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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함찬빈»
1차/old 2019. 10. 22. 16:06

1. 첫인상

그 애,

함찬빈은 세종대왕 동상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너도 죽고 싶어서 쓰는 거야?” 그 때, 함찬빈의 표정은 동상 그림자에 통째로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해를 막 스쳐갈 때였다. 나는 그 애 얼굴을 보기 위해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곤 동상에서 뛰어내렸다.

“신입생들이 이름 썼길래 지워준 거야.”

“아… 좋은 선배네.”

함찬빈은 내 명찰을 바라보곤 여러 가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이름에 관한 획일화 된 반응에 익숙한 사람이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해야 아, 또… 정도였을까.

하지만 함찬빈은 나를 이삼신이나 삼신 대신 신이라 부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 애는 내게 허락을 구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뒤로 함찬빈에게 나는 ‘신이’가 됐다.

 

2.

좋은 애네. 다시 마주칠 것 같진 않지만.

그게 걔 첫인상의 전부다.

 

3.

대체로 그런 예감들은 적중한다. 하지만 이번엔 삼신의 감이 틀렸다.

지난 이주일 동안 학교에서 가장 빈번하게 마주친 얼굴을 꼽으라 한다면 이삼신은 함찬빈이라 대답할 것이 분명하다. 함찬빈은 정말이지, 온갖 곳에서 튀어나왔다. 체육관, 과학실, 복도와 불탄 무용실 주변……. 묘하게 모든 장소는 학교에서 떠도는 유치찬란한 괴담의 근원지들과 맞아떨어졌고, 이삼신은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을 찾아 학교를 들쑤시는 그 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웃어야 했다. 안녕. 그렇게 인사하면 그 애는 꼭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어, 안녕! 그리고 나서 둘은 시덥잖은 이야길 주고받고 언제 그랬냐는 듯 복도를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였던 함찬빈의 표정이 ‘아, 또야?’가 되고 종국엔 ‘그래, 난 이해해, 신아’가 됐을 때쯤엔 벌써 봄이 다 갔을 무렵이었고 여름이었고 더웠고 달려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삼신은 함찬빈이 오컬트 매니아라는 사실에 대해선 별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그 오컬트가 왜 하필 ‘문방구에서 500원에 파는 미니 괴담 시리즈’에 나올 법한 구시대적 코드 감성이냐는 것에선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하지만 타인의 관심이 얼마나 시대에 뒤쳐져있든, 함찬빈이 얼마나 순진하든, 그것은 찬빈의 자유일 뿐이고 이삼신이 간섭할 것은 아니었으므로 금방 잊었다. (이삼신은 자신과 관련 없는 사항들을 종종 뒤로 재쳐 두곤 한다.)

그리고 다시 함찬빈을 만났을 땐 여름의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운동장 정중앙에서 공룡이 된 그 애를 보고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어?

고작해야 그게 다였다는 것이다.

 

4.

그런 옷으론 날 이길 수 없어, 애송이 티라노.

 

5,

여름이 가기 전에 함찬빈을 다시 마주쳤다. 에어컨이 드는 듯 마는 듯 더운 듯 덥지 않은 듯 모호한 편의점 안에서였다. 그 애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문에 붙여준 딸랑이가 비명을 지르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

“아!”

함찬빈은 입을 벌리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리 둘은 잠깐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여기서 일하는구나.”

나는 물방울이 맺힌 콜라를 집었다가 사이다를 하나 더 집어서 계산대에 올려놨다. 함찬빈은 바코드를 찍곤 “2400원이야. 어, 대타 뛰거든.”라고 대답했다. 나는 함찬빈에게 사이다를 밀었다. 함찬빈이 씩 웃었다. “땡큐땡큐.” 걔가 카운터 한쪽에 밀어놓은 빨대를 내밀었다. 나는 노란색이 좋다고 대답하곤 걔가 내민 빨간색 빨대를 집어갔다. 선택지에 노란 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함찬빈은 그게 참 아깝게 됐다는 투로 말했지만 별로 아쉬울 것까진 없는 일이었기에 우리 둘 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우리는 잠시 사이다와 콜라를 마셨고 할 말을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더 이상 우리는 어색하게 ‘아, 또 만났네.’ ‘그러게, 뭐 하러 왔어?’ ‘아, 난 쌤이 뭘 좀 시켜서…….’ ‘아, 정말? 사실 나도…….’ 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뻥치시네, 귀신 있나 보러 왔으면서’라고 생각할 구실 자체가 사라진 까닭이기도 했다.

내가 다른 질문을, 그러니까 평상시의 우리 사이에선 절대 나올 수 없는 질문을 시작한 건 그러니까 다 그 이유 때문이다.

“평소에도 여기서 일해?”

 

6. 이삼신은 끊임없이 말한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으니 좀 덥다. 포스 안은 더 더울 텐데… 안 더워?”

“난 마트 캐셔만 해봤어. 편의점은 그래도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 이거 너무 무심한 말이었니?”

“아, 학원은 안 다녀. 저녁엔 동생들 밥해주러 일찍 가는 거야. 너도 그래? 아, 아빠가 해줄 때도 있구나… 우리 아빤 바빠. 엄마도 그렇고… 여하튼 반찬은 다 내가 하는데, 애들 편식이 좀 있어서 항상 남기더라. 기껏 해줬는데 좀 속상하고 또 가끔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어…….”

“너도 고생이 많네. 바쁘구나, 다들… 여기 앉아있으면 좀 심심할 것 같아. 아닌 애들도 있겠지만 어쩐지 넌 심심하게 여길 것 같거든. 그냥, 넌 재미있는 애인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답답할 거 아냐?”

“그럼 자주 놀러와도 돼? 네가 대타하는 날이 언젠진 모르겠지만.”

“아, 나도 주말엔 바빠서 못 올 지도… 어쨌든 시간 나면 말이야.”

“아아, 그거 좋지. 그럼!”

“가지튀김 해본 적 있어? 나도 해보고 싶긴 한데 동생들 때문에 생각하는 양보다 세 배는 더 해야하구 기름은 뒤처리가 귀찮으니까… 응, 알지알지. 그래서 나도 항상 미뤄. 설거지 더 힘들잖아, 기름기 있는 거 하고 나면.”

“아, 찌는 법도 있지, 참… 그럼 다음엔 가지 만두 해볼까? 막내는 가지 싫어해서 완전 울겠다. 맛있게 만들면 걔도 먹긴 할 거야. 내 동생들 착해서 먹기 싫어도 꾸역꾸역 먹어주긴 해. 다는 안 먹지만 손도 안 대고 버리진 않아. 내가 만든 거라구…….”

“응, 내 동생들도 그래. 중학생이 되더니 성깔이 더 사나워졌어. 그래도 나쁜 애들은 아니야.”

“넌 좋은 형 노릇을 하고 있구나. 부럽네… 아니, 그건 고통스러운 일인가?”

“사실 난 고통스럽거든.”

“미안 방금 말은 잊어버려.”

“진심은 아니었어.”

‘사실 잘 모르겠지만.’

삼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7.

이삼신은 대화 도중 자신이 평소에 말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그대로 두었다. 함찬빈의 안에는 정말 공룡이 사는가 보다. 인간의 앞이었다면 더는 말하지 않았을 텐데 그 애는 뭘 말해도 정말이지 아무 반응도 없이 제 삶에만 집중할 것 같아서, 삼신은 멈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삼신의 몸속에도 공룡이 사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이삼신은 함찬빈이 걸어온 삶의 족적 곳곳에서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 크고 깊게 눌려 찍힌 발자국이 얼마나 캄캄했는지. 어떻게 하면 그 어둠을 신경 쓰지 않고 더 빨리 걸어갈 수 있는지. 그러니까 이삼신은 가지 반찬이라던가, 동생들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런 것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8.

너도 죽고 싶어서 쓰는 거야?

 

9.

“야, 함찬빈!”

편의점을 나서기 전에, 삼신은 한 번 더 그 애를 불렀다. 찬빈이 고개를 돌리자 삼신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찬빈이 눈을 반짝이며 씨익 웃었다. 삼신은 천천히 손을 내리고 그 애의 얼굴을 바라봤다. 장난 끼 넘치고 어쩐지 조금은 삶에 대해 영민해 보이는 그 눈을.

 

10. 갑자기 떠오르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

 

11.

“야, 너 왜 그렇게 박장대소해?”

“아, 아니야…… 그, 그냥…….”

삼신은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을 치며 웃었다. 낄낄거리고, 배를 움켜쥐고, 포스에 손을 올리고 입을 벌리며 웃어댔다. 공룡 찬빈이 떠오르자 견딜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우스워졌다. 이삼신은 찬빈이 건너왔을 그림자나 자신이 밟고 있을 그림자나 웃기지도 않는 괴담이나 촌스러운 미신들을 전부 잊었다. 신아! 라고 부르던 찬빈의 얼굴이 그제야 떠올랐다. 걘 처음부터 그렇게 잘 웃고 잘 웃기고 불쑥 악수를 했던 것이다. 이삼신은 함찬빈에게 했던 터무니없는 오해들과 자신이 어림짐작하는 찬빈의 모든 것들을 깡그리 날려버릴 때까지 웃어댔다. 그러자 찬빈은

“정말, 신이는 가끔 가다 증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삼신은 눈물을 닦으며 낄낄거렸다. 그리곤 헐떡이면서 포스를 짚고 제대로 일어섰다.

“뭐래, 티라노인 너보단 훠얼씬 알기 편하거든?”

삼신은 손을 털곤 후, 하고 숨을 내쉬며 도도하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함찬빈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질색했다. 삼신은 씨익 웃었다.

“찬빈, 너 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나랑 장이나 보러가자. 너 끼고 다니면 진짜 시간 완전 빨리 갈 것 같어.”

삼신은 불쑥 찬빈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함찬빈이 언젠가 이삼신에게 그래주었던 것처럼. 그러자 찬빈은 삼신의 손을 덥썩 잡았다. 별로 길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올바르게 느껴졌다.

“그러지 뭐. 학교 끝나고?”

“아니, 1시간 쯤 더 뒤에?”

“근처 대형 마트?”

“어. 근데 일행도 있어.”

“누군데?”

“아는 후배.”

삼신은 함찬빈을 마주친 은수의 동공이 이번엔 얼마나 더 열심히 떨리게 될지 상상해봤지만 곧 그만두었다. 은수의 동공은 늘 삼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진 했기 때문이다.

“걘 널 좋아할 거야.”

아마도.

삼신은 그 말을 덧붙이는 대신 한 번 더 활짝 웃었다.

“담에 봐.”

“그래.”

찬빈은 삼신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삼신도 찬빈에게 다시 손을 흔들어 줬다. 이삼신과 함찬빈은 친구가 된 것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벌어진 마법 같은 일이었다.

(오컬트 매니아 친구였다면 인생이 더 재미있어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공룡 친구를 얻는 것도 때론 나쁘지 않은 것이다. 원더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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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고백로그»
1차/old 2019. 10. 22. 15:59

물론 늑대 인간과 흡혈귀는 있다. 우리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 들뢰즈 · 가타리, 『천 개의 고원』, 521쪽 

 

아홉 달 동안 바르바라가 낚시와 업무 외 시간을 할애해 썼던 것들 : 

■ 사냥꾼 욘디가 같은 마을의 소녀를 사랑했다. 그 소녀는 늑대를 몹시도 좋아해 숲으로 고기를 던지거나 휘파람을 부는 습관이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욘디는 사냥을 관두고 밤마다 늑대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정말로 늑대가 되었다. 하지만 소녀는 자신을 찾아온 늑대를 보고 겁에 질리고 만다. 당황한 욘디는 원래모습으로 되돌아가려고 했지만, 숲속에서 들려온 늑대울음소리에 화답하는 바람에 결국 인간이 되는 법을 잊는다. 늑대도 인간도 아닌 그 무엇이 된 괴물은 슬프게 울부짖으며 도망쳤고 다시는 소녀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 검은 유리라 불리는 우이드린 호수 인근 지역에는 12월마다 사흘 간 되돌아오는 망자들을 위해 축제를 벌이는 풍습이 있다. 주민들은 되돌아온 이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눈앞의 망자가 진짜인지를 확인하려고 한다. 만약 그가 가짜를 구분하지 못 한다면 눈앞의 망자에게 현혹된 것이다. 외로운 망자들은 현혹된 주민들을 호숫가로 이끌어 길동무로 삼는다. 

