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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브라이언»
2차/old 2019. 10. 24. 19:11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나는 이제 그 시대의 끝물을 살고 있고, 지금도 종종 내 주변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안다. 그러나 적어도 내 삶 안에서, 기적이나 마법 혹은 재앙은 유통기간이 다 된 깡통과도 같다.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1939년 내가 포르티스에 배치를 받았을 때, 리더는 나를 곧장 바깥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화물용 창고처럼 보이는 대기실(그곳에 비행정들이 있었다)이 있었고, 풀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기지가 곳곳에 천막을 쳐놓았고, 몇몇 천막 앞에 간의의자를 두고 앉은 공군들이 보였다. 리더와 나는 줄지어 이어지는 천막들을 지나 거의 마지막쯤에 있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파리어 대위를 처음 보았다. 파리어 대위는 소파에 앉아서 RAZZLE을 읽고 있었다. “신입이에요?” 파리어 대위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고, 나는 그를 의식해서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콜린스야.” 리더가 말했다. 그는 파리어 대위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파리어 대위는 한동안 거기 앉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어깨를 으쓱였다. “반갑습니다.” 그러자 파리어 대위가 RAZZLE을 덮고 일어나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파리어 대위다. 오래 살아라.” 그가 말했다.

 그 때, 나는 파리어 대위가 말한 “오래 살아라”의 의미가 “행운을 빈다”와 비슷한 뜻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문자 그대로 오래 살아남으라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교육을 마치고 들어온 상태였고, 포르티스에 배치될 만큼 엘리트였지만, 비행정에 앉아 임무에 투입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 했다. 리더와 대위는 한동안 나를 햇병아리 취급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들어오자마자 스핏파이어를 몰았다. 리더와 파리어 대위는 그 전까지 허리케인을 몰았고, 내가 들어올 즈음부터 스핏파이어를 몰기 시작했다. 허리케인 전에는 하우커를 몰았다. 나는 세 대의 비행정을 조종할 수 있는 고참들의 날개 사이에서 비행할 수 있음에 자부심을 가졌다.

 나의 첫 번째 출격지는 포크스톤과 몇 십 마일 떨어진 해안으로, 포르티스 외 다른 한 팀(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과 함께 날았다. 나는 고도로 긴장한 상태였기에 리더의 무전을 두 번이나 놓쳤다. 중간 정도 날았을 때, 후발로 날아오던 비행정 한 대가 격추되었다. 파리어 대위가 무전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콜린스! 맹세컨대, 파리어 대위가 포르티스 2나 코드명 따위로 나를 불렀다면, 나는 그가 누구를 부르는지 알아듣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리어 대위는 나를 콜린스라고 불렀고, 그의 목소리는 벼락처럼 내 머릿속에 전짓불을 밝혔다. 나는 정신을 차렸고,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교육을 받는 동안 지겨울 정도로 외웠던 매뉴얼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머리가 깨어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방향을 틀고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흩어진 채로 무전을 기다리며, 주의 깊게 창공을 살폈다. 누가 추락했는지 몰랐으나 포르티스 조가 아니었다. 리더의 무전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적이 근처에 있으니 잘 살피도록 해.” 그러나 그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실상 도움이 되는 무전은 아니었다. 얼마 뒤 나는 북서쪽으로 날아가는 전투정 한 대를 포착했다. 구름을 빠져나오는 순간 날개가 반짝이는 걸 놓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몸체의 전대 코드를 확인했고, 리더에게 무전으로 위치를 쳤다. 격추시킨 건 파리어 대위였다. 돌아오자마자 나는 잔디밭에 엎어져 빈속을 게워냈다. 긴장이 풀리자 바짝 쪼그라들었던 위가 요동치고 있었다. 누군가 내 콕핏 근처로 다가왔다. 나는 그의 발치를 볼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파리어 대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스크를 벗으며 장갑을 낀 다른 한손으로 내 어깨를 두들겼다. “할 만 하지?” 장갑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그의 손길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부드럽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누가 죽었냐고 물었다. 파리어 대위는 어깨를 으쓱이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신만이 아실 일인데, 추락한 부근이 바다나 독일이 아니니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그것이 일어나기 어려운 기적임을 알고 있었고, 파리어 대위는 내가 아는 바로 무교였다.

 공군으로 있으면서, 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종종 보았다. 특별히 공군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이 있던 시대였고, 대다수의 일이 많은 이들에게 납득되지 못한 채 비극이 되었다. 징병, 어린아이들의 죽음, 런던 폭격… 지하철에 숨었던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행정에 올라타지 않고, 총을 들지 않아도, 모두가 독일과 어떤 식으로든 맞서 싸우던 시기였다. 우리는 비행정에 탑승했고, 그게 다였다. 더 일찍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랬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남들보다 더 고생했거나 공을 세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RAF의 자부심은 그런 곳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본격적인 항공전이 시작되자 파일럿이 부족해진 RAF에도 징발된 청년들이 등장했고, 그중에는 청년이 아닌 자발적 지원자도 더러 있었다. 기수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짧은 기간을 두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공군이 되었다. 잦은 출격 명령이 있었고, 조종사들은 아예 대기실로 나와 잔디에 앉아 있곤 했다. 나머지들은 천막 안에서 카드 패를 돌리거나 체스를 뒀다. 대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도 대체로 거기 있었다. 대기실 내부에는 그 날 임무에 투입될 예정인 항공기와 조종사 명단을 적은 칠판이 걸려 있었고,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콜을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리면 바로 뛰쳐나가 캐노피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잔디밭에 엎어진 공군들은 하나같이 메이 웨스트 구명조끼를 정복 위에 걸쳐 입었는데, 입기 까다로워 시간이 꽤 걸렸던 탓이었다. 콜이 울렸을 때부터 우리에겐 꾸물거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정말이지 미치광이 같은 전화벨이었다. 나는 그저 해가 내리쬐는 잔디밭에 앉아 있었는데, 하늘 어딘가 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잔디밭에 내내 앉아 전화벨을 기다렸음에도 종종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지만, 콜을 받으면 일어나 스핏파이어로 달렸다. 필요한 곳까지 재빨리 날아가서 비행정을 격추시키거나, 무사히 살아남았다. 때때로 콜이 시시각각 울릴 때도 있었다. 한 시간 단위, 심지어는 몇 분 단위로 울렸다. 많은 사람들이 비행정으로 달려갔고 돌아오지 못했다. 전화벨이 항상 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 전화인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벨소리가 똑같았으므로 전화가 울리면 우선 모두 엉거주춤 일어날 태세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콜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있었는데, 전화를 받은 머클 중위가 데이빗을 불렀다. 천막 안에서 허겁지겁 데이빗이 뛰쳐나왔다. 그는 전화를 받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초조하게 매만졌다. 이따금 “그래, 나도 알아. 곧 갈게, 지금은 당장 갈 수가 없어.”하고 대답하는 것을 모두가 지켜보았다. 그가 전화를 끊었을 때, 파리어 대위가 물었다. “급한 전화였나?” 데이빗은 아내로부터 장인의 부고소식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잔디밭 중간쯤에 서있던 누군가 달려와, 데이빗에게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그런 미친 일도 있었다. 이 일화는 그만큼 우리가 전화벨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어쨌든 데이빗은 돌아갔고, 주먹을 맞은 일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한 게 없는 것으로 안다. 그는 살아남았고, 주먹을 지른 남자는 죽었다. 그것으로 그 이야기는 닫혔고,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콜이 너무 자주 울릴 때는, 그냥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시간차를 두고 비행정에 올라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제 막 배치를 받은 신입들이 인사조차 하지 못 하고 전투정에 올라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리더들은 천막 혹은 잔디밭에 남은 낯선 새 가방과 보급품을 확인하고, 돌아오지 못 한 비행정의 이름을 리스트에서 찾은 후, 뒤늦게 신입의 이름을 읽었다. 전쟁 초반에, 나는 다른 팀의 리더가 칠판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허리케인을 몰았다. “오늘 허리케인은 다 돌아오지 않았어요?” 내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돌아오지 못 한 허리케인이 한 대 있어.” 그는 발치에 놓인 보급품을 내려다보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브라이언. 나는 이 놈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어.” 당시에는 출정하자마자 전사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두가 그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건, 그게 너무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극은 그렇게 지나칠 만큼 자주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시대를 말도 안 되는 시대라고 불렀다. 내가 서두에서 붙여둔 것은 나 혼자만의 작명이 아니었던 셈이다.

 주변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포르티스 팀은 오래 버텼다. 오래 살았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지막 출정은 다이나모 작전이라고 불렸고, 파리어 대위와 나는 프랑스의 덩케르크까지 날았다. 리더는 프랑스까지 가지 못 했다. 출정 중이었기에 우리는 충분히 슬퍼하지 못 했고, 그저 계속 날았다. 나중에 나는 바다를 보면 종종 그 날 푸른 물결 위로 출렁거리던 리더의 스핏파이어, 파도에 따라 언뜻 드러나는 몸통에 칠해진 익숙한 전대 코드, 햇빛에 반짝이던 날개의 잔해를 떠올리곤 했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악독한 착취를 꼽자면 바로 추모의 시간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전우들이 추모할 시간조차 가지지 못 하고 히스테릭과 PTSD, 노이로제와 각종 정신질환 속에서 죽어갔다. 그럼에도 우리가 RAF에 자긍심을 가진 건, 돌이켜보면 그저 국가의 프로파간다와 이데올로기였을 지도 모르겠다고 누군가 말했다. 전쟁은 미친 짓이고, 사람이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나는 어떤 말에는 동감을, 어떤 말에는 유감을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핏파이어를 몰았던 사실에 자긍심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리더를 그리워할 수 있다. 나는 포르티스의 모두를 그리워했고, 특히 그를, 파리어 대위를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렸다. 파리어 대위는 내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을지 몰라도, 그게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결코 알지 못 했을 것이다.

 나는 파리어 대위가 바닥을 드러낸 연료통과 함께 덩케르크 해변의 상공을 날아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중에 직접 보고를 받았지만, 그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덩케르크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문스톤호라고 불리는 작은 요트에 타고 있었고,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연료(아마 당시엔 10갤런도 채 남지 않았을 것이다)로 선회하여 내 눈앞에서 폭격기 한 대와 호위기 한 대를 격추시켰다. 그가 탄 스핏파이어가 그를 다시 영국으로 돌려보내줄 수 없음을 알았다. 울지 않았던 건, 앞에서 말했듯 충분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스톤호에는 마흔 명이 넘는 보병들이 타고 있었고, 바다는 온통 기름으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파도 아래 어딘가에는 U보트가 있었고, 격추된 독일 전투기로부터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배를 돌리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전투정을 만났지만, 요트를 몰던 두 도슨 가 사람들이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아무도 죽지 않았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미친 시대였음에도 종종 행운과 기적이 일어나던 때였다. 나는 피터 도슨이라고 하는 소년을 바로 그 요트에서 만났다. 그의 형이 허리케인을 몰았다. 피터는 그의 형이 전쟁 초기에 전사했다고 말했고, 그것을 과거형으로 말했다. 그는 떠나보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허리케인의 리더가 칠판 앞에서 읊던 이름을 떠올렸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배에서 내린 후에도 소집 명령을 받기 전까지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도슨 가에 따로 찾아가지는 않았으나, 나는 피터의 친구, 내가 문스톤호에 오르자마자 뱃바닥에서 마주한 소년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피터는 나를 알아보았지만 장례식 내내 말을 걸지 않고 앉아 있었다. 조지 밀스. 단상에 올라간 그 애가 천천히 발음했다. 나의 친구, 나의 용감한 친구, 조지 밀스. 그 애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애가 단상을 내려왔을 때, 다가가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그 애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그 애의 어깨를 두들겼다. 언젠가 파리어 대위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가 장갑을 끼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피터의 어깨를 토닥이려 애썼다. 그 애가 얼마나 용감했는지 신이 아실 거야. 네 조지는 분명 행복할 거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말했고, 나는 크리스천이었으며, 신을 믿었다. 피터는 끝까지 울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애가 분명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었을 것이며, 그렇지 못 했다면 죄책감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창공을 바라보며 파리어 대위를 응원할 때, 우리의 발밑에서 조지 밀스가 죽어가고 있었다. 피터 도슨은 친구의 임종이 진행되던 순간 자신이 어쩌면 그와 아무것도 상관없는 상황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브라이언의 죽음은 전화 한 통과 전보로 이루어졌으나, 조지 밀스의 죽음은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에는 육체성이 있었다. 피터는 시체를 눈앞에서 보았고, 심지어 그 시체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그의 눈앞에서 입을 달싹이고 있었으며, 그는 시체이기 이전에 피터의 오랜 벗이었다. 나 역시 떠나보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심지어 죽지도 않은 사람을 눈앞에서 떠나보냈던 상태였다.

 공군으로 돌아온 후에도 콜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스핏파이어에 탔다. 파리어 대위를 매순간 기다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생존에 급급했고, 매순간 추격하고 격추했고, 동시에 후퇴하고 선회했다. 전우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이들이 죽었다. 나와 같은 기수로 불리던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둘뿐이었고, 그 역시 종전 직전에 전사하였다. 놀랍게도 나는 살아남았고, 파리어 대위를 기다린 것은 그 뒤의 일이다. 그전까지 내가 기다린 것은 죽음과 생존, 비극과 기적뿐이었다.

 마지막 출격이 있기 전 야간에 비행을 할 일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대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재편성 되어 새로운 리더와 함께였고, 그는 나의 포르티스 리더의 선임이었다. 그가 왼편에, 내가 오른편에 있었다. 가운데에 랜디 소위가 있었다. 콜린스 대위님. 그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언젠가 내가 그의 자리에 날면서, 무전을 통해 파리어 대위를 그렇게 불렀던 일이 떠올랐다. 대위님. 나는 그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새 리더가 서쪽으로 좀 떨어져서 날고, 나는 랜디 소위와 붙어 이따금 무전으로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다 내가 좀 더 고도를 높이자고 말했고, 랜디가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달을 보라고, 얼간아. 여기서 적이 나타나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랜디와 나는 조금 더 높게 올라갔고, 구름 바로 위에서 달을 보았다. 특출 나게 크지는 않았다. 나는 땅에서 보는 달과 하늘에서 보는 달의 크기 차이가 실상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크지 않지?” 내가 랜디 소위에게 말했다. 그건 파리어 대위가 언젠가 내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나는 파리어 대위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랜디는 한동안 무전하지 않다가, 다시 고도를 낮춰 내려갈 즈음에 이렇게 말했다. “네. 하지만 아름답네요.” 나는 파리어 대위에게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파리어 대위가 특별히 감상적이거나 섬세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덤덤하고 무감한 편에 속했고, 감정을 어떻게 숨겨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변 사람보다 훨씬 무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종종 남이 자신보다 훨씬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거나 어림잡았다. 그는 나를 처음 본 이례로 쭉 나를 햇병아리 취급하면서(마침 머리색도 딱이군. 그는 리더와 함께 입을 모아 자주 그렇게 말했다) 내가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인 것처럼 취급하곤 했다. 매번 그러던 것은 아니었지만,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할 때면 그가 나를 어떤 인간으로 보고 있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불쾌한 느낌이 아니었지만, 불편하기는 했다. 실제로 나는 제법 뾰족한 감성을 가지고 있었고, 종종 그곳에 무게를 실어 몸을 움직였다. 그래서 파리어 대위가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게 느껴질 때면, 그가 내 사관학교 시절 내가 동기 몇 명을 주먹으로 때려눕혔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실제로 알고 있었다고, 파리어 대위가 재회 이후 말해주었다. “그러나 너를 취급하는 일과 그 일은 별개였어.” 그가 말했다.

 어쨌든, 그는 나를 달과 보다 가까운 곳으로 데려갔다. 우리의 스핏파이어는 부드럽게 솟아올랐고 놀랄 만큼 구름 위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리더는 우리보다 아래에서, 내가 랜디 소위를 데리고 솟아오를 때 새 리더가 그랬던 것처럼 서쪽으로 비행정을 몰고 있었다. 대기가 차가워서 캐노피에 김이 서리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파리어 대위가 무전으로 말했다. “봐.”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위성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속에 둥그렇고 거대한 조명 하나를 띄워놓은 것 같았다. 암청색 창공이 빛 무리에 따라 보라색으로 희미하게 일렁였고, 구름은 천처럼 출렁이며 몇 마일까지 아득하게 이어졌다. “생각보다 크지 않지?” 파리어 대위가 말했다. 나는 어쩐지 목이 메었다. “아뇨.” 나는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대단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한동안 거기 떠있었다. 뒤늦게 덧붙이지만, 리더의 무전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 리더가 올라오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 멀리까지 나가선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후발로 오는 다른 팀과 함께 붙어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곳엔 온전히 나와 파리어 대위만이 머물러 있었고, 함께 말없이 달 아래를 날았다. 나는 그 순간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파리어 대위가 무전으로 어떤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나의 첫 키스는 열여덟 살 때다. 동네에서 가장 아름답던 스무 살짜리 여인과 했다.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우스웠던지 그녀가 숨과 숨의 틈으로 작게 웃었다. 그 소리를 기억한다. 바짝 다가선 사람이 조용하고 은은하게 터뜨리는 숨의 탄성을. 그 때 나는 바로 그 소리를 파리어 대위의 무전으로부터 들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나는 잠깐이지만 그와 키스한 거라고 생각했다. 키스한 것이나 다름없는 어떤 순간이 있었고, 방금 지나갔다. 그리고 달이 아름답다. 그 순간을 잊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비행했다. 그 날은 아무도 죽지 않았고, 비행이 끝났을 때 나는 콕핏 아래에 주저앉았다. 내 어깨를 두들기던 파리어 대위의 손이 기억난다. 그는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드럽고 친밀했으며, 어떤 은밀한 애틋함이 숨겨져 있었다. 달을 다녀온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아주 미약하게, 애정이 뒤척였다.

 랜디는 1943년에 죽었다. 새 리더는 살아남았지만, 1944년 공중에서 추락했다. 나는 여전히 대위였고, 마지막으로 항공전을 치를 때 거의 죽을 뻔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거의 죽을 뻔했다는 것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사실, 나는 한 번 죽었다 돌아온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비행사들의 무덤에 다녀왔다. 실제로 그것을 보았다. 이 역시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비행사들의 무덤(혹은 비행정의 무덤이라고도 불렸다)은 RAF들뿐만 아니라 비행정을 모는 모든 파일럿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우리는 신의 존재가 불확실하고 확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희망하고 저주하고 사랑하곤 한다. 비행사들의 무덤은 바로 그 신처럼, 미신을 넘어선 어떤 강한 희망이자 저주였고, 돌아오지 못 한 비행정을 위한 일종의 괴담이었다. 비행기를 몰던 사람들이 가는 장소. 그곳은 가장 높은 고도에 있으며, 바람이 불지 않고 캐노피가 없어도 얼지 않는다. 하늘에서 전사한 모든 이들이 그곳으로 간다. 타고 있던 비행정이 영혼을 태운 채 위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이는 추락한 위치를 기록했음에도 해당 장소에서 비행정 혹은 시체를 발견할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누군가가 붙이기 시작한 가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라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빤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RAF에서도 유명한 미신이었다. 파리어 대위도 종종 내게 그 이야기를 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산채로 비행정 무덤에 끌려가는 수가 있어. 그럼 나는, “미신으로 겁을 먹기엔 제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대위님?”하고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틀렸다. 나는 겁을 먹었고, 파리어 대위는 그걸 알았다. 그는 덩케르크로 출정하던 그 날에도 콕핏 앞까지 쫓아와 내게 겁을 주고 떠났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하면 놀릴 수 있는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대체로 나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편에 속했다.

 나의 마지막 항공전은 치열했고, 나는 그것을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바람소리와 함께 스핏파이어가 통째로 흔들리며, 마치 기갑부대의 탱크처럼 탈탈거리던 소리가 떠오른다. 장면은 뭉텅이로 잘려있고 단편적인 이미지만이 기억난다. 나는 발포하고 연료 계를 잠갔다가, 다시 열었다. 조명탄 총이 부츠를 자꾸만 쳐서 엄지발가락이 얼얼했던 것, 내 옆으로 폭격기가 날았던 것, 무시무시한 총소리가 났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공중에서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고, 뒤집혀진 채 상대가 누구인 줄도 모르고 총격을 가했다. 전대 코드를 확인하기 위하여 몸통을 볼 틈이 없었다. 비행정들은 너무 빠르게,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총알을 다 소진한 후에도 스핏파이어를 험하게 몰았고, 어느 순간부터 졸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랬다. 늦은 오후였고 나는 삼일 동안 단 한숨도 자지 못 한 상태였다. 녹초가 되어 어느 순간 조종기를 놓았던 기억이 난다. 손이 미끄러지면서 기체에 부딪혔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도 스핏파이어가 제대로 중심을 잡으며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었다. 잠결에도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그대로 기대어 있었다. 잠시 후 중력이 붕 뜨는 것이 느껴졌고, 빠른 속도로 고도가 상승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스핏파이어를 잡아 올리는 것 같았다. 내가 한참 졸았다고 생각한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도계를 확인하곤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달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캐노피는 깨끗했다. 김이 서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위는 어두컴컴했고, 달은 아주 거대했다. 암청색의 하늘이 달빛 때문에 온통 보랏빛으로 울렁거렸다. 구름은 단 한 줄기를 제외하면 모두 스핏파이어 아래에 얌전히 깔려 있었다. 잘 경작된 밭처럼, 판판하고 드넓게, 몇 백 에이커, 아니 수백 헥타르에 달하는 구름이 대지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나는 달 위로 흐르는 기묘한 구름 한 줄기를 보았다. 그것은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점점이 작고 흰 무언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때로 그것들은 반짝이기도 했다. 그 구름은 여름날의 작은 강줄기처럼 보였고, 혹은 토성의 고리처럼 보였다. 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구름 위로 몇 대의 비행정이 솟아올랐다.

