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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자국의 정의»
2차/old 2019. 10. 24. 19:10

 1

 모두가 그를 토미라고 불렀다.

 

 2

 알렉스는 크리스마스가 되기 꼭 일주일 전 그 골목에서 취직했다. 파트타이머가 오토바이에 치여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만두게 된 자리였는데 카페철의 황금기라고도 할 수 있는 대목을 앞두고 생긴 공석이 오래 갈 리 없었다. 알렉스는 적재적소에 등장한 사람 취급을 받으며 채용되었다. 매니저는 이런 일에 오래 고민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크리스마스는 정말 바빴다. 가장 구석진 곳에 박힌 카페였는데도 연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들었다. 돌이켜보니 바로 그 이유로 더 붐볐다. 알렉스는 히터로 건조한 실내를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에스프레소를 내리고 커피를 나르고 쓰레기를 주워 담고 매장을 쓸었다. 그 해 크리스마스에는 눈이 내렸다 그쳤다 했다. 원래부터 강수가 변덕스러운 고장이니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런던 사람들은 비가와도 서두르지 않고 걷고 눈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안개와 강수의 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공평하게 무거워지고 젖는 것에 익숙했다.

  손님이 드나들면 차가운 공기가 히터바람을 밀어냈다. 그 때마다 고개를 들고 의무적으로 밝은 인사를 해야 했는데 근무시간이 길어질수록 활기를 잃어갔다. 카페가 아늑해서 한 번 들어온 손님들이 오래 빠져나가지 않았다. 창문에 블라인드를 내리고 오렌지색 조명을 달고 크리스마스라고 곳곳에 포인세티아 리스를 걸어놓아서 확실히 좋은 인상을 주긴 했다. 대신 하루 종일 카페에 박혀 있는 직원들은 날씨가 어떤지 확인할 수 없었다. 손님들의 머리카락에 눈송이가 붙어있으면, 눈이 오는구나. 그러다 또 아무 것도 붙어있지 않으면, 눈이 그쳤구나. 크리스마스 내내 알렉스는 그런 식으로 날씨를 가늠했다. 저녁에는 S가 잠시 들렀다. 카라멜 마끼야또를 주문하면서, “날 사랑하는 만큼 휘핑크림 좀 얹어줘.”하고 장난스럽게 씩 웃었다. S의 머리카락에 붙은 눈송이가 오렌지색 조명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알렉스는 S의 톨 사이즈 컵에 그란데 사이즈 컵만큼의 분량으로 하얀 크림을 잔뜩 얹어주었다. 당연하지만 뚜껑을 닫을 수는 없었다. S는 트레이를 받자마자 웃는 것 같은 비명을 질렀다. 알렉스가 낄낄거리며 S의 보조개에 입을 맞추자, 매니저가 못 본 척하며 고개를 돌렸다.

 토미와 남자가 나타난 건 영업 시간이 15분 정도 남았을 때였나. 그 즈음이었을 것이다. 알렉스는 둘이 오래 앉아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카운터로 나왔다. 둘은 메뉴판 앞에서 고민했다. “뭐 마실 거야?” 토미의 팔짱을 낀 남자가 물었을 때, 토미는 프라푸치노 코너를 살피고 있었다. 크림을 잔뜩 얹은, 혀끝이 녹아내릴 정도로 달달한 음료들.

 “넌 뭘 마실 건데?” 토미가 묻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아메리카노. 이것저것 시럽 넣고 크림 범벅된 건 커피라기엔 좀 그렇잖아.”

 알렉스는 S의 카라멜 마끼야또를 떠올려야 했다. 남자가 말하는 ‘좀 그런’ 게 뭔지 알 수 없었다. 토미는 슬그머니 프라푸치노 코너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나도 아메리카노 마실게.”

 “아메리카노 두 잔 주세요.” 남자가 주문했다.

 “차가운 걸로 드릴까요, 뜨거운 걸로 드릴까요?”

 “뜨거운 걸로.”

 “두 잔 다요?”

 “당연하죠.” 남자는 토미에게 묻지도 않고 그렇게 대답했다.

 알렉스는 카드를 받고 영수증을 넘겨주었다. 사인을 하던 남자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토미를 바라보았다. “뜨거운 거 괜찮지?”라고 너무 늦은 물음을 던지자 토미는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응, 괜찮아.” 둘은 그런 게 익숙해보였다.

 컵을 닦는 동안, 알렉스는 곁눈질로 구석에 앉은 둘을 흘끔거렸다. 토미는 머그컵을 아주 오래 감싸고 있었다. 연인이 좀처럼 말하지 않는 탓에 지나치게 수다스러운 사람으로 보이는 맞은편의 남자는 다리를 떨면서 내내 떠들어댔다. 영업시간이 5분도 채 남지 않았을 때, 알렉스는 그들에게 매장이 곧 문 닫을 시간이라고 알려주었다.

 “아, 그렇군요.”

 그렇게 대답하고 남자는 일어났다. 슬그머니 팔짱을 끼고 나가는 둘을 카페 직원들이 지그시 응시했다. 알렉스는 거의 입도 대지 않은 토미의 머그컵을 그대로 개수대에 쏟아버렸다. 마지막 설거지를 하는 동안 매니저가 블라인드를 올려서 바깥이 훤히 보였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눈발이 점점 굵어져서 퇴근할 무렵엔 쌓이기 시작했다. S의 아파트로 향하는 골목에 두 사람으로 보이는 발자국이 찍혀있었다. 알렉스는 아까 그 둘인가, 하고 호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발자국은 나란하지 않고 큰 쪽이 종종 앞서 나갔다. 뒤쳐진 쪽은 큰 발자국보다 깊은 그림자가 고였고 더 촘촘히 찍혀 있었다. 코너를 돌기 직전에 가로등이 켜져서 거리가 탁한 오렌지색이 됐다. 그쯤에 유난히 깊게 찍힌 부분이 있었다. 아마 멈춰 섰던 거겠지. 지독하게 외로워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가 망설임 없이 코너를 돌 때, 남겨진 사람은 그렇게 서있었을 것이다. 알렉스는 트레이를 받던 토미의 축축한 머리카락과 바깥에서 아주 오래 기다린 것 같은 발간 손과 코끝, 부르튼 뺨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자 그와 대조되던 남자의 건조한 머리카락과 좋은 혈색이 돌던 손, 건너편에 앉은 연인을 향해 미지근하게 웃어주던 미소가 떠올랐다. 한 방향으로 뻗은 사랑의 비극성을 눈으로 확인하는 일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 날 밤에는 S와 침대에서 얼마 남지 않은 크리스마스를 즐겼다. 알렉스는 S에게,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연인을 본 것 같다고 고해해보았다. 그리고 맹세컨대 자신은 그 반대편에 S를 데려다놓겠노라 고백해보기도 했다. 그게 얼마나 텅 빈 말인지 알면서도 말이다.

 봄이 오자 런던에는 다시 눈 대신 비가 내렸다. 여전히 내렸다 그쳤다 변덕스러웠는데 S와 알렉스의 관계도 꼭 그랬다. 2월 초에는 S가 경찰서를 다녀왔다.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그를 빌미로 알렉스는 지지부진한 연애에 종지부를 찍었다. 마지막에 S에게 물어보았다. “왜 말하지 않았어?” 오토바이를 타는 것은 알았지만 그런 짓을 저지를 줄은 몰랐다. S는 별로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얼굴이었다. “네가 그 카페에서 일하고 싶다고 했잖아. 내 아파트 근처에 있다는 이유로.” 괴물 보듯 하는 알렉스의 시선에도 S는 그저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다. “왜 그런 눈으로 봐? 바퀴로 그냥 살짝 스치게 만든 거야. 나 운전 잘하는 거 알잖아. 너도 들었지, 걔 다리에 금만 조금 갔다니까.”

 알렉스는 S의 귀에 매달린 무수한 피어싱과 왼쪽 코에 박힌 작은 비즈 알갱이, 손목을 감싸는 문신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전에는 한 번도 눈에 들어오지 않던 특징들이 그녀를 특정 짓고 있었다. 사랑이 소멸된 지 오래되었는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은 것 같았다.

 돌아오는 길에는 비가 내렸다. 알렉스는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걸었다. 집으로 돌아가면서 W에게 문자를 보낼 생각이었다. S와 사귀는 도중에도 W와 몇 번 섹스를 한 적이 있었다. 아마 S도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S의 아파트에서 종종 낯선 트렁크와 드로즈를 발견하곤 했었다.

 돌이켜보면 S와의 교제는 오로지 부정을 저지르고 그것을 은닉하는 재미로만 유지되었다. 사실 대부분의 연애사가 그랬다. 알렉스의 가벼움을 납득하지 못 하는 연인도 있었고,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연인도 있었고, 알면서도 내버려두는 연인도 있었고, 애원하면서 욕지거리를 내뱉거나 때리고 협박하는 연인도 있었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모두 알렉스를 붙잡지는 못 했다. 끝이 항상 나쁜 건 아니었다. S처럼 깔끔하게 보내주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그건 사랑이 없을 때나 가능한 결말이었으므로 가장 최악의 엔딩일 지도 몰랐다. 그래도 알렉스는 그 편이 제일 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서, 코너를 돈다. 이 부분이 중요하다. 풍경의 물리적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알렉스 인생의 코너에 대한 문제다. 그 뒤로 사랑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알렉스의 무수한 X들이 들었더라면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라고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였던 언젠가는 벌어질 일이었다. 토미가 때마침 그 코너 너머에 서있었다. 그렇게 왔다. 알렉스의 사랑을 위하여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람처럼. 한참 나중에야 알렉스는 그걸 운명이라고 간신히 불러보았다.

 토미는 노란 우비를 뒤집어 쓴 채 사차선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시시한 연인도 함께였다. 둘이 팔짱을 끼고 있지는 않았다. 그래도 뭔가 말을 하기는 했다. 알렉스는 W에게 문자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다. 어떤 일이 벌어질 것 같았는데, 순전 오랜 경험에 의한 감이었다. 그는 잠자코 둘을 지켜보았다. 남자가 토미에게 말하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질 않아서 대화는 이어졌다.

 여전하게도 토미는 때때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게 대답하면서 그에 응하고 있었는데, 남자의 마지막 말을 들었을 때는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던 것 같다. 천천히 고개를 젖혀 눈앞의 연인을 바라보는 눈이 마구 흔들렸다. 답을 구하는 입술이 희미하게 달싹이고 있었다. 바로 그 때, 신호가 바뀌었다. 건너가야 할 때가 왔으므로 남자는 손을 흔들었지만 토미가 움직이질 않자 내버려두었다. 중간까지 가서 그가 토미를 한 번 돌아보기는 했다. 그러나 곧 그대로 걸어 나갔다. 멀어지는 걸 멈추지 않았고 마침내는 신호가 바뀌어서 돌아올 수도 없게 되었다. 코너를 돌기 전, 남자가 한 번 더 손을 흔들었다. 안녕, 이라고 말한 것 같았다. 어쩌면 잘 지내, 라고 했을 지도 모른다. 그래도 토미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층 관광버스가 둘 사이를 오래 가로막았다. 버스가 지나갔을 땐 남자도 없었다. 둘의 끝은 S와 알렉스의 그것만큼이나 싱겁고 밍밍했다. 그게 놀라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조차 그랬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렉스는 그 말을 꼭 붙이고 싶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횡단보도로 뛰어온 여자가 급하게 택시에 탑승했다. 자전거를 끌고 멈추어 선 학생도 있었다. 개를 안은 노인과 아이 둘도 보였다. 횡단보도에 다시 행인이 찼고, 건너편도 그랬다. 남자는 떠나고 토미는 남았지만 거리의 운영에는 문제가 없었다. 신호가 바뀌자 건너편과 이곳의 사람이 교환되었다. 토미는 교환되지 않았다. 그는 전신주처럼 서있었다. 녹색 불이 깜빡이다가 다시 빨간 불로 바뀌었다. 얇은 빗방울이 쉴 새 없이 내렸다. 건물, 거리, 보도블록과 코트, 신발 따위가 탁한 채도로 천천히 젖어들었다. 세 번째 신호가 바뀌었을 때, 알렉스는 다가가서 토미를 툭 건드렸다. 꼭 물 먹은 종이를 만진 것 같았다. 토미는 울고 있지 않았다. 흐물거리는 몸을 바로 잡아 세우자, 매서운 손길이 날아왔다. 토미는 알렉스를 뿌리친 후에도 몇 번 더 비틀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었다.

 나중에, 토미가 말하길, 그 남자, 그러니까 X와의 연애는 꼭 유예 기간이 있는 데이트 서비스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아주 오랜 기간을, 기다려야 했다고. 언제쯤 이별의 순간이 올지 종잡을 수가 없어서 그저 기다려야 했다고 말이다. 물론 행복한 순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실망할 때가 더 많았다. 전자는 이별을 버터기 위한 힘으로, 후자는 이별을 납득하기 위한 힘으로 비축되었다. 그 때, 두 번의 신호를 떠나보내면서, 토미는 그 힘을 사용했다고 말했다. 다 소진해버려서 X를 제대로 떠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고. 알렉스의 연애사만 기가 막힌 것이 아니었다. 세상에는 그런 연애도 있었다.

 

 3

 그러나 이를 특별히 가엾게 여긴 적은 없다. (토미라는 이름도 그가 붙여주었다)

 

 4

 토미를 다시 만난 건 3월의 일이었다. 포인세티아 리스를 떼어내고 블라인드를 올린 창가로부터 진한 햇살이 떨어지던 오후에 문을 열고 나타났다. 알렉스는 카운터에 기대어 아무하고나 문자를 주고받고 있었다. 특별히 외로워서나 재미있어서 하고 있던 것은 아니고 그저 습관이었다. 앞치마에 휴대폰을 쑤셔 넣자 순식간에 주머니가 미지근해졌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의무적으로 인사했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이번에 토미는 혼자였다. 크리스마스 이후로 통 보이질 않았으니 올해로는 최초의 방문인 셈이 된다. 그 때 애인과 헤어지고 영영 다시 만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카운터로 천천히 걸어온 토미가 메뉴판을 들여다보았다. 머리카락이 젖지 않고 건조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한참 서서 그러고 있더니 고작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차가운 걸로 드릴까요, 뜨거운 걸로 드릴까요?”

 “뜨거운 거요.”

 토미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기어 들어간 나머지 움푹 들어간 블랙홀을 떠오르게 했다. 무한한 중력 때문에 목구멍 안으로 몸도 따라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너무 작은 목소리여서 사실 잘 들리지도 않았는데, 알렉스는 그냥 뜨거운 것이려니 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메리카노를 머그잔에 담아 트레이로 옮기자 토미가 인사하지도 않고 받아서 구석 자리로 갔다. 언젠가 둘이 앉았던 바로 그 자리였다. 진심으로 구질구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타임에 근무하는 동료 P가 토미를 기억하곤 대신 경악해주었다. 크리스마스에 카페를 방문한 동성연인이 그 둘뿐이었기에 매니저도 P도 어렵지 않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다들 아, 그 때… 하더니 말끝을 흐렸다.

 아마도 아메리카노를 마셔보려고 했던 것 같은데 결국 버렸다. 30분도 채 되지 않아 가게를 떠난 토미의 자리에서 거의 마시지도 않은 머그컵을 들어올렸다. 개수대에 커피를 쏟는데, 그제야 P가 대단하다 정말, 하고 입을 열었다. 손님이 몰려서 토미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지는 않았다. 자리로 돌아간 P는 커피를 내리고 알렉스는 매장 쓰레기통을 비웠다. 쉬는 시간에 스테프룸에서 W와 통화를 했다. W는 잘 지내고 있다고 했고, 알렉스가 보고 싶다고 웃었다. 저녁에 만나기로 하고 연락을 끊었다. 손을 내려다보니 쓰레기를 치우다 묻은 커피 찌꺼기에서 아메리카노 향이 났다. 알렉스는 연인과의 추억으로 목이 메어 마실 수 없는 커피 한 잔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해되지는 않았다.

  그 후 토미는 자주 카페에 왔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한 후 참을성 있게 앉아서 그것을 홀짝이거나 들이켜 보다가 어김없이 실패하고 나갔다. 앉는 건 늘 그 자리였다. 그 일이 서너 번 반복되자 카페에 근무하는 모두가 토미를 알게 되었다. P는 토미가 언제까지 이 카페에 올지 내기를 걸었다. 어쩌면 새 애인을 데리고 나타날 지도 몰라. P가 흥미진진한 듯이 말했는데, 무엇이 흥미진진한 건지는 본인도 모르는 눈치였다. 그저 신나보였다. 매니저는 토미가 구질구질하다고 말했다. 분명 애인에게 호되게 차인 거겠지. 그렇게 중얼거린 목소리에 의외로 연민이 묻어 있었다. 알렉스는 매니저의 의견에 대체로 공감하였다. 그렇다고 불쌍하게 여겼냐면 그건 아니었다. 연민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공감의 산물이다. 상상력이 발휘되지 않으면 느낄 수 없는 영역에 있다. 무수한 연애를 거치긴 했지만 알렉스가 토미를 위한 상상을 발휘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가엾게 여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애초부터 토미는 불가해의 영역에 존재했다. 알렉스는 남자로부터 성적인 끌림을 경험한다는 게 무엇인지 알지 못 했고 평생 알지 못 해도 상관없다는 쪽이었다. 이따금 런던에서 작은 시위가 벌어지곤 했지만 게이, 동성애, 성소수자, 같은 단어를 신문에서 가볍게 넘기는, 알렉스는 한평생 그런 인간이었다.

