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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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르바라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몸이 달라졌다는 것을 느꼈다. 우선 생리가 멈추었고 시시때때로 잠이 쏟아졌으며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미약하게 몸이 묵직해졌다. 빠르게 지쳤고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음식도 예전처럼 먹을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종종 체해서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있어야만 했다. 마리사는 바르바라의 이런 몸 상태를 임신이라 결론지었다. 

 “아, 좋아.” 

 바르바라는 스스로를 비꼬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네.” 

 바르바라의 임신 소식을 들은 타지아는 대체 언제 남자를 만든 거냐고 캐물었다. 제임스, 막심, 얼레이… 바르바라의 입을 통해 언급되었던 남자들의 이름이 타지아의 입을 타고 끊임없이 오르내렸다. 실상 그 남자들은 바르바라와 엮일 일이 전혀 없었다. 기사단 일을 하며 몇 번 정도 스쳐지나간 주민들이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몇 주간 기사단 현장 직을 유지하다가 주변의 권고에 못 이겨 결국 사무실로 이동했다. 모두가 바르바라의 임신을 축복해주었다. 난나를 닮아 똑똑할 거야. 다들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지만 바르바라는 대답 대신 입매를 비틀며 웃었다. 살면서 가장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는데, 도무지 어찌할 수 없는 결과를 맞이하게 되어 바르바라 자신은 수습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바르바라는 매일 아이가 죽는 상상을 하며 서류를 매만지고 글을 썼다. 진심으로 유산을 빌었다. 완성되지 않은 살덩이와 피가 한데 뭉쳐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기를.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감쪽같이 사라지기를. 

 임신은 바르바라의 몸을 자꾸만 변화시켰다. 늘 먹던 오트밀이 역겨워지고, 한 번도 먹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던 과일이 먹고 싶어졌다. 한 번은 느닷없이 고향 숲에서 종종 기근이 들 때 벗겨 먹곤 하던 나무껍질을 씹고 싶어 한밤중에 깨어난 적도 있었다. 마리사는 바르바라를 위해 지붕에 올린 전나무 껍질을 조금 벗겨 뜨거운 물에 그것을 팔팔 끓여주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가 먹고 싶다고 중얼거린 모든 것을 시장에서 구해왔다. 임신 중인 바르바라에게 필요한 게 있다면 무조건 주머니를 열겠다고 말했다. 두 여자는 바르바라가 임신을 끔찍하게 여기던 말던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으니 그녀를 돌보아야겠다는 식으로 모든 일을 진행했다. 바르바라의 아이는 이런 식으로 안전하게 보호되었고 나날이 바르바라의 양분을 섭취하며 몸집을 불려갔다. 바르바라의 몸이 갈수록 가느다래지는데 반해 그녀의 배는 아래로 축 쳐져서 점점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르바라의 배에 멋대로 손을 올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바르바라는 날카로운 표정을 숨기지 않고 저리 꺼지라고 으르렁거렸다. 임신을 하지 않았을 때에는 아무도 그녀를 함부로 만지려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가 바르바라의 배를 한번쯤은 쓰다듬어줄 의무가 있는 것처럼 굴었다. 심지어는 바르바라가 그것을 기쁘게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바르바라의 의사가 바르바라 자신에게 있는 게 아니라 바르바라가 품고 있는 아이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바르바라는 임신을 통해 잃어버린 게 너무 많다고 느꼈다. 자신의 내면을 통제할 수 있는 힘과 외부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의사의 자유를 박탈당했다고 느꼈다. 내부와 외부의 힘을 모조리 아이에게 빼앗겨버린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자 자신은 아무리 애써도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 거라는 강한 예감을 받았다. 

 출산의 순간을 기억한다. 바르바라는 사무실에 앉아있었고, 곁에는 오즈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서류를 넘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다말고 다시 주저앉았다. 다리 사이가 흥건해지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창백해졌지만 당황하지 않았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 거라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그녀는 오즈가 양수가 고인 바닥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기를 바라며 이렇게 말했다. 

 “오즈… 사람을 불러줘.” 

 그런 후 바르바라는 거의 자신의 다리 위까지 내려온 그 둥근 배에 손을 얹었다. 

 “이제 이걸 해결해야겠어.” 

 바르바라는 체사레 여관으로 옮겨졌다. 산통이 시작된 건 그로부터 삼십분 남짓이 흐른 뒤였다. 산파와 마리사가 그녀의 곁을 지켰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감싸고 끙끙거리다 말고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아직까지는 참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불에 달군 꼬챙이가 난도질하는 것만 같은 고통이 그녀의 다리 사이를 타고 기어올랐다. 바르바라는 입을 벌리고 비명을 질렀다. 가시가 달린 무수한 손들이 바르바라의 다리를 억지로 잡아 벌리고는 그녀의 다리를 쑤시고 후벼 파고 찢어발기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욕지거리를 했다. 열이 오르내리면서 정신이 아득해졌다. 바르바라는 아주 이전부터 들어왔던 상스러운 욕과 켈커스 지방에서 내려오는 오래된 저주와 모욕적인 단어를 지껄였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사용해본 적이 없었지만 살면서 무수하게 지나쳐왔던 이 세상의 모든 악독하고 지독한 단어를 입에 담아 제대로 씹지도 않고 뱉어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다리 사이에 날카로운 이빨이 돋아나서 지금 세상 밖으로 나오려고 하는 아이의 머리통을 씹어 부수는 것을 상상했다. 여린 살을 잘게 뜯어서 지난 몇 달 간 감히 바르바라로부터 앗아간 모든 영양분을 빼앗아 섭취하는 것을 상상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이것을 자신의 의지에 따라 처리하고 자유를 되찾는 것을 상상했다. 모든 것을 도무지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 순간, 바르바라의 곁으로 다가온 누군가가 무릎을 꿇고 앉아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난나.” 

 타지아가 말했다. 

 “난나, 그만두면 안 돼. 네가 죽을 거야.” 

 아이가 완전히 바르바라의 몸으로부터 빠져나왔을 때, 바르바라는 타오르던 횃불 위로 쏟아부은 차가운 물세례를 떠올렸다. 다리 사이를 쑤시던 고통이 한순간에 가라앉더니 바르바라를 괴롭히던 그 무수한 검은 손들이 그녀의 몸을 타고 기어올랐다. 그것들은 바르바라의 머리 꼭대기까지 단숨에 기어오르더니 한 덩어리로 뭉쳐 그곳에 고였다. 그러고는 첫 출산의 기억으로 굳어졌다. 

 타지아가 포대기에 감싼 아이를 바르바라에게 내밀었다. 아들이야. 바르바라는 땀과 눈물로 젖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숨을 고르기 위해 애썼다. 호흡이 자꾸만 몇 갈래로 갈라졌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아이를 확인한 바르바라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이게 그거니?” 

 “이름을 지어줘야지.” 

 바르바라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가 지어줘.” 

 “네 아이잖아.” 

 “이름을 고민해본 적 없어. 하지만 넌 고민해봤을 거 아니니.” 

