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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a.m.

월요일 등교 시간, 알렉스 스타일스가 주차장에서 학교 최고의 퀸카에게 따귀를 얻어맞는다. 주변에는 열댓 명의 구경꾼이 있었다. 토미는 차에서 막 내린 참이었다. 매니큐어를 꼼꼼하게 바른 린다 오스본의 긴 다섯 손가락이 알렉스의 뺨을 강타할 때, 구경꾼들로부터 일제히 감탄이 터져 나왔다. 워! 토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알렉스가 화를 낼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울음을 터뜨린 건 린다였다. 그녀는 마치 거대한 재앙을 막 목격한 사람처럼, 다소 인위적인 격양으로 가득 찬, 길고 시끄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불과 십분 전까지 그들을 태우고 왔던 스포츠카의 좌석에 던져진 키를 집어든 후, 보란 듯이 알렉스의 품으로 던졌다.

“더러운 놈!”

“오, 조심해.”

키를 엉거주춤 받아든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토미가 서있는 쪽으로부터 등을 지고 있어서 토미는 단지 알렉스의 어깨 너머로 시큰거리는 린다의 눈물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만을 간신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일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도 알렉스는 그녀를 달래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알렉스가 말했다.

“볼 일 남았어?”

“있겠어?”

린다는 경멸어린 눈으로 알렉스를 쏘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신 말도 걸지 마.”

“오, 그래.”

“꺼져!”

린다가 요란한 하이힐 소리를 내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알렉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거두었다.

“그런 것치곤 본인이 떠나고 있는데 말이지. 잘 가, 오스본! 생각나면 연락하고!”

린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비실비실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물론 네 혐오와 분노가 정상적인 범주로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야.”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학생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알렉스는 몸을 돌려 스포츠 차에서 백팩을 꺼내 어깨에 걸친 후, 키를 만지작거리다 공중으로 휙 던져 올렸다. 토미와 시선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알렉스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키를 솜씨 좋게 낚아챘다. 그가 잘생긴 얼굴로 장난스럽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Hey, 안녕.”

토미는 뒤를 돌아 아무도 없는 주차장 쪽을 확인했다. 알렉스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오, 아니. 너 말이야.”

토미는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손을 흔들었다.

“재밌는 구경거리 잘 봤어?”

토미는 대답 대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너 코피나.”

알렉스가 몸을 숙이고 황급히 인중을 더듬었다. 검지와 중지에 선명한 피가 묻어나왔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토미는 교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손등으로 피를 훔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백팩을 고쳐 매고 차문을 닫았다. 학교 종이 치고 있었다.

 

12:24 a.m.

모두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학교 최고의 퀸카와 학교 최고의 킹카의 한 달 연애가 막 쫑난 참이었고 불과 한 시간 만에 가십거리는 무서울 만큼 몸집을 불려서 이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조차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임신시켰대. 정말? 무슨 소리야, 걔 섹스할 땐 무조건 콘돔 쓰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 해봤냐? 오, 넌 그럼 안 해봤어? 으스대긴, 마음만 먹으면 다음 달엔 걔랑 내가 애인 사이가 되어있을 걸? 하긴, 그 알렉스인 걸!

알렉스 스타일스는 이 모든 소란 속에서도 자신의 얼굴근육이 얼마나 유연한지 보여주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멋지고 상쾌한 웃음을 지어주었고, 수업에 앉아 열심히 필기했고, 심지어는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들다가 껌을 씹는 것을 들켜 지적을 받기까지 했다. 퉁퉁 부은 왼쪽 뺨만 제외하면 그는 정말 괜찮아보였다. 오히려 괜찮지 않은 건 린다 쪽인 것 같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법석을 떨며 쉬는 시간마다 몰려드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하거나 각종 손짓을 동원해 이야기를 과장하는 식이었다. 월요일엔 린다 오스본과 강의실에서 적어도 세 번은 마주쳐야 하는 토미 화이트헤드-그는 학기 초 린다와 같은 스쿨 멘토에게 스케줄 조정을 조언 받았다-는 불쾌한 기색을 감춘 채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려 애썼다. 그가 싫어하는 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가십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란이었다. 요컨대 토미는 남의 이야기에 가능하면 신경을 끌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선호하는 개인주의자였고, 그런 이유로 그는 이 사건이 총체적으로 달갑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요란하게 사람을 끌고 강의실을 옮겨 다닐 린다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미 알렉스와 교제하던 지난 한 달 동안에도 충분히 시끄러웠던 것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토미는 그녀와 알렉스가 지난 한 달 간 어디를 다녔고 주로 무엇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주말에 만나 어떤 섹스를 했는지도 알고 있었는데 이는 결코 알고 싶은 정보가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tmi(too much information)의 표본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렇게 깨를 볶던 그 둘이 왜 깨진 걸까?

그러니까 말이다. 대체 그 둘은 왜 깨지고 만 것일까? 그야말로 우리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주제였다. 무엇을 겪던 떠들지 않곤 못 베기는 린다의 말에 따르면, 알렉스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걘, 그렇게 나를 속이고, 주말마다 했어! 오, 맙소사. 상상이 가니? 난 수십 번이나 그 병에 노출될 위기에 처해있던 거야. 난 그런… 인생의 위기를 잘 해쳐낸 내가 대견스러워.” 

그럼 대중들의 반응은 어떨까? 

링컨 스쿨의 학생들은 진작부터 알렉스의 지난 사생활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언젠간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투였다. 

A : 왜, 린다는 전학생이잖아. Freshmen때부터 알렉스를 알고 있었으면 진작부터 피해갈 수 있었을 걸. 전교에서 알렉스 소문 모르는 사람이 있어? 린다는… 순수했지. 

B : 아주 순수했지.

A : 솔직히 린다가 지나치게 유난을 떨고 있긴 해.

B : 오, 유난이 아니지. 나라도 내 남자친구가 알렉스 같았으면 큰 상처를 받았을 거야. 

