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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AU이벤트로그 (1)»
1차/old 2019. 10. 22. 15:38

  1. 

 네 번째 식사를 걸렀을 때, 바르바라는 자신이 더 이상 배고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루 내내 굶었는데도 뱃속은 조용했다. 오히려 이보다 더 만족스러운 상태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신 목구멍이 타는 듯이 아파왔다. 누군가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바르바라는 처음에 그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가, 한밤중에 박차고 일어나 식당으로 달려갔을 즈음에야 그것이 극심한 갈증임을 깨달았다. 물, 와인, 혹은 어떤 것. 목을 축축하게 적실 수 있는 액체가 절실했다. 바르바라는 미친 사람처럼 와인을 병째로 벌컥벌컥 들이켰다가 헐떡이며 모조리 토해냈다. 목구멍이 꿈틀거리며 아우성치고 있었다. 빈 뱃속에서부터 격렬한 거부반응이 올라왔다. 바르바라는 몸서리쳤다. 이게 아니야!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으로 번쩍 생각이 내리꽂혔다. 하지만 이 성에 나를 도와줄 만한 게 있을 거야. 

 바르바라는 자신이 토한 와인으로 시뻘겋게 젖은 카펫을 밟으며 조용히 침실로 돌아갔다. 

 

  2. 

 바르바르는 이틀 동안 방 안에 틀어박힌 채 바깥으로 흩날리는 눈을 쏘아보았다. 북쪽의 신화와 괴담을 떠올리면서 즐거운 상상을 해보려 했다. 잘 되지는 않았다. 기억나는 건 많았지만 지금의 바르바라에게 도움이 될 만한 게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목구멍이 타는 듯이 뜨거워졌다. 바르바라는 침착하려 애썼다. 문득 늑대가 되었다가 다시 인간이 되려고 노력하던 욘디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러나 욘디는 인간이 되기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괴물은 그런 식으로 탄생하곤 한다)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그럼 지금 나는 늑대가 되고 있는 걸까. 하지만 늑대는 갈증을 느낄 때 웅덩이에 얼굴을 처박고 물을 마시지 바르바라처럼 누군가의 목덜미를 떠올리지는 않는다. 

 그랬다, 바르바라의 마음속으로는 단 한 가지만이 강렬했다.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이미지가 되어 바르바라를 뒤흔들고 있었다. 다른 욕망은 깡그리 사라져버리고 오로지 그 욕망만이 사라진 욕망들의 몫까지 더욱 강렬하게 불타고 있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을 원했다. 하지만 아드리안 자체를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음속으로 아드리안을 그려보면,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몸을 구성하는 부위 하나하나를 포착하고 시선 안에서 난도질할 수 있었다. 아드리안의 얼굴과 어깨와 팔다리와 몸통을 분리하고 마침내는 목덜미만을 시선에 남길 수 있었다. 귀를 기울이면 그 목덜미를 타고 흐르는 따뜻한 개울소리를 들을 수도 있었다. 아드리안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 뜨겁고 따뜻한 피의 고랑. 

 바르바라의 입에서 침이 솟아올랐다. 

 

 3. 

 아드리안은 거의 나흘 만에 식당에 모습을 드러낸 바르바라를 보고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그는 정제된 몸짓으로 우아하게 나이프를 움직여 생선을 잘라 먹었고, 바르바라가 곁으로 다가와 옆자리에 앉았을 때도 와인을 마시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드리안은 바르바라가 낯선 상황 속에서 마음을 정리하느라 시간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하는 걸지도 몰랐다. 모두는 이곳에 너무 갑작스럽게 도착했고 너무 많은 걸 기억하지 못 했는데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반면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곁에 앉자마자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카락을 모조리 쥐어뜯으면서 애원하거나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미쳐버리는 중인 것 같았다. 아드리안의 몸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촉수가 뻗어 나와 바르바라를 끌어안고 감싸고 뒤흔들고 있었다. 아드리안은 살아있음으로써 온힘을 다해 바르바라를 유혹하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번쩍 고개를 들어 아드리안을 바라보았다.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아드리안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라는 평소처럼(평소처럼?) 나긋나긋하게 말해보려고 애썼다. 

 “시세로.” 

 하지만 다음 템포 만에 바르바라의 목소리가 무너졌다. 

 “가까이… 가도 돼?” 

 바르바라는 가면을 벗어던졌다. 

 “거기 얌전히 있어.” 

  

 4. 

 의자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이 신음을 뱉으며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다 말고 주저앉았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을 밀쳐 넘어뜨리고 그 위에 올라탔다. 테이블에 아슬아슬 걸쳐져있던 식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드리안과 바르바라는 서로를 오래 마주보았다. 하지만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르바라가 아무 생각도 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뭐해요? 바르바라도 그런 짓을 하게 됐어요? 다른 사람들처럼.” 

 아드리안이 말했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명령을 이해하지 못 한 사냥개가 고개를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아드리안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 한 것 같았다. 

아드리안이 다시 입을 열었다. 

 “바르바라도….” 

 그때였다. 바르바라가 아드리안의 목덜미로 얼굴을 묻었다. 아드리안이 흠칫 몸을 떨었다. 바르바라는 바로 그를 깨물지는 않았다. 코를 박고 목덜미를 훑으면서 냄새를 맡았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면서 아드리안이 살아있기 때문에 내뿜는 생기를 모조리 빨아먹으려 했다. 숨소리는 점점 거칠어졌다. 바르바라는 두 손으로 아드리안의 뺨을 어루만지고 어깨를 감싸고 목덜미에 매달렸다가 허리를 조일 듯이 붙잡았다. 숨이 지나는 감촉이 느껴질 때마다 아드리안은 미약하게 고개를 비틀었다. 

 “으…,” 

 아드리안은 침착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게 잘 될 리 있을까? 

 마침내 바르바라가 최적의 장소를 찾아냈다. 아드리안의 목덜미는 이틀 내내 그려본 것보다 더 부드럽고 탐스러워 보였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묻고 아드리안의 살결 아래로 흐르는 피를 느꼈다. 뺨을 타고 느껴지는 아드리안의 맥박.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아드리안이 그녀의 품에 있어서 정말이지 행복했다. 그를 너무 강렬히 원했다. 목구멍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불덩이가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천천히 혀를 내밀었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목덜미를 접시 핥듯이 싹싹 핥아댔다. 살을 녹여서 뼈가 드러날 때까지 핥아대려고 했다. 그러나 그녀를 정말로 기쁘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드리안의 살이 아니라 살이 숨기고 있는 바로 그것이었다. 바르바라의 욕망이 마침내 목구멍을 빠져나와 혓바닥 위에 앉았다. 난나, 이름값을 해야지. 한 건을 하는 거야. 그녀의 욕망이 말했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입을 벌렸다. 

 아드리안이 품에서 부르르 몸을 떠는 게 느껴졌다. 

 

 5. 

 아드리안은 반항했다. 바르바라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칠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반항했다. 아드리안은 바르바라에게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무엇을?) 싫다고 말했다. 떨어지라고 팔을 휘저었다. 바르바라는 그럴 때마다 아드리안을 결코 놓치지 않을 것처럼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살을 파먹을 것처럼 혓바닥을 움직이면서 이를 더 깊숙하게 박아 넣었다. 오랜 시간 갈증으로 고통 받은 만큼 피를 빨아올렸다. 아드리안의 피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축축했다. 쩍쩍 갈라져 있던 바르바라의 목 곳곳으로 스며들어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다. 바르바라의 욕망이 기쁨의 비명을 질러댔다. 

 아드리안의 얼굴은 금세 창백해졌다. 아드리안은 새로운 심장이 생긴 것 같았다. 일정한 리듬을 타고 온몸의 피가 한곳으로 펌프질하듯 빨려 올라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새로운 심장은 피를 돌려주는 대신 모조리 빨아먹었다. 한 번 빨려 들어간 피는 다시는 되돌아오지 못 했다. 아드리안은 급격한 현기증을 느꼈다. 반항할 힘이 없었다. 바르바라는 탐욕스러운 도둑의 기질을 타고났고 아드리안은 체념에 길들여진 사람이다. 

 아드리안이 작게 신음하면서 바르바라에게 중얼거렸다. 

 “그만,” 

 아드리안은 현기증 속에서도 몸을 뒤흔드는 열기를 느꼈다. 

 “그만,” 

 하지 말라는 말은 이제 목구멍을 맴돌았다. 바르바라는 아예 아드리안을 깔고 누워 온몸을 웅크리고 오로지 아드리안에게 매달렸다. 아드리안이 힘겹게 몸부림치다가 탄성을 내질렀다. 

 “바르바라.” 

 아드리안이 고통스럽게 신음했다. 

 “나를 죽일 셈이야?” 

 그 말에 바르바라가 번쩍 고개를 들었다. 바르바라의 두 뺨은 기쁨과 흥분으로 물들어 있었고 입술은 피로 흥건했다. 아드리안의 새하얀 뺨 위로 시뻘건 핏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아드리안은 반사적으로 자신의 목덜미를 쥐었다. 상처부위가 화끈거렸다. 손바닥 사이로 울컥울컥 피가 새는 게 느껴졌다. 

 아드리안은 생리적인 눈물을 삼키며 중얼거렸다. 

 “그만해요… 죽을 것 같아.” 

 “엄살떨지 마, 시세로….”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숨을 골라보려 애쓰다 기침했다. 그녀는 몇 번 핏방울을 토해내고는 아드리안의 두 뺨을 움켜쥐었다.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드리안이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바르바라는 이런 사람이 아니라, 좀 더….” 

 “흘릴 것 같으니까 입 다물어.” 

 바르바라는 다시 아드리안의 목덜미로 파고들었다. 

 

 6. 

