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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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바르바라가 보기에 타지아나 이반의 몸에는 공통적으로 흐르는 무엇이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을 귀품이나 우아함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분명히 닮은 지점이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것을 아마도 귀족들이 가지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반은 타지아에 비하면 부유하거나 현재의 권세를 누리는 집안출신이 아니었는데, 그래서인지 바르바라의 눈에는 이반이 어쩐지 가난한 귀족처럼 보였다. 타지아의 말에 따르면 이반의 집안이 원래 그렇지는 않았는데 요즘은 가세가 서서히 기울고 있어 모두가 몰락할 징조를 가진 가문쯤으로 본다고 했다. 가세가 기우는 가문이라니, 높으신 분 코털이라도 건드린 걸까? 그게 아니라면 재산 관리를 개떡같이 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켈커스 룬넨 마을을 영지로 두었더라면 마을 주민들의 존경을 얻기는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명예와 위엄은 바르바라가 밟고 있는 켈커스의 마을에서 부가 만들어주는 부산물 같은 것이었다. 페트로프 영주가 모두의 공포를 획득할 수 있는 이유는 그가 설원에 쌓인 모든 눈과 나무를 한데 끌어 모은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반이 평민처럼 보인 것도 아니었다. 이반은 엄밀히 말해 타지아와 거의 똑같았다. 바르바라가 보기에 두 사람은 우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일을 마구 벌여놓은 후에 그 일에 대해 태평스럽게 생각해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행동이 불러올 여파가 그렇게 심각하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를테면 타지아는 막무가내로 바르바라를 페트로프 성까지 끌고 가서는 바르바라에게 글을 가르쳐주려고 했다. 그 뒤에 바르바라가 영주 앞에서 절절매야 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녀는 타지아와 함께 있기를 원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권위에 무언가를 빌어볼 생각은 없었다. 물론 조금은 있었지만 자신이 곤란해질 정도의 호의를 받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가하면 이반은 첫 만남에서부터 말을 끌고 오더니 바르바라를 뒷자리에 태우고는 어느 순간부터 자기 좋을 대로 속력을 냈다. 무섭다고 말했는데도 멈추지 않고 달리면서 심지어는 자기 좋을 대로 말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놓기까지 했다. 바르바라는 발밑으로 쏜살같이 뭉개져 지나가는 풍경이나 느닷없이 높아진 눈높이에 정신을 빼앗겨서 이반이 하는 말을 드문드문 흘려들었다. 바르바라는 자신이 중간에 떨어져서 마구 구르다가 정신을 잃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났을 때 혼자 억울하게 죽지 않도록 이반의 허리를 꼭 붙잡았다. 자신이 죽으면 이반도 죽는 것이다. 이반은 어차피 그녀에게 따질 수가 없을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바르바라처럼 이미 죽었을 것이기 때문이고(바르바라는 말하는 시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다)또 고삐를 잡은 건 이반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르바라가 정신을 차린 건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산 높은 지점에 도달했을 때였다. 벌써 날이 어두워지고 눈이 내리고 있었다. 발아래로 펼쳐진 마을이 조그만 한 불빛으로 점점이 밝혀져 고즈넉해보였다. 바르바라는 이제 말 때문이 아니라 날씨 때문에 얼른 내려가고 싶었다. 마을로 돌아가서 가족이 만들어준 따뜻한 수프에 빵을 적셔먹고 싶었다. 

 여러 가지 상념에 젖어있을 때, 느닷없이 이반이 혼잣말처럼 바다에 가고 싶네, 라고 중얼거렸다. 바르바라는 짜증이 났다. 자신을 태우고 고삐를 잡은 이 가난한 도련님은 이 지역의 눈을 얕보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는 눈을 맞으면서도 따뜻한 지방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가면 되잖아.” 

 바르바라가 신경적으로 덧붙였다. 

 “그러려면 일단 거꾸로 내려가야겠지.” 

 “너는 가고 싶은 곳이 없어?” 

 “왜 없겠어.” 

 바르바라는 불편한 자세를 조금 고쳐보려다 중심을 잃을 뻔하자 다시 이반의 허리를 꽉 붙잡았다. 바르바라는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지금은 내려가고 싶어.” 