A : 아니, 아니. 아니지, 그게 무슨 상처가 되는데? 알렉스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그는 잘해줘. 어쨌든 사귈 땐 한 사람에게 올인하잖아

B : 어쨌든 그는 망할 호모라고!

A : 여자랑 자는 게이도 있냐?

B : 알게 뭐야!

A : 어쨌든 린다가 유난스러운 건 맞아. 지금까지 알렉스랑 사귄 여자애들이 다 저렇진 않았어.

B : 하!

A : 남자애들도. 혹은 뭐, 다른 애들도 있을 수 있고.

C : 소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A : AIDS랑 게이를 연결하는 사람은 호모포비아지. 멍청이 아니면 그런 말 안 믿어.

B : 난 믿어.

A : 그럼 넌 망할 호모포비아인 거고.

C : 너희들 굉장하네!

A : 칭찬 존나 고맙다.

 

여기서 알렉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알렉스. 알렉스 스타일스! 그는 걸어 다니는 가십 자판기고 잘 빠진 미남이다. 비율도 좋고 패션센스도 있으며, 제법 점잖고 모두에게 상냥하기까지 하다. 그는 링컨 스쿨의 Freshmen에서 Sophomore로 올라가는 동안 애인을 총 스물다섯 번 갈아치웠고(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다시 Junior로 진학하는 동안 대충 열 번을 갈아치웠다. (기세가 주춤한 걸 보아하니 요양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리고 사이언스 위크(링컨 스쿨의 3월 일정엔 2주 간 열리는 큰 과학 행사가 있다)에 당도한 화제의 전학생 린다 오스본을 잡아 한 달을, 무려 한 달을 연애했다. 알렉스의 한 달은 굉장한 기록이다. 그는 평균 일주일 정도면 관계를 정리했으니 말이다. 전부 돈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오스본은 굉장한 부잣집 딸인데다가, 금발이고, 예쁘장한데다가 돈도 잘 썼다. 특히 어떻게 사치를 부려야 할지 굉장히 잘 알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영리한 아가씨였다. 그녀는 원하는 만큼 알렉스를 시가지 호텔의 파티에 데리고 갔고, 비싼 스포츠카를 몰도록 허락하며, 단둘이 있고 싶을 땐 그녀의 빌라 꼭대기 층에 있는 풀로 불러들였다. 알렉스가 못 사는 편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부자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치가 알렉스를 감화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려 한 달. 한 달 간 알렉스는 그 짓을 했던 것이다. 사랑이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물론, 알렉스는 매 순간 진심을 다한다. 그와 사귀어 본 무수한 애인들은 관계가 끝난 후에도 대체로 알렉스를 미워하기보다 귀여워했다. 혹은 다신 없을 굉장한 애인이었다고 떠들어댔다. 놀랍게도 난봉꾼 알렉스의 평판은 극과 극이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사력을 다해 그를 증오했다. 그러고 싶어서 안달 난 것처럼 보이는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알렉스를 사랑했다. 그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팬클럽도 있었다. 어쨌든, 난봉꾼 생활을 청산한 알렉스가 한 달 간 린다 오스본에게 몸과 마음을 매진하는 동안 학교는 새로운 가십거리가 없어 시들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그 둘의 연애 생활에 관해 떠들어 대느라 몹시 산만했다. 이번에야말로 알렉스가 제 짝을 만난 게 틀림없다는 여론보다는, 대체 왜 ‘하필’ 린다 오스본이여야 하냐는 투덜거림이 주를 이뤘으니 둘이 산산조각 난 지금, 샴페인을 들 작자들이 이 학교에 차고 넘쳤다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이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모든 소란의 시발점인 알렉스가 학교에서 꺼져주거나 혹은 전학이라도 가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는 장학금을 노리고 있었고, 모범생이었으며,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지금 획득하는 것이 아닌 예정되어 있는 것이고, 그 확신에 필요한 신탁계좌와 아이비리그 졸업장의 티켓이 바로 성적표에 있다고 생각했다. 알렉스가 누구와 붙어먹던 그것은 토미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토미는 가능하면 엮이지 않기 위해 줄곧 알렉스를 솜씨 좋게 피해 다녔고(눈에 띄지 않도록 스스로를 숨기는 건 토미의 몇 안 되는 재능이다) 알렉스는 Junior가 되어서도 토미의 존재를 결코 모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세계에 살며 Senior가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토미가 바라던 바였다. 그래서 이른 아침 알렉스가 토미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 그는 속으로 굉장히 놀랐다. 알렉스의 왼뺨은 린다의 손자국으로 인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그의 웃음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웠다. 토미는 하마터면 그의 인사를 받아주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는 알렉스에게 조금 동정심을 느꼈다. 구경꾼들 중 그 누구도 알렉스를 걱정하거나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다툼 이후 곧장 자리를 뜬 린다의 곁으론 서너 명의 사람들이 붙었는데도 말이다. 알렉스는 혼자 남겨져 있었고, 유일하게 그 자리를 뜨지 않은 토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건넨 것이다. 맙소사, 왜 하필 자신이란 말인가? 토미는 덕분에 오전 내내 찜찜한 기분으로 굳이 가지지 않아도 될 죄책감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린다 오스본과 알렉스 스타일스에 대한 가십거리-그러니까, 임신과 콘돔, 섹스에 관한 것이었다-를 듣는 순간, 그 얕고 개인적인 동정과 죄책은 사라지고, Tommy's page에 알렉스에 대한 평가가 한 줄이 더 추가됨으로서 그 모든 내부적 갈등은 비로소 종식될 수 있었다. 토미의 페이지, 목차 알렉스 - 난봉꾼, 아웃팅의 천재, 멍청이, 그리고 철부지. 비고 : 주의요망!

 

2:46 p.m. 

[작성자] Tom0612

전에 말했던 걔 말이야, 깨졌대.

학교가 온통 뒤집어져서 시끄러워 죽겠어.

