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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탄 아래 «죽는 것은»
1차/new 2021. 1. 19. 02:17

 지지는 단상으로 올라가 힘차게 숨을 들이마셨다. 초속 100km의 속도로 피치파 마을을 아우르는 쾌청한 공기와 온갖 냄새가 지지의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지의 뱃속에는 때마침 형광색 버섯과 곰팡이와 이끼가 자라고 천장에선 잿빛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 어마무시한 콧바람이 들이닥치면서 그녀의 뱃속에서 벌어지던 사랑스러운 난장판은 흔적도 없이 쓸려나가고 말았다. 마침내 속이 텅 빈 느낌을 받은 지지는 뱃가죽을 문지르며 여러분을 향해 빙그레 웃었고, 리스피어 교수가 화답해주자 그녀의 뱃속에선 침착함과 용기라는 싹이 하나씩 솟구쳐 올랐다.

 “지지  헌팅턴입니다! 오늘 저는 그동안 작성해온 논문의 중간 단계를 발표하려고 합니다.”

 그녀 곁을 빙글빙글 돌던 소환수가 차례로 등 뒤에 붙더니 곧 여러 개의 손이 되어 거미처럼 쑥 튀어나왔다. 그러자 꼭 여러 개의 손으로 광채를 쥔 비슈누처럼 보였지만, 이곳에는 비슈누라는 것이 없으니 지금 지지의 모습을 설명할 말이 없을 테다.

 지지는 여러 개의 손으로 설명조의 행동을 덧붙이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 논문 제목은 <약학적 관점에서 본 불로불사와 그에 따른 연금술 활용에 관한 연구>입니다. 여기서 불로불사란 동방 대륙에서 온 개념으로, 병들지 않거나 노화를 막음으로써 오래 사는 것 또는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약학적으로, 노화라는 것은.”

 죽음에 대하여. 그것은 아주 오래되었고 무척이나 친숙하게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지지는 바닥에 엎어져있거나 침대에 누워있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피는 뜨겁거나 차가운 온도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까끌까끌하거나 날카롭다는 촉각으로 다가오곤 했다. 죽는 건 무서워, 어릴 땐 그렇게도 생각했었다.

 언젠가 지지의 엄마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하지만 괜찮아질 거란다. 그런 몸을 물려줘서 미안해.” 엄마의 장례식에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했다. 지지는 엄마의 인복이나 명성 같은 걸 생각해보았고, 어쩌면 그녀가 될 수 있을 법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나는 엄마를 원망한 적이 있나? 엄마의 죽음은 지지가 어렴풋하게 느끼던 감정 모두를 하나로 짓눌렀다. 지지는 때로 정말이지 엄마가 그리웠다. 그래서 침대에 눕거나 각혈을 할 때마다-특히 어릴 적에 강렬하게 찾아오곤 했던 핏줄에 대한 원망, 어렴풋한 분노 같은 건 아무렴 좋다고 얼렁뚱땅 퉁치기로 했다.

 ‘대인배의 마음! 아주 중요한 거야!’ 어느 순간에는 정말로 죽는 게 무섭지 않았다. 삶을 살아가는 일도 괜찮아졌다.

 “흘러내리는 피를 일시적으로 멈추거나 상처를 봉합하는 의학마법의 원리를 연금술에 응용한다면, 완벽한 불로불사는 아니더라도 흠집이 나지 않는 단단한 피부, 의도적으로 성장을 저해-발육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일부 기능의 성장을 저해시켜야 하겠지만요-하는 일 따위를 의도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됩니다. 하지만 그렇기 위해선 인간의 신체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수반되어야할 것이므로, 설령 가능하다고 한들 불로불사까진 아주, 아주, 아아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요약하자면.”

 지지가 찹 두 손을 모으자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세 쌍의 손이 동시에 오케이! 사인을 외쳤다.

 “불로불사는 불가능해. 어쩔 수 없지만 일단은 우리 모두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입시다!”

 아차, 너무 들떠서 마지막엔 결국 지지 같은 마무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의도한 걸까? 지지는 무거운 죽음 같은 건 바라지 않으니까. 병드는 일, 피를 보는 일, 사랑 속에서 미움을 더듬거리는 일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졸업 전까지 다른 실마리를 찾게 된다면 좋겠네요!”