 그래도 매일 같이 카페에 와서 마시지도 못 할 커피를 시키고 오래 지키지도 못 할 자리에 앉아있는 토미를 보는 일을 가볍게 넘기지는 않았다. 오히려 제법 관심이 갔고 지루하지 않았다. 거기 가만히 앉아 있는 그를 보고 있자면, 그 내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가 무언가와 싸우고 있음이 느껴졌다. 매일이 격전이었고 패잔병처럼 떠났다. 그야말로 Tommy(영국 병사)였다.

 이주일 쯤 되었을 때, P는 내기를 철회하고 그 일에 완전히 손을 뗐다. 대신 알렉스가 그렇게 부르듯, 그를 토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며칠 후엔 매니저도 그렇게 불렀다. 얘, 오늘은 토미 안 온대니? 혹은, 토미 왔었어? 그런 식으로 통용되었다.

 토미는 왔다. 계속 왔다. 멈추지 않고 왔다. 거의 한 달을 꾸준히 드나들었고 그 날도 그랬다. 알렉스는 그 때 쓰레기통을 비우고 있었다. 허리를 펼치자 쇼윈도우 너머로 비 내리는 런던 거리가 보였다. 끝에서부터 익숙한 인영이 나타나더니 점차 가까워졌다. 토미는 천천히, 좁은 보폭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비를 다 맞아가면서 달팽이처럼 왔다. 그걸 보는데 갑자기

 아, 참을 수 없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참아왔는지도 몰랐는데 감히 그렇게 느꼈다. 날씨 탓에 바깥이 캄캄했다. 카페 벽지가 유독 침침해보였고 토미가 앉는 기둥 근처에 포인세티아 리스를 달아놓았던 흔적이 도드라졌다. 크리스마스가 지난 후에도 카페는 한동안 그것들을 떼어내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그러다 알렉스가 말한 것이다. 철 지난 거 언제까지 촌스럽게 달고 있을 거예요? 알렉스는 그런 것들을 참지 못 했다. 시간감각을 어수선하게 만드는 물품과 사람들. 보내줘야 할 때를 알지 못 하고 구질구질 매달리던 지난 연인들처럼, 크리스마스가 떠난 자리에도 남아있던 리스가 꼴 보기 싫었다. 토미가 유지하고자 하는 시간들은 2월 어딘가에서 끝났는데 아직까지 걸려 있었고 리스가 떨어진 기둥 아래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거슬린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왜 갑자기 의식하게 된 건지 모르겠다. 그런데 리스 같은 걸로 취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크리스마스는 돌아오지만 연인은 유통기한이 있고 사랑은 재활용할 수가 없으니까. 그런 걸 알려주고 싶었던 것 같다. 토미가 그만했으면 싶었다. 미련하다고. 그 날도 토미는 아메리카노를 시켰는데 알렉스는 포스기에 아무것도 찍지 않고 그대로 서있었다.

 “그거 잘 못 마시지 않나요.”

 알렉스의 말에 토미가 고개를 들었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것처럼 알렉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인가 알게 될 징조를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네, 잘 마시지 못 해요.” 하고 토미가 대답했다. “익숙해져볼까 했는데 잘 되지가 않네요.”

 “마시고 싶은 걸 마셔요.” 알렉스가 말했다.

 “역시 그게 좋겠죠.” 토미는 납득했다.

 그래서 토미가 드디어 프라푸치노를 주문했다. 자바칩에 휘핑을 잔뜩 얹어달라고 말하는 토미의 눈이 오렌지색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처음으로 생기 있는 눈을 본 것 같았다. 알렉스는 트레이에 컵을 올려놓고 벨을 울리는 대신 직접 토미 앞으로 그걸 가지고 나갔다. 토미는 이번에 고맙다고 인사했다. 이때까지 인사하지 않았고, 이제 와서 인사를 했고, 고맙다고 했는데, 알렉스는 그 사실을 알아차린 자신에게 놀랐다. 이제까지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섬세해본 적이 없어서 그 경험은 더욱 특별하게 다가왔다. 연인들이 있지, 나 머리 잘랐는데, 할 때마다 잘 모르겠다는 말로 심드렁하게 넘겼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이건 명백히 새로운 사건이었고 기쁨을 느낄 차례였다. 그런데 알렉스는 그걸 토미가 고맙다고 해서가 아니라, 그 인사에 특별함을 알아차린 자신에 대한 놀라움이라고 믿어버렸다. 프라푸치노를 건네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알렉스는 사랑에 빠져놓고선 자신에게 눈이 멀어 이상한 포인트에 도취되고 말았다. 그 멍청이에게, 토미는 희미하게 웃어주었다. 어떤 비극이 다시 시작되려고 했는데 거절하지 않았던 셈이다. 트레이를 가져가려는 알렉스에게 토미가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커피를 남긴 건 말이에요, 그냥 써서 그랬던 거예요. 그 말에는 당신들이 나를 무엇으로 봐왔으며 어떻게 연민했는지 알고 있다는 정보가 명확하게 담겨 있었다. 알렉스는 엉거주춤 서서 ‘다음 프라푸치노에는 휘핑크림을 그란데 사이즈만큼이나 담아주겠다’고 멋쩍게 웃었다. 둘은 싱거운 대화를 몇 번 더 주고받다가 손님이 오는 바람에 헤어졌다. 토미는 자리에 앉아 알렉스가 바쁘게 매장을 돌아다니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의자가 이미 비어있었다. 나중에 P가, ‘어쩐 일로 토미가 평소보다 몇 분 더 길게 앉아있었다’고 전해주었다.

 무언가 시작되어 버린 것 같다는 감각을 깨달았을 땐 3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W와 섹스하던 알렉스는 어느 순간부터 그녀와 사귀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가끔 E나 A같은 친구들이 먼저 연락해오면 뿌리치지 않고 받았다. 모텔이나 E 혹은 A의 아파트에서 옷을 벗고 허겁지겁 정사를 나누며 4월을 보냈다. 매트리스에 엎어진 나신으로 담배를 피우며 W의 취조를 요리조리 빠져나가곤 했다. 섹스파트너로 시작한 여자 친구에게 거짓말을 한다고 지옥에 갈 것 같지는 않았다. 이때까지 저질러온 게 있어서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따금 견딜 수 없는 불안이 찾아왔다. 이를테면 토미가 오렌지색 조명을 받으며 눈동자를 반짝거릴 때, 톨 사이즈 컵에 그란데 사이즈만큼으로 휘핑크림을 잔뜩 얹어주면서 시선이 마주칠 때. 알렉스가 먼저 웃어주거나 아주 가끔 토미가 먼저 웃어주곤 하는 순간들. 그건 그냥 일상이었는데 일상으로 치부할 수가 없었다. 일상이라면 지루해야만 했는데 지나치게 생기가 있어서 비일상적이었다. 이대로 내버려두어도 괜찮은 것인가 싶을 정도로 싱싱한 고양을 느꼈다. S의 컵에 휘핑크림을 얹어주거나 W와 섹스하거나 A의 아파트에서 거짓말을 할 때도 그렇게까지 즐겁거나 기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권태롭기만 했고 연애가 다 그런 거라고 생각했는데 토미는 아니었다. 그런데 토미와 뭔가 하고 있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맞이하는 기쁨이라는 게 뭔지 몰라서 알렉스는 자꾸만 허둥지둥했다. 그걸 간직해도 되는 것인지, 아님 그냥 흘러가게 두어야 하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도 있었지만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몰라 그 마저도 불가능했다. 토미는 예나지금이나 불가해의 영역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았다. 매번 제시간에 와서 그 자리 그대로 앉아 음료를 주문했다. 그런데 참을 수 없지 않았다. 커피에서 음료를 주문한다는 것만 달랐는데도 그랬다. 그 변화를 알아차린 자신이 두려워졌다. 깊은 불안을 자주 느끼게 되었다. 인생에 토미가 들어와 있었다. 그것을 ‘어느 순간부터 그렇게 되었다’ 쯤으로 가볍게 말할 수 없었다. 토미는 남자였고 연인이 아니었고 그럴 일도 없었고 그렇기에 S도 W도 될 수 없었다. 토미는. 토미는… 그냥 거기 있을 뿐이었다.

 

 5

 토미에 대한 이미지로는,

 건너가지 않는다 움직이지 않는다 교환되지 않는다 저항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뿌리칠 수 있는 사람

 따위를 쓸 수 있었다.

 

 6

 알렉스의 첫 연애는 열두 살 때였다. 또래들에 비하여 조숙하게 진행되었는데 혀를 섞으며 입술을 포개는 법을 터득했을 즈음 헤어졌다. 여자애의 이름도 모습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금발이었던가? 까만 머리였던 것도 같았다. 어쩌면 동양인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 모르겠다.

 그 뒤로 많은 여자들이 알렉스를 거쳐 갔다. 다들 거대한 전철역을 지나는 기분으로 그를 대했을 것이다. 반드시 거쳐 갈 수도 있고, 또 거쳐 가는 게 나쁜 것도 아니었지만, 확실히 종착역은 아니다. 알렉스 자신도 그 사실을 인정했다. 열차들은 달려 나가고 역은 남는다. 그리고 기다리다 보면 새로운 기차가 온다. 헤어 디자이너와 교사, 파트타이머, 쉐프, 미대생… 운 좋게 모델도 사귀어 보았다. W가 그 모델이었다. 모델을 두고도 그 여성편력을 고치지 못 해서 이 사단이 났다. 여름 무렵에 결국 꼬리가 잡혔다. W는 구질구질하게 굴지는 않았지만 알렉스를 흠씬 두들겨 팼다. 배신감이라기보다 자존심에 가까운 감정으로 보였다. 모델이었으니까. A나 E가 W보다 특별히 예쁘거나 잘나지는 않았으니 이해는 갔다. 맞아주고 나와서 A나 E에게 연락을 하려다 길거리에 서있는 다른 여자에게 번호를 땄다. 잘생겨서 편리한 일들이 있었는데 알렉스는 자신이 가진 걸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지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편에 속했다.

 한여름이 오자 카페는 차양을 치고 테라스에 의자와 테이블을 놓았다. 원래 그렇게 해왔으니까 토 달지 말라고 매니저가 눈치를 줬는데 아무래도 리스 사건 때문에 그런 것 같았다. 알렉스는 그런 문제로 투덜거렸던 건 아니라고 해명하려다가 그만두었다.

 테라스가 열리자 토미는 종종 야외로 나갔다. 그 기둥을 벗어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알렉스는 그것으로 시간의 환기와 계절감을 느꼈다. 좀 덥지 않아? 아니, 괜찮아. 저녁 바람을 맞는 일이 좋아. 그 무렵엔 둘 다 말을 놓고 있었다. 확실히 토미의 모습은 제법 운치가 있었다. 비스듬한 햇발을 받으며 이따금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면 밝은 자갈색, 황금색, 빨간색 따위로 빛났다. 보기가 좋아서 근무 중에도 종종 바깥을 내다보았다. 블라인드를 떼버리는 게 어떠냐고 건의를 했다가 매니저에게 잔소리를 들었다. 휘핑크림을 한가득 얹은 프라푸치노를 일부러 테라스까지 들고 나가서 토미 앞에 내려놓을 때마다 신경 써서 미소를 만들었다. 하지만 매번 어색하기만 했다. 여자 앞에서는 잘만 되었는데. 남자라 그런 거라고 애써 다독여봤다. 딱히 꼬시려고 그런 건 아니었기에 스스로 썩 납득되지는 못 했다. 그러다 하루는 정말 꼬셔보려고 근무가 끝나면 기다려줄 수 있겠다고 내뱉었다. 큰 기대를 한 건 아니었는데 토미는 정말 기다려주었다. 알렉스는 그 날 A와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파기했다.

 술집 같은 곳을 데려갈 생각이었는데 왠지 입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냥 근처 공원을 갔다. 도시 한복판에 있어선지 관리가 잘 되어서 깨끗하고 고즈넉했다. 출근할 때마다 지나갔었는데 한 번도 가볼 생각을 못 했었다. 토미가 아니었으면 영영 출입해 볼일이 없었을 것 같았다. 둘은 노을이 지는 도시의 공원을 걸었다. 인공적으로 잘 닦긴 길을 어렵지 않게 누비며, 토미가 말한 초여름 저녁의 바람을 맞아보았다. 그 말 그대로 좋았다. 하늘은 비비드에 가까운 분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공원 한가운데에 작은 둔턱이 있었는데, 그곳을 넘어선 공간은 온통 살구에 가까운 오렌지색이었다. 변화무쌍한 노을의 서쪽으로 선선한 공기가 끊임없이 넘어오고 있었다. 둘은 대화를 했다. 주로 알렉스가 떠들어댔는데 토미 쪽이 말수가 적어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 알렉스는 그들의 두 번째 만남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냈다. 횡단보도 앞에서 자신을 뿌리치던 토미의 얼굴이 몹시 쓸쓸했던 것에 대하여. 신호를 두 번이나 놓친 토미의 빤한 고의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 고의 속에 담겨 있었을 어떤 감정들. 토미를 카페까지 이끌었던 그 격전의 순간들. 쭉 궁금해 했노라 내뱉고 나서 알렉스는 그렇게까지 토미를 곱씹고 있던 자신에게 놀랐다. 별로 궁금해 한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문장으로 내뱉고 나니 마음에 깊게 남았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서 문장 자체가 쪼글쪼글 주름져 있었다. 너를 궁금해 했어, 라는 말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토미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찬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무엇인가 알게 될 징조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그리곤, “알렉스 네가 잡아주지 않았더라도 나는 충분히 비틀거렸을 거야.”라고 대답했다. 토미는 그런 식으로 이상하게 말할 때가 있었다. 잡아주었다, 가 아니라 잡아주지 않았더라도, 라고 했다. 세상이 당연하게 정해놓은 법칙과 상식의 선 바깥에서 사고하고 답을 내렸다. 네가 붙잡은 덕분에 살았어, 가 아니라 네가 붙잡았기 때문에 죽을 수도 있었어, 따위로 말하는 사람이었다. 알렉스는 토미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바람이 불어서 머리카락이 둥그런 이마 위로 나부끼고 있었다. 찡그린 눈썹 위로 가로등의 불빛이 떨어졌다. 알렉스는 토미가 어쩌면, 방금 자신을 조금 밀쳐내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밀쳐져 본 적이 없어서-알렉스는 주로 밀쳐내는 쪽이었으므로-그게 맞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그랬구나.” 대답했다. 그랬구나. 내가 붙잡지 않았더라도 너는 그 길을 외롭게 걸어 나갔겠구나.

 “그래도 내버려 둘 수는 없었어.”

 “응.”

 토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아.”

 알렉스는 지난 몇 달 치의 많은 토미를 떠올렸다. 신호등 앞에 전신주처럼 서있던 토미, 알렉스를 뿌리치던 토미. 단 한 모금도 마시지 못 한 아메리카노가 식기를 기다리던 토미. 좀 더 나아가면 코너 앞에 쓸쓸하게 찍혀 있던 깊고 작은 발자국이 있었다. 그런데 토미는 단지 원래부터 휘청거릴 예정이었거나 쓴 것보다 단 것을 더 잘 마실 뿐이었다. 공원을 느리고 천천히 걸었다. 실연한 오기로 억척스럽게 붙들고 있는 미련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실 그게 아니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이때까지 착실하게 봐온 게 X의 그림자가 아니라 토미 그 자체였다는 확신이 생겼다. 그러자 갑자기 토미에 대해 너무 많은 걸 새삼스럽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전혀 거북하지 않고 오히려 다소 부족하게 느껴져서 곤란할 정도였다.

 그 날 공원을 도는 내내 알렉스는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다 마침내는 X에 대해 묻기 시작했는데 토미는 마치 언젠가 알렉스가 그것을 물어올 줄 알고 있었던 것처럼 준비된 대답을 늘어놓았다.

 X는 토미의 고등학교 동창이었고 대학도 가까운 곳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졸업 이후에도 종종 만나던 친구였다. 갑자기 그런 마음이 생긴 건 아니었고 차차 무르익은 거라고 했다. 그러니까, 토미가 말이다. X쪽이 어땠는지에 대해 토미는 확신하지 못 하고 말을 흐렸다. 한 땐 연인이기까지 했으면서 우스운 일이었다. 그만큼 확신도 없이 시작해버린 일이었기에 끝이 좋지 않았던 거라고, 토미는 덤덤하게 말했다. 퀴어 동아리를 하고 그런 류의 시위를 몇 번 나갔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고 말한 적이 있는데 X가 의외로 그래? 하고 어깨를 으쓱였다. 돌려서 떠본 거였기에 집으로 돌아와 혼자 가능성에 대해 점쳐보았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떠보고 점쳐보았다. 아무리 애써도 백 퍼센트로 치닫지는 못 했다.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어느 날 고백했는데 X가 알겠다는 대답을 내놓아 깜짝 놀랐다. 그리고 사귀게 되었는데 예전과 별 반 다를 건 없었다는 이야기까지. 사실 좀 상투적인 전개긴 해, 하고 토미가 덧붙였다. 같이 있는 게 편해서 그걸 사랑이라고 쳐도 좋을 것 같았나 봐, 라고 했다. 그러니까 그걸 디나이얼의 반대라고 하는데 커뮤니티에선 왕왕 있는 일이란 것이다. 마음에 확신이 없고 갈팡질팡하거나 아무렴 어떠냔 모험심으로 상대의 진심을 우선 받아보는 헤테로들. 알렉스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생각했다. 어느 연애에서든 마음이라는 것은 결국 권력이 되는구나. 거기에 성별이 덧입혀지면 더 아프고 유난스럽게 느껴지는 것일까. 알 수 없었기에 묻고 싶었다. 너도 그랬냐고.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S와 W가 생각나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타인의 고통을 궁금해 할 자격이 되는 지가 의심스러웠다.