└ 보통 학교가 그렇게까지 남의 연애 사에 신경 쓰냐? -df***

 └└ 어지간히 잘생긴 놈인 모양이지. -hurrion

  └└└ 진심 얼굴 존나 궁금하다. -df***

    └└└└ 근데 넌 왜 아이디 블러처리 하냐? 매너 없게. -hurrion

└ 잘 됐네. 한 번 꼬셔봐. :> -gib22

 └└ 내가 왜? 관심 없다니까. -tom0612

  └└└ :< -gib22

 

경적 소리에 토미가 고개를 들었다. 짐이 차에서 내렸다. 

“토미!”

토미는 휴대폰을 껐다.

“빨리 오셨네요.”

“가는 길에 퍼블릭 마켓에 들릴 생각이다. 네 여동생도 태우고.”

“늦는다고 문자 보낼까요?”

“아니, 먼저 태우고, 장을 보러 갈 거야.”

짐은 토미의 가방을 받아 뒷좌석에 밀어 넣은 후 조수석을 열었다. 토미가 어깨를 으쓱하곤 뒷좌석 문손잡이를 잡았다.

“어… 전 그냥 뒤에 탈게요. 엠마가 조수석을 좋아해요.”

“오, 그래.”

짐은 허둥대지 않고 건조하게 대꾸했다.

“좋을 대로 하렴. 괜찮다.”

짐이 시동을 걸고 라디오 채널을 맞추는 동안, 토미는 고개를 돌려 교문으로 쏟아지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천천히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뜯어보다가, 이내 주차장으로, 아침의 그 소동이 있었던 바로 그 장소로 옮겨졌다. 린다의 파란 스포츠카는 그대로 거기 있었다. 그나저나, 분명 린다의 차였는데 왜 린다는 키를 알렉스에게 집어던진 것일까? 그는 그것을 돌려줬을까?

“토미, 늦기 전에 출발해야지.”

“아, 네. 죄송해요.”

토미는 뒷좌석에 탔다. 차문을 닫자 짐이 에어컨을 틀어주었다. 습도 높은 찬바람이 차 냄새와 함께 좌석 곳곳으로 불어 닥쳤다. 라디오에선 케이티 페리의 노래가 나오는 중이었다. 학교 주차장을 벗어나다말고 짐이 신음했다.

“맙소사, 저런 스포츠카를 학교에 끌고 오는 놈도 있냐?”

토미는 차창 너머로 스쳐지나가는 린다 오스본의 BMW를 흘겨보았다.

“놈이 아니고 여자애 거예요.”

“뭐라고?”

짐이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토미는 대꾸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짐은 사거리를 빠져나와 외곽도로를 탔다. 토미와 그의 여동생 엠마의 학교는 차로 삼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짐은 그와 엠마를 등교시키고 다시 데리고 오는 것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케이티 페리의 곡은 후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Lets go all the way tonight

오늘 밤 끝까지 가보는 거야

No regrets, just love

후회 따윈 없어, 그저 사랑뿐이야

We can dance until we die

우린 죽을 때까지 춤출 수 있어

You and I, Well be young forever

너와 나, 우린 영원히 젊을 거야

 

노래로 채우고 있던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고, 짐이 물었다.

“토미, 학교에선 별 일 없었니?”

그 말은 굉장히 의무적이고 사무적으로 느껴져서 오히려 토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토미는 화면으로 뜬 리플 몇 개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엔, 관심 있는 것 같은데. -gib22’

"어, 음. 네. 별 일 없었어요.“

토미는 휴대전화를 껐다. 짐이 대답하지 않아서 토미는 한 번 더 대꾸해야 했다.

“정말로요.”

“그럼 됐다.”

차가 빨간 불에 걸렸다. 그들은 이제 속수무책으로 케이티 페리의 노래를 들어야만 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순간 토미는 짐이 아주 밟아주거나, 혹은 아예 영영 멈추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시 신호가 바뀌었고, 차가 출발했다. 노래는 끝나가고 있었다.

 

미들스쿨로부터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엠마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토미, 옆으로 좀 가.”

토미는 앞좌석을 흘겨보았다. 짐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엠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토미, 옆으로 가라니까.”

토미는 엉덩이를 구석으로 옮겼다. 엠마가 어깨까지 오는 단발을 찰랑거리며 앉자 차체가 작게 흔들렸다. 짐이 라디오 볼륨을 낮췄다.

“학교는 잘 다녀왔니, sweetie?”

“오, 그냥 그랬어요. 사실 친구랑 좀 싸웠는데 화해했어요. 괜찮아요.”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괜찮은 거야?”

“네가 뭘 안다고?”

“둘 다 그만해라.”

짐이 말꼬리를 잘랐다. 토미가 짐을 바라보았다.

“뭘요? 저흰 싸우지도 않았는데?”

“내 눈엔 그럴 것처럼 보였다.”

“아빠는 너무 걱정이 많아요.”

엠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빠랑 전 늘 이래요.”

짐은 대답하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차가 출발했다. 이제 라디오에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끄러운 곡이 나올 기미는 없었다. 넓은 도로를 타자 차가 늘어났다. 짐은 교통 방송으로 채널을 돌렸다. 창가에 턱을 괸 채 고개를 돌린 토미와 엠마가 백미러의 양 사이드에 앉아 있었다. 짐이 백미러를 흘끔거리며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집에 가기 전에 퍼블릭 마켓에 들릴 예정이다.”

“오, 잘 됐네요! 전 오늘 피자가 먹고 싶어요.”

토미가 작게 덧붙였다.

“난 피자 싫은데.”

엠마가 토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어차피 넌 제대로 먹지도 않을 거잖아.’

‘먹을 거거든?’ 

‘시끄러워.’

“아빠, 토미도 피자가 좋대요!”

“그럼 그렇게 하자. 토미?”

토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네, 좋아요.”

