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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 «조류»
2차/old 2019. 10. 23. 01:51

 모든 것은 언젠가 되돌아오는 법

 

 1.

 덩케르크 해안에는 조류가 있다. 어느 바다에나 있는 것이므로 명물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특별할 것 없이, 세상의 바다는 가득 찼다가 가득 빠져나가는 것이다. 마치 철새처럼.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할 ‘그들의 조국’이 있는 건 새도 바다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필립이 해변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간조(干潮)였고 모래사장은 군데군데 움푹 패어있었다. 백사장 너머의 바다는 눈부시게 청명하고 아름다웠다. 줄지어 선 망령 같은 영국군들이 없었다면 덩케르크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관광지로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등 뒤에서 총성이 마구 울려 퍼졌다. 필립은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 나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는 막 방어선 내부로 들어온 참이었다. 가벼운 이명이 찾아왔다가 맥없이 사라졌다. 심장소리만 남았다.

 그의 부대는 둘로 나뉘어졌다. 다섯 명이 방어선에 남았고, 나머지가 퇴각 명령을 받았다. 후퇴한 빈자리에 영국군들이 엎드려 총탄을 장전했다. 개중 한 명이 영어로 무어라 소리를 쳤지만 필립을 포함한 부대원들은 알아듣지 못 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총격전이 시작되었으므로 모두가 몸을 낮췄다. 영국군들이 손사래를 쳤다. 쌓아올린 포대 사이로 총탄이 박히면서 모래가 조금씩 튀었다. 소음 속에서 out, get, shit 따위가 들렸다. 누군가 어깨를 잡아끌었다. “기예, 뒤로 빠지자. 바다로 가자. 퇴각하라잖아.”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해변으로 달렸다. 마을의 끝까지. 그들이 지켜낸 방어선의 가장 안쪽까지. 누군가 쓰러졌지만 알지 못 한다. 허겁지겁 달리다 말고 멈추어 섰을 때, 푸른 수평선이 펼쳐졌다. 남겨진 전우도 달려 나온 전우도 각각 다섯이었는데 필립을 포함한 세 명만이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곤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잔교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역시도 영국군이 시간마다 선박을 보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미 해안선에는 몇 척의 함선이 떠있었다. 저 함선에 타면 군인이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땅에 무사히 이송된다. 퇴각명령을 받은 것은 프랑스군이나 영국군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겨지고 그들은 떠난다. 독일 군에는 진격할 수 있는 탱크와 폭격할 수 있는 비행기가 있다. 최전방에서 싸워온 우리는 덩케르크 해안선으로 시시각각 좁혀드는 방어선을 목격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남겨진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남겨졌다. 우리는 죽는다. 자명하다. 뒤통수가 서늘했다. 마르첼로가 필립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저 배를 타야해.” 테오가 묵묵히 동의하며 뒤를 따랐다.

 그들은 해안선을 가로질러 잔교로 향했다. 걷는 동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뭇거뭇한 점들과, 어렴풋이 보이는 영국령과, 희끄무레한 순양함들이 떠있었다. 하지만 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로 찢어질 듯 한 굉음과 함께 슈투카 폭격기가 날아갔다.

 잔교 입구는 이미 퇴각한 프랑스군의 군집으로 꽉 차있었다. 마르첼로가 익숙하게 몸싸움을 벌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테오와 필립은 그가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군집 앞에 선 영국군은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를 치고 있었다. only! 주변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필립은 얼굴을 찡그린 채 소리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영국군은 인파에 밀려날 때마다 빈번이 온몸을 던져서, 앞당겨진 군집을 도로 밀어놓았다.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외치고 있었다. 이번엔 또렷하게 들렸다. English Only!

 “그들은 우리를 보내주지 않을 거야.”

 “엿이나 먹으라지.”

 테오는 빈정거리면서도 초조하게 마을과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 뒤지게 생겼다고, 알아? 기예, 이제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배를 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

 “영국군만 된다잖아, 빌어먹을! 멀쩡한 건 이 잔교뿐이야. 여길 막는다고? 알아서 뒤지라고 등 떠미는 거랑 뭐가 달라?”

 “기다릴 거야?”

 “그럼 기다려야지. 별 다른 도리가 있겠냐? 마을로 돌아갈 순 없잖아. 미친 나치새끼들… 마르첼로 좀 봐.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인데?”

 잔교 위에서 작은 몸싸움이 벌어졌다. 다리 위에 서있던 영국군 두 명이 달려와 주먹질을 하는 마르첼로를 떼어놓고 내동댕이쳤다. 프랑스군들은 쓰러진 마르첼로를 잡아 벽 쪽에 앉혔다. 소란이 진정되자마자 영국군들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다리로 돌아갔다. 프랑스군들은 잠시 침묵하다말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이 재개되었다. 밀려났다가 되돌아오는 프랑스군들은 덩케르크 해안으로 쏟아지는 파도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주저앉은 마르첼로는 인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대열을 정돈하기 어려워졌음에도 그를 막기 위하여 영국군은 필사적이었다. 소리를 치며 쏟아지는 인파를 막으려 애썼다.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ENGLISH, ONLY!

 “난 갈래.”

 “어딜?”

 “여기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필립은 잔교를 내려왔다. 백사장을 지날 때, 바다에 줄지어 선 영국군들이 고개를 돌려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죽은 눈들이 필립의 뒤통수로 따라붙었다가 곧 떨어져나갔다. 테오는 따라오지 않았다. 마르첼로와 테오는 부대 안에서도 싸도 도는 사이였으므로 납득할 수 있었다. 필립이 혼자 남겨진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같은 부대원이라도 그와 그들은 동지보단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까웠다. 그의 동지들은 진작 최전방에서 죽었다.

 필립은 마을입구와 가까운 것도, 그렇다고 해안선과 가까운 것도 아닌 곳에 주저앉았다. 탱크의 포탄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먼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강했고,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워질 때가 다가오는 것이다. 필립은 그곳에 앉은 채 파도가 높아지고, 영국군들이 잔교 위 혹은 해변 가 안쪽으로 후퇴하고, 노을이 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수평선을 따라 떠있던 거뭇거뭇한 점들이 파도와 함께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시체, 시체들, 무수한 시체들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를 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 바닷가에는 여전히 새가 없었다. 어쩌면 돌아가지 못 하고 전부 죽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 끝까지 붙들고 있던 가냘픈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치까지 떠내려 온 시체 한 구가 허벅지를 치고 지나갔다. 필립은 고개를 숙였다. 배를 탄다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것보단 살 확률이 높아지겠지.

 English, Only! 마음속으로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필립의 영혼에 구멍을 냈다. 시체의 군번줄이 노을빛을 받아 눈앞에서 붉은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Gibson. 그것은 꼭 경고등처럼 보였다.

 

 2.

 그는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아침이 되었을 땐 Enligh가 되어 있었다. 이제 배를 탈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지게 된 셈이었다. 필립은 자신의 군번줄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군복 깊숙한 주머니에 묶은 후 안으로 감추어놓았다. 그리고 원래 자리에 새 군번줄을 달았다. Gibson. 그것이 이제부터 그의 이름이었다.

 깁슨이 깁슨이 되고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깁슨이었던 누군가의 시체 위로 흙을 덮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행동만은 아니었고, 약간의 죄책감, 그리고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이상한 의식에 가까웠다. 전쟁은 폭격과 살육의 현장이었고 그는 생사를 넘나들며 최전선까지 밀려나온 생존자였다. 학살은 너무나 당연한 듯 자행되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정신은 내내 제대로 붙박여있지 못 하고 종종 반쯤 허공을, 무의식의 경계를 부유하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구체적으로 깁슨이란 존재에게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당시에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 했다. 하지만 필립이 깁슨이 된 순간, 그가 디디고 섰던 땅은 그토록 염원하던 평화의 조국이 아닌 죄악의 심판지대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방황하던 그의 영혼이 무사히 몸으로 되돌아올 즘엔 필연적으로 그 죄책감과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시체를 파묻으며, 깁슨은 눈물 대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죄의식의 영역은 오래 전에 두고 온 나머지 너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가 고개 숙이는 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면 그의 영혼이 지상에 두고 온 게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 했을 것이다.

 반쯤 파묻은 시체를 두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 바지를 내리던 어린 영국군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소년은 헐거운 바지를 추슬러 올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가와 마주보고 쪼그렸다. 소년은 그가 묻어주다 만 시체의 발 위로 모래 더미를 얹어주기 시작했다. 깁슨은 손을 멈추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영어가 유창했더라면 무엇이든 물어봤을 지도 몰랐다. 소년에게 발견되었으므로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된 참이었다. 그러니까 그 순간, 필립(Philippe)이었던 프랑스군은 깁슨(Gibson)이란 영국군으로서 영국군 소년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이제 이전의 정체성으로는 설령 원한다고 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소년이 나타난 순간부터 톱니바퀴는 반대방향으로 맞물리기 시작한 것이다. 부유하던 영혼이 육신을 향해 끌려오고 있었다. 죄악의 지대로, 단죄의 시간으로, 죄책감으로, 손쓸 도리도 없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수통을 원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전우에게 무언가를 원한다. 깁슨은 제공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깁슨도 그렇게 한다.

 그는 수통을 내밀었다.

 소년은 물을 마셨다. 깨끗하고 신선한 물을 뚝뚝 흘려가며 마셨다. 그리고 되돌려 주었다. 그들은 눈을 마주보며 웃지도 않는 낯으로 희미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들은 그 순간 전우가 되었다.

 그 날, 그 순간, 하늘로부터 시시각각 슈투카 폭격기가 가까워지던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는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으므로’ 시체 묻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고, 소년을 만났고, 잃어선 안 될 이름과 조국을 잃었고, 동시에 잃어선 안 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토미와 함께 찾아온 그것을 양심(Gibson)이라고 불렀다.

 

 3.

 필립은 세 개의 부대에 배치되었다. 첫 번째 부대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곳엔 필립의 오랜 전우들이 있었고, 전쟁 이전의 시대를 함께 보낸 이들이었다. 당시엔 독일군의 침략 선전이 허황되고 우스운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들이 폭격을 맞이했을 때, 대다수는 부대 기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필립과 불침번을 섰던 두 명의 전우를 제외한 모든 이가 사망했다. 프랑스는 5일 만에 손을 들었고 손쓸 도리 없이 조국 곳곳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살아남은 필립과 남은 전우들은 새 부대에 재편성되었다. 마르첼로와 테오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부대에서였다. 나치가 최신형 전차를 끌고 시시각각 언덕을 넘고 있었다. 연합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덩케르크로 밀릴 때까지, 필립은 그들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대다수의 부대가 저지대에 전력 배치되어 몰살당하거나, 힘겹게 후퇴했다. 필립이 새롭게 배치된 부대의 사기는 이미 꺾일 대로 꺾여 있었다. 마르첼로와 테오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말수가 없고 신경질적인 부류였다. 과거의 부대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도 않고, 말이 나오면 분노했다. 그들은 오직 그들만이 서로의 안식인 것처럼 굴었고, 저들끼리 과거의 이야기를 하거나 죽어버린 이전의 전우들 이야기를 나눴다. 필립은 그들과 만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최전선에서 고전하다 말고 덩케르크 해안까지 밀려났다. 총격전에서 필립의 전우들이 모두 사망했다. 뒤돌아서 뛰쳐나온 건 필립뿐이었다. 살아남은 것도 필립뿐이었다. 함께 남겨진 건 마르첼로와 테오 뿐이었으나, 그들은 전우라고 하기엔 너무 멀고 남처럼 느껴졌다. 어색하기만 해서 소용이 없었다. 그가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더라도 언젠간 찢겨나갔을 지도 몰랐다.

