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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함찬빈»
1차/old 2019. 10. 22. 16:06

1. 첫인상

그 애,

함찬빈은 세종대왕 동상 아래에서 나를 올려다봤다. “너도 죽고 싶어서 쓰는 거야?” 그 때, 함찬빈의 표정은 동상 그림자에 통째로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구름이 해를 막 스쳐갈 때였다. 나는 그 애 얼굴을 보기 위해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곤 동상에서 뛰어내렸다.

“신입생들이 이름 썼길래 지워준 거야.”

“아… 좋은 선배네.”

함찬빈은 내 명찰을 바라보곤 여러 가지 표정을 지었다. 나는 내 이름에 관한 획일화 된 반응에 익숙한 사람이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해야 아, 또… 정도였을까.

하지만 함찬빈은 나를 이삼신이나 삼신 대신 신이라 부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 애는 내게 허락을 구했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뒤로 함찬빈에게 나는 ‘신이’가 됐다.

 

2.

좋은 애네. 다시 마주칠 것 같진 않지만.

그게 걔 첫인상의 전부다.

 

3.

대체로 그런 예감들은 적중한다. 하지만 이번엔 삼신의 감이 틀렸다.

지난 이주일 동안 학교에서 가장 빈번하게 마주친 얼굴을 꼽으라 한다면 이삼신은 함찬빈이라 대답할 것이 분명하다. 함찬빈은 정말이지, 온갖 곳에서 튀어나왔다. 체육관, 과학실, 복도와 불탄 무용실 주변……. 묘하게 모든 장소는 학교에서 떠도는 유치찬란한 괴담의 근원지들과 맞아떨어졌고, 이삼신은 보이지도 존재하지도 않는 것들을 찾아 학교를 들쑤시는 그 애의 얼굴을 볼 때마다 뭐라 설명할 수 없는 표정으로 웃어야 했다. 안녕. 그렇게 인사하면 그 애는 꼭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어어, 안녕! 그리고 나서 둘은 시덥잖은 이야길 주고받고 언제 그랬냐는 듯 복도를 스쳐지나가는 것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였던 함찬빈의 표정이 ‘아, 또야?’가 되고 종국엔 ‘그래, 난 이해해, 신아’가 됐을 때쯤엔 벌써 봄이 다 갔을 무렵이었고 여름이었고 더웠고 달려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그 때까지만 해도 이삼신은 함찬빈이 오컬트 매니아라는 사실에 대해선 별 다른 생각이 없었는데, 그 오컬트가 왜 하필 ‘문방구에서 500원에 파는 미니 괴담 시리즈’에 나올 법한 구시대적 코드 감성이냐는 것에선 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하지만 타인의 관심이 얼마나 시대에 뒤쳐져있든, 함찬빈이 얼마나 순진하든, 그것은 찬빈의 자유일 뿐이고 이삼신이 간섭할 것은 아니었으므로 금방 잊었다. (이삼신은 자신과 관련 없는 사항들을 종종 뒤로 재쳐 두곤 한다.)

그리고 다시 함찬빈을 만났을 땐 여름의 한복판이었던 것이다. 운동장 정중앙에서 공룡이 된 그 애를 보고 달리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어?

고작해야 그게 다였다는 것이다.

 

4.

그런 옷으론 날 이길 수 없어, 애송이 티라노.

 

5,

여름이 가기 전에 함찬빈을 다시 마주쳤다. 에어컨이 드는 듯 마는 듯 더운 듯 덥지 않은 듯 모호한 편의점 안에서였다. 그 애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문에 붙여준 딸랑이가 비명을 지르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

“아!”

함찬빈은 입을 벌리고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우리 둘은 잠깐 말도 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가, 이내 히죽 웃었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였다.

“여기서 일하는구나.”

