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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길리언 아든»
1차/old 2019. 10. 22. 15:13

 풋내기 길리언이 목검을 쥐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대련장이 훤히 보이는 위치에 쌓인 나무판자 탑 위에 올라가 앉아있었다. 덩치가 큰 기사들이 진작부터 앞으로 치고 나와 대련장 아래에 촘촘히 모여 서있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근처에 포진하여 대련을 관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햇살이 강렬했고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이번 신입의 첫 검술 대련식은 멋진 하늘과 풍광을 배경으로 기억될 것이다. 바르바라의 대련식 때에는 비가 내렸다. 

 대련장에 올라온 길리언의 상대는 어깨가 길리언의 두 배만했다. 그림자가 길리언을 통째로 덮었다. 길리언은 상대의 덩치를 확인하고는 쥐고 있는 목검에 힘을 주었다. 바르바라는 몸을 숙이고 대련장을 내려다보았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잘 들리지 않았지만 길리언 쪽이 대답하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움직이는 입모양을 볼 수 있었다. 잠시 후, 대련장에 올라왔던 덩치가 내려오고 구경꾼들이 전부 고개를 들었다. 그들전 부가 두리번거리다 말고 바르바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르바라는 허리를 펼치고 꼿꼿한 자세로 앉아 능청을 떨었다. 

 “무슨 일이기에 그렇게들 보시나 몰라….” 

 “난나, 내려와.” 

 덩치가 말했다. 

 “네 땅에서 온 녀석이야.” 

 길리언이 켈커스 출신이라는 소리였다. 

 바르바라는 상자에서 뛰어내린 후에 느긋하게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검을 잡으면서 생각했다. 그 추운 땅을 떠나온 지 이제는 거의… 10년도 넘었다. 너무 오래 전의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켈커스는 그녀의 땅이라고 불린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목검 날에 자신의 목검 날을 대면서 고개를 기울였다. 길리언은 긴장된 표정으로 바르바라를 훑어보았다. 바르바라는 자세를 고치지 않고 서서 길리언이 자신을 충분히 파악하고 평가를 내릴 수 있도록 기다렸다. 길리언은 바르바라를 오래 쳐다보지 않았다. 곧이어 검을 고쳐 잡더니 인사했을 뿐이었다. 

 “잘 부탁드려요.” 

 “그래, 신입.” 

 바르바라는 목검을 시험 삼아 흔들면서 뒤로 물러났다. 발뒤꿈치에 걸리는 허공이 느껴졌다. 바르바라에게는 물러날 공간이 얼마 없었다. 반면 길리언에게는 대련장의 3분의 2정도 되는 공간이 있었다. 처음 올라올 때부터 자리를 잘못 잡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애초부터 진지하게 할 생각도 없었다. 바르바라가 길리언에게 패배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길리언이 검을 휘두르며 앞으로 들어왔다. 지나치게 정직하고 무거운 움직임이었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숙여 검날을 피했다. 그러고는 옆으로 발을 쭉 뻗어서 길리언의 사정거리로부터 벗어났다. 길리언은 잠시 주춤거리다가 다시 바르바라의 방향으로 검을 찌르고 들어왔다. 둔중한 공격이었지만 허술했다. 바르바라는 짧게 뒤로 스텝을 밟았다가 다시 옆으로 이동했다. 이따금 길리언이 목덜미 쪽을 노릴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바르바라는 발을 굴러 점프를 하거나 허리를 숙여 공격에서 벗어났다. 기사의 품위가 느껴지기보다는 검을 오래 잡은 자만이 할 수 있는 유연한 꼼수 같은 것이었다.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대련장을 반 바퀴 돌았다. 바르바라는 지나치게 건성으로 하고 있었고 길리언은 지나치게 열심히 하고 있었다. 바르바라의 태도 때문에 길리언의 몸짓이 더욱 도드라졌다. 구경꾼들이 와와 박수를 치며 바르바라와 길리언을 번갈아 부추겼다. 바르바라는 검을 쥔 채 고개를 쳐들었다가 천천히 팔을 내리고는 길리언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디서 왔어?” 

 “제 고향에 대해 물으시는 건가요?” 

 “그래, 네 땅에 대해서.” 

 길리언은 숨을 고르기 위해 잠시 헐떡였다. 

 “킬케니에서 왔어요.” 

 “어딘지 알겠어.”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그곳의 언덕을 알고 있어.” 

 그런 후 처음으로 바르바라가 덤벼들었다. 

 길리언이 넘어졌을 때, 바르바라는 대련장을 내려가려고 진작부터 방향을 틀고 있었다. 하지만 길리언이 고개를 번쩍 쳐드는 것을 보고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바르바라는 길리언 쪽으로 되돌아와서 손을 내밀었다. 길리언은 바르바라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고마워요.” 

 “바르바라 체사레야.” 

 “길리언 아든이에요.” 

 “알고 있어.” 

 바르바라는 모든 신입의 이름을 기억한다. 

 “다들 날 난나라고 부르지만 너는 좋을 대로 하렴.” 

 “애칭인가요?” 

 바르바라는 고민하다가 비웃는 것 같은 웃음소리를 냈다. 

 “응.” 

 “그렇군요.” 

 길리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바르바라는 뒤늦게 길리언이 켈커스 땅에서 온 사람이라는 걸 상기했다. 길리언이라면 난나의 뜻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련장을 벗어나는데 길리언이 계단을 뛰어내려오더니 바르바라의 등 뒤에서 물었다. 

 “아까 그거 어떻게 했어요?” 

 길리언은 바르바라의 마지막 공격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이었다. 혹은 대련장을 빙빙 맴돌며 시간을 벌었던 여유로운 꼼수에 대해 묻고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려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길리언을 응시하다 말고 다시 고개를 돌려 앞서서 걸어 나갔다. 길리언은 빠른 걸음으로 그녀를 쫓아왔다. 

 “네?” 

 바르바라는 으음, 하고 고개를 젖히고 말끝을 흐리다 대답했다. 

 “그냥… 감?” 

 “감이요?” 

 “너도 언젠가는 하게 될 거야.” 

 정식 검술을 배우지 않은 채로 오래 검을 잡고 있던 평민들은 보통 바르바라와 같은 꼼수를 쓰고는 했다. 바르바라는 많은 꼼수를 쓸 수 있었다. 써드빌에 10년 이상 머물면서 체득하고 쌓아올린 관록이었다. 바르바라 정도의 짬을 먹게 되면 분명 길리언도 바르바라와 같은 검을 휘두를 것이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길리언은 바르바라의 대답에 잠시 말이 없다가 다시 그녀를 쫓아왔다. 그러더니 검술을 가르쳐달라고 말했다. 

 “대련 상대가 되어주세요.” 

 바르바라는 정말 귀찮은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고 생각했다. 

 

 켈커스 출신이라고 하면 어김없이 돌아보게 된다. 바르바라의 습성 같은 것이었는데, 스스로 오래 전에 그 땅을 떠나왔음에도 그곳에 남기고 온 것들이 많기 때문일 것이다. 향수병과는 조금 달랐다. 애틋하기보다 회한이 흘러넘쳤다. 돌아갈 마음은 없었지만 그곳에서 비롯된 흔적을 지속적으로 마주치고 자신의 안에 깃든 무엇인가를 상기시키고 싶었다. 써드빌은 최남단이고 켈커스는 최북단에 위치한 곳이었으므로 바르바라는 기사단에 입단하고부터는 켈커스의 조각들을 자주 마주칠 일이 없었다. 길리언은 그녀가 오랜만에 마주친 조각이었다. 추운 바람과 설산, 쌓여있는 눈의 반짝임에 길들여진 소년이 이곳까지 내려온 이유가 무엇일지가 궁금했다. 길리언이 켈커스 출신이 아니었더라면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을 가르쳐보기로 결심했다. 

 검술을 제대로 가르쳐주겠다고 마음먹은 건 이번이 두 번째다. 바르바라는 헤일리 이후로는 누군가를 책임지고 검술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누군가 부탁하면 무조건 귀족 출신의 기사들에게 떠넘겼다. 헤일리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제자가 될 줄 알았는데. 하지만 길리언을 가까이 두고 보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길리언을 가르치는 일이 헤일리보다 힘들지도 않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헤일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스스로 공부해 귀족적인 검술을 터득했던 날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때는 재미있던 만큼 힘에 부치는 일들이 많았다. 스스로에게 노력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번에 길리언에게 그런 검술을 가르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바르바라가 길리언에게 가르쳐줄 것은 꼼수였다. 흔히 야매검술이라고 불리는 것 말이다. 촘촘하게 쌓아올린 관록을 양피지처럼 펼쳐놓고 하나하나 읊어가면서 자신이 몸으로 부딪히며 배워온 것들을 알려줄 생각이었다. 

 길리언은 자주 넘어졌다. 자주 목검을 놓쳤다. 자주 비틀거렸다. 

 길리언이 배우는데 꿈 뜬 학생이라는 건 얼마 가지 않아 밝혀졌다. 진도가 너무 느렸다. 길리언은 걸핏하면 실수를 남발하거나 빈틈을 보였다. 그러지 않으려고 어느 정도 노력은 했지만, 바르바라는 결국 우수했던 자신의 첫 제자를 떠올릴 수밖에는 없었다. 헤일리 때에는 이런 고생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헤일리는 한 번 알려주면 유심히 살펴보고 덤벼들어서 기어코 그 날 모든 것을 배워갔다. 길리언과는 달랐다. 헤일리는 영특했고 필요할 때에는 영악했지만 길리언은 첫날 보여준 그대로에서 조금씩 나아갔을 뿐 다른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순진하거나 투명하거나 아둔했다. 하지만 근성이 있었다. 헤일리보다 칭찬해주고 싶은 길리언의 장점은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바르바라는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길리언의 올곧은 눈, 빛나는 얼굴, 포기하지 않고 일어서는 두 다리를 훑어보고는 다시 검을 잡았다. 바르바라. 길리언은 항상 그녀를 이름으로 불렀다.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그런 후에 덤벼들었다가 다시 넘어지기 일쑤였다. 바르바라는 매번 길리언에게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워주면서 무릎을 흘끔거렸다. 상처가 늘어나는데 왜 실력은 이렇게 더디게 나아갈까? 바르바라는 다시 헤일리 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조금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똑같이 브루넷인데다가 녹안이었다. 얼굴에 나란한 점도 가지고 있었다. 바르바라의 첫 번째 두 번째 제자들은 그런 식으로 조금씩 외모부터 풋내기였다는 지점까지 닮아있었는데 정작 내적인 부분에서만큼은 공유되는 공통지점이 없었다. 헤일리에게는 정석적인 귀족의 검술을 가르쳐놓고 길리언에게는 꼼수를 가르치고 있는 현 상황이 암시적으로 느껴졌다. 어쩌면 처음부터 길리언은 자신의 제자가 될 흐름을 타고났던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바라가 가지고 있는 두 가지의 검술을 두 사람에게 각각 나누어 가르쳤으니, 길리언은 정말로 바르바라의 마지막 제자가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실제 그랬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을 반 년 정도 가르쳤다. 길리언의 더딘 솜씨가 그의 검에 녹아들 때까지 참을성을 가지고 인내했다. 하지만 가르친 지 세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에는 진지하게 이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 때 한 말… 정정할게.” 