■ 켈커스 산맥에는 길 잃은 나그네를 잡아먹는 들개 버나디가 있다. 몸통은 하얀 털로 이루어져 있는데 얼굴만 가죽이 뒤집혀 피부가 바깥으로 드러난 괴물이다. 하얀 눈밭에 덩그러니 나타난 버나디의 붉은 얼굴은 나그네가 동사하는 동안 차츰 가까워져 마침내 나그네를 미쳐버리게 한다. 제 때 눈을 가린 나그네는 동사하여 시체로 남지만 그 얼굴을 본 나그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리고 만다. 

■ 예언자는 사랑하는 이와 결합하는 순간 예지의 능력을 잃고 보통의 인간이 된다. 루소 서쪽 끝에는 아름다운 예언자가 살았는데, 어느 날 그녀는 신의 목소리를 듣는데 지쳐 자신의 첫 번째 이를 알고자 했다. 그녀는 달이 뜨지 않는 밤 그릇에 물을 떠놓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신의 상이 있었다. 예언자는 신을 본 대가로 눈이 멀고 온몸이 타들어가 재가 되고 말았다. 

■ 브리다가 땅 끝에서 태양을 훔치자 세상은 끝나지 않는 밤에 사로잡힌다. 그러자 신의 문지기가 브리다의 마음을 훔쳐 도둑맞은 태양과 맞바꾸려 한다. 배신당할 사랑에 빠진 브리다는 태양을 돌려주는 대신 문지기의 모든 것을 훔쳐 사라지고, 문지기는 도둑맞은 자신을 되찾기 위해 평생 브리다를 찾아 떠돌게 된다. 역할을 잊은 문지기 때문에 세상에 영원한 낮이 찾아오자, 신은 차가운 달을 빚어 때가 되면 태양을 식혀 땅 끝으로 굴러 떨어지게 만들었다. 

 

 1 

 바르바라는 이반의 손을 붙잡고 괴물이 사라진 숲을 되짚어 마을로 돌아왔다. 이반이 타고 온 말 때문이었다. 검은 말 한 필이 마을 입구에 서있었다. 기둥에 고삐를 매고 짐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였지만 아무도 채가지 않은 상태였다. 이 마을 인심이 좋네. 이반이 우스갯소리를 하자 바르바라가 부드럽게 대답했다. 넌 나와 관련된 사람이니까. 이 마을 사람들은 나를 무서워하거든. 잠시 이반의 표정을 살피던 바르바라가 덧붙였다. 그들이 날 존중한다는 뜻이란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말은 큰 눈을 끔뻑이며 바르바라와 이반을 번갈아 응시했다. 이반이 손을 올려 말의 콧잔등을 쓰다듬는 것을 보던 바르바라가 물었다. 이 애 이름은 뭐니? 말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이반이 대답했다. 아직 정하지 않았어. 바르바라는 이반의 작명센스를 어느 정도 불신하는 편이었는데 이번에도 그가 말에게 강아지 혹은 바둑이 따위의 이름을 지어줄 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이반이, 이번엔 네가 지어줄래? 라고 물었을 때, 바르바라는 조금 당혹스럽다는 듯 웃으며 되물어야 했다. 정말? 

 이런, 갑자기 고민되는 걸. 

 마땅한 이름이 떠오르질 않나 봐. 

 물론 멍멍이보단 좋은 이름을 지어줄 자신이 있어. 

 꽤 괜찮은 이름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아니야. 

 생각에 잠긴 바르바라의 말이 거기서 끊어졌다. 이반은 말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거리를 걷던 주민 한 명이 바르바라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고 지나갔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고 짧게 화답했다. 주민은 두 사람을 지나치며 시선으로 이반을 훑었는데, 이반은 눈웃음을 짓다 말고 무언가 깨달은 사람처럼 어깨를 더듬었다. 

 로브를 두고 왔네. 

 아까 벗었잖니. 

 어디서? 

 호숫가에서. 

 바르바라는 이반이 리드하기 위해 자신을 들어 올리던 순간을 짧게 묘사했다. 깊고 광활한 호수가 보이는 들판에서 두 사람은 춤을 추었다. 그곳에서 조금 더 나아가면 자갈밭으로 이루어진 물가가 나왔다. 둥근 자갈들은 항상 젖어있었고 바위에는 이끼가 피어있었다. 물 냄새는 깨끗했다. 삼림이 뿜는 나무의 향기와 안개로 젖은 공기, 호숫가를 요람처럼 감싼 산맥들…. 이반은 어깨에서 로브가 미끄러지는 것도 모르고 바르바라를 들어올렸다. 바람이 바르바라 쪽으로 부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한껏 흩날렸고, 그녀의 발끝이 공중에 붕 떴다가 내려앉았다. 바르바라는 소리 내어 웃었다. 춤을 돌려받았구나, 라고 말했다. 좋아, 넘겨줄게, 라고 대답했던 것 같기도 했다. 

 아마 들판에 그대로 있겠지. 

 이런, 말해주지 그랬어. 

 열중하느라 깜빡했지 뭐니. 

 이반이 바르바라를 내려다보았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이야. 

 두 사람은 호숫가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번에 이반은 말의 고삐를 쥐었다. 말발굽 소리는 포장된 길을 걸을 때 또각또각 소리를 냈다가 숲 어귀에 들어서자 부드러운 흙과 이끼에 묻혀 뭉개졌다. 태워줄까? 이반이 물었다.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뒤로? 물론 이반은 그녀를 앞으로도 뒤로도 태울 수 있었다. 뒤에 태우던 시절과 앞으로 태우던 시절을 번갈아 지나왔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이반은 의외로 진지하게 되물었다. 어떻게 태워줄까? 바르바라는 다른 생각에 잠긴 얼굴로 앞을 보며 대답했다. 그냥 계속 걷자. 

 숲이 아까보다 훨씬 밝게 느껴졌다. 그 어떤 불길함도 없었다. 나뭇잎 그림자가 빛에 쪼개져 바람에 따라 흔들리고 어둠은 투명해지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생각에 잠겨있던 바르바라가 갑자기 떠오른 것처럼 불쑥 물었다. 

 잠깐 우리 집에 들렀다 갈래? 

 아까 그 가게? 

 아니, 집은 따로 있어.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반 옆에서 고개를 흔들며 걷는 말을 보았다. 방금 저 애 이름을 정했어. 바르바라는 미지근하게 웃으며 이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최근에 고양이를 한 마리를 풀어놓고 키울까 했거든… 그러니 쟤 이름은 고양이야. 

 결국 바르바라도 작명센스가 그렇게 좋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름의 괴물들> 

 태초에 에아가 땅에서 솟아오른 모든 들과 짐승과 새와 인간들을 굽어보시고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으시니 에아가 일컫는 것이 그것들의 이름이 되었더라. 

 옛 말씀에서부터 이름은 생명을 받는 행위를 간접적으로 은유하는데 쓰였다. 명명命名은 사람과 짐승, 사물과 사건에 명령命令함으로써 호명呼名하는 것이다. ‘앞으로 이것이 너다(명령)’라고 이름을 붙일 때, 그전까지 그 무엇도 아니었기에 그 어떤 것으로도 붙잡을 수 없던 익명의 존재는 생명命을 받는다. 

 이때 이름은 존재 자체를 끌어안아 다변적인 상징을 가진다. 이를테면 아르베스가 무례하게 굴거나 오만하게 명령하거나 왕성하게 자라거나 건방을 떤다고 해보자. 무례한 아르베스, 오만한 아르베스, 명령한 아르베스… 이것들은 모두 아르베스가 창조한 수많은 변체다. 하지만 우리가 그녀를 아르베스로 호명하는 한, 이 모든 변체는 아르베스라는 이름에 종속된다. 이름을 아는 한 우리가 그녀를 잃을 일은 없다. 그녀 자신이 무수한 변체로 나뉠 지라도! 

 거꾸로 뒤집자면 이름을 잃고 익명으로 돌아간 존재는 죽음의 영역에 들게 된다는 소리다. 그것에 이름이 없는 한 우리는 그를 인식하더라도 그 무엇으로도 부를 수가 없고 기억할 수도 없다. 우리가 이름으로써 붙잡을 수 있던 존재의 무수한 변체들 역시 그 공허함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고 만다. 

■ 욘디는 소녀의 사랑을 받기 위해 사냥을 그만둔다(그는 ‘사냥꾼 욘디’라는 변체를 포기했다). 중요한 변체를 잃은 그의 의식은 무의식의 영역(꿈)으로 떨어지고 만다. 꿈은 죽음의 세계다. 욘디는 그곳에서 ‘인간 욘디’라는 변체(그는 늑대가 된다)마저 상실한다. 그러나 현실은 산 자들의 세계이며, 이름이 없으면 존재할 수가 없다. 현실의 소녀는 익명의 늑대가 된 욘디를 마주하자 겁에 질린다. 

 이때 욘디에게는 아직 마지막 변체(‘소녀를 사랑하는 욘디’)가 남아있었다. 그러나 사냥꾼이기를 포기하고, 인간의 모습을 상실한 욘디는 이미 죽음의 세계와 더 가까운 존재가 되어있었다. 결국 그는 늑대의 울음소리에 화답하고 괴수가 된다. 소녀가 비명을 지르는 순간은 최후의 변체(‘소녀를 사랑하는’)가 소실되는 순간이다. 그 순간 욘디는 완전한 익명의 존재가 된다. 완벽한 죽음이다. 

 욘디는 이름을 해체하는 자다. 변체를 하나씩 제거해 종국에 변체를 껴안던 이름 자체를 상실한 괴수가 바로 늑대인간이다. 

■ 반면 이름을 얻어 괴물이 되는 존재들도 있다. 우이드린 호수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손님이 그들이다. 이미 죽음의 세계에 소속된 그들에게는 이름이 없다. 익명의 존재들은 이름을 얻기 위해 생전 누군가의 변체를 빌려 산 자의 지붕 아래로 숨어든다. 

 그러나 호명 받는다 한들 그것은 이미 생전 누군가 한 번 가졌던 이름이다. 만약 그것이 자신의 이름이 아니었을 때, 손님은 이름의 진짜 주인이 생성하던 변체들을 완벽히 재현하지 못 한다. (검은 유리에 비친 상은 깨끗하지 않으므로.) 주민들이 손님에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져 자신이 기다리던 망자의 생전과 비교하는 것은 자신이 알던 변체들을 눈앞의 손님이 모두 재현할 수 있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명명된 것(생전의 망자)과 인식된 것(손님)의 간극이 좁혀져 마침내 일치되면 그는 주민이 기다리던 그 자가 맞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라면? 이름의 주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름의 진짜 주인이 생성하던 변체들을 재현할 수 없는 손님은 어떻게 될까? 그는 그 이름을 얻는 순간 그것을 상실한다. 결론적으로 손님은 두 번의 죽음을 맞는다. 하나는 그를 호수 밑바닥에 가둔 육신의 죽음이고, 또 하나는 이름을 잃어 얻은 상징의 죽음이다. 손님은 명명과 인식 사이에 발생한 구멍으로 주민을 끌어들인다. 결국 명명한 자와 명명 받은 자 모두가 그 공허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우이드린 호수의 밑바닥은 두 번의 죽음을 맞은 이들의 저승이다. 

