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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감옥에 갇혔을 때»
1차/old 2019. 10. 22. 15:47

 1. 

 감옥은 차갑고 딱딱했다. 바르바라는 발가락을 움츠렸다가 손을 더듬어 벽을 짚은 후, 그대로 천천히 다리를 접고 앉았다. 어둠 속에서 혼란과 분노, 피로에 물든 목소리들이 저마다 속삭이며 두 감옥을 번갈아 드나들었다. 가까이 붙어 앉은 동료들의 몸에서 쉰 가죽, 땀과 피와 철의 냄새가 났다. 쌀쌀한 공기에는 곰팡이와 이끼 냄새가 스며있었다. 바르바라는 어둠이 눈에 익기를 기다렸지만 시간이 지나도 기대한 것보다 시야가 선명해지지는 않았다. 지하였고, 빛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초를 서는 데아의 기사는 횃불을 들고 있었지만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고, 때때로는 자리를 비웠다. 어둠에 익숙해질 것 같으면 복도 끝에서 희끄무레한 횃불이 나타나 바르바라의 시야를 어지럽게 했다. 선써드는 그 횃불에 대해서도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야기는 종국에 그들을 집요하게 가로막았던 데아 기사단에 대한 비난과 툴툴거림으로 변했는데 과연 감옥에 갇혀있다 한들 선써드의 이런 면모는 사라지는 법이 없었다. 바르바라는 피곤해서 아무 말도 얹지 않았지만 가만히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이따금씩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다 잠시 졸았는데, 눈을 떴을 땐 아까보다 웅성거림이 잦아들어 비교적 고요해져 있었다. 벽에 난 창이 없었기 때문에 시간을 가늠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주변의 사람들이 잠을 청하기 시작했다는 점을 미루어 밤이 늦었다는 것을 짐작했다. 주변에서 규칙적이고 고른 숨소리들이 들려왔다. 아직 잠을 청하지 않은 사람들도 대화를 중단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각자의 생각에 빠져있는 지도 몰랐다. 

 그 날 바르바라는 새벽까지 깨어있었다. 

 횃불을 든 데아의 기사가 돌아오지 않은지 꽤 지났을 무렵, 바르바라는 마침내 침침한 어둠을 눈으로 익히고 주변 사물과 사람들의 윤곽을 시선으로 훑어보았다. 같은 방에 갇힌 이들의 덩어리진 실루엣을 하나씩 짚어 머릿속으로 이름을 외워보았다. 그러다 마침내 자신과 어깨를 맞대고 있던 상대를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상대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바르바라는 그를 금방 알아보았다. 이마 선을 따라 내려오는 앞 머리카락을 훑던 바르바라의 시선이 멈추었다. 이반이 고개를 들었기 때문이다. 

 “깼어?” 

 “내가 할 말이야.” 

 바르바라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존 건 바랴 너지.” 

 “잠깐이야.” 

 바르바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덧붙였다. 

 “잠이 오질 않는구나.” 

 “아까 졸았으니까.” 

 “잠깐이라니까.” 

 두 사람은 그런 시시한 대화를 이어나갔다. 바르바라는 감옥에 들어가기 전에 이반이 했던 팔순의 이야기, 그러니까 오십 년 뒤의 미래에 대해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늘어놓았다. 주제는 어쩌다보니 타지아의 이야기로 빠졌다. 이반이 그들의 미래를 ‘세 명’이라고 지칭했으니 당연한 수순이었는지도 몰랐다. 두 사람은 시간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며 그 속에 들어있는 돌멩이를 이따금씩 짚어보았고, 좋은 시절을 거쳐 드문드문 기억하고 있는 순간들에 대해 짧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마침내 룬넨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두 사람은 언젠가 체사레의 여관집에서 했던 주사위 보드게임을 기억해냈다. 그곳에서, 아직 ‘세 사람’이었던 두 사람은 몇 번이고 이야기의 숲에 걸려든 타지아의 지루한 이야기를 듣고 또 들었다. 바르바라는 어쩌면 지금도 게임을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보드판은 전쟁터고, 말은 선루스 기사단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그 숲에 갇혀있는 건가. 그렇게 대답하는 이반에게서 지친 육신의 냄새가 났다. 

 바르바라는 무료한 것처럼 어깨를 타고 늘어지는 자신의 금발 끄트머리를 매만졌다. 전쟁을 각오하며 줄곧 마차에 올라있었는데, 막상 수도에 오니 깜깜한 감옥에 앉아있었다. 왕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궁금하지 않았지만 자신의 눈앞에 있었더라면 훈육을 하듯 손을 붙잡고 손등을 찰싹 내려쳤을 것이다. 앞으로의 일들을 알 수 없었다. 전부 까마득하기만 했다. 마법이 나타났고, 다섯 달 동안 동료를 잃었고, 겨울이 오고, 종국에 마법을 거래하고, 심지어 검으로 사람을 베어죽인 이후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지게 되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준비하고 있는 일들을 상기하면서 생각을 정리했다. 

 바르바라가 불쑥 말을 꺼냈다. 

 “숲에 들어왔으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이야기를 준비해야겠구나.” 

 “우리가 하지 않은 이야기도 있었나?” 

 “난 남아있어. 넌 더 이상 말할 게 없는 모양이지.” 

 바르바라가 물었다. 

 “도망칠 거니?” 

 “내가 그렇게 말했었나.” 

 “그렇진 않지.”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듣는 동안 잘 궁리해봐.” 

 네 남은 이야기들. 

 그런 후 바르바라는 마지막 괴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2. 

 아주 유명한 이야기다. 이반도 알고 있을 것이고 마리안도 알고 있을 것이고 길리언도 알고 있을 것이며 사라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외의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을지 모른다. 켈커스 지방의 중부에서 시작되어 세미니온 곳곳에 전승된 이 이야기를 바르바라는 어린 시절 자신의 할머니 마미사로부터 들었다. 단 한 번 들었지만 결코 잊지 않았다. 이야기의 결말이 지역과 집안에 따라 조금씩 달랐기 때문인데, 바르바라는 체사레 집안이 믿고 있는 이 괴담의 결말을 이반에게 들려주고 있는 것이었다. 괴물처럼 무시무시하고 유령처럼 소리가 없는 도둑 브리다에 대한 이야기였다. 

 브리다의 어머니는 브리다를 낳다가 다리를 절게 되었는데, 브리다는 나중에 그 일을 두고 “어머니의 다리를 훔쳤다”고 표현했다. 과연 그 말대로 브리다는 보통 아이들보다 더 빨리 걸음마를 배우더니 그 누구보다 빠르게 뛰고 그 누구보다 날래게 움직였다. 그녀는 그 다리로 장터의 모든 물건을 휩쓸고 귀족의 주머니를 털고 남의 명예를 훔치거나 이름을 빼앗았다. 

 브리다는 정말이지 훔치지 못 하는 게 없는 명석한 도둑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들은 모두 브리다가 훔쳐본 것과 훔치기 전의 것으로 나뉘어 있었다. 혹은 훔칠 것과 훔치지 않을 것으로 나뉘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브리다는 돈과 명예, 신분과 한 마을을 훔쳤고, 내킬 때는 형태가 없는 것도 훔쳐 자신의 능력을 증명했다. 사람의 마음, 기억, 한 시절과 시간을 빼앗는가 하면 아주 기분이 나쁠 때에는 상대의 수명마저 빼앗았다. 어느 날 브리다는 더 이상 인간의 세상에서 훔칠만한 게 없음을 깨닫고 신이 빚어놓은 가장 거대한 것을 훔쳐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해를 훔쳐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세상 끝으로 떠났다. 

 해를 훔치기 하루 전, 브리다는 세상 끄트머리의 마을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브리다와 마음이 잘 맞아 대화를 나누는 게 무척이나 즐거웠다. 브리다는 그에게 해를 훔치러 이곳에 왔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해가 어디쯤에 있냐고 물었다. 

 하늘에 있지. 남자가 대답했다. 

 그래, 낮에는 그게 너무 높게 매달려 있잖니, 내 말은 밤에는 그게 어디로 가냔 말이야. 브리다가 조금 성질을 내자, 남 자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을을 감싼 두 개의 봉우리를 가리켰다. 

 밤에는 해를 저곳에 보관해두지. 신의 창고가 저기 있거든. 

 그날 밤 브리다는 남자가 일러준 지점을 향해 봉우리를 따라 산을 올랐다. 얼마나 올랐을까. 정말 남자의 말대로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에 무언가 있었다. 브리다는 봉우리 사이에 놓인 거대한 접시를 보았다. 바로 그 안에 해가 있었다. 브리다는 팔팔 끓고 있는 투명한 바닷물 안에 둥글고 아름다운 해가 잠겨 있는 것을 보았다. 

 브리다는 주머니에 해를 넣고 산을 내려왔다. 아직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주머니가 뜨끈뜨끈했다. 브리다는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훔쳤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훔친 자신에게 충만한 자부심과 사랑을 느꼈다. 해를 훔쳤으니 이번엔 세상 전부를 훔쳐보기로 마음먹었다. 

 마을을 떠나기 전, 브리다는 해의 위치를 일러준 남자의 집에 들러 고맙다는 인사를 전했다. 사례를 하겠다고 말했다. 원한다면 돈이나 작위를 주겠다고 했다. 영지를 원하면 땅을 훔쳐 주고, 사랑하는 여자가 있다면 마음을 훔쳐다 안겨주겠다 말했다. 남자는 관심 없다는 것처럼 웃더니 그런 것들은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고는 브리다가 이때까지 훔친 것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때마침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브리다는 흔쾌히 그것을 수락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마주앉았다. 

 브리다는 자신이 여태껏 훔친 물건과 사람과 땅과 혹은 그 무엇도 아닌 이야기들을 늘어놓고 또 늘어놓았다. 브리다의 업적은 끝이 없었다. 너무 많은 걸 훔쳤기 때문에 아무리 늘어놓아도 무용담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브리다의 이야기를 들으며 때때로 ‘정말?’ 혹은, ‘대단한 걸’하고 추임새를 넣었다. 브리다가 해를 훔쳤기 때문에 창문 밖은 여전히 깜깜했고 새벽도 아침도 오지 않았다. 영원하고 끝없는 밤이었다. 하지만 이야기에 열중한 브리다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밤이 끝나지 않았으므로 하루가 채 다 지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몇날 며칠을 남자와 보냈는지도 모르고 브리다는 끊임없이 말하고 또 말했다. 

 어느 순간 브리다는 자신이 무언가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야기를 늘어놓던 브리다가 창백해진 얼굴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가 브리다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야? 

 내 주머니가 가벼워진 것 같아. 

 그럴 리가. 

 브리다는 주머니를 확인했다. 해는 그곳에 있었다. 해를 보자 브리다는 모든 진실을 깨달았다. 브리다는 격노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내 시간을 빼앗았구나. 

 그렇지 않아. 남자가 대답했다. 그건 네가 내게 직접 준 것일 뿐이야. 

 하지만 내 주머니가 가벼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무얼 빼앗긴 것 같니? 

 브리다는 잠시 고민에 빠졌고, 심각한 얼굴로 자신의 온몸을 더듬고 뒤지고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무사했다. 재빠른 다리도, 비범한 손도, 영민한 눈도 그대로였다. 브리다는 자신을 놀리는 남자가 괘씸해 그의 생명을 빼앗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남자의 목을 조르려는 브리다의 손이 머뭇거리다 마침내 동작을 멈췄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망설이니? 남자가 물었다. 

 널 죽일 수가 없어. 브리다가 화가 나서 말했다.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맞아, 나는 네가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을 빼앗았어. 남자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돌려받고 싶다면 나와 거래를 하자. 네 마음을 돌려줄 테니 해를 돌려줘. 

 남자는 신의 창고를 지키는 문지기였다. 

 

 브리다는 자존심이 상해 미친 듯이 남자를 저주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주먹으로 때리고 목을 조르는 시늉을 하며 위협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을 뒤흔들던 자라도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 오로지 단 한 사람에게 흔들리는 법. 브리다는 결국 주머니를 열었다. 해를 돌려주겠노라고 선포했다. 남자는 주머니를 받고 브리다의 마음을 돌려주었다. 

 남자가 해를 꺼내기 위해 주머니 안으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브리다는 해를 제외한 그의 모든 것을 그로부터 빼앗았다. 이름, 역할, 신분, 마음, 브리다의 무용담을 비롯한 브리다의 모든 흔적과 조각들, 시간과 이야기들을 빼앗았다. 그런 후… 그녀는 마을을 떠나버렸다. 