 ‘그래도 죽는 건 싫어~’

 오,지지.

 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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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지가 그 나무를 키우기 시작한 건 2학년 때다.

 집에서 가지고 온 작은 묘목이었다. 지지의 오빠가 시험 삼아 만들어낸 새 품종이었는데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세 그루 째 말라죽게 되자 이걸 개량할 순 없다고 판단하고 남은 마지막 한 그루였다. 지지는 오빠에게 이 나무를 달라고 했다. 지지의 오빠는 흔쾌히 그 빼빼마른 나무를 건네주었지만, 사과나무라는 건 구색일 뿐 정작 무슨 색깔의 열매가 열릴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괜찮아. 팔 만한 게 열리진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 키우면 뿌듯해질 것 같아!”

 과수원 집안의 딸자식으로서 어깨 너머 배워온 여러 가지 지식은 분명 유용하게 쓰였다. 한동안 지지는 이 작다란 나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지를 치고, 비료를 푸고, 영양제를 넣고, 나무의 마력을 관찰하며 기분을 살폈다. 그런가 하면 지지는 의외로(남들이 추측하기로 그녀는 인정 많은 사람이긴 했으니)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해 자신의 특별한 무언가로 삼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이 나무는 그녀가 자라는 동안에도 그냥 사과나무로만 남았다. 지지는 나무가 갑자기 쓰러져 생을 다한대도 그 죽음에 오래 사로잡혀있지는 않으리라. 추억할 만한 이름을 따로 붙여주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 사정도 그러하여, 학년이 높아질수록 지지는 안뜰에 심어진 그 나무를 종종 잊어버렸고, 아카데미를 떠나있던 지난 2년간은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카데미 기숙사 안뜰에서 애지중지 길러져온 역사를 간직한 이 지지님의 사과나무를 허락도 없이 따먹다니, 이 엄연한 절도행위를 용납할 수는 없는 법! 지지가 데미안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사건 때문이다. 데미안은 정말이지 잊을 만하면 지지의 나무 근처를 얼쩡거리다 귀신같은 솜씨로 사과를 따먹곤 했던 것이다. 이 소소하고도 용납 불가능한 절도 행위가 이어져온지도 벌써 몇 주째였다. 어쩌면 지지가 제대로 알지 못했을 뿐, 사과나무를 향한 데미안의 소소한 절도 행위는 몇 년째 이어져왔던 걸지도 모른다.

 지지는 데미안이 싫지 않았다. 데미안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지만 다루기 쉬운 구석이 있었고, 거짓말을 하며 뻔뻔하게 굴기보다는 자백해놓고 기분을 살피는 쪽에 가까웠다. 처음 절도행위를 적발 당했을 때, (비록 처음에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도망치기는 했지만, 붙잡히고 나자 순순히 그녀의 기분을 살펴준 점도 지지의 기분을 누그러지게 했다. 볼을 쭉 잡아당기자 데미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는데, 지지는 그가 으레 그 뒤에 뱉는 말도 좋아했다.

 “그치만 이 사과가 제일 맛있는 걸. 항상 내가 다니는 길에 그렇게 탐스럽게 열려있는데 안 먹을 수가 없잖아?”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가물가물한 어느 날, 지지는 아카데미 기숙사 안뜰을 빙글빙글 맴돌며, 자신의 나무를 흘끔흘끔 훔쳐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데미안이 사과 서리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지 며칠 지나지 않았던 때일 것이다. 자신의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지지는 생각했다. 그렇지, 이 나무는 사과나무였어. 가지 곳곳에는 주황빛이 도는 매끈한 붉은 색의 작은 사과가 열려있었다. 언제 이렇게 열렸던 걸까? 갑작스럽게도 지지는 나무가 낯설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세월동안에도 꾸준히 생장해온 나무만의 시간이 더는 지지의 나무가 아닌 낯선 나무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용케도 혼자 잘 자랐구나. 이름이라도 붙여줄 걸 그랬나보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이 나무는 여전히 지지의 나무이긴 한 것이다.

 

 

 “데미안!!”