 두 사람은 다시 산을 내려갔다. 이반이 말을 잘 모는 편에 속한다는 사실이 증명되고 있었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었고 눈이 많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바르바라는 승마를 계속할 마음이 없었다. 두 사람은 완만한 지대까지 조심조심 내려왔다가 평지에서는 힘껏 말을 달려 타지아가 기다리고 있는 숲 입구로 돌아왔다. 타지아는 그곳에 없었다. 

 “돌아갔나 보네.” 

 이반이 중얼거리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바르바라는 이반이 말에서 더 멀어지기 전에 냉큼 그의 등을 밟고 내려왔다. 이반이 작게 신음하다가 고개를 번쩍 들어 바르바라를 쳐다보았다. 바르바라는 이반의 얼굴을 비웃음으로 되갚아주고는 고개를 돌려 타지아를 불렀다. 

 “타지아, 얼른 나와!” 

 그러자 타지아가 인근 오두막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오랫동안 추위에 노출된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바르바라가 천천히 다가가자, 타지아가 우다다 달려와 바르바라를 껴안았다. 이반이 두 사람을 응시하며 말고삐를 정돈했다. 

 “간 게 아니었네.” 

 “그럼 추운데 거기 계속 서있겠어?” 

 타지아는 바르바라를 껴안은 채 어깨 너머로 이반을 바라보며 입술을 씰룩였다. 

 “이제 넌 나랑 돌아가야 해. 저녁시간이니까.” 

 타지아가 엄숙한 무언가를 선포하듯 말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걸어 가야해. 네가 모는 말에는 안 탈 거야.” 

 여자를 말에 태운다면 자신의 뒤가 아니라 앞에 태워야 하는 것이 신사의 암묵적인 매너임을 바르바라는 나중에야 알았다. 이반은 귀족이고 말을 몰지만 숙녀를 뒤에 태우고 좋을 대로 달리는, 일종의 평민스러운 구석이 있는 이상한 소년이었던 것이다. 

 

 

 5. 

 다음 날부터 세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한꺼번에 만나서 룬넨 마을의 이곳저곳을 쏘다녔다. 바르바라는 이반과 타지아를 마을에서 열리는 오전 시장에 데려가 별 볼 일은 없지만 귀족들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제법 흥미로울 법한 물건들을 구경시켜주었다. 가판대에는 직접 사냥하여 마름질한 모피, 설탕을 조금 묻혀놓고는 어마어마한 값을 받는 말린 과일들, 모피로 만든 외투와 장갑과 부츠 따위가 늘어져있었다. 타지아는 비명을 지르며(그녀는 이제 비명을 지르지 않는 게 더 이상할 지경이었다)바르바라의 팔짱을 끼고는 신나서 시장골목을 돌아다녔다. 이반은 그들의 뒤를 천천히 쫓아오다가 이따금 혼자 가판대에 멈추어 서서 여유롭게 물건을 구경하고는 다시 서두르지 않고 두 소녀를 쫓아갔다. 이반이 시장에 관심이 있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아마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이반이 지갑을 연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혹은 평민들의 물건을 살 만큼의 재정적인 여유도 없었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장사꾼들은 세 사람을 성가시다는 얼굴로 흘끔거렸지만 이따금 타지아가 손을 들어 “이것 좀 주세요”라고 말할 때면 기다렸다는 듯 굽실거리며 행복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타지아는 습관처럼 바르바라의 몫까지 포함하여 두 사람 분을 계산해놓고는 동행인 한 사람의 존재를 마저 깨닫고 세 사람 몫의 금액을 더 지불하고는 했다. 이반은 그럴 때마다 모호한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 곁에 서있었다. 

