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우리의 인사_1 

 바르바라의 작은 이모 라이라 체사레는 바퀴 달린 의자를 탔다. 어릴 적에 열병을 앓은 후 다리를 못 쓰게 되자 목수 아르뎅 아저씨가 만들어준 것이다. 

 드로키스가 세미니온의 대지를 밀고 내려왔을 때, 체사레 식구들은 사업을 정리할 때가 왔음을 직감했다. 이미 룬넨의 몇몇 가구는 짐을 싸고 있었다. 체사레들은 짐을 정리하고 가구를 불태운 뒤에 모든 물건을 치웠다. 마치 룬넨에 자신들이 존재했다는 흔적을 모조리 지워버리려는 것 같았다. 전나무로 엮은 지붕을 올린 체사레 여관은 하루 만에 거짓말처럼 텅 비어버렸고, 식구들은 눈이 쌓인 숲에 얕은 발자국을 남기며 쥐도 새도 모르게 모습을 감췄다. 떠나기 전에 체사레 식구들은 속이 빈 오두막집을 내려다보면서 자신의 검지와 중지, 약지를 나란히 펼치고 그 위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세손가락을 들었다. 

  체사레들은 라이라 체사레의 휠체어를 번갈아 밀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해가 지기 전에는 반드시 작은 마을을 방문해 짧게 머물렀고, 해가 뜨면 다시 숲을 헤치고 동쪽으로 나아가면서 꾸준히 이동했다. 라이라 의자의 바퀴가 지나간 자리에는 두 줄기의 깊은 홈이 팼다. 작은 짐마차가 지나간 것 같은 흔적이었다. 

 이동한지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 때, 체사레 식구들은 자신들의 운을 시험해야만 하는 순간을 마주했다. 드로키스의 잔병들이 숲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눈치가 빠른 사기꾼 집안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아났다. 그 때 라이라의 휠체어를 끌고 있던 것은 바르바라의 사촌 릴리버드 체사레였다. 릴리버드는 새처럼 가벼웠지만 라이라의 휠체어는 그렇지 않았다. 달음박질하며 의자를 밀던 릴리버드가 뒤쪽의 시야를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리던 순간, 돌부리에 걸린 의자가 헛바퀴를 돌더니 그대로 쓰러졌다. 의자는 넘어지면서 큰 소리를 냈다. 뒤집어진 의자 바퀴가 빙글빙글 돌았다. 라이라는 눈 속에 얼굴을 박았다가 벌떡 고개를 들었다. 

 릴리버드는 침착하게 라이라를 일으켜 의자에 앉히려 했지만 라이라가 릴리버드를 제지했다. 조용히 하고 들어. 아주 단호한 목소리였다. 릴리버드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귀를 기울였다. 갑옷과 검이 부딪힐 때 들려오는 금속성 타격음의 간격이 짧아지고 있었다. 근처를 맴돌던 희미한 발소리들이 방향을 잡은 것처럼 몰려들었다. 드로키스 병사들이 오고 있었다. 

 릴리버드는 라이라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라이라는 냉정한 얼굴로 릴리버드를 응시했다. 네가 할 일을 해. / 싫어요. / 똑똑하게 굴어. / 체사레는 체사레를 배반하지 않아요. / 이건 배반이 아니야. 라이라는 으르렁거렸다. 이건 개죽음이지. 

 릴리버드는 듣지 않았다. 그녀는 품에 간직한 체사레의 단도를 꺼내들고 두 다리를 벌려 땅을 단단하게 딛고 섰다. 그러자 라이라가 거칠게 릴리버드의 손목을 붙잡아 끌고는 힘을 실어 뺨을 후려쳤다. 그런 일은 처음이었다. 식구들은 손찌검을 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한이 있더라도 집안 내부에서 그런 일들은 금기시되었다. 하지만 라이라는 강력하게 릴리버드를 후려쳤다. 마치 그렇게 하면 릴리버드의 감정이 몸 밖으로 튕겨져 나오고, 그녀의 이성만이 그 육신에 남아있을 것처럼 말이다. 발소리들이 지나치게 가깝게 느껴지는가 싶더니 몇 발자국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칼을 뽑는 소리가 났다. 릴리버드는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감싸 쥐고 라이라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라이라는 두 팔을 벌린 채 단호하게 명령했다. 어서 가! 릴리버드는 그 품안으로 뛰어들어 있는 힘껏 라이라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왼뺨에 입을 맞추고 떨어져 나왔다. 