 

 2 

 체사레의 이름을 바르바라는 단 한 번도 부끄러워해본 적이 없었다. 집안은 대대로 그들의 자손에게 재빠른 다리와 비범한 손, 영민한 눈을 물려주었고 그중에서도 바르바라는 우등하여 어릴 적부터 모두가 자랑스레 그녀의 운명을 불렀다. 영광의 한 건, 우리의 난나. 걷고 뛰고 말하는 성장의 순간마다 바르바라는 깨달았다. 원한다면 나는 세상을 훔칠 수도 있을 것이다. 재능을 물려준 체사레를 사랑하는 동안 유년시절이 끝났고, 바르바라는 마리사와 함께 최남단 써드빌로 내려왔다. 그곳에서 청소년기가 시작되었다. 마리사가 체사레의 이름을 잃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온화한 기후와 태평한 마을 분위기 속에 동화된 마리사는 손을 털겠다고 선언한 것도 모자라 자신이 쌓아온 것들을 나누려고 들었다.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을 듣는 딸의 의사는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만이 마리사에게 남은 체사레의 마지막 면모였다. 

 남자의 마음을 훔치지 못 해 임신한 몸으로 남겨졌던 마리사의 과거는 바르바라를 수치스럽게 했다. 어머니 마리사는 그 이야기를 끊임없이 반복하여 읊어댔는데, 그건 사실 중년기에 접어든 모든 이들이 그러하듯 지나온 과거를 연거푸 되짚어, 종국에 반질반질해진 기억을 시간의 물살로 흘려보내려고 시도하는 것에 가까웠다. 그러나 바르바라에게 그것은 체사레의 영광을 훼손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마리사는 더 이상 이름을 날리던 도둑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늙어가는 육신을 가진, 특별한 구석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으며 집안의 영광을 물려받을 수 없는 존재로 전락해버렸다. 그러자 마리사의 키가 무척 작아 보이고 볼품없이 느껴졌다. 체사레의 이름을 잃는다는 건 그렇게도 위험했다. 마리사가 과거를 읊는 일은 바르바라와 체사레를 분리시키려는 시도처럼 느껴졌다. 체사레의 자부심이 훼손된 순간 잉태된 존재가 바로 바르바라였으니, 실패와 함께 탄생한 바르바라 역시 언젠가는 체사레의 이름을 잃게 될 운명이라고 강조하는 것만 같았다. 바르바라는 어머니의 예언에서 벗어나는 편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검을 잡았다. 

 문제는 집안의 이름을 물려받는 것이 그 집안의 영광과 불운을 함께 계승하는 일이라는 것을 바르바라가 미처 깨닫지 못 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감쪽같이 훔쳐낼 수 있었지만 그것은 그녀에게 영광일 수도, 불운일 수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남자를 훔쳐 체사레의 이름을 지키려 했지만 결과적으로 아이를 도둑맞은 것도 모자라 타지아마저 잃어버리고 말았다. 체사레의 불운이 계승되고 영광이 사라졌다. 어머니의 예언이 실현된 것이다. 바르바라는 분명 그 순간 한 번은 체사레의 이름을 잃었다. 해변에서 유체이탈과 같은 순간을 경험하고, 신의 눈동자를 빌어 세상을 바라보았던 그 순간이 바로 죽음이 바르바라를 관통하고 지나간 순간이었다. 그때 바르바라는 이름의 해체를 경험했다. 

 바르바라는 노이어에서 그와 아주 반대되는 경험을 했다. 그곳은 무거운 땅이었다. 이름의 해체 대신 이름의 생성이 이루어졌다. 노이어는 유령에게도 이름을 붙여주는 곳이었다. 노이어의 사람들은 횃대 옆이 스산하면 브륑굴렌이 곁에 있다고 중얼거렸으며, 미남자가 방문하면 에이프릴을 조심하라고 말했다. 망자들이 생전에 생성하던 변체를 그대로 읊어 괴담으로 만든 것이 바로 노이어의 유령들이었다. 요컨대 노이어 사람들이 궁극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름의 주인을 대신해 무수한 변체를 재생산하는 일이었다. 유령들은 사람들이 재생산한 변체에 따라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브륑굴렌은 언제까지나 보초를 설 테고 에이프릴은 객실로 숨어들어가 미남자의 꿈을 먹어치울 테였다. 

 노이어의 영지는 산 자들에게도 비슷한 일을 했다. ‘첫째인 자’, ‘계승하는 자’, ‘책임지는 자’, ‘이름을 받는 자’와 같은 변체들이 이반의 이름 속으로 흡수되었다. 집안 식솔과 영지민이 만든 변체들이 그 이름 속에 득시글했다. 문제는 노이어의 영향력이 너무나 강력해 이반 스스로가 만들어낸 변체보다 노이어가 만들어낸 변체가 더 많았다는 점이다. 이반 슈타겐 노이어는 분명히 이반의 이름이었음에도 누군가 명명하는 그것과 이반 스스로가 인지하는 그것에는 분명한 간극이 존재했다. 이반은 자신의 변체를 포기하고 타인이 만들어놓은 변체를 수행하기로 결심했다. 노이어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반은 반투명해졌다. 명명된 것과 인식된 것의 간극은 그런 식으로 메꿔졌다. 노이어의 이름을 쫓으면서도 이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에 있었다. 가문의 이름을 가지는 순간마다 자신의 이름을 상실했다. 

 물론 노이어가 계승하려 들었던 이 모든 불운의 속성을 바르바라가 속속들이 알지는 못 한다. 바르바라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녀가 노이어의 영지를 밟던 순간 세상이 어두컴컴했다는 사실뿐이다. 모든 것들이 숨을 죽였던 그 순간. 밤의 대지, 그림자가 도사리는 숲, 죽은 자와 산 자가 공존하는 세계는 바르바라 역시 가지고 있던 것이지만 노이어에서 도사리는 위험은 그녀에게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이름을 해체해야만 죽을 수 있는 자였기 때문이다. 노이어는 이름을 명명 받아야만 죽을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바르바라는 무사할 것이었다. 

 노이어에서 하룻밤을 보내던 날 바르바라는 자신의 친구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 때 바르바라는 맨발로 복도를 산책하다 말고 이반과 마주쳤다. 새벽이 다가오고 있었지만 하늘은 아직 깜깜하기만 했고 복도로 쏟아지는 달빛은 어두침침한 파란색이었다. 안녕. 이반이 먼저 인사했고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안녕. 

 여기에도 유령이 있더라. 

 봤어? 

 그럼. 

 이반은 누구를 보았는지를 물었다. 바르바라는 그들에게도 일일이 이름을 지어 주냐고 되물었다. 룬넨에선 그렇게 하지 않던가? 하지 않아. 그런 후 바르바라는 덧붙였다. 원래는 이름이 있었는데 사라진 자들이 룬넨의 유령이 되는 거니까. 

 두 사람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조금 걸었다. 어둠속에 잠긴 복도는 앞도 뒤도 온통 캄캄하기만 해서 그들이 어디쯤까지 걸었는지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성의 복도가 어디로 뻗어나가는지 알고 있는 건 이반이었으므로 바르바라는 그를 따라 걸었다. 그 어둠은 이반의 것이었다. 

 복도의 바닥에서부터 끊임없이 냉기가 솟아올랐다. 그 냉기는 바르바라의 맨발에 달라붙어 발등을 핥고 지나갔다. 바르바라는 창 너머로 펼쳐진 깜깜한 밤과 어두운 영지를 바라보았다. 성 내부도 성 바깥도 온통 어둠으로 꽉 차있었다. 창에 비친 얼굴이 흐릿했다. 너무 어두워서 그게 정말 자신의 얼굴인지를 확인하기도 힘들었다. 검은 유리가 노이어를 감싸고 있었다. 새까만 대지로 드문드문 숲의 실루엣이 보였고, 이따금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가 몇 번 깜빡이다 순식간에 풍경을 가로질러 사라졌다. 바르바라는 지평선이 푸르게 물든 것을 보았다. 여명이 아주 힘겹게 기어 올라오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걸음을 멈췄다. 이반은 몇 걸음 앞서가다 말고 뒤돌아 그녀를 보았다. 이반. 바르바라가 불렀다. 이반이 대답했다. 응. 

 새벽이 오려는 모양이지. 

 방으로 안내해줄게. 

 괜찮아, 되짚어갈 수 있단다. 

 다음 순간, 해가 뜨기 직전의 대지가 한순간 빛을 잃더니 모든 것들이 깊은 암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지평선에서부터 힘겹게 기어오르던 여명이 손을 놓친 것처럼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영원한 밤이 찾아왔다. 바르바라는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축축한 호수의 물비린내를 맡았다. 이반은 우이드린의 손님이 되어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도 느낄 수 있었다. 손끝을 뚫고 자라난 발톱과 잇몸을 찢고 솟아난 이빨, 손등에 난 거친 털과 기민해진 눈과 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지평선에서부터 해가 솟아올랐다. 

 강한 빛 한 줄기가 노이어를 가로질러 성의 창문에 부딪쳤다. 황금빛이었다. 바르바라는 인간으로 돌아온 이반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잠시 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빛이 드리우는 노이어의 영지가 서서히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드문드문 나무가 솟아오른 갈색 들판으로 들개 한 마리가 달려 나갔다. 황량한 대지에도 늑대와 개와 새들이 살았다. 이곳에는 지켜야 할 것들이 많았다. 잊지 않기 위해서 지켜야 할 것들마다 이름을 붙였다. 

 지킬 가치가 있는 곳이구나, 이반. 

 바르바라가 속삭였다. 

 그래서 이곳의 어둠은 별로 무섭지 않아. 

 결국 두 사람이 말할 수 있는 사실은… 

 지키는 과정에서 이름을 잃거나 얻어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인식의 괴물들> 

 타자를 인식하는 순간 우리에게 벌어지는 일은 무엇인가. 

 아직 인식된 적 없는 타자는 ‘나’에게 미지未知다. 내가 알 수 없는 세계가 저편에 있는 것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타자의 세계가 그곳에 있음을 확인하는 일이다. 우리는 타자를 똑바로 응시하여 그 미지를 확인하려고 든다. 물론 우리가 타자를 볼 때, 타자 역시 우리를 응시한다. 우리는 인식의 과정에서 우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드러내야만 하는 모험을 감수한다. 그런데 반대로 타자가 나를 인식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그가 자신의 미지였던 우리를 확인하려고 든다면? 

 이때 타자의 인식은 우리에게 자신의 미지未知를 선보이겠다는 선언이 된다. 우리는 타자가 내보인 미지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우리는 이제 타자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 인식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사실상 관계맺음을 성공하는 일이고, 타자와 내가 짝을 짓는 일이다. 

 한편 우리가 타자를 인식하려고 할 때, 타자가 이에 응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우리의 시선은 관계 맺지 못 한 채 그곳에 남겨진다. 관계 맺지 못 한 응시, 그것이 바로 짝사랑이다. 

■ 버나디와의 만남에 필요한 것은 상호 교환적 인식이다. 버나디가 나그네를 인식할 때, 나그네 역시 버나디를 인식한다. 버나디가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나그네는 두 개의 선택지를 갖는다. 그와 관계 맺거나, 혹은 관계 맺지 않는 것이다. 버나디와의 관계맺음을 거부한 나그네는 눈을 가린다. 나그네는 얼마 뒤 싸늘한 시체로 발견될 것이다. 이때 버나디는 나그네가 동사 직전에 본 환각의 존재로 남는다. 그래서 그에게 실존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없다. 

 반면 눈을 가리지 않은 나그네들은 어떻게 될까. 켈커스 지방은 설산에 올랐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이들을 두고 ‘버나디에 홀렸다’는 표현을 쓴다. 버나디의 얼굴을 확인한 나그네들은 돌아오지 못 한다. 시체를 남길 수도 없다. 버나디는 관계맺음에 성공하는 순간 비로소 괴물이 된다. 다시 말해 ‘나’를 인식한 상대와의 관계맺음에 성공한 괴물이 바로 버나디다. 

