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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근원의 문제»
1차/old 2019. 10. 23. 01:00

1.

요나스와 프웨이에서 돌아온 후, 아나렉샤는 꿈을 꾸었다.
요나스가 나오지는 않았다.


2.

고백하자면 가족이 있는 건 어떤 기분일까 생각해본 적 있다.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가든 시절 로맨스 드라마를 보면서였다. (돌이켜보면, 가든 시절 보았던 이 오락 프로그램은 아나렉샤에게 여러모로 많은 영향을 끼쳤다). 매체가 그려내는 혈연관계는 꼭 한 군데 씩은 주인공과 닮아있었다. 대표적으로 눈동자나 머리카락 색이 그랬다. 사소한 습관이나 말버릇이 비슷하다고 묘사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렇게 시청자들이 섬세하게 찾아내야만 알 수 있는 조건들은 곧잘 배제되었다. 나이를 먹으면서 아나렉샤가 깨달은 건 혈통이란 굉장히 직관적으로 인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서로 닮지 않은 아이 둘을 세워놓고 오늘부터 너희 둘은 가족이라고 말해봤자 신빙성이 없었다. 무엇이 되었든 혈통을 증명할 게 필요했다. 그렇다면 눈동자나 머리카락 색으로 증명하는 편이 가장 간편할 것이다. 드라마란 바로 이런 틀 안에서 구조적으로 가족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게 틀림없었다.

어쨌든, 가족의 개념을 알게 된 아칸의 아이들이 한 번쯤은 그렇게 하듯이, 아나렉샤 역시 생각해본 적 있다. 자신의 혈통 말이다. 하지만 곧 그만두었다. 가족이 있다는 건 도무지 부정하거나 어찌 수습할 수도 없는 근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근원이 없다면 찾아나설 수도 있다. 그런 소설이나 드라마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나렉샤가 근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제국이 아나렉샤의 근원을 대신했다. 그들은 태어난 이유와 삶의 방향을, 가든-ACOTS로 이어질 생활의 터전과 적절한 교육을 제공했다. 가족의 빈자리를 체감하기에 아나렉샤는 무척 편안한 유년시절을 보냈고, 원래부터 그녀는 썩 외로움을 타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나렉샤의 가족 찾기는 이틀도 채 되지 않아 종지부를 찍었다. 가든을 떠나면서 그 사안은 거의 수면 밑바닥에 침체되어 기억으로부터 소거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요나스를 만났을 때, 아나렉샤는 아주 잠깐 그 삐죽 솟은 적발과 빛나는 회색 눈동자를 보며 불현듯 아, 나 불을 켜놓고 방에서 나왔던 것만 같아, 쯤의 감상을 떠올렸지만 구체적으로 자신이 무엇을 떠올렸는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주 오래 전 만들다내다 만 가상의 오빠-언니-동생의 존재가 수면 위로 올라온 건 요나스와의 대화가 한참은 더 진행된 후였다. 그것들은 너무 오래 전에 만들어서 형태가 전부 흐물흐물했다. 얼굴을 알아보거나 형체를 어루만질 수조차 없었다. 가족이란 개념은 낯설고 미끄러워서 아나렉샤가 체감하기에는 너무 먼 것이 되어있었다.


3.

하지만 요나스가 될 꿈이기는 했다.


4.

상상의 가족들은 모두 붉은 적발에 회색 눈을 가지고 있다. 아나렉샤처럼 빛을 받으면 반짝반짝 여러 각도로 빛이 나는 눈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눈도 있다. 어릴 때에는 자신의 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기호와 희망에 따라 상상력을 발휘하다보면 아나렉샤는 금방 혈통 깊은 집안의 자제가 되었다. 

요나스는 밝은 적발을 가졌고, 아나렉샤처럼 과하게 반짝거리는 눈 대신 적절한 회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소년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나렉샤는 요나스와 자신이 파편적인 특징을 제외하고는 닮은 점이 요만큼도 없다고 생각했다. 같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가진다고 다 가족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걸 오히려 요나스를 통해 배웠다고나 할까. 성격적인 부분도 그렇다. 생활 습관도, 평소 태도도, 좋아하는 음식이나 색깔도 달랐고 좀 더 따지고 들어가면 훨씬 더 많을 거였다. 

하지만 아나렉샤는 요나스와 혈통에 대해 이야기하는 과정을 좋아했다. 패드를 펼치고 가족의 개념을 꼼꼼하게 짚으며 함께 고민하는 그 우스꽝스러운 시간이 좋았다. 확률을 따지며 오늘의 우리가 얼마큼의 근원을 공유하는지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어쩌면 어릴 적에 그렇게 금방 가족 찾기 놀이를 그만둔 건 상상을 함께 할 친구가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느세파 가든에서 아나렉샤와 비슷하게 생긴 아이는 한 명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그러고보니 다른 아이들이 서로 우리가 형제나 자매일 지도 모르겠다고 으스대는 과정에서 아나렉샤는 한 번도 소리내어 말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 의기소침하게 대꾸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족이 없어. 근원이 있다면 제국이야. 돌이켜보니 그건 그냥 오기였던지 싶다.

그래서, 아나렉샤는 요나스와 계속해서 닮은 점을 찾아보기로 했다. 조금은 노력했다. 물론 아나렉샤는 요나스와 자신이 가족일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다. 정말이지 한 군데도 닮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읊고 있는 60%라던가 85%는 단지 관념적인 개념을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두 사람이 노력한 수치였다. 바꾸어 말하자면 요나스와 아나렉샤가 서로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한 다소 우스꽝스러운 방법에 대한 수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린 얼마 정도의 '서로를 소중히 여길 위험'에 처해있지? 아나렉샤는 종종 그것을 이렇게 바꾸어 물었다. 오늘은 몇 %야? 


프웨이에서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떠오른다. 요나스가 어느 순간에는 정말로 아나렉샤가 탐구하는 '가족'의 개념에 가까워져 있었던 것 같다. 그 때, 요나스는 아나렉샤의 두 눈을 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우리는 누군가를 소중히 여기면 안되는 건가? 거의 다왔다고 생각했다. 아나렉샤는 요나스에게 고백할까 했다. 있지, 요나스, 우리는 정말로 가족은 아닐 거야. 나는 사실 말이야, 이 일이 단지 너와 있는 게 즐거워서 시작한 일이었단 말이지… 하지만 그러지 못 했다. 대신 요나스가 진지하게 가족의 개념을 고민하듯이, 아나렉샤 나름의 진지함으로 그 질문을 받아쳤다. 