“와! 피자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토미는 이번에 화면조차 확인하지 않고 전원을 꺼버렸다. 라디오의 교통방송이 끝나가고 있었다. 차는 덜컹거리며 퍼블릭마켓을 향해 달려 나갔다. 

-

'Site'는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게이들을 위한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다. 데이트, 채팅, 잡담과 원나잇 외 잡다한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창립 초기엔 작은 규모로 소수 인원을 받아 운영되었지만, 디도스 공격과 해킹 시도를 겪은 후 서버를 교체하고 완전 익명제로 바뀌었다. 그 뒤로 알음알음 유입된 인원들로 하여금 차차 몸집을 불려 이제는 이름 그대로 거대한 하나의 사이트(site)가 되었고, 지금은 포털 사이트 못지않은 기능과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었다. 토미가 Site를 알게 된 건 열네 살 때였다. 그가 그곳에 곧바로 가입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그 사이트의 존재를 알자마자 잊어버렸다. 그가 Site를, 주변엔 암만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사실 곳곳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이 거대한 미국 서부, 하다못해 캘리포니아 주에서조차 수천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토미 역시 결코 오류 혹은 돌연변이가 아님을 증명해줄 수 있는 그 거대한 커뮤니티를 떠올리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엠마가 벌컥 문을 열었다.

“토미!!”

“엠마, 제발 내 방에 들어올 땐 노크 좀 해줄래?”

토미가 짜증을 참는 얼굴로 의자를 돌렸다. 엠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피자 안 먹어?”

“생각 없어. (있겠냐?)”

“아, 그래……?”

시선의 이동을 느낀 토미가 황급히 노트북을 닫았다. 엠마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랑 채팅해?”

“안 해.”

“했잖아! 네가 누구랑 채팅도 해?”

“아니라니까.”

“텍스트로 도배된 창 다 봤거든?”

“메일이야.”

토미는 얼결에 마구 뱉었다.

“학교, 과제야.”

“흐음.”

엠마는 미심쩍다는 표정이었으나 곧 흥미를 잃고 문지방에서 물러났다.

“아무튼 생각 없어도, 나중에 내려와서 먹어. 짐이 슬퍼할 거야.”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 그는 이제 우리 가족이라고! 맙소사, 피자를 직접 만들어줄 줄 누가 알았겠어? 맛없어도 두 조각은 먹을 각오를 했는데, 심지어 맛있어서 네 조각이나 먹었어.”

“알겠으니까 제발 빨리 나가.”

“피자 먹을 거야?”

“나중에.”

토미는 마지못해 덧붙였다.

“아무도 없을 때 내려가서 한 조각만 먹을게.”

“오븐에 넣어놓을게. 식기 전에 먹어.”

“그래… 엠마, 제발 나갈 때 방문 좀 닫아!”

엠마는 뒤돌아보지 않고 층계를 내려갔다.

“엠마!”

fuck. 작게 욕을 중얼거린 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게 문을 닫았다. 분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이사를 온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문의 잠금장치는 여전히 고장 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새 집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토미는 생각했다. 정원엔 낡은 스프링클러가 있고, 문은 하얗고, 지붕은 붉네. 이보다 더 진부한 집이 있을까? 엠마도 같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린 둘은 집을 보며 오두방정을 떠는 엄마를 지나쳐 심드렁하게 문으로 들어섰다. 짐은 엄마의 열렬한 반응에 몹시 신난 기색으로, 토미를 직접 층계에 데리고 가 그의 것이 될 예정인 빈 방을 보여주었다. “집에서 두 번째로 큰 방이란다.” 짐은 무슨 자랑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제니와 거실을 둘러보고 있을 테니, 원하는 만큼 있다가 내려오렴.” 그리고 그는 토미를 빈 방에 버려둔 채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 것도 없는 방에 홀로 남겨진 토미는 건성으로 공간 전체를 훑어보았다. 가구가 옮겨지지 않은 방은 짐의 말대로 굉장히 크게 느껴졌으나, 동시에 그만큼 텅 빈 까닭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구석엔 칠이 조금 벗겨진 벽장이 있었고, 창문은 왼쪽으로 크게 나있었다. 햇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마룻바닥으로 쏟아졌다. 토미는 몇 번 훑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하고 허술한 무게감이 잡혔다. 토미는 손을 떼어내고 문고리를 살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토미는 다시 한 번 문고리를 잡아보았다. 덜컥. 토미는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찡그린 채, 문고리에 바싹 시야를 붙였다. 그러자 안쪽, 잠금장치의 핀 버튼이 미묘하게 어긋나서 구멍에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토미는 층계를 내려왔다. “문고리가 고장 났어요. 수리해야 해요.” 짐은 큰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 이사하기 전에 내가 사람을 불러 수리해놓으마.” 

그리고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일주일이면 사람을 부르는 건 고사하고 본인이 문고리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고칠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빌어먹을 피자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여기 있었는데! 사실, 그는 언제나 정말 해야 할 일은 잊어버리는 남자였다. 토미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인상은 대게 그대로 굳어지는 법이다.

자리로 돌아온 토미가 노트북을 펼치자, 스크린이 깜빡이며 마지막 작업 창을 띄워주었다. 채팅은 거기서 멈춰있었다. 개인 채팅 방이었고, gib22가 이모지를 남겨놓았다.

 

gib22 :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16:43

gib22 : Tommy, 간 거야? :(  16:52

 

토미는 황급히 답장을 입력했다.

 

Tommy0612 : 미안, 일이 있어서.  16:54

Tommy0612 : 나간 거 아니야.  16:54

Tommy0612 : 그리고 난 정말 생각 없어.  16:54

 

잠시 뒤, 답장이 갱신되었다.

 

gib22 : Oh. :(  16:56

gib22 : 가족이 포비아야?  16:56

 

토미는 아니, 와 몰라, 중에서 머뭇거렸다. 그것은 실상 동일한 뜻이었다.