 “어떤 말이요?” 

 “너도 언젠가는 하게 될 거라는 말.” 

 바르바라는 목검을 내리고는 다른 한손으로 길리언을 일으켰다. 바닥에 엎어져있던 길리언이 작게 신음하면서 두 다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이마를 타고 투명한 땀방울이 후드득 떨어져 바르바라의 손등에 튀었다. 바르바라는 시선으로 손등 위에 맺힌 길리언의 근성을 내려다보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너는 이런 방식이 무리일 지도 모르겠구나.” 

 길리언은 별로 놀라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어느 정도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길리언은 침착한 눈으로 바르바라를 응시하면서 말했다. 

 “그럼 그건 바르바라의 방식이었겠네요.” 

 바르바라의 방식이란 무엇일까. 유연하거나 재빠른 것. 약삭빠르고 영악한 것. 크게 힘들이지 않고 여유를 부리면서 상대의 빈틈을 찌르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라면 바르바라의 방식이 아니라 켈커스의 방식이라도 해도 좋았다. 척박한 땅에서 온 자들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일찌감치 상기하고 있었다. 눈 아래에는 바스러진 풀과 나무의 뿌리가 단단히 움켜쥔 대지가 숨어있고, 어두운 숲속에는 굶주린 들짐승들이 어슬렁거렸다. 사기꾼들이 돌아다니고 사냥꾼들이 날고기를 씹어댔으므로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몇 세대에 걸쳐 내려온 으스스한 괴담을 들려주며 바깥의 위험을 상기했다. 그런데 길리언이라면 그 모든 걸 알고 있었을 텐데도, 왜 하필 켈커스의 방식이 아닌 바르바라의 방식인가. 대련장에서 내려온 이후에도 바르바라는 그 점을 몇 번이고 곱씹어보았다. 

 

 얼마 뒤에 대련장으로 올라온 바르바라는 길리언에게 무거운 목검을 던지고는 본인이 가벼운 검을 쥐었다. 그전까지는 길리언에게 더 가벼운 검을 주었다. 길리언의 몸동작이 굼떴기 때문이다. 검이라도 가벼우면 조금 달라질까 싶어 선택한 사항인데 그날만큼은 무거운 검을 쥐게 하고 길리언에게 직접 감상을 물었다. 

 “어때?” 

 길리언은 시험 삼아 무거운 목검을 몇 번 휘둘러보더니 별 다른 차이를 느끼지 못 하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손에 감기는 느낌이 조금 다르지만 비슷해요.” 

 “그러니.” 

 그런 후 두 사람은 대련을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이 공격을 하도록 내버려두면서 가볍게 움직였다. 길리언을 대련장 중앙으로 유도하면서 뒤로 물러났다가 옆으로 빠지기를 반복했다. 길리언은 조금 혼란스러워했다. 그전까지는 바르바라가 찌르고 들어오면 길리언이 지금의 바르바라가 하는 것처럼 스텝을 밟으며 유연하게 도망치는 것을 훈련 중이었는데 오늘의 대련에서는 모든 게 반대였던 것이다. 마치 두 사람의 대련 첫날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에 바르바라가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냐고 그에게 말을 걸었다. 네? 길리언이 다소 얼빠진 얼굴로 되묻는데, 대뜸 바르바라가 맥락도 없이 내뱉었다. 

 “내 방식을 써보고 싶다고 했지?” 

 다음 순간, 바르바라의 눈이 가늘게 뜨이더니 검이 길리언의 옆구리 사이를 찌르고 들어왔다. 길리언이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재빨리 물러났다. 

 “지금 일부러…,” 

 빗나가게 한 건가요? 바르바라는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옆구리를 노리고 들어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된 각도였다. 길리언이 펄쩍 뛰었다. 놀랍도록 가볍고 재빠른 스탭이었다. 바르바라가 첫날 보여주었던 바로 그 스탭. 길리언은 주춤거리며 물러나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자신이 해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제가 방금…,” 

 그러나 다음 순간 바르바라가 반 바퀴를 돌며 검을 쳐들었다. 강한 스윙으로 공격을 가하려는 폼을 취했다. 길리언이 얼결에 자신의 무거운 검을 들어 얼굴을 가로막았다. 목검이 정통으로 부딪히며 둔탁한 소리가 났다. 길리언은 그 상태에서 바르바라의 검을 밀어냈다. 정통으로 받아친 공격이 그 힘에 떠밀려 뒤로 후퇴했다. 그런 방어 형태는 바르바라가 가르쳐준 적 없는 방식이었다. 빈틈이 많았으나 솔직하고 올곧은 몸짓이었다. 1:1에서 이런 방어에 튕겨져 나온다면…. 생각이 거기서 끊어졌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손이 허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 대련장을 확인했더니 바닥에 자신의 검이 떨어져있었다. 

 길리언이 헐떡였다. 

 “제가… 이긴 건가요?” 

 바르바라는 숨을 고르느라 잠시 뜸을 들였다. 

 “그래.” 

 길리언의 얼굴을 타고 기쁨과 성취감이 흘러넘쳤다. 바르바라는 다시 고개를 돌리다 말고 그 얼굴과 정통으로 마주했다. 속수무책으로 그 감정에 압도당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그녀는 동요하지 않기 위해서 순간적으로 길리언과 거리를 두었다. 그런 후 길리언 역시 자신의 제자라는 것을, 그리하여 제자를 들이고 가르칠 때마다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이러한 순간들을 스스로의 방식으로 만끽했다. 길리언에게 잘해왔노라고 격려해야했다. 그가 자랑스럽다고 말해야했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그렇게 하는 대신 길리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정수리를 향해 손을 올렸다가, 천천히 거두고는 생각을 고쳐먹었다. 그를 애송이로 취급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바르바라는 손바닥을 넓게 펼쳐 길리언의 허리를 툭 하고 가볍게 쳤다. 길리언이 바르바라를 내려다보았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켈커스 땅에서나 볼 수 있는 녹색을 떠올렸다. 진한 색깔의 키가 크고 뾰쪽하게 솟아난 풀들을. 그런 풀들이 부드러운 눈에 덮여서 자취를 감춘다. 두 사람은 그런 땅에서 왔다. 그러나 길리언은 날카로운 것을 눈 속에 숨기지는 않는다.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대로 보여준다. 많은 것을 부드러움 속에 숨기고 있는 바르바라와는 다르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을 보면서 여명이 밝아오는 전나무 숲을 떠올렸다. 빛이 터 오르고 모든 것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길리언의 방식은 언젠가 바르바라가 숨기고 있는 것을 파헤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바르바라가 공들여 쌓아놓고 결단코 녹이지 않을 거라 마음먹은 만년설을 기어코 녹이고는 그 속의 날카로운 풀을 들춰내어 밟고 걸어갈 것이라는 예감이. 바르바라는 자신의 검이 멀리 날아가 버린 것을 상기했다. 길리언이 길리언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대응했을 때, 자신은 결국 패배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바라가 물었다. 

 “난나의 뜻을 알고 있어?” 

 길리언은 바르바라를 똑바로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네, 알고 있어요.” 

 바르바라는 길리언으로부터 떨어졌다. 그러고는 검을 줍기 위해 대련장 가장자리로 걸어갔다. 길리언이 그녀를 기다렸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없이 숙소까지 함께 걸었다가 짧은 인사를 마치고 헤어졌다. 

 

 길리언이 바르바라에게만 검술 지도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다른 사람과도 대련하면서 이런 저런 충고를 듣고 연거푸 폼을 고쳤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이 자신과 대련하는 매순간 자신이 알려주지 않은 방식을 시도해보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의 방식을 흉내 내려는 길리언을 제지하고 좌절시키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길리언은 그런 것들에 서툴렀다. 바르바라가 길리언에게 흔들리는 순간은 언제나 길리언이 그녀를 당혹스럽게 만들 때 찾아왔다. 길리언이 길리언의 방식을 자신도 모르게 발휘하는 순간이 그 때였다. 올곧게 치고 들어오거나 올곧게 막아서는 방식에는 꼼수가 통하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이때까지 발휘해온 방식이 켈커스의 방식이 아니라 정말 바르바라 자신의 방식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바르바라가 길리언의 방식에 속수무책으로 검을 놓치게 된다면 그녀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 궁극적으로 켈커스의 방식은 아니지 않은가. 그렇다면 바르바라가 길리언에게 알려주려고 한 것은 바르바라의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방식을 찾는 바로 그 과정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길리언은 처음부터 그런 것을 원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그건 바르바라의 방식이었겠네요’라는 말에는 바로 그런 뜻이 함의되어 있었다. 바르바라가 길리언에게 평소보다 무거운 검을 쥐어준 것도 결국은 길리언의 방식을 찾아보기 위함이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언젠가는 하게 될 거야. 바르바라는 언젠가의 말을 마음속으로 이렇게 정정했다. 너도 언젠가는 찾게 될 거야. 

 

길리언이 그 뒤로 바르바라를 이긴 적은 없었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방식으로 인해 당황한 순간에도 그의 검을 능숙하게 쳐내고는 했다. 경험과 시간의 차이였다.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단순히 승리하고 패배하는 일보다는 검술을 점검하는 데에 의의를 두었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에게 더디지만 꾸준히 실력을 붙이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켰다.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요, 계속 할게요. 그런 후 두 사람은 켈커스 지방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거나 설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이따금 켈커스 지방에서 내려온 괴담 이야기를 하기도 했지만 결국 하게 되는 것들은 그들이 두고 온 친구의 이야기였다. 길리언에게는 루스라는 친구가 있었다. 길리언이 그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자신 역시 사랑하는 친구가 있노라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드문드문 바람이 부는 날에는 길리언과 성곽에 걸터앉아 바다를 보면서, 타지아라는 이름을 몇 번 중얼거렸다. 길리언은 그 때마다 바르바라를 바라보았고, 바르바라는 뒤를 돌아 돌로 쌓은 담장을 흘끔거렸다. 길리언에게 어떤 것들을 들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런 감정은 그녀가 살면서 몇 번 겪어보지 못 한 것이었다. ‘들키고 싶지 않다’는 말에는 상대가 자신을 파악하게 될 거라는 예감이 숨어있었다. 이미 상대에게 함락당할 것을 염두 해놓고는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이다. 길리언이 자신을 제대로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면…, 바르바라는 그런 식으로 부정했다. 타지아를 입에 올릴 때마다 자신이 가느다랗고 날카로워지는 것을 느꼈다. 마음속을 덮고 있는 부드러운 눈이 녹아내리고 그것이 감추고 있던 예리한 풀들이 드러나는 것을 느꼈다. 지금 길리언을 쳐다봐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그녀는 항상 고개를 돌려 담장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 틈에 대해서 생각했다. 길리언과 바르바라가 얼마나 다른지를. 둘 사이에 어떤 돌을 잘 손질해 끼워 맞춘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발생할 틈이 얼마나 많은지를. 저 담장이 꼭 길리언과 자신 같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이야기를 했다. 길리언은 매번 고개를 끄덕이며 바다를 보았다. 파도치는 바다와 하얀 거품이 일어나는 물결 같은 것들을. 그들이 두고 온 것들과는 너무나도 다른 그것들을. 