 자리를 박차고 나온 데미안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지지가 기숙사 안뜰로 걸음을 옮겼다. 지지의 예감대로 데미안은 거기 있었다. 어쩐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불만스러워 보이지만 결국 지지에게 누그러뜨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나무 아래에 서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아름답고 작고 옹골찬 열매가 가득 핀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쳐나가며 끝없는 생장의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지지는 문득 자신이 완전히 자리를 비웠던 지난 2년간에도 데미안이 자신의 나무 아래를 어슬렁거렸을지, 때로는 저 가지를 잡고 올라타 단단한 열매를 따먹었을지, 그렇게 함으로써 나무를 혼자 두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미안~ 너무 놀렸나봐! 화났어? ? ?”

 데미안에게 쪼르르 달려간 지지가 아양을 떨며 말했다.

 “화 풀어라~ 그치만 자꾸 허락도 없이 훔쳐 먹는 데미도 나빴는걸!”

 지지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날카롭게 움직여 사과 하나를 떨어뜨렸다. 작고 단단한 과일 하나가 데미안의 정수리에 부딪쳐 한 번 더 튀어올랐다가, 그대로 데미안의 손안에 감겨들어갔다.

 “맛있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봐주는 거야! 이번 건 아무 짓도 안 했다구?”

 어쨌든 데미안도 결국 사과 한 알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지지의 나무에서 열리는 건 그에게 있어 맛있는 사과니까. 지지는 데미안의 괘씸한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나무 아래를 계속해서 어슬렁거려준다면 기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릴 하진 않겠어! 버릇이 들어버리면 어떡해? 게다가 이 나무는 아직까진 지지의 나무이긴 한 것이니 말이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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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탄 아래 «풍선»
1차/new 2021. 1. 19. 02:16

 지지는 아름다운 풍선을 만들고 있었다. 열여덟 살 때다. 날씨가 좋았다. 피치파 마을의 바람은 후덥지근한 법이 없고 서늘하고 건조해서 언제나 창문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황금빛 액체를 머그컵에 넣고 흔들고 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듣고 있던 건 무슨 과목이었지?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약초학 강의는 아니었다. 졸고 있지 않았으니까.

 한창 수업 중인 강의실 문을 두들긴 것은 당시 지지를 담당하던 해던 교수였다. 그가 지지를 찾았다. 그는 그때 지지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호명했는데(“지지 헌팅턴 학생을 불러주세요”), 지지는 아직도 해던 교수가 사용하던 어투에 담긴 무게, 그 무게로 감지할 수 있는 비일상의 전조를 잊지 못한다.

 계단식 강의실을 천천히 내려와 교단을 지나치는 동안 지지는 등이 차갑게 굳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그녀는 부고를 가져오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 뒤의 일은 너무나 생생한 나머지 오히려 소설 속의 장면처럼 편집되어있다. 지지는 다소 멍한 얼굴로 교수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응당 그녀가 거쳐야 할 장소들로 조금씩 이동되었다. 빨간 눈가를 숨기면서 이를 악물던 오빠와, 지지의 얼굴을 보며 오열하던 동생을 번갈아 안아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지?’ 어떤 사건이 벌어졌지만 그 경과는 그녀의 발밑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깊은 슬픔의 시기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지에게는 편지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글을 쓰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굉장한 위안을 준다. 특히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때로 살아가는 일은 상처받은 마음을 감추고 살아가는 자신을 견디는 일이지만, 엄마가 죽었을 때 지지는 그 무게가 지겨웠다. 하지만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울음을 터뜨릴 때면 죽음이 더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죽음의 의미는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때로는 우는 자신을 위해 우는 것만 같았다. 불행의 저울 위에 슬쩍 추를 하나 얹어놓는 것만 같은 나날이 있었다.

 

 복도를 걷다가 쓰레기통 곁을 굴러다니는 그 구깃구깃한 편지조각을 주웠을 때, 지지는 그 깊은 슬픔의 구렁에서 올라오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왜였을까? 지지는 그때까지 머시 멧갈프에 대해 크게 신경써본 적이 없었다. 지지가 머시 멧갈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약초학에 엄청나게 재능이 있었지!”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혓바닥이 빛나서 재밌어!”가 전부였던 것이다. 아카데미 재학 기간 동안 머시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2년 동안 아카데미의 사건사고와 동떨어진 생활공간에 있었던 지지로서는 머시가 다소 먼 후배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편지를 주워버리다니.

 ‘어쩌면 좋지?’