■ 한편 눈이 멀어 결국 타죽고 만 예지자는 이와 반대의 상황을 통해 괴물로 재탄생한다. 예지자는 자신의 첫 번째 상대를 인식하고자 물을 뜬 그릇으로 고개를 숙이지만, 신의 얼굴과 마주하는 비극을 맞는다. 이때 신은 관계 맺을 수 없는 절대적인 무엇이다. 결국 ‘나’가 인식하려는 상대와 관계 맺지 못 한 예지자는 대가를 치루고 괴물이 된다. 인식의 실패가 예지자의 눈을 멀게 만든다. 짝사랑하는 괴물이 바로 눈 먼 예지자다. 

 

 3 

 노이어에서 시작된 순회공연을 보기 위해 도트라에 다녀온 후부터 바르바라는 꿈속에서 유령과 괴물을 보았다. 첫날 밤 그녀는 시선을 느끼고 눈을 떴는데, 머리맡에 누군가 서있었다. 달빛이 사선으로 떨어져 테이블과 의자를 비추자, 길게 늘어진 사물의 그림자가 이방인의 실루엣과 겹쳐 더욱 시꺼멓게 물들었다. 바르바라는 눈앞의 이방인이 반투명한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유령이었고 바르바라는 아직 꿈속에 있었다. 

 그 뒤로 비슷한 일들이 매일같이 이어졌다. 바르바라는 밤마다 유령들이 침대 맡에 앉아있거나 침대 아래에 웅크리고 있는 풍경에 익숙해졌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에는 괴물들이 몰려왔다. 나그네를 삼킨 고래, 눈 먼 예지자와 버나디, 검은 백조와 불길함을 노래하는 달리아, 벽장 속의 2피트 넘는 괴수와 마녀들… 바르바라는 모든 유령들과 괴물들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고 있었다. 꿈속에 방문하는 그들 모두가 이반이 쓴 극에 등장하는 이들이었다. 그 극으로 하여금 바르바라가 이반을 생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그들이 꿈속으로 침범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날이 갈수록 꿈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자고 있는 중에도 깨어있는 것 같았다. 어둠에 잠긴 호수와 반투명한 존재로 가득 찬 집안이 골치 아플 정도로 선명했다. 바르바라는 관속에 자리를 잡고 누운 것처럼 침대에 몸을 누이고 생각했다. 악몽이구나. 이것들을 어쩌면 좋을까. 하지만 정말로 바르바라가 어쩔 도리가 있겠는가. 어떻게 이것들을 멈출 수 있겠는가. 

 악몽이 찾아온 지 한 달이 조금 넘었을 무렵, 바르바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창살 그림자 너머로 간간이 무언가 일렁이며 지나갔다. 유령들이 기웃거리며 바르바라가 쓰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바르바라는 계속해서 써내려갔고,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에 감탄했다. 이반에게 들려주거나 이반으로부터 들은 그들의 이름이 이렇게나 많다니. 괴담을 써내려갈수록 바르바라에게 몰려드는 존재들이 많아졌다. 점점 몸을 얻고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무의식에 존재하던 그것들이 의식의 세계로 발을 디디며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이 뚜렷해질 때마다 바르바라는 어렴풋한 예감을 받았다. 이 기록을 다시 자신의 세계관으로 재구성하면, 한 가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바르바라가 평소 제한적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미처 발견하지 못 했던 사실이 마침내 의식의 세계로 진입했으니, 그녀가 할 일은 기록을 재구성하는 것. 

 유령들은 관념적이었고 괴물들은 신화적이었지만 바르바라는 몇 가지 키워드를 통해 그들을 묶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럼으로써 바르바라는 상징의 세계에 있던 존재를 인식의 땅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모호하던 것을 명확한 사실로 이해하려고 했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그것을 해냈다. 

 

 <두 명의 괴물> 

■ 브리다 신화는 다변적인 키워드로 엮긴 이야기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결국 마지막에 괴물이 된 건 브리다가 아니라 신의 문지기라는 점이다. 그는 태양을 되찾는 대신 자신의 모든 것을 잃고 영원히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 브리다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물론 그전까지 괴물은 브리다였다. 그녀는 신의 문지기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신의 문지기는 애초부터 그녀와 관계 맺을 의사가 없었다. 태양을 돌려받기 위해 그녀의 마음을 훔쳤기 때문이다. 사랑에 ‘눈 먼’(그렇다, 그녀는 이 때 ‘눈 먼 예지자’가 된다) 브리다에게는 비극이 예고되어 있었다. 신화는 직접적으로 브리다가 눈이 멀었다고 알려주는 대신 바깥의 상황을 통해 이를 은유한다. 태양이 사라진 세계가 영원한 밤에 잠겨 있었기 때문이다. 브리다는 외부적 상황을 식별할 능력을 상실하고 신의 문지기에게 매달린다. 이 상황은 그녀가 빛(태양)을 마주하는 순간 종료된다. 모든 사실을 알아차린 브리다는 분노한다. 천하를 훔칠 도둑이 인식의 영역에서 실패를 경험한 것이다. 브리다는 짝사랑의 괴물로 남기를 거부하고 신의 문지기에게 복수한다. 태양을 돌려주는 대신 그의 이름을 빼앗아간다. 문지기는 자신의 변체(‘신의 문지기’, ‘태양을 지키는’, ‘신의 사랑을 받는’)를 모두 상실한다. 그 순간 문지기는 이미 죽음의 영역에 드는 셈이다. 신에게 잊혀지고, 브리다마저 놓쳤으니 그는 살아있는 자임에도 죽은 자와 같다. 브리다 신화는 두 사람이 번갈아 괴물이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 신화는 결국 인간의 핏줄로 연결되어 실존성을 획득한다. 체사레 집안이 굳게 믿는 한 브리다는 상징의 세계가 아니라 인지의 땅에 있다. 그러니까 브리다 신화는 이미 몸을 가지고 있는 이야기다. 이 작업은 여기서 끝난다. 

 이제 모든 괴물과 유령에게 몸을 주었으니, 결국 이 모든 존재들이 그 몸을 통해 공통적으로 무엇을 실현하고자 하는지 결론지어야한다. 

 이 모든 신화적 미신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4 

 이반은 바르바라의 집에 대해 이런 감상을 남겼다 : 작아. 

 집안에 들어가서는 이런 감상을 남겼다 : 보이는 것보다 넓네. 

 바르바라는 찬장에서 통을 꺼낸 후 스푼을 넣어 찻잎을 퍼올렸다. 그것을 주전자 통에 집어놓고 물을 올렸다.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인 후 컵 두 개를 나란히 내려놓았다. 

 이반은 테이블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호수가 가까운 곳에 있었고 경사가 완만한 들판이 아래로 펼쳐져 있었다. 계절이 돌아오면 그곳에는 꽃이 피고 토끼가 뜀박질을 하거나 땅새들이 둥지를 짓기 위해 날개를 접고 내려올 것이다. 바르바라는 테이블을 두드리는 이반의 손가락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주전자에서 김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좋은 곳이지? 

 볕이 잘 드네. 

 그럼. 밤에도 어둡지 않단다. 달이 잘 들거든. 

 바르바라는 허리를 숙이고 바람을 불어 불을 껐다. 가게에선 뭘 팔아? 이반이 물었다. 바르바라는 뜨거운 차를 컵에 나누어 담고 열린 찬장에서 시럽을 꺼내며 대답했다. 무엇이든. 

 무엇이든? 

 무엇이든. 

 그런 것치곤 가게가 작던데. 

 아. 정확히는… 누군가 의뢰를 하면 그걸 구해다 주는 식이지. 

 바르바라는 티스푼을 컵에 꽂아놓고는 시럽통과 함께 들어올렸다. 이반이 창가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테이블로 다가오는 바르바라를 올려다보았다. 바르바라는 컵과 시럽 통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달 게 먹고 싶으면 많이 넣어도 좋아. 

 고마워. 

 별 말씀을. 

 바르바라가 자신의 컵을 가지러 부엌으로 돌아간 동안 이반은 시럽을 떠서 차에 섞었다. 컵과 스푼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바르바라는 주전자를 기울여 컵을 채웠다. 이반이 차와 시럽을 휘젓고 섞는 소리를 듣던 바르바라가 몸을 돌리지 않은 채 문득 떠오른 것처럼 물었다. 

 언제 떠날 거니? 

 글쎄… 언젠가는. 

 바르바라는 허공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가 곧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일 잠깐 가게 좀 봐줄래? 

 주인은 어디로 가려고? 

 호숫가에서 낚시를 할 생각이지. 

 오는 손님마다 주인이 놀고 있다고 전해주면 되는 건가? 

 뭐… 내 가게에 날마다 손님이 들지는 않아. 

 한가하네. 

 그럼. 써드빌과 비슷하단다. 

 머물기 좋은 곳이군. 

 그럼. 

 바르바라는 이곳의 생활을 묘사했다. 호숫가의 물살과 잘 잡히지 않는 고기, 둥근 자갈에 낀 이끼와 수면에 비친 하늘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일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또 그녀는 자신의 일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소문을 듣고 찾아온 이들이 바르바라에게 부탁하는 일들, 그것을 해결해주기 위해 말을 달려 루소의 곳곳을 떠돌던 몇 달,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이 바르바라를 마녀라고 믿기 시작했다는 것… 바르바라는 자신이 쓰고 있는 몇 개의 가명들을 노래하듯 늘어놓았다. 이 마을에서는 ‘브리다’야. 이반은 차를 마시면서 웃었다. 네 조상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 쓰는구나. 그래, 근원으로 되짚어 갈 필요성을 느꼈거든.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면 모든 일이 흐릿해지고 결국 잡을 수 없는 무언가가 되는 것 같았으니까. 바르바라는 상징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브리다로 지내보니 어때? 

 악몽이나 꾸던 걸. 

 저런. 

 그래도 얼마 전에 답을 내렸어. 

 무엇에 대한? 

 내가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던 예감에 대한. 

 부엌에 난 작은 창으로 햇살이 쏟아졌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컵 안으로 쏟아지는 빛과, 그 빛을 다시 반사시키는 수면을 보았다. 이반. 바르바라가 부드럽게 불렀고, 이반은 대답했다. 응. 

 원한다면 좀 더 이곳에 머물러도 좋아. 

 여기? 

 그래, 여기. 

 이반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같이 살자는 말처럼 들리는데. 

 일단은.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청혼이야? 

 비슷해. 

 그런 후에는 침묵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조용히 자신의 컵에 떠놓은 차의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그 속에서 신을 발견하게 된다면 눈이 멀어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영원히 인식되지 못 하거나 관계 맺을 수 없는 것들은 괴물이 되기 마련이니… 하지만 결국 바르바라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한 가지였다. 구전되는 모든 이야기들이 한 갈래에서 탄생했다. 그러니까 결국 우리가 정말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입으로 내뱉기 위해서는 무수한 상징의 세계를 뚫고 거슬러 올라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침묵 속에서 바르바라가 한 번 더 물었다. 

 농담인 것 같니? 

 

 <내려놓으며> 

 결국 모든 이야기가 하나의 욕망에서 비롯되었다. 

 욕망을 잃는 순간 늑대인간이 되고, 욕망을 얻는 순간 산 자를 호수 밑바닥으로 끌어들이며, 욕망이 포착되는 순간 버나디가 되거나 욕망이 배제 받는 순간 눈 먼 예지자가 된다. 브리다는 어떠한가. 브리다와 문지기 자체가 욕망을 가지고 서로로부터 도망치거나 쫓는 이야기다. 이들 모두가 욕망을 몸의 차원에서 완전하게 실현하는 존재들이다. 

 몇 달의 악몽을 되짚어보는 일은 결국 이런 몸의 논리가 어떤 식으로 구현되는가를 되짚어보는 일이었다. 몸의 논리란 결국 사랑(욕망)을 동력으로 삼아 짜여가는 사랑의 논리라는 것이 이 작업의 결론이었다.¹ 
 어찌되었든 우리는 괴물이 되었다 돌아온다는 게 무엇인지 안다. 