 

 길리언에게 화를 냈을 때, 바르바라는 침착하게 대꾸하는 길리언보다도 길리언에게 화를 내고 있는 자신에게 놀랐다. 그런 식으로 감정을 내보이거나 동요한 적이 없었는데. 길리언 같은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멈출 수 없었고 독사처럼 혓바닥을 놀려서 길리언이 사랑하는 모든 것들을 격렬하게 찔러댔다. 마침내 길리언이 단호하게 말을 끊어냈다.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돼요. 길리언이 똑바로 바르바라를 쳐다보았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바르바라는 천천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돌렸다. 사과 같은 걸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음을 온몸으로 느꼈다. 길리언이 분노했다는 사실 역시 직면했다. 하지만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을까? 

 그 날 혼자 해변을 따라 기사단으로 돌아가는 길에, 바르바라는 손을 뻗어서 담장을 만졌다. 손가락으로 흐르는 돌의 결과 울퉁불퉁한 모래를 느꼈다. 이따금 움푹 파인 홈이 느껴질 때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멈추어 서서 그 홈에 손가락을 넣어보았다. 바위의 안으로 흐르는 바람들. 돌과 돌 사이의 틈이 길리언과 자신의 거리감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바르바라 자신의 틈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길리언은 이미 자신의 눈 더미를 녹이고 날카로운 풀 한 포기를 밟고 있던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그게 언제였지. 언제 그런 걸 내가 허락해준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며 바르바라는 화가 난 길리언과 자꾸만 멀어지며 걸어 나갔다.

2018/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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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헤일리 레무어»
1차/old 2019. 10. 22. 15:12

 헤일리 레무어가 열일곱 살일 때 바르바라는 스물다섯이었다. 헤일리가 입단식을 마치고 막 선써드에 입단했을 때 바르바라는 입단 6년차 고참이었다. 이제 막 어린 티를 벗기 시작한 소년의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바르바라는 참새 따위를 생각했다. 작은 갈색 새가 막 알을 깨고 나와 젖은 깃털을 말릴 시기 같은 것이 소년의 시간을 관통하며 느린 구름처럼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다. 

 오즈는 그런 애송이를 바르바라에게 떠맡겼다. 입단식을 갓 마친 따끈따끈한 신참이라고 설명하면서 기본적인 검술을 바르바라가 가르쳐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오즈는 또 바르바라가 기사단에 (심지어는 자신보다)오래 몸담고 있던 몸이니 정식으로 검술 수업을 받은 귀족들보다는 못 할지 몰라도 누군가를 가르칠 능력 정도는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능청을 부렸다. 바르바라는 오즈에게 그가 귀족인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안 그랬으면 이렇게 귀찮은 일을 떠맡겨버린 건에 대한 피의 복수를 면치 못 했을 거라고 대꾸하려다 그만두었다. 어차피 오즈는 바르바라가 피의 복수로 응징해도 그 피를 와인 잔에 받아 마실 위인이지 자신의 불찰에 용서를 구할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헤일리는 일찌감치 오즈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대련 장에 서서 바르바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이번 해 입단식에는 참석하지 않았기에 헤일리를 가까이서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참새의 이미지를 떠올린 것도 그때였다. 헤일리가 먼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안녕, 레무어.” 바르바라는 이미 오즈로부터 그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난 바르바라 체사레야.” 

 “네, 알고 있어요.” 

 “다들 난나라고 부르지만 호칭은 편할 대로 하렴.” 

 바르바라는 목검을 주워서 몇 번 들어보다가 내려놓고는 그 옆에 놓인 좀 더 무거운 목검을 집어 들어 헤일리에게 건넸다. 그러고는 자신은 좀 더 가벼운 목검을 들었다. 

 “검 다룰 줄 아니?” 바르바라는 헤일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판단했다. 

 “여기 들어올 정도면 조금은 하겠지.” 

 헤일리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검을 고쳐들었다. 바르바라는 헤일리의 검잡는 폼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어깨가 올라갔고 손목이 비뚜름했지만 나쁘지 않았다. 감으로 취한 폼이라도 이 정도면 합격점이다. 선루스에는 오합지졸이 많았고 바르바라는 이보다 더 나쁜 폼도 많이 보았다. 바르바라의 시선이 헤일리의 손등에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휘둘러보렴.” 

 그런 후 바르바라가 선공했다. 

 의외로 헤일리는 검을 다룰 줄 몰랐다. 바르바라는 간단히 쓰러진 헤일리의 앞으로 목검을 겨누면서 평화롭게 호흡했다. 폼이 괜찮아서 잘 해낼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모양이다. 헤일리는 초짜였고 바르바라를 올려다보면서 미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손을 내밀었다. 

 “오즈가 널 가르치라고 했으니 도와줄게. 나한테 배워.” 

 헤일리는 바르바라의 손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가 붙잡고 일어났다. 그러나 잡은 손에 힘을 주거나 바르바라의 팔을 끌어당겨 그 반동으로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헤일리는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일어났다. 손을 잡은 건 단지 바르바라가 손을 내밀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헤일리는 일어서자마자 바르바라의 손을 놓고는 떨어진 목검을 주웠다. 

 “그러기 위해서 왔어요. 잘 부탁드립니다, 체사레 경.” 

 헤일리는 자신의 모든 일을 마친 후에야 비로소 그렇게 대답했다.

 초짜지만 오합지졸은 아니구나, 라고 바르바라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기사로 근무하면서 바르바라는 많은 사람에게 자질구레한 것들을 가르쳤다. 열아홉에 입단해서 스물다섯이 되도록 스스로 터득한 것들이었다. 바르바라는 써드빌의 미로 같은 지름길을 알았고, 뒷골목의 소문들과 써드빌의 괜찮은 식당들과 잡상인들의 바가지 수법을 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한밤중에 새 시트가 필요할 땐 숙소의 어디로 찾아가야만 하는지, 단장의 말장난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요령 좋게 땡땡이를 부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검술을 제대로 가르쳐본 적은 없었다. 귀족출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검술을 입단 전에 독학했고(그나마도 첫 입단식에선 고배를 마셨다), 입단 초기에는 그 어설픈 검술로 절절맸다. 지금에 와서는 요령껏 검을 부릴 수 있게 되었지만 처음부터 야매로 배운 것이었으므로 누군가를 가르칠 만한 것은 못 된다고 생각해왔다. 그런데 오즈 그 뻔뻔한 자식이 이 사단을 내놓은 것이다. 

 대충하면 그만이지. 바르바라는 느슨하게 생각했다. 몇 번 휘두르는 폼을 고쳐주고는 나 몰라라 떠나도 괜찮지 않을까. 써드빌에선 엄격한 일들이 잘 발생하지 않았다. 제대로 배우지 않은 검술도 이곳에서는 빛을 발하고는 한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바르바라 역시 거쳐 온 역사였다. 헤일리에게 그런 역사를 물려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다음 날에도 헤일리는 제시간에 대련장에 서서 바르바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빳빳한 옷을 가지런하게 차려입고 반듯하게 서있었다. 모난 구석이 없었고 느슨하게 풀어진 지점도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뻣뻣하고 융통성이 없어보이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적당히 조여 묶은 보따리를 보는 기분. 그 “적절함”의 상태는 잘 관리되어 있는 것이었다. 헤일리는 자신을 그런 식으로 통제하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가 귀찮아하면 금방 눈치 챌 타입이었다. 바르바라는 이 수업을 은근슬쩍 어물거리며 넘길 수가 없다는 것을 예감했다. 그만두고 싶다면 헤일리에게 직접 다른 사람을 찾아보라고 이야기해야 할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그렇게까지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르바라는 대련장으로 올라서서는 헤일리에게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안녕, 레무어.” 

 “안녕하세요, 체사레.” 

 헤일리가 따라서 고갯짓으로 인사했다. 

 그 날 바르바라는 그에게 검을 쥐는 법과 기본적인 폼을 알려주었다. 원래는 자신이 늘 쓰는 자세를 가르쳐주려고 했었다. 손목을 낮게 내리고 부담을 줄이는 자세였다. 크고 묵직한 것을 베어낼 때는 불리하지만 가벼운 싸움을 제압하기엔 그 자세가 적격이었는데 바르바라는 그것을 써드빌의 모든 것과 닮았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바르바라는 어느 순간 자신이 헤일리에게 다른 방식의 폼을 알려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정직한 방식으로 검 손잡이를 쥐고 꼿꼿하게 서서 앞으로 뻗는 방식이었다. 바르바라는 스스로도 조금 당황했다. 그것은 선루스를 오며가며 마주치는 귀족출신 단원들의 어깨 너머에서 종종 벌어지는 일들을 닮아있었다. 바르바라가 헤일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반듯하고 흠 없는 정식 검술 폼이었다. 

 첫 번째 수업이 끝났을 때, 바르바라는 목검을 내리고는 헤일리를 쳐다보며 물었다. 

 “레무어는 편한 게 좋니, 힘든 게 좋니?” 

 곧이어 바르바라가 내 말은, 하고 정정했다. “어떤 방식으로 배우고 싶냐는 뜻이야.” 

 헤일리는 크게 고민하지 않았다.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요.” 

 헤일리가 고저 없이 대답했다. 

 

 그 날 바르바라는 일부러 먼 길을 돌아갔다. 해안선을 따라 걸으면서 보초근무지역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마침내 원하던 것을 찾았다. 바르바라가 찾던 사람은 모래사장에 서서 노을을 바라보며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귀족 출신의 누구였는데 이름이 뭐였더라. 좌천되어 온 기사였는데 곧 성으로 돌아갈 거라고 들었다. 어쨌든 성으로 귀환하기로 마음먹기 전에도 그녀는 종종 이 부근에서 홀로 검술을 연습했었다. 귀족들이 다 저렇게 성실하다면 좋겠는 걸(그렇다, 바르바라는 오즈를 생각하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근처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그녀를 훔쳐보았다. 귀족적인 몸짓이었다. 노을이 져가는 동안 그녀는 몇 번이고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바르바라는 눈을 뜨고 시선으로 그녀의 몸짓 하나하나를 관찰하여 마음속 양피지에 가지런히 기록해두었다. 

 완전히 해가 졌을 무렵, 바르바라는 숙소로 돌아와 마음속에 기록한 그것들을 꺼내어보았다. 그러고는 자신의 방에 두 다리를 벌리고 서서 검을 휘둘러보았다. 눈을 감고 노을과 귀족의 그림자 따위를 생각했다. 그녀는 그것을 몇 번 반복한 후에 몇 가지 엉성했던 지점을 종이에 기록해 서랍에 넣었다. 바르바라는 그 날 조금 늦게 잠들었다. 

 

 다음 날 바르바라는 약속시간보다 일찍 대련장에 도착해 헤일리를 기다렸다. 헤일리는 대련장에 들어서다 말고 바르바라를 올려다보았다. 

 “안녕.” 바르바라가 먼저 인사했다. 

 “네, 안녕하세요.” 헤일리가 대답했다. 

