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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미 화이트헤드는 생각했다.

 ‘내가 잘못한 거야?’

 Nope. 토미 화이트헤드는 언제고 잘못한 적이 없었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대체로, 아니 거의 절대적으로, 그것은 세계와 타인의 문제였다. 부엌에서 밤낮으로 소란이 끊이지 않을 때도, 부모가 일방적으로 이혼을 통보할 때도,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버지가 메일 하나를 덜컥 보내왔을 때도, 처음 보는 남자가 어머니의 뒤를 따라 어색한 웃음을 달고 거실로 들어올 때도, Site에 가입할 때도, 아니, 그 이후에도…… 토미는 잘못한 적도, 그렇다고 잘못된 적도 없었다. 왜냐고? 

 그는 조용히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는 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보아라, 세상 모든 뉴스는 떠들썩한 자들의 몫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게 항상 좋은 일은 아니다. 슈퍼스타가 될 깜냥이 없다면 허리를 숙이고 사는 편이 낫다. 시선과 주목, 가십과 오해 따위는 별세계의 일이었으며, 토미 화이트헤드는 이때까지 잘 해왔다고 스스로 자부할 수 있었다. 튀지 않고, 옳다고 생각되는 일을 하고, 불의를 보면 직접 행동하기보다는 경찰을 부르는 삶. 괴로워질 때마다 생각했다. 신탁계좌, 아이비리그, 성공이 보장된 미래. 그래도 견딜 수 없이 괴로워지면 보다 있는 힘껏 생각했다. 신탁계좌, 아이비리그, 성공이 보장된 미래. 알렉스 스타일스는 거기 없었다. 없을 예정이었고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그러나 토미 화이트헤드는 무언가 치명적인 실수를 한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선 인생이 이렇게 꼬일 리가 없었다. 

 노크 소리가 들렸다. 토미는 이불속에서 얼굴을 내밀었다. 낯익은 큼, 소리가 났다. 짐이었다. 

 토미는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토미, 저녁 안 먹을 거니?”

 “…….”

 문 바깥에서 서성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짐이 조용히 한 번 더 불렀다.

 “토미?”

 이번에도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후, 짐은 층계를 내려갔다. 발자국 소리는 천천히, 무겁게 멀어졌다. 아래층에서 짐과 엠마가 대화를 주고 받는 게 들렸다. 그리고 곧 오븐 타이머가 알람을 울렸다.

 토미는 뒤척이지도 않고 누워 있었다. 책상에 얹어둔 노트북은 웅웅거리고 있었고, 휴대폰은 잠잠했다. 채팅창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나왔으니 당연했다. 새로 올린 글도 없었다. Site가 띄워줄 알람 같은 건 더는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gib22가 게시판을 거슬러 올라가 토미의 게시물을 찾아서, 그의 이름을 누르고, 아이피를 따서 새 방을 개설하지 않는 한… 아니, 휴대폰은 영영 조용할 것이다. 애초에 상대가 일방적으로 종료한 채팅을 다시 이어가고 싶어 할 상대가 몇이나 될까? 제아무리 gib22라고 해도 말이다……. 토미는 허공을 쏘아보았다. gib22는 토미가 Site를 시작한 이례 가장 오래, 자주 교류한 온라인 친구였고, 방금 전까지 토미 인생에 닥친 최대 난관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던-적어도 토미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토미는 그것에 오히려 불편함과 불안함을 느꼈다-참이었다. 그건 토미 화이트헤드의 잘못일까? 그래, 적어도 gib22에겐 그렇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렉스 스타일스에게는 아니었다. 토미는 생각했다. 알렉스 스타일스에겐 아니야.

 그러나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토미 화이트헤드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경위에 대해 설명해야한다. 어디서부터? 토미는 알 수 없다. 자신이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은 어제? 아니, 좀 더 거슬러 가야할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설문지를 받은 수요일? 아니다, 좀 더 거슬러 가보자. 그렇다면 알렉스 스타일스가 린다 오스본에게 뺨을 맞던 지난주 월요일? 그래, 아마 그 때부터다. 자신은 왜 하필 주차장에 서있었을까. 토미는 그곳에서 알렉스 스타일스와 눈이 마주쳤고, 그가 말을 걸었으며, 자신은 그것을 필사적으로 무시하려고… 했으나 약간의 친절-“너 코피나.”-을 베풀었다. 아니, 그게 친절 축에나 낄 수 있는 문제인가? 어쨌든 그래도 알렉스 스타일스에겐 친절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토미 화이트헤드를 기억해냈고, 생각해보니 작년 수업도 같이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고, 그런데 '그 토미'가 자신의 설문지를 사물함에 얌전히 보관해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알렉스 스타일스는 마침 솔로였다. 좋다, 모든 퍼즐은 완성되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어디까지나 얄팍한 흥미로 토미 화이트헤드에게 접근한 것이다. 그렇다면 그 뒤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지? 토미 화이트헤드의 추론은 여기서 주춤거리고 만다. 기억속의 알렉스 스타일스가 더는 웃고 있지 않다. 그는 싸늘한 표정으로 토미 화이트헤드를 응시하고 있다.

 와우, 알렉스가 감탄한다. 그리곤 곧 입술을 비틀며 비난한다.

 “너 진짜 최악이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이상하고, 불가해하고, 최악이야.” 

 그리고 이 대화는 불과 금요일 오후에 있었던 일이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얼굴을 찡그린다. 그는 왜 린다 오스본에게 제대로 사과하지도 않는 주제에 나의 도덕성을 논하는 것일까?

 그것은 토미 화이트헤드를 포함한 우리 모두가 좀 더 알아봐야할 필요가 있다.

 

 “…좋아, 토미.”

 알렉스 스타일스가 대답했다.

 “약속한 거야. 무르는 순간 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건 너를 박살내버릴 테니까.”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홀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학생들로 분주했고 주변은 어수선했다. 그들을 흘끔거리던 테이블 건너편의 시선들도 이제 어느 정도는 흥미를 잃은 듯 각자의 도시락에 집중하고 있었다. 

 토미는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딘지 위태롭고 묘한 느낌의 미소가 걸린 알렉스 스타일스의 표정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함없이 반짝거려서 과연 학교 최고의 킹카라는 인상을 준다. 저 얼굴에 사랑을 고백한 모든 아이들이 그와 손을 잡고 입을 맞췄다. 몇몇은 함께 뒹굴었을 지도 모른다. 그가 말한 대로 남자든 여자든 혹은 둘 다거나 둘 다가 아닌 애들이든. 알렉스 스타일스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근거렸고, 모조리 성공했고, 최근엔 학교 최고의 퀸카와 뜨거운 연애를 하고 화려하게 걷어차이기까지 했다. 그가 토미 화이트헤드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면, 그건 알렉스 자신이 진지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이력에 넣을 새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맹세컨대 토미 화이트헤드는 스타일스의 이력서에 자신의 이름을 기입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요컨대 “린다 오스본에게 사과해”, 다시 말하자면 “네가 임신시킨 전 여자 친구에게 진중하게 사과해”따위의 조건을 내걸 때부터, 토미 화이트헤드는 그 결과가 어떻든 간에 알렉스 스타일스와 데이트를 할 마음이 단 한 톨도 없었다는 셈이 된다.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조건이 아닌가? 물론 알렉스 스타일스가 린다 오스본에게 저지른 만행은 그보다 더 말이 안 되는 사건이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토미는 알렉스가 절반 정도는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점심시간이 끝난 후 락카로 되돌아갔을 때, 토미는 이미 그들이 점심시간에 나눈 대화의 절반 정도를 잊어버린 상태였다. 불행히도 5교시에 진행된 지질학 수업의 교사는 그날따라 의욕이 넘쳤고, 그 다음 교시에는 고전 쪽지 시험이 예정되어 있었다. 모든 일정이 끝났을 무렵 토미가 그 무엇도 기억하지 못 하고 있었음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고 밖엔 할 수가 없다. 말했지만 토미가 그 말도 안 되는 제안을 입 밖에 냈을 때부터, 그는 거의 진심을 말하고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알렉스 스타일스가 빠른 보폭으로 토미의 교실을 지나쳐 바로 옆 교실, 린다 오스본이 앉아 있는 B반으로 향하고 있을 때, 토미는 노트와 교재를 가방에 차례로 욱여넣는다고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그는 주변이 왁자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학생들이 웅성거리며 책상을 박차고 하나 둘 빠져나가고 있었다. 토미는 가방에 마저 레포트를 집어넣은 후, 백팩을 매고 바깥으로 나왔다. 복도는 이미 린다 오스본과 알렉스 스타일스를 빙 둘러싼 구경꾼들로 가득 차있었다. 토미는 그 때까지도 이 소란의 주인공들이 대체 어떤 경위로 모이게 된 것인지는 까맣게 잊은 채로 인파를 헤치고 있었는데, 곧 익숙한 목소리에 멈추어 설 수밖엔 없었다.

 “오, 아-알-렉스, 너 정말 뻔뻔하고 구역질난다!”

 그것은 린다 오스본이었다.

 “그래?”

 그리고 알렉스 스타일스도 거기 있었다.

 토미는 구경꾼들을 재치고 앞으로 이동했다. 잠시만, 잠시만 지나갈게, 잠시만……. 하지만 사람들은 도무지 순순히 길을 비켜줄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 그건 그들이 의도한 게 아니라 모두가 린다 오스본과 알렉스 스타일스를 바라보고 있어 낑낑거리는 토미에게 신경을 써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토미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거의 엎어질 뻔했고, 다행스럽게도 누군가 이를 잡아준 덕분에 쓰러지는 꼴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토미가 고개를 들어 그 누군가를 확인하는 순간, 그건 다행스러운 게 아니라 불행한 일이 되었다.

 알렉스는 웃고 있었다.

 “오, 왔구나, 토미.”

 “어.”

 토미는 입을 다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제 구경꾼들은 모두 토미를 보고 있었다. 그는 인파를 헤치다 얼결에 앞으로 떠밀려선, 소란의 한가운데로 들어와 버린 것이다! 토미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왔다니?”

 토미가 어색하게 되물었지만 답은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지금 린다 오스본에게 사과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토미 화이트헤드와 데이트하기 위해서.

 “너 약속한 거야.”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이곤 고개를 저었다.

 “이 빌어먹을 약속을 건 건 너니까. 난 정말이지, 얘 얼굴은 다신보고 싶지 않았다고.”

  “그건 내가 할 말이야, 알렉스.”

 린다 오스본이 언짢은 듯 대꾸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시선으로 토미를 가리켰다.

 “얜 누구니? 너랑 뒹군 호모?”

 “뭐든 네가 알 바는 아니지, 오스본.”

 알렉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청스럽게 굴었다. 토미가 여전히 자신의 손목을 붙잡은 알렉스를 뿌리치자, 그는 순순히 토미를 놔주었다. 알렉스의 시선은 린다 오스본을 향해 꼿꼿하게 고정되어 있었고, 입가엔 여유로우면서도 위태로운 웃음이 걸려있었다. 토미는 알렉스의 옆모습과 그들을 둘러싼 구경꾼들, 그리고 마치 미어캣 무리처럼 린다의 주변을 지키고 서서 알렉스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는 그녀의 친구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린다 오스본은 미어켓들의 여왕처럼 보였다.

 그녀가 고개를 기울여 머리카락을 어깨 너머로 털어냈다.

 “그래서?”

 린다가 물었다.

 “나한테 찾아온 이유가 뭔데?”

 알렉스는 토미를 한 번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고, 알렉스는 다소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토미는 웃지 않았다. 그는 그저 이 상황이 빨리 끝나기를 바랐다! 혹은, 알렉스가 그만두고 돌아가거나. 

 그러나 그럴 일은 없어 보였다. 알렉스는 다시 고개를 돌렸고, 린다를 향해 다소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글쎄. 너에게 사과하려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군중 속에서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동시에 몇몇은 ‘알렉스가 드디어 제정신을 차린 모양이지.’라고 입을 모아 납득하고 있었다. 토미는 전자의 반응을 취한 사람들이 완전 돌아버린 거라고 생각했다. 

 린다 오스본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웃고 있었는데, 그녀의 친구들 역시 비슷한 얼굴이었다. 그들은 마치 바닥으로 떨어진 명예를 천신만고의 끝에 회복하고 방금 막 승리를 되찾은 사람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토미는 그녀가 진심으로 위안을 받길 바랐는데, 그런 것치곤 린다의 표정이 꽤나 석연치 못 했음을 아주 나중에도 부정하지 못 했다. 

 “너 정신 차렸구나, 그렇지!”

 린다가 말했다.

 “정말 기쁘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너와 다시 돌아갈 일 따위는 절대 없겠지만,”

 린다는 마치 선심을 쓰듯 그렇게 대꾸했다.

 “네가 사과한다면 어느 정도는 납득하고 너와 친구 관계를 유지할 의향은 있어.”

 “와, 그거 참 영광이네.”

 알렉스는 하나도 고맙지 않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사양할게, 오스본. 난 그냥 사과만 하면 돼. 네가 받아주던 받아주지 않던 그것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오, 나는 받아줄 거야.”

 린다의 표정은 언젠가 자선사업의 홍보대사로 일할 때 짓던 것과 아주 유사했고 일종의 결의에 차있었다.

 “왜냐하면 내 검진결과가 나쁘지 않았거든. 난 월요일에 이미 병원에 다녀왔어.”

 “뭐라고?”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린다는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오, 알렉스, 너도 걱정할 필요는 없겠다. 어쨌든 네가 아직 최악의 상태는 아니어서 다행이야. 그리고 그 이전에 네가 마음을 고쳐먹고 정상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것도 기뻐.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이전의 애정을 생각해서 기뻐하는 거야.”

 토미는 린다 오스본이 말하는 검진결과가 임신 혹은 그 비슷한 것에 대한 것이라면, 나쁘지 않다의 기준은 대체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어쨌든 린다 오스본의 기분은 나빠 보이지 않았고, 그건 토미에게 자신의 모험이 도덕적인 결과로 볼 때 그 나름대로 가치가 있었건 걸지도 모르겠다는 위안을 주었다. 물론 토미 자신은 문제를 피하려다 구덩이에 빠진 격이 되었지만, 린다 오스본은 자신에게 몹쓸 짓을 한 과거의 애인에게 사과를 들을 참인 것이다. 알렉스 스타일스의 데이트는 다시 한 번 거절하면 그만이 아니겠는가. 토미가 다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긴 했지만, 그건 사실 알렉스가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일이 아니었던가? 토미는 심지어 그를 위해 어떤 당위성을 마련해주기까지 한 것이다.

 문제는-토미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알렉스의 상태가 나빠졌다는 것이다. 토미는 알렉스가 짧은 순간 눈을 내리깔고 작게 신음하는 것을 보았고, 동시에 “이거 진짜 못 해먹겠네.”라고 중얼거리는 것을 들었다.

 알렉스는 호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뭐, 어찌 되었던 마저 할 말은 해야겠지.”

 그는 차키를 린다 오스본에게 던졌다. 키는 짤랑거리며 깔끔한 포물선을 그렸는데, 린다는 그것을 받기 위해 손을 뻗을 필요도 없었다. 잠시 후 그것은 정확히 린다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그녀는 알렉스를 보며 얼굴을 찡그린 채 설명을 구하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네 차 키잖아. 참, 오스본.”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미안.”