나는 물방울이 맺힌 콜라를 집었다가 사이다를 하나 더 집어서 계산대에 올려놨다. 함찬빈은 바코드를 찍곤 “2400원이야. 어, 대타 뛰거든.”라고 대답했다. 나는 함찬빈에게 사이다를 밀었다. 함찬빈이 씩 웃었다. “땡큐땡큐.” 걔가 카운터 한쪽에 밀어놓은 빨대를 내밀었다. 나는 노란색이 좋다고 대답하곤 걔가 내민 빨간색 빨대를 집어갔다. 선택지에 노란 색이 없었기 때문이다. 함찬빈은 그게 참 아깝게 됐다는 투로 말했지만 별로 아쉬울 것까진 없는 일이었기에 우리 둘 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기로 했다. 우리는 잠시 사이다와 콜라를 마셨고 할 말을 생각하다가 그만뒀다. 더 이상 우리는 어색하게 ‘아, 또 만났네.’ ‘그러게, 뭐 하러 왔어?’ ‘아, 난 쌤이 뭘 좀 시켜서…….’ ‘아, 정말? 사실 나도…….’ 라고 이야기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속으로 ‘뻥치시네, 귀신 있나 보러 왔으면서’라고 생각할 구실 자체가 사라진 까닭이기도 했다.

내가 다른 질문을, 그러니까 평상시의 우리 사이에선 절대 나올 수 없는 질문을 시작한 건 그러니까 다 그 이유 때문이다.

“평소에도 여기서 일해?”

 

6. 이삼신은 끊임없이 말한다.

“여기 가만히 앉아 있으니 좀 덥다. 포스 안은 더 더울 텐데… 안 더워?”

“난 마트 캐셔만 해봤어. 편의점은 그래도 앉아 있을 수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 이거 너무 무심한 말이었니?”

“아, 학원은 안 다녀. 저녁엔 동생들 밥해주러 일찍 가는 거야. 너도 그래? 아, 아빠가 해줄 때도 있구나… 우리 아빤 바빠. 엄마도 그렇고… 여하튼 반찬은 다 내가 하는데, 애들 편식이 좀 있어서 항상 남기더라. 기껏 해줬는데 좀 속상하고 또 가끔 때려주고 싶을 때도 있어…….”

“너도 고생이 많네. 바쁘구나, 다들… 여기 앉아있으면 좀 심심할 것 같아. 아닌 애들도 있겠지만 어쩐지 넌 심심하게 여길 것 같거든. 그냥, 넌 재미있는 애인데,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답답할 거 아냐?”

“그럼 자주 놀러와도 돼? 네가 대타하는 날이 언젠진 모르겠지만.”

“아, 나도 주말엔 바빠서 못 올 지도… 어쨌든 시간 나면 말이야.”

“아아, 그거 좋지. 그럼!”

“가지튀김 해본 적 있어? 나도 해보고 싶긴 한데 동생들 때문에 생각하는 양보다 세 배는 더 해야하구 기름은 뒤처리가 귀찮으니까… 응, 알지알지. 그래서 나도 항상 미뤄. 설거지 더 힘들잖아, 기름기 있는 거 하고 나면.”

“아, 찌는 법도 있지, 참… 그럼 다음엔 가지 만두 해볼까? 막내는 가지 싫어해서 완전 울겠다. 맛있게 만들면 걔도 먹긴 할 거야. 내 동생들 착해서 먹기 싫어도 꾸역꾸역 먹어주긴 해. 다는 안 먹지만 손도 안 대고 버리진 않아. 내가 만든 거라구…….”

“응, 내 동생들도 그래. 중학생이 되더니 성깔이 더 사나워졌어. 그래도 나쁜 애들은 아니야.”

“넌 좋은 형 노릇을 하고 있구나. 부럽네… 아니, 그건 고통스러운 일인가?”

“사실 난 고통스럽거든.”

“미안 방금 말은 잊어버려.”

“진심은 아니었어.”

‘사실 잘 모르겠지만.’

삼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7.