 토미는 어떤 말을 기다렸던 것 같은데, 알렉스는 그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노을이 다 져버려서 공원이 어두워졌고 가로등 탓에 완벽히 다른 분위기가 되었다. 고즈넉 하다기 보다 좀 더 은밀해졌다는 편이 어울렸다. 풀벌레가 울기 시작했다. 둘은 벤치 근처에 멈추어 섰다. 건너편 화단으로 조깅하는 남자가 희미한 음악소리를 달고 지나갔다. 알렉스는 손가락을 매만지면서 입을 열었다.

 “…걔랑 잤어?”

 다시 생각해도 끔찍할 만큼 멍청한 말이었다. 그러니까 알렉스가 하려던 말은, 너도 외롭고 아팠냐는 것이었는데, 그러려면 연애다운 뭔가를 해봤을 테고, 연애라는 건… 보통 그런 거니까. 어쨌든 많은 게 생략되어 무례해졌는데도 토미는 화내지 않았다. 그런 게 익숙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였다.

 “응.”

 “아팠겠구나.”

 “그렇지.”

 “여러가지로.”

 “응, 여러모로.”

 그리고 둘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그대로 공원을 빠져나왔다. 토미의 빌라로 갔다. 토미의 거실은 복층이었고 방은 제법 넓었다. 유복함의 상징이었는데도 넓다기보다 비어 보인다는 인상을 줘서 무신경하고 외로워보였다. 꼭 지 같은 방에서 자네. 방문을 닫기 전에 그런 생각을 했다.

 거기서 알렉스 인생 최악의 섹스를 했다. 기분이 나빴던 건 아니고 순전 알렉스의 서투름 탓이었다. 여자를 안는 거나 남자를 안는 거나 삽입하는 쪽이라면 거기서 거기일 줄로 알았는데 의외로 많은 준비 과정이 필요했다. 콘돔이 똑같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을 땐 제법 놀랐다. 아메리카노를 주문할 땐 그렇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던 토미가 흔들리거나 혼란스러워 하지 않고 차분하게 그 과정을 말로 설명해주었다. 매트리스에 앉아 고개를 끄덕이며, 알렉스는 속에 블랙홀을 삼킨 것 같은 말투로 가끔 대답했다. 응, 응, 알겠어. 기억해볼게. 좋아, 알겠어.

 토미를 껴안고, 입을 맞추고, 옷을 벗기고, 다리를 벌린다. 콘돔을 손가락에 끼우고 구멍을 헤집는다. 도무지 상상해본 적이 없는 영역으로 발을 내딛었는데도 거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원래 이런 건가? 따위의 생각이 들었다. 토미는 끙끙거렸고 가끔 물기 있는 소리를 뱉으면서 고개를 젖혔다. 단단한 가슴팍을 바싹 붙이며 언젠가 넘겨버린 신문의 기사들을 생각했다. 플랜카드를 들고 무지개 깃발 아래서 소리치던 사람들. 그 속에 토미도 있었을까. 읽었더라면 더 빨리 알 수 있었을까. 더 빨리 이런 것들을 알아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있었을까. 이 애를 더 기분 좋게 해줄 수 있었을까. S나 W의 가슴은 둥글고 풍만해서 아무리 힘껏 껴안아도 자꾸만 틈이 생겼는데 토미는 아니어서 심장이 자꾸만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도 틈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었지만. 그랬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둘은 네 번이나 했다. 녹초가 되어 쓰러진 토미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주면서, 알렉스는 자꾸만 품으로 그 애를 끌어당겼다. 아팠어? 를 물어보고 싶었는데 내뱉고 보니 “외로웠어?”였다. 그제야 제대로 물어보았는데 하필 섹스 이후라는 게 지극히 알렉스다웠다. 토미는 숨을 고르느라 가슴을 자꾸만 움직이면서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하나도 외롭지 않았어. 왜? 걔가 날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해서. 그게 더 외롭지 않아? 그렇지 않아. 사랑은 불확실한 것에 자꾸 마음을 거는 거잖아.

 그 때, 그건 아마 사랑고백이었을 것이다. 알렉스가 대답할 차례였는데 그냥 껴안았다. 그러자 두 납작한 가슴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두 다리가 얽혀서 매트리스 바깥으로 조금씩 걸쳐졌다. 토미는 발가락만 걸쳤다. 알렉스는 어떤 확신을 느꼈다. 다시 이곳에 와서 이런 일을 하게 되면 이번보다 더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예감. 토미가 다시 초대해준다면 이번엔 올바른 타이밍에 올바른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럼 토미가 대답할 테고, 이번엔 놓치지 않겠다고. 그런 다짐을 하며, 품속의 그 애를 아주 오래오래 껴안았다. 다음 날 일어났더니 A나 E나 G로부터 문자가 몇 통이나 쌓여 있었다. 알렉스는 연락처를 비웠다.

 

 7

 토미 (TOMMY)

 1. <명사> 영국 병사

 2. <상태> 움직이지 않다, ~와 교환되지 않다, ~에게 저항하지 않다

 3. <명사> 뿌리치는 사람

 

 8

 알렉스는 토미가 깨어나기 전에 빌라를 나왔다. 새벽이어서 거리엔 사람이 드물었다. 가게들은 아직 문을 열기도 전이었다. 알렉스네 카페도 블라인드가 쳐져 있었다. 건물들의 꼭짓점을 완만하게 만들 만큼 코너를 돌고 또 돌면서 서서히 동이 트는 걸 구경했다. 주머니에 손을 꽂고 간밤의 일을 자꾸 곱씹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난 간밤에 남자랑 잤는데 말이야, 세상은 멀쩡하다. 아니, 멀쩡하지만 여전한 건 아니었다. 확실히 무엇인가 변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언가 시작되었음을 넘어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을 방치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가슴에 뭔가 걸린 것처럼 매스껍고 묵직했다. 토미를 그렇게 내버려두고 나오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뒤늦게 들었다. 외로웠냐고 물어놓곤 그 큰 방에 잘도 버리고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서서 그 애를 오래 정의해보았다. 인생에 갑자기 들어찬 불가해한 존재의 이름과 뜻을 고민해봤다. 갑자기 패잔병처럼 나타나 격전하고 자신을 뿌리치고 또……. 이상한 기분이 든다. 간밤에 그 애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알렉스는 죄책감을 느꼈다. 아무래도 자신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옥에 자리 하나가 마련되었는데 조만간 거기 떨어질 것 같았다. 그제야 토미로부터 오던 깊은 불안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내내 미안해하고 있었다. 무엇을 미안해하는 줄도 모르고, 그저 사랑을 철학하면서 자꾸만 미안해했다. 토미에게. 시작하거나 끝내지 않을 자신을, 미안해했다. 그리고 간밤에 토미가 그것을 물었다. 언젠가 X에게 그랬던 것처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떠보고 점쳐본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애써도 백 퍼센트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알렉스가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동이 다 터오를 쯤부터 출근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서서히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행인들이 이따금 알렉스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알렉스는 고개를 숙이고 발가락을 움츠렸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떤 다짐을 했다. 사귈래 혹은 사랑할래. 아마 후자가 더 좋을 거라고, 왜냐하면 전자는 조금 유치해보이니까. 그런 이상한 고민과 결론을 내리고 카페가 문을 열 때까지 오래 서있었다.

 

 9

 마땅한 구실이 없다. 그런 식으로 알렉스는 종종 책임을 회피하고 인연을 방기했다. 제대로 시작하지 않은 관계에서는 그걸 계기로, 시작해서 끝난 관계에서는 그걸 자신의 못남으로 읽었다. 우리가 그럴 계기가 있던 건 아니었잖아, 혹은, 내가 너무 못나서 그렇지 뭐. 확실하게 상대의 공격과 방어를 차단할 수 있는 가장 비겁하고 좋은 변명이었다. 구실이라는 건 알렉스의 연애사에서 유구한 역사를 가진다. 기록되지 않아도 몸속에 켜켜이 축척되어 그의 인격을 만들어왔다. 어느 순간부터 구실은 사랑의 필수조건이 되었다. 사랑을 시작할 때도 끝낼 때도 항상 필요했다. 알렉스는 여태껏 그것을 요령껏 사용해서 곤란한 순간을 벗어나왔는데 종국엔 그게 모든 걸 망쳐놓았다는 생각이 든다. 알렉스는 그 순간을 아주 많이 후회했다.

 토미는 평소보다 좀 더 이른 시간에 왔다. 좀 피곤한 얼굴이었다. 간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는 알렉스가 휘핑크림을 탑처럼 쌓았다. 트레이에 얹자 중심을 잡기 힘들어 마구 위태롭게 휘청거렸다. 토미가 그 모습을 보고 희미하게 웃었다. 알렉스는 웃을 생각이 아니었는데도 그 얼굴을 보니 절로 입 꼬리가 올라가게 되었다. 발가락이나 손가락 같이 꼼질거릴 수 있는 모든 부위를 가만둘 수가 없었다. 알렉스는 평소보다 정신 사납게 움직이며 토미 앞을 왔다갔다했다. 그게 꼭,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말을 걸 구실이 없으니까 네가 먼저 걸어주면 안 될까, 쯤으로 읽혔다. 토미는 그 무언의 몸짓을 받아주었다. 힘없이 먼저 입을 열었다.

 “안녕.”

 “음, 안녕.”

 알렉스는 토미가 무어라 묻지도 않았는데 변명부터 했다.

 “깨우기엔 뭐해서, 먼저 나갔어.”

 “응.”

 “너는…….”

 알렉스가 우물쭈물하자 토미가 대답했다.

 “괜찮아.”

 “음… 그렇구나.”

 알렉스는 멋쩍게 입을 다물었다. 더 대화하지 않고 매장 음악이 공백을 채웠다. 토미가 정말 괜찮은지가 궁금했는데 그보다는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 우선 그것부터 해도 늦지 않을 것 같았다. 타이밍을 잡기 위하여 공백 속에서 자꾸 틈을 노렸다. 쉽지 않았다. 이때까진 지나칠 만큼 쉬웠는데 밀쳐진 난이도가 이 순간을 위하여 투자되었던 것 같았다. 침묵이 점점 묵직해지는데, 있지, 하고 토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있지, 알렉스. 그 애는 처음으로 알렉스의 이름을 불렀다. 트레이에 얹어놓은 휘핑크림이 녹아내릴 것처럼 달달한 음료 안으로 침몰하듯 서서히 기울어지고 있었다. 컵 표면에 붙은 물방울이 지나치게 무거워져서 언제든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다시 여기 오지 않을 건데, 넌 어떻게 생각해?”

 주르륵, 트레이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알렉스는 토미의 프라푸치노를 내려다보다가 쇼윈도우를 보다가 했다. 토미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아서 그랬다. 여태까지 쭉 도망쳐왔기에 이럴 땐 어떻게 받아쳐야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창밖으로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소나기처럼 보였다. 햇빛이 여전하게 들어서 카페가 밝았다. 토미는 침착하게 기다렸고, 마침내 알렉스가 고개를 돌려 토미를 마주보았다.

 토미는, 마지막 기회를 주는 사람으로 보였다. 어떤 말이든 해달라는 눈으로 알렉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몹시, 불안하고 위태롭게 느껴졌다. 토미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이런 일엔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무엇이든, 심지어는 말도 안 되는 것들에까지 익숙하게 굴었으면서도. 트레이에 잔뜩 물이 고여 있었다. 알렉스가 입을 벌리곤 어, 하고, 간신히 입을 떼었다.

 “난, 나는 네가 왜 그런 소릴 하는지.”

 잘, 모르겠어. 까지 말하고 나서야 번쩍 깨달았다. 실수했다고. 하고 많은 대답 중에서도 제일 얼간이 같은 대답을 내놓았고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이 애를 실망시켜버렸다고. 또 미안한 일을 만들어버렸다고. 알렉스는 토미를 내려다보았는데, 토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어쩐지 아주 나쁘지는 않을 것 같은 예감이라고 바보같이 믿으면서 따라 희미하게 웃어보았다. 그게 비웃음이라는 걸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그렇게 믿었다.

 

 10

 토미가 카페를 뛰쳐나왔을 때, 하늘은 밝고 곳곳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동시에 가느다란 빗방울이 떨어졌다. 지극히 연약한 나머지 어딘가를 적시거나 고이거나 범람할 수 없을 것 같은 수분의 조각들이 쉴 새 없이 내렸다. 알렉스가 뒤늦게 따라 뛰쳐나왔는데 토미는 벌써 성큼성큼 거리의 절반까지 나아가있었다. 카페 앞치마를 하고 정신없이 달려 나가는 알렉스를 행인들이 흘끔거리다 지나쳤다. 비가 내리는데도 모두 서두르지 않고 걸었기 때문에 따라잡으려는 알렉스와 떠나가는 토미만이 동떨어진 풍경으로 콜라주된 것처럼 보였다.

 토미를 따라잡은 건 코너를 돌아 나오는 횡단보도 앞에서였다. 잡고 보니 언젠가 서있던 바로 그 거리였다. 코너 이전에는 토미가 겨울 무렵 진한 발자국을 남기고, 코너 너머에선 토미가 봄 무렵에 잔인하게 걷어차였다. 알렉스는 순간 토미가 거기 멈춰서 있지는 않을까 얕은 기대를 했는데, 곧 신호가 빠르게 바뀌어서 행인들과 떠밀렸다. 토미는 멈추지 않고 걸어 나갔다. 알렉스가 허겁지겁 신호에 편승하였으나 너무 늦어버렸다. 깜빡이던 신호가 재빨리 빨간불로 바뀌어서 덩그러니 도로 한가운데에 남겨지게 되었다. 승용차가 빵빵거리며 엑셀을 밟는 바람에 알렉스는 더 나아가지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섰다. 토미가 건너편 거리를 걸어 나가고 있는 게 보여서 소리쳐 부르려고 했다. 토미, 하고 부르려는데 그제야 문득, 토미의 이름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토미라고 불렀는데 정작 누구의 토미도 아니었다. 토미는 알렉스가 자신을 토미라고 부른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런데도 알렉스는 달리 외쳐 부를 이름이 없어서 엉겁결에 “토미!”하고 불렀다. 당연하게도 토미는 돌아보지 못 했다. 이층 관광버스가 지나가는 바람에 시야가 완전히 차단되었고, 그 버스 뒤로도 고층 버스가 몇 대나 더 서있었다. 그 버스가 지나고, 그 다음 버스가 지나는 짧은 틈마다 멀어지는 토미의 뒤통수를 속수무책으로 바라봤다. 바람이 불었는데 선선하지 않고 온통 매연이었다. 버스와 버스의 틈마다 토미의 뒤통수가 바뀌었다. 노란 우비를 입고 있다가, 티셔츠를 입고 있다가, 마침내는 목도리에 코트를 껴입고 있었다. 빗방울이 순식간에 눈송이로 바뀌었다. 알렉스는 발자국을 찍으며 돌아가는 토미를 보았다. 길게 이어지는 촘촘하고 깊은 발자국이 코너를 돌 때까지 주욱 늘어졌다. 언젠가의 알렉스가 뒤늦게 그 발자국을 좇으며 생각했었다. 용케 그런 얼굴을 마주보면서 연애를 하는 구나. 했었다. 용케 혼자 코너를 돌아 마저 걸어갔구나. 그런데 너 정말 외롭지 않았니.

 신호가 바뀌어 녹색불이 되었지만 교환되지 않은 알렉스가 얼굴을 두 손으로 묻었다. 그게 꼭 전신주처럼 보였다. 무엇이 끝났는지도 모르고 울었다. ■

 

* 자국 [명사]

1. 다른 물건이 닿거나 묻어서 생긴 자리. 또는 어떤 것에 의하여 원래의 상태가 달라진 흔적.

2. 부스럼이나 상처가 생겼다가 아문 자리.

3. 발자국

4. 무엇이 있었거나 지나가거나 작용하여 남은 결과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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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핀리 최애 자작곡 <imprint>를 테마로 썼다. 핀리 진짜 지 같은 거 부르는 것 같음... (당연하지 자작곡인데...) 해리랑 무대 한 번만 서달라고 물 떠놓고 빌었었는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음. 하지만 해리가 인터뷰에서도 핀리 자작곡 언급했었기 때문에 아주 근본도 없는 소망은 아니었음 진짜임.

1-1. 부제목 : 이상한 기분이 든다. 간밤에 그 애가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 같다.