 두 번째 수업에서 바르바라는 헤일레에게 검을 휘두르는 세 가지 기본자세를 알려주었다. 지난밤에 잠을 자는 대신 직접 휘둘러보며 익혔던 것이다. 야매라고는 해도 검술에 기본기가 잡혀 있었기 때문에 빠르게 배울 수 있었다. 사실 바르바라는 그런 식으로 ‘훔치는’ 일을 잘했다. 빠르게 배웠고 남을 금세 따라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귀족출신의 기사를 가르치는 스승이라도 된 것처럼 엄격하고 빈틈없이 검술을 가르쳤다. 헤일리는 바르바라가 움직일 때 조급하게 따라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그 자리에 반듯하게 서서 바르바라가 하는 것을 주의 깊게 살핀 후, 자신이 충분히 이해했다고 생각하면 검을 쥐고 똑같이 휘둘렀다. 헤일리는 바르바라가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배우고 금세 따라했다. 아주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헤일리라면 어쩐지 그럴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헤일리와의 첫 번째 수업을 되짚어보았다. 반듯하고 가지런하게 서서 자신을 기다리던 헤일리의 모습이 떠올랐다. 잘 관리되어 있는, 의도적인 “적절함”…. 자신을 통제할 줄 아는 자들은 무엇을 배울 때 어떤 것을 버리고 어떤 것을 취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그러했듯이. 써드빌 외부의 역사를 물려주려고 했는데 바르바라 내부의 역사를 물려줘버린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헤일리가 바르바라로부터 배우고 있는 것은 그녀가 훔쳐온 귀족적인 검술이 아니라 바로 그 능숙한 태도가 아닌가. 바르바라는 목검의 손잡이를 매만지다가 힘주어 단단히 붙잡았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헤일리는 원래 그런 사람이다. 

그런 것들을 물려줄 수는 없다. 타고난 성정에서 비롯된 것들을. 

 

 수업이 여덟 번째, 아홉 번째, 열 번째에 이어 더 이상 두 손으로 그 횟수를 셀 수가 없을 정도로 이어졌을 때, 헤일리는 엄격한 바르바라의 수업에 익숙해졌고 바르바라는 밤잠을 줄이며 자신이 훔쳐온 검술을 익히는 생활에 길들여졌다. 오즈는 바르바라에게 헤일리를 맡겨놓고는 정작 일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감시하거나 확인하려는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 것 같았다. 한 번은 복도에서 바르바라를 마주쳤을 때 문득 떠올랐다는 듯이 “그래서 수업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나?”라고 물어보았다. 바르바라는 오즈에게 어떤 말을 퍼부어줄 수 있을지를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이고는 별일 없다고 대답했다. 헤일리를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 사실을 오즈가 알았더라도 그는 지극히 건설적인 방향의 전개라고 대답해서 바르바라를 짜증나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찌됐든 헤일리는 훌륭한 학생이었다. 바르바라는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이렇게나 재미있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다는 게 좀 분할 정도였다. 누군가를 가르치거나 돌보아주는 일은 그때까지 그녀에게 가장 귀찮은 일 중 하나였는데 헤일리를 가르치는 일만큼은 꽤나 재미있었다. 물론 바르바라도 그것이 헤일리가 영민하고, 답답한 구석도 없을 뿐더러 자신과의 거리를 능숙하게 유지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헤일리가 아니었더라면 바르바라는 직접 자신이 배워가면서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아예 검을 집어던지고 금세 농땡이를 부렸을 지도 모른다. 써드빌 외부의 역사를, 사람을 느슨하고 헤이하게 만드는 평화로움을 물려주고는 나 몰라라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헤일리를 가르치던 날들이야말로 바르바라가 살아가며 보기 드물게 타인에게 성실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죽어도 밤마다 앞질러 연습한다는 걸 레무어에게 말하지는 않을 거야.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그 정도로 열성이었다는 걸 헤일리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헤일리가 그런 것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헤일리가 바르바라의 손에서 목검을 떨어뜨리게 만든 날, 바르바라는 가슴에 켜켜이 기록하여 겹쳐놓았던 양피지가 모조리 헤일리의 마음속으로 빨려 들어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이상 넘겨줄 것이 남아있지 않은 가슴에는 그 이상의 정보도 없었고, 구멍이 뚫린 것처럼 흉흉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러나 목검이 바닥으로 떨어져 바르바라의 발끝을 스쳤을 때, 그래서 고개를 들어 헤일리를 쳐다보았을 때,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그 깊은 녹안을 들여다보았을 때, 그곳에서 순간적으로 스쳐간 성취감이 반짝 빛나는 것을 목격했을 때, 바르바라는 가슴의 구멍이 닫히고 따뜻한 액체 같은 무언가가 들어차는 것을 느꼈다. 

 헤일리는 한 발짝 물러나더니 크게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이겼군요.” 

 바르바라는 눈을 내리깔고 웃었는데 드물게도 진심이 담긴 웃음이었다. 

 “그래, 네가 이겼구나.” 

 바르바라가 두 번이나 대답했다. 

 “네가 이겼구나.” 

 바르바라는 자신이 그 순간 정말로 헤일리의 스승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애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헤일리가 자랑스러웠고 그가 대단히 훌륭했다는 사실을 그 자신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두 번이나 중얼거렸던 것이다. 

 

 그 뒤에도 몇 가지 일들을 더 했지만 예전처럼 엄격하지는 않았다. 헤일리는 더 이상 자신이 배울 게 남아있지 않으며 나머지는 스스로의 경험으로 성취해야 한다는 것을 점잖고 예의바르게 인정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이 줄어들자 바르바라는 헤일리에게 난나 샌드위치를 만들어주면서 그것을 베어 무는 헤일리의 미묘한 표정변화를 지켜보는 것을 새로운 재미거리로 삼았다. 헤일리는 표정을 숨기는데 능숙한 편이었으므로 바르바라는 그를 관찰하기 위하여 눈을 가늘게 떠야만 했다. 그러고는 헤일리가 샌드위치 안에 무엇을 넣었을 때 눈을 빛내거나 흡족해하는지를 마음속 양피지에 기록했다. 그러니까… 그 양피지에는 누군가로부터 훔쳐온 것들만 기록되지는 않았던 것이다. 헤일리는 샌드위치 안에 튀긴 닭이 들어있을 때 가장 좋아했고 바르바라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는 한 번도 그것을 잊은 적이 없다. 

 

 두 사람이 더 이상 대련장에 모이지 않게 되었을 무렵부터는 샌드위치를 만드는 일도 줄어들었다. 대신 그들은 이따금 함께 근무를 나섰다. 별 거 아닌 일들을 해치우고 신속하게 숙소로 돌아가는 일들을 하면서 대화는 많이 나누지 않았다. 그 날에는 집을 나간 말을 몰아서 마구간으로 끌고 왔었다. 의뢰를 해온 로잔네가 두 사람에게 무척 고마워하며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집안사정 탓에 내일 장에 말을 팔러갈 참이었는데 그 녀석이 달아나버려서 곤란해 하던 참이었다고, 기사님들 덕분에 살았다고 연거푸 중얼거렸다. 헤일리는 상냥하고 친절한 얼굴로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대답했고 바르바라는 로잔네가 자신의 손을 붙잡고 다시 고맙다는 말을 반복할까봐 일부러 거리를 벌려 떨어져 있었다. 그런 와중에 로잔네가 두 사람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오늘 닭을 잡았답니다. 양념을 쳐서 팔팔 끓는 기름에 튀길 생각입죠. 기사님들이 오시면 아이들도 기뻐할 겁니다. 어차피 저희 가족이 먹어치우기엔 양이 꽤 됩니다.” 

 물론 헤일리와 바르바라는 거절했다. 정말이지 그렇게나 단호하고 부드럽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로잔네는 포기하지 않았다. 질기게 초대하면서 두 사람의 팔을 잡아끌기까지 했는데 나중에는 사정하는 투에 가까워서 두 사람에게 닭을 먹이지 않으면 어디 가서 목이라도 잘릴 사람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두 사람은 그의 기분이 상하지 않는 선에서 정중함을 유지하며 그를 떨어뜨리기 위해 전전긍긍하느라 남은 근무시간을 모조리 날려버렸다. 

 돌아오는 길에 바르바라는 넓은 해안선을 바라보면서 말을 아꼈다. 써드빌의 인심은 붙임성 좋은 누군가에게는 유용한 것이겠지만, 하고 바르바라가 생각했다. 하지만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야. 그러다 문득 자신과 나란하지 않게, 하지만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거리에서 헤일리가 따라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가 기울어져서 그림자가 졌기 때문이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그림자와 헤일리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다 말고 한데 뒤섞이는 것을 내려다보면서 걷는 속도를 늦췄다. 헤일리의 걸음걸이와 비슷해지자 그녀는 그 속도에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별로… 안 좋아해… 이런 일들.” 

 바르바라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헤일리는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다. 

 “사람이 언제나 사람과 통하지 않는다는 건 슬프지요?” 

 바르바라는 헤일리를 쳐다보았다. 

 “…저도 그렇지만.” 

 헤일리는 그렇게 덧붙이고는 공범 같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르바라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고개를 돌렸다. 

 “사실 그렇게 슬픈 것도 아니면서.” 

 “그냥, 붙여보는 말 같은 거예요. 그런 거.” 

 헤일리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아시면서.” 

 그래, 알고 있어. 바르바라는 그렇게 대답하는 대신 다시 앞서 걸어서 헤일리와 거리를 벌렸다. 헤일리의 손등이 떠올랐다. 검을 잡을 줄은 몰랐으나 여러 생체기가 나있고 여러 가지 일을 매만지고 거쳐 왔을 그 손을 처음 보았을 때, 바르바라는 생각했었다. 초짜지만 오합지졸은 아니구나. 그러고는 검을 쥐는 법을 가르치면서 몰래 밤마다 홀로 연습을 했었다. 헤일리에게 결코 말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그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바라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드러내지 않는 것들을 헤일리는 전부 알고 있을까? 그렇다면 헤일리는 그 때, 바르바라의 손에서 검을 쳐내던 그 순간, 바르바라의 두 눈을 바라보면서, 그녀의 마음속으로 차오른 따뜻한 액체의 존재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가 얼마나 훌륭했는지. 어째서 바르바라가 패배를 두 번이나 시인하게 되었는지. 그 액체를 뭐라고 불러야 좋은지. 

 하지만 그런 것들을 물어보지는 않는다. 궁금해 하지도 않는다. 발각했지만 거리를 벌린 채 나란히 걸어간다. 

 바르바라가 헤일리와 자꾸만 거리를 벌려 걸으면서 입으로만 “헤일리, 해가 지고 있구나.”라고 말한다. 헤일리는 대답한다. “그러게요, 바르바라.” 해가 지고 있군요. 

 그런 역사가 물려지거나 교환되며 앞으로 엇갈려 나아갔다. 