 필립이 마지막으로 옮겨간 부대는, 정확하게 몇 사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의적으로 옮겼고, 소속도 바뀌었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확실하게 자신의 소속을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English. 그는 이제 깁슨이었다.

 잠시 후에, 병원선이 정박했다. 토미는 시체를 묻다 말고 수통을 들고 마셨으며, 목을 축인 후 해안선을 향해 걸어 나갔다. 깁슨은 일어나 그의 뒤를 밟았다. 다시 간조기를 맞은 해변으로 영국군들이 일렬을 유지하며 해변에 서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장관이었다. 동시에 끔찍한 풍경처럼 보였다. 백사장을 모조리 채운 군인들의 투구 때문에 해변은 새까맣게 뒤덮여있었다. 토미는 눈치를 보며 줄에 끼어들었다가, 소속이 아님이 발각되자 빠져나왔다. 계속해서 걸었고, 이따금 뒤를 돌아 깁슨와 눈을 마주쳤다.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두었다. 그들 사이에 희미한 끈이 생긴 것 같았다. 유대감이라 부르기엔 너무 얄팍한 시간으로 붙잡힌, 전쟁이 만든 기묘한 인연처럼 느껴졌다. 토미는 앞서 나가다 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미 뿐만이 아니었다. 해변의 모든 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누군가 총을 장전했다. 창공을 찢으며 폭격기가 등장했다. 슈투카 폭격기들은, 온몸에 폭탄을 두른 괴물들이다. 그들은 비명소리 같은 소음과 함께 등장해 모래사장으로 내리꽂을 것처럼 하강하다가, 몸무게를 줄이고 직각으로 솟구친다. 총을 장전한 병사 하나가 대공사격을 개시했으나 이내 쓰러졌다. 모두가 모래밭이 납작 엎드린 채 때를 기다렸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바로 근처에 떨어졌음에도 그 무엇도 하지 못 한 채 숨을 죽여야 하는 순간, 인간의 무력함은 가중된다. 깁슨은 숨을 멈추고 차례차례 터지는 폭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잠시 후, 주변이 조용해졌다. 깁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토미 쪽을 바라보았다. 토미는 죽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마저 걸어나갔다. 계속해서 걷다가 다시 멈추어 섰다. 버려진 들 것 위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토미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부상병 하나가 꿈틀거리며 목을 움직였다. 잔교에 정박한 병원선에서 길게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토미는 뒤를 돌아 깁슨을 바라보았다.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 순간, 그들 사이를 아우르던 투명하고 느슨한 그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유대감! 토미가 코트를 벗는 동안 깁슨은 들 것의 손잡이를 쥐었다. 토미가 가세했다. 그들은 장정을 지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토미가 생존을 위하여 선택한 일은 죄를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 행위의 기저에는 동일한 당위가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군번줄을 훔침으로서 영영 시체의 소속을 지워버린 것과는 다른 세계에 있었다. 양심과 함께 찾아온 소년이었기 때문인가? 혹은 양심 그 자체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토미(Tommy)는 그의 구원인가?

 다리를 건너는 와중에도 몇 번의 공습이 이어졌다. 그들은 인원 수 제한으로 승선거부 당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교각에 매달린 채 다음 기회를 노렸다.

 새하얀 병원선은 집중 포격되었다. 쉰여 명의 부상병들이 물에 수장되었고 깁슨은 교각을 붙들고 토미와 함께 배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제군들, 다른 배를 타게.” 머리 위로 제독이 권고했다. 깁슨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 했지만, another ship이란 단어에서 생존의 냄새를 맡았다. 토미와 그는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교각을 붙잡고 물에 들어갔다가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들이 건져 올린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 되었다.

 그들은 교각 사다리를 타고 다른 군인들과 함께 잔교 위로 올라왔다. 모두가 물에 젖어있었으므로 그들은 한 군집처럼 보였다. 꽁무니에 허겁지겁 붙었는데도 누구 하나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이방인임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은, 토미가 건져 올린 토미 또래의 소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은근슬쩍 부대원들 사이에 낀 그들을 보고도 적개심을 품기는커녕 오히려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후 뻔뻔한 표정으로 나아갔다. 토미와 깁슨은 다시 한 번 시선을 교환했다. 모터보트에 탑승했을 때, 소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그들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산뜻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Hey, 제법인데.”

 바로 그 순간, 알렉스 역시 그들의 전우가 되었다. 말하자면 한 배를 탄 셈이다. 

 다중적인 의미가 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4.

 그 날 밤, 깁슨은 갑판 아래로 내려가지 못 하고 난간에 섰다. 그는 조국을 보았다. 멀어져가는 바다 너머의 땅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다. 그곳은

 불타고 있었고, 

 싸우고 있었고, 

 나날이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조국이 사라진다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영국군의 이름을 얻은 그가 안식을 취한다면 어디에 묻힐 것인가? 오월인데도 바닷바람은 몹시 찼다. 깁슨은 추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것과 맞서 싸우며 덜덜 떨었다. 바다 곳곳에 보트가 떠있었다. 무수한 영국군들이 올라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Don't, leave, us! 불기둥은 끊임없이 어두컴컴한 마을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어뢰다!

 그것은 상어처럼 물살을 가르며 왔다.

 

 5.

 많은 것을 서술할 수는 없다. 밤바다는 존재만으로도 몹시 공포스러운 장소다. 새까맣고, 끝을 알 수도 없으며, 발 디딜 곳조차 제공해주지 않는다. 상어나 어뢰 같은 것을 상상하면 도무지 맨 정신으로 떠있을 수가 없다. 깁슨은 그곳에서 구출되었다. 영국군들은 그가 구명조끼를 입고 있지 않은 영국군이어서 기꺼이 건져내주었다. 배 끄트머리에 탑승한 채, 그는 물을 떨어뜨리며 침몰하는 함선을 바라보았다. 토미와 알렉스가 배 근처로 헤엄쳐오는 것이 보였다. 함선 뱃전을 삼킨 불길이 천천히, 육중하게,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물보라가 일면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 한 병사들이 수장되었고, 모두가 끔찍할 만큼 숨을 죽였다. 토미가 헐떡이며 뱃전을 잡았다. 깁슨은 바라보았다. 그가 문을 열어 기꺼이 구출한 그의 양심을. 그의 전우를. 알렉스는 그 옆에 꼭 붙어있었다.

 “우릴 버리지 마.” 그의 전우들이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밧줄을 내려서, 둘이 그것을 꼭 붙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들은 밤바다를 가르며 죽음의 땅으로 되돌아왔다.

그 다음 날 탈출에 실패한 한 남자가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6.

 이제 깁슨은 모래톱에 좌초된 선박에 앉아 만조를 기다리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지루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기다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죽음의 공포를 감내하는 일에는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웅크리고 있던 모든 소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들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꾸벅꾸벅 졸다 말고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예민하게 경청하며 바싹 곤두섰다.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배는 방어선 바깥에 있었다. 독일군이 모래톱 너머로 득실거렸다.

 몇 시간동안 긴장과 공포에 길들여진 깁슨은, 그 지루하고 지겨운 시간의 틈 속에서, 문득, 아주 느닷없이 궁금해졌다. 마르첼로와 테오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것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그는 깁슨 아닌 필립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을 소년들이 알 리는 만무하였으나, 때때로 관념은 예리하고 섬세한 영혼의 감수성에 의하여 포착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깁슨은 알렉스에게 유감을 표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앞으로 다가왔을 때, 이따금, 아니 자주, 인간들은 살기 위하여 영혼을 내던진다. 그것은 온전히 가지고 있기엔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깁슨의 품에는 두 개의 군번줄이 낙인처럼 매달려 있었으며, 그의 영혼은 이미 한 번 내던져 졌다가 토미에 의해 간신히 붙들려 있었다.

 배 안에서 유일한 프랑스군이 된 깁슨은 이제 토미와 함께 들 것을 지고 뛰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었다. 들 것에 버려진 부상병을 이고 잔교 입구를 지날 때, 프랑스군들의 군집과 다시 마주할 일이 있었다. 깁슨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단 한 명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발견되지도 않았다. 잔교 입구엔 마르첼로도 테오도 없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방도를 찾아 떠난 것일 지도 모른다. 새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배 안의 소년들은 결코 알지 못 했지만, 만조가 다가올 무렵 창공으로 갈매기 두 마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무거운 공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날개를 움직이다가, 다시 바람을 타고 위로 솟구쳐 오른 후 해안선 너머로 멀리, 아주 멀리 날아갔다. 그 새들은, 잔병들을 태운 순양함과 병원선을 지나… 국기를 단 채 함선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수십 척의 요트들을 거쳐… 용기를 위해 영혼을 걸고 투쟁한 고귀한 두 소년을 태운 단 한 척의 특별한 배(MOONSTONE)를 거슬러…… 도싯의 하얀 절벽 너머로, 누군가의 조국으로, 영국으로… 돌아갔다.

 

 7.

 사랑한다. 인간을 사랑한다. 조국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한다. 돌아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인간들이 있었다. 영혼을 버린 사람도 영혼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어째서 그런 일들이 벌어져야만 했나.

 새들은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8.

 말해, 어서 말해, 아니라고 말해!

 

 9.

 Français… Je suis Français…….

 

 10.

 그는 온전한 영혼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전우를 잃었다.

 

 11.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알렉스는 깁슨을 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전혀 닿지 못 하고 수장되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그가 고백함에 따라 전위로 올라온 그의 죄 때문이었다. 그가 버렸다고 시인한 정체성을 돌려받는 순간, 알렉스와 그 사이를 묶던 투명한 끈은 끊어지고 유대는 사라졌으며 부족한 영어로도 소통할 수 있었던 마법 같은 순간들은 삭제되었다. 물을 차고 빠져나오려던 깁슨의 군복 안쪽에서부터 필립(Philippe)의 군번줄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부유하다말고 물살에 친친 엉켜 뱃 기둥에 단단히 감겼다. 수면을 갈망하며 뻗었던 손이 저지되었다. 바닷물이 목구멍을 차고 끊임없이 빨려 들어왔다. 필립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 했다. 군번줄은 단단히 그의 몸을 붙잡고 함선과 함께 침몰했다. 부유하던 육신은 영혼을 향해 끌려 내려갔다. 죄악의 지대로, 단죄의 시간으로, 죄책감으로, 손쓸 도리도 없이… 수몰되었다…… 바로 그 순간, 필립의 숨통이 끊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군번줄이 순간 붕 뜨면서 엉겨 붙은 매듭에 헐거운 틈이 생겼다. 필립의 시신은 물살과 함께 아래로 소용돌이치듯 잡아당겨졌다가, 뱃전에 쿵 부딪히며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선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수면 위로 조금 치솟았다가, 이내 물살에 따라 흔들리며 천천히 운반되었다. 그의 시체는 파도를 타고 무수한 다른 시체들과 함께 덩케르크의 해변으로, 새가 한 마리도 날지 못 했던 그 흰 모래톱 위로, 프랑스의 바다로, 조국으로…… 돌아갔다.