 타지아가 침묵했다. 긍정의 뜻이었다. 품에 안긴 아이가 작게 울음을 터뜨리자 타지아는 포대기를 부드럽게 흔들었다. 

 “그래, 그럼 얘 이름은 아르만도야.” 

 타지아가 대답했다. 

  

 2. 

 아르만도의 육아는 타지아와 마리사가 번갈아 도맡았다. 바르바라는 몸을 회복하는데 집중했다. 아이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곧 아르만도와 자신을 완전히 분리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이를 갖는 것은 배에서 그를 키우는 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니었다.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다는 건 익숙해져 있던 모든 것들이 오로지 아이 하나를 위해 송두리째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몸이 한 번 더 변하는 것을 느끼고는 진저리를 쳤다. 하지만 그녀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일도 있었다. 사실 임신했을 때부터 바르바라의 통제권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르만도는 도둑의 아들답게 바르바라가 지키고자 하는 모든 걸 그녀로부터 앗아갔다. 

 출산이 끝난 뒤, 바르바라는 두 차례에 걸쳐 가슴의 통증을 겪었다. 젖무덤이 딱딱해지더니 누군가 사방에서 잡아 비트는 것 같은 고통이 며칠에 걸쳐 지속되었다. 그러다 젖이 돌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밤이며 낮이며 차가운 물로 적신 수건을 가슴 위에 얹고 가슴에서 흘러내리는 멀건 죽 같은 액체를 닦고 짜내느라 고충을 치렀다. 아르만도는 먹성이 좋은 편에 속했다. 반면 바르바라는 젖이 제대로 돌지 않아서 아르만도를 충분히 배부르게 만들 수가 없었다. 아이를 가지기를 그토록 거부했기 때문인 지도 몰랐다. 바르바라의 몸이 건강하지 않다는 신호일지도 몰랐지만 바르바라는 자신이 제대로 수유를 할 수 없는 이유가 자신이 아이를 위해 몸을 마련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바르바라는 아이에게 제대로 젖을 물릴 수 없는 자신의 상태에 은근히 안심했다. 몸의 통제권이 다시 자신에게 되돌아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끔찍이 예뻐했다. 바르바라가 아르만도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아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사실 아르만도는 바르바라보다는 타지아를 더 닮아있었다. 아르만도는 바르바라보다 더 밝은 금발에 남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눈은 동그랗고 또렷했다. 그건 요한의 얼굴이었다. 아르만도는 바르바라의 특징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사기꾼 집안의 아들이라기엔 너무 유순했다. 아르만도의 얼굴은 귀족가문의 자제에 훨씬 가까웠다. 타지아가 아르만도를 안고 근처를 걷고 있으면, 바르바라는 그늘에 앉아 두 사람을 조용히 지켜보면서 마치 자신의 아이가 타지아의 아이처럼 보인다고 생각하고는 했다. 

 몸이 회복기에 접어들자 바르바라는 선루스 기사단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뒤쳐져 있던 훈련을 조금씩 해나가면서 조심스럽게 몸을 움직였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몸이 예전보다 살이 붙었음을 알 수 있었다. 임신 기간 동안 비쩍 말라있었는데 지금은 뺨부터 어깨, 목덜미와 가슴, 허리와 다리가 부드러운 곡선으로 바뀌어 있었다. 모두가 바르바라에게 건강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 때마다 바르바라는 미지근하게 웃으면서 고맙다고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늦은 시간에 퇴근했고, 아르만도를 아주 가끔씩만 껴안았다. 아이를 품에 안을 때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느낌을 받았다. 바르바라는 아기가 타지아 같다고 생각했다. 사랑하고 싶은지 증오하고 싶은지를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르만도는 안을 때마다 묵직해졌다. 바르바라는 아이의 성장과정에 거의 동참하지 못 했다. 뒤집기를 성공했을 때, 옹알이를 시작했을 때, 첫 걸음마를 뗐을 때, 아르만도의 곁에는 항상 타지아가 있었다. 아르만도는 타지아를 엄마라고 불렀다. 타지아는 아르만도에게 이모라는 단어를 가르쳐주려고 내내 그 옆에 붙어서 발음을 가르쳤다. 얼마 뒤 아르만도는 바르바라를 엄마로, 타지아를 이모로 부르기 시작했지만 종종 두 사람의 호칭을 바꾸어서 부르기도 했고 그런 일이 잦아졌다. 

 아이가 걷기 시작한 이례로 타지아가 이따금 아르만도의 손을 잡고 기사단에 찾아올 때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대련장에 서있다 말고 자신을 지켜보는 두 쌍의 눈동자를 의식하고는 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를 가리키며 엄마, 기사, 명예 따위의 단어를 아르만도에게 이야기했다. 이따금 동료기사들이 두 사람과 바르바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지나갈 때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바르바라는 시선을 피하고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반이 선루스에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에, 타지아는 여느 때처럼 아르만도를 데리고 대련장을 찾았다가 바르바라와 나란히 서있는 이반을 마주쳤다. 바르바라는 그 때 이반과 처음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는데, 입구에 들어서다 말고 우뚝 멈추어 선 타지아의 행동을 보고는 고개를 돌려 그녀와 자신의 아들을 내려다보았다. 타지아는 바르바라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이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불현 듯 무언가를 떠올려놓고는 자신의 기억과 눈앞의 사실을 대조해보는 듯한 멍한 얼굴이었다. 잠시 후, 타지아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오, 에아이시여. 믿을 수가 없네.” 

 타지아가 맑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반!”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끌어안고는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이반이 시선으로 타지아를 훑었다. 타지아의 얼굴, 어깨, 손동작과 습관… 타지아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 머물렀던 시선이 타지아가 재차 “이반!”이라고 외치는 순간 곧장 위로 튕겨져 올라왔다. 

 “아는 사람이야?” 

 바르바라가 타지아에게 묻자, 타지아는 얼굴을 익살스럽게 찡그리면서 농담하지 말라고 들뜬 소리로 웃어댔다. 

 “그 좁은 마을에서 우리 말고 사귀어본 또래친구는 이반 말고 없었잖아.” 

 타지아가 속사포처럼 이전의 기억들, 그러니까 세 사람이 보냈던 짧은 몇 달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너무 오래 전의 일들이었는데도 타지아는 바로 어제 일처럼 이야기했다. 바르바라가 당연히 이반을 기억해야만 하고, 이반을 기억하지 못 하고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기억해내야 한다는 것을 바르바라에게 증명하려고 안달이 난 사람처럼 보였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시선을 느끼고는 고개를 돌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한 쌍의 군청색 눈을 응시하면서 눈을 가늘게 떴다. 바르바라의 기억에서부터 한 소년이 서두르지 않고 걸어 나왔다. 소년은 부츠를 신고 따뜻한 바지를 입고 부드러운 모피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열네 살이었다. 바르바라는 소년이 이반의 얼굴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이반이 바르바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시험 삼아 속삭이듯 물었다. 