 나는 랜디의 스핏파이어를 보았다. 몸통의 전대 코드를 확인한 후, 나는 캐노피 안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랜디였다. 나는 랜디 심슨의 매부리코 모양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코 모양 때문에 마스크가 조금 아래로 처지던 것을 기억한다. 랜디는 그곳에, 조금 처진 마스크를 쓰고 스핏파이어에 앉아있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는데, 그는 이미 1943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나의 오른편으로 다른 한 대의 스핏파이어가 솟아올랐다. 나는 이번에도 전대 코드를 확인했고, 캐노피 안에 앉아있는 새 리더를 보았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이해했다. 내가 죽었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앞으로, 색이 바란, 아주 오래된 스핏파이어 한 대가 솟아올랐다. 나는 비행정의 날개로부터 물이 떨어지고 있는 것, 그리고 군데군데에 하얀 거품이 굳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캐노피 안에 나의 리더가 앉아 있음을 확인하지 않고도 알았다. 코끝으로 열이 몰리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잠자코 앉아 있었다. 나는 마지막 스핏파이어 한 대를 기다린 것이다. 그 때까지도, 나는 파리어 대위가 덩케르크 해변에 불시착하지 않았다면, 그 근방을 날던 독일 전투정에게 격파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스핏파이어는 솟아오르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비행정 네 대가 그렇게 구름의 평원 위에 떠있었다. 잠시 후, 랜디의 스핏파이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랜디의 비행정이 달을 향해 자꾸만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랜디는 마침내 구름의 유수에 닿았고, 그 일부가 되었다. 그는 북쪽으로 흘러갔다. 그 다음엔 새 리더의 스핏파이어가,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나의 포르티스 리더의 스핏파이어가 차례로 솟아올랐다. 그들은 직각으로, 마치 누군가 그들을 끌어올리는 것처럼 부유했고, 구름의 한줄기가 되어 랜디를 따라 북쪽으로, 어딘가로 흘러갔다. 나는 달빛에 반사된 스핏파이어들을 볼 수 있었다. 그 구름 한 줄기 속에 얼마나 많은 파일럿들이 앉아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파리어 대위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그 때였다. 봐, 라고 언젠가 그가 그랬다. 생각보다 크지 않지? 나는 거대한 달 아래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목 같은 게 메지 않았다. “아뇨.” 나는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대단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겠다. 난 죽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연료가 반도 채 남지 않은 스핏파이어를 타고 홀로 바다 근처를 부유하고 있었다. 어떤 정신으로 그걸 몰아 귀환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는다. 어쨌든 난 살아남았고, 파리어 대위 역시 살아있음을 알았다. 그는 구름이 되지 않았고, 독일 어딘가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나는 종전 당시를 자세히 서술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기쁘기보다 피로한 상태로 작은 해방감만을 맛보았다. 정복을 벗고 침대에 누웠는데, 한밤중에 무려 다섯 번이나 허겁지겁 깨어났다. 거실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고, 오래도록 거기서 신호음을 들었다.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내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주었으나 몸이 제대로 납득하지 못했다. 한동안 그랬고, 그 후에도 그랬다. 아주 오래도록 나는 전화벨 노이로제와 맞서 싸웠다.

 파리어 대위를 다시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왜소하고 수척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파리어.” 내가 말했다. “파리어, 파리어…….” 그는 대답 대신 팔을 벌려 나를 껴안았다. 그는 이전보다 작아진 것 같았는데도 힘은 여전히 장사였다. 내 어깨를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파서 눈물이 핑 돌 정도였는데, 그가 나를 품에서 놓아줄 즈음 나는 정말 울고 있었다. 그랬다. 나는 비로소 그 때서야 울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고, 아무도 어리둥절하게 죽지 않을 어느 여름, 나는 그의 품에서 아이처럼 흐느꼈다.

 우리는 조지 밀스의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도버를 방문하였다. 내가 조지 밀스의 장례식을 기억하고 있는 건 순전히 문스톤호에서 만난 피터 도슨 때문이었다. 나는 그 배에서 가장 먼저 구출된 사람이었고, 피터가 믿은 어른이었다. 그 때, 그 애가 내게 조지의 상태를 묻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내 정복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눈으로 이렇게 묻고 있었다. 뭔가를 알고 계시다면 무엇이든 말해주세요. 그런데 나는 그 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모르겠구나.” 그 뒤의 말은 현명하게 뱉었다고 생각한다. “넌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나는 오래도록 전자의 말 때문에 그 아이에게 부채감이 있었지만, 정작 다시 만났을 때 피터는 후자의 말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애는 그 말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때의 친절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콜린스. 제 친구의 장례식에 와주신 것도요.” 피터가 그렇게 말했을 때, 파리어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도버의 LOCAL HERO라고 기려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조지 밀스만의 추모식이 아니었다. 도슨 일가는 가장 앞줄에 앉아 있었고, 조지 밀스의 부모로 보이는 두 사람이 그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로의 손을 잡았다. 파리어와 나는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가 손끝으로 내 손등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그 때마다 나는 주변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려 애썼다.

 피터 도슨이 단상 위로 올라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도슨 일가는 이 전쟁으로 가까운 두 사람을 잃었고, 특히 피터는 그랬다. 그는 길지 않은 추모사를 들고 있었다. 서류 한 장 분량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지만, 추모사를 읊기 전에 군중을 조용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어느 한 곳을 응시하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마이크를 앞에 두고 추모사를 읽어나갔다.

 내용을 다 기억하지는 못 한다. 추모식 이후에도 오랜 시간, 나는 필사적으로 전쟁을 떨쳐내고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폭력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싸웠다. 파리어도 파리어 나름대로의 전쟁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이겨나가려 애썼지만, 어떤 것은 결국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것을 패배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파편들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다.

 분명히 기억하는 건 피터 도슨이 조지 밀스를 부를 때, 그가 군중 속 어느 한 곳에 종종 시선이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 떨리는 목소리를 내다가, 마지막에는 놀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나중에 피터 도슨이 바라보던 그 장소에, 언젠가 문스톤호에서 만났던 남자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뱃머리에 쭈그리고 있다가 나중에는 보병들의 구조를 도왔던 바로 그 남자였다. 피터는 또, 조지 밀스 외에 다른 이름을, 이번에는 파리어도 알고 있는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이 호명될 때, 우리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이언, 그 애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줄곧 우리의 어떤 시대에서 그 이름을 불러냈다. 브라이언 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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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레이먼드 카버의 에세이 <내 아버지의 인생>의 마지막 문단을 차용해서 썼음. 내용은 전혀 다르나 장례식장에서 이름을 호명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인용하여 글에 맞게 꾸려 썼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붉은 돼지>의 세계관도 차용해서 씀. 비행정 무덤 장면에서 얼마나 전율했는지..그러니까 이 글은 내가 쓴 글이지만 온전히 내 글은 아님.

 1-2. <마지막 문장의 원문>
 "레이먼드, 장례식장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줄곧 내 유년기에서 그 이름을 불러냈다. 레이먼드.“

2. 덩케르크 오피셜 비하인드에서 피터의 형 이름이 브라이언으로 밝혀졌다. 그것을 기념하여 쓴 글이다.

201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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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병조 «유랑기담»
2차/old 2019. 10. 24. 19:11

 햄프셔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허스트 도로에는 간의 카페들이 열려 있었는데, 그 중 일부는 새벽 운전자를 위해 스물네 시간 운영되었다. 알렉스 스튜어트가 그중 한 곳에 도착했을 때는 시계가 이미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가 내려서 헤드라이트와 카페 불빛을 제외한 주차장의 대부분이 축축한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다행히 바람은 심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코트 깃을 올리며 차에서 내렸다. 키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어깨를 움츠리자 오한이 솟았다.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 그는 비를 뚫고 주차장을 가로지르다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랜드로버를 바라보았다.

 주차장 맨 앞줄엔 그 남색 랜드로버 한 대만이 주차되어 있었다. 쇼윈도로부터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보닛이 거의 갈색처럼 보였다.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뻣뻣하게 서서 트렁크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가느다랗게 겁에 질린 음성이 새어나왔다.

 “살려 주세요…….”

 알렉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차장에 누군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트렁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틀림없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거기 누구 있으면 살려 주세요…….”

 알렉스는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랜드로버를 지나쳐 카페로 들어왔다. 입구에 매달린 종이 짤랑거리자 클리브 잭슨은 걸레질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알렉스를 발견하고 카운터로 들어왔다.

 “일은?”

 “해결했어.”

 알렉스는 머리에 붙은 물방울을 매트 위로 마구 털어냈다.

 “내 차는?”

 “세 번째 줄에 주차해놨어.”

 “기스 났으면 두 배로 청구할 거야.”

 클리브가 장난스럽게 던졌다.

 클리브 잭슨은 이 Needles Eye Cafe의 주인 둘째아들로, 야간 시간동안 홀을 지키며 몇 안 되는 주문을 받고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그는 그 일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이따금 파트타이머를 내버려두고 근처 오두막에서 농땡이를 피우다가 새벽이 될 무렵 슬그머니 돌아오는 게 그의 유일한 낙처럼 보였다. 알렉스 스튜어트는 햄프셔에 머문 이주일 동안 거의 빠짐없이 밤마다 이곳을 드나들었는데, 클리브는 세 번에 한 번 꼴로 홀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지난주 그의 아지트로 출발한지 거의 오십분 만에 사색이 되어 카페로 돌아왔다. 오두막은 매장으로부터 약 한 시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클리브가 얼마나 밟아댔는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었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매트 위로 주저앉았고,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덜덜 턱을 떨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맹세하고 고하길, 소파 옆에 있던 탁자가 마룻바닥으로부터 약 3피트 정도 허공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가 비명을 지르자, 집안 전체가 따라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클리브는 자신이 어떻게 차를 타고 돌아왔는지도 거의 기억하지 못 했다.

 알렉스는 보통 이런 일에는 돈을 받지만, 클리브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그냥 차키를 가져가기로 했다. 그리고 왕복 2시간 정도 되는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오두막집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그는 십분도 채 되지 않아 그곳을 평범한 공간으로 돌려놓았다. 다시 카페로 돌아왔을 때, 클리브는 경찰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도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여기고 있었다. 확실히 그건 경찰이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키를 돌려주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리브는 한동안 오두막집은 얼씬도 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카페를 지켰다. 나중에 그는 값을 지불하겠다고 했고, 알렉스는 돈 대신 차를 한 번 빌려달라고 했다. 여기서 차로 두 시간은 떨어진 뉴 포레스트 부근에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알렉스는 히치하이킹에는 소질이 없었다.

 “빌려줘서 고맙다.”

 알렉스가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카운터로 던졌다.

 “뭐, 내게도 갚을 게 있었으니까.”

 클리브가 어깨를 으쓱였다.

 “주차장에 못 보던 차가 있던데.”

 알렉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차주가 누구야?”

 “랜드로버?”

 클리브가 물었다.

 “그래, 남색 랜드로버.”

 “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클리브는 턱짓으로 홀을 가리켰다.

 홀에는 클리브와 알렉스를 포함한 총 다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60대 노인이 창가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주방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이따금 고개를 들어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는데, 음악소리가 커서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한 시간 째 앉아있어. 윈체스터로 간다던데. 확실히 여기 주민은 아니지.”

 클리브가 말했다.

 “음악 좀 줄여, 클리브.”

 알렉스가 입술을 핥았다.

 그는 테이블로 갔다. 머리 위로 진 그림자 때문에 벽 소파에 앉은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알렉스는 그가 청년이라기보다 차라리 소년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은 왜소한데다가 창백했고, 희미한 주근깨가 콧잔등을 중심으로 뺨에 포진해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

 소년이 먼저 잔뜩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알렉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저 앞에 세워둔 랜드로버의 차주 분 되시는지?”

 “네, 그런데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소년이 방어적으로 대꾸했다.

 “네가 운전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이쪽 신사 분?”

 알렉스가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깁슨은 프랑스인이라 영어를 몰라요.”

 “프랑스인이라도 운전은 할 줄 알잖아.”

 알렉스가 남자의 넓은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이봐요.” 

 남자는 거의 졸고 있던 모양이다. 알렉스가 흔들자마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온 눈은 둥그렇고 선해보였고, 인중은 면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했다. 이마로 흘러내린 곱슬머리가 진한 눈썹을 따라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낯선 얼굴 때문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당신 운전하지 마요.”

 알렉스가 말했다.

 “알겠어요? 오늘 밤에는 운전하지 말아요.”

 “그쪽이 뭔데요?”

 소년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토미, 누구야?”

 깁슨이 물었다.

 “말할 줄 아네?”

 알렉스가 토미를 바라보자, 토미는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쪽이 누군데 저희한테 이러시는 거죠?”

 “너희 밀퍼드에서 오는 길이지.”

 알렉스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이죽거렸다. 토미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부근에서 실종 신고가 있었거든.”

 알렉스는 손을 비비며 토미와 깁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생각에 그게 너희랑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모르는 일이에요.”

 토미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어쩐지 불안한 눈치였다.

 “저흰 가봐야 해요. 깁슨, 일어나자. 이 사람 미친 사람이야.”

 “사람 면전에 대고 미쳤다고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알렉스가 투덜거렸다.

 토미는 벌떡 일어섰다. 깁슨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 둘의 눈치를 살폈다. 토미는 눈짓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알렉스를 밀친 후 황급히 카페를 뛰쳐나갔다. 성난 종소리가 매장 음악을 추월했다. 깁슨은 나가기 전까지 머뭇거리며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토미는 랜드로버 앞에서 초조하게 깁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깁슨이 휘청거리며 현관 계단을 밟고 내려갈 때, 알렉스가 달려 나갔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굵어져 있었다. 깁슨이 차키를 꽂자, 토미가 다급하게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알렉스는 세 칸짜리 계단을 한 번에 뛰어넘었다. 그리고 단숨에 랜드로버까지 도달한 후, 조수석을 활짝 열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토미가 차안에서 비명을 질렀지만 알렉스는 아랑곳 앉고 조수석에 몸을 욱여넣었다. 운전석에 앉은 깁슨이 당황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출발해.”

 “당장 내려요.”

 토미가 경고했다. 알렉스는 백미러로 토미를 내다보았다.

 “지금 출발할 거라면 나도 동승시켜야 할 거야.”

 “왜요?”

 “아님 너희 둘 다 죽을 테니까.”

 알렉스는 코트 안쪽에 손을 집어넣고 둔중한 화기를 붙들었다. 곧 품속에서 희미하게 철컥, 소리가 났다. 보닛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차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어쩔래?”

 알렉스가 물었다.

 백미러로 성난 한 쌍의 녹색 눈동자가 죽일 듯이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마치 고양이 같군. 알렉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참 후, 토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깁슨, 출발해.”

 “그래도 돼?”

 깁슨이 물었다.

 “응.”

 토미는 여전히 알렉스를 노려보는 채 대답했다.

 깁슨은 와이퍼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 야간 카페의 네온사인이 멀어지는 동안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허스트 도로에 들어서자, 가로등 덕에 시야가 다소 밝아졌다. 깁슨은 불안한 눈빛으로 조수석과 백미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좌측 가드레일 너머로 아득한 밤바다가 이어졌다. 절벽 아래에 깊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밀퍼드로 운전해.”

 알렉스는 길게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힘껏 기댔다.

 “왜요?”

 토미가 물었다.

 “실종자를 찾았으니까.”

 알렉스가 말했다.

 “도로 있던 곳에 돌려놓자고.”

 “밀퍼드에서 오는 길은 맞지만 저흰 관계없어요.”

 “아니, 너희는 관계있어.”

 알렉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번에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다시 한 번 코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철컥. 그 소리는 여전히 효과가 있었다. 토미는 긴 한숨을 내쉬곤 깁슨에게 부탁했다.

 “저 사람이 말한 곳으로 운전해줘.”

 “밀퍼드로?”

 깁슨이 물었다.

 “응.”

 한 박자 느리게 토미가 대답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주변이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그들은 허스트 도로를 벗어나 웨스토버로 들어섰다. ‘밀퍼드 온 시, 앞으로 50마일’이라는 표지판을 지나칠 무렵,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트렁크 안에서 날뛰고 있었다. 등을 바닥에 붙이고 다리로 뚜껑을 걷어차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서 울부짖었는데, 처음엔 아이 울음처럼 가느다랗고 겁에 질려 있다가, 끊어질 무렵 갈라지면서 묵직하고 잔뜩 쉰 저음을 냈다. 늙은 개가 짖어도 그런 소리를 내지는 못 했을 것이다. 째진 고음이 드라이버에 철판을 대고 마구 긁는 소리처럼 들렸다.

 깁슨은 터질 것처럼 하얗게 질린 손으로 운전대를 움켜쥐고 있었다. 알렉스는 운전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지나치게 겁에 질려있다면 차를 멈출 생각이었던 것이다. 밀퍼드에 도달하지는 못 했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그럭저럭 해 볼만도 했다. 그러나 깁슨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는 이 낯선 청년이 트렁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며, 왜 이 차에 탑승했는지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모른 척 해줘.’

 알렉스는 대답 대신 웃어주었다.

 “네 이름이 토미라고 했었나?”

 바로 그 순간, 찢어질 것 같은 비명소리가 트렁크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쪽은 우릴 죽일 생각인가요?”

 토미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 반대야.”

 비명소리가 너무 커서 알렉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너희의 구세주지.”

 “총으로 협박하는 구세주도 있나요?”

 “오, 토미. 그렇지 않으면 넌 내 말을 듣지 않았을 거잖아.”

 그러나 알렉스가 가진 것은 사실 총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저녁 내내 뉴 포레스트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곳에는 포트머스와 본머스 사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국립공원이 있다. 실상 관광요소는 몇 가지 없는 곳인데, 유일한 볼거리가 있다면 조랑말들이다. 공원 도로를 따라 차를 몰다보면 울타리 너머로 풀을 뜯는 지역 조랑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주 전부터 밤마다 불 탄 말들이 나타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절뚝거리는 폼을 수상히 여긴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었다가, 고기 탄내를 풍기며 침을 흘리는 끔찍한 조랑말 시체를 보고 질겁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관리인은 공중 화장실에 붙은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마침 알렉스의 ‘영적인’ 도움을 받은 햄프셔의 일가가 진위를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에, 관리인은 전화상에서부터 그가 벌써 사건의 반은 해결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알렉스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그것들을 직접 보았는데, 그들은 악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공원 입구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낯선 소녀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알렉스가 물었다.

 “내 몸을 도둑맞았어.”

 소녀는 검은자가 없었다. 동공이 있어야 할 자리는 깔끔하게 지워져 있고 흰자가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동상처럼 보였다.

 “무덤이 엉망이 된 걸 부모님이 아시기 전에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싶어.”

 “어쩌다 그 꼴이 된 건데?”

 “도굴꾼이 내 몸을 가져갔거든. 나는 곧 떠날 계획이었는데, 덕분에 다 틀어져버렸어. 몸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만, 나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 그게 움직이고 있거든.”

 “그래서?”

 “네가 그걸 멈춰줬으면 좋겠어.”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그럼 넌 내게 뭘 줄 건데?”

 소녀가 알렉스가 서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젖혔는데, 두 팔을 단단히 양 옆구리에 붙인 채 얼굴만 움직였기 때문에 그 몸짓은 마네킹을 떠오르게 했다.

 “난 줄 게 없어.”

 소녀가 딱딱거렸다.

 “대신 네가 부르면 딱 한 번 달려와서 필요한 만큼 일할게.”

 “필요한 일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좋아.”

 그러자, 소녀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알렉스의 생각에, 그 애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소녀는 이미 웃는 법을 잊어버려서, 그 비슷한 것만 끔찍하게 겨우 흉내 낼 수 있었다. 뒤집힌 입안으로 단단하게 다물린 새까만 이가 드러났다. 그 속에서 웅웅거리는 벌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네 이름이 뭐야?”

 알렉스가 물었다.

 “라일리.”

 소녀가 대답했다.

 “좋아, 라일리. 넌 어디서 왔지?”

 “밀퍼드.”

 “거기에도 무덤이 있어?”

 “응.”

 “지금 네 몸이 어디 있는데?”

 “허스트.”

 소녀가 말했다.

 “내 몸은 움직였다가 멈췄다가 해.”

 “네 시체가 끝내주게 혈기왕성한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 실려 운송되고 있는 것이겠군.”

 알렉스가 입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알겠어.”

 알렉스가 구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열두 살 때였다. 스튜어트 가문이 소유한 버크셔의 여름 별장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쌓여 있다. 그의 부모님은 가업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그곳에 구비해두고 때때로 알렉스와 그의 형에게 사용법을 알려주곤 했다. 알렉스가 기억하는 가장 흥미로운 도구는 궤짝이었다. 평범한 나무 상자처럼 보였지만 걸쇠를 걸면 무슨 수를 써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건 사실상 궤짝이 아니라 감옥에 가깝다고 아버지 위넌트가 설명해주었다. “알렉산더, 그러나 영혼을 가둘 수는 없단다. 이곳에 가둘 수 있는 건 이미 영혼을 상실한 존재들뿐이다.” 요컨대 위넌트 스튜어트는 악마나 그 엇비슷한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그 해 여름, 어머니 마거릿 스튜어트가 그곳에 갇혔다. 그리고 영영 빠져나오지 못 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궤짝에 그녀를 가둔 건 다름 아닌 알렉스였다. 그가 망설임 없이 걸쇠를 걸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영혼이 거실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검은자를 상실한 흰 눈으로 소파에 앉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입에서는 악취가 솟아올랐고 벌레가 그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녀는… 영혼의 상태로도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영혼은 죽을 수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몸은 어디다 두셨어요?”

 알렉스가 놀라서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손만 들어 올려 다락을 가리켰다. 어머니의 영혼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알렉스가 다락으로 올라갔을 때, 마거릿의 몸은 누운 채 팔을 뒤로 꺾어서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둥글게 치솟은 배가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팽팽하게 당겨진 살가죽 아래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게 몸을 뒤틀 때마다 마거릿의 뱃가죽이 고무 같은 소리를 내면서 찢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늘어났다. 알렉스는 악마가 들어간 몸은 뒤집혀 걸어 다닌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마거릿의 몸은 이미 어머니가 아니었다. 알렉스는 뱃속의 그것이… 탄생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궤짝을 열어 그녀를 욱여넣었다.