 좁은 골목마다 타지아의 식욕과 호기심을 돋우는 음식이 존재했다. 사탕과 말린 과일과 익힌 닭다리 살… 모든 게 맛있었다. 한 구역을 빠져나올 때마다 세 사람 모두 입가에 사탕이며 기름을 묻히고 있었다. 세 사람은 각자 동떨어진 듯 행동하다가도 음식을 먹을 때면 자연스럽게 붙어 다녔다. 어느새 타지아는 첫날의 적개심을 누그러뜨리고 이반을 자신의 친구로 취급하고 있었다. 반면 바르바라는 이반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굳이 고르자면 싫은 쪽에 속했는데, 어찌되었든 그가 귀족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함께 노는 것은 좋아했다. 아마 이반도 자신을 똑같이 여길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골목을 지나는데 나무상자 때문에 길이 막혀 있어서 평소와는 다른 길로 돌아가게 되었다. 평소에 바르바라가 두 사람을 끌고 다니는 길은 사람과 수레가 다닐 수 있을 만큼 넓고 햇볕이 잘 드는 길이었다. 하지만 그 날 세 사람은 한 사람 혹은 두 사람이 바짝 붙어야만 지나갈 수 있는 음습하고 기묘한 길을 통해 앞으로 나아갔다. 아무도 눈을 치우지 않아 바닥이 미끄럽고, 볕이 들지 않는 구역마다 어슴푸레한 어둠이 감싸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공기가 텁텁해졌다. 타지아는 바르바라 곁에 꼭 붙어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바르바라가 가장 먼저 앞서는 것이 불만이었던지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결국 세 사람은 나란히 일렬로 서서 그 좁고 어둡고 축축한 길을 나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다섯 발자국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바르바라가 흠칫 멈추어 서자 뒤따라오던 이반과 타지아도 우르르 멈추어 섰다. 바르바라는 잠시 숨을 죽이고 주변을 살폈다. “무슨 일인데?” 이반이 등 뒤에서 묻자 바르바라가 쉿, 소리를 냈다. 하지만 더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길거리는 여전히 불길함에 감싸여 있었지만 그들을 위협할 만큼 적대적인 소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 같았다. 바르바라는 다시 젖은 벽을 더듬거리며 아까보다 느린 속도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세 사람이 골목 끝으로 나와 희끄무레한 햇살을 마주했을 때, 등 뒤에서 요란한 나무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동시에 몸을 돌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를 살피려 들었다. 한 여자가 골목 벽 어딘가에 달려있던 문을 열고 뛰쳐나왔다. 여자는 세 사람이 서있는 골목 출구까지 쏜살같이 달려 나오다 말고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곧이어 다른 한 여자가 한손에 칼을 든 채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녀는 결연한 표정이었으나 분노로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칼을 든 여자는 서두르지 않고 세 사람을 지나쳐 길바닥에 쓰러진 여자 앞까지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러더니 심호흡을 했다. 바르바라는 반사적으로 두 발자국 물러나 타지아의 곁에 섰다. 

 “이 거지같은, 이 개 같은 년!” 

 여자는 허공에 칼을 휘두르며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길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두 여자와 세 아이들이 서있는 좁은 골목길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널 에아가 심판할 거야, 이 거지같은 년! 네가 감히!” 

 여자는 여전히 칼을 허공에 마구 휘두르면서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바닥에 쓰러진 여자가 얼굴을 감싸고 자신을 숨기려 들자, 그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칼을 들지 않은 나머지 손으로 눈앞의 상대의 얼굴과 손을 분리시켰다. 그러고는 다시 욕지거리를 퍼붓기 시작했다. 

 “걸레! 쓰레기! 오물!” 

 바르바라는 타지아와 이반을 번갈아 살피다말고 타지아의 두 귀를 가렸다. 그러고는 이반을 보며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반은 바르바라를 바라보며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그는 이 욕을 들어본 적도 있고 그 뜻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바르바라의 보호를 받을 필요가 없었다. 

 한바탕 소동이 진정된 후에 바르바라는 타지아와 이반을 끌고 장터를 벗어났다. 세 사람은 눈이 쌓인 산등성이를 묵묵히 바라보며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갑자기 타지아가 말을 꺼냈다. 

 “걸레가 뭐야?” 

 바르바라와 이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바르바라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쳐다보면서 대답했다.

 “그건 남의 남편을 빼앗은 계집애들에게 할 수 있는 모욕적인 단어야.” 

 바르바라는 이반의 시선을 느꼈다.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게 있는 법이다. 

 바르바라가 덧붙였다. 

 “아까 그 여자는 분명 칼을 든 여자의 남편과 간통을 하고 있었을 걸.” 

 룬넨 마을에서는 그런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간간이 일어나곤 한다. 

 타지아는 얼굴을 찡그린 채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알겠어. 알려줘서 고마워, 난나.” 