2017/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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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포커»
2차/old 2019. 10. 24. 19:10

 한동안 개롯의 레스토랑은 군인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 레스토랑은 워킹 역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있으며, 가게 우측으로는 16번 국도가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를 향해 길게 뻗는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도무지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 이차선 도로가 산등성이 너머의 또 다른 산등성이로, 또 그 너머의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개롯은 도로의 부산스러운 인구 이동을 기대하며 이 가게를 열었는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개점 당시엔 그닥 수완이 좋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기차 때문이었다. 워킹의 거주민들은 차를 끌고 다니기보다 기차를 자주 이용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털털거리는 고물 트럭보다 아무렴 철마가 좋다는 것이 주된 의견이었고, 바로 그런 연유로 16번 국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기야 정부는 이 국도를 좁아터진 이차선으로 결정했을 때부터 ‘어떤 운명’을 분명하게 예감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작 워킹에 기차를 배치할 계획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개롯의 주장은 후자였다. 그는 국가 토지 개발 사업이 이룩한 전유물의 힘을 빌려볼 요량으로 사업을 벌여놓곤, 바로 그 이유로 폭삭 망하게 생겼던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전쟁 이전에 그곳을 방문했다면, 텅 빈 레스토랑 구석에서 정부를 향한 개롯의 끝없는 투덜거림을 곤욕스럽게 듣고 있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터진 후 개롯의 기대를 충족시켜준 것은 ‘그 빌어먹을 기차’였다. 열차가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백 명의 군인들을 워킹 역으로 쏟아 붓게 되면서 작은 숙박업소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워킹에 남은 청년들은 역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은 후, 아침부터 밤까지 유령처럼 곳곳을 쏘다니고 박혀 있었다. 얼마 뒤 개롯의 작은 레스토랑에도 바로 그 유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곧 모든 테이블이 차지되었다. 개롯은 이제 아주 만족스러운 레스토랑의 경영주가 된 것이다.

 3주 정도 그 레스토랑 테이블에 신세를 진 후, 마침내 알렉스 스튜어드와 토미 테일러는 움직이기로 ‘합의’했다. 그것은 충동적인 결심이 아니라 2주 동안의 고민과 신중함, 그리고 망설임으로 점철된 결론에 가까웠다. 그들은 워킹을 떠나 스튜어드 별장으로 가 볼 생각이었고, 그건 전적으로 알렉스의 의견이었다. 놀라운 지점은 이 모험을 시도하기로 마음먹기 전까지 둘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건 놀라운 일이기 이전에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개롯의 레스토랑 아침 영업시간에는 침묵을 지킨 채 카드 패를 돌리는 군인들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저녁부터 밤까지는 비교적 시끄러워졌는데, 그건 지당하게도 술 때문이었다.) 토미와 알렉스 역시 카드 게임을 했다. 아주 많이 했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이따금 알렉스가 조지게일 상표의 에일을 얻어오긴 했지만 작정하고 그 레스토랑에서 음주를 한 적은 없다. 그들은 아침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개롯의 테이블로 등장했다가, 저녁이 되면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들의 숙소는 역 근처에 있었는데,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에는 이미 서넛 쌍이 넘은 군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지내다보면 각자의 짝이 생기는 것일까?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당시 워킹엔 짝 지어 돌아다니는 군복 입은 청년들이 많았고 토미와 알렉스는 개들 중 한 쌍이었다. 그러나 저녁부터 밤까지 그 많은 짝들이 개롯의 레스토랑에 몰려가 술을 마시고 있을 무렵, 둘은 조용하기 그지없는 여관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둘은 같은 침대를 썼는데-방이 비좁아 침대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토미가 벽 쪽, 알렉스가 바깥쪽에서 잤다. 그래서 그 둘이 잠을 청할 때, 토미는 주로 벽을, 알렉스는 천장을 보고 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보면 알렉스가 토미의 등에 바짝 붙어있거나 토미가 알렉스 쪽으로 돌아누워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한 번은 서로 끌어안은 채 깨어난 적도 있는데, 먼저 일어나는 알렉스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토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특별히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설령 알게 된다고 한들 달라질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워킹 곳곳에 포진한 짝들이 이따금 서로로부터 그들의 욕망을 뒤적인다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였지만, 알렉스와 토미에게 그것은 아주 먼 일이었다. 너무 멀어서 도무지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들 스스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알렉스는 어떻게 하면 같은 남자로부터 성적인 욕망과 충동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쪽이었고, 토미는 만사가 피로해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기로 마음먹은 건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어쨌든 워킹 역에 떠도는 소문에는 어느 정도 진위성이 있었던 셈이다.

 스튜어드 별장은 워킹에서 차로 어림잡아 다섯 시간을 달려야하는 곳에 있었다. 철로가 깔려있지 않은 곳이라 기차로는 갈 수가 없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바로 전날까지 둘은 개롯의 레스토랑 구석에 박힌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채 이 문제에 대해 제법 진지한 논의를 주고받았다. 알렉스는 기차로 갈 수 있는 만큼은 갔다가 내려서 도보로 이동하자는 쪽이었고 토미는 결코 차를 이용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어디서 어떻게 차를 장만할 건데. 히치하이킹이라도 할 거야?”

 알렉스가 물었지만 16번 국도엔 히치하이킹을 할 만큼 많은 차가 지나다니지 않았다. 둘 다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마저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었다.

 “차를 훔치지 않는 이상은 우릴 거기까지 태우고 갈 사람을 찾는 것도 드문 일일 걸.”

 “그럼 훔치자.”

 토미가 카드 패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토미를 바라보았다. 토미는 진지하게 스페이드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투 페어.”

 “진심이야?”

 “내가 이겼어.”

 그런 후, 토미가 알렉스를 마주보았다. 흘끗거리기엔 길고 대화를 의도하기엔 짧은 시선이 교환되었다. 건너편에서 한 군인이 시가를 피우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매캐하게 레스토랑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개롯이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 찌그러진 종이 마구 짤랑거렸다.

 “음, 그럼 누가 훔치지?”

 알렉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토미는 자신의 카드 패를 전부 테이블 위로 던졌다.

 “네가.”

 “정말 웃기는데.”

 알렉스가 말했다. 토미의 남은 패는 전부 쓰레기였다. 알렉스는 엎어진 패 위로 자신의 하트10을 던졌다.

 “풀하우스. 유감스럽지만 이건 내가 이겼어.”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스는 문득 이 모든 일이 시시하고, 시시하기 때문에 평화롭고, 평화롭기 때문에 대단하며, 동시에 끔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간밤에 수음을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테이블을 놓고 포커를 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카드만 만지고 있을 거야?”

 “알렉스.”

 “난 지겨워. 토미, 알겠어? 모든 일이 지겹다고.”

 그는 거의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그곳에 토미를 버려둔 채 가게를 박차고 나왔다. 저녁도 아닌데 레스토랑 바깥으로 나와 보긴 처음이었고, 토미를 두고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16번 국도의 반대편을 가로지르고 있을 무렵 누군가 따라붙었다. 알렉스는 돌아보지 않고도 그게 토미의 그림자임을 알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른 낮에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방에서 누군가들이 섹스를 시작했다. 알렉스는 이따금 복도에서 마주치던 옆방의 남자 둘을 떠올렸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토미의 눈치를 보았다. 토미는 시트에 누운 채 도무지 참기 힘든 것을 간신히 참아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겨워.”라고 토미가 중얼거렸는데, 그건 꼭 알렉스를 향한 말처럼 들렸다.

 “뭐라고?”

 알렉스가 되물었다. 토미는 천장을 노려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역겹다고.”

 둘은 숨조차 쉬지 않고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난잡한 난교에 귀를 기울였다. 알렉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손이 온통 흥건했다. 발기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조금도 흥분해있지 않았다.

 “토미,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알렉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토미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은 무언가를 힐난하거나 캐묻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순간, 알렉스는 토미가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토미는 모두 알고 있다.

 

 

 워킹에 머무른 3주 동안 그들 사이에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토미는 워킹을 한 번 떠났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그들은 3주 내내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같은 테이블에서 포커를 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알렉스는 토미가 떠난 일주일 동안 작은 일인용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잠을 잤다. 천장을 보고 두 손을 흉부와 복부 사이에 가지런히 모은 뒤 눈을 감는다. 이따금 숙소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겠지만 모르는 척 한다. 그리고 그것에 성공하면 잠들 수 있다. 꿈조차 없이, 총에 맞은 병사처럼 비척거리는 의식이 무의식의 세계로 엉거주춤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버틸 수 없는 날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아무 곳이나 쏘다녔다. 개롯의 레스토랑을 발견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끝없는 16번 국도의 한복판에 지어진 그 건물은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고, 간판도 아주 낡아서 반은 허물어져 있었다. 그곳이 영업 중이지 않았더라도 알렉스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게는 열려있었다. 문을 열자 달아놓은 종이 마구 짤랑거렸다. 종은 찌그러져서 다소 혼탁한 소리를 냈다.

 가게는 바깥에서 예상하던 것보다 좀 더 크고, 또 예상한 것만큼만 지저분했다. 테이블은 총 열다섯 개였고 바닥은 탁한 파란색 타일로 덮여 있었다. 입구 쪽은 전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한산한 16번 국도가 보였고, 그 날은 날씨가 좋아서 햇빛이 잘 들었다. 먼지가 마구 산란하는 가운데 싸구려 레코드판으로 재즈 음악이 흘렀다. 가게 한가운데엔 작은 바가 있었다. 가게의 주인이 바로 그 너머에서 허리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개롯은 알렉스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군인, 군인, 또 군인이군.”

 그는 툴툴거렸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쁨이 담겨있었다.

 “아무 곳에나 앉으시오.”

 알렉스는 맥주를 주문했는데 개롯이 술 종류는 저녁부터 밤에만 서비스할 수 있는 것이라고 거절했다. 그래서 알렉스는 가장 싼 커피를 시켰다. 씁쓸하고 찝찔한 맛의 아메리카노였다. 향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아주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게에는 알렉스 외에 다른 손님이 없었는데, 그 애매모호한 커피를 마시며 알렉스는 ‘과연’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개롯은 구석에 앉아 혼자 포커를 치고 있었다. 정말 지루한 광경이었다. 알렉스는 커피를 반쯤 남겨놓고 테이블을 옮겼다. 개롯은 그를 끼워주었다.

 알렉스는 포커 초짜였다. 개롯은 서두르지 않았다. 룰을 알려주고 카드 패를 참을성 있게 돌렸다. 알렉스가 룰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 해 자신의 기회를 놓치게 되면 반드시 짚어주었다. 개롯은 게임에 있어선 정직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 역시 게임과 같지.”

 개롯이 말했다.

 “얻거나 잃어서 승리하거나 패하게 되니까.”

 토미가 워킹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알렉스는 아침마다 그곳에서 개롯과 포커를 쳤다. 배팅을 할 때도 있었고 아무 것도 걸지 않고 칠 때도 있었지만 걸어보았자 펜스 단위였다. 정오가 지나면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의 포커 역시 중단되었다. 개롯의 말대로 이곳을 찾는 대다수는 ‘군인, 군인, 또 군인’이었다. 알렉스는 테이블이 꽉 찰 기미가 보이면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레스토랑으로 옮겨간 몇 쌍의 군인들이 밤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잠드는 일은 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알렉스는 그럭저럭 혼자에 적응해나갔다. 그리고 토미가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방세를 함께 지불한 친구가 떠났어요.”

 알렉스는 그것을 말할 때 gone, 이라는 단어를 썼다. 개롯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담하건대 그 빌어먹을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요.”

 그는 덧붙였다.

 “여기선 흔한 일이지. 저런 거대하고 편리한 운송수단을 가진 고장의 인간들은 도통 박혀 있지 못 하고 아무 곳이나 떠돌아다닌다오. 경적소리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언제든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지. 하지만 곧 돌아오게 되어있소.”

 “돌아오게 되어 있다뇨?”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개롯은 패를 뽑으며 대답했다.

 “떠난 사람들은 자신이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게 되어있거든. 아직 잃지도 않았고, 잃을 걱정도 없으니까. 워킹 역으론 끊임없이 사람들이 돌아오지. 자네의 친구 역시 돌아올 테니 두고 보시오. 아마 고향에 있을 여자를 만나러 갔겠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혼한 걸 테고, 돌아온다면 여자가 이미 결혼해버렸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일주일 만에, 토미는 돌아왔다. 알렉스가 눈을 떴을 때, 토미는 벽 쪽에 붙어 있었다. 알렉스는 생각한 것보다 놀라지 않았는데, 어쩌면 개롯의 ‘돌아올 테니 두고 보라’는 말 때문일 지도 몰랐다. 그는 토미를 흔들어 깨웠다. 토미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사납게 얼굴을 찡그렸다.

 “좀 더 재워줘.”

 “언제 왔어?”

 알렉스가 물었다.

 “한밤중에.”

 이불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으며 토미가 대답했다.

 그들은 다음 날 개롯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개롯은 뒤따라 들어온 토미를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날은 셋이서 포커를 쳤다. 토미는 포커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개롯의 레스토랑이 오전에도 점점 분주해지기 시작하자 포커는 둘 만의 일이 되었다. 토미와 알렉스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패를 돌린 후,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킹과 퀸 따위를 보여주며 번갈아 승리하거나 패했다. 토미의 승리가 훨씬 빈번했다. 언젠가부터 알렉스는 패를 받으면 토미의 얼굴부터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이길 만 한 패를 쥐었을 때 미묘하게 왼쪽 눈썹을 찡긋거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알렉스는 이를 이용한 심리전으로 몇 번 이겼고, 자신의 관찰이 유의미하다는 증거를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변명 삼아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토미에 대한 관심을 이어나갔다. 얼마 뒤 알렉스는 더 많은 것을 관찰해낼 수 있었는데, 이를테면 토미는 언제나 커피를 남겼고, 그의 오른쪽 귓불에는 피어싱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가끔 손님 중 하나가 시가를 뻑뻑거릴 때면 가게가 온통 자욱해졌다. 연기 너머에 앉은 토미의 신중한 얼굴은 때때로 신의 불가해한 예언처럼 보였다. 그 때마다 알렉스는 개롯의 말을 상기해보았다. ‘떠난 사람들은 자신이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게 되어있거든. 아직 잃지도 않았고, 잃을 걱정도 없으니까.’ 그러다 촘촘한 토미의 눈꺼풀이 위로 치솟을 때면, 알렉스는 숨을 멈추고 자신의 패만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죄를 저지르다 발각된 사람처럼 심장이 뛰곤 했다. 토미가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하여 돌아온 것인지 해명을 구하고 싶었다. 알렉스는 그 뒤에도 종종 포커에서 졌다.

 그 일은 토미가 돌아온 지 5일이 지난 한밤중에 일어났다. 옆방의 남자들이 그것을 시작한 것이다. 토미는 자고 있었고, 알렉스는 습관처럼 손을 포개어 놓고 천장을 노려보고 있던 중이었다. 벽에서 쿵, 하고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허겁지겁 주고받는 숨소리가 훤히 들렸다. 알렉스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맞잡아 포갠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속삭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티미, 티미, 나를 봐…….” 알렉스는 눈을 감고 역겨운 것들, 축축한 늪과 부패한 가축의 장기, 피가 섞인 토사물 따위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갑자기 그 풍경 위로 자욱한 안개가 덮이더니, 모든 게 온통 흐릿해졌다. 곧이어 그 속에서 유령처럼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알렉스는 그 얼굴이 짓는 신중한 표정, 귓불에 남은 선명한 흉터를 볼 수 있었다. 사실 자욱한 것은 안개가 아니라 담배연기였던 것이다. 풀하우스. 얼굴이 말했다. 알렉스는 눈을 떴다. 토미가 뒤척이며 한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건너편에서 계속 섹스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일어나서 토미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토미는 분명 잠들어 있었는데,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굳이 따지자면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무서울 만큼 공허한 얼굴이었고, 지쳐 있었고,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오, 찰스. 제발, 찰스…….” 알렉스는 갑자기 아주 어릴 적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는 여덟 살이었고, 별장 건너편의 농장에서 사과 두 개를 훔친 후 달려가는 중이었다. 배가 고파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해서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는 처벌받지 못 할 비밀스러운 죄를 소유하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그는 사과를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먹어버렸는데, 죄의식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 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알렉스는 사과 두 알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고 건너편 방에선 두 사내가 동성애를 한다. ‘게임에 있어선 정직해야 한다오.’ 알렉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토미의 눈꺼풀 아래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토미는 분명 잠들어 있었다.

 그 뒤로, 알렉스는 시체처럼 잠들 수가 없게 되었다. 눈을 뜨면 그는 토미의 쪽으로 돌아누워 있거나, 혹은 그 등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가 의도하거나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알렉스는 말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토미도 때때로 돌아누웠고 그럼 알렉스는 잠들지 않고 토미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볼 수 있었다. 볼록하고 창백한 이마, 흔들거리면서도 일직선을 유지하며 떨어지는 콧날, 촘촘하고 새까만 속눈썹과 힘주어 다물린 입술, 턱 끝에 붙은 점, 그리고. 그리고……. 그러다 잠들었다.

 포커는 계속되었다. 둘은 말없이 패를 섞고 돌리고 이기거나 패했다. 무언가를 거는 일은 없었다. 토미는 여전히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이따금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주로 스튜어드 별장에서 여름을 났던 시절에 대해서였다. 깨끗한 개울이 흐르고, 별이 잘 보이며, 다락에는 오리털 이불과 싸구려 잡지 희곡이 굴러다닌다. 그 시절에선 청명하고 아득한 바람 냄새가 났다. 알렉스는 곧 토미에게 그 별장에 대한 모든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보낸 유년시절이야말로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괜찮은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사과를 훔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토미는 패를 들여다보며 아주 가끔, “그래” 혹은 “멋지네”라고 대답하곤 했다. 스튜어드의 별장은 몇 년 전부터 발길이 끊겨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이야기는 늘 마무리되었다. “언젠가는 그곳으로 가자.” 알렉스는 지켜질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그 말을 공허하게 뱉었다. 그러면 토미는, 또 “그래” 혹은 “글쎄”로 이따금 그에 응답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별장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너무 멀어서 도무지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들 스스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위법행위처럼. 그래, 마치 그것처럼.