 침묵이 있었다.

 “뭐라고?”

 린다가 되묻자, 알렉스가 눈짓으로 키를 가리키며 대꾸했다.

 “너무 늦게 돌려줘서 미안하다고. 할 말은 그게 끝이야.”

 다시 한 번 긴 침묵이 있었다. 토미는 알렉스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알렉스 역시 고개를 돌려 그 시선을 받아쳤다. 끔찍할 만큼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가운데, 알렉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 이제.”

 “나랑 데이트 하자.”

 정적. 그리고 그 다음 순간, 린다가 거의 비명에 가까운 울음소리를 질렀다. 토미는 놀라서 돌아보았는데, 알렉스가 부드럽고 단호한 손짓으로 그가 자신을 보게 만들었다.

 “토미.”

 “이거 놔.”

 토미가 뿌리치며 뒤로 물러났다. 린다의 울음을 들은 학생들이 문밖으로 고개를 들었다가 운집한 구경꾼들을 보고 모여들고 있었다. 주변이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린다 오스본은 차 키를 바닥으로 집어던지곤, 하이힐을 신은 채 마구 발을 굴렀다. 그녀의 나이를 생각하자면 도무지 믿을 수 없을 만큼 우스운 광경이었다.

 “알렉스, 넌 정말 무례하고 뻔뻔하고 끔찍해!”

 린다는 씩씩거리며 욕을 퍼부었다.

 “넌 지금 나를 완전 우습게 만든 거야, 알고 있어?”

 모두가 마치 어떤 쇼를 보는 것처럼 린다로부터 눈을 떼지 못 하고 있는 가운데, 토미는 복도 끝에서부터 걸어오는 미스 메리엇을 발견하곤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소란에 휩싸여 있다는 걸 교사에게 알리고 싶은 생각은 추어도 없었다. 군중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이제 모든 소리는 토미에게 굉장히 크게 다가오고 있었다. “들었어?” “뭐가?” “방금 알렉스가 데이트라고 한 거 맞지?” “방금 쟤한테 데이트 신청한 거야?” “이름이 뭐더라? 어제 들었는데…… 아, 맞아.”

 토미 화이트헤드!

 세상이 빙글빙글 돌면서 급격히 속이 안 좋아졌다. 배가 부글거리고 있었고 모든 기운이 역류하는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점심에 억지로 꾸역꾸역 욱여넣은 샌드위치 때문일 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 그런 것 같았다. 목구멍으로 신 양배추물이 연거푸 넘어오고 있었다. 토미는 입을 틀어막고 몇 걸음 더 뒷걸음질 쳤다. 알렉스가 토미의 어깨를 붙잡고 작게 흔들었다. “토미? 토미, 너 괜찮아?” 알렉스의 목소리는 귓가로 들어오지 못 하고 웅웅거리며 흩어졌다. 토미는 입을 벌리다 말고 꾹 다문 채 작게 신음했다. 괜찮을 리가… 없었다!

 “토할 것 같아…….”

 “뭐라고?”

 알렉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바싹 닿은 귓가로 토미가 한 번 더 웅얼거렸다.

 “토할 것 같으니까, 저리 꺼지라고, 알렉스…….”

 이제 귓속으로 파고드는 모든 게 비명처럼 들렸다. 린다 오스본이 발을 구르며 내는 하이힐의 소리, 아이들의 웅성거림과 알렉스의 속삭임, 미스 메리엇의 고함소리가 고장난 테이프처럼 길게 늘어지다가…… 완벽히 정지했다. 바로 그 순간, 양배추의 신물이 코로 맹렬하게 넘어오더니 목구멍을 타고 반죽이 된 샌드위치가 치솟았다. 토미는 알렉스를 빠르게 밀쳐내곤 벽에 기댄 채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구토했다. 눈앞이 새하얗게 물들었다가… 차차 페이드인 되었다. 풍경이 돌아오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최악이야.’

 토미는 생각했다. 복도의 모두, 심지어는 린다 오스본까지 얼어붙은 채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역겨운 느낌이 깔깔하게, 그리고 끊이지 않고 목구멍으로 넘어왔고, 토미는 그것을 도무지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는 락카에 기댄 채 속수무책으로 뱃속에 든 모든 것을 게워냈다. 구토감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모든 게 끝났다. 미스 메리엇이 인파를 헤치고 다가오고 있었다.

 “다들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토미는 대답하려고 했다. 교수님, 설명하자면요, 라고 무엇이든 변명하고자 했다. 혹은 책임을 전가하고 도망갈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교수님, 제가 설명하자면, 이라고 토미는 운을 떼고 있었다. 지금 이 상황은. 이 모든 것은……. 그 순간, 알렉스가 토미를 망설임 없이 안아 올리면서 생각은 거기서 끊어졌다.

 “다들 좀 비켜줘.”

 알렉스는 토미를 어깨에 얹은 채 그의 두 다리를 팔로 감아 단단하게 지탱했다. 그 과정에서 엉망이 된 토미의 옷이나 시큼한 냄새 따위는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토미를 그대로 들어 올린 후, 미스 메리엇이 걸어오는 반대 방향, 그러니까 알렉스가 왔던 길을 성큼성큼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홍해처럼 갈라져 둘이 지나갈 수 있도록 비켜섰다. 토미는 작게 신음했는데, 이번엔 고통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에 대한 자책 때문이었다. 그러나 알렉스가 부드럽게 토미의 뒤통수를 쓸어주는 순간, 믿을 수 없게도 그 모든 상념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오로지 완성되지 못 한 생각만이 남았다. 알렉스 스타일스가 그를 보건실로 옮기는 동안, 토미 화이트헤드는 머릿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 교수님, 제가 설명하자면요. 이 모든 일은 결코 저나 린다의 잘못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것은 전부……, 이 모든 것은 전부……,

 알렉스 스타일스 때문이에요.

 까무룩 정신을 잃어버리는 드라마틱한 전개는 일어나지 않았다. 토미는 알렉스의 품에 안긴 채 한 층을 건너 보건실까지 이송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같은 학년뿐 아니라 타 학년-심지어는 몇 명의 교사까지-이 목격했다는 점에서, 토미 화이트헤드의 다음 주 월요일은 꼬여도 단단히 꼬일 것이 분명했다.

 바로 이런 이유로, 알렉스가 토미를 매트리스 위에 앉혀놓았을 때, 토미 화이트헤드의 기분은 나락으로 떨어져있었다. 알렉스가 휴지를 들고 오자 토미는 고개를 숙인 채 시선을 내리깔고 차갑게 대꾸했다.

 “그냥 가.”

 “농담이지?”

 알렉스는 무릎을 접고 앉아 토미의 턱을 부드럽게 들어 올리려 했는데, 토미는 손을 휘둘러 그를 쳐냈다.

 “됐다니까.”

 “너 대체 왜 이렇게 심술을 부리는 거야?”

 “심술이라고?”

 토미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딴 사과를 오스본에게 해놓고, 소란은 있는 대로 다 피운 후에, 어쨌든 약속을 지켰으니 나와 뭐라도 해보겠다고 구는 거야, 지금?”

 토미가 바닥을 쏘아보며 무시무시하게 내뱉었다.

 “난 정말이지 네가 싫어, 알렉스 스타일스. 넌 뭐라도 된 것처럼 사방팔방을 벌집 쑤시듯이 쑤시고 다니지만, 그래도 사리분별은 할 줄 알았어. 넌 네 스스로가 마치 관대하고, 차별적이지 않고, 모두를 사랑하고, 그래서 동시에 모든 사랑을 독차지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유감스럽게도 넌 내게 있어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야. 아니, 굳이 나뿐만 아니라 이젠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걸. 린다 오스본에게 네가 어떤 짓을 했는지 생각해보라고.”

 알렉스는 휴지를 쥔 채 굳어 있었다. 토미의 시야로 알렉스의 손이 보였다. 그는 휴지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너는… 린다한테 그러면 안 됐어. 그리고 난 처음부터 너랑 데이트 할 생각 같은 거 없었어. 그것에 별로 미안함을 느끼진 않아. 어쨌든 네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오히려 너는 나한테 고마워해야하는 셈이지. 알렉스, 네가 내 환심을 사려고 이렇게 구는 거 난 전혀 달갑지도 않고 고맙지도 않아. 넌 정말 얄팍하고…….”

 “너 진심이야?”

 알렉스는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되물었다.

 “얄팍하다니, 뭐가? 넌 방금 오스본이 어떤 말을 내뱉었는지 보고 오는 길이야. 토미, 그리고 넌 호모포비아도 아니랬고, 내가 뭘 하던 알 바 아니라고 했었지. 그리고 지금 네 태도를 봐!”

 “내가 뭘?”

 토미는 시큰거리며 토기를 쓸어내렸다. 그는 스스로도 자신이 다소 지나치게 반응하고 있음을 깨달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이미 절반 이상의 진심을 쏟아낸 참이었고 속은 여전히 매슥거렸다. 그렇게 토해냈는데도 불구하고 속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문득 최악의 금요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짐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거였으면서도 토미를 앞좌석에 태웠고, 하필 라디오 DJ는 조용한 재즈 팝을 틀어주었으며, 알렉스는 모두의 앞에서 자꾸만 토미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고,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수락해서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는 그 조건을 이용해 린다 오스본에게 배로 상처를 입혔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알렉스 스타일스가 싫었다. 아니, 이번 주만의 일도 아니었고 저번 주의 일도 아니었다. 알렉스가 린다 오스본에게 뺨을 얻어맞던 지난주 월요일보다도 훨씬 더, 어쩌면 이번 학년보다 더 멀리, 작년, 혹은 제작년에도… 토미는 그를 싫어하고 있었다. 그건, 알렉스 스타일스가 잘나서도 아니었고, 그가 잘난 집안이어서도 아니었고, 난봉꾼이어서도 아니었다. 그는……. 그는 토미와 비슷했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모든 걸 해내고… 있어왔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커밍아웃’을. 

 

Tommy0612 :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 난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불신해. 16:57

gib22 : 네가 말한 그 알렉스처럼? 16:57

Tommy0612 : 그래. 16:58

Tommy0612 : 걔처럼. 16:58

 

 “그래, 내 태도 말이지. 알렉스, 전에도 말했지만 난 린다 오스본과 네 사이에 벌어진 일 따위에 깊은 관심은 없어.”

 토미가 말했다.

 “하지만 솔직히… 네가 언젠가 이런 문제에 휘말리기를 늘 바라고 있었어.”

 “무슨 뜻이야?”

알렉스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난 너를 직접적으로 싫어할 구실이 필요했던 모양이야.”

토미가 대답했다.

"그러니까 알렉스, 네가 방금 그런 일을 겪게 되어서 참 기쁘다. 넌 돌려받은 거고, 난 비로소 널 싫어할 완벽할 구실을 찾은 셈이지.”

끔찍한 정적이 흘렀다. 알렉스는 휴지를 움켜쥔 채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 토미의 뒤통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정확히 이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고, 토미 화이트헤드의 사고방식을 따라잡을 수도 없었고, 그것을 따라잡을 시도도 딱히 하고 싶지는 않았다. 헤이호, 이번엔 끝까지 가보자고. 머릿속의 목소리가 비웃고 있었다. 그러니까 알렉스 스타일스, 뭘 기대한 거야? 네가 건드린 건 생각보다 더 형편없는 인간인 것 같은데. 저 자식 완전 미친 거 아니야? 알렉스, 말해 봐, 알렉스! 어쩔 거야, 끝까지 갈 거야? 계속 해볼 거야? 알렉스는 생각했다. ‘no.' 

 “토미.”

 알렉스가 말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난 지금부터 영영 꺼져주겠어. 하지만 그 전에 진지하게 말하는데, 넌 빌어먹을 호모포비아야.”

 “그리고 넌 인간쓰레기고.”

 토미가 대꾸했고, 알렉스는 이번에는 결코 웃지 않았다.

 “놀랍네! 그거 참 고맙다.”

 그는 쓰레기통에 휴지를 던져 넣으며 싸늘하게 대꾸했다.

“난 린다 오스본한테 사과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솔직히 방금 것도 사소한 문제였지. 난 그걸 대충 제시에게 맡길 셈이었어. 굳이 얼굴 보면서 키를 돌려줄 필요는 없잖아, 안 그래? 너도 우리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빌어먹을 정도로 아주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말이야. 맞아, 네가 그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걸었을 때, 난 네가 오기를 부린다는 걸 알았지. 네가 날 싫어하는 것쯤은 나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어. 그거 알아, 화이트헤드? 난 너를 작년, 아니 재작년부터 알고 있었고, 네가 나를 싫어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어. 하지만 그게 그 흔히들 말하는 깍쟁이들의 태도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내가 거기에 도전한 건 맞아. 그걸 얄팍하다고 말해도 난 별로 상관 안 해. 어차피 내 연애사는 모두 얄팍한 채로 시작했었거든. 하지만 맹세컨대 네가 린다 오스본과 똑같은 족속인 걸 알았더라면 이런 바보 같은 조건은 받아들이지도 않았어. 사리분별이라, 오, 나도 그 정도는 할 줄 알아, 화이트헤드! 난 린다 오스본에게 전혀 사과할 것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왜냐하면 난 잘못한 적이 없거든. 그리고 네가 그것에 대해 뭐라 참견할 여지 같은 건 없어.”

“아, 그래.”

토미는 빈정거렸다.

“그럼 우리의 개인적인 일로 인해서 결국 오스본만 불쌍하게 된 거네, 그렇지?”

“너 진짜 최악이다.”

알렉스가 얼굴을 구겼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서 가장 이상하고, 불가해하고, 최악이야.” 

토미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알렉스의 표정을 마주보곤 몹시 당황했다. 토미는, 단 한 번도 알렉스 스타일스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도 있는 사람이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건 그가 생각하는 알렉스가 지나치게 가벼워서도 있었고, 그런 충격을 받을 만큼의 양심과 마음이 남아있는 사람이라면 애초에 린다 오스본에게 진작 사과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된 것 같았고, 토미 화이트헤드는 죄책감을 느껴야 할 타이밍인 것 같았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상처를 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이런 사람이라서 유감스럽다, 화이트헤드. 널 제대로 알진 못 했지만, 어쩐지 난 네가 괜찮은 놈일 거라고 생각했었어.”

알렉스는 지친 것처럼 중얼거렸다.

“뭐, 난 늘 사람을 고르는데 서투르지.”

그리고… 그는 떠났다. 보건실 문이 닫혔고, 토미 화이트헤드는 홀로 시트 위에 남겨졌다. 옷에서부터 토사물 냄새가 진하게 피어오르는 가운데 토미는 방금 전까지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를 진지하게 곱씹어보았다. 그는 분노에 취한 채 얼떨떨한 상태에 놓였고, 알렉스의 반응을 이해하려 애쓰면서도 마음 한 편으론 상관 쓰지 말라고 아우성을 치는 내면의 목소리들과 맞서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마음이 찝찝해졌다.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자신이 틀린 말을 했었나? 아니다.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필요 이상으로 대꾸했었나? 그렇다. 토미는 오스본의 일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개인적인 감정으로 몰아붙였고 비난했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린다의 일은 알렉스의 잘못이었다. 전적으로, 그랬다.