 자신의 역할을 잊은 문지기는 밤이 되면 해를 창고에 도로 집어넣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말았다. 그는 자신이 빼앗긴 것을 찾기 위하여 떠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영원한 낮이 계속되었다. 끓어오르는 열이 세상을 술렁이게 만들자, 신은 차가운 달을 빚어 때가 되면 그것이 뜨거운 해를 식혀 봉우리 사이로 떨어지도록 만들었다. 그 뒤로 낮과 밤이면 하늘에 뜨겁거나 차갑고 아름다운 둥근 해와 달이 번갈아 떴다. 

 

 3. 

 “그 뒤에 브리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말하지 않는구나.” 

 이반이 말했다.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우리 집안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이야. 해와 달이 만들어지고, 브리다는 복수를 하고 세상에서 몸을 감쪽같이 감췄단다.” 

 “뒤가 궁금하지 않아?” 

 “전혀. 사실 우리 집안사람들은 이 이야기의 끝을 이미 알고 있단다.” 

 바르바라가 쿡쿡 웃으며 말했다. 

 “이건 나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래서 이야기는 거기서 닫혔다. 바르바라의 차례가 끝났으니 그녀는 숲을 빠져나올 것이고 이제는 이반의 차례가 되었다. 

 숲을 빠져나올 준비가 되었니, 라고 바르바라는 숲의 입구에서 이반을 쳐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2018/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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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법을 쓰지 마. 

 바르바라는 대체로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이야기한다. 

 

 2. 

 바르바라와 길리언이 서로를 마주보며 서있었다. 주변은 피로 축축했다. 길리언이 검을 흔들어 피를 털어내고는 천천히 바르바라의 손을 놓았다. 바르바라는 왼손을 조금 움츠려보았다. 아프지 않았고, 화끈거리지도 않았고, 뜨겁지도 않았다. 상처는 없었다. 바르바라는 그 기적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방금 길리언이 바르바라를 위해 마법을 썼다. 

 “지금은 바르바라가……, 필요한 순간이었어요.”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얼굴을 시선으로 매만지다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한숨을 쉬었다. 깨끗한 손바닥을 타고 출처를 잃은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주변이 조용했으므로 두 사람은 모든 일이 끝났음을 알았다. 발밑에 쓰러진 시체의 창백한 손등을 내려다보던 바르바라가 시선을 흘리며 마차 쪽으로 몸을 돌렸다. 

 한참 말이 없던 바르바라가 힘없이 중얼거렸다. 

 “움직이자.” 

 

 3. 

 무려 5개월이다. 짧은 시간이 될 수는 없었다. 바르바라는 그곳에 두고 온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죄책감과 책임감을 느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지난 5개월 동안 바르바라는 슬픔을 숨기지 않았다. 밤마다 꿈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왔다. 길리언도 그곳에 있었다. 

 마법과 함께. 

 

 4. 

 피를 뒤집어 쓴 바르바라가 먼저 마차에 올랐다. 그런 후 손을 내밀어 그를 끌어올려주었다. 마차에 올라탄 모두가 피곤한 것처럼 말을 아끼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마차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 머리를 기대고 앉았다. 길리언이 옆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는 눈을 뜨지 않은 채로 생각에 잠겼다. 앞으로의 일들을 고민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길리언이 숨을 쉬는 게 느껴지고, 몸을 뒤척이는 게 느껴지고, 자신을 살피는 게 느껴지자 결국 천천히 눈을 떴다. 시선이 마주쳤다. 바르바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피곤한 것처럼 콧잔등을 누르며 숨을 골랐다. 잠시 후, 바르바라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생각을 하고 있단다.” 

 “무엇을요?” 

 “내가 한 터무니없는 거래에 대해서.” 

 길리언은 잠시 침묵하다 긍정했다. 

 “네, 마법을 쓰신 걸 봤어요.” 

 “그래.” 

 바르바라는 비참한 기색을 숨기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걸 나도 가지고 있단다.” 

 

 5. 

 마법이 기적의 대가로 생명을 갉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바르바라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영리한 사기꾼은 덫에 걸리지 않고, 수지에 맞지 않는 장사를 하지도 않는다. 마법이 기적이라 불리는 이유는 그것이 불가능한 것을 행하는 힘이라서가 아니라, 이때까지 우리 주변의 그 누구도 가져보지 못 했던 힘이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마법이 운명을 바꿀 수 없는 축에 속하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을 바꿀 수는 없는 힘은 이 세상에 널려있다. 마법이 특별하게 취급되는 건 아무도 가져보지 않았던 것이기 때문이며, 이제는 누군가 가지게 되었으니 또 다른 누군가는 마법의 정체를 꿰뚫어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운명을 바꿀 수는 없으나 지불하는 대가는 큰 무엇”의 이름을 짧게 써야만 한다면 “마법”이 좋겠다. 바르바라는 마법을 선택하지 않기로 결심했고, 품에 숨긴 단도처럼 최후에 꺼내 쓸 선택지로 남겨두었다. 그래서 마지막 짐을 정리하기 위해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서 길리언을 만났을 때,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단호하게 말할 수 있었다. 

 마법을 쓰지 마. 

 

 6. 

 마차가 흔들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차가운 마차 안에서 희미하게 피비린내가 났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손을 붙잡아 피딱지를 하나씩 벗겨주었다. 둘 다 말을 아꼈다. 한참을 천막 사이의 풍경을 응시하던 바르바라가 문득 떠오른 것처럼 물었다. 

 “이 모든 게 끝나면 뭘 할 거니.” 

 침묵. 

 “저는…,” 

 길리언이 피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다가 몸을 뒤척였다. 

 “우선 편지를 보낼 거예요.” 

 “그러니.” 

 바르바라는 하늘을 응시하며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구나.” 

  

 7.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두 손을 붙잡고 단호하게 명령했다. 마법을 쓰지 마. 그 말은 정확히 말하자면 이런 뜻이었다 : 길리언, 너를 희생해서는 안 돼. 네가 희생의 원인이 될 수는 있어도 희생의 주체가 되어선 안 돼. 바르바라는 어리고 젊은 사람들에게 관대했다. 혹은 어리고 젊은 사람들처럼 서투른 사람들에게 관대했다.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의 신입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줄 때, 나이차가 큰 어린 단원들에게 상냥한 충고를 아끼지 않을 때, 바르바라의 머릿속엔 그 사실이 항상 지워지지 않는 글씨처럼 새겨져 있었다. 너보다 서투른 이들에게 관대하라, 써드빌에선 누군가를 물어뜯거나 증오하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다. 어느 순간부터 바르바라는 생각뿐 아니라 그런 식으로 행동도 했다. 길리언에게 애착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말을 부정하지 않겠다. 길리언은 어렸기 때문에 바르바라가 책임감을 강하게 느끼는 범위 깊숙이 소속되어 있었다. 길리언은 마법을 사용하지 않기를 바르바라가 간절히 바라는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원한다면 바르바라는 길리언이 마법을 쓸 때마다 그를 겁주고 협박할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길리언은 그녀의 충직하고 온순한 제자였으므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다. 마지못해서라도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고 어쩔 수 없이 약속을 할 것이며 설령 약속을 깰 상황이 와도 주춤거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바르바라가 길리언의 두 눈을 올려다보았을 때, 

 길리언은 대답했다. 

 하지만, 

 

 8. 

 마차가 한 번 덜컹 흔들려서 두 사람의 몸이 조금씩 부딪쳤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손을 힘주어 쥐었다가 놓아주었다. 지리멸렬한 피로와 분노가 한 차례 몸 안을 맴돌다 지나갔다. 바르바라는 이 일이 끝나면 무엇을 할지가 떠올랐다. 그러자 자신이 아주 오래 전부터 그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때마침 그녀의 곁에는 길리언이 있었고, 적어도 바르바라가 아는 한 길리언은 바르바라를 도와줄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길리언에게 말했다. 

 

 7. 

 하지만… 아시잖아요. 

 길리언은 지킬 수 없는 것은 약속하지 않는다. 

 

 8. 

 “네 도움이 필요해.” 

 그 말에 길리언이 바르바라를 돌아보았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인가요?” 

 “그럼.” 

 바르바라가 속삭였다. 

 “이건 귀족이 아닌 사람만이 도와줄 수 있는 일이란다.” 

 “어째서요?” 

 “난 귀족을 믿지 않거든.” 

 바르바라는 덧붙였다. 

 “하지만 이 일에는 돈이 필요하단다.” 

 

 9. 

 길리언이 마법을 쓰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않자 바르바라는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곧이어 다그치듯 읊었다. 내가 필요할 땐 네가 그것을 알려줘야 해. 그건 약속해야만 해. 그때까지만 해도 바르바라는 수도에 올라가서야 마법을 배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쟁이 코앞으로 다가온 직후에야 바르바라는 자신의 단도를 꺼내들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마법은 그녀에게 포기가 가능한 선택지였지 필수적인 선택지는 아니었다. 

 길리언은 바르바라의 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전 언제나 바르바라의 도움이 필요할 거예요. 

 

 10. 

 바르바라는 길리언에게 그 무엇도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지도 않았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그것을 조금 빌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게 전부였다. 

 “휴가를 가야겠어.” 

 바르바라는 질린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방식으로 돈을 마련하는 건 의미가 없단다.”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이상 설명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인적이 드문 호숫가, 조용한 숲과 잔잔한 물결과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고 종국에는 길리언의 어깨에 느긋하게 기댄 채로 작게 “아깐 고마웠단다.”라고 털어놓았다. 그러고는 가능하면 누군가의 앞에서 마법을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잠시 눈을 붙였다. 옅은 꿈속에서 바르바라는 미래를 보았고 그것에 만족했다. 그곳에서 그녀는 바르바라 체사레가 아니었고 그 무엇도 아니었다. 

2018/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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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르바라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생리가 멈추었고 시시때때로 잠이 쏟아졌으며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하게 몸이 묵직해졌다. 빠르게 지쳤고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음식도 예전처럼 먹을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종종 체해서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어야만 했다. 마리사는 바르바라의 이런 몸 상태를 임신이라 결론지었다. 

 “아, 좋아.” 

 바르바라는 스스로를 비꼬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네.” 

 바르바라의 임신 소식을 들은 타지아는 대체 언제 남자를 만든 거냐고 캐물었다. 제임스, 막심, 얼레이… 바르바라의 입을 통해 언급되었던 남자들의 이름이 타지아의 입을 타고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실상 그 남자들은 바르바라와 엮일 일이 전혀 없었다. 기사단 일을 하며 몇 번 정도 스쳐지나간 주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몇 주간 기사단 현장 직을 유지하다가 주변의 권고에 못 이겨 결국 사무실로 이동했다. 모두가 바르바라의 임신을 축복해주었다. 난나를 닮아 똑똑할 거야. 다들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지만 바르바라는 대답 대신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살면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어 바르바라 자신은 수습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바르바라는 매일 아이가 죽는 상상을 하며 서류를 매만지고 글을 썼다. 진심으로 유산을 빌었다. 완성되지 않은 살덩이와 피가 한데 뭉쳐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기를.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감쪽같이 사라지기를. 

 임신은 바르바라의 몸을 자꾸만 변화시켰다. 늘 먹던 오트밀이 역겨워지고, 한 번도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과일이 먹고 싶어졌다. 한 번은 느닷없이 고향 숲에서 종종 기근이 들 때 벗겨 먹곤 하던 나무껍질을 씹고 싶어 한밤중에 깨어난 적도 있었다. 마리사는 바르바라를 위해 지붕에 올린 전나무 껍질을 조금 벗겨 뜨거운 물에 그것을 팔팔 끓여주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가 먹고 싶다고 중얼거린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구해왔다. 임신 중인 바르바라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무조건 주머니를 열겠다고 말했다. 두 여자는 바르바라가 임신을 끔찍하게 여기던 말던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녀를 돌보아야겠다는 식으로 모든 일을 진행했다. 바르바라의 아이는 이런 식으로 안전하게 보호되었고 나날이 바르바라의 양분을 섭취하며 몸집을 불려갔다. 바르바라의 몸이 갈수록 가느다래지는데 반해 그녀의 배는 아래로 축 쳐져서 점점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르바라의 배에 멋대로 손을 올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바르바라는 날카로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저리 꺼지라고 으르렁거렸다. 임신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만지려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바르바라의 배를 한번쯤은 쓰다듬어줄 의무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는 바르바라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르바라의 의사가 바르바라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바르바라가 품고 있는 아이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바르바라는 임신을 통해 잃어버린 게 너무 많다고 느꼈다. 자신의 내면을 통제할 수 있는 힘과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의사의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느꼈다. 내부와 외부의 힘을 모조리 아이에게 빼앗겨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자신은 아무리 애써도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강한 예감을 받았다. 

