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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곳엔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소식을 듣자마자 코를 훌쩍이며 회사를 뛰쳐나온 그가 조금 민망해질 정도의 분위기였다. 마당엔 어림잡아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있었다. 활짝 열린 현관문 안쪽엔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있을 터였다. 태리 커트는 그 사실에 다소 침울해졌다. 미스 메텔은 나를 기억하지도 못 할 거야. 그는 단지 그녀가 도서관에서 근무할 적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를 했던 보조사서에 불과했다. 기억 속의 미스메텔이 활짝 웃는다. 태리, 이것 좀 도와줄래? 태리는 사다리를 잘 탔다. 높은 곳에 있는 책을 모조리 꺼내어 알파벳순으로 정돈했다. 메텔은 사다리 아래를 단단히 쥐어 잡고 태리에게 한 권씩 건네받는다. 두꺼운 책을 받을 땐 무게 때문에 상체를 조금 숙여야만 했고, 그럼 스웨터 안쪽에서 반짝거리는 도금 목걸이가 흘러내렸다. 언젠가 태리는 물어본 적이 있다. 나비를 좋아하시나 봐요. 미스 메텔은 온화하게 웃기만 했다. 특별히 더 좋아해본 적은 없어. 미스 메텔은 태리 커트가 아르바이트를 그만둔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그 도서관의 사서로 남아있었다. 명예로운 퇴직을 하지 못 했다고 들었다. 그녀는 암으로 예순 살이 조금 넘었을 무렵 일을 그만두었다. 입원을 위해서는 아니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아, 태리 커트입니다.”

 태리는 방명록에 붙은 숫자를 읽어보았다. 52. 그러니까 미스 메텔은 살아가는 동안 적어도 쉰 명이 넘는 사람들을 가지고 있던 셈이었다. 거실에선 누군가 재즈를 틀어놓았다. 잔을 든 사람들이 고개를 숙이고 조곤조곤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태리는 서명을 했다. 쉰 세 번째였다.

 미스 메텔은 침실에 있었다. 관을 침대처럼 꾸며놓았다. 조문객들은 국화만 가지고 오지 않았다. 안개꽃과 장미, 러넌큘러스…… 꽃들은 키가 달라서 들쑥날쑥했다. 태리 커트가 가지고 온 건 두껍고 무거운 <시간여행의 역설>이었다. 미스 메텔이 그 책을 좋아했다.

 방문 앞에서 태리 커트는 머뭇거렸다. 그는 한 번도 이렇게 가까이서 타인의 관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기억 속의 메텔은 언제나 웃고 있었다. 그러나 웃고 있는 시체도 있을까? 죽음은 세계에 분명히 붙어있으면서도 이 세계의 모든 것과 어울리지 않았다. 무엇이든 죽음이 붙으면 공포스럽기만 했다. 죽은 사람의 미소. 죽은 메텔의 목걸이. 죽은 그녀의 재즈. 죽은 그녀가 좋아하던 책. 책을 껴안은 태리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메텔은 관에 그저 얌전히 누워있을 뿐이었다. 등 너머에서 누군가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실례합니다.”

 태리가 허겁지겁 통로 쪽으로 비켜섰다. 남자는 그림자처럼 나타났다. 엉거주춤 선 태리의 옆을 매끄럽게 지나쳤다. 긴 코트를 걸치고 안엔 체크 양복을 빼입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스치는 짧은 순간 얼핏 보인 얼굴이 굉장히 앳되어보였다. 그런데도 어딘지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특별히 미남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도 그랬다. 태리 커트는 멍하니 자리에 서서 남자가 방안으로 들어서는 걸 지켜보았다.

