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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드라마의 주인공»
1차/old 2019. 10. 22. 16:40

어릴 적에는 종종 드라마를 보았다. 느세파 가든이 오전마다 유행이 지난 통속극 몇 편을 틀어줬기 때문이다. 영상매체 속 장교들은 종종 지나치게 변화무쌍한 감정상태를 경험했고, 운명처럼 등장한 상대에게 속절없이 빠져들었다. 한편 나니아 출신들은 열약한 환경 속에서 항상 씩씩하게 성장했다. 그들의 굳센 성정은 훗날 자신을 사랑하는 장교가 흔들릴 때면 정신적 지지자 역할을 하게끔 사용되었다.

어쨌든, 모든 드라마가 표면적으로 사랑과 연애의 낭만을 표방하고 있었지만, 실상 뜯어보면 비슷한 이데올로기를 갖추고 있었다. 바로 그 모든 로맨스의 주인공이 함선을 탄 장교를 중심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함선을 탄 자가 곧 낭만과 모험의 중심이었다. 

일상적으로 드라마를 보던 늦은 오전, 아나렉샤는 문득 그것을 깨달았다. 장차 아이들을 군인으로 길러내기 위해 만들어진 국가기관이 한가로운 오전에 기꺼이 드라마 한 편을 틀어주는 데에는 이런 이유가 숨어있던 것이다. 어쩌면, 굳이 가든 아이들에게 국한된 사항이 아닐 지도 몰랐다. 아칸 제국이 원하는 가장 보편적인 인재상이란 바로 함선의 장교일 테니까 말이다.

아나렉샤는 자신의 태생에 감사했다. 그 위치에 도달하기 위해 계획된 존재이므로 노력만 하면 못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를 보는 다른 아이들 역시 이 사실을 깨닫고 있는지 궁금했기 때문에, 그 후에도 아나렉샤는 종종 바닥에 엎드린 채 영상을 시청하곤 했다. 가끔 콘스탄틴이 곁에 있을 때도 있었다. 그럼 때때로 그 애에게 묻고 싶었다. 코스챠, 넌 장교가 될 거지? 너는 장교가 되어서 저런 사랑을 할 거지? 하지 못한다고 해도 그 비슷한 것을 위해 올라갈 거지? 하지만… 그런 질문은 무용하다. 답은 정해져있었다.

율카에서 온 아티야는 군대에는 다소 적합하지 않은 태도를 곧잘 취했다. 자비를 베풀어선 안 될 순간에도 기꺼이 총구를 치우고, 경쟁 중에도 넘어진 아이를 향해 달려갈 것만 같은 얼굴이었다. 느세파 가든에도 가끔 그런 애들이 있었다. 중앙 대신 모서리를, 성취 대신 양보를 선택하는 아이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말하고 움직였다. 너희들, 혹은 우리들, 이라고 말했다. 개인을 개인으로 두지 않았다. 아나렉샤는 엘리트가 되고자 하는 의무감으로부터 벗어나있는 그들을 볼 때면 종종 생각했다. 물론 ‘우리’는 우리들이지만, 너희가 말하는 ‘우리’에 나는 포함되지 않아. 소속감을 위한다면 좀 더 빠르게 움직이는 편이 좋았다. 그것 역시 성취해야만 하는 일종의 보상 같은 감정이었다. 엘리트로서 성장하길 요구받는 아칸의 아이들이니 말이다. 아나렉샤는 아티야가 중심을 찾길 바랐다. 이곳은 모서리가 적고, 양보하기엔 아까운 게 너무 많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아이들은 벌써 행정구역으로 떠났다. 그들을 위한 로맨스 드라마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건 시시하다. 로맨스와 낭만이 좋으니까 아나렉샤는 엘리트가 되고 싶다. 그것이 더 괜찮은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아티야, 넌 이곳으로 진학했고 그건 사고가 아니잖아.”

아나렉샤가 말했다.

“행정관 사람들도 내 말에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 거야. 원래는 다들 이곳에 오기 위해 태어났잖으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인 걸. 향수병 같은 건 금방 잊어버리게 될 거야. 너에겐 새로운 ‘우리’가 있잖니.”