 목구멍의 열기가 해소되자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아드리안에게서 몸을 일으킬 때,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궈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다리에 스치는 아드리안의 아랫도리 사정은 모른 척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려 바닥에 늘어진 아드리안이 욕망과 고통 속에서 다리를 떠는 것을 지켜보다 말고 방으로 돌아왔다. 이불을 갑옷처럼 감싸고 다리만 내놓은 채로 침대 위에 늘어졌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아드리안의 피를 너무 많이 마신 것 같았다. 그걸 마시면 마실수록 떠올릴 수 있는 것들이 희미해지고 마침내는 없는 일처럼 취급되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천천히 눈을 감고 몸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자신이 아드리안보다 더 성적으로 흥분한 것을 알았지만 아드리안에게 돌아가지 않으려고 온힘을 다해 자신을 제어했다. 다리 사이가 뜨거워진 것을 알았지만 얼마 남지 않은 과거의 기억을 붙잡으려 몸부림쳤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이 자신의 아들과 비슷한 이름이라는 것을 상기함으로써 그를 인간으로 인식하는데 성공했다. 내일은 조금 상냥하게 대해줘야겠다. 이미 늦었다는 걸 알면서도 바르바라는 가면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그 날 새벽 이불 속에서 몇 번 뒤척이던 바르바라는 밤이 끝나가도록 해소되지 않는 성적인 욕망 때문에 짜증 섞인 신음을 내질렀다. 결국 그녀는 언젠가 와인을 마시러 갈 때 그러했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식당으로 내려갔다. 맨발로 정신없이 달려갔다. 하지만 아드리안은 이미 자리를 떠나고 없었다. 바르바라는 찬 바닥에 웅크린 채 작게 욕지거리를 하다가 바닥에 떨어져 차갑게 말라가는 핏방울을 손으로 쓸었다. 그리고 축축해진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고 천천히 빨았다. 아드리안의 피구나. 바르바라는 황홀하게 눈을 감았다. 

 

 7. 

 그 때 아드리안이 중얼거린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아드리안은 바르바라가 이런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아드리안은 과거의 바르바라로부터 어떤 상냥함, 자신의 목덜미를 물어뜯거나 게걸스럽게 탐하지 않는 품위를 찾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이전의 일들이 잘 기억나지 않았고 잘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건, 과거의 그녀는 지금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었다. 과거의 자신은 곧잘 욕망을 숨기고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욕망이 숨길 수 있을 만큼 미약하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바르바라가 욕망을 숨기고 상냥해질 수 있던 것은 그녀가 능숙하고 어른이기 때문이었다. 중요한 건 강렬하고 추한 욕망은 언제나 그녀의 안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각각의 갈래로 뻗어나가 바르바라의 삶에 녹아들어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의 바르바라는 어떠한가? 그녀가 원하는 건 이제 아드리안밖에 없다. 원하는 것은 빼앗으면 그만이고 이제 그녀는 아드리안으로부터 아드리안이라는 존재를 빼앗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체사레의 자식이고 그 사실을 유감없이 드러낼 준비가 되어있었다. 

 

 8. 

 다음 날에도 아드리안은 바르바라를 피해 달아나거나 분노하며 침을 뱉거나 욕지거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르바라를 마주쳤을 때의 표정을 감추지는 못 했다. 아드리안은 바르바라로부터 자연스럽게 몇 걸음 떨어져서 그녀를 탐색했다. 바르바라는 은근하게 손목 안쪽을 다른 손으로 가렸다. 문양을 보여주지 않고 온순한 표정을 지었다. 아드리안은 혼란스러워했다. 

 “이제… 된 건가요?” 

 아드리안은 고작 그걸로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는 어쩜 저렇게도 강렬한 욕망을 모를까? 탐욕스러운 인간의 본성을 모르는 것일까?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목이 아프지 않아….” 

 “다가오진 마요.” 

 아드리안은 손을 들어 앞으로 나오려는 바르바라를 제지했다. 

 “당신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요.” 

 “나도야.”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드리안이 몇 걸음 뒤로 물러나다가 멈추어 섰다. 그는 바르바라를 탐색하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이 자신의 얼굴과 몸짓에서 과거의 자신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바르바라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며 두 팔을 벌렸다. 

 “시세로….”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목을 감고 자신의 어깨로 끌어내려 껴안았다. 

 “많이 아팠지.” 

 아드리안이 딱딱하게 굳은 채 천천히 숨을 몰아쉬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그를 쓰다듬어주었다. 아드리안이 원하는 대로 행동해주었다. 

 “미안해, 시세로.” 

 바르바라가 속삭였다. 

 “미안해….” 

 “웃기지 마요, 방금까지 날 잡아먹고 있었잖아….” 

 아드리안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아드리안의 어깨 너머에서 게슴츠레 눈을 뜨고 차갑게 웃었다. 

 “이제 이런 난나는 별로니?” 

 아드리안은 잠시 침묵하다가 작게 신음했다. 

 “아뇨….” 

 아드리안이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아뇨, 이렇게 해주세요.” 

 그래서 바르바라는 그렇게 해주었다.

2018/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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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로사리온 마나»
1차/old 2019. 10. 22. 15:16

 1. 

 마리사 체사레가 써드빌로 내려온 건 그녀의 딸 바르바라가 열여섯 살 때였다. 켈커스에서 써드빌로 내려오는 데에 꼬박 한 달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따로 챙겨온 이삿짐이 없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마차와 말을 번갈아 타고, 때로는 도보로 걸어서 북쪽에서부터 최남단까지 여행했다. 중간에 돈이 필요하면 챙겨온 패물로 물물교환을 했는데, 그래도 돈이 부족할 때에는 주머니가 그득한 이들의 지갑을 털어서 썼다. 영락없는 체사레의 방식이었다. 

 써드빌로 내려온 마리사가 가장 먼저 한 일은 풍광이 좋은 빈 집 한 채를 사들이는 것이었다. 이층에 방이 다섯 개나 딸린, 써드빌로 치면 꽤나 큰 규모의 집이었다. 써드빌 인근 숲에서 베어낸 통나무로 기둥을 만들었기 때문에 현관에서부터 그 향기롭고 달큰한 나무냄새가 진동을 했다. 그 냄새를 맡으며, 바르바라는 앞으로의 삶이 어찌되었든 이전의 삶과는 무척 달라질 것임을 직감했다. 켈커스 지방에서는 결코 맡을 수가 없는 냄새였기 때문이다. 

 이사 온 이후 한동안 두 모녀는 자신들의 새로운 터전을 여관으로 꾸미는데 품을 들이기 시작했다. 목수의 집을 드나들며 가구 값들을 흥정하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이었다. 마나 집안과 체사레 집안이 만나던 순간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웠고 수상쩍은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열여섯 살의 바르바라 체사레는 리온 마나를 그곳에서 처음 보았다. 리온은 그 때 여섯 살이었다. 

 “지붕 보수도 이곳에서 할 수 있는 모양이죠?” 

 마리사 체사레가 묻자, 리온의 아버지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어른들의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바르바라는 얌전히 마리사의 뒤편에 서있었다. 리온이 그녀를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말없이 리온의 시선을 즐기다가 느닷없이 리온 쪽으로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음침한 표정을 지었다. 리온이 깜짝 놀랐다. 바르바라는 흡족한 표정으로 쿡쿡 웃다가 문지방을 나서는 어머니를 따라 나갔다. 나중에 보자는 말도 없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그런 식으로 흐지부지 끝이 났다. 

 체사레 여관이 문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 달이 더 흐른 이후였다. 애초부터 방문객이 적은 써드빌에서 여관을 여는 건 무모한 짓이라고들 이야기하는 주민도 있었다. 마리사는 걱정하지 않았다. 체사레 집안은 굶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숙달된 여관주인이 아니라 능숙한 도둑이었고 필요하다면 언제든 장소를 옮겨 새로운 사업을 벌일 준비가 되어있었다. 바로 그런 이유로 그녀는 새로운 체사레 여관에 따로 간판을 달지 않았다. 한동안 주민들은 두 모녀의 여관을 “그 집” 혹은 “그 여관”이라고 지칭했다. 

 마나 집안과 다시 만나게 된 건 여름이 다 흘러갈 무렵의 일이었다. 언젠가의 대화에서 예견되었던 것처럼 마나 집안의 남자들이 여관의 지붕을 보수하기 위해 연장을 들고 찾아왔다. 리온은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연장도구가 들어있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현관 앞에서 손님을 맞이하다말고 리온과 눈이 마주쳤다. 리온은 그녀를 발견하자 조금 긴장한 기색이었다. 바르바라는 그를 놀려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어른들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 위에서 견적을 재고 있을 때, 리온은 사다리 앞에 서서 이따금 위쪽을 흘끔거리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리온에게 다가가 말을 붙였다. 

 “안녕?” 

 리온은 조금 놀란 기색이다가 곧장 붙임성 좋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이름이 뭐니?” 

 바르바라는 덧붙였다. 

 “마나라고 부르기에는 너희 집안 식구들이 너무 많잖니.” 

 “리온이야.” 

 “그래, 리온.” 

 바르바라가 그의 이름을 중얼거려보았다. 리온. 

 “내 이름은 바르바라야.” 

 “아까 난나라고 불리던 걸.” 

 “응, 그것도 내 이름이야.” 

 바르바라가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리온은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조금 찡그렸다. 

 “이름이 두 개인 사람도 있어?” 

 “바르바라보다는 난나가 더 짧고 편리하잖니. 하지만 원래 이름은 바르바라니까. 그래서 두 개가 되는 거야.” 

 “알 것 같아. 나도 비슷해.” 

 리온이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하지만 바르바라와 난나는 발음에서 전혀 닮은 구석이 없네.” 

 “그런 법도 있는 거란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애칭과 같은 켈커스 지방의 사투리와 얽힌 사연들, 자신이 태어났던 날과 체사레 집안의 생활양식을 설명해주기 귀찮았기 때문에 그냥 그런 식으로 대답했다. 

 지붕에서 어른들이 내려왔다. 리온은 사다리를 붙잡고 어른들이 안전하게 내려올 수 있도록 보조했다. 바르바라는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서서 리온이 하는 것을 보고 있었다. 리온의 체구가 너무 작았기 때문에 리온은 사다리를 붙잡고 있는 게 아니라 거의 매달려있는 것처럼 보였다. 

 ‘귀엽네. 겁주기도 재밌고 손으로 제압하기도 쉬울 것 같아.’ 

 리온이 뒤쪽을 흘끔거리다 바르바라와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바르바라는 씩 웃어주었다. 이번에 리온은 겁먹지 않았다. 