2018/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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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바르바라가 보기에 타지아나 이반의 몸에는 공통적으로 흐르는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귀품이나 우아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분명히 닮은 지점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것을 아마도 귀족들이 가지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반은 타지아에 비하면 부유하거나 현재의 권세를 누리는 집안출신이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 바르바라의 눈에는 이반이 어쩐지 가난한 귀족처럼 보였다. 타지아의 말에 따르면 이반의 집안이 원래 그렇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가세가 서서히 기울고 있어 모두가 몰락할 징조를 가진 가문쯤으로 본다고 했다. 가세가 기우는 가문이라니, 높으신 분 코털이라도 건드린 걸까? 그게 아니라면 재산 관리를 개떡같이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켈커스 룬넨 마을을 영지로 두었더라면 마을 주민들의 존경을 얻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예와 위엄은 바르바라가 밟고 있는 켈커스의 마을에서 부가 만들어주는 부산물 같은 것이었다. 페트로프 영주가 모두의 공포를 획득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설원에 쌓인 모든 눈과 나무를 한데 끌어 모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반이 평민처럼 보인 것도 아니었다. 이반은 엄밀히 말해 타지아와 거의 똑같았다. 바르바라가 보기에 두 사람은 우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마구 벌여놓은 후에 그 일에 대해 태평스럽게 생각해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여파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를테면 타지아는 막무가내로 바르바라를 페트로프 성까지 끌고 가서는 바르바라에게 글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그 뒤에 바르바라가 영주 앞에서 절절매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타지아와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권위에 무언가를 빌어볼 생각은 없었다. 물론 조금은 있었지만 자신이 곤란해질 정도의 호의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가하면 이반은 첫 만남에서부터 말을 끌고 오더니 바르바라를 뒷자리에 태우고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 좋을 대로 속력을 냈다. 무섭다고 말했는데도 멈추지 않고 달리면서 심지어는 자기 좋을 대로 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바르바라는 발밑으로 쏜살같이 뭉개져 지나가는 풍경이나 느닷없이 높아진 눈높이에 정신을 빼앗겨서 이반이 하는 말을 드문드문 흘려들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중간에 떨어져서 마구 구르다가 정신을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을 때 혼자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이반의 허리를 꼭 붙잡았다. 자신이 죽으면 이반도 죽는 것이다. 이반은 어차피 그녀에게 따질 수가 없을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바르바라처럼 이미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고(바르바라는 말하는 시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또 고삐를 잡은 건 이반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가 정신을 차린 건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높은 지점에 도달했을 때였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발아래로 펼쳐진 마을이 조그만 한 불빛으로 점점이 밝혀져 고즈넉해보였다. 바르바라는 이제 말 때문이 아니라 날씨 때문에 얼른 내려가고 싶었다. 마을로 돌아가서 가족이 만들어준 따뜻한 수프에 빵을 적셔먹고 싶었다.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있을 때, 느닷없이 이반이 혼잣말처럼 바다에 가고 싶네, 라고 중얼거렸다. 바르바라는 짜증이 났다. 자신을 태우고 고삐를 잡은 이 가난한 도련님은 이 지역의 눈을 얕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맞으면서도 따뜻한 지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가면 되잖아.” 

 바르바라가 신경적으로 덧붙였다. 

 “그러려면 일단 거꾸로 내려가야겠지.” 

 “너는 가고 싶은 곳이 없어?” 

 “왜 없겠어.” 

 바르바라는 불편한 자세를 조금 고쳐보려다 중심을 잃을 뻔하자 다시 이반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바르바라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금은 내려가고 싶어.” 

 두 사람은 다시 산을 내려갔다. 이반이 말을 잘 모는 편에 속한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바르바라는 승마를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두 사람은 완만한 지대까지 조심조심 내려왔다가 평지에서는 힘껏 말을 달려 타지아가 기다리고 있는 숲 입구로 돌아왔다. 타지아는 그곳에 없었다. 

 “돌아갔나 보네.” 

 이반이 중얼거리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바르바라는 이반이 말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냉큼 그의 등을 밟고 내려왔다. 이반이 작게 신음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 바르바라를 쳐다보았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얼굴을 비웃음으로 되갚아주고는 고개를 돌려 타지아를 불렀다. 

 “타지아, 얼른 나와!” 

 그러자 타지아가 인근 오두막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추위에 노출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바르바라가 천천히 다가가자, 타지아가 우다다 달려와 바르바라를 껴안았다. 이반이 두 사람을 응시하며 말고삐를 정돈했다. 

 “간 게 아니었네.” 

 “그럼 추운데 거기 계속 서있겠어?” 

 타지아는 바르바라를 껴안은 채 어깨 너머로 이반을 바라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이제 넌 나랑 돌아가야 해. 저녁시간이니까.” 

 타지아가 엄숙한 무언가를 선포하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걸어 가야해. 네가 모는 말에는 안 탈 거야.” 

 여자를 말에 태운다면 자신의 뒤가 아니라 앞에 태워야 하는 것이 신사의 암묵적인 매너임을 바르바라는 나중에야 알았다. 이반은 귀족이고 말을 몰지만 숙녀를 뒤에 태우고 좋을 대로 달리는, 일종의 평민스러운 구석이 있는 이상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5. 

 다음 날부터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만나서 룬넨 마을의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바르바라는 이반과 타지아를 마을에서 열리는 오전 시장에 데려가 별 볼 일은 없지만 귀족들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제법 흥미로울 법한 물건들을 구경시켜주었다. 가판대에는 직접 사냥하여 마름질한 모피, 설탕을 조금 묻혀놓고는 어마어마한 값을 받는 말린 과일들, 모피로 만든 외투와 장갑과 부츠 따위가 늘어져있었다. 타지아는 비명을 지르며(그녀는 이제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바르바라의 팔짱을 끼고는 신나서 시장골목을 돌아다녔다. 이반은 그들의 뒤를 천천히 쫓아오다가 이따금 혼자 가판대에 멈추어 서서 여유롭게 물건을 구경하고는 다시 서두르지 않고 두 소녀를 쫓아갔다. 이반이 시장에 관심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반이 지갑을 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은 평민들의 물건을 살 만큼의 재정적인 여유도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장사꾼들은 세 사람을 성가시다는 얼굴로 흘끔거렸지만 이따금 타지아가 손을 들어 “이것 좀 주세요”라고 말할 때면 기다렸다는 듯 굽실거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타지아는 습관처럼 바르바라의 몫까지 포함하여 두 사람 분을 계산해놓고는 동행인 한 사람의 존재를 마저 깨닫고 세 사람 몫의 금액을 더 지불하고는 했다. 이반은 그럴 때마다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 곁에 서있었다. 

 좁은 골목마다 타지아의 식욕과 호기심을 돋우는 음식이 존재했다. 사탕과 말린 과일과 익힌 닭다리 살… 모든 게 맛있었다. 한 구역을 빠져나올 때마다 세 사람 모두 입가에 사탕이며 기름을 묻히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각자 동떨어진 듯 행동하다가도 음식을 먹을 때면 자연스럽게 붙어 다녔다. 어느새 타지아는 첫날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고 이반을 자신의 친구로 취급하고 있었다. 반면 바르바라는 이반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굳이 고르자면 싫은 쪽에 속했는데, 어찌되었든 그가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노는 것은 좋아했다. 아마 이반도 자신을 똑같이 여길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골목을 지나는데 나무상자 때문에 길이 막혀 있어서 평소와는 다른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평소에 바르바라가 두 사람을 끌고 다니는 길은 사람과 수레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고 햇볕이 잘 드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날 세 사람은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바짝 붙어야만 지나갈 수 있는 음습하고 기묘한 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도 눈을 치우지 않아 바닥이 미끄럽고, 볕이 들지 않는 구역마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기가 텁텁해졌다. 타지아는 바르바라 곁에 꼭 붙어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바르바라가 가장 먼저 앞서는 것이 불만이었던지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결국 세 사람은 나란히 일렬로 서서 그 좁고 어둡고 축축한 길을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다섯 발자국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가 흠칫 멈추어 서자 뒤따라오던 이반과 타지아도 우르르 멈추어 섰다. 바르바라는 잠시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폈다. “무슨 일인데?” 이반이 등 뒤에서 묻자 바르바라가 쉿, 소리를 냈다. 하지만 더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길거리는 여전히 불길함에 감싸여 있었지만 그들을 위협할 만큼 적대적인 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다시 젖은 벽을 더듬거리며 아까보다 느린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세 사람이 골목 끝으로 나와 희끄무레한 햇살을 마주했을 때, 등 뒤에서 요란한 나무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몸을 돌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살피려 들었다. 한 여자가 골목 벽 어딘가에 달려있던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여자는 세 사람이 서있는 골목 출구까지 쏜살같이 달려 나오다 말고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곧이어 다른 한 여자가 한손에 칼을 든 채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이었으나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칼을 든 여자는 서두르지 않고 세 사람을 지나쳐 길바닥에 쓰러진 여자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더니 심호흡을 했다. 바르바라는 반사적으로 두 발자국 물러나 타지아의 곁에 섰다. 

 “이 거지같은, 이 개 같은 년!” 

 여자는 허공에 칼을 휘두르며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두 여자와 세 아이들이 서있는 좁은 골목길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널 에아가 심판할 거야, 이 거지같은 년! 네가 감히!” 

 여자는 여전히 칼을 허공에 마구 휘두르면서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진 여자가 얼굴을 감싸고 자신을 숨기려 들자, 그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칼을 들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눈앞의 상대의 얼굴과 손을 분리시켰다. 그러고는 다시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걸레! 쓰레기! 오물!” 

 바르바라는 타지아와 이반을 번갈아 살피다말고 타지아의 두 귀를 가렸다. 그러고는 이반을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반은 바르바라를 바라보며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그는 이 욕을 들어본 적도 있고 그 뜻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바르바라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한바탕 소동이 진정된 후에 바르바라는 타지아와 이반을 끌고 장터를 벗어났다. 세 사람은 눈이 쌓인 산등성이를 묵묵히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타지아가 말을 꺼냈다. 

 “걸레가 뭐야?” 

 바르바라와 이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르바라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그건 남의 남편을 빼앗은 계집애들에게 할 수 있는 모욕적인 단어야.” 

 바르바라는 이반의 시선을 느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는 법이다. 

 바르바라가 덧붙였다. 

 “아까 그 여자는 분명 칼을 든 여자의 남편과 간통을 하고 있었을 걸.” 

 룬넨 마을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일어나곤 한다. 

 타지아는 얼굴을 찡그린 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어. 알려줘서 고마워, 난나.” 

 그런 후 타지아는 습관처럼 바르바라를 껴안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어깨 너머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도 걸레라는 말을 알고 있니?’ 이반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6. 

 세 사람이 조그만 룬넨 마을을 샅샅이 훑고 다닌 후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다. 그러자 마침내 타지아가 엄숙히, 드디어 그럴 때가 됐다는 것처럼 “난나네 여관으로 가자”고 말했다. 

 “우리 집은 여관이야.” 

 바르바라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이반에게 덧붙여주었다. 

 “알고 있어.” 

 이반이 대답했다. 

 “아 그래?” 

 “타지아에게 들었거든.” 

 “그럼 우리 집이 사기꾼들로 득실거린다는 것도 알겠구나.” 

 바르바라는 비웃는 투로 앞서나가며 이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고 있어.” 

 이번에도 이반이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녀는 몇 걸음 더 앞서가다가 멈추어 서더니 타지아와 이반이 자신을 쫓아올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그녀를 쫓아오자 더 이상 앞서나가지 않고 두 사람의 속력에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체사레 여관까지 걸어 나갔다.  

 여관 문을 열자, 1층 거실에 앉아있던 바르바라의 할머니 마미사가 고개를 돌렸다. 

 “페트로프 아가씨, 오랜만이구나.” 

 그런 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떠 낯선 소년을 살피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온 그 마차의 주인 되시겠군.” 

 “이반이에요.” 

 바르바라는 두 사람의 외투에 묻은 눈을 거칠게 털어내면서 대꾸했다. 

 “귀족이니?” 

 “그럼요.” 

 바르바라는 능청스럽게 대꾸하면서 이반에게 물었다. 