요컨대 우리는 아칸의 아이들이라는 소리다. 가족을 찾거나 탐구할 필요가 없었다. 제국이 곧 그 근원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제국이 자리를 대체할 다른 근원을 찾는다면 앞으로가 곤란해질 지도 몰랐다.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제국이 아니라 한 사람만이 남을 테니까. 아나렉샤는 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게 될 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한 적 있다. 그리고 요나스를 위해서 목숨을 바칠 수 있는지도 생각했다. 하지만 역시 그건 안 된다. 요나스의 손에 죽어줄 수는 있었다. 반대로 요나스를 직접 처리하거나. 

"그게 85%쯤 되는 누나의 책임감이라고 생각해."

그것은, 무척 슬픈 일이겠지.

아나렉샤는 책임이란 그처럼 무겁거나 괴로움에도 마땅히 짊어져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프웨이에서 ACOTS로 돌아오는 셔틀 안에서, 아나렉샤는 역시 조금 후회했다. 

그렇게 말하지 말 걸 그랬어.

처리나 제거를 발음할 때 고개를 숙이던 요나스의 모습. 어쨌든 두 사람은 여전히 85%였다. 그건 서로를 소중히 여길 위험에 대략 85%정도 처해있다는 뜻이었고… 아나렉샤는 거기다 대고 날 죽이거나 널 죽여도 아랑곳하지 말자고 섬세한 구석이라고는 요만큼도 없는 선언을 내뱉은 셈이었다.


6.

그 날 밤 아나렉샤는 물가에 앉아있었다. 아주 잔잔한 수면이었고 안개가 자욱했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은 물건들이 그러하듯 어딘지 풍경들이 전부 바싹 낡아있었다. 호수 중앙으로부터 무언가 솟구쳐 오르는 건 그때다. 보글보글 거품을 뿜으며 그것들이 시체처럼, 바람이 든 비누처럼, 넝마처럼, 아나렉샤를 향해 온다. 아나렉샤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것들을 만져보려고 애쓴다. 축축하거나 미끄러운 그것들을. 하지만 제국은 안아줄 품이나 따뜻한 손바닥, 아름다운 적발과 투명한 회색 눈동자를 가질 수가 없기 때문에 육화肉化되지 못 한다. 그것들은 단지 흐물거리는 채로 거기 서있을 뿐이다. 그럼 아나렉샤는 마침내 축축한 손으로 깨닫는 것이다. 아, 이것을 근원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구나. 근원이라는 건 이토록 관념적인 것으로서 대체할 수가 없는 것이구나. 제국이 나에게 빼앗아놓고 제공해줄 수 없는 무언가를… 이 손으로 잡으려고 이토록 애썼었다니.

정말이지 이상한 꿈이었다.


7.

번뜩, 잠에서 깬 아나렉샤는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새벽 6시 반이었다. 다시 잠들기엔 뭐한 시간이었고, 이미 창가는 푸른 새벽의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아나렉샤는 허공을 떠다니는 먼지를 세다 말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 새벽, 천천히 복도를 가로지르며 요나스 생각을 했다. 복도 끝으로 향하면서, 오늘은 요나스가 복도 중앙에서 스트레칭을 해주기를 바랐다. 요나스가 어떤 식으로 자신에게 달려와 정다운 얼굴을 했는지를 제대로 떠올릴 수 있기를 바랐다. 우리가 여전히 85%라는 걸, 나의 근원은 제국이 아니라 사실 만지고 껴안을 수 있는, 나와 이 우스꽝스러운 근원 찾기를 함께 해주는 너에게 더 적합하다는 걸, 그러므로 너를 잃게 된다면 무척 슬플 것이라는 사실을 요나스에게 제대로 말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1학년 중반 어느 새벽, 복도를 서성거리면서 아나렉샤는 그런 생각들을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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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분기점»
1차/old 2019. 10. 23. 00:59

지평선을 루가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다. 

아나렉샤는 위성 나흐트를 내려다보며 500에이커에 달하는 농장을 관찰한다. 자잘한 잎사귀를 가진 루는 마치 수십만 개의 레고가 엎어져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그냥 흩뿌려져 있는 건 아니다. 3m 가량의 두께로 한 줄씩, 명백한 목적을 가지고 열을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그 사이를 사람들이 누빈다. 마찬가지로 3m씩 떨어진 열과 열 사이로. 어떠한 보조기구나 보호장비 없이. 그저 반복해서 잎을 채취하는 단순 노동. 

좀 더 자세히 보면 농장에 배치된 인력 사이에서 제국민과 장교를 손쉽게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들이 주로 검은색 옷을 입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곳의 장교들은 종종 인간 구분 놀이라고 불렀다. 나머지 인력은 곧잘 비인간으로 취급되었다. 그래야 한다는 것을 아나렉샤는 이곳에 와서 배웠다.

“생도.”

“…….”

“생도.”

미르 대위가 힘주어 말했다.

“생도들,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안카를라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아나렉샤는 그보다 한 박자 늦었다.

미르 대위는 화가 나 있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고 있었는데 꾸짖기 직전에 나오는 버릇이었다. 

지안카를라가 능청스럽게 말했다.

“죄송합니다, 두통이 있어서요.”

미르 대위가 눈을 가늘게 뜨자 아나렉샤는 어깨를 으쓱였다.

“죄송합니다.”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해봅시다.”

미르 대위가 딱딱하게 질문했다. 

“루를 피웠습니까?”

아나렉샤가 지안카를라를 곁눈질 했다.

지안카를라는 자세를 정돈하며 대답했다.

“네, 그렇습니다.”

“당일 농장 관리 담당이던 크샤트 대위의 권유가 있었습니다.”

아나렉샤가 재빨리 덧붙였다.

“시범근무 중인 생도의 입장으로, 상관의 권유를 거절하기 어려웠습니다.”

“강압적인 분위기였습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미르 대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들기는 소리가 점점 빨라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함선 안에서 벌어진 모든 일은 AI의 눈을 피할 수 없지만 농장에서 벌어진 일이라면 사정이 달랐다. 장교들은 종종 그곳에서 부정을 저질렀다. 횡령과 폭력, 착취와 학대가 감시탑 아래서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지상에서 근무하는 날이면 약에 취해 비틀거리며 걷는 장교들을 손쉽게 볼 수 있었다. 직접 나니아민을 때리는 장면을 목격한 적도 있었는데 너무 멀어서 확실히 본 건 아니었다. 아마 그것도 크샤트 대위였을 것이다. 어제는 그가 지상근무 중이던 지안카를라와 아나렉샤를 불러 루를 어떻게 피우는지 알려주었다. 반투명한 종이 위에 두어 번 접힌 루를 얹는다. (붉을수록 잘 익은 것이다). 함께 돌돌 만다. 불을 붙이면 오렌지색 연기가 피어오른다고 설명하는 그의 왼쪽 눈꺼풀이 미약하게 경련을 일으키던 장면이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다.

“함선에서 루를 피우는 건 금지되어 있습니다.”

“농장에서는요?”