 마나집안의 어른들은 사다리에서 내려온 후에 리온의 정수리를 쓰다듬었다. 그런 후 도면을 들고 차례대로 여관으로 들어갔다. 마리사가 응접실에 주전부리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그들은 자리에 앉아 지붕 보수비에 대한 이야기를 몇 번 나눈 후에 곧장 다른 쪽으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마나집안은 써드빌의 생활은 어떻고 어떤 연유로 내려왔는지. 여관을 전에도 열어본 적이 있는지 따위를 물었다. 그럼 마리사는 능숙하고 유하게 질문을 받으며 정작 핵심적인 정보는 슬그머니 미루어놓는 식으로 대답했다. 나중에는 마나집안의 질문을 모두 바르바라가 대답했는데, 그녀는 어머니보다 대화를 이끄는데 훨씬 재주가 있어서 어른들을 종종 웃게 만들었다. 그러는 동안 마리사는 마나집안의 연장도구를 시선으로 쓸어보다가 습관처럼 작은 망치 하나를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건 놀이 같은 것이었는데, 바르바라는 마리사가 마나집안이 현관을 나서기 전에 감쪽같이 그 망치를 원래 자리에 되돌려놓고는 자신을 향해 빈 두 손을 펼치며 깔깔 웃어댈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리사가 주머니에 망치를 집어넣는 것을 알게 된 순간에도 슬그머니 미소를 짓고는 딴청을 부렸다. 

 리온은 웃지 않았다. 바르바라와 마리사의 행태를 목격한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리온이 뚫어져라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챈 바르바라가 고개를 돌려 리온의 시선을 받아쳤다. 리온이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바르바라는 모든 상황을 파악했다. 바르바라는 마리사와 눈짓을 교환하고는 리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그런 짓… 안 하는 게 좋아.” 

 리온이 진지하게 말했다. 바르바라는 웃는 낯으로 리온의 충고를 듣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진귀한 망치라서?” 

 “아니, 우리 부모님이 알면 마을에 소문이 날 테니까.” 

 리온이 바르바라를 무서워하는 것과 하고자 하는 말을 망설임 없이 내뱉는 건 별개의 일인 모양이었다. 망치가 아까워서 그런 말을 꺼낸 것도 아니었다.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리온을 내려다보다가 서늘하게 웃었다. 

 “너도 마나집안의 자식이잖아. 소문낼 거니?” 

 리온은 바르바라의 표정을 보고는 반사적으로 주변을 살폈다. 복도의 방문은 모두 닫혀 있었고, 창문은 모두 커튼이 쳐져있었다. 주변은 침침하고 음산했고, 나무냄새가 맹렬하게 진동했다. 리온이 다시 바르바라를 쳐다보았다. 

 “리온, 그거 아니?” 

 “뭘?” 

 불안을 감지한 리온이 작게 속삭였다. 

 바르바라의 목소리가 낮고 비밀스러워졌다. 

 “북쪽에는 남의 비밀을 함부로 이야기한 사람에게 찾아오는 사슴이 있어. 뿔 한쪽이 잘려있으니까 멀리서 봐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단다. 그 사슴은 비밀을 떠벌린 이들을 보복하기 위해 숲에서부터 그들을 찾아오곤 하지. 그런 뒤에는 

어떻게 되는지 아니?” 

 “아니.” 

 리온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 순간, 바르바라가 고개를 숙이더니 리온의 오른쪽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소름끼치게 속삭였다. 

 “사슴이 한쪽 귀를 잘라간다!” 

 리온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러더니 사색이 된 얼굴로 쏜살같이 계단으로 도망쳤다. 바르바라는 느긋하게 층계를 밟고 내려오다 말고 일층에 서있는 마리사와 눈이 마주쳤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귀를 가리켰고 마리사는 모든 뜻을 이해했다. 

 마나집안은 막 현관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그들은 허겁지겁 뛰어온 리온을 발견하고는 어딜 다녀왔냐고 물었다. 리온이 입을 뻐끔거리는데, 어느새 리온의 뒤에 다가온 바르바라가 온화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했다. 

 “놀고 있었어요.” 

 “아가, 사슴을 기억하렴.” 

 마리사가 리온에게 말했다. 리온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리사의 주머니로 시선을 내렸다. 마리사의 주머니는 홀쭉했다. 마리사가 빈 두 손을 펼쳐보였다. 

 “얼른 안 가고 뭐하니, 아가?” 

 리온은 뒤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두 모녀는 바짝 긴장한 작은 어깨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서로를 마주보며 작게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2. 

 그 뒤에도 계절이 바뀔 때면 마나 집안의 사람들이 어김없이 체사레 여관으로 찾아와 연장을 챙겨들고는 지붕으로 올라갔다. 하루는 지붕을 엮은 통나무 몇 개를 들어내야 한다기에 마리사가 그렇다면 새로운 지붕에 전나무를 쓸 수도 있는 거냐고 물었다. 전나무는 켈커스 지방 숲의 명물이다. 리온의 아버지는 나무를 구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가능하다고 대답했다. 마리사는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그 뒤로 계절이 바뀔 때마다 체사레 여관의 나무재질이 조금씩 바뀌었고 종국에는 써드빌의 모든 이들이 그 여관을 ‘전나무 집’이라 부르게 되었다. 바르바라는 낯설지 않은 냄새가 나는 집안에 앉아 장부를 정리하고 시트를 치우고 빨래를 했으며, 손님이 들지 않는 날에는 바닷가를 산책하다 종종 먼발치에서 보이는 검은색 리퍼코트의 사람들을 구경했다. 써드빌에는 정말로 방문객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여관을 지키며 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써드빌을 쏘다니다가 느닷없이 마주치게 되는 한가한 선루스 기사단을 지켜보는 데에 남은 시간 대부분을 소비하게 되었다. 바르바라가 기사가 되기로 결정한 건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는 그 생각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어느 날 문득 리온에게 그 사실을 당연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나 선루스에 들어가려고….” 

 지붕을 보수하기 위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던 리온은 지붕에 앉아있는 바르바라를 보고 조금 놀란 기색이다가, 바르바라가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을 듣고는 다른 의미로 한 번 더 깜짝 놀랐다. 

 “진심이야?” 

 “안 어울리니?”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리온은 말끝을 흐리다가 사다리를 잡고 지붕 위로 마저 올라왔다. 

 높은 지붕에서는 써드빌의 풍경이 잘 보였다. 날씨는 청명하고 깨끗했다. 드문드문 들어선 집의 지붕들과 굴뚝, 빨래를 매달아놓은 지지대와 광장으로 이어지는 중앙도로가 보였다. 먼 곳에 써드성이 보였고, 써드성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선루스 기사단 본부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다리를 겹쳐 앉은 채로 그곳을 보고 있었다. 리온이 지붕을 밟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난나가 기사단에 들어가고 싶어 할 줄은 몰랐어.” 

 “그러니.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다른 이유라도 있어?” 

 바르바라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마리사처럼 살고 싶지 않아.” 

 리온은 바르바라의 곁에 앉았다. 

 “그런 일이 싫어졌어?” 

 “그럴 리가. 내가 가장 잘 하는 일이란다.” 

 바람이 불어서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흩날렸다. 바르바라는 먼 풍경을 바라보았다. 

 “내 말은, 리온… 우리 엄마는 이미 한 번 실패했다는 거야. 도둑으로서. 난 그런 일 겪고 싶지 않아. 나도 여관을 운영하다 다른 남자랑 눈이라도 맞으면 어떡하니? 남자랑 눈 맞기 싫어. 마음을 빼앗기고 허술해지고 싶지 않아. 애 낳기도 싫고.” 

 바르바라는 드물게 진심을 이야기했고 리온은 잠자코 들었다. 

 “그래서?” 

 “그래서… 내 친구의 조언을 따라보기로 했지.”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려 리온을 쳐다보았다. 

 “좀 더 좋은 곳에서 좀 더 다른 일을 해보라고 그 애가 말했었던 거 있지. 이곳에 오니까 새삼 기억이 났어.” 

 바르바라는 작게 웃었다. 

 “격려해줄 거니?” 

 “난나가 원한다면.” 

 리온이 대답했다. 

 열여덟 살이 되자 바르바라는 입단식을 치르기 위하여 혼자 선루스 기사단에 방문했다. 검술을 독학했기 때문에 스스로의 실력에 확신을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였다. 바르바라는 대련장에 올라가 시험 삼아 검을 휘둘러보고는 자신이 패배할 것을 직감했다. 얼마 뒤, 바르바라는 고배를 마시고 여관으로 돌아왔다. 리온과 만난 건 그로부터 몇 주 뒤였다. 지붕을 보수하러 온 리온이 현관 앞에 기대어 앉은 바르바라와 마주치고는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 

 “응, 안녕.” 

 리온이 사다리를 펼치고 지붕에 고정시키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바르바라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떨어졌어.” 

 “응, 들었어.” 

 리온이 상자를 열면서 대답했다. 

 “솔직히 들어갈 줄 알았는데.” 

 “그러니.” 

 “난나는 어쩐지…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어.” 

 바르바라가 쿡쿡 웃었다. 

 “넌 날 무서워하니까.” 

 리온이 조금 창피한 기색으로 발끈했다. 

 “이젠 아니야.” 

 계절이 바뀌었고 두 사람이 공평하게 두 살 씩 먹었을 때였다. 리온은 열두 살이 되었고 체사레 모녀가 들려준 미신을 믿지 않을 만큼 세상을 알게 되었지만 바르바라는 리온이 종종 자신을 마주칠 때마다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작은 어깨, 부드러운 정수리와 크게 뜨인 눈동자 같은 것을 시선으로 쓸어보다가 눈이 마주치면 음침하게 웃어주었다. 그럼 리온이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다시 바르바라를 쳐다보며 입모양으로 난나! 라고 중얼거리고는 했다. 

 “기사가 될 거니까 이제 도둑질은 그만둔 거야?” 

 사다리를 고정시키고는 할 일을 끝낸 리온이 바르바라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바르바라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가 성의 없이 대꾸했다. 

 “글쎄… 어떨 것 같니?”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그러자 바르바라가 리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하지 않아.” 

 …. 

 “정말이야….” 

 그런 후 바르바라는 비밀스러운 무언가를 이야기한 사람처럼 쿡쿡 웃었다. 

 곧이어 마나 어른들이 연장을 챙겨들고 도착했다. 바르바라 옆에 앉아있던 리온이 엉덩이를 털고 일어났다. 작업을 할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있지, 난나. 얼마 전에 벼락이 떨어져서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마구간이 불에 그슬린 거 알아?” 

 리온이 지붕으로 올라가는 어른들의 보조를 도와주려고 연장도구를 챙기며 물었다. 바르바라는 잠시 앓는 소리를 내다가 딴 생각으로부터 빠져나왔다. 

 “뭐라고?” 

 “벼락 말이야.” 