 “그렇지?” 

 “그렇지.” 

 이반이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두 사람을 먼저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려 보냈다. 타지아는 일부러 쿵쾅거리면서 계단을 올라갔는데, 그녀가 이곳에 한없이 익숙하다는 것을 이반에게 과시하고 싶은 듯했다. 타지아의 요란한 발소리는 위층을 따라 희미해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거실 한쪽에 소리도 없이 앉아있던 릴리버드와 콜리아가 얼굴을 내밀고는 두 아이들이 올라간 층계를 살피며 히죽였다. 릴리버드와 콜리아는 바르바라의 사촌언니들인데 릴리버드가 맏이고 콜리아가 둘째다. 두 사람은 큰 이모의 딸이고 바르바라보다 각각 7살, 5살이 더 많았다. 릴리버드가 고개를 돌려 바르바라를 쳐다보았다. 

 “쟤네 자고 갈 거야?” 

 “응.” 

 “잘 됐다.” 

 릴리버드가 손뼉을 치며 뺨을 붉혔다. 

 “페트로프 아가씨 물건은 손도 못 대지만 저 빨간 머리 남자애는 괜찮아.” 

 콜리아는 노래하듯이 말을 받았다. 

 “쟤는 여길 떠날 테니까.” 

 “여길 떠나겠지.” 

 “어쩐지 빈털터리 같지만.” 

 “털어보면 또 다르겠지.” 

 바르바라는 두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언니들 마음대로 해도 좋아.” 

 그런 후 바르바라는 층계를 올라갔다. 

 

 7. 

 바르바라는 자신의 방에서 타지아와 이반과 함께 보드게임을 했다. 나무로 대충 깎은 말 세 마리를 판 위에 얹어놓고 주사위를 굴려서 누가 먼저 결승선에 도달하는지를 겨루는 놀이였다. 판의 가장자리마다 숲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이야기’라고 쓰여 있었다. 누구든 간에 그 숲으로 말을 들이게 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해야만 했다. 일종의 벌칙이었는데 사실 이 보드게임은 결승선에 먼저 도달하는 것보다는 바로 그 숲속에 도달한 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세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자신의 말을 움직여 보드를 몇 번이고 돌고 또 돌았다. 바르바라는 한 번도 이야기의 숲에 걸리지 않았다. 오로지 타지아만 세 번 연속으로 그곳에 당도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타지아가 들려주는 에아의 신화에 대해서 들어야만 했다. 마침내 바르바라가 숲에 걸렸을 때, 타지아는 비명을 질렀다. 

 “난나, 네가 걸렸어!” 

 타지아는 온갖 오두방정을 떨면서 박수를 쳤다. 

 “이제 네가 이야기를 할 차례야!” 

 바르바라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없는 걸.” 

 “갑자기 도망치는 거야?” 

 이반이 물었다.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반을 응시했다. 

 “안 한다고 하지는 않았어.” 

 바르바라가 대꾸했다.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8. 

 켈커스 지방의 북부에는 이 이야기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써 그러나 하나의 줄기를 유지하며 전승되어 내려온다. 바로 늑대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르바라가 사는 룬넨 마을에도 늑대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어릴 때 어머니 마리사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고, 나중에는 마미사 할머니로부터 더 구체화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열세 살의 바르바라는 이 이야기를 이반과 타지아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두 아이들에게 켈커스 최북단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붕이 작은 나무 타일로 이루어져 있고, 마을의 뒤로는 거대한 숲이 펼쳐져 있는 아주 고립된 마을이었다. 바르바라는 풍경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전나무가 우거진 숲 곳곳에는 짐승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밤이면 빛나는 두 쌍의 눈들이 숲 곳곳에 점처럼 박혀 있었다. 특히 늑대가 그곳에 자주 출몰했다. 

 키가 작은 청년 욘디는 바로 그 늑대를 사냥하는 사냥꾼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늑대 사냥을 중단하고 일을 쉬고 있었다. 건넛집에서 살고 있는 목수의 딸에게 푹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목수의 딸은 이상하게도 늑대를 좋아해서 이따금 숲속을 내다보며 휘파람을 불곤 하는 기묘한 소녀였다. 늑대 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인간이나 나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욘디는 어느 순간부터 늑대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본인이 늑대가 되는 상상을 하기 이르렀다. 어느 날 욘디는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늑대가 되었다. 욘디는 무척 기뻐하며 목수의 딸이 휘파람을 불 때까지 숲속에서 기다렸다가 그녀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목수의 딸은 늑대가 된 욘디를 하염없이 어루만져주었다. 무척 달콤한 꿈이었다. 

 그 후로 욘디는 매일같이 그 꿈을 꾸었다. 늑대가 되는 경험이 매일 밤 반복되자 꿈에는 살이 붙기 시작했다. 욘디는 꿈속에서 단순히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는데 그치지 않고 숲으로 나가 동료와 함께 사냥을 하거나 덫을 피해 설산을 달리거나 달을 향해 울부짖게 되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데도 자신이 네발로 걷는 게 더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에 울부짖는 늑대 소리에 잔뜩 흥분해 깨어나기도 했다. 욘디의 털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혓바닥이 길어지고 송곳니가 날카로워졌다. 욘디는 밤에도 숲속의 짐승과 어둠으로 감싸인 마을의 풍경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욘디는 자신이 네발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목구멍에서 헥헥거리는 소리가 기어 올라왔다. 욘디는 정말로 늑대가 되었던 것이다! 

 욘디는 웅크린 채 집안을 몇 번 킁킁거리다가 휘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목수의 집까지 달려갔다. 그는 이 일련의 일들이 너무나 익숙했다. 꿈속에서 몇 번이고 경험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수의 딸은 욘디를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정말로 늑대가 나타나자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어쩌면 욘디의 몸집이 너무 커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혹은 늑대를 좋아하지만 정말로 늑대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길 바라며 휘파람을 분 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욘디는 너무나 당황해서 그녀를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인간으로 돌아가서 나라는 걸 알려줘야겠어.’ 

 욘디는 두 발로 서서 말을 해보려고 했다. 간신히 ‘욘,디’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욘디는 자신의 몸에서 털이 빠져나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거뭇거뭇한 털 사이로 듬성듬성 인간의 살결이 드러났다. 발가락 사이로 솟아오른 발톱이 서서히 손가락에 붙은 모양새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꼬리가 점점 작아져 엉덩이에 달라붙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욘디의 등 뒤로 아주 긴 늑대울음소리가 들렸다. 욘디는 습관처럼 고개를 젖히고 울부짖었다. 아우우우. 그러자 욘디의 몸에서 일어나던 모든 변화가 일순 중단되었다. 공포에 질린 욘디가 고개를 돌려 등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보름달이 떠있었다. 

 목수의 딸은 달빛에 드러난 흉측한 욘디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욘디는 두 발로 서있었지만 늑대의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는 인간의 털이라기엔 너무 길고 거친 가죽으로 덮여있었다. 두 눈이 숲속의 그들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송곳니를 타고 침이 줄줄 샜다. 

 “괴물이야, 괴물이라고!” 

 목수의 딸은 울면서 살려달라고 외쳤다. 욘디는 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잠시 후 그의 등 뒤로 다시 한 번 늑대의 긴 울음소리가 들렸다. 욘디는 고개를 젖혀 그에 화답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리고 다시는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따금 마을에는 보름달이 뜰 때면 늑대도 인간도 아닌 무언가가 울부짖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두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했다. 그것은 인간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잊은 짐승의 목소리였다. 

 

 9. 

 “무서워.” 

 타지아가 팔을 휘적거리다가 바르바라를 껴안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에게 안긴 채로 이반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제법 득의양양했다. 

 “어때?” 

 “그래서 이 이야기는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이반이 물었다. 

 “글쎄.”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인간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잊은 사람들은 이렇게도 슬프고 끔찍한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겠지.” 

 “도덕에 대한 이야기야?” 

 이반이 되물었다. 

 “아니.” 

 바르바라는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마도 정말 문자 그대로 괴물에 대한 이야기야.” 

 “오늘 밤에도 나타날까?” 

 타지아가 속삭이자, 바르바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컴컴했고 달이 떠있었다. 그러나 보름달은 아니었다. 

 “아니, 나타나지 않아.” 

 “벌써 밤이네.” 

 이반은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잘 시간이 벌써 지났겠어.” 

 타지아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바르바라는 문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맞아.”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긴 이야기를 한 거야.” 

 이반과 타지아가 자고 있을 때, 바르바라는 습관처럼 이반의 머리맡을 뒤져서 장갑 한 짝을 훔쳤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10. 

 이반이 떠나기 전에 세 사람이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페트로프 성에 존재하는(그러나 쓰이지 않는) 작은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일이었다. 원래는 이반이 리드를 하고 당연하지만 타지아가 팔로를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온 타지아가 갑자기 바르바라를 끌고 구석으로 가더니 속삭였다. 

 “난나, 어떡해?” 

 타지아는 드레스를 한 단 정도 걷어서 무릎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하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고 남아있었다. 

 “이반에게 이걸 보여주면 난 죽을 거야!” 

 “수치스럽니?”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후 덧붙였다. 

 “네가 수치스러워 할 게 아니야.” 

 “어쨌든.” 

 타지아는 엉성하게 걸어보려다 드레스 사이로 다리가 드러나면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슬퍼.” 

 타지아가 중얼거렸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손을 잡고 이반이 기다리고 있는 무도회장 중앙까지 갔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의 등 뒤에 숨었다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바르바라가 말했다. 

 “페트로프 아가씨가 드레스를 입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삐었대.” 

 바르바라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춤은 못 출 것 같으니까 다른 걸 하자.” 

 “글쎄.” 

 이반은 바르바라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것처럼 대꾸했다. 구체적으로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무언가가 가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은듯했다.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지만 이반은 어느 정도 눈치가 있었다. 

 “그냥 네가 추지 그래?” 

 그리고 그것을 상냥하게 눈감아주는 법이 없었다. 

 바르바라는 저를 놀리듯 바라보며 팔을 벌리고 있는 이반을 쏘아보다가 타지아를 한 번 돌아보고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바르바라는 이반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춤을 출 줄 몰라, 도련님.” 

 그 말에 이반은 약을 올리듯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춤을 도둑질하면 되잖아?” 

 “좋은 생각이야.” 

 바르바라는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차갑고 딱딱한 바닥을 조용히 누비면서 엉성하게 춤을 추었다. 바르바라는 정말로 춤을 출 줄 몰랐다. 타지아가 몇 번 스텝에 대한 조언을 던지기도 했지만 따라가기 버거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몸에 리듬을 익힌 것처럼 이반의 스텝을 따라서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드물게도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는 이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무언가를 정말 훔치기 위해 유심히 관찰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반이 바르바라를 리드해야 할 그 타이밍에 자신이 리듬을 가로채고 이반의 허리를 꺾었다. 마치 본인이 도련님이고 이반이 영애인 것처럼 말이다. 순식간에 포지션이 뒤바뀌었다. 이제 리드를 하는 건 바르바라고 팔로를 하는 건 이반이 되었다. 

 둘은 잠시 그 자세로 멈추어 있었다. 그러다 이반이 허리를 꺾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훔쳤구나.” 

 “제대로 훔친 것 같아?” 

 “어느 정도는.” 