아나렉샤는 ‘우리’를, 아칸의 아이들을 발음하려다 말고 입을 다물었다.

아칸의 아이들, 을 발음하면 미묘한 우월의식으로부터 오는 소속감과 함께 필연적인 고립감이 느껴졌다.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 개인으로서 무언가 성취해나가야만 하는 존재들. 아티야의 모서리가 어디쯤에 있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고립감이라면 영원히 느껴야하는 향수병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괜찮다. 모서리에 앉을 수 있는 건 혼자뿐이지만 중앙에는 여럿이 모일 수 있으니, 눈 깜짝할 사이에 그런 고립감 따위 잊어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아나렉샤는 조금만 더 지나면 아티야가 중앙에 앉아있을 거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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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불의 아이들»
1차/old 2019. 10. 22. 16:38

어렴풋한 경보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밤 9시 무렵의 일이었다.

아나렉샤는 베개 속으로 뜨끈뜨끈한 패드를 밀어 넣고 복도로 나왔다. 취침시간이었으므로 전원 소등되어 있었고, 어둠이 깔린 가든의 복도는 낮에 느끼는 것보다 훨씬 차갑고 음산한 느낌을 주었다. 천천히 걷는 동안 경보가 점점 더 뚜렷해졌다. 아나렉샤는 탄내를 맡았다. 정원 쪽이었다. 통유리로 된 창문 앞에 누군가 서있었다. 아나렉샤가 멈추어 서자, 키 큰 실루엣이 고개를 돌리고 그녀를 확인했다.

오르카가 말했다. “정원에 불이 났어.”

아나렉샤는 천천히 걸어 오르카 곁에 섰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였다. 우거진 열대우림 한 편에서부터 연기가 치솟고 있었다. 가든에서부터 다소 떨어진 섹터였다. 주황색 불꽃이 일렁이며 솟구쳐오를 때마다 바싹 탄 나뭇잎이 사방으로 흩날리는 것을 두 사람은 볼 수 있었다. 화재 장소가 결코 가깝지 않았음에도 유리창에 손을 대면 그 열기가 느껴질 것 같았다.

‘어쩌면 누군가 더 올 지도 몰라. 경보가 너무 커.’ 아나렉샤는 생각했고, 그 일은 얼마 안 가 정말로 벌어졌다. 어두컴컴한 복도에서부터 콘스탄틴이 등장했던 것이다. 조심스럽게 창가로 다가오던 그는 눈앞의 풍경을 보고 우뚝 멈추어 서고 말았다.

“코스챠.” 이번에는 아나렉샤가 말했다.

“정원에 불이 났어.”

그러니까, 밤 9시 무렵이었다. 오르카와 콘스탄틴이 무엇을 하다 경보를 들은 건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경보를 들은 게 아니라 우연히 그곳을 지나가던 중이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세 사람은 어둠속에서부터 생명력을 품고 타오르는 그 끔찍한 불기둥을 보았다. 연기가 솟구쳐 오르고, 나무가 서서히 쩍쩍 소리를 내며 갈라지는 것을, 재와 함께 흩날리는 나뭇잎 조각들을 세 아이들은 똑똑히 보았다. 정말이지 속수무책의 광경이었다. 끝없이 확장하는 불기둥이 정작 그 자신의 유지를 위해서는 열대우림의 생명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은 아나렉샤에게 꽤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녀는 완전히 넋을 빼놓고 창가 앞에 서 있었다.

잠시 후 삑삑 소리와 함께 인공강우가 시작되었다. 묵직한 빗방울이 정원 한복판으로 쏟아지더니, 탄내가 축축해지고 불길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세 사람은 침묵한 채 창가에 서서 그 압도적인 소리를 들었다. 빗방울이 어찌나 굵었는지 땅에서부터 피어오른 안개 때문에 앞이 자욱해질 지경이었다. 화재가 수습되고 난 뒤 AI가 짧게 보고했다. B섹터가 전소되었다고 했다.


