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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ge of Daybreak «괴담과 늑대»
1차/old 2019. 10. 22. 15:00

 1. 

 칼날과 칼날이 부딪힐 때 들리는 격동의 소리, 날붙이를 망치로 내려칠 때 튀어 오르는 불꽃, 갈등을 고조시키는 흥분의 감정들. 전사의 운명을 타고난 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볼 때 바르바라가 읽을 수 있는 것들. 하지만 마리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바르바라가 떠올린 것은 불꽃이 아닌 얼음이었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을 술집에서 처음 보았다. 생선요리가 유명한 곳이었고, 바르바라는 늦은 저녁에 혼자 식사를 하려고 그곳을 방문한 참이었다. 마리안은 바르바라의 건너편 테이블에 앉아 리퍼코트를 입은 동료들을 앉혀놓고 술을 퍼마시고 있었다. 가게는 조용하지도 시끄럽지도 않았다. 생선살을 잘라 먹던 바르바라는 건너편 테이블에서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것을 의식하고 시선을 돌렸다. 마리안이 빈 잔으로 테이블을 두드리고 있었다. 남자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얼큰하게 취한 목소리가 고조되어 끊임없이 한탄과 욕을 쏟아냈다. 바르바라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는 생선의 뱃살을 잘라 포크로 집어먹었다. 한니발, 사슴, 사냥, 그리고 개자식. 바르바라는 천천히 생선의 맛을 음시하며 건너편 테이블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었다. 특별히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마리안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그 테이블에서 떠드는 건 오로지 마리안뿐이었다. 다른 목소리가 감히 끼어들 수 없었다. 사연은 다시 한니발, 사슴, 사냥, 그리고 개자식의 이야기로 돌아갔다. 그러다 목소리가 뚝 끊어졌다. 누군가 마리안의 빈 술잔에 맥주를 채웠던 것이다. 마리안은 자신을 둑처럼 취급하며 그 안으로 술을 퍼담았고 그 바람에 기나긴 한탄이 일순간 끊어졌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로 식사를 이어나가며, 마리안의 키워드 순서를 올바르게 나열해보았다. 사슴, 사냥, 개자식, 그리고 한니발. 사실 모든 단어가 한 사람으로 이어져있었다. 

 얼마 뒤에도 바르바라는 우연하게 식사를 하다가 몇 테이블 건너에 앉은 마리안을 마주쳤다. 마리안은 그 때와는 다른 사람들을 앉혀놓고 동일한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나중에 바르바라는 마리안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그녀와 술을 마시다 질린 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꼭 이런 말을 중얼거리곤 했다. “그놈의 한니발.” 

 하지만 마리안과 정식으로 만났을 때, 바르바라는 그녀로부터 전혀 다른 인상을 받았다. 우선 마리안은 말수가 적었고 경계심이 짙었다. 바르바라가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한 번의 곱씹는 과정을 거쳤으며,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보다는 타인의 이야기를 듣기 위한 질문을 자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정말 멍청하거나 둔한 것도 아니었다. 궁극적으로 마리안이 수행하고 있는 것은 침묵이 아니라 관찰, 경계가 아니라 사냥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마리안이 기사단에 들어와 세운 업적들은 전부 짐승을 제압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 바르바라는 켈커스 지방의 사람들이 이따금 입에 올리곤 하던 산지벽촌의 아주 작은 마을들을 떠올렸다. 그곳의 주민들은 숙련된 사냥꾼들이었고, 사람보다 짐승에 익숙했으므로 사람의 언어를 잘 사용하지 않았다. 마미사 할머니도 그런 마을들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그런 마을에서 온 남자를 만난 적이 있지. 그가 쓰는 말투는 막 깎은 새 지팡이처럼 투박하더구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마미사는 너무 많이 문질러서 반들반들해진 체사레 집안의 지팡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이 사냥꾼의 마을에서 왔을 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써드빌 뒤쪽으로 이어지는 숲에 늑대가 출몰해 목축을 방해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마리안을 떠올렸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을 자신의 동행자로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고참이었고 이런 일에는 어느 정도 선택권이 있었다. 마리안의 의사를 묻는 대신 서류에 마리안의 이름을 적어 넣는 바르바라에게 동료 기사가 염려의 말을 남겼다. “난나, 마리안 에이어는 임무 중에도 술을 마셔요.” 이런, 그건 좀 심각한 걸. 하지만 겨울의 사냥꾼들은 추운 숲에서 체온을 유지하기 위하여 조금씩 술을 마시고, 두꺼운 털옷을 입은 채로도 토끼의 눈을 향해 화살을 쏜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바르바라는 자신이 마리안을 이미 사냥꾼이라고 판단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리안은 풀풀 술 냄새를 풍기며 등장했다. 바르바라는 늑대를 잡는 임무에 마리안 역시 동행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마리안이 경계하며 얼굴을 찡그리자, 바르바라는 자신이 짐작한 그녀의 배경을 상기시켜주었다. 넌 사냥꾼이잖니. 마리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숲으로 이동하면서 늑대를 잡으러 가자는 말을 한 번 더 반복했을 때, 비로소 마리안이 입을 열었다. “나를 알아?” 그렇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마리안보다 오히려 한니발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한니발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도 있었다. 겨울 숲에서 살아가는 짐승들, 한밤중에 울부짖는 늑대의 울음소리, 이따금 캄캄한 나무 틈 사이로 빛나는 한 쌍의 눈동자… 원한다면 더 나열할 수도 있었다. 바르바라가 알고 있는 것들. 그것들이 있어 켈커스 지방의 겨울밤은 때때로 영원할 것만 같았다. 두려움 때문이었다. 바르바라는 어린 시절 나무작대로 들개를 패서 쫓아낸 적이 있었지만 한 번도 그것에 자만해본 적이 없었다. 밤에는 반드시 집으로 돌아와 창문 바깥을 흘끔거리며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음을 상기했다. 겨울 숲에는 필연적인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켈커스 지방에는 바로 그 필연적인 위험에서 비롯된 무수한 괴담들이 있었다. 주민들은 자신이 해치울 수 없는 두려움에 형태를 부여하고 이름을 붙여, 그것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재탄생시킴으로써 극복하고자 했다. 하지만 괴담을 파괴하는 이들도 있다. 바르바라가 한니발보다 더 많이 알고 있는 것은 바로 사냥꾼들이 사냥을 통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룩하는 것인가에 대해서였다. 사냥꾼들은 초자연을 탄생시킨 자연의 존재를 향해 화살을 쏘는 이들이다. 사냥이란 나그네를 잡아먹는 괴물 버나디가 되었던 어두운 숲속의 그림자가 내일 아침에는 한 마리 늑대 시체로 되돌아오는 사건을 의미했다. 사냥꾼들은 우리의 괴담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에게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이 아니라, 형태를 가진 존재를 오히려 알 수 없는 정체로 둔갑시키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주었다. 그럼 주민들은 그들이 가져온 짐승의 가죽을 벗이고 그것을 박박 씻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려움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이라고. 두려움이란 괴담으로든 가죽으로든, 다시 말해 무형으로든 유형으로든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우리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한 두려움에 잡아먹히는 일 따위는 없는 것이라고. 바르바라는 마리안이 술을 마시고 휘청거리다 종국에는 환각까지 보게 된다 한들 화살만큼은 빗맞히는 법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유형의 존재를 무형으로 만들 수가 없는 사람이다. 증오하고 사랑하는 남자를 먼 이전의 일로 흘려보내, 더 이상 잡을 수 없는 무엇으로 만들기보다 끊임없이 입으로 반복하여 그 존재를 상기하는 사람이다. 한니발의 형체가 흐물흐물해지지 않도록 지겹게 복기하는 사람이다. 바르바라는 한니발에게 욕지거리를 하던 마리안을 잊지 않았다. 개자식이라는 욕설이 하나의 단단한 화살처럼 한니발의 이름에 내다꽂혔던 매일 밤. 구 애인을 씹어대는 마리안의 음주는 추운 숲에서 술을 마시고 체온을 유지하는 행위처럼 보였다. 밤의 마리안은 낮의 마리안보다 훨씬 사냥꾼처럼 보였다. 그래서 마리안이, “나를 알아?”라고 물었을 때, 바르바라는 

 “짐작한 거란다.” 