하지만 석연찮은 구석이 있었다. 사실 그건 알렉스도 토미도 흥분해서 도무지 알아차리질 못 했던 것인데, 그들이 주고받은 대화는 조금씩 어긋나있었다. 전개도 당위도 엉성하고 이상했으며, 결과적으로 그들은 제각기 다른 이유로 분노하고 있었다. 그리고 알렉스 스타일스는 상처를 받았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토미가 전적으로 린다를 지지하고 알렉스에게 비난을 퍼부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체 그게 왜?

…Nevermind. 토미가 중얼거리며 일어났다. 휴대폰으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짐의 전화였다. 반짝거리는 화면 위로 gib22가 보냈던 메시지가 떠있었다.

 

gib22 : 무슨 일인데? :> 12:14

 

토미는 가만히 내려다보았고, 짐의 전화가 끊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짐이 늘 그렇듯 포기했을 때, 홀드를 풀고 gib22에게 답장을 보내기 시작했다.

 

Tommy0612 : 어… 그냥 좀.   15:08

Tommy0612 : 하지만 일단 다 끝났어.   15:08

 

뭐라고 설명해야만 좋을까? 학교 최고의 가십꾼들이 한 판을 벌였고, 그 사이에 껴서 구경꾼들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데다가, 공개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고, 그 뒤에 곧장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멋지게 토한 금요일이다. 짐은 주차장에서 토미를 기다리고 있으며 곧 다시 전화를 걸 테고 오늘 저녁은 피자도 라자냐도 아닐 것이다. 그리고 토미 화이트헤드는 방금 알렉스 스타일스와 완전히 틀어졌다. 앞으로 알렉스 스타일스는 결코 토미의 삶에 침범할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고, 그건 바로 토미가 바라던 전개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마음 한 구석이 이렇게 찜찜한가? …Nevermind. 이제 주문을 외울 차례였다. 그게 뭐였더라? 그래, 신탁계좌, 아이비리그, 성공이 보장된 미래. 다시 한 번 외운다. 신탁계좌, 아이비리그, 성공이 보장된 미래.

‘알 게 뭐야.’

엉망진창이 된 토미 화이트헤드가 보건실을 나선다. 고개를 숙이고 걸으며 눈을 감는다. 비틀거리면서도 꾸준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다음 주 월요일, 미스 메리엇의 급작스러운 수술 일정으로 생긴 부재가 초래할 비극을 알았더라면, 토미는 그 날 짐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 피자든 라나쟈든 무엇이든 잔뜩 퍼먹고 몸에 문제를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을 것이다. 

토미 화이트헤드와 알렉스 스타일스의 앞에는, 다음 주 내내 한 자리에 앉아 지루하기 짝이 없는 캘리포니아 로컬 역사 수업을 들으며, 미스터 심슨의 무용담을 들을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다.

 인생이란 그런 것이지.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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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는 등허리를 꼿꼿하게 펼친 채 앞만 보고 있었다. 창가로부터 오전의 햇살이 끊임없이 쏟아지던 장면이 기억난다. 알렉스는 토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한 자리에 앉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알렉스는 옆자리의 토미가 한 번쯤은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시선을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토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칠판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고, 이따금 시선을 내려 노트 위에 필기를 하는 것으로 그 수업에 완전히 참여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의 도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쫓기듯이 필기하는 토미의 펜과 희미하게 떨리는 손등, 어지럽게 움직이다 갈피를 잡은 듯 칠판을 응시하는 토미의 불안한 시선 따위를 관찰할 수 있었다. 애쓰지 않아도 훤히 보였다. 어쩌면 지각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토미는 그 날 유일한 지각생이었고, 거의 최초의 지각인 것처럼 보였고-교사가 무슨 일이 있냐는 식으로 오히려 걱정했기 때문이었다-무언가 불만스러워 보였고 동시에 몹시 불편해보였다. 그는 교실에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사람이었던 알렉스 옆의 빈자리를, 그 교실에 남은 유일한 빈자리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곤 이내 체념한 것처럼 가방을 풀고 자리로 들어왔다. 알렉스는 토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는 교내에서 유명했다. 우등생이었고 단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었다. 같은 수업을 몇 번 들어본 적도 있고 복도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알렉스가 아는 한 그는 굉장히 조용하고 침착했다. 재미있을 거야. 무엇이 재미있을 것인지도 모르고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등생과 한 자리에 앉았네. 좋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번 보자고.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토미는 알렉스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곤, 놀라울 정도로 소리 없이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재빨리 노트를 꺼내 책상에 펼쳐놓고 필기구 세 개-펜, 하이라이트 마크, 화이트-를 나란히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마치 숙련된 목수처럼 보였다. 알렉스가 대놓고 토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알렉스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 할 리가 만무했으므로 그것은 무관심하다기보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알렉스를 차단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그전까진 한 번도 마음으로 들어온 적이 없던 토미의 이름을 중얼거려보아야 했다. 토미. 토미 화이트헤드. 그 이름은 호기심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입술이 밀려 올라갔다.

“Hey.”

알렉스가 작게 속삭이며 토미의 손가락을 제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렸다. 토미는 돌아보지 않았다. 희미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을 뿐이었다. 알렉스가 한 번 더 불렀다.

“Hey.”

이번에 토미는 알렉스를 곁눈질했다. 경고의 눈빛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그런 반응이 신선했다. 적어도 알렉스의 Hey는 그 이전까진 꽤 괜찮은 신호와 함께 긍정적인 응답을 들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알렉스가 아는 한, 초면에 알렉스에게 반감을 가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호모포비아 집단을 제외하곤. 어쨌든 호모포비아들도 알렉스의 Hey에 무응답으로 대처하지는 않았으므로 토미는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었다. 링컨 스쿨 1교시에 진행되는 켈리포니아 로컬 역사 수업은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교사의 잡담이 지나쳐 영양가가 거의 없는 수업으로 유명하다. 알렉스가 맹세컨대 이 수업에서 필기할 것이 있다면 미스터 심슨의 사생활에 지극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거나, 혹은 미스터 심슨이 쪽지 시험에 자신의 신혼여행지가 튀니지였는지 바르셀로나였는지를 묻는 보너스 문제를 출제할 정도로 분별력 없는 교사여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토미는 교실에 입성하자마자 멈추지 않고 무엇이든 적고 있었다. 옆에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교내 최고의 미남(자기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어쨌든 사실이다)을 완전히 차단하고 말이다. 사실, 알렉스에게 별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플러팅의 의도도 없었다. 그는 그저… 조금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알렉스가 물었다.

“오늘 왜 늦었어?”

이제 미스터 심슨은 캘리포니아의 타호 호수에 대해 설명하다 말고 자신의 보이스카우트 시절 첫 캠핑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토미는 시선을 내리깔고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알렉스가 손을 뻗어 토미의 노트를 건드리려고 하자, 토미가 그의 손을 밀쳐내다 말고 펜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펜이 데굴데굴 구르다 말고 알렉스의 구두에 맞아 멈추었다. 순산 토미와 알렉스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햇빛 아래서 토미의 눈동자가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알렉스는 그 속에서 토미의 신경질적인 어떤 말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꺼져.’ 그는 허리를 굽혀 토미의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토미에게 내밀었다.

“미안.”

“괜찮아.”

토미의 목소리는 그 신경질적인 눈동자에 비해 지나치게 단조로운 톤이었다.

“고마워.”

토미는 펜을 받아든 후 시선으로 인사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알렉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알렉스는 고의적으로 토미와 슬쩍 팔을 부딪쳤다. 이번에 토미는 뒤척이거나 노려보거나 꼿꼿하게 앉지 않고 알렉스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알렉스는 똑똑히 들었다. ‘Fuck.' 오, 그래. 힘내, 알렉스. 이런 일도 있는 거지.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하곤 깨끗한 자신의 노트를 덮었다. 내가 좀 성가시게 굴긴 했잖아. 그렇지? 종이 치자 토미는 깔끔하게 가방을 챙긴 후 누구보다 빠르게 교실을 나가버렸다. 제시가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서서 알렉스의 표정을 감정했다. 너 굉장히 얼떨떨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네. 알렉스가 입술을 익살스럽게 삐죽이며 대답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러고 나서, 제시가 낸시를 데리고 왔고… 정확히 점심시간 종이 칠 무렵 낸시는 알렉스의 스물 몇 번째 애인이 되어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를 깔끔하게 잊어버렸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토미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뭐라고?”

토미는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나랑 데이트하자고.”

알렉스가 말했다.

“뭐 어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던가, 아님 영화를 빌려서 집에 가던가, 피자를 먹던가… Whatever.”

“데이트가 뭔지는 나도 알아.”

토미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 잘 됐네. 그럼 우리…….”

“싫어.”

토미가 딱 잘라 말했다. 알렉스는 놀랍지도 않았는데, 그건 거의 예고된 대답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그에게 이상한 전의를 불어넣었다. 알렉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기울이고 조금 앙탈을 부렸다.

“왜?”

“첫째로, 난 바빠.”

토미는 마치 준비되어 있던 사람처럼 이유를 열거하기 시작했다.

“둘째로, 난 남자랑 데이트 안 해.”

“셋째로, 한다고 해도 너랑은 안 해.”

“넷째로, 난…….”

“워, 알겠어, 토미. 알겠어.”

알렉스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토미는 알렉스를 쏘아보았는데, 알렉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으므로 그는 양팔 안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토미의 체구는 알렉스가 늘 멀리서 마주칠 때마다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작았다. 토미의 어깨는 그의 어깨와 거의 반배의 차이가 있었다. 저보다 몇 살 어리다고 해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알렉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토미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토미를 못마땅하게 만든 것 같았다. 토미는 신경질적으로 알렉스의 팔을 치워냈다. 진동소리가 들렸다. 토미는 고개를 숙여 제 휴대폰을 확인하곤 다시 홀드를 내렸다.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린 채 한쪽 눈썹을 올렸다. 

“애인이야?”

“아니.”

토미는 마치 종족 번식 외엔 별 다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신인류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정말 그렇게밖엔 그 눈빛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새)아빠야.”

“그럼 넌 지금 솔로라는 거네?”

“그렇다고 너랑 데이트 할 생각은 없어.”

“그걸 노리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난 윤리적인 입장으로 접근한 거라고.”

알렉스가 항복이라도 한 것처럼 양손을 들어올렸다. 토미는 가방을 고쳐 맸다.

“잘 됐네. 계속 윤리적으로 살도록 노력해 봐. 내 눈엔 전혀 그렇게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오, 너 굉장히 단정적이다.”

“그럼 아니야?”

“아닌데.”

“그럼 가서 린다에게 사과부터 하는 게 어때?”

그 말에 알렉스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너 호모포비아야?”

“뭐라고?”

이번엔 토미가 경멸스러운 듯 눈을 치켜떴다.

“내가?”

“그래.”

알렉스가 대꾸했다. 

“진지하게 묻는 거야.”

토미는 모욕을 받은 기분이 됐다. 끔찍한 농담을 듣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그는 알렉스가 몹시 가증스러워졌다. 그러니까 알렉스 그는 성소수자고, 그러므로 자신을 거절하면 상대는 호모포비아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그는 린다를 임신시켰고 분명 그에 관해 무책임하게 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그 주차장에서, 마치 쇼의 일부처럼 화려하게 뺨을 얻어맞으며 걷어차였다. 린다는 시끄럽고 유난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토미는 진심으로 린다를 동정했다. 알렉스를 빌어먹을 난봉꾼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는 토미의 상상 속에서 윤리의 테두리 가장 끄트머리에 선 채 저 편할 대로 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토미는 알렉스에 대해 단언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에게 그 어떤 윤리적 비난, 혹은 인간적 지성에 대한 비판을 듣는다면, 그건 토미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을 때뿐일 거라고,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걸 알렉스의 입에서 들을 이유 같은 건 없다고 완벽하게… 아주 완벽하게 생각했다.

“난 빌어먹을 호모포비아가 아니야.”

토미는 얼굴을 찡그린 채 숨을 몰아쉬려고 애썼다.

“이봐, 알렉스. 내가 너를 거절했다고 호모포비아가 되는 건 아니야. 난 네가 누구랑 자던 전혀 상관없어. 다시 말해서, 난 그냥 너한테 관심이 없는 거야. 신경 끄고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오.”

알렉스는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너 그런데도 내가 오스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 때,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엔 끊어지지 않고 연거푸 이어졌다. 토미는 알렉스와 자신의 액정을 번갈아 보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토미는 연거푸 “네, 알아요.” “네, 죄송해요.” “지금 교문 근처요.” “곧 나갈게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통화를 종료한 후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오스본에게 사과하던 말던 그것도 내 알 바는 아니지만.”

토미는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라면 마땅히 그러했을 거야.”

그리고 그는 인사도 없나 나가버렸다. 알렉스는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토미가 빵,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승용차 앞에 멈추어 창문을 내린 남자와 몇 마디 대화를 하고, 뒷좌석에 타려다 멈추어 서서 다시 한 번 남자와 대화하곤…… 다시 앞좌석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차는 요란한 라디오 소리를 내며 떠나버렸다. 주차장으로 알렉스의 Boo! 몇 장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었다. 알렉스는 손에 들린 토미의 설문지를 내려다보았다.

 

비고 : 이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는 거야?

 

“글쎄, 토미. 내가 알겠어?”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헤이 호, 이번엔 끝까지 가보자고.”

재미있을 거야.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 최고의 우등생에게 차였네, 좋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번 보자고. 

그렇게 해서, 토미 화이트헤드는 알렉스 스타일스의 타겟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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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Tom0612

급해서 그런데 종료된 채팅방 상대 어떻게 불러내?

└ 이거 완전 핑프잖아 -HHpl

 └└ 나도 잘 모르는데 -karl9

└└└ 333 핑프는 아닌 듯 -jujujm 

└ 그냥 네 프로필 들어가서 채팅 서버 접속해. 대기실에 채팅 기록 있어. -torry

 └└ 고마워. -tom0612

└ 니 학교킹카 까던 걔 아님? 뭔일인데 -df***

 └└ 그리고 넌 또 아이디 블러처리하네 -hurrion

└└└ 너 내 스토커냐? -df***

 

My Cheating History

HOSTNAME : gib22 

2017.06.24 17:00 

ip 122.101.122.92

! gib22를 호출합니다 !

 

Tommy0612 : 급해서 그런데, 이거 보면 답장 줄 수 있어?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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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한 금요일이었다. 토미 화이트헤드와 짐 트레버는 침묵 속에서 링컨 스쿨까지 이동했다. 라디오는 15번 도로의 정체 상황을 사무적으로 알리는 중이었고 평소 시끄러운 댄스곡을 선곡하던 DJ는 재즈풍의 클래식팝을 틀어주었다. 짐은 토미에게 사소한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아침을 덜 먹던데 입맛이 없니? 어제 하루 종일 노트북만 보고 있던데 너무 오래 그것만 두들기고 있지 마라. 눈이 안 좋아지잖니. 늘 그렇듯 짐의 질문 혹은 염려는 지나치게 의무적인 느낌이 있었고-적어도 토미는 그렇게 생각했다-토미는 대충 ok로 모든 질문에 대답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둘은 링컨 스쿨의 주차장에 다다르기 전까지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토미는 안전벨트를 푼 후 몸을 돌려 뒷좌석에 던져놓은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제 짐은 느닷없이 뒷좌석 문을 열어젖힌 토미를 향해 다소 머뭇거리는 톤으로 물었다. “오늘은 앞좌석에 타는 게 어떻겠니.” 정말이지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토미는 잠시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채로 어색하게 입을 벌렸다. 그는 바로 이전에 학교 최고의 킹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어떤 난봉꾼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고 온 참이었다. 두 번의 거절은 분명 쉬운 일일 것이다.