 떠나기 전에 릴리버드는 세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라이라를 향해 들어보였다. 라이라는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병사들을 똑바로 응시하느라 릴리버드에게 등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릴리버드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는 것처럼, 뒤돌아보지 않고도 그 행동을 똑같이 돌려주었다. 두 사람은 잠시 세손가락을 들고 그렇게 있었다. 잠시 후, 라이라는 손을 내렸고 릴리버드는 달아났다. 

 릴리버드는 숲을 벗어난 이후에야 자신의 주머니가 가벼워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달음박질을 멈추고 망토를 들추어 허리띠를 살폈다. 있어야 할 자리에 단도가 없었다. 릴리버드는 라이라가 마지막으로 훔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바람이 불자 금발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릴리버드는 고개를 쳐들고 큰 소리로 웃으며 자신의 이마를 때렸다. 목소리가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웃음소리는 멈추지 않고 이어졌다. 그러다 하늘이 두 갈래로 갈라졌다. 여명의 경계가 세상을 가르며 낮과 밤을 끌어내렸다. 

 릴리버드는 그제야 웃는 것을 멈췄다. 

 

 우리의 인사_2 

 첫 번째 마법진에 다섯 사람을 세워두고 수도권으로 향하기 전, 바르바라는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천장이 조금씩 흔들릴 때마다 어깨 위로 흙이 떨어졌다. 지상은 비명과 함성, 아우성과 신음소리가 한데 뒤섞여 아비규환이었다. 바르바라는 뒤돌아 빛나는 진 위를 지키고 있는 칼리오페와 브륀힐드, 펜시브, 헤일리와 리온의 얼굴을 차례로 응시했다. 그들의 얼굴을 보는 게 마지막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를 해야 할 때였다. 

 바르바라는 세손가락에 입을 맞추고 그들을 향해 조용히 들어보였다. 거기 있어. 

 그런 후 그녀는 떠났다. 

 그게 바르바라와 다섯 사람의 마지막이었다. 

 

 3. 

 마법이 실행된 이후에도 바르바라는 총 열 다섯 명을 더 베어 죽였다. 후퇴가 결정된 드로키스 군들이 무기를 챙겨 떠날 때, 바르바라는 마리안이 하던 것처럼 바닥에 침을 뱉어보려다 그만두었다. 그건 체사레의 방식이 아니었으므로 바르바라에게 아무런 위안도 주지 못 할 테였다. 바르바라는 피에 젖은 무기를 내려놓고 남은 이들과 함께 왕성으로 돌아갔다. 

 선루스 써드빌 기사단은 종전 선언이 오기 전까지 왕의 곁에 머물러야 했다. 마법진에 섰던 열 명의 동료들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데아 기사단 본부로 옮겨지고, 이후에 몇몇이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바르바라는 그들과 만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슬그머니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아직 복귀 허가가 떨어지기도 전이었다. 왕명을 어겼으니 오즈월드가 옷을 벗어놓고 가라고 명령할지도 몰랐다. 상관없었다. 오즈월드와 다시 만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엉망진창으로 짓밟힌 정원을 가로질러 그림자처럼 유유히 왕성을 빠져나갔다. 복귀 허가가 떨어진 건 그녀가 왕성을 떠난 바로 다음 날이었다. 그 무렵 바르바라는 말을 달려 남향하고 있었다. 도트라를 벗어나 몬테나를 거쳐 에이브리스로 향했다. 써드빌까지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차가운 공기에서 피 냄새가 가시는 게 느껴졌다. 전쟁이 끝났구나… 바르바라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영웅이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이들을 영웅으로 만들어놓고, 전쟁이 물러가고 있구나. 