 그러자 바르바라가 신경질적으로 이반의 팔을 붙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바르바라는 갑자기 남자가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이반을 자신의 여자인 것처럼 대하면서 무도회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심술궂게 손을 놔버렸다. 이반은 휘청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는 마치 그녀가 그의 등을 밟고 말에서 내려왔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쨌든 훔쳤으니 그걸로 됐어.” 

 바르바라는 손을 털어내며 말했다. 

 “난 욕심 많은 도둑은 아니거든.” 

 그런 뒤에도 두 사람은 몇 번 더 포지션을 바꾸어가며 무도회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바르바라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그녀는 그만하고 싶다고 말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타지아와 이반은 저녁을 먹으러 올라갔다. 세 사람은 같이 식사할 수 없었다. 

 

 11. 

 바르바라는 이반이 떠나는 당일 날 이반이 떠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반에게 언제쯤 떠나는 것이냐고 물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것만을 확실하게 인식해두고 그 이상을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한을 알게 되면 정말로 애틋해지거나 애틋해서는 안 될 순간이 뒤바뀌게 될 지도 모르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작별인사를 위해 말을 타고 마을로 내려와서는 바르바라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말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냥 그곳에 앉아 바르바라를 내려다보았다. 

 “타지아는?” 

 “영주님하고 같이 있어. 손님들을 마중해야 하니까.” 

 “떠나는구나.” 

 “아쉬워?” 

 “네가 떠날 거란 사실을 잊은 적은 없어.”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어 이반을 올려다보았다. 드물게 맑은 햇빛이 잿빛 구름 사이로 내리쬐고 있었다. 이반의 등 뒤로 빛이 들어서 역광이 강렬했다. 이반의 얼굴이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잘 있어.” 

 바르바라가 말했다. 

 “뭔가 좋은 말을 덧붙여봐.” 

 “음.” 

 바르바라는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좀 더 부자가 되도록 해.” 

 그 말에 이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여관은 내가 거지라서 건드리지 않았던 모양이야.” 

 바르바라는 웃지 않았다. 이반의 말에 자신이 훔친 장갑 한 짝이 떠올랐던 것이다. 

 바르바라는 품에서 털장갑을 꺼냈다. 그녀는 말없이 그 한 짝을 이반에게 건네주고는 곧 쌀쌀맞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은 여관집에서 체사레 식구들이 늘 짓는 표정이었다. 도둑질을 한 후에 시치미를 떼면서도 상대를 위협하는 그 표정. 

 “내가 훔친 거야.” 

 바르바라는 이반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잘 있어. 이제 가버려.” 

 그런 후 바르바라는 돌아갔다. 등 뒤에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녀는 결단코 몸을 돌리지 않았다. 

 

 12. 

 이반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타지아가 바르바라를 찾아왔다. 이제 다시 둘이 되었어. 타지아는 그 말을 기쁜 것처럼 읊었지만 표정은 어쩐지 외로워보였다. 바르바라는 그녀에게 이반이 다시 돌아올 객식구인지를 묻지 않았다. 아마도 이반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바르바라는 그를 잊어갈 것이다. 겨울이 긴 지방에서 누군가를 또렷하게 기억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새하얀 눈을 보고 있자면 머릿속도 덩달아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반의 물건 중에 훔친 게 있어?” 

 타지아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니.” 

 바르바라는 모든 일의 결과만을 이야기했다. 

 잠시 후 바르바라가 정정했다. 

 “물건 중에는 없어.” 

 “그럼 뭘 훔쳤는데?” 

 “이제부터 보여줄게.”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의 어깨에 둘러진 망토를 벗겨 한쪽에 던져놓았다. 타지아는 두꺼운 재질의 털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녀의 손을 들어 자신의 허리를 감게 하고, 나머지 한 손을 자신의 어깨에 두게 했다. 그런 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르바라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린 타지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 난나!” 

 타지아가 말했다. 

 “넌 정말 멋진 도둑이야!” 

 “알고 있어.” 

 바르바라는 어깨에 얹어진 타지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춤을 리드했다. 그녀는 타지아를 자신의 영애처럼 대하고 있었다. 타지아가 기쁘게 발을 놀리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바르바라도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춤을 추는 동안 이반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어쩐지 바르바라는 역광 속에 가려진 얼굴밖에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에 올라탄 소년은 바르바라를 내려다보고 있고 얼굴은 어둠에 감싸여 보이지 않는다. 햇빛이 강렬해서 그녀는 눈을 찌푸린다. 이제 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는다. 

 “내가 훔친 것 중에서 가장 우아한 게 될 것 같아.”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아마도.” 

2018/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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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타지아는 이따금 다리를 절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눈치 챌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움직임이었지만 바르바라는 그녀가 때때로 아주 느닷없이 다리를 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유를 타지아에게 묻거나 혹은 자신이 그 사실을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 적은 없었다. 대신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다리를 절을 때면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 할 만큼만 느리게 걸었다. 타지아가 비틀거린다는 사실을 자신도 알고 있다고 그녀의 눈앞에서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리를 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르바라는 자신의 마을에서 절름발이들을 많이 보아왔다. 여관집에서 몇 마일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고 있는 목수 아르뎅 아저씨는 이리에게 다리를 물려 힘줄이 끊어졌다. 옆집에 사는 미세스 소네토의 아이는 사다리를 오르다 떨어져서 다리를 접질렸다. 그런가하면 바르바라의 작은 이모 라이라는 어릴 때 열병을 앓은 후 아예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아르뎅 아저씨는 그녀에게 의족을 만들어주려다 라이라 이모가 다리를 잘라낼 의사가 없음을 알고는 바퀴를 단 나무의자를 만들어주었다. 그건 수레처럼 생겼는데 뒤에 손잡이가 달려있어서 체사레 식구들이 라이라 이모를 앉혀놓고 의자를 밀어서 어디든 데리고 다닐 수가 있었다. 라이라 이모는 스무 살이 좀 넘었을 무렵에 지금 달린 것을 떼어내고 자신이 직접 밀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바퀴를 달아달라고 했다. 아르뎅 아저씨는 그렇게 해주었다. 그 뒤로 그녀는 혼자 의자를 밀어 계단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닌다. 

 하지만 켈커스 지방의 여러 권세 있는 집안 중에서도 특히 유복한 편에 속하는 페트로프 가의 둘째 딸 타지아 계나디 페트로프가 다리를 전다면 그것은 분명 이리에게 물리거나 사다리에서 떨어졌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게다가 타지아는 아주 튼튼한 아이였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열병을 앓은 적도 없었다. 바르바라는 그 점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타지아가 미세하게 다리를 절기 시작하는 날에는 활동량이 적어도 원활하게 이동할 수 있는 곳으로만 갔다. 보통 두 사람은 시장 뒤편으로 이어지는 구불구불한 뒷골목이나 오르막이 가파른 산의 언덕까지 올라갔다. 하지만 타지아가 다리를 절게 되면 바르바라는 그녀를 여관방이나 여관 인근의 주민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리고 그곳에 앉아서 북쪽지방의 신화를 결합한 괴담을 들려주거나 다른 주민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생활을 위해 아등바등 하는 것을 구경하고는 했다. 제일 자주 가는 곳은 라이라 이모의 바퀴의자를 만들어준 아르뎅 아저씨의 작업장이었다. 바르바라는 목수들의 손놀림을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녀 혼자 작업장을 기웃거리면 목수들은 위험하다는 명목으로 그녀를 멀리 내쫓아버리곤 했다. 하지만 타지아를 데리고 가면 모두들 입을 다물고 이따금 두 사람을 흘끔거릴 뿐 아무 행동도 취하지 않은 채 작업에 몰두하려 애썼다. 페트로프 가의 아가씨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른 주민들의 터전이나 작업장이나 일터도 그런 식으로 드나들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어디든 통과할 수 있는 마법의 승인 문서처럼 달고 다녔다. 

 타지아는 자신의 집안 영지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인간사를 무척 재미있게 생각했다. 닭을 잡기 위해 칼을 갈고 있는 사람이나 간이상점을 열기 위해 나무를 자르고 있는 사람을 봐도 눈을 빛내면서 바르바라를 마구 흔들고 때렸다. 

 “저길 봐, 난나! 저 사람 좀 봐!” 

 그럼 바르바라는 건성으로 고개를 돌려 그녀가 짚은 풍경을 대략적으로 훑어본 후에 이렇게 대답했다. 

 “아, 그러게. 저기에 사람이 있네.” 

 그럼 타지아는 너무너무 신이 나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찬사를 쏟아 부은 후 “너무 멋있다!”라고 외쳐대곤 했다. 

 타지아가 그런 풍경을 재미있어 할 수 있는 이유는 그녀가 그 풍경의 일원이 되어본 적이 없는데다가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바르바라에게 있어 룬넨 마을은 그녀의 생활공간이었고 닭을 잡거나 나무를 자르는 일은 전부 언젠가 그녀가 해보았거나 하게 될 일이었다. 그녀는 일상을 하나의 특별한 풍경으로 생각할 일이 별로 없었다. 무언가를 특별하게 여기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거리가 필요한데 마을의 인간사는 모두 바르바라와 너무 가까이 밀착되어 있었다. 

 바르바라가 타지아의 동떨어진 감수성을 밥맛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오히려 바르바라는 자신의 별 볼 일없는 공간과 생활양식에 온갖 찬탄을 멈추지 않는 타지아를 재미있게 여겼다. 타자의 시선으로 포착된 자신의 일부가 화려한 언변에 감싸여 재탄생 되는 순간을 경이롭게 느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한바탕 떠들고 간 날이면 홀로 언덕 높은 곳에 앉아 마을을 내려다보고는 했다. 그러고는 타지아가 짚어준 골목과 인간군상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이따금씩 어떤 특별함을 희미하게 느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특별함은 바르바라가 무언가의 언어로 포착해보려 시도하기도 전에 물속으로 가라앉은 타다 만 성냥개비의 불씨마냥 비실비실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타지아의 다리에 대한 의문은 열세 살 때까지 이어졌다. 바르바라는 전혀 예상치 못 한 사건으로써 그 의문을 풀게 되었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바르바라의 충격이 어찌나 컸던지 한동안 바르바라는 타지아만 생각하면 마치 그녀가 자신의 몸속으로 들어와 자신과 동화라도 된 것처럼 스스로 다리를 절었다. 

 그 사건은 바로 타지아가 머리띠를 잃어버린 날에 일어났다. 귀족집안의 자제답게 타지아는 여러 벌의 드레스와 외투와 장갑과 구두와 머리띠와 머리끈과 머리핀을 가지고 있었다. 타지아가 가장 즐겨 하는 장신구는 머리띠였는데, 타지아는 그 중에서도 잘 마름질한 가죽에 부드러운 담비 털을 매달아놓은 머리띠를 가장 좋아했다. 바르바라도 그 머리띠를 좋아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타지아는 어느 날 바르바라에게 그 머리띠를 씌운 후 바르바라가 여왕이고 자신은 시녀로 시중을 드는 연극놀이를 했다. 일주일 동안 그것을 빌려주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바르바라가 도둑질을 일삼는 사기꾼 집안의 딸인 것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 머리띠는 체사레 집안이 도둑질을 해서 사라진 게 아니라 타지아의 부주의로 인하여 사라지고 말았다. 머리띠를 잃어버렸다는 것을 깨닫기 직전까지 타지아와 바르바라는 눈 덮인 설원을 달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타지아가 습관처럼 정수리를 더듬거리다 말고 우뚝 멈추어 섰다. 바르바라는 몇 걸음 더 앞서다 말고 타지아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자 덩달아 멈추어 서서 뒤를 확인했다. 