 남자는 줄기가 무성한 꽃 한 다발을 미스 메텔의 위에 얹어놓곤, 잠시 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것 같기도 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마침내 어떤 결론을 내린 듯 했다. 그는 똑바로 서서 손을 뻗은 후, 관에서 무언가를 건져 올렸다. 그리곤 허리를 숙여 입을 맞췄다. 남자가 몸을 일으켜 세웠을 때 태리 커트는 그의 손에서 반짝이는 금빛 물체를 볼 수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기도 전에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잠깐 마주쳤다. 태리 커트는 발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압도적이고 굉장한 느낌에 사로잡혀야만 했다. 공포와 경외심으로 응축된 힘이 명치 아래를 가격한 것만 같았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사랑에 빠졌을 때와 비슷한 속도로. 그러나 남자가 시선을 거두고 걸어 나가는 순간 속수무책으로 고양되었던 긴장감은 사라지고 이상한 우울감이 남았다. 태리 커트는 몸을 돌려 저를 스쳐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입을 벌렸으나 말이 나오지 않아 뻐끔거렸다. 남자는 멍청하게 입을 벌린 태리 커트에게 시선을 주었다가 고개를 숙였다. 품속에 들린 책의 표지를 훑었다. <시간여행의 역설>, professor V. 남자의 표정이 일순 씰룩거렸다.

 “개정판을 읽어요.”

 남자는 비웃는 것도 그렇다고 진지하게 충고하는 것도 아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건 오래 전에 써서 헛소리가 된지 오래거든요.”

 그런 후… 그는 떠났다. 인파에 부딪히거나 스며드는 법 없이 유연하게 틈 사이를 흘러 다니는 것처럼 걸어서, 마침내 거실로부터 종적을 감추었다. 입구에서 조문객 한 명이 그와 부딪히기는 했으나 거의 고의처럼 보였다. 어머, 죄송해요. 검은 스웨터를 갖춰 입은 여인이 은근한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남자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남자의 표정은 여전히 모자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너머의 것을 마주하고 있을 여인은 마치 사랑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좀 전에 태리 커트가 겪었던 상황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분명 자신 역시 저렇게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자 태리는 조금 착잡해졌다. 남자는 화를 내거나 대화를 이어나가는 법 없이 짧게 고개를 숙인 후 현관 너머로 사라졌다. 재즈의 곡이 처음으로 돌아가 반복 재생되었다. 조문객들의 소곤거림이 아주 커졌다. 갑자기 세상이 굉장히 시끄러워진 것 같았다. 태리 커트는 급작 굉장한 조급함에 사로잡혀 왼손에 책을 쥐고 현관으로 달려 나갔다. 조문객들과 마구 부딪히고 떠밀려 자꾸만 주춤거렸다. “죄송합니다. 아, 죄송해요. 아,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 만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인파 사이를 “흘러 다니던” 남자는 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누구의 인연일까? 메텔의 “누구”였을까? 태리 커트는 현관 문턱에 발이 걸려 거의 넘어질 뻔했다. 마당엔 여전하게도 어림잡아 스무 명이 넘는 인원이 모여 있었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칠이 벗겨진 흰 울타리 너머로 차 한 대가 매끄럽게 출발했다. 태리 커트는 우두커니 서서 검은 승용차의 꽁무니를 바라보았다. 멍청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참 뒤에, 누군가 툭 어깨를 쳤다. 화들짝 놀란 태리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캐시가 있었다.

 “태리, 와줬구나. 누가 소식을 전해줬던?”

 “마담 앙졸라가요.”

 태리가 어색하게 어깨를 움츠렸다.

 “캐시, 메텔에게 애인이 있었나요?”

 “글쎄.”

 캐시는 확신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애는 원래부터 내게 그런 말은 잘 하지 않았거든. 비밀이 많은 애였지. 특히 서른 살 이후부터는. 메텔에게 인사는 했니?”

 “아뇨, 아직…….”

 “그럼 들어와.”

 태리는 다시 현관 문지방을 넘다말고 조금 주춤거렸다.

 “저, 캐시. 미스 메텔은 꽃 대신 책을(그것도 개정판도 아닌 구판을) 들고 와도 괜찮다고 말해주셨을까요?”