“어…….”

토미는 머뭇거렸다.

“그래요.”

그래요… 는 무슨! 토미는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토미의 몸은 이미 앞좌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가방을 발아래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짐은 헛기침을 하며 라디오 볼륨을 줄였는데, 그건 토미에게 아주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무슨 일 없었니?”

짐이 물었다. 토미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딱히요.”

그러니까 토미 화이트헤드는 방금 전 학교 최고의 킹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아니, 그만두자. 토미는 더는 생각하기를 관뒀다. 알렉스 스타일스와의 작은 해프닝은 곧 잊혀 질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대체 왜 자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일까? …Nevermind.

“음, 넌 늘 아무 일이 없었다고 대답하는구나.”

짐이 우물쭈물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이제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창으로 희미하게 토미의 얼굴이 비쳤고, 그 너머로 링컨 스쿨이 빠르게 멀어지는 중이었다. 토미는 찡그리고 있었다. 짐이 지금 뭘 시도하는 거지?

“그야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학교를 다니면서… 오, 그러니까 내 말은.”

짐은 진땀을 뺐다.

“네 일상 이야기가 궁금해서 묻는 거였단다. 어떤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

토미는 할 말을 고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정말이지 어색하고 끔찍한 분위기였다. 토미는 자신이 짐의 제안을 거절하고 뒷좌석에 앉아야만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는 엠마의 핑계를 댈 수 없었지만, 머리를 굴리면 어떤 핑계든 댈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핑계든. 바보 같은 핑계라도 댔다면 짐은 알겠다고 대답했을 것이고 더는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았을 테였다. 토미의 말이 진실이라서가 아니라, 토미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토미 혹은 엠마가 거절하면 그 이상 다가오지 않고 선을 지켰다. 토미는 그의 그런 점이 굉장히 편안하면서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짐이 상처받을 때마다 윽박을 지르거나 신경질을 내는 사람이었다면, 토미는 그를 증오하거나 밀어내는데 훨씬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짐은 상처를 받으면 그대로 거기 멈춰서 다가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건… 그건 마치, 토미 같았다. 그리고 토미가 생각하건대, 침묵하는 자들이야말로 때론 가장 거대한 상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짐이 불편했다. 짐이 정말 불편했다. 자신이 가장 손쉽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상대가 생기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고… 그러니까, 토미는 짐이 정말로 불편했다. 

짐은 가는 내내 토미에게 어색한 대화를 시도하려고 애썼다. 토미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표정을 지으며 하나하나에 대답했다. 그는 ok로만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물어보았고 오래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토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헛헛하게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는데, 짐은 그것에 용기를 받은 것처럼 자꾸만 대화를 끌어나갔다. 차가 엠마의 학교에 멈추어 섰을 때, 토미는 속으로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엠마가 뒷좌석 문을 열다 말고 앞좌석에 앉은 토미를 흘겨보며 시선으로 물었다. ‘너 뭐야?’ 그러거나 말거나 토미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 엠마. 오늘도 피자 먹고 싶니?”

“아니.”

엠마는 간밤에 외계인이 토미를 죽이고 그 거죽을 뒤집어쓴 후 완벽히 새로운 토미로 거듭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난 피자에 미친년이 아니야.”

저녁은 라자냐였다. 짐의 요리 실력은 정말 좋았다. 토미는 이번에 한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말 끔찍하리만큼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저녁 식사였다. 제니는 오늘도 늦는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토미와 엠마는 꾸역꾸역… 아니, 중간부터는 정말 맛있어서 진심을 담아 라자냐를 퍼먹었다. 짐의 ‘어색한 시도’는 저녁에도 계속되었다. 라자냐의 맛과는 상관없이, 토미는 분명 오늘 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식탁 아래로 초조하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게시판에는 이미 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고 잠금 화면으로 알림 몇 개가 쌓여 있었다. 토미는 빠르게 눈을 굴려 내용을 훑어보았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hurrion과 df***가 키보드 배틀을 벌이는 것이었다. 대체 왜 남의 게시물에서 이러는 건데? 토미는 묵묵히 라자냐를 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 물었다. “더 줄까, 토미?” “아뇨, 됐어요.” 토미는 대답했다. “전 올라갈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체하지 않았다. 밤이 될 때까지 토미는 그가 락카 앞에서 모조리 쏟아버린 유인물들을 파일 철에 가지런히 정리하며 수시로 노트북을 들락거렸다. 채팅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달리 뾰족한 수나 괜찮은 채팅 친구의 조언 없이, 거의 잠들 때까지, 토미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만 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무슨 정신으로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한 거지?

“다녀올게요.”

토미가 다소 멍한 정신으로 인사했다. 

“늦지 않고 마중 나가마.”

짐은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 다녀와라, 토미.”

토미는 건성으로 보이는 고갯짓-사실 그는 어쩔 줄 몰라 고개를 까딱일지 말지 고민하다가, 너무 늦어버린 타이밍에 마구 흔들어버린 것이다-으로 답한 후 차문을 닫았다. 짐이 오늘 아침에 침묵을 지켜준 건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토미는 뒷좌석에 탈 생각으로 가방을 미리부터 던져놓았지만, 결국 또다시 앞좌석에 앉는 끔찍한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금요일은 토미에게 굉장히 피곤한 날이 될 예정이었으므로 아침부터 짐과의 대화로 진땀을 뺐다면 토미는 그 날 점심 알렉스 스타일스의 멱살을 쥐어 잡았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들은 그 날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했다. 거의 하루 종일.

자신의 슬픈 운명을 아직 감지하지 못 한 토미 화이트헤드는 잠시 머뭇거리며 주차장을 둘러보았는데, 그곳에는 더는 Boo! 하고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는 무수한 알렉스의 얼굴도 없었고, 요란하게 트럼펫을 울리는 AL's 패거리도 없었고, 설문을 위해 뛰어다니는 제시도 없었다. 그는 아주 만족스럽게 불안한 마음을 놓아주었다. 빵! 뒤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토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짐을 돌아보다가, 이내 가방을 고쳐 매곤 교문을 통과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토미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뭔데?’

토미는 생각했다.

‘이게 대체 뭔데?’

모두의 시선이 토미 화이트헤드에게 집중되고 있었는데, 알렉스는 그 일련의 시선이 결코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작게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말하자면 1교시의 흔하지 않은 풍경이었고 어떤 일이 막 벌어질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교내의 모든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토미 화이트헤드와 알렉스 스타일스의 교집합은 고작 해봐야 같은 영장류라는 정도였고, 굳이 또 하나의 교집합을 찾는다면 생물학적으로 남자라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알렉스 스타일스가 누군가의 옆자리에 자진해서 앉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앞줄, 그것도 흔히들 모범생 혹은 너드 취급을 받는 인간들을 위해 마련된 좌석처럼 가지런히 비어있는 “지식의 로얄석”에 앉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거기 앉았다. 정확히는, 토미 화이트헤드가 앉은 자리 옆에 가방을 두고 앉았다. 토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알렉스를 올려다보자, 알렉스는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만연하게 띄우며 고개를 기울였다.

“오, 안녕, 토미. 간밤에 생각은 좀 해봤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토미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뭘?”

“어제 내가 데이트 신청한 거.”

교실이 소리 없이 술렁거렸고 이제 교실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던 교탁 앞 로얄 석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책상 아래로 빠르게 텍스트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토미는 이 일련의 사태가 전혀 반갑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덤덤하게 수습하고자 애썼다.

“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어제 거절했잖아.”

“거절하면 보통 그걸로 끝난 거 아니야?”

“좋아, 잘 기억하고 있잖아.”

토미는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져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는 기분 좋은 듯 자리에 앉아 토미를 바라보았다. 토미는 그 부담스러운 관심에 응하는 대신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교실이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기 때문인데, 그건 전적으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던 까닭이었고, 토미는 정말로… 자신이 아직 이것을 수습할 기회가 있다면, 너무 늦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곡히 빌었다.

“생각 안 해봤어.”

토미는 거짓말을 했다.

“내 대답은 여전히 싫어, 야.”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그럼 나도 뭔가 물어봐야겠는데.”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 여자야?”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토미가 불쾌한 듯 대꾸하자,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여자거나 남자거나 해? 아님… 뭐,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아니.”

토미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왜 물어보는 건데?”

“그런 애들도 있어서?”

알렉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럼 너 헤테로야?”

토미는 입을 다물고 알렉스를 쏘아보았다. 알렉스는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오, 그래. 음. 그럼 너 호모포비아야?”

“아니!”

토미는 이번에 정말 화를 냈다.

“한 번만 더 물어보면 네 멱살을 잡을 거야.”

“이상하네.”

알렉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대체 왜지?”

“알렉스, 네가 웬일로 앞자리에 앉아있구나.”

미스 메리엇이 서류를 내려놓고 교탁 앞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물리학 교사로 레포트를 무지막지하게 내주기로 유명했는데, 거기에 더불어 주일마다 쪽지시험을 봤다. 알렉스는 수요일에 그녀의 수업에서 거의 반타작을 했다.

“오, 쪽지시험에 대한 충격이 컸거든요.”

알렉스가 선량한 웃음을 지어보였으나 돌 심장으로 만들어져 있는 미스 메리엇은 이에 굉장히 냉담했다.

“모두에게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구나. 성적에 향상심을 가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수업 시간에 요란스럽게 굴거나 졸게 되면 뒤로 내보낼 거다.”

“걱정 마세요.”

알렉스가 쾌활하게 웃으며 토미의 팔을 건드렸다. 토미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그를 피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업 종이 울렸다.

알렉스의 말이 맞았다. 그는 떠들지도 졸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토미를 건드리거나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는 얌전히 거기 앉아서 필기를 하고, 교탁을 보고,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여 미스 메리엇을 ‘퍽 흡족하게’ 했다. 그들은 그 수업 이후로도 다음다음 교시에 한 번 더 마주쳐야만 했는데, 알렉스는 그 때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토미의 옆자리를 점유함으로써 모든 소란을 증폭시켰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학교는 이미 새로운 가십거리로 떠들썩했다. 한 번도 그 소란에 오르내린 적이 없고, 그럴 일도 없어보였던 이름 하나가 그 주인공이었다. 토미 화이트헤드. 데이트. 거절. 그리고 다시, 토미 화이트헤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잠깐만, 네가 말하는 게 내가 알고 있는 ‘그’ 화이트헤드야? 말했지만, 그리고 토미 본인은 잘 몰랐지만, 혹은 알았다면 조금 우쭐해하면서도 겁을 먹었겠지만, 그는 유명했다. 알렉스 스타일스 만큼 유명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교사들도 학생들도 그가 누군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맹세컨대 그와 알렉스 스타일스 사이엔 조금의 접점도… 무엇 하나… 겹쳐지는 게 없고 또…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도 어색했고…… 그러나 그 토미 화이트헤드가 맞았다. 그가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고, 거절했고, 알렉스가 다시 달라붙었다. 그러나 플러팅 하거나 삽질을 하는 것은 또 아니고, 그냥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게 다였다. 정말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토미는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알렉스가 아침,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순간, 데이트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도 이 학교 곳곳에 자신의 이름이 무수한 학생들 입을 타고 배송될 거란 걸 말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학교의 생태를 잘 알고 있는 건 알렉스 스타일스 같은 난봉꾼들만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맹세컨대 토미는 이제 이걸 수습할 기회는 거의 남지 않았고, 굳이 기회가 남았다고 친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알렉스를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바람을 맞히거나… 여하튼, 다소 매정하고 매몰찬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엔 접점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죽을 때까지 없을 것이란 것을 모두의 앞에서 인식시키는 일. 토미에겐 바로 그런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런 일 따위를 시도할 생각은 없었다. 알렉스가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는 굳이 나서서 남을 헤집거나 상처 입히는 일을 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알렉스 스타일스와 토미 화이트헤드의 차이점이 아니겠는가! 가엾은 린다. 린다 오스본!

알렉스는 도시락을 들고 홀을 가로질러 토미의 옆자리로 왔다. 구석진 곳에 앉아 홀로 매점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토미는 그가 다가오는 걸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알렉스가 어깨를 붙잡아 토미를 앉혔다.

“아직 샌드위치가 남았잖아, 그렇지?”

알렉스가 윙크를 해서, 토미는 정말로 구토를 할 뻔했다… 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사실 이런 류의 최면은 알렉스가 정말 잘생겼으므로 거의 토미에게 들어먹는 일이 없었다. 윙크를 하던 애교를 부리던 알렉스가 하면 정말 괜찮게 보였다. 다만 토미는 ‘낯부끄럽지 않게 잘도 저런 짓을 하는 구나…’하고 감상에 빠질 뿐이었다.

어쨌든 토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들었다. 그러나 식욕이 뚝 떨어져 더는 베어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건 굉장히 맛이 없었다. 짐이 싸준 도시락이 있긴 했지만 토미는 그것을 열어보는 대신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왔다. 그리고 그건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다……. 짐의 도시락을 꺼냈다면 알렉스가 오기 전에 그것을 해결하고 자리를 떴을 수도 있었고, 그럼 알렉스에게 발견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훨씬 맛있는 점심을 했겠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토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렉스는 자신의 도시락 통을 열었다.

“오, 샌드위치네.”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토미는 그걸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알렉스는 얼핏 보기에 식당에서 비싼 밥을 사먹거나 외부로 나가 아무 레스토랑에서 무엇이든 주문할 인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도시락은, 그러니까… 좀 가정적이지 않은가. 짐처럼. 알렉스에게 그런 가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는 않았다. …Nevermind. 토미는 신경을 껐다.

“Hey, 토미.”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토미이.”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만 알려달라니까.”

“어제 네 가지는 댔던 것 같은데.”

“세 가지야.”

알렉스가 정정해주었다.

“그게 그거지.”

토미가 대꾸했다.

“납득 가능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바쁜 게?”

“오, 아니, 그건 이해가 되긴 해.”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확히는 그 뒤의 두 개가. 넌 헤테로도 아닌데 남자랑 데이트도 안 하고…….”

“헤테로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럼 헤테로야?”

토미는 대답 대신 맛없는 매점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맛이 없었다. 알렉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어쨌든 말이야. 그리고 설령 해도 나랑은 안 한다며.”

“그래.”

토미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걸 느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그게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야.”

알렉스가 자신의 샌드위치를 한 입 물곤 Hmm, 하고 만족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싱싱한 양배추를 아삭아삭하게 씹으며 열정적으로 물었다.

“이것 봐.”

“뭘?”

