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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팬지»
2차/old 2019. 10. 23. 01:34

 플랫폼으로 사람들이 쏟아졌다. 햇빛. 날씨는 화창하고 밝았다. 역사 기둥 곳곳에 간이 테이블이 세워져 있었다. 여인과 노인들만 그 자리를 지키는 것은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구분하지 않고 뛰쳐나온 워킹의 주민들이 쏟아져 나오는 병사들을 유심히 보고 있다가, 테이블을 스쳐갈 때 홍차와 잼 바른 빵을 쥐어주었다. 귀환자들은 청년이라기보다 소년에 가까워 보였다. 고맙다는 말 대신 고개를 까딱이곤 서둘러 가던 길을 걸어 나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걷는 것처럼 보였다. 

 군복의 소년들은 꼬질꼬질하기만 했다. 뒤통수에 새까만 기름때가 딱딱하게 굳은 사람도 있었고, 너덜너덜한 군복을 입고 다리를 저는 사람도 있었다. 주민들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들의 등을 연신 두들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고했다.” “고맙다.” “이제 집이야.”

 토미는 그림자가 진 좌석에 앉아 차창 밖으로 펼쳐진 풍경을 보고 있었다. 철로에 싱그러운 풀이 자라나있고, 열살 배기로 보이는 사내 아이들이 무쇠로 된 길을 겅중겅중 넘나들며 신문을 날랐다. 아이들 키보다 훨씬 높게 쌓여있던 신문이 5월의 청량한 햇살을 받으며 차차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이제는 거의 그들 키만 했다. 토미의 맞은편 좌석 역시 볕이 들어 환한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알렉스는 엉거주춤 일어나 옷가지를 정돈하고 있었다. 눈이 부신지 곧잘 눈을 찡그렸다. 군복 입은 소년들이 복도를 따라 이동하며 종종 그들을 곁눈질로 흘끔거리다 줄이 앞으로 이동하면 고개를 돌리고 가던 길을 걸어나갔다. 그 시선들은 환희와 동지애로 가득 차있지도 않았고, 다만 무심하고 지쳐있었다. 알렉스는 시선을 느낄 때마다 고개를 들어 일일이 얼굴을 바라보곤, 옷매무새를 바로잡자마자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곧장 고개를 돌려 토미를 마주보았다. 토미가 줄곧 알렉스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선이 부딪치자 토미가 물었다.

 “내릴 거야?”

 “넌 안 내려?” 알렉스가 눈을 깜빡였다.

 “내려야지.” 토미가 대답했다.

 햇빛 때문에 자꾸만 눈을 찡그리게 됐다. 토미의 표정은 그림자가 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럼 나가자.”

 알렉스는 구겨진 신문과 빈 병을 한쪽으로 치웠다.

 토미는 담요를 꽁꽁 싸맨 채 창문 밖을 보며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차창밖엔 환희하는 시민들과 지친 귀환병들이 있을 뿐이다. 폭격과 어뢰, 난사하는 총과 삐라가 아니면 대체 바깥을 살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토미.”

 “먼저 내려도 돼.” 토미가 딱딱하게 대꾸했다.

 알렉스는 강한 반감이 생겼다.

 “여기가 종점이야.”

 “나도 곧 내릴 거야.”

 “그럼 같이 내리자. 왜?”

 그러자 토미가 고개를 돌려 다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은 환희도 동지애도 아니었으며, 동시에 건조하거나 지쳐있지도 않았다. 알렉스는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토미의 표정은 침몰한 함선에서 막 건져 올려 졌을 때와 다를 게 없었다. 그는 아직도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보였다. 덩케르크에.

 “알아서 해.”

 알렉스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푹 눌러앉았다. 눈을 감았지만 토미의 시선쯤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꿰뚫을 것 같은 녹색 눈을 상상하면서, 알렉스는 꼭 항변하는 것처럼 그 자리에 앉아 기차의 모든 사람이 빠져나갈 때까지 단단히 버텼다. 마침내 주변이 조용해지고 복도에 더는 그 누구도 나타나지 않을 때, 토미가 담요를 치우고 일어났다. 토미는 천천히 발을 좌석 아래로 내리면서 그를 불렀다.

 “알렉스.” 알렉스는 눈을 떴다.

 토미가 중얼거렸다.

 “나가자.”