 출산의 순간을 기억한다. 바르바라는 사무실에 앉아있었고, 곁에는 오즈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서류를 넘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말고 다시 주저앉았다. 다리 사이가 흥건해지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창백해졌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 거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즈가 양수가 고인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기를 바라며 이렇게 말했다. 

 “오즈… 사람을 불러줘.” 

 그런 후 바르바라는 거의 자신의 다리 위까지 내려온 그 둥근 배에 손을 얹었다. 

 “이제 이걸 해결해야겠어.” 

 바르바라는 체사레 여관으로 옮겨졌다. 산통이 시작된 건 그로부터 삼십분 남짓이 흐른 뒤였다. 산파와 마리사가 그녀의 곁을 지켰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감싸고 끙끙거리다 말고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아직까지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불에 달군 꼬챙이가 난도질하는 것만 같은 고통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타고 기어올랐다. 바르바라는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 가시가 달린 무수한 손들이 바르바라의 다리를 억지로 잡아 벌리고는 그녀의 다리를 쑤시고 후벼 파고 찢어발기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욕지거리를 했다. 열이 오르내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르바라는 아주 이전부터 들어왔던 상스러운 욕과 켈커스 지방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저주와 모욕적인 단어를 지껄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지만 살면서 무수하게 지나쳐왔던 이 세상의 모든 악독하고 지독한 단어를 입에 담아 제대로 씹지도 않고 뱉어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나서 지금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아이의 머리통을 씹어 부수는 것을 상상했다. 여린 살을 잘게 뜯어서 지난 몇 달 간 감히 바르바라로부터 앗아간 모든 영양분을 빼앗아 섭취하는 것을 상상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것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처리하고 자유를 되찾는 것을 상상했다. 모든 것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 바르바라의 곁으로 다가온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난나.” 

 타지아가 말했다. 

 “난나, 그만두면 안 돼. 네가 죽을 거야.” 

 아이가 완전히 바르바라의 몸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바르바라는 타오르던 횃불 위로 쏟아부은 차가운 물세례를 떠올렸다. 다리 사이를 쑤시던 고통이 한순간에 가라앉더니 바르바라를 괴롭히던 그 무수한 검은 손들이 그녀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그것들은 바르바라의 머리 꼭대기까지 단숨에 기어오르더니 한 덩어리로 뭉쳐 그곳에 고였다. 그러고는 첫 출산의 기억으로 굳어졌다. 

 타지아가 포대기에 감싼 아이를 바르바라에게 내밀었다. 아들이야. 바르바라는 땀과 눈물로 젖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숨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 호흡이 자꾸만 몇 갈래로 갈라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확인한 바르바라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그거니?” 

 “이름을 지어줘야지.” 

 바르바라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지어줘.” 

 “네 아이잖아.” 

 “이름을 고민해본 적 없어. 하지만 넌 고민해봤을 거 아니니.” 

 타지아가 침묵했다. 긍정의 뜻이었다. 품에 안긴 아이가 작게 울음을 터뜨리자 타지아는 포대기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래, 그럼 얘 이름은 아르만도야.” 

 타지아가 대답했다. 

  

 2. 

 아르만도의 육아는 타지아와 마리사가 번갈아 도맡았다. 바르바라는 몸을 회복하는데 집중했다. 아이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곧 아르만도와 자신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이를 갖는 것은 배에서 그를 키우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다는 건 익숙해져 있던 모든 것들이 오로지 아이 하나를 위해 송두리째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몸이 한 번 더 변하는 것을 느끼고는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녀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사실 임신했을 때부터 바르바라의 통제권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르만도는 도둑의 아들답게 바르바라가 지키고자 하는 모든 걸 그녀로부터 앗아갔다. 

 출산이 끝난 뒤, 바르바라는 두 차례에 걸쳐 가슴의 통증을 겪었다. 젖무덤이 딱딱해지더니 누군가 사방에서 잡아 비트는 것 같은 고통이 며칠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러다 젖이 돌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밤이며 낮이며 차가운 물로 적신 수건을 가슴 위에 얹고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멀건 죽 같은 액체를 닦고 짜내느라 고충을 치렀다. 아르만도는 먹성이 좋은 편에 속했다. 반면 바르바라는 젖이 제대로 돌지 않아서 아르만도를 충분히 배부르게 만들 수가 없었다. 아이를 가지기를 그토록 거부했기 때문인 지도 몰랐다. 바르바라의 몸이 건강하지 않다는 신호일지도 몰랐지만 바르바라는 자신이 제대로 수유를 할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이 아이를 위해 몸을 마련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르바라는 아이에게 제대로 젖을 물릴 수 없는 자신의 상태에 은근히 안심했다. 몸의 통제권이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끔찍이 예뻐했다. 바르바라가 아르만도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르만도는 바르바라보다는 타지아를 더 닮아있었다. 아르만도는 바르바라보다 더 밝은 금발에 남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눈은 동그랗고 또렷했다. 그건 요한의 얼굴이었다. 아르만도는 바르바라의 특징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기꾼 집안의 아들이라기엔 너무 유순했다. 아르만도의 얼굴은 귀족가문의 자제에 훨씬 가까웠다. 타지아가 아르만도를 안고 근처를 걷고 있으면, 바르바라는 그늘에 앉아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마치 자신의 아이가 타지아의 아이처럼 보인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몸이 회복기에 접어들자 바르바라는 선루스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뒤쳐져 있던 훈련을 조금씩 해나가면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몸이 예전보다 살이 붙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임신 기간 동안 비쩍 말라있었는데 지금은 뺨부터 어깨, 목덜미와 가슴, 허리와 다리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두가 바르바라에게 건강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 때마다 바르바라는 미지근하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늦은 시간에 퇴근했고, 아르만도를 아주 가끔씩만 껴안았다. 아이를 품에 안을 때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바르바라는 아기가 타지아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하고 싶은지 증오하고 싶은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만도는 안을 때마다 묵직해졌다. 바르바라는 아이의 성장과정에 거의 동참하지 못 했다. 뒤집기를 성공했을 때, 옹알이를 시작했을 때, 첫 걸음마를 뗐을 때, 아르만도의 곁에는 항상 타지아가 있었다. 아르만도는 타지아를 엄마라고 불렀다. 타지아는 아르만도에게 이모라는 단어를 가르쳐주려고 내내 그 옆에 붙어서 발음을 가르쳤다. 얼마 뒤 아르만도는 바르바라를 엄마로, 타지아를 이모로 부르기 시작했지만 종종 두 사람의 호칭을 바꾸어서 부르기도 했고 그런 일이 잦아졌다. 

 아이가 걷기 시작한 이례로 타지아가 이따금 아르만도의 손을 잡고 기사단에 찾아올 때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대련장에 서있다 말고 자신을 지켜보는 두 쌍의 눈동자를 의식하고는 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를 가리키며 엄마, 기사, 명예 따위의 단어를 아르만도에게 이야기했다. 이따금 동료기사들이 두 사람과 바르바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지나갈 때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바르바라는 시선을 피하고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반이 선루스에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타지아는 여느 때처럼 아르만도를 데리고 대련장을 찾았다가 바르바라와 나란히 서있는 이반을 마주쳤다. 바르바라는 그 때 이반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입구에 들어서다 말고 우뚝 멈추어 선 타지아의 행동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와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타지아는 바르바라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이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현 듯 무언가를 떠올려놓고는 자신의 기억과 눈앞의 사실을 대조해보는 듯한 멍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타지아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오, 에아이시여. 믿을 수가 없네.” 

 타지아가 맑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반!”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끌어안고는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이반이 시선으로 타지아를 훑었다. 타지아의 얼굴, 어깨, 손동작과 습관… 타지아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 머물렀던 시선이 타지아가 재차 “이반!”이라고 외치는 순간 곧장 위로 튕겨져 올라왔다. 

 “아는 사람이야?” 

 바르바라가 타지아에게 묻자, 타지아는 얼굴을 익살스럽게 찡그리면서 농담하지 말라고 들뜬 소리로 웃어댔다. 

 “그 좁은 마을에서 우리 말고 사귀어본 또래친구는 이반 말고 없었잖아.” 

 타지아가 속사포처럼 이전의 기억들, 그러니까 세 사람이 보냈던 짧은 몇 달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전의 일들이었는데도 타지아는 바로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다. 바르바라가 당연히 이반을 기억해야만 하고, 이반을 기억하지 못 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을 바르바라에게 증명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한 쌍의 군청색 눈을 응시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바르바라의 기억에서부터 한 소년이 서두르지 않고 걸어 나왔다. 소년은 부츠를 신고 따뜻한 바지를 입고 부드러운 모피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열네 살이었다. 바르바라는 소년이 이반의 얼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반이 바르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시험 삼아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화가 난 것 같아?” 

 잠시 후, 이반이 대답했다. 

 “아니.” 

 이반은 여전히 바르바라의 표정을 구분할 수 있었다. 

 

 3. 

 타지아의 오지랖과 호들갑은 세 사람을 다시 묶어주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기사단 잔업을 마친 후에는 항상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는 타지아와 아르만도와 함께 써드빌의 거리를 걸었다. 이반은 타지아에게 아르만도가 타지아의 아이냐고 물었다. 바르바라가 대신 대답했다. 

 “내 아이야.” 

 “결혼했어?” 

 “아니.” 

 바르바라가 딱 잘라 대답하고는 덧붙였다. 

 “애 아빠도 없어.” 

 눈치 빠른 이반은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세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종종 장터에 들러서 언젠가 세 사람일 적에 그랬던 것처럼 주전부리를 사먹었다. 사탕과 말린 과일과 익힌 닭다리 살… 이반은 주전부리를 받으면 아이가 먹을 수 있을 만큼 그것을 쪼개거나 잘게 찢어서 아르만도에게 건네주었다. 바르바라는 이반이 아이에게 제법 상냥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심지어 이반은 자신보다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만도도 바르바라보다 이반에게 더 친근하게 굴었다. 아르만도는 종종 이반의 손끝을 붙잡고 풍경과 사물을 가리키며 어설프게 단어를 읊어댔는데, 그럴 때면 이반은 아르만도의 말장난을 받아주면서 아이의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바르바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들으며 종종 이반의 옆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훑어보고는 했다. 바르바라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이반은 눈동자를 움직여 그녀의 시선을 받아쳤다. 하루는 바르바라가 물었다. 

 “아이를 키운 적 있어?” 

 “그렇게 보여?” 

 “나보다 능숙해 보여.” 

 바르바라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가.” 

 이반은 작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키워본 적은 없어.”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반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런 것 같아. 그냥 내가 너무 서투른 것뿐이야.” 

 종종 타지아가 아르만도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내달리면, 이반과 바르바라는 조금 뒤쳐진 채로 나란하게 걸으면서 시시한 이야기들을 했다. 시시한 이야기들이란 어떤 계산이나 의도를 가지지 않은 채로 평화롭게 이어지는 사연들을 의미했다. 바르바라는 나이를 먹으며 자신을 숨기고 반 발짝 물러난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했지만 이반과 대화를 할 때는 종종 그런 것들을 내려놓았다. 이반에게 이미 자신을 보여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문득 이반이 아주 오래 전의 일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코너를 돌아 분수대를 지나면서, 바르바라는 이반에게 늑대인간 이야기를 꺼냈다. 

 “욘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어?” 

 “그래, 바랴 네가 들려줬잖아.” 

 “우리가 그 때 했던 게임도 기억해?” 

 “타지아가 종종 졌었지.” 

 “우리가 갔던 목수의 집을 기억해?” 

 “타지아를 귀찮아하는 게 보이던 거기?” 

 “우리가 시장을 돌아다니다 들어갔던 골목은 기억하니?” 

 “그래, 기억하고 있어 바랴.” 

 앞질러가던 타지아가 기분 좋은 비명을 지르며 아르만도를 껴안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걸음을 좀 더 늦추어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의 범위에서 멀어졌다. 간이상점이 쳐놓은 천막 때문에 두 사람은 반투명한 그늘 아래를 걷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건물 사이로 보이는 푸른 써드해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네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 

 바람이 불어서 바르바라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흩날렸다. 바람은 따뜻하고 건조했고, 짭조름한 냄새가 배여 있었다. 

 바르바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상하지. 살아오면서 그 때의 생각을 어렴풋하게라도 한 적이 없어. 너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름을 부르면 거짓말처럼 순간순간이 떠올라….”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려 이반을 바라보았다. 천막의 얇은 천을 투과한 잿빛 햇살이 이반의 얼굴에 드문드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표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건 이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바르바라는 드물게 진심을 말하고 싶다고 느꼈다. 