토미는 알렉스 입에 든 양배추를 역겹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조금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거기 말고, 내 전체적인 얼굴을 보라고.”

그래서 토미는 그렇게 했다.

“어때?”

“뭐가?”

“잘생겼잖아.”

토미는 전 인류에게 투자할 수 있는 혐오의 총량을 그 순간 다 소진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진짜 너무하다. 사진으로 찍어놓고 내가 심각해져야만 하는 순간에 꺼내보고 싶어. 이를테면 헌혈할 때.”

알렉스가 투덜거리자 토미가 매정하게 대꾸했다.

“그건 불법이야.”

“장난 아니거든!”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라면, 그것도 솔로인 상태에서, 내 얼굴로 데이트 하자고 했을 때 이미 뻑갔을 거야.”

“잘 됐네, 너 혼자 데이트 해.”

“그게 데이트야?”

알렉스가 진심으로 물었다.

“너 내 얼굴이 싫어?”

토미는 좀 질렸다는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알렉스… 네가 잘생겼다고 모든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줄래.”

“내가 잘생겼다곤 생각하는구나.”

알렉스는 단순해보일 만큼 행복해졌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네가.”

토미는 매점 샌드위치를 포기하고 종이로 뭉쳤다. 거의 절반은 먹었지만, 그 이상 해낼 자신이 없었다.

“난 네가 싫어. 아니, 싫다기보다… 그러니까, 너랑 있는 게 싫어.”

“왜?”

토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홀을 가득 채운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음식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몇 명은 분명하게 그들이 앉은 테이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난 조용히 지내고 싶어.”

‘그런 것치곤 존나 유명하던데.’

알렉스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구태여 입으로 뱉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넌 클로짓게이구나.”

토미는 곤란하단 표정으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술을 물었다.

“입 닥쳐.”

“왜?”

“아니니까.”

“아니야?”

토미는 다시 주변을 훑어보았다.

“아니야.”

토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Whatever.”

잠시 침묵이 있었다. 홀 안은 온통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달그닥 거리는 락앤락 통 소리로 시끄러웠다.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떠드는 가운데 토미는 어색하게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토미는 허겁지겁 텍스트를 확인했다.

 

gib22 : 무슨 일인데? :>  12:14

 

“오, 이거 너희 부모님이 싸주신 거야?”

알렉스가 토미의 팔 아래에 놓인 짐의 도시락을 가리켰다. 토미는 홀드를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 아마도.”

“대답이 이상한데.”

알렉스가 샌드위치의 마지막 조각을 털어 넣었다.

“그런데 왜 안 먹어?”

“매점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서.”

토미가 재빨리 둘러댔다. 알렉스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구석에 박힌 볼품없는 매점 샌드위치와 짐의 도시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 입맛이 아주 특이하구나.”

“알 거 없잖아.”

“내가 맞춰볼게. 이거 네 아빠가 만든 거지?”

토미는 말문이 막혔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널 데리러 오니까? 원래 그렇잖아. 부지런한 쪽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거라고.”

알렉스는 마지막 조각을 완전히 삼킨 후 다시 한 번 윙크를 해보였다. 이번에 토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거나 그 미소에 반항할 힘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그저 고개를 돌리기만 했다.

“따지자면 아빠지만 별로 아빠인 것도 아니야.”

토미가 말했다.

“오.”

알렉스는 눈치껏 되묻지 않았다. 토미는 처음으로 그것에 조금의 호감을 느꼈다.

“먹을래? 어차피 버릴 거야.”

알렉스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토미의 도시락을 바라보다가 코를 찡긋거렸다.

“아니, 네가 먹는 게 낫겠는데… 버리지 말고.”

“네 알 바는 아니지.”

토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고, 알렉스는 그의 방어적인 태도에 다소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하게도 그것에 대해 더 캐묻거나 에둘러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거절당한 그 자리에 멈췄고, 입을 열지 않았고, 그리고 그건…… 짐을 생각나게 했다. 토미는 이제 완전히 메스꺼움을 느꼈다. 데이트를 거절했을 때처럼 굴었다면 좀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럼 알렉스에게 샌드위치를 던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모두가 그것을 지켜보고 자신이 알렉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려줄 수도… 있었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알렉스가 그렇게 했다면, 신이 한 번의 기회를 내려줬던 셈이라고 토미는 분명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토미에게 더는 기회를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제 토미는 스스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토미가 이 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어떤 시도라도 하려던 참에, 고맙게도, 알렉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뭘 하면 나랑 데이트해줄래?”

토미는 마음속으로 이모지를 생각했다. :> 무슨 일이야? 오, 별 거 아니야, 전에 말한 걔한테서 데이트 신청을 받았어. 와, 뭐라고 대답했어? 거절했는데, 조건을 걸어보기로 했어. 어떤 조건?

‘더러운 놈!’ ‘오, 가엾은 린다 오스본! 임신했대?’ ‘그렇대!’

“네가 린다 오스본에게 사과하면.”

토미가 말했다.

“너랑 데이트할게.”

그 순간, 토미는 방금 전까지 생글거리던 알렉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있었고, 모두의 웃음소리가 멀어졌고, 달그닥거리는 홀의 잡음과 작은 비명소리와 매점 앞에서 웅성거리는 군중의 웅성거림이 천천히 세계 뒤편으로, 아주 천천히 밀려났다. 그들은 잠시 진공상태에 도달했다가, 이내 순식간에 세계 한가운데로 되돌아 왔다.

“…좋아, 토미.”

알렉스 스타일스가 대답했다.

“약속한 거야. 무르는 순간 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건 너를 박살내버릴 테니까.”

그런 후, 알렉스는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일그러진 것 같은 웃음이었고, 토미는 대체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토미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Chatting Dialog

gib22 : 무슨 일인데? :>   12:14

Tommy0612 : 어… 그냥 좀.   17:08

Tommy0612 : 하지만 일단 다 끝났어.   17:08

gib22 : 심각한 일이었어?   17:15

Tommy0612 : 음.   17:18

Tommy0612 : 잘 모르겠는데.   17:18

Tommy0612 : 몇 가지 점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17:18

gib22 : 어떤 점?   17:18

Tommy0612 : 학교 최고의 가십꾼들이 한 판을 벌였고, 난 사이에 껴서 구경꾼들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데다가, 그 싸움이 끝나자마자 공개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고, 그 뒤에 곧장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멋지게… 토했다는 점?   17:18

gib22 : oh.   17:20

gib22 : are you okay?   17:20

.

gib22 : are you really okay, Tommy?   17:22

.
.
'n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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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mmy0612 : yes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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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a.m.

월요일 등교 시간, 알렉스 스타일스가 주차장에서 학교 최고의 퀸카에게 따귀를 얻어맞는다. 주변에는 열댓 명의 구경꾼이 있었다. 토미는 차에서 막 내린 참이었다. 매니큐어를 꼼꼼하게 바른 린다 오스본의 긴 다섯 손가락이 알렉스의 뺨을 강타할 때, 구경꾼들로부터 일제히 감탄이 터져 나왔다. 워! 토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알렉스가 화를 낼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울음을 터뜨린 건 린다였다. 그녀는 마치 거대한 재앙을 막 목격한 사람처럼, 다소 인위적인 격양으로 가득 찬, 길고 시끄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불과 십분 전까지 그들을 태우고 왔던 스포츠카의 좌석에 던져진 키를 집어든 후, 보란 듯이 알렉스의 품으로 던졌다.

“더러운 놈!”

“오, 조심해.”

키를 엉거주춤 받아든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토미가 서있는 쪽으로부터 등을 지고 있어서 토미는 단지 알렉스의 어깨 너머로 시큰거리는 린다의 눈물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만을 간신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일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도 알렉스는 그녀를 달래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알렉스가 말했다.

“볼 일 남았어?”

“있겠어?”

린다는 경멸어린 눈으로 알렉스를 쏘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신 말도 걸지 마.”

“오, 그래.”

“꺼져!”

린다가 요란한 하이힐 소리를 내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알렉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거두었다.

“그런 것치곤 본인이 떠나고 있는데 말이지. 잘 가, 오스본! 생각나면 연락하고!”

린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비실비실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물론 네 혐오와 분노가 정상적인 범주로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야.”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학생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알렉스는 몸을 돌려 스포츠 차에서 백팩을 꺼내 어깨에 걸친 후, 키를 만지작거리다 공중으로 휙 던져 올렸다. 토미와 시선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알렉스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키를 솜씨 좋게 낚아챘다. 그가 잘생긴 얼굴로 장난스럽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Hey, 안녕.”

토미는 뒤를 돌아 아무도 없는 주차장 쪽을 확인했다. 알렉스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오, 아니. 너 말이야.”

토미는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손을 흔들었다.

“재밌는 구경거리 잘 봤어?”

토미는 대답 대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너 코피나.”

알렉스가 몸을 숙이고 황급히 인중을 더듬었다. 검지와 중지에 선명한 피가 묻어나왔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토미는 교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손등으로 피를 훔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백팩을 고쳐 매고 차문을 닫았다. 학교 종이 치고 있었다.

 

12:24 a.m.

모두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학교 최고의 퀸카와 학교 최고의 킹카의 한 달 연애가 막 쫑난 참이었고 불과 한 시간 만에 가십거리는 무서울 만큼 몸집을 불려서 이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조차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임신시켰대. 정말? 무슨 소리야, 걔 섹스할 땐 무조건 콘돔 쓰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 해봤냐? 오, 넌 그럼 안 해봤어? 으스대긴, 마음만 먹으면 다음 달엔 걔랑 내가 애인 사이가 되어있을 걸? 하긴, 그 알렉스인 걸!

알렉스 스타일스는 이 모든 소란 속에서도 자신의 얼굴근육이 얼마나 유연한지 보여주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멋지고 상쾌한 웃음을 지어주었고, 수업에 앉아 열심히 필기했고, 심지어는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들다가 껌을 씹는 것을 들켜 지적을 받기까지 했다. 퉁퉁 부은 왼쪽 뺨만 제외하면 그는 정말 괜찮아보였다. 오히려 괜찮지 않은 건 린다 쪽인 것 같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법석을 떨며 쉬는 시간마다 몰려드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하거나 각종 손짓을 동원해 이야기를 과장하는 식이었다. 월요일엔 린다 오스본과 강의실에서 적어도 세 번은 마주쳐야 하는 토미 화이트헤드-그는 학기 초 린다와 같은 스쿨 멘토에게 스케줄 조정을 조언 받았다-는 불쾌한 기색을 감춘 채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려 애썼다. 그가 싫어하는 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가십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란이었다. 요컨대 토미는 남의 이야기에 가능하면 신경을 끌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선호하는 개인주의자였고, 그런 이유로 그는 이 사건이 총체적으로 달갑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요란하게 사람을 끌고 강의실을 옮겨 다닐 린다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미 알렉스와 교제하던 지난 한 달 동안에도 충분히 시끄러웠던 것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토미는 그녀와 알렉스가 지난 한 달 간 어디를 다녔고 주로 무엇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주말에 만나 어떤 섹스를 했는지도 알고 있었는데 이는 결코 알고 싶은 정보가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tmi(too much information)의 표본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렇게 깨를 볶던 그 둘이 왜 깨진 걸까?

그러니까 말이다. 대체 그 둘은 왜 깨지고 만 것일까? 그야말로 우리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주제였다. 무엇을 겪던 떠들지 않곤 못 베기는 린다의 말에 따르면, 알렉스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걘, 그렇게 나를 속이고, 주말마다 했어! 오, 맙소사. 상상이 가니? 난 수십 번이나 그 병에 노출될 위기에 처해있던 거야. 난 그런… 인생의 위기를 잘 해쳐낸 내가 대견스러워.” 

그럼 대중들의 반응은 어떨까? 

링컨 스쿨의 학생들은 진작부터 알렉스의 지난 사생활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언젠간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투였다. 

A : 왜, 린다는 전학생이잖아. Freshmen때부터 알렉스를 알고 있었으면 진작부터 피해갈 수 있었을 걸. 전교에서 알렉스 소문 모르는 사람이 있어? 린다는… 순수했지. 

B : 아주 순수했지.

A : 솔직히 린다가 지나치게 유난을 떨고 있긴 해.

B : 오, 유난이 아니지. 나라도 내 남자친구가 알렉스 같았으면 큰 상처를 받았을 거야. 

A : 아니, 아니. 아니지, 그게 무슨 상처가 되는데? 알렉스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그는 잘해줘. 어쨌든 사귈 땐 한 사람에게 올인하잖아

B : 어쨌든 그는 망할 호모라고!

A : 여자랑 자는 게이도 있냐?

B : 알게 뭐야!

A : 어쨌든 린다가 유난스러운 건 맞아. 지금까지 알렉스랑 사귄 여자애들이 다 저렇진 않았어.

B : 하!

A : 남자애들도. 혹은 뭐, 다른 애들도 있을 수 있고.

C : 소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A : AIDS랑 게이를 연결하는 사람은 호모포비아지. 멍청이 아니면 그런 말 안 믿어.

B : 난 믿어.

A : 그럼 넌 망할 호모포비아인 거고.

C : 너희들 굉장하네!

A : 칭찬 존나 고맙다.