지안카를라의 물음에 아나렉샤가 다소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지안카를라는 태연했지만 아나렉샤는 일이 더 커질까봐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미르 대위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중독성이 강한 약물이 함선에 유통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불미스러운 일이겠죠. 매년 어린 생도들이 시범근무 배치를 받고 이곳에 오르지만, 여태껏 루와 관련되어 처벌을 받은 이력은 없습니다. 생도 여러분이 처음입니다. 알고 있습니까?”

거짓말이다. 지안카를라와 아나렉샤가 처음일 리 없었다.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린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지안카를라는 웃고 있었다. 아나렉샤는 같이 웃어야하는지 고민하다 타이밍을 놓쳤다.

미르 대위의 엄격한 꾸짖음이 이어지는 동안 지안카를라가 다시 농장을 내려다보며 검은 옷을 세기 시작했다. 몇 번 손가락을 까딱거리더니 아나렉샤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보였다. 네 명.

아나렉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자는 뜻인지 다시 한 번 세어보라는 건지 그 뜻이 모호했다. 지안카를라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흥미가 떨어졌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일주일 간 함선 B덱 바닥은 전부 생도들의 몫입니다.”

AI의 손이 닿지 않는 곳까지 손수 걸레질을 하고 먼지를 긁어내야 한다는 뜻이었다. 

“네에, 알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또한, 생도 여러분은 이틀 간 관개용수 관리 야간반에 배치될 것입니다. 성실히 임해야 할 겁니다.”

이 일은 밤을 새야한다. 귀찮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에 지안카를라는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네에, 알겠습니다.”

아나렉샤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알겠습니다.”

지난 번에는 음주 사실이 적발되어 지적받았다. 그때에도 미르 대위는 갑판 청소 따위의 처분을 내리고 두 사람을 돌려보냈다. 지안카를라와 아나렉샤는 슬슬 함선의 분위기와 미르 대위의 유한 태도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을 담당하는 이 직속 장교는 암묵적 금기를 실행하는 어린 두 생도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태도를 보였는데 아마 윗선에 그들의 행동을 보고하면 일이 정말 커질 것을 염려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음주나 마약 복용은 시범 근무 성적 감점으로 끝나지 않고 최악의 경우에는 본국에 소환되어 재교육을 받아야 했다. 운이 나쁘다면 말이다. 이미 지안카를라는 미르 대위가 너무 쉽다고 언급한 적 있었다. 감점이나 심문을 견디는 대신 고작해야 함선 바닥을 닦거나 드나들기 번거로운 관개용수를 감시하는 일을 반복하다보면 군기가 다 죽을 게 빤하다는 것이다.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가 본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지안카를라가 손가락으로 머리카락을 빗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성으로 인사하고 나가는 폼이 전혀 반성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나렉샤가 뒤따라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미르 대위가 아나렉샤를 불러세웠다. 그러더니 잠시 머뭇거렸다.

“아나렉샤 생도.”

미르 대위는 어딘지 수치심을 억누른 얼굴이었다.

“…저는 우리 함선의 분위기가 시범근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사실을 압니다.”

아나렉샤는 대답 대신 무심한 표정으로 가슴에 손을 얹어 경례했다. 미르 대위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 말고 손을 이마에 붙였다. 그것으로 대화가 닫혔다.

밖으로 나오자 지안카를라가 벽에 기대어 있다 말고 아나렉샤에게 다가와 팔짱을 꼈다. “대위가 뭐래?” 

“몰라.” 아나렉샤는 일부러 귀찮다는 목소리를 꾸며냈다. 

지안카를라가 웃음을 터뜨리며 몸을 기댔다.

“차 타러 가자.”

운전은 네가 해. 그렇게 말하는 지안카를라가 아나렉샤는 밉지 않았다.

에오르에서 일루어스Illuearth까지 대략적으로 이주일이 걸렸다. 지루한 나날이었다. 지안카를라는 이틀 만에 셔틀 생활에 질렸다. 아나렉샤는 대체로 잠을 잤다. 도착하자마자 본 것은 일루어스 주변을 부유하는 위성 나흐트Nacht였다. 크기가 일루어스와 비슷해 위성이라기보다 독립된 행성에 가까워보였다. 셔틀 AI가 일루어스의 중력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전송했다.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두 행성이 술에 취한 것처럼 비틀거리며 돌고 있었다.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완벽히 지배하지 못 해 두 행성이 서로를 공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함선에 가까워지자 얼굴 위로 거대한 그림자가 드리웠다. 잠이 덜 깬 표정으로 눈을 깜빡이는 아나렉샤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지안카를라가 무언가를 속삭였는데, 아직도 무슨 소리였는지 모른다. 도킹할 때 셔틀이 덜컹거리며 크게 흔들렸던 것, 정거장 앞에 엄숙하게 서있던 미르 대위의 모습 따위가 파편적으로 남아있다. 함선생활에 적응하는데 하루도 채 걸리지 않았다. 미르 대위를 제외한 모든 장교가 각자의 사리사욕을 쫓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지안카를라는 보조석에 앉자마자 다리를 쭉 뻗으며 의자를 젖혔다. 아나렉샤는 목적지를 입력한 뒤 차를 자동 운전모드로 전환했다. 지안카를라처럼 의자를 젖힐까 하다 그만두었다. 누워있으면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차가 천천히 방향을 틀어 추진을 준비하자 사방으로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술이라도 챙겨올 걸.”

출발하기 직전 지안카를라가 중얼거렸다.

관개시설까지 한 시간을 꼬박 달렸다. 흙먼지와 끝없이 이어지는 루 농장의 풍경 외에는 볼 게 거의 없었다. 아나렉샤와 지안카를라는 서로 농담따먹기를 하며 지루함을 견뎠다. 중간에 아나렉샤가 회심의 농담을 알아듣지 못해 심각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지안카를라가 박장대소를 했다. 발로 창문을 걷어차며 웃다가 의자가 끝까지 젖혀지는 바람에 이번에는 아나렉샤가 웃음을 터뜨렸다. 

시설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두 사람은 차를 세우고 시설 꼭대기에 앉아 핏빛으로 물든 루 농장을 내려다보며 다리를 흔들었다. 몇 번째 보는 풍경이었기에 아나렉샤는 조금 심드렁했다. 지안카를라가 다시 술 이야기를 했다. 

“조금이라도 챙겨올 걸.”

나흐트는 볼 게 정말 없었다. 미르 대위도 그것을 알기에 두 사람을 종종 농장으로 보냈다. 물론 크샤트 대위 같은 사람들을 만나면 농장에서 루를 빨 수 있도록 해주었지만 아나렉샤는 약을 자주 빨고 싶지는 않았다. 몸이 망가지는 감각이 불쾌했기 때문이다. 중독되면 본국으로 돌아갈 때 곤란한 일이 벌어질 것이다. 지안카를라도 그 정도는 구분했다. 그래서 약 대신 술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걸 테였다.

