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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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르바라는 사람들과 함께 우두커니 서서 해안에 정박하는 배를 보았다. 수평선에서부터 나타난 까만 점이 써드빌로 다가와 마침내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것을 보았다. 가까워진 배의 갑판을 보기 위해서는 고개를 조금 들어야했다. 바르바라는 갑판 위에서 죽었다고 생각한 얼굴들을 보았다. 
 해변의 기사들과 갑판의 기사들은 동시에 숨을 죽였다. 놀란 표정이 교환되고 잠시간 침묵이 있다가 마침내 누군가 입을 열었다. 그들이 돌아왔어. 갑판 위에 선 동료들이 모래톱으로 뛰어내렸다. 몇몇이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뛰쳐나갔고, 몇몇은 망연하게 제자리에 남았다. 바르바라는 후자였다. 그녀는 마음을 가다듬을 준비가 필요했다. 불과 이틀 전에 섬에 남겨진 자들을 완전히 마음 바깥으로 떠밀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틀 전에 이미 그들의 장례를 치른 참이었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늘 그렇듯이 곧 정신을 차렸다. 
 이반이 자신을 끌어안았을 때, 바르바라는 이반을 밀쳐내야 하는지 아니면 얌전히 안겨있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다. 자신이 화가 나는지 우울한지 괴로운지를 확신할 수가 없었다. 모든 일들이 공중에 붕 떠서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반은 바르바라를 힘주어 꽉 끌어안았다. 그 힘에 들려서 바르바라의 발끝이 땅과 조금 떨어져 있었는데 바르바라는 모든 일들이 바로 그 발끝에 매달려 있는 것 같았다. 공중에 간신히 붙어서 땅에 닿을 듯 말 듯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이반이 살아 돌아온 게 맞는 건가?’ 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무척 현실적이었다. ‘그럼 선써드의 모든 기사들이 수도로 올라가게 되는 건가?’ 
 바르바라는 이반에게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해주어야하나 고민했지만 이반은 들뜬 건지 아니면 제정신이 아닌 건지 자꾸만 다른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바르바라는 얌전히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자꾸만 전쟁 생각을 했다. 
 정말 다섯 달이야? 그래서 머리가 이렇게 길었구나. 오년쯤 지난 뒤에 왔으면 널 만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네. 우리가 제때 도착했어. 다행이다. 
 제때 도착했다는 건 무슨 뜻일까. 너 전쟁에 나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알고 있니? 너는 앞으로 나보다 더…, 바르바라는 이반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수평선을 쏘아보다 말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전쟁 이야기는 나중에 누군가 알아서 해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쌀쌀한 바람 때문에 앞 머리카락이 자꾸만 흩날렸다.
 “돌아오니 정말 좋은데.” 
 “응, 알아.” 
 바르바라는 왼손을 뻗어 이반의 뺨을 미약하게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돌렸다. 표정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네가 돌아와서 기뻐, 내 친구.” 
 내부의 통증을 숨기며 바르바라가 작게 속삭였다.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이반이 모래톱을 밟으며 다른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을 즈음에야 바르바라는 이반의 몸이 자신과 다르게 무척 따뜻했음을 상기했다. 방금의 이반이 정말로 기뻐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뒷모습을 한 번 흘끔거리다 고개를 돌렸다. 
 살아 돌아온 사람들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바르바라는 한 번도 고민해본 적이 없었다. 
 바르바라는 그들이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죽었을 거라는 생각을 확고하게 굳힌 이후로는 더 이상 그런 것들을, 혹은 그런 비슷한 것들조차 상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을 수가 없는 것들이 있었다. 도무지 참을 수가 없는 사실들이. 바르바라는 모래톱을 마저 내려오다 말고 갑판에서 뛰어내리는 길리언을 발견한 그 순간 그 사실들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칼날을 겨누는 것을 격렬하게 느꼈다. 길리언이 중심을 잡기 위해 몇 번 비틀거리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르바라는 그 자리에 오래 서있었다. 이번에는 북풍이 불어서 바르바라의 머리카락이 전부 길리언이 서있는 방향으로 흩날렸다. 파도소리가 들렸다. 길리언은 천천히 바르바라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차 좁혀졌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갈색 머리카락과 나란한 두 개의 점과 순한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길리언이 바르바라를 내려다보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바르바라는 두 손을 뻗었다. 길리언이 중얼거리듯이 말했다. 
 “바르바라.” 
 바르바라는 두 손으로 길리언의 머리카락을 쓸어보다가 그대로 미끄러뜨려서 얼굴을 더듬거렸다. 길리언의 둥근 이마와 긴 속눈썹과 콧잔등과 인중과 입술과 턱을 매만지고 탐색하고 확인했다. 길리언이 눈을 느리게 감았다가 떴다. 살아있나? 실체를 갖춘 무엇인가? 따뜻한가? 모든 것을 확인한 바르바라의 손이 마침내 힘 빠진 것처럼 스르르 미끄러졌다. 
 바르바라가 고통스럽게 속삭였다. 
 “네가 더 오래 살아야한다고 생각했어…,” 
 …. 
 “너무 어리다고…,” 
 섬에 남은 사람들의 죽음을 내제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것은 그중에 가장 어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바르바라가 도무지 용서할 수가 없었던 건, 그가 길리언이었다는 사실이다. 길리언을 제자로 두지 않았더라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하기가 훨씬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인간이고 부끄러움을 안다. 책임감을 안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소년에게 부채감을 가질 줄 안다. 
 “고통스러웠니?” 
 그건 사실 바르바라 자신에게 묻는 말에 가까웠다. 
 길리언은 바르바라의 손끝을 붙잡았다가 놓으면서 중얼거렸다. 
 “네.” 
 길리언이 속삭였다. 
 “네, 스승님.” 