 

여기서 알렉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알렉스. 알렉스 스타일스! 그는 걸어 다니는 가십 자판기고 잘 빠진 미남이다. 비율도 좋고 패션센스도 있으며, 제법 점잖고 모두에게 상냥하기까지 하다. 그는 링컨 스쿨의 Freshmen에서 Sophomore로 올라가는 동안 애인을 총 스물다섯 번 갈아치웠고(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다시 Junior로 진학하는 동안 대충 열 번을 갈아치웠다. (기세가 주춤한 걸 보아하니 요양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리고 사이언스 위크(링컨 스쿨의 3월 일정엔 2주 간 열리는 큰 과학 행사가 있다)에 당도한 화제의 전학생 린다 오스본을 잡아 한 달을, 무려 한 달을 연애했다. 알렉스의 한 달은 굉장한 기록이다. 그는 평균 일주일 정도면 관계를 정리했으니 말이다. 전부 돈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오스본은 굉장한 부잣집 딸인데다가, 금발이고, 예쁘장한데다가 돈도 잘 썼다. 특히 어떻게 사치를 부려야 할지 굉장히 잘 알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영리한 아가씨였다. 그녀는 원하는 만큼 알렉스를 시가지 호텔의 파티에 데리고 갔고, 비싼 스포츠카를 몰도록 허락하며, 단둘이 있고 싶을 땐 그녀의 빌라 꼭대기 층에 있는 풀로 불러들였다. 알렉스가 못 사는 편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부자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치가 알렉스를 감화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려 한 달. 한 달 간 알렉스는 그 짓을 했던 것이다. 사랑이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물론, 알렉스는 매 순간 진심을 다한다. 그와 사귀어 본 무수한 애인들은 관계가 끝난 후에도 대체로 알렉스를 미워하기보다 귀여워했다. 혹은 다신 없을 굉장한 애인이었다고 떠들어댔다. 놀랍게도 난봉꾼 알렉스의 평판은 극과 극이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사력을 다해 그를 증오했다. 그러고 싶어서 안달 난 것처럼 보이는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알렉스를 사랑했다. 그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팬클럽도 있었다. 어쨌든, 난봉꾼 생활을 청산한 알렉스가 한 달 간 린다 오스본에게 몸과 마음을 매진하는 동안 학교는 새로운 가십거리가 없어 시들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그 둘의 연애 생활에 관해 떠들어 대느라 몹시 산만했다. 이번에야말로 알렉스가 제 짝을 만난 게 틀림없다는 여론보다는, 대체 왜 ‘하필’ 린다 오스본이여야 하냐는 투덜거림이 주를 이뤘으니 둘이 산산조각 난 지금, 샴페인을 들 작자들이 이 학교에 차고 넘쳤다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이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모든 소란의 시발점인 알렉스가 학교에서 꺼져주거나 혹은 전학이라도 가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는 장학금을 노리고 있었고, 모범생이었으며,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지금 획득하는 것이 아닌 예정되어 있는 것이고, 그 확신에 필요한 신탁계좌와 아이비리그 졸업장의 티켓이 바로 성적표에 있다고 생각했다. 알렉스가 누구와 붙어먹던 그것은 토미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토미는 가능하면 엮이지 않기 위해 줄곧 알렉스를 솜씨 좋게 피해 다녔고(눈에 띄지 않도록 스스로를 숨기는 건 토미의 몇 안 되는 재능이다) 알렉스는 Junior가 되어서도 토미의 존재를 결코 모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세계에 살며 Senior가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토미가 바라던 바였다. 그래서 이른 아침 알렉스가 토미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 그는 속으로 굉장히 놀랐다. 알렉스의 왼뺨은 린다의 손자국으로 인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그의 웃음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웠다. 토미는 하마터면 그의 인사를 받아주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는 알렉스에게 조금 동정심을 느꼈다. 구경꾼들 중 그 누구도 알렉스를 걱정하거나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다툼 이후 곧장 자리를 뜬 린다의 곁으론 서너 명의 사람들이 붙었는데도 말이다. 알렉스는 혼자 남겨져 있었고, 유일하게 그 자리를 뜨지 않은 토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건넨 것이다. 맙소사, 왜 하필 자신이란 말인가? 토미는 덕분에 오전 내내 찜찜한 기분으로 굳이 가지지 않아도 될 죄책감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린다 오스본과 알렉스 스타일스에 대한 가십거리-그러니까, 임신과 콘돔, 섹스에 관한 것이었다-를 듣는 순간, 그 얕고 개인적인 동정과 죄책은 사라지고, Tommy's page에 알렉스에 대한 평가가 한 줄이 더 추가됨으로서 그 모든 내부적 갈등은 비로소 종식될 수 있었다. 토미의 페이지, 목차 알렉스 - 난봉꾼, 아웃팅의 천재, 멍청이, 그리고 철부지. 비고 : 주의요망!

 

2:46 p.m. 

[작성자] Tom0612

전에 말했던 걔 말이야, 깨졌대.

학교가 온통 뒤집어져서 시끄러워 죽겠어.

└ 보통 학교가 그렇게까지 남의 연애 사에 신경 쓰냐? -df***

 └└ 어지간히 잘생긴 놈인 모양이지. -hurrion

  └└└ 진심 얼굴 존나 궁금하다. -df***

    └└└└ 근데 넌 왜 아이디 블러처리 하냐? 매너 없게. -hurrion

└ 잘 됐네. 한 번 꼬셔봐. :> -gib22

 └└ 내가 왜? 관심 없다니까. -tom0612

  └└└ :< -gib22

 

경적 소리에 토미가 고개를 들었다. 짐이 차에서 내렸다. 

“토미!”

토미는 휴대폰을 껐다.

“빨리 오셨네요.”

“가는 길에 퍼블릭 마켓에 들릴 생각이다. 네 여동생도 태우고.”

“늦는다고 문자 보낼까요?”

“아니, 먼저 태우고, 장을 보러 갈 거야.”

짐은 토미의 가방을 받아 뒷좌석에 밀어 넣은 후 조수석을 열었다. 토미가 어깨를 으쓱하곤 뒷좌석 문손잡이를 잡았다.

“어… 전 그냥 뒤에 탈게요. 엠마가 조수석을 좋아해요.”

“오, 그래.”

짐은 허둥대지 않고 건조하게 대꾸했다.

“좋을 대로 하렴. 괜찮다.”

짐이 시동을 걸고 라디오 채널을 맞추는 동안, 토미는 고개를 돌려 교문으로 쏟아지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천천히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뜯어보다가, 이내 주차장으로, 아침의 그 소동이 있었던 바로 그 장소로 옮겨졌다. 린다의 파란 스포츠카는 그대로 거기 있었다. 그나저나, 분명 린다의 차였는데 왜 린다는 키를 알렉스에게 집어던진 것일까? 그는 그것을 돌려줬을까?

“토미, 늦기 전에 출발해야지.”

“아, 네. 죄송해요.”

토미는 뒷좌석에 탔다. 차문을 닫자 짐이 에어컨을 틀어주었다. 습도 높은 찬바람이 차 냄새와 함께 좌석 곳곳으로 불어 닥쳤다. 라디오에선 케이티 페리의 노래가 나오는 중이었다. 학교 주차장을 벗어나다말고 짐이 신음했다.

“맙소사, 저런 스포츠카를 학교에 끌고 오는 놈도 있냐?”

토미는 차창 너머로 스쳐지나가는 린다 오스본의 BMW를 흘겨보았다.

“놈이 아니고 여자애 거예요.”

“뭐라고?”

짐이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토미는 대꾸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짐은 사거리를 빠져나와 외곽도로를 탔다. 토미와 그의 여동생 엠마의 학교는 차로 삼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짐은 그와 엠마를 등교시키고 다시 데리고 오는 것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케이티 페리의 곡은 후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Lets go all the way tonight

오늘 밤 끝까지 가보는 거야

No regrets, just love

후회 따윈 없어, 그저 사랑뿐이야

We can dance until we die

우린 죽을 때까지 춤출 수 있어

You and I, Well be young forever

너와 나, 우린 영원히 젊을 거야

 

노래로 채우고 있던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고, 짐이 물었다.

“토미, 학교에선 별 일 없었니?”

그 말은 굉장히 의무적이고 사무적으로 느껴져서 오히려 토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토미는 화면으로 뜬 리플 몇 개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엔, 관심 있는 것 같은데. -gib22’

"어, 음. 네. 별 일 없었어요.“

토미는 휴대전화를 껐다. 짐이 대답하지 않아서 토미는 한 번 더 대꾸해야 했다.

“정말로요.”

“그럼 됐다.”

차가 빨간 불에 걸렸다. 그들은 이제 속수무책으로 케이티 페리의 노래를 들어야만 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순간 토미는 짐이 아주 밟아주거나, 혹은 아예 영영 멈추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시 신호가 바뀌었고, 차가 출발했다. 노래는 끝나가고 있었다.

 

미들스쿨로부터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엠마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토미, 옆으로 좀 가.”

토미는 앞좌석을 흘겨보았다. 짐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엠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토미, 옆으로 가라니까.”

토미는 엉덩이를 구석으로 옮겼다. 엠마가 어깨까지 오는 단발을 찰랑거리며 앉자 차체가 작게 흔들렸다. 짐이 라디오 볼륨을 낮췄다.

“학교는 잘 다녀왔니, sweetie?”

“오, 그냥 그랬어요. 사실 친구랑 좀 싸웠는데 화해했어요. 괜찮아요.”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괜찮은 거야?”

“네가 뭘 안다고?”

“둘 다 그만해라.”

짐이 말꼬리를 잘랐다. 토미가 짐을 바라보았다.

“뭘요? 저흰 싸우지도 않았는데?”

“내 눈엔 그럴 것처럼 보였다.”

“아빠는 너무 걱정이 많아요.”

엠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빠랑 전 늘 이래요.”

짐은 대답하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차가 출발했다. 이제 라디오에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끄러운 곡이 나올 기미는 없었다. 넓은 도로를 타자 차가 늘어났다. 짐은 교통 방송으로 채널을 돌렸다. 창가에 턱을 괸 채 고개를 돌린 토미와 엠마가 백미러의 양 사이드에 앉아 있었다. 짐이 백미러를 흘끔거리며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집에 가기 전에 퍼블릭 마켓에 들릴 예정이다.”

“오, 잘 됐네요! 전 오늘 피자가 먹고 싶어요.”

토미가 작게 덧붙였다.

“난 피자 싫은데.”

엠마가 토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어차피 넌 제대로 먹지도 않을 거잖아.’

‘먹을 거거든?’ 

‘시끄러워.’

“아빠, 토미도 피자가 좋대요!”

“그럼 그렇게 하자. 토미?”

토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네, 좋아요.”

“와! 피자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토미는 이번에 화면조차 확인하지 않고 전원을 꺼버렸다. 라디오의 교통방송이 끝나가고 있었다. 차는 덜컹거리며 퍼블릭마켓을 향해 달려 나갔다. 

-

'Site'는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게이들을 위한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다. 데이트, 채팅, 잡담과 원나잇 외 잡다한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창립 초기엔 작은 규모로 소수 인원을 받아 운영되었지만, 디도스 공격과 해킹 시도를 겪은 후 서버를 교체하고 완전 익명제로 바뀌었다. 그 뒤로 알음알음 유입된 인원들로 하여금 차차 몸집을 불려 이제는 이름 그대로 거대한 하나의 사이트(site)가 되었고, 지금은 포털 사이트 못지않은 기능과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었다. 토미가 Site를 알게 된 건 열네 살 때였다. 그가 그곳에 곧바로 가입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그 사이트의 존재를 알자마자 잊어버렸다. 그가 Site를, 주변엔 암만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사실 곳곳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이 거대한 미국 서부, 하다못해 캘리포니아 주에서조차 수천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토미 역시 결코 오류 혹은 돌연변이가 아님을 증명해줄 수 있는 그 거대한 커뮤니티를 떠올리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엠마가 벌컥 문을 열었다.

“토미!!”

“엠마, 제발 내 방에 들어올 땐 노크 좀 해줄래?”

토미가 짜증을 참는 얼굴로 의자를 돌렸다. 엠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피자 안 먹어?”

“생각 없어. (있겠냐?)”

“아, 그래……?”

시선의 이동을 느낀 토미가 황급히 노트북을 닫았다. 엠마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랑 채팅해?”

“안 해.”

“했잖아! 네가 누구랑 채팅도 해?”

“아니라니까.”

“텍스트로 도배된 창 다 봤거든?”

“메일이야.”

토미는 얼결에 마구 뱉었다.

“학교, 과제야.”

“흐음.”

엠마는 미심쩍다는 표정이었으나 곧 흥미를 잃고 문지방에서 물러났다.

“아무튼 생각 없어도, 나중에 내려와서 먹어. 짐이 슬퍼할 거야.”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 그는 이제 우리 가족이라고! 맙소사, 피자를 직접 만들어줄 줄 누가 알았겠어? 맛없어도 두 조각은 먹을 각오를 했는데, 심지어 맛있어서 네 조각이나 먹었어.”

“알겠으니까 제발 빨리 나가.”

“피자 먹을 거야?”

“나중에.”

토미는 마지못해 덧붙였다.

“아무도 없을 때 내려가서 한 조각만 먹을게.”

“오븐에 넣어놓을게. 식기 전에 먹어.”

“그래… 엠마, 제발 나갈 때 방문 좀 닫아!”

엠마는 뒤돌아보지 않고 층계를 내려갔다.

“엠마!”

fuck. 작게 욕을 중얼거린 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게 문을 닫았다. 분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이사를 온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문의 잠금장치는 여전히 고장 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새 집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토미는 생각했다. 정원엔 낡은 스프링클러가 있고, 문은 하얗고, 지붕은 붉네. 이보다 더 진부한 집이 있을까? 엠마도 같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린 둘은 집을 보며 오두방정을 떠는 엄마를 지나쳐 심드렁하게 문으로 들어섰다. 짐은 엄마의 열렬한 반응에 몹시 신난 기색으로, 토미를 직접 층계에 데리고 가 그의 것이 될 예정인 빈 방을 보여주었다. “집에서 두 번째로 큰 방이란다.” 짐은 무슨 자랑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제니와 거실을 둘러보고 있을 테니, 원하는 만큼 있다가 내려오렴.” 그리고 그는 토미를 빈 방에 버려둔 채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 것도 없는 방에 홀로 남겨진 토미는 건성으로 공간 전체를 훑어보았다. 가구가 옮겨지지 않은 방은 짐의 말대로 굉장히 크게 느껴졌으나, 동시에 그만큼 텅 빈 까닭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구석엔 칠이 조금 벗겨진 벽장이 있었고, 창문은 왼쪽으로 크게 나있었다. 햇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마룻바닥으로 쏟아졌다. 토미는 몇 번 훑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하고 허술한 무게감이 잡혔다. 토미는 손을 떼어내고 문고리를 살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토미는 다시 한 번 문고리를 잡아보았다. 덜컥. 토미는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찡그린 채, 문고리에 바싹 시야를 붙였다. 그러자 안쪽, 잠금장치의 핀 버튼이 미묘하게 어긋나서 구멍에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토미는 층계를 내려왔다. “문고리가 고장 났어요. 수리해야 해요.” 짐은 큰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 이사하기 전에 내가 사람을 불러 수리해놓으마.” 

그리고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일주일이면 사람을 부르는 건 고사하고 본인이 문고리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고칠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빌어먹을 피자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여기 있었는데! 사실, 그는 언제나 정말 해야 할 일은 잊어버리는 남자였다. 토미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인상은 대게 그대로 굳어지는 법이다.

자리로 돌아온 토미가 노트북을 펼치자, 스크린이 깜빡이며 마지막 작업 창을 띄워주었다. 채팅은 거기서 멈춰있었다. 개인 채팅 방이었고, gib22가 이모지를 남겨놓았다.

 

gib22 :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16:43

gib22 : Tommy, 간 거야? :(  16:52

 

토미는 황급히 답장을 입력했다.

 

Tommy0612 : 미안, 일이 있어서.  16:54

Tommy0612 : 나간 거 아니야.  16:54

Tommy0612 : 그리고 난 정말 생각 없어.  16:54

 

잠시 뒤, 답장이 갱신되었다.

 

gib22 : Oh. :(  16:56

gib22 : 가족이 포비아야?  16:56

 

토미는 아니, 와 몰라, 중에서 머뭇거렸다. 그것은 실상 동일한 뜻이었다.

 

Tommy0612 : 몰라.  16:56

Tommy0612 :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16:56

Tommy0612 : 괜히 떠보려고 물어봤다가 일이 커지면 어떡해?  16:56

Tommy0612 : 그건 싫어.  16:56

gib22 : 동의해.  16:57

Tommy0612 :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 난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불신해.  16:57

gib22 : 네가 말한 그 알렉스처럼?  16:57

Tommy0612 : 그래.  16:58

Tommy0612 : 걔처럼.  16:58

gib22 : 걔가 데이트 신청하면 거절할 거야?  16:58

gib22 : 얼굴은 잘생겼다며?  16:58

Tommy0612 : 장난해?!  16:58

Tommy0612 : 관심 없어!!  16:58

Tommy0612 : 그리고 절대 그럴 일 없어!  16:58

gib22 : 왜?  16:59

Tommy0612 : 걘 내가 누군지도 모르거든.  17:00

 

토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Tommy0612 :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고.  17:00

 

채팅은 거기서 종료되었다.