 “내가 화가 난 것 같아?” 

 잠시 후, 이반이 대답했다. 

 “아니.” 

 이반은 여전히 바르바라의 표정을 구분할 수 있었다. 

 

 3. 

 타지아의 오지랖과 호들갑은 세 사람을 다시 묶어주는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기사단 잔업을 마친 후에는 항상 본부에서 기다리고 있는 타지아와 아르만도와 함께 써드빌의 거리를 걸었다. 이반은 타지아에게 아르만도가 타지아의 아이냐고 물었다. 바르바라가 대신 대답했다. 

 “내 아이야.” 

 “결혼했어?” 

 “아니.” 

 바르바라가 딱 잘라 대답하고는 덧붙였다. 

 “애 아빠도 없어.” 

 눈치 빠른 이반은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세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종종 장터에 들러서 언젠가 세 사람일 적에 그랬던 것처럼 주전부리를 사먹었다. 사탕과 말린 과일과 익힌 닭다리 살… 이반은 주전부리를 받으면 아이가 먹을 수 있을 만큼 그것을 쪼개거나 잘게 찢어서 아르만도에게 건네주었다. 바르바라는 이반이 아이에게 제법 상냥하다는 사실에 놀랐다. 심지어 이반은 자신보다 아이를 어떻게 대하는지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르만도도 바르바라보다 이반에게 더 친근하게 굴었다. 아르만도는 종종 이반의 손끝을 붙잡고 풍경과 사물을 가리키며 어설프게 단어를 읊어댔는데, 그럴 때면 이반은 아르만도의 말장난을 받아주면서 아이의 발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걸었다. 바르바라는 두 사람의 대화를 말없이 들으며 종종 이반의 옆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처럼 훑어보고는 했다. 바르바라의 시선을 느낄 때마다 이반은 눈동자를 움직여 그녀의 시선을 받아쳤다. 하루는 바르바라가 물었다. 

 “아이를 키운 적 있어?” 

 “그렇게 보여?” 

 “나보다 능숙해 보여.” 

 바르바라가 솔직하게 말했다. 

 “그런가.” 

 이반은 작게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키워본 적은 없어.”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반을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그런 것 같아. 그냥 내가 너무 서투른 것뿐이야.” 

 종종 타지아가 아르만도의 손을 잡고 앞으로 내달리면, 이반과 바르바라는 조금 뒤쳐진 채로 나란하게 걸으면서 시시한 이야기들을 했다. 시시한 이야기들이란 어떤 계산이나 의도를 가지지 않은 채로 평화롭게 이어지는 사연들을 의미했다. 바르바라는 나이를 먹으며 자신을 숨기고 반 발짝 물러난 화법을 구사하기 시작했지만 이반과 대화를 할 때는 종종 그런 것들을 내려놓았다. 이반에게 이미 자신을 보여준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문득 이반이 아주 오래 전의 일들을 얼마나 기억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코너를 돌아 분수대를 지나면서, 바르바라는 이반에게 늑대인간 이야기를 꺼냈다. 

 “욘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어?” 

 “그래, 바랴 네가 들려줬잖아.” 

 “우리가 그 때 했던 게임도 기억해?” 

 “타지아가 종종 졌었지.” 

 “우리가 갔던 목수의 집을 기억해?” 

 “타지아를 귀찮아하는 게 보이던 거기?” 

 “우리가 시장을 돌아다니다 들어갔던 골목은 기억하니?” 

 “그래, 기억하고 있어 바랴.” 

 앞질러가던 타지아가 기분 좋은 비명을 지르며 아르만도를 껴안고 빙빙 돌기 시작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걸음을 좀 더 늦추어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의 범위에서 멀어졌다. 간이상점이 쳐놓은 천막 때문에 두 사람은 반투명한 그늘 아래를 걷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건물 사이로 보이는 푸른 써드해의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네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 

 바람이 불어서 바르바라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흩날렸다. 바람은 따뜻하고 건조했고, 짭조름한 냄새가 배여 있었다. 

 바르바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상하지. 살아오면서 그 때의 생각을 어렴풋하게라도 한 적이 없어. 너를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름을 부르면 거짓말처럼 순간순간이 떠올라….”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려 이반을 바라보았다. 천막의 얇은 천을 투과한 잿빛 햇살이 이반의 얼굴에 드문드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표정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고 그건 이반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바르바라는 드물게 진심을 말하고 싶다고 느꼈다. 

 “이반.” 

 바르바라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만나게 된 사람에게는 어떤 인사를 해야 하는 거니.” 

 이반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그 대답을 오래도록 잘 기억하고 있어야했다고 바르바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그러니까 결국 이반과 자신이 또다시 분리되어 섬과 육지에 남았을 때, 광활한 써드해를 사이에 두고 단절되었을 때, 5일과 5개월의 시간이 갈렸을 때, 각자의 고뇌와 고통으로 그 시간을 흘려보냈을 때, 그러나 마침내 해변에서 서로를 마주했을 때, 그리고 재회의 순간이 막 지나갔을 때 깨달았다. 이반에게 인사를 제대로 해준 적이 없다고. 바르바라는 결국 이반에게 “잘 있어. 이제 가버려.”외에는 제대로 건네 본 인사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우리는 다시 떨어질 것이고 언젠가는 되돌아와 만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순환의 가장 마지막 순간에 이 인사를 하자. 그러고 보면 바르바라가 물어본 것은 결국 작별이 아니라 재회의 인사였다. 

 

 4. 