 

Tommy0612 : 몰라.  16:56

Tommy0612 :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16:56

Tommy0612 : 괜히 떠보려고 물어봤다가 일이 커지면 어떡해?  16:56

Tommy0612 : 그건 싫어.  16:56

gib22 : 동의해.  16:57

Tommy0612 :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 난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불신해.  16:57

gib22 : 네가 말한 그 알렉스처럼?  16:57

Tommy0612 : 그래.  16:58

Tommy0612 : 걔처럼.  16:58

gib22 : 걔가 데이트 신청하면 거절할 거야?  16:58

gib22 : 얼굴은 잘생겼다며?  16:58

Tommy0612 : 장난해?!  16:58

Tommy0612 : 관심 없어!!  16:58

Tommy0612 : 그리고 절대 그럴 일 없어!  16:58

gib22 : 왜?  16:59

Tommy0612 : 걘 내가 누군지도 모르거든.  17:00

 

토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Tommy0612 :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고.  17:00

 

채팅은 거기서 종료되었다.

-

다음주 수요일 아침, 링컨 스쿨의 주차장 앞으로 작은 행렬이 있었다. 짐은 운전대를 잡은 채 얼굴을 찡그렸다. 

“저게 대체 무슨 소동이냐?”

토미는 짐의 자동차 앞으로 지나가는 행렬 속에서 익숙한 몇 명의 얼굴들을 발견하곤 곧 흥미를 잃었다. 그들은 평소 알렉스 스타일스 옆에 삼삼오오 붙어있던 ‘패거리’들이었다.

“어, 상관 쓰지 마세요. 쟤넨 원래 쓸데없는 짓을 잘 하거든요.”

토미는 가방을 챙겨 맨 후 문을 닫았다. 패거리 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어깨를 잡고 구겨진 포스터 한 장을 토미에게 막무가내로 안겨주었다.

“헤이, 헤이. 너도 받아.”

토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알렉스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존나 좋아!!

▫좋아!

▫그냥 그래

▫조금 싫어

비고 :

 

“워워, 조심해. 넌 지금 알렉스의 얼굴을 구기고 있어.”

그녀는 토미가 붙잡고 있는 포스터 상단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곳엔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짓고 있는 알렉스가, 허세가 잔뜩 담긴 각도로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손가락 총알을 날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진으로 고른 거야.”

“아, 그래.”

토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게 뭔데?”

“알렉스가 만든 건데, 중요한 설문이야.”

“아, 그래.”

토미는 다시 한 번 심드렁하게 알렉스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거 참 중요해 보인다. 이걸로 교내 인기왕이라도 하겠대?”

“글쎄! 그건 굳이 이러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니야? 펜 빌려줄까?”

“어, 아니.”

“그래!”

그녀는 토미의 대답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포스터를 줄 때와 똑같이 막무가내로 그에게 펜을 쥐어주었다. 토미는 뚱한 표정으로 설문 항목을 내려다보았다.

 

▫존나 좋아!!

▫좋아!

▫그냥 그래

▫조금 싫어

비고 :

 

“왜… 정말 싫어는 없는 거야?”

“사실, 있었는데 알렉스가 상처 받을까 봐 우리가 뺐어.”

“아, 그래.”

토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비고를 채워 넣은 후, 다시 볼펜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경쾌한 미소로 딸깍딸깍 볼펜을 누르며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앞서가던 무리들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시, 빨리 와!”

“오, 이런.” 

제시는 호들갑을 떨다가 재빨리 손을 흔들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안녕, 다음에 봐!”

“잠시만, 이건?”

“아, 포스터는 가지고 있어, 나중에 수거하러 올게! 안녕!”

제시는 경고하듯 토미의 손에 들린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재차 당부했다.

“버리지 마! 네 얼굴 기억했어!”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알렉스의 패거리와 그의 팬클럽으로 추정되는 무리는 그렇게 시끄러운 트럼펫 소리와 웃음소리를 달고 주차장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토미는 이미 주차장 사방에 굴러다니고 있는 구겨진 알렉스의 얼굴들을 조용히 훑어보다가, 포스터인지 설문지인지 모를 그것을 잘 접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빵, 하고 뒤에서 클락센이 울렸다. 토미는 짐을 돌아보지 않았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지난 일주일 간 루머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선 사람치곤 제법 무탈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린다의 복수도 없었고, 그녀의 무리들의 보복도 없었고, 알렉스의 무리는 돌아왔으며 수업은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밝고 사람들은 여전히 알렉스를 사랑했다.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린다와 헤어진 것은 유감이었으나 알렉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 사실 하나로 알렉스는 일련의 사건을 반으로 뚝 접어 뒤로 제쳐놓았다. 루머와 가십거리에 휩싸이는 건 이번만이 아니었으며 그는 그런 일들에 아주 익숙해서, 상처를 받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참이었다.

그는 지난 일주일 간 새로운 애인을 찾고 있었다.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연애를 삶의 필수요소처럼 취급했고, 외로움을 상쇄하고 정성을 투자할 특별한 단 한 사람을 가지는 것에 매순간 충실했다. 다행스럽게도 조물주는 알렉스에게 이런 성정을 불어넣으며 그가 비참해지지 않도록 한 가지 은혜를 내려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얼굴이었다. 잘생긴 얼굴. 아주 잘난 얼굴. 알렉스는 자신이 웃어줄 때 대다수의 인간들이 행복하게 미소를 돌려준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거울을 보는 일이 즐거웠고, 옷을 잘 차려입는 일이 보람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을 가질 수 있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 능력인지 알았고, 그 기적 같은 일이 모두 자신의 얼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믿었다. 유치원에서 초등학생, 초등학생에서 중학교, 그리고 다시 사립 링컨 스쿨로 이동하는 동안 알렉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인간들을 내치지 않고 기껍게 받아들였다. 세상은 그를 향한 사랑으로 넘쳐서 삶은 도무지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고, 원한다면 양 뺨에 입을 맞추거나 하룻밤을 보냈다. 남자, 여자, 혹은 둘 다거나 둘 다가 아니어도 좋았다. 알렉스를 사랑해준다면 그 역시도 충실히 그들에게 매진할 것이었다.