-

다음주 수요일 아침, 링컨 스쿨의 주차장 앞으로 작은 행렬이 있었다. 짐은 운전대를 잡은 채 얼굴을 찡그렸다. 

“저게 대체 무슨 소동이냐?”

토미는 짐의 자동차 앞으로 지나가는 행렬 속에서 익숙한 몇 명의 얼굴들을 발견하곤 곧 흥미를 잃었다. 그들은 평소 알렉스 스타일스 옆에 삼삼오오 붙어있던 ‘패거리’들이었다.

“어, 상관 쓰지 마세요. 쟤넨 원래 쓸데없는 짓을 잘 하거든요.”

토미는 가방을 챙겨 맨 후 문을 닫았다. 패거리 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어깨를 잡고 구겨진 포스터 한 장을 토미에게 막무가내로 안겨주었다.

“헤이, 헤이. 너도 받아.”

토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알렉스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존나 좋아!!

▫좋아!

▫그냥 그래

▫조금 싫어

비고 :

 

“워워, 조심해. 넌 지금 알렉스의 얼굴을 구기고 있어.”

그녀는 토미가 붙잡고 있는 포스터 상단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곳엔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짓고 있는 알렉스가, 허세가 잔뜩 담긴 각도로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손가락 총알을 날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진으로 고른 거야.”

“아, 그래.”

토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게 뭔데?”

“알렉스가 만든 건데, 중요한 설문이야.”

“아, 그래.”

토미는 다시 한 번 심드렁하게 알렉스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거 참 중요해 보인다. 이걸로 교내 인기왕이라도 하겠대?”

“글쎄! 그건 굳이 이러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니야? 펜 빌려줄까?”

“어, 아니.”

“그래!”

그녀는 토미의 대답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포스터를 줄 때와 똑같이 막무가내로 그에게 펜을 쥐어주었다. 토미는 뚱한 표정으로 설문 항목을 내려다보았다.

 

▫존나 좋아!!

▫좋아!

▫그냥 그래

▫조금 싫어

비고 :

 

“왜… 정말 싫어는 없는 거야?”

“사실, 있었는데 알렉스가 상처 받을까 봐 우리가 뺐어.”

“아, 그래.”

토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비고를 채워 넣은 후, 다시 볼펜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경쾌한 미소로 딸깍딸깍 볼펜을 누르며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앞서가던 무리들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시, 빨리 와!”

“오, 이런.” 

제시는 호들갑을 떨다가 재빨리 손을 흔들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안녕, 다음에 봐!”

“잠시만, 이건?”

“아, 포스터는 가지고 있어, 나중에 수거하러 올게! 안녕!”

제시는 경고하듯 토미의 손에 들린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재차 당부했다.

“버리지 마! 네 얼굴 기억했어!”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알렉스의 패거리와 그의 팬클럽으로 추정되는 무리는 그렇게 시끄러운 트럼펫 소리와 웃음소리를 달고 주차장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토미는 이미 주차장 사방에 굴러다니고 있는 구겨진 알렉스의 얼굴들을 조용히 훑어보다가, 포스터인지 설문지인지 모를 그것을 잘 접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빵, 하고 뒤에서 클락센이 울렸다. 토미는 짐을 돌아보지 않았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지난 일주일 간 루머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선 사람치곤 제법 무탈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린다의 복수도 없었고, 그녀의 무리들의 보복도 없었고, 알렉스의 무리는 돌아왔으며 수업은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밝고 사람들은 여전히 알렉스를 사랑했다.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린다와 헤어진 것은 유감이었으나 알렉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 사실 하나로 알렉스는 일련의 사건을 반으로 뚝 접어 뒤로 제쳐놓았다. 루머와 가십거리에 휩싸이는 건 이번만이 아니었으며 그는 그런 일들에 아주 익숙해서, 상처를 받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참이었다.

그는 지난 일주일 간 새로운 애인을 찾고 있었다.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연애를 삶의 필수요소처럼 취급했고, 외로움을 상쇄하고 정성을 투자할 특별한 단 한 사람을 가지는 것에 매순간 충실했다. 다행스럽게도 조물주는 알렉스에게 이런 성정을 불어넣으며 그가 비참해지지 않도록 한 가지 은혜를 내려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얼굴이었다. 잘생긴 얼굴. 아주 잘난 얼굴. 알렉스는 자신이 웃어줄 때 대다수의 인간들이 행복하게 미소를 돌려준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거울을 보는 일이 즐거웠고, 옷을 잘 차려입는 일이 보람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을 가질 수 있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 능력인지 알았고, 그 기적 같은 일이 모두 자신의 얼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믿었다. 유치원에서 초등학생, 초등학생에서 중학교, 그리고 다시 사립 링컨 스쿨로 이동하는 동안 알렉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인간들을 내치지 않고 기껍게 받아들였다. 세상은 그를 향한 사랑으로 넘쳐서 삶은 도무지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고, 원한다면 양 뺨에 입을 맞추거나 하룻밤을 보냈다. 남자, 여자, 혹은 둘 다거나 둘 다가 아니어도 좋았다. 알렉스를 사랑해준다면 그 역시도 충실히 그들에게 매진할 것이었다.

링컨 스쿨에서부턴 일이 다소 꼬이긴 했다. 유서 깊은 사립학교엔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 말은 즉 이 학교의 전교생이 가지는 종교, 가치관, 신념을 포함한 모든 특성이 켈리포니아주의 조그만 마을이 가지는 동일한 특질과 하나하나 구분되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인간의 것으로 구분된다는 뜻이었다. 알렉스는 난봉꾼이 되어있었고(사실, 그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여러 의미로 그는 난봉꾼이었다) 몇몇은 그들이 증오해 마땅한 존재를 알렉스가, 학교의 아이돌이자 모두의 우상처럼 여겨지는 그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고 입을 맞춘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그들은 알렉스가 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잘못된 인식을 학교에 퍼뜨릴 위험이 있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요컨대 그들은 암묵적으로 ‘호모’와 ‘정신병’을 가진 자들과 섹스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렉스는 그것을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좋다는데 굳이 밀어낼 필요가 있냐는 거야. 걔네가 누군들 어때? 날 좋아해주는 건 엄청난 일 아니야?”

그것은 진심이었다.

링컨 스쿨에 입학한 후 알렉스는 보란 듯이 애인을 갈아치웠다. 여자일 때도 있었고, 남자일 때도 있었고 혹은 둘 다거나 둘 다 아니기도 했다. 얼굴이 어떻던 인종이 어떻던 출신이 어떻던 상관하지 않았다. 입학한 지 일 년 즈음엔 알렉스를 증오하는 호모포비아들이 생겼고, 그들은 집단을 이루어 알렉스를 비난하거나 대놓고 악질적인 장난을 늘어놓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다 밀가루 계란 폭탄을 맞았을 땐 알렉스도 제법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는 그렇게 완전하고, 옹졸하고, 강건하며 근본도 없는 악의를 처음 맞닥뜨려본 셈이었다. 

“정말 이상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긴 하지만 그게 누굴 피해주거나 상처 입히는 일도 아니잖아?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다시 사랑을 주지. 그런데 걔넨 바로 그 이유로 나를 공격했어. 이때까지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당시 알렉스의 대충 서른 몇 번째 애인쯤 되던 제시가 그의 가슴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스. 정말 신기하다. 중학교에서 그런 사람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어?”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음, 글쎄. 기억에는 없는데.”

“넌 정말 운이 좋았구나.”

제시는 눈을 감았다.

“난 늘 근처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

“저런 놈들이 그렇게나 많단 말이야?”

“오, 알렉스, 그들은 어디에나 있어. 그래서 넌 정말 신기해. 보통 잘생긴 애들은 멍청하고 많은 걸 신경 쓰지 않거든.”

“나도 걸핏하면 멍청하다거나 깊게 생각하지 않는단 소릴 듣는데 말이야.”

알렉스는 히죽거렸다.

“단순함이 내 매력이라고도 했었는데.”

제시는 알렉스에게 다정하게 입을 맞춰주었다.

“맞아, 넌 멍청하고 단순해. 나는 그런 널 정말 사랑해.”

제시는 정확히 삼일 뒤에 알렉스와 깨졌다. 그러나 나쁜 결말은 아니었고, 그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위에서 보시다시피.

엄밀히 말하자면 그놈의 ‘포스터’는 바로 제시의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그녀는 알렉스가 진심으로 사랑에 마지않았던 린다 오스본이 호모포비아라는 것에 몹시 유감을 표했다. 그녀는 지난 한 달 간 알렉스가 얼마나 린다에게 정을 쏟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을 찾은 것 같다고’ 떠들어댔는지 지켜본 장본인으로서 알렉스의 상태를 몹시 걱정했다. 비록 알렉스는 깨진 당일 날에도 유쾌하고 쾌청한 웃음으로 학교 복도를 활보하긴 했지만, 그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게다가 린다와 싸운 일요일 날, 그는 전화도 받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박혀만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책상에 다리를 걸치며 “Hey, 제시."하고 그녀를 불렀을 때, 제시는 정말이지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알렉스의 뺨은 린다에게 얻어맞은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온통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알렉스! 네 꼴 좀 봐!”

알렉스는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좀 엉망이긴 하지.”

“알렉스! 너 괜찮니?”

“오, 난 괜찮아. 그냥 새 애인을 구할 생각에 들떠있었어.”

알렉스가 고개를 돌려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자, 제시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넌 정말 어이없고 이상해!”

“그게 바로 내 매력이지.”

“음, 린다의 일은 유감이야.”

“괜찮아, 내 잘못이 아닌 건 금방 잊어.”

“새 애인을 어떻게 찾을 건데? 또 고백이라도 받았어?”

“나 좋다고 해서 사귀고 깨진 애들만 꼽아도 벌써 이 학교의 삼분의 일일 걸.”

알렉스는 다소 과장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이제 나 좋다는 사람은 모조리 다 사귀어봐서, 새로운 스릴이 필요해. 아, 그렇다고 나한테 관심 없는 애들을 찍어보라는 말은 하지 마. 그건 이미 중학생 때 다 해봤다고!”

“정말 부풀리는 게 심각하구나.”

“어쩔 수 없지, 내 매력이 철철 넘쳐서 미소 한 방이면 모두가 돌아보는데. 한 번 찍으면 일주일도 안 되어서 빵, 하고 넘어온단 말이야.”

알렉스는 빵, 소리를 내며 양팔을 극적으로 들어올렸다. 제시는 몇 번 더 실소를 흘린 후 어설프게 덧붙였다.

“그럼 이번엔 아예 골탕을 먹이는 건 어때?”

“누구에게?”

“글쎄, 뭐. 린다 같은 애들?”

제시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였다.

“널 싫어하는 애들이라던가.”

“싫어하는 애들!”

알렉스는 크게 감명을 받은 얼굴이었다.

“오, 나쁘지 않네. 하긴, 난 만인의 알렉스니까, 그렇지? 그런데 날 싫어하는 애들을 무슨 수로 알아? 아, 물론 내게 밀가루 폭탄을 안겨준 걔넨 잊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좀 봐주라, 아무리 나라도 걔네한테 작업을 걸 긴 싫단 말이야, 동의하지?”

제시는 알렉스가 평소에 비해 다소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알렉스… 그냥 농담으로 던진 말이야, 너도 알잖아. 진지하게 받지 마. 널 싫어하는 애들한테 그럴 필요 없어.”

“오, 아니야. 좋은 시도 같아.”

알렉스는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일어났다. 제시는 그가 몹시 의욕적으로 보여서 당황했다.

“그런 멍청이들 말고, 좀 적당히,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서 날 싫어하는 사람이 좋겠어. 밀가루 폭탄을 던진 걔넨 날 싫어하는 이유가 내가 그 ‘알렉스’라서 라고 했잖아. 그런 이유를 어떻게 상쇄시켜? 내가 알렉스인데! 그런 거 말고, 좀 적당히 날 싫어하는 사람이 좋겠어.”

제시는 ‘적당히 싫어한다’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오, 그래. 그런데 그걸 어떻게… 구분할 건데?”

“글쎄! 생각 중인데, 음.”

알렉스는 산발적으로 다리를 구르며 창가를 서성였다. 지나치게 하이텐션이라 오히려 지극히 이상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오히려 몹시 불안해보이기도 했다. 제시는 그런 알렉스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알렉스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팔을 들어 올리고 박수를 쳤다.

“좋아! 아예 설문지를 돌리는 거야.”

“와!”

제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평소처럼 맞장구쳤다.

“괜찮은 생각이네!”

“그렇지?”

정직해지자면 제시는 그것이 재치 있긴 하나 다소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스가 한결 기분이 나아진 표정으로 제시를 돌아보자, 그녀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맞장구는 얼마든지 쳐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아예 네 멋진 사진도 붙이지 그래! 내가 네 인스타그램에서 한 장 뽑아줄게. 제일 코멘트를 많이 받은 게 좋겠어, 그렇지?”

“그리고 그 아래에 설문을 달아놓는 거지. 항목은 존나 좋아, 좋아, 그냥 그래, 싫어, 존나 싫어가 좋겠다.”

“최고야!”

그렇게 해서 일주일이 지난 수요일 아침, 링컨스쿨의 주차장 곳곳엔 바로 그 제시의 작품이 굴러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제시는 알렉스의 친구를 자청하고 있는 그의 무리(실상 절반은 알렉스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어쨌든 알렉스는 그들 역시 친구라 여겨주었다) 그리고 알렉스의 팬클럽과 함께 사방에 알렉스의 얼굴이 찍힌 그 흑백 포스터를 뿌리고 다녔다. 그녀는 그 날 아침 거의 서른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포스터를 지참시켜 주었는데, 토미는 그녀가 막무가내로 그것을 안겨준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날 점심, 알렉스가 모든 것에 심드렁해진 얼굴로 “이제 됐어.”라고 선언했다.

“뭐가?”

“이제 정말 괜찮아. 내 기분을 위해 내가 만든 억지스러운 쇼를 감내해줘서 고마워!”

“오.”

제시는 아직 남은 포스터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의 알렉스는 상큼한 웃음을 달고 제시를 향해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진을 고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알렉스의 그 사진은 정말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한 때 대다수의 여학생들이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시는 바로 그 무렵 알렉스와 진하게 연애를 했던 EX였다.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거야?”

“그냥 내 변덕으로 이 이상 네가 고생하는 게 보고 싶지 않아서야.”

알렉스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회수할 건지도 문제잖아? 난 여기 오는 동안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포스터를 수십 개는 본 것 같아. 설마 그걸 일일이 네가 주울 건 아니지, 제시?”

제시는 어깨를 으쓱하곤 두 팔을 벌렸다. 알렉스가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넌 정말 몇 안 되는 최고의 친구야.”

“당연하지.”

제시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몇 안 되지는 않아, 알렉스.”

 

점심 이후엔 두 반의 합동 수업이 있었다. 제시는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락커가 늘어선 복도를 지나다 말고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제시는 고개를 돌렸으나 얼굴을 보고도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오, 안녕.”