 그런 후 타지아는 습관처럼 바르바라를 껴안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어깨 너머로 이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모양으로 이렇게 말했다. ‘너도 걸레라는 말을 알고 있니?’ 이반은 한쪽 입 꼬리를 올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6. 

 세 사람이 조그만 룬넨 마을을 샅샅이 훑고 다닌 후에는 더 이상 갈 곳이 없어졌다. 그러자 마침내 타지아가 엄숙히, 드디어 그럴 때가 됐다는 것처럼 “난나네 여관으로 가자”고 말했다. 

 “우리 집은 여관이야.” 

 바르바라는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을 이반에게 덧붙여주었다. 

 “알고 있어.” 

 이반이 대답했다. 

 “아 그래?” 

 “타지아에게 들었거든.” 

 “그럼 우리 집이 사기꾼들로 득실거린다는 것도 알겠구나.” 

 바르바라는 비웃는 투로 앞서나가며 이반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알고 있어.” 

 이번에도 이반이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갑자기 차분해졌다. 그녀는 몇 걸음 더 앞서가다가 멈추어 서더니 타지아와 이반이 자신을 쫓아올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그러고는 두 사람이 그녀를 쫓아오자 더 이상 앞서나가지 않고 두 사람의 속력에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그런 식으로 체사레 여관까지 걸어 나갔다.  

 여관 문을 열자, 1층 거실에 앉아있던 바르바라의 할머니 마미사가 고개를 돌렸다. 

 “페트로프 아가씨, 오랜만이구나.” 

 그런 후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떠 낯선 소년을 살피고는 덧붙였다. 

 “…그리고 이번에 들어온 그 마차의 주인 되시겠군.” 

 “이반이에요.” 

 바르바라는 두 사람의 외투에 묻은 눈을 거칠게 털어내면서 대꾸했다. 

 “귀족이니?” 

 “그럼요.” 

 바르바라는 능청스럽게 대꾸하면서 이반에게 물었다. 

 “그렇지?” 

 “그렇지.” 

 이반이 대답했다. 

 바르바라는 두 사람을 먼저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으로 올려 보냈다. 타지아는 일부러 쿵쾅거리면서 계단을 올라갔는데, 그녀가 이곳에 한없이 익숙하다는 것을 이반에게 과시하고 싶은 듯했다. 타지아의 요란한 발소리는 위층을 따라 희미해지다가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자 거실 한쪽에 소리도 없이 앉아있던 릴리버드와 콜리아가 얼굴을 내밀고는 두 아이들이 올라간 층계를 살피며 히죽였다. 릴리버드와 콜리아는 바르바라의 사촌언니들인데 릴리버드가 맏이고 콜리아가 둘째다. 두 사람은 큰 이모의 딸이고 바르바라보다 각각 7살, 5살이 더 많았다. 릴리버드가 고개를 돌려 바르바라를 쳐다보았다. 

 “쟤네 자고 갈 거야?” 

 “응.” 

 “잘 됐다.” 

 릴리버드가 손뼉을 치며 뺨을 붉혔다. 

 “페트로프 아가씨 물건은 손도 못 대지만 저 빨간 머리 남자애는 괜찮아.” 

 콜리아는 노래하듯이 말을 받았다. 

 “쟤는 여길 떠날 테니까.” 

 “여길 떠나겠지.” 

 “어쩐지 빈털터리 같지만.” 

 “털어보면 또 다르겠지.” 

 바르바라는 두 언니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언니들 마음대로 해도 좋아.” 

 그런 후 바르바라는 층계를 올라갔다. 

 

 7. 

 바르바라는 자신의 방에서 타지아와 이반과 함께 보드게임을 했다. 나무로 대충 깎은 말 세 마리를 판 위에 얹어놓고 주사위를 굴려서 누가 먼저 결승선에 도달하는지를 겨루는 놀이였다. 판의 가장자리마다 숲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 위에는 ‘이야기’라고 쓰여 있었다. 누구든 간에 그 숲으로 말을 들이게 되면 자신이 알고 있는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를 해야만 했다. 일종의 벌칙이었는데 사실 이 보드게임은 결승선에 먼저 도달하는 것보다는 바로 그 숲속에 도달한 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목적이 있었다. 세 사람은 엎치락뒤치락하며 자신의 말을 움직여 보드를 몇 번이고 돌고 또 돌았다. 바르바라는 한 번도 이야기의 숲에 걸리지 않았다. 오로지 타지아만 세 번 연속으로 그곳에 당도했고 나머지 두 사람은 타지아가 들려주는 에아의 신화에 대해서 들어야만 했다. 마침내 바르바라가 숲에 걸렸을 때, 타지아는 비명을 질렀다. 