링컨 스쿨에서부턴 일이 다소 꼬이긴 했다. 유서 깊은 사립학교엔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 말은 즉 이 학교의 전교생이 가지는 종교, 가치관, 신념을 포함한 모든 특성이 켈리포니아주의 조그만 마을이 가지는 동일한 특질과 하나하나 구분되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인간의 것으로 구분된다는 뜻이었다. 알렉스는 난봉꾼이 되어있었고(사실, 그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여러 의미로 그는 난봉꾼이었다) 몇몇은 그들이 증오해 마땅한 존재를 알렉스가, 학교의 아이돌이자 모두의 우상처럼 여겨지는 그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고 입을 맞춘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그들은 알렉스가 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잘못된 인식을 학교에 퍼뜨릴 위험이 있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요컨대 그들은 암묵적으로 ‘호모’와 ‘정신병’을 가진 자들과 섹스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렉스는 그것을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좋다는데 굳이 밀어낼 필요가 있냐는 거야. 걔네가 누군들 어때? 날 좋아해주는 건 엄청난 일 아니야?”

그것은 진심이었다.

링컨 스쿨에 입학한 후 알렉스는 보란 듯이 애인을 갈아치웠다. 여자일 때도 있었고, 남자일 때도 있었고 혹은 둘 다거나 둘 다 아니기도 했다. 얼굴이 어떻던 인종이 어떻던 출신이 어떻던 상관하지 않았다. 입학한 지 일 년 즈음엔 알렉스를 증오하는 호모포비아들이 생겼고, 그들은 집단을 이루어 알렉스를 비난하거나 대놓고 악질적인 장난을 늘어놓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다 밀가루 계란 폭탄을 맞았을 땐 알렉스도 제법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는 그렇게 완전하고, 옹졸하고, 강건하며 근본도 없는 악의를 처음 맞닥뜨려본 셈이었다. 

“정말 이상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긴 하지만 그게 누굴 피해주거나 상처 입히는 일도 아니잖아?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다시 사랑을 주지. 그런데 걔넨 바로 그 이유로 나를 공격했어. 이때까지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당시 알렉스의 대충 서른 몇 번째 애인쯤 되던 제시가 그의 가슴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스. 정말 신기하다. 중학교에서 그런 사람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어?”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음, 글쎄. 기억에는 없는데.”

“넌 정말 운이 좋았구나.”

제시는 눈을 감았다.

“난 늘 근처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

“저런 놈들이 그렇게나 많단 말이야?”

“오, 알렉스, 그들은 어디에나 있어. 그래서 넌 정말 신기해. 보통 잘생긴 애들은 멍청하고 많은 걸 신경 쓰지 않거든.”

“나도 걸핏하면 멍청하다거나 깊게 생각하지 않는단 소릴 듣는데 말이야.”

알렉스는 히죽거렸다.

“단순함이 내 매력이라고도 했었는데.”

제시는 알렉스에게 다정하게 입을 맞춰주었다.

“맞아, 넌 멍청하고 단순해. 나는 그런 널 정말 사랑해.”

제시는 정확히 삼일 뒤에 알렉스와 깨졌다. 그러나 나쁜 결말은 아니었고, 그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위에서 보시다시피.

엄밀히 말하자면 그놈의 ‘포스터’는 바로 제시의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그녀는 알렉스가 진심으로 사랑에 마지않았던 린다 오스본이 호모포비아라는 것에 몹시 유감을 표했다. 그녀는 지난 한 달 간 알렉스가 얼마나 린다에게 정을 쏟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을 찾은 것 같다고’ 떠들어댔는지 지켜본 장본인으로서 알렉스의 상태를 몹시 걱정했다. 비록 알렉스는 깨진 당일 날에도 유쾌하고 쾌청한 웃음으로 학교 복도를 활보하긴 했지만, 그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게다가 린다와 싸운 일요일 날, 그는 전화도 받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박혀만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책상에 다리를 걸치며 “Hey, 제시."하고 그녀를 불렀을 때, 제시는 정말이지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알렉스의 뺨은 린다에게 얻어맞은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온통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알렉스! 네 꼴 좀 봐!”

알렉스는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좀 엉망이긴 하지.”

“알렉스! 너 괜찮니?”

“오, 난 괜찮아. 그냥 새 애인을 구할 생각에 들떠있었어.”

알렉스가 고개를 돌려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자, 제시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넌 정말 어이없고 이상해!”

“그게 바로 내 매력이지.”

“음, 린다의 일은 유감이야.”

“괜찮아, 내 잘못이 아닌 건 금방 잊어.”

“새 애인을 어떻게 찾을 건데? 또 고백이라도 받았어?”

“나 좋다고 해서 사귀고 깨진 애들만 꼽아도 벌써 이 학교의 삼분의 일일 걸.”

알렉스는 다소 과장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이제 나 좋다는 사람은 모조리 다 사귀어봐서, 새로운 스릴이 필요해. 아, 그렇다고 나한테 관심 없는 애들을 찍어보라는 말은 하지 마. 그건 이미 중학생 때 다 해봤다고!”

“정말 부풀리는 게 심각하구나.”

“어쩔 수 없지, 내 매력이 철철 넘쳐서 미소 한 방이면 모두가 돌아보는데. 한 번 찍으면 일주일도 안 되어서 빵, 하고 넘어온단 말이야.”

알렉스는 빵, 소리를 내며 양팔을 극적으로 들어올렸다. 제시는 몇 번 더 실소를 흘린 후 어설프게 덧붙였다.

“그럼 이번엔 아예 골탕을 먹이는 건 어때?”

“누구에게?”

“글쎄, 뭐. 린다 같은 애들?”

제시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였다.

“널 싫어하는 애들이라던가.”

“싫어하는 애들!”

