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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노이어 입성»
1차/old 2019. 10. 22. 15:56

 헤일리가 바르바라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지나가던 메이지가 장작을 던져 불꽃을 살려주었다. 바르바라는 어두컴컴한 풍경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려 메이지를 바라보았다. 메이지의 뒤에는 이반이 서있었다. 

 “고마워. 산책 가니?” 

 “응, 근처를 둘러보다 올 생각이야.” 

 “다녀오렴.” 

 두 사람은 멀어졌고 바르바라는 다시 밤하늘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따금 무릎 위로 헤일리의 머리카락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바르바라는 손가락을 뻗어 제자의 머리카락을 조용히 쓸어주었다. 

 바르바라는 노이어 영지에 대한 이야기들, 어둠과 괴담, 축축하고 음침한 성질에 대해 고민하고 또 고민하면서 주변이 밝아진 것도 모르고 캄캄한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다가 마침내 어느 지점에서 멈췄다. 나무 근처에 길리언이 기대어 앉았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생각과 상상의 지점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오다 말고 주변이 아까보다 밝고 따뜻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길리언과 눈이 마주치자 표정이 저절로 부드러워졌다. 모닥불의 불꽃이 살아났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바르바라는 주변의 빛을 몰고 온 게 길리언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정말 그럴 지도 모르는 일이다. 

 세 사람은 모닥불 앞에서 몸을 녹이느라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장작 불씨가 탁,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헤일리는 옅은 잠에 빠져서 숨소리가 느리고 규칙적으로 변했고, 길리언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길리언이 느닷없이 번쩍 고개를 들고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아!” 

 바르바라는 동시에 세 가지 일을 했다. 손으로는 헤일리의 눈 위를 가렸고, 입으로는 쉿, 소리를 냈으며, 시선으로는 길리언의 안색을 살폈다. 

 “왜 그러니?” 

 “무슨 소리 안 들렸어요?” 

 “소리?” 

 길리언은 손등으로 왼쪽 귀를 문질렀다. 

 “누가 옆에서 웃으면서…,” 

 “피곤하니? 너도 쉬어야겠구나.”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손등에 남은 불똥 자국을 응시하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바르바라와 시선이 마주친 길리언이 머쓱하게 손을 내렸다. 

 “……그쵸.” 

 “그래, 눈 좀 붙이렴.” 

 바르바라가 눈짓했다. 

 “이리오렴, 무릎이 남았단다.” 

 그래서 마침내 길리언도 바르바라의 곁에 앉았다. 하지만 길리언은 바르바라의 무릎을 베는 대신 바르바라의 다리에 기대는 쪽을 택했고, 결론적으로 그녀는 자신의 두 제자를 무릎과 옆구리에 두고 있는 모양새가 되었다. 주변은 다시 조용해졌다. 바르바라는 이따금 한 손으로는 헤일리의 머리카락을, 다른 한손으로는 길리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면서 침묵을 지켰다. 생각에 잠기기도 했지만 오래 가지 않았다. 모닥불에서 불씨가 탁, 하고 솟구칠 때마다 상념이 끊어져버렸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바르바라는 길리언이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제자의 피로하고 불안한 몸뚱이가 느껴졌다. 무겁거나 가볍지 않고… 그러나 사라져서는 안 되는 무게들도 있다. 

 문득 길리언이 깜짝 놀라던 순간이 떠올랐다. 바르바라는 (믿지는 않지만 그럼에도)자신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노이어 영지의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하늘이 어두컴컴해지자 어느 것이 숲이고 어느 것이 하늘인지가 불분명했다. 음침하고 황량해보였고 무엇이든 존재할 것처럼 느껴졌으나 그곳에 웃는 얼굴은 없었다. 바르바라는 작게 웃으며 다시 모닥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는 주문처럼 속삭였다. 

 “만약 곁에 있다면 내 귀에 바람을 불어주렴.” 

 주변은 조용했다. 바르바라는 헤일리의 머리카락을 쓸어주면서 작게 자장가를 흥얼거렸다. 바르바라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이곳은 노이어의 땅이었으므로. 바르바라는 괴담의 온상지가 가지는 힘이 제대로 발휘되기를 기대했다. 

 바람조차 불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잠시 먼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가 마차에서 오즈월드가 내리는 것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의 두 제자를 부드럽게 흔들어 깨웠다. 

 “일어날 시간이 된 것 같구나. 편한 곳으로 가자.” 