 써드빌 관문을 통과했을 때, 시간은 늦은 밤이었고 문지기는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언덕 위에 말을 메어놓고 마을로 내려갔다. 불을 밝힌 집은 한 곳도 없었다.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오로지 파도소리만이 맹렬했다. 바르바라는 잠시 해변 앞에 우두커니 서서 달을 응시했다. 희끄무레하고 창백한 빛이 검은 물결을 따라 일렁이며 수평선과 하늘의 경계를 나누고 있었다. 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겨있던 바르바라는 자신이 서있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불현 듯 깨달았다. 아주 오래 전 그곳에서 실수를 저질렀던 것이다. 요를 깔고 요한과 몸을 겹쳤던 순간이 떠올랐다. 바르바라는 그곳에서 오랜 친구의 약혼자를 훔쳤다. 그 때 타지아는 체사레 여관 2층에 누워 훌쩍이고 있었을 것이다. 홀로 언덕을 따라 내려온 바르바라의 발자국 위에 언젠가의 바르바라와 요한이 걸었던 발자국이 뒤섞이더니 순식간의 과거의 기억이 현재를 점령했다. 바르바라는 갑자기 과거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바로 옆에 이십 대의 바르바라와, 마찬가지로 이십 대의 요한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헐벗은 등과 어깨, 미끄러져 내려오는 금발을 볼 수 있었다. 그 아래에는 요한이 짓눌려 있었다. 두 사람은 몸을 섞으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귀족들이 모두 같지는 않아요. / 증명할 수 있는지? / 원하신다면. 

 인생에서 마주하게 되는 선택의 순간들, 실수와 실패, 흘려보낸 시간. 바르바라는 신의 눈동자를 원했다. 인간의 육신에서 튕겨져 나온 영혼의 상태로 세상을 관조하고 싶었다. 그 날, 그 밤, 그 해변에서 그랬던 것처럼… 바르바라는 신의 눈동자를 빌어 해변을 내려다보던 순간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인간의 육신에 남아 요한과 죄를 저지르는 것을 택하는 대신 걸어온 길을 되짚어 여관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2층에서 울고 있는 타지아의 곁으로 돌아가 그녀의 뺨을 때리고는 너를 증오하지만 복수하고 싶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과거는 무슨 수를 써도 과거로 남는다. 후회하는가? 그렇다면 바르바라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시간을 돌려 해변의 일을 잘라낸다면 그 뒤에 있었던 일 역시 재구성해야만 했다. 바르바라는 삶을 살아간다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하나의 길고 긴 길이며, 선택은 영속성을 가지고 있었다. 한 번 선택하면 길이 뒤바뀌었다. 무엇을 선택했는지를 잊은 순간에조차 선택은 삶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바르바라가 기사단에 들어가기로 결심한 건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지만 궁극적으로 그 선택은 서른 살의 바르바라를 도트라로 이끌었다. 바르바라는 마법을 얻었고 목숨을 조금 버렸으며 사람을 죽이고 전쟁을 멈추었다. 그러니까 선택의 순간이란, 결국 삶을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별한 사건 같은 건 없어도 무방했다. 뚜렷한 징후가 없어도 바르바라는 언제든 선택할 수 있었고 삶의 방향을 바꿀 수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오래 전에 선택한 순간이 자신을 휘두르고 있다는 사실을 도트라에 가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는 검을 내려놓을 때가 왔다는 것을 직감했다. 

 이십 대의 바르바라가 요한의 목을 조르다 놓아주었다. 과거의 환상이 막바지에 치닫고 있었다. 두 개의 헐벗은 몸이 들썩이며 신음을 주고받았다. 서른 살의 바르바라는 우두커니 서서 자신의 옆에서 벌어지는 정사의 장면을 응시했다. 

 그 때, 예상치 못 한 일이 벌어졌다. 해변 끝에서부터 누군가 천천히 걸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었다. 어두운 한밤의 해변으로 늘어진 발자국을 따라 누군가 한 발 한 발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상대의 긴 금발머리가 흩날리며 얼굴이 뚜렷하게 보였다.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건 이십 대의 타지아였다. 그녀는 삼십 대의 바르바라를 똑바로 응시하며 걸어오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몸을 돌려 환상 속의 타지아를 향해 똑바로 섰다. 타지아는 차분하고 창백한 얼굴로 세 사람 몫의 발자국이 찍힌 해변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으며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다 마침내 바르바라와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다. 침묵이 있었다. 