짐을 챙겨 기차에 오를 때, 아나렉샤는 열두 살에 보았던 그 운명적인 장면을 떠올렸다. 콘스탄틴은 이미 좌석에 앉아있었고, 오르카는 일련번호를 확인하며 좌석을 찾는 중이었다. 아나렉샤는 두 사람이 ACOTS에 배정받았다는 사실을 그때서야 알게 되었다. 세 사람이 평소에 그런 이야기를 당연한 듯 나눌 만큼 친근했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ACOTS행 열차에서 마주친 두 사람의 존재는 한편으로 당연한 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세 사람이 다시 모인 건 열두 살에 정원 화재를 목격한 이후 그 열차에서가 유일했다. 거의, 유일했다.

아나렉샤는 오르카의 옆좌석에 앉았다. 콘스탄틴은 그녀의 맞은편에 대각선으로 앉아있었다. 고개를 들면 콘스탄틴을, 고개를 돌리면 오르카를 볼 수 있었다. 아나렉샤는 나란히 두 사람을 번갈아 응시해, 마침내는 세 사람이 동시에 눈을 마주친 채 서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길 바랐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열차가 출발하며 오르카와 팔뚝이 부딪쳤다 떨어졌다. AI가 느세파 가든에서부터 ACOTS까지 소요될 이동시간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그 소리가 들렸다.

그러니까, 아직도 가끔씩 어렴풋한 그 경보소리를 듣는다. 느세파 가든 출신 중에 그 화재를 모르는 아이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밤에, 9시 무렵에 말이다. 그 유리창 앞에 당도하지 않고서야 불꽃이 무엇인지는 결코 설명할 수가 없을 테다. 그것은 정말이지 아름답고 끔찍하게 타오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세 사람을 묶어놓지 못 한 다소 시큰둥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제 세 사람은 ACOTS으로 떠날 것이고, 다시는 한밤중에 불타오르는 숲을 목격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하지만 세 사람은 여전히 첫번째 이름으로써 그 화재를 간직한다. 불기둥은 기억 속에서 아칸을 닮은 그 원초적인 힘과 함께 영원토록 타오를 것이다. 그렇다면 그 불을 기억하는 느세파의 우리는 모두 불의 아이들이 아닌가. 

아나렉샤는 아직도 그 불이 너무 일찍 전소되었다고 믿는다. 때로 우리를 묶는 끈은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더욱 단단해져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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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haircsis «가정의 이야기»
1차/old 2019. 10. 22. 16:26

1.

눈이 검은 상인을 본 적이 있어, 라고 말해서 난롯불이 화드득 타올랐다. 꼭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잼은,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야.”라고 덧붙였다.

그녀는 일인용 소파에 앉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난롯불 때문에 벽난로 근처까지 희미한 주황빛이 둥글게 퍼져 있었지만, 창가부터 응접실 끄트머리까지 이어지는 넓은 공간이 모두 푸르스름한 공기로 채워져 있었다. 불꽃으로부터 동떨어진 모든 공간이 거대한 암실 같았다.

알랑은 막 복도를 지나려던 참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잼이, “눈이 검은 상인을 본 적이 있어”라고 말해버린 것이다. 알랑은 멈추어 섰고, 잼은 덧붙였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는 건 아니니까.” 그래서 잼과 알랑은 대화할 수 있었다.

사실 둘은 비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2.

요컨대 이것은 가정(假定)의 이야기다. 잼은 열다섯 살에 동쪽항만으로 몰려온 낯선 상인들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보지 못 한 옷을 입고 들어보지 못 한 언어를 썼는데, 때때로 잼보다 나이든 남자들이 그녀보다 키가 작기도 했다. 돌이켜보자면 대체로 그들 모두가 키가 큰 편이 아니었다. 잼이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한 가지는, 그들 모두가 눈이 새까맣고 깊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에흐놀 너머의 동방국가에서 온 부르주아 상인들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국가에서 권력자였다.

 

3.