 머시를 찾아 아카데미를 헤매는 동안, 지지는 자신의 지나가버린 어떤 슬픔의 시절과, 그를 통과한 오늘날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굳은살, 슬픔을 다루는 제 나름의 능숙함을 떠올렸고, 마침내는 머시 멧갈프에 대한 감상에 한 가지를 덧붙이게 되었다. “신경써주고 싶어.”

 하지만 어쩐담? 눈치도 센스도 눈곱만큼도 없는 선배로 유명한 지지가 전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정평이 난 저 머시에게 어떻게 말해야만 이 마음을 능숙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지지는 말을 걸었고 머시는 그에 응답했다. 그럼 이제부터 챙겨주면 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지지는 그런 쪽으론 영 재능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말을 걸었기 때문에 지지가 알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머시는 이상하고, 무시무시하다는 소문과 달리 상냥한 아이라는 것이다. 어쩔 줄 모르고 단어를 고르는 머시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지지는 머시가 무척이나 좋아졌다.

 “그건 저도 선배님과 같은 이유인 것 같아요. 작문 같은 건 취미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 쓰니까 낫더라구요.”

  어쩐지 책상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편지를 몇 번이고 고치는 머시가 떠올라, 지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지지가 말했다.

 “나는 머시가 이 편지를 불태우지 말고 잘 간직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앞으로도 가끔씩이나마 써보는 걸 추천할게! 편지는 읽는 상대를 전제로 쓰는 거니까, 쓰다보면 결국 엄청나게 솔직해지는 거 있지? 게다가 보낼 수 없는 편지는.”

 지지는 잠깐 어물거리다 덧붙였다.

 “읽히지 않을 편지라서 훨씬 더 솔직해지곤 하는 것 같아. 때로는 위험할 정도로 말이야. 그런 문장은 처음 읽을 땐 마음이 따끔따끔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속 시원해지는 구석도 있지만? 어떻게 써야할지 모를 땐 내가 도와줄게!”

 머시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싼 지지가 가볍게 눈을 감았다. 잠깐이지만 맞댄 두 사람의 손 틈으로 바람이 불었다. 그 깊은 슬픔의 구렁에서 올라온 습윤한 바람처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피치파 마을의 바람이다. 서늘하고 건조해서 언제든 마음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 바람이다.

 지지가 눈을 떴다. 머시의 두 손에 들린 편지는 구겨진 구석 하나 없는 말끔한 종이로 돌아가 있었다.

 “편지쓰기,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구?”

 밤을 새서 편지를 쓰고 아침이 되면 꺼내어보았다. 어느 날은 상자를 활짝 열어놓고 하나씩 모조리 읽었다. 고통 속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지지의 열여덟 살은 비로소 끝날 수 있었다. 슬픔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함께 삶의 곁을 흘러가는 것임을. 그러니까 이것이 지지가 그 날 채 다 만들지 못한 아름다운 풍선일 지도 모른다. 슬픔과 씁쓸한 감상 위로 삶을 들어올리는 마법같은 풍선 말이다. 그녀는 머시가 자신만의 풍선을 만들기를 바랐다. 날아가는 머시를 보고 싶었다.

 머시의 풍선은 어쩐지 기묘한 녹색 가스를 뿜어내는 빨간 색일 것만 같은 걸.

 아차, 지지는 또 너무 많은 상상을 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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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베가에 도착하자마자 위에나는 복잡한 도시 생활이 그리워졌다. 슈텐에는 어디를 가도 최소 2층짜리 건물이 세워져있었고 길도 편리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칼베가에도 포장된 도로가 있기는 했지만 가장자리 군데군데가 깨져있어 마차가 활발히 지나다니기 힘들고 도시 자체가 구식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위에나는 도시 입구까지 도보로 30여분 정도 걸어온 상태였는데, 마차사고가 있어 그녀를 태운 마차가 진입할 길목이 완전히 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위에나는 너무 피곤한 상태로 이곳에 도착한 나머지 모든 게 나빠 보이기만 했다. 아무리 애써도 이 도시를 도무지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의 무의식이 어떻게든 트집을 잡기 위해 도시의 풍경을 둘러보는 동안 주변은 점차 어두워지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비까지 내리기 시작하자 위에나의 마음은 조급해졌다.

얼른 숙소로 가야해. 편지에 뭐라고 적혀 있었더라.’