 타지아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머리카락을 마구 뒤적이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 없는 무엇인가가 자신의 필사적인 행동으로 인하여 갑자기 그 존재감을 발휘해 무사히 손아귀에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람 같았다. 그러나 머리띠가 사라졌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자, 타지아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바르바라는 서두르지 않고 타지아에게 다가갔다. 타지아의 입술은 새파랗게 질려있었고 벌어진 턱은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이런 모습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타지아는 아무리 위험천만하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과장된 비명을 지르거나 바르바라에게 매달렸을 뿐이지 정말로 그 상황에 겁을 집어먹은 적은 없었다. 그녀는 모든 것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는 사람처럼 구는 것에 더 익숙했다. 하지만 머리띠를 잃어버린 타지아는 거의 패닉상태였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주변을 불길하게 둘러보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잡고 흔들었다. 

 “얘, 타지아. 타지아!” 

 타지아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불현 듯 차가운 얼음에 닿은 사람처럼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바르바라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난나, 나랑 같이 머리띠를 찾아줘. 만약에 못 찾으면 나랑 같이 성으로 가줘. 내 손을 놓으면 안 돼. 부탁이야. 중간에 돌아가면 안 돼. 내 방 앞에 도착하면 그 때는 돌아가도 좋아. 막지 않을게. 하지만 지금은 나랑 같이 있어줘야 해.” 

 말을 너무 빨리 해서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헐떡이는 바람에 그녀의 입김이 자꾸만 토막 나는 것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머리띠를 잃어버린 일이 타지아에게는 끔찍할 만큼 심각한 일인 듯싶었다. 귀족 자제의 물욕이라기보다는 좀 더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지나치게 음울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해가 지기 전까지 눈 속을 뒤지며 돌아다녔지만 머리띠를 찾을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약속대로 타지아의 손을 잡고 페트로프 성으로 갔다. 걷는 내내 타지아의 손은 시종일관 바르바라의 손을 세게 쥐고 있었다. 성으로 다가갈수록 타지아의 손이 점점 축축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침착하려고 애썼지만 손바닥을 타고 연거푸 느껴지는 타지아의 감정 때문에 결국은 그녀와 함께 이유도 모를 압박감에 시달렸다. 

 타지아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사람처럼 연회장을 지나서 중앙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분명 곳곳에서 사용인들이 걸어 다니고 있었을 텐데도 성은 소름끼칠 만큼 적막하게 느껴졌다. 차가운 공기와 죽은 색처럼 보이는 붉은 카페트들과 허옇게 눈을 뜬 초상화들이 두 사람을 따라다니고 있는 것 같았다. 

 타지아는 가장 먼저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자리에 없었다. 사용인으로부터 그 소식을 전해들은 타지아는 희미하게 웃으면서 다행이라고 작게 비명을 질렀다. 그러더니 익숙한 것처럼 아래층에 있는 자신의 오빠의 방으로 이동했다. 바르바라는 대체 그녀가 뭘 하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잠시 후 타지아는 바르바라를 문 앞에 내버려두고 혼자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타지아는 힘주어 바르바라의 손을 붙잡았는데 어찌나 세게 붙잡았던지 바르바라의 손도 타지아의 손만큼 창백하게 질릴 정도였다. 

 “이제 가. 고마워, 난나.” 타지아는 그렇게 속삭였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들어간 문에 귀를 바싹 대고는 숨을 죽였다. 안에서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타지아의 오빠의 목소리를 바르바라는 그 때 처음 들었다. 머리띠라는 단어가 들리자 바르바라는 숨을 멈추었다. 

 “그건 평민들이 두 달을 벌어먹어야 간신히 만져볼 수나 있는 머리띠란다. 알고 있니?” 

 “알고 있어요.” 

 타지아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런데 너는 평민도 아니면서 평민 계집아이들처럼 뛰어다니다 그것을 잃어버렸다는 말이구나.” 

 타지아는 그 말에는 대답하지 못 했다. 낮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계나디, 우리는 귀족이고 그들의 귀감이 되어야 한단다. 너는 네 위치를 알아야해. 우리가 걷고 먹고 마시는 모든 행 위를 평민들이 지켜본다고 생각하렴. 현명하게 행동해라. 하다못해 친구를 선택할 때에도.” 

 그런 뒤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가 아주 거칠게 다른 무언가를 후려치는 소리였다. 바르바라는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써도 타지아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한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또 다시. 또 다시. 

 바르바라는 몸부림치면서 뒤로 물러났다가 문 옆에 기대어 숨을 몰아쉬었다. 마치 문 너머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녀가 겪은 것처럼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얼마 뒤 타지아가 비틀거리며 문을 열고 나오다 말고 바르바라와 눈이 마주쳤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손을 낚아채고 쏜살같이 타지아의 방까지 달렸다. 오로지 그녀의 방 만이 이 성에 도사리고 있는 어떤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힘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줄 수 있는 것처럼. 두 사람은 계단을 날듯이 내려와 초상화들이 걸린 긴 복도와 텅 빈 응접실을 지나 타지아의 방에 도착했다. 

 바르바라는 거칠게 문을 닫고 타지아의 얼굴을 더듬거렸다. 타지아는 무표정하게 서있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몸을 손으로 훑고 매만지면서 어떤 흔적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러다가 갑자기 단추를 뜯어내고 옷을 풀어헤치기 시작했다. 보들보들한 드레스를 그녀의 몸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속옷을 벗기고 두 팔을 들게 했다. 타지아가 흐느끼기 시작했지만 바르바라는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타지아는 거의 전라 상태가 된 채로 바르바라의 앞에 진정한 모습을 드러냈다. 바르바라는 큰 충격을 받아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친구의 몸을 뚜렷이 응시했다. 타지아의 몸 보이지 않는 구석구석에는 수차례 가해진 매질의 흔적이 새하얗게 남아있었다. 

 

  2. 

 “나는 모두가 그런 줄 알았어.” 

 타지아는 그런 후에 말을 조금 고쳤다. 

 “내 말은, 나는 귀족이니까 조금 더 엄격한 거라고 생각했어.” 

 바르바라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창밖을 쏘아보고 있었다. 화를 간신히 억눌러 참는 얼굴이었는데 무척이나 서늘한 표정이었다. 타지아는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간 후에 바르바라를 올려다보았다. 

 “난나.” 

 타지아가 물었다. 

 “너도 맞아본 적은 있지?” 

 “아니.” 

 바르바라가 쏘아붙였다. 

 “우리 가족은 나를 건드린 적이 단 한 번도 없어. 맹세컨대 그 누구라도 내 몸에 손을 댔다간 나머지 가족들이 그 년의 손목을 자른 후에 짐승들 먹이로 던져버렸을 거야.” 

 바르바라는 너무 화가 난 나머지 타지아 앞에서 욕설을 사용하고 말았다. 타지아는 작게 웃다가 갑자기 훌쩍이기 시작했다. 타지아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라고 마구 화를 냈다. 난나네 가족이 유독 이상한 거지 나머지 아이들도 한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거라고 했다. 자기 앞에서 욕을 사용하지 말라고도 했다. 다른 때는 괜찮지만 지금은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울음을 그치곤 돌변해서 자기 집안은 그만큼 품위가 있고 엄격하다고 말했다. 타지아가 감정기복을 보이는 동안 바르바라는 그녀의 침대 맡에 앉아 타지아의 오빠를 상상했다. 타지아와 똑같이 금발이고, 사파이어 같은 눈을 가졌고, 귀족적인 자태를 가진 남자를. 그 남자의 주먹에는 흉물스러운 털이 나있어서 마치 짐승의 발같이 보였다. 바르바라는 그 손을 잘라버리는 상상을 하려고 했지만 그녀는 기사도 아니고 사냥꾼도 아니어서 그것을 해낼 수가 없었다. 

 “네 오빠가 너를 자주 이렇게 대하니?” 

 “아버지가 없을 때만 대신하는 거야.” 

 타지아가 이불 속에서 꿈틀거렸다. 

 “아버지가 하면 오빠는 하지 않아.” 

 “영주가 돌아오면 또 너를 그렇게 할까?” 

 “아니, 한동안은 둘 다 날 건드리지 않을 걸.” 

 타지아가 들뜬 얼굴로 말했다. 

 “아버지가 성을 비웠다는 건 곧 손님과 함께 돌아올 거라는 뜻이거든. 손님이 오면 두 사람 모두 나를 건드리지 않아.” 

 그런 후 타지아는 눈물 젖은 얼굴을 익살스럽게 일그러뜨렸다. 

 

 3. 

 페트로프 영주는 그로부터 열흘 뒤에 돌아왔다. 타지아의 말대로 손님과 함께였는데 타지아가 나중에 설명해주기를 페트로프처럼 부유하지는 않지만 귀족의 이름을 유지하고는 있는 가문의 손님이라고 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자신의 가문과 급은 다르지만 어찌되었든 귀한 손님으로 모실 예정인 사람이라는 뜻이었다. 얼마 뒤 룬넨 마을을 감싼 산맥의 도로를 따라 마차 한 대가 들어왔고, 그 마차는 곧장 페트로프 성으로 향했다. 마을 사람들은 방문객에 대한 싱거운 추리를 몇 번 하다 말고 각자의 일터로 돌아간 뒤 아예 신경을 꺼버렸다. 이 지역의 사람들은 본래 남에게 무관심한 면이 있었다. 바르바라 역시 마차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는데 귀족출신이라면 어차피 체사레 여관에 머물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쟁취하기 어려운 난나(한 건)였다고나 할까. 체사레 식구들 역시 몇 마디를 주고받고는 끝이었다. 그들 모두가 익숙한 듯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며칠이 지난 뒤 타지아가 바르바라를 찾아왔다. 타지아는 평소보다 배로 들떠있었고 다리를 절지도 않았으며 무척 쌩쌩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를 껴안으며 비명을 지르다가 새로운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더니 뒤를 돌아서 맑고 높은 목소리로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반!” 

 소년은 서두르지 않고 두 사람 쪽으로 걸어왔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의 팔짱을 끼고는 그녀 곁에 밀착했다. 바르바라는 소년을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훑었다. 소년은 부츠를 신고 따뜻한 바지를 입고 부드러운 모피 외투를 걸치고 있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었고 눈은 눈청색이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를 조금 앞으로 끌고 오더니 그녀에게 소년을 소개했다. 

 “난나, 얘는 노이어 남작의 첫째야. 우리보다 한 살 많아.” 

 “안녕.” 

 바르바라는 예의 그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소년은 바르바라를 머리부터 발끝으로 훑었다. 그러더니 타지아를 쳐다보았다. 

 “너 평민이랑 친구야?” 

 바르바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때 갑자기 소년이 고개를 돌려 다시 바르바라 쪽을 바라보았다. 할 말을 마치고 다시 그녀를 관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표정을 미처 숨기지 못 한 바르바라의 미묘한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 화가 났구나.” 

 이반 슈타겐 노이어는 그때 열네 살이었다. 

2018/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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