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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와 씨앗은 예로부터 번영과 가족의 상징이다. 씨를 뿌리는 것은 곧 성관계를 통한 새 생명의 탄생을, 피는 바로 그 혈통으로 이루어진 가문의 번영을 의미한다. 연극 <피와 씨앗>은 그런 의미에서 상징성이 다분한 극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작중의 피는 전혀 다른 의미로써 극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이작은 교도소 복역 도중 외출하여 극중의 무대공간으로 들어온다. 바로 소피아의 집이다. 소피아의 집에는 어텀과 바이올렛이 함께 살고 있다. 이성적이고 예의바른 소피아와 감정적이고 거친 바이올렛은 대조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어텀의 생명연장이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아이작의 장기가 필요하다. 극은 아이작의 장기기증을 바라는 두 여자와 그 행동의 정당성을 저울에 재고 있는 보호관찰관 버트의 입을 통해 직접적으로 주제를 전달한다. 바로 “희생”이다.



 신화와 신앙 속에는 반드시 희생이 등장한다. 신에게 바치는 재물은 번영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였다. 연극 <피와 씨앗>속의 밀알의 여신 역시 피를 요구한다. 밀짚인형에 피를 채워 넣으면 번영을 가져다준다는 주기도문은 섬뜩하지만 어디선가 들어봄직한, 어느 역사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 법한 보편적 신화의 이야기다. 그리고 이 희생의 구조는 연극의 인물들의 관계와 갈등 속으로 고스란히 내려온다. 어텀의 어머니 썸머의 죽음은 아이작의 실수와 치기 어린 호기심에 의한 참사였지만, 밀밭에 흩뿌려진 피는 출산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만들기 충분하다. 어텀은 썸머의 피, 즉 썸머의 희생을 통해 탄생한다. 썸머의 씨앗은 피와 함께 대지에 흩뿌려졌고, 어텀은 대를 이어 탄생한 2세, 번영이 될 그녀의 연장선이다. 그리고 이제 어텀은 아버지 아이작의 피, 즉 아이작의 희생을 필요로 한다. 소피아와 바이올렛은 마치 밀알의 여신에게 재물을 바치기 위해 짐승을 잡던 마을 사람들처럼 아이작의 목으로 칼을 들이댄다. 어텀은 마치 두 사람의 안녕과 번영을 가져다 줄 밀알의 여신과 같은 위치에 놓인 것처럼 보인다. 작중 무대 전면은 어텀의 링거대에 매달린 카메라의 화면 영상을 보여주는 스크린으로 활용되었는데, 이 때문에 객석은 마치 어텀이 아닌 제 3의 시점, 즉 보이지 않는 존재가 집을 걸어 다니는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마치 신의 시선처럼 말이다. 이 신의 시선은 병으로 몸부림치는 어텀, 증오에 사로잡힌 바이올렛, 여유를 잃어가는 초조한 소피아, 미래에 대한 희망과 끔찍한 죄책감 속에서 허덕이는 아이작, 그리고 이 세 사람을 관조하며 도덕적 저울을 재는 바트를 연달아 비춘다. 신이 원하는 것은 진정 희생일까?

 연극 <피와 씨앗>에 등장하는 주기도문에는 흥미로운 단어가 있다. 바로 “속죄”다. 밀알의 여신을 향한 기도에는 “피로서 속죄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연극 <피와 씨앗>속 희생은 번영을 위한 토대가 아니다. 희생으로서 속죄하는 것이다. 작중의 피는 “번영”이 아닌 “속죄”였던 것이다.

 무대에서 피가 직접적으로 등장한 것은 바이올렛이 양을 사냥한 이후부터다. 바이올렛은 비닐에 감싸인 양 시체를 무대 한쪽에 전시해놓곤 양동이에 핏물을 받는다. 다음 날 가족과 버트는 핏물로 물들어 분홍빛을 띤 죽을 나눠받지만 이 죽에 손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텀이 산통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어텀의 진실공방은 그녀를 마치 밀알의 여신, 희생으로써만 번영할 수 있으며 자신들을 구원할 존재로 상정하는 바이올렛과 소피아의 기대를 산산이 부순다. 어텀은 깊은 고통 속에서 삶의 의지를 포기한 한 인간 소녀일 뿐이며, 타인의 희생을 필요치도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이작의 장기기증은 희생이 될 수 없었다. 그것은 어텀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어텀은 이 사실을 아이작에게만 폭로함으로써 그에게 속죄의 길을 제시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아이작은 어텀에게 장기기증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그 순간 진정 어텀을 위한 희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속죄를 입증하듯 바이올렛이 뒤엎은 양동이의 피는 그를 가득 적신다.