 “내가 알겠니.”

 캐시는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잖니. 그 애는 비밀이 많은 애였다고.”

 메텔은 기억 속의 얼굴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었고 왜소했으나 여전히 편안하고 귀품 있었다. 눈을 감은 채 먼 여정을 떠난 것처럼 보였다. 혹은 영혼이 어딘가로 잠시 긴 외출을 떠난 상태고, 몸은 여전히 보존된 채 새 보금자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허연 입술과 핏기 없는 얼굴이 산발한 꽃들 사이에서 보다 도드라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태리 커트가 직전까지 두려워하던 죽음의 기미는 도무지 찾아볼 수가 없었다. 품에 줄기 무성한 그 꽃이 안겨져 있었다. 태리 커트는 한 눈에 그 꽃을 알아보았다. 광장 화단에 빼곡하게 심어진 글라디올러스였다. 여름이 아닌데도 활짝 피어있다는 점에서 확실히 이상하긴 했으나, 온실의 존재를 생각하면 꼭 비현실적인 것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만개한 꽃망울이었다. 노랗고 싱그러운데다가 줄기가 젖어있었다. 꽃망울 아래엔 바싹 마른 메텔의 목덜미가, 그리고 얌전히 걸린 금색의 나비목걸이가 있을 테였다. 남자가 그것에 입을 맞췄다. 들어 올리고 경의를 표했다. 모두의 경외를 받아야 마땅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 남자가.

 그 애는 비밀이 많은 애였지. 캐시가 그렇게 말했지만 태리는 확신할 수 없었다. 예순이 넘은 미스 메텔의 곁을 지키는 젊고 어린 청년을 떠올리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남자를 메텔의 리틀 핑거-젊은 애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태리는 생각을 접어놓았다. 고인의 앞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상상하는 것도 다소 경거망동한 행동이다. 죽음과 고인이라는 단어는 결말과 비슷한 냄새를 가지고 있어서, 이야기를 그 이상 이어나가는 것을 지나친 행위로 만든다. 태리 커트는 책을 내려놓곤 잠시 고개를 숙인 후, 작게 중얼거렸다.

 “미스 메텔, 안녕하세요.”

 저녁으로 접어드는 햇빛이 커튼 사이로 노랗게 반짝였다. 탁자에 놓인 책의 표지로 내리쬐었다. 저자 이름이 다만 무심하게 번들거렸다. professor V. 남자는 방명록을 적지 않았다.

 

 2.

 백작은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마당을 나온 V가 차문을 열어젖히다 말고 얼굴을 우그러뜨렸다.

 “언제 왔어요?”

 “한참 전에.”

 “쫓아왔어요?”

 “계속 타고 있었어.”

 V는 신경질적으로 차문을 닫곤 운전대를 잡았다.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었다. 지역뉴스가 흘러나왔다.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메텔의 장례식에선 내내 재즈를 틀어주었다. 장례식만도 못 한 라디오 방송이라니. 소리 내어 불만을 토로하지도 않았는데 백작은 눈길을 돌려 라디오에 시선을 주었다. 곧 팍, 소리를 내며 전원이 꺼졌다. 차는 정적에 휩싸였다. V는 시동을 걸었다.

 “꺼달라고 한 적 없어요.”

 “지루해했잖아, 달링.”

 “그렇게 말한 적 없잖아요.”

 V의 목소리에 가시가 돋혀 있었다.

 “백작, 저에 관해서 그렇게 확신을 가져주지 말아줄래요.”

 “달링에 관해서가 아니면 어디서 확신을 가지지?”

 “부탁한 적 없다고 했잖아요.”

 “장례식만도 못 한 라디오 방송이라니.”

 “…….”