 바르바라와 이반, 타지아와 아르만도가 함께 시간을 보낸 건 공교롭게도 불과 몇 달 남짓이었다. 세 사람은 아이를 데리고 써드빌의 어디든 다녔다. 예배당, 낮은 언덕과 광장, 장터와 좁은 골목길, 해변과 인적이 드문 곶… 세 사람은 번갈아가며 아르만도의 손을 쥐었다 놓았고 아르만도의 질문에 대답했고 아르만도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었다. 세 사람이 가장 자주 다녔던 곳은 해변이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이었는데, 그 언덕 위에는 몇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어서 면적은 작지만 제법 울창한 그늘이 져있었다. 바르바라는 주로 그곳에 앉아 아이와 놀아주는 타지아, 혹은 아이에게 말을 걸어주는 이반을 지켜보았다. 이따금 타지아가 바르바라의 손을 잡아끌 때도 있었다. 그러면 바르바라는 마지못해 아르만도의 앞에 앉아 손장난을 치고 아이의 질문에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아르만도를 끌어안아주다가 이반과 시선이 마주치면 슬그머니 시선을 돌리고는 머쓱한 표정을 갈무리했다. 아이와 친하지 않은 자신을 거듭 보여주는 게 좋은 일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람이 선선한 날에는 그 언덕에 오르기 전에 간단한 점심거리를 챙겨가기도 했다. 아르만도는 한창 풀밭을 뒹굴다 말고 배가 고프면 그늘로 돌아와 점심을 먹자고 보챘다. 그럼 세 어른들은 아이와 둘러앉아 샌드위치를 베어 먹었다. 아르만도가 바르바라와 관련해 가장 좋아하는 게 바로 그 난나 샌드위치였다. (추후에 난나 샌드위치에는 바르바라가 낚아 올린 생선살이 추가되었다.) 배가 채워지면 아르만도는 나른해져서 나무 그늘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그럼 누군가는 항상 아르만도에게 말을 걸어, 그 애가 심심하지 않도록 흥미를 돋워주었다. 바르바라는 아이에게 해줄 말이 별로 없었지만 괴담만큼은 언제고 이야기해줄 수가 있었다. 두 살 먹은 아이에게 무서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게 잘하는 짓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거나 바르바라는 아이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몇 가지 없었기 때문에 점심이 지나갈 무렵에는 그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면서 음침한 이야기를 조곤조곤 늘어놓고는 했다. 이따금은 이반이 몇 가지 이야기를 보탤 때도 있었다. 에아의 교리와 신화적인 이야기를 늘어놓는 타지아와는 달리, 두 사람은 미신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사람의 마음에서 탄생한 괴물과 유령들의 이야기를 말했다. 세상의 어떤 부분들이 잔혹하고 고통스럽다는 이야기를, 그러나 종국에 그 고통과 공포 속에서 탄생한 존재들이야말로 인간 세상과 맞닿아있다는 이야기를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아르만도는 겁이 많지 않은 아이였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비명을 지르는 건 항상 타지아였다. 대체로 아르만도는 얌전히 앉아서 괴담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가 결국에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이따금 이반이 아르만도를 무릎에 눕혀놓고는 자장가를 불러줄 때도 있었다.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 바르바라는 곁에 앉아서 먼 풍경을 응시하며 그의 노래를 들었다. 고저가 크지 않지만 아이가 잠들기에 충분한 부드러움을 가지고 있는, 어딘가 들어본 적이 있는 것도 같지만 궁극적으로는 기억나지 않는 오래된 자장가를 들었다. 바르바라는 이제 이반의 그런 모습들이 크게 놀랍지 않았다. 아르만도가 이반을 좋아하는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르만도의 금발이 타지아를 닮은 것처럼, 아르만도의 청색 눈동자가 이반을 닮은 것 같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자 아이를 조금은 사랑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의 어떤 면들을 세 사람이 나란히 나누어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귀족의 아이도 아니고, 평민의 아이도 아니고, 그렇다고 욘디처럼 그 어느 것도 아닌 아이라고도 할 수 없는 아르만도. 귀족인 타지아와 평민인 바르바라와 귀족이지만 평민스러운 구석을 가지고 있는 이반이 보살피는 아르만도. 어쩌면 결국 아르만도를 낳은 건 우리 셋이 재회하기 위해 내가 거쳐야만 했던 어떤 절차가 아니었을까? 바르바라는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스스로도 조금 웃었다. 바르바라의 웃음소리를 들은 이반이 아르만도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매만지다말고 고개를 돌려 그녀를 응시했다. 바르바라는 이반과, 이반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아르만도와, 두 사람의 근처에 앉아있는 타지아를 응시하다가 다시 이반에게로 되돌아왔다. 그렇구나, 라고 바르바라는 한 쌍의 군청색 눈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런 삶도 나쁘지 않겠구나. 이 시절이 행복하다는 것을 이번에는 이 시절이 지나기 전에 제대로 알아채고 있구나. 

 열네 살의 이반이 떠난 후에야 그 시절의 세 사람이 제법 즐거운 조합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던 열세 살의 자신이 떠올랐다. 바르바라는 이 시절도 그 시절처럼 지나갈 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분명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타지아의 약혼 문제가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다는 것, 수도로 떠난 요한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 아르만도는 결국 요한의 아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5. 

 아르만도가 사라지기 일주일 전, 세 사람은 아이와 함께 인근에서 열린 작은 축제에 방문했다. 써드빌에서 이따금 벌어지곤 하는 축제였는데 그 날 벌어진 것은 규모가 작은 축에 속했다. 아르만도의 손을 잡고 걷던 타지아가 손가락을 들어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놓인 가판대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나무로 깎은 인형과 천으로 만든 인형 몇 개가 나란히 놓여있었고 가판대 뒤편으로는 군데군데가 젖은 나무 과녁이 걸려있었다. 세 사람은 가판대로 다가갔다. 가판대에 서있던 여자가 짐승의 내장껍질을 둥그렇게 묶은 후 안에 물을 채워 넣어 만든 공 몇 알을 내밀면서 게임을 해보겠냐고 물었다. 

 “과녁에 맞추면 제가 점수를 매겨드린답니다.” 

 타지아가 돈을 지불하고는 아르만도에게 어떤 게 가장 가지고 싶냐고 물었다. 아르만도는 가판대 중간을 가리켰다. 타지아는 가판대에 놓인 천인형의 이름을 읽었다. 

 “상희.” 

 “이름이 이상하네.” 

 바르바라가 말했다. 

 “이름이 이상한데.” 

 이반이 맞장구쳤다. 

 “하지만 아르만도가 가지고 싶대. 그렇지, 아르만도?” 

 타지아가 묻자 아르만도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타지아는 비장하게 물공 일곱 개를 차례로 과녁에 던졌다. 과녁판은 1점부터 5점까지 매길 수 있었는데 바깥으로 아웃되면 점수를 받을 수가 없었다. 타지아는 물공 4개를 아웃시키고 나머지 3개를 간신히 2점에 맞췄다. 인형을 얻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점수였다. 아르만도가 아쉬운 얼굴로 흐으응, 소리를 내자 잠자코 타지아가 던지는 것을 지켜보던 바르바라가 이반을 쳐다보았다. 

 “네가 던져봐.” 

 “내가?” 

 “네가.” 

 바르바라가 심각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나 저 인형 갖고 싶어.” 

 이반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이반은 결국 그 인형을 따냈다. 그는 인형을 바르바라에게 건넸는데, 바르바라는 그 인형을 다시 아르만도에게 건넸다. 아르만도는 기쁨의 비명을 지르면서 상희를 껴안았다. 하지만 활달한 아이들이 곧 그렇게 하듯이 인형을 손안에 넣고 주물거리고 뭉개고 꼬집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미묘한 표정으로 아르만도의 손안에서 구겨지는 상희를 내려다보았다…. 어딘지 흡족한 얼굴이었으므로 이반이 물었다. 

 “아르만도가 인형을 험하게 다루네.” 

 “그러게. 그래도 가만히 내버려두자.” 

 바르바라가 만족스럽게 대답했다. 

 나중에 바르바라는 상희에 먼지가 묻었다는 이유로 그것을 들어 올리고는 몇 대를 쥐어 팼다가 아르만도의 품에 돌려주었다. 악의는 없었다. 악의는 없었다… 기분이 좋았을 뿐. 