 헤일리와 길리언이 잠이 덜 깬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헤일리는 기지개를 켰고 길리언은 하품을 했다. 바르바라는 두 제자의 머리통을 가볍게 끌어안아주고는 치마를 털면서 일어났다. 오즈월드가 세 사람을 보았다. 세 사람은 서두르지 않고 오즈월드 쪽으로 걸었다. 오즈월드는 그들을 성 안쪽으로 보냈다. 

 “노이어 경이 잠자리를 마련해주셨어. 고마운 일이지.” 

 오즈월드가 말했다. 

 “그래, 이곳은 우리의 잠자리가 아닌가보구나. 우리가 방해한 걸지도 모르겠어.”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성문 안으로 완전히 들어서기 전, 바르바라는 두 제자(특히 길리언)의 코트 상태를 보고는 노이어에서 외투를 얻을 수 있는지 물어보자고 말했다. 사실 바르바라의 옷 상태도 썩 좋지는 않았다. 선써드의 대다수가 간밤의 화재로 그을린 옷을 입고 있었다. 멀리서 보았더라면 모닥불 위를 구르고 온 사람들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런 후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손등을 붙잡았고, 두 제자가 무언가를 눈치 채기도 전에 재빨리 그것을 해결했다. 가벼운 마법. 그리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길리언의 손등을 놓고는 희미하게 웃으며 두 제자를 안으로 물렸다. 

 “먼저 들어가렴.” 

 바로 그 때 느닷없이 거센 바람이 불었다. 금발이 사방으로 나부끼면서 바르바라의 얼굴을 할퀴고 지나갔다. 바람이 자꾸만 바르바라의 등을 성안으로 떠밀었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리며 뒤를 돌았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바람이 멎더니 공기가 잠잠해졌다. 주변은 금세 고요해졌고 밤하늘에는 별이 반짝였다. 멀리서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메이지와 이반의 실루엣이 보였다. 꿈이라도 꾼 것 같은 얼굴로 바르바라가 움직이는 두 실루엣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공기가 서늘해졌다. 바로 다음 순간, 누군가 바르바라의 귓가에 후, 하고 바람을 불었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는 있었다. 

 바르바라는 귓가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아, 이런 곳에서 자랐단 말이지.” 

 과연, 켈커스 출신도 아니면서 그렇게나 적응이 빠르더라니. 룬넨마을에도 유령과 괴물은 있다. 혹은 그 무엇도 아닌 것들 역시 차고 넘친다. 황량하고 메마른 땅에서는 무엇이든 자라고 죽는다. 바르바라는 노이어에 도사리고 있는 무형의 것들을 어쩔 수 없이 감지해냈으나 의식적으로 털어내곤 몸을 돌렸다. 등 뒤로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는 천천히 복도를 가로질러 노이어에 입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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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최초 마법 사용»
1차/old 2019. 10. 22. 15:55

 뽑기 운이 나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바르바라는 밖으로 나가는 대신 마차에 걸터앉은 채로 손등을 매만지며 주변의 소리를 들었다. 나무 조각들이 통 안에서 부딪치며 흩어지는 소리가 끝나면 누군가가 운을 시험하기 위해 그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고, 바르바라는 그 뒤에 터지는 탄성 혹은 신음으로 선써드의 희비를 감지했다. 정말로 운이 나빴던 모양이다. 이브리얼의 기사가 좀 더 기다려야겠다며 돌아가 버렸기 때문이다. 단원들이 근심어린 몇 마디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는 동료들이 마차로 돌아오기 전에 고개를 들어 주변을 한 번 훑어보고는, 오른손 손바닥을 넓게 펼쳐서 왼손의 손등을 덮었다. 간밤의 화재를 진압하는 도중 마차에 올랐다가 데인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따끔거리는 통증이 가실 때까지 손바닥으로 새빨갛게 물든 피부를 누르고 있다가, 천천히 숨을 고르며 손가락을 움츠렸다. 바로 다음 순간 아주 희미한 빛 무리가 손바닥 안에서 샘솟더니 그 아래에 짓눌린 상처를 재빠르게 핥고 지나갔다. 바르바라는 손을 떼어내고 고개를 기울여 손등을 살폈다. 화상이 사라져 있었다. 거짓말처럼 말끔했다. 바르바라는 ‘거짓말처럼’을 올바르게 고쳤다. ‘마법처럼.’ 아니다, ‘마법으로.’가 좋겠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몸을 손끝으로 더듬어 무언가 문제가 생기진 않았는지를 예리하게 살폈지만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고 아무 위기도 찾아오지 않았다. 마법이 직전의 일을 위해 바르바라의 무엇을 가져가거나 훼손했는지를 파악할 수 없었다. 바르바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차에 올라오려는 세실을 발견하곤 느리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떻게 됐니.” 