 걸쇠를 걸기 전, 그게 말을 하기는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로 울면서 애원하였다. 알렉스는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사태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 아버지는 짤막하게 한 마디만을 전했다. “잘했다.” 그는 그게 구울의 짓이라고 나중에 설명해주었다. “구울이라는 것은, 사막에서 살던 악마의 자손들이다. 악마가 되고자 했으나 실패한 것들이지. 아랍의 흑마술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단다. 이제 자력으로 구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기록으로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낮에는 움직일 수가 없어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거나 다른 모습에 빗대어 살아가야만 하지. 그러나 밤에는 여행객들을 잡아먹고 살았다. 유럽으로 넘어와선 묘지와 폐가에 기생하면서 시체를 파먹었고, 그걸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배를 갈라 불태우는 것뿐이야. 만약 네가 배를 가르면 그게 부탁할 거다. 다시 한 번 자신을 갈라달라고 말이다. 그 때 절대 부탁을 들어주어서는 안 돼. 그건 거꾸로 뒤집어진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부활하면 너로서는 도무지 죽일 방법이 없을 거다. 다른 가문을 찾아가 부탁해야 해. 게다가 구울은 교활하고 끈질기지. 손가락만 남아도 움직일 수 있다.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어딘가에 파고들어 숙주를 조종할 수 있는 게 바로 구울이다. 마거릿의 몸에 바로 그 조각이 있다. 네 어머니는 그걸 죽이는데 실패했고, 당장 우리로서는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다. 마거릿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몸을 잃은 영혼들이 다 저런 모습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몸을 절대 빼앗겨선 안 될 것에게 빼앗겼을 때, 영혼은 저주를 받는다. 처벌을 받는 셈이지. 구울은 주인 있는 육신으로는 초대를 받지 않는 한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허스트 도로를 따라 간의 카페로 향하는 동안, 알렉스는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했다. 소녀의 영혼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했고, 뉴 포레스트 국립공원 울타리 너머에는 불에 타 죽은 짐승의 시체들이 절뚝거리며 돌아다닌다. 그리고 말들의 복부에는 갈라진 상흔이 있었다. 알렉스는 그들을 다시 갈라서 모조리 불태웠다. 불꽃은 비명소리를 냈다. 누군가 구울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그게 누굴까?

 “차가 흔들리는 것 같아.”

 토미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트렁크가 쿵쿵거리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이야기 좀 끊지 마, 토미.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조랑말들.”

 깁슨이 대답했다.

 “고맙다, 프랑스 운전자야.”

 알렉스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전화로 듣기엔 이상한 문제였어. 동물들은 영혼이 없거든. 그러니까 악령은 아니었지. 게다가 짐승이 좀비가 되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이야.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는 한 짐승형의 좀비는 존재할 수가 없어. 하지만 내가 알기로, 영국에서 그런 짓을 할 전도유망한 미치광이는 없거든……. 그래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어. 직접 봐야만 알 것 같았거든.

 노을이 질 무렵부터 짐승들의 움직임이 뜸해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곧 밤이 됐지. 말들이 서서 자더군. 초식동물이 서서 잔다면, 그건 주변에 적이 있어 경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뉴 포레스트의 평원에는 말을 사냥할 만큼 큰 육식동물이 살지 않아. 관리인이 말하길, 이곳의 말들은 눕거나 앉는 게 익숙하다고 하던데 맹세코 단 한 마리도 그렇지 않더군. 다들 바짝 경계한 채로 서있었고, 쉽게 잠들지 못 했어.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적당한 곳에 차를 댄 후,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지. 라디오가 없었으면 지루해서 죽었을 지도 몰라.

 자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그림자가 평원 끝에서부터 울타리를 향해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어.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사람의 키는 아니었지. 그건 확실히 말들이었어. 세 마리 정도 됐지. 아니, 세 마리였어.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가는데, 울타리 앞에서부터 악취가 코를 찌르더군. 분뇨 냄새는 아니었어. 정말 끔찍할 정도로 지독해서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았어. 비가 오면 젖은 흙냄새가 피어오르지만 그 땐 정말이지, 그 냄새 외에는 맡을 수가 없더군.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그 악취의 원인을 알 수 있었지.

 정말 그 말들은 죽어있더군. 갈기는 불에 모조리 타서 거의 심지만 남아있었고, 가죽은 오그라들어서 등판에 쪼글쪼글하게 들러붙어있었어. 피부가 떨어져나간 살갗은 새빨갛게 드러나 있고, 불에 그을린 부분은 어두운 분홍색으로 번들거렸어. 한 놈은 점박이 무늬가 있었던 건지 엉덩이 부분만 색이 달랐는데, 거긴 자주색으로 썩어가고 있던 게 기억나. 그리고 그것들의 배는……. 배가, 찢어진 것도 아니고 아주 깔끔하게 갈라져 있었는데, 분명 누군가 고의적으로 갈라버린 거였어. 장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새까만 조직들이 부패해가고 있었고, 그 속에는 벌레가 들끓고 있었어. 움직일 때마다 주렁주렁 붙은 그 벌레고치와 썩은 조직들이 흔들거렸는데, 이따금 바닥으로 누런 진물이 뚝 뚝 떨어져 썩은 내를 풍기더군. 그 말들은……. 마지못해 움직임을 종용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나 같아도 할 수만 있다면 더는 움직이지 않고 바닥에 처박혀 마저 썩어가고 싶었을 거야. 제 때 대지로 돌아가지 못 한 것에 용서를 구하면서……. 지금이라도 영원히 잠들 수 있음에 감사했겠지.

 난 그 말들을 살려내거나 죽인 적이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놈들의 배를 다시 한 번 갈라주었어. 말들은 목구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픽픽 쓰러졌지. 반항을 하거나 달려들지는 않았어. 말했지만 그 어떤 의지도 상실한 몸뚱이였거든. 그놈들을 움직이게 종용하던 것들도 더는 그 불쌍한 짐승들의 몸에 미련이 가지지 못 했을 거야.

 난 한 마리씩 남김없이 태웠어. 마지막 한 마리를 태울 때, 그건 바닥에 목을 꺾은 채 주둥이를 위로 쳐들고 누워있었지. 가까이 다가가자 그게 눈동자만 굴려서 나를 바라보더군. 찌그러진 동공에는 구멍이 나있었는데, 눈동자가 움직이는 바람에 거기서 검은 국물이 흘러내렸어. 그래서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 장난 아니게 역겨웠지만 불쌍한 마음이 든 건 순전 그 때문이었어. 그 때, 그게 입을 벌려서 말을 했지. 그건 짐승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처럼 들렸어. ‘아에에에…….’ 말의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이는 이빨이 꼭 인간의 어금니처럼 보였어. 그건 계속 울부짖었어. ‘아에에에……. 아에에에…….’ 목구멍으로부터 뭔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장담컨대 가래나 진물이었을 것이고, 공기가 들락거리는 바람에 끓기 시작한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그 소리는 더욱 기괴해졌어. 마지막엔 입을 오물거려서 무슨 말인가를 했지. 발음이 불분명해서 잘 알아듣지는 못 했어. 하지만 아마 이렇게 말하려고 했을 거야. ‘제발 다시 한 번 갈라줘.’

 프랑스 놈, 너 이름이 뭐랬지? 그런 말을 하는 존재가 뭔지 너는 알고 있지?”

 “그래.”

 깁슨이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걸 막을 수가 없어.”

 그들은 밀퍼드에 도착했고 A13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트렁크의 소녀가 날뛰기 시작해서 차체가 통째로 마구 흔들렸다. 토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차가 흔들리고 있어.”

 토미가 헐떡였다.

 “깁슨?”

 “꺼내달라고 했잖아!!!”

 쾅쾅쾅.

 “괜찮아, 토미. 별 일 아니야.”

 깁슨이 대답했다.

 “차를 세워.”

 알렉스가 말했다.

 랜드로버는 갓길에 멈추어 섰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코트 깃을 올리는 게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알렉스는 뻣뻣하게 굳은 채 앉아 있는 토미를 백미러로 내다보면서 깁슨에게 명령했다.

 “쟤가 이 이상 듣지 못 하게 해.”

 “내가 뭘 듣지 못 하는데?”

 토미는 백미러로 알렉스와 시선을 맞추면서 깁슨에게 물었다.

 “네가 늘 듣지 못 하던 것들.”

 깁슨이 대답했다.

 “이번에는 네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토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응. 토미, 나는 할 수 없어.”

 깁슨이 작게 중얼거렸는데, 죄책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 친구는 뭔가를 죽일 수는 없어, 토미.”

 알렉스가 코트 속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는 거의 알렉스의 손바닥만 했다. 은으로 만들어져서 묵직했고, 십자가를 둘러싼 가시나무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알렉스가 그것을 엄지로 밀어서 열자, 둔중한 철컥 소리가 났다. 그는 몸을 돌려 토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라이터에 불을 올렸다. 주변이 환해져서 토미도 알렉스의 손에 들린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난 총으로 누굴 협박하는 깡패는 아니거든.”

 알렉스가 씩 웃었다. 토미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앉아있었다.

 “너도… 깁슨이랑 비슷한 사람이야?”

 갑자기 트렁크에서 짐승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작은 주먹이 트렁크를 미친 듯이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차는 마치 춤추는 것처럼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아니, 저 친구는 사람이 아니잖아.”

 알렉스는 지포라이터를 닫았다.

 “난 사람이고, 사냥꾼에 가깝지.”

 차가 다시 어둠 속에 휩싸이자 모든 소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토미는 아무 것도 듣지 못 한 채 앉아 있었지만, 듣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알렉스가 손가락으로 토미와 깁슨을 차례로 가리켰다.

 “넌 내리지 말고, 너는 내가 부르면 내려.”

 트렁크는 이미 솟아오른 모양새로 찌그러져 있었다. 뚜껑을 열기 전, 알렉스는 덜컹거리는 차안에 앉아 헐떡이는 토미의 뒤통수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백미러로 그를 내다보던 깁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알렉스가 능숙하게 잡아채지 못 했더라면 목을 물어 뜯겼을 것이다. 한 손으로 목을 붙잡고 트렁크 바닥으로 처박자 차체가 충격을 받아 통째로 출렁거렸다. 알렉스는 나머지 손으로 소녀의 대가리를 짓눌렀다.

 “안 돼.”

 소녀가 그륵거리는 쇳소리를 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소녀의 몸은 뱃머리에 던져진 생선처럼 거칠게 꿈틀거렸다. 알렉스의 손목을 할퀴고 때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이따금 작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알렉스는 꽤 나중에야 그것이 손톱이 꺾어나가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들은 부패한 손가락에 너무 오래도록 헐겁게 매달려 있던 나머지 충분히 공격하거나 위협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목은 미끌미끌해서 계속 붙잡고 있기가 몹시 힘들었다. 피부조직이 기름진 생선껍질처럼 누렇게 벗겨져 손바닥 곳곳에 들러붙고 있었다. 알렉스는 역겨움에 신음하면서도 결코 놓지 않았고,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소녀의 얼굴가죽 너머로 어떤 벌레 같은 것이 아래쪽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기어 올라왔다. 소녀가 입을 달싹거리며 어떤 말이든 하고자 애썼다.

 “아에에에엑…….”

 그러나 그 벌레는 멈추지 않고 피부를 뚫을 기세로 눈구멍을 향하여 전진했다. 바로 다음 순간, 왼쪽 동공을 뚫고 무언가 솟구쳐 올랐다. 바싹 마른, 길고 쭈글쭈글한 갈색 손가락이었다.

 바로 구울의 조각이었다.

 “알렉산더!!!”

 시체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손가락은 곧장 알렉스를 향해 튕겨져 올라왔다. 그는 거의 놓칠 뻔 했고, 눈앞에서 간신히 그걸 붙잡을 수 있었다. 그게 몸을 뒤틀면서 끽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알렉스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알렉스가 재빨리 지포라이터를 열었다. 손가락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가 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알렉스는 한 발짝 물러나 손가락이 꺼지지 않는 화마 속에서 죽어가는 걸 끝까지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것이 마지막 힘을 다해 꿈틀거리다가, 머리를 처박고 웅덩이 속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쪽에서부터 느닷없이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알렉스는 차에 기댄 채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 내리는 한밤의 풍경이 제대로 보일 리는 만무했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 가려져 인영만 드문드문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그 덩어리들을 뚫고, 아주 희미한 등불 같은 것이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불쑥 나타났다.

 알렉스가 차를 두들겼다.

 “이제 네가 할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좀 나오지.”

 깁슨은 기다렸던 것처럼 튀어나왔다. 그들은 거리를 두고 서서 서쪽으로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하얀 불꽃같은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라일리로, 몇 백 마일이나 떨어진 뉴 포레스트에서 밀퍼드까지 양 옆구리에 손을 붙인 채 뻣뻣하게 굳은 그 상태 그대로 자신의 몸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내 생각엔 쟤가 천국행 티켓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알렉스가 깁슨을 흘끔거렸다.

 “가능하다면 끊어서 보내주는 편이 좋겠지.”

 “나는 원칙대로 수행할 뿐이야.”

 깁슨이 대답했다.

 알렉스는 트렁크에 반쯤 걸친 채 늘어진 라일리의 시체를 훑어보다 말고 원하는 걸 발견했다. 그건 작은 칼이었고, 대체 라일리가 어디서 그런 걸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건 라일리의 것이었다. 알렉스는 칼을 슬그머니 빼내어 뒷짐을 졌다.

 라일리의 영혼이 랜드로버에 도달했을 때, 알렉스와 깁슨은 마치 트렁크의 문지기 마냥 양쪽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라일리.”

 알렉스가 인사했다.

 “안녕, 스튜어트.”

 라일리가 검은 이를 드러내며 즐겁게 웃었다.

 “옆은 누구야?”

 “티켓 끊어주실 분.”

 “오, 천사구나.”

 라일리가 낄낄거렸다.

 “유감스럽게도 난 필요 없어. 안 가.”

 “널 지옥에 보내지는 않을 거야.”

 깁슨이 말했다.

 “지옥에 가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라일리가 대꾸했다.

 “어서 비켜달라고, 너희 둘 다! 내 길을 막고 있잖아!”

 그런 후, 라일리는 곧장 자신의 몸속으로 뛰어들었다. 알렉스가 당황한 눈으로 깁슨을 바라보았는데, 깁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쟤가 지금 뭘 한 거야?”

 알렉스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라일리의 시체가 휘청거리면서 일어났다. 그건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 해서 좌우로 흔들렸는데, 라일리가 번쩍 고개를 쳐든 순간 구멍 난 왼쪽 눈동자로부터 줄줄 검은 국물이 샜다. 라일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피부가 벗겨진 손바닥으로 눈 주변을 더듬었다.

 “정말 훌륭한 모양새가 됐구나, 라일리. 그 몸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알렉스가 빈정거렸다.

 “거기서 나와, 라일리. 이런 식이면 이 천사놈도 널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단 말이야. 우린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네가 빌어먹을 구울과 거래를 했다는 것 정도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 정말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라일리. 정말 어리석었어.”

 “어쨌든 내가 이겼잖아.”

 라일리가 쇳소리를 내며 딱딱거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어마어마한 악취가 솟았다.

 “그건 네가 이긴 게 아니라 운이 좋았던 거지.”

 알렉스가 고쳐주었다.

 “구울에게 일단 몸을 넘겨주면 끝이야.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야?”

 “난 죽은 지 고작 삼일밖에 안 됐어.”

 라일리는 으르렁거렸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어! 난 아직 다 썩지도 않았고, 아직 신선한(…fresh) 상태였다고.”

 “네가 무슨 신선식품 같은 건줄 알아? 죽으면 끝이야, 라일리. 그냥 끝난 거야. 그게 네게 어떤 감언이설을 한다한들 네가 살아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 넌 그냥 네 시체를 구울에게 넘겨준 거야. 칼을 쓴 건 영리한 일이긴 했지만… 아니, 영리한 일도 아니지. 시체 주제에 그걸 완벽하게 해낼 수도 없었을 테니까. 덕분에 난 네가 처리 실패한 구울 조각들 수습한다고 밤새 국립공원이나 뛰어다녀야 했거든. 네 몸뚱이 제 때 못 찾았으면 저 뒷좌석에 앉은 불쌍한 토미도 뒤졌을 거야. 너 쟤가 어떤 상태인지 보여?”

 라일리는 관심 없다는 것처럼 다리를 흔들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그냥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바로 그게 문제야, 라일리. 네 몸은 이제 썩 정상적인 시체도 아니고, 구원받을 수도 없는 영혼이 들어가 있고,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거라고도 볼 수 없어.”

 “그건 쟤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토미는 시체가 아니거든. 너랑 달라.”

 알렉스가 짜증을 냈다.

 “어쨌든 넌 운이 좋은 편이야. 널 어떻게든 해줄 놈이 여기 있으니까. 그러니까 현명한 선택하고 광명을 찾자고. 오케이?”

 “No.”

 라일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집에 갈 거야.”

 “그 꼴로?”

 “멀리서 지켜만 볼 거야.”

 그렇게 말할 때, 라일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나도… 내 꼴이 어떤지는 알아!”

 라일리는 트렁크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눈동자로부터 후두둑 검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엉거주춤 두 팔을 벌리고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다가, 알렉스 앞에 똑바로 섰다. 라일리의 키는 알렉스의 허리까지 왔다. 그녀가 알렉스를 올려다보자, 뺨을 타고 그 검은 국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제발!”

 라일리가 말했다.

 알렉스는 깁슨을 바라보았고, 깁슨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로서도 당장 뭘 어찌할 도리는 없다는 소리였다. 알렉스는 다시 라일리를 바라보았다.

 “…좋아! 알아서 해.”

 라일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알렉스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알렉스는 기겁하며 두 손을 들었는데, 그녀를 밀쳐내지는 못 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라일리의 몸 상태가 지독했으므로 조금이라도 만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 라일리가 천천히 물러났다. 알렉스는 떨떠름하게 자신의 코트에 묻은 검고 묽은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제 가 봐.”

 “약속을 너무 오래 묵혀 두지는 마.”

 라일리의 왼쪽 눈동자가 폭삭 찌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걸 제대로 맞춰보려고 애쓰다가, 이내 포기하곤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애꾸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던가.”

 “알겠으니까 빨리 꺼져.”

 알렉스가 악취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라일리는 갓길의 가드레일을 넘어 겅중겅중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마구 꺾인 풀과 진흙발자국만이 남았다. 빗줄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둘이 차로 돌아왔을 때, 토미는 뒷좌석 유리창에 붙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끝났어?”

 토미는 이런 일들이 익숙한 사람처럼 물었다.

 “그래, 다 끝났어, 토미.”

 깁슨이 대답했다.

 “네가 한 거야?”

 토미가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한 거야.”

 알렉스는 피곤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너희 윈체스터로 간다고 했지?”

 “그런데?”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따라가려고?”

 “이왕 가는 거 날 태워주면 좋지.”

 알렉스가 말했다.

 “너희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걸.”

 “네가 뭔지도 모르는데?”

 “일단 난 사람이고 악마는 아니야.”

 알렉스가 킬킬거렸다.

 “그리고 유령이나 괴물 같은 걸 죽이지.”

 “악마는?”

 “악마는 죽일 수 없어, 토미.”

 “깁슨은 죽였어.”

 “그래, 깁슨은 가능할 거야.”

 알렉스가 귀찮은 듯이 대꾸했다.

 “어쨌든 같이 가자고. 그리고 가는 내내 너희도 나에게 설명을 좀 해줘야 할 거야. 나도 너희가 대체 뭘 하는 놈들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깁슨은 대답 없이 시동을 걸었고, 토미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둘 다 그에게 내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므로, 알렉스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차가 천천히 갓길을 벗어났고, 셋은 또다시 침묵 속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내 알렉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버크셔에 있는 여름 별장에 대해서. 스튜어트 가문이 오래 전부터 이어온 가업과 평생의 사업에 대해서. 다락과 궤짝에 대해서.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랜드로버가 햄프셔를 벗어나는 동안, 알렉스 스튜어트는 내내 떠들어댔고, 그건 순전히 말수가 적은 두 동행자 때문이었다.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실제 그랬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그들은 거의 반 년 간 영국 곳곳을 누비게 된다.

 이제 나는 이 셋의 수상한 유랑기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

 영안은 없는데 귀신과 크리쳐가 잘 꼬이는 토미, 수수께끼 프랑스인 깁슨, 엑소시스트 집안 막내 알렉스라는 설정으로 쓴 것. 사실 세부적인 설정은 다 짜놨는데 고어+호러물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이 글을 쓰는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고.. 결과적으로 다신 꺼내보지 않았다. ㅋㅋㅋㅋㅋㅋ 호러물 잘쓰는 사람을 정말 부럽다...

 

 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글의 기반이 된 개인적인 설정을 주절주절 풀어보자면, 토미 일가는 아빠가 부정하게 들여온 골동품에 악마가 깃들어 있던 바람에 저주를 받아 몰살 당했음. 그때 토미는 한 번 지옥불에 떨어진다... 뒤늦게 천사가 강림했는데 그게 깁슨임. 애초에 골동품 자체가 좀 문제가 많았음. 사람을 몇백명 죽인 사형도구 비슷한 거 ㅇㅇ 토미 부모님은 그 모든 사실을 알고서도 모종의 이유로 이 도구를 들여온다고 애를 많이 쓴 사람들인지라 죄가 많아서 깁슨은 토미의 부모를 구원해줄 수는 없었고, 어린 토미만 지옥불에서 꺼내온다. 결과적으로 토미는 한 번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한 몸이 된 것이다.

 사흘.. 그 뒤로 토미에게는 악령이며 온갖 크리쳐가 꼬이는데 토미한테서 성물의 냄새가 나서임. 사흘 만에 부활한 사람 중 가장 유명하신 분, 그러하다 예수 때문이다. 깁슨은 토미가 본래 살아야 했던 수명을 다할 때까진 토미 곁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함. 그래서 인간의 모습으로 토미와 함께 돌아다니기 시작했음 > 이 상태에서 알렉스 만남 (글의 시점은 여기)

 깁슨은 징벌의 천사인데, 그가 지옥불을 뚫고 강림했을 때 토미는 깁슨과 딜을 했음. 부모님의 죄를 덜어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천국으로 보낼 수는 없지만 죄를 덜어서 지옥에서 꺼내달라는 그런 딜이었음. 어차피 그래봤자 림보(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인 연옥의 세계)에 떨어지는 것밖엔 안 되겠지만.. 그래서 토미는 부활한 후에 부모의 원죄를 뒤집어쓰고 일생동안 죄악의 존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음. 토미의 체질을 그대로 두는 것도, 토미의 고통을 관전하는 것도 깁슨의 할 일인 것이다. 토미를 보호하는 건 토미가 부모의 원죄를 덜기 전에 죽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고, 죽어서 징벌을 제대로 받지 못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토미가 딜할 거 알고 신이 징벌의 천사를 보내준 것이기도 함 ㅇㅇ 깁슨은 그래도 애가 어리고 자길 잘 따르니까 금방 정이 들었는데 토미가 룰에서 어긋나는 순간에는 본모습으로 돌아가서 매섭게 몰아붙이기도 한다는 그런 설정임. 애초에 그건 깁슨 의지라기보다 신의 명령에 따른 천사의 모습인 거겠지만.