 2. 
 두고 왔던 절반의 기사들이 돌아왔다. 비워놓은 방에 다시 사람이 들어찼다. 귀환자들이 마을에 모습을 드러내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이따금 술잔을 비운다. 일상이 돌아왔다. 다섯 달 동안 남은 자들이 결코 되찾지 못 한 일상이 돌아오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숙소로 돌아가는 대신 하루의 대부분을 오즈의 사무실에 처박혀 일을 하는데 보냈다. 귀환자들이 써드빌로 가지고 온 것은 기쁨과 충격, 놀라움과 고통, 그리고 마법과 서류뭉치들이었다. 알렉스가 돌아왔지만 바르바라는 다섯 달 동안 지속해서 처리 중인 수십 가지 종류의 서류를 알렉스에게 떠맡길 수 없음을 알았다. 게다가 가만히 있으면 머리가 아팠다. 생각해야 할 것들이 무척 많았는데, 바르바라는 그 생각에 떠밀려가기보다는 어딘가에 붙어 지속적으로 무언가를 꾸준히 하는 편이 낫다는 판단을 내렸다. 실제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바르바라는 남은 이들의 생환 이후에도 사무실에 붙어 말없이 전투적으로 일을 하는데 시간을 보냈다. 
 이따금 사무실로 누군가 찾아올 때도 있었다. 오즈월드를 찾는 사람일 때도 있었고 바르바라를 찾는 사람일 때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누군가 오즈월드를 찾을 때에는 얌전히 자리를 비켜주었지만 자신을 찾는 사람일 때는 지금은 바쁘다는 식으로 그들을 돌려보냈다. 오즈월드는 그 때마다 서류뭉치에서 고개를 들고 바르바라를 바라보았다. 
 “피하는 건가?” 
 한 번은 그런 질문을 받은 적도 있었다. 
 “말이라고 하니.” 
 바르바라는 서류를 넘기며 부드럽게 시치미를 뗐다.
 “할 일이 너무 많잖니, 오즈.” 
 바르바라는 서류 위로 글씨를 작성하면서 중얼거렸다. 
 “여기 있는 편이 차라리 마음이 편해.” 
 진심이었다.

2018/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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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탄 아래 «죽는 것은»
1차/new 2021. 1. 19. 02:17

 지지는 단상으로 올라가 힘차게 숨을 들이마셨다. 초속 100km의 속도로 피치파 마을을 아우르는 쾌청한 공기와 온갖 냄새가 지지의 콧구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지의 뱃속에는 때마침 형광색 버섯과 곰팡이와 이끼가 자라고 천장에선 잿빛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는데, 이 어마무시한 콧바람이 들이닥치면서 그녀의 뱃속에서 벌어지던 사랑스러운 난장판은 흔적도 없이 쓸려나가고 말았다. 마침내 속이 텅 빈 느낌을 받은 지지는 뱃가죽을 문지르며 여러분을 향해 빙그레 웃었고, 리스피어 교수가 화답해주자 그녀의 뱃속에선 침착함과 용기라는 싹이 하나씩 솟구쳐 올랐다.