 그렇게 말하는 토미의 눈은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플랫폼엔 아까만큼의 사람이 없었다. 간의 테이블을 정리한 주민들 때문에 기둥 곳곳은 비어있었고, 병사들은 플랫폼을 빠져나와 각자의 길로 흩어지고 있었다. 토미와 알렉스가 가장 마지막에 내렸다. 그들이 플랫폼으로 발을 디뎠을 때, 기차 앞쪽에서 증기가 힘차게 뿜어져 나오며 굉음을 냈다. 알렉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확인했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폭격의 기미는 없었다. 그들은 조국(home)에 있었다.

 토미는 몇 걸음 떨어지지 않은 기둥에 세워진 간의 테이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노파가 있었다. 그녀는 둘을 바라보며 한 손에는 컵을, 그리고 다른 한 손에는 빵을 들고 서있었다. 시선이 마주쳤으므로 그녀는 맹인이 아니었다.

 토미와 알렉스는 짐이 없었다. 도버에서 그들은 구명조끼를 가지고 있었다. 그게 유일한 짐이었다. 토미는 그것을 배 안에, 그리고 알렉스는 그것을 항구 입구에 버리고 나왔다. 그들이 앞으로 향하게 될 곳은 바다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둘은 빈몸으로 기차를 탔고, 워킹까지 멈추지 않고 달렸다. 어쩌면 그들이 마지막으로 향하게 될 곳이 결국 바다일 수도 있었다. 처칠은 이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쨌든 그들이 지금껏 타고 온 건 배가 아니라 기차였다.

 역사 안으로 들어섰을 때, 노파가 손을 뻗어 알렉스를 붙잡았다. 그리고 빵과 차를 안겨주었다. 알렉스는 이번에 똑바로 노인을 마주볼 수 있었다. 신문은 그들을 도망자에서 생존자로, 패배자에서 구조자로 만들었다. 잠시 부끄러움을 잊을 수 있게 소년들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고맙습니다.” 

 알렉스는 노파의 눈을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토미는 그녀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는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지 않았다. 대신 건너편 기둥에 세워진 간의 테이블을 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 몫의 식빵을 욱여넣으며 토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 테이블에는 중년 남성이 서있었고, 테이블 앞에는 한 병사가 혼란스럽게 서있었다. 그는 둘의 또래 소년으로 보이거나, 혹은 한두 살이 더 많아 보였다. 남자가 소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한참 자리에 서서 둘을 지켜보던 토미가 그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토미, 하고 알렉스가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알렉스는 노파와 토미의 뒷모습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미지근한 차를 한 번에 넘기곤 허겁지겁 토미의 뒤를 따랐다. 건너편 기둥에 가까이 다가갔을 때, 알렉스는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수 있었다.

 “집이 어디니? 내게 트럭이 있으니 가까운 곳은 데려다줄 수 있어. 아니면 버스를 안내해줄게. 여긴 정류장이 적단다.”

 남자는 마치 자신의 아들을 대하듯 눈앞의 소년에게 말했다. 그러나 소년은 눈을 굴리다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그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토미는 다가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러자 소년과 남자가 동시에 고개를 돌렸고, 토미와 토미를 뒤따라 걸어오던 알렉스를 발견했다. 소년의 시선은 토미를, 그리고 곧 그 뒤의 알렉스를 향했다. 알렉스는 재빨리 고개를 숙여 그 시선을 피했다. 남자가 토미에게 말했다.

 “서로 아는 사이니? 아까부터 통 입을 열지 않는구나. 여긴 시골이라서 말이다… 집과 거리가 멀면 주민들 도움을 받지 않고선 좀 힘들 텐데.”

 그 말을 들은 알렉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희 부대에요.”

 토미가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군복의 소년은 조용히 서있었다.

 “폭격 때문에 귀가 멀었어요. 못 알아들어요.”

 알렉스가 거짓말을 했다. 토미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지난 일주일 간 함께 잔교에 갇혀 있었고, 둘은 눈앞의 소년을 본 적이 없었다. 소년은 알렉스와 같은 부대도 아니었고, 심지어는 함께 배를 타지도 않았다. 그러나 토미는 잠자코 서서 알렉스가 하는 말을 들었다.