 알렉스는 엑소시스트로 유명한 집안의 막내 아들이고, 엄마는 구울 때문에 죽었음. 돌아다니면서 엑소시즘을 하며 살고 있는 초짜(but 그 집안 사람들이 그렇듯 천재)엑소시스트인데 도중에 깁슨이랑 토미를 만나서 벌어지게 되는 그런.. 삼류.. 오컬트 소설이었다.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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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물과 번개의 아이들»
2차/old 2019. 10. 24. 19:11

 어젯밤 토미는 공중으로 떠오른 램프를 보았다. 그것은 테일러 부부가 결혼기념일을 맞아 장만한 물건으로, 삼년 전 집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단 한 번도 침대 협탁 위를 벗어난 적이 없던 전구였다. 그들 부부가 램프를 어찌나 애지중지 했는지 토미조차 만져본 적이 거의 없었다-그 둘은 가능한 한 아들을 침실에 들여놓지 않으려 애썼다. 토미가 전구를 깨뜨릴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램프는 공중에 정확히 0.4초가량 머물러 있었다. 코드 째로 뽑혀 올라간 램프는 마치 뿌리 채 뽑힌 상록수처럼 보였다. 끝에 흙 대신 전기가 묻어있다는 점만 달랐을 뿐 거의 그랬다. 희미한 오렌지색으로 깜빡이던 전구는 마침내 플러그에 남은 전류를 소진했고, 포물선의 정점에 도달한 그 찰나에 깜빡거리며 힘을 다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바닥으로 추락했다. 비뚜름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테일러 부부의 램프-전구의 연약한 유리가 박살나고 필라멘트가 식탁 아래로 구르는 장면은 슬로우 모션처럼 프레임 하나하나 토미의 머릿속에 각인되었다. 그러나 토미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어떤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졌고, 이번에는 접시가 날아올랐다. 접시는 램프보다 더 짧은 시간을 공중에 머물렀다. 접시 다음은 숟가락, 숟가락 다음은 전화기, 전화기 다음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은 공중에 저마다의 무게로 매달려 있다 말고 순식간에 추락했고, 조각조각 박살나면서 요란한 소리를 냈다.
 테일러 부부가 언성을 높이기 시작한 건 근래의 일이지만 서로의 물건을 집어던진 것은 지난밤이 처음이었다. 그들은 지나치게 흥분한 나머지 거실 복도 가장 첫 번째 방에서 자고 있던 열 두 살짜리 아들의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만약 가디가 여느 때처럼 문지방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그들 부부에게 컹컹 짖어댐으로써 침대 한구석에서 귀를 막고 있는 토미의 존재를 상기시켜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틀 전부터 진행된 포켓몬센터 정기검진으로 인해 그들의 가디는 문지방이 아닌 센터 소속 몬스터볼에 얌전히 들어 있었다. 아마 이틀 뒤에나 다시 이집으로 돌아올 수 있으리라. 그 때 가디는 알아차릴 수 있을까? 집안의 몇 가지 물건이-아니 거의 대부분이 박살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쨌거나 토미가 깨어난 것은 제 때 짖어줄 가디의 부재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실 토미는 두 부부의 언성이 높아지기도 전에 이미 반쯤 깨어나 있었다. 정확히는, 토미의 아빠가 “당신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고, 린다! 젠장, 이렇게까지 고집을 못 꺾는 모습 정말 경이로워서 미치겠군.”이라고 비명을 질렀던 대목에서 번쩍 눈을 떴다.
 ‘또 싸우시는 거야.’ 토미는 생각했다. ‘기세를 보니 밤새 싸우시겠지. 나는 한숨도 못 잘 거야.’ 두 부부는 내일이 어떤 날인지도 잊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다음 날 아침 9시에는 연구소에서 열두 살이 된 아이들에게 스타팅 포켓몬을 나누어주기로 되어 있었다. 마을에는 열두 살이 된 아이들이 토미를 포함하여 다섯 명이 있었는데, 스타팅 포켓몬은 예로부터 세 마리뿐이라 제 때 일어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칠 테였다. 포켓몬을 받지 못 한 아이들은 대체로 스스로 포켓몬을 잡아 파트너로 삼거나, 아니면 떠나기를 포기하고 마을에 남았다. 물론 마을에 남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세상은 열두 살 먹은 아이들에게 너그러울 정도로 작게 보이기 때문에 모험을 떠나기 적당한 나이인 것이다. 미적거리며 나이를 먹어봤자 좁아터진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뿔충이 유충을 돌보거나 연구소 목장을 돌보는 일뿐이다. 그런 일을 원하는 아이들은 없겠지. 토미도 마찬가지였다. 토미는 진작부터 마을을 벗어나면 어디로 갈 것인지, 어떤 포켓몬을 데리고 떠날 것인지도 마음속으로 정해놓았다. 토미는 이상해씨를 고를 생각이었다. 풀포켓몬은 여러모로 숲에서 지낼 때 유용할 것이다. 넝쿨채찍은 어떻고? 잎사귀를 날려서 솜씨 좋게 열매를 딸 수 있는 건? 이상해씨야말로 끝내주는 스타팅 포켓몬인 것이다. 물론, 이런 끝내주는 포켓몬을 노리는 사람은 토미 뿐만이 아니었다. 토미의 옆집-어릴 적부터 사사건건 토미를 간섭하지 않고선 못 버티는 숙명의 라이벌 알렉스도 이상해씨를 노리고 있었다. 무슨 수로 토미가 점찍은 포켓몬을 알아냈는지는 몰라도, 알렉스는 이틀 전 포켓몬 센터에서-토미는 가디를, 알렉스는 구구를 데리고 있었다-만났을 때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어이, 토미. 난 토요일에 8시부터 일어나서 이상해씨를 데리고 올 거야. 너 각오하는 게 좋을 걸!”
 ‘하지만 다 망했어.’ 토미는 생각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생각한 순간, 린다가 램프를 집어든 것이다. 그 뒤 약 삼십여 분 동안 두 부부는 주거니 받거니 손에 집히는 물건은 그게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집어던지며 살림살이의 4분의 1을 격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도로 침대로 돌아간 토미는 새벽 5시가 되어서도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뒤척였다. 슬프거나 괴로운가에 대해 고민해 보았지만 알 수 없었다. 내일이면 포켓몬을 받을 테고 그럼 이 집을 떠날 수 있을 테니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요컨대 열두 살이면 모험을 떠나기 적당한 나이임과 동시에 마침내 자신의 부모에게 질릴 수 있는 나이이기도 했던 것이다.

 알렉스는 자명종이 울리기도 전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내복을 벗고 옷을 껴입었다. 셔츠 단추를 잠그면서 시간을 확인하니 8시가 되기도 전이었다. 이렇게 일찍 일어나본 것은 갓난아이 이후로 처음이었다-알렉스 모 왈, 알렉스는 핏덩이일 적 새벽마다 깨어나 자신을 힘들게 했다고 한다. 그러나 ‘늦잠’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이후부터 알렉스는 그 개념을 온몸으로 만끽하고 즐기기 위하여 태어난 것처럼 굴었으므로, 알렉스가 기억하는 한 자신은 언제나 늦잠쟁이였고, 이렇게 일찍 일어난 것은 가히 인생역사의 위대한 첫 장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는 오늘에야말로 그의 숙적 토미를 제치고 이상해씨를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그렇게 되면 토미 녀석의 얼굴은 정말 볼만할 것이다-생각해 몹시 들뜨기 시작했고, 마침내는 옷을 입는 내내 어깨를 으쓱으쓱 거리게 되었다. 심지어 외투까지 껴입었음에도 시계가 8시를 겨우 2분만 넘기고 있었기 때문에, 알렉스는 그야말로 ‘끝내주는 상태’가 되었다. 어찌나 뿌듯했는지 아침을 먹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렀다. 그래서 정말로 알렉스는 아침을 먹지 않았고, 포켓볼을 담을 작은 가방을 어깨에 짊어진 채 언덕 너머에 있는 박사 연구소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막 아침을 맞이한 거리는 신선한 초목의 공기가 가득했고, 두트리오가 꼭꼭거리며 하늘을 향해 울음을 토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잠시 멈추어 서서 두 팔을 활짝 벌리고 그 울음을 만끽했다. 발끝에서부터 차오르는 전율! 아침을 알리는 세쌍둥이 포켓몬 보다 일찍 일어난 알렉스 스튜어트! 이 세계의 주인공은 바로 나! 인생은 아름다워! 벌써부터 눈앞에 그려지는 토미의 허망한 미소와 이상해씨를 끌어안고 있는 자신이 그려지는 것 같다! 알렉스는 환희에 찬 숨을 뱉어내며 주먹을 쥐었다. 그리고 달음박질하여 언덕을 뛰어올라갔다.
 “이상해씨요!” 알렉스는 연구소 입구에서부터 비명을 질렀다.
 “이상해씨!”
 “알렉수, 진정해. 너가 첫 번째야.” 깁슨이 말했다.
 “박사님은?”
 “블루시티에서 욘구하고 있던 윤겔라가 탈츌해서 급하게 떠나셧어. 오눌은 조수인 내가 노희에게 포켓몬을 나눠줄 고야.”
 깁슨은 알로라 지방-이곳 상록시티에서 멀리 떨어진 타지방이다-출신의 외지인으로, 발음이 조금 어눌했다. 상록시티 연구소에 일손이 부족하여 몇 달 동안 이곳에 머물고 있는 박사 조수인데, 듣기로는 여러 지방을 돌아다니며 체육관 배지를 여러 개를 모은 실력자라고 했다. 알렉스는 그것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깁슨을 볼 때마다 가운을 잡아당기거나 발을 밟는 식으로 그를 놀리곤 했다. 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알렉스는 그를 놀리기 위해 발을 내밀어 깁슨의 왼발을 힘껏 밟았다.
 “이상해씨 줘!” 알렉스가 약 오르라는 듯 혀를 내밀었다.
 깁슨은 발톱 앞에서 깐죽거리는 쥐새끼를 평온하게 바라보는 호랑이 같은 눈빛으로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구래. 9시가 되면.” 깁슨이 대답했다.
 그래서 알렉스는 연구소 B동 2번방에서 9시까지 죽치고 앉아 있었고, 마침내 시간이 되자마자 벌떡 일어나 깁슨으로부터 이상해씨를 받았다. 알렉스는 그 과정에서 굉장한 승리감에 취해 깁슨의 가운을 두 번 더 잡아당겼다. 그리고 뒤늦게 달려올 토미 녀석의 얼굴이 패배감으로 물드는 것을 실시간으로 감상하기 위하여 자리에 앉아 다른 아이들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알렉스를 제외한 첫 번째 아이는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여유롭게 도착하여 파이리를 받아갔다. 두 번째 아이는 9시 반쯤에 왔는데, 자신이 너무 늦은 것은 아닐까 잔뜩 겁에 질려있었다. 그 애는 포켓몬이 남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몹시 기쁜 나머지 어떤 포켓몬이 남아있는지는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애는 마지막으로 남은 꼬부기를 소중히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알렉스는 토미가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제 남은 포켓몬이 없는데?’ 알렉스는 얼굴을 감싸고 끙끙거렸다. ‘하지만 토미 녀석은 늦잠을 잘 애가 아니란 말이야!’ 이건 뭔가가 잘못되었다. 토미가 포켓몬을 가지지 못 하다니. 그럼 경쟁을 할 수가 없는 것 아닌가? 토미 녀석, 포기한 건가? 마을을 떠날 거라고 말했으면서 이렇게 허무하게 패배의 깃발을 흔들다니! 패닉에 빠진 알렉스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깁슨은 커피를 타다 말고 그런 알렉스를 한 번 내려다보곤 여유롭게 테이블로 돌아갔다.
 “너 안 갈 고니?”
 “잠시만… 잠시 만요.” 알렉스가 심각하게 대꾸했다.
 “제겐 시간이 필요해요.”
 그 때 연구소 문이 열렸다. 알렉스와 깁슨이 동시에 고개를 돌렸는데, 그곳에는 토미가 아니라 이 마을의 가장 멀리서 살고 있는 마지막 열두 살짜리 친구가 서있었다. 알렉스는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입을 쩍 벌렸다.
 “진, 왜 네가 와?”
 “뭐가?” 진이 얼굴을 찌푸렸다.
 “넌 왜 집에 안 가고 거기 죽치고 앉아있냐. 포켓몬 못 받았어?”
 “왜 네가 오냐니까! 혹시 오면서 토미 못 봤어?”
 “못 봤는데.” 진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말도 안 돼!” 알렉스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다시 주저앉았다.
 진은 깁슨을 한 번 쳐다보았고, 깁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부터 조러고 있오. 신경 쑤지 마.”
 “박사님은요?”
 “업어. 내가 대신 일을 보고 이찌.”
 “포켓몬이 남아있나요?”
 그러자 깁슨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은 알 것 같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어요. 혹시나 해서 와본 거예요. 어쩔 수 없죠. 풀숲에서 구구라도 잡을 수밖에.”
 진이 문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발걸음을 돌리는데,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알렉스는 분해서 어쩔 줄 모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야?”
 “너 얘 가져라.” 알렉스가 이상해씨가 든 몬스터볼을 내밀었다.
 진은 황당한 눈빛으로 알렉스와 깁슨, 그리고 몬스터볼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뭐라고?”
 “이상해씨 너 가지라고! 난… 됐어.”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너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진이 말했다.
 “제정신이 아닌 건 토미야!” 알렉스가 씩씩거렸다.
 그는 진의 손에 억지로 몬스터볼을 쥐어주곤 올 때와 다름없이 텅 빈 가방을 메고 연구소를 뛰쳐나갔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단숨에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후회 따위는 없어! 그러나 언덕을 거의 다 내려올 즈음에는, 역시 잠깐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괜히 줬나?’

 토미는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눈을 떴다. 커튼을 치지 않아서 햇살이 가득 침대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토미는 자명종을 집어든 후 오랫동안 바늘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었고, 이를 납득하는 데에 조금 시간을 썼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어떤 사실을 받아들였다. 어젯밤 이불 속에서 뒤척이던 순간부터 어렴풋이 예감하고 있던 사실 하나가 현실로 다가왔을 뿐인 것이다. 토미는 한숨을 쉬는 대신 눈곱을 떼어내며 침대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거실은 난장판이었다. 토미는 방문을 조금 열어서 카펫 위로 어질러진 유리조각과 잡동사니를 확인하곤, 또다시 마음속으로 정리해야할 어떤 감정을 한쪽으로 치워두느라 멈추어 서있었다. 그런 후 토미는 날카로운 것들을 밟지 않기 위해 발가락을 들고 조심스럽게 화장실로 향했고, 소매를 두 번 접은 후 세수를 했다. 방으로 돌아온 후에는 옷을 갈아입고 두꺼운 양말을 신었다. 그래서 거실로 나올 땐 발가락을 들지 않아도 괜찮았다. 토미는 식탁 위에 놓인 잼 바른 식빵을 보았다. ‘엄마가 해준 건가?’ 어쨌든 두 부부가 아들의 아침을 잊지는 않은 것이다. 토미는 식탁 의자에 앉아 다리를 조금씩 흔들거리며 푸석푸석한 식빵을 먹었다. 특별히 맛이 있지도, 그렇다고 없지도 않았다. 꼭 부모님의 사이 같은 맛이라고나 할까. 요컨대 사이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하지만 가끔 싸울 뿐이다-상태 말이다. 하지만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토미의 이상해씨는 이제 토미의 것이 아니게 된지 오래일 텐데.
 토미는 크로스백을 메고 바깥으로 나왔다. 연구소로 갈 생각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 시간이면 포켓몬이 남아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대신 숲으로 갈 생각이었다. 토미의 집 주변에는 작은 숲과 연못이 있었다. 운이 좋다면 가디가 없어도 꼬렛 한 마리 정도는 잡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꼬렛도 잘만 키우면 레트라로 진화를 하고, 그럼 당분간은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토미는 숲으로 가는 길목에서 작은 나뭇가지를 주워 장비했다. 마치 알렉스의 집에서 했던 게임 속 레벨 1짜리 탐험가처럼. 알렉스네 거실에는 게임 콘솔이 있어서 원하면 어느 때나 찾아가 이런저런 게임을 해볼 수가 있었다. 만약 토미의 집에 콘솔이 있었다면, 어젯밤 부로 수명을 달리 했을 것이고 그럼 알렉스가 몹시 슬퍼하거나 분하게 여겼을 것이다. 알렉스는 그런 시시한 일에도 곧잘 열을 내거나 눈물을 보이곤 했으니까 분명 콘솔이 사라져도 그렇게 할 것이다. 그러자 토미는 알렉스가 부모가 없어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예 치고 박고 싸울 사람이 집에 없다면 콘솔도 평생 무사할 테니 말이다. 알렉스는 큰 누나와 살고 있었다. 그리고 큰 누나는 콘솔을 때려 부술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연못에 다다랐을 때, 바람이 불어서 숲속의 모든 나무가 쏴아아, 하고 울었다. 토미는 수면 위로 퍼지는 파동과 날리는 잎사귀들, 어딘가에 숨어 울고 있는 작은 포켓몬들의 움직임을 보았고, 어쩐지 가슴이 텅 비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까까지는 분명 부모님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기 위해 마음 한구석으로 이것저것을 치워놓았는데, 그래서 터질 것처럼 무언가로 가득 차올라 몹시 곤란했는데, 이제는 오히려 그것들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서 허전하게 느껴졌다. 꼬렛을 잡고 싶지도 않았다. 토미는 연못 앞에 앉아 두 다리를 모으고, 숲 위로 흘러가는 거대한 구름의 천장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마음속으로 흘러가는 구름들이 보였다. 구름들은 크거나 작았고, 자세히 보니 어떤 것을 닮아있었다. 토미는 마음을 집중했다. 그러자 구름의 모양을 볼 수 있었다. 구름들은 어젯밤 공중으로 떠오른 모든 것들을 닮아 있었다. 토미는 램프 구름을 보았다.
 “어이, 토미!”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왜 상상 속에서도 알렉스는 날 가만 놔두지 않는 걸까?’
 토미는 눈을 감은 채로 얼굴을 찡그렸다.
 “야, 토미!”
 한 번 더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진짜 짜증난다.’ 토미는 생각했다.
 “야!” 알렉스가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토미의 눈앞으로 펼쳐진 구름들이 마구 흔들리더니, 모조리 가루가 되어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토미는 퍼뜩 놀라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알렉스의 얼굴이 보였다. 알렉스는 토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있었다.
 “너 자꾸 무시할래?” 알렉스가 헐떡거렸다.
 토미는 알렉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멀리서부터 줄곧 달려온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토미네 집 가디가 공 던지기 놀이를 할 때면 저런 표정을 짓곤 한다. 토미는 알렉스가 이상해씨를 자랑하기 위해 이렇게나 필사적으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이 믿을 수 없을 만큼 한심하게 느껴졌다.
 “이상해씨는 귀엽던?” 토미는 눈을 흘겼다.
 “보지도 못 했거든.” 알렉스가 툴툴거렸다.
 “너 늦잠 잤어?”
 “어, 완전 늦잠 잤어.” 알렉스가 대답했다.
 좀 비켜 봐. 알렉스가 토미를 툭툭 치더니 그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토미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잘하는 짓이다. 늦잠 자서 포켓몬도 놓치고. 어떡할래?”
 “몰라, 꼬렛이라도 잡지 뭐. 레트라로 진화하면 나쁘지만도 않을 걸?”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토미는 알렉스가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음에 짜증이 나서 입을 다물었다. 바람이 불어서 풀숲이 쏴아아 흔들렸는데, 그곳에서 어렴풋하게 찍찍거리는 소리가 났다. 꼬렛이겠지. 여하튼 알렉스가 꼬렛을 잡는다면 토미는 꼬렛을 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따라쟁이.’ 토미는 생각했다.
 “야, 내가 아까 집으로 돌아오면서 누나한테 들었는데 말이야.”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토미를 바라보았다.
 “너희 부모님 어제 엄청 싸웠다며? 너 집 나갈 거야?”
 토미도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아서 뭐하게?”
 “아니, 우리 누나가 그러는데 여하차면 우리 집 남은 방에서 재워줄 수 있대.” 알렉스가 말했다.
 “집 나가도 너희 집은 안 가.”
 “왜? 우리 집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그건 게임할 때나 가는 거지.”
 “그거랑 그게 뭐가 달라?”
 “달라.”
 토미는 고개를 숙이고 발끝을 지나가는 작은 개미 포켓몬들-이름은 몰랐다-을 바라보았다. 개미 포켓몬들은 한 줄을 맞추어 어딘가로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었다.
 “난 다른 애들이 나갈 때랑 맞춰서 마을을 떠날 거야.” 토미가 말했다.
 “포켓몬도 없이?”
 “가디를 데려가지 뭐.” 토미가 말했지만 진심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하고 보니 그렇게 나쁜 생각도 아닌 것 같았다.
 “가디를 데려가는 건 반칙이야!” 알렉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내 맘이거든.” 토미는 혀를 내밀었다.
 “아, 짜증나!”
 분을 못 이긴 알렉스가 풀숲에 벌렁 드러누웠다. 토미는 한심하단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넌 왜 그렇게 사소한 일에 화를 내고 울어? 피곤하게.”
 “너도 어젯밤엔 엉엉 울었을 거면서!”
 “안 울었어.” 토미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난 그런 일엔 울지 않아.”
 “야, 그럼 안 돼!”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토미는 알렉스의 어깨와 등에 듬성듬성 붙어있던 풀꽃이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것을 보았고, 그 중 하나가 자신의 발치를 지나는 개미 포켓몬의 시야를 가리는 것을 보았다. 토미는 꽃잎을 들어 포켓몬들이 마저 지나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뭐가 안 된다는 건데?”
 “야, 그런 일에는 울어야지!” 알렉스가 답답하다는 듯이 말했다.
 “넌 그런 것도 가르쳐줘야 해? 그렇게 멍청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래?”
 “뭐?” 토미는 드물게 큰 충격과 분노에 빠졌다.
 “알렉스, 그건 내가 할 소리야. 넌 게다가 매일 나한테 지잖아.”
 “승패가 멍청함과 똑똑함을 증명하는 것만은 아니거든?”
 알렉스는 보기 드물게 달변가처럼 굴었다.
 “토미, 세상에는 슬퍼하거나 화를 내거나 기뻐해야 하는 일이란 게 있는 거야. 그런 걸 놓치면 넌 나중에 슬퍼하거나 화를 내거나 기뻐해야만 알게 되는 것들을 영영 모르고 살게 될 걸.”
 “다른 방식으로도 알 게 될 수도 있어. 난 지금도 너보다 뭐든 잘하잖아.”
 “아니야, 멍청아. 네가 뭘 알아.”
 알렉스는 씩씩거렸다.
 “정말이야. 토미, 네가 뭘 알아. 넌 아무것도 몰라.”
 “너 정말 짜증나는 거 알아?”
 “네가 더!” 알렉스는 벌떡 일어났다.
 토미도 따라서 천천히 일어났다. 잠시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서있었다. 토미는 알렉스의 표정을 읽어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알렉스가 덤벼들 표정을 짓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알렉스가 화가 나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토미는 좀처럼 알렉스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 지금 뭐하는 거야?”
 “집에 가려고 하는데 네가 따라 일어난 거야.”
 알렉스는 토미가 덤벼들기 위해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자세를 낮추며 대답했다.
 “뭐해? 덤빌 테면 덤벼 봐.”
 “그럴 생각 없어.” 토미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알렉스가 무언가 더 말하기 위해 입을 빠끔거리던 찰나, 어디선가 진동소리가 들렸다. 둘은 다시 한 번 더 정지한 상태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곧 알렉스가 자신의 백팩에서 울리는 진동소리를 깨닫곤 가방을 벗었다. 그리고 휴대용 포켓컴을 펼쳐서 연구소로부터 온 메시지를 읽었다. 잠시 알렉스는 자리에 서서 메시지를 두어 번 정도 더 읽었고, 마침내 토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깁슨이 연구소로 오래.”
 알렉스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중얼거렸다.
 “우리한테 남은 포켓몬을 주겠대!”
 “남은 포켓몬이 있어?”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있으니까 연락했겠지. 가자!” 알렉스가 말했다.
 그래서 두 아이들은 연구소로 갔다.