 세상의 파도는 바다가 삼킨 것을 되돌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12.

 마르첼로와 테오는 해안에서 퇴각하는 영국군 무리 끄트머리에 서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조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모두가 서둘렀다. 요트와 선박을 끌고 온 민간인들이 차례로 영국군을 실어 나르고 있었고, 여유의 자리에 프랑스군들을 태웠다. 조국에 남겠다고 승선을 거부한 일부는 해안의 반대편을 향하여 마르첼로와 테오를 지나쳐 걸어 나갔다. 시체들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

 “새가 하나도 없군.”

 마르첼로가 하늘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테오도 덩달아 고개를 젖혔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한 마리도 없군. 원래 그런가?”

 “모르지.”

 “폭격기가 올 지도 몰라.”

 “배에 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

 뻣뻣한 시체 하나가 마르첼로의 허벅지를 둔탁하게 치고 지나갔다. 마르첼로는 고통으로 펄쩍 뛰었다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테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르첼로, 왜 그래?”

 “기예야.”

 마르첼로가 고개를 들어 테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살에 더는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시체를 붙들고 있었다. 테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체의 눈을 마주보았다.

 “…눈을 감겨.”

 그가 속삭였다. 마르첼로는 그렇게 했다.

 “……이 자식, 군번줄이 없어.”

 “달아야 할 자리에 없어?”

 “없어. 이음부가 떨어져 나갔어.”

 테오는 물살에 흔들리는 희끄무레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것은 시체의 허리 부근에 친친 감기다 만 모양새로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테오는 몸을 숙여 물속에서 그것을 건져냈다. 햇살에 반짝이며 눈부신 흰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Philippe.

 “찾았어.”

 테오가 말했다.

 “입에 넣어줘.”

 마르첼로가 읊조렸다. 그래서 테오는 그렇게 했다.

 그는 눈을 감긴 시체의 입 안으로 그의 이름을 밀어 넣고, 단단히 턱을 다물렸다. 이제 시체의 혓바닥 아래에는 그가 어디에 묻힐 것인지 분명하게 말해줄 소속의 징표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우리 모두는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떠내려 보내.”

 마르첼로가 말했다. 그는 우울하지도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작게 신음한 후, 앞으로 움직인 대열을 향하여 한 발짝 나아갔다. 테오는 조심스럽게 시체를 다른 시체와 부딪히지 않도록 파도에 띄워 모래톱으로 보냈다. 그들은 필립의 시체가 점점 멀어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 하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들은 필립의 전우가 되었다.

 

 13.

 덩케르크 해안의 만조가 모래톱을 무너뜨리며 코앞까지 차올랐다가, 간조기가 다가옴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파도는 후퇴하는 도중에도 곳곳을 헤집었다. 땅에 반쯤 묻혀 있던 소속 없는 시체 한 구가 물살을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다시 모래톱으로 되돌아왔다. 물거품과 함께 중간이 똑 끊어진 군번줄 하나가 마구 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물결을 타고 천천히 시체 근처로 떠내려 왔다. 마침내 파도가 더는 모래톱에 영역을 끼치지 못 하고 바다로 되돌아 갈 때, 시체에 막혀 돌아가지 못 한 군번줄이 젖은 흙에 남았다. 그것이 반들거렸다. Gibson. 그러니까, 모든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확실하게… 돌려받은 것이다. 조류였다. 누군가는 언젠가 그것을 양심이라고 읽었다.

 간조가 닥치고 덩케르크의 모두는 후퇴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덩케르크의 해안 위로 하얗고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창공에 나타났다. 그것은 유유히 날갯짓하며 희고 고운 모래톱과 새파란 물위를 떠돌다가, 마을을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그리고 포화를 뚫고, 언덕을 넘어서… 총알과 대공사격을 피해서… 누군가의 평화로운 조국(home)으로, 집(home)으로, 평화의 육신으로…… 돌아갔다.

-

1. 깁슨은 WW2 당시 지리적으로 영국 몸빵을 하느라 개털린 프랑스를 상징하는 인물. 깁슨을 연기한 배우 아나이린의 피셜에 따르면 깁슨의 진명은 필립 위고 기예 (Philippe Hugo Guillet). 내 안의 이미지랑 매칭되는 어감은 아니다. 위고? 기예는 좀 어울린다고 생각함. 작중 이름조차 없던 배역이 작품 바깥에서 유일하게 풀네임을 얻은 이 아이러니라니.

2. 처음 덩케르크를 보았을 땐 알렉스가 죽은 것인줄 알았다. 권선징악 엔딩인줄 알았음. 2차 찍은 후에야 알았다. 죽은 거 깁슨이었음을... 그렇게 어두컴컴한 곳에서 백인 배우들 얼굴 어떻게 구분하는 거냐. 

3. 깁슨의 설정을 마구 날조해가며 썼는데 무슨 생각을 하며 썼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잘 안 난다. 깁슨한테 뭔가 해주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함. 이름을 돌려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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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녹턴»
2차/old 2019. 10. 23. 01:44

 그로부터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알렉스는 집을 그리워했다. 그에겐 형이 있었고, 크지 않은 집 거실엔 피아노가 있었다. 아버지는 치과 의사였다. 시골에 병원을 차리고 시가지보다 싼 가격에 진료를 했다. 그 거실에 햇볕이 잘 들었던 것이 기억난다. 어머니는 파이를 잘 구웠다. 디저트를 먹는 동안 형이 종종 피아노를 쳤다. 그는 음대를 지망하고 있었고 꽤 연주를 잘 했다. 대체로 들어줄 만한 연주였다. 가끔 진심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 나이 대 아이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알렉스는 진심으로 형을 선망했다. 아이들은 성인은 아니되 어른의 경계선 가까이에 있는 사람에게 쉽게 마음을 내주기 마련이다. 너무 동떨어지지는 않았으나 자신과는 분명히 다른 형의 연주는 분명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고백하자면 알렉스 역시 피아노를 치고 싶었다. 몰래 건반을 눌러본 적도 있다. 그러나 그가 제대로 오선지를 읽어보기도 전에 일이 터졌고, 알렉스는 건반을 누르는 대신 트리거를 당겨야 했다. 독일이 세계를 침략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알렉스는 운명을 선택하기도 전에 끌려나온 셈이다. 시대의 비극은 종종 이런 식으로 계승된다.

 그는 노르망디로 전송되었다.

 알렉스는 낙하산을 짊어져야 했다. 그건 분명 운 나쁜 일이다. 공수 부대에 배치된 것 역시 알렉스의 선택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비행정에 올라타지 않았더라도 그 이후의 일들은 언제든지 운 나쁜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공수 부대가 아니었다면 함선에 탑승해야 했을 것인데, 알렉스는 이미 독일의 U보트가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인지 알고 있었고 침몰하는 함선 속에서 익사의 위기를 다시 한 번 맛보느니 하늘에서 폭탄처럼 떨어지는 편이 낫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공수 훈련을 하는 동안 날씨가 몹시 쾌청했다. 노르망디에 상륙하기 전까지 그들은 도버 해를 떠돌면서 낙하산을 펼치고 뛰어내리는 일을 훈련이랍시고 반복한 후, 곧장 비행정에 태워져 명령을 기다렸다. 그러나 악천후가 시작되었다. 상륙작전이 다가오고 있었으나 바다는 잠잠해질 틈이 없었다. 작전이 미뤄지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진지에 웅크린 채 몰아치는 비바람 소리를 들으며 자신이 공수부대에 배치된 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기 위해서였다고, 함선에 오르는 대신 비행정에 오른 건 기회였을 거라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다. 작전은 강행되었다. 비행정에 올랐을 무렵엔 그럭저럭 기분이 누그러져 있었다. 긴장된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모든 가능성에 “설마”를 붙일 만큼의 여유가 생긴 알렉스가 스스로에게 중얼거렸다. 설마 죽기야 하겠어. 설마 내가 제일 운이 나쁘겠어. 설마 돌아가지 못 하겠어. 그의 옆자리에 앉은 미군은 이를 딱딱거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비행정은 가장 마지막에 출발할 예정이었고 자유 프랑스군과 영국군이 몇 명 탑승한 미군 부대의 것이었다. 알렉스는 주변을 둘러보지 않았고 오직 자신에게 중얼거리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알렉스 역시 결국 고도로 긴장해있던 셈이다. 비행정이 출발했을 땐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바람소리는 끔찍했다.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다. 알렉스는 풍경이 그렇게도 멀고 작게, 동시에 빠르게 스쳐갈 수도 있다는 걸 그 때 알았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지 않았더라면 알렉스는 낙하산 줄을 펼치는 것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는 긴장하면 순간적으로 백지 상태가 되는 습관이 있었다. 피아노를 치지 못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피아노. 알렉스는 아이러니하게도 떨어지는 순간 언젠가 형이 거실에서 쳤던 이름 모를 곡을 떠올렸다. 곡 이름이 뭐였지? 아니, 그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나는 떨어지고 있다.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있으므로 이렇게 있어서는 안 된다. 알렉스는 버튼을 눌러 낙하산을 펼쳤다. 중력과 가속의 법칙에 의해 포탄마냥 땅으로 내다꽂던 몸이 일순 위로 잡아당겨졌다. 허공에 붕 뜬 발을 마구 자맥질했다. 알렉스는 이제 직각이 아닌 직진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제대로 떨어지지 않으면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다는 공포감 때문에 발끝을 노려보며 점점 가까워지는 풍경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공수부대가 뿔뿔이 흩어지고 있음을 그가 알 수 있을 리는 만무했다. 그는 숲속에 떨어졌고, 낙하산은 가지에 걸렸다. 알렉스는 다리 부상 없이 무사히 착륙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상에 무사히 발을 디디고 나서야 또 다른 공포감이 엄습했다. 알렉스는 혼자 있었다. 공수부대와 합류하지 못 했다. 비행정이 잘못된 장소에 내려주었거나, 그가 실수한 것이다. 원인을 알 수는 없었다. 알렉스는 오래 고민하지 않으려 애썼다. 생각을 하면 죽는 곳에 도착해버렸기 때문이다. 총을 쥐고 비틀거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다리를 다치지 않은 것을 행운으로 여기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위안이었다.