 소피아는 병든 말 라일라를 수술할 시기를 놓치고, 바이올렛이 든 총에는 총탄이 없었으며, 심지어 강제로 아이작의 장기를 꺼내려는 두 사람의 이후 행보는 연출로 인해 보여 지지 않는다. 두 인물은 충분히 피와 접촉할 수 있었음에도 배제되어 있었다. 피의 테마가 희생이었더라면 수년 간 투병하는 어텀의 수발을 든 소피아와 바이올렛 역시 좋든 싫든 피와 접촉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피의 테마는 속죄였다. 그리고 작중 피와 직접적으로 접촉한 사람은 아이작 뿐이었다. 연극 <피와 씨앗>은 이런 연출을 통해 희생은 번영의 발판이 될 수 없으며 오로지 속죄로써만 힘을 발휘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 극의 제목이 <피의 번영>, 즉 <피의 씨앗>이 아닌 <피와 씨앗>인 이유는 다름 아닌 여기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우리의 신이 진정 원하던 “희생”이란 이웃과 짐승, 즉 외부세계의 피가 아닌 우리 내면의 피, 요컨대 속죄가 아니었을까. ■ 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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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극 <엘렉트라>를 관통하는 주제는 복수다. 작중 주요 인물로 등장하는 엘렉트라, 클리탐네스트라, 아이기스토스와 오레스테스, 크리소테미스 모두는 이 복수라는 욕망 하에 움직인다. 이 극의 원본이라 할 수 있는 신화 속 엘렉트라와 그녀의 남동생 오레스테스가 결국 복수에 성공하고, 심지어는 그 죄를 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미루어볼 때, 연극 <엘렉트라>의 인물 중 그 누구도 복수에 성공하지 않는다는 각색 방향은 이 극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짐작케 한다.

 <엘렉트라>의 주요 인물들은 모두 각자의 당위를 가지고 복수를 정당화하고 있다. 복수가 그들에겐 곧 정의 혹은 행동방향의 지표가 된다. 그러나 그들의 복수극은 전쟁으로 무너진 성전 아래, 즉 이미 정의가 무너진 공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모순을 피할 수 없다. 엘렉트라와 그녀의 형제자매들의 정의가 더 이상 정의가 아닌 그 무엇, 일종의 광기로까지 비춰지는 건 바로 이 이유 때문일 것이다. 성전이란 단순히 신을 모시는 공간이 아니라, 사람들의 소망과 염원을 기원하는 공간이다. 이 때, 엘렉트라와 형제자매들이 몸을 의탁하는 성전의 잔해 아래는 복수를 성공시킴으로써 정의를 실현하고 마음의 평화를 찾길 기원하는 그들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을 위탁할 수 있는 안정과 평화의 공간은 이미 전쟁 때문에 파괴되었으며, 이 전쟁은 다름 아닌 엘렉트라의 복수로부터 기인한 비극이다. 요컨대 그들은 정의를 찾기 위해 그들의 공간을 스스로 파괴한 꼴이 된 것이다. 엘렉트라와 형제자매들의 몰락은 이미 막이 올랐을 때부터 암시되어 있던 거나 다름없다. 게다가 엘렉트라는 자신의 성전을 찾기 위하여 만인의 성전을 파괴했다는 점에서, 이미 복수의 정당성을 박탈당한지 오래다. 작중 엘렉트라가 부추겨 전쟁에 투입된 민간인들이 학살당했다는 언급이 등장하는 것은 결코 이 성전의 의미와 다르지 않다. 엘렉트라가 무너뜨린 성전은 무고한 이들의 평화의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무너진 성전의 잔해는 희생자들의 시체를 연상케 한다. 엘렉트라는 그들의 시체를 밟고 복수와 정의를 외치고 있었다. 몰락할 수밖에 없다. 그녀가 외치던 것은 더 이상 정의가 아니었다.