 결과를 알면서도 묻자 세실이 어깨를 으쓱이며 “안 됐어요,”라고 대답했다. 

 “그럼 기다리는 수밖엔 없겠구나.” 

 그런 후 바르바라는 아무런 흔적도 남지 않은 손을 내밀어 세실을 마차 위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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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타이틀 매치»
1차/old 2019. 10. 22. 15:54

 바람이 거세게 불던 날 바르바라는 자신의 방을 완전히 정리했다. 오즈월드와 함께 집무실을 빠져나온 직후의 일이었다. 이전부터 대부분의 것을 치워놓고 있었으므로 정돈할 물품은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내일이면 마차에 올라야한다. 그녀는 간만에 집으로 돌아갔고 짐은 하나도 챙기지 않았다. 

 마리사 체사레는 바르바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문간에 선 그녀는 바르바라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안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저녁이 준비되어 있었다. 생선요리였다. 두 사람은 하얀 뱃살을 썰며 가벼운 대화를 나누고, 식사를 끝낸 후에는 커튼을 치고 불을 밝혔다. 그러고는 소파에 앉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이 마를 때에는 와인을 조금 마시고, 입이 심심할 땐 치즈를 잘라서 먹었다. 두 사람 모두 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 ‘지금은 아직’이라는 것처럼 미루었다. 마리사는 미래의 이야기보다는 과거의 이야기를 했다. 주로 바르바라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리사는 마치 강의 물결 반대편으로 손을 뻗어, 그 안에 들어있는 반들반들한 조약돌을 매만지는 것처럼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건져 올렸다. 바르바라는 조용히 들으며 가끔씩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머니. 기억하고 있어요. 그 때의 저는 서툴렀죠. 하지만 지금은 너무 나이를 먹었군요. 네, 그러니까 저는 충분히 나이를 먹은 셈이죠. 

 마리사는 타지아에 대한 이야기도 했고, 이름이 너무 길어서 기억하지 않았던 돈 없는 붉은 머리의 귀족소년 이야기도 했고, 라일라 이모의 이야기도 했고, 써드빌에 정착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만났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것처럼 내일 떠나기 전에 반드시 마나 집안에 들러서 인사를 하고 가라고 명령했다.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요.” 

 “그리고 알렉스에게도 안부를 전하렴.” 

 마리사가 분명한 어조로 강조했다. 

 “돌아와서 다행이라는 이야기도 전하렴.” 

 “네, 어머니. 그렇게 할게요.” 

 그런 후 두 사람은 다시 과거의 이야기를 했고, 늦은 밤이 오자 잠을 자러 각자의 방으로 들어갔다. 새벽에 마리사는 바르바라를 문간에서 배웅하며 가볍게 끌어안았다. 왜 헤어지거나 재회하는 이들은 반드시 바르바라를 껴안는 것일까. 바르바라는 마리사를 마주 안았고, 잘 다녀오겠다고 속삭였다. 두 모녀는 잠시 문간에서 서로를 껴안은 채 서 있다가 천천히 물러났다. 

 “네가 훔칠 수 없는 게 있다는 걸 명심해라. 나이가 들었으니 너도 알겠지.” 

 마리사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죽음을 훔칠 수는 있어도 생명을 훔칠 수는 없단다. 명심하렴, 난나.” 

 바르바라는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오, 어머니. 체사레가 키운 도둑은 자만하지 않아요.” 

 “알고 있다.” 

 “네, 저 역시 알고 있어요.” 

 그런 후 바르바라는 그녀에게 잘 쓰던 머리끈을 남기고 현관을 빠져나왔다. 

 바르바라는 선루스 기사단으로 향하기 전에 약속대로 마나 집안을 들러서 인사를 나누었고, 간단한 인사와 선물을 받았다. 육포였다. ‘그럼 리온도 가지고 있겠구나.’ 바르바라는 주머니에 그것들을 챙겨 넣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걸어가는 길에도 마주치는 주민들마다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 모두가 바르바라에게 안부를 물었다. 잘 지내고 있는 거냐고 물었고, 잘 지내라고 인사했다. 그녀를 가볍게 껴안아주는 이도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들을 이해했다. 이곳의 모두가 그녀와 십 년이 넘는 세월을 알고 지냈다. 바르바라는 돌아오겠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약속을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진심으로 인사했다. 고맙다고 말했다.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할 자신이 있었다. 