 “지지  헌팅턴입니다! 오늘 저는 그동안 작성해온 논문의 중간 단계를 발표하려고 합니다.”

 그녀 곁을 빙글빙글 돌던 소환수가 차례로 등 뒤에 붙더니 곧 여러 개의 손이 되어 거미처럼 쑥 튀어나왔다. 그러자 꼭 여러 개의 손으로 광채를 쥔 비슈누처럼 보였지만, 이곳에는 비슈누라는 것이 없으니 지금 지지의 모습을 설명할 말이 없을 테다.

 지지는 여러 개의 손으로 설명조의 행동을 덧붙이며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제 논문 제목은 <약학적 관점에서 본 불로불사와 그에 따른 연금술 활용에 관한 연구>입니다. 여기서 불로불사란 동방 대륙에서 온 개념으로, 병들지 않거나 노화를 막음으로써 오래 사는 것 또는 죽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약학적으로, 노화라는 것은.”

 죽음에 대하여. 그것은 아주 오래되었고 무척이나 친숙하게 느껴지는 어떤 것이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에서도 지지는 바닥에 엎어져있거나 침대에 누워있다. 목구멍에서 올라오는 피는 뜨겁거나 차가운 온도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까끌까끌하거나 날카롭다는 촉각으로 다가오곤 했다. 죽는 건 무서워, 어릴 땐 그렇게도 생각했었다.

 언젠가 지지의 엄마도 비슷한 생각을 했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하지만 괜찮아질 거란다. 그런 몸을 물려줘서 미안해.” 엄마의 장례식에는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참여했다. 지지는 엄마의 인복이나 명성 같은 걸 생각해보았고, 어쩌면 그녀가 될 수 있을 법했던 것들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았다. 나는 엄마를 원망한 적이 있나? 엄마의 죽음은 지지가 어렴풋하게 느끼던 감정 모두를 하나로 짓눌렀다. 지지는 때로 정말이지 엄마가 그리웠다. 그래서 침대에 눕거나 각혈을 할 때마다-특히 어릴 적에 강렬하게 찾아오곤 했던 핏줄에 대한 원망, 어렴풋한 분노 같은 건 아무렴 좋다고 얼렁뚱땅 퉁치기로 했다.

 ‘대인배의 마음! 아주 중요한 거야!’ 어느 순간에는 정말로 죽는 게 무섭지 않았다. 삶을 살아가는 일도 괜찮아졌다.

 “흘러내리는 피를 일시적으로 멈추거나 상처를 봉합하는 의학마법의 원리를 연금술에 응용한다면, 완벽한 불로불사는 아니더라도 흠집이 나지 않는 단단한 피부, 의도적으로 성장을 저해-발육에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 선에서 일부 기능의 성장을 저해시켜야 하겠지만요-하는 일 따위를 의도해볼 수 있을 거라 기대됩니다. 하지만 그렇기 위해선 인간의 신체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수반되어야할 것이므로, 설령 가능하다고 한들 불로불사까진 아주, 아주, 아아아주 긴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니 현재까지의 연구 성과를 요약하자면.”

 지지가 찹 두 손을 모으자 등 뒤에서 뻗어 나온 세 쌍의 손이 동시에 오케이! 사인을 외쳤다.

 “불로불사는 불가능해. 어쩔 수 없지만 일단은 우리 모두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입시다!”

 아차, 너무 들떠서 마지막엔 결국 지지 같은 마무리가 되어버린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의도한 걸까? 지지는 무거운 죽음 같은 건 바라지 않으니까. 병드는 일, 피를 보는 일, 사랑 속에서 미움을 더듬거리는 일 같은 건 이제 아무래도 좋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졸업 전까지 다른 실마리를 찾게 된다면 좋겠네요!”