 알렉스는 숲에서 아무도 만나지 못 했다. 그는 코탕탱 반도 동쪽에 있었고, 야트막한 숲이 끝나면 평야가 펼쳐져 있었다. 프랑스 서부는 독일군에게 점령당해 상황이 좋지 않았다. 숲을 헤매다가 사살당할 수도 있었다. 운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숲에서 재회한 공수부대도 있었지만(그들은 급조 전투 부대를 만들었다) 알렉스는 생트메르에글리즈 뒤쪽에 도착할 때까지 홀로 움직여야 했다. 아무도 그를 발견하지 못 해 사살당하지 않고 마을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그러나 행운은 그게 끝이었다. 그곳엔 독일군들이 포진해 있었다. 빈 집에 성공적으로 숨어들기까지 알렉스는 총살당해 걸레짝이 될 자신의 시체를 생각하며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 했다. 벌벌 떨면서 기어갔다. 울타리의 개구멍으로 몸을 욱여넣고 최대한 사물에 붙어 있었다. 독일군들이 그가 웅크린 울타리 너머를 지나갔다. 누군가 소리를 쳤다. 독어로 말했다. 독일군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달려갔다. 알렉스는 더는 기어가지 못 하고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었다. 멀리서 총성이 울렸다. 어쩌면 마을엔 알렉스 말고 다른 공수부대원들이 있는 걸지도 몰랐다. 독일군들은 그들을 한 명씩 색출해 죽이고 있었다. 한 번 더 먼 곳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번엔 연달아 울리고 있었다. 알렉스는 거의 울 것처럼 헐떡이다가 죽을 각오를 하고 문을 열어 빈 집으로 기어들어갔다. 다행히 근처의 독일군들은 전부 총성의 출처지로 이동한 모양이었다. 발견되지 않았다.

 집안에 들어서자마자 알렉스는 눈을 비비며 고개를 숙이고 헛구역질을 했다. 아무것도 게워낼 수 없음에도 그렇게 했다. 무엇이든 게워내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그렇지 않고선 도무지 견뎌낼 수가 없었다. 먼지가 마구 날아다녔다.

 고개를 들었을 때, 뒤통수에 차가운 금속이 닿았다. 알렉스는 얼어붙었다, 찰칵, 소리가 굉장히 익숙했다. 눈을 감은 채 두 손을 들어올렸다. 손끝이 벌벌 떨렸다. 먼지가 뽀얗게 다시 바닥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공기가 차가웠다. 누군가는 쏘지 않았다. 잠시 그렇게 굳어 있다가 천천히 총구를 내렸다. 알렉스는 헐떡이면서 숨을 고르다가, 속으로 셋을 세고 둘에 뒤를 돌았다. 덤벼들었다. 누군가의 멱살을 쥔 채 소리 없이 엎치락뒤치락했다. 둘은 빈 집의 바닥을 뒹굴었다. 알렉스가 먼저 정신을 차렸다. 아래에 짓눌린 소년이 헐떡이며 늘어져있었다.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시간이 걸렸다. 얼굴을 알아보았다, 는 사실이 알렉스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그는 토미의 멱살을 쥐고 있었다.

 “토…….”

 창문 너머의 발소리들이 가까워졌다. 알렉스와 토미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창가 아래에 바싹 붙어 있었다. 알렉스는 그대로 엎어져 토미를 짓눌렀다. 최대한 바닥에 붙어 숨을 죽였다. 토미의 입술이 알렉스의 뺨 아래에서 마구 뭉개지고 있었다. 불규칙한 숨소리가 잔뜩 기를 죽인 채 알렉스의 얼굴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토미의 인중을 들락거리는 숨의 기운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발소리들이 멀어지고 다시 한 번 멀리서 총성이 울렸다. 그들은 소리가 지나간 후에도 한동안 자세를 유지하며 바싹 붙어있었다. 먼저 긴장이 풀린 쪽은 알렉스였다. 그는 고개를 돌려 토미를 내려다보았다. 둘은 너무 가까이 붙어 있어서 거의 한 몸처럼 보였다. 알렉스의 입술이 토미의 입술 끝을 스쳤다가 닿았다가 다시 떨어져나갔다. 알렉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가 비틀거리며 다시 주저앉았다.

 “……토미.”

 알렉스가 뱉어냈다.

 “토미.”

 이번엔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너는 죽지 않았구나, 하고 확인하는 절차처럼 들렸다. 토미는 천천히 일어나 알렉스 쪽으로 기어갔다. 벽에 기대고 앉았다. 숲에서 내려왔어. 토미는 말했다. 둘은 침묵한 채 그렇게 오래 앉아 있었다. 발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지만 먼 곳에서 이따금 총성이 들려왔다.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알렉스는 시선으로 집을 훑어보았다. 그들은 거실에 있었다. 전체적인 집 크기에 비해 거실이 컸다. 피아노가 있었다. 그랜드 피아노는 아니었다. 피아노, 하고 알렉스는 한 번 더 머릿속으로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기억 속에서 파이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형을 떠올리지는 못 했다. 그는 노르망디에 없었고, 그렇다고 평화로운 어딘가에 있지도 않았다. 전쟁 때문에 그렇게 된 건 아니었다. 세계의 모든 비극이 그곳에만 있는 건 아니다. 알렉스는 형이 그렇게 된 게 결론적으로 굉장히 나쁘지만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형은 공포에 떨지는 않았다. 비통과 상실감에 젖기는 했지만, 죄책감을 가지거나 스스로를 증오하거나 야비해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정말이지, 그랬다. 지망대학에서 떨어지는 게 무슨 대수란 말인가? 살아있다면 다음 해가 올 것이고 그렇다면 다시 피아노 앞에 앉을 수도 있었는데. 왜 그래야만 했을까? 바보 같은 형. 바보 같은 칼라일. 정말이지 바보 같은 일이었다. 머리에 구멍을 내면 사람이 죽는다. 그 사실을 알렉스는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에 깨달아야만 했다. 사람은, 누군가는, 살아가다 문득 스스로를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결국 형에 대해 생각해버리고 말았고 곧 고개를 숙였다. 눈가가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토미는 가만히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알렉스의 어깨가 들썩거리는 것쯤은 분명 눈치 챘을 것이다. 알렉스가 겁을 먹어서 울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지도 몰랐다. 알렉스는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지만 울음이 잦아들자 코를 삼키곤 우물거렸다.

 “무서워서 운 건 아니야.”

 토미가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손등으로 인중과 뺨을 훔치곤 한숨 같은 숨을 뱉어냈다. 시선이 거둬지지 않았다. 알렉스는 결국 고개를 돌려 토미를 마주보았다. 시선이 부딪혔을 때, 토미는 알렉스의 손끝을 건드렸다.

 “그렇게 생각하진 않았어.”

 멀리서 다시 한 번 총성이 울렸다. 발소리는 없었다. 독일군들이 분명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어쩐지 안전하게 느껴졌다. 잠시 그랬다. 알렉스는 어쩔 줄 모르며 시선을 헤매다 고개를 숙이고 다시 한 번 코를 삼켰다.

 “그래.”

 햇빛이 완전히 기울어졌다. 알렉스는 울음을 완전히 그쳤다. 먼지가 금빛으로 산란하면서 창문 근처를 날고 있었다. 그래서, 하고 알렉스가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서.

 “너도 공수부대였군.”

 “운이 좋은 건 아니었지.”

 “아닐 수도 있어.”

 알렉스는 입술을 비틀었다.

 “U보트는 지긋지긋하잖아, 안 그래?”

 토미는 잠시 침묵했다가, 수긍했다.

 “그래.”

 “배에 탔으면 벌써 죽었을 지도 몰라. 배는 늘 우릴 죽일 뻔했잖아.”

 “배가 없었으면 우린 죽었어.”

 “…그건 그래.”

 잠시 침묵이 있었다. 발소리는 없었고 총성도 더는 울리지 않았다. 주변이 고요했다.

 알렉스가 다시 불쑥 말했다.

 “어쩌면 그 때 죽었어야 했는지도 몰라.”

 토미는 대답 대신 알렉스의 손끝을 치워냈다. 알렉스는 자신이 멀리 밀쳐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변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 상황이 끔찍하잖아.”

 토미는 수긍하는 눈치였지만 그 불길한 말에 무언가 보탤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는 창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어느 쪽이든 죽는 건 최악이야.”

 이번엔 알렉스가 그 말에 수긍했다. 반박할 여지도 없었고 자명했으며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살기를 간절히 기원했다. 더 이상 나쁜 말을 해서는 안 됐다. 알렉스는 벽에 기댄 채 몸을 조금 뒤척였다.

 “집(home)에 가면 뭘 할 거야?”

 “조국(home)?”

 토미가 되물었으므로 알렉스는 정정해야 했다.

 “아니, 너희 집(home).”

 “아.”

 토미는 우물쭈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일단… 따뜻한 걸 먹고 싶어.”

 “그거 좋지.”

 “수프 같은 거.”

 “난 파이가 먹고 싶다.”

 “그리고 푹 자고 일어났으면 좋겠어.”

 “당연한 거 아니야?”

 “그리고 또…….”

 토미는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보챘다. 또?

 “피아노를 쳐보고 싶어.”

 알렉스의 표정이 잠깐 무너졌다가 돌아왔다.

 “칠 줄 알아?”

 “아니.”

 토미는 제법 딱딱하게 대꾸했다.

 “그냥 배우고 싶어서.”

 “언제부터 그랬는데?”

 “그냥…….”

 토미가 말끝을 흐렸다.

 “난 악기를 한 번도 가까이서 본 적이 없어. 그럴 기회가 없었거든.”

 해가 지기 직전의 볕은 오렌지 빛을 띄고 있었다. 빛을 반사하면서 피아노의 표면이 매끄럽게 반짝였다. 먼지가 쌓여있었지만 황금색 로고가 선명했다. 유명한 회사였다. 알렉스도 알고 있었다. 그의 거실에도 동일한 브랜드가 있었다. 알렉스가 말했다.

 “저건 좋은 피아노야.”

 “나도 알아.”

 토미는 입술을 물었다가 몸을 뒤척였다.

 “제기랄, 그러니까, 언젠가는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 마을의 악기상은 성질이 나빠서 고객이 아니면 악기 가까이 가지도 못 하게 했거든. 원래 멀리 있으면 더 궁금해지잖아. 그렇다고 눈에서 아예 안 보이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야. 무슨 뜻인지 알겠어?”

 알렉스는 형을 떠올렸다. 어리석은 칼라일. 그를 사랑했으므로 진심으로 어리석다고 폄하할 수 있었다. 그는 그렇게 가선 안 됐다. 멀리 있기에 동경했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리 있지도 않았기에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너무 먼 곳에 있다.

 “무슨 뜻인지 이해했어.”

 알렉스가 대답했다. 토미는 다시 피아노를 보고 있었다.

 “지금 눈앞에 굉장히 좋은 피아노가 있어. 하지만 조금도 두들겨보지 못 하잖아. 튜닝이 잘 되었다거나, 역시 좋은 음을 낸다던가, 그런 걸 알 수는 없어. 하지만 가까이서 봤어. 그게 다야.”

 “그래서?”

 토미는 벽에 머리를 기댔다.

 “난 살고 싶어.”

 알렉스는 그 순간 거의 토미의 손을 잡을 뻔 했다. 대신 그는 말로써 다독이는 법을 택했다.

 “돌아가면 피아노를 칠 수 있어.”

 “아마도.”

 토미는 피아노의 미래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 하는 투였다.

 “잘 모르겠어. 그냥 살고 싶어. 피아노를 못 쳐도 상관없어.”

 그리고 다시 침묵이었다. 창 근처는 온통 산란한 먼지로 금빛이었다. 노을 속의 피아노는 아주 고급져 보였다. 알렉스는 어깨에 기댄 토미의 무게가 조금 더 묵직해지는 걸 느꼈다. 그러나 알렉스가 다시 손을 뻗기도 전에, 토미가 몸을 뒤척여 자세를 고쳐 앉았다. 알렉스는 고개를 돌렸다.