 이 극의 흥미로운 지점은 복수의 대상이 되었던 클리탐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의 발화 내용이다. 작중 프로타고니스트인 엘렉트라의 발화는 격양되어 있고, 무조건적인 정의를 외치고, 자신의 욕망을 부르짖는다. 그녀는 자신의 정의가 정의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가정조차 하지 않는다. 죄를 죄라고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반면 그녀의 안타고니스트인 클리탐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자신의 죄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자신의 죄 이전에 누군가의 죄가 존재했기에 자신은 신으로부터 사함을 받았거나, 혹은 그것이 정당했다고 주장한다. 정당화와 정의는 다른데, 그들은 자신들이 이루어 마땅한 짓을 저질렀다고 발화하기는 하나 그것을 정의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엘렉트라의 복수극 역시 죄라는 것을 꼬집고, 그녀의 복수극이 진행되는 공간이 다름 아닌 무너진 성전임을 거듭 엘렉트라에게 환기시킨다. 그들은 엘렉트라의 복수를 가로막는 게 아닌, 그녀의 복수가 정의가 아님을 폭로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안타고니스트가 된다. 엘렉트라의 욕망은 궁극적으로 정의를 수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엘렉트라와 대척점에 있던 이 두 인물이 신을 믿었다는 점이다. 엘렉트라의 어머니 클리탐네스트라는 아가멤논의 복수를 신들에게 사함 받았다고 언급하며, 클리탐네스트라의 연인 아이기스토스는 엘렉트라에게 신의 징벌을 운운한다. 반면 엘렉트라는 신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징벌한다”는 요지의 답변을 내놓을 뿐이다. 그러나 이 차이점이 그들의 생사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신을 믿은 클리탐네스트라와 아이기스토스는 무너진 성전에 끌려와 죽임을 당하고, 신을 믿지 않고 성전을 파괴한 엘렉트라는 알 수 없는 외부의 폭력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때문이다. 이 때, 무너진 성전은 누군가의 죄를 사하거나 징벌할 수 있는 절대적인 존재의 부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극이 현대로 각색되었다는 점 역시 주목하고 싶은데, 나는 엘렉트라가 알 수 없는 외부의 적에 의해 살해당하는 결말방향이 바로 이 신의 부재, 혹은 신의 대체를 암시하고 있다고 느꼈다. 개개인의 복수를 무력화하는 절대적 힘, 요컨대 신의 권력이 다름 아닌 사회, 혹은 그보다 더 거대한 외부적인 흐름, 그 흐름 속에서 발생하는 비극이라는 것임을 말이다. 이 때, 작중 무너진 성전은 평화의 공간이 파괴되었다는 관념적인 의미와 동시에 신의 공간이 파괴됨으로써 신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직관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성전은 우리에게 두 가지 질문을 남긴다. 희생이 수반된 복수란 정당한가? 그리고 우리의 삶을 궁극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오늘 날의 권력이란 과연 무엇인가?(작중 소년병으로 추측되는 워커의 존재는 이 두 개의 질문을 동시에 던지는 유일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작중 굳이 워커를 각색하여 집어넣은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이 두 가지의 질문은 궁극적으로 연극 <엘렉트라>가 말하고자 하는, “복수의 무의미함”을 더욱 강화시키게 된다. 개인적으로 복수에 냉소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는 극으로 느껴졌는데, 그를 위해 가장 고전적인 복수의 원형을 가지고 왔다는 점에서 아이러니와 흥미를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캄캄한 조명, 암울한 전쟁의 분위기, 등장인물 간의 쟁쟁한 대립과 설전이 쉴 틈 없이 진행되는 극의 전체적 분위기가 내게 무척 피로하게 다가왔던 것도 사실이다. 여러모로 기진맥진하게 만드는 극이었다. 그러나 고전적인 논쟁 중 하나인 “복수는 정당화 될 수 있는가/복수는 정의실현의 수단으로 이용될 수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는 점에서 이 극의 고전성이 원본과 아주 동떨어져 있지는 않다고 느껴진다. 그리고 작가는 결국 “그렇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미 성전을 파괴했던 것이다. ■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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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는 2층 다세대 주택으로 꾸며져 있었다. 1층은 세 개의 방으로, 2층은 옥상으로 사용되었다. 1층과 무대바닥 사이에는 반 지하로 보이는 좁은 틈이 존재했다. 그곳에 무수한 빈 의자가 빼곡하게 들어차있었다. 의자들은 옥상에도 있었다. <옥상밭 고추는 왜>의 무대에는 널브러진 의자들이 곳곳에 널려있었다.