 “이반.” 

 바르바라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만나게 된 사람에게는 어떤 인사를 해야 하는 거니.” 

 이반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 대답을 오래도록 잘 기억하고 있어야했다고 바르바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러니까 결국 이반과 자신이 또다시 분리되어 섬과 육지에 남았을 때, 광활한 써드해를 사이에 두고 단절되었을 때, 5일과 5개월의 시간이 갈렸을 때, 각자의 고뇌와 고통으로 그 시간을 흘려보냈을 때, 그러나 마침내 해변에서 서로를 마주했을 때, 그리고 재회의 순간이 막 지나갔을 때 깨달았다. 이반에게 인사를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다고. 바르바라는 결국 이반에게 “잘 있어. 이제 가버려.”외에는 제대로 건네 본 인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떨어질 것이고 언젠가는 되돌아와 만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순환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 이 인사를 하자. 그러고 보면 바르바라가 물어본 것은 결국 작별이 아니라 재회의 인사였다. 

 

 4. 

 바르바라와 이반, 타지아와 아르만도가 함께 시간을 보낸 건 공교롭게도 불과 몇 달 남짓이었다. 세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써드빌의 어디든 다녔다. 예배당, 낮은 언덕과 광장, 장터와 좁은 골목길, 해변과 인적이 드문 곶… 세 사람은 번갈아가며 아르만도의 손을 쥐었다 놓았고 아르만도의 질문에 대답했고 아르만도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었다. 세 사람이 가장 자주 다녔던 곳은 해변이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는데, 그 언덕 위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면적은 작지만 제법 울창한 그늘이 져있었다. 바르바라는 주로 그곳에 앉아 아이와 놀아주는 타지아, 혹은 아이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반을 지켜보았다. 이따금 타지아가 바르바라의 손을 잡아끌 때도 있었다. 그러면 바르바라는 마지못해 아르만도의 앞에 앉아 손장난을 치고 아이의 질문에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아르만도를 끌어안아주다가 이반과 시선이 마주치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고는 머쓱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이와 친하지 않은 자신을 거듭 보여주는 게 좋은 일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선선한 날에는 그 언덕에 오르기 전에 간단한 점심거리를 챙겨가기도 했다. 아르만도는 한창 풀밭을 뒹굴다 말고 배가 고프면 그늘로 돌아와 점심을 먹자고 보챘다. 그럼 세 어른들은 아이와 둘러앉아 샌드위치를 베어 먹었다. 아르만도가 바르바라와 관련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그 난나 샌드위치였다. (추후에 난나 샌드위치에는 바르바라가 낚아 올린 생선살이 추가되었다.) 배가 채워지면 아르만도는 나른해져서 나무 그늘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그럼 누군가는 항상 아르만도에게 말을 걸어, 그 애가 심심하지 않도록 흥미를 돋워주었다. 바르바라는 아이에게 해줄 말이 별로 없었지만 괴담만큼은 언제고 이야기해줄 수가 있었다. 두 살 먹은 아이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잘하는 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바르바라는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몇 가지 없었기 때문에 점심이 지나갈 무렵에는 그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음침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늘어놓고는 했다. 이따금은 이반이 몇 가지 이야기를 보탤 때도 있었다. 에아의 교리와 신화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타지아와는 달리, 두 사람은 미신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사람의 마음에서 탄생한 괴물과 유령들의 이야기를 말했다. 세상의 어떤 부분들이 잔혹하고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그러나 종국에 그 고통과 공포 속에서 탄생한 존재들이야말로 인간 세상과 맞닿아있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아르만도는 겁이 많지 않은 아이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명을 지르는 건 항상 타지아였다. 대체로 아르만도는 얌전히 앉아서 괴담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결국에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따금 이반이 아르만도를 무릎에 눕혀놓고는 자장가를 불러줄 때도 있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바르바라는 곁에 앉아서 먼 풍경을 응시하며 그의 노래를 들었다. 고저가 크지 않지만 아이가 잠들기에 충분한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는, 어딘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자장가를 들었다. 바르바라는 이제 이반의 그런 모습들이 크게 놀랍지 않았다. 아르만도가 이반을 좋아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만도의 금발이 타지아를 닮은 것처럼, 아르만도의 청색 눈동자가 이반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자 아이를 조금은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어떤 면들을 세 사람이 나란히 나누어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의 아이도 아니고, 평민의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욘디처럼 그 어느 것도 아닌 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르만도. 귀족인 타지아와 평민인 바르바라와 귀족이지만 평민스러운 구석을 가지고 있는 이반이 보살피는 아르만도. 어쩌면 결국 아르만도를 낳은 건 우리 셋이 재회하기 위해 내가 거쳐야만 했던 어떤 절차가 아니었을까? 바르바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도 조금 웃었다. 바르바라의 웃음소리를 들은 이반이 아르만도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매만지다말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바르바라는 이반과, 이반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아르만도와, 두 사람의 근처에 앉아있는 타지아를 응시하다가 다시 이반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렇구나, 라고 바르바라는 한 쌍의 군청색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삶도 나쁘지 않겠구나. 이 시절이 행복하다는 것을 이번에는 이 시절이 지나기 전에 제대로 알아채고 있구나. 

 열네 살의 이반이 떠난 후에야 그 시절의 세 사람이 제법 즐거운 조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열세 살의 자신이 떠올랐다. 바르바라는 이 시절도 그 시절처럼 지나갈 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분명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지아의 약혼 문제가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 수도로 떠난 요한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아르만도는 결국 요한의 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아르만도가 사라지기 일주일 전, 세 사람은 아이와 함께 인근에서 열린 작은 축제에 방문했다. 써드빌에서 이따금 벌어지곤 하는 축제였는데 그 날 벌어진 것은 규모가 작은 축에 속했다. 아르만도의 손을 잡고 걷던 타지아가 손가락을 들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놓인 가판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나무로 깎은 인형과 천으로 만든 인형 몇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가판대 뒤편으로는 군데군데가 젖은 나무 과녁이 걸려있었다. 세 사람은 가판대로 다가갔다. 가판대에 서있던 여자가 짐승의 내장껍질을 둥그렇게 묶은 후 안에 물을 채워 넣어 만든 공 몇 알을 내밀면서 게임을 해보겠냐고 물었다. 

 “과녁에 맞추면 제가 점수를 매겨드린답니다.” 

 타지아가 돈을 지불하고는 아르만도에게 어떤 게 가장 가지고 싶냐고 물었다. 아르만도는 가판대 중간을 가리켰다. 타지아는 가판대에 놓인 천인형의 이름을 읽었다. 

 “상희.” 

 “이름이 이상하네.” 

 바르바라가 말했다. 

 “이름이 이상한데.” 

 이반이 맞장구쳤다. 

 “하지만 아르만도가 가지고 싶대. 그렇지, 아르만도?” 

 타지아가 묻자 아르만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타지아는 비장하게 물공 일곱 개를 차례로 과녁에 던졌다. 과녁판은 1점부터 5점까지 매길 수 있었는데 바깥으로 아웃되면 점수를 받을 수가 없었다. 타지아는 물공 4개를 아웃시키고 나머지 3개를 간신히 2점에 맞췄다. 인형을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점수였다. 아르만도가 아쉬운 얼굴로 흐으응, 소리를 내자 잠자코 타지아가 던지는 것을 지켜보던 바르바라가 이반을 쳐다보았다. 

 “네가 던져봐.” 

 “내가?” 

 “네가.” 

 바르바라가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저 인형 갖고 싶어.” 

 이반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이반은 결국 그 인형을 따냈다. 그는 인형을 바르바라에게 건넸는데, 바르바라는 그 인형을 다시 아르만도에게 건넸다. 아르만도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면서 상희를 껴안았다. 하지만 활달한 아이들이 곧 그렇게 하듯이 인형을 손안에 넣고 주물거리고 뭉개고 꼬집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미묘한 표정으로 아르만도의 손안에서 구겨지는 상희를 내려다보았다…. 어딘지 흡족한 얼굴이었으므로 이반이 물었다. 

 “아르만도가 인형을 험하게 다루네.” 

 “그러게. 그래도 가만히 내버려두자.” 

 바르바라가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나중에 바르바라는 상희에 먼지가 묻었다는 이유로 그것을 들어 올리고는 몇 대를 쥐어 팼다가 아르만도의 품에 돌려주었다. 악의는 없었다. 악의는 없었다… 기분이 좋았을 뿐. 

 세 사람은 아르만도를 데리고 작은 축제 판을 빙빙 돌았다. 음식을 사먹고 달콤한 과자를 아르만도의 입에 넣어주었다. 때때로 아르만도가 먼 곳을 보고 싶다고 손가락으로 풍경을 짚기도 했다. 그럴 때면 타지아가 아르만도에게 목마를 태워달라고 이반에게 부탁했다. 그럼 이반은 두 여자의 가운데에 서서 아르만도를 들어 올려 제 어깨에 얹어놓았다. 이반이 아르만도에게 목마를 태워주고 있을 때면 두 여자는 항상 그를 사이에 두고 걸으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이반에게 떠들어댔는데, 정작 이반은 “저것 좀 봐”라고 소리를 지르는 아르만도에게 가장 많이 대답했다. 그 무렵 아르만도는 삼촌이라는 말을 배워서 이반을 종종 그렇게 불렀다. 

 아르만도가 다시 이반의 어깨에서 내려왔을 때, 타지아가 갑자기 아르만도의 손을 잡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르만도는 신이 나서 타지아를 따라 뒤뚱뒤뚱 앞으로 내달렸다. 바르바라는 이반과 함께 제자리에 남았는데, 축제 판에 흥이 난 행인무리가 우르르 앞을 지나가는 바람에 잠시 멈추어서야했다. 행인들이 다 빠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앞이 보였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와 아르만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 간 거지?” 

 이반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지만 바르바라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근처에 있겠지 뭐.” 

 하지만 타지아와 아르만도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축제 판을 두 바퀴째 빙빙 돌았다. 처음에 이반과 바르바라는 서로에게 말을 걸었지만 앞서간 두 사람이 보이질 않자 점점 말수가 줄더니 근처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조금 불안해졌기 때문에 금발의 여자와 아이만 보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홱 돌려 얼굴을 반드시 확인했다. 하지만 매번 그들은 타지아와 아르만도가 아니었다. 

 “먼저 돌아갔을 지도 몰라.” 

 이반이 바르바라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까.” 

 “보이질 않으니까.” 

 “우리를 두고?” 

 “그럴 수도 있지.” 

 그 때 정수리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은 점점 더 굵고 가팔라지다가 종국에는 쏟아지기 시작했다. 축제의 거리를 걷던 행인들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천막이 쳐진 가판대 아래로 뿔뿔이 흩어졌다. 소나기였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손을 붙잡고 근처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절반쯤 젖어서 축축했다. 바르바라와 이반의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고인 물방울이 그들의 움직일 때마다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르바라는 신경질적으로 젖은 앞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비가 쏟아지는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아르만도가 비를 맞으면 안 되는데.”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감기에 걸릴 거야.” 

 “감기는 네가 걸릴 것 같은데.” 

 이반이 말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조금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이 추운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이 붕 떠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르만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바르바라가 성급하게 앞으로 나섰다. 

 “안 되겠어, 찾아봐야겠어.” 

 “바랴, 곧 비가 그칠 거야.” 

 “싫어.” 

 바르바라가 이반을 돌아보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이반. 나는 내 아들을 찾아야겠어.” 

 그렇게까지 결연하게 결정을 내린 적이 있던가? 알 수 없었다. 없던 모성이 생겨난 걸까? 혹은 아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인정했기 때문에 타지아로 말미암아 사라지게 둘 수는 없다는 뜻이었나? 그 때, 추위로 인해 판단력은 흐려졌고 바르바라는 실제로 창백하게 질려있었지만 머릿속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또렷했다. 그 불가사의한 선명함을 바르바라는 지금도 확신할 수가 없다. 

 바르바라는 빗속을 헤치고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타지아와 아르만도의 이름을 불렀다. 그 어디에도 두 사람은 없었다. 비는 이반의 말대로 금방 그쳤고 날씨는 빨리 개었다. 바르바라는 바닥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를 밟으며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광장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데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말을 탄 남자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말의 안장에 달린 익숙한 인장을 보았다. 그건 페트로프 가의 것이었다. 룬넨마을 곳곳에도 그것이 걸려있었다. 바르바라는 뛰던 걸음을 늦추고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드문드문 말소리가 들렸고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졌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타지아가 잔뜩 꾸며낸 명랑한 어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전 정말 좋아요. 이제라도 일이 잘 해결되어 기뻐요.” 