 바로 다음 순간, 거센 바람이 불더니 파도가 해변 깊숙한 곳까지 거칠게 침범했다. 바르바라는 이십 대의 자신과 요한의 발자국이 파도에 씻겨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환상이 끝나고 과거의 순간이 원래의 시간선으로 회귀했다. 정사를 나누던 두 사람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러나 발자국 두 개는 그대로 남아있었다. 삼십 대의 바르바라의 발자국과…, 

 바르바라는 자신의 앞에 선 타지아의 창백한 발등을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타지아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구름이 지나면서 빛이 사라져 그림자가 두 사람을 덮었다. 지독한 어둠의 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더니 다시 희끄무레한 달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타지아의 창백한 얼굴이 달빛을 반사하며 환하게 빛났다. 

 “…난나.” 

 서른 살의 타지아가 나지막이 말했다. 

 

 4. 

 바르바라는 말을 잃고 그곳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파도소리만 들렸다. 두 사람은 침묵한 채 서로를 응시하는 것으로 순간과 순간을 흘려보냈다. 타지아는 조금 나이가 들어보였지만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름답고 고귀해보였다. 귀족적이었고 품위가 있었으며 어딘지 지쳐보였다. 짙은 금발은 여전히 길게 늘어져 있었고 눈동자는 깊고 진한 파란색이었다. 바르바라는 대체 어째서 이 야심한 시간에 타지아가 깨어있는 것인지를 가장 먼저 의문스러워했다. 타지아가 써드빌에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기 때문에 상황을 이해하는 대신 한 구석으로 치워버린 것이다. 

 한참 뒤에, 타지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오는 걸 봤어.” 

 바르바라는 당황했다. “아. 그래?” 

 “그래, 관문 근처에 있었거든,” 타지아가 작은 목소리로 피곤한 듯 덧붙였다. “기다리느라…,”  

 “나를 기다렸니?”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채 확인하듯 되물었다. “…일이 남았니?” 

 타지아는 조금 웃다가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이 어른스러워보였다. 바르바라처럼 보이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실감했다. 서른 살의 타지아가 갑자기 너무 멀게 느껴졌다. 

 “오, 난나.” 타지아가 중얼거렸다. “좀 더 일찍 왔어야 했는데.” 

 “내 앞에서 후회하는 거니?” 

 “네가 죽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마찬가지야.”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쏘아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바다를 응시하면서 말을 골랐다.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바르바라는 이런 순간에 대비해본 적이 없었다. 오 년만의 재회였다. 마지막으로 타지아와 나누었던 대화를 되짚어 보려다 그만두었다. 엉망진창이었다. 풀지 못 한 울퉁불퉁한 문제 위로 고운 모래가 쌓이듯 시간이 그 위를 에워싸 마침내 평평해진 것뿐이다. 타지아가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알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바르바라는 동시에 깨달았다. 타지아가 이곳에 온 이유가 바로 지금의 타지아를 구성하고 있는 전부라는 것을. 

 이것 역시 오래 전의 선택이 가져온 순간이라는 것을. 

 

 5. 

 두 사람은 함께 해변을 걸었다. 타지아는 몇 가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지난겨울과 봄의 이야기, 자신이 거주 중인 도트라 인근의 영지성과 요한이 가꾸는 영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구나 짐작하고 상상할 수 있을 법한 부유한 귀족들의 생활을 덤덤한 투로 이어나갔다. 타지아의 말투는 예전 같지 않았다. 어딘가 가라앉아있었고, 차분하고 침착했으며, 이야기를 하던 중간에 생각을 정리하느라 단어를 다시 고르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그런 타지아가 무척이나 낯설었다. 어느 순간에 철이 들어버린 아이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모르는 시간 선으로 사라졌던 타지아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그러니까 전혀 다른 사람이 타지아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되돌아 온 것만 같았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하기도 했다. 정말 궁금해서라기보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꺼내기 전까지 시간을 벌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작정인지를 물었다. 계속 이곳에 머물 거냐고 물어보기도 했다. 어떻게 지냈는지도 물어보고 이반의 이야기를 잠깐 꺼내기도 했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면서 질문에 짧게 대답했다. 기사를 그만둘 거라고 했고, 떠날 거라고 했고, 잘 지내왔으며 이반 역시 잘 지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 후에는 떠나기 전에 타지아를 만나게 되어 반가웠다고 덧붙였다. 너는 모르겠지만, 바르바라가 말했다. 나는 이따금 네 생각을 했어. 