 그들이 함께한지 2주쯤 지났을 때, 워킹 역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교회에서 나온 남자가 팸플릿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나란히 걷는 군인들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알렉스와 토미도 그것을 받았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문구를 읽은 알렉스가 고개를 들자, 남자는 보란 듯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는 며칠 만에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듣기로는 누군가 두들겨 팬 후 풀숲에 버렸다고 한다. 죽었다는 말도 떠돌았는데 알렉스는 그가 조용한 얼굴로 교회 정원에 서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토미는 팸플릿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접어 방 한쪽에 치워놓았고, 이따금 실없이 혼잣말을 했다.

 “알렉스, 지옥이 뭘까?”

 “글쎄.”

 알렉스가 대답하면 토미는 또 홀로 어떤 것에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난 거기 안 가.”

 팸플릿 사건 이후 토미는 그전까지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던 모든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거리를 걷다 나란히 걷는 군인들을 마주쳤을 때 고개를 들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식이었다. 마치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는 어떤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면, 비로소 나란히 걷고 있는 알렉스를 흘끔 바라본 후,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좁아터진 한 침대에서 잠을 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포커를 쳤다. 알렉스는 토미가 아무것도 모르는 만큼 자신 역시 아는 게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알렉스는 토미를 도무지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령 토미를 별장에 데려갈 수 있다한들 그곳에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포커다. 고작 포커를 치기 위하여 깨끗한 개울이 있고 별이 잘 보이고 오리털 이불과 희곡이 있는 별장으로 간다. 그리고 걷는 것이다. 그곳에는 정말 둘뿐이라 쌍을 이루는 군인도 팸플릿도 마주칠 수가 없다. 그럼 토미 테일러는 어떻게 할까? 그럼에도 알렉스를 흘끔, 바라본 후 거리를 벌릴까. 그를 두렵게 할 존재가 그 무엇도 없는 그곳에서도 그는 과연 거리를 벌릴까.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알렉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어떻게 해야만 좋은 것인가. 그리고 그곳은 분명 한밤중일 것이다. 죄가 유보되거나 은폐되기에 좋은 시간인 것이다.

 “별장에 갈까.”

 불쑥 말한 것은 토미였다. 알렉스는 패를 돌리다 말고 카드를 전부 엎을 뻔했다.

 “뭐라고?”

 “슬슬 떠나자고.”

 토미는 덤덤하게, 마치 당장이라도 실현될 수 있는 것을 늘어놓는 사람처럼 말했다. 알렉스는 그로부터 어떤 신호나 낌새를 알아차리기 위해 애썼지만, 그 어떤 의도도 욕망도 발각할 수 없었다. 알렉스는 토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 하고 뜸을 들였다.

 토미가 되물었다.

 “싫어?”

 “그럼 넌?”

 알렉스가 대답을 회피했다. 토미는 즉답했다.

 “난 지겨워.”

 그는 씹어뱉었다.

 “여기가 지겨워.”

 그들은 이른 저녁 숙소로 돌아왔다. 토미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방 한구석에 박아놓았던 팸플릿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알렉스를 노려보며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h, e, l, l들이 먼지처럼 허공을 날았다. 알렉스는 토미의 분노가 언제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따라잡고 싶어 무엇이든 되짚어 보았으나 곧 그만두었다. 어딘가에서 헐떡거림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미와 알렉스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숙소의 어떤 군인 한 쌍이 뒹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로 다음 순간, 토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작게 우는 신음을 냈다. 알렉스는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토미는 발기해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알렉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렉스는 다리를 벌리고 왼쪽 허벅지에 토미를 앉혔다. 그리고 토미가 그 깊은 분노와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토미는 수음을 받는 내내 결코 알렉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사정을 할 때는 그의 목에 단단히 손을 감았다. 밀어내거나 거리를 벌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알렉스가 손을 씻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토미는 자리에 없었다. 알렉스는 그를 기다렸지만, 한밤이 지나도록 토미가 돌아오지 않아서 이번에야말로 그가 영영 떠나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렉스는 방에서 홀로 수음을 했다. 그리고 잠들었다. 토미는 새벽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돌아왔다. 그는 벽에 바짝 붙어 돌아누웠는데, 알렉스가 일어났을 땐 그를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알렉스는 품에 안긴 토미의 얼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볼록하고 창백한 이마, 흔들거리면서도 일직선을 유지하며 떨어지는 콧날, 촘촘하고 축축한 속눈썹과 힘주어 다물린 입술, 턱 끝에 붙은 점, 그리고. 그리고……. 눈가가 잔뜩 짓물러 있었다. 밤새 울고 왔을 지도 모른다. 울고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미는 어째서 울었을까? 알렉스는, 언젠가처럼 그 얼굴로부터 신의 불가해한 예언을 보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말았고, 그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언은 오지 않았다. 똑같았다. 둘은 그 날 개롯의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 포커를 쳤고, 이번에는 3팬스를 걸었다. 알렉스가 이겼다. 그런 후 그들은 별장에 어떻게 하면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을 심심하게 교환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알렉스는 무엇이든 말해보려고 시도했으나 토미가 너무 일찍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토미는 거의 전투적으로, 증오하다시피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다음 날에도 그들은 포커를 쳤고, 별장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날엔 또다시 수음을 했다. 하지만 일상은 계속되었다. 그런 짓을 세 번 정도 반복한 후에, 토미가 말했다.

 “우리는… 아직은 괜찮아.”

 yet, 을 발음하는 토미의 눈이 절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되새겼다.

 “알겠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했잖아.”

 물론이다. 그들은 성교하지 않았다.

 ‘넌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라.’

 알렉스는 생각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이야.’

 하지만 토미는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문제가 생겼어.”

 토미가 말했다. 알렉스는 대꾸하는 대신 창문을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한낮이었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데, 차를 훔치거나 도로에 서서 엄지를 들어 올려야만 하는데, 토미는 무엇을 알고 싶은 거지? 이제 와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너는 나로부터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 거지? 알렉스가 침묵하자 토미가 눈을 부릅떴다.

 “우린 하나도 괜찮지 않아.”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알렉스가 재빨리 대답했다. 토미는 으르렁거렸다.

 “네가 가게를 박차고 나왔잖아.”

 “그래서?”

 “넌 지금 들리는 소리를 역겹다고 생각하지 않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난 잠든 적이 없으니까.”

 토미는 빌어먹을, 이라고 중얼거렸다.

 “너 때문이야. 전부 네가 잘못했어.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는 갑자기 내게…….”

 “정말 알고 있었어?”

 알렉스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되물었다.

 “넌 알고 있었는데도 이 지경으로 굴었어?”

 “역겹게 굴지 마, 알렉스.”

 “역겹다고!”

 알렉스가 화를 냈다.

 “그래놓고 넌 내 허벅지 위에서 쌌잖아.”

 “입 닥쳐.”

 토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렉스는 계속 지껄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그래놓고 잘도 낮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입을 닦았지. 깨끗한 척 굴지 마, 토미. 너도 알고 있잖아.”

 “지옥에나 떨어져버려.”

 “오, 그럼 내 옆구리엔 너를 껴야겠네.” 

 알렉스가 빈정거렸다.

 “넌 무서워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난 너한테 화내고 있는 거야.”

 “그래, 무서워서 화가 나는 거야.”

 알렉스가 힐난했다.

 “넌 내가 무서운 거야. 그렇지, 토미? 난 다 알고 있어. 모를 수가 없어. 모를 수가 없다고. 너만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워킹에 돌아온 순간부터 우린 이렇게 될 거였어. 빌어먹을 토미, 넌 돌아와서 이주일 내내 나랑 여기 처박혀 있었잖아. 뭘 기대했어? 뭘 기대한 건데?”

 바로 그 다음 순간, 토미가 알렉스에게 달려들었다. 알렉스는 주먹을 맞고 휘청거리다가 반격했다. 그는 토미를 덮쳤다.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둘은 침대 위로 쓰러져 뒹굴었다. 토미가 알렉스의 얼굴을 마구 할퀴자, 알렉스는 그를 깔아뭉갠 채로 주먹을 내질렀다. 토미가 미친 듯이 바둥거렸다. 씨큰거리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토미는 알렉스의 목을 쥐었다. 알렉스가 컥컥거리며 뒤집혔다. 이제 토미가 알렉스의 위에, 알렉스가 토미의 아래에 있었다. 토미는 그대로 그의 숨통을 조였다.

 “네가 끔찍해.”

 토미의 손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토미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손아귀가 느슨해지자 알렉스는 헐떡거리며 토미를 발로 찼다. 토미는 순순히 치워졌다. 알렉스는 거칠게 숨을 고르며 그 위로 올라탔다. 토미는 눈을 깜빡이다 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길고 마른 손가락 사이로 작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알렉스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고, 그건 고통에 가까웠다. 그는 토미의 목을 쥐다 말고 그대로 감싼 채 엎어졌다.

 “제기랄.”

 알렉스가 씹어뱉으며 토미의 손목을 쥐었다. 그 아래에는 축축한 얼굴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곳에 깊게 입을 맞췄다. 토미가 나지막이 비명 같은 걸 질렀다. 그러나 결코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내는 법이 없었다.

 알렉스는 몇 번 더 토미의 축축한 눈 위에 입을 맞췄다. 둘은 다시 한 번 침대 위를 뒹굴었다. 이번에는 몸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때때로 몸싸움처럼 보였다. 그들은 축축해져서 비빌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비비며 파고들었다. 정신없이 서로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끝까지 가는 데는 실패했다. 삽입은 어려운 일이었다. 

 토미는 울었다. 많이 울었다. 알렉스는 방 곳곳에 흩날리던 무수한 h와 e와 l을 떠올렸다. 그는 거기서 l을 빌려왔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열해보았다.

 “잘 들어 봐, 토미.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알렉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이걸 이해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토미는 훌쩍거리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토미는… 마치 신의 불가해한 예언을 보는 것 같은, 그래서 앞으로 어떤 비극이 벌어지고 말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의 눈 같은 걸 하고 있었다. 토미가 알렉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 내가 워킹을 떠났던 지난 일주일 동안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알아?”

 “아니.”

 “나는 고향에 있는 내 애인을 만나고 왔어.”

 토미가 말했다.

 “그리고 난 우리에 대해 기대한 적 없어.”

 끔찍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토미가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횡설수설하며 훌쩍였다.

 “여길 나가야겠어. 미쳐버릴 것 같아. 남자랑 남자가 사랑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잖아. 여긴 현실이 아니야. 취해버리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알렉스가 두 팔을 벌렸지만 이번에 토미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 그리고 그 몸짓은 분명하게 알렉스의 무언가를 관통했다. 막을 수 없는 구멍이 생겨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토미의 얼굴, 그를 밀어낸 자신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은 것처럼 깜짝 놀라 굳어 있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모조리 무너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재건되었다. 그곳에선 그 어떤 사랑도 불법이 아니었다.

 “토미, 이러지 마.”

 알렉스가 간절하게 말했다.

 “우리는 괜찮을 거야.”

 “제발 떠나자.”

 토미가 애원했다.

 “난 더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우린 차가 없어.”

 “훔치면 돼.”

 토미는 눈가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우린 이미 범법자야.”

 그러니까 토미도 마침내 인정한 셈이었다.

 그들은 숙소 바깥으로 나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오래된 주차장이 있었는데, 둘은 레스토랑과 숙소를 오며가며 종종 그곳을 눈으로 둘러보곤 했다. 그리고 기억하건데 그 주차장 한쪽에는 내내 처박힌 채 아무도 몰 것 같지 않은 낡은 고물 트럭이 한 대 버려져 있었다. 알렉스는 창문을 깬 뒤 문을 열어서 계기판을 확인해보았는데, 놀랍게도 신은 그 트럭에 키와 몇 갤런 정도의 기름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알렉스는 포커에는 초짜였지만 운전을 할 줄 알았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올라타.”

 알렉스가 말했다.

 “가는 길을 알아?”

 토미가 물었다.

 “아니.”

 알렉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곳의 도로는 하나뿐이잖아.”

 둘은 트럭에 앉아 숙소의 모든 사람들이 레스토랑으로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노을이 지면서 주차장 팬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까마귀가 그 위에 앉아 몇 번이고 울었다. 그리고… 저녁이 끝났다. 까마귀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알렉스는 시동을 걸었다. 몇 번 실패했지만 마침내 걸렸다. 그는 주의 깊게 핸들을 꺾어서, 찔끔거리며 후진을 두어 번 하고, 입구에서 한 번 긁힌 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16번국도 입구에 진입했을 때, 도로에 외따로 세워진 개롯의 레스토랑에서는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둘은 술과 접시를 주고받는 왁자한 군인들의 무리를 시트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개롯은 바에 있는 것인지 보이질 않았다. 알렉스는 페달을 밟아 그곳을 벗어났다. 레스토랑은 빠르게 멀어졌다.

 트럭은 탈탈거리며 한산한 16번 국도를 마구 달렸다. 깨진 운전석 창문 안으로 바람이 자꾸만 들어왔다. 토미는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가운데 산등성이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공기가 점점 더 서늘해지고 있었다. 숲을 지날 무렵, 토미가 물었다.

 “너는 무섭지 않아?”

 “넌?”

 “무섭지 않아.”

 토미가 대답했다. 알렉스는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었는데, 고장이 났는지 작동하질 않았다. 알렉스는 핸들을 쥔 채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 모든 게 무서워.”

 한밤의 숲은 지독하게 새까맣고 무서웠다. 그리고 정말 추웠다. 바람이 너무 서늘해서 둘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이마를 칠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다. 긴장한 알렉스가 너무 세게 밟고 있었다. 풍경이 뭉개져서 사방이 온통 흐지부지 칠해진 까만 도화지처럼 보였다. 토미는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알렉스가 토미를 흘끔거렸다. 그는 중얼거리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so this is the part where we say goodbye…….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야.)”

 토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알렉스는 요란한 바람소리 속에서도 뚜렷하게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I promise I'll try to make it stick this time. (이번엔 정말 잘 이겨내 볼게.)”

 “누구 곡이야?”

 “original.”

 토미가 대답했다.

 

 So this is the part where we say goodbye.
 이제 우리 헤어질 시간이야
 I promise I'll try to make it stick this time.
 이번엔 정말 잘 이겨내 볼게
 I always loved breaking up with you cause
 난 늘 너와 헤어지는 걸 좋아 했어
 The more bitter it was the better the making up with you was.
 마음이 아플수록 더 화해하고 싶었지
 And I think we can agree,
 그래, 이제 우리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
 On the following things
 왜냐하면


 그것은 토미 자신에 대한 곡이었다.


 I am an asshole,
 난 쓰레기야
 And you're kinda needy.
 넌 그저 사랑을 원했고
 We said it was casual,
 아무 문제없어 보였지
 And you pretended to believe me.
 넌 나를 믿는 척 했어


 16번 국도는 끝이 없었고 숲은 연거푸 이어졌다. 알렉스의 손 떨림이 잦아들었다. 토미의 목소리가 바람소리를 추월했다. 트럭은 아까보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하나가 깜빡거리다 나가버렸다. 모든 게 나빠질 지도 몰랐지만 토미의 노래는 듣기 괜찮았다. 객관적으로, 그런 느낌이었다. 토미는 자신이 고향에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걸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만나고 왔던 애인, 그러니까 토미가 십대 시절 사랑했던 여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꿈속에서도 그린 것처럼 늘어놓았고, 그건 알렉스가 스튜어드 별장의 시절을 늘어놓을 때와 꼭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토미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절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토미는 그녀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해왔다고 고백했다. 이어서 토미는 워킹을 떠났던 일주일 동안 고향에 그 모든 것을 두고 왔다고 털어놓았다. 사랑은 늘 증오와 같았어, 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죽여 버리고 싶었고 동시에 용서하고 싶었지. 알렉스는 토미의 말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완성된 곡이 아니야.”

 토미는 자신의 노래가 뒤죽박죽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뒤의 가사를 쓴다면, 분명 너에 대해 말하게 되겠지…….”

 그 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알렉스를 흥분하게 했다.

 토미는 그 뒤로는 별다른 말없이 미완성의 곡을 완성한 만큼만 불렀다. I only love you when you're leaving… 곡의 말미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only. 난 네가 나를 떠날 때만 사랑했어.

 

 둘은 밤의 정점에 샛길로 빠져서 트럭을 세웠다. 눈을 좀 붙일 필요가 있던 것이다. 도로가 너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풀벌레들이 울었고 먼 곳에서 맹금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잦아들자 흙냄새가 사방에서 끓어올랐다. 알렉스는 생각했다. 아침이 되면, 낮이 오면, 언덕을 넘어서 산으로, 산을 지나서 별장으로 가자. 그리고 거기서 삽입을 해보자. 거기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두려워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세상에는 그런 곳도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잠이 들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개롯이, 그의 옆 좌석에는 한 소녀가 앉아 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토미가 말한 대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토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면사포를 쓰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토미는 그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베팅을 해.”

 그녀가 말했다.

 “어… 6펜스?”

 알렉스가 걸었다. 소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는 토미를 걸 거야.”

 “그리고 난 레스토랑을 걸겠소.”

 개롯이 대답했다.

 그들은 포커를 쳤다. 커피가 있었지만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곳은 개롯의 레스토랑이었는데, 어쩐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통유리로 희끄무레한 빛이 드문드문 쏟아지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실링팬이 천천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한 때 토미의 것이었고 동시에 토미를 소유했던 소녀는 결혼식 장갑을 낀 채로 패를 던졌다.