“바다 너머에는 에흐놀이 있고, 에흐놀의 너머에는 그런 국가도 있는 거야. 그걸 잊은 적이 없어. …열다섯 살에 말이야. 나는 세상을 나가고 싶었는데. 내게는 당나귀와 작대가 있었지만 돈도 배도 없었지.”

잼은 어둠속에 들어앉은 채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그들의 나라로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 있었어. 그러니까 내가 열다섯 살에 말이야, 나는 카르스텐의 이름 바깥에 있는 세계를 슬쩍 엿보게 되었던 거야.”

알랑이 잼의 옆 소파에 앉았다. 어둠 속에서 그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잼은 알랑이 여느 때처럼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걸 상상하는 건 쉬웠다. 알랑은 호수의 수면을 보여주는 사람이므로, 수면 아래를 상상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공과 함께할 수 있는 얼마 남지 않은 밤이군요.” 알랑이 잘 개어진 옷처럼 대답했다.

“…그건 격려입니까?”

“맞아.” 잼은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요점을 짚어줘서 고마워.”

그래서 잼은 이야기를 단축할 수 있게 되었다.

 

4.

이름 모를 동방 국가에서 온 그 부르주아들이 많은 것을 구매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책을 몇 번 뒤져보고, 과일을 기웃거리고, 몇 가지를 가리켜 먹어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서책 방에서 몇 가지 저서를 구입했고, 머뭇거림도 없이 배에 오를 채비를 했다. 잼은 반나절동안 그들을 졸졸 쫓아다닐 마음을 먹은 참이었는데, 일이 너무 싱겁게 끝나 몹시 실망했다. 그들은 통상적인 상인처럼 재물을 취하지도 않았고, 마을 한가운데에 세워진 교회를 구경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시시하다.” 잼은 중얼거리다 말고 허리를 숙였다. 발치에 무언가 채였던 까닭이었다.

잼은 묵직한 돈주머니를 주워들었다. 부르주아의 돈주머니에는 황금이 가득 들어있었다. 낯선 모양으로 둥글게 깎은 동전들이었다.

잼은 배를 오르던 그들 중 하나에게 뛰어가 소맷부리를 붙잡았다.

“흠?” 남자는 고개를 돌려 잼을 올려다보았다.

잼은 그에게 주머니를 내밀었다.

 

5.

잼이 이야기 하다 말고 농담조로 덧붙였다.

“그냥 내가 다 가질 걸 그랬다.”

어둠 속에서 알랑의 웃음소리가 작은 알 구슬처럼 쏟아졌다.

“그것도 좋겠지요.” 알랑이 대답했다.

“하지만 잼 공은 돌려주셨군요.”

“맞아.” 잼이 말했다.

“왜냐하면 알고 싶었기 때문이야.”

 

6.

남자는 몹시 유쾌하게 웃어댔다. 어찌나 크게 웃어댔던지, 배에 오르던 동료들 모두가 몸을 돌려 그와 눈앞의 잼을 바라볼 정도였다. 잼은 그들 전원이 새까만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 때서야 본 것이다.

“고마워.” 남자의 발음은 몹시 서툴렀다.

“나. 아가씨. 고마워. 감사하다.”

“말 할 줄 알아?”

“조금.” 남자가 엄지로 검지의 마디를 쥐꼬리만큼 잡았다.

“그러나 알아듣는다. 듣기 한다. 말. 조금.”

“그럼 나 질문 있어.”

남자가 완전히 잼쪽으로 몸을 틀었기에, 잼은 그의 소맷부리를 놓아주었다.

“너 왜 책만 사?”

그 때, 남자의 등 뒤에서 그의 동료들이 이국어로 무어라 말을 걸었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몇 가지 대답을 했고, 어깨를 으쓱이곤 낄낄거리며 다시 잼을 바라보았다. 잼은 그들이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가 궁금했다. 눈앞의 남자들은 어떤 질서처럼 보였다. 이베르타에 도착했으나 그 무엇도 이베르타에 방문한 행색 같지가 않았다.

남자가 대답했다.