 세 사람은 아르만도를 데리고 작은 축제 판을 빙빙 돌았다. 음식을 사먹고 달콤한 과자를 아르만도의 입에 넣어주었다. 때때로 아르만도가 먼 곳을 보고 싶다고 손가락으로 풍경을 짚기도 했다. 그럴 때면 타지아가 아르만도에게 목마를 태워달라고 이반에게 부탁했다. 그럼 이반은 두 여자의 가운데에 서서 아르만도를 들어 올려 제 어깨에 얹어놓았다. 이반이 아르만도에게 목마를 태워주고 있을 때면 두 여자는 항상 그를 사이에 두고 걸으면서 각자의 이야기를 이반에게 떠들어댔는데, 정작 이반은 “저것 좀 봐”라고 소리를 지르는 아르만도에게 가장 많이 대답했다. 그 무렵 아르만도는 삼촌이라는 말을 배워서 이반을 종종 그렇게 불렀다. 

 아르만도가 다시 이반의 어깨에서 내려왔을 때, 타지아가 갑자기 아르만도의 손을 잡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아르만도는 신이 나서 타지아를 따라 뒤뚱뒤뚱 앞으로 내달렸다. 바르바라는 이반과 함께 제자리에 남았는데, 축제 판에 흥이 난 행인무리가 우르르 앞을 지나가는 바람에 잠시 멈추어서야했다. 행인들이 다 빠지고 난 후에야 비로소 앞이 보였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와 아르만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디 간 거지?” 

 이반이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지만 바르바라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근처에 있겠지 뭐.” 

 하지만 타지아와 아르만도는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축제 판을 두 바퀴째 빙빙 돌았다. 처음에 이반과 바르바라는 서로에게 말을 걸었지만 앞서간 두 사람이 보이질 않자 점점 말수가 줄더니 근처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조금 불안해졌기 때문에 금발의 여자와 아이만 보면 눈을 가늘게 뜨고 고개를 홱 돌려 얼굴을 반드시 확인했다. 하지만 매번 그들은 타지아와 아르만도가 아니었다. 

 “먼저 돌아갔을 지도 몰라.” 

 이반이 바르바라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그렇게 말했다. 

 “그럴까.” 

 “보이질 않으니까.” 

 “우리를 두고?” 

 “그럴 수도 있지.” 

 그 때 정수리로 빗방울이 떨어졌다. 두 사람은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빗방울은 점점 더 굵고 가팔라지다가 종국에는 쏟아지기 시작했다. 축제의 거리를 걷던 행인들이 작게 비명을 지르며 천막이 쳐진 가판대 아래로 뿔뿔이 흩어졌다. 소나기였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손을 붙잡고 근처의 천막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이미 절반쯤 젖어서 축축했다. 바르바라와 이반의 머리카락 끄트머리에 고인 물방울이 그들의 움직일 때마다 후드득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르바라는 신경질적으로 젖은 앞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면서 비가 쏟아지는 바깥 풍경을 응시했다. 

 “아르만도가 비를 맞으면 안 되는데.”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감기에 걸릴 거야.” 

 “감기는 네가 걸릴 것 같은데.” 

 이반이 말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조금 떨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정말로 자신이 추운 상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모든 감각이 붕 떠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르만도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바르바라가 성급하게 앞으로 나섰다. 

 “안 되겠어, 찾아봐야겠어.” 

 “바랴, 곧 비가 그칠 거야.” 

 “싫어.” 

 바르바라가 이반을 돌아보고는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어, 이반. 나는 내 아들을 찾아야겠어.” 

 그렇게까지 결연하게 결정을 내린 적이 있던가? 알 수 없었다. 없던 모성이 생겨난 걸까? 혹은 아들을 자신의 소유물로 인정했기 때문에 타지아로 말미암아 사라지게 둘 수는 없다는 뜻이었나? 그 때, 추위로 인해 판단력은 흐려졌고 바르바라는 실제로 창백하게 질려있었지만 머릿속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또렷했다. 그 불가사의한 선명함을 바르바라는 지금도 확신할 수가 없다. 

 바르바라는 빗속을 헤치고 구석구석을 돌아보면서 타지아와 아르만도의 이름을 불렀다. 그 어디에도 두 사람은 없었다. 비는 이반의 말대로 금방 그쳤고 날씨는 빨리 개었다. 바르바라는 바닥 곳곳에 생긴 물웅덩이를 밟으며 뛰어다니다가 마침내 광장에서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했다.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데리고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 앞에는 말을 탄 남자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말의 안장에 달린 익숙한 인장을 보았다. 그건 페트로프 가의 것이었다. 룬넨마을 곳곳에도 그것이 걸려있었다. 바르바라는 뛰던 걸음을 늦추고는 천천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드문드문 말소리가 들렸고 가까워질수록 선명해졌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말소리에 집중했다. 타지아가 잔뜩 꾸며낸 명랑한 어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전 정말 좋아요. 이제라도 일이 잘 해결되어 기뻐요.” 

 “그럼 그렇게 전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아들을 소개하게 될까요?” 

 “그건 확신할 수 없지만 결혼식에는 반드시 참석하게 되겠지요.” 

 “요한에게 안부 전해주세요. 저희 아버지에게도요.” 

 “영주님께 그대로 전달하지요.” 

 말을 탄 남자가 관문 방향으로 떠난 뒤,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한 번 껴안고는 천천히 뒤를 돌았다가 물에 쫄딱 젖은 바르바라를 보고 우뚝 멈추어 섰다. 바르바라는 싸늘한 표정으로 타지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에서부터 뚝뚝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이제 넌 모든 걸 설명해야 할 거야, 이 빌어먹을 여우같은 계집애.” 

 바르바라가 극도로 억누른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6. 

 페트로프 가의 영주는 딸이 도주한 이후 행방을 수색하기 시작했지만 도무지 꼬투리를 잡을 수가 없었다. 타지아가 인적이 드문 새벽에 도주했고 사용인을 단 한 명도 데려가지 않았을 뿐더러 여관을 들린 흔적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페트로프 영주는 타지아와 인연을 유지하던 체사레 집안을 직접 협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체사레 집안 여자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시치미를 뗐다. 사실 사기꾼을 협박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타지아가 사라진 지난 이 년 동안 페트로프 영주가 할 수 있던 것은 요한의 가문과의 친분을 유지하면서 딸아이의 심정을 포장하고 수습하는 일이었다. 요한의 가문은 도트라의 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척을 질 수가 없었다. 그는 타지아의 변덕스러운 마음이 불러올 지도 모를 재앙 앞에서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요한의 가문은 그의 마음을 깊이 헤아려주고는 충분히 시간을 주고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요한이 약혼을 철회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그 무렵의 요한은 이미 바르바라의 흔적을 추적해내서 타지아가 써드빌로 향한 것을 알아냈을 뿐더러 그곳에 머물다 되돌아와서는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가문의 일에 온힘을 다하고 있었다. 그는 바르바라가 임신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 했다. 