 “탈 것이 어디 있는지 알려주시면 제가 데리고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며, 알렉스는 바싹 마른 입술에 혓바닥을 찍어 눌렀다.

 알렉스는 멀뚱히 서있는 소년의 팔을 자신의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소년이 주춤거리며 그대로 딸려왔고, 토미와 알렉스 사이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토미는 남자에게 말없이 인사했다.

 남자는 손가락으로 역외 풍경을 짚으며 가까운 버스정류장의 위치와 방향을 설명해주었다. 알렉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트레이에서 식빵 하나를 더 집어먹었다. 그리고 그곳을 나오기 전에 하나를 더 챙겼다. 알렉스는 그 빵을 소년에게 건네주었다. 소년은 빵을 받았지만, 먹지 않고 물끄러미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어쩌면 토미처럼 그 역시도 아무것도 먹거나 마시고 싶지 않은 건지도 몰랐다. 그래도 알렉스는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는 차편이 있는 쪽으로 손가락을 뻗고, 아까 남자가 그들에게 설명해준 것처럼 버스의 방향과 위치에 대해 말하려 애썼다. 알렉스는 소년에게 자신의 설명이 어떻게든 전해지기를 바랐다.

 “저기로 가.”

 알렉스는 흙먼지가 날리는 지평선을 가리켰다.

 “…….”

 “저기야.”

 소년은 알렉스를, 그리고 토미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빵을 입에 집어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사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알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을 만큼 불확실한 움직임이었다. 둘 다일지도 몰랐다.

 그들은 어떠한 대화나 징조도 없이 헤어졌다. 느릿느릿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알렉스는 한동안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러다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옆자리가 비어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토미가 없었다. 토미는 이미 반대편을 향해 걷고 있었다. 알렉스는 빠른 걸음으로 그 뒤를 따라잡았다. 햇볕이 내리쬐었지만 토미는 나무, 전신주, 역사 지붕 아래로 자꾸만 걸어 나갔다. 그림자 아래로만 걷고 있었다.

 

 역 근처를 벗어나자 시골길이 이어졌다. 목가적인 풍경이었다. 칠이 벗겨진 울타리 너머로 오월의 풀꽃이 가득 피어있었다. 팬지꽃들이 많이 보였다. 시뻘겋고 샛노랬다. 알렉스는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철로 위의 기차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토미.”

 알렉스는 중얼거렸다.

 “아까 그는 프랑스군이었을까?”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알렉스는 재차 맥없이 되물었다. 토미, 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프랑스군이었을까?”

 “…….”

 바람이 불었다. 토미는 녹슬어가는 팻말 앞에서 멈추어 섰다. 버스 팻말이었다. 배차 간격이 넓었지만 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 옆으로 낡은 버스 한 대가 탈탈거리며 지나쳤다. 토미가 알렉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알렉스, 집이 어디야?”

 “여기서 너무 멀지는 않아.”

 “멀지 않아?”

 “…그래.”

 토미는 고개를 돌려 버스 안내판을 눈으로 훑었다. 다시 바람이 불었다. 알렉스는 이마에 엉겨 붙었다가 마구 흩날리는 토미의 머리카락을 볼 수 있었다. 그늘 안에서도 훤히 보였다. 잠시 후, 토미가 천천히 고개를 수그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난 이걸로 못 가.”

 그리고 작별했다.

 “잘 있어.”

 토미는 망설임 없이 마저 걸어 나갔다. 알렉스가 머뭇거리다 말고 멈추어 섰다. 버스는 아주 멀리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알렉스가 거쳐야 할 지역에 내려줄 수 있었다. 버스를 타야했다. 그러지 않는다고 토미와 계속 함께 갈 수는 없었다. 그럴 이유도 없었다. 알렉스는 멀어지는 토미의 등 뒤로 목소리를 높였다.

 “또 보자.”

 그가 힘주어 다시 한 번 외쳤다.