 타지아는 말이 없었다. 나란히 걷던 걸음이 뒤처지더니 종국에 멈추어 섰다. 바르바라는 뒤를 돌아 우두커니 선 타지아를 응시했다. 타지아는 발끝을 노려보다 마침내 고개를 들어 바르바라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흔들림 없이 부딪혔다. 그 누구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타지아의 눈동자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기다렸다. 기다릴 수 있었다. 

 잠시 후, 타지아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바르바라는 그녀가 자신을 따라잡기를 기다리며 서 있다가 다시 발을 맞추었다. 

 “…네가 그렇게 말해줘서 기뻐.” 타지아가 속삭이듯 말했다. 

 “사실이니까.” 

 “거짓말이라도 기뻤을 거야.” 

 “그러니.” 

 “네가 날 미워하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오, 타지아.” 바르바라는 고개를 저으며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오랜 시간이 흘렀단다.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어.” 

 “내겐 짧았어.” 

 “내게는 길었단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걷다가 멈추어 섰다. 해변의 끝이었다. 암벽으로 길이 막혀 있었다. 바르바라는 뒤돌아 자신들이 지나온 길을 눈으로 짚어보았다. 발자국은 나란하지 않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며 서로 어지럽게 얽혀있었다. 분명 나란히 걸어왔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지. 하지만 그런 것들이야말로 삶이다. 

 타지아가 암벽을 손으로 짚었다가 바르바라처럼 뒤를 돌았다. 파도가 쏴아아 들이닥쳤다. 

 “드로키스 군이 쳐들어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써드빌로 갈 마음을 먹었어.” 타지아는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네가 이미 떠나고 없었지. 네 어머니를 만나볼 생각도 못 했어. 부끄러웠거든.” 

 “마리사는 너에 대해 아무 생각도 없어.”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 

 바르바라는 잠시 생각했다가 인정했다. “그래, 아무도 모르는 일이겠구나.” 

 “…….” 

 타지아는 고개를 들었다. 

 “난나.” 

 “응.” 

 “무슨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마찬가지야.” 

 두 사람 사이로 바람이 불었다. 타지아는 잠시 달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보고 싶었어.” 

 “…….” 

 “네가 죽으면 안 된다고 에아께 빌었어.” 

 “그랬니.” 

 “응.” 

 타지아는 잠시 머뭇거리다 팔을 올렸다. 

 “헤어지기 전에 한 번만 안아도 될까.” 

 바르바라는 마른 침을 삼키고는 한 박자 느리게 대답했다. 

 “그럼.” 

 그래서 두 사람은 포옹했다. 타지아의 팔이 덩굴처럼 바르바라를 에워쌌다. 바르바라는 타지아가 끝내 자신이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을 하지 못 할 것임을 직감했다. 타지아가 힘주어 바르바라를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어색하게 그 품에 안겨있다가 마침내 눈을 감았다. 타지아는 울지 않았다. 바람이 불어서 타지아의 머리카락이 바르바라의 뺨을 조금씩 할퀴고 지나갔다. 

 타지아는 침을 삼키면서 아주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르만도가 보고 싶다면 언제든 내 성으로 와도 돼.” 

 “그 애 생각은 안 한지 오래 됐어.” 

 “나는 정말 괜찮아.” 

 “나도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야.”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해도 돼.”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마주안고는 팔에 힘을 주었다. 

 바르바라가 속삭였다. 