“그냥 째고 셔틀 빌려서 드라이브나 할래?”

아나렉샤가 지나가는 말처럼 던졌다. 지안카를라가 무시해주기를 바라며 모호한 어투로 던진 것이었지만 동시에 지안카를라가 받아들인다면 기꺼이 저지를 준비가 되어있다는 투이기도 했다.

지안카를라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어깨를 으쓱였다. 아나렉샤의 버릇을 따라하는 것이었다. 

“진짜 간다?”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의 허리에 손을 감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두 사람은 정류장까지 차를 몰라 셔틀을 빌린 다음 위성 나흐트에서 행성 일루어스로 건너갔다. 일루어스 정류장에서 가장 예쁜 색의 차를 골라탔다. 이번에는 지안카를라가 운전대를 잡았다.

광활한 사막 끄트머리에 빛의 도시가 건설되어 있었다. 캄캄한 모래 지대를 지날 때 지안카를라가 차 뚜껑을 열어젖히고 기분 좋은 표정으로 기지개를 켰다. 싸샤, 음악 좀 틀어 봐. 발끝으로 라디오를 차서 음악을 틀려다 실패한 아나렉샤가 머쓱한 표정으로 AI에게 라디오를 요청했다. 곧이어 알 수 없는 언어로 이루어진 경쾌한 후크송이 흘러나왔다. 반복되는 비트가 두 사람의 기분을 고양시켰다.

“클래식이네.”

지안카를라가 낄낄대며 볼륨을 높였다.

바람이 귀를 자꾸만 때렸다. 음악소리가 너무 커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이번에야말로 시트를 젖힐 때였으므로 아나렉샤는 드러누워 얼굴을 찡그린 채 별을 올려다보았다. 오늘은 뭘 하지? 알 수 없었다. 어쨌든 술을 마시고 돌아다니다보면 카지노나 호텔 방에 들어갈 수 있겠지. 지안카를라는 도박 운이 좋았다. 아마 다음에는 잭팟을 터뜨릴 것이다. 반면 아나렉샤는 운이 나쁜 쪽에 속했다. 지안카를라가 손쉽게 얻을 수 있는 건 아나렉샤에게 대체로 어려웠다. 대범하게 저질러도 성정이 따라주지 않으면 행운 역시 주춤거리는 모양이었다.

지안카를라가 뒤늦게 아나렉샤의 표정을 확인했다.

“어디 아파?”

“아니~….”

힘없이 대답한 아나렉샤가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굴 위로 빛이 쏟아지는 바람에 잠시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도시의 화려한 간판이 번쩍이며 머리 위를 끊임없이 스쳐지났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아나렉샤가 지안카를라를 돌아보았다. 바람 때문에 머리카락이 자꾸만 사방으로 흩날렸다.

아나렉샤는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기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멈추기만 해봐. 더 세게 밟아야 돼, 알겠어?”

지안카를라가 시원한 웃음을 터뜨렸다.

“당연하지.”


*

ACOTS에 입학한 당시에는 지안카를라와 대화할 일이 거의 없었다. 첫 훈련에서 지정구역을 이탈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일라이와 카르니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고 시민 주택 단지에 내린 후에도 서로 떨어져서 걸었다. 파트너 축제에서 술을 나누어 마실 때에도 몇 마디 나누지 않았다. 지안카를라는 금기를 쉽게 넘었다. 아나렉샤가 눈치를 보며 카르니와 술을 반씩 나누어 마실 때, 지안카를라는 끊임없이 잔을 채우며 붉어진 얼굴로 히히 웃었다. 그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끌렸다.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를 찾아갔고, 음주의 경험이 나쁘지 않았다고 새빨간 얼굴로 털어놓았다. 지안카를라는 짓궂은 표정으로 허리를 감싸며 다가왔다. 얼마 뒤 두 사람은 술을 제조하기 시작했고 그 통은 아직도 지안카를라의 방에 보관되어 있었다. 규칙을 지킬 때보다 금기를 넘을 때 우정은 훨씬 단단해졌다. 지안카를라는 그런 인간이었고 아나렉샤도 어느 순간부터 그것에 익숙해졌다.

아나렉샤는 자신이 생각만큼 자제력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나이를 먹으면서 깨달았다. 지안카를라와 가까워진 것을 계기로 아나렉샤는 차차 삶의 궤도를 수정했다.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하거나 하릴없이 거리를 쏘다녔다. 지안카를라가 부추길 때도 있었고 스스로 행할 때도 있었다. 가든이나 신입생 시절을 얌전하게 보낼 수 있던 건 그녀를 부추길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은 분위기에 잘 융화되고 감정적으로 굴며 타인의 성정에 휩쓸리는 인간이었다. 지안카를라와 가까워질 수록 이런 면모는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어쨌든 아나렉샤 역시 전환기를 맞은 셈이었다. 누구나에게나 이데올로기와 개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분열된 자신을 발견하는 시기가 온다. 어떤 사람은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노력하지만 아나렉샤는 그러지 않았다. 그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다. 남의 성정에 기대어 술이나 담배 따위의 금기를 넘나드는 일로 자신을 적당히 파괴시키고 돌아오는 일 외에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분열을 확인하는 일 외에는 말이다.

그래도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가 좋았다. 금기를 넘는 일을 대수롭지 않은 모험처럼 취급하는 말투가, 여유로운 발걸음이, 문제를 징검다리처럼 느긋하게 뛰어넘는 태도가 좋았다. 지안카를라와 옆구리를 찌르며 나란히 걸을 때면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아나렉샤는 일련의 문제를 무성의하게 건너뛰는 지안카를라의 대담함에 빌어 ACOTS에 자신을 적응시키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스트레스를 무시하는데 익숙해졌다. 불안감은 점점 무뎌졌고 행동은 보다 대담해졌다. 일탈은 곧 생활의 일부로 자리잡았고 아나렉샤는 변한 자신을 경계심 없이 받아들였다. 사춘기가 그런 식으로 지나갔다. 외롭거나 괴롭지 않은 방식으로, 다만 담담하고 기묘하게.

사실 아나렉샤 자신이 그렇다고 믿었다.