 이 극의 메인플롯은 304호의 광자 아줌마가 가꾸던 옥상 밭의 고추를, 201호의 현지 아줌마가 무차별적으로 수확하면서 벌어지는 갈등상황으로부터 시작된다. 현지 아줌마의 땅을 빌려 농사한 고추였으므로 광자 아줌마는 현지 아줌마는 물론이고 주택 이웃들에게도 이 고추를 나누어주고 있던 상태였다. 그러나 현지 아줌마가 한 마디의 양해도 없이 이 고추들을 한 바구니 가득 따기 시작하면서부터 고추는 이웃 간의 정과 호의가 아닌, “나의 것을 빌려 만든 것이므로 언제든 내가 탈환할 수 있는 것”, 요컨대 오로지 소유자가 소유권을 행사하는데 쓰는 소유물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존재로 전략하고 만다. 광자 아줌마의 삶의 행복이 되어주었던 옥상 밭의 고추들은 그렇게 그녀가 하루하루 구축한 의미망을 상실한 채 세속화된다. 극의 주제는 이때부터 명확해지는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다일까?

 그러나 <옥상밭 고추는 왜>의 주제는 한 가지로 정의될 수가 없다. 각종 사회문제와 현 우리 세태, 하루하루 급변하는 시대의 모습들은 다세대 주택이라는 한정된 공간의 광자 아주머니가 돌보던 “옥상밭의 고추들”로 축소되어 관객 앞에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극에서 관객들은 청년과 기성세대 간의 갈등, 빌라촌의 재개발(젠트리피케이션), 좌우파의 정치적 모순, 사이버 신상 털이와 주택 간의 소음공해, 주차 공간 부족으로 인한 이웃 간 갈등과 같은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들과 마주할 수 있다.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옥상밭 고추는 왜>가 이 모든 문제 상황을 제시할 뿐 그 어떤 정답과 문제해결의 실마리도 제공해주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중 현태와 현지 아줌마를 비롯한 모든 인물들에겐 각자의 욕망과 현재 그들을 만든 개인적인 사정이 존재한다. 따라서 그들 누구도 절대적인 악인이나 선인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혈압으로 쓰러진 광자 아줌마를 적극적으로 돕고자 하는 현태는 평소 현지 아줌마와 소소한 갈등을 빚었던 인물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변변한 직업이 없어 촬영장을 비정기적으로 드나들어야만 하는 개인적 고난이 존재한다. 그는 광자 아줌마에 대한 사과를 받아내겠다며 정의를 외치지만 그것이 정말 정의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현지 아줌마에 대한 복수심과 자신이 처한 지리멸렬한 상황으로부터 기인한 자기혐오감에서 비롯된 것인지 관객들은 알 도리가 없다. 현지 아줌마 역시 절대적 악인으로 그려지지는 않는다. 그녀는 야간 학교를 나온 여성 노동자로 대한민국의 IMF 극복에 자신이 기여한 바가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밥벌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치열한 인생을 살아온 그녀는 현재 부동산 투기와 중계로 돈을 벌고 있는 자신의 상황을 전부 자신의 노력으로 일궈낸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관객들은 그녀의 삶이 필연적으로 외부세계와 단절될 수밖에 없으며, 그 삶이 다름 아닌 대한민국의 급박한 경제상황이 배출한, 우리 주변의 “누군가들”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현지 아줌마의 타인에 대한 무관심은 필연적 무지와 생존의 태도로부터 기인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절대적 악을 지닌 자가 아니며, 사회가 낳은 무수한 인물 중 하나일 뿐이다.