 V가 매서운 눈으로 조수석에 앉은 남자를 쏘아보았다. 그는 방금 V가 마주하고 온 시체보다도 핏기가 없어 창백한 얼굴을 하곤 V의 시선을 받아치며 미묘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매혹적이고 유독한 미소였다. V는 작게 신음하곤 다시 고개를 돌렸다. 페달을 밟자 차가 앞으로 이동했다.

 “조금 읽을 수 있게 됐다고 해서, 다 안다는 듯이 말하지 마세요.”

 V는 으르렁거렸지만 아까보단 한풀 꺾인 목소리였다. 흐렸던 날씨가 개어 햇빛이 나오고 있었다. 두껍게 선팅된 차는 온통 캄캄해서 한밤중 같았다. 백작은 무심하게 턱을 괸 채 차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당을 뛰쳐나온 청년이 엉거주춤 서있었다. 백미러에 비쳐 반대로 뒤집혀 보였다. 차가 앞으로 이동했으므로 청년은 조금씩 줄어들고, 줄어들고, 줄어들다가 마침내는 보이지 않게 되었다. 차는 대로변을 지나 도로로 들어섰다. 둘은 끔찍할 만큼 아무 말도 나누지 않았다. 속도가 붙어 차가 노을 아래를 달리기 시작했다.

 “달링을 닮았던데.”

 사차선 도로에 접어들었을 무렵 백작이 건조하게 던졌다. V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차선을 갈아탔다. 가로등이 켜졌다. 사위는 놀랄 만큼 빠르게 어두워지고 있었다. V는 앞을 보는 채로 대답했다.

 “아뇨, 저보다 멍청해요.”

 “달링보다 똑똑한 사람이 있겠어.”

 “끔찍한 책을 들고 있던데요.”

 “장례식에 본인이 읽을 책을 들고 오는 사람은 없어, 달링.”

 V는 입을 다물었다. 도로에 차가 없어서 자꾸만 가속페달을 밟았다. 차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저녁이 끝나가고 있었다.

 “메텔이… 제 책을 읽을 거라곤 생각해본 적 없어요.”

 운전대를 쥔 V의 손이 잠시 움츠러들었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너무 어렵고 쓸데없는 책이라 그녀가 읽을 만 한 게 못 돼요.”

 “상징적 의미의 독서도 있는 법이지.”

 “알고 싶지 않아요.”

 이제 차는 거의 최고 속력을 내고 있었다. 운전대를 쥔 V의 손이 희미하게 떨렸다. 백작은 미동도 없이 앉아있었다. 선텐한 차창 너머엔 더 이상 침투할 햇빛이 한 움큼도 남아있지 않았고 차는 미친 듯이 어두웠다. 바깥이 도무지 보이지 않아 가로등 불빛만이 희끄무레한 점처럼 뭉개져 보였다. 그런데도 차는 차선을 침범하는 일 없이 매끄럽게 달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밤은 이전의 세계보다 더욱 선명하고 뚜렷하게 다가오곤 했고 흔들리지 않는 차는 그것을 증명하는 셈이었다. 트렁크 안엔 밤보다 낮의 세계에 익숙했던 사람의 시체가 들어있었다. 피가 다 빨려서 껍데기밖에 남지 않은, 아주 가볍고 바싹 마른 여인의 시체가.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일 터였다.

 “슬프진 않았어요.”

 V는 관 속에 놓여있던 메텔의 얼굴을 떠올렸다. 예순 살이 넘었어도 그녀는 아름다웠다. V는 주름살과 죽음의 그림자를 아주 손쉽게 걷어내고 언젠가의 메텔, 그러니까 마당 앞에서 처음 만났던 어느 여름날의 그녀를 힘들이지 않고 상상할 수 있었다. 나와 우주여행을 떠날래요? 그 무렵의 V는 초라하고 미숙했으며 볼품없고 너절했다. 주변 사람은 어머니 한 명뿐인데도 도무지 간수하지 못 해 절절매고 울음을 터뜨렸다. 메텔은 V에게 단 한 번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녀는 V가 V임을 포기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돌려 사랑에 대해 논해주었다.