위에나는 준비해둔 우산을 펼쳤다. 기둥을 미끄러지듯 통과하면서 경쾌한 팡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우산머리와 대가 분리되었다. 위에나가 한숨을 쉬며 머리를 주우려는 순간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우산은 그녀의 손아귀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 거리를 데굴데굴 구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붕 떠올라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방금 벌어진 일이 너무 황당한 나머지 위에나는 한 손에 우산대를 쥔 채 망연히 서있었다.

시발.’

그녀는 물을 먹기 시작한 가죽 트렁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온이 놀랄 만큼 떨어지고 있었다. 슈텐에선 전혀 경험해보지 못한 바람이 몸을 에워싸자 덜컥 겁이 났다. 아무튼지 간에 재빨리 숙소로 가야할 듯싶었다. 슈텐을 떠나기 전에 칼베가에 위치한 숙소를 찾아서 편지를 부쳐두고 답장을 받은 상태였으므로 상황이 완전히 절망적이지만은 않았다. 일단 거기에 도착하면 무엇이든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위에나가 추위로 덜덜 떨면서 물건이 쏟아지지 않게 트렁크를 조금만 열고 손목을 집어넣어 짐을 뒤지고 있을 때,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등 뒤로 다가왔다. 그녀는 동작을 멈췄다. 그녀의 상상력이 가장 음습하고 위협적인 지점에 떨어졌다가 튕겨져 올라왔다. 다음 순간 위에나는 쏜살같이 구부정한 몸을 일으키면서 팔꿈치로 뒤편의 사람을 가격했다.

어이쿠.”

남자는 깜짝 놀란 것 같았다. 벼락처럼 움직였던 위에나는 자신의 공격이 실패한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별로 아파보이지도 않았고 위에나에게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어둠 에 싸인 남자를 어떻게든 식별하기 위해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둠이 충분히 눈에 익은 것 같은데도 남자의 머리통은 새까맣게만 보였다.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도와드릴까요?”

남자가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웠다. 자기도 모르게 얼떨떨한 목소리가 위에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머나.”

얼굴이 수치심으로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스스로에게 화가 난 것처럼 위에나가 중얼거렸다.

, 그래요. 아니, 괜찮아요. 저는,”

그 순간에 운명이 마지막 주사위를 굴린 듯했다. 당황한 나머지 뒤로 물러나던 그녀의 허벅지에 부딪쳐 중심을 잃은 트렁크가 활짝 열리면서 짐이 쏟아졌다. 머리 위로 굵어진 빗방울이 빠르게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아니요.”

이번에 위에나는 단호하게 말한 뒤 트렁크를 눕히고 재빠르게 짐을 주워 넣기 시작했다. 남자는 한동안 우산을 들어주더니 결국 허리를 굽히고 물건을 함께 주워 넣었다. 이제 위에나는 정말로 창피해져서 그에게 매정하게 굴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몸을 숙이고 짐을 주워들던 남자의 어깨에서 뭔가가 굴러 떨어지더니 위에나의 구두코에 부딪쳤다. 위에나는 손을 더듬어 그 물건을 주웠다. 그것은 그녀에게 있어 너무나 익숙한 촉감이었다. 그것은 나무로 만든 반듯한 상자였던 것이다.

위에나는 그에게 상자를 돌려주면서 말했다.

당신 거예요.”

, 고마워요.”

상자를 돌려받으며 그는 미소를 지었는데, 그런 게 습관인 듯했다. 길을 걷다가 누군가의 곤경을 알아차리고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워주는 남자의 호의는 슈텐의 공방 근처에서였다면 그러려니 넘겼을 테지만 이곳은 너무나 춥고 낯선 도시여서 위에나는 그를 여전히 경계해야 하는지 잠시 고민했다. 그녀는 트렁크를 닫은 뒤 그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여긴 처음이라 잔뜩 곤두서있었어요.”

공교롭네요. 저도 그래요.”

그렇군요.”

위에나는 거리를 둘러보고 트렁크를 들었다.

그럼 안녕히.”

고개를 까딱여 인사한 뒤 그녀는 재빨리 비를 맞으며 거리를 빠져나왔다. 아까보다 기운이 났고 머릿속으로 숙소 주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남자가 우산을 씌워준 덕분인 것 같았다. 대가없는 호의를 받으니 내심 안도하게 된 듯했다. 어둠이 깔린 광야가 펼쳐진 도시 뒤편의 풍경이 운치 있게 느껴졌다. 비정할 만큼 날카로운 바람을 뚫고 그녀는 무사히 숙소를 찾아냈다. 현관에서 물기를 털어내고 보니 손등이 딱딱하게 얼어있었다.