 리온의 시선이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리다 말고 능숙하게 추임새를 넣었다. 아아, 벼락. 그래, 벼락 말이지. 하지만 며칠 전에 벌어진 그 기묘한 사건을 떠올리는 데에는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추임새 이후 잠시 침묵하던 바르바라가 마침내 그 사건을 기억해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기억나. 알고 있어.” 

 “난나도 조심해. 종종 지붕에 올라가곤 하잖아.” 

 리온이 걱정스러워했다. 바르바라는 이번에도 작게 쿡쿡 웃었다. 

 “괜찮아, 그딴 거 무섭지도 않아….” 

 “무섭지 않아?” 

 “그럼. 사실 그것도 내가 만든 거거든.” 

 “벼락을?” 

 “벼락을.” 

 못 믿겠어? 바르바라가 마녀처럼 무시무시한 얼굴로 눈을 가늘게 뜨자 리온이 어쩔 줄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농담은 거기서 끝났다. 바르바라가 다시 지친 것처럼 현관 기둥에 기대자, 리온은 사다리를 붙잡고 한 칸씩 오르기 시작했다. 

 “난나, 기운 내.” 

 사다리 끄트머리에 도달했을 즈음 리온이 바르바라의 머리 위에서 말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약해보였다는 생각에 조금 짜증이 났다. 

 “무슨 소리야?” 

 바르바라가 심술궂게 대답했다. 

 “오늘 뭐라도 도둑맞지 않게 조심해.” 

 바르바라의 사춘기는 그런 식으로 권태롭게 지나갔다. 

 열아홉 살에 바르바라는 결국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에 입단했다. 기사단 숙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으므로 바르바라는 여관보다 숙소에 더 오래 머물러 있었다. 리온과 만날 일도 예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이따금 거리에서 마주치는 일도 있었다. 그 때마다 리온은 어색한 듯 혹은 익숙한 듯 바르바라의 검은색 리퍼코트를 바라보았고, 바르바라는 모른 척하면서도 리온만큼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미미한 미소를 지으며 리온을 스쳐지나갔다. 마나 집안은 여전히 계절이 바뀌면 지붕을 보수하기 위해 체사레의 여관 꼭대기에 사다리를 놓았다. 

 

 3. 

 서네스 섬의 귀환자들이 써드빌로 돌아온 이후 바르바라는 집무실이나 오즈의 사무실에 처박혀 하루 종일 서류를 뒤적였지만 한밤중에는 밖으로 나와 해변을 걷기도 했다. 때때로 숙소 근처에 앉아서 궐련을 피우기도 했다. 작게 연기를 뿜으면서 생각을 정리하느라 아주 오랜 시간을 보냈다. 잠은 적게 잤다. 그전까지 바르바라는 술이든 흡연이든 잘 하지 않는 편에 속했는데 최근에는 궐련을 피우는 횟수가 늘어났고 그럼에도 바르바라는 아직까지는 자신을 제대로 통제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리온과 마주친 건 그 즈음의 일이었다. 그날에는 리온이 먼저 자리에 나와 있었고 해변 가를 응시하며 불을 물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천천히 걷다 말고 멈추어 서서 리온을 내려다보았다. 리온은 인기척을 눈치 채고 고개를 돌렸다. 

 “안녕.” 

 “안녕.” 

 바르바라는 리온의 옆에 거리를 두고 앉아서 자신의 담배를 꺼내 물었다. 리온이 길게 연기를 뱉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요즘 사무실에 있다며?” 

 “맞아.” 

 바르바라는 작게 한숨을 쉬면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밤바다가 끊임없이 바람을 보내고 파도를 실어 나르고 육지에 몸을 부딪치는 광경을 응시했다. 바르바라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모래사장을 보니 네가 춤을 추던 게 떠오르는구나.” 

 바르바라가 말했다. 

 “작년 축제?” 

 “그래.” 

 써드빌 축제 마지막 날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리온이 처음으로 춤을 리드하던 순간을 기억했다. 그 광경을 먼 발치에서 보았다. 리온은 대장간 둘째딸 마리의 손을 붙잡고 어설프게 발을 맞추었다. 바르바라는 춤판보다 멀리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있었다. 그녀는 곁에 앉은 마나부부가 리온과 마리를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들으며 이따금 포도주를 홀짝였다. 해변 가에 피워 올린 불꽃이 밤하늘을 향해 자꾸만 치솟아 올랐던 것, 그 뜨거운 열기와 이글거리는 주변의 풍경 뒤에서 춤을 추던 리온과 마리가 기억난다. 바르바라는 리온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그 애가 자랐음을 느끼고는 했다. 기사단에서 리온과 마주쳤을 때부터 지금까지 달라지지 않는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정작 리온의 얼굴을 볼 때마다 바르바라는 여섯 살의 그 모습을 찾았다. 애구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누군가를 돕기 위해 뛰쳐나갈 때, 혹은 제 또래의 여자아이의 손을 붙잡고 춤을 출 때 보이는 뒷모습을 마주하고는 친누나마냥 많이 컸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리온 너는 크고 있구나.

 리온이 담배를 입에 물고는 작게 웅얼거렸다. 

 “이제 다들 그 이야긴 안 해.” 

 “하지만 난 종종 그 때가 떠오르는 걸.” 

 바람이 불어서 바르바라의 긴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때…,” 

 바르바라가 말끝을 흐리다 먼 풍경을 보았다. 

 “네가 계속해서 자라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어.” 

 리온이 연기를 뱉어냈다. 바르바라는 어둠 속에서 작게 타오르는 담배 끄트머리의 불꽃에 의지해 리온의 희미한 윤곽을 포착하려 애썼다. 어둠 속에서, 달빛을 받으며 앉아있는 스무 살 청년의 어깨와 턱과 손등을 포착하고 그곳에서 여섯 살의 리온의 모습을 끌어내려고 시도해보았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예전과 지금을 구분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언가 달라졌다는 사실을 바르바라는 리온의 어딘가로부터 느낄 수 있었다. 아마 리온도 바르바라에게 비슷한 걸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무시무시한 마법을 쓴다고 믿은 건 너였는데…,” 

 바르바라가 작게 중얼거렸다. 

 “삶은 늘 이런 식으로 빗겨가곤 하는 모양이지.” 

 쏴아아, 파도가 들이닥쳐서 리온의 숨소리가 풍경에 묻혀 사라졌다. 바르바라는 희끄무레한 연기를 통해 수평선을 바라보면서 작게 쿡쿡 웃다가 그만두었다. 마녀의 신화가 사라졌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 그랬다. 

2018/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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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오즈월드 펄 써드»
1차/old 2019. 10. 22. 15:16

 바르바라는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의 새로운 단장을 책상에서 맞이했다. 그녀가 임신 중이었기 때문이다. 오즈월드는 바르바라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채로 “안녕,”이라고 말했을 때에도 무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누군가 바르바라의 임신 사실을 알려준 것일 지도 몰랐다.

 “이름이 뭐니?” 

 바르바라가 서류를 작성하면서 물었다. 

 “오즈월드. 자네는?” 

 “바르바라야.” 

 바르바라는 작성한 서류를 서랍에 집어넣고는 다른 서류 한 장을 꺼내어 일을 시작했다. 

 “오즈월드… 오즈라고 부르면 되겠니?” 

 “편할 대로 하게.” 

 오즈월드가 사무실을 시선으로 훑는 게 느껴졌다. 단장의 사무실은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단장의 책상 옆에 중간 사이즈의 책상을 두고 서류 작업을 하고 있는 바르바라의 근처는 다소 난잡했다. 한쪽에는 이미 작성한 서류가, 다른 한쪽에는 이제 작성해야 하는 서류가 뭉텅이로 쌓여있었다. 빈 잉크병이 책상 한쪽에 밀려있었고, 새 잉크병은 손을 휘둘러도 쏟지 않을 위쪽에 얹어져있었다. 선써드의 단장이 공석이 된 이후로 서류작업은 항상 손이 능숙한 자들이 돌아가며 맡고 있었지만 바르바라가 임신한 이후로는 모든 서류가 그녀의 손을 통해 전달되었다. 매번 들어오는 신입들이 그녀에게 인사하기 위해 사무실을 찾아왔다. 바르바라는 오즈월드 역시 그 신입들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새로 온 단장임을 알았더라면 그런 식으로 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르바라가 급한 서류를 모조리 처리한 후에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오즈의 시선이 순간적으로 그녀를 향했다가 빗겨나갔다. 바르바라는 손을 내려서 자신의 둥근 배를 감쌌다. 오즈월드는 창 너머로 보이는 써드해의 해변을 응시하다가 바르바라에게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바르바라는 작게 웃었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게 물어보렴, 오즈.” 

 동시에 바르바라는 오즈가 새로 온 단장임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상냥한 어투로 대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상사와 친근해 보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 

 바르바라가 임신한 것은 그녀가 스물두 살 때의 일이었다.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바르바라는 진심으로 괴로워했다.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했고, 동시에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던 일이 일어나고 만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납작한 배를 내려다보면서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앞으로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다는 거지. 그녀는 아직 낳지도 않은 아이가 끔찍했다. 이 모든 일이 자신의 선택으로 벌어진 결과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이의 존재가 저주처럼 느껴졌다. 임신을 하고 그 과정에서 맞이할 몸의 변화가 두려웠다. 상상만 해도 구역질이 났다. 

 그 무렵에는 타지아가 써드빌로 내려와 바르바라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의 임신 소식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바르바라는 해맑게 웃는 타지아의 얼굴을 볼 때마다 비틀린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욕지거리를 하고 싶은 충동을 다잡느라 애를 썼다. 이 아이는 사실 잘난 네 약혼자의 아이야. 그런 말을 하면 타지아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바르바라는 늘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자신이 낳게 될 아이를 타지아를 욕보이게 만드는 수단으로 쓰고 그녀에게 온갖 상처를 안겨주고 떠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타지아를 보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임신초기에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공격하고 싶은 마음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넘나들며 자신의 충동과 분노를 다스리느라 진을 뺐다. 임신중반부터는 그럴 힘도 사라졌는데, 다름 아닌 몸의 변화 때문이었다. 바르바라는 정말로 자신의 내부에서 어떤 생명이 태동하고 있음을 느끼기 시작했고 거부감은 점점 심해졌다. 자주 구역질을 하거나 신경질을 부렸는데 곧이어 차분해져서는 평소의 말투로 상냥하게 떠들어대기도 했다. 그 무렵의 바르바라는 도무지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었다. 평생 스스로를 능숙하게 통제하며 살아왔는데, 이제 그 퉁제력으로 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다는 객관적인 사실을 인지하는 것뿐이었다. 