*

지안카를라와 도시를 두 바퀴째 돌았다. 중간에 도박장에 들렀지만 한 푼도 따지 못 했다. 지안카를라는 걸었던 금액에서 두 배의 성과를 올렸다. 가는 길에는 술을 샀다. 진탕 퍼마셔서 마침내는 지안카를라도 아나렉샤도 제법 취했다. 비틀거리며 어깨에 손을 감는 지안카를라의 무게가 자꾸만 아나렉샤를 좌우로 흔들었다. 아나렉샤는 머리가 아파서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숙였다. 술이나 담배가 그녀를 즐겁게 하는 경우는 사실 많지 않았다. 다만 저지르고 나면 남는 미약한 죄책감이 자신을 제국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기분이 들게 만들었으므로 계속할 수 있었다. 제국이 암묵적으로 금기하는 것들을 저질러 마침내 개인으로 남고나면 무엇이 찾아올지가 궁금했다. 사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런 것들을 궁금해 했지만, 그러므로 결국 저질렀지만, 남는 건 숙취과 기침뿐이었다. 슬슬 이 짓도 그만둬야 할 것 같다고 밤거리를 걷는 내내 아나렉샤는 생각했다. 불안정한 세계에서 나를 찾아낼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던 거지. 눈을 감았다 뜨면 거리가 두 개가 되었다. 어디로 걸어가면 좋을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를 끌고 자꾸만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코너를 돌던 두 젊은 생도를 발견한 건 슬럼가 골목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나니아민이었다. 늙은 걸인 역시 술에 잔뜩 취해있었다. 그가 벽을 짚으며 천천히 허리를 펼치고 일어났다.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를 좌측으로 밀어 중심을 잡아주다 말고 그와 눈이 마주쳤다. 지안카를라가 낄낄거리며 아나렉샤를 안아주었으나 아나렉샤는 불길한 기운에 사로잡혀 자리에 우뚝 멈추어 섰다.

마찬가지로 걸인 역시 그 자리에 멈추어 서있었다. 눈앞에 서있는 이들이 어디 출신인지 가늠해보는 얼굴이었다. 술에 쩔어있는 눈이 가늘게 뜨여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빛이 났다. 마침내 그가 술병을 들었을 때, 아나렉샤는 지안카를라를 끌고 급하게 뒤로 물러나다가 발을 헛디뎠다. 

쨍강.

술병이 빗나가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뺨이 잠깐 따끔했다. 지안카를라가 번쩍 고개를 들고 눈을 부릅떴다. 그녀의 적의는 상대를 확인하자 금방 수그러들었다. 눈앞의 남자가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신세라는 걸 인지한 얼굴에 비웃음과 여유로움이 스며들었다. 아나렉샤는 물러났지만 지안카를라는 다가갔고, 걸인의 멱살을 붙잡아 벽으로 내팽겨쳤다. 대단히 세게 밀친 것도 아니었다. 지안카를라는 여전히 기분이 좋았고 술에 꼴아있는 나니아민쯤이야 어느 정도 봐줄 요량이 있었다. 

“눈치없게 나타나서는!”

지안카를라가 높게 웃음을 터뜨리며 허공으로 발길질을 했다. 걸인은 다시 일어나지 않고 벽에 머리를 박은 채로 작게 욕지거리를 지껄였다. 아나렉샤가 걸인에게 다가가다 말고 지안카를라에게 팔을 붙잡혔다. 그녀가 다정하게 아나렉샤의 어깨에 몸을 기댔다.

“우리 너무 깊게 왔나 봐. 돌아가자.”

“…응.”

지안카를라가 아나렉샤의 손을 잡고 서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아나렉샤는 따라서 걷다 말고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걸인이 쓰러진 골목 뒤쪽에 아이 하나가 숨어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어둠 속으로 달아나 얼굴을 제대로 알아볼 수가 없었다.

“싸샤!”

그제야 아나렉샤는 고개를 돌렸다.

골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종종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곳에는 어둠뿐이었다. 무엇도 없었으므로 아무것도 그녀를 되돌아가게 만들 수 없었다. 결국 아나렉샤는 그 캄캄한 길을 외면하고 지안카를라와 함께 돌아갔다. 빛에 감싸인 아름다운 차체에 몸을 싣고 출처도 알 수 없는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다음 날 아나렉샤는 일루어스 슬럼가 순찰을 맡아 미르 대위와 함께 셔틀을 타고 다시 그곳을 찾았다. 지안카를라는 나흐트에 남아 함께 올 수가 없었다. 의도적인 분리였다. 

화창한 날씨였다. 빛이 드는 골목을 걸으며, 미르 대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아나렉샤는 그 침묵이 불편해 자꾸만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문제의 그 코너를 돌 때, 느닷없이 미르 대위가 입을 열었다.

“어제 이곳에서 나니아민이 한 명 사망했습니다.”

아나렉샤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신중한 침묵이 있었다. 미르 대위가 아나렉샤를 돌아보았다. 

마침내 아나렉샤가 대답했다.

“저희가 그런 게 아니에요.”

지안카를라를 변호하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음주 사실을 밝혀야 했으므로 입만 달싹였다. 미르 대위는 얼굴을 찡그리곤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압니다. 알콜 중독사였어요.”

그런 후 먼저 앞서 걸어갔다. 아나렉샤가 보폭을 빨리하자 미르 대위가 충고했다. 

“제 등을 보며 걷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대체 무슨 소린가 싶었다. 그러나 시야를 넓힌 순간 아나렉샤는 그 말을 이해했다. 빛이 드는 골목 곳곳에 널린 걸인들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아나렉샤는 미르 대위가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방금의 이야기를 꺼냈는지를 깨달았지만 그건 입밖으로 냈을 때 지나치게 위험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다, 표면적으로는 괜찮을 지도 몰랐다. 나니아가 제국의 일부라면 나니아민 역시 결국은 제국민이었다. 적어도 이론적으로는.

“대위님은 슬럼가 거주민들을 하나하나 파악하세요?”

“그렇습니다.”

“왜요?”

미르 대위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나렉샤가 다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골목은 깨끗하게 치워져있었고 어젯밤 지안카를라와 아나렉샤를 향해 술병을 휘두르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시체가 있었는 줄도 모를 만큼 풍경은 완벽히 은폐되어 있었다. 골목은 그대로였다. 단지 불행한 나니아민들을 수용하는데 기능하고 있을 뿐. 아나렉샤는 이 모든 일을 왜 미르 대위가 굳이 상기시키는지 궁금했다.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지 않고도 어떤 것과 분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그것과 접근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럼 정말로 돌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나렉샤는 결국 골목 뒤쪽을 살피고 있었다. 아이는 보이지 않았으나 분명 어딘가에 있을 시선을 확신했다. 멍한 표정으로 아나렉샤가 중얼거리듯 물었다.

“죽은 나니아민에게… 파트너가 있었나요?”

대위가 멈추어 섰다.

“질문의 의도를 묻고 싶습니다.”

“자녀는요?”

미르 대위는 몸을 돌려 골목에 시선을 빼앗긴 아나렉샤를 확인했다.

잠시 후 아나렉샤 역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으나, 아나렉샤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미르 대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추궁하듯 물었다.

“질문의 의도를 묻겠습니다.”

“…….”

아나렉샤는 땅을 쏘아보며 미간을 좁혔다.

“생도.”

“…….”

“아나렉샤 생도.”

“나니아민들은 미개해요.”

아나렉샤는 여전히 땅을 쏘아보는 채 힘주어 말했다.