 이제 마음속에 들끓던 괴물들을 세상에 풀어놓으니, 부디 당신의 밤에 스며들기를.² 
 그래서 사랑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의 행복한 악몽이 되기를.³ 


1-3. 권혁웅 : 몬스터 멜랑콜리아 中 

20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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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이야기의 숲을 (完)»
1차/old 2019. 10. 22. 15:59

 1. 

 소문대로 그 잡화점에는 간판이 없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기껏해야 여섯 평 남짓의 공간이 펼쳐졌다. 좌측에 매대가 있었지만 잡동사니만 듬성듬성 비치되어 있었고, 천장 곳곳에 뒤집힌 채 매달린 꽃다발들은 서서히 말라가며 풀 냄새를 풍겼다. 가게의 풍경은 잡화점이라기엔 지나치게 간소했으며, 가게라기보다 개인적인 공간에 더 가까워보였다. 

 가판대는 가게의 3분의 1정도 되는 공간을 차지하고 있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도 가게의 주인은 안쪽에 앉아 뜸을 들였다. 루시우스가 헛기침으로 자신의 존재를 한 번 더 알린 후에야 그녀는 가판대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연한 금발. 루시우스는 눈앞의 여인이 자신이 찾던 사람임을 알아차렸다. 

 안녕. 바르바라는 느긋한 몸짓으로 다리를 꼬아 편한 자세로 앉았다. 찾는 게 있니? 시선이 마주치자 루시우스는 마른 침을 삼키며 고개를 돌렸다. …당신에게 부탁하면 못 해도 일주일 안에 무엇이든 구할 수가 있다고 하던데. 바르바라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무엇이냐에 따라 다르지. 더 늦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더 빠를 수도 있지. 바르바라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가판대를 두드렸다. 그래서, 뭘 찾고 있니? 

 처음에 루시우스는 조금 쭈뼛거렸는데, 바르바라와 눈이 마주친 후에는 오히려 바싹 긴장한 것 같았다. 바르바라를 쉽게 대할 수 없는 어떤 분위기가 있었다. 의미심장하고 수상쩍으며 위험하고 냉랭해보였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이 작은 마을에까지 찾아와 그녀에게 도움을 구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는 것일까. 마녀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검은 모자를 쓰지도 않았고 산발머리도 아니었으며 하얀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가게에는 도마뱀 대신 꽃이 매달려 있었고 루시우스 자신이 부탁할 내용도 심각하게 위법적이거나 유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루시우스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바르바라는 그를 위해 기꺼이 몸을 기울여주었다. 잠시 후, 루시우스가 바르바라로부터 떨어졌다. 바르바라는 부드럽게 웃었다. 

 좋아, 그건 해줄 수 있어. 

 가능한 빨리 구해줬으면 좋겠는데. 

 어렵지 않아. 

 바르바라는 기지개를 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걸릴까? 루시우스가 조급함을 숨기며 은근하게 독촉하자, 바르바라는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어깨를 으쓱였다. 글쎄…, 딴 생각에 잠겨 있는 말투로 말끝을 흐리던 바르바라가 명령하듯 대답했다. 일주일 뒤에 거기서 봐. 

 

 2. 

 떠난 지 반년 만에 길리언에게서 편지가 왔다. 써드빌의 생활을 청산하고 북쪽으로 올라온 바르바라는 아든 상단에 손을 벌려 조금의 돈을 빌렸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마련할 수 있는 액수였지만 한동안 체사레의 방식을 내려놓을 참이었으므로 다른 길도 나쁘지 않았다. 신변정리를 끝낸 바르바라는 오는 길에 써드빌에서 훔쳐온 그녀의 흔적을 대부분 처분하고 외진 마을까지 침착하게 흘러갔다. 호숫가가 보이고, 빽빽한 숲이 드리웠고, 공기가 한적하며 전쟁의 여파가 크지 않은 곳으로. 시간이 남아돌아 무엇이든 저질러볼 수 있는 곳으로. 마리사 체사레가 써드빌을 선택한 것처럼 바르바라도 그곳을 선택했다. 붉은 벽돌을 쌓아올려 지은 새 터전은 현관 앞에 서면 호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호수를 껴안고 있는 짙은 숲, 젖은 흙의 냄새, 볕이 잘 드는 창가. 그 집에 불을 밝히며, 바르바라는 앞으로의 일들이 이전의 일들과 얼마나 연관되어갈지를 생각했다. 과거의 선택을 끊어내듯 써드빌의 난나를 지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바르바라가 살아있는 한 과거는 얼마든지 그녀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었다. 과거가 현재를 추월해 미래의 방향을 정할 때가 오면… 선택의 순간. 순간들. 또 순간들. 

 잡화점을 연지 한 달 반 만에 그녀는 아든 상단에 진 빚을 청산했다. 필요한 물건을 반드시 구해오면 신용이 붙었고, 암암리에 돌던 소문에 가속이 붙을수록 벌이가 점점 좋아졌다. 도둑질이 아니어도 바르바라는 수완이 좋았다. 장사에도 재능이 있었나봐. 바르바라는 호숫가에 쪽배를 띄우고 느긋하게 낚시를 하면서 스스로를 그렇게 평가했다. 못 하는 게 없어서 큰일이네, 바뀐 이름으로도 명성을 떨치고 싶지는 않은데 말이지. 반은 농담이었다. 새 터전의 풍경은 온통 선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어 낮이면 새가 울고 밤이면 풀벌레가 울었다. 바람이 불면 나뭇잎들이 쏴아아 파도처럼 몰아치고, 물 냄새는 비리지 않고 맑았으며, 햇살은 매일같이 청명했다. 건져 올릴 때마다 미끼가 사라진 낚싯바늘과 텅 빈 양동이를 두고도 근심어릴 일이 없었다. 바르바라는 그런 식으로 팔자 좋은 몇 달을 살았다. 

 길리언의 편지를 받은 날, 바르바라는 평소보다 일찍 잡화점 문을 닫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미 오전시간에 루시우스의 의뢰를 받아놓았기 때문에 아쉬울 게 없었다. 떠난 지 반년 만에 마주한 과거의 흔적은 생각했던 딱 그만큼 기꺼웠다. 길리언 아든의 필체와 문장은 변함이 없어 무척이나 그 애다웠다. 원한다면 길리언은 좀 더 빨리 그녀에게 연락을 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든 상단을 통한다면 길리언은 한때 바르바라였고 지금은 바르바라가 아닌 그녀가 어디서 살고 무엇을 하며 지내고 있는지를 손쉽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아든의 성을 빌어 돈을 마련해준 길리언에게 최소한의 염치를 차리기로 마음먹은 바르바라는 의도적으로 흔적을 남겨 필요할 때 그 애가 자신을 찾을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하지만 동시에 너무 일찍부터 자신을 찾지 않기를 바랐다. 아무리 맹해도 그 정도 눈치는 있겠지. 다행히 길리언은 그 기대에 부응했다. 반년이면 충분하다. 편지 문장마다 묻어있는 그리움이나 조금의 서운함을 시선으로 문지르며, 바르바라는 발끝을 까딱였다. 길리언의 편지는 그녀가 예상한 것보다 늦게 도착한 편에 속했다. 꾹 참은 모양이지, 기특한 것. 바르바라는 답신을 짧고 간결하게 썼다. 

 며칠 뒤에 길리언이 마을에 도착했다. 말에서 내린 길리언은 입구에 나와 기다리고 있던 바르바라를 가볍게 포옹한 후 놓아주었다. 못 본 사이에 키가 더 자라있었다. 아이구나, 그 생장을 실감하며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자라고 있는 아이구나. 

 바르바라, 잘 지냈어요? 제가 조금 늦었죠…. 중간에 자리를 비우는 바람에, 

 아니야, 적당한 때에 도착했어. 

 받자마자 출발했으면 이틀 전에는 도착할 수 있었을 텐데. 

 그 땐 내가 자리를 비우고 있었단다. 

 여행 다녀오신 거예요? 

 아니, 일 때문에. 

 오늘도 일 때문에 절 부르신 거 아닌가요? 

 맞아. 

 바르바라가 작게 웃으며 덧붙였다. 그러니 도트라에 가야겠구나. 말을 빌려주렴. 

 루소에서 도트라까지 반나절이 걸렸다. 길리언이 마차를 부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물었지만 바르바라는 말을 달리는 편이 훨씬 간편하다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말 두 필에 나란히 올라 거리를 좁히거나 벌리며 고삐를 잡거나 놓아주었다. 쉬지 않고 달려 늦은 밤에 도트라 인근에 도달했다. 숙소에 방을 잡으면서 길리언이 물었다. 그런데 저희는 왜 수도에 가는 거죠? 연극을 보러. 그렇게 대답한 바르바라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가늘게 뜨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라도 응시하는 것처럼 허공을 바라보았다. …연극 내용을 얼핏 들었는데 개인적으로 무척 호기심이 생기더구나. 길리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다음 날 점심 두 사람은 수복 중인 도트라의 공연장을 찾았다. 거리의 많은 것이 부서지거나 헤져있었는데 꼭 그만큼의 사람들이 벌떼처럼 붙어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올리고 타일을 깔고 있었다. 바르바라와 길리언은 기사단 복장이 아니었으므로 그 누구도 그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보지 못 했다. 사실 두 사람이 리퍼코트를 입고 있었더라도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하얀 드레스 위에 짙은 색 망토를 두른 채 야외에 세워진 원형극장을 응시하다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길리언이 바르바라의 틀어 올린 머리카락을 보고 있었다. 길어서 거치적거리더구나. 그런가요?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어울리니? 길리언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제게 어색해서 보고 있었어요. 

 연극 시작 전까지 아직 시간이 남아있을 텐데도 객석의 절반이 벌써 차있었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을 옆에 세워놓고 다른 생각에 잠겨 있다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루시우스였다. 

 구했나? 

 그럼. 

 짙은 색 망토가 조금 들썩이더니 로브 사이로 조용히 손 하나가 빠져나왔다. 바르바라는 티켓 토큰을 루시우스에게 쥐어주고는 빈 손바닥을 펼쳤다. 대체 무슨 수로 이걸 구했는지 모르겠군. 티켓 토큰을 훑으며 중얼거리던 루시우스는 그녀의 손바닥 위에 값을 지불했다. 

 떠나기 전 루시우스가 눈짓으로 길리언을 가리키며 은근하게 웃었다. 애인? 너무 어려보이는 걸.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채 날카롭게 웃었다. 조카야. 바르바라는 곧 정정했다. 음, 아닌가… 사촌? 바르바라는 맹하게 서서 딴 곳을 보고 있는 길리언을 한 번 훑어보고는 결론지었다. 사촌쯤으로 하자. 

 당신에 대한 소문이 꽤 많아. 

 마녀라는 것?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이를테면? 

 어린 애를 잡아먹는다던데. 

 바르바라는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부진한 상상력들이구나. 

 재주 좋은 사람이 외딴 곳에 숨어살면 다들 궁금해 하기 마련이지. 

 술래잡기나 숨바꼭질 비슷한 거야. 

 바르바라는 극장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서 그곳에 있는 것뿐이지.

 연극이 시작됨을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들렸다. 루시우스는 인파에 섞여 사라졌다. 바르바라와 길리언은 문지기에게 토큰을 보이고 객석에 앉았다. 막이 오르자 켈커스인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남자가 나타났다. 욘디. 무대를 올려다보던 바르바라의 입 꼬리가 부드럽게 움직였다. 

 늑대인간의 이야기는 각색되었다. 바르바라가 들려준 이야기에서 몇 가지가 빠지거나 더해졌고, 욘디가 사랑한 소녀는 결국 욘디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야기는 비극서사의 구조를 착실하게 쌓아올리며 절정으로 치달아갔다. 비극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이 쓴 극이었다. 극 기저에 깔린 감정을 감지한 바르바라가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턱을 괸 채 의자에 기댔다. 노이어에서 시작된 공연이 있는데, 이번에 도트라에도 온다더군, 그 티켓을 구해줘. 루시우스는 그렇게 말했었다. 노이어.