 기사단으로 돌아온 바르바라는 마차에 오르기 전에 써드빌의 바다를 한 번 바라보았다. 때마침 바람이 불어서 머리 위의 천막이 마구 흔들렸다. 바르바라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면서 마차에 걸터앉았다. 오즈월드가 바르바라에게 다리를 제대로 집어넣으라고 말했다. 곧 출발할 거니까 말이야. 바르바라는 대답 대신 주머니에서 육포를 꺼내 내밀었다. 그러고는 웃었다. 

 “먹어.” 

 “과일인가?” 

 오즈월드가 육포 한 조각을 받아 입에 털어 넣었다. 바르바라도 육포를 입안에 집어넣고 씹었다. 조금 질기고 짭조름하지만 간이 잘 배였다.  

 오즈월드는 육포를 맛보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고기군.” 

 “맞아.” 

 바르바라가 다리를 흔들거리며 대답했다. 

 “받은 거란다.” 

 조금 뒤에 마차가 흔들거리기 시작했으므로 바르바라는 다리를 집어넣었다. 써드빌의 바다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 상징적으로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육포를 씹으며 멀어지거나 작아지는 그 풍경들을, 한없이 가까웠으나 지금 당장은 멀어지고 마는 그 영지를 지켜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2018/0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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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바라는 연이어 마차에서 뛰어내리다 말고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순간적으로 휘청거렸다. 발바닥 아래에서 서리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익숙하게 중심을 잡으며 반사적으로 칼을 빼들자, 오즈의 검날이 먼저 눈앞에서 번쩍였다. 그들 앞으로 늑대 한 마리가 캥캥거리다 말고 쓰러졌다. 오즈가 베어 죽인 것이다. 

 “늑대 밥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가는 길이 몹시 순탄해.” 

 “짐승 밥이 되는 건 사양이야, 오즈.” 

 바르바라는 검을 고쳐 쥐고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횃불은 바람에 따라 일렁였고 어둠은 여전히 주변에 도사리고 있었다. 무수한 몇 쌍의 눈들… 굶주린 들짐승의 것이다. 골치 아프게 됐네, 가엾은 것들. 바르바라는 마차를 둘러싼 늑대무리의 수를 세어보다 그만두었다. 

 “난 뒤쪽으로 갈게. 아예 작정하고 둘러싼 모양이지.” 

 “발밑을 조심해.” 

 “오, 오즈. 켈커스에서 온 사기꾼은 덫을 밟지도 서리에 넘어지지도 않는단다.” 

 그런 후 바르바라는 마차 뒤쪽으로 빠졌다. 그러고는 말에게 덤벼드는 늑대를 향해 매섭게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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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차에 묶인 말들이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날카롭게 찌르는 소리의 휘파람을 내면서 한 마리의 고삐를 붙잡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말이 헐떡일 때 피어오르는 입김과 연거푸 부풀어 올랐다 줄어드는 갈색 가죽이 잘 보였다. 말의 불안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말의 힘에 밀려 고삐를 한 번 놓쳤다가, 아예 고삐를 손에 친친 감고 다시 휘파람을 불었다. 

 켈커스에 봄이 찾아오면 룬넨마을의 상인들은 서리를 밟고 마차를 몰아 산을 넘었다. 바르바라는 여관 지붕에 앉아 그들이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것을 지켜보고는 했다. 가끔 말들은 눈과 서리에 미끄러져 휘청거리거나 숲속에서 들려오는 들짐승의 울음소리를 듣고 불안에 떨며 멈추어 섰다. 그럴 때면 마부들이 휘파람을 불었다. 높고 찌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 말들은 처음에는 그 소리에 저항했는데, 결국은 순응하고 멈추어 섰고 마침내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기억해내곤 마차를 끌게 되었다. 

 바르바라는 그 장면을 흉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말이 길게 울부짖으며 다리를 휘젓다 말고 천천히 푸르륵 숨을 토해냈다. 바르바라는 휘파람을 멈췄다. 그러고는 칭찬을 해주듯 말의 콧잔등을 쓸었다. 문득 주변이 조금 춥다고 생각했다. 늑대들이 되돌아올까.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에서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바르바라는 뒤를 돌았다가 이반이 마부석에 오르려다 미끄러지는 것, 메이지가 그와 대화를 나누다 선뜻 마부석에 오르는 것을 보았다. 바르바라는 메이지의 옆모습을 잠시 응시하가 고개를 돌렸다. 

 “다리 조심하렴.” 

 바르바라는 마차로 돌아가는 이반을 앞지르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춤을 다리 한 짝으로만 출 순 없잖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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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련장으로 가시덤불의 율이 올라왔다. 그녀는 올라오자마자 주변의 호응을 유도하면서 분위기를 몰았다. 가시덤불은 적대적인 사기를 숨길 마음이 없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대련장 아래에서 오즈의 말을 되뇌어보았다. 