 검 대신 펜을 잡고, 대련장에 올라가는 대신 사무실에 앉아있기 시작한 것은 결과적으로 그녀의 그런 변덕을 다스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몸의 변화에 맞추어 환경을 가꾸기 시작하자 불현듯 몰려오는 분노와 좌절감도, 후회와 스스로에 대한 증오심도, 타지아에 대한 복합적인 감정도 전보다 훨씬 능숙하게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이 일련의 환경 변화를 ‘주저앉혔다’고 표현했다. 무거워지는 몸이 그녀를 의자에 주저앉혔다. 숨겨야 할 감정이 많아졌으므로 진심을 주저앉혔다. 출산을 상상하지 않기 위해 생각을 주저앉혔다. 바르바라는 출산이 기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차라리 낳다가 아이가 죽는다면? 혹은 낳기 전에 죽는다면? 그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과연 얼마나 될까? 오즈월드를 처음 보았을 때에도 서류작업을 하면서 내내 그런 생각들을 했다. 모체에서 자발적으로 아이를 분해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들을 상상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내게 물어보렴, 오즈 

 라고 말했다. 

 

 3. 

 오즈월드는 다음 날부터 단장의 사무실에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서 바르바라와 함께 서류업무를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오즈월드에게 몇 가지 간단한 지시사항을 알려주고는 본인 일에만 착수할 생각이었는데, 예상 외로 오즈가 기사단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기사단의 규모, 숙소의 빈 방의 갯수, 예산과 관련된 모든 것들… 관련된 서류가 있냐고도 물어보았다. 바르바라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몸을 움직여 서랍에서 장부를 꺼내고 관련 서류를 넘겨주었다. 오즈월드는 그것들을 받아 눈으로 살펴보았다. 

 ‘신참인 줄 알았는데.’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그냥 서류작업 거들어온 사무원인 모양이지.’ 

 그 오해는 일주일 동안 이어졌다. 그동안 바르바라는 오즈에게 자잘한 서류를 일방적으로 떠넘기거나 오즈의 이름을 부르면서 반말을 쓰고 이따금 그의 실수를 지적하며 은근하게 놀렸다. 가벼운 농담을 하다가도 갑자기 기분이 바닥을 쳐서 입을 다물기도 했다. 본인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던 사무실에 고작 한 사람 늘었다고 변덕이 다시 시작되려던 참이었다. 바르바라는 날선 기분을 드러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오즈월드와 대화를 나누었다. 오즈월드는 대체로 바르바라보다 일찍 퇴근했다. 혹은 훨씬 늦게 퇴근할 때도 있었는데 그 때는 기사단의 장부를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계산하고 있었다. 다시 생각해보면 바르바라가 대체 왜 오즈월드의 직위를 눈치 채지 못 했는지 모르겠다. 아마 스스로의 몸에 너무 많은 신경을 쏟느라 미처 그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못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오해가 종식된 건 오즈월드가 선루스에 들어온 지 정확히 일주일 째 되던 날이었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같은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나 퇴근했는데, 마을 사람들이 길거리에서 두 사람을 자꾸만 돌아보았다. 그러다 주민들이 먼저 그들에게 말을 걸었다. 그들은 오즈월드를 보면서 도련님이라고 말했다. 바르바라가 얼굴을 찡그린 채 오즈월드를 올려다보았다. 오즈월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당황하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그 호칭에 자연스러웠다. 바르바라는 기시감을 느꼈다. 그 기시감이란… 타지아와 타지아의 약혼자, 혹은 그녀가 살면서 마주친 이들의 권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그 기시감은 오즈월드의 발걸음이 써드성 방향으로 이어질 즈음에 선명한 사실이 되었다. 바르바라는 성으로 향하려고 인사를 나누는 오즈월드를 어이없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왜 말씀을 안 하셨죠?” 

 오즈월드는 오히려 바르바라의 반응에 당혹스러워했다. 

 “왜 갑자기?” 

 “잡일꾼인 줄 알았어요.” 

 “모르고 있었나?” 

 오즈월드도 바르바라 못지않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곧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적당한 텐션으로 돌아왔다. 

 “이제 알았으니 해결됐군.” 

 바르바라는 지난 일주일간의 대화를 빠르게 되짚어보았다. 오즈월드는 느긋하고 여유로운 사람이었다. 바르바라가 날이 서있을 때에도 상대하지 않고 부드럽게 빠져나가는데 능숙했다. 비슷한 연배에서 오는 관록쯤으로 생각했는데 되짚어보니 도련님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성질과 더 가까웠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바라는 금방 표정을 갈무리하고 시선을 흘겼다. 

 “편하게 대했었는데.” 

 “나도 자네가 말을 높이는 게 어색할 다름이야. 여긴 원래 다 그런 줄로만 알았지.” 

 “농담하지 마시길.” 

 그런 후 바르바라는 배에 손을 얹었다가 힘을 주어 아래로 쓰다듬었다. 습관이었다. 그것은 보듬는다기보다 이대로 그 속에 담긴 존재가 뭉개지기를 바라는 것에 가까웠다. 

 “한 번 더 이런 농담을 들었다간 제 아이가 주저앉아버리겠어요.” 

 바르바라가 이죽거렸다. 

 “이런,” 오즈월드가 바르바라의 농담 같지 않은 말에 짧게 대꾸했다. 

 “사과해야 하는 건가?” 

 “농담은 정말 그만두시는 게 좋겠네요.” 

 바르바라가 단호하게 대꾸하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 

 “도련님이라고 불러드려요?” 

 “오즈라고 불러도 좋아.” 

 오즈월드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바르바라 네 도움을 많이 받았으니 편하게 대해도 좋다는 말이야.” 

 “아하,” 

 바르바라는 무미건조하게 중얼거리며 지난 날 자신의 행적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오즈, 이것 좀 해줘. 오즈, 좀 빨리 처리해줄래? 오즈, 손이 느리구나…, 오즈, 괜찮아. 이건 내가 어떻게 하는지 알려줄게. 바르바라는 되짚는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럼, 오즈.”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어 오즈월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일 사무실에서 보자.” 

 “조심히 들어가게.” 

 오즈월드는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미약하게 내려서 바르바라의 배를 응시하다 올라왔는데 어쩌면 그건 바르바라의 착각일 수도 있었다. 임신한 이후로 바르바라는 자신을 향한 모든 걱정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아이의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주 느리게 걸으면서, 바르바라는 노을에 물든 오즈월드의 금발과 한 쌍의 푸른 눈을 떠올렸다. 오즈월드를 그런 식으로 올려다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그러고보니 얼굴 하나는 잘생겼었지. 귀족들은 원래 얼굴도 타고나는 건가. 적어도 바르바라가 만나온 귀족들은 하나같이 출중한 얼굴이었고 오즈월드는 그 중 가장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뜯어보면 오즈월드의 모든 것들이 귀족적인 무언가로 이루어져 있었는데도 바르바라는 전혀 알아보지 못 했다. 심지어는 오즈월드를 올려다보게 된 그 순간에조차 오즈월드가 자신과 너무 먼 사람이라기보다 생각 이상으로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으로 여겨졌다. 그 이유를 고민하면서 바르바라는 느리게, 아주 느리게 집으로 돌아왔다. 

 

 4. 

 바르바라는 ‘편하게 대하라’는 오즈월드의 말을 지켰다. 다음 날 책상으로 돌아온 두 사람은 서류업무를 하면서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바르바라는 그를 여전히 오즈라고 불렀고, 편한 어투를 선호했으며 경어를 쓰지 않았다. 시시콜콜한 대화가 두 사람 사이를 번갈아 드나들었다가 때때로 사적인 이야기들이 튀어나왔고 그럴 때면 대화는 몸집을 불렸다. 바르바라는 오즈월드가 인간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느긋하면서도 일처리에 허술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바르바라에게 관심이 없었다. 바르바라의 임신에 대해서도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출산 이후 벌어질 일들을 “아이가 아주 예쁠 것”이라던가 “건강하게 낳을 것”이라던가 “영특한 아이일 것”이라는 말로 축복하지도 않았다. 그는 필요한 일을 했고 이따금 내키지 않을 때만 바르바라에게 떠넘겼다. 바르바라는 기꺼이 그 일들을 해주었다. 오즈월드의 서류업무는 할 수 있는 한 자신이 해결했다. 돌이켜보자면 알렉스 레밍턴의 고통은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예견되어 있었는데, 순전 바르바라가 오즈월드의 버릇을 잘못 들여놓은 탓이었다. 물론 바르바라가 그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한 적은 없다. 어차피 본인이 그 뒤로 오즈월드의 사무실에 앉아 있을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알렉스가 서류더미 속에서 고통 받고 있을 때 바르바라는 아마 한두 번쯤은 농땡이를 치는 오즈월드에게 가벼운 농담을 하거나 그와 함께 슬그머니 기사단 본부를 빠져나와 갈림길로 빠져보았을 것이다. 

 첫 태동을 느꼈을 때, 바르바라는 책상을 거의 발로 찰 뻔했다. 오즈월드의 앞에서 거의 욕지거리를 할 뻔했다. 그녀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배를 내려다보다 말고 손바닥으로 그 위를 덮었다. 갑자기 들썩이다가 조용해진 바르바라의 낌새를 이상하게 생각한 오즈월드가 고개를 들었다. 바르바라는 표정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몰라서 그냥 그 자리에 뺨을 대고 엎드렸다. 오즈월드가 바르바라의 얼굴을 확인할 수 없는 반대방향으로. 

 “무슨 일이지?” 

 “아무것도.” 

 바르바라가 책상에 얼굴을 붙인 채 조금 웅얼거리는 투로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끔찍한 일이었을 뿐.” 

 “몸이 안 좋은가?” 

 오즈월드는 바르바라가 몸을 엎어놓은 것에 대해 그렇게 물었다. 바르바라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오즈월드를 시선으로 올려다보았다. 겁에 질린 표정을 지우고 탐색의 시선을 하면서 대답했다. 

 “아니, 아니야, 오즈… 그냥 내 안의 그게 좀 움직였을 뿐이야.” 

 바르바라는 아이를 그것이라고 불렀다. 오즈월드가 무언가 말하려는데 바르바라가 제지하고는 말을 이어나갔다. 