 “치고 싶은 곡은 있어?”

 “아는 곡은 있어.”

 토미가 대답했다.

 “하지만 곡 제목을 몰라.”

 “내가 가르쳐줄 수 있어.”

 알렉스는 다소 허풍을 보탰다.

 “난 피아노 조금 칠 줄 알아.”

 토미는 찡그린 얼굴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진짜야. 형이 음대 출신이거든.”

 “그래?”

 “멘체스터 음대에 들어갔어. 명문대야. 난 잘 모르지만, 그렇대. 거길 가려고 디저트를 먹고 매일 피아노만 쳤어.”

 이제 방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새빨간 거짓말을 하기에 시기적절한 타이밍인 것이다. 그렇다고 믿었다.

 “지겨울 정도였어. 어머니는 불평도 안 하고 파이를 구웠지. 난 의자에 앉아서 듣기만 했었어.”

 파아노를 치는 형은 거실의 역광을 받아 빛에 감싸인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 아름다운 곡은 대체 어디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일까? 악보와 악기만으로 그런 시간을 이룩할 수 있다니. 형의 연주엔 그런 힘이 있었다. 알렉스는, 그 힘이 좋았다. 그 힘은 주먹보다는 무수한 촉수에 가까워서 단단히 뭉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솜씨 좋게 마음을 더듬거리고 만졌다. 그럼 알렉스는, 영혼이 거기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혼이 얌전히 거기 들어있고, 전혀 금이 가거나 부서지지 않은 채로, 무사히 아름다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에 안정감을 느꼈다. 그리고 칼라일, 피아노 앞에 앉은 그의 형은 아주 멀리 가있었다. 늘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 서서 알렉스의 이정표가 되었던 그는 그 순간 아주 멀리 떠나서 음악이 되어있었다. 영혼이 얌전히 거기 있음에 그치지 않고, 방출하여 세계 곳곳을 떠돌고 있었다. 오, 칼라일. 그건, 그건 다시 생각해보면 죽음처럼 보였다.

 “어떤 날은 내가 조르기도 했어. 가르쳐 달라고 말이야. 그럼 형은 나를 앉혀두고,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얹어서,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려줬지. 감각적이었어. 난 악보부터 외워야 하는 줄 알았거든.”

 그건 봄의 일이었다. 전쟁의 징조조차 없었던 오후에, 피아노를 쳐도 총살당할 위험 따위가 없는 그 때. 알렉스는 떼를 썼다. 피아노를 쳐보고 싶다고 말했다. 칼라일은 다소 귀찮아했고 대게는 그런 부탁을 무시하곤 했으나 어쩐 일인지 그 날은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알렉스를 앉혀두고 손가락이 움직이는 걸 도와주었다. 어느 건반에서 어느 건반으로 이동해야 하는지, 얼마나의 힘으로 눌러야 하는지 가르쳐주었다. 알렉스는 그 날 거실에서 따뜻한 햇볕을 받으며 형의 손가락에 맞춰 신중하게 녹턴을 쳤다. 녹턴. 알렉스는 이제 그 곡의 이름을 기억해냈다.

 “녹턴.”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그걸 쳤었어.”

 얼마 후 칼라일은 권총자살을 했다. 알렉스는 그가 대학에 떨어졌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영혼이 거기 있었는데, 얌전히 알렉스의 속에 들어있음을 말해줬는데. 나중에야 알았지만 칼라일은, 무대 위에서 아무 곡도 치지 못 했다고 한다. 머릿속이 새햐얘져버려서 도무지 아무 것도 칠 수 없었다고. 알렉스에겐 낙하산이 있었고, 그건 간단히 버튼만 누르면 됐다. 그러나 칼라일이 가진 악보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고 건반을 누르는 건 버튼을 누르는 것보다 훨씬 어려웠다. 영혼을 깨우는 일이 버튼으로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버튼이 할 수 있는 건 영혼이 깨지지 않도록 낙하산을 펼치는 일뿐이니까 말이다. 칼라일은 추락했고, 그를 건져 올릴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방에 틀어박혀 있다가, 거실로 나와 피아노를 한 번 바라본 후, 벽난로 안에 있던 권총을 꺼내 방으로 돌아갔다. 칼라일은 머리에 구멍을 내는 일을 선택했다.

 “형은 연주를 아주 잘해서, 대학을 다니면서도 오케스트라에 소속되어 있어.”

 알렉스는 손가락을 꼼질거리며 고개를 숙였다. 토미는 진중하게 듣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알렉스는 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토미와 눈이 마주치자, 알렉스는 애써 어깨를 으쓱였다.

 “끝이야.”

 “나쁘지 않네.”

 “뭐가?”

 “네가 배운 방식.”

 알렉스는 토미의 말을 중얼거려보았다.

 “내가 배운 방식.”

 “…….”

 “내가 배운 방식.”

 토미가 피아노를 바라보았다. 뚜껑이 열려있었으므로 건반이 훤히 보였다.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지만 총성이나 발자국 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았다. 독일군은 어쩌면 전부 철수해버린 건 아닐까? 그럴 지도 몰랐다. 토미가 손을 들어서, 허공으로 손가락을 움직였다. 피아노 건반은 멀리 있었으므로 손가락이 건반 세 개 정도를 가리고도 남았다. 알렉스는 그 손을 잡아끌었다.

 “줘봐.”

 토미의 손가락은 마디마디가 벗겨져 있었다. 알렉스는 그 위에,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얹어놓았다. 토미의 옆으로 보다 바싹 붙어 건반 쪽을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토미의 손가락을 건반처럼 누르며 허공을 움직였다. 두 명의 손가락이 보이지 않는 건반을 누르며 조금씩 날았다. 토미가 물었다.

 “뭘 치는 거야?”

 알렉스가 대답했다.

 “녹턴.”

 파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알렉스는 눈을 감지 않아도 모든 걸 그려볼 수 있었다. 볕이 잘 드는 따뜻한 거실, 부드러운 가죽 의자와 그랜드 피아노, 칼라일…… 너무 멀리 가버린 칼라일과 그의 연주, 그것을 가만히 들었던 알렉스. 거기 얌전히 있던 영혼. 영혼들. 너무 많은 영혼들. 알렉스의 가슴이 진동하고 있었다. 토미의 손가락은 움찔거리면서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그들의 몸이 붕 떠오르는 것 같았다. 아주 멀리까지 날아가고 있었다. 노르망디 해협을 건너서, 도버 해안으로, 절벽으로, 절벽 너머의 항구로, 기차로, 플랫폼으로, 집으로, home. 맙소사, 집이었다. 정말로 집이었다……. 알렉스는 텅 빈 거실 한가운데에 앉은 형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오래된 풍경이었다. 형이 피아노에 앉아 녹턴을 치고 있었다. 알렉스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상상을 했다. 그는 거실 구석에 박힌 벽난로로 다가갔다. 허리를 숙여 재를 뒤집어쓴 무언가를 꺼냈다. 권총은 생각보다 가벼웠다. 알렉스는 총탄을 빼내기 위해 그것을 분리하였다. 그러나 그 안은 텅 비어있었다. 놀란 알렉스가 고개를 돌려 거실을 바라보았다. 피아노 앞엔 아무도 없었다.

 총성이 들렸다.

 토미의 손가락이 멈췄다. 알렉스는 꿈에서 깨어났다. 먼 곳에서 한 번 더 총성이 울렸다. 토미는 알렉스에게 기댔던 몸을 떼어내고 웅크렸다. 발자국 소리가 나지는 않는지, 둘은 침묵한 채 귀를 기울였다. 독일군은 여전히 주변에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둘은 더 이상 허공의 피아노를 치지 못 하고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알렉스는 생각했다. 이런 상황은 정말이지 원하지 않았어. 정말이었다. 알렉스는 전쟁 같은 걸 원하지 않았다. 누가 그런 걸 원하겠는가? 죽음을 목격하는 행위로만 영혼이 자신의 안에 제대로 붙어 있음을 확인하는 일 같은 건 전혀 아름답지 않았다. 끔찍하기만 했다. 죽음으로 영혼을 확인하는 일. 칼라일은 어째서 그것을 선택했을까? 그의 형은 죽음을 선택했다. 돌아오지 않았다. 알렉스는 돌아오지 못 할지도 모른다. 그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알렉스는 그 시절 그가 느낄 수 있었던 자신의 영혼이 더는 고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형이 죽음으로써 알렉스의 일부 역시 죽어갈 운명이 되고 만 것이다. 알렉스는 그런 녹턴을 칠 수 없었다.

 갑자기, 토미가 말을 꺼냈다.

 “알렉스.”

 알렉스는 한 박자 느리게 반응했다.

 “응?”

 “아까 말이야.”

 “그래.”

 “피아노를 쳤잖아.”

 알렉스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지.”

 “영혼을 믿어?”

 맥락이 없는 것처럼 들렸지만 알렉스는 이해했다. 말문이 막히지는 않았으나 목이 막혔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토미, 하고 알렉스가 불렀다. 토미. 토미.

 “영혼을 느꼈어?”

 그는 속삭였다.

 “거기 있었어?”

 멀리서 한 번 더 총성이 울렸다. 토미는 뒤척이지도 손을 내치지도 않았다. 알렉스가 토미의 손끝을 붙잡았다가 놓았다. 거기 얌전히 있었다. 토미의 영혼은 거기 있었다. 살아있었다.

 “아까 그 곡 이름이 뭐라고 했지?”

 “녹턴.”

 “녹턴.”

 토미가 중얼거렸다.

 “무슨 곡인데?”

 달빛이 들어서 이제 먼지는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피아노도 어둠에 가려져 있었다. 알렉스는 눈을 감았다. 어둠 속에서 더 짙은 어둠으로 기어들어갔다. 아주 깊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그 속에서 토미의 손끝이 등불처럼 빛나고 있었다. 풍등처럼 위태로운 불빛으로 알렉스의 영혼을 비추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금 간 영혼을 벌어지지 않도록 오므려주고 있는 것 같았다.

 “세레나데.”

 알렉스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레나데라고 들었어.”

 영혼은 아직도 거기 있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 배경
고증 안 되어있음

20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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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팬지»
2차/old 2019. 10. 23. 01:34

 플랫폼으로 사람들이 쏟아졌다. 햇빛. 날씨는 화창하고 밝았다. 역사 기둥 곳곳에 간이 테이블이 세워져 있었다. 여인과 노인들만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뛰쳐나온 워킹의 주민들이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테이블을 스쳐갈 때 홍차와 잼 바른 빵을 쥐어주었다. 귀환자들은 청년이라기보다 소년에 가까워 보였다.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까딱이곤 서둘러 가던 길을 걸어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걷는 것처럼 보였다. 

 군복의 소년들은 꼬질꼬질하기만 했다. 뒤통수에 새까만 기름때가 딱딱하게 굳은 사람도 있었고, 너덜너덜한 군복을 입고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었다. 주민들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들의 등을 연신 두들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고맙다.” “이제 집이야.”