 누가 썼는지 궁금한 걸. 

 그런가요? 

 농담이란다. 사실 궁금하지 않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이반이 옆자리에 앉았더라면 자신을 보며 뭐라고 말할지 궁금했다. 이건 무엇에 대한 이야기 같아? 상상 속의 이반이 바르바라에게 묻는다. 글쎄, 바르바라는 대답한다. 이건 사랑에 대한 이야기구나. 

 연극이 끝나고 박수가 이어졌다. 배우들은 무대 위에서 인사를 나누고 빠르게 모습을 감췄다. 관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이동하기 시작했다. 바르바라와 길리언은 객석 바깥으로 걸으며 그들이 알고 있는 욘디의 이야기를 극의 서사와 비교해보았다. 그들이 알고 있는 것도 방금 보고 온 것도 비극임은 마찬가지였지만 같은 성질은 아니었다. 사랑을 얻지 못 하고 괴물이 되어버린 남자와 괴물이 되었기 때문에 사랑을 상실한 남자의 이야기를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비극이란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였으므로. 진부한 대화주제를 꺼내려던 바르바라는 무대 뒤편으로 빠져나오는 붉은 뒤통수를 보고 잠깐 말을 멈췄다. 길리언이 주변 관객들의 대화내용을 주워듣고는 바르바라의 망토를 잡아당겼다. 

 평이 좋아요, 다들 비극을 좋아하나 봐요. 아마 저 사람들은 원래 이야기가 어떤지 모르겠죠. 

  바르바라는 곧 무대 뒤편에서 시선을 떼어내고는 작게 혼잣말을 했다. 

 모르는 편이 나아, 그건 우리 이야기니까. 

 

 3. 

 이반과 재회한 건 그 뒤로부터 세 달이 좀 더 흐른 뒤였다. 잡화점을 열어놓고 정작 하릴없이 느긋하게 마을을 걷던 바르바라는 말을 탄 이방인이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이 보이질 않았는데 바르바라 쪽으로 고개가 돌아간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무엇이더라. 고민하는 사이에 남자가 말에서 뛰어내려 두 팔을 벌렸다. 그 품에 안긴 후에야 바르바라는 술래잡기 혹은 숨바꼭질 비슷한 것으로 남았던 지난 몇 달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이반. 로브를 벗자마자 나타난 얼굴을 보고 바르바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내가 안아줄 틈을 주지 않는구나. 사실, 그녀의 친구들이 대체로 그랬다. 

 다시 만났구나.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모양이지. 

 이반이 웃는 걸 올려다보던 바르바라가 가볍게 이반의 손등을 쥐었다 놓았다. 그러고는 몸을 돌려 잡화점으로 돌아갔다. 이반은 바르바라가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이반은 그녀가 가게 문을 닫는 것을 기다려주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거리로 빠져나와 걷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올 줄은 몰랐네. 나는 네가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맞아.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하지만 좀 더 분명하게 용건이 있는 것 같구나. 이반이 대답했다. 그것도 사실, 맞아. 

 바람이 불자 선선한 손길이 바르바라의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바르바라는 여기까지 온 이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선한 것들, 아직은 선한 것들. 혹은 지속적으로 선할 것들. 좀 걸을까. 바르바라가 중얼거리자 이반이 물었다. 어디로? 어디겠니. 

 마을을 천천히 벗어나며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는데도 익숙하게 느껴졌다. 이반과 떨어지거나 재회하는 일들이 너무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는 만나지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만나게 된 사람에게는 어떤 인사를 해야 하는 거니. 그 때 이반이 했던 대답을 바르바라는 기억해냈다. 

 기다리고 있었어. 

 알고 있어. 

 이반은 대답하면서 웃었다. 이번에는 바르바라가 까닭 없이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의 걸음걸이가 엇갈렸다가 다시 나란해졌다. 대화는 계속되었다. 지난 아홉 달의 이야기가 짧고 간결하게 이어졌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아홉 달에 대해 말을 아끼며 어깨를 으쓱였다. 늘어놓을 사건들이 많지 않았다. 이반이 빛깔만 다른 바다를 내내 보고 있을 때, 바르바라는 잔잔한 호숫가에 찌를 던졌다가 빈 양동이를 들고 돌아오는 하루를 살았다. 이야기는 결국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갔다. 여행하기 전에는 뭘 했는데? 바르바라의 질문에 이반이 코끝을 긁적였다. 책을 썼어. 드물게 이반은 머쓱해했다. 너도 나와. 누군가 책을 쓴다면 그것은 비극이거나 희극일 것인데, 바르바라가 그곳에 있다면 이반은 그것을 비극으로도 희극으로도 쓰지 않을 것이다. 또 누가 나오는지 알겠어. 바르바라가 말했다. 

 노이어에서부터 시작된 그 순회공연을 보고 돌아온 이후 바르바라는 이따금 꿈처럼 느껴지는 현실의 이질적인 감각들과 마주하곤 했다. 한밤중에 나타난 그림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거나 반투명한 무언가가 의자에 앉아 호숫가를 내려다보는 일들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놀라지 않았다. 자신이 이반을 생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꿈과 환상의 경계에서 시작된 상념이 형태를 갖추기 위해서는 이름을 붙여주어야만 했다. 바르바라는 그들을 마주할 때마다 턱을 괸 채 여유를 부리며 중얼거렸다. 넌 욘디구나. 아, 넌 우이드린 호수에서 왔니. 그럼 너는 버나디의 얼굴을 본 모양이지. 어느 날에는 호숫가에서부터 아주 깊고 슬픈 포효가 들려와 한밤중에 침대에서 일어난 적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호수 한가운데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검고 축축한 짐승을 보았다. 고래는 숨구멍으로 물을 뿜어내며 달이 뜬 호수의 수면 위를 천천히 헤엄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육지를 향해 거대한 턱을 벌렸다. 그 안에서부터 남자가 걸어 나왔다. 죽은 자였다. 다음 순간 눈앞의 호수는 우이드린이 되었다. 세상은 무엇도 비출 수 없고 무엇도 비치지 않는 검은 유리 속에 갇힌 것처럼, 그래서 어두컴컴하고 영원한 밤이 계속되는 것처럼…, 끊임없이 바르바라를 경계에 데려다놓았다. 마무리 짓지 않은 과거가 있었다. 의도적으로 매듭을 느슨하게 매어놓고 세상 밖으로 끊임없이 괴담을 방출하면서, 바르바라는 기다렸다. 지금의 자신이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 있다면, 내일이 오기 전인 오늘에 있다면, 그렇다면 아직 끝이 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한 번 더 만날 수 있다. 아직 오늘인 것을 알고 있는 한.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하더라고. 사랑과 상실에 대한 이야기를 이야기하던 이반이 덧붙였다. 그래서 이건 그냥 책으로 남겨둘 거야. 이반이 꺼낸 책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바르바라가 작게 말했다. 거기에 내가 나오는구나. 이반은 조금 망설였지만 결국 책의 한 부분을 펼쳤다. 바르바라는 이반이 쓰고 그린 것을 보았다. 자신의 모습을 보자마자 웃음이 터졌다. 진심으로 즐거워진 바르바라가 책장을 넘기며 손가락으로 하나하나 자신이 알고 있는 이들을 짚고 호명했다. 마리안, 페니, 사라… 이선, 테사와 리온, 메이지, 브륀힐드. …헤일리. 길리언. 아드리안, 트윙클, 오즈월드… 알렉스. 그것은 역사서도 아니었고 수기도 아니었다. 그것 역시 분류하자면 어떤 불분명한 경계에 있었다. 하지만 그 자체로 명확했다. 바르바라는 지난 아홉 달 동안 잊고 있던 전쟁의 기억을 떠올렸다. 호명하던 목소리가 조금씩 누그러지더니 종국에 부드러워졌다. 세이런, 칼리오페, 제인, 에밀, 세실… 그래, 전부 다. 

 고개를 들자 이반이 손바닥으로 귀를 꽉 누르고 있었다. 그녀의 친구는 민망해하는 모습이 드물었으므로 바르바라는 진심으로 그 모습을 귀여워해주었다. 그림이 있는 건 이것뿐이거든. 이반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니까 이게 원본이고, 노이어에 있는 건 전부 사본이야. 

 사본이 아니라 아예 다른 책인 것처럼 들리는데. 

 원본 수식어를 다 바꾸느라 손가락에 쥐가 날 정도였지. 폐하가 어찌나 재수가 없던지 원본이 그만. 

 바르바라는 이반의 얼굴에 떨어지는 나무그림자를 응시하며 그의 말을 들었다. 이반의 어깨 너머로 숲의 빽빽한 어둠이 드리워있었다. 그들은 함께 어두컴컴한 숲을 지나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반이 다시 그들의 이야기를, 괴담, 허구와 현실의 경계에 걸친 그 사랑과 상실의 이야기를 꺼냈을 때, 바르바라는 이반의 어깨 너머로 일렁이는 나무 그림자들 틈바구니에서 버나디를 보았다. 이야기에 열중하던 이반이 고개를 들었다. 저 끝에는 뭐가 있지? 그 때 등 뒤로 바람이 불어오며 술렁이는 목소리를 실어 날랐다. 바르바라는 호수 밑바닥에 잠긴 누군가의 연인들의 목소리들을 들었다. 호수가 있단다. 바르바라가 노래하듯 대답했다. 이반은 말을 멈췄다. 

 숲에서부터 괴물들이 기어오고 있었다. 버나디와 한쪽 뿔이 잘린 사슴, 눈 먼 예지자와 유령들, 욘디와 소녀가 이반의 등 뒤에 있었다. 바르바라는 걸음을 멈추고 이반을 돌아보았다. 괴수들이 반투명하고 흐릿한 그림자처럼 일렁이며 두 사람이 걸어온 길 위에 서있었다. 그 속의 이반은 그 무엇보다 명징하고 선명해보였다. 바람이 불자 나뭇잎이 흔들렸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야 한다면 호수 밑에 가두고 싶을 거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어. 

 바람이 스친 숲처럼, 지난 나날이 흔들릴 때…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게 삶이라면. 바르바라는 들고 있던 책을 옆에 끼고 몸을 돌려 이반을 정면으로 보았다. 괴물들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책등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괴물들이 뒷걸음질 쳤다. 이반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왔다. 

 흘러가버릴 거라면 그냥 호수가 되는 것도 좋겠다고. 

 하지만 너는 책을 썼잖니. 

 역서사도 수기도 아니지만 거짓이 없기에 명징한 활자.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도 스스로를 잃지 않는다면, 오늘과 내일의 경계에 서있더라도 아직 오늘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걸로 충분할까. 

 아마도. 

 괴물들이 뒷걸음질 쳐 숲의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여전히 좋은 나날이라고 생각해? 

 그럼. 

 그림자들이 사라진 숲의 대지 위로 빛이 드리웠다. 

 그럼 이제 춤을 춰도 되겠구나. 

 그래. 

 한 걸음을 남겨두고 바르바라가 손을 내밀었다. 이반. 그의 등 뒤로 보이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나란했다. 어둠은 그곳에 있었지만 그들은 무사했다. 아직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었지만 또한 어떤 이야기도 필요 없었다. 음악의 부재는 기억으로 충분했다. 손만 잡는다면 모자람이 없었다. 이반이 깊이 숨을 들이쉬고 앞으로 내딛었다. 다음 순간- 

 너 화가 났구나 

                네가 떠날 거란 사실을 잊은 적은 없어 

너는 가고 싶은 곳이 없어? 

                네가 바다에 가고 싶다고 했던 걸 기억해 


페트로프 아가씨가 드레스를 입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삐었대 

                그냥 네가 추지 그래? 