 이 년의 시간을 참지 못 하고 백기를 든 건 페트로프 영주 쪽이었다. 그는 상식적으로 잘 나가는 도트라의 가문이 결혼을 앞두고 도망친 타지아를 이토록 오랜 시간을 기다려준다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타지아와 요한 사이에 무언가 있거나, 혹은 요한이 타지아를 버릴 수 없는 도의적인 실수를 저질렀다는 것을 눈치 챘다. 결국 그는 요한을 직접 만나 몇 차례를 심문했고 자신의 딸의 행방을 알아냈다. 그리고는 써드빌로 사람을 보냈다. 페트로프 가의 인장을 단 말이 써드빌 관문을 통과하고 있을 무렵 이반과 바르바라와 타지아는 축제 판을 돌면서 주전부리를 먹고 있었다. 

 그 때, 타지아는 아르만도와 달려 나가다 말고 행인들에 휘말려 바르바라와 이반을 시야에서 놓치고 말았다. 타지아는 아드만도의 손을 잡고 두 사람을 찾아 거리를 쏘다니다가 결국은 먼저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이반의 말이 맞았다. 적어도 그때까지 그녀는 아르만도와 함께 돌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타지아는 체사레 여관 앞을 서성이는 말 한 필을 보았다. 그 위에 탄 남자와, 그 안장에 매달린 자신의 가문의 인장을 보았다. 그 때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타지아는 아르만도를 껴안고 체사레 여관으로 뛰어 들어갔다. 남자가 말에서 내려 여관으로 들어섰다. 그는 타지아를 오랫동안 응시하다가 그녀의 품에 안긴 아르만도를 보고 물었다. 

 “아가씨 아이입니까?” 

 타지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를 경계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남자는 페트로프 가의 지난 이 년 간의 상황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영주의 명을 받고 이곳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영주와 첫째 도련님이 무척이나 진노한 상태임을 설명하면서 상황을 얼른 수습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아이를 보니 마음이 놓인다고도 했다. 자신도 대충의 상황을 알고 있다면서, 요한 가문이 결혼을 기다려준 건 전부 아이 때문이라는 걸 알겠다고 늘어놓았다. 남자의 이야기를 듣던 타지아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졌다. 진노한 영주님과 첫째 도련님의 대목에서부터 그녀는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녀가 겪어온 지난 트라우마가 몸에 습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기억은 써드빌의 아름다운 해변과 바람으로도 떨쳐낼 수 없는 어떤 것이었다. 떨쳐낼 수 없는 기억이라는 게 누구에게나 있다면 타지아의 경우에는 체벌과 하얀 흉터, 다리를 저는 일과 뺨을 후려쳐 맞는 일이 그것이었다. 타지아는 상상 속에서 매를 맞다가 피를 흘리며 실신하는 자신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공포가 그녀를 지배하자 판단력은 흐려졌다. 하지만 정작 타지아의 머릿속만큼은 기묘할 정도로 또렷했다. 자신을 보호하고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 떠올랐다. 그렇게까지 단호하게 결정한 적이 있던가? 알 수 없었다. 난나는 나를 증오하게 될까? 하지만 아들을 소유물로밖에는 그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내가 낫지 않을까? 

 타지아가 대답했다. 

 “네, 아버지께 전해주세요. 요한의 아이를 낳아 길렀다고. 이제 요한이 이 모든 것에 책임을 지라고 전해주세요. 결혼이 성사되었다고.” 

 타지아는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7. 

 바르바라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천천히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야기를 끝낸 타지아는 침착하게 바르바라를 바라보았다. 

 “미안해, 어쩔 수가 없었어.” 

 바르바라는 놀랍도록 차분해졌다.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다가 타지아에게 물었다. 

 “네가 아이를 데려가겠다는 소리야?” 

 “난나 네가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데려가지 않아.” 

 “그럼 네 거짓말은 어쩌고?” 

 “다른 수를 생각해봐야지.” 

 “사실 너 대책 같은 거 없지?” 

 바르바라는 갑자기 신음하면서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됐어, 지금 널 보고 싶지 않아. 생각하게 내버려둬.” 

 그런 후 바르바라는 비틀거리며 층계참으로 올라갔다. 

 그 다음 날 바르바라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서 기사단에 출근할 수가 없었다. 근무를 마친 이반이 저녁에 체사레 여관을 들렀다. 바르바라는 이층 방에 누워 이불을 감고 웅크리고 있었다. 그녀는 시선을 느끼고는 천천히 눈을 떠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반을 응시했다. 이반은 리퍼코트를 입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작게 속삭였다. 

 “안녕, 이반.” 

 “감기에 걸릴 거라고 했잖아.” 

 “그래, 걸려본 건 정말 오랜만이야.” 

 나는 추위에 강했는데 정말 이상하지. 바르바라가 힘없이 중얼거리고는 몇 번 몸을 뒤척였다. 이반이 근처에 의자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는 머리맡에 앉은 이반의 얼굴을 쳐다보는 대신 눈높이에 있는 이반의 다리를 보면서 말했다. 

 “하루 종일 고민을 했어.” 

 바르바라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천천히 털어놓았다. 

 “네 조언을 들어야겠어. 아르만도는 널 좋아하고 너도 아르만도를 좋아하니까.”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간략하게 추려서 이야기했고 드문드문 거짓을 섞었지만 결론적으로는 아르만도의 일생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가난과 추위에 대해 말했다. 계승되는 가풍과 환경이 아이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이야기했다. 부모의 잘못은 얼마나 아이에게 전염되는지, 귀족적인 관습 아래에서 자란 아이들은 불행의 그늘에서 조금 빗겨난 삶을 살아가는지… 어째서 우리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하고 마는 것인지. 앞으로 얼마나 더 잘못된 선택을 하고 후회를 하고 고통스러움을 겪으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지. 결국 이야기는 바르바라의 삶에 대한 것이 되었다. 이반은 잠자코 들었다. 바르바라가 물었다. 아르만도의 삶이 냉소적인 엄마의 아래에서 진행되는 것보다 낙천적인 “이모”의 아래에서 진행되는 것이 좋겠냐고 돌려서 물었다. 아르만도가 자신이 되는 것보다는 타지아의 성격을 계승하는 게 좋지 않을까. 바르바라는 이반이 마치 아르만도의 또다른 보호자인 것처럼 진지하게 그의 의견을 물었다. 마침내 이반이 대답했다. 그 대답은 바르바라로 하여금 타지아의 낙천성과 활달함의 배경이 되는 지점을 상기하도록 도와주었다. 바르바라는 알겠다고 대답하고는 찾아와줘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 그런 후 이제까지 그 대답을 듣기 위하여 필사적으로 정신을 붙잡았던 것처럼, 그리고 이제 그 대답을 들었으니 모든 걸 놓아버리겠다는 것처럼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8. 

 열에서 벗어난 뒤에도 한동안 바르바라는 선택을 미루었다. 타지아에게 아이를 데려가도 좋다거나 아이를 데려가선 안 된다고 이야기하지 못 했다. 그녀는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기사단에 출근했고 이반과 잡일을 처리하고는 여관으로 되돌아와 타지아가 아르만도와 노는 것을 심란하게 바라보았다. 