“아가씨. 이곳의 물건. 우리에게도 다 있다.”

남자는 품속에서 서책 한 권을 꺼내며 덧붙였다.

“오로지 책. 모두 다르다. 어디를 가도.”

“너 배고프지 않아?”

잼이 얼굴을 찡그렸다.

“고기나 빵을 사지 않아도 괜찮아?”

그러자 남자가 히죽 웃으며 동료들을 바라보았고, 동료들에게 몇 가지 말을 전달했다. 잠시 후, 그곳에 선 동방의 부르주아들이 너나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오, 아가씨.” 남자가 말했다.

“배에 탄다. 배고플 때 있다. 그러나 지루하다. 그것이 더 크다.”

“너희는 귀족이야?”

“아니.”

남자는 잼이 건네준 돈주머니를 열어서 보여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힘이 있다.”

그들은 이국의 노래를 부르며 배에 올랐다. 잼은 항구 돌바닥에 주저앉아 낯선 돛을 달고 바람을 맞는 동방의 함선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배가 까마득한 점으로 멀어지는 것을 눈도 떼지 않고 바라보았다. 잼은 허전했고, 갑자기 허무해졌는데, 곧 괜찮아졌다. 그러자 어떤 질서가 막 이베르타에 도달했는데, 닿기도 전에 떠나보냈다는 것을 막 깨달았다. 그러나 열다섯 살의 잼이 무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잼은 단지 그 질서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할 기회를 얻었을 뿐이다.

 

7.

- 저는 하던 일을 계속할 생각입니다. 세드릭 상인 조합의 사업이요. 비르가 가주가 된다면 상업의 활성화와 인식 개선을 해나갈 테니 제게는 더욱 호기가 될 것입니다.

 

알랑은 “호기”를 말할 때조차 단정했다.

그러나 그 담담한 어조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그런 걸 상상하는 건 쉽지 않다.

알랑의 수면 아래를 상상하는 일이다.

 

8.

“어떻게 되던 시대가 변할 거야.” 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제 난롯불이 거의 다 꺼져서, 방이 온통 어두컴컴했다. 아까보다 짙고 빽빽하고 건조한 어둠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다. 그것은 꼭 한밤처럼 보였다. 새벽이 올 기미는 없었다.

“그럴 겁니다.” 알랑이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래서, 그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일까요?”

“허무하고 좀 어이없지만, 그래.”

잼은 어깨를 으쓱이곤 자리를 뒤척였다.

“내가 기억하는 건 그들 모두가 눈이 새까맣게 깊었다는 것뿐이야. 가장 중요했던 것은, 그들이 권력자라는 사실이었지. 그런데 그들이 흑안이었기에 권력자였던 건 아니라는 사실이었지. 나는 그걸 잊은 적이 없어.”

잼은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너를 처음 봤을 때, 그들을 생각했어.”

“그만큼 큰 돈주머니를 들고 다니진 않지만.” 알랑은 농담조로 덧붙였다.

“그렇군요.”

“그래.” 잼은 대답했다.

“그런 세상도 있더라고.”

“그런 세상을 기대하십니까?”

“아니.”

잼은 알랑이 있을 어둠속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단지 너의 호기를 기대할 뿐이야.”

탁, 하고 마지막 불꽃이 타오르더니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난롯불이 꺼진 것이다. 이제 서로의 눈동자를 희미하게나마 비춰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두가 깜깜한 눈동자가 되었다. 어둠속에서 둘은 차츰 공평해졌다.

이번에도 잼은 알랑이 단정한 표정을 짓고 있을 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들여다보지 않는 편이 좋을 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이제 모든 게 끝났기 때문이다. 시대가 작살났기 때문이다. 항구에는 언젠가 또 다른 신세계의 배가 도달하고, 어두컴컴한 방에도 새벽이 온다. 잼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랑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영리한 사람이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으니 헤어짐의 노래를 불러볼까.”

잼이 씩 웃었다.

“이건 그들이 떠나기 전에 나에게 불러줬던 노래인데 말이야. 뜻은 모르지만 음만 따서 내가 멋대로 개사했어.”