 ‘일 늘리지 말고 적당히.’ 

 귀찮은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바라는 대련장에 올라가기 전에 검을 시험 삼아 뽑아보고는, 도로 집어넣고 목검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얼른 올라오라고 부추기는 박수세례가 시작되었지만 손쉽게 무시했다. 

 바르바라는 마침내 나무통에서 목검 하나를 골라 뽑아냈다. 

 대련장으로 올라오자 박수소리가 멈추고 시선이 집중되었다. 율의 뒤편으로 보이는 가시덤불 무리를 훑어보던 바르바라가 생각을 고쳤다. 굶주린 늑대 떼와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적군의 칼날보다는 저들을 상대하는 편이 낫다. 복잡한 일보다는 귀찮은 일을 수행하는 편이 지금의 시국에서는 훨씬 이로운 법. 사실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이야말로 귀찮음과 맞서는데 익숙한 자들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자 목검을 쥔 손에 적당히 힘이 빠지면서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율이 옆으로 움직였다. 거리를 유지하며 바르바라의 기색을 탐색하는 것처럼 시선을 훑었다. 바르바라는 제자리에 다소곳하게 서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기다렸다. 상대 쪽이 선공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되자, 율이 그대로 기합을 지르며 매섭게 덤벼들었다. 바르바라는 슬쩍 몸을 비틀었다가 발을 깡총 굴러서 그곳을 벗어났다. 율이 짧은 텀을 두고 곧장 몸을 비틀어 바르바라에게 검을 휘둘렀다. 바르바라는 검을 받는 대신 다시 발을 깡총 굴러서 그곳을 벗어났다. 주변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제대로 받아라!” 

 바르바라는 무성의하게 검을 휘휘 젓다 말고 뒤를 돌아 선써드 사람들을 보았다. 그들은 바르바라의 대련태도에 별로 놀라지 않았고, 무언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들은 바르바라가 검을 잡을 때마다 보여주는 꼼수를 알고 있었다. 선써드의 모두가 바르바라와 한번쯤은 반드시 검을 대보았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율의 기합소리가 가까워졌다. 뒤를 돈 채 한눈을 팔고 있던 바르바라는 율이 덤벼드는 것을 한끝 차이로 간신히 피하고는 드디어 검을 들어서 그녀의 날을 한 번 받아쳤다. 율이 흥분한 게 느껴졌다. 칼날 바로 뒤에 율의 얼굴이 숨어있었다. 그녀의 숨소리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집오리는 싸울 용기가 없으신가?” 

 두 사람의 얼굴이 가까웠으므로 율이 빈정거렸다. 바르바라는 모호한 소리를 내면서 웃었다. 

 “음.” 

 바르바라는 다른 생각에 잠긴 얼굴로 혼자 중얼거렸다. 

 “일 늘리지 말라니, 일을 늘린 게 누군데 그런 소릴 하는 거람.” 

 율의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졌다. 자신에게 집중하지 않는 바르바라 때문에 약이 오른 것이다. 그녀가 크게 고함을 지르면서 바르바라를 떠밀었다. 바르바라는 밀려나는 것처럼 뒷걸음질 치다 말고 부드럽게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율은 쉴 틈을 주지 않고 검을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바르바라는 몇 번 더 스텝을 밟아 그녀의 공격에 맞을 듯 빠져나올 듯 굴며 대련장을 돌았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던 바르바라가 일순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율이 옆구리를 찌르기 위해 자세를 낮게 숙이던 순간이었다. 

 바르바라는 율의 다리를 거는 것처럼 움직여서 율이 펄쩍 뛰어오르게 만들었다가, 곧장 그 틈새로 치고 들어갔다. 그 뒤는 아주 손쉽고 빨랐다. 바르바라는 오즈의 ‘적당히’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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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기가 점점 자욱해졌다. 목구멍이 따갑고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불 바로 앞에 있는 게 아니었는데도 그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바르바라는 오즈의 뒤를 따라 달리다 오즈가 마차에 오르자 그대로 멈추어 섰다. 곤두선 얼굴로 주변을 훑자, 화재의 몸통이 보였다. 바르바라는 뒤따라 달려온 선일로 기사 한 명에게 마차 끄트머리를 가리키며 진압을 지시했다. 갑작스러운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그녀는 누군가에게 부탁을 하는 것보다 명령하는 게 더 익숙했다. 바르바라는 큰 소리로 진원지를 알리는 선일로 기사를 지나쳐 나머지 마차에 올랐다. 불꽃의 열기가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불에 달군 혓바닥이 피부를 핥는 것만 같았다. 바르바라는 연소가 빠른 짐짝들을 손으로 붙잡아 마차 밖으로 내던졌다. 공기가 매캐했다. 땀이 솟아올랐다.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장갑을 낀 손등으로 얼굴을 훔치면서 짐을 모조리 밖으로 내던지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진압을 위해 물양동이를 들고 오는 이들이 보였다. 양동이속 물이 마차에 뿌려질 때마다 물방울이 열기와 함께 증발되는 소리가 들렸는데 꼭 기름에 무언가를 튀길 때 들을 수 있는 소리였다. 