 라고 대답하면서 속으로는 

 “판단이란다.” 

 라고 대답했다. 

 

 2. 

 두 사람은 말을 달려 닷새 동안 늑대를 쫓았다. 숲으로 들어가 발자국을 쫓고, 나무에 남은 발톱자국을 손으로 쓸어보면서 늑대의 이동거리를 짐작했다. 마리안은 바르바라의 판단대로 사냥꾼이었다. 짐승을 쫓기 위해서는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의 뒤를 쫓으며 그녀가 하는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았고, 그 행동을 복기하기에 앞서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를 이해하려고 했다. 이를테면 나무에 남은 발톱자국을 살피는 일은 늑대가 언제 그곳을 할퀴었는지를 알고자 함이 아니라 어째서 그곳을 할퀴었는지를 알고자 함에 가까운 일이었고, 사냥의 과정은 짐승을 죽이는 과정이 아니라 짐승을 이해하는 과정에 가까웠다. 바르바라는 마리안과 끊임없이 거리를 유지하며 마리안의 습성을 훔쳐 사용했다. 마리안은 바르바라를 몰이꾼이라고 불렀다. 

 “사냥꾼이 아니야?” 

 “그래.” 

 맞는 말이었다. 바르바라는 짐승을 사냥하는 자가 아니라 짐승으로부터 비롯된 괴담을 읊는 자들의 곁에서 자랐고, 분명한 진실을 모호한 은유로 풀어내는데 더 능숙했다. 반면 마리안의 언어는 거칠고 투박한 지팡이를 만지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체사레의 언어를 반들반들한 지팡이 머리처럼 문지르며, 활을 든 마리안과 함께 어두운 숲속을 걸었다. 이따금 숲속의 어딘가에서 길게 짐승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지거나 근처의 풀숲이 들썩이는 일도 있었다. 그럴 때면 바르바라는 마리안, 혹은 마리안이 들고 있는 화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나는 두려움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잊지 않는다. 

 마리안이 늑대가 아닌 바르바라에게 더 관심을 두기 시작한 건 사냥을 시작한지 이틀째 되던 밤이었다. 그녀는 술을 마시려고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가져가다 말고 의식적으로 떨어뜨렸다. 바르바라는 담요를 두르고 오두막집의 천장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숲 인근의 작은 오두막집에 앉아 있었고, 연기를 염려해 불은 피우지 않았다. 마리안이 어둠 속에서 바르바라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는 잠시 침묵하다 입을 열었다. 

 “사람들이 다 다르게 당신을 부르던데. 난나는 무슨 뜻이고, 바랴는 또 무슨 뜻이야?” 

 마리안은 또 이런 질문을 했다. 

 “난나라고 부를 때 당신은 조금 더 크게 움직여. 응답하려는 것처럼 보이지. 바랴라고 하면 조용히 호응해. 당신에겐 무슨 차이야?” 

 혹은 이런 질문도 했다. 

 “기사단에 들어오기 전에는 뭘 했어?” 

 혹은 이런 질문도. 

 “아침에는 항상 일찍 일어나?” 

 이런, 이건 좀 심각한 걸. 바르바라는 마리안이 차라리 술을 마시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술을 마신 그녀는 언제나 한니발을 사냥한다. 그렇다면 술을 마시지 않는 때에는 바르바라를 사냥하기로 마음이라도 먹은 것일까. 마리안이 늑대를 잡아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사실 그런 건 마리안에게 문제도 아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을 숨기는데 익숙했고 마리안에게는 반드시 그럴 생각이었지만, 마리안은 바로 그 지점 때문에 바르바라를 늑대보다 더 귀중히 여기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늑대는 유형의 존재지만 바르바라는 그렇지 않았기에. 바르바라가 형태를 갖춘 명징한 존재로 남지 않았기 때문에 마리안은 바르바라를 사냥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바르바라가 거리를 두면 멀어지는 보통의 존재들과는 달리, 마리안은 바르바라가 거리를 두면 그것을 추적하고 싶어 했다. 바르바라는 사냥꾼을 다루기 위해서는 체사레의 언어를 보다 신중히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마리안에게 대답했다. 

 “나는 사냥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다.” 

 “그럼 뭔데?” 

 “네 동료지, 에이어.” 

 그건 늑대를 잡는 현재의 임무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다음 날 아침 마리안은 어제보다 술을 줄였고 말을 타고 달리면서 바르바라의 곁에 따라붙었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이 자신을 주시하는 것을 의식하면서 먼 풍경을 보았다. 숲을 조금만 더 달리면 넓게 이어지는 들판이 나왔고, 들판은 키 큰 풀로 온통 장관이었다. 바람이 불 때면 파도가 들이닥치는 것처럼 거대한 녹색의 물결이 굽이치며 앞으로 혹은 뒤로 돌진했다. 바르바라는 말을 멈추고 천천히 자리에 멈추어 서서 그 풍경을 보았다. 마리안도 말을 멈추었다. 한동안 두 사람은 녹색의 물결이 일렁이며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고 또 돌진하는 것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마침내 바르바라가 작은 목소리로 솔직하게 중얼거렸다. 방금 아름다웠지. 마리안은 말없이 바르바라를 응시했다. 이번에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받아쳤고, 마리안이 이것으로 만족하기를 바랐다. 자신을 향한 추격을 멈추는 편이 이롭다는 사실을 깨닫길 바랐다. 의미심장하고 수상쩍게 보이는 바르바라가 정말로 감추고 있는 건 이런 것들이라는 사실을. 들판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기에 말을 멈추고, 오두막집에 떨어지는 달빛을 지켜보는 모습이 바르바라의 전부라고 착각하기를 바랐다. 

 물론 바르바라의 내면에는 사라진 아들과 어두컴컴한 숲에 대한 이야기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결코 마리안에게 보여주지는 않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에게 사냥당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마리안을 통제할 자신이 있었다. 실제 그랬다. 

 

 3. 

 닷새째에 두 사람은 결국 늑대를 잡았다. 호수와 가까운 수풀에서였다. 마리안이 늑대를 쏘았고, 그건 바르바라가 처음부터 마리안에게 기대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바르바라는 늑대를 보자마자 뽑아들었던 검을 도로 집어넣고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두 사람은 호숫가 앞에서 늑대를 처리했다. 마리안이 가죽을 벗기고는 바르바라에게 그것을 내밀었다. 바르바라는 켈커스 땅에서 벌어지던 사냥꾼과 주민의 관계를 떠올렸다. 하지만 지금의 바르바라는 늑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괴담을 만들어내지도 않았다. 그래서 그것이 필요 없었다. 