 깁슨은 두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알렉스와 토미는 조금 어리둥절한 상태로 깁슨을 따라 연구소 안쪽으로 이동했다. 이번에 깁슨은 B동으로 가지 않았다. 알렉스는 눈앞의 방문에 붙은 위치를 읽었는데, 그곳에는 C동 1번방이라고 적혀 있었다.
 “왜 B동이 아닌데?” 알렉스가 물었다.
 “내가 노희에게 줄 포켓몬은 아직 안정된 친구들이 아니고든.” 깁슨이 대답했다.
 “C동은 아직 사람들과 지내기엔 힘든 포켓몬이나 유전자적으로 안정되지 않운 연구소 포켓몬들이 있는 곳이야.”
 “그럼 우리한테 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토미가 이상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렸다. 깁슨은 어깨를 으쓱이곤 차트 위에 무언가를 적었다.
 “괜차나. 얘네눈 난폭한 애둘은 아니야. 박사님이 노희에게 줘도 괜찮을 거라고 해써.”
 깁슨은 차트를 한쪽에 내려놓고 유리창 앞으로 다가갔다. 알렉스와 토미는 유리창 너머로 끊임없이 펼쳐진 거대한 서랍들을 보았고, 그 서랍 한 칸 한 칸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얹어진 몬스터볼들의 향연을 보았다. 토미는 깁슨의 차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차트 위에는 알파벳과 숫자로 조합된 코드명이 나열되어 있었는데, V-19, V-20 이라는 코드명 박스에 체크가 되어있었다.
 깁슨은 판넬에서 V를 누르고 숫자를 입력했다. ‘19’ ‘20’. 그러자 창가 너머의 서랍들이 일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사방이 웅웅거렸고, 기계는 V라벨이 붙은 서랍장에서 몬스터볼 두 개를 찾아 구멍으로 굴려 넣었다. 일련의 과정은 아주 신속하게 이루어졌으므로 토미와 알렉스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깁슨은 몬스터볼 두 개를 집어 각각 한 개씩 두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
 “여깃써.”
 알렉스와 토미는 몬스터볼을 내려다보았다.
 “안 던져볼 고야?”
 그러자 알렉스와 토미는 깁슨을 올려다보았다.
 “안 물어.” 깁슨이 말했다.
 “노희들은 다칠 위험이 업서. 얘넨 순해.”
 토미는 머뭇거리면서 한손에 몬스터볼을 쥐었다. 몬스터볼은 따뜻했다. 그 말은 즉 안에 따뜻한 체온을 가진 포켓몬이 들어있다는 소리다. 물포켓몬이나 풀포켓몬은 아닌 것 같았다. 불포켓몬일까? 어쩌면 꼬렛처럼 노말포켓몬일 지도 몰랐다. 몬스터볼을 던질 폼을 취하는 토미를 보며 안절부절 못 하던 알렉스가 엉거주춤 따라 폼을 취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몬스터볼을 던졌다.
 작은 폭죽소리와 함께 빛 무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몬스터볼로부터 작은 존재가 튀어나왔다. 알렉스와 토미는 몬스터볼을 내리고 눈앞에 나타난 포켓몬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몹시 복슬복슬하고 귀가 길었다. 눈이 동글동글하고 반질반질했다. 목덜미에 털이 아주 많았다. 여우처럼 긴 귀를 가졌다. 가디만큼 말랑말랑한 발바닥과 작은 발톱을 가졌고 몹시 귀여웠다. 
 깁슨이 말했다.
 “얘넨 이브이라눈 포켓몬이야.”
 잠시 침묵이 있은 후, 알렉스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끝내준다!”
 토미는 조심스럽게 몸을 숙여 자신의 이브이를 안아들었다. 보기보다 이브이는 무거웠다. 이브이가 토미의 품안에서 작게 낑낑거리는 소리를 냈다. 토미는 이브이가 마음에 들었다.
 “이브이가 왜 사람들과 지내기 어려운 포켓몬인 건가요?” 토미가 물었다.
 “이브이는 사람들과 지내기 힘둔 송굑은 아니야. 이브이가 요기 있는 이유는 유전자적으로 불안종한 포켓몬이기 때무니야.” 깁슨이 설명했다.
 “구래서 얘네둘은 외부 환굥 요인에 따라 진화룰 해. 다룬 포켓몬들과는 조굼 다루지.”
 “이를테면요?” 알렉스가 물었다.
 “이룰테면 다른 포켓몬운 타입에 따라 사용할 수 잇눈 진화의 돌이 정해져 이써. 하지만 이브이는 어떤 돌을 사용해도 진화할 수 있찌. 이브이들의 유존자는 일반적으로 불, 물, 번개의 돌에 가장 반응하는 푠이야.”
 깁슨의 설명이 이어지는 동안, 알렉스는 이브이를 안아 올린 토미를 몹시 애타는 눈빛으로 바라보곤 자신의 이브이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러나 알렉스의 이브이는 알렉스를 한 번 바라보더니 무시해버렸다.
 “제 이브이는 좀 건방진 것 같아요.”
 “이브이도 멍청한 사람은 싫어하나 봐.”
 토미가 작게 킬킬거렸다.
 “시끄러워 토미.”
 알렉스는 입을 삐죽 내밀곤 자신의 이브이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이브이는 알렉스가 다가오던 말던 신경 쓰지 않겠다는 듯 길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피고 있었는데, 알렉스가 가까워지자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쟤는 절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은데요!” 알렉스가 항의했다.
 “구렇지 안아, 알렉수. 너의 이브이눈 그냥 너랑 놀고 싶어 하는 고야. 활달한 고라구.” 깁슨은 어깨를 으쓱였다.
 “진화의 돌을 사용하면 제 이브이가 바로 진화하게 되는 건가요?” 토미가 물었다.
 “구래.”
 “그거 사기 아니에요?”
 알렉스가 항의하며 자신의 이브이를 향해 다시 조심조심 다가갔다. 이브이는 이번에 제법 얌전히 알렉스를 기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알렉스가 아주 가까이 다가와 허리를 숙였을 때, 폴짝 뛰어올라 그의 정수리를 밟고 반대편으로 달아나고 말았다.
 “저 지금 완전 짜증나요!”
 “깁슨 씨도 이브이를 진화시켜본 적이 있나요?” 토미는 알렉스의 비명을 무시했다.
 “웅. 나도 이브이가 잇엇거둔. 나눈 불의 돌을 사용해찌.”
 깁슨은 가운 주머니에서 작은 몬스터볼을 하나 꺼냈다. 깁슨이 중앙 버튼을 누르자, 몬스터볼은 그의 손안에 가득 차는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깁슨은 몬스터볼을 요요를 던지듯 바닥에 던졌다가 다시 받았다. 몬스터볼은 바닥에 닿았을 때 슬그머니 열렸다가, 빛 무리를 뱉어내곤 다시 닫힌 상태로 깁슨의 손바닥으로 돌아왔다. 두 아이들은 각자 이브이를 안거나 쫓다 말고 멈추어 서서 빛 무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굵고 낮은 울음소리가 들렸고, 빛 무리는 점점 형태를 갖추더니 이브이보다 조금 더 큰 몸집으로 변했다. 잠시 후 두 아이들은 연구실 바닥에 태평하게 앉아있는 붉은 털의 포켓몬을 볼 수 있었다.
 “얘눈 부스터라는 포켓몬이야.”
 아이들은 할 말을 잃고 눈앞의 환상적인 이브이 진화형 포켓몬을 내려다보았다. 부스터는 이브이보다 두 배는 털이 많아보였고, 그 말은 즉 한계까지 복슬복슬해보였고, 몹시 따뜻해보였으며, 목덜미 부근의 털은 거의 목도리처럼 보였다. 게다가 눈망울은 더욱 날카로워 졌으며, 더 반들반들하면서도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부스터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불포켓몬이었다.
 긴 침묵이 있었고, 한참 후 알렉스가 작게 탄식을 뱉었다.
 “진짜 끝내준다!”
 “맞아.” 이번에는 토미도 긍정했다.
 그리고 두 아이들은 동시에 이렇게 생각했다.
 ‘진화를 시켜야해.’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토미는 줄곧 생각에 잠겨있었다. 알렉스는 끊임없이 자신의 몬스터볼을 매만지며 토미에게 시답잖은 말을 걸었는데, 토미는 거기에 대꾸하지 않거나 간혹 “응” 혹은 “아닌데, 멍청아”라고 대답해주기만 했다. 그럼에도 알렉스는 기죽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걸었고, 토미를 성가시게 해서 마침내는 토미가 생각하기를 그만두게 만들었다.
 “너 정말 포기를 모르는구나.” 토미가 대꾸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알렉스는 토미의 언짢은 표정을 보고 이죽거리며 물었다.
 “그냥…….” 토미는 자신 없는 투로 말했다.
 “내 이브이를 진화시켜도 괜찮을지 고민하고 있었어.”
 “뭘 그런 걸 고민하고 그래? 당연히 진화시켜야지!”
 알렉스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토미를 흘겨보았다. 토미는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 없다는 얼굴이었고, 그건 몹시 드문 일이었기 때문에 알렉스를 진지하게 만들었다.
 “뭔가를 걱정하는 거야?” 알렉스가 물었다.
 “그래.” 토미가 대답했다.
 “만약 진화한 후에 내 이브이 성격이 달라지면 어떡하지? 지금은 얌전한데 진화한 후에 날 싫어하거나 난폭해질 수도 있잖아.”
 “깁슨의 부스터는 안 그랬잖아.”
 “내 이브이는 다를 수도 있잖아.”
 토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자신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네 옆으로 보이는 빨간 지붕의 작은 집. 어젯밤에 토미의 부모는 물건을 집어던지며 싸웠고, 서로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토미는 침대에 누워서 단 한숨도 자지 못 하고 뒤척였다. 뒤척이면서 생각했다. 어른이 되면, 화가 날 때 토스트기를 던질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강해지는 걸까. 강해지기 때문에, 남을 미워할 힘 역시 강해지는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 미워하거나 좋아하는 힘이 강해지게 된다면 토미는 어떻게 행동하게 될까? 지금처럼 무엇이든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버릴 수 있을까? 그러니까 슬픔이나 분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다. 이브이를 진화시켰는데, 이브이가 더 이상 토미를 좋아하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거다. 린다와 조쉬처럼. 어느 부부가 사랑하다 말고 증오하게 되는 것처럼.
 알렉스가 다시 생각에 빠진 토미를 붙잡았다.
 “너 지금 너희 부모님 생각하고 있구나, 그치?”
 토미는 고개를 들었고, 생각의 그물에서 빠져나왔다. 토미는 알렉스를 잠시 바라보다 말고 시선을 돌렸다.
 “아니.” 토미는 거짓말을 했다.
 “맞잖아.” 알렉스가 알아차리고 추격했다.
 “아니라니까.”
 “맞으면서!”
 “아니라고!” 토미가 으르렁거리며 알렉스를 떠밀었다.
 알렉스는 엉거주춤 피하다 말고 뒤로 쿵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그 바람에 알렉스의 손에서 튕겨나간 몬스터볼이 바닥에서 두 번 정도 굴렀고, 폭죽소리와 함께 이브이가 빠져나왔다. 이브이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말고 자신의 주인이 바닥에 엎어진 꼴을 보곤 팔짝팔짝 뛰었다. 토미는 어쩔 줄 모르고 이브이를 내려다보았다. 이브이의 눈망울은 거울처럼 반짝반짝해서 토미의 얼굴을 그대로 비추고 있었는데, 그 속의 토미는 얼굴이 빨개져서 보기 드물게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겁쟁이!” 알렉스가 비난했다.
 “아니거든.” 토미는 뒤로 물러나며 말끝을 흐렸다.
 “난 단지… 지금 이대로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알렉스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스가 대답하지 않는 것은 드문 일이다. 토미의 ‘드문 표정’을 봐서일 지도 모른다. 토미는 알렉스의 얼굴을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애가 어떤 말을 하게 된다면 또다시 무슨 대답이든 해야만 하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응”이라던가, “아니야, 멍청아”라고 대꾸해줄 수 없을 것 같았다. 온몸이 후들거렸다.
 토미는 뒤를 돌아 집까지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고 현관까지 단숨에 달렸다. 가로수와 드문드문 이어지는 집, 울타리 따위가 뭉개진 색처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문고리를 붙잡은 후에야 토미는 헐떡거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알렉스는 쫓아오지 않았다.

 그 날 저녁, 토미는 게임보이 통신으로 알렉스가 남긴 메시지를 읽었다.

네 마을에 잡초 쌓여서 아주 지저분하더라! 마을 지수가 C-던데! 난 네 마을에 들리긴 했지만 잡초는 안 뽑아줄 거야! 꼴좋다 토미!
- AlexTheBrave -

 토미는 유치하다고 생각하면서 신경질적으로 알렉스의 메시지를 삭제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을로 돌아가 삼십분 동안 열심히 잡초를 뽑았다. 촌장은 TommyTheHope의 마을 지수에 B+를 주었다. 그리고 이렇게 코멘트 했다. ‘마을이 아주 깨끗해졌구나! 하지만 뭔가 부족한 걸? 꽃이나 나무 같은 걸 심어보는 게 어떻겠나!’
 테일러 부부는 토미가 혼자 저녁을 먹고 있을 무렵 집으로 돌아왔는데, 몹시 피곤한 기색으로 각자 비척거리며 소파에 눕거나 방으로 들어갔으므로 어떠한 대화도 나누지 않았다. 토미는 그것을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어떤 싸움도 없겠지. 하지만 지난밤에도 저녁부터 싸우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새벽까지 무사히 지나가기를 마냥 기대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린다가 지나가다 말고 토미의 그릇을 흘끔 바라보며 물었다.
 “너 뭘 먹고 있는 거니?”
 “어제 저녁에 먹다 남은 비프스튜요.”
 “아, 그래. 그게 있었지.”
 그런 후 린다는 소파에 누워 있는 조쉬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곤 침실로 들어갔다. 램프의 잔해는 여전히 치워지지 않은 채 소파 뒤편을 굴러다니고 있었다. 토미는 비프스튜를 먹으며 자신은 거의 만져보지도 못 했던 동그란 알전구에 대해 생각했다. 그것 외엔 당장 떠오른 생각 중에서 기분이 괜찮아질 만한 주제가 없었던 것이다.
 그 날 밤은 몹시 쥐죽은 듯 했다. 정말 조용해서 슬그머니 열어놓은 창문 틈으로 풀벌레 포켓몬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올 정도였다. 토미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서랍 위에 올려둔 자신의 몬스터볼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이브이가 들어있었다. 토미의 포켓몬. 꼬렛이나 구구를 잡지 않아도 괜찮았다. 토미는 이브이와 함께 짐을 싸들고 마을을 떠날 수 있다. 이 집을 벗어나 다른 곳으로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토미는 그것을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집을 벗어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토미는 이제 저녁으로 식은 비프스튜를 먹거나, 바닥을 치우지 않아서 조심조심 다녀야만 하는 거실을 매번 마주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커튼이 흩날리며 밤의 안개처럼 부드럽게 흩날릴 때, 토미는 잠이 들었다. 두 부부는 오늘 싸우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래서 토미는 어떤 염려나 불안 없이 성공적으로 잠에 빠져들 수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조금씩 코를 골기 시작했다. 지난밤 때문에 몹시 피곤했던 것이다. 새벽 2시가 되자 토미는 완전히 잠들어서 뒤척이지 조차 않았다. 탁상 위의 시계가 새벽 2시 1분을 가리켰다.
 바로 다음 순간,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나더니 무거운 물건들이 쏟아질 때나 들을 수 있을 법한 둔탁하고 묵직한 굉음이 들렸다. 깜짝 놀란 토미가 침대에서 거의 반쯤 튀어 올랐다. 소리는 거실에서부터 들려오고 있었다. 토미는 드물게 공포를 느꼈다. 두 부부는 오늘도 여전하게 싸울 모양이었는데, 아들 때문에 서로 비명을 지르지 않기로 마음이라도 먹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건 정말 무섭고 이상한 일이 아닌가? 소리를 지르지 않고 서로를 향해 말없이 물건을 던지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토미는 침대에서 점프한 후 크로스백 안에 게임보이와 속옷을 쑤셔 넣고 탁자 위에 올려둔 몬스터볼을 집어넣은 후, 외투를 걸치고 허겁지겁 복도로 뛰쳐나왔다. 그리고 신발을 구겨 신은 채 거실 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자신의 현관에서 멀찍이 떨어진 채, 토미는 게임보이를 열고 통신을 활성화시킨 후 알렉스의 마을로 들어갔다. 그리고 Y버튼을 난타했다-이렇게 하면 ‘초인종’을 누르는 것이 되어서 알렉스의 게임보이가 마구 울린다. 등 뒤로 집안 어딘가에서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린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들이 달아났다는 것을 깨닫곤 안심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토미는 모든 것이 슬프고, 정말 무서웠다! 잠시 후, 토미의 게임보이로 알렉스의 불만 가득한 메시지가 떴다.

이게 무슨 짓이야!!! 복수는 낮에 하라고!!!! 근데 애초에 넌 나한테 복수할 합당한 이유가 없거든?!
- AlexTheBrave -

 토미는 메시지를 보냈다.