 바르바라는 침착하게 마차에서 조금 떨어져 양동이를 가지러 숙소로 돌아갔다. 눈물과 땀을 훔치다가 공기가 점점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차가워지자 뛰기 시작했다. 이동하면서, 바르바라는 자신의 손목이 조금 데인 것을 알아차렸지만 마법을 써야할 지는 알 수 없었다. 나중에 실험해보기로 했다. 나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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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바라는 마차에서 내려 근처를 조금 걷다가 헤일리가 졸고 있는 것을 보곤 그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릎 좀 빌려달라고 하면, 싫으실까요?"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 애처럼 구는 것 같구나, 라고 생각하면서 바르바라는 먼 곳을 보았다. 

"글쎄. 깨워달라고 해도 괜찮아." 

 헤일리가 바르바라의 다리에 머리를 뉘였다. 바르바라는 그의 브루넷 머리카락 가닥을 의미없이 매만지다 말고 어두컴컴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헤일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주변은 충분히 조용했으므로 바르바라는 마음껏 생각에 잠길 수 있었다. 

 땅은 어둠이 내려앉아 그 경계를 명확히 구분할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노이어의 영지에 대해 생각했다. 개도 살고 늑대도 살지만 종국에는 모두 죽는다. 인간이 모든 것을 죽이고 가장 오래 살아남는다. 언젠가 바르바라는 아름다운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앉아서 이반으로부터 그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상상 속의 노이어는 황량하거나 안개에 싸여있어서 온통 흐릿하기만 했다. 때때로 그 상상 속의 땅에 누군가 서있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매번 그것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괴담의 온상지같구나.' 

 바르바라는 손이 심심할 때마다 헤일리의 브루넷 머리카락 가닥을 매만지면서, 이반이 아버지를 생각하고 있을지를 궁금해했다. 그러다 문득 방금의 헤일리가 불안해했던 것인지를 고민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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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바라는 아서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마리안이 곤두서는 것만큼은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녀가 누구를 보호하고 무엇을 방어하고자 했는지가 떠올랐으나 그만두었다. 눈앞에 일제히 검이 뽑히는 순간, 거짓말처럼 생각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아주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바르바라는 사람을 찌른 적은 있어도 죽여본 적은 없었다. 그녀가 지난 십일년 간 베어온 것은 나무토막, 줄과 가죽들. 그것들은 칼날을 대면 어떤 소리를 내거나 가루를 뿜어내며 반토막이 났다. 하지만 바르바라가 눈앞의 기사를 향해 칼을 휘두른 순간, 그것은 가루 대신 피를 뿜었다.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발밑으로 구르는 누군가의 시체를 뒤로 하고 곧장 뒤돌아 자신을 방어했다. 칼을 휘두르며 자신에게 달려든 칼날을 쳐냈다. 숨이 가빴다. 그녀는 생각했다. 지금이 적기인가?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검은 로브의 남자가 덤벼들었다. 바르바라는 반사적으로 방어하며 마법을 썼다. 아무 징조도 없었다. 바르바라는 계속해서 마법을 출력하며 그를 밀어붙였다. 주변이 아우성으로 이루어진 것만 같았다. 시선이 어지러웠다. 숨소리가 크게 들렸다. 바르바라는 마법을 실어 다시 한 번 강하게 칼을 휘둘렀다. 눈앞의 남자가 옆구리를 쥐고 물러나다 뒤에서 달려든 칼에 찔려 쓰러졌다. 천천히 쓰러지는 시체 뒤에서 길리언이 나타났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으나 바르바라는 입을 움직이는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손목을 타고 따끔한 고통이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검을 휘두르려다 잠시 주춤거리며 멈추어섰다. 하지만 고통은 언제 그랬냐는 것처럼 가라앉았다. 아무 징조도 없었다. 