 임무를 마친 두 사람은 써드빌로 복귀했고 그 날 밤에 식당에서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둘 다 같은 테이블에서 서로를 마주보며 앉았다. 마리안은 술을 많이 시켰고, 또 많이 마셨다. 지난 닷새간 끊었던 만큼의 분량을 오늘 밤 들이마시기로 작정한 사람 같았다. 바르바라는 아주 가끔씩만 술을 홀짝이며 마리안의 이야기를 들었다. 술이 들어가기 시작한 마리안의 입에서 또 그 이름이 나왔다. 한니발. 

 마리안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할 정도로 끊임없이 말했다. 한니발과 사냥을 나갔던 일을 늘어놓다 말고 불현 듯 분노가 차올라 한니발을 미친 개자식이라고 불렀다. 그런가하면 한니발의 외모를 묘사하며 꿈꾸는 멍한 표정을 지었다가, 맥락도 없이 사슴 이야기를 꺼내기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몇 차례에 걸쳐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의 입에서 불덩이가 나오는 거라고 생각했다. 가슴에서부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뱉어내고 그것이 제대로 식고는 있는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식을 때까지 연거푸 뱉어내 그 온도를 확인하고 있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바르바라는 마리안의 눈을 볼 때마다 얼음조각을 떠올렸다. 공중에서 흩날리는 눈발과 겨울 숲을. 때때로 바르바라가 마리안에게 찬물을 줄 때도 있었다. 술잔이 비면 술을 채워주고, 마리안이 이야기 도중 더듬거리면 그녀가 헷갈리고 있는 단어를 불러주었다. 테이블에 엎어진 채 앓는 소리를 내는 마리안의 어깨를 쓸어주기도 했다. 바르바라. 마리안이 술김에 자꾸만 중얼거렸다. 알고 있어? 한니발은…, 그럼 바르바라는 대답했다.  그럼. 알고 있단다, 에이어. 네가 사냥꾼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가 없겠구나. 

 늑대를 잡는 임무가 끝난 후, 두 사람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때때로 두 사람은 같은 조에 배치되어 잡일을 수행했고, 이따금 짐승과 관련된 일을 하러 떠날 때도 있었다. 그 때마다 마리안은 임무 도중 느닷없이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했다. 바르바라의 지시를 따르는 대신 단독으로 움직였다가 위험에 처해 일을 복잡하게 만들기도 했다. 술을 마신 채 나타나서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마리안은 엉망으로 굴었다. 자신이 기사가 아니라 여전히 사냥꾼인 것처럼 행동했다. 그 때마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의 손을 붙잡고 손등을 가볍게 내리쳤다. 성가신 아이를 훈육하듯이 마리안을 다루었다. 

 하루는 마리안이 임무 도중 갑자기 사라진 일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녀를 찾아 언덕으로 올라갔다가 울타리 아래로 이어지는 가파른 절벽에 몸을 기울이는 마리안을 발견하고는 쏜살같이 내달렸다. 마리안은 자신을 구조한 바르바라의 일그러진 표정을 올려다보고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분에 못 이긴 듯 말했다. 

 “너는 역시 그냥 내가 한 말에서 장난치고 있을 뿐이지?” 

 바르바라가 마리안의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지 않는 걸 불평하고 있는 것이었다. 혹은 그렇게 거리를 두는 주제에 대체 왜 나의 파괴에 개입하는 것이냐고 불평하는 걸지도 몰랐다. 바르바라는 제멋대로인 마리안에게 짜증이 나있던 참이어서 자못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쏘아붙였다. 

 “전에도 말했지만, 놀리고 싶었다면 네 말 따위가 아니라 너와 함께 놀아났을 거야.” 

 “…….”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쏘아보았다. 마리안이 몸을 걸친 울타리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다음 순간, 갑자기 마리안이 바르바라에게 덤벼들어 입을 맞추었다. 바르바라는 밀려나지 않기 위해 손을 뻗어 울타리를 움켜쥐었다. 마리안이 혀를 내밀었지만 바르바라는 입을 다물었다. 울타리를 쥔 손이 하얗게 물들었다. 

 마리안의 혀가 입술을 마구 핥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인중에 내려앉는 마리안의 숨을 느낄 수 있었다. 잠시 후, 마리안이 천천히 물러나자 바르바라는 울타리를 쥐던 손을 놓고는 마리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어느 때보다 힘을 주어 찰싹 내리쳤다. 

 “마리안.” 

 바르바라가 단호하고 부드럽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당장 입을 맞춘다고 해서 우리가 정말로 가까워질 수는 없어.” 

 우리가 동료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고 손을 붙잡는다. 내리치는 건 그것을 상기하지 못 한 마리안에게 벌을 주는 것이다. 바르바라가 수행하는 훈육은 공동체의 유대를 강조하면서도 그 유대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일정한 거리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체벌이 동시에 존재했다. 바르바라는 한니발이 마리안에게 이와 비슷한 짓을 했다는 걸 은연중에 알고 있었다. 손등을 내려칠 때마다 마리안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의 의미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을 통제하기 위해 한니발의 이미지를 훔쳐 사용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람이 불자 마리안의 침으로 축축한 자신의 입술이 느껴졌다. 바르바라는 손등으로 그것을 훔쳐내고 고개를 돌렸다. 

 “가자.” 

 그런 후 두 사람은 함께 돌아왔다. 

 그 뒤에도 종종 마리안은 엉망으로굴었고 때때로 바르바라에게 덤벼들었지만, 바르바라는 마리안의 손등을 내리치며 그녀를 훈육했다. 거리감을 상기시켜 우리가 동료임을 알게 했다. 언젠가의 나날을 보내며, 마침내 마리안은 그것을 이해했다. 

 어느 순간부터 마리안은 엉망으로 굴기를 그만두었고 다른 기사들과 어울리며 바르바라에게서 멀어졌다. 어느 날이었나. 훈련장을 지나치다 말고 바르바라는 리온과 함께 있는 마리안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런 뒤 아무 말도 없이 천천히 그곳을 스쳐지나갔다. 

 

 4. 

 서네스섬에서 돌아온 이들이 숙소를 정리하기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바르바라는 집무실에 있었다. 그러다 오즈가 마침내 일이 끝났다고 말했고, 바르바라는 그 뜻을 이해했다. 시간을 벌기 위해 시간을 쓰던 일들이 끝났다는 말이었다. 그제야 그녀는 사무실을 나와 다른 곳에 처박혀 있기 시작했다. 주로 휴게실에 있었고, 그렇지 않으면 인적이 드문 바닷가 절벽에 있었다. 휴게실에 있을 때에는 마리안과 체스를 두었고, 절벽에 있을 때에는 궐련을 물거나 수평선을 응시하며 앞으로의 일을 계산했다. 바르바라는 마법없이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을 때와 마법을 가지고 전쟁터에 나가게 되었을 때를 번갈아 저울에 재보았다. 어느 쪽도 썩 유쾌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바르바라는 요 며칠 다섯 달의 시간을 함께 보내온 몇몇이 대련장에 들어서서 시험 삼아 검을 휘두르거나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해 무거운 물체를 들어 올려 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마법이 거래되고 있었다. 사용할 때마다 주인의 생명을 갉아먹는 그것이. 손잡이 없는 칼을 쥐듯 사람들이 마법을 쥐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손은 단단한 굳은살로 판판했고 살결은 반질반질했다. 피투성이가 되지도 않았고, 새로운 상처가 생기지도 않았다. 