 “정말로… 슬픈 건 아니었어요.”

 차가 최고 속력을 찍었다. 어둠 속의 도로를 요란하게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백작의 몸이 희미하게 앞으로 기울었다. 안전벨트를 하지 않아서 관성이 그대로 적용되었다. V는 몸을 둥글게 말고 앞을 쏘아보고 있었다. 백작은 부드럽게 눈을 감았다.

 “달링, 후회는 없잖아.”

 세상이 침묵했다. 그는 다시 한 번 속삭였다.

 “길을 잃지 마.”

 순간, 그들 앞에 펼쳐진 가로등이 한순간에 점멸했다. 도로는 순식간에 無에 휩싸였다. V가 브레이크를 밟았다. 속력을 줄이지 못 한 차는 가드레일을 박고 빙글빙글 돌았다. 도로와 타이어가 끔찍한 마찰음을 만들어냈다. 조수석은 어느새 텅 비어있었다. 풍경이 정신없이 맴돌았다. 이곳저곳을 부딪치며 유리창이 산산이 부서졌고, V의 얼굴을 마구 할퀴며 무너져 내렸다. 차는 요란하게 가드레일을 한 번 더 박곤 천천히 회전을 멈췄다. 보닛이 직각으로 우그러지다말고 펑, 소리를 냈다. 엔진으로부터 불이 솟아올랐다. 폭발음과 함께 사방이 불바다로 변했다. 어두컴컴한 도로 위에서 소름끼치도록 밝게 타올라 허공으로 번졌다. 찌그러진 차체 때문에 벌어진 차문으로 V의 손이 흘러내렸다. 피투성이가 되어 미동도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불길을 뚫고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구둣발 소리가 선명했다. V의 손이 움찔거렸다. 백작은 긴 몸을 접어 허리를 숙이고 차 안쪽으로 고개를 집어넣었다. V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달링, 대답해.”

 V의 가슴이 희미하게 오르락내리락하기를 반복했다. 얼굴은 이미 아물어 피가 멎어가고 있었다. V가 헐떡거리며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백작의 얼굴을 보곤 헛웃음을 터뜨렸다.

 “백작, 짜증나요.”

 “확신을 가지지 말라고 한 건 달링이었어.”

 “……씨발.”

 V는 지친 듯이 눈을 감았다. 화염이 쉿쉿거리며 타올랐다. 트렁크 안으로 번진 불이 시체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누린내가 났다.

 “후회하지 않아요.”

 V는 실토했다.

 “그러고 싶어요.”

 백작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거면 됐어.”

 백작이 깊게 수그렸다. V는 얌전히 누워있었다. 백작의 뺨을 잡아끌거나 밀치지도 않았다. 다만 누워서 끝나기를 기다렸다. 불은 시체를 태우고 있었고 오늘의 V는 일생을 바쳐 사랑한 여인의 장례식을 다녀왔다. 감히 입을 맞추지도 못 하고 목걸이에 입술을 눌렀다. 최고 속력으로 달려 자살했고 실패했다. 화염 때문에 모든 건 완벽범죄가 되었다. 죄는 이런 식으로 청산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V는 지옥의 문 앞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선다. 식사와 살인을 동일한 선상에 놓을 수 있다니. 죽음과 키스를 동시에 경험할 수 있다니. 죽을 수 없다니. 이런데도 죽을 수 없다니. 백작이 입술을 뗄 때, V는 눈을 감는다. 눈가가 축축했다. 연기 때문은 아니었다. 달링, 길을 잃지 마. 백작은 속삭였다. 그의 어깨너머로 보름달이 빛나고 있었다. 길을 잃어선 안 돼. V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싶어요. 구태여 입으로 대답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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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해석으로 절절매던 글이라 끝낸 후에는 들춰보지 않았다.
이제는 마마돈크라이 뮤지컬 같은 거 그만 팔아줘야 된다고 생각함..

20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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