그리고 잼은 노래를 불렀다.

그러니까, 열다섯 살에 말이다. 열다섯 살에 잼은 그 항구에서, 새벽이 올 것임을 알게 되었는데. 그럼에도 허전하고 쓸쓸했던 것이다. 그것이 언제 올 줄도 모르고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잼은 어둠속에서 새벽을 기다리고 있으니 노래를 부를 수가 있다.

 

잘 있게나, 어제의 전우여.

우린 어쩐지 오래 전부터 벗이었던 것만 같아….

 

눈을 감자 항구가 펼쳐졌다. 잼은 굴러온 돈주머니를 주웠다. 남자의 소맷부리를 붙들자, 남자가 고개를 돌려 잼을 바라보았다. 그는 이번에도 웃어주었고, 잼도 그렇게 했다. 알랑과 잼은 잠시 그런 식으로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네 호기가 올 거야. 잼이 입모양으로 말했다. 새 시대가 온다면.

요컨대 이것은 가정(假定)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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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커플게임 크롭»
1차/old 2019. 10. 22. 16:07

5.

그 날 밤, 삼신은 꿈을 꿨다. 삼신은 바다에 있었다. 놀랄 만큼 헤엄도 잘 쳤다. 이삼신은 인어가 됐던 것이다. 지느러미는 아주 크고, 가슴을 억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은 아주 차갑고 고요했다. 그리고 아주 어두웠다. 삼신은 어둠 속을 마구잡이로 헤엄치며 돌아다녔다. 그러다 문득 솟구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삼신은 사실 대부분의 꿈속에서 하늘로 솟구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삼신은 수면 위로 올라왔다. 육지는 모두 사막이었고 바다의 파도는 아주 높았다. 삼신은 파도를 타고 앞으로 나아갔다. 모래사장엔 큰 바위가 있었다. 그 위엔 교복 차림의 희가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파도가 솟구쳐 바위 끄트머리를 철썩 때렸다. 삼신은 파도가 물 아래로 빠질 때 바위를 붙잡고 위로 기어 올라왔다. 육지의 열기는 혹독했지만 햇볕에 데워진 바위는 따뜻했다. 삼신은 지느러미가 거슬려 인간이 되기로 했고, 곧 말짱한 두 다리가 생겼다. 삼신은 축축한 전라의 몸을 끌고 희의 위로 올라왔다. 희는 하복 차림이었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팔에 빽빽하게 칼자국이 나있었다. 삼신은 너무 놀라서 희를 마구 흔들었는데,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서 인간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고 생각했다. 희는 눈을 뜨지 않았다. 희의 팔 안쪽을 매만지며 몸을 숙이자, 피가 속눈썹과 뺨에 닿았다. 삼신은 얼굴을 비비며 소리 없이 그 애를 불렀다. 희의 팔에 맺힌 피가 웅덩이가 되고 뚝 뚝 바위 아래로 떨어졌다. 새파란 파도가 쳤다. 삼신은 자기가 울고 있음을 깨달았는데, 갑자기 뺨이 너무 뜨거워져서였다. 삼신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희를 끌어안았다. 그리곤 인간의 언어를 하나 배웠다. 죽지 마! 라고 삼신이 외쳤다. 희는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삼신은 그 애가 죽을까 봐 입을 맞췄다. 그리곤 그 애 안에 가득 들어있는 죽음을 빨아 당기기 시작했다.

희는 그걸 뺏기기 싫어서 몸부림 쳤다. 인간의 언어로 마구 욕하고 할퀴었다. 하지만 삼신은 인간의 욕설을 몰랐다. 그래서 그건 삼신을 상처 입힐 수 없었다. 삼신은 혀로 희의 입속을 샅샅이 긁었고, 영혼을 습윤하게 만들었고, 죽음을 물렁하게 만들어서 자기 입으로 들어오게 했다. 삼신은 그걸 잠깐 삼켰는데, 곧 너무 고약한 맛이 나 뱉어냈다. 희가 마구 기침했다. 삼신은 그 애의 얼굴을 젖은 손으로 더듬어보았다. 희는 너무 피를 많이 흘렸고 기침도 너무 많이 한 까닭에 지쳐가고 있었다. 삼신은 제 뺨을 희의 뺨에 가져다 댔다. 희가 눈을 뜨고 삼신을 바라봤다. 삼신은 인간의 언어를 하나 더 배웠다. 안녕. 삼신이 말했다. 희가 말했다. 안녕.