 “난나, 네가 걸렸어!” 

 타지아는 온갖 오두방정을 떨면서 박수를 쳤다. 

 “이제 네가 이야기를 할 차례야!” 

 바르바라는 입술을 삐죽이다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없는 걸.” 

 “갑자기 도망치는 거야?” 

 이반이 물었다. 바르바라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반을 응시했다. 

 “안 한다고 하지는 않았어.” 

 바르바라가 대꾸했다. 

 그런 후 바르바라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8. 

 켈커스 지방의 북부에는 이 이야기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써 그러나 하나의 줄기를 유지하며 전승되어 내려온다. 바로 늑대인간에 대한 이야기였다. 

 바르바라가 사는 룬넨 마을에도 늑대인간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바르바라는 어릴 때 어머니 마리사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고, 나중에는 마미사 할머니로부터 더 구체화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리고 열세 살의 바르바라는 이 이야기를 이반과 타지아에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바르바라는 두 아이들에게 켈커스 최북단에 있는 조그만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지붕이 작은 나무 타일로 이루어져 있고, 마을의 뒤로는 거대한 숲이 펼쳐져 있는 아주 고립된 마을이었다. 바르바라는 풍경을 세세하게 묘사했다. 전나무가 우거진 숲 곳곳에는 짐승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밤이면 빛나는 두 쌍의 눈들이 숲 곳곳에 점처럼 박혀 있었다. 특히 늑대가 그곳에 자주 출몰했다. 

 키가 작은 청년 욘디는 바로 그 늑대를 사냥하는 사냥꾼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늑대 사냥을 중단하고 일을 쉬고 있었다. 건넛집에서 살고 있는 목수의 딸에게 푹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목수의 딸은 이상하게도 늑대를 좋아해서 이따금 숲속을 내다보며 휘파람을 불곤 하는 기묘한 소녀였다. 늑대 외의 것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인간이나 나무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욘디는 어느 순간부터 늑대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본인이 늑대가 되는 상상을 하기 이르렀다. 어느 날 욘디는 꿈을 꾸었고, 꿈속에서 늑대가 되었다. 욘디는 무척 기뻐하며 목수의 딸이 휘파람을 불 때까지 숲속에서 기다렸다가 그녀의 휘파람 소리가 들리자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목수의 딸은 늑대가 된 욘디를 하염없이 어루만져주었다. 무척 달콤한 꿈이었다. 

 그 후로 욘디는 매일같이 그 꿈을 꾸었다. 늑대가 되는 경험이 매일 밤 반복되자 꿈에는 살이 붙기 시작했다. 욘디는 꿈속에서 단순히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는데 그치지 않고 숲으로 나가 동료와 함께 사냥을 하거나 덫을 피해 설산을 달리거나 달을 향해 울부짖게 되었다. 그러자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데도 자신이 네발로 걷는 게 더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밤중에 울부짖는 늑대 소리에 잔뜩 흥분해 깨어나기도 했다. 욘디의 털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혓바닥이 길어지고 송곳니가 날카로워졌다. 욘디는 밤에도 숲속의 짐승과 어둠으로 감싸인 마을의 풍경을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어느 날 욘디는 자신이 네발로 걷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귀를 쫑긋 세웠다. 그러자 목구멍에서 헥헥거리는 소리가 기어 올라왔다. 욘디는 정말로 늑대가 되었던 것이다! 

 욘디는 웅크린 채 집안을 몇 번 킁킁거리다가 휘파람 소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쏜살같이 목수의 집까지 달려갔다. 그는 이 일련의 일들이 너무나 익숙했다. 꿈속에서 몇 번이고 경험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목수의 딸은 욘디를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정말로 늑대가 나타나자 공포에 질리고 말았다. 어쩌면 욘디의 몸집이 너무 커서 그랬을 지도 모른다. 혹은 늑대를 좋아하지만 정말로 늑대가 자신의 앞에 나타나길 바라며 휘파람을 분 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어쨌든 욘디는 너무나 당황해서 그녀를 안심시켜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인간으로 돌아가서 나라는 걸 알려줘야겠어.’ 