                                내가 훔친 것 중에서 가장 우아한 게 될 것 같아 


내가 화가 난 것 같아? 

                                아니 


뭔가 좋은 말을 덧붙여봐 

                        그냥 거기 있어줘 


그래서 이 이야기는 뭘 말하고 싶은 건데? 

                                …… 모든 것을 

 

 -바르바라는 이반의 손을 잡아당겼고, 두 사람은 그 손에 단단히 깍지를 꼈다. 자 이제 모든 어둠 속에서 탄생한 괴담을 바닥으로 끌어내릴 때가 되었으니. 술렁임이 끝나고 바람과 물소리, 젖은 흙과 향기로운 풀 냄새가 남는다. 선한 것들, 아직은 선한 것들, 혹은 지속적으로 선할 것들을 위하여 

 마침내 두 사람은 그렇게 
 이야기의 숲을 빠져나온다. 

2018/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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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새벽의 모서리»
1차/old 2019. 10. 22. 15:58

 우리의 인사_1 

 바르바라의 작은 이모 라이라 체사레는 바퀴 달린 의자를 탔다. 어릴 적에 열병을 앓은 후 다리를 못 쓰게 되자 목수 아르뎅 아저씨가 만들어준 것이다. 

 드로키스가 세미니온의 대지를 밀고 내려왔을 때, 체사레 식구들은 사업을 정리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미 룬넨의 몇몇 가구는 짐을 싸고 있었다. 체사레들은 짐을 정리하고 가구를 불태운 뒤에 모든 물건을 치웠다. 마치 룬넨에 자신들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리려는 것 같았다. 전나무로 엮은 지붕을 올린 체사레 여관은 하루 만에 거짓말처럼 텅 비어버렸고, 식구들은 눈이 쌓인 숲에 얕은 발자국을 남기며 쥐도 새도 모르게 모습을 감췄다. 떠나기 전에 체사레 식구들은 속이 빈 오두막집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검지와 중지, 약지를 나란히 펼치고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세손가락을 들었다. 

  체사레들은 라이라 체사레의 휠체어를 번갈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작은 마을을 방문해 짧게 머물렀고, 해가 뜨면 다시 숲을 헤치고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꾸준히 이동했다. 라이라 의자의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는 두 줄기의 깊은 홈이 팼다. 작은 짐마차가 지나간 것 같은 흔적이었다. 

 이동한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 때, 체사레 식구들은 자신들의 운을 시험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했다. 드로키스의 잔병들이 숲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기꾼 집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아났다. 그 때 라이라의 휠체어를 끌고 있던 것은 바르바라의 사촌 릴리버드 체사레였다. 릴리버드는 새처럼 가벼웠지만 라이라의 휠체어는 그렇지 않았다. 달음박질하며 의자를 밀던 릴리버드가 뒤쪽의 시야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던 순간, 돌부리에 걸린 의자가 헛바퀴를 돌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의자는 넘어지면서 큰 소리를 냈다. 뒤집어진 의자 바퀴가 빙글빙글 돌았다. 라이라는 눈 속에 얼굴을 박았다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릴리버드는 침착하게 라이라를 일으켜 의자에 앉히려 했지만 라이라가 릴리버드를 제지했다. 조용히 하고 들어.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릴리버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갑옷과 검이 부딪힐 때 들려오는 금속성 타격음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었다. 근처를 맴돌던 희미한 발소리들이 방향을 잡은 것처럼 몰려들었다. 드로키스 병사들이 오고 있었다. 

 릴리버드는 라이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라이라는 냉정한 얼굴로 릴리버드를 응시했다. 네가 할 일을 해. / 싫어요. / 똑똑하게 굴어. / 체사레는 체사레를 배반하지 않아요. / 이건 배반이 아니야. 라이라는 으르렁거렸다. 이건 개죽음이지. 

 릴리버드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품에 간직한 체사레의 단도를 꺼내들고 두 다리를 벌려 땅을 단단하게 딛고 섰다. 그러자 라이라가 거칠게 릴리버드의 손목을 붙잡아 끌고는 힘을 실어 뺨을 후려쳤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식구들은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한이 있더라도 집안 내부에서 그런 일들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라이라는 강력하게 릴리버드를 후려쳤다. 마치 그렇게 하면 릴리버드의 감정이 몸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그녀의 이성만이 그 육신에 남아있을 것처럼 말이다. 발소리들이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칼을 뽑는 소리가 났다. 릴리버드는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고 라이라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라이라는 두 팔을 벌린 채 단호하게 명령했다. 어서 가! 릴리버드는 그 품안으로 뛰어들어 있는 힘껏 라이라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왼뺨에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왔다. 

 떠나기 전에 릴리버드는 세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라이라를 향해 들어보였다. 라이라는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병사들을 똑바로 응시하느라 릴리버드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릴리버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뒤돌아보지 않고도 그 행동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세손가락을 들고 그렇게 있었다. 잠시 후, 라이라는 손을 내렸고 릴리버드는 달아났다. 

 릴리버드는 숲을 벗어난 이후에야 자신의 주머니가 가벼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달음박질을 멈추고 망토를 들추어 허리띠를 살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단도가 없었다. 릴리버드는 라이라가 마지막으로 훔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람이 불자 금발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릴리버드는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로 웃으며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다 하늘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여명의 경계가 세상을 가르며 낮과 밤을 끌어내렸다. 

 릴리버드는 그제야 웃는 것을 멈췄다. 

 

 우리의 인사_2 

 첫 번째 마법진에 다섯 사람을 세워두고 수도권으로 향하기 전, 바르바라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천장이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어깨 위로 흙이 떨어졌다. 지상은 비명과 함성, 아우성과 신음소리가 한데 뒤섞여 아비규환이었다. 바르바라는 뒤돌아 빛나는 진 위를 지키고 있는 칼리오페와 브륀힐드, 펜시브, 헤일리와 리온의 얼굴을 차례로 응시했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게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를 해야 할 때였다. 

 바르바라는 세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그들을 향해 조용히 들어보였다. 거기 있어. 

 그런 후 그녀는 떠났다. 

 그게 바르바라와 다섯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3. 

 마법이 실행된 이후에도 바르바라는 총 열 다섯 명을 더 베어 죽였다. 후퇴가 결정된 드로키스 군들이 무기를 챙겨 떠날 때, 바르바라는 마리안이 하던 것처럼 바닥에 침을 뱉어보려다 그만두었다. 그건 체사레의 방식이 아니었으므로 바르바라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 할 테였다. 바르바라는 피에 젖은 무기를 내려놓고 남은 이들과 함께 왕성으로 돌아갔다.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은 종전 선언이 오기 전까지 왕의 곁에 머물러야 했다. 마법진에 섰던 열 명의 동료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데아 기사단 본부로 옮겨지고, 이후에 몇몇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르바라는 그들과 만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복귀 허가가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왕명을 어겼으니 오즈월드가 옷을 벗어놓고 가라고 명령할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오즈월드와 다시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엉망진창으로 짓밟힌 정원을 가로질러 그림자처럼 유유히 왕성을 빠져나갔다. 복귀 허가가 떨어진 건 그녀가 왕성을 떠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 무렵 바르바라는 말을 달려 남향하고 있었다. 도트라를 벗어나 몬테나를 거쳐 에이브리스로 향했다. 써드빌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차가운 공기에서 피 냄새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전쟁이 끝났구나… 바르바라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영웅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이들을 영웅으로 만들어놓고, 전쟁이 물러가고 있구나. 

 써드빌 관문을 통과했을 때, 시간은 늦은 밤이었고 문지기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언덕 위에 말을 메어놓고 마을로 내려갔다. 불을 밝힌 집은 한 곳도 없었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오로지 파도소리만이 맹렬했다. 바르바라는 잠시 해변 앞에 우두커니 서서 달을 응시했다. 희끄무레하고 창백한 빛이 검은 물결을 따라 일렁이며 수평선과 하늘의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바르바라는 자신이 서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불현 듯 깨달았다. 아주 오래 전 그곳에서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요를 깔고 요한과 몸을 겹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바르바라는 그곳에서 오랜 친구의 약혼자를 훔쳤다. 그 때 타지아는 체사레 여관 2층에 누워 훌쩍이고 있었을 것이다. 홀로 언덕을 따라 내려온 바르바라의 발자국 위에 언젠가의 바르바라와 요한이 걸었던 발자국이 뒤섞이더니 순식간의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점령했다. 바르바라는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바로 옆에 이십 대의 바르바라와, 마찬가지로 이십 대의 요한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헐벗은 등과 어깨, 미끄러져 내려오는 금발을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는 요한이 짓눌려 있었다. 두 사람은 몸을 섞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귀족들이 모두 같지는 않아요. / 증명할 수 있는지? / 원하신다면.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선택의 순간들, 실수와 실패, 흘려보낸 시간. 바르바라는 신의 눈동자를 원했다. 인간의 육신에서 튕겨져 나온 영혼의 상태로 세상을 관조하고 싶었다. 그 날, 그 밤, 그 해변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르바라는 신의 눈동자를 빌어 해변을 내려다보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인간의 육신에 남아 요한과 죄를 저지르는 것을 택하는 대신 걸어온 길을 되짚어 여관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2층에서 울고 있는 타지아의 곁으로 돌아가 그녀의 뺨을 때리고는 너를 증오하지만 복수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과거는 무슨 수를 써도 과거로 남는다. 후회하는가? 그렇다면 바르바라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시간을 돌려 해변의 일을 잘라낸다면 그 뒤에 있었던 일 역시 재구성해야만 했다. 바르바라는 삶을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의 길고 긴 길이며, 선택은 영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 선택하면 길이 뒤바뀌었다.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잊은 순간에조차 선택은 삶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기사단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건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그 선택은 서른 살의 바르바라를 도트라로 이끌었다. 바르바라는 마법을 얻었고 목숨을 조금 버렸으며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선택의 순간이란, 결국 삶을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별한 사건 같은 건 없어도 무방했다. 뚜렷한 징후가 없어도 바르바라는 언제든 선택할 수 있었고 삶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오래 전에 선택한 순간이 자신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도트라에 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검을 내려놓을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십 대의 바르바라가 요한의 목을 조르다 놓아주었다. 과거의 환상이 막바지에 치닫고 있었다. 두 개의 헐벗은 몸이 들썩이며 신음을 주고받았다. 서른 살의 바르바라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옆에서 벌어지는 정사의 장면을 응시했다. 

 그 때, 예상치 못 한 일이 벌어졌다. 해변 끝에서부터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한밤의 해변으로 늘어진 발자국을 따라 누군가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상대의 긴 금발머리가 흩날리며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이십 대의 타지아였다. 그녀는 삼십 대의 바르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몸을 돌려 환상 속의 타지아를 향해 똑바로 섰다. 타지아는 차분하고 창백한 얼굴로 세 사람 몫의 발자국이 찍힌 해변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다 마침내 바르바라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다. 침묵이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거센 바람이 불더니 파도가 해변 깊숙한 곳까지 거칠게 침범했다. 바르바라는 이십 대의 자신과 요한의 발자국이 파도에 씻겨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환상이 끝나고 과거의 순간이 원래의 시간선으로 회귀했다. 정사를 나누던 두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발자국 두 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삼십 대의 바르바라의 발자국과…, 

 바르바라는 자신의 앞에 선 타지아의 창백한 발등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타지아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구름이 지나면서 빛이 사라져 그림자가 두 사람을 덮었다. 지독한 어둠의 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더니 다시 희끄무레한 달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지아의 창백한 얼굴이 달빛을 반사하며 환하게 빛났다. 

 “…난나.” 

 서른 살의 타지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4. 