 “그럼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아들을 소개하게 될까요?” 

 “그건 확신할 수 없지만 결혼식에는 반드시 참석하게 되겠지요.” 

 “요한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저희 아버지에게도요.” 

 “영주님께 그대로 전달하지요.” 

 말을 탄 남자가 관문 방향으로 떠난 뒤,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한 번 껴안고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가 물에 쫄딱 젖은 바르바라를 보고 우뚝 멈추어 섰다. 바르바라는 싸늘한 표정으로 타지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에서부터 뚝뚝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제 넌 모든 걸 설명해야 할 거야, 이 빌어먹을 여우같은 계집애.” 

 바르바라가 극도로 억누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6. 

 페트로프 가의 영주는 딸이 도주한 이후 행방을 수색하기 시작했지만 도무지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타지아가 인적이 드문 새벽에 도주했고 사용인을 단 한 명도 데려가지 않았을 뿐더러 여관을 들린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트로프 영주는 타지아와 인연을 유지하던 체사레 집안을 직접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체사레 집안 여자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사실 사기꾼을 협박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타지아가 사라진 지난 이 년 동안 페트로프 영주가 할 수 있던 것은 요한의 가문과의 친분을 유지하면서 딸아이의 심정을 포장하고 수습하는 일이었다. 요한의 가문은 도트라의 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척을 질 수가 없었다. 그는 타지아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불러올 지도 모를 재앙 앞에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요한의 가문은 그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주고는 충분히 시간을 주고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요한이 약혼을 철회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요한은 이미 바르바라의 흔적을 추적해내서 타지아가 써드빌로 향한 것을 알아냈을 뿐더러 그곳에 머물다 되돌아와서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가문의 일에 온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바르바라가 임신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 했다. 

 이 년의 시간을 참지 못 하고 백기를 든 건 페트로프 영주 쪽이었다. 그는 상식적으로 잘 나가는 도트라의 가문이 결혼을 앞두고 도망친 타지아를 이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준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타지아와 요한 사이에 무언가 있거나, 혹은 요한이 타지아를 버릴 수 없는 도의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눈치 챘다. 결국 그는 요한을 직접 만나 몇 차례를 심문했고 자신의 딸의 행방을 알아냈다. 그리고는 써드빌로 사람을 보냈다. 페트로프 가의 인장을 단 말이 써드빌 관문을 통과하고 있을 무렵 이반과 바르바라와 타지아는 축제 판을 돌면서 주전부리를 먹고 있었다. 

 그 때, 타지아는 아르만도와 달려 나가다 말고 행인들에 휘말려 바르바라와 이반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타지아는 아드만도의 손을 잡고 두 사람을 찾아 거리를 쏘다니다가 결국은 먼저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반의 말이 맞았다. 적어도 그때까지 그녀는 아르만도와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타지아는 체사레 여관 앞을 서성이는 말 한 필을 보았다. 그 위에 탄 남자와, 그 안장에 매달린 자신의 가문의 인장을 보았다. 그 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껴안고 체사레 여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자가 말에서 내려 여관으로 들어섰다. 그는 타지아를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그녀의 품에 안긴 아르만도를 보고 물었다. 

 “아가씨 아이입니까?” 

 타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자는 페트로프 가의 지난 이 년 간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영주의 명을 받고 이곳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영주와 첫째 도련님이 무척이나 진노한 상태임을 설명하면서 상황을 얼른 수습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를 보니 마음이 놓인다고도 했다. 자신도 대충의 상황을 알고 있다면서, 요한 가문이 결혼을 기다려준 건 전부 아이 때문이라는 걸 알겠다고 늘어놓았다.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타지아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진노한 영주님과 첫째 도련님의 대목에서부터 그녀는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가 겪어온 지난 트라우마가 몸에 습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써드빌의 아름다운 해변과 바람으로도 떨쳐낼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떨쳐낼 수 없는 기억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있다면 타지아의 경우에는 체벌과 하얀 흉터, 다리를 저는 일과 뺨을 후려쳐 맞는 일이 그것이었다. 타지아는 상상 속에서 매를 맞다가 피를 흘리며 실신하는 자신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공포가 그녀를 지배하자 판단력은 흐려졌다. 하지만 정작 타지아의 머릿속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또렷했다. 자신을 보호하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떠올랐다.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결정한 적이 있던가? 알 수 없었다. 난나는 나를 증오하게 될까? 하지만 아들을 소유물로밖에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내가 낫지 않을까? 

 타지아가 대답했다. 

 “네, 아버지께 전해주세요. 요한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고. 이제 요한이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지라고 전해주세요. 결혼이 성사되었다고.” 

 타지아는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7. 

 바르바라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천천히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야기를 끝낸 타지아는 침착하게 바르바라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바르바라는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타지아에게 물었다. 

 “네가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소리야?” 

 “난나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데려가지 않아.” 

 “그럼 네 거짓말은 어쩌고?” 

 “다른 수를 생각해봐야지.” 

 “사실 너 대책 같은 거 없지?” 

 바르바라는 갑자기 신음하면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됐어, 지금 널 보고 싶지 않아. 생각하게 내버려둬.” 

 그런 후 바르바라는 비틀거리며 층계참으로 올라갔다. 

 그 다음 날 바르바라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기사단에 출근할 수가 없었다. 근무를 마친 이반이 저녁에 체사레 여관을 들렀다. 바르바라는 이층 방에 누워 이불을 감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느끼고는 천천히 눈을 떠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반을 응시했다. 이반은 리퍼코트를 입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작게 속삭였다. 

 “안녕, 이반.” 

 “감기에 걸릴 거라고 했잖아.” 

 “그래, 걸려본 건 정말 오랜만이야.” 

 나는 추위에 강했는데 정말 이상하지. 바르바라가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몇 번 몸을 뒤척였다. 이반이 근처에 의자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는 머리맡에 앉은 이반의 얼굴을 쳐다보는 대신 눈높이에 있는 이반의 다리를 보면서 말했다. 

 “하루 종일 고민을 했어.” 

 바르바라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털어놓았다. 

 “네 조언을 들어야겠어. 아르만도는 널 좋아하고 너도 아르만도를 좋아하니까.”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략하게 추려서 이야기했고 드문드문 거짓을 섞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르만도의 일생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가난과 추위에 대해 말했다. 계승되는 가풍과 환경이 아이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모의 잘못은 얼마나 아이에게 전염되는지, 귀족적인 관습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은 불행의 그늘에서 조금 빗겨난 삶을 살아가는지… 어째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하고 마는 것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잘못된 선택을 하고 후회를 하고 고통스러움을 겪으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지. 결국 이야기는 바르바라의 삶에 대한 것이 되었다. 이반은 잠자코 들었다. 바르바라가 물었다. 아르만도의 삶이 냉소적인 엄마의 아래에서 진행되는 것보다 낙천적인 “이모”의 아래에서 진행되는 것이 좋겠냐고 돌려서 물었다. 아르만도가 자신이 되는 것보다는 타지아의 성격을 계승하는 게 좋지 않을까. 바르바라는 이반이 마치 아르만도의 또다른 보호자인 것처럼 진지하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 마침내 이반이 대답했다. 그 대답은 바르바라로 하여금 타지아의 낙천성과 활달함의 배경이 되는 지점을 상기하도록 도와주었다. 바르바라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후 이제까지 그 대답을 듣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던 것처럼, 그리고 이제 그 대답을 들었으니 모든 걸 놓아버리겠다는 것처럼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8. 

 열에서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바르바라는 선택을 미루었다. 타지아에게 아이를 데려가도 좋다거나 아이를 데려가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 못 했다. 그녀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기사단에 출근했고 이반과 잡일을 처리하고는 여관으로 되돌아와 타지아가 아르만도와 노는 것을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타지아는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예전보다 더 자주 아르만도의 곁에 붙어있었다. 마치 자신이 아르만도의 훌륭한 보호자임을 바르바라에게 거듭해서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아르만도가 자신을 이모가 아닌 엄마라고 부를 때에도 은근하게 그 상황을 넘겨버렸고, 잘못된 호칭을 정정하는 대신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 번 “그래, 엄마 여기 있어.”라고 이야기했다. 

 바르바라의 갈등은 깊어졌다. 타지아가 암묵적으로 선택을 종용하는 게 느껴졌다. 사실상 답은 정해져있었다. 바르바라가 아르만도의 훌륭한 보호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타지아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켈커스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바르바라는 페트로프 가문이 타지아를 어떻게 다룰 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고, 그것만큼은 도무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선택을 입으로 내뱉는단 말인가. 바르바라는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 하고 며칠을 더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마침내는 이 모든 상황을 벌인 타지아에게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건 바르바라 자신에 대한 분노에 가까웠다. 

 바르바라가 선택을 미룬 지 엿새째 되던 날, 페트로프 가문의 사용인이 다시 써드빌을 방문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그를 불렀다고 생각해 날카롭게 반응했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냐고 되물으면서 아직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타지아가 그녀에게 벌컥 화를 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타지아는 그게 그렇게 오래 고민할 일이냐고 되물었다. 바르바라가 얼굴을 찡그린 채 반문하자, 타지아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타지아는 아르만도가 태어나던 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름을 지어준 게 누구인지를 상기하면서 아르만도의 성장과정을 상세하게 읊어댔다. 아르만도가 뒤집기를 성공했을 때, 옹알이를 했을 때, 걸음마를 뗐을 때, 단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엄마라는 말을 누구의 얼굴을 보며 했는지, 아르만도가 누굴 더 좋아하는지를 상기시키며 바르바라의 형편없는 육아를 조롱하고 비꼬았다. 타지아는 바르바라가 정말이지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바르바라가 형편없는 부모고 그건 전부 바르바라가 못돼먹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빤히 집안에 되돌아가 당할 수모를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하는 거라고 말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가 사실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 윽박질렀다. 자신은 바보가 아니고 이제는 결코 바르바라에게 속지 않는다고 소리를 쳤다. 

 바르바라는 이 모든 말을 잠자코 들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타지아를 쏘아보면서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타지아가 집안을 들먹이기 시작했을 때, 그러고는 마침내 자신이 숨겨온 사랑의 이면에 존재하는 증오를 건드렸을 때는 스스로를 통제하기를 그만두었다. 바르바라는 더 이상 타지아에게 자신의 이면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건 곧 이성을 잃었다는 소리였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이중성을 꼬집기 시작했다. 냉정한 얼굴로 침착하게, 마치 이 날을 위해서 벼르고 있었다는 것처럼 바르바라는 모든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타지아 자신이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 평민들은 페트로프가의 가식을 전부 알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마을 사람들이 타지아를 지독하게 성가셔했노라고 말했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두가 너를 속여 왔고 너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으며 눈치 없는 얼굴로 웃고 다녔노라고 이야기했다. 바르바라는 또, 자신이 속여 온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타지아의 말대로 자신이 그녀를 증오하고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그건 전부 타지아의 탓이라고 했다. 타지아를 사랑하는 건 너무 힘이 들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심지어는 타지아의 약혼자조차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을 거라고 했다. 고귀한 귀족의 가문이었음에도 타지아는 선택받지 못 했고, 타지아가 그토록 속으로 멸시하던 사기꾼 집안의 딸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상처받을 수 있도록 모든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남편이 될 남자와 자신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를 이야기했다. 아르만도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이야기했다. 적어도 아르만도는 요한의 피가 섞여있으니 네가 데려가면 그렇게 남인 것도 아닐 거라고 비웃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통제권을 잃었고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타지아가 말을 잃고는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지아에게 아이를 넘겨주는 쪽을 방금 그녀를 모욕하기 위하여 선택해버린 것이다. 

 바르바라의 독설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시큰거리는 숨소리와 분노에 찬 눈빛이 침묵을 가득 채웠다. 

 한참이 흐른 뒤, 마침내 타지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걸레.” 

 타지아는 그 한 단어를 부들부들 떨면서 내뱉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바르바라는 타지아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기사단으로 출근했다가 저녁 이른 시간에 되돌아왔다. 그러다 문득 집안이 텅 비어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방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방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바르바라는 옷장을 열었다. 드레스와 외투가 전부 사라져있었다. 바르바라는 층계를 뛰어 내려와 아르만도의 방문을 열었다. 아르만도가 없었다. 아르만도의 장난감도, 옷도, 인형도 그곳에 없었다. 방은 텅 비어있었다. 

 

 9. 