 욘디는 두 발로 서서 말을 해보려고 했다. 간신히 ‘욘,디’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욘디는 자신의 몸에서 털이 빠져나가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거뭇거뭇한 털 사이로 듬성듬성 인간의 살결이 드러났다. 발가락 사이로 솟아오른 발톱이 서서히 손가락에 붙은 모양새로 돌아오기 시작했고, 꼬리가 점점 작아져 엉덩이에 달라붙으려고 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욘디의 등 뒤로 아주 긴 늑대울음소리가 들렸다. 욘디는 습관처럼 고개를 젖히고 울부짖었다. 아우우우. 그러자 욘디의 몸에서 일어나던 모든 변화가 일순 중단되었다. 공포에 질린 욘디가 고개를 돌려 등뒤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대한 보름달이 떠있었다. 

 목수의 딸은 달빛에 드러난 흉측한 욘디의 모습에 비명을 질렀다. 욘디는 두 발로 서있었지만 늑대의 주둥이를 가지고 있었다. 피부는 인간의 털이라기엔 너무 길고 거친 가죽으로 덮여있었다. 두 눈이 숲속의 그들처럼 형형하게 빛났다. 송곳니를 타고 침이 줄줄 샜다. 

 “괴물이야, 괴물이라고!” 

 목수의 딸은 울면서 살려달라고 외쳤다. 욘디는 그 모습에 큰 충격을 받았다. 

 잠시 후 그의 등 뒤로 다시 한 번 늑대의 긴 울음소리가 들렸다. 욘디는 고개를 젖혀 그에 화답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그리고 다시는 마을로 내려오지 않았다. 

 이따금 마을에는 보름달이 뜰 때면 늑대도 인간도 아닌 무언가가 울부짖는 끔찍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모두는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했다. 그것은 인간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잊은 짐승의 목소리였다. 

 

 9. 

 “무서워.” 

 타지아가 팔을 휘적거리다가 바르바라를 껴안았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에게 안긴 채로 이반을 쳐다보았다. 얼굴이 제법 득의양양했다. 

 “어때?” 

 “그래서 이 이야기는 뭘 말하고 싶은 건데?” 

 이반이 물었다. 

 “글쎄.” 바르바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마도 인간으로 돌아오는 방법을 잊은 사람들은 이렇게도 슬프고 끔찍한 존재가 된다는 이야기겠지.” 

 “도덕에 대한 이야기야?” 

 이반이 되물었다. 

 “아니.” 

 바르바라는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아마도 정말 문자 그대로 괴물에 대한 이야기야.” 

 “오늘 밤에도 나타날까?” 

 타지아가 속삭이자, 바르바라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은 어느새 어두컴컴했고 달이 떠있었다. 그러나 보름달은 아니었다. 

 “아니, 나타나지 않아.” 

 “벌써 밤이네.” 

 이반은 창밖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잘 시간이 벌써 지났겠어.” 

 타지아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리자, 바르바라는 문을 쳐다보며 대답했다. 

 “맞아.”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그래서 긴 이야기를 한 거야.” 

 이반과 타지아가 자고 있을 때, 바르바라는 습관처럼 이반의 머리맡을 뒤져서 장갑 한 짝을 훔쳤다. 그리고는 그 사실을 곧 잊어버렸다. 

 

 10. 

 이반이 떠나기 전에 세 사람이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페트로프 성에 존재하는(그러나 쓰이지 않는) 작은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일이었다. 원래는 이반이 리드를 하고 당연하지만 타지아가 팔로를 하기로 되어있었는데 드레스로 갈아입고 나온 타지아가 갑자기 바르바라를 끌고 구석으로 가더니 속삭였다. 

 “난나, 어떡해?” 

 타지아는 드레스를 한 단 정도 걷어서 무릎을 보여주었다. 그곳에는 하얀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고 남아있었다. 