알렉스, 도와줘!
- TommyTheHope -

 그리고 토미는 기다렸다. 알렉스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알렉스의 방 창문이 벌컥 열리더니 안에서 난리법석을 떠는 소리가 났고, 토미는 쭈그리고 앉아 그곳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후 열린 창문 틈으로 이브이와 알렉스가 차례로 뛰어내렸다. 알렉스는 집 앞에 쭈그리고 앉은 토미를 보곤 허겁지겁 달려왔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우스꽝스러워 토미에게 조금 위안을 주었다. 그러나 토미가 웃음을 터뜨리려고 할 때, 목구멍이 꽉 막히더니 이상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통제되지 않는 상황에 난처할 틈도 없었다. 토미는 알렉스를 올려다보며 불가항력으로 훌쩍이기 시작했다.
 알렉스는 굉장히 정신이 없어보였는데, 심지어는 토미가 울기 시작하자 두 배로 당황한 것 같았다. 그래서 등 뒤에서 벌어지는 테일러 집안의 혼비박산을 한 박자 느리게 깨달았다.
 “저게 다 뭐하는 짓거리래?”
 알렉스가 토미와 테일러네를 번갈아 바라보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토미는 눈물을 쏟으며 화를 냈다.
 “말이라고 해? 내가 어떻게 알아!”
 그런데 토미가 너무 크게 소리를 질렀던 모양이다. 마음 한구석으로 치워놓았던 어떤 것들이, 마치 코르크 마개가 튕겨져 올라오는 것처럼 뻥 뚫리고 말았던 것이다.
 토미는 차오르는 분노와 공포를 손에 담고 벌떡 일어나 알렉스에게 주먹질을 했다. 알렉스가 펄쩍 뛰며 물러났다.
 “너 왜 날 때리려고 그래!” 알렉스가 억울하단 투로 항변했다.
 “내가 새벽부터 너한테 얻어맞으려고 뛰쳐나온 건 줄 아냐?”
 “알게 뭐야!”
 토미는 한 번 더 주먹질을 했는데, 그런 것치고는 힘이 없어서 이번에도 알렉스가 쉽게 피할 수 있었다. 그러자 토미는 주먹질을 관두고 그 자리에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테일러 집안은 여전히 난리법석이고, 알렉스의 누나의 방에 불이 켜지고, 벌레 포켓몬들이 울고, 서늘한 새벽바람이 부는 가운데 토미의 울음소리는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샘처럼 터져 올라왔다.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콧물도 찔끔찔끔 나왔다. 토미는 여태껏 모아둔 눈물을 쏟아내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서럽게 울었다.
 알렉스는 어쩔 줄 모르는 표정으로 토미의 앞에서 우물쭈물 했다. 알렉스의 이브이도 별 도리는 없는 것 같았다. 이브이는 발치에서 낑낑거리며 알렉스를 발로 밀고 있었다. 발길질을 통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뭐라도 해 봐, 짜샤!’ 그래서 알렉스는 정말 무엇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 기분에 휩싸였고, 엉겁결에 손을 뻗어 울고 있는 토미를 껴안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토미는 알렉스를 밀쳐내지 않았고, 그렇다고 울음을 그치지도 않았다. 오히려 더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알렉스는 혼란스러운 듯 소리를 지르면서도 토미의 어깨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러자 토미가 외마디 비명처럼, 혹은 최후의 단말마처럼 한 마디를 울음과 함께 헐떡이며 토해냈다.
 “엄마…!”
 와장창! 테일러의 집안에서 다시 린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토미? 토미! 너 어디 있는 거니!” 그리고 다음 순간, 조쉬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토미, 아들아! 너 대체 어디 있는 거니!”
 두 부부의 비명소리를 들은 두 아이들은 몹시 당황했는데, 심지어 토미는 단숨에 울음까지 그치고 말았다. 두 부부의 목소리가 도무지 서로 싸우는 것처럼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린다와 조쉬는 싸우기 시작하면 토미를 눈곱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야, 너희 부모님이 너 찾는 것 같은데?” 알렉스가 말했다.
 “싸우고 계신 게 아닌가 봐.” 토미가 코맹맹이 소리로 웅얼거렸다.
 두 아이들은 잠시 서로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서있었다. 그러나 곧 제정신으로 돌아온 토미가 알렉스를 힘껏 밀어냈는데, 어찌나 힘껏 밀었던지 토미 본인도 밀어놓곤 꽤 당황한 눈치였다. 알렉스는 아까와 똑같은 포즈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야!” 알렉스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토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토미는 대답하는 대신 크로스백을 지고 다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알렉스 역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알렉스의 이브이가 토미를 따라 펄쩍펄쩍 뛰며 테일러네 문지방을 뛰어넘었던 것이다.
 “너 가만두지 않을 거야!” 알렉스가 씩씩거렸다.
 그러나 으름장이 무색하게도, 알렉스는 현관 앞에 우두커니 멈추어 서고 말았다. 토미도 비슷한 상태였다. 둘은 얼어붙은 채 뻣뻣하게 서서, 거실의 난장판을-바닥에 엎드린 채 린다와 조쉬가 떨고 있었다-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창문은 모조리 박살나있고, 치우지 못 한 가구들이 바닥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정말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는, 눈앞에 펼쳐진 말도 안 되는 광경 때문이었다. 알렉스는 공중으로 떠오른 소파를 보았다.
 그건 절대로 추락하거나 포물선을 그릴 일이 없어보였다. 누군가 던진 것도 아니었다. 그냥 허공에 떠올라서, 그 상태 그대로 멈추어버린 것이다.
 토미 역시 보았다. 공중으로 떠오른 소파 옆에 TV가 통째로 뒤집혀 마치 시리얼박스처럼 흔들리는 것을. 그리고 그것은 제 아무리 화가 난 두 부모라도 던질 수는 없는 물건이었다. TV는 실제로 시리얼박스보다 몇 십 배는 무거웠다.
 알렉스의 발치에 웅크린 이브이가 길게 울음소리를 내뱉었다. 그러자 갑작스러운 강풍이 불어 닥치더니, 허공을 지배한 살림살이들이 마치 자석이라도 되는 것처럼 천장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러자 시야가 트여 거실 창문이 통째로 보이게 되었다. 커튼이 마구 흩날리면서 창문 앞을 지키고 선 인영이 드러났다.
 그건 사람이라고 보기엔 키가 좀 작았으나 어린 아이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토미와 알렉스는 입을 벌린 채 눈앞의 정체를 알 수 없는 포켓몬 같은 것을-아마 포켓몬이 맞을 것이다-얼빠진 얼굴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 두 눈이 붉게 빛나고 있었다. 레이저처럼 보였다. 거의 그랬다.
 토미는 알렉스의 외투 주머니로부터 반쯤 솟아오른 포켓컴에 불이 들어온 것을 보았다. 포켓컴이 깜빡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강한 바람이 몰아쳤고, 린다와 조쉬가 비명을 질렀으며, 알렉스는 이브이를 향해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토미는 아득한 시야와 요란한 바람소리 속에서도, 알렉스의 포켓컴이 어떤 단어를 방송하는 것을 들었다. ‘윤겔라.’
 “저건 포켓몬이야!” 토미가 소리를 지르며 고개를 빳빳하게 세웠다.
 “알렉스, 저 녀석은 박사님이 쫓고 있는 그 윤겔라야!”
 그러나 다음 순간, 토미는 한 쌍의 붉은 눈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모든 소리가 몹시 느리게 들리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곁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도 같았지만, 토미가 제대로 귀를 기울이기도 전에 하나의 소음이 되어 저 멀리 사라지고 말았다. 세상이 마치 한순간에 저편으로 밀려난 것처럼, 공간 자체가 소실되더니 거대한 암흑이 이어졌다. 토미의 눈앞으로 몇 가지 영상이 아주 빠르게 스쳐지나갔다. 공중으로 치솟았던 토스트기와 숟가락, 수화기와 접시가 보였다. 그 아래에서 소리를 지르거나 머리를 쥐어뜯는 부모도 보였다. 모든 것이 되감기 되었다. 바닥을 구르던 산산조각 난 램프 부품들이 슬금슬금 하나의 지점을 향해 후진하더니 다시 동그란 전구로 합쳐졌다. 그 다음 순간 램프는 온전한 모양 그대로 공중에 치솟은 채 0.4초간 허공에 멈추어 있었고… 보이지 않는 손에 끌어당겨진 것처럼 협탁으로 하강했다. 토미가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때, 램프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치미를 떼고 협탁 위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지난밤의 일만 되감기 되는 것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되돌아가고 있었다. 굉장히 빠르고 간단했다. 토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보았다. 어린 시절의 토미는 아주 작았고, 모든 순간마다 혼자 앉아서 게임을 하거나 어딘가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다음 장면에서 알렉스가 반드시 끼어들었고, 토미가 만끽하는 중이었던 혼자만의 시간을 방해했다. “어이, 토미!” 알렉스는 늘 그렇게 불렀고, 때때로 승부를 요청했다. 그리고 항상 처절하게 패배했다. ‘왜 어느 순간에서든 알렉스는 날 가만 놔두지 않는 걸까?’ 토미는 생각했다. 마침내 토미의 과거가 하나의 필름처럼 돌돌 말려 들어가더니, 작은 점이 되었다. 더 이상의 영상은 없었다. 토미는 눈앞에서 반짝거리는 자신의 인생사-그건 몬스터볼보다 작았다-를 바라보았다. 빛나는 동그라미는 잠시 그 상태로 토미의 눈앞에 머물러 있었는데, 바로 다음 순간… 사라졌다. 그러자 영원한 어둠이 이어졌고, 토미는 마침내 혼자가 되었으므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눈을 뜬 것이나 감은 것이나 캄캄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므로 “혼자”라는 것은 전혀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를 밀쳐 내거나 밀어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토미는 생각했다. 혼자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필요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혼자라는 것은, 결국 혼자일 수가 없는 것이다… 혼자라는 것을 알기 위하여 누군가가 필요하다면, 사람들은 홀로 살아가면서 조차 그 누군가를 끊임없이 생각할 수밖에 없겠구나. 토미는 그 사실을 알게 되어 몹시 슬퍼졌다. 왜냐하면 토미가 누군가를 가장 필요로 하게 된다면, 그것이 부모님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았다. 그것은 슬픔이나 분노와는 조금 다른 이야기로 만들어져있었다. 비슷하지만 분명 달랐다. 토미는 이 어둠속을 무엇으로든 채워 넣고 싶어졌다. 토미는 그것을 쓸쓸함이라 부르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이제 토미는 정말 혼자가 된다는 것이라던가, 쓸쓸함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이다.
 그러자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져서 금세 커다란 호수가 되었다. 하나도 슬프지 않아! 하나도 화나지 않아! 하지만 쓸쓸함이라는 것은 슬프거나 화가 나지 않아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것. 토미는 제 안에 이렇게 큰 울음이 있다는 것이 몹시 놀랍다고 생각했다. ‘나는 울보였던 모양이지.’ 그리하여 토미는 보았다. 물속을 자유롭게 유영하는 어떤 그림자를 똑똑히 보았다. 그것은 갈퀴 같은 꼬리를 달고 있었고, 새파란 몸을 가지고 있었다. 눈이 날카롭고 반질반질했다. 목덜미에 지느러미가 돋아 있었다. 이브이보다 차갑고 완전했으며, 자유롭고 아름다웠다.
 토미는 그것이 자신의 포켓몬임을 알았다.
 눈을 감자 알렉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토미, 세상에는 슬퍼하거나 화를 내거나 기뻐해야 하는 일이란 게 있는 거야. 알렉스가 말하고 있었다. 그런 걸 놓치면 넌 나중에 슬퍼하거나 화를 내거나 기뻐해야만 알게 되는 것들을 영영 모르고 살게 될 걸.
 나도 알아, 라고 토미가 대답했다. 나도 알아, 알렉스.
 “그러니까 이번에도 네가 진 거야.”
 갑자기 세상이 마구 흔들리더니 물이 좌우로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자유롭게 유영하던 토미의 포켓몬이 화들짝 놀라 소용돌이와 함께 저편으로 달아나 버렸다. 그러자 되감기 되었던 모든 시간이 도로 내뱉어진 것처럼, 눈앞으로 수만 개의 영상이 의식을 추월하며 토미의 공간을 구성하기 시작했다. 알렉스의 패배 연대기가 재빨리 눈앞을 스쳐가고, 가디가 짖고, 부부가 소리를 지르더니 물건이 사방에서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램프가 날아올랐다.
 “어이 토미!”
 토미는 퍼뜩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는 알렉스의 얼굴이 보였다. 알렉스는 토미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고 있었고, 거의 울상을 짓고 있었다.
 “토미, 너 괜찮냐?”
 토미는 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둘은 현관에 앉아있었고,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거실은 온통 난장판이었는데, 가운을 입은 사람들 몇몇이 토미의 부모를 부축해주고 있었다. 거실 유리창은 깔끔하게 박살나서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텅 빈 거실로 커튼이 천천히 흩날렸다. 근처 숲에서부터 풀벌레 포켓몬들의 울음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깁슨은 현관 복도 앞에 서서 가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다 말고 두 아이들에게 다가왔다.
 “토미, 깼구나.”
 “어떻게 된 건가요?” 토미가 물었다.
 “윤겔라의 짓이지.” 깁슨이 대답했다.
 “알렉수의 포켓컴이 반응해서 연구소 사람들이 모두 이곳으로 달려와써. 나참, 블루시티에서 여기까지 오다니… 우리가 도착해쓸 때, 너희 둘은 쓰러져 있었서. 알렉수가 먼저 깨어낫찌.”
 “저는 이상한 영상을 봤어요.” 토미가 말했다.
 “나도.” 알렉스가 토미와 깁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구건 윤겔라의 ‘꿈’공격이야. 최면술의 일종인데, 포켓몬이나 사람에게 환각을 보여주는 공격이야. 어떤 사람둘은 윤겔라의 최면술이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어떤 신비한 힘이 깃든 기술이라고 말하곤 하지. 하지만 아무도 그것울 밝혀내지는 못 해써. 윤겔라가 ‘꿈’공격을 사용하는 것은 아주 드물거둔.”
 깁슨은 두 아이들을 내려다보았다.
 “노희는 어떤 꿈을 꾸엇는데?”
 “완전 이상했어! 분명 아까까진 현관에 서있었는데, 갑자기 시간이 되돌아가는 거야!”
 알렉스가 흥분해서 펄쩍 뛰어올랐다.
 “그러더니 엄청 깜깜한 공간에 있었는데, 그게 너무 무서웠어! 그런데 또 가만 생각해보니까 내가 이렇게 혼자 있어본 게 처음이었던 거지. 그래서 그 상황을 받아들이려고 해봤는데… 완전 기분이 이상하더라니까! 무서운 건 아니었어. 아니었는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무척 심심해하고 있었어. 그래서 기분이 이상했던 거야. 나는 여태껏 심심한 적이 거의 없었으니까! 심심한 적이 거의 없다니, 정말 난 대단한 놈이지 않아? 그런데 역시 심심하기만 한 건 엄청 견디기 힘들었어. 그래서 무슨 일이라도 벌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 근데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어디선가 번개가 번쩍 튀어 오르더니…….”
 “번개?” 잠자코 듣고 있던 토미가 되물었다.
 알렉스가 잔뜩 흥분한 채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래, 번개 말이야! 사방이 번쩍번쩍하고 불꽃이 튀고 아주 난리도 아니었다니까! 완전 끝내줬어! 야야, 토미, 이 다음 이야기는 너도 못 믿을 걸. 내가 거기서 어떤 포켓몬을 봤는데 말이야… 무슨 번개 맞은 이브이처럼 생겼는데 이브이보다 더 크고…….”
 “알렉수 너 지금 쥬피썬더 말하는 고니?”
 “맞아, 그 포켓몬에게 이름이 있다면 분명 그런 이름이었을 거야!” 알렉스가 말했다.
 “쥬피썬더는 이브이의 전기타입 진화형이야.”
 “물타입의 이브이 진화형도 있나요?” 토미가 불쑥 물었다.
 “구럼. 물의 돌을 사용하면 이브이는 샤미드가 되지.” 깁슨이 대답했다.
 “샤미드는 멋진 포켓몬이야. 물속에서 정말 아름답거둔.”
 “그러니까 나는 진화하는 꿈을 꾼 거구나.”
 알렉스는 신이 났다. 깁슨은 들뜬 알렉스를 흘끔 내려다보곤 토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토미 너는 무순 꿈을 꿧니?”
 토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저도 진화하는 꿈을 꿨어요.”
 “따라쟁이!”
 “너야말로!” 토미가 말했다.
 두 아이들은 잠시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의 누나가 들이닥치며 모든 상황이 종료되었다. 그녀는 오밤중에 뛰쳐나온 알렉스와 옆집에서 일어난 소란을 목격하곤 몹시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으나, 상황을 전해들은 후에는 두 아이들을 꼭 끌어안아주었다. 특히 그녀는 토미를 아주 오래도록 껴안아주었고, 남은 밤 동안은 토미가 알렉스의 방에서 함께 잘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알렉스는 침대로 돌아와서 이브이를 껴안았다. 알렉스는 이브이를 몬스터볼에 집어넣지 않았다. 알렉스의 품안에서 이브이가 기분좋게 뽁뽁거렸다. 토미는 자신의 이브이를 몬스터볼에서 꺼냈다. 그리고 힘껏 끌어안았다. 알렉스는 다시 한 번 토미가 자신을 따라한다며 비난했지만, 이번에는 토미가 정말 알렉스를 따라한 쪽이 맞았으므로 “시끄러워”라고 대꾸하기만 했다.

 다음 날, 토미는 포켓몬센터에 들려 가디를 데리고 왔다.
 “가디는 아주 건강하단다. 조심히 가렴.” 간호사가 말했다.
 가디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펄쩍펄쩍 뛰어다니면서 바닥에 코를 박았다. 그리고 킁킁거리며 복도를 시작으로 온 집안을 헤집고 다녔고, 마침내 거실 창가 앞에 도달해서 귀를 쫑긋 세웠다. 가디는 고개를 번쩍 쳐들곤 헥헥거리며 한참 멈추어 서 있다가, 창가를 향해 한 번 크게 짖었다. 토미는 가디가 혼란스러워 하고 있음을 알았는데, 집안의 살림살이 대다수가 엉망진창이 되었으므로 그럴 수밖에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다시 집밖으로 나왔을 때, 알렉스는 토미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미는 현관 앞에 잠시 멈추어 서서 알렉스를 바라보았고, 알렉스도 토미를 바라보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잠시 후 알렉스가 고개를 돌리며 운동화 코로 흙바닥을 콕콕 찍었다.
 “뭐해, 가자.” 알렉스가 말했다.
 그래서 둘은 숲으로 갔다. 토미가 앞서서 걷고, 알렉스가 따라 걸었다. 토미는 크로스백을, 알렉스는 배낭을 메고 있었다. 둘은 호숫가까지 걸었다. 날씨가 좋았다. 호수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시게 수십만 개의 파편으로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유리조각이나 소파, 혹은 램프와는 달리 빛과 물은 날아올라도 누군가를 아프게 만들지 않는다. 그래서 호수는 언제나 아이들을 기쁘게 해준다.
 두 아이들은 멈추어 서서 각자의 가방을 내려놓곤 몬스터볼을 던져 이브이들을 풀어주었다. 토미의 이브이와 알렉스의 이브이가 빛 무리와 함께 데굴데굴 굴러 나왔다. 두 이브이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곤, 이내 겅중겅중 뛰어다니며 풀숲을 뒹굴기 시작했다. 꼬렛이 소란에 놀라 황급히 반대편 수풀로 달아났다. 토미와 알렉스는 자리에 앉아 이브이들이 부산하게 돌아다니고, 즐겁게 뿍뿍거리고, 행복하게 뛰어오르는 것을 지켜보았다. 바람이 불어서 호수의 수면 위로 부드러운 물결이 그들이 앉은 곳에서부터 반대편으로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알렉스가 불쑥 말했다.
 “너는 곧 떠날 거지?”
 “응.”
 “나도 떠날 거다.”
 토미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어디로?”
 “음, 우선 회색시티로 갈 거야.”
 알렉스가 떵떵거리는 투로 말했다.
 “회색시티에 번개의 돌이 있대. 나는 내 이브이를 쥬피썬더로 진화시킬 거거든.”
 토미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토미는 갈색시티로 갈 생각이었다. 그곳에는 물의 돌이 있다.
 “그리고 블루시티로 가는 거지.” 알렉스가 말했다.
 “블루시티에 윤겔라가 산다잖아. 나는 윤겔라를 잡을 거야. 진짜 멋진 포켓몬 아니냐.”
 토미는 대답 대신 고개를 숙이고 두 다리를 껴안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발치에 개미포켓몬들이 없어서, 달리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 했다.
 “…따라쟁이.” 토미가 작게 중얼거렸다.
 “뭐라고?”
 알렉스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토미가 다시 한 번 말했다.
 “항상 넌 나를 너무 따라해.”
 알렉스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토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벌리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너도 그렇게 할 생각이었구나, 그렇지. 너도 이브이를 진화시키고 윤겔라를 잡을 생각이었던 거지!” 알렉스는 신난 것처럼 조잘거렸다.
 “아무렴! 아이고, 어떡하냐, 토미? 내가 선수 칠 것 같은데. 그러고 보니 너 진화 같은 거 안 시키겠다고 겁쟁이처럼 굴지 않았냐. 생각이 바뀌었나보지? 내가 너무 멋진 계획을 세워버려서 마음이 동했건 거지, 그렇지?”
 ‘진짜 유치해.’ 토미는 생각했다.
 “왜, 내가 너보다 잘할까 봐 쫄리냐?” 토미가 물었다.
 알렉스가 씩씩거렸다.
 “아, 뭐래!”
 “맞잖아. 너 늘 나한테 지니까 아득바득거리고.”
 토미는 알렉스를 향해 혀를 쭉 내밀었다.
 “약 오르지?”
 그리고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었다. 이번에는 아주 미약한 바람이었기 때문에 수면 위의 파동이 호수 끝에 채 닿지 못 하고 흩어졌다. 토미는 눈을 깜빡거리면서 상황을 파악하려고 애썼다. 알렉스가 토미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그 애가 토미의 혀를 입술로 깨물고 있었다. 풀꽃이 흩날리면서 토미의 손등을 간지럽혔다. 평생을 걸쳐서도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있어. 토미는 생각했다. 이브이들이 근처 풀숲에서 뽁뽁거리며 뒹굴고, 그 바람에 풀이 사방으로 꺾이는 소리가 났다. 토미는 어느 순간부터 눈을 감았고, 그 사실을 눈치 채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는데, 왜냐하면 눈앞이 온통 캄캄한데도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슬픔이라던가, 분노라던가, 혹은 조금 다르면서도 아주 비슷한 쓸쓸함에 대한 이야기도 아니었으므로, 그리하여 조금도 그 어둠속을 채워 넣을 마음이 들지 않으므로, 마냥 어둠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채로 엉거주춤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무엇이라 부르면 좋을까? 토미는 생각했다. 적어도 이것을 혼자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
 그러자 손가락에서부터 바짝 열이 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물벼락 대신 온통 불이었다. 홧홧하고 날뛰고 있었다. 그것은 몹시 닮아있었다. 벼락처럼,
 알렉스! 토미는 눈을 떴다.
 알렉스의 얼굴이 눈앞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는 처음이었다. 토미는 알렉스의 귓불이 부스터의 털 색깔보다 두 배는 새빨갛게 물들어 있는 것을 보았다.
 “너 방금 뭐한 거야?” 토미가 물었다.
 “약 올라서 복수.”
 알렉스가 재빨리 떨어지면서 대답했다. 토미는 알렉스가 고개를 돌리고 불만스럽게 “무드는 알아서 귀신같이 눈은 감고……”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너 귓불 완전 빨개.” 토미가 말했다.
 “지는!” 알렉스가 씩씩거렸다.
 그래서 토미는 자신의 뺨에 두 손을 가져다대보았다. 그러자 어쩌면 자신의 얼굴이 알렉스보다 더 불타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됐다. 무지막지하게 뜨거웠다. 상상을 초월하게 뜨거웠다.
 “너 날 못 이겨먹겠으니까 키스하는 거야?”
 그 말에 알렉스가 악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얘가 뭐래! 키, 키스라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마!”
 “뭐. 내가 모를 줄 아냐?”
 토미가 입을 삐죽거렸다.
 “나도 그 정도는 다 알아.”
 알렉스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토미를 내려다보며 황당하게 중얼거렸다.
 “이렇게 둔해서 세상을 어떻게 살려고 그러지?”
 “뭐래, 머리통도 돌멩이 같은 게!”
 “야, 내 몸에서 돌멩이 같은 것은 오로지 주먹뿐이야. 주먹 맛 좀 볼래?”
 그러나 알렉스가 정말 주먹질을 하지는 않았다. 토미가 피식피식 웃음을 터뜨렸기 때문이었다. 그런 얼굴에 주먹질을 하는 건 못 할 짓이다. 주먹이 돌멩이가 아니라 젤리가 되어버리고 말 것이다.
 알렉스는 끙끙거리다 말고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네가 뭘 알아.” 알렉스가 구시렁거렸다.
 “넌 정말 하나도 몰라.”
 “하지만 알게 될 거야.”
 어떤 확신에 찬 목소리로 토미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네가 질 거야.”
 그런데 언젠가 이런 말 하지 않았나?
 알렉스가 다시 기울어졌으므로 토미는 눈을 감았다. 머리카락이 램프마냥 삐죽삐죽 치솟았다. 0.4초보다 오래오래 머물렀다. 내려갈 생각을 안 했다. 알렉스가 자신의 뺨을 주욱 끌어당기는 것이 느껴졌다. 평생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을 때, 토미의 마음은 통째로 기울어졌다. 슬픔이라던가, 분노라던가. 가령 쓸쓸함이라던가. 어떤 것들을 기분 좋게 상실하였다. 키스! 두 아이들의 마음속으로 이브이들이 펄쩍펄쩍 뛰어오르고, 호수의 물결이 쏜살같이 반대편으로 달려 나가고, 가디가 짖고 불꽃이 튀어 올랐다.
 ‘끝내준다!’ 두 아이들은 동시에 생각했다.