 다음 날 바르바라는 출근하지 않고 해변 가를 서성이다가 인적이 드문 절벽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은 언젠가 바르바라가 이반과 타지아와 아르만도와 함께 다녀와 본 곳이었다. 경사가 져있고 높이가 제법 높아서 이반이 계속 아르만도를 주시하던 것이 기억났다. 세 사람은 아이와 함께 앉아서 써드빌의 관문이 훤히 보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방문객이 나타날지를 두고 내기를 했었다. 그리고 방문객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이 여자일지 남자일지, 평민일지 귀족일지를 두고 다시 한 번 내기를 했다. 누가 이겼더라. 아마 이반이 이겼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홀로 바위에 앉아 써드빌의 관문을 바라보면서 숨을 죽였다. 타지아의 마차는 언제 떠났을까? 아르만도는 타지아를 따라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더 이상 상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바르바라는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익숙하게 통제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바르바라는 한참을 그곳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건 그로부터 또 한참이 흐른 뒤였다. 바르바라는 그게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날카롭게 반응했다. 

 “꺼져.” 

 …. 

 “아니… 아니야. 너지? 그냥 거기 있어줘.”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반은 그곳에 서있었다. 바르바라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써드빌 관문을 쏘아보았다. 해안가 근처의 절벽이었기 때문에 거센 바람이 파도와 함께 끊임없이 몰려왔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금발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자꾸만 바르바라의 뺨을 미약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마침내, 아주 오랜 침묵을 뚫고 바르바라가 바람에 날려 사라질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애를 사랑했던 것 같아.” 

 “알고 있어.” 

 등 뒤에서 이반이 대답했다. 

 “알고 있어, 바랴.” 

 바르바라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바람이 점점 쌀쌀해지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자신을 통제했다. 결코 이반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로 모든 생각과 감정을 갈무리했다. 이반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수평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랴.” 

 이반이 말했다. 

 “돌아가자.” 

 바르바라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응.”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어두워지는 해변 가를 조금 걸었다. 사멸하는 노을 아래에서 바르바라는 이반의 군청색 눈을 바라보며, 사실 아르만도의 두 눈동자는 이반이랑 전혀 닮은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시절을 상상한 것일까. 그 날 두 사람은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고 그대로 헤어졌다. 

 바르바라는 그 날 이후로 더 이상 아르만도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미묘하게 늘어졌다. 이반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고 대신 바르바라의 곁을 종종 지키면서 이야기를 했다. 어떤 계산이나 의도를 가지지 않은 채로 평화롭게 이어지는 시시한 이야기들을. 

 

 10. 

 둘만 남았다. 언제나 그런 법칙이 적용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함께하는 몇 달은 분명 다시는 올 수 없을 좋은 시절로 남지만 종국에는 누군가가 “잘 있어, 이제 가버려.”라고 이야기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에 떠난 건 이반이지만 이번에 떠난 건 타지아였다. 그렇다면 다음에 떠나는 건 나일까. 타지아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상상하기를 그만두었다. 셋의 관계에 더는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이제 남은 건 이반이었고 바르바라는 이반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고 검을 대고 식사를 할 것이다. 바르바라는 현실로 돌아오기로 했고 몇 주 간 정처 없이 마음을 비틀거리다가 마침내 정신을 다잡았다. 불행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벌어진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무렵에 써드빌에 결혼식이 열렸다. 바르바라와 이반이 종종 편의를 봐주곤 하던 빵가게 장녀의 결혼식이었다. 두 사람은 거기에 기사로서 초대를 받았고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리퍼코트를 입은 채로 그곳에 참석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타지아의 결혼식이기도 했다. 타지아는 도트라에서 드레스를 입고 한손으로 아르만도의 손을 잡고는 예식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의자에 앉는 대신 뒤쪽에 서서 신랑과 신부가 손을 맞잡고 반지를 교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타지아는 에아의 교리 위에 손을 얹어놓고 요한을 바라보며 긴장한 듯 웃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두 부부가 입을 맞추고 사랑을 맹세하는 걸 보았다. 타지아는 교리 위에 손을 얹은 채로 결혼의 맹세를 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 시절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 

 바르바라가 말했다. 

 “좋았던 시절은 언제나 흐르는 물처럼 떠나가지.” 

 이반이 대답했다. 

 타지아는 반지를 낀 채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았던 시절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결혼식이 끝나자 써드빌이 늘 그러하듯 춤판이 벌어졌다. 사실상 작은 축제에 가까웠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무대 근처에 서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껴안고 춤을 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대의 한가운데에는 신랑과 신부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사랑을 맹세한 자들은 행복해보였다. 바르바라는 이반에게 춤을 추자고 말했다. 이반은 대답 대신 무대 위로 올라가 손을 내밀었다. 

 “감회가 새로운데.” 

 이반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 한 번 잘해봐.” 

 “너무 오랜만이라.” 

 이반이 바르바라의 허리를 감았다. 

 이반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잘 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못 추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유년시절의 이반이 이것보다 더 잘 추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반의 스텝에 엉킨 바르바라의 발이 몇 번 그의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반이 짓궂게 웃었다. 

 “그러는 너도 솜씨가 좋지는 않은데, 바랴.” 

 “아, 그래?” 

 바르바라가 이반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면서 그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반이 조금 비틀거리다 말고 중심을 잡았다. 

 “심술부리는 거야?” 

 “그럴 리가.”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반의 스텝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리듬을 흡수하면서 이반의 몸짓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무대에 올라선 인파 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능숙하게 찾아냈다. 바르바라는 주도권을 쥔 것처럼 움직였다. 언젠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보여줄게.” 

 바르바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훔친 것 중에서 가장 우아한 것.” 

 재주껏 다시 돌려받아봐.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반으로부터 훔쳐온 유일한 것을 두른 채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열네 살의 이반이 가지고 있던 것 중에서 바르바라가 판단하기로 가장 귀족적인 것. 훔치고 싶다면 형태가 없는 것을 훔칠 수도 있는 건가요. 언젠가 어린 바르바라가 마미사에게 물었을 때, 마미사는 대답했다. 영리한 도둑이라면 무엇이든 훔칠 수 있단다. 마음과 시간까지도. 

 

 하지만 이반 당신으로부터 훔치지 않는 것도 있다. 이반의 말을 달려 저녁의 설산을 올랐던 것, 눈 내리는 언덕에 올라 세 사람이 볼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숨 가쁘게 뛰었던 것, 아르만도의 이름을 세 사람이 번갈아 불렀던 것, 함께 걷던 해변에서 소라껍질을 주웠던 것, 가판대에 인형이 올려져있던 것, 아름다운 풍광 앞에 누운 채 괴담을 이야기하던 것. 바르바라 역시 가지고 있기에 탐내지 않는 기억들. 좋았던 시절은 그곳에 남는다. 언제까지나 그곳에 남는다. 

201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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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마리사 체사레와 그녀의 딸 바르바라 체사레는 체사레 식구들 중에서도 유독 손이 재빠르고 영악한 편에 속했다. 집안을 꾸려온 마미사 할머니는 두 사람을 특별히 예뻐했고 그 사실을 다른 식구들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특히 그녀는 자신의 딸 마리사를 무척이나 기특하게 여겼다. 마리사라면 어딜 가도 한 몸 건사할 수 있을 거라고 모두가 입버릇처럼 말했다. 바르바라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의 어머니라면 어디서든 실력을 발휘하여 놀랄 만한 무언가를 보여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써드빌로 내려온 이후, 마리사는 얼마 안 가 손을 털었다. 그 결정을 바르바라에게 통보 식으로 이야기했을 때만해도 바르바라는 별로 실망하지 않았다 써드빌에서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곳은 너무 한적했고 유동인구도 적었다. 체사레 여관이 무수한 도둑질에도 무사할 수 있었던 건 룬넨마을을 방문하는 유동인구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말은 즉 그들이 다시는 마을로 돌아올 일이 없는 외부인들의 주머니를 털어왔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나 써드빌은 어떠한가. 써드빌에는 외부인들이 많지 않았다. 종종 외부인들이 유입되는 때가 있기는 했다. 선루스 기사단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목적지로 삼은 이들은 대체로 기사가 되어 마을에 자리를 잡았고, 숙소에 머물렀기 때문에 여관까지 도달할 일도 없었다. 마리사가 손을 털겠다고 내린 결정은 모로 보나 타당해보였다. 써드빌은 모험을 하기에는 시시하고 문제를 일으키기에는 너무 좁은 공간이었다. 바르바라는 어머니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리사가 바르바라의 출생 건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을 때부터 모든 게 달라졌다. 바르바라는 잠자코 마리사의 이야기를 듣다가 밖으로 나와 침을 뱉었다. 출산과 관련된 이야기들이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마리사는 켈커스에 방문한 별 볼일 없는 귀족 남자와 눈이 맞아 하룻밤 몸을 섞고는 바르바라를 낳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바르바라에게는 아버지가 없었다. 애초에 체사레 집안에는 남자가 없었다. 이때까지 바르바라는 그 문제를 크게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남자가 “발생한”적이 있기는 했으나 곧 이 집안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라고 막연하게 상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라의 생부가 체사레 여관에 존재하지 않았던 진짜 이유는 그녀들에게 추방당해서가 아니라 그 스스로가 떠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임신한 여자를 버려두고는 영지로 돌아가 버렸다. 개새끼. 마리사는 자신의 실패를 인정했다. 그 남자의 마음을 훔치는데 실패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고는 바르바라를 낳았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존재가 곧 마리사 인생의 어떤 지점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자 여태까지 어머니를 높게 평가하던 자신에게 짜증이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여관에 있고 싶지 않았다. 지금의 삶을 유지하며 어머니와 닮고 싶지 않았다. 사춘기는 그런 식으로 왔고, 결과적으로 바르바라는 기사단으로 떠났다. 어머니의 거울이 되고 싶지 않은 딸의 마음은 어느 세대에서든 그런 식으로 계승되어 그녀들을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선택지로 떠밀고 마는 것이다. 

 내 말은, 리온… 우리 엄마는 이미 한 번 실패했다는 거야. 도둑으로서. 

 난 그런 일 겪고 싶지 않아. 

 바르바라는 그 말을 지키며 살았고, 스물한 살이 되었다. 바르바라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더는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가 멈추고 살과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사춘기가 끝나고 청년기가 오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어른이 되었다는 것을 바로 그 때 느꼈다. 

 

 2. 

 타지아 계나디 페트로프가 써드빌로 내려온 건 바르바라의 스물한 살이 한창 무르익은 늦은 여름의 일이었다. 바르바라는 그 때 기사단 업무 접수처에서 서류를 뒤적이고 있었는데, 귀족처럼 보이는 여자가 써드빌 관문 앞에서 입씨름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르바라는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그 장소에 없었으면 다른 사람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귀찮은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다. 관문까지 걸어가는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있던 바르바라는 관문 앞에서 문지기와 입씨름을 벌이던 명랑한 얼굴과 마주하자마자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타지아는 비명을 질렀다. 

 “난나!”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채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난나, 나야!” 

 타지아가 손에 들고 있는 짐을 내팽겨 치고 바르바라에게 달려갔다. 그러고는 바르바라를 껴안고 붙잡고 매달려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밀쳐내야 하는지 아니면 얌전히 안겨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자신이 어떤 감정인지를 정확하게 확신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모든 일들이 공중에 붕 떠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사랑하는 이들을 마주할 때면 언제나 그런 것들이 불확실하게 맴돌았다. 타지아가 바르바라를 힘껏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그 힘에 들려서 바르바라의 발끝이 땅과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바르바라는 모든 일들이 바로 그 발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여기에 왜 타지아가 있는 거지?’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무척 현실적이었다. ‘그럼 타지아는 집으로 돌아가 매를 맞게 되는 건가?’ 

 “네가 왜 여기 있어?” 

 한참 후에야 바르바라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타지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대답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오년만의 만남이었다. 그전까지 두 사람은 단 한 번도 편지하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거짓말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3. 

 타지아 계나디 페트로프가 가출을 감행한 건 그녀가 집안이 맺어준 귀족 자제와 결혼하기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그 대가로 타지아는 페트로프 가문이 준수하는 몇 가지 벌을 받아야만 했는데, 그 무렵의 타지아는 그 모든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타지아는 결혼을 감행하면 자신의 삶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산산이 비틀리고 말 것 같다는 예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결국 그녀는 오밤중에 짐을 싸들고는 체사레 여관 문을 두드렸고-정말 무례하구나, 라고 바르바라는 그 대목을 들으며 생각했다-하룻밤을 그곳에서 보낸 뒤의 마미사의 도움을 받아 체사레 모녀의 최종 행선지를 알아낸 것이었다. 타지아는 짐과 몇 가지 금품을 챙겨서 마차에 올랐다. 그러고는 써드빌까지 단숨에 내려왔다. 