 작중 현지 아줌마로부터 사과를 받아내기 위한 현태의 싸움은 갈수록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광자 아줌마는 장면이 전환될 때마다 인물 간의 새로운 갈등구조 속에서 잊혀 진다. 마침내 광자 아줌마는 별세하고, 상황은 엉거주춤 버려진 채 일부만 수습될 뿐이다. 현태는 현지 아줌마가 아끼는 반려견 하니를 도둑질하여 현지 아줌마를 광자 아줌마와 똑같은 상황에 놓이도록 유도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사과를 받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현지 아줌마는 자신이 광자 아줌마의 고추가 가지는 의미망을 어떻게 탈환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한 인물이다. 현태는 결국 그녀로부터 하니를 탈환함으로써 사과를 받는데 성공하지만, 그도 물론이고 관객들 역시 씁쓸함에서 벗어나지는 못 한다. 현태는 광자 아줌마의 가족이었던 개를 “강요하기 위해 필요한 도구”로 전략시켰던 것이다. 현태는 광자 아줌마가 가진 의미망을 파괴시킨 현지 아줌마의 반성을 위해 현지 아줌마의 의미망을 파괴했다. 결국 그 의미망을 잃은 하니는 풀밭에 놓여 자유의 몸이 되고, 옥상 밭의 고추들은 현지 아줌마의 엉성한 사과로 인하여 그 무엇의 의미도 가지지 못 하고 진딧물로 인해 죽게 된다.

 이렇게 보면, 무대 곳곳에 널려있던 의자들은 최초의 의미망을 잃고 세상 속에서 죽거나 버려지거나 잊혀진 것들을 대신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사회의 문제는 이렇듯 개개인의 상황과 사연 속에서, 그들이 가진 애정의 의미망들을 파괴하거나 탈환한다. 우리의 주변이 삭막해지는 건 바로 이 의미망을 상실한 자들의 빈자리가 늘어나기 때문이며, 동시에 우리가 그것들을 잊어버리기 때문일 것이다. 작중 현태가 울분을 토하며 내뱉은 대사, “엄마, 진짜 모르겠어? 세상이 왜 망가지는지. 그런 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니까 세상이 점점 더 이렇게 되는 거야.”에 주목하게 되는 것 역시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작가의 목소리는 현태의 입을 빌려 우리에게 전달된다. 사소하고 작은 이유는 사실 우리 주변을 파괴하는 어떤 거대한 시대적 흐름과 별반 다를 게 없으며, 개인의 존재(의미)는 이 두 가지 상황 전부에 의해 말살당할 수 있다는 것. 무대가 막을 내린 뒤에도 관객들이 찝찝하고 갑갑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이 극이 “그 잃어버린 존재들을 상기시킬 뿐 수복할 기회는 제공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들은 단지 주인 없이 넘어진 무수한 의자들을 마주할 수 있을 뿐이며, 그들이 살면서 지나쳐오거나 혹은 스스로 압사시킨 누군가들의 의미망을 곱씹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하지만, 이 극이 마땅한 문제해결 방법을 내놓지 않은 것은, 이 문제의 해결방법을 찾을 수 없던 작가적 상상력의 한계 때문이 아니다. 문제는 해결되었을 때 잊혀지기 때문이다. 작가는 소실된 의미망들을, 잊혀진 개개인의 존재를 거듭하여 보여주기 위하여 이 모든 문제를 그저 문제의 상태로 내버려두었다. 무대 곳곳에 버려진 의자들은 그 의지를 그대로 반영한다. 그 의자들이, 마땅한 용도가 없어 의미 없이 무대에 배치되어 있는 상태 그 자체 역시 상징적이다. 따라서 우리는 <옥상밭 고추는 왜>가 가지는 불편함이 곧 극이 아닌 우리의 세계에 내제된 문제로부터 기인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한 번 씩은 반드시 곱씹어봐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언젠가 지나치거나 삭제했던 누군가의 빈 의자들이, 어쩌면 우리 자신의 의자일지도 모를 그 의자들이 부표처럼 떠오른다. 언젠가 잊어버릴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된다. ■ 18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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