“저희가 꼭 이렇게 신경써야 하나요?”

그건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으므로 미르 대위는 대답 대신 한 번 더 그녀를 불렀다.

“생도.”

 아나렉샤는 고개를 들고 미르 대위를 쏘아보았다.

“제 대답에 책임지실 건가요? 제 입으로 굳이 이 기분을 꺼내게 만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대위님이 제게 무엇을 강요하고 있는 건지 알고 계신가요?”

“질문에 대답하십시오.”

아나렉샤는 자신이 실수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이 대위에게 대들어서인지, 아니면 이제 막 고백할 내용 때문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길은 여전히 두 갈래였고 아나렉샤는 그 앞에 멈추어 있었다.

마침내 아나렉샤가 신음하듯 고백했다.

“마음이… 불편해요.”

“…….”

주먹을 쥐고 바닥을 쏘아보았다. 빛과 어둠이 나뉘어 그림자는 보다 선명하게 발등으로 떨어졌다. 

미르 대위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그림자가 아나렉샤의 발등을 통째로 덮었다. 아나렉샤는 고개를 들었지만 표정을 숨기지는 못 했다. 혼란스러웠고 어린 애처럼 보였다. 스스로 짓고 있음에도 낯선 표정이었다. 미르 대위는 그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말고 입을 열었다.

“생도, 저 역시 아까의 질문에 대답하겠습니다.”

“…….”

“마찬가지의 이유입니다.”

지안카를라가 보고 싶었다. 이이상 대화해서는 안 됐다. 아나렉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미르 대위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도, 사관학교 졸업생의 3할은 시범근무지역을 선택합니다.”

“…….”

“갈리모프로 돌아오면 어떻겠습니까? 생도를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 이제 알 것 같습니다.”

 아나렉샤는 고개를 들었다. 역광 때문에 미르 대위의 표정을 구체적으로 읽기가 어려웠다.

“저는….”

아나렉샤는 자신이 망설이고 있다는 사실에 다소 충격을 받았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웅얼거리듯 대답한 아나렉샤가 곧이어 대답을 정정했다.

“거절하겠습니다.”

지안카를라를 봐야할 때였다. 아나렉샤는 이 골목에 혼자 남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녀는 어둠 속을 걸어 빛의 세계로 귀환했다. 누군가는 반드시 곁에 있어야 했다. 미르 대위를 곁에 두고 싶지는 않았다. 아나렉샤는 그 끝에 어딘지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두 갈래의 길이 있다면 친근한 자가 골라준 길을 걸을 것이다. 어느 쪽이든 갈팡질팡할 거라면 보다 안전하게 잘 휩쓸릴 수 있는 곳으로. 생각을 멈추지 않는다는 건 어두캄캄한 골목을 돌아보는 일이었고 아나렉샤는 의도적으로 생각을 멈추는 일에 능숙했다. 

그렇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멈출 수가 없다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하다못해 약을 빨면 됐다.

하지만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는 건 대체 뭘까.

“그렇군요.”

미르 대위는 그것으로 대화를 닫았다.


돌아오는 길에 아나렉샤는 셔틀에서 루 농장을 내려다보았다. 500에이커에 달하는 거대한 농장이 관개 파이프를 두고 끝없이 펼쳐졌다. 흰 옷을 입은 노동자들이 장교와 제국민 틈에 섞여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나렉샤는 그들을 구분해냈다. 손가락으로 수를 셀 수도 있었다. 열 손가락보다 더 많이 필요했다. 수백 명이 그곳에서 정당한 임금을 받지 못 한 채 단순노동을 했다. 아나렉샤는 손가락을 조용히 까딱이다 말고 집어넣었다. 그리고 눈으로 까만 옷을 세기 시작했다. 


지안카를라.
아나렉샤는 손바닥으로 4를 만들다 말고 눈을 감았다.
네가 필요해.


술을 아주 많이 마셔야 할 때였다.
골목에서 벗어나기 위한 이름이 필요했다.
그 이름을 불러줄 친근한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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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기억은 시냇물처럼»
1차/old 2019. 10. 23. 00:55

1.

허겁지겁 정원으로 달려가는 동안 두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떠났을까? 그래도 괜찮아. 하지만, 그 뒤에는 어떡하지?


2.

그 날 아나렉샤는 오전 일곱 시 반에 번쩍 눈을 떴다. 보통은 여덟 시까지 괴로워하며 꿈지럭거리는데, 아침잠이 많기 때문이다. 패드를 확인했더니 AI 마리사로부터 메시지가 와있었다. 과연, 뭔가 있기 때문에 일찍 눈이 떠진 것이로구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으로 대충 빗어 넘기며 메시지를 읽었다. 오늘 하루 대련 보조직을 맡아달라는 제안이었다. 아나렉샤는 메시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다 말고 소스라치게 놀라 튀어 올랐다. 귓불에서부터 찌르르한 통증이 느껴졌다. 벼락처럼 그 이름이 떠올랐다. 코스챠!

‘수락하면, 오늘 하루 정신없겠지….’ 

오후에는 콘스탄틴과 정원을 걷기로 되어있었다. 만약 호출을 받으면 언제가 되었든 그녀를 필요로 하는 누군가를 위해 대련실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마리사에게 대련 보조직 제안을 받은 사실 역시 영광스러운 일이다.

‘약속을 미룰까?’

귓불이 여전히 찌르르 아팠다. 창밖으로부터 새벽의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나렉샤는 방의 조도로 하루의 운을 점쳐보았다. 오늘만큼 화창한 날이 없을 지도 몰랐다. 어쩌면 콘스탄틴이 보고 싶다던 꽃이 내일은 질지도 몰랐다.

아나렉샤는 AI 마리사의 메시지에 답장한 후 패드를 껐다.


3.

‘멍청한 아나렉샤.’

숨이 가쁘기 시작할 무렵, 정원 입구가 보이기 시작했다.


4.

생물학 강의가 시작되기 전에 잠깐 방을 들릴 시간이 있었다. 아나렉샤는 서랍을 열고 그동안 모아둔 보급용 실삔을 꺼내 거울 앞에 섰다. 심각하게 고민을 거듭해 왼쪽 머리카락을 고정시켜 귀가 보이도록 해보았다. 그러자 새빨간 귓불이 드러났다. 어제보다는 붓기가 많이 빠졌는데 괜찮은 건지는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드러낸 적이 없는 귀를 내놓고 있어 기분이 이상했다. 아나렉샤는 오른쪽도 마저 올리려다 말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고백하자면 하루 종일 귀가 만지고 싶어서 어쩔 줄 몰랐다. 여전히 귀걸이가 제대로 달려있는지, 혹시 꼭지가 빠지지는 않았는지, 씻을 때 보석 알이 떨어지지는 않았는지 걱정되어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생물학 시간에도 한 손으로는 필기를 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자꾸만 귀 뒤를 문질렀다. 콘스탄틴이 보았더라면 뭐랄까, 가자미 같은 눈으로 ‘만지지 말라고 했지’라고 말했을 지도.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귓불로 올라가는 손을 연거푸 내려 책상 위에 얹어두었다.