 다음 순간, 뒤에서 또다른 로브의 상대가 달려들었다. 바르바라는 뒤로 물러났다가 검을 휘둘렀다. 사방이 적이었고 바르바라에게는 냉정한 판단이 필요했다. 합리적인 선택을 통해 최고의 결과를 도모해야 한다. 바르바라는 마법을 최대로 사용해본 적이 없었지만 언젠가는 그것을 시도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왔고 적기가 있다면 지금이 아니고선 그 어느 때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 적기인가? 바르바라는 머릿속으로 한 번 더 질문하고는, 계산을 끝냈다. 

지금이 적기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그 짓을 했다. 

 바르바라는 몸에 마법을 두른 채로 전투에 몸을 섞었다. 몸은 놀랄 만큼 빠르고 강해졌다. 육신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였다. 움직이기로 마음을 먹으면 이미 몸이 먼저 그곳에 가있었다. 마법이 바르바라의 뇌를 거치지 않고 곧장 몸의 미세한 움직임에 반응해 흐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머리를 비우고 눈앞의 상황에 따라 움직였으며, 종국에는 마법에 모든 것을 맡겼다. 육신을 마법에게 통째로 빌려준 것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베어죽여야하는가. 어느 순간 바르바라는 어떤 고통이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 고통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어떤 경고처럼 날카롭게 육신을 관통해 흐르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왼손이 축축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목을 타고 피가 흘러내려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칼을 휘두르던 손이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바르바라는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리며 뒤로 물러났다가 자신의 왼 손목을 쥐었다. 가벼운 이명이 찾아왔다가 차츰 가라앉더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뜨겁고 거대한 통증이 비명을 질러대고 있었다. 바르바라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바르바라를 찢어버리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천천히 피투성이가 되어 뚝 뚝 핏물이 떨어지는 자신의 왼손바닥을 펼쳤다. 

 그곳에는 상처가 있었다. 

 그 상처는 마치 누군가 날카로운 단도로 수차례 저미고 또 저민 것처럼, 갈가리 찢겨지고 벗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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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련장이 한산해지고 노을이 질 무렵, 선루스 일로어 기사단 몇 명이 일꾼과 함께 나타났다. 그들은 마차를 수리하려고 사람을 데리고 왔다고 말했다. 바르바라는 그들을 위해 길을 터주고는 근처에 등을 기대고 서서 그들이 마차의 바퀴를 점검하고 이음새를 매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인근 숲에서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렸다. 밥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팔짱을 낀 채 숙소 쪽을 흘끔거리다가 누군가 말을 걸어서 다시 마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써드빌은 어때?” 

 일로어 기사는 바르바라의 옆에 자연스럽게 기대섰다. 

 “우리?” 

 바르바라는 미지근하게 웃었다. 

 “한가하지.” 

 “이젠 그렇지 않겠네.” 

 “모두가 부지런을 떨어야 할 시기란다.” 

 바르바라가 부드럽게 대꾸했다. 

 “그래, 네 말이 맞아.” 

 그가 동의했다. 

 동일한 코트를 입은 두 기사는 잠시 마차에 기대어 서서 점점 어두워지는 하늘을 지켜보았다. 바르바라는 이곳의 선루스들도 농땡이를 치고 한가롭게 축제거리를 걸어본 적이 있는지가 궁금해졌다. 하지만 구태여 선일로의 분위기를 물어보지는 않았다. 두 단장을 비교해도 벌써 많은 것이 달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전쟁에 대한 짧은 의견과 서로의 기사단에 대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토막토막 주고받다가 숙소로 돌아왔다. 식당으로 들어서기 전 선일로의 남자가 손을 내밀고 악수를 청했다. “제시야.” 바르바라는 그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가 떨어뜨렸다. “난나.” 

 두 선루스들은 섞여 앉아 식사를 했다. 건너편 테이블에서 사라가 큰소리를 냈다. 아드리안과 마리안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오즈월드가 어린 단장 카미유의 이야기를 들었다. 낯설지만 같은 옷을 입은 선일로들도 군데군데 모여앉아 있었다. 그들은 빵을 자르며 이따금 선써드를 흘끔거렸다. 바르바라는 수프를 저으며 (늘 그렇듯)다른 생각에 잠겼다. 제시가 옆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그녀는 주변 풍경으로부터 멀리 달아나있었다. 제시가 바르바라의 어깨를 가볍게 건드리자 그녀는 고개를 돌리면서 생각을 모조리 머리 위로 치워버렸다. 

 “안녕.” 

 바르바라가 짧게 인사했다. 