 ‘그래도 죽는 건 싫어~’

 오,지지.

 죽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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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지가 그 나무를 키우기 시작한 건 2학년 때다.

 집에서 가지고 온 작은 묘목이었다. 지지의 오빠가 시험 삼아 만들어낸 새 품종이었는데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세 그루 째 말라죽게 되자 이걸 개량할 순 없다고 판단하고 남은 마지막 한 그루였다. 지지는 오빠에게 이 나무를 달라고 했다. 지지의 오빠는 흔쾌히 그 빼빼마른 나무를 건네주었지만, 사과나무라는 건 구색일 뿐 정작 무슨 색깔의 열매가 열릴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괜찮아. 팔 만한 게 열리진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 키우면 뿌듯해질 것 같아!”

 과수원 집안의 딸자식으로서 어깨 너머 배워온 여러 가지 지식은 분명 유용하게 쓰였다. 한동안 지지는 이 작다란 나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지를 치고, 비료를 푸고, 영양제를 넣고, 나무의 마력을 관찰하며 기분을 살폈다. 그런가 하면 지지는 의외로(남들이 추측하기로 그녀는 인정 많은 사람이긴 했으니)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해 자신의 특별한 무언가로 삼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이 나무는 그녀가 자라는 동안에도 그냥 사과나무로만 남았다. 지지는 나무가 갑자기 쓰러져 생을 다한대도 그 죽음에 오래 사로잡혀있지는 않으리라. 추억할 만한 이름을 따로 붙여주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 사정도 그러하여, 학년이 높아질수록 지지는 안뜰에 심어진 그 나무를 종종 잊어버렸고, 아카데미를 떠나있던 지난 2년간은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카데미 기숙사 안뜰에서 애지중지 길러져온 역사를 간직한 이 지지님의 사과나무를 허락도 없이 따먹다니, 이 엄연한 절도행위를 용납할 수는 없는 법! 지지가 데미안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사건 때문이다. 데미안은 정말이지 잊을 만하면 지지의 나무 근처를 얼쩡거리다 귀신같은 솜씨로 사과를 따먹곤 했던 것이다. 이 소소하고도 용납 불가능한 절도 행위가 이어져온지도 벌써 몇 주째였다. 어쩌면 지지가 제대로 알지 못했을 뿐, 사과나무를 향한 데미안의 소소한 절도 행위는 몇 년째 이어져왔던 걸지도 모른다.

 지지는 데미안이 싫지 않았다. 데미안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지만 다루기 쉬운 구석이 있었고, 거짓말을 하며 뻔뻔하게 굴기보다는 자백해놓고 기분을 살피는 쪽에 가까웠다. 처음 절도행위를 적발 당했을 때, (비록 처음에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도망치기는 했지만, 붙잡히고 나자 순순히 그녀의 기분을 살펴준 점도 지지의 기분을 누그러지게 했다. 볼을 쭉 잡아당기자 데미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는데, 지지는 그가 으레 그 뒤에 뱉는 말도 좋아했다.

 “그치만 이 사과가 제일 맛있는 걸. 항상 내가 다니는 길에 그렇게 탐스럽게 열려있는데 안 먹을 수가 없잖아?”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가물가물한 어느 날, 지지는 아카데미 기숙사 안뜰을 빙글빙글 맴돌며, 자신의 나무를 흘끔흘끔 훔쳐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데미안이 사과 서리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지 며칠 지나지 않았던 때일 것이다. 자신의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지지는 생각했다. 그렇지, 이 나무는 사과나무였어. 가지 곳곳에는 주황빛이 도는 매끈한 붉은 색의 작은 사과가 열려있었다. 언제 이렇게 열렸던 걸까? 갑작스럽게도 지지는 나무가 낯설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세월동안에도 꾸준히 생장해온 나무만의 시간이 더는 지지의 나무가 아닌 낯선 나무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용케도 혼자 잘 자랐구나. 이름이라도 붙여줄 걸 그랬나보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이 나무는 여전히 지지의 나무이긴 한 것이다.

 

 

 “데미안!!”