 “넌 모르겠지만, 이런 일들이 끔찍한 사람도 있어.”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 아이를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되는 거였다는 게 아니라, 오즈월드에게 신경질을 부리거나 날을 세워 말해서는 안 된다는 소리였다. 바르바라는 오즈월드와의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 선을 넘는 건 스스로 판단했을 때 무척이나 멍청한 짓이었다. 바르바라는 그 모든 것들을 생각해놓고도 말을 그런 식으로 뱉었다. 넌 모르겠지만.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고 서류를 제 앞으로 끌어왔다. 

 “미안… 이제 일하자.” 

 바르바라는 빠르게 수습하고는 고개를 숙였다. 오즈월드의 책상은 잠시 침묵하다가 다시 서류 소리를 냈다. 바르바라는 시선을 내리깔고 깃펜을 힘주어 쥐었다. 스스로를 통제할 수가 없다는 사실에 수치를 느꼈다. 임신을 하면서 가장 견디기 힘든 건 자신을 통제하지 못 하고 휘둘리는데서 오는 수치와 분노와 무력감이었다. 정작 남들이 보기에 바르바라의 모든 동요는 미약하게 외부로 표출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그녀는 잘 해내고 있는 것이었을 테지만, 어쨌거나. 

 이런 일들이 끔찍한 사람도 있어. 

 맞는 말이다. 

 그렇기에 바르바라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오즈월드와 함께 앉아 업무를 보았던 그 무렵을 상기했다. 그리고 변덕이 극심하게 바르바라를 공격하던 그 시기의 오즈월드가 과연 바르바라의 날선 태도를 어떤 식으로 피하고 관여하지 않았는지를 되짚어보고는 했다. 

 

 5. 

 섬에서 돌아온 직후에 바르바라는 보고를 올리기 위해 오즈월드의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 후 한동안 그곳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고 해변을 걷거나, 숙소에 머물거나,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며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어느 정도 머릿속이 정돈되고 선명해졌을 무렵부터 자신이 미루어 둔 할 일을 돌보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기사단을 돌아다니며 후배 기사들을 격려하고 올바르게 사고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한산한 대련장에 쓰러진 무기들을 정리하고 바닥을 쓸었다. 숙소의 방을 정돈하고 쓰레기를 비웠다. 오즈월드의 사무실이 떠오른 것도 그 무렵의 일이었다. 그녀는 오즈월드의 책상 옆에 다시 책상을 놓을 때가 왔다는 것을 알았다. 알렉스 레밍턴은 그 섬에서 돌아오지 못 했기 때문이다. 오즈월드가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을 것을 바르바라는 알고 있었다. 그가 혼자 서류업무를 처리하지 못 할 거란 사실도 알고 있었다. 오즈월드와 직접적으로 연관되어 본 적도 없고, 같은 귀족도 아니고, 특별한 사건이 강렬하게 남아있지도  않았지만 바르바라는 오즈월드라는 사람을 적어도 ‘단장’이라는 직위의 영역 내에서는 잘 알고 있다고 대답할 수 있었다. 사실 더 알고 있다고 대답할 수도 있었다. 칠 년은 그 정도 대답하는 게 민망하지는 않을 만큼의 시간이었고 바르바라는 애초부터 그를 기사단장으로만 대하지도 않았다. 

 그리하여 바르바라는 써네스 섬에서 귀환한지 세 달이 다 되어갈 무렵 책상을 들고 오즈월드의 사무실에 나타났다. 오즈월드는 신경질적인 얼굴로 서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바르바라에게 제대로 인사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오즈월드가 무척이나 바빴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일찍 오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사단에 일이 생겼을 때, 서류작업에 공석이 생겼을 때, 오즈월드가 없다면 그 일은 선써드의 고참들에게 돌아갔고 다시 말해 그 일의 대부분은 바르바라가 해결했다. 좀 더 일찍 오는 편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을 고쳐야 했다. 어쨌든 그녀는 그 누구의 명령이 아니더라도 자발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민망할 만큼의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온 사람이었다. 십일 년이라면 무기력함에 조금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바르바라는 말없이 오즈월드의 책상 옆에 자신의 책상을 놓고는 오즈월드 앞에 섰다. 오즈월드는 뒤늦게 바르바라에게 아는 체를 했다. 

 “왔나?” 

 오즈월드는 ‘무슨 일인가?’라던가 ‘도와주려는 건가?’라고 묻는 대신 ‘왔나?’라고 말했다.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부터 하면 되니?” 

 오즈월드는 바르바라에게 서류뭉치를 넘겨주었다. 

 두 사람은 익숙한 것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업무를 보았다. 이따금 오즈가 바르바라의 책상을 넘어오는 경우도 있었는데 그건 순전히 새 서류뭉치를 넘기기 위함이었다. 두 사람은 평소처럼 일했고 평소처럼 대화했지만 바르바라는 미묘하게 침체되어 있었고 오즈월드는 날이 서있었다. 

 서류는 정말 끔찍할 정도로 많았다. 기밀로 부쳐야 하는 게 많았으므로 바르바라가 전부 처리할 수는 없었다. 오즈월드가 세 달 간 대체 이것들을 어떻게 처리해왔는지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돌아오지 못 한 단원들의 실종에 괴로워 할 시간 같은 게 있기는 했을까? 바르바라는 오즈월드와 같이 자신의 영역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남에게 시선을 주기보다 자신의 내부를 살피는 게 더 적성에 맞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괴로웠다. 십일 년의 이력은 그녀에게 책임을 묻게 만들었다. 괴로운 자신을 느끼고, 그것을 인정하고, 머리를 비우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오즈월드는 어떠한가. 그는 단장이다. 원하지 않아도 책임을 물어야 할 때가 올 것이다. 바르바라 역시 원하지 않았지만 결국 죄책감을 맞이했듯이. 

 하지만 그런 걸 구태여 입으로 내뱉어서 위로하지는 않겠어.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나는 내 할 일을 하면 그만이다. 

수도에서 또 다른 왕명이 내려오기 전까지 바르바라는 오즈월드의 옆에 붙어서 어마어마한 분량의 서류를 처리했다. 이따금 오즈월드가 외출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다른 지역으로 건너가 선루스 기사단끼리 집합을 하거나 써드성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일이 생겼을 때의 일이었다. 그런 때에 바르바라는 그를 기다리면서 사무실을 정돈하고 어지러운 책상을 치우고 서류를 묶어서 깔끔하게 나열했다. 서재의 먼지를 털고 커튼을 빨고 헐거워진 의자를 교체했다. 오즈월드는 얼마 뒤에 돌아와서는 또다시 서류더미에 파묻혀야 했는데 바르바라는 처음으로 그가 좀 측은하게 느껴졌다. 오즈월드가 날이 서있기는 했어도 대체로 평소와 같이 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외부적 상황이 변했을 때 평소처럼 굴기 위해서는 얼마큼의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상황이 자신을 주저앉혔을 때 다시 일어나기 위해서는 얼마큼 신경을 써야 하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으로부터 자신의 통제권을 지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도 알고 있었다. 

 어느 날 사흘 간 자리를 비웠던 오즈월드가 돌아왔을 때, 바르바라가 그의 얼굴에 드리운 피로를 눈치 채고는 말을 걸었다. 

 “표정이 나쁜 걸.” 

 “개인적으로 골치 아픈 일이 있었을 뿐.” 

 “몸은 좀 괜찮니?” 

 “말이라고 하나.” 

 오즈월드는 사무실로 들어오다 말고 자신의 책상에 가지런히 쌓인 서류더미를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바르바라가 깔끔하게 정돈해놓은 것이었지만 그런 식으로 쌓아올려진 서류더미는 어지럽혀졌을 때의 그것보다 훨씬 방대해보였다. 

바르바라는 곁눈질로 오즈월드의 시선을 따라가며 말했다. 

 “내가 열어볼 수 없는 서류가 많더라.” 

 “내 업무가 늘어났다는 말이로군.” 

 오즈월드가 질색했다. 

 “원한다면 도와줄게, 내가 볼 수 있는 부분은 따로 떼어놔. 지금은 내가 열어볼 수가 없어서 전부 올려놨지만.” 

 “안 그래도 그렇게 할 작정이었어.” 

 오즈월드는 그렇게 말해놓고는 창밖을 응시하다 말고 별다른 말없이 다시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문이 쾅 닫히면서 생긴 바람이 바르바라의 앞머리를 흔들었다. 바르바라는 동요 없이 앉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서류를 처리했다. 오즈월드는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다가 밤이 될 무렵에 나타나서는 외투를 한쪽에 벗어던지고 책상에 앉았다. 그러고는 아까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곧장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도 구태여 그런 것들을 묻지는 않았다. 오즈월드의 변덕이나 날 선 감정들을 능숙하게 피하고 관여하지도 않았다. 

 바르바라의 균열이 오밤중에 그녀를 바다로 이끌었던 것에 반해, 오즈월드는 자신의 균열에 몸을 휘둘릴 새도 없이 외부의 부름을 받고 시도 때도 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두 사람 모두 이 모든 일에 명백한 내적 변화를 겪었지만 바르바라는 그 변화에 휘둘릴 만큼 자신을 버려둘 여유가 있었다. 오즈월드는 아니었다.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란스러운 일들에 오즈월드의 의지는 단 한 줌도 반영되어 있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임신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이를 가지게 된 것, 아이를 뱃속에 넣고 길러온 것에 바르바라의 의지는 반영되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임신했을 때 자신의 몸이 얼마나 속수무책으로 무거웠으며 매순간 벌어지는 일들이 그녀의 자제력을 시험했는지를 기억했다. 오즈월드가 그 시절을 함께 보내주었다는 것 역시 기억했다. 바르바라는 오즈월드의 지금이 그 때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게 있다면 서로의 입장이 뒤바뀐 것뿐이었다. 오즈월드의 짜증과 변덕을 처리하는 일이 두렵지 않았다. 그런 건 그녀에게 흠집을 낼 수 없었다. 

 

 6. 