 타지아는 그 일이 있은 이후로는 예전보다 더 자주 아르만도의 곁에 붙어있었다. 마치 자신이 아르만도의 훌륭한 보호자임을 바르바라에게 거듭해서 보여주고 싶은 것처럼 굴었다. 그녀는 아르만도가 자신을 이모가 아닌 엄마라고 부를 때에도 은근하게 그 상황을 넘겨버렸고, 잘못된 호칭을 정정하는 대신 자신의 입으로 다시 한 번 “그래, 엄마 여기 있어.”라고 이야기했다. 

 바르바라의 갈등은 깊어졌다. 타지아가 암묵적으로 선택을 종용하는 게 느껴졌다. 사실상 답은 정해져있었다. 바르바라가 아르만도의 훌륭한 보호자가 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타지아를 거짓말쟁이로 만들어 켈커스로 돌려보낼 수도 없었다. 바르바라는 페트로프 가문이 타지아를 어떻게 다룰 지를 쉽게 상상할 수 있었고, 그것만큼은 도무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떻게 그런 선택을 입으로 내뱉는단 말인가. 바르바라는 자신에게 확신을 가지지 못 하고 며칠을 더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마침내는 이 모든 상황을 벌인 타지아에게 분노를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실상 그건 바르바라 자신에 대한 분노에 가까웠다. 

 바르바라가 선택을 미룬 지 엿새째 되던 날, 페트로프 가문의 사용인이 다시 써드빌을 방문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그를 불렀다고 생각해 날카롭게 반응했다.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냐고 되물으면서 아직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그러자 타지아가 그녀에게 벌컥 화를 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뻔뻔스러움에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타지아는 그게 그렇게 오래 고민할 일이냐고 되물었다. 바르바라가 얼굴을 찡그린 채 반문하자, 타지아는 기다렸다는 것처럼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타지아는 아르만도가 태어나던 날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이름을 지어준 게 누구인지를 상기하면서 아르만도의 성장과정을 상세하게 읊어댔다. 아르만도가 뒤집기를 성공했을 때, 옹알이를 했을 때, 걸음마를 뗐을 때, 단어를 배우기 시작했을 때를 생생하게 묘사했다. 엄마라는 말을 누구의 얼굴을 보며 했는지, 아르만도가 누굴 더 좋아하는지를 상기시키며 바르바라의 형편없는 육아를 조롱하고 비꼬았다. 타지아는 바르바라가 정말이지 아이를 가져서는 안 되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바르바라가 형편없는 부모고 그건 전부 바르바라가 못돼먹은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제는 자신이 빤히 집안에 되돌아가 당할 수모를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 하는 거라고 말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가 사실 자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고 윽박질렀다. 자신은 바보가 아니고 이제는 결코 바르바라에게 속지 않는다고 소리를 쳤다. 

 바르바라는 이 모든 말을 잠자코 들었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타지아를 쏘아보면서 침착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타지아가 집안을 들먹이기 시작했을 때, 그러고는 마침내 자신이 숨겨온 사랑의 이면에 존재하는 증오를 건드렸을 때는 스스로를 통제하기를 그만두었다. 바르바라는 더 이상 타지아에게 자신의 이면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자신을 내려놓았다. 그건 곧 이성을 잃었다는 소리였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이중성을 꼬집기 시작했다. 냉정한 얼굴로 침착하게, 마치 이 날을 위해서 벼르고 있었다는 것처럼 바르바라는 모든 사실을 적나라하게 고발했다. 타지아 자신이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고 있지만 실상 평민들은 페트로프가의 가식을 전부 알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마을 사람들이 타지아를 지독하게 성가셔했노라고 말했다. 아무도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모두가 너를 속여 왔고 너는 감쪽같이 속아 넘어갔으며 눈치 없는 얼굴로 웃고 다녔노라고 이야기했다. 바르바라는 또, 자신이 속여 온 것에 대해서도 말했다. 타지아의 말대로 자신이 그녀를 증오하고 있었다고 인정하면서, 그건 전부 타지아의 탓이라고 했다. 타지아를 사랑하는 건 너무 힘이 들기 때문에 아무도 그녀를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했다. 심지어는 타지아의 약혼자조차 그녀를 사랑할 수가 없을 거라고 했다. 고귀한 귀족의 가문이었음에도 타지아는 선택받지 못 했고, 타지아가 그토록 속으로 멸시하던 사기꾼 집안의 딸이 그의 마음에 들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상처받을 수 있도록 모든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남편이 될 남자와 자신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를 이야기했다. 아르만도가 누구의 자식인지도 이야기했다. 적어도 아르만도는 요한의 피가 섞여있으니 네가 데려가면 그렇게 남인 것도 아닐 거라고 비웃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통제권을 잃었고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타지아가 말을 잃고는 비틀거렸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타지아에게 아이를 넘겨주는 쪽을 방금 그녀를 모욕하기 위하여 선택해버린 것이다. 

 바르바라의 독설이 끝난 후, 두 사람은 더 이상 서로를 증오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말을 찾을 수가 없어서 입을 다물었다. 시큰거리는 숨소리와 분노에 찬 눈빛이 침묵을 가득 채웠다. 

 한참이 흐른 뒤, 마침내 타지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걸레.” 

 타지아는 그 한 단어를 부들부들 떨면서 내뱉고는 밖으로 나갔다. 

 다음 날 바르바라는 타지아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기사단으로 출근했다가 저녁 이른 시간에 되돌아왔다. 그러다 문득 집안이 텅 비어있는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방으로 올라가 문을 열었다. 방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바르바라는 옷장을 열었다. 드레스와 외투가 전부 사라져있었다. 바르바라는 층계를 뛰어 내려와 아르만도의 방문을 열었다. 아르만도가 없었다. 아르만도의 장난감도, 옷도, 인형도 그곳에 없었다. 방은 텅 비어있었다. 

 

 9. 

 다음 날 바르바라는 출근하지 않고 해변 가를 서성이다가 인적이 드문 절벽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곳은 언젠가 바르바라가 이반과 타지아와 아르만도와 함께 다녀와 본 곳이었다. 경사가 져있고 높이가 제법 높아서 이반이 계속 아르만도를 주시하던 것이 기억났다. 세 사람은 아이와 함께 앉아서 써드빌의 관문이 훤히 보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고 방문객이 나타날지를 두고 내기를 했었다. 그리고 방문객이 나타난다면 그 사람이 여자일지 남자일지, 평민일지 귀족일지를 두고 다시 한 번 내기를 했다. 누가 이겼더라. 아마 이반이 이겼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홀로 바위에 앉아 써드빌의 관문을 바라보면서 숨을 죽였다. 타지아의 마차는 언제 떠났을까? 아르만도는 타지아를 따라가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더 이상 상상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바르바라는 슬픔으로부터 자신을 익숙하게 통제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바르바라는 한참을 그곳에 앉아 생각에 잠겨있었다. 