알렉스는 크게 감명을 받은 얼굴이었다.

“오, 나쁘지 않네. 하긴, 난 만인의 알렉스니까, 그렇지? 그런데 날 싫어하는 애들을 무슨 수로 알아? 아, 물론 내게 밀가루 폭탄을 안겨준 걔넨 잊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좀 봐주라, 아무리 나라도 걔네한테 작업을 걸 긴 싫단 말이야, 동의하지?”

제시는 알렉스가 평소에 비해 다소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알렉스… 그냥 농담으로 던진 말이야, 너도 알잖아. 진지하게 받지 마. 널 싫어하는 애들한테 그럴 필요 없어.”

“오, 아니야. 좋은 시도 같아.”

알렉스는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일어났다. 제시는 그가 몹시 의욕적으로 보여서 당황했다.

“그런 멍청이들 말고, 좀 적당히,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서 날 싫어하는 사람이 좋겠어. 밀가루 폭탄을 던진 걔넨 날 싫어하는 이유가 내가 그 ‘알렉스’라서 라고 했잖아. 그런 이유를 어떻게 상쇄시켜? 내가 알렉스인데! 그런 거 말고, 좀 적당히 날 싫어하는 사람이 좋겠어.”

제시는 ‘적당히 싫어한다’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오, 그래. 그런데 그걸 어떻게… 구분할 건데?”

“글쎄! 생각 중인데, 음.”

알렉스는 산발적으로 다리를 구르며 창가를 서성였다. 지나치게 하이텐션이라 오히려 지극히 이상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오히려 몹시 불안해보이기도 했다. 제시는 그런 알렉스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알렉스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팔을 들어 올리고 박수를 쳤다.

“좋아! 아예 설문지를 돌리는 거야.”

“와!”

제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평소처럼 맞장구쳤다.

“괜찮은 생각이네!”

“그렇지?”

정직해지자면 제시는 그것이 재치 있긴 하나 다소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스가 한결 기분이 나아진 표정으로 제시를 돌아보자, 그녀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맞장구는 얼마든지 쳐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아예 네 멋진 사진도 붙이지 그래! 내가 네 인스타그램에서 한 장 뽑아줄게. 제일 코멘트를 많이 받은 게 좋겠어, 그렇지?”

“그리고 그 아래에 설문을 달아놓는 거지. 항목은 존나 좋아, 좋아, 그냥 그래, 싫어, 존나 싫어가 좋겠다.”

“최고야!”

그렇게 해서 일주일이 지난 수요일 아침, 링컨스쿨의 주차장 곳곳엔 바로 그 제시의 작품이 굴러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제시는 알렉스의 친구를 자청하고 있는 그의 무리(실상 절반은 알렉스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어쨌든 알렉스는 그들 역시 친구라 여겨주었다) 그리고 알렉스의 팬클럽과 함께 사방에 알렉스의 얼굴이 찍힌 그 흑백 포스터를 뿌리고 다녔다. 그녀는 그 날 아침 거의 서른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포스터를 지참시켜 주었는데, 토미는 그녀가 막무가내로 그것을 안겨준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날 점심, 알렉스가 모든 것에 심드렁해진 얼굴로 “이제 됐어.”라고 선언했다.

“뭐가?”

“이제 정말 괜찮아. 내 기분을 위해 내가 만든 억지스러운 쇼를 감내해줘서 고마워!”

“오.”

제시는 아직 남은 포스터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의 알렉스는 상큼한 웃음을 달고 제시를 향해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진을 고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알렉스의 그 사진은 정말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한 때 대다수의 여학생들이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시는 바로 그 무렵 알렉스와 진하게 연애를 했던 EX였다.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거야?”

“그냥 내 변덕으로 이 이상 네가 고생하는 게 보고 싶지 않아서야.”

알렉스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회수할 건지도 문제잖아? 난 여기 오는 동안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포스터를 수십 개는 본 것 같아. 설마 그걸 일일이 네가 주울 건 아니지, 제시?”

제시는 어깨를 으쓱하곤 두 팔을 벌렸다. 알렉스가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넌 정말 몇 안 되는 최고의 친구야.”

“당연하지.”

제시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몇 안 되지는 않아, 알렉스.”

 

점심 이후엔 두 반의 합동 수업이 있었다. 제시는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락커가 늘어선 복도를 지나다 말고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제시는 고개를 돌렸으나 얼굴을 보고도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오, 안녕.”

그녀가 인사하자,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 이거 언제 가져갈 거야?”

토미가 내민 것은 아침에 그녀가 막무가내로 배포한 알렉스의 설문지였다. 그제야 제시는 그가 누군지 불현 듯 떠올랐다. 그는 그녀가 주차장에서 만난 마지막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 너구나!”

제시는 활달하게 소식을 전했다.

“그거 버려도 좋아, 혹은 뒤집어서 필기하는데 쓰거나. 우린 그걸 회수하지 않기로 결정했어.”

“뭐?”

토미는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왜?”

“글쎄, 회수하기 어려워서?”

“그럼 애초에 왜 나한테 이걸 준 거야?”

토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제시는 조금 언짢아졌다.

“뭐,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그럼 이건 어떡해?”

“말했잖아, 버리거나, 음, 뭐, 다른 용도로 좋을 대로 쓰던가. 알아서 해!”