 지금쯤이면 나의 고향에 이른 눈이 내릴 거야, 라고 바르바라가 사무실 바깥을 응시하며 이야기를 꺼냈을 때, 정말로 켈커스에는 이른 눈이 내렸다. 한편 몬테나에 동부에 드로키스의 병사들이 말을 끌고 등장했다. 바르바라는 전쟁이 정말로 일어날 것인지를 점쳐보면서 서류를 써내려갔다. 써드빌에는 눈이 내리지 않았으므로 저녁이 일찍 오는 것으로 계절의 변화를 점쳤다. 해가 질 무렵 바르바라는 커튼을 치고는 자리에 돌아왔다.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바르바라가 중얼거리자, 오즈월드가 다소 딱딱한 어투로 대답했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것이다. 

 “사방이 칼날로 만든 길이지.” 

 “기밀서류가 갈수록 늘어나네.” 

 “나를 가만 둘 생각이 없으니.” 

 “섬에 남은 이들, 다 죽었을 거야, 그렇지?” 

  바르바라가 그들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을 꺼낸 건 그 때가 처음이었다. 서류를 작성하던 오즈월드의 깃펜이 조금 좌측으로 꺾였다. 바르바라는 오즈월드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시선으로 흘겨보았다. 

 “그 애들의 죽음도 기밀이 되니?” 

 “바르바라.” 

 오즈월드가 냉담하게 대꾸했다. 

 “알고 있는 걸 구태여 나에게 묻지 마.” 

 “구태여 물어보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야, 오즈.” 

 “그래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가?” 

 “돈이…,” 

 바르바라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다음 말을 내뱉기까지 꽤 힘겨워했으나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뜸을 들이는 시간도 아주 짧았다. 

 “…보수에 대해 말하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임무가 기밀이 된다면 보수금은 어떻게 되는가. 출정할 때 들어간 비용과 출정 이후 돌아온 절반의 사람들이 근근이 메꾸고 있는 비용은 어떻게 되는가. 장부는 몇 달 전부터 힘겹게 숫자를 이어오고 있었고 바르바라는 감정적이고 인도적인 문제를 한쪽으로 치워놔야 할 때가 왔다는 것을 직시했다. 그녀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바르바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깃펜을 쥔 손이 다소 창백했다. 

 오즈월드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 곤란한 문제지.” 

 오즈월드는 그렇게 말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경 써야 할 문제야. 곧 한 번 더 알아보도록 하지.” 

 “고마워.” 

 바르바라는 속으로 소용돌이를 삼켜버린 것처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외부의 상황은 점점 나빠졌다. 바르바라와 오즈월드는 지면을 통해 전쟁의 징조를 가장 먼저 접한 사람들이었다. 그 무렵 바르바라는 마음을 정리하고 차분함을 되찾은 상태였으므로 냉정하게 앞으로의 상황을 분석해볼 수가 있었다. 전쟁이 일어난다면 기사단들은 징발될 것이고 아마도 오즈월드 역시 바르바라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수도로 가야만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들 어떻게 될까. 바르바라는 자신의 검술을 되짚어 볼 수밖에는 없었다. 사람을 베어내게 될까? 죽게 될까? 

 바르바라는 서류를 넘기며 오즈월드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즈, 정말로 전쟁이 다가오니?” 

 오즈월드가 부드럽게 서류를 넘기며 대답했다. 

 “응. 바르바라. 바로 네 뒤에 있어.” 

 “너를 따르게 되겠구나.” 

 바르바라가 덧붙였다. 

 “단장으로서.” 

 “그렇게 되겠지.” 

 “난 존경심도 충성심이 없는 걸.” 

 기사감은 아니지, 라고 중얼거리며 바르바라가 덧붙였다. 

 “참, 그거 아니? 난 이곳에서 네가 뽑지 않은 유일한 사람이란다.” 

 오즈월드는 말없이 서류를 넘기다 말고 느닷없이 고개를 들어 바르바라를 바라보았다. 바르바라가 그 시선을 똑바로 받아쳤다. 두 사람은 키 차이가 많이 났지만 앉아있으면 눈높이가 엇비슷해서 그 누구도 고개를 들거나 숙이지 않아도 되었다. 오즈월드와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부터 바르바라는 이 눈높이에 익숙했다. 올려다봄으로써 그를 더 낯설게 만드는 것들-귀족적인 외모, 여유로움에서 오는 능청스러움과 자애 따위를 체감하는 일보다 비슷한 눈높이에서 오즈월드의 인간성을 목격하는 일이 더 익숙했다. 칠년 간 바르바라가 오즈월드를 어떻게 대하고 있었는가. 오즈월드가 어째서 귀족 출신의 상사임에도 그렇게까지 멀게 느껴지지 않았는지를 고민하며 돌아오던 언젠가의 그 날 바르바라는 결국 어떤 판단을 내렸는가. 명확하게도 바르바라는 오즈월드를 또래의 친구 비슷한 것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녀가 지난 반 년 간 다시 그의 사무실을 지켜준 것은 상사의 명령을 지키는 부하가 아니라 친구끼리의 그것에 가까웠다. 

 “전쟁은 충성과 존경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오즈월드가 느릿하게 대답했다. 써드빌의 도련님에게 충성하거나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한들 전쟁이 벌어진다면 바르바라나 다른 사람들에게 선택지는 없을 것이었다. 세상에는 개인의 감정과 통제력으로는 도무지 막을 수 없는 재앙이 존재하는 법이다. 

 “오, 오즈. 오즈.” 

 내가 어쩔 수 있겠니. 바르바라가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 나는 너와 나를 묶을 때 ‘우리’라는 단어를 쓴단다.” 

 오즈월드의 사무실에서 책상을 덜어내는 게 언제쯤일지를 생각했다. 

 하지만 종국에 ‘우리’ 두 사람은 써드빌을 떠나게 될 것이었고 바르바라의 상상 속에는 결국 두 개의 책상이 그대로 남겨진 사무실 풍경만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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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발레리안 레이»
1차/old 2019. 10. 22. 15:15

 1. 

 발레리안의 소문을 들은 건 그가 입단한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바르바라는 대략적인 사정을 들었을 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말이야. 소문을 전해준 기사는 호들갑을 떨면서 이야기를 좀 더 부풀렸다. 바르바라가 원하는 만큼 격하게 반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사는 사교계에는 훨씬 추잡한 소문이 돌고 있다고 말했다. 소문이 정말 사실일지 맞춰 보자고도 했다. 바르바라는 거기서 이야기를 끊었다. 알겠어, 고마워. 그런 후 그를 내버려두고 혼자 걸어갔다. 

 정부가 되는 기분은 어떨까. 남의 남자나 여자를 빼앗은 사람들은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바르바라는 그런 것들이 때때로 궁금했다. 그녀가 비슷한 짓을 저질러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바르바라는 경험해보지 않은 일들을 상상하기보다는 자신이 이미 경험한 쪽을 타인의 시선으로 다시금 느끼는 일을 상상하는 게 훨씬 잦았다. 나는 이렇게 느꼈는데 너는 어떻게 느꼈니. 그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말을 정말로 내뱉어본 적은 없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실수나 기억을 구태여 먼저 언급하는 편이 아니었다. 

 

 2. 

 써네스 섬에서 돌아온 이후로 바르바라는 아주 가끔 꿈 비슷한 것을 꾸었다. 그녀는 호수가 보이는 오두막집에 앉아있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고는 호수밑바닥에서부터 살아 돌아온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 손님은 바르바라가 섬에서 두고 온 누군가들을 닮아있었고, 식사가 끝나면 바르바라에게 자신이 정말로 그 누군가들인지를 물었다. 바르바라는 항상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름을 대답했다. 눈앞의 손님이 정말로 바르바라가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말이다. 바르바라는 손님과 함께 호수로 내려가고, 그리고… 거기서 꿈은 끝난다. 바르바라는 이따금 그런 식으로 한밤중에 걸어 나와 바다로 들어가려고 했다. 바르바라는 그런 꿈들이 얼른 끝나기를 바랐다. 언제까지나 한밤중에 잠옷을 푹 적신 채로 숙소를 드나들 수는 없지 않은가. 누군가가 바르바라를 보았다면 유령이 나타났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침의 바르바라는 별다를 것이 없었다. 흐느끼지도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걸었고 호출을 받으면 마을로 내려가 일을 도왔다. 바르바라가 자신의 균열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나 밤과 새벽 그 어딘가에 있었다. 혼자 있으면 끊임없이 생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이 지리멸렬한 슬픔과 고통이 끝나고 마침내 동료들의 죽음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현실주의자였고 희망보다는 눈앞에 닥친 위험을 상기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전까지는 계속해서 이런 꿈을 꾸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통이 가라앉고 머리를 식힌 후 냉정하게 사고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니까 그전까지 오밤중에 바다로 걸어 들어가 익사하는 일 따위는 없어야 할 것이다. 

 그 날 밤에 바르바라는 거의 바다에 빠질 뻔 했다. 정신을 차리니 가슴팍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고, 파도가 거칠게 바르바라를 밀었다가 다시 잡아끌기를 반복했다. 바르바라는 진저리치며 해변 가로 헤엄쳐 돌아왔다. 코를 통해 들어간 짠물의 비린내가 느껴졌다. 그녀는 두 번씩 기침하면서 축축한 손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헛구역질을 하며 목구멍에 달라붙은 짠 내를 완전히 게워낸 후에, 바르바라는 비틀거리며 해변을 따라 마을로 돌아갔다. 그녀가 예배당을 본 건 순전 우연이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우연찮게 시야에 그곳이 있었을 뿐이다. 바르바라는 어떤 예감을 받았다. 그곳에 사람이 있을 거라는 예감이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누군지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레리안은 거기 있었다. 예배당 전면 창은 전부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가운데에는 신의 형상을 본뜬 흰색 유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바로 그 신의 형상을 투과한 달빛이 발레리안의 정수리를 향해 똑바로 떨어지고 있었다. 달빛은 바르바라가 바닷가에서 보고 온 것보다 훨씬 밝고 새하얬다. 유리의 색깔 때문일 것이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이 경전에 손을 얹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손이 창백하게 질려있었다. 

 

 3.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을 찾고 싶은데 단서가 없을 때에는 예배당으로 향하면 그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입단식 이후 그녀가 발레리안을 처음 마주친 곳도 다름 아닌 예배당이었다. 그는 독실하고 성실한 신자였다. 