 “또 보자, 토미.”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류장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비포장도로에 트럭 한 대가 서있었다. 농부 한 명이 내려서 바퀴 쪽을 살피고 있었다. 토미는 그 앞에 멈춰서 무언가를 물어보았다. 농부는 토미의 군복을 보곤 다소 누그러진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것들을 가늠해보다가 곧 기다리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니까 토미는 트럭을 타고 갈 모양이었다. 알렉스의 가슴 한 구석이 내려앉았다. 철렁하는 감각이 아니었다. 안심에 가까웠다. 버스가 없어도 토미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어뢰를 맞을 일도, 폭력을 당할 일도 없는 시골의 어느 낡아빠진 트럭을 타고 버스로는 갈 수 없는 거리까지. 알렉스는 고개를 돌리곤 버스 안내판을 훑어보았다. 주먹을 쥐고 노려보듯 했다. 정신없이 게걸스럽게 활자를 훑었다. 알고 있는 지명들이 보일 때마다 눈으로 주워 담았다. 조국에 왔고, 집으로(home)가야 한다는 사실을 머릿속으로 상기시켰다. 나무 위에서 새가 울었다.

 갑자기 굉음이 터졌다. 명백한 폭발음이었다. 세상이 뒤집어졌고, 가지에 앉은 새가 날아갔다. 눈앞으로 섬광과 폭발, 불꽃과 시체의 이미지가 스쳐지나갔다. 알렉스는 반사 신경과 같은 속도로 흙바닥에 납작 엎드려 머리를 감쌌다. 헐떡거리며 숨을 골랐다. 신음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공포에 질린 울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죽음의 징조는 없었다. 가지 위로 다시 새가 날아와 앉았다. 바람이 불기 시작했고, 세상은 제대로 돌아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눈을 뜨고, 엉거주춤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토미가 기다리던 낡은 트럭이 보였다. 열린 보닛 안으로부터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알렉스는 헐떡이며 자리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키다말고 토미와 눈이 마주쳤다. 토미는 여전히 바닥에 바싹 누워 머리를 감싼 채 알렉스 쪽을 보고 있었다. 폭발음을 들었을 때부터 줄곧 주시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농부가 헐레벌떡 도로로 뛰어나와 보닛 안쪽을 살피고 있었다. 알렉스는 천천히 일어나 흙을 털어냈다. 가슴이 여전히 두근거리고 있었다. 쿵쾅거린 채 공포로부터 빠져나오지 못 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를 향해 달음박질했다. 토미는 여전히 일어나지 못 한 채 알렉스를 보고 있었다. 알렉스가 손을 뻗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토미는 작게 기침했다. 도로를 따라 버스 한 대가 달려오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냥 보냈다.

 “토미.”

 “…….”

 “토미.”

 알렉스가 토미의 어깨를 감쌌다. 군복은 아직도 조금 축축했다.

 알렉스는 묻고 싶었다. 갑자기 묻고 싶었다. 왜 기차에서 진작 내리지 못 했는지. 창밖으로 무엇을 그렇게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지. 왜 그렇게도 너의 집은 먼지. 버스로는 갈 수 없는 곳인지. 어디로 갈 것인지. 앞으로 어디로 가고 말 것인지. 그러나 전부를 물어볼 수는 없었다. 알렉스는 토미가 토미인지 혹은 다른 이름인지도 확신할 수 없다. 이 세상에는 너무 많은 토미가 있었다. 덩케르크에 두고 온 무수한 토미들이 있었다. 무수한 깁슨도……. 어깨를 쥔 알렉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제 햇빛은 기울어져 토미가 밝은 곳에 서있고 알렉스가 그늘에 서있게 되었다.

 “아까 뭘 보고 있었어?”

 알렉스가 물었다. 토미는 눈을 찡그렸다.

 “뭘?”

 “기차에서 뭘 보고 있었어?”

 바람이 마구 불었다. 햇빛 아래에서 토미의 머리카락이 잘게 부서졌다. 빛이 윤기를 따라 마구 흘러내렸다. 알렉스 역시 눈을 찡그렸다. 그늘에서도 눈이 부셨다. 오월이 잔인하게 아름다웠다. 세계 어딘가에서 여전히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멈추지 않고 사람들이 죽었다. 등 뒤에서 트럭 보닛을 닫는 소리가 들렸다.

 “……팬지들.” 

 토미는 고개를 숙였다.

 “팬지를 봤어.”

 버스 한 대가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알렉스 역시 고개를 숙였다.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부끄러움이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국을 지켜 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상륙지점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들판과 거리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언덕에서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의 철수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덩케르크에서 귀환했다.

 

 

「오늘의 철수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결국 개개인의 불행일 뿐이다.
미시적으로 파고들수록 잔인해진다.

20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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