 ‘두려움을 두려워하지는 않지만.’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마법은 두려워할 만큼 대단한 것도 못 된다.’ 

 

 5. 

 바르바라가 마리안과 마지막 체스를 두던 날, 마리안은 게임을 하다 말고 바르바라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그러더니 곧 바르바라에게 부탁을 했다. 

 “내가 또 멋대로 굴면…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줄래? 나를 거절해줄래?”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어 눈을 가늘게 뜨고 마리안을 응시했다. 자신이 마리안을 거절한 순간들이 떠올랐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이 울타리에서 떨어지는 걸 거절했고, 그녀가 기사가 아닌 사냥꾼으로 남는 것을 거절했고, 마리안과 입 맞추는 것을 거절했고 그녀와의 섹스를 거절했다. 한니발처럼 그녀를 훈육하면서도 한니발이 되는 것을 거절했다. 그리하여 마리안은 정말 그렇게 되었다. 울타리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기사들과 사교하기 시작했으며, 바르바라와 혀를 섞지 못 했고 더 이상 그녀와 섹스하자고 조르지도 않았다. 마리안이 살아남아 마리안 에이어로서 나아갔던 일들을 생각한다. 더 이상 자신의 훈육이 필요 없게 된 나날들을. 바르바라는 마리안이 훈육을 부탁하고 있음을 알아들었다. 언젠가처럼 자신을 통제해주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마리안은 다시 사냥꾼으로 돌아간 것일까? 무형의 형식으로, 구전으로, 전설로 내려오던 마법을 손에 넣어서 그것을 유형의 방식으로, 사냥으로, 현실로 전복시키고자 하는 것일까. 바르바라는 방금의 부탁으로 마리안이 마법을 얻었다는 사실을 눈치 챘지만 구태여 되묻는 대신 말을 움직였다. 마리안이 마법사를 만지작거리다 말고 기사를 움직였기 때문이다. 체스는 종종 은유로 읽힌다.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그렇게 할게, 내 시선이 닿는 한.” 

 바르바라는 울타리에 위태롭게 걸쳐져있던 마리안과 그 아래로 펼쳐진 낭떠러지를 기억한다. 

 “이것도 내가 멋대로 구는 거야?” 

 “어느 정도는.” 

 B5의 마법사와 H4의 기사가 기로에 놓였다. 바르바라는 손등을 매만지듯 마리안에게 선택지를 주고는 고개를 묻은 채 웃었다. 고민하던 마리안은 기사를 움직였다. 꽤나 기특한 선택이었다. 마리안이 현명하게 판단했다는 생각이 들자, 바르바라는 그대로 손등을 내려치듯 자신의 졸을 C6으로 움직여 위험을 상기시켰다. 

 “기억해야 해 마리안. 자신은 스스로 지키는 거야. 너라면 알 거야.” 

 마리안은 대답 대신 말을 움직였다. 사실 그것이야말로 마리안의 대답이었다. 

 체스가 계속되었다. 바르바라는 늘 그렇듯 여왕을 움직여 차례로 말을 잡아냈다. 마리안은 자꾸만 기사를 움직였다. 지루해진다고 생각하던 바르바라는 어느 순간 턱을 괴던 자세를 고쳐 똑바로 앉았다. 마리안이 사냥꾼처럼 움직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르바라는 마리안의 부탁이 자신이 생각한 의미와는 다른 뜻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마리안은 이전과는 다르다. 마법을 얻었다고 해서 그 시절로 복귀하지는 않는다. 마리안의 수를 읽다가 그만둔 바르바라가 마리안의 여왕을 잡자, 마리안이 마침내 바르바라의 왕을 잡아냈다. 체크메이트. 바르바라는 왕을 잡은 마리안의 말을 확인했다. 마법사였다. 

 “교묘해졌구나, 마리안.” 

 마리안이 긴장을 풀고 의자에 누웠다. 

 “그건 칭찬이야?” 

 “칭찬 같니?” 

 “그렇진 않은데.” 

 “네가 그렇다면 그렇게 두렴.” 

 마리안의 피를 타고 흐르는 마법을 생각한다. 생명을 깎아 사용하는 것치고 마법은 썩 대단치도 않았다. 수지에 맞지 않는 거래다. 기적이 아니라 사기에 가깝다. 바르바라는 아까의 체스를 떠올렸다. 자신이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꺼내들었던 마법사를 생각했다. 마법을 선택해야 한다면 가능한 마지막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 그러나 동시에 마리안이 마법을 선택했기 때문에 자신은 마법을 선택하지 않은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사이기 이전에 두 사람은 사냥꾼과 주민의 관계였기 때문이다. 만물을 무형으로 빚는 자와 무형으로 빚은 만물을 현실로 복귀시키는 자. 아침이면 마리안이 들고 돌아올 가죽을 생각했다. 발가벗겨진 마법을 바르바라는 찬물에 연거푸 씻어내 말릴 것이다. 그러고는 생각하겠지. 두려움을 구분해야 한다고. 

 “내가 나의 적일수도 있잖아. 무슨 뜻인지 알지?" 

 한니발을 괴담이 되게 내버려두지 않는 마리안. 무형의 존재를 향해 화살을 쏘는 마리안. 마법을 받은 마리안. 하지만 본래 사냥꾼은 자신의 일을 하는 법. 마리안이 바르바라를 필요로 하듯 바르바라는 마리안이 필요했다. 

 “알지. 알고 말고, 나의 동지.” 

 바르바라는 그 말의 뜻을 마리안이 완전히 이해했을 거라고 믿었다. 

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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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바르바라는 수면 아래에 드리운 거대한 그림자를 보았다.

 그것은 다홍색 비늘을 가진 물고기였다. 바르바라가 눈을 가늘게 뜨자, 비늘에 반사된 빛의 파편이 일곱 개의 무지개 색으로 빛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물고기를 본 적이 거의 없었다. 낚싯대를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 힘이 실렸다.

 바르바라는 낚싯대를 조심스럽게 건져내 바늘에 떡밥을 갈아 끼웠다. 가장 크고 통통한 지렁이의 대가리를 끼운 후에 다시 바다에 던져 넣었다. 그리고 쥐 죽은 듯이 앉아서 따뜻한 물 아래에서 일렁이는 월척이 자신의 낚싯대에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갈매기가 머리 위로 날아갔다. 바람이 불자 파도가 잔잔하게 육지를 향해 밀려들었고, 바르바라가 앉아있는 바위 근처에도 물방울이 튀었다. 물고기의 반투명한 그림자가 점차 바르바라의 낚싯대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본 물고기의 그림자에 다홍빛깔의 파편들이 부서지다 만 보석 알갱이처럼 물그림자와 함께 일렁이고 있었다. 일순 낚싯대에 거대한 무게가 실리더니 줄이 빠르게 풀려나갔다. 고기의 턱 힘이 지나치게 셌다. 되려 낚시꾼이 물속에 가라앉아버릴 것만 같았다. 바르바라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낚싯대를 붙잡으며 다리를 벌리고 단단하게 섰다. 눈을 뜨자 물고기가 더욱 잘 보였다. 그놈이 발버둥치고 있었다. 낚싯줄이 끊어질 것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줄이 끊어졌다. 바르바라는 신경질적으로 낚싯대를 내팽겨 치려다 말고 바위에 두 발을 모으고 서서 자신이 낚아보려던 아름다운 그 물고기가 유유히 바다 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홍색 빛깔의 저것은 이름이 무엇일까. 이토록 오래 낚시를 해왔는데도 정작 경이로운 존재를 발견했을 때에는 이름조차 부를 수가 없다니. 바르바라는 그 날 곧장 짐을 싸서 써드빌 해변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돌아오는 길에 페니를 만났다.