알렉스토미 게스트북 원고였다
부제목 : 찌릿찌릿하거나 축축한

2018/0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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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웰컴투시카고»
2차/old 2019. 10. 24. 19:10

 1

 오후 11시 30분, 보잉777이 관제탑 지시에 따라 욘.F.케네디 국제공항의 상공으로 날아오른다. 기장으로는 조쉬 랜턴과 닐 버튼이 앉았다. 그들은 새벽 근무를 위해 몇 시간 전까지 충분한 숙면을 취한 상태였고, 커피를 마신 후 조종 대를 잡았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맑은 집중력을 체감하고 있었다. 날씨 역시 나쁘지 않았다. 그들을 제외한 326명의 승객과 12명의 승무원이 항공기에 타고 있었다. 약 이십여 분 동안 꾸준하게 고도를 높인 보잉 777은 뉴욕 시내를 벗어났고, 오전 12시 무렵에는 오하이오 주 끝자락에 도달한다. 거대한 이리호수가 바퀴 아래로 펼쳐지자 대기는 더욱 잔잔해졌다. 구름들이 마치 찢어진 솜사탕처럼 곳곳에 걸려 있었다. 조쉬는 기내방송을 통해 승객들이 시트벨트를 풀고 이동할 수 있음을 알렸다. 그리고 안내 등을 켰다. 마이크를 끄기 전, 조쉬는 몇 가지 사족을 덧붙일 참이었는데-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혹은 좋은 밤 되세요, 혹은 해피 핼러윈-닐이 갑작스럽게 방송을 종료했다.

 “조쉬, 계기판 좀 봐.” 닐은 심각해보였다.

 조쉬는 계기판을 확인한 후 곧장 캐노피 앞을 점검했다. 그들은 깨끗하고 아름다운 밤하늘을 날고 있었다. 반투명한 구름들을 제외하면 장애물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고, 대기는 안정적이었다. 그런데 계기판 레이더엔 분명 녹색 점 하나가 찍혀 있었다. 그것은 보잉777의 반대방향으로부터 직진하고 있었고, 빠른 속도-추측컨대 여객기의 평균 속도였다-로 날아오는 중이었다.

 “관제탑에서 연락 받은 거 있어?” 조쉬가 물었다.

 “아니, 내가 그걸 물어보려던 참이었어.” 닐이 대답했고, 둘은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계기판에 찍힌 녹색 점과 보잉777 사이의 거리는 이제 불과 15km도 채 남지 않았고,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선회하지 않는다면 몇 분 후 충돌할 것이라는 좌표 계산이 계기판을 가득 채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경고음은 울리지 않았다.

 “오류일까?” 닐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여태껏 이런 오류는 들어본 적도 없어.” 조쉬가 대답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캐노피 너머의 세계에는 구름과 별, 바람과 차가운 대기가 존재했지만 비행기는 보이지 않았다. 좌표 상의 거리를 고려하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계기판의 녹색 점이 6km 안까지 다가왔다. 조쉬가 다시 한 번 눈앞을 살폈지만 아무 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고장인 모양이야.” 조쉬가 말했다.

 바로 그 순간, 계기판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튀어 오르더니 녹색 레이더가 순식간에 붉은 색으로 바뀌었다. 전방위 모니터가 워닝 사인을 깜빡이며 무수한 느낌표를 띄워 올리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닐이 퍼드득 뛰어올랐다가 조종석에 주저앉았다. “젠장, 놀라게 하네!” 녹색 점은 이제 코앞에 있었다. 그들은 잠자코 앉아 캐노피와 계기판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10초, 9초, 8초……. 여전히 아무 것도 발견되지 않는 가운데 계기판의 세계가 예고한 충돌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3초, 2초, 그리고……. 갑자기 쾅 소리와 함께 기체 전면부에 큰 충격이 느껴지더니, 곧 파동이 기체를 꿰뚫었다. 기체 전체가 물고기처럼 출렁거리며 아래로 훅 꺼졌다가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조쉬가 비명을 질렀고, 닐은 창백하게 질렸다. 다음 순간 그들은 계기판에 뜬 녹색점이 사라졌음을 확인했다. 사고는 없었고, 비행기는 괜찮은 것 같았다. 보잉777은 문제없이 여전하게 이리호수 위를 지나고 있었다.

 잠시 조종석에 침묵이 흘렀다. 조쉬는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오, 하나님……. 닐이 탄식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봤어?”

 “뭘 봐?” 조쉬가 물었다.

 “비행기 말이야!” 닐이 헐떡거렸다. “방금 바로 눈앞에 여객기 한 대가 있었다고! 오, 제기랄. 오-제기랄. 분명히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가 어째서 여전히 살아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난 아무것도 못 봤어.” 조쉬는 침착하려 애썼다. “아마 난기류 때문이겠지. 종종 이러잖아.”

 “난기류라고?” 닐이 흥분했다. “넌 진동 못 느꼈어? 우린 씨발 뭔가에 부딪혔다니까. 갑자기 사라지긴 했지만 그건 염병할 델타였다고.”

 “델타 항공은 오늘 이쪽 경로를 타지 않는데.” 조쉬가 대답했고, 곧 어떤 사건이 떠올라 입을 다물었다. 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그들은 잠시 1981년 7월 12일에 있었던 델타 항공사의 비극을 떠올렸고, 공중에서 산산조각 난 보잉727에 대하여 생각했다. 잠시 후, 닐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에.” 닐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난기류 때문인 것 같아.”

 “그래, 그렇게 생각해.” 조쉬가 고개를 끄덕였다. 스튜어디스 한 명이 무전을 보냈기 때문에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다시 기내방송 버튼을 눌렀다. 이번에는 사족을 붙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해피 핼러윈이라니. 그래, 오늘은 fuking 핼러윈데이였고 방금 일은 우연치곤 지나치게 오싹했던 것이다. 옆 좌석에서 닐이 긴장을 풀기 위해 백스트리트보이즈의 곡을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2

 토미는

 갑자기 세상이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놀라서 시트에 몸을 기대고 숨을 몰아쉬는데 기내방송이 울렸다. 난기류가 있었고 기체가 크게 흔들렸는데 이제는 괜찮다는 내용이었다. 스튜어디스들이 좁은 복도를 분주히 움직이며 승객 상태를 점검하고 있었다. 토미는 단단히 틀어 막혔던 숨을 천천히 몰아쉬며 미끄러지듯 시트에 등을 붙였다. 오렌지색 등이 은은하게 창가에 붙은 좌석을 줄지어 비추고 있었고, 잠들었던 승객 몇몇이 토미처럼 황급히 깨어나 있었다. 하나같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토미는 마른세수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바닥이 미세하게 진동하고 있었고, 몸은 그것보다 더 미세한 틈을 두고 떠오른 채였다. 이 모호한 진공의 세계에서 앞으로 두 시간은 더 날아야했다. 토미는 3만 피트 이상의 상공에 있었다.

 비행공포증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떠오르는 느낌을 좋아해본 적도 없다.

 라고 토미는 생각했다.

 천천히, 그러나 속수무책으로 차가워지는 손끝과 발끝을 문지르다 말고 주먹을 쥐었다. 얼마 안 가 마른 땀이 새어나와서 허벅지에 손바닥을 비볐다. 먹먹한 귓속에 잔뜩 먼지가 쌓인 것 같았다. 그냥 먼지도 아니고 진공청소기 뚜껑을 열었을 때나 볼 수 있을 법한, 무작위의 소음과 흡입으로 잘 뭉쳐진 이물질 같은 것이다. 그런 게 귀에 끼어 있는 것 같고, 물을 마시고 싶었다. 마침 복도를 따라 스튜어디스 한 명이 다가오고 있었다. 토미는 몸을 일으키며 시트벨트를 풀다 말고 불현 듯 뭔가를 깨달았다. 변화가 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옆자리에 누가 앉아있었다.

 토미는 눈을 깜빡거렸다. 이륙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 복도 쪽 좌석은 비어있었다. 잠든 것은 그 이후니까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까 옆 좌석의 누군가는 갑자기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그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적어도 비행기 안에서는. 어쩌면 좌석을 잘못 배치 받았다가 옮긴 사람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일도 있나?

 옆자리의 누군가는 신문을 읽고 있었다. 종이에 얼굴이 절반 이상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지만, 남자라는 사실은 확실했다. 브루넷에 머리카락을 정갈하게 위로 빗어 올렸고, 왁스가 붙잡지 못 한 머리카락 몇 올만이 이마 위로 빼죽 늘어져 있었다. 손목에 찬 까만색 가죽시계는 구식 디자인으로 보였다. 남자는 다음 장을 넘기기 위해 신문을 반으로 접다 말고 토미의 시선을 눈치 챘다. 그가 고개를 틀었고, 토미는 피하지 못 했다. 눈과 눈이 속수무책으로 교환되었다. 남자의 눈동자는 잘 닦인 녹주석 같았다. 꽤 잘생긴 얼굴이었다. 볼록하게 솟은 이마를 따라 콧대가 시원하게 뻗었고, 눈썹은 짙고 속눈썹은 길고 섬세했다. 입은 꽤 크고 아랫입술이 미세하게 두툼했다. 그는 토미의 상사 테넘스 보다 잘생겼다고 자신할 수 있을 만한 미남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리고 보조개까지. 부끄러움과 당혹감으로 토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음, 안녕하세요.”

 토미가 우물쭈물 인사하자, 남자는 다시 한 번 환하게 웃더니 손을 내밀었다. 토미는 악수를 하기 전에 잠시 뜸을 들이며 그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알렉산더(Alexander)입니다.”

 “토마스(Thomas)예요.”

 토미가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럼 Tommy(*토마스의 애칭)군요.”

 “당신은 Alex(*알렉산더의 애칭)겠고요.”

 토미가 응수했고, 알렉스는 손을 흔들다 말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잡은 손에 힘이 실렸다. 토미는 알렉스의 손이 자신의 손을 조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불쾌하지는 않았는데 조금 미지근하고 간지러웠다. 둘은 꽤 오랫동안 악수하고 있었다. 마침내 토미가 먼저 슬그머니 손을 빼내자,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졌다. 앞좌석에서 부스럭거리며 칩을 먹는 소리가 났다. 알렉스는 구두를 까딱거리다 말고 입을 열었다.

 “쭉 주무시고 계시더라고요. 피곤하셨나 봐요.”

 “대체로 비행 중엔 억지로 잠들기를 택해요.”

 방금 소동으로 깨어났지만.

 “멀미가 심하신가 봐요. 아니면 비행기공포증이라던가?”

 “아뇨, 그건 아니지만.”

 떠오르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마도요. 토미가 덧붙였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요. 토미는 그가 함부로 자신에게 접근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것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알렉스의 모든 제스처는 크고 부드러운데 호들갑스럽지 않고 오히려 상대를 배려하거나 공감한다는 느낌을 주었다. 토미는 손가락을 매만지다 말고 손끝이 아까보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이 아까의 압박을 기억하고 있었다. 알렉스로부터 상쾌한 향수 냄새가 났다.

 “떠오르는 게 유쾌한 일이 아니라면, 그건 일종의 비행기공포증이 아닌가요?”

 알렉스가 물었다. 토미는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비행기공포증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문제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전부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토미는 선택적으로 정보를 선별했다. 제 상사가 말하길, 비행기공포증이 있는 사람은 비행기를 탈 수조차 없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전 뉴욕에서 아틀랜타로 날아가 본 적이 있는 사람이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유타로 날아간 적도 있으니 공포증은 아니란 것이죠. 그저 기분의 문제에 그칠 수 있는 사항에 대해선 회사가 느슨해질 수 없답니다.”

 “그래서 지금 당신은 뉴욕에서 다시 시카고로 날고 있는 거고요.”

 “네, 그런 셈이죠.”

 “시카고엔 무슨 일로 가는 건지 여쭤 봐도 될까요?”

 “저는…….”

 토미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저는 시카고로 발령을 받은 거예요. 책상을 옮긴 셈이죠. 새 사무실에서 실무를 보게 될 겁니다. 아마 못 해도 반 년 정도는 거기 머물겠죠. 제 표는 편도고, 왕복이 아니에요. 당분간 비행기를 탈일도 없을 겁니다.”

 아마 그럴 테고, 정말 그랬으면 좋겠군요. 토미가 그렇게 덧붙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까끌까끌했다. 일정을 공지하면서 테넘스가 짤막하게 던진 말이 떠올랐다. “토미. 이번 제안은 당신뿐 아니라 저, 그러니까 우리에게 분명 좋은 전환점이 될 겁니다.” 그는 us를 말할 때 혀에 힘을 빼서 재빨리 발음했다. 사무실 가장자리에 서서, 토미는 그 발음 속에 함께 돌돌 말려들어가다 말고 테넘스가 불쑥 서류를 들이대는 바람에 튕겨져 나오듯 돌아왔다. 상단에 적힌 ‘시카고’라는 지명을 오래 들여다보다가 마지막 시도처럼 저, 비행기공포증이 있는데요, 라고 중얼거렸다. 테넘스는 처음 듣는 소리라는 것처럼 눈을 깜빡거렸다. 난처한 미소를 달고 고개를 젓는 입술을 빤히 바라보면서 그 다음에 나올 말이 어떤 의미인지 무게를 달아보았다. 토미가 가진 저울은 대체로 그런 류의 무게를 정확히 재는 편에 속했다.

 “비행기를 탈 수 있다고 해서 꼭 비행기공포증이 아닌 것은 아니죠. 병원에서 진단을 받는 것은 어때요? 저라면 그렇게 하겠어요.” 알렉스가 말했다.

 “괜찮아요… 원래 출장이 잦은 일도 아니었고, 시카고에선 움직일 일이 더 없을 테니까요.” 토미가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군요.”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잘 된 일일까요?”

 토미는 물끄러미 알렉스의 표정을 들여다보았다.

 “잘 모르겠지만, 그러길 바라고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은 잘 된 일이 아니군요.”

 “음, 그런 셈이죠.”

 토미는 긍정했고, 곧 서글퍼져서 혀를 깨물었다. 말로 내뱉고 보니 생생하게 와 닿는 게 있었다. 본사에서 시카고로 발령을 받고, 넓은 사무실을 잃었고, 트렁크에 짐을 챙긴 채 몇 시간이고 비행기 좌석에 앉아서 눈앞의 낯선 남자와 대화를 나눈다. “이건 당신에게 좋은 기회가 될 거예요.” 테넘스는 그렇게 말했지만 좋은 기회가 뉴욕 한복판도 아니고 시카고 부사에서 불쑥 솟아오를 리 없다. 할 수만 있다면 창문을 깨고 상공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을 저지를 수 있을 만큼 죽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사실 토미는 도망치고 싶었고, 그렇다고 시카고로 도망치고 싶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해 그는 뉴욕으로 돌아가 자신의 책상, 익숙한 사무실과 동료들에 둘러싸여 안정감을 느끼고 싶었다. 의자에 앉으면 칸막이 너머로 이따금 복도를 걷는 테넘스가 보인다. 옆자리 메리엇은 거래처 담당 직원에게 스페인어를 쓴다. 책상 근처에 정수기가 있어서, 누군가 물을 마시면 물통 안으로 울컥 울컥 올라오는 두꺼운 물방울들의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타자를 두들기는 소리, 전화벨 소리, 휴게실로부터 퍼져 나오는 인스턴트커피의 냄새와 샌드위치의 양상추가 아삭거리는 소리… 후각과 청각으로 저장된 무수한 기억들이 더는 일상일 수 없다는 것은 그를 슬프게 한다. 이제 토미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 없고, 마지막 기억 속에서 테넘스는 어색하게 웃으며 단지 어깨를 으쓱일 뿐이다. “그렇지만, 토미. 당신은 이미 아틀랜타를 건너본 사람이 아닌가요?” 요컨대 비행기공포증이란 하늘을 건너지 못 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다.

 머리 위로 시트벨트를 풀어도 된다는 등이 꺼졌다. 알렉스가 고개를 들어 확인하더니 다시 벨트를 찼다. 토미도 그렇게 했고, 잠시 침묵이 있었다.

 “아깐 계시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앉아있었던 거죠?”

 “오, 전 아까부터 여기 앉아있었는걸요.”

 알렉스가 유쾌하게 대답했다. 토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이륙할 때부터요?”

 “당연한 소릴 하시네요.”

 “아닌데…….”

 토미가 확신하지 못 하고 말끝을 흐리자, 알렉스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토미, 당신 몇 살이죠?”

 “스물여섯 살이요.”

 “와, 저와 얼마 차이가 없네요. 전 스물아홉 살이거든요.”

 “세 살 차이네요. 그런데 그게 중요한가요?”

 “아뇨, 그건 아니지만.”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사실 오늘이 제 생일이거든요. 그래서 물어보고 싶었어요. 전 방금 스물아홉 살이 된 참이니까요.”

 “와… 생일 축하드려요.”

 토미의 축하는 애써 무엇이든 하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그것처럼 들렸다. 잔뜩 쥐어짠 목소리를 들은 알렉스가 동그랗게 눈을 뜨다 말고 푸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턱을 뒤로 젖히고, 기분 좋게 목청을 떨면서 터뜨리는 소리였다. 맑은 종소리 같았고, 은은하게 퍼져가면서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었다. 토미는 움츠러들어야할지 아니면 따라 미소를 지어야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어색하게 굳어있었다. 알렉스는 잔기침처럼 몇 번 더 웃음을 뱉어내다 말고 토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고마워요, 토미. 정말 기쁘네요.”

 “음, 그렇군요.”

 “이런, 비웃음은 아니었어요. 정말 기뻐서 웃은 거예요. 생일을 축하받은 건 이번이 처음이거든요.”

 알렉스는 이번, 을 힘주어 말했고 그래서 그 단어는 형광펜 친 문장처럼 머릿속에 오래 남았다. ‘이번’이 괄호처럼 벌어져 알렉스의 생을 감쌌다. 그 괄호는 비행기를 타고 낯선 타인과 대화를 나누는 경험만을 껴안았다가, 알렉스의 전 생애를 껴안기도 했다. 토미는 지나칠 만큼 알렉스의 이번이라는 것에 대하여 곱씹어보았다. 후자라면 알렉스가 너무 가엾을 것 같았다. 평생에 걸쳐 생일축하를 해준 사람이 토미 하나뿐이라면. 스튜어디스 한 명이 복도를 따라 다가오고 있었고 앞좌석의 남자가 손을 들어 콜라를 마실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스튜어디스는 카운터기를 들고 있었는데, 사무적인 톤으로 간략하게 지금은 음료를 제공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그런 후 그녀는 알렉스와 토미가 앉은 좌석을 지났고, 둘을 보며 버튼을 두 번 눌렀다.

 “당신의 시카고 생활이 무사히 풀리기를 기도해요. 오늘은 제게 있어 특별한 날이니, 그쪽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알렉스가 말했고, 토미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감사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라고 토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3

 테넘스 테이덤은 지난봄 뉴욕본사로 발령을 받아 들어왔다. 토미의 부서에 배정을 받았고, 나이가 젊어서 낙하산이 아니냐는 이야기가 돌았는데 헛소문이었다. 그는 일을 잘했다. 유능했기 때문에 올라온 것이다. 토미는 테넘스와 사적으로 대화를 나눌 일이 거의 없었지만 업무상의 이유로 자주 얼굴을 마주쳤고 얼마 뒤 친근한 동료 사이가 되었다. 여름 무렵에 그들은 이따금 같이 퇴근했고 사옥 근처 레스토랑에서 간단한 저녁을 먹기도 했다. 테넘스는 토미만큼은 아니지만 말수가 적은 편이었다. 게다가 다소 낯을 가리기까지 해서 실상 사적인 장소에서조차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유형은 아니었다. 그래도 유머감각이 있었고,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었다. 둘은 빠르게 친해졌다. 저녁 식사를 하는 동안, 토미는 그가 여태까지 사내생활을 어떤 방식으로 해나갔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테넘스는 예의범절을 중시했고, 그래서 고지식한 면이 있었지만 그렇기에 결코 선은 넘지 않는 사람이었다. 토미는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그를 좋아하기로 마음먹었는데, 마음을 먹고 보니 스스로 꽤 오래 전부터 그를 의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어느 순간부터 테넘스가 자주 책상 근처로 어슬렁거려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무엇을 더 했던 것은 아니다. 토미는 게이가 아니었지만 남자를 사랑해본 게 처음은 아니었고 그러나 교제를 해본 적은 없었다는 점에서 모호한 헤테로로 남아 있었다. 자신을 헤테로라고 생각하려 애썼기 때문이었는데 실상 그렇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다. 어쨌든 가을이 되었을 무렵, 테넘스 테이덤은 토미가 아마 게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처음부터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중요한 건 토미가 좋아하는 사람이 누구냐의 문제였고 테넘스 테이덤이 누구를 좋아할 수 있냐의 문제였다. 토미는 그의 바운더리에 없었다.

 고백을, 하지는 않았다. 아마 안 했을 것이다. 모르겠다.