둘은 바위 위를 뒹굴며 죽음과 계속 맞서 싸웠다. 희는 삼신의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삼신의 등에 박힌 가시를 하나씩 뽑아주었다. 그리곤 눈꺼풀을 핥아 속눈썹 곳곳에 말라붙은 피딱지를 없애주었다. 삼신은 희의 눈을 가리곤 물었다. ‘눈을 감아 봐. 뭐가 보여?’ 희가 대답했다. ‘그냥 깜깜하기만 해.’ ‘거기가 내가 있던 곳이야.’ ‘어딘데?’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왔어.’

삼신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너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삼신이 그 꿈에서 마지막으로 배운 것은 물거품이 되는 감각이었다.

 

삼신이 꿈에서 깼을 때, 옆에선 은주가 잠을 자고 있었다. 삼신은 사타구니에서 손을 떼어내고 슬그머니 일어나 화장실로 갔다. 그리곤 세면대에서 끈적끈적한 손을 마구 씻어냈다. 그리곤 물기가 마르지 않은 축축한 손에 얼굴을 묻었다. 다리 사이가 아직도 화끈거렸다.

이삼신은 착잡하게 중얼거렸다.

“아, 내가 무슨 사춘기 남학생도 아니고…….”

다시 자리로 돌아왔을 때, 부스스 깬 동래가 조금 겁에 질린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아파? 아까 끙끙거렸어…….”

삼신은 이불을 뒤집어쓰며 대답했다.

“아니, 그런 거 아냐. 그냥 자.”

가족들이 아니었다면 이불을 찼을 것이다. 이삼신은 눈을 감고 창피함을 달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리곤 이내 잠이 드는데 성공했다. 이번엔 아무 꿈도 꾸지 않았다.

 

 

6.

그 다음 날 삼신은 희의 집에 놀러갔다. 꿈 때문은 아니고 원래 약속되어 있던 것이었다. 아파트 입구에서 하늘이 어두컴컴해지더니 마구 비가 내렸다. 소나기인 줄 알았지만 집에 들어오자 천둥이 치기 시작했다. 무서운 비바람이었다.

삼신은 언젠가 그랬듯이 거실을 돌아다니며 리모컨을 만지작거리다가 TV를 틀어 영화를 봤다. 희는 삼신 옆에 앉아 가끔 몇 마디를 덧붙였다. (“쟤 이제 죽는다.” “스포 하지 마, 미니야. 네가 쟤보다 먼저 죽는 수가 있어.”) 둘은 영화가 끝나기 전 너무 많이 말해버린 나머지 줄거리를 쫓아가는데 실패했고, 결국 TV를 켜둔 채 앉아만 있었다. 삼신이 비바람과 천둥과 번개가 치는 바깥을 바라봤다. 희가 사는 아파트 유리창은 두껍고 튼튼해서 바깥에서 그 어떤 바람이 불어도 결코 흔들리거나 깨지지 않을 것 같았다. 삼신은 희가 적어도 비바람에 있어서 안전하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았다. 어젯밤 꿈이 생각났다. 이삼신은 조급함을 느꼈다. 그것은 희가 세상 그 너머로 사라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비슷했다. G와 밀고 당기기를 할 때는 G가 어디로 사라져도 그러려니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 민 희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면 견딜 수 없을 것처럼 느껴졌다.

“미니야.”

천둥이 쳤다. 삼신은 희를 붙잡고 늘어졌다.

“미니야아.”

희가 물끄러미 삼신을 바라봤다. 삼신은 힘주어 희의 얼굴을 당겼다.