 페니의 머리카락은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2.

 페니는 종종 평화로운 써드빌 해변을 지나 적당한 다이빙 장소에서 수영을 하곤 했다. 써드빌의 해안은 물의 표면은 따뜻한데 조금만 깊이 들어가도 차가운 물이 피부로 느껴졌다. 변화무쌍한 수온은 페니를 감싸 안다가도 한순간 몸을 조르며 파고들었다. 그럴 때면 페니는 팔을 움직여 수면을 가르고, 두 줄기로 갈라진 물방울 사이 틈으로 얼굴을 들이민 후 다리를 이용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그는 바다를 좋아했다. 그래서 수영하는 법과 바다가 자신을 해치지 않도록 유도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

 그 날은 유독 물이 차갑게 느껴졌다. 페니는 바위 근처에 상반신을 내민 채 수평선을 바라보다 말고 100m도 채 떨어지지 않은 위치에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아주 큰 그림자를 가졌고 찬란한 빛으로 감싸여 있었다. 아름다움을 체감하는데 도가 튼 페니는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다가오는 존재가 경이로운 무언가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는 잠수했고 수면 아래에서 게슴츠레 눈을 뜨고 그 존재를 확인하려 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다홍색 물고기였다.

 숨이 막혀서 수면 위로 솟구친 페니는 한동안 눈을 깜빡이며 눈동자에 들러붙은 짠 기운을 떨쳐내려 애썼다. 그러는 동안 그 물고기는 페니의 다리를 묵직하게 스치고 지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바위틈으로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 감각이 어찌나 서늘하면서도 기묘하던지 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페니는 수면에 몸을 맡긴 채 파도와 함께 넘실거리며 한동안 바위틈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물고기는 다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3.

 “안녕, 위버.”

 “페니요.” 페니는 슬그머니 정정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난나.”

 “머리가 젖어있구나. 수영을 나갔던 모양이지?”

 “난나는 낚시를 하고 오던 길인가보네요.”

 “맞아.”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드물게 이죽거렸다.

 “마음을 정리하려 간 거였는데 되려 심란해졌단다.”

 바르바라는 페니에게 오늘 그녀가 마주한 거대하고 아름다운 물고기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바르바라가 그것을 묘사하는 동안, 페니는 고개를 끄덕이다말고 점점 진지한 표정을 짓더니 마침내는 무언가 알고 있다는 사람의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혹시 그 물고기 다홍색인가요?” 페니가 물었다.

 “맞아.”

 바르바라가 긍정하자 페니는 고개를 다시 한 번 주억거렸다.

 “오늘 바위 근처에서 수영을 하다 보았어요. 난나가 놓친 녀석이 저를 찾아왔던 모양이죠….”

 “그러니.”

 바르바라는 감흥이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의기소침한 모습처럼 보이기도 했고 어딘지 묘하게 짜증난 기색인 것 같기도 했다. 페니는 슬그머니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느릿느릿 되물었다.

 “그 물고기가 잡고 싶었나요, 난나?”

 바르바라는 잠시 뜸을 들였는데, 곧장 내뱉으면 쏘아붙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면 보면 모르냐는 식으로 대답했을 것이다. 그녀는 곧 평정을 되찾았다. 바르바라는 평소의 웃음을 달고 나긋나긋 그렇다고 긍정했다. 페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일 낚시에 동행할 수 있을까요? 도와드릴게요.”

 바르바라는 페니의 친절에서 자신의 눈치를 보는 조심스러움을 느꼈다. 정말 물고기를 잡아 난나를 기쁘게 해주고 싶다는 욕망 이전의 그 무엇이 있었다. 그것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 바르바라는 눈을 뜨고 페니를 응시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기에 그만두었다.

 “좋아. 내일 정오에 여기서 보자.”

 바르바라가 덧붙였다.

 “밀짚모자를 쓰고 나오는 게 좋을 거야. 태양이…, (뜨겁거든).”

 “으음. 알겠어요.” 페니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짧게 인사하고 헤어졌다.

 

 4.

 다음 날 바르바라와 페니는 인적이 드문 곶으로 향했다. 하얀 절벽을 등지고 판판한 바위에 앉아 수평선을 감상할 수 있는 운치 좋은 곳이었다. 페니는 그녀의 곁에 앉아서 그녀가 살아있는 지렁이에 날카로운 바늘을 꽂아 넣고 수면 위로 던지는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았다. 바르바라는 침묵을 지키며 앉아있었다. 다른 생각에 잠긴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곁에 앉은 페니의 존재를 완전히 지워버린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그 물고기가 오늘도 나타나려나.”

 갑자기 바르바라가 말을 꺼냈다.

 페니는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흐음.”

 페니는 그렇게만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한 시간이 좀 지났을까, 모자를 쓰고 있어도 정수리에 땀이 찰 무렵 느닷없이 바르바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페니는 그들의 발아래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수면 아래를 살폈다. 거대한 그림자가 그곳에 있었다. 어렴풋하지만 분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물고기는 다홍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네 실없는 추임새가 쓸모가 있었던 모양이야.”

 바르바라는 한손으로 밀짚모자를 붙잡은 채 입 꼬리를 올렸다.

 “난나의 지렁이가 유독 통통했기 때문일 지도요.”

 페니는 바르바라에게 공을 돌려 그녀의 들뜬 기분을 더 오래 유지시키고자 했다.

 바르바라가 낚싯대를 붙잡고 섰다. 다리를 벌린 채 허리를 둥글게 숙이고 줄을 당기자, 미끼를 발견한 물고기가 그들이 앉은 바위 근처로 헤엄쳐왔다. 바르바라는 어제보다 더 침착했다. 그녀는 눈앞에 목표를 발견하고 선회하여 낮게 날고 있지만 당장 먹이를 덮치지는 않는 매처럼 보였다. 바르바라는 공을 들일수록 모험할 가치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마침내 낚싯대에 엄청난 무게가 실리고, 대 자체가 수면 아래로 매섭게 휘어졌다. 바르바라는 페니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욕지거리를 하며 버티고 섰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페니!” 그녀는 그 이름을 호통처럼 불렀다.

 페니는 자신이 잘하는 일을 했다. 안경을 벗고는 바위에서 부드러운 몸짓으로 뛰어내린 후에 쏜살같이 수면 아래로 파고들었다. 낚싯대에 걸린 물고기가 어찌나 힘이 세던지 수면 위로 끊임없이 물방울이 튀었다. 수면 아래에서 올려다 본 수면 위의 풍경이 흐릿할 지경이었다. 바위에 서서 낚싯대를 붙잡고 선 바르바라도 일그러져서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페니는 숨을 크게 참았다가 바닥에 발바닥을 붙이고 웅크린 후, 다음 순간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페니는 자신의 가슴팍을 스치는 소름끼치는 차갑고 미끄러운 감각과 까끌까끌하고 큼지막한 지느러미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물고기를 두 팔로 붙잡은 후 놓아주지 않으려 힘을 주었다. 오른손이 절로 흐느적거렸지만 왼손은 물고기의 어딘가를 단단히 붙잡았다. 물고기의 진액이 흘러나왔다. 페니는 그대로 물고기와 함께 바위 위로 기어 올라왔다. 