 “내 말은, 난나.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할 때가 오잖아. 안 그래?” 

 바르바라는 그 감각을 이미 열일곱 살 전후로 겪어왔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타지아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이제 어른이었고 격동의 사춘기는 훨씬 이전의 이야기였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사춘기가 스물한 살이 되어서야 그녀를 뒤흔들고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정작 타지아 본인은 이 상황이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특유의 태평스럽고 낙천적인 성격은 오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였다. 타지아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체사레 여관 소파에 제집마냥 다리를 뻗고 눕더니 바르바라를 보며 해죽해죽 웃었다.

 “이러니까 옛날 생각난다, 그렇지?”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혔다.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면 어쩌려고 그러니?” 

 “돌아갈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줄 알아?” 

 타지아는 입을 삐죽였다. 

 바르바라는 확인 차 반복해서 되물었다. 

 “여기서 살 거란 소리야?” 

 “너희 여관집은 넓으니까 방 하나쯤은 날 줘도 괜찮지 않을까? 정 뭐하면 돈을 줄게.” 

 바르바라가 화를 내기 위해 입을 벌리던 순간, 타지아가 덥다고 중얼거리며 바지를 허벅지까지 걷어 올렸다. 하얗고 얇은 드레스 속에는 얼룩덜룩한 다리가 숨겨져 있었다. 바르바라는 숨을 멈추고 타지아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보랏빛으로 물든 귀족의 다리가 적나라하게 노출된 순간… 바르바라는 할 말을 삼키고는 참담하게 시선을 돌렸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의 심정을 모른 체했다. 바르바라가 자신의 상처에 약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타지아는 체사레 여관의 가장 넓은 방을 차지하게 되었다. 마리사는 조금 귀찮아하는 기색이었지만 그렇다고 귀족을 쫓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타지아가 선금으로 내민 금품이 제법 값어치가 있었기 때문도 있었다. (사실 그 이유가 가장 컸다.) 첫날,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짐을 푸는 것을 도와주다 말고 슬슬 돌아가야겠다고 말했다. 

 “돌아가다니? 여기가 네 집 아니야?” 

 타지아가 휘둥그레 눈을 뜨자 바르바라가 담백하게 대답했다. 

 “난 이제 따로 살아. 기사가 되었거든.” 

 “기사?” 

 “그래, 선루스 기사단 말이야.” 

 타지아는 현관까지 바르바라를 졸졸 따라왔다가, 바르바라가 입구에 걸어둔 검은색 리퍼코트를 입는 것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러고는 갑자기 복받친 것처럼 두 팔을 벌려 바르바라를 와락 껴안았다. 

 “세상에, 너무 기쁘다. 오, 맙소사. 난나, 너 정말 대단하다!” 

 바르바라는 끙, 소리를 내다가 시선을 내리깔고는 중얼거렸다. 

 “그러니.” 

 “그렇고말고.” 

 타지아가 바르바라의 뺨에 입을 맞추자, 바르바라는 윽, 소리를 내면서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장을 바라보았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의식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아직까지 자신이 타지아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게 다행인건지 불행인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4. 

 타지아가 여관방에 자리를 잡은 이후 마리사와 바르바라는 조금 바빠졌다. 우선 그들은 타지아를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점심이 되기 전에는 타지아의 방을 청소해야만 했다. 타지아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타지아는 두 모녀의 이런 노동을 당연하게 생각했다. 페트로프 성에 있을 적에도 타지아의 주변에는 이런 보이지 않는 일꾼들이 사방에 널려있었다. 타지아는 이미 차려진 식사, 늘 깨끗한 시트, 식지 않은 찻잔과 반들반들하게 닦긴 식기에 어떤 노력이 투자되었는지를 알지 못 했고, 사실은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런 것들이 늘 도처에 준비되어 있는 삶을 살아왔다. 평민의 귀감이 되어야한다고 뺨을 얻어맞고 살면서도 동시에 그녀에게는 그런 모순된 이면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항상 타지아의 그런 점을 못 견디게 짜증스러워했다. 

 하지만 동시에 타지아는 사랑스러웠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바르바라가 퇴근하여 집으로 되돌아올 때면 타지아는 현관 바깥에 서서 바르바라가 보일 때까지 발끝을 세우고 풍경을 기웃거리다 곧장 뛰쳐나가 두 팔로 바르바라를 끌어안았다. 그런 환대를 받은 적이 얼마만이더라. 바르바라는 자신을 사랑하는 타지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결코 그녀의 아침식사를 포기하거나 접시를 닦지 않거나 시트를 치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그 모든 골치 아프고 귀찮은 일을 기꺼이 해냈다. 타지아가 귀족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귀족이 타지아였기 때문이다. 타지아를 사랑하기 위해서는 타지아라는 인물과 귀족이라는 상황을 그런 식으로 역전시켜 사고할 필요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런 일들을 능숙하게 해내는 축에 속했다. 이제는 소녀보다 어른에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두어 달 동안 타지아의 시중을 들어주고 늦은 오전에 출근해 기사단에서 근무를 하고 저녁이면 다시 돌아오는 생활을 유지했다. 때때로 피곤한 날에 타지아의 저녁밥을 준비해줘야 할 때도 있었다. 씻지도 못 하고 부엌에 서서 음식을 만들고 있으면 타지아가 배고프다고 칭얼거리며 바르바라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럴 때마다 바르바라는 음식을 손질하느라 축축한 손을 내려 타지아의 손등을 붙잡았다가 다시 천천히 떨어뜨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이따금은 타지아를 위해 닭을 잡았고, 큰 생선을 낚았고, 그들의 목을 비틀거나 대가리를 잘라내고 뼈를 분리하고 살을 손질했다. 칼을 이용해 고기를 큼지막하게 잘라낼 때마다 칼자루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빨래를 할 때, 시트를 갤 때도 마찬가지였다. 타지아가 자리에 없을 때마다 바르바라는 혼란스러워했다. 타지아를 쫓아내고 싶었다. 자신의 상처와 지난날의 우정을 빌미로 이곳을 은신처로 삼고는 뻔뻔스럽게 구는 타지아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올라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타지아의 금발과 푸른 눈동자를 사랑하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자신은 결코 타지아에게 제대로 화낼 수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정말로 사랑하는 것들 앞에서 바르바라는 자신의 진심을 숨기기 급급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는 것, 그것은 그녀에게 치욕에 가까웠다. 마리사 체사레는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 했고 심지어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도 못 했다. 그래서 바르바라를 낳은 것이다. 바르바라는 체사레 집안에서 가장 뛰어났던 사기꾼 여자의 오점으로부터 비롯된 존재였고 그 자신은 어머니의 실수를 답습할 마음이 추어도 없었다. 타지아를 내쫓기 위해 타지아에 대한 증오를 이야기하기 시작하면 자신을 걷잡을 수가 없을 거란 것을 바르바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았다.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동일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였다.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삶을 귀중하게 생각했다. 타인의 나락을 보았다면 비슷한 것을 겪지 않기 위해 뒷걸음질 치는 게 그녀가 터득한 삶의 지혜였다. 신중한 판단이었다. 

 

 5. 

 타지아가 써드빌에 몰고 온 작은 재앙은 바르바라가 스물두 살이 되기 불과 몇 주 전에 일어났다. 초겨울이었고 날씨는 아직 따뜻했다. 파발이 말을 타고 써드빌 관문에 도착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작가의 장손이 긴장한 기색으로 마을에 들어섰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 때 바르바라는 근무 중이었기 때문에 그 소식을 한참 뒤에야 접했다. 퇴근하고 숙소로 돌아가던 바르바라는 낯선 품종 말이 자신의 여관 근처에 묶여있는 것을 보았다. 타지아의 방에 불이 밝혀져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마리사는 혀를 차며 손가락으로 이층을 가리켰다. 

 “누구야?” 

 “약혼자.” 

 “오늘 아침에 온 귀족?” 

 “후작가란다.” 

 “어디서 왔대?” 

 마리사는 은근하게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수도에서.” 

 “하루 종일 둘이 대화했던 거야?” 

 “말도 마렴.” 

 바르바라는 층계참을 올려다보았다. 복도에 희미하게 밝혀진 불이 보였다. 귀를 기울이자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타지아는 결혼이 싫어서 이곳까지 내려온 것이 아니었나. 그나저나 저 후작 가는 이곳을 어떻게 찾았지.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 페트로프 자제를 숨겨주었기 때문에 응징을 받는가? 바르바라는 다시금 심란해졌다. 그리고 심란해진 지금의 상태에 짜증이 났다. 

 얼마 뒤 완전히 밤이 찾아왔고, 타지아의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던 후작가의 자제가 마침내 층계참에 모습을 드러냈다. 타지아는 그보다 두 박자 정도 늦게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나란히 계단을 내려와서는 현관 앞에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바르바라가 타지아의 뒤로 다가가 삐딱하게 섰다. 후작가의 시선이 타지아에서 바르바라로 이동했다. 

 “저분은…,” 

 후작가가 타지아에게 은근한 눈치를 주자, 타지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뒤돌아보고는 바르바라의 존재를 뒤늦게 

알아차리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 언제 와있었니?” 

 타지아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후작가 자제를 향해 웃어주었다. 

 “제… 현재 시중이에요.” 

 타지아가 우물거리며 얼버무렸다. 

 “시중이라고?” 

 바르바라가 눈썹을 치켜 올리자 타지아가 다급하게 실토했다. 

 “사실은, 제 친구인데, 제발 저희 집안에는 말하지 말아주세요.” 

 후작가는 바르바라를 꼼꼼하게 뜯어보았다. 바르바라는 그 시선이 짜증스러웠지만 그가 자신을 제대로 볼 수 있도록 불빛 앞으로 직접 나서는 친절을 보였다. 비꼬는 행동이었지만 후작가 자제는 눈치 채지 못 한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 올리고는 일부러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그러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후작가가 눈을 크게 뜨더니 급작스럽게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라는 그의 행동이 이해되질 않았다. 

 “저분, 저분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후작가가 일부러 타지아를 바라보며 억지로 웃었다. 타지아는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 하고 말해주기 곤란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후작가가 다시 바르바라를 응시했다. 바르바라는 후작가의 양 귓불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을 보았다. 

 “존함이 어떻게 되시죠?” 

 후작가가 물었다. 

 “당신은 이름이 뭔데요?” 

 바르바라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무례를 저질렀네요. 제 이름은 요한입니다.” 

 후작가가 절절매자, 바르바라는 비웃는 표정을 짓고는 쏘아붙였다. 

 “난나예요.” 

 요한이 돌아간 후에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끌고 이층 방으로 올라가 그와 결혼할 생각이냐고 캐물었다. 타지아는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모호하게 대답했지만 싫은 기색이 아니었다. 그녀는 자신을 찾아 직접 써드빌까지 내려온 요한의 태도에 조금 취해있는 것 같았다. 집안이 엮어준 사람이라 별로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좀 더 만나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더니 바르바라에게 요한과 했던 대화를 되짚으면서 그가 자신에게 빠져있는 것인지를 봐달라고 했다. 바르바라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얌전히 타지아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훔치기를 원하지 않았던 남자의 마음이 지금 내 손안에 있네. 

 

 6. 

 요한은 한동안 써드빌에 머물며 종종 체사레 여관을 찾았다. 타지아는 그를 기다리느라 하루 종일 방 안에 처박혀 옷을 골라 입고 화장을 했다. 물론 뒷정리는 바르바라의 몫이었다. 요한이 여관 앞에서 타지아를 부르면 언제나 타지아 대신 바르바라가 먼저 현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타지아가 준비를 제 때 마치는 경우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요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소리 높여 타지아의 이름을 부르는 건 타지아에게 자신이 도착했음을 알리기보다는 현관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바르바라를 보고자 하는 의도에 더 가까웠다. 그는 바르바라를 마주할 때마다 수줍게 시선을 돌렸다가 곧 자신의 권력을 의식하면서 바르바라에게 손을 내밀고는 했다. 바르바라는 그에게 손을 주었고 그럼 요한은 그녀의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위층에서 타지아가 요한을 만나기 위해 법석을 떨고 있을 때, 두 사람은 매일 그런 행위를 반복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기만하는 이 상황이 불편하면서도 즐거웠다. 자신에게 한눈에 반한 남자를 대해본 게 그 때가 처음이기 때문도 있었다. 