 등 뒤에서 인기척을 느낀 건 그로부터 또 한참이 흐른 뒤였다. 바르바라는 그게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날카롭게 반응했다. 

 “꺼져.” 

 …. 

 “아니… 아니야. 너지? 그냥 거기 있어줘.”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반은 그곳에 서있었다. 바르바라는 침묵을 유지하면서 써드빌 관문을 쏘아보았다. 해안가 근처의 절벽이었기 때문에 거센 바람이 파도와 함께 끊임없이 몰려왔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금발이 바람에 나부끼면서 자꾸만 바르바라의 뺨을 미약하게 할퀴고 지나갔다. 

 마침내, 아주 오랜 침묵을 뚫고 바르바라가 바람에 날려 사라질 만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애를 사랑했던 것 같아.” 

 “알고 있어.” 

 등 뒤에서 이반이 대답했다. 

 “알고 있어, 바랴.” 

 바르바라는 고개를 숙였다. 다시 침묵이 이어졌다. 바람이 점점 쌀쌀해지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자신을 통제했다. 결코 이반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로 모든 생각과 감정을 갈무리했다. 이반이 서서히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수평선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랴.” 

 이반이 말했다. 

 “돌아가자.” 

 바르바라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응.”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어두워지는 해변 가를 조금 걸었다. 사멸하는 노을 아래에서 바르바라는 이반의 군청색 눈을 바라보며, 사실 아르만도의 두 눈동자는 이반이랑 전혀 닮은 게 아니었다고 생각했다. 왜 그런 시절을 상상한 것일까. 그 날 두 사람은 대화를 많이 나누지 않고 그대로 헤어졌다. 

 바르바라는 그 날 이후로 더 이상 아르만도의 이야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대신 눈에 띄게 말수가 줄어들었고 미묘하게 늘어졌다. 이반은 언제나 그러했듯이 많은 질문을 하지 않았고 대신 바르바라의 곁을 종종 지키면서 이야기를 했다. 어떤 계산이나 의도를 가지지 않은 채로 평화롭게 이어지는 시시한 이야기들을. 

 

 10. 

 둘만 남았다. 언제나 그런 법칙이 적용되는 것일지도 몰랐다. 함께하는 몇 달은 분명 다시는 올 수 없을 좋은 시절로 남지만 종국에는 누군가가 “잘 있어, 이제 가버려.”라고 이야기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처음에 떠난 건 이반이지만 이번에 떠난 건 타지아였다. 그렇다면 다음에 떠나는 건 나일까. 타지아와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상상하기를 그만두었다. 셋의 관계에 더는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이제 남은 건 이반이었고 바르바라는 이반과 함께 직장생활을 하고 검을 대고 식사를 할 것이다. 바르바라는 현실로 돌아오기로 했고 몇 주 간 정처 없이 마음을 비틀거리다가 마침내 정신을 다잡았다. 불행을 다루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모든 일이 벌어진지 한 달이 조금 지났을 무렵에 써드빌에 결혼식이 열렸다. 바르바라와 이반이 종종 편의를 봐주곤 하던 빵가게 장녀의 결혼식이었다. 두 사람은 거기에 기사로서 초대를 받았고 그래서 두 사람 모두 리퍼코트를 입은 채로 그곳에 참석했다. 공교롭게도 그 날은 타지아의 결혼식이기도 했다. 타지아는 도트라에서 드레스를 입고 한손으로 아르만도의 손을 잡고는 예식장에 들어서고 있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의자에 앉는 대신 뒤쪽에 서서 신랑과 신부가 손을 맞잡고 반지를 교환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타지아는 에아의 교리 위에 손을 얹어놓고 요한을 바라보며 긴장한 듯 웃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두 부부가 입을 맞추고 사랑을 맹세하는 걸 보았다. 타지아는 교리 위에 손을 얹은 채로 결혼의 맹세를 했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한 시절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 

 바르바라가 말했다. 

 “좋았던 시절은 언제나 흐르는 물처럼 떠나가지.” 

 이반이 대답했다. 

 타지아는 반지를 낀 채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좋았던 시절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결혼식이 끝나자 써드빌이 늘 그러하듯 춤판이 벌어졌다. 사실상 작은 축제에 가까웠다. 바르바라와 이반은 무대 근처에 서서 사람들이 웃고 떠들고 껴안고 춤을 추는 것을 지켜보았다. 무대의 한가운데에는 신랑과 신부가 손을 잡고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사랑을 맹세한 자들은 행복해보였다. 바르바라는 이반에게 춤을 추자고 말했다. 이반은 대답 대신 무대 위로 올라가 손을 내밀었다. 

 “감회가 새로운데.” 

 이반이 우스갯소리를 했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손을 붙잡았다. 

 “어디 한 번 잘해봐.” 

 “너무 오랜만이라.” 

 이반이 바르바라의 허리를 감았다. 

 이반은 움직이기 시작했지만 잘 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못 추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유년시절의 이반이 이것보다 더 잘 추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이반의 스텝에 엉킨 바르바라의 발이 몇 번 그의 발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반이 짓궂게 웃었다. 

 “그러는 너도 솜씨가 좋지는 않은데, 바랴.” 

 “아, 그래?” 

 바르바라가 이반의 손을 강하게 움켜쥐면서 그를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반이 조금 비틀거리다 말고 중심을 잡았다. 

 “심술부리는 거야?” 

 “그럴 리가.”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반의 스텝을 리드하기 시작했다. 리듬을 흡수하면서 이반의 몸짓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무대에 올라선 인파 틈에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능숙하게 찾아냈다. 바르바라는 주도권을 쥔 것처럼 움직였다. 언젠가 그렇게 했던 것처럼. 

 “보여줄게.” 

 바르바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내가 훔친 것 중에서 가장 우아한 것.” 

 재주껏 다시 돌려받아봐.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반으로부터 훔쳐온 유일한 것을 두른 채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열네 살의 이반이 가지고 있던 것 중에서 바르바라가 판단하기로 가장 귀족적인 것. 훔치고 싶다면 형태가 없는 것을 훔칠 수도 있는 건가요. 언젠가 어린 바르바라가 마미사에게 물었을 때, 마미사는 대답했다. 영리한 도둑이라면 무엇이든 훔칠 수 있단다. 마음과 시간까지도. 

 

 하지만 이반 당신으로부터 훔치지 않는 것도 있다. 이반의 말을 달려 저녁의 설산을 올랐던 것, 눈 내리는 언덕에 올라 세 사람이 볼이 빨갛게 물들 정도로 숨 가쁘게 뛰었던 것, 아르만도의 이름을 세 사람이 번갈아 불렀던 것, 함께 걷던 해변에서 소라껍질을 주웠던 것, 가판대에 인형이 올려져있던 것, 아름다운 풍광 앞에 누운 채 괴담을 이야기하던 것. 바르바라 역시 가지고 있기에 탐내지 않는 기억들. 좋았던 시절은 그곳에 남는다. 언제까지나 그곳에 남는다. 

2018/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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