 자리를 박차고 나온 데미안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지지가 기숙사 안뜰로 걸음을 옮겼다. 지지의 예감대로 데미안은 거기 있었다. 어쩐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불만스러워 보이지만 결국 지지에게 누그러뜨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나무 아래에 서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아름답고 작고 옹골찬 열매가 가득 핀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쳐나가며 끝없는 생장의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지지는 문득 자신이 완전히 자리를 비웠던 지난 2년간에도 데미안이 자신의 나무 아래를 어슬렁거렸을지, 때로는 저 가지를 잡고 올라타 단단한 열매를 따먹었을지, 그렇게 함으로써 나무를 혼자 두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미안~ 너무 놀렸나봐! 화났어? ? ?”

 데미안에게 쪼르르 달려간 지지가 아양을 떨며 말했다.

 “화 풀어라~ 그치만 자꾸 허락도 없이 훔쳐 먹는 데미도 나빴는걸!”

 지지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날카롭게 움직여 사과 하나를 떨어뜨렸다. 작고 단단한 과일 하나가 데미안의 정수리에 부딪쳐 한 번 더 튀어올랐다가, 그대로 데미안의 손안에 감겨들어갔다.

 “맛있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봐주는 거야! 이번 건 아무 짓도 안 했다구?”

 어쨌든 데미안도 결국 사과 한 알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지지의 나무에서 열리는 건 그에게 있어 맛있는 사과니까. 지지는 데미안의 괘씸한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나무 아래를 계속해서 어슬렁거려준다면 기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릴 하진 않겠어! 버릇이 들어버리면 어떡해? 게다가 이 나무는 아직까진 지지의 나무이긴 한 것이니 말이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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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탄 아래 «풍선»
1차/new 2021. 1. 19. 02:16

 지지는 아름다운 풍선을 만들고 있었다. 열여덟 살 때다. 날씨가 좋았다. 피치파 마을의 바람은 후덥지근한 법이 없고 서늘하고 건조해서 언제나 창문을 열어놓을 수 있었다. 창가에 기대어 황금빛 액체를 머그컵에 넣고 흔들고 있던 기억이 난다. 그때 듣고 있던 건 무슨 과목이었지? 가물가물하다. 어쨌든 약초학 강의는 아니었다. 졸고 있지 않았으니까.

 한창 수업 중인 강의실 문을 두들긴 것은 당시 지지를 담당하던 해던 교수였다. 그가 지지를 찾았다. 그는 그때 지지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호명했는데(“지지 헌팅턴 학생을 불러주세요”), 지지는 아직도 해던 교수가 사용하던 어투에 담긴 무게, 그 무게로 감지할 수 있는 비일상의 전조를 잊지 못한다.

 계단식 강의실을 천천히 내려와 교단을 지나치는 동안 지지는 등이 차갑게 굳는 것을 느꼈다. 그때까지 그녀는 부고를 가져오는 사람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 뒤의 일은 너무나 생생한 나머지 오히려 소설 속의 장면처럼 편집되어있다. 지지는 다소 멍한 얼굴로 교수님의 안내를 받으면서 응당 그녀가 거쳐야 할 장소들로 조금씩 이동되었다. 빨간 눈가를 숨기면서 이를 악물던 오빠와, 지지의 얼굴을 보며 오열하던 동생을 번갈아 안아주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이게 다 무슨 소란이지?’ 어떤 사건이 벌어졌지만 그 경과는 그녀의 발밑에서 그림자처럼 움직이고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깊은 슬픔의 시기가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지지에게는 편지를 쓰는 습관이 있었다. 글을 쓰는 일은 생각 이상으로 굉장한 위안을 준다. 특히 편지를 쓰기 위해서는 상대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어버리는 것이다. 때로 살아가는 일은 상처받은 마음을 감추고 살아가는 자신을 견디는 일이지만, 엄마가 죽었을 때 지지는 그 무게가 지겨웠다. 하지만 걸핏하면 울음을 터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울음을 터뜨릴 때면 죽음이 더 무거워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이유로 죽음의 의미는 가벼워지는 것만 같았다. 때로는 우는 자신을 위해 우는 것만 같았다. 불행의 저울 위에 슬쩍 추를 하나 얹어놓는 것만 같은 나날이 있었다.