 “이반에게 이걸 보여주면 난 죽을 거야!” 

 “수치스럽니?”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린 후 덧붙였다. 

 “네가 수치스러워 할 게 아니야.” 

 “어쨌든.” 

 타지아는 엉성하게 걸어보려다 드레스 사이로 다리가 드러나면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너무 슬퍼.” 

 타지아가 중얼거렸다. 

 바르바라는 타지아의 손을 잡고 이반이 기다리고 있는 무도회장 중앙까지 갔다. 타지아는 바르바라의 등 뒤에 숨었다가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바닥에 주저앉았다. 이반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바르바라가 말했다. 

 “페트로프 아가씨가 드레스를 입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삐었대.” 

 바르바라는 능청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그래서 춤은 못 출 것 같으니까 다른 걸 하자.” 

 “글쎄.” 

 이반은 바르바라의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것처럼 대꾸했다. 구체적으로 그녀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를 알 수는 없었지만 분명 무언가가 가려져 있다는 느낌을 받은듯했다. 처음 만날 때부터 그랬지만 이반은 어느 정도 눈치가 있었다. 

 “그냥 네가 추지 그래?” 

 그리고 그것을 상냥하게 눈감아주는 법이 없었다. 

 바르바라는 저를 놀리듯 바라보며 팔을 벌리고 있는 이반을 쏘아보다가 타지아를 한 번 돌아보고는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바르바라는 이반에게 다가가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나는 춤을 출 줄 몰라, 도련님.” 

 그 말에 이반은 약을 올리듯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내 춤을 도둑질하면 되잖아?” 

 “좋은 생각이야.” 

 바르바라는 작게 웃었다. 

 두 사람은 차갑고 딱딱한 바닥을 조용히 누비면서 엉성하게 춤을 추었다. 바르바라는 정말로 춤을 출 줄 몰랐다. 타지아가 몇 번 스텝에 대한 조언을 던지기도 했지만 따라가기 버거워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는 몸에 리듬을 익힌 것처럼 이반의 스텝을 따라서 밟기 시작했다. 그녀는 드물게도 가느다랗게 눈을 뜨고는 이반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집중했다. 무언가를 정말 훔치기 위해 유심히 관찰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반이 바르바라를 리드해야 할 그 타이밍에 자신이 리듬을 가로채고 이반의 허리를 꺾었다. 마치 본인이 도련님이고 이반이 영애인 것처럼 말이다. 순식간에 포지션이 뒤바뀌었다. 이제 리드를 하는 건 바르바라고 팔로를 하는 건 이반이 되었다. 

 둘은 잠시 그 자세로 멈추어 있었다. 그러다 이반이 허리를 꺾어 제자리로 돌아왔다. 

 “정말 훔쳤구나.” 

 “제대로 훔친 것 같아?” 

 “어느 정도는.” 

 그러자 바르바라가 신경질적으로 이반의 팔을 붙잡고 앞으로 이끌었다. 바르바라는 갑자기 남자가 된 것 같았다. 그녀는 이반을 자신의 여자인 것처럼 대하면서 무도회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그러다 심술궂게 손을 놔버렸다. 이반은 휘청거리다 간신히 중심을 잡았다. 그러고는 마치 그녀가 그의 등을 밟고 말에서 내려왔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어쨌든 훔쳤으니 그걸로 됐어.” 

 바르바라는 손을 털어내며 말했다. 

 “난 욕심 많은 도둑은 아니거든.” 

 그런 뒤에도 두 사람은 몇 번 더 포지션을 바꾸어가며 무도회장을 빙글빙글 돌았다. 바르바라가 먼저 나가떨어졌다. 그녀는 그만하고 싶다고 말한 뒤에 집으로 돌아갔다. 타지아와 이반은 저녁을 먹으러 올라갔다. 세 사람은 같이 식사할 수 없었다. 

 

 11. 

 바르바라는 이반이 떠나는 당일 날 이반이 떠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이반에게 언제쯤 떠나는 것이냐고 물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언젠가 떠날 사람이라는 것만을 확실하게 인식해두고 그 이상을 궁금해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기한을 알게 되면 정말로 애틋해지거나 애틋해서는 안 될 순간이 뒤바뀌게 될 지도 모르는 노릇이었기 때문이다. 