 머리 위로 통통 바위를 박차고 내려오는 바르바라의 발소리가 들렸다. 페니는 눈부신 빛을 등진 채 자신을, 정확히는 자신이 낚은 물고기를 내려다보는 바르바라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바르바라가 기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페니는 자신이 잘하는 일을 해냈음을 알았다.

 바르바라는 페니가 끌어올린 거대한 물고기를 양동이에 담았다. 너무 커서 넣자마자 철퍽 소리가 나며 굵은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바르바라와 페니는 양동이가 엎어지지 않도록 한동안 손으로 그것을 붙잡고 있어야했다. 마침내 물고기가 안정을 찾자, 바르바라는 양동이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어서 물고기를 하염없이 들여다보았다.

 다홍색의 거대한 물고기. 눈알은 새파랗고 눈동자는 무척 깨끗한 하얀색이었다. 비늘이 바르바라의 손톱만 했다. 애초에 물고기를 낚기 위하여 낚시를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물고기라면 가지고 싶었다. 그리고 마침내 가지게 되어 바르바라는 기뻤다. 하지만 물고기의 얼굴이 미묘하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고기의 얼굴이… 마치 인간의 얼굴처럼 보였다.

 ‘낚아선 안 되는 것을 낚아버린 것 같구나.’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그 물고기를 잡아먹을 건가요?”

 페니가 물었다. 바르바라는 두 손으로 여전히 양동이의 주둥이를 붙잡은 채로 고개를 들어 페니를 바라보았다.

 “아니.” 바르바라가 대답하자 페니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바르바라는 페니에게 물고기의 얼굴에 대해 이야기했다. 페니도 양동이로 고개를 숙여 물고기를 확인했다. 그러더니 정말로 그 물고기가 특별할 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바위에 앉은 채 이따금 출렁이는 양동이를 흘끔거리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르바라는 양동이를 뒤집었다.

 물고기가 수면 아래에서 몸부림치다 말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바위에 서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다홍색의 경이로운 무엇인가가 그들에게서 멀어져 마침내는 사라지는 것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마침내 페니가 물었다.

 “아깝지 않나요?”

 그런 후 그는 덧붙였다.

 “물론 난나가 만족한다면 저도 좋아요.”

 ‘그렇구나.’ 바르바라는 생각했다.

 ‘이 애는 나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은 걸 넘어서 내가 행복하기를 바라는 모양이지. 그래서 내가 좋은 판단을 내리길 바라는 것이다.’

 피곤하게 산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페니가 밉거나 안쓰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었다. 어쨌든 페니는 오늘 바르바라를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도와주었다.

 “방금 물고기의 이름은 뭐였을까?”

 바르바라는 페니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대답을 찾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제 나름의 기상천외한 지식을 짜내기를 바라며 질문을 던진 후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나 이번에 페니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곧장 나긋나긋하게 대꾸했다.

 “에아가 아닐까요. 신의 얼굴을 하고 있었어요.”

 바르바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런 모양이지.”

 그때 갑자기 강한 동풍이 불어와 두 사람의 머리카락이 사방으로 마구 흩날렸다. 밀짚모자 두 개가 창공으로 날아올랐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찌푸린 채 손을 내젓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페니의 옆모습을 보았다. 빛이 그의 얼굴을 따라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생각했다. 경이로운 존재라는 게 갑자기 찾아오는 걸 수도 있고, 혹은 주변의 사물이나 누군가에게서 나타는 걸 수도 있다고. 에아가 세상 어딘가에 잠들어 있거나 혹은 우리의 주변에 깃들어 있는 것처럼. 어쩌면 어떻게 불러야 좋을지 모르겠는 구석을 가진 모든 것들에게 신이 깃들어있는 지도 모른다.

 바르바라는 그녀 특유의 단호함으로 재빨리 상념에서 벗어났다.

 “이제 가자.”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페니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그 날 해안선을 따라 걸으며 두 사람 특유의 느긋한 어조로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신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와 햇빛과 다홍색의 이야기도 했다. 헤어질 때 바르바라는 페니를 다시 위버라고 불렀다. 페니에요, 페니는 정정하면서도 바르바라가 기분 나쁘지 않을 선에서 슬그머니 호칭을 고쳐주었다. 피곤하게 사는구나. 바르바라는 다시 한 번 그렇게 생각했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사정이 있는 걸 수도 있겠지. 그런 후에는 더 이상 그를 궁금해 하고 싶지 않아서 마음속의 양동이를 쏟아버렸다. 그러자 이름을 붙일 수 없는 페니의 무엇인가가 마치 다홍색의 경이로운 물고기처럼, 그녀의 마음 어딘가로 미끄러지듯 헤엄치며 사라지고 말았다.

2018/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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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늙은 여자가 바르바라를 불렀다.

 바르바라는 드물게도 검정색 재킷에 완장까지 차고 있었다. 누구나 그녀가 선루스 기사단임을 알아보았을 것이다. 늙은 여자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바르바라를 불러 세운 것이었다.

 노인은 바르바라에게 자신이 찾고 있는 사람을 묘사했다. 기사님이고 여자인데 머리가 복슬복슬하고 새까맣다고 했다. 노인이 말을 하는 동안, 바르바라는 노인의 눈높이에 맞추어 허리를 숙였다. 그 사람 키가 어떻게 되나요? 바르바라가 묻자, 노인은 바르바라가 숙이고 있는 딱 그만큼을 손바닥으로 표시하며 대답했다. 아마 지금 딱 이 정도쯤 될 거야. 바르바라는 노인이 니아 다얄을 찾고 있음을 알았다.

 니아는 오늘 바닷가가 훤히 보이는 언덕 부근에 배치를 받았다. 그곳에서 한낮까지 보초를 서고 점심이 다가올 무렵 교대를 한 뒤 자유 시간을 가질 것이다. 노인이 어떤 연유로 니아를 찾는 것인지는 잘 알지 못 했지만 주민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움직이는 것이 선루스의 도리. 바르바라는 노인을 부축하거나 느긋한 발걸음을 맞추며 언덕으로 올라갔다.

 니아는 햇볕을 피하려 지어놓은 작은 오두막에 앉아있었다. 그 오두막집은 정말 모양새만 간신히 갖춘 정도라서 창도 없고 문도 없었다. 그래서 사방으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가 끊임없이 밀려들어왔다. 바르바라는 입구에 두 손을 모은 채 서서 니아를 불렀다. 니아는 서두르지 않고 모습을 드러냈다. 더운데도 제대로 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바르바라.”

 “안녕, 다얄….”

 바르바라가 미처 용건을 설명하기도 전에 그녀의 등 뒤에 서있던 노인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니아를 무척 반갑게 맞으며 두 팔을 벌렸다.

 “기사님! 오늘은 무더운데 이곳에 계시는군요.”

 그런 후 노인은 품에서 가지런히 접힌 종이를 들어보였다.

 “저어, 아들에게 또 편지가 왔는데요.”

 “아.”

 니아는 알만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바르바라는 그녀의 인상이 한순간에 유순하고 부드러워 지는 것을 보았다. 니아가 평소에도 자주 신경 써서 웃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르바라 자신도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웃지 않을 때의 얼굴이 대조적이면 사람들은 멋대로 무엇이든 상상하려 든다.

 “음, 들어오세요.”

 니아는 노인의 편지를 건네받으며 슬그머니 입구에 비켜섰다. 노인은 손으로 치마 주름을 붙잡으며 오두막에 들어갔다. 니아는 바르바라를 바라보았다.