 토미는 그림자가 진 좌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었다. 철로에 싱그러운 풀이 자라나있고, 열살 배기로 보이는 사내 아이들이 무쇠로 된 길을 겅중겅중 넘나들며 신문을 날랐다. 아이들 키보다 훨씬 높게 쌓여있던 신문이 5월의 청량한 햇살을 받으며 차차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그들 키만 했다. 토미의 맞은편 좌석 역시 볕이 들어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렉스는 엉거주춤 일어나 옷가지를 정돈하고 있었다. 눈이 부신지 곧잘 눈을 찡그렸다. 군복 입은 소년들이 복도를 따라 이동하며 종종 그들을 곁눈질로 흘끔거리다 줄이 앞으로 이동하면 고개를 돌리고 가던 길을 걸어나갔다. 그 시선들은 환희와 동지애로 가득 차있지도 않았고, 다만 무심하고 지쳐있었다. 알렉스는 시선을 느낄 때마다 고개를 들어 일일이 얼굴을 바라보곤, 옷매무새를 바로잡자마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돌려 토미를 마주보았다. 토미가 줄곧 알렉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이 부딪치자 토미가 물었다.

 “내릴 거야?”

 “넌 안 내려?” 알렉스가 눈을 깜빡였다.

 “내려야지.” 토미가 대답했다.

 햇빛 때문에 자꾸만 눈을 찡그리게 됐다. 토미의 표정은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가자.”

 알렉스는 구겨진 신문과 빈 병을 한쪽으로 치웠다.

 토미는 담요를 꽁꽁 싸맨 채 창문 밖을 보며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차창밖엔 환희하는 시민들과 지친 귀환병들이 있을 뿐이다. 폭격과 어뢰, 난사하는 총과 삐라가 아니면 대체 바깥을 살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토미.”

 “먼저 내려도 돼.” 토미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알렉스는 강한 반감이 생겼다.

 “여기가 종점이야.”

 “나도 곧 내릴 거야.”

 “그럼 같이 내리자. 왜?”

 그러자 토미가 고개를 돌려 다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환희도 동지애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건조하거나 지쳐있지도 않았다. 알렉스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토미의 표정은 침몰한 함선에서 막 건져 올려 졌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아직도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덩케르크에.

 “알아서 해.”

 알렉스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푹 눌러앉았다. 눈을 감았지만 토미의 시선쯤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꿰뚫을 것 같은 녹색 눈을 상상하면서, 알렉스는 꼭 항변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 앉아 기차의 모든 사람이 빠져나갈 때까지 단단히 버텼다. 마침내 주변이 조용해지고 복도에 더는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을 때, 토미가 담요를 치우고 일어났다. 토미는 천천히 발을 좌석 아래로 내리면서 그를 불렀다.

 “알렉스.” 알렉스는 눈을 떴다.

 토미가 중얼거렸다.

 “나가자.”

 그렇게 말하는 토미의 눈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플랫폼엔 아까만큼의 사람이 없었다. 간의 테이블을 정리한 주민들 때문에 기둥 곳곳은 비어있었고, 병사들은 플랫폼을 빠져나와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있었다. 토미와 알렉스가 가장 마지막에 내렸다. 그들이 플랫폼으로 발을 디뎠을 때, 기차 앞쪽에서 증기가 힘차게 뿜어져 나오며 굉음을 냈다.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폭격의 기미는 없었다. 그들은 조국(home)에 있었다.

 토미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기둥에 세워진 간의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노파가 있었다. 그녀는 둘을 바라보며 한 손에는 컵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서있었다. 시선이 마주쳤으므로 그녀는 맹인이 아니었다.

 토미와 알렉스는 짐이 없었다. 도버에서 그들은 구명조끼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유일한 짐이었다. 토미는 그것을 배 안에, 그리고 알렉스는 그것을 항구 입구에 버리고 나왔다. 그들이 앞으로 향하게 될 곳은 바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은 빈몸으로 기차를 탔고, 워킹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어쩌면 그들이 마지막으로 향하게 될 곳이 결국 바다일 수도 있었다. 처칠은 이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그들이 지금껏 타고 온 건 배가 아니라 기차였다.

 역사 안으로 들어섰을 때, 노파가 손을 뻗어 알렉스를 붙잡았다. 그리고 빵과 차를 안겨주었다. 알렉스는 이번에 똑바로 노인을 마주볼 수 있었다. 신문은 그들을 도망자에서 생존자로, 패배자에서 구조자로 만들었다. 잠시 부끄러움을 잊을 수 있게 소년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고맙습니다.” 

 알렉스는 노파의 눈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토미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 대신 건너편 기둥에 세워진 간의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 몫의 식빵을 욱여넣으며 토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 테이블에는 중년 남성이 서있었고, 테이블 앞에는 한 병사가 혼란스럽게 서있었다. 그는 둘의 또래 소년으로 보이거나, 혹은 한두 살이 더 많아 보였다. 남자가 소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한참 자리에 서서 둘을 지켜보던 토미가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토미, 하고 알렉스가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알렉스는 노파와 토미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미지근한 차를 한 번에 넘기곤 허겁지겁 토미의 뒤를 따랐다. 건너편 기둥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알렉스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집이 어디니? 내게 트럭이 있으니 가까운 곳은 데려다줄 수 있어. 아니면 버스를 안내해줄게. 여긴 정류장이 적단다.”

 남자는 마치 자신의 아들을 대하듯 눈앞의 소년에게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눈을 굴리다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그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토미는 다가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러자 소년과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토미와 토미를 뒤따라 걸어오던 알렉스를 발견했다. 소년의 시선은 토미를, 그리고 곧 그 뒤의 알렉스를 향했다. 알렉스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피했다. 남자가 토미에게 말했다.

 “서로 아는 사이니? 아까부터 통 입을 열지 않는구나. 여긴 시골이라서 말이다… 집과 거리가 멀면 주민들 도움을 받지 않고선 좀 힘들 텐데.”

 그 말을 들은 알렉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희 부대에요.”

 토미가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군복의 소년은 조용히 서있었다.

 “폭격 때문에 귀가 멀었어요. 못 알아들어요.”

 알렉스가 거짓말을 했다. 토미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일주일 간 함께 잔교에 갇혀 있었고, 둘은 눈앞의 소년을 본 적이 없었다. 소년은 알렉스와 같은 부대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함께 배를 타지도 않았다. 그러나 토미는 잠자코 서서 알렉스가 하는 말을 들었다.

 “탈 것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데리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는 바싹 마른 입술에 혓바닥을 찍어 눌렀다.

 알렉스는 멀뚱히 서있는 소년의 팔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소년이 주춤거리며 그대로 딸려왔고, 토미와 알렉스 사이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토미는 남자에게 말없이 인사했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역외 풍경을 짚으며 가까운 버스정류장의 위치와 방향을 설명해주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트레이에서 식빵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그리고 그곳을 나오기 전에 하나를 더 챙겼다. 알렉스는 그 빵을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소년은 빵을 받았지만, 먹지 않고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쩌면 토미처럼 그 역시도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알렉스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차편이 있는 쪽으로 손가락을 뻗고, 아까 남자가 그들에게 설명해준 것처럼 버스의 방향과 위치에 대해 말하려 애썼다. 알렉스는 소년에게 자신의 설명이 어떻게든 전해지기를 바랐다.

 “저기로 가.”

 알렉스는 흙먼지가 날리는 지평선을 가리켰다.

 “…….”

 “저기야.”

 소년은 알렉스를, 그리고 토미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빵을 입에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불확실한 움직임이었다.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어떠한 대화나 징조도 없이 헤어졌다. 느릿느릿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렉스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토미가 없었다. 토미는 이미 반대편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알렉스는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잡았다. 햇볕이 내리쬐었지만 토미는 나무, 전신주, 역사 지붕 아래로 자꾸만 걸어 나갔다. 그림자 아래로만 걷고 있었다.

 

 역 근처를 벗어나자 시골길이 이어졌다.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칠이 벗겨진 울타리 너머로 오월의 풀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팬지꽃들이 많이 보였다. 시뻘겋고 샛노랬다. 알렉스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철로 위의 기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토미.”

 알렉스는 중얼거렸다.

 “아까 그는 프랑스군이었을까?”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재차 맥없이 되물었다. 토미,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프랑스군이었을까?”

 “…….”

 바람이 불었다. 토미는 녹슬어가는 팻말 앞에서 멈추어 섰다. 버스 팻말이었다. 배차 간격이 넓었지만 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 옆으로 낡은 버스 한 대가 탈탈거리며 지나쳤다. 토미가 알렉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 집이 어디야?”

 “여기서 너무 멀지는 않아.”

 “멀지 않아?”

 “…그래.”

 토미는 고개를 돌려 버스 안내판을 눈으로 훑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알렉스는 이마에 엉겨 붙었다가 마구 흩날리는 토미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그늘 안에서도 훤히 보였다. 잠시 후, 토미가 천천히 고개를 수그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난 이걸로 못 가.”

 그리고 작별했다.

 “잘 있어.”

 토미는 망설임 없이 마저 걸어 나갔다. 알렉스가 머뭇거리다 말고 멈추어 섰다. 버스는 아주 멀리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알렉스가 거쳐야 할 지역에 내려줄 수 있었다. 버스를 타야했다. 그러지 않는다고 토미와 계속 함께 갈 수는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알렉스는 멀어지는 토미의 등 뒤로 목소리를 높였다.

 “또 보자.”

 그가 힘주어 다시 한 번 외쳤다.

 “또 보자, 토미.”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비포장도로에 트럭 한 대가 서있었다. 농부 한 명이 내려서 바퀴 쪽을 살피고 있었다. 토미는 그 앞에 멈춰서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농부는 토미의 군복을 보곤 다소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것들을 가늠해보다가 곧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니까 토미는 트럭을 타고 갈 모양이었다. 알렉스의 가슴 한 구석이 내려앉았다. 철렁하는 감각이 아니었다. 안심에 가까웠다. 버스가 없어도 토미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뢰를 맞을 일도, 폭력을 당할 일도 없는 시골의 어느 낡아빠진 트럭을 타고 버스로는 갈 수 없는 거리까지. 알렉스는 고개를 돌리곤 버스 안내판을 훑어보았다. 주먹을 쥐고 노려보듯 했다. 정신없이 게걸스럽게 활자를 훑었다. 알고 있는 지명들이 보일 때마다 눈으로 주워 담았다. 조국에 왔고, 집으로(home)가야 한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상기시켰다. 나무 위에서 새가 울었다.

 갑자기 굉음이 터졌다. 명백한 폭발음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졌고, 가지에 앉은 새가 날아갔다. 눈앞으로 섬광과 폭발, 불꽃과 시체의 이미지가 스쳐지나갔다. 알렉스는 반사 신경과 같은 속도로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감쌌다. 헐떡거리며 숨을 골랐다. 신음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의 징조는 없었다. 가지 위로 다시 새가 날아와 앉았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눈을 뜨고, 엉거주춤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토미가 기다리던 낡은 트럭이 보였다. 열린 보닛 안으로부터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알렉스는 헐떡이며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말고 토미와 눈이 마주쳤다. 토미는 여전히 바닥에 바싹 누워 머리를 감싼 채 알렉스 쪽을 보고 있었다. 폭발음을 들었을 때부터 줄곧 주시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농부가 헐레벌떡 도로로 뛰어나와 보닛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일어나 흙을 털어냈다. 가슴이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쿵쾅거린 채 공포로부터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를 향해 달음박질했다. 토미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 한 채 알렉스를 보고 있었다. 알렉스가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토미는 작게 기침했다. 도로를 따라 버스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냥 보냈다.