이반은 작별인사를 위해 말을 타고 마을로 내려와서는 바르바라 앞에 멈추어 섰다. 그는 말에서 내려오지 않고 그냥 그곳에 앉아 바르바라를 내려다보았다. 

 “타지아는?” 

 “영주님하고 같이 있어. 손님들을 마중해야 하니까.” 

 “떠나는구나.” 

 “아쉬워?” 

 “네가 떠날 거란 사실을 잊은 적은 없어.” 

 바르바라는 고개를 들어 이반을 올려다보았다. 드물게 맑은 햇빛이 잿빛 구름 사이로 내리쬐고 있었다. 이반의 등 뒤로 빛이 들어서 역광이 강렬했다. 이반의 얼굴이 어둠에 감싸여 있었다. 바르바라는 얼굴을 찡그렸다. 

 “잘 있어.” 

 바르바라가 말했다. 

 “뭔가 좋은 말을 덧붙여봐.” 

 “음.” 

 바르바라는 고민하다가 덧붙였다. 

 “좀 더 부자가 되도록 해.” 

 그 말에 이반이 웃음을 터뜨렸다. 

 “네 여관은 내가 거지라서 건드리지 않았던 모양이야.” 

 바르바라는 웃지 않았다. 이반의 말에 자신이 훔친 장갑 한 짝이 떠올랐던 것이다. 

 바르바라는 품에서 털장갑을 꺼냈다. 그녀는 말없이 그 한 짝을 이반에게 건네주고는 곧 쌀쌀맞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것은 여관집에서 체사레 식구들이 늘 짓는 표정이었다. 도둑질을 한 후에 시치미를 떼면서도 상대를 위협하는 그 표정. 

 “내가 훔친 거야.” 

 바르바라는 이반을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잘 있어. 이제 가버려.” 

 그런 후 바르바라는 돌아갔다. 등 뒤에서 말 달리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그녀는 결단코 몸을 돌리지 않았다. 

 

 12. 

 이반이 떠나고 얼마 안 있어 타지아가 바르바라를 찾아왔다. 이제 다시 둘이 되었어. 타지아는 그 말을 기쁜 것처럼 읊었지만 표정은 어쩐지 외로워보였다. 바르바라는 그녀에게 이반이 다시 돌아올 객식구인지를 묻지 않았다. 아마도 이반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바르바라는 그를 잊어갈 것이다. 겨울이 긴 지방에서 누군가를 또렷하게 기억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새하얀 눈을 보고 있자면 머릿속도 덩달아 백지상태가 되는 것이다. 

 “이반의 물건 중에 훔친 게 있어?” 

 타지아는 궁금한 듯이 물었다. 

 “아니.” 

 바르바라는 모든 일의 결과만을 이야기했다. 

 잠시 후 바르바라가 정정했다. 

 “물건 중에는 없어.” 

 “그럼 뭘 훔쳤는데?” 

 “이제부터 보여줄게.” 

 바르바라는 타지아를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의 어깨에 둘러진 망토를 벗겨 한쪽에 던져놓았다. 타지아는 두꺼운 재질의 털 달린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바르바라는 그녀의 손을 들어 자신의 허리를 감게 하고, 나머지 한 손을 자신의 어깨에 두게 했다. 그런 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르바라가 무엇을 하는지 알아차린 타지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 난나!” 

 타지아가 말했다. 

 “넌 정말 멋진 도둑이야!” 

 “알고 있어.” 

 바르바라는 어깨에 얹어진 타지아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춤을 리드했다. 그녀는 타지아를 자신의 영애처럼 대하고 있었다. 타지아가 기쁘게 발을 놀리며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바르바라도 이번에는 조금 웃었다. 

 춤을 추는 동안 이반을 떠올려보려고 했지만 어쩐지 바르바라는 역광 속에 가려진 얼굴밖에는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말에 올라탄 소년은 바르바라를 내려다보고 있고 얼굴은 어둠에 감싸여 보이지 않는다. 햇빛이 강렬해서 그녀는 눈을 찌푸린다. 이제 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눈을 감는다. 

 “내가 훔친 것 중에서 가장 우아한 게 될 것 같아.” 

 바르바라가 중얼거렸다. 

 “아마도.” 

2018/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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