 “트리플.”

 “한 방 먹었군.”

 개롯이 낄낄거렸다.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웃을 때가 아닌데요.”

 “오, 그럼. 웃을 때가 아니지.”

 개롯이 중얼거렸다.

 “난 항상 진지했다오.”

 그들은 계속 쳤고 카드를 뽑았고 패를 돌렸다. 첫 판은 알렉스가 이겼는데, 소녀는 알렉스에게 무릎을 꿇고 토미를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난 모든 걸 잃었고 토미마저 없으면 난 죽어버리고 말 거야. 그러나 어쨌든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판은 개롯이 이겼다.

 “점점 흥미진진해지는군.”

 개롯이 말했다.

 “내가 이기면 더 흥미진진해지는 셈이지.”

 소녀가 대답했다.

 세 번째 판이 시작되기 전에, 알렉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토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트럭에서 토미의 실루엣이 창문의 밤하늘을 등진 채 선명하게 드러났다. 알렉스는 시트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I'm sorry I hurt you,
 너에게 상처 줘서 미안해
 And for pissing you off and,
 널 보내려고 그랬어……

 
 뒤척거리는 소리에 토미가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I'm sorry for not hurting you,
 너에게 조금 더 자주
 A little more often.
 상처주지 않아 미안해…

 

 “토미.”

 알렉스가 손을 뻗었을 때, 토미는 고개를 숙여 뺨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결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의 불가해한 예언이 있다면, 이해해야만 하는 순간이 여기 있었다. 알렉스는 이해하고자 했다. 토미가 그렇게 하자고 방금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했다. 이번엔 성공했고, 그것은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그러나 토미의 두려움은 거기서 다 끝났다. 알렉스는 포커를 떠올렸다. 무엇도 걸지 않았음에도 이기거나 졌던 토미와의 포커를. ‘게임은 인생과 같다오. 얻거나 잃어서 승리하거나 패하게 되니까.’

 ‘하지만 인생은 게임이 아니야.’ 알렉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사과 두 알을 훔친 후 어떻게 되었는지가 떠올랐다. 그는 도둑질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서 사과를 전부 먹어 버렸고, 그 과정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배가 너무 찼기 때문이었다. 죄의식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행위에 대한 만족감과 행복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내가 강탈하였다, 혹은, 영영 소유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싱거워지고 말았다. 토미가 아래에서 헐떡거리며 알렉스를 껴안았다. 뜨거운 두 뺨이 알렉스의 서늘한 목덜미에 닿았을 때, 마음속으로 화염이 끓어올랐다. 알렉스는 강렬한 죄의식을 느꼈다. 하지만 괜찮다. 아주 한밤중이므로 그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는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⑴ 알렉스는 토미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 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토미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알렉스는 토미의 어떤 것이 재건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재건에 알렉스가 일조하고 있음을 직감했으나,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건이 항상 좋은 쪽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토미는 다만 산산이 부서졌다가 ‘무엇으로든’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입을 맞추면서 속으로 물어보았다. 토미, 그곳에도 사랑이 불법이야? 토미가 대답할 수 있을 리는 물론 만무했다.

 둘은 끌어안고 잠들었고, 동이 틀 무렵 16번 국도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 그들은 더 이상 스튜어드 별장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건 너무 멀리 있었음에도 간밤에 이미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토미는 밤새 바로 그 별장을 재건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토미의 마음속으로 깨끗한 개울이 흐르고, 별이 잘 보이며, 오리털 이불과 싸구려 잡지 희곡이 굴러다닌다… 그리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 토미는 그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절을 갱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차역에서 헤어졌다. 떠나기 전에 토미가 플랫폼에서 알렉스를 끌어안았다. 알렉스가 속삭였다.

 “우리는 지옥에 갈 거야.”

 “그래, 고물 트럭을 훔쳤으니까.”

 토미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제 돌려놨으니 아무 상관없어.”

 기차가 경적을 울렸다. 토미는 천천히 떨어졌는데, 그 과정에 알렉스는 토미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묻혔다’고 생각했다. 그건 토미가 원해서 혹은 알렉스가 원해서 옮겨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달리 그렇게밖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토미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제 알렉스의 일부가 된 셈이었다. 알렉스는 언젠가 토미가 자신을 멀리 밀쳐냄으로써 관통시킨 구멍이 단단히 틀어 막혔음을 알 수 있었다. 방 곳곳에 흩날리던 무수한 h와 e와 l속에서 다시금 배열된 단어가 떠올랐다. 알렉스는 물러나는 토미를 붙잡아 귓가에 그 문장을 쏟아 넣었다. 흉터가 분명하게 남아있는 토미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토미는 입을 맞추는 대신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기차가 출발할 때, 알렉스는 머릿속의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소녀와 개롯은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거기서 마지막 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토미는 돌아올 거야.”

 소녀가 심술궂게 웃었다.

 “그리고 넌 이 게임에서 이겨도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 없어.”

 “이제 아무 상관없어.”

 알렉스가 대답했다.

 “정말 아무 상관없어.”

 기차가 멀어지는 가운데, 알렉스는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패를 던진다. 개롯이 대신 소리쳐준다. 소녀가 퇴장하고, 연기가 깨끗하게 걷힌다. 개롯의 레스토랑은 이제 알렉스의 것이고 통유리로는 맑은 햇살이 쏟아진다. 알렉스는 개롯의 레스토랑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토미를 볼 수 있다. 자, 이제 끝났다. 알렉스는 모든 게임에서 승리한 것이다. 

 알렉스는 손을 흔드는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묻는다. 풀하우스, 라고 알렉스는 중얼거린다. 풀하우스. 토미, 그리고 사랑해. 너를 사랑해. 그리고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 ■

 

⑴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 김승옥, 무진기행 中

 

토미가 부른 곡은 Asshole (러덜리스 soundtrack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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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태고의 밤»
2차/old 2019. 10. 24. 19:10

 인어의 말

 알렉스가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일자형 수조에 갇혀 있었고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항구는 인어를 잡아왔다는 소문에 줄줄이 모여든 사람들로 빽빽했다. 알렉스는 인어보다는 사냥꾼이라는 남자가 먼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까치발을 들어도 인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저리 좀 비켜 봐요. 몸을 비집어 넣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다가 철퍽 엎어졌다. 군집의 행렬은 끝나있었고 고개를 들자 천막을 씌운 거대한 수조가 시선 위로 솟구쳐 있었다. 수조를 지키던 무뚝뚝한 남자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알렉스는 남자의 가슴에 매달린 목걸이를 보았다. 조개처럼 보였으나 좀 더 편평하고 납작했다. 빛이 바랐지만 아름다웠다.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조심하렴.”

 남자가 말했다. 그 순간, 천막 너머의 수조에서 탕탕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알렉스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안에서부터 자그맣게 속삭임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수중에 응집되어 기포와 함께 희미해진 발음이었다.  그래도 가까이 서있던 남자와 알렉스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그것은 말하고 있었다.

 ‘죽이고 싶어.’

 ‘죽이고 싶어.’

 ‘나를 풀어준다면.’

 ‘너는 죽이지 않을게.’

 “신경 쓰지 마라.” 

 남자는 냉랭하게 대꾸하며 알렉스를 내려다봤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수조에 갇혀있고 알렉스는 그것을 도울 생각이 없었다. 조금도 없었다. 그보다, 저 안에 든 저게 정말 인어일까?

 “정말 죽이려 들면 어쩌죠? 제가 듣기론 인어들은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다고 하던데요.”

 탕. 수조가 덜컹거리면서 좌우로 흔들렸다. 안에서 작게 쇠사슬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응수하듯 수조를 주먹으로 쿵 내리쳤다.

 “인어의 말은 믿지 마라.”

 남자는 경고하듯 씹어뱉었다.

 “그것들은 전부 거짓말만 한단다.”

 “당신이 저걸 잡아온 사냥꾼인가요?”

 알렉스가 물었다.

 “그래.”

 “기분이 어때요?”

 남자는 대답했다.

 “실망스럽구나.”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죠?”

 “내가 찾던 게 아니었어.”

 알렉스는 수조를 담은 수레를 끌고 상인의 무리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남자의 어깨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실망스럽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바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찾던 것은 아니었다. 이름답지 않은 인어기 때문일까? 그는 무엇을 찾았던 걸까?

 경매가 시작되자 구경꾼이 몰렸다. 알렉스는 인파를 헤집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대신 수조를 실었던 수레를 밟고 올라가기로 했다. 남자는 여전히 수조 옆에 있었다. 보물을 소개하는 보석상보단 장례식 첫날을 맞이한 상주의 표정을 하고. 경매 주최가 몇 가지를 과장되게 떠든 후 남자를 돌아보자, 그는 수조를 덮은 덮개의 끝과 끝을 쥐곤 한 번에 벗겨냈다. 그 순간 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조가 크게 흔들렸다. 수조에 반사된 빛 때문에 모두가 움츠렸다. 알렉스는 실낱같은 눈을 뜨고 몸을 곤두세웠다. 그는 그 자리에 서있던 구경꾼 중 가장 처음으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남자였고 지느러미와 양손에 무거운 사슬을 차고 있었다. 어둠속에 잠겨있다 말고 느닷없이 빛에 노출된 사람의 표정 같은 것을 하고, 경멸스럽게 수조 옆을 지키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물이 찰랑거려서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부드럽게 유영했다. 지상의 성질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속도로 상하좌우, 천천히 퍼졌다가 하나도 뭉쳐지면서. 그리고 그것이 돌아보았다. 시선이 사격되었다. 보이지 않는 화살이 구경꾼들을 제치고 곧장 어딘가로 와박혔다. 그것은, 수레를 밟고 올라간 열여덟 살짜리 소년 알렉스를 철저하게, 가차 없이, 무자비하게 관통했다. 알렉스는 이상한 고통을 느꼈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내려앉은 심장이 막 건져올려진 생선마냥 토막토막 펄떡거렸다. 관념적인 고통이었다. 그것이 알렉스를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알렉스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고통은 깔끔하게 뽑혀나가긴 커녕 대신 선명한 상처로 남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한 공격이 있었다. 알렉스는 가슴 언저리를 괜히 더듬거렸다. 그런 주제에 고개를 돌린 그것으로부터 눈을 떼지도 못 했다. 자기도 모르게 죽일 거야, 라고 읊조리게 되었다. 저것은, 저것은, 무엇이든 죽이고 말 거야. 중얼거린 후 그는 생각했다. 저것은, 저것은, 아름다운 촉을 가지고 있으니까.

 알렉스는 그것에게 무가치한 존재거나 혹은 흥미 밖의 존재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내리깐 눈동자 위로 허연 물그림자가 져있었다. 알렉스는 바랐다. 가장 높은 고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지상의 존재인 자신을, 저렇게도, 저렇게도 어릴 줄이야… 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경매도 금방 끝나고 말았다. 인어는 마을 제일의 부호에게 팔렸다. 누군가 액수를 더 부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전례 없는 가격이었다. 수도의 부르주아들이 와도 그만큼은 부르지 못 했을 테였다. 그가 마을의 운하사업을 맡은 후 거래처와 결탁해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인어를 사들이고도 휘청거리지 않는다면 정말일 것 같았다. 인어는 그렇게 알렉스에게 화살 하나를 날래게 박아놓고, 책임지지 못 할 상처를 남겨놓고, 부호의 집으로 이송되었다. 멀어지는 수조를 보며 알렉스는 다시 한 번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다. 그곳엔 그가 박아놓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상한 촉이 박혀 있었다.

 

 운하사업

 알렉스가 살고 있는 공간은 앞으로 바다를, 뒤로 산맥을 등진 작은 시골 어촌이었다. 그러나 지방자치를 맡던 시장이 임기를 마치고 재산을 정리해 내려온 후 급하게 재개발 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인어를 사들인 부호였다. 그는 이 마을을 관광지로 유치시키고 싶어 했다. 대중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안다고 유세를 내걸었다. 이 어촌이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슬로건을 사방에 붙여놓았다. 생선 비린내와 작살에 지친 주민들이 손을 벌려 환영했다. 운하사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는 산맥 어귀에서부터 바다까지 이어지는 인공 수로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비용은 고사하고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는지 계획이 도중에 수정되었다. 그는 운하 사업의 규모를 반으로 줄이고, 대신 최초 계획으로 얻어낸 예산의 4할을 그대로 삼켰다. 그 돈이 없었다면 인어를 살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굉장한 액수였다. 그는 운하 사업을 더욱 축소하기 위해 건설을 맡은 거래처와 결탁해 뇌물을 더 끌어들였다. 사업은 더 줄어들었다. 이제 인부들은 운하가 아닌 연못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신전처럼 지어진 부호의 집을 중심으로 층층이 내려다보이는 집 마당마다 거대한 구덩이를 팠다. 부호의 궁전에서 그곳을 내려다보면, 거대하고 둥그런 접시 같은 구덩이가 순차적으로 고도를 낮춰가며 계단처럼 이어졌다. 거기에 물을 채우고 물고기를 기를 거라고 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수로를 개방해서 부호의 집 수영장에서부터 물을 연못과 연못으로 이어 보낼 계획이었다. 그림만 생각하자면 근사한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그렇게 사업의 맥을 망치지 않고도 돈을 챙겨서, 그 돈으로 인어를 샀다.

 그는 인어를 위해 자신의 수영장을 확장시켜서, 마치 테라스처럼 꾸며놓았다. 그리고 그 위를 단단한 철망으로 씌웠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거대한 새장 혹은 흉물스러운 돔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바다의 존재가 살고 있었다. 갇혀 있었다.

 알렉스는 자전거를 타고 저녁마다 그 근처를 지나쳤다. 운이 좋으면 내리막을 내려가는 동안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깊고 어두컴컴한 바닷속, 판과 판이 갈라진 지구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져 올라오는 것만 같은, 누군가의 수렁을 닮은, 고요하고 음울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아름답기보다 끔찍했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유독한 목소리가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알렉스의 서늘한 가슴으로 끊임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분명히 꿰뚫렸던 가슴 언저리를 휑하니 스치고 있었다. 그것이 멈추지 않고 노래하고 있었다.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인간은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파괴할 수만 있어

 너를 죽일 거야, 라고 언젠가는 그렇게 말했었다.

 

 Tommy

 유난히 춥고 어두컴컴한 날 보름달이 떴다. 차가운 공기는 금속과 날카롭게 벼려진 것들, 섬세하고 유려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추운 날엔 유독 달이 하얗고 서늘하게만 보였다. 알렉스는 내리막길을 위해 자전거를 끌고 자꾸만 높은 곳으로 향했다. 운하 사업이 이뤄지고 있는 집 곳곳에 거대한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밟을 때마다 우드득, 돌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알렉스는 부호의 새장 근처에서 비로소 멈추어 섰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선 달빛에 부서지는 밤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귀를 기울였지만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정도로, 고요했다. 그 때,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큰 진동이 일었다. 쾅! 알렉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전거를 내던지고 부호의 새장으로 달음박질했다. 철옹성 같은 철제 돔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소리가 들렸다. 쾅! 알렉스는 부호의 저택을 빙 둘러싸고 있는 정원목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엎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쾅! 알렉스는 숨을 고르며 발을 끌고 기다시피 돔 앞으로 기어갔다.

 그곳에는 인어가 있었다.

 바짝 돔 앞에 몸을 붙인 채, 지그재그로 얽힌 철망을 붙잡고 죽일 듯이 알렉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것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노여움과 두려움, 힐난과 그리움이 혼재한 눈동자는 달빛 속에서 녹색도 파란색도 아닌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물을 강하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의 시선이 비로소 그것의 얼굴 너머, 허리 아래부턴 도무지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지느러미는 은빛이었고 방금 전까지 언덕에서 내려다보던 밤바다 위의 달을 꼭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달빛을 받아 도무지 달, 혹은 빛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의 것처럼 반짝일 때, 알렉스의 눈으로 물이 튀겼다.

 “윽, 하지 마.”

 알렉스가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 몰랐으므로 중얼거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행동을 멈추고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알렉스는 중얼거린 게 아니라 말한 것이 되었다.

 “왜 왔어?”

 인어가 딱딱거렸다. 알렉스는 물기를 닦아내며 돔 앞에 바싹 붙었다.

 “소리가 나서.”

 “날 도와줄 거야?”

 “아니.”

 알렉스가 입술을 찡긋거렸다.

 “그런 짓 했다간 내 목이 날아가. 널 배상할 돈이 없거든. 그리고 설령 시도했어도 힘들었을 거야.”

 “왜?”

 “이거.”

 알렉스가 둥글게 얼기설기 얽힌 돔을 가리켰다.

 “강철이거든. 그냥 강철도 아니고 아주 특수한 강철이라고, 지상에서 단단한 모든 걸 녹여 만든 거라고 네 주인이 그랬어.”

 “난 주인이 없어.”

 “한 달 전에 생겼어.”

 알렉스는 그렇게 말해놓고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분하다니, 무엇을? 그는 빈털터리 고아였고 신문사의 다락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인어를 가질 수 있는 자본 따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눈앞의 인어를 보면 재물을 마주한 것처럼 탐이 났다. 재물일 수 없었으나 재물로 취급되고 있는 존재를. 가지고 싶었다.

 “인어는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오, 나도 알아.”

 알렉스는 기묘한 허밍 음을 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인간은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인어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알렉스는 흘끔, 그의 눈치를 보며 노래를 중단했다.