종이 쳤으므로 제시는 서둘러야 했다. 그녀는 인사도 없이-이번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복도를 가로질러 후문으로 사라졌다. 다소 구겨진-알렉스를 어떻게 생각 하세요?를 든 채 복도에 남겨진 토미는 재빨리 달려 나가는 제시의 뒷모습을 찡그린 채 응시하다가, 그녀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고개를 숙여 제 손에 들린 포스터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네 번 접힌 흔적이 남아있었고, 알렉스의 미소 부분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래엔 공중에서 펜을 사용한다고 제법 비뚜름하게 적은 자신의 글씨가 비고란에 쓰여 있었다. 토미는 미소가 우그러진 탓에 다소 묘하게 우울해 보이는 알렉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락카를 열어 그것을 책 사이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책을 챙긴 후, 요란스럽게 문을 닫고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합동 수업 크리켓에서 제시가 선두로 2점을 따고, 알렉스는 쪽지시험에서 반타작을 했으며, 토미는 과제 제출로 A를 받았다. 지루한 일상은 다음 날도 문제없이 이어졌다. 이번엔 크리켓에서 알렉스가 선두로 4점을 따고, 토미는 쪽지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으며, 제시는 과제 제출로 B를 받았다. 하루 간 정신없이 전교를 떠돌던 알렉스의 포스터는 그쯤엔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메모지, 휴지, 다트과녁과 저주대용, 종이비행기 등등…… 토미가 받은 포스터는 여전히 락카에 얌전히 박혀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그 무엇도 하지 않을 계획이었고, 분리수거가 있는 금요일에 폐지함에 가져가 버릴 생각이었다. 

어쨌든 토미 화이트헤드의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그는 목요일 내내 학교 곳곳에서 자신이 가장 싫어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물론 거기서 짐을 제외하자면 말이다. 짐은 모든 것의 예외였다-인간의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알렉스는 화장실 칸막이 안에도 붙어있었고, 세면대, 변기, 심지어는 전봇대와 책상, 복도 기둥 곳곳에도 붙어 있었다. 정원을 걷다 말고 오층에서 쏟아지는 종이비행기들을 맞은 적도 있는데, 카라 안으로 주둥이가 처박힌 종이비행기를 잡아 펼쳤던 토미는 짜증이 솟구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가 너무나 상큼한 웃음으로 토미를 향해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길 가도 알렉스, 저길 가도 알렉스라니. 저번 주엔 린다 오스본이 쉬지 않고 시끄럽게 굴더니, 이번 주엔 알렉스 스타일스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화장실 칸막이 알렉스, 세면대 알렉스, 다트 알렉스, 휴지 알렉스, 종이비행기 알렉스, 메모장 알렉스 따위를 지켜보고 있자니 알렉스 노이로제가 걸릴 판이었다. 신경질 난 토미가 책을 챙기기 위해 락카를 열었을 때, 바로 그곳엔 ‘토미 락카의 알렉스’가 

Boo!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다. 이제 토미는 정말 아무나 붙잡고 멱살을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짜증나…….’

그는 괜한 분풀이를 하듯 성의 없이 쌓인 책 위로 파일을 던졌다가, 중심을 잃고 쏟아진 책들 때문에 작게 신음을 뱉어냈다. 

“젠장.”

“오, 저런. 도와줄까?”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렸다.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입을 열면 그에게 괜히 신경질을 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토미는 주섬주섬 바닥을 쓸며 지리책과 문학책을 주워 무릎에 얹어놓았다. 파일철이 벌어져 사방에 레포트가 흩날리고 있었다. 토미가 무어라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질문한 소년은 무릎을 접고 바닥에 떨어진 그 레포트를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토미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소년은 대충 종이를 주워 파일철을 되돌려주었다. 

“고마워.”

토미는 고개를 들다 말고 뻣뻣하게 굳었다. 그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파일 철에 미쳐 쑤셔 넣지 못 한 종이 몇 개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그는 토미를 보지도 않고 파일철을 넘긴 뒤, 포스터 한 장을 쑥 빼서 눈으로 훑었다. 토미는 천천히, 최대한 침묵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설문지를 읽었다. 손도 대지 않은 항목은 깨끗하고, 시선은 곧장 마지막에 붙은 비고란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다소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럽게, 내용을 그렇게 쓴 사람치곤 꽤 길게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비고 : 이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는 거야?

 

“버릴 생각이었어.”

토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스는 여전히 뚫어져라 토미의 설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토미는 점점 닥치는 불길한 예감을 지우기 위해 애썼지만, 여전히 설문지에 시선을 박고 있는 알렉스의 입 꼬리가 벌어지자 마침내 모든 기대를 버리기로 작정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고 기분 좋게 웃었다.

“오, 안녕.”

알렉스는 덧붙였다.

“토미.”

토미는 알렉스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날 알아?”

“오, 당연히 알지. 토미 화이트헤드잖아. 지난주에 우리 대화도 하지 않았나?”

알렉스는 자신의 뺨을 가리키며 손을 휘저었다.

“주차장에서 말이야.”

“내 이름을 알아?”

“그건 당연하지. 넌 나랑 지난 학기에 거의 다섯 타임 정도 같은 수업을 들었거든? 오, 넌 내 이름 알아? 난…….”

“알렉스 스타일스.”

“아, 역시 난 유명해.”

알렉스는 자화자찬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토미는 빳빳하게 굳은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엄, 그래. 우선… 난 가볼게. 짐, 아니 아빠가 날 데리러 오는데, 슬슬 오셨을 거거든.”

“워, 잠깐만, 잠깐만.”

알렉스가 토미의 어깨를 붙잡았다. 토미는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왜?”

“너 완전 싫어한다. 내가 너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하곤 그대로 손목을 둘러 토미를 제 쪽으로 약하게 끌어당겼다. 딱딱하게 굳은 토미가 엉거주춤 딸려왔다. 

“나한테 왜 그래?”

토미가 기겁했다. 알렉스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예의 그 ‘잘생겼다’고 알려진 잔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고개를 기울였다.

“Hey, Tommy.”

토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렉스가 말했다.

“너 나랑 데이트 하자.”

 

gib22 : 걔가 데이트 신청하면 거절할 거야?  16:58

Tommy0612 : 절대 그럴 일 없어!  16:58

gib22 : 왜?  16:59

Tommy0612 : 걘 내가 누군지도 모르거든.  17:00

Tommy0612 :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고.  17:00

 

“…뭐라고?”

정말이지 토미는 그렇게 되물어볼 수밖엔 없었다. 

그럴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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