 “토미.”

 “…….”

 “토미.”

 알렉스가 토미의 어깨를 감쌌다. 군복은 아직도 조금 축축했다.

 알렉스는 묻고 싶었다. 갑자기 묻고 싶었다. 왜 기차에서 진작 내리지 못 했는지. 창밖으로 무엇을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지. 왜 그렇게도 너의 집은 먼지. 버스로는 갈 수 없는 곳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앞으로 어디로 가고 말 것인지. 그러나 전부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알렉스는 토미가 토미인지 혹은 다른 이름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토미가 있었다. 덩케르크에 두고 온 무수한 토미들이 있었다. 무수한 깁슨도……. 어깨를 쥔 알렉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햇빛은 기울어져 토미가 밝은 곳에 서있고 알렉스가 그늘에 서있게 되었다.

 “아까 뭘 보고 있었어?”

 알렉스가 물었다. 토미는 눈을 찡그렸다.

 “뭘?”

 “기차에서 뭘 보고 있었어?”

 바람이 마구 불었다. 햇빛 아래에서 토미의 머리카락이 잘게 부서졌다. 빛이 윤기를 따라 마구 흘러내렸다. 알렉스 역시 눈을 찡그렸다. 그늘에서도 눈이 부셨다. 오월이 잔인하게 아름다웠다. 세계 어딘가에서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사람들이 죽었다. 등 뒤에서 트럭 보닛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팬지들.” 

 토미는 고개를 숙였다.

 “팬지를 봤어.”

 버스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알렉스 역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철수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덩케르크에서 귀환했다.

 

 

「오늘의 철수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결국 개개인의 불행일 뿐이다.
미시적으로 파고들수록 잔인해진다.

20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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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콥스콧 «체스»
2차/old 2019. 10. 19. 01:14