5.

정원은 열려 있었다. 아나렉샤는 잠깐 문고리를 붙잡고 숨을 골랐다. 대련이 끝나자마자 줄곧 달려와서 숨을 쉬기가 무척 힘들었다. 무려 복도 끝에서부터 끝까지, 3층 거리를 쉬지 않고 뛰어오른 것이다.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이 느껴졌다. 손을 더듬어보니 삔이 감쪽같이 사라져있었다. 뛰다가 흘린 모양이었다.

아나렉샤는 눈을 감고 후, 심호흡을 했다.

‘바보 같아….’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으면 서운하다.

설령 실행되더라도 완벽하지 않으면 변함없이 속상하다.


6.

정원에는 이름모를 꽃들이 잔뜩 피어 있었다. 과연 날씨가 좋았고 콘스탄틴이 찾던 꽃도 거기 있던 모양이었다. 좁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길목을 지날 때, 콘스탄틴이 파란 꽃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저건가?” 옆모습을 쳐다보았다. 아나렉샤는 생각했다. ‘그늘로 들어가고 싶지 않은데.’ 왜냐하면 빛이 있는 쪽이 좋으니까.

어제의 일이 떠올랐다. 귀를 뚫기 직전에 두 사람이 지었던 표정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했다. 콘스탄틴은 비장하고 어딘지 전문적이었고, 아나렉샤는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귀를 관통할 때는 으드득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둘 다 조금 놀랐다. 귓바퀴를 잡고 있던 콘스탄틴의 손이 조금 느슨해졌던 것을 기억한다. 그 때 겁이 났었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그런 뒤에는 사실 자긴 그렇게 겁이 나지는 않았다고 말하려고 했다. 가든에서도 이런 일을 함께 한 쪽은 콘스탄틴이니까 말이다. 패드에서 호출이 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물어보았을 것이다. 콘스탄틴이 막 가든에서의 이야기를 하려던 참이었다. 두 사람은 인공 시냇가를 앞에 두고 있었다. 패드의 호출 신호를 듣자마자 아나렉샤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멈추어 섰다.

“왜?” 콘스탄틴은 묻자마자 무슨 일인지 이해한 얼굴을 했다.

잠깐 시냇가를 쳐다보던 콘스탄틴이 물었다.

“가야하지?”

아마 그때 아나렉샤는 울상을 지었을 것이다.


7.

정원에 들어서자 조금 쌀쌀한 공기가 느껴졌다. 아까보다 어두워진 정원에는 빛이 많지 않았다. 아나렉샤는 한 손에 쥔 물건을 다른 한손으로 옮기고는 손을 붕붕 휘저어 땀을 말렸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줄기가 조금 뭉개져 있었다. 방에서 가지고 올 때는 좀 더 싱싱했던 것도 같은데. 어쩌면 주변이 어두워서 그렇게 보이는 걸지도 몰랐다.

시냇가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나무가 드리워 그림자가 졌다. 그렇게 늦은 시간도 아닌데 캄캄한 한밤의 동굴을 지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나렉샤는 걸어가는 동안 자신이 줄어들고 있는 것을 느꼈다. 키가 조금씩 작아져 생도복이 헐렁거리고 신발이 끌렸다. 그런 채로 열두 살까지 돌아갔다. 시냇물 소리가 들렸다. 어디선가 탄내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나렉샤는 우뚝 멈추어 서서 빛을 반사하며 튕겨져 오르는 물방울을 보았다. 시냇가 앞에서 뒤통수가 고개를 돌렸다. 타이탄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나렉샤는 심호흡을 했다.

“30분이나 걸려서 미안해.”

쥐고 있던 꽃다발에서 꽃잎이 줄줄 떨어졌다.


8.

하지만 말해야 하는 것과, 말하고 싶은 것을 종종 구분하지 못한다. 어쩌면 아까, 패드에서 알람이 울리지 않았더라도 아나렉샤는 콘스탄틴에게 물어보지 않아서 뒤에 하고픈 말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런 법이니까. 포기하는 일들이 늘어나는 것 말이다… 어른이 되어가는 감각이란 이런 걸지도. 그렇지만 언젠가 흙을 뒤집어 쓴 콘스탄틴을 구덩이에서 건져올렸을 때에는 제대로 물어보았다. 무섭지 않았어? 그래서 그 뒤의 말도 할 수 있었다. 돌아가자.

포기한 말과 행동은 어디로 흘러가고 마는 걸까. 만약 인간도 AI처럼 DB가 있다면… 그런 것들은 어디로 흘러가 퇴적되는 것일까.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진다면 서운하다. 설령 실행되지 않더라도 스스로는 기억하고 있는 편이 좋다. 파란 꽃에 대해 이야기하던 그 애의 옆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햇빛, 얼굴에 드리우던 조도를 보면서 아나렉샤는 생각했었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잊어버릴 것 같아.

하지만 정신없이 정원으로 달려오는 도중에 아나렉샤는 결국 그 순간의 말들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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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못되지 않았다»
1차/old 2019. 10. 22. 16:41

룸메이트가 신경 쓰인다. 이것은 불길한 예감이다.
아나렉샤는 악시온 알레프와 생활한 지난 이주일 간의 데이터를 정리해보았다.

첫째로, 알레프는 레고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미니블럭 함대다)

아나렉샤는 손재주가 나쁜 건 아니지만, 뛰어나게 좋은 것도 아니라서 그런 분야에는 영 관심이 없다. 가든에서도 조립이나 수리와 관련된 과목이 등장하면 빠르게 흥미를 잃었다. AO2에서 현식스케 5세를 만났을 때에도 심드렁한 감상이 떠오른 건 그래서였다. 룸메이트 알레프에게는 바닥이나 침대에서 미니블럭 함선을 조립하는 취미가 있었다. 마음에 드는 함선에는 꼭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유감스럽게도 네이밍센스는 형편없었다. 현식스케라니.

언젠가 알레프가 자리를 비운 틈에 현식스케들을 감상한 적이 있기는 했다. 울퉁불퉁한 면 없이 매끄럽게 칠해진 등, 부드럽게 잘 빠진 선으로부터 알레프가 느끼는 애정을 느껴보려고 노력해보았지만 잘 되지는 않았다. 

둘째로, 알레프는 못됐다.