“미니야!”

“왜?”

희가 물었다. 삼신은 대답했다.

“나는 지금 세상과 맞서 싸우고 싶어졌어!”

“어떻게?”

삼신은 희를 잡아끌었다. 희는 목줄이 없어도 삼신이 손을 잡아당기면 그대로 끌려오는 것이다. 둘은 침대로 갔다. 그리곤 삼신의 꿈속만큼 했다. 꿈속과 다른 게 있다면 둘이 옷을 전부 벗지 않은 것뿐이었다. 그리고 희가 삼신의 위로 올라탔다는 것만 달랐다. 하지만 때때론 삼신이 위에 있기도 했다. 비바람이 끊임없이 희의 방 창문을 두드렸다. 삼신은 오르가즘을 느꼈다. 번개가 쳐서 방 안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천둥이 콰르르 쏟아져 내렸다. 삼신은 작게 흐느끼면서 희의 가슴 위로 쏟아졌다. 희가 고개를 들어서 삼신에게 입을 맞춰줬다. 삼신은 깔깔 웃으며 희의 목을 물었다. 희가 기겁했다.

“야, 왜 그래!”

“너무 좋은데 달리 표현할 방법을 찾을 수 없어서 잠시 짐승이 됐어!”

이삼신은 벌어진 셔츠를 추스르곤 희의 위에서 내려와 기진맥진하게 눈을 감았다. 비바람이 잦아들었지만 천둥은 계속해서 방을 흔들었다.

“희야.”

삼신은 눈을 감은 채로 불렀다. 희의 손가락이 삼신의 얼굴 위로 머뭇거리며 지나갔다. 닿지는 않았고 그냥 그 위를 서성거리다 돌아간 것이었다.

삼신은 어젯밤 꿈이 떠올랐고 하고 싶은 말도 떠올랐다. 그래서 그것을 말했다.

“나는 가장 야한 방식으로 너를 받아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야 일단은.”

“일단은?”

“일단은!”

삼신은 눈을 뜨고 단호하게 단언했다.

“우리가 평생 사귈 순 없잖아.”

“너 정말 무드 없다…….”

“하지만 널 평생 기억할 수 있을 거야.”

삼신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웃었다.

“너도 살면서 때때로 다른 누군가를 찾겠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네. 일단은.”

“일단은?”

“일단은.”

삼신은 희 쪽으로 몸을 돌리곤 턱을 괬다. 그리곤 장난스럽게 찡그렸다. 마구 헝클어진 포니테일이 어깨선을 따라 미끄러졌다.

“그렇지만 넌 다신 나처럼 촌스러운 이름을 가진 여자애를 찾진 못 할 거야.”

천둥이 쳤다. 희는 천천히 대답했다.

“그럴지도…….”

희는 잠깐 누워서 생각에 잠긴 듯 했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떠오른 것처럼 말했다.

“키 좀 더 컸으면 좋겠다. 누우니까 차이도 안 느껴지는 것 같아.”

“그래? 그런가?”

삼신은 별 다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정말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넌 언젠가 키도 품도 더 클 테고 사실 여기서 멈춰도 상관없다고 생각해.”

“왜?”

“네 침대에선 네 냄새가 나서 여기서 섹스하면 네 품이 정말 크게 느껴지거든. 위 아래로 안긴 느낌이랄까.”

“난 모르겠는데.”

“우리 집엔 침대 없어.”

삼신은 유감스럽다는 투로 비장하게 말했다.

“근데 원한다면 금은동 내쫓고 우리 집에서 하자. 이불 위라서 좀 아플 거야.”

“생각해볼게.”

희가 삼신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삼신은 손을 들어서 아주 큰 손바닥으로 그 정수리를 슬슬 쓰다듬어줬다. 그러자 발가락 끝이 간지럽기 시작했다. 삼신은 아, 물거품이 될 차례인가, 라고 생각했다. 한여름에 꿀 수 있는 꿈들은 결국 사라지기 위해 태어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삼신은 사라지는 대신 기진맥진해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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