스콧른 게스트북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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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비에는 어림잡아 서른 명 정도의 아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목에는 스타플릿에서 나눠준 명찰을 걸고, 한 손에는 랩 지도를 쥔 채 교사의 지시에 따라 앞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눈으로 훑던 스콧은 어깨를 으쓱이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붉은 생도복 위에 흰 가운을 걸친 스콧은 스타플릿 아카데미의 학생이라기보다 연구자에 가까워보였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움직이죠. 섹터 B부터 D까지 한 시간 안에 돌아봅시다.”
 “한 시간 안에?”
 조이가 얼굴을 찌푸리자, 스콧은 어깨를 으쓱이며 정정했다.
 “한 시간 반.”
 스타플릿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견학 프로그램은 학교가 방학을 앞둔 여름과 가을에 각각 한 번씩 진행되었다. 견학생들에게 랩을 안내하는 것은 생도들의 의무사항이었다. 따로 지원자를 받지는 않았고, 순번제였다. 운이 좋으면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었다. 스콧은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해에 결국 일을 받았다. 그는 가운을 걸치고 목에 플라스틱 명찰을 단 후, 조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확성기도 챙겨야 할까?”
 그는 시끄러운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스콧이 예상하는 것보다 시끄럽지 않았다. 확성기를 통해 설명하지 않고선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소란스러움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질서정연했고, 예의도 발랐고, 아무 곳으로나 흩어지지도 않았다. 스콧은 침착하게 B섹터를 돌며 유리창 너머의 생도들이 최첨단 기계를 만지고, 실험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모습을 손으로 짚으며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아이들은 유리창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하며 한 마디씩 떠들어댔다.
 “끝내준다.”
 “저게 드릴이라고?”
 “우주선은 어디 있지?”
 이건 예상한 소란스러움이었으므로 스콧은 견딜 수 있었다. 조이가 아이들에게 기계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하는 동안, 그는 한쪽으로 물러서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유리창 너머의 생도 하나가 멈추어 섰다. 스콧이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생도는 이죽이며 그와 아이들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빠끔거렸다. ‘어울리는데, 스콧 선생.’ ‘입 닥치고 꺼지시지!’ 스콧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생도는 스콧과 몇 번의 수신호를 더 주고받다 말고 스콧의 어깨 너머를 응시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내렸다. 스콧은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확인했다. 한 아이가 그를 보고 있었다.
 “뭘 보냐.” 
 스콧은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위해 툴툴거렸다.
 “스물여덟 살쯤 먹었으면 욕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라고. 알겠니, 꼬맹아?” 
 아이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B섹터를 지날 무렵 스콧은 뒤를 돌아 아이들의 수를 확인했고, 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는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 했지만, 시선으로 아까 자신을 바라보았던 아이를 찾아냈다. 그 소년은 그 어떤 무리에도 끼지 않은 채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소극적으로 걷고 있었다. 스콧은 소년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제야 소년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5살은 어려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월반인가?’
 스콧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 그는 머리가 무성해질 무렵부터 제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는데, 전적으로 그가 너무 똑똑했던 탓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아이들이 모두 스콧보다 멍청했던 탓이었다. 그는 또래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기쁨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도들과 거의 사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콧이 아는 한 그들은 여전하게도 스콧보다 멍청했다.
 지적인 기쁨만이 전부였다. 타고나기를 공식과 우주, 첨예한 첨단기술과 물리학적 가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스콧은 타인보다 영리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거듭 경험했다. 인간관계란 자발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억눌러야 진행될 수 있는 하위의 임무에 불과했다.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말을 우선 접어둬야했다. 아름다운 공식과 가설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조롱말곤 달리 떠오르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논문 앞에서 입을 벌리는 타인들을 위하여. 그리하여 스콧의 일방적 희생-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을 통해 진행된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것은 결국 일시적 충족감과 긴 회의뿐이었다. 천재들은 고립을 택하고, 그 고립이 그들에게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다 자란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무감한 눈으로 랩을 둘러보는 어린 금발 소년의 태도는 스콧에게 어떤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자국을 남겼다. 그래서 전혀 스콧답지 않게도, 그는 명단을 뒤져 그 아이의 이름을 찾아냈다. ‘파벨 체콥.’ 러시아에서 왔군. 스콧은 다시 명단을 옆구리에 꼈다. 소년은 스콧이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어렸다. 체콥은 이곳에 모인 아이들보다 7살은 어렸다.
 “스콧 선생님.”
 한 소년이 스콧에게 다가와 알짱거렸다. 스콧은 시선만 움직여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가 덧붙였다.
 “난 교사가 아니야.”
 “스콧 선생님은 애인이 있나요?”
 고개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조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스콧은 아이 앞에서 굳이 경멸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 와서 궁금한 건 그것뿐이냐?”
 “어, 저는 그냥. 미남이시길래요.” 
 소년이 어깨를 으쓱이며 ‘아시잖아요?’하고 눈빛을 보냈다.
 스콧은 혀를 찼다.
 “스타플릿에 연애하러 들어오는 얼간이들은 보통 한 학기 만에 낙제하고 떠나기 마련이지.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다. 넌 최첨단 연구소를 둘러보고 있는 와중에도 시시껄렁한 게 궁금한 모양이구나.”
 아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질문한 소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스콧이 만족스럽다는 콧소리를 내자, 허겁지겁 다가온 조이가 그의 발을 힘주어 밟았다. 스콧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물러났다. 조이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잘 좀 해. 여기서도 밥맛으로 굴 거야?”
 “엿이나 먹어.” 
 스콧이 으르렁거렸다.
 섹터 C는 조이의 담당이었으므로 스콧은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아까보다 스콧에게 관심을 덜 가졌고, 그를 훔쳐보던 소녀들도 아까의 일로 그에게 시선을 거뒀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콧은 길쭉한 몸으로 위풍당당 걸어 다녔다.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남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처럼. 섹터 C의 생도들이 이따금 스콧을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섹터 D에는 로비가 있었고, 견학 일정 상 아이들은 그곳에 모여 자유행동을 할 수 있었다. 로비에는 견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모의 프로젝트 기계와 가상 우주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섹터를 둘러보며 구경했던 장비의 기초 버전을 직접 시연해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아이들은 이 스케줄을 가장 고대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재빨리 로비 입구에서 학생용 실험 가운을 걸치고, 자신이 연구원이 된 것처럼 뿔뿔이 흩어져 기계를 만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스콧은 자신이 염려한 데시벨만큼 치솟는 소음을 맛보았다. 아이들이 무서운 기세로 떠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콧은 피곤하다는 얼굴로 벽에 기대어 섰다. 아이들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조이를 찾았다. 스콧을 찾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스콧은 길게 하품하곤 시계를 확인했다. 중앙로비에서 출발한지 딱 한 시간째였다. 30분이면 이 짓도 끝날 것이고, 스콧은 개인 연구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스콧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누구의 부름도 받지 않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그는 혼자서도 모든 것을 잘 할 자신이 있었다. 지루한 눈으로 왁자한 로비를 바라보던 스콧은 화들짝 생각에서 깨어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어떻게든 동떨어지기 위해 벽에 기대어있는 스콧처럼, 혹은 그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벽에 등을 맞대고 서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스콧은 파벨 체콥이 혼자 있는 것을 보았다.
 체콥은 심지어 가운을 입지도 않았다. 들어올 때와 똑같은 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눈빛에는 어떤 참담함이 섞여있었는데, 어쩐지 몹시 슬퍼보였다. 스콧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그는 슬퍼하기보다 분노하는 쪽이었다. 타인의 무지가 주는 외로움에 대하여 화를 내던 나날들. 체콥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아까부터 부러운 눈으로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첨단 기계를 하나하나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섹터를 거쳐 오는 동안 그렇게나 무감하게 굴었으면서! 연구소 시스템에는 무관심해도 그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끝장나는 장비와 기술력 앞에 마음을 빼앗긴 걸까? 그렇다면 체콥 역시 엔지니어를 지망하고 있는 것일까? 스콧 역시 엔지니어였다. 그는 단언컨대 스타플릿이 배출한 엔지니어 중 가장 전도유망한 인재가 될 것이었다. 스콧은 체콥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 해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체콥은 다가오는 그림자의 끄트머리를 보곤 고개를 들었다. 둘은 오래 시선을 마주쳤다. 체콥은 스콧을 올려다보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떠한 말이라도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그러나 스콧이 이렇게 입을 열었을 때, 체콥은 마치 그 질문을 듣기 위하여 오늘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양자의 핵을 분리하는 에너지의 생산 원리를 우주선의 엔진에 달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우주선의 98%가 방사능 덩어리가 돼요. 제외된 2%는 4중 격폐처리된 엔진 냉각수의 제어봉 때문이에요.”
 스콧은 체콥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스콧은 구석에 처박힌 책상을 앞으로 끌어온 뒤 의자 두 개를 놓았다. 체콥은 의자에 앉았고, 스콧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스콧을 꿰뚫었다. 소년은 전적으로 스콧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고 스콧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심심하니?”
 “잘 모르겠어요.” 
 체콥이 대답했다.
 “하지만 할 일이 생긴다면 잘 할 수 있어요.”
 “그럼 할 일을 만들어주마.”
 스콧이 말했다.
 “난 네가 재밌어 할 만한 걸 알겠거든.” 
 체콥은 그 말을 이해했다. 
 스콧은 자신이 들고 있던 플라스틱판에서 명단을 통째로 떼어낸 후, 그 중 한 장을 뒤집었다. 그리고 가운에서 만년필을 꺼내, 그 여백에 큰 사각형을 그렸다. 스콧은 사각형을 가로로 뻗는 여덟 개의 직선으로 나눈 후, 세로에도 똑같은 작업을 했다.
 “체스판이군요.” 
 체콥이 말했다.
 “둔하지는 않구나. 하지만 이건 네가 아는 그 체스는 아니야”
 스콧이 사각형을 칠하며 대답했다.
 스콧은 그들 사이에 그 체스판을 놓고, 손가락으로 그 중 한 사각형을 짚었다.
 “말은 하나야.” 
 스콧이 설명했다.
 “그리고 매 턴마다 오직 한 칸씩 움직일 수 있는데, 두 칸씩 대각선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문제를 내는 거야. 퀴즈지. 상대가 문제를 내고, 네가 그것을 맞추면, 넌 두 칸씩 전진할 수 있어. 맞추지 못 하면 넌 한 칸씩 움직일 기회조차 잃는 거지.”
 “그럼 서로 도망 다니기만 하잖아요.”
 체콥이 말했다.
 “-그래서.” 
 스콧이 대답했다
 “너는 나를 쫓아야 하는 거지.”
 “스콧은 도망가고요?”
 스콧은 체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스콧이 덧붙였다.
 “애라고 봐주지는 않을 거야.”
 체콥은 눈을 굴리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할래요.”
 그래서 둘은 더는 체스라고 할 수 없는 그 게임을 시작했다.
 체콥이 먼저 움직였다. 스콧은 그에게 물리학 기초 이론에 대해 물었고, 체콥은 얼굴을 찡그리곤 스콧을 올려다보았다.
 “그 정도는 알아요.”
 “그럼 대답하고 말을 옮기지 그래.”
 그래서 체콥은 그렇게 했다. 말이 두 개뿐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굳이 말을 형상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각자의 말이 어디에 있는지 판 위를 차례로 짚으면 됐다.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 잊어버릴 리도 없었다.
 체콥은 말을 옮기며 스콧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밥맛으로 굴어요?”
 스콧은 콧방귀를 뀌었다.
 “밥맛으로 보였냐?”
 “굳이… 밀어낼 필요는 없잖아요?”
 스콧의 차례였다. 체콥은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내세운 원자 모형에 대해 물었고, 스콧은 어깨를 으쓱이곤 정답을 말했다. 그는 말을 옮기며 체콥의 질문에 돌려 대답했다.
 “그렇다고 밀어내지 않을 필요도 없지.”
 스콧은 도망가는데 성공했다. 이제 체콥의 차례였다. 
 “넌 그럼 밀어내지 않는 모양이구나, 체콥.”
 스콧은 그에게 대각선으로 움직일 것이냐고 물었고, 체콥은 판을 들여다보다가 이번엔 한 칸만 움직이겠다고 대답했다. 체콥은 자신의 말을 한 칸 전진시켰다.
 체콥이 말했다.
 “밀쳐지는 것뿐이에요.”
 스콧은 얼굴을 구겼다.
 “저 애들은 멍청해.”
 “알아요.”
 “사람들에게 상냥할 필요는 없어.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알랑거리지만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침을 뱉으며 떠나지. 너를 이해하지 못 할 사람들이 네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너를 할퀴는 일뿐이야.”
 체콥은 스콧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스콧은 밀치며 살아온 건가요?”
 스콧은 대답 대신 턱을 문질렀다.
 잠시 후 스콧이 말했다.
 “난 대각선으로 도망칠 테니 너는 질문하렴.”
 “왜 파동함수에 모순이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스콧은 체콥을 흘끔거린 후 말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애초에 그건 아무도 모르는,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수학적 언어기 때문이다. 양자의 비밀을 전혀 밝혀내지 못 한 그들이 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였던 거야. 함수라는 게 넣으면 답이 뿅 튀어나오는 마법상자라도 되는 줄 알았던 거지. 그들은 상자를 이루는 질서를 존중하지 않았어. 핵심이 되는 언어가 가장 불확실한 줄도 모르고. 그래서 문제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지. 파동함수에는 물리적 의미가 없어. 다만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을 내포할 뿐이지. 그건 수학이 아니야. 인문학이지.”
 스콧이 말했다.
 “네 차례다.”
 “저도 움직일래요.”
 체콥은 추격하겠다고 대답했다. 스콧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 물리학자가 그놈의 인문학으로써 주장한 게 있을 거야, 꼬맹아.”
 “불확정성의 원리.”
 체콥이 스콧이 도망친 방향으로 말을 움직였다.
 스콧이 어깨를 으쓱였다.
 “설명할 수 있니?”
 “그 원리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줬어요.”
 체콥은 스콧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건 양자를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나요?”
 “그럼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지?”
 “사람들.”
 그러니까 체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은 양자가 아니야.”
 스콧이 말했다.
 스콧의 차례였다. 스콧은 질문을 받지 않고 한 칸을 움직였다. 다시 체콥의 차례가 되었다. 체콥은 판을 내려다보았다. 체콥의 말은 두 번만 대각선으로 움직이면 스콧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콧은 도망갈 것이다. 체콥은 스콧이 대답하지 못 할 공식을 고민해보았다. 그러나 공식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스콧의 탈출구가 될 것이다.
 체콥은 질문을 받지 않고 한 칸을 움직였다. 이제 다시 스콧의 차례가 됐다. 체콥이 물었다.
 “도망칠 거죠?”
 “질문하렴.”
 “저 사람.”
 체콥이 시선으로 조이를 가리켰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콧은 침묵했다. 체콥이 그를 바라보았다. 스콧은 얼굴을 찡그리곤 턱을 문질렀다.
 “서른 둘?”
 “서른이에요.”
 스콧은 말을 움직이지 못 했다. 이제 체콥의 차례였다.
 “전 계속 추격할 거예요, 질문해주세요.” 
 스콧은 로비를 훑어보다 말고 덩치 큰 남자 아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친구 이름이 뭔지 알고 있냐?”
 체콥은 뒤를 돌아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뒤,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했다.
 “제임스.”
 스콧은 남은 명단에서 제임스를 찾아냈다. 체콥이 맞았다. 소년의 이름은 제임스였다.
 체콥은 말을 움직여 스콧의 말과 가까워졌다. 이제 다시 스콧의 차례였다. 스콧은 질문을 받는 대신 이번에도 스스로 한 칸을 움직였다. 그는 이제 질문으로부터도 도망치고 있는 셈이었다.
 “질문하세요.”
 체콥이 어깨를 으쓱였다.
 “참고로 전 애들 이름을 다 알고 있어요.”
 “너 완전 밥맛이구나.”
 “스콧보단 아닐 걸요.”
 스콧은 이번에도 양자역학에 대한 질문을 했고,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체콥은 훌륭히 정답을 맞췄다. 체콥은 놀랄만큼 예상한 것 이상으로 영특했다. 생도들이 절절매는 질문에도 서두르지 않고 간결하고 분명한 답을 내놓았다. 당황하긴커녕 새로운 공을 선물받은 것처럼 점차 빛났다.
 체콥이 스콧의 말을 추격하고 있었다. 이제는 세 칸밖에 남지 않았다. 스콧은 도망칠 수 없었는데, 그의 말이 구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판에는 끝이 있고 도망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자신을 추격해온 말에게 지켜온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스콧은 더는 대각선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말을 어쩔 수 없이 한 칸 전진시켰다. 그는 이제 완전히 코너에 몰렸다. 다음 차례가 온다고 한들 더는 움직일 곳이 없었다. 체콥이 다음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대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래도 제가 움직일 수 있게 마저 질문해주세요.” 
 체콥이 말했다.
 스콧은 어깨를 으쓱이곤 질문했다.
 “내 이름이 뭔지 알고 있니?” 
 체콥이 대답했다.
 “몽고메리 스콧.”
 “요르겐센.”
 스콧이 정정했다.
 “몽고메리 요르겐센 스콧.”
 체콥의 말은 전진하지 못하고 스콧의 말과 마주보며 섰다. 게임이 끝났다. 체콥이 이겼다. 체스는 체콥의 승리로 끝났다.
 스콧은 시계를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됐구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꼬마 엔지니어씨.”
 “엔지니어를 할 생각은 없는데요.”
 “그럼 어디를 지망하지?”
 잠시 고민하던 체콥이 대답했다.
 “조타수요.”
 아이들은 걸었던 순서대로 D섹터에서 C섹터로, C섹터에서 다시 B섹터로 돌아갔다. 그리고 A섹터와 B섹터를 연결하는 중앙로비에 모여 인원수를 체크한 후, 스타플릿이 제공하는 기념품을 한 명씩 받아갔다. 스콧은 기념품을 챙겨 체콥에게 다가갔다.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조이에게 몰려갔으므로, 스콧에게 기념품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는 아이는 체콥뿐이었다.
 “체스는 재미있었니?”
 “네.”
 체콥이 기념품인 조립식 우주선 모형을 받으며 대답했다.
 “마치 연애 같던 걸요.”
 스콧이 비웃었다.
 “연애해본 적은 있냐?”
 “도망치고 추격한다는 점에서 연애와 스콧의 게임은 다를 바가 없어요.”
 체콥이 똘똘하게 말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않나요?”
 스콧은 낄낄거렸다.
 “그럴 지도 모르지.”
 체콥은 기념품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스타플릿의 엔지니어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어요?”
 스콧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름다운 함선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혀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럼 저는 그 함선의 브리지에 앉겠어요.”
 “그리 어려운 목표도 아니구나.”
 “하지만 저는 오늘 스콧을 추격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는걸요.”
 “시간이 더 있었다면 잡을 수 있었어.” 
 체콥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연애에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법이에요. 놓치면 영영 붙잡을 수 없는 거예요. 코앞에 있어도.”
 “사랑 고백을 듣는 것 같군.”
 스콧은 기발하고 재밌는 농담을 던진 것처럼 낄낄거렸지만, 체콥은 진지한 얼굴로 가방을 메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체콥이 고개를 들었다.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데 고개 좀 숙여주세요, 미스터 스콧.”
 그래서 스콧은 그렇게 했다. 그의 뺨에 물기어린 감촉이 조심스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체콥이 속삭이며 당부했다.
 “다음에 또 봐요. 저를 잊지 마세요, 미스터 스콧.”
 스콧은 대답 대신 작별했다.
 “잘가렴, 파벨 체콥.”
 “안드로비치.” 
 체콥이 덧붙였다. 스콧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벨 안드로비치 체콥.”
 그렇게 두 천재는 헤어졌고, 각자의 체스판으로 돌아갔다. 스콧은 그 뒤에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정신이 쏙 빠졌고, 이 어린 천재의 존재를-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체콥은 시큰둥한 얼굴로 랩을 돌아다니는 밥맛의 미청년을 잊지 않았고, 그리하여 언젠가 둘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함선에서 재회할 운명이었다. 그러니까 체콥은 마침내 스콧을 추격하는데 성공할 운명인 것이다. 이 체스는 전적으로 파벨 안드로비치 체콥의 승리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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