 “네가 매일 부르잖아. 아니야?”

 “맞아.”

 “앞부분은 까먹었어, 미안.”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인어가 말했다.

 “그 뒤도 알아?”

 “알아.”

 알렉스는 어설프게 노래를 불렀다.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파괴할 수만 있어……. 인어는 아까보다 누그러진 기색으로 돔에서 천천히 떨어져 수영장 바닥에 얼굴을 뉘였다.

 “너 정말 노래 못 부른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래.”

 알렉스가 항변했다.

 “그런 걸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어.”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조금?”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배우지 않아도 상관없어.”

 “왜?”

 “그런 일들이 많았으니까.”

 알렉스가 대답했다.

 “그리고 배운다고 해도 잘해내진 못 할 거야.”

 “너 인어한테 노래를 배우면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할 수 있게 된다는 거 알아?”

 인어가 천천히 물에서 반쯤 빠져나왔다. 지느러미를 걸친 채 알렉스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알렉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들어본 적 없는데.”

 “나처럼 부를 수 있어.”

 인어가 속삭였다.

 “약속을 하자. 매일 밤마다 여기로 와줘. 나랑 대화를 하면 노래를 가르쳐줄게.”

 “무슨 대화?”

 “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줘.”

 인어는 눈을 깜빡였다. 아주 슬퍼보였다.

 “평생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알고 싶어…….”

 “좋아.”

 알렉스는 약속했다.

 “매일 올게.”

 “그래, 너 잊지 마.”

 “알렉스야.”

 알렉스가 인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어는 한참동안 답이 없었다. 파도소리와 함께 희미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짠 내가 났다. 마침내 인어가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수영장에 온몸을 천천히 담그며 중얼거렸다.

 “토미.”

 인어의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내 이름은 토미야.”

 그렇게 알렉스는 인어의 이름을 획득하게 되었다.

 

 Alex

 그는 원래 고아가 아니었다. 모친이 알렉스를 출산하자마자 죽긴 했지만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여덟 살 때까지 알렉스의 꿈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것이었다. 고전문학에 줄곧 등장한 거대한 참치를 잡는 꿈을 좋은 꿈이라고 여겼다. 그런 꿈을 꾼 날 아버지에게 달려가면 길몽이라며 동전을 주었다. 알렉스는 꿈을 판값으로 사탕을 사먹거나 과자를 집어먹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렉스가 열 살에 여느 때처럼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시체조차 건질 수 없었다. 뱃사람에게는 진부한 죽음이었다. 그것을 언제나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굉장히 슬펐다. 알렉스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은행원들의 방문에 비로소 문을 열었다. 신탁계좌를 만들 거란다. 그들은 설명했다. 네가 성인이 되면 작은 돈이긴 하지만 네 아버지 재산을 모두 돌려줄 거야. 알렉스는 곧 기운을 차렸다. 그가 집안에 틀어박힌 채 맞서 싸워온 건 아버지의 부고로 인한 슬픔이 아닌 그 부재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활의 유지와 자립에 대한 걱정이 신탁계좌라는 단어 아래에 잘 정돈되었다. 알렉스는 추모를 그만두고 밖으로 나와 어디에나 취직했다. 빵집에도 취직했고 꽃집에도 취직했고 창고에도 취직했고 교회에도 취직했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마을의 조그만 신문사에 취직해서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날랐다. 마을 가장 높은 곳-부호의 집에서부터 시작해 차례로 내려가면서 페달을 밟고 신문을 솜씨 좋게 집집마다 던져 넣는 일은 보람도 무엇도 없었지만 알렉스는 그 일을 좋아했다. 부호의 집 앞을 어슬렁거릴 수 있는 적당한 핑계거리가 생긴 까닭이었다. 아침이던 밤이던 간에 신문사 로고가 붙은 자전거 하나만 있으면 그럴싸한 이유를 댈 수 있었다.

 토미와의 첫 대면 이후, 알렉스는 약속대로 매일 돔 앞까지 왔다. 밤마다 걸어서 풀숲을 헤치고 왔다. 토미는 언제나 그 소리에 맞춰 지느러미를 움직여 넓고 깊은 수영장의 끝에서부터 끝으로 쏜살같이 헤엄쳐왔다. 첨벙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알렉스의 가슴이 부풀었다. 신비하고 존귀한 존재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물소리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토미는 알렉스의 혓바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여겨보면서 발음과 음의 고도를 가르쳤다. 높은 음을 어떻게 뱉고 낮은 음을 어떻게 긁어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그 뒤는 힘주지 마.”

 “……불태울 수만 있어.”

 “응, 그렇게.”

 토미는 눈을 깜빡이며 알렉스의 얼굴과 떨리는 입천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입을 다물고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너 정말 아름답구나.”

 토미는 그것을 역겨운 말처럼 대했다.

 “매일 들어. 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니야.”

 “누구에게?”

 “날 산 남자에게.”

 토미는 수영장 끄트머리에 세워진 작은 의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앉아서 매일 그 소리를 해.”

 “그럼 다른 말을 할게.” 

 알렉스는 고민하다가 진중하게 속삭였다.

 “넌… 달 같아.”

 “어떤 달?”

 “보름 달.” 

 그러자 토미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를 응시했다.

 “너 인어를 알아?”

 “음, 아니.”

 알렉스는 다소 멍청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으로 대답했다.

 “네가 처음이야.”

 “모든 인어는 보름달을 좋아해.”

 “왜?”

 “인간이 될 수 있거든.” 

 알렉스는 놀랐다.

 “거짓말.”

 “딱 하루야. 딱 그날 밤이야.”

 “그럼…….”

 알렉스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더듬거렸다.

 “그럼 왜 그 날엔 계속 인어였는데?”

 “여긴 바다가 아니잖아.”

 토미가 대답했다.

 “바다가 아닌 곳에 사는 인어가 어떻게 인어라고 할 수 있어?”

 토미의 눈은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이제 인간도 인어도 아닌 존재가 된 거야.”

 알렉스는 토미의 고통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는 다소 방어적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이곳에 올게.”

 “그건 약속한 거잖아.”

 토미의 지느러미가 물속에서 달빛을 받아 느릿하게 반짝였다.

 “내가 노래를 가르쳐줬으니 이제 마저 약속을 지킬 차례야.”

 “엄.”

 알렉스는 뜸을 들였다.

 “네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할지 모르겠어. 그냥 마을 이야기면 돼?”

 “글쎄.”

 토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네가 알아서 해.”

 “음.”

 알렉스는 이야기를 고민해보았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처음에 그는 지리 이야기를 했다. 산을 등지고 바다에 맞서는 작은 고장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이 고장에서 가장 큰 집의 이야기가 나올 땐 토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시한 이야기라며 끝을 흐렸다.

 “음, 물론 너도 잘 알겠지만. 위넌트는 제일 부자고.”

 “왜 그렇게 돈이 많은데?”

 “어… 운하산업 때문에?”

 알렉스는 토미와 마주보던 제 몸을 한쪽으로 비켜 세우고 흉물스럽게 층층이 늘어진 구덩이들을 보여주었다. 구덩이의 나열은 해변의 작은 집 마당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끝났다. 밤이라 잘 보일지 의문이었다. 구덩이는 어둠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밤 속에서 포착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으니. 그러나 토미는 철창을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수영장 아래로 펼쳐진 그 풍경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포착하려 애쓰는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공간을 꿰뚫었다.

 “사람들은 위넌트가 돈을 꿍쳤다고 하더라.”

 알렉스가 구멍 뚫린 풍경 곳곳을 훑어보며 바람에 눈을 찡그렸다.

 “저걸 하면서 엄청 돈을 벌어서 원래 부호였지만 이제는 엄청난 부호가 되었대.”

 “너희 집은 어딘데?”

 토미가 속삭였다.

 “너희 집 앞에도 저런 게 있어?”

 “음, 아니.”

 알렉스는 솔직히 대답했다.

 “난 이제 집이 없어.”

 “왜?”

 “부모가 없거든.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돈은 전부 은행 신탁계좌에 있지. 그것도 몇 푼 되는 건 아니지만. 어머니는 날 낳다가 죽었는데, 아버지도 대충 내가… 아마 아홉 살쯤이었을 거야. 아마도. 사실 잘 기억 안 나. 여하튼 배를 타고 생선을 잡는 사람이었는데, 뻔하지만 배를 타다가 죽었어. 누군가 인어가 잡아먹었을 거라고 하더라.”

 알렉스는 마지막 말을 뱉어놓고 후회했다. 그러나 토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것이 알렉스를 두렵게 했다.

 “토미.” 

 “말해.”

 “사람을 먹어본 적 있어?”

 그러자 토미가 매섭게 알렉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고요하게 알렉스를 응시했다. 맹수의 그것처럼…… 알렉스는 엉거주춤 자세를 흐트러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미안.”

 “알면 됐어.”

 토미는 다시 물로 되돌아갔다. 지느러미를 박차고 수영장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빠르게 왕복하고 돌아왔다. 알렉스는 넋이 나간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이지 그가 헤엄을 칠 때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토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이곳에서 나가야만 했다. 이런 조그만 곳에 갇혀있으면 안 됐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가 정말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알렉스는…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남겨지는 걸까? 인어가 없는 이 고장에 그가 남아있을 이유가 대체 뭐가 있을까?

 “알렉스.”

 “응?”

 토미는 물속에서 고개를 들고 천천히 눈을 떴다. 시선은 알렉스를 향해있었지만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나를 꺼내줘.”

 알렉스가 말을 흐렸다.

 “내가 할 수 없는 거 알잖아…….”

 토미는 눈을 감았다.

 “그래, 알아.”

 그는 중얼거렸다.

 “잘 알고 있어.”

 토미는 잠수했고 오랫동안 솟아오르지 않았다. 알렉스는 쭈그려 앉은 채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토미는 올라오지 않았다. 기포도 없고 숨이 담긴 물방울도 없었다. 물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존재는 단순히 머리를 집어넣었을 뿐인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 한참을 외롭게 기다리던 알렉스는 결국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리막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풀숲으로 들어섰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등 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첨벙, 첨벙, 거리면서 수영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좁아터진 수조를…… 토미는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야겠지.

 그렇다면 난 토미를 평생 볼 수 있는 걸까.

 해서는 안 될 생각을, 죄를, 저질러버린 것 같은 기분으로, 알렉스는 뒤돌아보지 못 하고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사냥꾼의 노래

 운하산업이 중간으로 접어들었을 무렵, 알렉스는 신문을 던지다 말고 그를 만났다. 수조 앞을 지키던, 토미를 물위로 끌어올린 그 남자, 이 고장의 명성 높은 사냥꾼. 그는 대문 앞에서 굴러다니는 신문을 집어 들곤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걸친 알렉스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적잖이 놀랐다. 그의 집은 대부호에게 인어를 팔아넘긴 사람치곤 지나치게 볼품없고 초라했다. 돈을 다 어디다 쓴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알렉스가 먼저 인사했다. 남자는 멍하니 바다 쪽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인사하지 않았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어, 목걸이가 멋지네요.”

 알렉스는 남자의 목에 걸린 그것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결을 더듬거리며 목걸이를 문질렀다.

 “조개인가요?”

 “아니.”

 남자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개는 아니다.”

 “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알렉스는 잠시 고민했으나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알렉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음, 인어를 잡으셨잖아요.”

 “그래.”

 “작살로 잡은 건가요?”

 “아니.”

 “그물로 잡은 건가요?”

 “그것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는 그랬지.”

 “그럼 어떻게 가까이 다가오게 했는데요?”

 남자는 대답했다.

 “노래를 불렀다.”

 “오.”

 예상치 못 한 대답에 알렉스가 우물쭈물했다.

 “그렇군요.”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도 인어를 사냥하러 나가실 건가요?”

 그러자 남자는 굉장히 공허하고 끝없는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그 눈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 부서지는 파도와 어두컴컴한 바다, 그 바다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생물들의 꿈틀거림을 보았다. 알렉스는 시선을 피했다.

 “아니. 이젠 포기했다.”

 남자가 무겁게 대꾸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인어를 잡는 노래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마.”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응시했다. 그러나 곧장 대답하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남자는 신문을 옆구리에 꼈다.

 “잘 있어라.”

 그런 후 남자는 문을 열고 집안으로 사라졌다. 작게 음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쾅, 문이 닫히자 멜로디는 희미해졌다. 알렉스는 하얗게 질린 채로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려왔다. 남자의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자꾸만 맴돌고 있었다. 알렉스를 겁에 질리게 하고 있었다.

 

 꿈

 내가 살던 곳은 따뜻하고 고요해. 바닷물이 바닷물 속에 고여 있는 거야. 요람처럼.

 잘 상상이 안 돼.

 눈을 감아 봐. 뭐가 보여?

 그냥 깜깜하기만 한데.

 거기가 내가 있던 곳이야.

 어딘데?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왜?

 ‘ .’

 마지막 말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이야기, 이야기들

 어릴 땐 참치 잡는 꿈을 꿨었어. 아주 큰 참치. 어,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너한테 동족상잔을 고백하고 있는 건가? 오, 아니구나. 참치 좋아한다고? 그래… 토미 너도 참치를 먹는 구나. 여하튼 아주 큰 참치였어. 나는 그걸 작살로 잡아서 배에 힘겹게 끌고 와… 집에 도착하는 거야.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있다 말고 나를 반기지. 그리고 나와 함께 그 무겁고 거대한 참치를 헹가래 하는 거야. 왜 하필 내가 아닌 참치를 헹가래 하는 걸까 고민해본 적도 있어. 하지만 꿈속의 아버지는 나보다는 생선이 좋았던 모양이야. 어쩌면 실제로 그랬는지도 모르지. 생선을 잡으려고 바다에 나갔다가 나를 두고 죽었으니까. 소중한 게 있으면 악착같이 살아 돌아오잖아. 인간은 그렇거든.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 사실, 소중한 걸 뺏길까 봐 그런 걸 거야. 죽으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잖아. 내가 주인이었는데 내가 사라지니까……. 아버지는 내 주인이었던 셈이지.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는 너처럼 누군가에 의해 가둬지고 키워지고 영영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던 거야. 하지만 아버지는 나보다 생선이 더 소중해서 죽고 말았어.

 토미가 물었다. 위넌트도 죽게 될까? 뭐, 그도 인간이니까. 언젠간 죽어. 알렉스가 대답했다.

 내 이야기는 그 뒤론 정말 재미없어. 하루 종일, 거의 평생, 일만 했거든. 돈을 벌지 않으면 사람은 죽고 마니까.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돈이야. 지금도 난 돈을 벌고 매일 밤 너를 만나러 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난 신문을 배달해. 신문이 뭐냐면… 어, 다른 사람들이 간밤에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나 모두에게 알려주는 종이야. 생선 값이 오늘은 얼마고, 내일은 얼마가 될 것 같고, 그런 것들도 알려줘. 운하 산업에 대한 이야기도 해. 너 전에 물어봤었지? 이제 구덩이를 다 파서 내일이면 물을 채워 넣는대. 신문에서 그러는데 대충 일주일이면 될 거라고 하더라.

 한 곳에 고인 물은 썩어. 토미가 말했다. 알렉스가 동의했다. 그래, 내 생각에도 그래.

 이번엔 토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에겐 섬이 있어.

 우리?

 그래, 우리.

 네 친구들?

 그래, 많진 않아.

 너 말고 또 다른 인어가 있는 거구나.

 그래. 난 혼자는 아니야.

 외롭지 않겠네.

 그렇지 않아.

 토미가 말했다.

 난 외로워.

 알렉스는 그 말에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구나.

 그래… 난 섬으로 돌아가고 싶어.

 거기가 어디 있는데?

 설명할 수 없어. 하지만 여기서 아주 멀어.

 거기서 뭘 하는데?

 노래를 부르지. 그리고 보름밤이 되기를 기다려.

 인간이 되려고?

 그래, 두 다리가 생기길 기다려.

 왜?

 새끼를 치려고.

 이번에 알렉스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어… 그렇구나.

 토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넌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못 하는 구나.

 거짓말이었어?

 아니.

 토미는 출렁거리며 물장구를 치다가 유유히 되돌아왔다.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자.

 “왜?”

 “노래 가르쳐줄게.”

 인어는 정말 제멋대로구나. 알렉스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인간은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계속 불러.”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파괴할 수만 있어.”

 알렉스는 노래를 멈췄다.

 “위넌트가 너를 강간하기도 해?”

 토미는 대답 대신 물속에 얼굴을 반쯤 집어넣은 채 투명하게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슬픔에 젖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토미, 대답해줘.”

 알렉스는 알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그 질투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괴로운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토미.”

 “빨아줘.”

 토미가 물속에서 속삭였다.

 “안 그럼 그가 나를 아프게 해.”

 “위넌트가 너를 불태우기도 해?”

 토미는 대답하지 않고 물속에서 손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알렉스의 앞으로 가져다놓았다. 알렉스가 돔에 바짝 붙어 섬세하고 단단해 보이는, 조각상 같은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들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다. 누군가의 손자국의 모양 그대로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인간들은 뜨겁거든.” 

 토미가 말했다.

 “내겐 불덩이 같아.”

 “나는 너를 만지지 않을게.”

 알렉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제발 나를 싫어하지 마.”

 “너도 인간이야.”

 토미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리고 넌 날 만지게 될 거야.”

 “왜?”

 “넌 나를 보면 위넌트와 똑같은 눈을 해.”

 “그렇지 않아.”

 알렉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을 거야.”

 “그렇지 못 한 것뿐이지.”