 “그 애를 때린 적 있어?” 

 타지아는 바르바라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 애를 네가 직접 돌보니?” 

 타지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컸니?” 

 “이제 글을 써.” 

 “건강하니?” 

 “눈을 맞으면서 뛰어다녀.” 

 “그 애를 사랑해?” 

 “그 무엇보다.” 

 “네 가족이 그 애한테 손댄 적 있어?”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아.” 

 바르바라 역시 타지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그 애에게,” 

 바르바라는 잠시 말을 골랐다. 

 “빼앗는 법 말고 지키는 법을 가르치도록 해.” 

 “그렇게 할게.” 

 타지아는 목메는 소리로 한 번 더 중얼거렸다. 

 “난나 네 말대로 할게.” 

 “너처럼 재수 없게 키우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타지아가 힘 빠진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래. 알겠어.” 

 “절대 그 애를 때리지 마.” 

 “맹세할게.” 

 “맹세 정도로는 안 돼.” 

 바르바라는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때리면 널 죽여 버릴 거야.” 

 타지아는 고개를 연거푸 끄덕였다. 그 바람에 바르바라의 몸이 마구 흔들렸다. 타지아는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절대로 약속을 어기지 않겠다고 말했다. 미안하다고 말할 때는 결국 목이 메여 한 박자를 쉬었다. 바르바라는 울지 않았지만 힘이 다 빠진 사람처럼 그 품에 안겨있었다. 파도소리가 멀어지고 오로지 타지아의 목소리만이 귓가에 가득 차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타지아가 천천히 바르바라에게서 떨어져나왔다. 그러나 몇 걸음 더 떨어지기 전에, 고개를 저으며 다시 바르바라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이번에는 아예 바르바라의 허리가 휘청거릴 만큼 세게 끌어안았다. 

 타지아가 속삭였다. 

 “…사랑해, 난나.” 

 “…….” 

 바르바라는 손을 올려 타지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알아.”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나는 언제나 그랬어.” 

 다음 순간, 바르바라는 자신의 어깨가 조금 축축해졌다는 걸 알아차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달빛으로 일렁이는 거대한 수평선의 앞에서 부둥켜안은 채로 한동안 그렇게 서있었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어깨 너머로 이십대의 자신과 타지아와 이반을 보았다. 그들 사이에 아르만도가 걸어가고 있었다. 아르만도는 부둥켜안은 자신들을 가리키며 이반에게 무언가를 질문했다. 이반은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춰주고는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고 그대로 아이를 들어올렸다. 언젠가의 장면이 그대로 반복되고 있었다. 좋았던 시절들. 이반이 아이에게 목마를 태운 채 돌아가자, 뒤따라 걷던 타지아와 바르바라 역시 등을 돌렸다. 네 사람은 해변의 반대편을 향해 끊임없이 걸어 나갔다. 뒷모습이 작아지고 작아지다가, 마침내 사라졌다. 한 시절이 지나갔다는 생각이 들어. 언젠가의 바르바라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반은 대답했다. 좋았던 시절은 언제나 흐르는 물처럼 떠나가지. 

 ‘맞아’라고 바르바라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좋은 시절이었지.’ 정말로 좋은 시절이었어. 

 

 우리의 인사_6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배웅하지 않았다. 대신 해변에 남아 달빛이 수평선을 가로지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겨울바다의 바람은 쌀쌀맞고 거세고 심술궂었다. 바르바라는 한동안 해변이 내려다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에 앉아 풍경을 응시하다가 마침내 옷을 털고 일어났다. 타지아가 떠나자 자신이 써드빌에 남겨둘 수밖에 없던 모든 미련이 한곳에 모여 모래알처럼 빠져나간 것 같았다. 그러자 몸과 마음이 몹시도 가벼워졌다. 타지아가 나타난 것이 운명처럼 느껴졌다. 