 바르바라는 말을 잃고 그곳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파도소리만 들렸다. 두 사람은 침묵한 채 서로를 응시하는 것으로 순간과 순간을 흘려보냈다. 타지아는 조금 나이가 들어보였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름답고 고귀해보였다. 귀족적이었고 품위가 있었으며 어딘지 지쳐보였다. 짙은 금발은 여전히 길게 늘어져 있었고 눈동자는 깊고 진한 파란색이었다. 바르바라는 대체 어째서 이 야심한 시간에 타지아가 깨어있는 것인지를 가장 먼저 의문스러워했다. 타지아가 써드빌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상황을 이해하는 대신 한 구석으로 치워버린 것이다. 

 한참 뒤에, 타지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오는 걸 봤어.” 

 바르바라는 당황했다. “아. 그래?” 

 “그래, 관문 근처에 있었거든,” 타지아가 작은 목소리로 피곤한 듯 덧붙였다. “기다리느라…,”  

 “나를 기다렸니?”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채 확인하듯 되물었다. “…일이 남았니?” 

 타지아는 조금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어른스러워보였다. 바르바라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서른 살의 타지아가 갑자기 너무 멀게 느껴졌다. 

 “오, 난나.” 타지아가 중얼거렸다.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내 앞에서 후회하는 거니?” 

 “네가 죽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마찬가지야.”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쏘아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다를 응시하면서 말을 골랐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이런 순간에 대비해본 적이 없었다. 오 년만의 재회였다. 마지막으로 타지아와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엉망진창이었다. 풀지 못 한 울퉁불퉁한 문제 위로 고운 모래가 쌓이듯 시간이 그 위를 에워싸 마침내 평평해진 것뿐이다. 타지아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동시에 깨달았다. 타지아가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지금의 타지아를 구성하고 있는 전부라는 것을. 

 이것 역시 오래 전의 선택이 가져온 순간이라는 것을. 

 

 5. 

 두 사람은 함께 해변을 걸었다. 타지아는 몇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난겨울과 봄의 이야기, 자신이 거주 중인 도트라 인근의 영지성과 요한이 가꾸는 영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구나 짐작하고 상상할 수 있을 법한 부유한 귀족들의 생활을 덤덤한 투로 이어나갔다. 타지아의 말투는 예전 같지 않았다. 어딘가 가라앉아있었고, 차분하고 침착했으며, 이야기를 하던 중간에 생각을 정리하느라 단어를 다시 고르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그런 타지아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어느 순간에 철이 들어버린 아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모르는 시간 선으로 사라졌던 타지아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그러니까 전혀 다른 사람이 타지아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되돌아 온 것만 같았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정말 궁금해서라기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시간을 벌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작정인지를 물었다. 계속 이곳에 머물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어떻게 지냈는지도 물어보고 이반의 이야기를 잠깐 꺼내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면서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기사를 그만둘 거라고 했고, 떠날 거라고 했고, 잘 지내왔으며 이반 역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후에는 떠나기 전에 타지아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고 덧붙였다. 너는 모르겠지만, 바르바라가 말했다. 나는 이따금 네 생각을 했어. 

 타지아는 말이 없었다. 나란히 걷던 걸음이 뒤처지더니 종국에 멈추어 섰다. 바르바라는 뒤를 돌아 우두커니 선 타지아를 응시했다. 타지아는 발끝을 노려보다 마침내 고개를 들어 바르바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부딪혔다. 그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타지아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기다렸다. 기다릴 수 있었다. 

 잠시 후, 타지아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그녀가 자신을 따라잡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다시 발을 맞추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 타지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이니까.” 

 “거짓말이라도 기뻤을 거야.” 

 “그러니.” 

 “네가 날 미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오, 타지아.” 바르바라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단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어.” 

 “내겐 짧았어.” 

 “내게는 길었단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걷다가 멈추어 섰다. 해변의 끝이었다. 암벽으로 길이 막혀 있었다. 바르바라는 뒤돌아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눈으로 짚어보았다. 발자국은 나란하지 않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서로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분명 나란히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지. 하지만 그런 것들이야말로 삶이다. 

 타지아가 암벽을 손으로 짚었다가 바르바라처럼 뒤를 돌았다. 파도가 쏴아아 들이닥쳤다. 

 “드로키스 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써드빌로 갈 마음을 먹었어.” 타지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네가 이미 떠나고 없었지. 네 어머니를 만나볼 생각도 못 했어. 부끄러웠거든.” 

 “마리사는 너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바르바라는 잠시 생각했다가 인정했다. “그래,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구나.” 

 “…….” 

 타지아는 고개를 들었다. 

 “난나.” 

 “응.”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마찬가지야.”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타지아는 잠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보고 싶었어.” 

 “…….” 

 “네가 죽으면 안 된다고 에아께 빌었어.” 

 “그랬니.” 

 “응.” 

 타지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팔을 올렸다. 

 “헤어지기 전에 한 번만 안아도 될까.” 

 바르바라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럼.” 

 그래서 두 사람은 포옹했다. 타지아의 팔이 덩굴처럼 바르바라를 에워쌌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끝내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 할 것임을 직감했다. 타지아가 힘주어 바르바라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어색하게 그 품에 안겨있다가 마침내 눈을 감았다. 타지아는 울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서 타지아의 머리카락이 바르바라의 뺨을 조금씩 할퀴고 지나갔다. 

 타지아는 침을 삼키면서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르만도가 보고 싶다면 언제든 내 성으로 와도 돼.” 

 “그 애 생각은 안 한지 오래 됐어.” 

 “나는 정말 괜찮아.” 

 “나도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야.”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돼.”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마주안고는 팔에 힘을 주었다. 

 바르바라가 속삭였다. 

 “그 애를 때린 적 있어?” 

 타지아는 바르바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 애를 네가 직접 돌보니?” 

 타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컸니?” 

 “이제 글을 써.” 

 “건강하니?” 

 “눈을 맞으면서 뛰어다녀.” 

 “그 애를 사랑해?” 

 “그 무엇보다.” 

 “네 가족이 그 애한테 손댄 적 있어?”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아.” 

 바르바라 역시 타지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 애에게,” 

 바르바라는 잠시 말을 골랐다. 

 “빼앗는 법 말고 지키는 법을 가르치도록 해.” 

 “그렇게 할게.” 

 타지아는 목메는 소리로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난나 네 말대로 할게.” 

 “너처럼 재수 없게 키우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타지아가 힘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알겠어.” 

 “절대 그 애를 때리지 마.” 

 “맹세할게.” 

 “맹세 정도로는 안 돼.” 

 바르바라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때리면 널 죽여 버릴 거야.” 

 타지아는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그 바람에 바르바라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타지아는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할 때는 결국 목이 메여 한 박자를 쉬었다. 바르바라는 울지 않았지만 힘이 다 빠진 사람처럼 그 품에 안겨있었다. 파도소리가 멀어지고 오로지 타지아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가득 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타지아가 천천히 바르바라에게서 떨어져나왔다. 그러나 몇 걸음 더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바르바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아예 바르바라의 허리가 휘청거릴 만큼 세게 끌어안았다. 

 타지아가 속삭였다. 

 “…사랑해, 난나.” 

 “…….” 

 바르바라는 손을 올려 타지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알아.”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나는 언제나 그랬어.” 

 다음 순간, 바르바라는 자신의 어깨가 조금 축축해졌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달빛으로 일렁이는 거대한 수평선의 앞에서 부둥켜안은 채로 한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어깨 너머로 이십대의 자신과 타지아와 이반을 보았다. 그들 사이에 아르만도가 걸어가고 있었다. 아르만도는 부둥켜안은 자신들을 가리키며 이반에게 무언가를 질문했다. 이반은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춰주고는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고 그대로 아이를 들어올렸다. 언젠가의 장면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다. 좋았던 시절들. 이반이 아이에게 목마를 태운 채 돌아가자, 뒤따라 걷던 타지아와 바르바라 역시 등을 돌렸다. 네 사람은 해변의 반대편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 나갔다. 뒷모습이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한 시절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 언젠가의 바르바라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반은 대답했다. 좋았던 시절은 언제나 흐르는 물처럼 떠나가지. 

 ‘맞아’라고 바르바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좋은 시절이었지.’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어. 

 

 우리의 인사_6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배웅하지 않았다. 대신 해변에 남아 달빛이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겨울바다의 바람은 쌀쌀맞고 거세고 심술궂었다. 바르바라는 한동안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앉아 풍경을 응시하다가 마침내 옷을 털고 일어났다. 타지아가 떠나자 자신이 써드빌에 남겨둘 수밖에 없던 모든 미련이 한곳에 모여 모래알처럼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러자 몸과 마음이 몹시도 가벼워졌다. 타지아가 나타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아직 밤이 끝나기 전에, 바르바라는 선루스 기사단 본부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어 텅 빈 본부를 활보하면서 빙글빙글 돌다가 입구, 식당, 복도, 테라스, 숙소, 집무실과 사무실을 순차적으로 방문했다. 바르바라는 그곳에서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훔쳤다. 마리안과 두던 체스, 자신이 즐겨 쓰던 깃펜, 쓰다 남은 잉크병과 테사와 나누던 십자말풀이를 모아둔 노트… 오즈월드의 집무실에는 특히 그녀가 훔쳐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지난 몇 년 동안 작성해놓은 모든 서류, 혹은 자신과 관련된 서류를 모조리 빼돌렸다. 오즈월드가 돌아오면 골머리를 썩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바르바라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녀는 선루스 기사단 숙소 역시 방문했다. 그곳에서 동료들의 방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바르바라는 지난 십일 년간 그들과 관계를 나누며 남겼던 모든 흔적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있지 않게 했다. 마치 처음부터 바르바라 체사레라는 존재가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만들었다. 바르바라는 대련장도 방문했다. 즐겨 쓰던 목검과 자주 착용하던 방패와 아대 따위가 그녀의 발걸음과 함께 하나 둘씩 사라졌다. 몇 시간에 걸쳐 바르바라는 묵직한 주머니에 차곡차곡 지난 십일 년의 세월을 통째로 훔쳐 넣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더 이상 훔칠 것이 남아있지 않자 그곳을 떠났다. 

 바르바라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전나무 집으로 불리는 마리사의 여관이다. 그곳에서 정리할 건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조금의 옷과 식기만을 훔칠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마리사 역시 훔쳐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마리사만큼은 그곳에 남겨두기로 했다. 어차피 바르바라가 떠난 것을 안다면 마리사 역시 바르바라를 지워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체사레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세상 끝에서 해를 훔친 도둑의 자손들이다. 

 다시 써드빌의 가장 높은 언덕을 올랐을 때, 바르바라는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과 희미한 여명을 느꼈다. 어느덧 캄캄했던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르바라는 뒤돌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달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라색과 분홍색으로 울긋불긋하게 물든 빛 무리가 바다 끝에서부터 서서히 격상하고 있었다. 태양의 꼬리가 찬란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바다를 반으로 가로질렀다. 어둠이 걷힌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르바라는 마리사 체사레가 전나무 집 현관 앞에 서서 언덕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불자 금발이 흩날려서 시야가 조금 가려졌다. 바르바라는 나무 옆에 손을 짚고 서서 자신의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두 모녀는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마침내, 마리사가 움직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세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바르바라를 향해 들어보였다. 

 바르바라는 그대로 돌려주었다. 

 여명이 닥쳐오는 그 새벽, 바르바라는 묵직한 주머니와 함께 안장에 올랐다. 언덕에 메어두었던 말은 여전히 충분히 달릴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고삐를 쥔 채로 관문을 벗어나다가, 찬란한 빛과 함께 물든 써드빌과 그 바다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바르바라의 한 시절이 그곳에 있었다. 사실 여러 시절이 그곳과 연관되어 있었다. 바르바라는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아득한 서네스를, 점처럼 보이는 고대 현자 선루스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선루스가 어느덧 바르바라의 곁에 서있었다. 바르바라는 선루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는 편이 좋아, 하지만 보이는가. 우리가 어디쯤에 서있는지. 선루스가 묻자, 바르바라는 조용히 대답했다. 

 예, 우리는 세상의 끄트머리에 있군요. 새벽의 모서리에요. 

2018/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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