 토미는 천천히 물러났다.

 “하지만 괜찮아… 난 이제 그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잊어버렸어.”

 달빛 속에서 토미의 지느러미가 형형하게 빛났다. 아름답게 부서지고 있었다.

 “알렉스, 넌 인간 중에서도 가여운 편에 속한다고 생각해.”

 토미가 말했다.

 “나는, 너의 가엾음을 인정해…….”

 알렉스는 그 말에 큰 상처를, 동시에 큰 위안을 받았다. 저절로 손이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게 되었다. 언젠가 토미가 분명하게 박아 넣었고, 점유했고, 뽑아냈음에도 분명한 상흔이 남은 영혼의 구멍을.

 토미는 수면 위로 카펫 같은 주름을 잔잔하게 띄우며 천천히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운하 사업이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부들은 몇 갤런의 물을 깊고 깊은 구덩이로 쏟아 넣었다. 흉물스러웠던 앞마당마다 아름다운 연못이 생겼다.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알렉스는 페달을 밟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갈매기들이 낮게 날고 있었다. 폭풍우가 올 거야. 편집장은 재난 경보를 실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르막길을 오르자, 굉장한 광경이 펼쳐졌다. 알렉스는 자전거에서 내린 후 뜀박질로 더 높게 올라갔다. 부호의 궁전까지, 위넌트의 감옥까지, 가장 높은 곳으로……. 그리고 내려다보았다. 테라스처럼 솟은 인어의 수조 아래로, 계단처럼 층층이 깎아지른 무수한 연못들의 향연을 보았다. 바다를 향해 이어지는 그 둥근 접시들, 한밤의 달을 담을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그 때,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토미의 목소리였다.

 알렉스는 허겁지겁 정원을 헤치고 나아갔다가, 이내 천천히 멈추어 섰다. 낯선 자의 목소리가 함께 뒤엉켜 있었던 까닭이었다. 알렉스는 숨을 죽이고 엎드렸다. 천천히 기어 풀을 치워냈다. 돔 근처에 다다르자 목소리들은 뚜렷해졌다.

 “이리 와.”

 알렉스는 토미의 팔을 마치 물건 다루듯 쥐어 올린 위넌트를 보았다. 그는 꼭 거대한 생선을 건져 올리는 것과 같은 폼이었다. 토미는 위넌트에게 쥔 팔목을 잡아 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위넌트가 토미를 물속에서 잡아끌자, 토미의 지느러미가 마구 꿈틀거리며 수면을 사방으로 후려쳤다. 물방울이 강하게 튀겨서 엎드린 알렉스의 뺨에도 몇 방울 튀겼다.

 “이리 오라니까.”

 위넌트가 으르렁거렸다. 토미는 길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런데도 단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증오한거나 죽여버린다거나, 그런 저주의 말도 없었다. 완강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위넌트는 토미의 얼굴을 붙잡아 제 가랑이 사이로 처박았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토미가 고개를 저었다. 위넌트는 참을성 있게 그를 짓눌렀다. 양손을 촉수처럼 뻗어 토미의 뒷덜미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토미가 흐느끼면서 고개를 박았다. 고통으로 빳빳하게 굳은 지느러미가 한 번 부르르 경련하다 말고 물속에 축 늘어졌다. 토미가 억지로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욱… 아헥…… 어흑……. 헐떡이는 소리에 구역질과 질척한 점성이 뒤엉켜 엉망이었다. 알렉스는 입을 틀어막았다. 구토감이 올라와 견딜 수 없었다. 토미는 위넌트의 성기를 빨다 말고 견딜 수 없다는 듯 힘껏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위넌트가 토미의 머리통을 붙잡고 쳐올리기 시작했다. 토미는, 결코 허우적거릴 수 없는 존재였음에도, 분명하게 허우적거렸다. 고통으로 울고 있었다. 잠시 후 위넌트가 사정했다. 그가 놓아주자마자 토미는 튕겨져 나가듯 그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토미는 뚝 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벌건 눈과 코로부터 끊임없이 액체가 줄줄 샜다. 위넌트는 바지를 추슬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알렉스는 헛구역질을 하며 풀숲에 고개를 박았다. 토미가 흐느끼는 소리가 돔 안에서 잔잔히 들려왔다. 알렉스는 젖은 입술로 고개를 들었다. 돔 앞으로 기어나갔다.

 “토미.”

 “어흑…….”

 “토미.”

 토미는 고개를 들고 증오스러운 눈으로 알렉스를 쏘아보았다. 벌건 눈에 주렁주렁 진주가 매달려 있었다. 진주는 알알이 수면으로 쏟아졌다. 반짝반짝하고 은은했다, 끔찍할 만큼… 정액을 닮아 있었다. 토미가 물속으로 허연 침을 뱉었다.

 “왜 왔어?”

 “내가 너를.”

 알렉스가 헐떡거리며 돔의 철창을 세게 쥐었다.

 “내가 너를 구해줄게.”

 알렉스가 마구 약속했다.

 “정말로 너를 이곳에서 구해줄게.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해, 토미. 정말 미안해, 토미.”

 “어떻게?”

 “잘 모르겠어…….”

 알렉스는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어, 토미… 그래도 너를 구해줄게. 약속해. 약속해, 토미.”

 토미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몇 번 자맥질을 하려다 포기했는지 그대로 물 안으로 고꾸라져 가라앉았다. 낮이었으므로 알렉스는 물속에 쓰러져있는 토미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수조… 바닥은 온통 허옇고 반짝반짝했다. 알렉스는 밤이었으므로 결코 알지 못 했다. 결코 보지도 못 했다. 그곳은 온통 진주투성이였다.

 “인간은 결코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알렉스가 속삭였다.

 “인간은 결코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물속에서 희미한 물방울이 올라왔다. 알렉스는 눈물을 닦아냈다. 토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나 천천히 알렉스 쪽으로 헤엄쳐왔다.

 “이제 형편없지는 않구나.”

 토미가 팔을 겹치고 얼굴을 얹었다. 그리고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주가 가득 담겨있었다.

 “가져.”

 토미가 말했다.

 “난 필요없어.”

 “나도 필요없어.”

 알렉스는 모욕을 당한 기분을 느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걸 원한 게 아니야.”

 “알아.”

 토미가 속삭였다.

 “그렇지만 위넌트에게 주긴 죽기보다 싫어. 무슨 뜻인지 알지…… 알고 있지, 알렉스.” 

 토미가 애원했다.

 “빨리 받아.”

 알렉스는 딱딱하게 굳은 채 토미의 손에 쌓인 진주알갱이들을 바라보았다.

 “부탁이야?”

 “그래.”

 “너를 꺼내달라는 부탁은 안 해?”

 “말했잖아.”

 토미가 중얼거렸다.

 “이제 그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희미하다고.”

 알렉스는 눈가를 힘껏 닦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토미의 손 아래로 오므렸다.

 “네가 쏟아줘.”

 알렉스가 말했다.

 “난 널 만지지 않을 거야.”

 그래서 토미는 그렇게 했다.

 

 전설

 인어는 힘이 세다
 인어의 눈물은 무엇이든 치유한다
 인어의 눈물은 굳으면 진주가 된다
 인어의 진주는 세상 그 어떤 진주보다 값비싸다
 인어의 진주는 녹이면 강한 독이 된다
 인어의 노래는 누군가를 홀려 죽일 만큼 아름답다
 인어에게 노래를 배우면 인어처럼 노래하게 된다
 인어는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인어의 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하거나 평생 저주 받는다
 인어는……,
 인어는…….
 알렉스는 진주의 전설을 안다.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그날 밤, 알렉스가 거대한 유리병을 짊어지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만월이었다. 등 뒤로 새하얗고 서늘한 보름달이 떠있었다. 연못마다 조금씩 나누어 담겨져 있었다. 알렉스는 위넌트의 저택 앞에 자전거를 내팽겨 치고 유리병을 짊어진 채 풀숲을 헤치고 달려 나갔다.

 토미는 알렉스가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알렉스의 눈을 보았다. 그는 정말로, 진심으로…….

 “토미.”

 알렉스가 속삭였다.

 “뒤로 물러나.”

 달빛 아래서 유리병에 담긴 액체가 진득하게 출렁거렸다. 그것은 꼭 달빛과 꼭 닮아있었다. 토미의 지느러미를 닮아있었다. 토미가 물었다.

 “그게 뭔데?”

 알렉스가 대답했다.

 “네 독.”

 토미는 알렉스의 손이 형용할 수 없는 모양새로 짓물러있는 것을 보았다.

 “그걸 짊어지고 왔어?”

 “그래. 이제 비켜줘.”

 알렉스가 이를 갈았다.

 “이건 지금 아주 뜨거워.”

 토미가 뒤로 참방거리며 물러나자, 알렉스는 유리병을 열고 바닥을 고쳐 잡았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나머지 한손으로 주둥이를 붙잡았다. 독소에 쏘인 것처럼 손가락이 순식간에 부식하기 시작했다. 살타는 냄새가 났다. 토미가 눈을 찡그렸다. 알렉스는 신음하면서 있는 힘껏 진주의 액을 철장 안으로 내던졌다. 돔이 크게 흔들렸다. 길게 늘어진 토미의 지느러미가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마구 파닥거렸다. 액이 튀긴 자리가 조금 녹아있었다. 토미는 녹아서 납작해진 제 비늘을 손가락으로 훑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돔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하얗고 눅진한 액이 달빛에 반짝이며 천천히 돔과 함께 녹아내리고 있었다. 구멍 너머로 하얀 달이 보였다. 토미는 찰랑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알렉스는 헐떡거리며 유리병을 집어던졌다. 손가락 마디마다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와 살덩이가 엉겨 붙어 온통 엉망이었다.

 “토미, 넌 자유야.”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젠장… 너는 자유라고.”

 돔을 녹이던 진주의 액이 흘러내리다말고 딱딱하게 굳었다. 토미는 알렉스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힘껏 손을 펼쳤다.

 “알렉스.”

 “잠시만.”

 알렉스는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자전거 뒤에 담요를 실어놨어. 가지고 올게… 그럼 넌 화상을 입을 필요도 없이 바다로… 내가 바다로 데려다줄 수 있을 거야.”

 “알렉스.”

 토미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괜찮아. 이리와.”

 알렉스는 천천히 돔 앞에 바싹 붙었다. 토미가 펼친 하얗고 섬세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토미가 알렉스의 손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알렉스는 머뭇거리며 상처로 엉망진창인 제 손을 엉거주춤 펼쳐 그 앞으로 가져다댔다. 토미는 다정하게 그곳에 뺨을 가져다댔다. 돔의 철장을 사이에 두고 아주 조금의 열기가, 그리고 알렉스에게는 조금의 축축함이 전달되었다.

 “고마워.”

 토미가 속삭였다.

 “소원을 들어줘서 고마워.”

 “별 거 아니야.”

 알렉스가 몹시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이제 내 소원을 들어줄래?”

 “뭔데?”

 “이게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알렉스는 애원하듯 신음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를 가지고 싶어.”

 토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알렉스는 이번에는 토미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느꼈다. 토미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물러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로… 뒤로 물러났다.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토미는, 있는 힘껏 지느러미를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녹아내린 돔의 구멍을 지나, 하늘 끝으로 날아올랐다. 달빛 위로 매끄러운 실루엣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토미는 천천히 공중에 머물러 있다가, 곧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추락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토미가 저택 바로 아래에 펼쳐진 넓은 연못으로, 운하사업으로 지지부진하게 파헤치던 물웅덩이로 떨어지는 것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풍덩… 소리와 함께 거센 파동이 일었다. 잠시 후, 연못 속에서 토미가 다시 솟구쳤다. 그는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그 아래의 연못을 향해 떨어졌다. 이제 연못은 토미를 위한 바다의 계단이었다.

 알렉스는 훌쩍임을 멈추고 길가로 달려갔다. 아무렇게나 엎어진 자전거를 타고 페달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토미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풍덩… 소리와 함께 토미가 위로 솟구치면, 알렉스가 고개를 젖히고 달빛 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부신 인어를 바라보았다. 풍덩… 쏴아아……. 풍덩… 쏴아아……. 알렉스의 옆으로 나무와 집이 마구 뭉개졌다. 토미는 규칙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바다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토미가 마지막 연못에 다다랐을 때, 알렉스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가속 때문에 쉽사리 밟히지 않아 마구 쇳소리가 났다. 알렉스가 쉰 목소리로 찢어져라 외쳤다.

 “토미!”

 그 순간, 토미가 그 어떤 때보다 높게, 아주 높고 아름답게 솟구쳤다. 그리고 공중에서 한 바퀴를 매끄럽게 돈 채로, 사방에 눈부신 물방울 조각을 뿌리며, 그렇게 멈추어 있다가…… 바다로, 그의 고향으로…… 떨어졌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자전거는 급하게 멈추어 섰다. 알렉스는 자전거를 내팽겨 치고 모래사장으로 뛰쳐나갔다. 파도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돌진했다가 부서졌다. 알렉스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닥쳤다. 그는 먼 바다로부터 몰려오는 거대한 먹구름의 운집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달을 가리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우르릉,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있었다. 번개가 번쩍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배경을 등진 채, 파도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허리를 펼치고 일어났다. 알렉스는 못 박힌 듯 자리에 서서 달빛 아래 빛나는 그 실루엣을 응시했다. 그것은 두 다리로 단단히 모래를 버티고 선 채, 물을 떨어뜨리며 다가왔다. 보름달이 환하게 작열하고 있었다. 토미는 그렇게 인간이 된 채, 알렉스의 앞으로, 느긋하게, 걸어왔다. 알렉스는 눈을 감았다.

 둘은 전라가 된 채로 모래 위를 뒹굴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재난과 맞서 싸웠다. 토미는 알렉스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다정하게 비비며 입을 맞췄다. 알렉스는 토미를 허겁지겁 탐하면서 자꾸만 품으로 끌어당겼다. 토미는 놀랄 만큼 차가웠고 무서울 만큼 딱딱했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알렉스가 핥은 자리마다 눅진한 화상자국이 남았다. 아프지 않아? 아파. 토미는 눈을 감았다. 너는 불덩이 같구나. 뜨거운 뱀처럼 나를 파고드는구나. 섬세한 속눈썹마다 촘촘히 물기와 작은 진주알갱이가 박혀 있었다. 알렉스가 울었다. 너를 만져서 미안해. 토미는 아물어가는 알렉스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괜찮아. 토미의 가슴언저리에 강렬한 화상자국이 남아있었다. 평생 남길 생각으로 너를 각오했어.

 토미는 쾌락에 젖은 울음소리를 냈다. 차갑고 단단한 다리가 알렉스의 허리를 감았다. 번개가 번쩍였다. 알렉스는 절정을 느꼈다. 천둥이 콰르르 무너졌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미가 알렉스에게 짓눌린 채 헐떡였다. 파도가 가까워져서 이제 물은 그들의 다리언저리까지 차있었다. 알렉스가 속삭였다.

 “넌 어디로 가?”

 “내가 태어난 곳.”

 “거기가 어딘데?”

 토미는 알렉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가까이 끌어 당겼다.

 “눈을 감아 봐. 뭐가 보여?”

 “그냥 깜깜하기만 한데.”

 “거기가 내가 있던 곳이야.”

 알렉스는 데자뷰를 느꼈다.

 “어딘데?”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알렉스는 왜, 라고 묻지 않았다.

 그래서 토미가 말한다.

 “너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흰 거품이 갈퀴처럼 토미의 다리를 적셨다. 토미는 허벅지를 더듬어 납작하게 녹은, 작은 조각을 알렉스에게 건네주었다. 비가 쏟아져서 사방은 이제 온통 물로 출렁이고 있었다.

 “선물이야.”

 “이게 뭔데?”

 “네가 영원히 상처 낸 내 비늘.”

 알렉스는 뒷말이 듣고 싶지 않아 토미에게 입을 맞췄다. 혀로 토미의 곳곳을 헤집고 자꾸만 습윤하게 만들었다. 토미는 밀치지 않고 무력하게 그 사랑을 받아주었다. 둘은 한 번 더 뒹굴었다. 폭풍우가 아주 가까이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알렉스는 녹초가 될 때까지 토미를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엎어졌다. 토미는 축축한 뺨을 알렉스의 뺨에 마주 대며 속삭였다.

 “안녕, 알렉스.”

 “…토미, 가지마.”

 “보름달이 뜨면 너를 보러 올게.”

 “약속해줘.”

 토미는 대답 대신 알렉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큰 파도가 둘을 덮쳤다. 토미는 물거품처럼 그곳에 휩쓸렸다. 알렉스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토미는 온데간데없었다.

 “토미!”

 비바람이 우우, 불었다. 하늘엔 더 이상 보름달도, 빛도 없었다.

 “토미!”

 천둥이 쳤다. 알렉스는 흐느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다 차가운 촉감을 느끼며 손을 떼어냈다. 번개가 번쩍였다. 알렉스는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조개처럼 보였으나 좀 더 편평하고 납작했다. 빛이 바랐지만 아름다웠다. 폭풍우 속에서도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파도의 결과 결 사이로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인간은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파괴할 수만 있어……

 

 알렉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 노랫소리는 언젠가 사냥꾼이 흥얼거렸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실망스럽구나, 라고 언젠가 그가 그랬다. 실망스럽구나. 왜요? 내가 찾던 게 아니었어.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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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감아 봐. 뭐가 보여?
 그냥 깜깜하기만 한데.
 거기가 내가 있던 곳이야.
 어딘데?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너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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