방에는 낡은 침대와 창문을 마주보며 배치된 작은 책상이 있었다. 위에나는 램프에 불을 붙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녹인 뒤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짐을 풀었다. 반쯤 젖은 옷가지와 장신구, 손톱을 다듬는 우드파일(위에나가 만든 것이었다)을 침대에 늘어놓던 손이 자연스럽게 한쪽으로 뻗어나갔다. 위에나는 낯선 상자를 집어 들었다. 그것은 세로 길이가 팔뚝만하고 가로 길이가 한 뼘만 한 크기로, 집어 들자 안에서 덜그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위에나의 상자가 아니었다. 아까 그 남자의 것과 자신의 상자가 뒤바뀐 거였다.

위에나는 책상에 앉았다. 상자를 바닥부터 모서리까지 훑어보았다. 손바닥으로 표면을 쓸자 마감이 잘 된 나무가 반드시 선사하는 특유의 시원한 촉감이 느껴졌다.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짜여 경첩에만 슬쩍 못질이 된 상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무만을 사용해 퍼즐처럼 짜 맞추는 위에나의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있긴 했지만 솜씨 좋은 장인이 만든 물건이라는 것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상자의 제작자는 분명 꼼꼼하고 성실한 사람일 것이다. 아까의 남자가 만든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이 장인에 대해 많은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상자를 흔들던 위에나가 뚜껑을 열었다.

황당하게도 거기엔 당근 하나가 덩그러니 들어있었다. 위에나는 상자를 기울여 안쪽을 살폈다. 작은 깃털 하나가 당근에 눌려 있는 게 보였다. 깃털을 치우자, 짙은 갈색으로 번지듯 눌러쓴 누군가의 이름이 나타났다. , , ,라고 읽혔다. 저거 피로 쓴 건가? 그렇다면 아마 이 상자는 기적을 부르는 장인의 상품일 것이다.

무엇이 깃들어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위에나는 턱을 괴고 나머지 손으로 깃털을 돌렸다.

, 그러고 보니.’

내 상자를 가져간 그 남자는 어쩐다?

호신용 상자였는데, 큰일이네.”

캄캄한 어둠에 감싸인 낡은 도시가 끝없이 젖어들고 있었다. 그 순간 위에나는 일종의 예언적인 기분을 감지했다. 그래서 그녀는 기다렸다. 장인으로서, 그녀는 미안함을 느꼈다. 다음 순간 거대한 짐승의 무시무시하고 우렁찬 사자후가 도시 저편에서부터 솟구쳤다. 강력한 파동이 웅웅 소리를 내며 도시 곳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거리 전체를 장악했다. 당황한 남자가 상자를 닫아버린 듯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뚝 끊어졌다. 창틀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위에나는 보이지 않는 파동이 다음 골목으로 지나갈 때까지 잠자코 있었다.

,” 하고 그녀는 깨달았다.

깃털을 주워든 그녀가 말했다.

이거 맷비둘기의 깃털이구나.”

그렇다면 이 사람의 공방은 숲속에 있겠구나. 머릿속으로 상자를 맞추고 경첩을 매달고 있는 엘피스라는 장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째서인지 그는 까만 머리카락에 푸른 눈을 한 채였다. 그녀는 자신의 무의식이 아까 그 남자의 모습을 끼워맞춘 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상자를 만드는 자들이 그렇듯, 마지막 나무 조각을 짜 맞출 때 뚝 하는 소리가 나면서 모든 일이 제대로 마무리되었다는 기분 좋은 확신을 경험해본 이들에게만 주어진 그러한 직감이 위에나를 사로잡았다-그것은 예언적이지 않았다, 성실한 생활에 깃든 자신감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시시하긴 했으나 훨씬 단단하고 믿음직스러웠다. 위에나는 그 직감을 존중하기로 했고, 그리하여 그녀의 기억 속에서 엘피스라는 그 남자는 우산을 접고 어둠에 싸인 거리를 빠져나와 빛이 드는 아름다운 숲속의 공방으로 걸어들어가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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