 타지아가 밖으로 나오면,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떨어져 걸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와 요한 사이에 서서 해변을 산책하고 광장으로 나갔다. 세 사람 사이의 대화는 대부분 타지아의 입으로부터 나왔다. 타지아는 정말이지 쉴 틈 없이 떠들어댔다. 써드빌의 풍광과 아름다운 해변, 바르바라 여관의 안락함과 이곳 주민들의 식생활 따위를 능숙한 것처럼 늘어놓으면서 조금 으스대기도 했다. 타지아는 자신이 이다지도 써드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던 것은 평민들의 생을 존중해왔던 이전의 삶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저희 집안은 항상 평민의 삶에 귀감이 되어야한다고 강력하게 생각해왔답니다. 아버지는 절 엄격하게 교육하셨어요. 이전에는 그런 일들이 무척 힘들었지만, 지금은 이해한답니다. 써드빌로 도망쳐온 건 다소 성급하고 부끄러운 선택이었지만 저는 이곳에서 결국 페트로프 가문의 모든 걸 이해하게 되었어요.” 

 바르바라는 속으로 헛웃음을 터뜨렸다. 타지아가 꾸며내는 뻔뻔스러운 말들. 그녀가 겪어온 학대와 부조리가 하나의 교육관으로 포장되어 혓바닥을 오르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다. 결혼할 지도 모를 남자의 앞에서 어떻게든 자신의 괴로운 과거를 좋은 것으로, 미래를 위해 투자해온 일종의 대가로 치부하는 것을 가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타지아는 천천히 산책을 하며 눈앞의 요한을 두고 그 나름의 투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복잡한 심경으로 해변을 바라보았다. 요한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리는 대신 눈을 감았다. 

 요한과의 산책이 끝난 그 날 저녁 타지아는 유독 짜증을 많이 부렸다. 신경이 날카로워져서는 바르바라에게 이것저것을 요구하고 자신은 나 몰라라 소파에 주저앉았다. 바르바라는 침착한 얼굴로 타지아가 집어던져 산산조각이 난 접시를 치우다 말고 손을 베였다. 

 “뭐가 그렇게 불안하니?” 

 바르바라는 자신의 손가락에 맺힌 핏방울을 내려다보다 말고 타지아에게 물었다. 

 “난나.” 

 타지아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바르바라는 앞치마에 핏방울을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타지아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훨씬 권위적으로 느껴졌다. 

 “너… 아무 말도 하지 마.” 

 “뭘?” 

 바르바라는 시치미를 뗐다. 

 “요한에게 말이야.” 

 타지아가 신경질을 냈다. 

 “말하지 말라고, 네가 알고 있는 것들 전부.” 

 “너 그 사람이랑 결혼할 마음이 없다며?”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야, 난나. 넌 모르겠지만 이건 생각보다 훨씬 더 복잡한 일이야!” 

 타지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알겠니? 내일부터는 산책도 같이 나오지 마. 내가 알아서 할 수 있어. 우리 둘이 이야기하게 내버려둬.”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무언가를 감지했음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끝까지 시치미를 뗐다. 

 “그렇지만 타지아, 난 네 시종이나 마찬가지 아니니. 시종도 없이 돌아다니다 다치면 안 되잖니?” 

 “그렇게 말한 건 널 보호하기 위해서였어!” 

 타지아가 항변했지만 바르바라는 딴청을 부렸다. 그러자 타지아가 부엌을 향해 돌진하더니 바르바라의 발치에 놓인 접시 파편을 발로 걷어찼다. 바르바라는 하마터면 다시 한 번 접시에 크게 베일 뻔했다. 바르바라가 날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타지아의 얼굴은 분노로 인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바르바라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이딴 식으로 굴면 나도 더는 안 봐줘.” 

 “봐줘? 네가? 나를?” 

 타지아가 딱딱거렸다. 

 “주제를 알아, 난나! 너와 나는 친구이기 이전에 귀족과 평민이야!” 

 타지아가 비명을 질렀다. 

 “귀족과 귀족의 일에 끼어들지 마, 절대로!” 

 그런 후 타지아는 엉엉 울면서 층계참을 쏜살같이 달려 올라가버렸다. 

 바르바라는 홀로 남겨져 부엌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자리에 주저앉아 접시를 마저 치우기 시작했다. 주제를 알아, 라는 말을 몇 번 정도 중얼거리다 그만두었다. 귀족과 평민. 타지아와 바르바라. 그 두 가지는 바르바라가 지금껏 의도적으로 역전시켜온 구도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타지아의 입을 통해 그것이 다시 한 번 반전된 순간, 그리하여 바르바라의 앞에 평민이, 귀족의 앞에 타지아가 대치된 순간,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하나의 균열이 되었다. 타지아는 그런 식으로 들먹여서는 안 되었다. 바르바라를 죄의식 없이 하대하고 잡일을 도맡게 한 그녀의 밑바탕에 깔린 사고를 그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실수했음을 알았지만 이번에는 용서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접시를 치우는 손이 작게 덜덜 떨렸다. 

 그 날 밤, 요한이 체사레 여관에 찾아왔다. 말을 타지 않은 채였고, 소리 높여 타지아를 부르지도 않았다. 바르바라는 불을 끄기 위해 현관으로 나섰다가 요한을 마주치고는 그 자리에 우뚝 섰다. 요한은 바르바라를 바라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틀 뒤에 수도로 돌아가게 되었어요.” 

 그의 목소리가 긴장으로 미약하게 떨렸다. 

 “그전에 만나고 싶어서 찾아왔습니다.” 

 요한은 난나라는 이름도 타지아라는 이름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갈등했다. 입을 벌려 타지아를 부르면, 요한은 타지아와 함께 한밤의 해변을 걷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요한이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요한이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해 이곳에 나타난 것인지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바르바라는 층계참을 한 번 흘끔거리고는 현관의 기둥을 힘주어 붙잡았다. 어찌나 세게 붙잡았던지 손이 하얗게 질릴 지경이었다. 마침내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좋아요, 같이 걷죠.” 

 바르바라는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 했다. 

 

 7. 

 두 사람은 그 날 한밤의 해변을 걷다 말고 모래사장에 두꺼운 요를 깔았다. 그러고는 그 위에 누워 몸을 겹쳤다. 요한이 허겁지겁 바르바라의 옷을 한 꺼풀씩 벗겨냈다. 그러고는 바르바라에게 입을 맞추면서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요한은 바르바라에게 자신과 함께 수도로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자신은 바르바라를 위해 무엇이든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고백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자신이 바르바라를 원해왔음을 알아달라고 애걸했다. 타지아를 원하지 않는다고 자꾸만 중얼거렸다. 그의 고백을 들으며 무성의하게 혀를 섞던 바르바라가 그 이름에 번쩍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몸을 떼어내고는 눈앞의 벌거벗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것인가. 타지아의 이름은 마치 힘주어 내려친 주먹처럼 바르바라의 복부를 내리쳤다. 그 힘에 휩쓸린 바르바라의 영혼이 순간적으로 허공에 튕겨져 올라온 것만 같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약혼자와 몸을 겹치고 있는 자신의 헐벗은 등과 어깨, 미끄러져 내려오는 금발을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 짓눌린 요한의 진한 금발을 볼 수도 있었다. 해변을 따라 길게 이어진 자신과 요한의 발자국을 볼 수도 있었고, 그 발자국을 거슬러 오르면 종국에 도달하게 되는 체사레 여관을 볼 수도 있었다. 이층에서 타지아가 상심에 빠져 잠을 이루지 못 하는 것이 보였다. 그 순간 바르바라는 신의 눈동자를 빌어 해변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모든 상황을 객관적으로 내려다보았고 자신이 저지르고 있는 실수에 대해서도 충분히 파악했다. 그녀에게는 아직 모든 걸 되돌릴 기회가 있었다. 잠시 후, 의식이 다시 육신으로 빨려 들어왔다. 바르바라는 자신을 껴안은 요한의 뜨거운 팔을 느끼며 눈을 떴다. 요한이 바르바라의 머릿결을 쓸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바르바라는 냉담한 표정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물었다. 

 “왜 그 애 이름을 꺼낸 거죠?” 

 “타지아요?” 

 요한은 중얼거리듯 되물었다가 미안한 듯 웃었다. 

 “그녀에게 상처를 주고 싶어서…,” 

 요한이 말끝을 흐렸다. 

 “물론 그녀에게는 닿지 않지만요.” 

 바르바라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쪽이 왜 그 애에게 상처를 준담?” 

 “난 오늘 저녁내도록 당신의 여관 앞에 서있었으니까.” 

 요한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난 타지아의 말에 동의하지 않아요, 난나.” 

 주제를 알아. 

 바르바라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래요? 본인은 다르다 이건가?” 

 “귀족들이 모두 같지는 않아요.” 

 “증명할 수 있는지?” 

 “원하신다면.” 

 그런 후 요한이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바르바라는 내버려두었다. 에아가 마련해준 기회를 왼손에 쥐었다가 오른손으로 옮긴 뒤 파도에 흘려보냈다. 잘못된 순간을 고칠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고는 이성을 놓아주었다. 그러자 모든 게 편해졌다. 바르바라는 요한의 위에 올라타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그의 여유를 빼앗아주었다. 요한이 자신의 안에 들어오게 허락한 다음에 곧장 그에게서 규칙적인 호흡을 훔쳤다. 온몸으로 요한을 붙잡고 취하면서 그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 그 순간의 것들을 모조리 빼앗았다. 두 사람은 한밤의 모래사장을 뒹굴면서 몇 번이고 그 짓을 했다. 요한이 사정하는 순간, 바르바라는 두 눈을 감았다. 오오, 에아이시여! 바르바라가 속으로 에아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정녕 세상의 딸들은 어머니의 거울이 되는 수밖에는 없나이까! 이토록 현명하게 살아왔는데, 결국 선택하게 되는 것들은 어째서 오답이여야만 하는지. 

 그 날 바르바라는 먼저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몸을 누이자마자 지쳐 잠이 들었다. 

 

 8. 

 다음 날 바르바라는 늦은 오후에 겨우 눈을 떴다. 다리 사이가 뻐근했고 온몸이 뜯어질 것처럼 아프고 나른했다. 바르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껴입고는 양동이에 받아둔 물로 세수를 했다. 그러다 여관 앞에서 익숙한 말의 그림자를 보았다. 바르바라는 바깥으로 나갔다. 

 요한은 타지아와 함께 서있었다. 체사레 여관의 그림자 속에 숨은 두 사람은 은밀하고 다정해보였다. 요한이 문지방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르바라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돌리려는데, 갑자기 타지아가 그의 얼굴을 붙잡고는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고는 그대로 입을 맞추었다. 바르바라는 현관에 기대어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요한이 어쩔 줄 모르는 눈으로 타지아와 바르바라를 번갈아 바라보는 꼴을 보았다. 이제는 요한이 선택할 차례였고 바르바라는 기다렸다. 요한은 잠시간 바르바라를 향해 손을 뻗으려는 것처럼 팔을 움찔거렸다. 그러나 곧 눈을 감고는 팔을 그대로 타지아에게 감았다. 바르바라는 입 꼬리를 비틀어 올린 채 두 사람을 내려다보다 말고 집안으로 돌아갔다. 그런 후 곧장 리퍼코트를 입고 다시 바깥으로 나와 두 사람을 지나쳐 기사단으로 출근했다. 뒤돌아보지도 않았고 욕지거리를 하지도 않았다. 발걸음을 옮기는 동안 바르바라의 표정은 차츰 냉랭해졌다가 침착해졌고 곧 아무 일도 없던 사람의 얼굴이 되었다. 

그 날 밤, 타지아는 바르바라에게 자신이 오늘 요한과 섹스를 했다고 통보 식으로 털어놓았다. 

 “내일 돌아갈 거라고 하기에 내가 졸랐어. 시트 좀 갈아줄래?” 

 타지아는 무척 피로해보였고 어딘지 후회스러운 기색이었지만 그 감정을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바르바라는 간밤에 벌였던 자신과 타지아 사이의 냉전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남자를 나란히 번갈아 사용한 후에야 기진맥진한 채로 이 모든 일을 과거에 묻어놓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얼마큼을 눈치 채고 알고 있을까를 재보다가 결국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요한의 어떤 감정이 명백히 바르바라를 향하고 있음을 타지아가 눈치 채기는 했지만, 지난 밤 바르바라가 어떤 실수를 저질렀는지는 모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지아는 이제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해결했다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실상 요한이 수도로 올라간 건 타지아와의 일을 가문에 전달하기 위함이 아니라 요한 자신이 저지르고 만 실수로부터 도망친 것에 가까웠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와 요한이 뒹굴었을 시트를 치우고 쓰레기통을 비웠다. 그러고는 아래층으로 내려와 다시 긴 잠에 빠져들었다. 바르바라가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20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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