 그 날에는 잔뜩 취했다. 그들은 다음 날 비행기를 타고 아틀랜타로 떠났다가 삼일 후 본사로 돌아와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이었다. 근처 레스토랑(이제는 단골집이 된)에서 짧게 저녁을 먹고 브랜디를 걸친 후 몇 가지 사적인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 때의 대화 역시 잘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은 바다에 드리운 낚시찌처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곤 했는데, 막상 잡아당겨보면 아무것도 걸려나오지 않았다. 무엇인가 떠올리고 싶다면 가만히 앉아 공을 들여야 했지만 토미는 수면 아래에 정확히 무엇이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토미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지나치게 긴장해 자꾸만 술을 퍼 넣던 자신과, 취한 자신을 택시에 태우던 테넘스, 다소 난처한 듯 머뭇거리며 등을 두들기던 손과 토미, 하고 부르던 목소리뿐이다. 다음 날 토미는 공항에서 테넘스를 만났고 테넘스는 캐리어 앞에서 애써 웃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잠시 어색한 기운이 흘렀다. 테넘스의 시선이 토미를 노골적으로 관찰하고 있었다. 어떤 것을 질문해보고 답을 내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찡그린 토미의 표정을 보며 마침내 어떤 답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토미는 간밤에 자신이 어떤 말인가를 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테넘스에게 어떤 말인가를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고 기억하고 싶지도 않았다. 눈앞의 상사가 성공적으로 웃고 있었고 일은 어설프게나마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그들은 앞으로 몇 시간 동안 가깝게 붙어 앉은 채로 날아올라야만 하는데 괜한 말을 꺼내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토미는 입을 다물었다.

 마음을 밀쳐놓는 일은 어렵지 않았지만 비행기를 타는 일은 거북해서 자꾸만 손에 땀이 났다. 그렇게 믿었고, 그렇게 되었다. 활주로를 따라 내달리던 비행기가 마침내 이륙하는 순간, 가벼운 충격과 함께 몸이 붕 떠올랐다. 토미는 세계가 자신을 밀쳐놓은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육신은 안전벨트에 잡혀 있었지만 영혼은 몇 인치 정도 몸에서 벗어나 바깥에 머물렀다. 잠시 후 이명이 찾아왔고 빈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했다. 건조해진 기내 공기를 메우며 먼지가 돌아다녔다. 테넘스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토미.” 토미는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테넘스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귀 끝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토미는 그 온도의 무게를 쟀고,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난처함과 연민으로 감싸인 어떤 것이다. 라고 저울이 말해주었다. 요컨대 네가 바라는 것만큼 무거워질 일이 없는 세계가 있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토미는 이미 마음속으로 심판을 내린 채 테넘스가 떠듬떠듬 꺼내는 이야기를 들었다. “요 근래 여자 친구가 저녁을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앞으로 저녁 식사는 같이 못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사실 여자 친구와 동거를 하고 있는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저녁을 먹자고. 그렇게 말하더군요.” 토미는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굳이 저울에 재보지는 않았다. 그는 충분히 알아들었고, 가느다란 힘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상사가 더는 난처해하지 않도록 모범적인 답안을 내놓았다. “예, 압니다.” “네, 다행이군요. 제가 여자 친구가 생긴 건 최근의 일이지만…….” “네, 압니다.” 그런 뒤에 대화는 없었다. 기내는 조용했고 이따금 스튜어디스들이 물과 음료와 커피와 쿠키를 날랐다. 토미는 아무 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빈속이 자꾸만 끓어올라서 견딜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주먹을 쥐자 식은땀이 새어나왔다. 손이 자꾸만 차가워졌다가 뜨거워졌다가 했다. 비행은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뭔가를 새겼다. 토미의 영혼이 부재한 사이, 몸과 공백의 틈을 비집고 들어와 결코 지워지지 않을 뭔가를 심어놓았다. 비행기가 지상에 착륙했을 때, 기체가 덜컹거리며 앞으로 쏠렸고 풍선처럼 부유하던 토미의 영혼이 다시 퍼즐처럼 맞춰지기 위하여 육신과 같은 각도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그 순간, 낯선 이물감을 느낀 그 투명한 존재가, 소스라치게 부르르 떨면서 튕겨 올라왔다. 그 때. 바로 그 때, 토미는 그것을 예감했다. 아, 나는 앞으로도 결코… 날 수 없을 것이다. 비행을 좋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제대로 자리 잡지 못 한 영혼이 헐겁게 덜컥거리고 있었다. 그게 꼭 결코 짜 맞춰지지 못 할 관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다물리지 못 한 채 평생을 이렇게 무방비하게, 숨기고 싶은 어떤 것을 보호하지 못 하고 뚜껑을 열어젖힐 지도 모른다고. 슬프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마음을 밀쳐놓으려 했는데 하필 비행기를 탔고, 그 중요한 순간에 세계가 흔들려서 토미의 몸과 영혼을 분리시켜 버렸고, 그래서 영혼을 밀쳐버렸고 중요한 것을 소실한 것 같았다. 이것은 사랑의 상처가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것을 뭐라 불러야 좋을까. 뭐라고 이름을 붙여서 책임을 물어야 하는가. 그래서 토미는 이 책임을 보잉사에 묻기로 했다. 그러나 테넘스가 말하길, 그렇지만, 토미. 당신은 이미 아틀랜타를 건너본 사람이 아닌가요?

 그러니까 이것은 비행기공포증도 될 수 없고, 사랑의 상처라고도 할 수가 없었는데, 그렇다고 실연이라고 하기엔 너무 억울했다. 토미는 아무 것도 의도하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답이 내려져 있었고 직장 상사이기 이전에 좋은 인연일 수 있던 사람을 잃었다. 예기치 못 한 소실을 만회하기도 전에 시카고로 이동되었다. 테넘스는 토미를 마치 화물 다루듯이 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는 결코 열어보고 싶지 않은 것처럼 굴었지만 실상 둘 다 알고 있었다. “압니다.” “네, 다행이군요.” 거대한 대륙을 가로질러 아틀랜타로 떠났던 두 사람은 뉴욕으로 돌아와선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고, 테넘스는 토미를 홀로 LA로, 유타로, 시애틀로 보냈다. 혼자 좌석에 앉아 붕 떠오르는 것에 대해 곱씹었다. 그럼 테넘스가 떠올랐고, 토하고 싶어졌다. 비행공포증이 있다는 것은 거짓말이지만 떠오르는 느낌을 좋아해본 적도 없다. 고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

 갑자기 세상이 마구 흔들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창가에 이마를 붙이고 있던 토미가 흠칫 놀라 일어났다. 얕은 잠의 장막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의식을 허우적거리자, 시야가 점차 또렷해지면서 불 꺼진 기내가 눈에 들어왔다. 시트벨트를 풀어도 좋다는 안내 등만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옆자리에서 희미한 향수 냄새가 났다. 토미는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어둠 속에서 신문을 읽고 있었다. 이번에는 종이로 얼굴을 가리지 않아서 옆모습이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플라스틱 커튼을 치지 않은 덕분에 창문 너머로 희미한 달빛이 일렁이며 둘의 좌석을 간간이 비추고 있었다. 기내는 조용했고, 이따금 어딘가에서 부스럭거리거나 헛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천천히 신문을 넘겼고, 종이가 소름끼칠 정도로 선명하게 부스럭거렸다. 토미는 알렉스가 들고 있는 신문의 타이틀을 읽었는데, 뉴욕 타임즈였고 대서특필 된 헤드기사가 전면을 통째로 차지하고 있었다. 토미가 기억하기로 뉴욕 타임즈가 전면 기사를 내보내던 것은 1990년대 후반이 마지막이었다. 뉴욕 타임즈는 2000년대 초반부터 잡지 형식을 도입하여 보다 촘촘하게 기사를 꾸려나갔다. 그런 류의 일을 하고 있으므로 토미는 간행기사의 지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알렉스가 들고 있는 신문은 출판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오래된 것이었다. 토미는 신문의 날짜를 확인하려고 했지만, 알렉스가 그 부분을 잡고 있어서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찡그려 어렵사리 손가락 틈으로 년도를 읽어냈다. 19…81년. 신문이 치워져서 고개를 들었다. 알렉스가 토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동자가 녹색으로, 혹은 갈색으로, 또 보라색으로 반짝였다. 토미는 알렉스가 웃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고, 비행기가 구름을 빠져나가며 달빛이 떨어져서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알렉스는 정말 웃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희미한 미소였고 어딘지 씁쓸해보였다.

 “토미, 이번에는 흔들리지도 않았는데 깨어났네요.” 알렉스가 말했다. “시카고까지 앞으로 삼십분 남았어요.”

 “음.” 토미는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비볐다. “그래요… 얼마 남지 않았네요…….”

 대답하고 나서야 이상함을 눈치 챘다. 토미가 알렉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제가 뭐 때문에 깨어난 건지 어떻게 아셨죠?”

 알렉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이다가, 다시 신문을 들었다.

 “알렉스.”

 “이봐요, 토미. 제 신문이 궁금하지 않아요?” 알렉스는 화제를 돌렸다.

 “…오래된 신문 같기는 하네요.” 토미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알렉스는 신문의 다음 장을 넘기면서 눈썹을 찡긋거렸다.

 “아뇨, 토미. 이건 미래의 신문이에요.”

 알렉스는 장난스럽게 신문을 뒤적이더니 곧 기사 하나를 짚어 읽어 내려갔다. “2018년 1월 8일의 기사네요. 당신이 시카고 부사에서 승진을 했어요.”

 “전 별로 승진하고 싶지 않은데요.”

 “오.”

 알렉스는 개의치 않고 다음 기사를 읽었다.

 “그럼 좀 더 전으로 가볼까요? 2017년 12월 25일, 당신은 크리스마스를 원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게 돼요.”

 “그거 정말 어색하겠네요.”

 토미는 테넘스의 어설픈 미소를 떠올리며 침침하게 대꾸했다.

 “별로 좋은 선택 같지도 않고요.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제 쪽에서 찾아가는 걸 텐데, 제가 그런 미친 짓을 실행하기로 결심했다면 아마 그 다음 날 리볼버를 입에 물 각오를 한 거겠죠.”

 “너무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말아요, 토미. 어쩌면 상대가 찾아가는 걸 수도 있잖아요?”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이곤 다음 장을 넘겼다.

 “2017년 11월 5일. 오, 당신은 원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게 돼요.”

 “진지하게, 미래의 저는 자살할 결심을 굳히는 걸까요?”

 “2017년 11월 2일. 당신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받네요. 아마 3일 동안 고민하다가 데이트를 나간 거겠죠. 토미 당신 너무 우유부단하네요. 애가 탈 상대를 생각해봐요. 요즘 시대에 누가 데이트 하나로 3일을 고민해요?”

 “제가 아직 하지도 않은 일로 비난받는 기분이란 이런 것이군요.”

 알렉스가 킬킬거렸고, 이번에는 토미도 작게 미소 지었다.

 “2017년 10월 31일. 당신은 전화를 기다리고 있어요.”

 “음.”

 토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테넘스가 전화를 할까? 과연? 그렇다면 왜?

 “오, 토미. 표정 풀어요. 이 신문에 나쁜 일은 단 한 가지밖에 적혀있지 않다고요. 미래의 당신은 좋은 전화를 기다리는 거예요.”

 “나쁜 일이 뭔데요?”

 알렉스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고, 다음 장을 넘겼다. 신문이 반으로 접혔다. 마지막 장이었던 것이다.

 “2017년 10월 31일. 시간을 보니 오전 2시 경이네요. 당신은 시카고에 도착하고, 좋은 일이 있을 거라고 확신하게 돼요.”

 토미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고, 알렉스 역시 그를 보며 화답했다. 둘은 마주본 채 오래 시선을 주고받았다.

 “고마워요.” 토미가 말했다. “이런 식의 위안을 받아본 적이 없었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기분이에요.”

 “위안이 아니에요, 토미.” 알렉스의 보조개가 깊고 아름답게 패였다. “이 신문에는 미래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으니까요. 전 그저 그대로 읽어준 것뿐이죠.”

 알렉스는 신문을 제대로 접기 위해 전면 부를 토미 쪽으로 잠시 펼쳐놓았고, 토미는 기사 헤드라인을 또렷이 읽을 수 있었다. ‘역대 최악의 여객기 충돌 사고. 시카고, 충격에 휩싸이다.’ 사진은 흑백이었고, 전면부가 심하게 일그러진 보잉 여객기 두 대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진 아래 달린 주석은 너무 작은 글씨라 잘 보이지 않았다. 파편들이 땅을 뒹굴고 있고, 사람들이 드문드문 등을 보이고 서있었다. 토미는 날짜를 읽었다. 1981년 7월 12일. 바로 다음 순간, 신문이 접혀 들어갔고 알렉스는 그것을 세 번이나 포개어 양복 안으로 집어넣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이번에도 알렉스는 상큼하게 웃어보였다. 머리 위로 시트벨트 안내 등이 꺼졌다. 비행기가 탈탈거리며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일어났다. 시트벨트가 그의 허벅지를 따라 미끄럽게 흘러내렸다. 토미가 고개를 들었다.

 “지금 움직이면 안 되지 않나요?”

 “오.” 알렉스는 새삼스럽다는 듯 머리 위의 안내 등을 확인한 후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돌아올 거예요.” 아마도요. 알렉스가 덧붙였다. 토미는 알렉스가 자신을 흉내 냈음을 알았지만 어쩐지 웃을 수가 없어서 그대로 굳어 있었다. 알렉스는 시계를 확인한 후 다시 토미에게 손을 내밀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토미.”

 토미는 눈앞의 손을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비행기가 흔들거리는 가운데 몸이 앞으로 조금씩 쏠리고 있었다. 잔잔한 물처럼 담겨 있던 영혼이 기울어지며 마구 출렁거렸다. 언젠가 이런 감각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속에서 뭔가 덜컥거리는 것 같았다. 다물리지 못 한 마음으로, 이렇게 평생을 무방비하게, 숨기고 싶은 어떤 것을 보호하지 못 한 채로……. 쏟아져 나오려고 했다.

 “우리가 또 만날 수 있을까요?” 토미가 물었다.

 알렉스는 기쁜 듯이 웃었고,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으로 코끝을 털어냈다. “그럼요, 토미. 우리는 다시 만날 거예요. 다른 방식으로든, 다른 시간으로든, 혹은 다른 공간으로든 말이죠. 하지만 장담컨대, 우리는 비행기에서 만나지는 않겠네요. 당신의 표는 편도고, 왕복이 아니니까요.”

 토미는 손을 뻗어 알렉스의 손을 잡았다. 그러자 알렉스가 맞잡은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깍지를 꼈다. 그것은 악수가 아니었기에 몹시 다정하고 상냥하게, 그리고 아주 따뜻하게 느껴졌다. 토미는 그의 향수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맞잡은 손 너머로 희끄무레하게 녹주석이 빛났다. 섬세하게 뻗은 속눈썹이 그 한 쌍의 보석을 조심스럽게 덮었고, 좁은 창을 투과한 달빛이 알렉스의 보조개를 선명하게 만들었다. 토미는 잠시 숨을 멈추고 그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고, 그 다음 순간, 어떤 온기가 맞물린 손가락을 따라 이동하는 것을 분명하게 느꼈다.

 “언젠가, 당신은 왕복을 하게 될 거예요. 가야할 곳과 돌아올 곳을 명확하게 알게 되겠죠. 길을 잃지 않게 되는 순간이 찾아와요. 누구나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이건 기사에서 읽은 말이 아니에요.” 알렉스는 토미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토미.” 알렉스는 깍지를 풀고 다시 악수를 했다. 그리고 얼빠진 토미를 보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 뒤, 그대로 복도를 빠져나와 걸어 나갔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도 그에게 주의를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알렉스는 마치 유령처럼, 마치 거기 없는 사람인 것 마냥 취급되었고,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알렉스는 복도 끝으로 사라졌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토미는 시트벨트가 널브러진 옆 좌석에 손바닥을 대보았다. 마치 오래 전부터 비어있었던 것처럼, 몹시 차가웠다.

 

 4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토미는 더 이상 기울어진다거나, 출렁거린다거나, 덜컥거린다거나 하지 않았다. 몸속에 무언가 꽉 들어찬 것 같았고 몹시 따뜻했다. 주먹을 쥐어도 식은땀이 새어나오지 않았고 속도 끓지 않았다. 발끝과 손끝이 줄곧 말랑말랑해서 이상할 정도였다. 활주로를 달리는 동안 몸이 앞으로 쏠렸지만 토미는 그 무엇도 놓치거나 밀치지 않았고, 모든 것을 제대로 붙잡은 채 거기 있었다. 아, 어쩌면 나는 앞으로……, 라고, 토미는 생각했다. 어떤 예언을 계시 받은 기분이었다. 그는 그 기분에 사로잡힌 채 아주 오랫동안 앉아있었다.

 승객 중 가장 마지막으로 내렸을 때, 카운터기를 들고 있던 스튜어디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입구에 선 토미와 텅 빈 좌석 칸을 번갈아 살폈다.

 “승객 분, 마지막이신가요?”

 “네, 마지막이에요.” 토미가 대답했다.

 “이상하네…….” 그녀는 얼굴을 찡그렸다. “한 사람 놓쳤나?”

 화물을 내리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서서, 토미는 시계를 확인했다. 벽면에 붙은 무수한 세계의 지명 중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다. 시카고. 새벽 1시 52분. 토미는 B칸으로 이동한 후 작은 트렁크 하나를 기다리면서 5분 정도를 지체했다. 그의 트렁크는 오래 걸리지 않고 컨테이너 벨트 위로 올라왔다. 토미는 그것을 끌고 관광객 라인을 지났고, 줄을 서지 않고 자국민 라인을 통과했다. 입국장으로 이어지는 자동문까지 머뭇거리지 않고 걸음에 힘을 주어 걸었다. 입국장에는 많은 이들이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줄지어 서서 누군가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토미는 그들을 지나쳐 공항 내부로 들어섰고, 열린 문으로 새어나오는 새벽의 차가운 공기를 느꼈다. 핼러윈 팻말을 단 카페와 베이커리가 보였고 공항 바깥에 드문드문 택시가 서있었다.

 출구의 기둥 근처를 지나던 토미는 닫힌 안내 데스크와 휴대폰 대리점 사이에 작게 마련된 어떤 공간을 보았다. 거기에 남자 한 명이 서있었다. 토미는 트렁크를 끌고 천천히 그곳으로 다가갔다.

 그곳은 작은 기념관이었다. 벽면에는 신문과 사진이, 전면부에는 작은 전시용 모니터가 붙어있었다. 공간 한가운데에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고, 비석보다 조금 낮은 곳에 일종의 단(團)이 있었는데 거기에 백합꽃들이 얹어져 있었다. 꽃들은 차곡차곡 시간을 두고 쌓인 것 같았다. 가장 아래쪽에 깔린 꽃잎들은 갈색으로 말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단에는 꽃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크고 작은 액자들도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은 남자, 여자, 아이, 혹은 때때로 가족 단위이기도 했다. 모두가 그곳에 놓여 추모를 받고 있었다. 토미는 벽면에 붙은 신문 기사를 읽었다. ‘역대 최악의 여객기 충돌 사고. 시카고, 충격에 휩싸이다.’ 뉴욕 타임즈가 걸어놓은 사진은 낯설지 않았다. 이번에 토미는 사진 아래에 달린 주석을 읽을 수 있었다.

 

 끔찍한 사고. 7월 12일 오후 9시 10분 경 시카고 상공을 날던 보잉 727이 반대편에서 날아오던 보잉 717과 충돌, 전면부가 격파되고 총 415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 델타 항공은 관제탑의 혼선을 원인으로 분석하고 있다. “이번 일은 역대 최악의 여객기 사고로 기록될 것입니다.” - 허프 댈런드 더스터스.

 

 사진을 둘러보던 토미는 그대로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꽃으로 파묻힌 사진들 중에 낯설지 않은 얼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토미는 눈을 깜빡였고, 녹주석을 떠올렸다. 사진 속의 알렉스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음, 저희 큰아버지시죠.”

 등 뒤에서 남자가 말했다. 토미는 고개를 돌렸고,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사진 속의 알렉스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눈앞에 서있었다. 토미는 잠시 뻣뻣하게 굳은 채 남자를 노려보다시피 했고, 조금 정신이 든 후에는 사진과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네, 알아요. 정말 닮았죠. 저희 아버지께서도 늘 말씀하셨어요.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제가 저희 아버지를 닮은 거예요. 큰아버지와 제 아버지는 쌍둥이셨거든요. 아무튼…….” 남자는 액자를 눈짓으로 가리키며 어색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태어나기 전에 돌아가셨지만, 저는 가끔 이곳에 와요. 뭔가. 연결되어 있는 기분이라는 게 있잖아요. 가족이란 그런 거죠.”

 토미는 여전히 형용할 수 없는 눈으로-다소 경악에 차있었다-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대화가 이어지지 않자 남자는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다시 한 번 어깨를 으쓱이곤 어, 하고 운을 뗐다.

 “시카고는 어떤 일로 오신 거죠? 업무 차? 아니면 이사? 이전에도 시카고에 와보셨나요?”

 “아뇨.” 토미가 작게 대답했다. “아뇨, 처음 와요.”

 “그렇군요.” 남자가 미소를 지었다. 토미는 남자의 볼에 파인 작은 볼우물을 볼 수 있었다. 입술이 부드럽게 호선을 그리며 매끄럽게 올라갔고, 왼쪽 턱 아래에 점이 하나 있었다. 알렉스는 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까 눈앞의 남자는 토미가 아는 사람이 아니었다.

 “음.” 남자는 우물쭈물하다가 엉거주춤 손을 내밀었다. “어, 우리 인사를 할까요.”

 토미는 그의 손을 내려다보다 말고 힘주어 잡았다. “네, 그러죠.”

 “제 이름은 알렉산더 스튜어트고, 그쪽은…….”

 “토미.” 토미가 말했다. “토미 테일러입니다.”

 “토미.”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럼 저도 알렉스라고 할까요.”

 둘은 그런 채로, 아주 오랫동안 악수하고 있었다. 알렉스에게서 희미한 향수냄새가 났다. 어떤 징조가, 몸속을 흐르던 따뜻하고 상냥한 기운이 부나비처럼 튀어 올랐다. 좋은 일이 있을 거야. 토미는 알렉스의 손이 자신의 손을 조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웰컴 투 시카고.” 알렉스가 말했다.

2017/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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