 저 사람 시끄럽다. 제시가 고개를 까딱여 건너편 테이블에 앉은 사라를 가리켰다. 바르바라는 그러다 사라랑 눈이 마주치는 즉시 시비가 걸릴 거라고 충고해주려다 말았다. 최근의 사라가 여유로워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먹다짐으로 갈 상황을 만들 것 같지는 않았는데, 사실 주먹다짐이 벌어지더라도 바르바라의 탓은 아니었다. 제시가 코가 부러지는 상상을 하다가 그만두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네 코뼈가 부러지는 생각.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이고 제시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대꾸했다. 

 “선택에 대해서.” 

 “참전과 도주에 대한?” 

 제시가 농담처럼 물었지만 바르바라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간밤에는 고삐에 쓸려 피부가 벗겨져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 흔적도 남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이반이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가 고삐가 쓸고 지나간 자국을 더듬은 순간을 복기해냈다. 잠깐 실례. 그렇게 말한 후에 이반은 다시 한 번 힘주어 그 위를 붙잡고 덧붙였다. 손 조심해, 리드하려면 깨끗한 손으로 청하는 게 매너지. 마차 안으로 돌아온 바르바라는 생각에 잠긴 채 자꾸만 뒤로 멀어지는 천막 사이의 풍경을 응시했고 어느 순간 선잠에 빠졌다가 이른 새벽에 깨어났다. 그러자 선택지가 뚜렷해졌다. 

 “비슷하단다, 제시.”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지.” 

 식사를 마친 후 바르바라는 식당을 나왔다. 이반이 몇 걸음 앞서서 걷는 게 보였으므로 바르바라는 쉽게 따라잡았다. 날이 어두워지자 주변의 흙냄새와 나무냄새가 더 맹렬해지는 것 같았다. 식당과 멀어지자 소음은 금방 사라지고 걸어가는 발소리만 남았다. 바르바라는 앞을 보는 채로 조용히 말했다. 

 “계속 걸어서 보는 눈이 없는 곳으로 가야겠어.” 

 “산책이라도 하려고?” 

 “오, 무슨 소리를. 너도 같이 가야지.” 

 바르바라가 부드럽고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바르바라는 이반과 함께 숲의 입구까지 걸었다. 단단하게 얼어붙은 흙바닥 위로 서리가 밟혀 튀어 올랐다. 마침내 바르바라가 멈추어 서서 이반을 돌아보았다. 이반의 어깨너머로 어두운 보라색 하늘과 검은 덩어리처럼 뭉쳐있는 숲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반이 숨을 쉴 때마다 그 풍경으로 입김이 번졌다. 

 잠시 후, 바르바라가 딱 잘라 말했다. 

 “넘겨줘야겠어.” 

 “무엇을?” 

 “이반,” 

 바르바라가 타이르듯 중얼거렸다. 

 “사용한다와 사용하지 않는다의 선택지를 남겨두었다고 생각했는데 받는다와 받지 않는다의 선택지였더구나. 깨닫게 해줘서 아주 고마워.” 

 반은 비꼰 것이었다. 

 “넘겨줄 마음이 없다면?” 

 “그런 선택지는 없어.” 

 바르바라가 말했다. 

 “넌 내게 선택지를 주지 않았잖니.” 

 바르바라는 잠깐 이반의 어깨 너머를 응시했다. 어두컴컴한 겨울 숲의 풍경. 바르바라는 전쟁이 켈커스의 겨울 숲과 비슷한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인가가 도사리고 있음은 명징하지만, 그것이 정말 무엇인지는 그 위험을 눈앞에서 마주하기 전까지는 결코 알 수가 없다는 점에서 그러했다. 바르바라는 예상할 수 없는 위험을 처치하기 위하여 예상할 수 없는 힘을 쥐는 일에 대해 고민했다. 마차에 앉은 채로 매끈한 손바닥을 매만지면서, 혹은 식사를 하는 내내 수프를 휘저으면서, 바르바라는 이반 외에도 다른 사람이 또다시 그녀에게 마법을 사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자신의 선택이 능동성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했는데, 모든 상황은 그 능동적인 선택으로 말미암아 수동적으로 뒤바뀌고 말았다. 아-주-고맙게도. 

 “손을 주시죠, 기사님.” 

 “훔쳐가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주지는 않을 거야.” 

 이반이 밉살맞게 덧붙였다. 

 “세상엔 훔칠 수 없는 것도 있지.” 

 바르바라는 조용히 웃으며 이반의 두 손을 들어올렸다. 

 “훔칠 수 없는 건 없어, 이반.” 

 바르바라가 말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겨울이었고, 누군가는 죽거나 다칠 것이며, 도둑과 거짓말쟁이는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모두가 부지런을 떨어야 할 시기였으므로 바르바라는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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