종종 알레프가 방바닥에 레고 조각을 흩뿌려 놓을 때가 있다. 아나렉샤가 밟았으면 해서 거기 놓는 것이다. 며칠이 가도록 치우지도 않는다. 이런 술수에는 통달했다고 자신했지만, 화장실 매트에 발을 올리다 말고 레고를 밟은 뒤로는 한순간도 방심할 수가 없게 됐다. 모두 다 아는 사실이지만 레고를 밟는 순간은 정말 아프다. 아나렉샤의 경우 머리카락이 위로 삐죽 솟구쳐오를 정도다. 눈물이 고일 때도 있다. 

아나렉샤를 제일 짜증나게 만드는 건 레고를 밟자마자 고개를 돌렸을 때, 반드시 눈이 마주치고 마는 알레프의 등장이다. 알레프는 언제나 뺀질거리는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동그란 눈을 접은 후에 난처하게 웃는다. 그런 후 어쩔 수 없었다는 것처럼 군다. 때려주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세 번째, 알레프는 잠버릇이 있는 것 같다.

새벽에 종종 침대에서 떨어져 둔탁한 소리를 낸다. 첫날 그 소리를 들었을 때 아나렉샤는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일어나 바닥을 확인했다. 떨어진 알레프는 매번 화장실에 가려고 했다면서 도도하게 일어나지만, 최근부터 아나렉샤는 그 말을 믿지 않게 됐다.

네 번째, 알레프는 얼굴점 클럽 초창기 멤버다.

룸메이트 이상으로 엮기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이렇게 됐다. 

그 외에도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일곱 번째를 더 쓸 수 있다. 이주일은 꽤 긴 시간이었다.

지난 주에 아나렉샤는 알레프의 레고를 정통으로 밟는 비극적 경험을 했다. ACOTS가 들썩일 만큼 비명을 지르면서, 아나렉샤는 다짐했다. 피의 복수를 내리리라. 응징하리라. 처벌해서 다시는 이런 짓을 할 수 없도록 만드리라. 알레프는 복도에서 태평하게 감말랭이를 먹다 말고 덜미를 잡혔다. 알레프는 별로 당황하거나 미안해하지도 않았다. 대신 감말랭이를 먹을 거냐고 물었다. 

아나렉샤는 AO2로 돌아가면 현식스케들을 치워버릴 거라고 다짐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얼굴점 클럽의 창시자이자 아나렉샤에게 종종 도움이 되는 조언을 건네는 콘스탄틴은 알레프가 그렇게 나쁜 친구는 아닐 거라고 넌지시 언급했다. 아나렉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 그런 일을 벌이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슬쩍 말을 얹어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콘스탄틴의 말에 따르면, 알레프는 마음에 드는 상대의 발 밑에 지뢰를 설치해 그 폭발 장면을 감상하는 취미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갈수록 콘스탄틴의 말이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알레프는 바닥을 치우고 레고를 제자리에 보관하기 시작했고, 자신과 새벽에 대화를 나누려고 시도하거나 아직 끝내지 않은 과제를 해치우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건네기 위해 복도를 질주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러니까 알레프는 생각보다 아나렉샤를 싫어하는 게 아닐 수도 있었다. 방법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노력하는 쪽일 수도 있다. 아나렉샤는 귀여운 것과 노력하는 것들에게 너그럽다. 그러니까 어쩌면 알레프는, 바닥에 흩뿌려진 난잡하고, 기분 나쁘고, 자나깨나 아나렉샤를 찌르려 드는 레고조각이 아니라 잘 조립되어 특별한 이름이 붙은 함선 같은 아이일 수도 있는 게 아닐까? 그럴 지도.


아나렉샤는 AO2 문앞에서 품에 든 블럭 함대 세트 박스를 한 번 점검해보았다. 이틀 전 마리사를 통해 요청한 것으로, 모델명은 같은 악시온 출신의 동기들에게 자문한 것이다. 사달수드가 특히 많은 도움을 주었다. 알레프가 자리를 비웠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당당하게 방으로 들어선 아나렉샤는 잠깐의 고민 후 함대 세트 박스를 책상 위에 얹어놓고 나왔다.

40분 후, 아나렉샤는 AO2에 들러 책상 위를 확인했다. 박스는 그대로 얹어져 있었다. 알레프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아나렉샤는 다른 수업을 듣기 위해 방을 나왔다.

50분 후, 아나렉샤는 AO2에 룸메이트가 귀가했는지 AI 마리사에게 정보를 요청했다. 갑자기 괜한 짓을 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든 아나렉샤는 수업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달려 AO2의 책상에서 박스를 제거했다.

2시간 후, 아나렉샤는 AO2에 들러 책상 위에 박스를 다시 얹어놓았다. 

2시간 30분 후, 허겁지겁 AO2로 뛰어온 아나렉샤가 박스를 침대 밑으로 치워버렸다.

3시간 후, 아나렉샤는 AO2에 들러 책상 위에 박스를 다시 얹어놓았다. 

이런 짓을 2시간 동안 더 반복했다.

5시간 10분 후, 아나렉샤는 마침내 마음을 결정했다. 선물을 치우고 없던 일로 하자. 마지막으로 마음을 다잡고 나니 제법 비장한 마음도 들었다. 마지막 수업이 끝나고 부리나케 달려온 아나렉샤는 텅 빈 AO2에 들이닥쳤다. 박스는 여전히 알레프의 책상 위에 얌전히 얹어져있었다. 하도 만져서 구겨진 표지가 보였다. 아나렉샤는 박스를 들어올리다 말고 마지막으로 고민에 빠졌다. 괜찮을까? 

괜찮을 지도…, 

아니 역시 괜찮지 않을 지도…….

엉거주춤 책상 앞에 선 아나렉샤는 복도에서 들리는 발소리를 깨닫지 못하고 박스를 도로 책상 위에 얹어두었다. 그 다음에, 그 일이 있었다. 아나렉샤는 고개를 돌리다 말고 문앞에 서있는 알레프를 보았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레고를 밟지 않은 상태로 마주친 알레프의 얼굴,
에 붙은 삼각형 모양 점,
과 꽤 고약한 잠버릇과 그것을 수습하는 태도의 귀여움,
같은 것을 막 깨달은 참이다.
그 순간에,

언젠가 알레프가 자리를 비운 틈에 보았던 현식스케들이 떠올랐다. 꼼꼼하고 정성스럽게 조립된 단면들을 보며, 아나렉샤는 생각했었다. 그렇게 사방팔방 요란하게 흩뿌려놓고는 이런 것을 만들다니. 알레프의 행동거지는 꼭 레고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건 시작의 단계일 뿐이다. 알레프는 결국 그 모든 조각으로 함선을 만들고 이름도 붙여주지 않는가. 그러므로 뭔가 수정해야 한다면, 아나렉샤는 두번째 항목을 수정하겠다. 그런 건… 싫지 않아, 라고 생각했었다.

아무튼,
어쨌든 간에,
뭐가 됐던 간에,
알레프에게 딱 걸리고 만 것이다.


5초 뒤 아나렉샤의 머리카락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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