 발레리안이 처음 입단했을 때, 기사단을 술렁거리게 만든 소문이 있었다. 바르바라도 그와 얽힌 소문들을 알고 있었다. 더러운 소문도 있었다. 발레리안은 단 한 번도 직접 그런 것들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사정이 있었을 뿐이라고 드문드문 짚어서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곧 그를 시시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가 주기적으로 예배당을 찾는 것을 알게 된 이후로는 종종 그 시간에 그곳을 찾기도 했다. 발레리안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실 바르바라는 기도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그것과는 전혀 관련 없는 일들을 떠올렸고, 그것은 발레리안이 기도하지 않으면 평소에는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는 일들이었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을 보면서 자신의 친구의 약혼자를 빼앗아 취했던 자신의 과거를 상기하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신의 부름을 믿지 않았지만 정작 그녀가 예배당에 자주 드나들지 못 한 것은 자신이 기도를 하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의 이름을 부르기에는 다소 염치가 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발레리안은? 발레리안은 어떠할까. 그 소문들이 사실일까.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예배당을 드나들고 신의 이름을 입에 올리며 기도를 전하는 것일까. 그런 것들이 궁금했다. 아니다, 사실 그의 소문 같은 건 궁금하지 않았다. 그녀는 단지 자신과 같은 도덕적 흠결을 가진 자가 교회를 드나드는 걸 지켜보고 싶었을 뿐이다. 발레리안이 그 문턱을 넘는다면 자신도 이전과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그 문턱을 넘어도 좋을 것만 같았다. 아니다… 그런 생각도 아니었던 것 같다. 바르바라는 확신할 수 없다. 어쩌면 그녀는 그저 생각할 공간이 필요했고, 발레리안 덕분에 예배당을 그 공간으로 지정할 수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발레리안은 성실한 신자였다. 그가 예배당 문턱을 넘을 때마다 그를 향한 소문들이 조금씩 줄어들거나 목소리를 낮추었다. 발레리안이 신과 가까워보이자 사람들은 그의 무결을 믿었다. 더러운 소문이라던가 사교계의 추잡한 성질 따위는 애초부터 부지불식이었으므로 상쇄되었다. 바르바라는 모름지기 신앙이란 결국 신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신과 가까워 보이는 인간이 신을 믿는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했다. 그러자 발레리안과 대화할 마음이 생겼다. 

 어느 날 오전, 바르바라는 여느 때처럼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는 발레리안에게 물었다. 

 “누군가를 인생의 선택지로 알았다가 잘못됐을 때가 있다면,” 

 바르바라가 끊어서 대답했다. 

 “후회한 적도 있나요?” 

 발레리안은 조용히 바르바라를 들여다보다가 잔잔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아뇨, 후회하지 않습니다.” 

 발레리안은 그것을 현재형으로 말했다. 

 “그런가.” 

 바르바라가 미지근하게 웃다가 말을 돌렸다. 

 “에아를 사랑하나요?” 

 “그렇습니다.” 

 “그럼 제 아들을 위해 기도해주세요.” 

 바르바라는 잠시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두 손을 모으고 웃었다. 

 “저는 신에게 미움 받을 짓을 골라하거든요… 제 기도는 닿지 않을 거예요.” 

 이번에 발레리안은 뜸을 들였다. 한동안 바르바라를 내려다보다 말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에아는 모든 이들을 사랑할 겁니다. 인간은 원래 부족함으로 가득 차 신의 보살핌이 필요하니까요.” 

 발레리안은 다시 한 번 뜸을 들였다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경이 원한다면 기도하겠습니다.” 

 그런 후 기도를 마치고 일어났던 남자는 다시 몸을 돌려 창문 앞에 무릎을 꿇었다. 침묵한 채 진중하게 마음을 다했다. 바르바라의 아들을 위해서 기도를 올렸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의 뒤에 서서 의자에 반쯤 몸을 기댄 채로 그가 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잠시 후, 발레리안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바르바라는 잠시 기다렸다가 그와 함께 예배당을 나섰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고 함께 돌아왔다. 그 뒤로도 종종 그런 일들이 반복됐다. 발레리안은 바르바라가 오지 않아도 그녀의 아들을 위한 기도를 매번 같은 시간에 올려주었다. 바르바라도 그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그곳을 찾지는 않았다. 하지만 발레리안을 찾기 위해서는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기도하고 싶지만 기도하지 않을 자신을 느낄 때에는 그곳으로 가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4. 

 달빛에 물들었던 발레리안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가 일어나자 예배당 복도에 늘어진 그림자가 더 길어졌다. 바르바라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발레리안이 자신을 응시할 때까지 기다렸다. 문득 소름이 돋았다. 바닷물에 축축하게 젖은 탓이었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채 옷을 몇 번 매만지다 말았다. 젖은 옷이 팔뚝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생경해서 불쾌했다. 발레리안은 익숙하게 그녀와 함께 발걸음을 맞추어 돌아왔다. 예배당을 나서자마자 매서운 밤바람이 몰아쳐서 발레리안이 그녀에게 겉옷을 벗어주었다. 바르바라는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어차피 발레리안이 벗어주지 않았더라면 벗어달라고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숙소에 도착한 두 사람은 인사없이 헤어졌다. 발레리안이 짧게 고갯짓을 하기는 했지만, 평소의 그라면 좀 더 길게 인사를 했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멀어지는 발레리안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이 더는 규칙적으로 시간을 지켜 예배당을 방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주교가 말해주었다. 그러나 아침의 발레리안은 별다를 것이 없었다. 흐느끼지도 않았고 분노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진중한 걸음으로 걸었고 호출을 받으면 마을로 내려가 일을 도왔다. 그러나 더 이상 태양이 내리쬐는 오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예배당이 아름다운 유리창의 빛깔로 물드는 시간에 기도하기 위해 무릎 꿇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의 균열이 자신과 동일한 시간에 찾아오곤 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밤과 새벽 그 사이에는 어떤 것들이 자꾸만 바르바라를 혹은 발레리안을 끌어당겼다. 인력처럼 바다로, 혹은 신이 깃든 장소로 이끌었다. 악몽에 휘둘리다 잠에서 깨어나기 직전, 바르바라는 정신이 아래로 쑥 꺼지는 느낌을 받고는 했다. 그것은 죽음에 가까운 추락처럼 느껴졌다가 어느 순간에는 고통스러운 과거로부터 현실로 복기하기 위한 저항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발레리안은 어느 쪽일까. 발레리안은 고통이 지나가기 전까지 무엇을 하는가. 궁극적으로 무엇을 기도하는가… 그 날 남은 새벽동안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의 옷을 입은 채로 잠이 들었다. 

 

 5. 

 “오늘은 당신도 기도 하는 건 어떻습니까, 체사레 경.” 

 “당신의 기도만으로는 부족하나요?” 

 “부르는 이름이 많아 그만큼의 정성이 더 필요할 듯싶네요.” 

 바르바라는 대답 대신 발레리안의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발레리안은 굳이 되묻지 않았다. 그저 무릎을 꿇은 채 기도를 이어나갔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의 정수리 위로 떨어지는 달빛의 창백함을 보았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한 빛들은 태양을 통과했을 때보다 미미하고 어쩐지 허옇게 질려있었다. 그 빛들은 생명보다는 죽음에 가까운 인상을 주었다. 발레리안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를 알 수는 없었으나 바르바라는 결과적으로는 발레리안 역시 자신과 동일한 결론을 내리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남겨진 사람들이 살아있기를 기도하기보다는 그들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앞으로의 일들을, 이곳으로 돌아온 우리가 겪게 될지도 모를 혼란과 고통을 위해 기도하기를 바랐다. 우리의 이름을 부르기를 바랐다. 발레리안 자신의 이름을 부르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기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연고도 없는 누군가의 아들을 위해 매번 아침마다 무릎을 꿇었던 사람이 살아남은 자들의 이름만을 부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기도는 바르바라의 몫인가. 

 바르바라는 천천히 두 손을 올려 깍지를 꼈다가 곧 떨어뜨렸다. 그녀는 기도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반달을 보았다. 밤바다의 파도가 몰아치면서 수백만 개의 물방울로 쪼개지고 그 물방울들이 서로 부딪혀 격렬한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 발레리안은 바르바라를 곁눈질했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이 몇 주 전 건네주었던 그의 외투를 입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 외투를 돌려주지 않았고 이따금은 그것을 입고 나타나기까지 했다. 그런 차림새로 새벽이나 밤에 예고도 없이 나타나 발레리안이 기도를 마칠 때까지 서 있다가 그와 함께 되돌아왔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두 사람은 궁극적으로 이전과 동일한 행위를 반복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 모든 일과가 낮이 아니라 밤 혹은 새벽에 일어난다는 점만이 달랐을 뿐이었다. 발레리안은 바르바라에게 외투를 돌려달라고 말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대체로 바르바라에게 질문하지 않는 편에 속했다. 보통 그는 그녀에게 있어 답하는 자였다. 

 바르바라는 양손을 엇갈려 발레리안 외투의 양쪽 깃을 붙잡은 채 걸었다. 두 사람의 발자국이 해변의 모래 위로 나란하게 찍혔다. 발레리안은 바다를 바라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라는 아무것도 돌아보지 않았다. 바다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파도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가 고개를 들었다. 

 “레이.” 

 발레리안은 바르바라를 응시했다. 

 “돌아오는 것과 남는 것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후회한 적 있어요? 다시 한 번 파도가 쳐서 그 목소리는 묻혀버리고 말았다. 

 발레리안이 대답하지 않았다. 숙소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었다. 바르바라는 때때로 부드러운 모래를 잘못 디뎌서 미약하게 휘청거렸다. 바람이 거세지는 게 느껴졌다. 바다가 아니라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이었다. 바르바라는 그곳에서 피와 철의 냄새를 맡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이번에도 선택을 하게 될까. 바르바라는 언제나 선택을 미루어두고는 했다.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에둘러 질문하는 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감추고 싶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었다. 선택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사는 것은 선택의 연속이다. 하물며 생존 역시 선택의 기로 안에 있었다. 바르바라는 생명을 택하는데 성공했지만 밤마다 죽음의 장소로 걸어 들어간다. 후회하게 될까. 

 “레이, 추워.” 

 바르바라가 작게 중얼거린다. 넌 안 그러니? 그녀가 말을 놓는 순간에도 발레리안은 그 이유를 물어보는 대신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바르바라는 발레리안을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가 다시 낮의 영역으로 돌아오기를. 햇빛 아래에서 침묵할 수 있기를. 

 저희에게 닥친 고난과 역경을 이겨낼 힘을 주시옵시고, 당신의 사랑으로 굽어 살피소서. 

 하지만 발레리안을 굽어 살피는 건 에아가 아니라 자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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