 “나는 괜찮아.”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니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노인을 따라 오두막 안으로 사라졌다.

 바르바라는 오두막 입구 앞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았다. 멍하니 하늘을 보면서 갈매기가 지나가기를 바랐다. 셀 수 있을 만큼의 마릿수가 하늘에 떠있길 바랐다. 오두막 안에서 드문드문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소곤거리는 듯 하다가 차츰 낭랑하고 또렷한 발음이 되었다. 파도와 바람소리에 묻히지 않고 그 목소리는 청명하게, 보이지 않는 무언가로 가득 차있을 것 같은 빽빽한 대기의 틈을 반드시 찾아내 찌르고 들어왔다. 바르바라는 편지의 내용을 대부분 들을 수 있었다. 니아의 입을 통해 낭독되는 누군가의 안부와 질문들… 부모를 떠난 자식과 자식을 떠난 부모들이 서로를 생각할 때 하게 되는 이야기들을 빠짐없이 들었다. 니아는 무언가를 읽는데 능숙해보였다. 노인의 편지를 읽는 것도 익숙해보였다. 머리 위로 갈매기가 날아갔지만 바르바라는 세는 것을 잊었다.

 ‘이런 일을 자주 하는 모양이지.’

 바르바라는 나무 벽에 머리를 기댄 채 생각했다.

 ‘부지런하게도.’

 얼마 뒤 노인이 오두막을 나오다 말고 바르바라를 발견했다. 바르바라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나 노인을 향해 미소 지었다.

 “바래다 드릴게요.”

 노인은 고맙다고 두 번이나 말했다.

 니아는 오두막을 따라 나오다 말고 바르바라와 시선이 마주쳤다. 바르바라는 배시시 웃어보였다. 이번에는 진심으로 웃은 것이다. 니아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르바라를 응시하다 말고 곧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계셨군요.”

 “응… 바래다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바르바라는 손톱을 내려다보다가 물었다.

 “평소에는 이런 일을 하는 거니? 익숙해 보이는구나.”

 “찾으실 때 만요.”

 니아는 어깨를 으쓱였다.

 “저분을 모시고 와주셔서 감사해요, 바르바라.”

 “아니야, 다얄. 너야말로.”

 바르바라는 작게 후후 웃었다.

 “하릴없이 시간을 죽이는 이들도 많은데, 좋은 일을 하는 구나….”

 니아는 금안을 슬그머니 굴리며 잠시 대답을 미루었다. 바르바라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파도소리가 들이닥치고 바람이 마구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바르바라는 손톱 끝을 매만졌다. 아까의 목소리가 귀에 남아있었다. 니아는 말할 때와 낭독할 때의 목소리가 달랐다. 웃지 않을 때와 웃고 있을 때가 다른 것처럼. 아까의 목소리는 지금의 것보다 더 아름다웠다. 하지만 자주 웃는 만큼 낭독을 하지는 않는다. 정말로 좋은 것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포착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니아는 글을 읽을 줄은 모르지만 마음을 부딪쳐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하여 아름다운 목소리를 낸다. 술집이나 골목이나 시장에서는 들을 수 없는 목소리로.

 마침내 니아가 대답했다.

 “그냥, 보통의 일이에요.”

 바르바라는 니아의 목소리에서 쑥스러운 기색을 희미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바르바라는 고개를 돌려 니아를 바라보았다. 니아는 시선을 피하는 대신 둥글게 웃었다.

 “바르바라도 좋은 일을 하고 있어요.”

 그 말에 바르바라는 조금 웃다 말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노인을 부축하며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갈매기를 다섯 마리나 보았다. 바르바라는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웃거나 웃지 않는 일들에 대해 생각했다. 어느 쪽을 숨기거나 올바르게 사용해야 하는지. 무엇이 아름답고 무엇을 신중하게 드러내야 하는지도. 하지만 그런 것을 도무지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는 좋은 일을 해나가면서 답을 찾아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니아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 바르바라는 그 생각을 했다. 

2018/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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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군가 따라오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오른손에는 양동이를, 왼손에는 떡밥을 담은 작은 철통을 들고 있었다. 어깨에는 낚싯대 두 개(긴 것과 짧은 것)를 짊어지고 있었다. 머리에는 밀짚모자를 쓰고 있었다.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게 소매치기나 강도로 생각되지는 않았다. 아직 이른 아침이었고 햇빛이 바르바라의 둥근 정수리를 내리쬐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 바라바라는 낚시를 하러 가려던 참이다. 빈 양동이와 진흙에서 퍼 올린 신선한 지렁이 외에는 가지고 있는 게 없었다. 누군가 장난을 치려고 내 뒤를 밟는 걸지도 몰라. 이런 생각을 하며 뒤를 돌았을 때, 그곳에는 제인이 있었다.

 제인은 바르바라와 거리를 벌린 채 그녀를 따라오고 있었다. 시선이 마주친 제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기는 했지만 크게 당황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장난을 치려다 발각된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바르바라는 제인이 바다로 산책을 나가려던 참에 자신을 따라오고 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모로 보나 낚시꾼의 행색이니 제인이 자신을 따라온다면 낚시에 흥미가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낚시를 하러 가는데 같이 갈래?”

 바르바라가 나긋나긋하게 물었다.

 제인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바르바라가 다시 앞서 걸어 나가자 조용히 그녀의 뒤를 쫓아왔다. 바르바라는 햇빛이 베이지색으로 부서지는 부드러운 모래사장 옆으로 쌓아올린 길을 걸으며 작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제인이 바르바라를 추월하거나 콧노래에 화음을 더하거나 혹은 거리를 줄일 지도 몰랐다. 혹은 뒤늦게 괜찮아요, 저는 그냥 갈게요, 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바르바라는 마을에서 멀지 않은 곶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날씨가 좋았다. 제인은 바르바라의 옆에 앉았다. 두 사람은 잠시 따뜻한 바위가 엉덩이를 데우는 것을 느끼며 반짝이는 수평선과 투명한 수면 아래로 보이는 에메랄드 빛깔의 물그림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후, 바르바라가 철통을 열고 지렁이를 꺼냈다. 바르바라는 제인에게 일부러 그 상자를 가까이 가져가 보여주면서 물었다.

 “드와이트, 지렁이가 으깨지지 않게 바늘을 끼울 수 있니?”

 제인은 눈을 굴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바르바라는 긴 낚싯대에 낚싯바늘을 걸었다. 그리고 꿈틀거리는 지렁이가 터지지 않도록 집게손가락과 엄지손가락으로 능숙하게 잡아, 재빠르게 낚싯바늘에 대가리를 끼워 넣었다. 바늘을 통과하는 순간 지렁이의 온몸이 진동하는 것을 바르바라는 느낄 수 있었다.

 제인은 바르바라의 능숙하고 재빠른 행동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바르바라는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할 수 있다고 해도 별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겠지. 혹은 정말 할 줄 모르거나.’

 바르바라는 미끼가 걸린 긴 낚싯대를 감아서 제인에게 넘겨주었다. 그런 후 제인에게 낚시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이번에 제인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저는 섬에서 살았어요.”

 그렇다면 짧은 낚싯대를 줬어도 잘 해냈을 것이다. 바르바라는 자신의 낚싯대에도 미끼를 건 뒤에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인은 바위에서 일어나 서두르지 않고 낚싯대를 젖혔다. 그리고 먼 바다를 향해 줄을 던져 넣었다. 바르바라는 자리에서 손만 휘둘렀다.