 

 복도를 걷다가 쓰레기통 곁을 굴러다니는 그 구깃구깃한 편지조각을 주웠을 때, 지지는 그 깊은 슬픔의 구렁에서 올라오는 바람소리를 들었다. 왜였을까? 지지는 그때까지 머시 멧갈프에 대해 크게 신경써본 적이 없었다. 지지가 머시 멧갈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약초학에 엄청나게 재능이 있었지!”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혓바닥이 빛나서 재밌어!”가 전부였던 것이다. 아카데미 재학 기간 동안 머시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2년 동안 아카데미의 사건사고와 동떨어진 생활공간에 있었던 지지로서는 머시가 다소 먼 후배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 편지를 주워버리다니.

 ‘어쩌면 좋지?’

 머시를 찾아 아카데미를 헤매는 동안, 지지는 자신의 지나가버린 어떤 슬픔의 시절과, 그를 통과한 오늘날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굳은살, 슬픔을 다루는 제 나름의 능숙함을 떠올렸고, 마침내는 머시 멧갈프에 대한 감상에 한 가지를 덧붙이게 되었다. “신경써주고 싶어.”

 하지만 어쩐담? 눈치도 센스도 눈곱만큼도 없는 선배로 유명한 지지가 전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다고 정평이 난 저 머시에게 어떻게 말해야만 이 마음을 능숙하게 전달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지지는 말을 걸었고 머시는 그에 응답했다. 그럼 이제부터 챙겨주면 되는 건가? 잘 모르겠다. 지지는 그런 쪽으론 영 재능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말을 걸었기 때문에 지지가 알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우선 머시는 이상하고, 무시무시하다는 소문과 달리 상냥한 아이라는 것이다. 어쩔 줄 모르고 단어를 고르는 머시의 표정을 들여다보며, 지지는 머시가 무척이나 좋아졌다.

 “그건 저도 선배님과 같은 이유인 것 같아요. 작문 같은 건 취미가 없지만 그래도 조금 쓰니까 낫더라구요.”

  어쩐지 책상에 앉아 머리를 부여잡고 편지를 몇 번이고 고치는 머시가 떠올라, 지지는 빙그레 웃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야.”

 지지가 말했다.

 “나는 머시가 이 편지를 불태우지 말고 잘 간직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앞으로도 가끔씩이나마 써보는 걸 추천할게! 편지는 읽는 상대를 전제로 쓰는 거니까, 쓰다보면 결국 엄청나게 솔직해지는 거 있지? 게다가 보낼 수 없는 편지는.”

 지지는 잠깐 어물거리다 덧붙였다.

 “읽히지 않을 편지라서 훨씬 더 솔직해지곤 하는 것 같아. 때로는 위험할 정도로 말이야. 그런 문장은 처음 읽을 땐 마음이 따끔따끔해.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속 시원해지는 구석도 있지만? 어떻게 써야할지 모를 땐 내가 도와줄게!”

 머시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싼 지지가 가볍게 눈을 감았다. 잠깐이지만 맞댄 두 사람의 손 틈으로 바람이 불었다. 그 깊은 슬픔의 구렁에서 올라온 습윤한 바람처럼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것은 피치파 마을의 바람이다. 서늘하고 건조해서 언제든 마음을 활짝 열어놓을 수 있는 바람이다.

 지지가 눈을 떴다. 머시의 두 손에 들린 편지는 구겨진 구석 하나 없는 말끔한 종이로 돌아가 있었다.

 “편지쓰기,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구?”

 밤을 새서 편지를 쓰고 아침이 되면 꺼내어보았다. 어느 날은 상자를 활짝 열어놓고 하나씩 모조리 읽었다. 고통 속에도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지지의 열여덟 살은 비로소 끝날 수 있었다. 슬픔은 견디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함께 삶의 곁을 흘러가는 것임을. 그러니까 이것이 지지가 그 날 채 다 만들지 못한 아름다운 풍선일 지도 모른다. 슬픔과 씁쓸한 감상 위로 삶을 들어올리는 마법같은 풍선 말이다. 그녀는 머시가 자신만의 풍선을 만들기를 바랐다. 날아가는 머시를 보고 싶었다.

 머시의 풍선은 어쩐지 기묘한 녹색 가스를 뿜어내는 빨간 색일 것만 같은 걸.

 아차, 지지는 또 너무 많은 상상을 해버린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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