 아직 밤이 끝나기 전에, 바르바라는 선루스 기사단 본부로 돌아갔다. 아무도 없어 텅 빈 본부를 활보하면서 빙글빙글 돌다가 입구, 식당, 복도, 테라스, 숙소, 집무실과 사무실을 순차적으로 방문했다. 바르바라는 그곳에서 자신과 관련된 것이라면 그 어떤 것이든 훔쳤다. 마리안과 두던 체스, 자신이 즐겨 쓰던 깃펜, 쓰다 남은 잉크병과 테사와 나누던 십자말풀이를 모아둔 노트… 오즈월드의 집무실에는 특히 그녀가 훔쳐야 할 것들이 아주 많았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지난 몇 년 동안 작성해놓은 모든 서류, 혹은 자신과 관련된 서류를 모조리 빼돌렸다. 오즈월드가 돌아오면 골머리를 썩일 거라는 생각이 들자 바르바라는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그녀는 선루스 기사단 숙소 역시 방문했다. 그곳에서 동료들의 방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바르바라는 지난 십일 년간 그들과 관계를 나누며 남겼던 모든 흔적이 티끌만큼이라도 남아있지 않게 했다. 마치 처음부터 바르바라 체사레라는 존재가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만들었다. 바르바라는 대련장도 방문했다. 즐겨 쓰던 목검과 자주 착용하던 방패와 아대 따위가 그녀의 발걸음과 함께 하나 둘씩 사라졌다. 몇 시간에 걸쳐 바르바라는 묵직한 주머니에 차곡차곡 지난 십일 년의 세월을 통째로 훔쳐 넣었다. 그러고는 마침내 더 이상 훔칠 것이 남아있지 않자 그곳을 떠났다. 

 바르바라가 마지막으로 방문한 곳은 전나무 집으로 불리는 마리사의 여관이다. 그곳에서 정리할 건 몇 개 남아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조금의 옷과 식기만을 훔칠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마리사 역시 훔쳐야 할지를 고민했다. 하지만 마리사만큼은 그곳에 남겨두기로 했다. 어차피 바르바라가 떠난 것을 안다면 마리사 역시 바르바라를 지워버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체사레의 방식이었다. 그들은 세상 끝에서 해를 훔친 도둑의 자손들이다. 

 다시 써드빌의 가장 높은 언덕을 올랐을 때, 바르바라는 등 뒤로 불어오는 바람과 희미한 여명을 느꼈다. 어느덧 캄캄했던 하늘이 남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바르바라는 뒤돌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달은 어느덧 사라지고, 보라색과 분홍색으로 울긋불긋하게 물든 빛 무리가 바다 끝에서부터 서서히 격상하고 있었다. 태양의 꼬리가 찬란하게 모습을 드러내며 바다를 반으로 가로질렀다. 어둠이 걷힌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르바라는 마리사 체사레가 전나무 집 현관 앞에 서서 언덕을 올려다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람이 불자 금발이 흩날려서 시야가 조금 가려졌다. 바르바라는 나무 옆에 손을 짚고 서서 자신의 어머니를 내려다보았다. 두 모녀는 움직이지 않고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있었다. 마침내, 마리사가 움직였다. 그녀는 고개를 숙여 세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조용히 바르바라를 향해 들어보였다. 

 바르바라는 그대로 돌려주었다. 

 여명이 닥쳐오는 그 새벽, 바르바라는 묵직한 주머니와 함께 안장에 올랐다. 언덕에 메어두었던 말은 여전히 충분히 달릴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고삐를 쥔 채로 관문을 벗어나다가, 찬란한 빛과 함께 물든 써드빌과 그 바다를 마지막으로 돌아보았다. 바르바라의 한 시절이 그곳에 있었다. 사실 여러 시절이 그곳과 연관되어 있었다. 바르바라는 수평선 너머로 보이는 아득한 서네스를, 점처럼 보이는 고대 현자 선루스의 무덤을 바라보았다. 선루스가 어느덧 바르바라의 곁에 서있었다. 바르바라는 선루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다시는 오지 않는 편이 좋아, 하지만 보이는가. 우리가 어디쯤에 서있는지. 선루스가 묻자, 바르바라는 조용히 대답했다. 

 예, 우리는 세상의 끄트머리에 있군요. 새벽의 모서리에요. 

2018/08/25

comments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