 두 사람은 다시 바위에 앉아 일렁이는 수면, 이따금 보이는 작은 물고기들의 그림자 따위를 응시했다. 파도소리가 규칙적인 듯 조금씩 어긋난 타이밍으로 땅을 향해 밀려들어왔다. 바르바라는 낚시를 하는 동안 말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제인 역시 수다쟁이가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침묵을 특별히 불편해하지 않았다.

 앉은 지 한 시간이 좀 지나자 햇볕이 뜨거워졌다. 바르바라가 제인의 머리에 자신의 밀짚모자를 씌웠다. 제인이 당황해했다.

 “뜨겁잖아. 쓰고 있어줘….”

 바르바라가 수줍게 손을 모으고 웃었다.

 제인은 무언가 불편한 것처럼 앉아있었다. 밀짚모자 때문에 생긴 그늘이 얼굴에 드리우자 마치 수심이 깊은 사람처럼 보였다. 몇 분이 지났을까, 결국 제인은 모자를 벗어 바르바라에게 돌려주었다. ‘빚을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가?’ 바르바라는 생각하면서도 상냥하게 마음을 써줘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더 이상 제인에게 모자를 권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다시 말이 없어졌다.

 고기가 잡혔다. 바르바라는 빈 양동이를 들고 통통 바위를 박차고 내려가 바닷물을 길었다. 그리고 그 안에 낚아 올린 고기를 던져 넣었다. 제인은 바르바라의 양동이를 들여다보았다. 물고기는 공포에 질린 것처럼 몇 번 뻐끔거리다 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헤엄치기 시작했다. 양동이에 들어있다는 사실을 까먹은 것 같았다.

제인은 고기를 잡고 싶어 하는 눈치였으나 몇 가지가 엉성했다. 바르바라는 제인의 낚싯줄이 파도에 떠밀려 점점 그들이 앉은 바위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원래는 파도의 흐름을 보고 다시 던져주어야만 한다.

 마침내 제인이 물었다.

 “줄이 아까보다 더 가까워진 것 같아요. 다시 던져야 할까요?”

 바르바라는 그렇게 하기 전에 먼저 낚싯대를 들어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제인의 낚싯대에는 아까 바르바라가 솜씨 좋게 꽂아 넣은 지렁이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다.

 “먹어버렸잖아.”

 제인이 말했다.

 바르바라는 누군가가 그녀를 귀여워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바르바라는 다시 지렁이를 끼워주었다. 그동안 제인은 바위 아래로 내려가 자신의 양동이에도 물을 길어왔다. 미끼를 새로 끼웠으니 슬슬 입질이 올 거라고 기대하는 걸지도 몰랐다.

 바르바라는 제인이 줄을 풀고 바다에 그것을 던져 넣는 것을 지켜보다가, 몇 가지를 더 조언해준 후에 자리에 앉았다. 제인은 한 번 바르바라에게 조언을 구한 후에는 아까보다는 어렵지 않은 눈치로 그녀에게 이것저것을 물어왔다. 바르바라는 성의 있게 대답했다. 그러는 동안 바르바라는 물고기를 두 마리 더 낚았다. 제인은 아무것도 낚지 못 했지만 대화를 시작했다.

 “낚시는 신물이 나도록 해봤어요.”

 “그렇구나.”

 바르바라는 줄을 당기며 느긋하게 웃었다.

 “아까는 말이야, 드와이트. 낚시를 하려고 나를 따라온 거니?”

 “그렇다기보다는 모래사장을 걸을 셈으로….”

 제인은 바다가 좋다고 말했다. 종종 모래사장이나 바닷가 근처의 길목을 걷는다는 이야기도 해주었다.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곳에 대해서도 말했다. 사방이 물로 가득 찬 작은 땅덩어리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섬에 대해 말할 때, 제인은 잠시 수평선 너머를 잠시 응시하다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라는 낚싯줄을 감으며 제인의 시선이 닿았던 수평선 근처를 바라보았다. 그곳에 어렴풋하게 점처럼 솟아오른 작은 땅덩어리가 보였다.

 이번에는 제인이 바르바라에게 이것저것을 묻기 시작했다. 제인은 바르바라가 낚시 스팟을 찾게 된 계기나 과정을 궁금해 했다. 그녀는 한 번 대화를 시작하자 무척이나 들떠보였다.

 “조용한 곳이 좋아서… 그런 곳에는 고기가 많더라. 사람이 드물어서 그런 걸 거야.”

 바르바라가 대답했다.

 제인은 육지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갔다. 시장과 좁은 골목들, 붉은 지붕의 집과 담을 타고 오르는 넝쿨 같은 것들을 나열하다가, 바르바라에게 시장에 자주 나가는지, 그렇다면 잘 아는 가게가 있는지도 물어보았다. 바르바라는 빵가게에 대해 말해주었다. 아침마다 속이 촉촉한 모닝빵을 굽고, 점심에는 바게트를 내놓는 빵집이었다. 바르바라는 이따금 생선으로 회를 떠서 그 집 빵으로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는다고 했다. 제인은 바르바라가 제인의 섬에 대한 묘사를 들을 때 그랬던 것처럼 그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었다. 그러더니 좋은 가게 같다면서 그 날 처음으로 웃었다. 바르바라는 그녀의 눈꺼풀을 가로지르며 접히는 얇은 쌍꺼풀을 들여다보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너도 가보는 거야, 드와이트. 그곳은 그렇게나 맛있는데도 생각보다 손님이 적단다.

 그 날 낚시는 일찍 파했다. 제인은 한 마리도 낚지 못 했다. 제인이 한 마리도 낚지를 못 해 슬슬 몸이 달아오른 것 같은 눈치였기 때문에 바르바라 역시 일찍 파한 것이다. 두 사람은 헤어져야만 하는 구간까지 천천히 걸으면서 웃거나 떠들었고,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바다를 흘끔거렸다. 바르바라는 제인의 양동이 속에서 출렁이는 짠 물방울과 이글거리는 하얀 물그림자를 보았다. 양동이를 잡고 있는 제인의 단단한 손목, 손목 위로 이어지는 팔을 보았다.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응시했다. 그러자 제인의 팔을 타고 자잘하게 박힌 작은 점들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수평선 끄트머리에서 보았던 희끄무레한 땅덩어리처럼 보였다.

 헤어지기 전에 바르바라는 제인의 양동이에 작은 물고기 한 마리를 옮겨 넣었다. 거절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제인은 고맙다고 말하더니 자신의 양동이 속으로 옮겨온 작은 생선을 살폈다.

 “일찍 죽을 거니까 오늘 저녁으로 먹어….”

 바르바라가 조곤조곤 말했다. 제인은 알겠다는 대답 대신 다시 한 번 고맙다고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그녀를 껴안아줄까 고민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오른손에 양동이를, 왼손에 철통을 들고 있었고, 어깨에는 낚싯대를 짊어지고 있었다. 왼손은 아까보다 미세하게 가벼웠지만 나머지는 전부 무거웠다. 그래서 바르바라는 그냥 인사를 했다.

 “빵집에 들러줘 드와이트. 가게를 운영하는 부부가 때때로 걱정하더라.”

 “그럴게요.”

 “안녕,”

 “내일 봐요.”

 두 사람은 노을의 기미가 보이는 분홍색 하늘 아래에서 반대의 방향으로 천천히 거리를 벌리며 걸어 나갔다. 각자의 집으로 갔다. 어느 누구의 양동이도 비지 않았다.

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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