이삼신은 대화 도중 자신이 평소에 말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너무나도 손쉽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그대로 두었다. 함찬빈의 안에는 정말 공룡이 사는가 보다. 인간의 앞이었다면 더는 말하지 않았을 텐데 그 애는 뭘 말해도 정말이지 아무 반응도 없이 제 삶에만 집중할 것 같아서, 삼신은 멈출 수가 없었다. 어쩌면 이삼신의 몸속에도 공룡이 사는지도 모르지. 어쨌든 이삼신은 함찬빈이 걸어온 삶의 족적 곳곳에서 비슷한 냄새를 맡았던 것이다. 그 크고 깊게 눌려 찍힌 발자국이 얼마나 캄캄했는지. 어떻게 하면 그 어둠을 신경 쓰지 않고 더 빨리 걸어갈 수 있는지. 그러니까 이삼신은 가지 반찬이라던가, 동생들 이야기를 하는 내내 그런 것들을 떠올렸던 것이다.

 

8.

너도 죽고 싶어서 쓰는 거야?

 

9.

“야, 함찬빈!”

편의점을 나서기 전에, 삼신은 한 번 더 그 애를 불렀다. 찬빈이 고개를 돌리자 삼신은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찬빈이 눈을 반짝이며 씨익 웃었다. 삼신은 천천히 손을 내리고 그 애의 얼굴을 바라봤다. 장난 끼 넘치고 어쩐지 조금은 삶에 대해 영민해 보이는 그 눈을.

 

10. 갑자기 떠오르다

크와아아아아아아아!!!

 

11.

“야, 너 왜 그렇게 박장대소해?”

“아, 아니야…… 그, 그냥…….”

삼신은 바닥에 주저앉아 바닥을 치며 웃었다. 낄낄거리고, 배를 움켜쥐고, 포스에 손을 올리고 입을 벌리며 웃어댔다. 공룡 찬빈이 떠오르자 견딜 수 없을 만큼 행복하고 우스워졌다. 이삼신은 찬빈이 건너왔을 그림자나 자신이 밟고 있을 그림자나 웃기지도 않는 괴담이나 촌스러운 미신들을 전부 잊었다. 신아! 라고 부르던 찬빈의 얼굴이 그제야 떠올랐다. 걘 처음부터 그렇게 잘 웃고 잘 웃기고 불쑥 악수를 했던 것이다. 이삼신은 함찬빈에게 했던 터무니없는 오해들과 자신이 어림짐작하는 찬빈의 모든 것들을 깡그리 날려버릴 때까지 웃어댔다. 그러자 찬빈은

“정말, 신이는 가끔 가다 증말 이해할 수 없다니까~”

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삼신은 눈물을 닦으며 낄낄거렸다. 그리곤 헐떡이면서 포스를 짚고 제대로 일어섰다.

“뭐래, 티라노인 너보단 훠얼씬 알기 편하거든?”

삼신은 손을 털곤 후, 하고 숨을 내쉬며 도도하게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함찬빈이 형용할 수 없는 표정으로 질색했다. 삼신은 씨익 웃었다.

“찬빈, 너 내일 저녁에 시간 되면 나랑 장이나 보러가자. 너 끼고 다니면 진짜 시간 완전 빨리 갈 것 같어.”

삼신은 불쑥 찬빈 쪽으로 손을 내밀었다. 함찬빈이 언젠가 이삼신에게 그래주었던 것처럼. 그러자 찬빈은 삼신의 손을 덥썩 잡았다. 별로 길게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올바르게 느껴졌다.

“그러지 뭐. 학교 끝나고?”

“아니, 1시간 쯤 더 뒤에?”

“근처 대형 마트?”

“어. 근데 일행도 있어.”

“누군데?”

“아는 후배.”

삼신은 함찬빈을 마주친 은수의 동공이 이번엔 얼마나 더 열심히 떨리게 될지 상상해봤지만 곧 그만두었다. 은수의 동공은 늘 삼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지진 했기 때문이다.

“걘 널 좋아할 거야.”

아마도.

삼신은 그 말을 덧붙이는 대신 한 번 더 활짝 웃었다.

“담에 봐.”

“그래.”

찬빈은 삼신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삼신도 찬빈에게 다시 손을 흔들어 줬다. 이삼신과 함찬빈은 친구가 된 것이다. 여름이 가기 전에 벌어진 마법 같은 일이었다.

(오컬트 매니아 친구였다면 인생이 더 재미있어졌을 지도 모르겠지만 공룡 친구를 얻는 것도 때론 나쁘지 않은 것이다. 원더풀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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