그녀가 인사하자,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 이거 언제 가져갈 거야?”

토미가 내민 것은 아침에 그녀가 막무가내로 배포한 알렉스의 설문지였다. 그제야 제시는 그가 누군지 불현 듯 떠올랐다. 그는 그녀가 주차장에서 만난 마지막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 너구나!”

제시는 활달하게 소식을 전했다.

“그거 버려도 좋아, 혹은 뒤집어서 필기하는데 쓰거나. 우린 그걸 회수하지 않기로 결정했어.”

“뭐?”

토미는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왜?”

“글쎄, 회수하기 어려워서?”

“그럼 애초에 왜 나한테 이걸 준 거야?”

토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제시는 조금 언짢아졌다.

“뭐,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그럼 이건 어떡해?”

“말했잖아, 버리거나, 음, 뭐, 다른 용도로 좋을 대로 쓰던가. 알아서 해!”

종이 쳤으므로 제시는 서둘러야 했다. 그녀는 인사도 없이-이번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복도를 가로질러 후문으로 사라졌다. 다소 구겨진-알렉스를 어떻게 생각 하세요?를 든 채 복도에 남겨진 토미는 재빨리 달려 나가는 제시의 뒷모습을 찡그린 채 응시하다가, 그녀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고개를 숙여 제 손에 들린 포스터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네 번 접힌 흔적이 남아있었고, 알렉스의 미소 부분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래엔 공중에서 펜을 사용한다고 제법 비뚜름하게 적은 자신의 글씨가 비고란에 쓰여 있었다. 토미는 미소가 우그러진 탓에 다소 묘하게 우울해 보이는 알렉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락카를 열어 그것을 책 사이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책을 챙긴 후, 요란스럽게 문을 닫고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합동 수업 크리켓에서 제시가 선두로 2점을 따고, 알렉스는 쪽지시험에서 반타작을 했으며, 토미는 과제 제출로 A를 받았다. 지루한 일상은 다음 날도 문제없이 이어졌다. 이번엔 크리켓에서 알렉스가 선두로 4점을 따고, 토미는 쪽지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으며, 제시는 과제 제출로 B를 받았다. 하루 간 정신없이 전교를 떠돌던 알렉스의 포스터는 그쯤엔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메모지, 휴지, 다트과녁과 저주대용, 종이비행기 등등…… 토미가 받은 포스터는 여전히 락카에 얌전히 박혀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그 무엇도 하지 않을 계획이었고, 분리수거가 있는 금요일에 폐지함에 가져가 버릴 생각이었다. 

어쨌든 토미 화이트헤드의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그는 목요일 내내 학교 곳곳에서 자신이 가장 싫어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물론 거기서 짐을 제외하자면 말이다. 짐은 모든 것의 예외였다-인간의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알렉스는 화장실 칸막이 안에도 붙어있었고, 세면대, 변기, 심지어는 전봇대와 책상, 복도 기둥 곳곳에도 붙어 있었다. 정원을 걷다 말고 오층에서 쏟아지는 종이비행기들을 맞은 적도 있는데, 카라 안으로 주둥이가 처박힌 종이비행기를 잡아 펼쳤던 토미는 짜증이 솟구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가 너무나 상큼한 웃음으로 토미를 향해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길 가도 알렉스, 저길 가도 알렉스라니. 저번 주엔 린다 오스본이 쉬지 않고 시끄럽게 굴더니, 이번 주엔 알렉스 스타일스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화장실 칸막이 알렉스, 세면대 알렉스, 다트 알렉스, 휴지 알렉스, 종이비행기 알렉스, 메모장 알렉스 따위를 지켜보고 있자니 알렉스 노이로제가 걸릴 판이었다. 신경질 난 토미가 책을 챙기기 위해 락카를 열었을 때, 바로 그곳엔 ‘토미 락카의 알렉스’가 

Boo!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다. 이제 토미는 정말 아무나 붙잡고 멱살을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짜증나…….’

그는 괜한 분풀이를 하듯 성의 없이 쌓인 책 위로 파일을 던졌다가, 중심을 잃고 쏟아진 책들 때문에 작게 신음을 뱉어냈다. 

“젠장.”

“오, 저런. 도와줄까?”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렸다.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입을 열면 그에게 괜히 신경질을 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토미는 주섬주섬 바닥을 쓸며 지리책과 문학책을 주워 무릎에 얹어놓았다. 파일철이 벌어져 사방에 레포트가 흩날리고 있었다. 토미가 무어라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질문한 소년은 무릎을 접고 바닥에 떨어진 그 레포트를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토미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소년은 대충 종이를 주워 파일철을 되돌려주었다. 

“고마워.”

토미는 고개를 들다 말고 뻣뻣하게 굳었다. 그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파일 철에 미쳐 쑤셔 넣지 못 한 종이 몇 개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그는 토미를 보지도 않고 파일철을 넘긴 뒤, 포스터 한 장을 쑥 빼서 눈으로 훑었다. 토미는 천천히, 최대한 침묵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설문지를 읽었다. 손도 대지 않은 항목은 깨끗하고, 시선은 곧장 마지막에 붙은 비고란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다소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럽게, 내용을 그렇게 쓴 사람치곤 꽤 길게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비고 : 이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는 거야?

 

“버릴 생각이었어.”

토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스는 여전히 뚫어져라 토미의 설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토미는 점점 닥치는 불길한 예감을 지우기 위해 애썼지만, 여전히 설문지에 시선을 박고 있는 알렉스의 입 꼬리가 벌어지자 마침내 모든 기대를 버리기로 작정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고 기분 좋게 웃었다.

“오, 안녕.”

알렉스는 덧붙였다.

“토미.”

토미는 알렉스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날 알아?”

“오, 당연히 알지. 토미 화이트헤드잖아. 지난주에 우리 대화도 하지 않았나?”

알렉스는 자신의 뺨을 가리키며 손을 휘저었다.

“주차장에서 말이야.”

“내 이름을 알아?”

“그건 당연하지. 넌 나랑 지난 학기에 거의 다섯 타임 정도 같은 수업을 들었거든? 오, 넌 내 이름 알아? 난…….”

“알렉스 스타일스.”

“아, 역시 난 유명해.”

알렉스는 자화자찬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토미는 빳빳하게 굳은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엄, 그래. 우선… 난 가볼게. 짐, 아니 아빠가 날 데리러 오는데, 슬슬 오셨을 거거든.”

“워, 잠깐만, 잠깐만.”

알렉스가 토미의 어깨를 붙잡았다. 토미는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왜?”

“너 완전 싫어한다. 내가 너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하곤 그대로 손목을 둘러 토미를 제 쪽으로 약하게 끌어당겼다. 딱딱하게 굳은 토미가 엉거주춤 딸려왔다. 

“나한테 왜 그래?”

토미가 기겁했다. 알렉스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예의 그 ‘잘생겼다’고 알려진 잔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고개를 기울였다.

“Hey, Tommy.”

토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렉스가 말했다.

“너 나랑 데이트 하자.”

 

gib22 : 걔가 데이트 신청하면 거절할 거야?  16:58

Tommy0612 : 절대 그럴 일 없어!  16:58

gib22 : 왜?  16:59

Tommy0612 : 걘 내가 누군지도 모르거든.  17:00

Tommy0612 :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고.  17:00

 

“…뭐라고?”

정말이지 토미는 그렇게 되물어볼 수밖엔 없었다. 

그럴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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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It's OK»
2차/old 2019. 10. 24. 19:11

1

조지 밀스는 1922년 도버에서 출생했다. 아마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잔병치례 없이 열여덟 살을 통과하며 꾸준히 성장했기 때문인데, 축복을 받지 않았다면 운이 좋은 것이겠다. 

도버는 바다를 등지고 팔을 벌리면 바람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마구 뒤집는 곳이었다. 작은 항구로 요트들이 끊임없이 돌아오고, 수평선을 따라 흰 새들이 날았다. 파도도 사람도 새들도 떠났다가 되돌아왔으므로 조지는 떠난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년으로 자랄 수 있었다. 바다는 조지에게 “돌려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은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일어났을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조지는 자고 있었다. 아침에 라디오를 듣는데 그 소리가 나왔다. 앵커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길, 독일에서 공군들이 공습했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라의 국민들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스크럼블 에그를 먹던 조지는 멍청하게 고개를 들고 밀스 부부를 바라보았다. 밀스 부부가 말했다. 조지, 괜찮을 거야. It’s ok는 그때까지 힘이 있었고, 조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접시에 코를 박았다. It’s ok를 중얼거려보았으나 어딘지 갑갑했다.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 직감이라는 게 있었다. 어떤 거대한 물살. 시대를 따라 흘러가는 무수한 인간들의 세포 하나하나에 내장된 태고적 감각이 조지에게도 있었다. 

그 날은 피터를 만났다. 둘은 약속하고 만난 적이 거의 없었으나, 웬일로 피터가 먼저 전화를 한 것이다. 도버 항구 앞까지 냉큼 달릴 수 있는 좁은 지름길을 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피터는 문스톤 호에 앉아있었다. 도슨 일가가 지난여름에 장만한 요트. 날이 흐려서 파도가 통상보다 높았으므로, 배에 앉은 두 소년은 조금씩 엉덩이를 미끄러뜨리며 하늘을 보았다. 잿빛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날 것처럼 보였다. 자연은 원래부터 인간에게 여러 상징과 징조가 되는 법이다. 피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라이언 형이. 응. 브라이언 형이 자원했는데. 조지는 피터의 옆모습을 보았다. 바람이 불어서 얼굴을 찡그리게 됐다. 그래서 싸웠어? 아니. 피터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착잡해보였다. 그렇지만 돌아올 거니까 괜찮을 거라고 말했어. 네가? 아니, 아버지가. 피터가 고개를 들고 조지를 마주보았다. 바람이 불자 금발이 탁한 하늘 아래에서 마구 나부꼈다. 조지, 나는 슬프거나 화가 나지 않는데. 피터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 소년의 표정은 아직 실감하지 못 하는 먼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오전에 조지가 접시에 코를 박다 말고 지은 표정과 비슷한 성질이 있었다. 전쟁은 가까운 땅에서 벌어졌으나 눈앞에서 벌어진 살육이 없었으므로 먼일처럼 보였다. 어쩌면 먼일처럼 생각하고 싶어서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조지는 고개를 돌리고 먼 바다를 보았다. 날씨가 흐려서 프랑스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 모든 일들은 더 멀게… 멀게만 느껴졌다. 네 형은 돌아올 거야. 조지가 말했다. 늘 그래왔잖아. 바다가 키운 소년들은 여전히 그 불문율을 희망하고 있었다.

바다가 처음으로 그들을 배신했던 날, 도슨 가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지른 것이다. 피터의 것은 아니었다. 조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도슨 가의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위태로워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불빛이 그곳에 있었다. 피터, 라고 조지가 중얼거렸다. 피터. 그러나 뒷말을 말할 수는 없었다. It’s ok를 말하려는데 혓바닥이 천장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말할 수 없다는, 이 이상 그렇게 안심할 수는 없다는, 외면할 수 없다는, 모르는 채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감각이 경고등처럼 머릿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전등이, 뇌를 밝히던 전등이 진자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촛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 바람을 불면 금방이라도 머릿속이 암전될 것처럼 느껴졌다. 덜컥 겁이 났다. 그랬다. 브라이언 도슨이 전사하던 날, 조지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떠났다 되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됐던 것이다. 그 날 피터가 울었는지 조지는 끝끝내 물을 수 없었는데, 그건 조지가 울었기 때문이고, 그러니까… 그런 걸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피터와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형의 장례식이 미뤄질 거야. 시체를 찾았대. 피터는 고개를 숙인 채 조지의 손을 붙잡았다. 그건 흔한 일이 아니래… 보통은 시체를 찾아주지 않는다는데… 가장 먼저 돌격해서 죽어버렸기 때문에… 훈장을 받을 수도 있는 거라고……. 피터의 말은 드문드문 바람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피터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이 새빨갰다. 울고 있지는 않았다. 조지는 생각했다. 피터가 화가 나있는 것만 같다. 피터 도슨이 조지 밀스에게 물었다. 조지, 죽음에 영광이라는 게 있을까? 그건 피터 자신에게 묻는 말처럼 들렸다. 조지, 조지 말해줘.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게 있을까? 조지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조지는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지만 피터, 화내고 싶다면 화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누구에게? 피터가 마침내 분노했다. 누구에게 분노하란 말이야? 그런 후에 피터는 돌아갔고, 조지는 문스톤호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오래 그곳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한 후에 한 가지를 깨달았다. 피터가 나에게 화를 냈구나. 그러자 자신이 아주 멍청한 존재만은 아닐 거라고 느끼게 되었다. It’s ok보다 이런 방식이 더 간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상하고 또 그럼에도 꼭 필요한 깨달음이었다. 말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때, 그 말들이 힘을 잃을 때,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쳤을 때, 혼자의 힘으로 도무지 해낼 수가 없을 때, 누군가의 분노를… 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맞서야만 할 때. 그 때 조지는 몸을 던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언젠가는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바다로부터 걸어 나오는 꿈을 꿨다. 헐떡이며 일어났더니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조지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커튼을 열어젖혔다. 바다. 그러자 바다가 보였다. 어두컴컴한 바다 너머에서 끊임없이 번쩍이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묵직하게 쿵. 그리고 또 쿵… 이었다. 그것이 축제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조지는 창가에 손바닥을 올리고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전쟁이라는 것을 각막에 새기는 일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지. 눈앞으로 다가온 공포가 어떤 종류인지. 덩케르크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징발된 청년들이 배를 타고 나가서 돌아오지 못 했다. 이곳은 조지의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도버의 신화는 끝났고 바다는 사람들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다의 탓일까? 아침마다 라디오를 틀면서 밀스 가족은 접시에 코를 박았다.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는 it’s ok들이 마치 주파수를 잃은 전파처럼 공기를 떠돌았다. 조지 밀스는 음식의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불안과 두려움은 이미 도버를 잠식하였다. 맞서 싸우고자 하는 의지 밑에는 생존에 대한 본능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깔려있었다. 처칠은 투쟁을 위해 싸우자고 말했으나. 소년은 생각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많은”의 수식어는 사실 단 한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브라이언. 브라이언 도슨이 죽었어. 옆집에서 살던 나의 이웃이, 친형처럼 따르던 다정한 누군가가 더는 되돌아오지 못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방관의 이유가 발생하는가? 이이상의 죽음을 묵인할 수 있게 되는가? 조지는 포크를 매만지다 말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바글바글 끓는 공포 위로 용기를 짓눌렀다.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이. 그럼에도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지는 동시에 그저 살아가고 싶었다. 일상을 보장받고 싶을 뿐이었다. 

문스톤호가 출항을 알릴 때, 조지는 보았다. 배에 탄 피터가 막 멀어지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넓은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조지는 피터가 입은 스웨터가 브라이언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수의壽衣였을까? 피터는 죽을 수 있음을 각오하려 하는 것일까?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배에 올라탄 조지를 보며 피터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 했다. 조지, 뭐하는 거야? 도슨씨가 고개를 돌렸다. 거긴 전쟁터야, 조지! 조지는 코를 찡긋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방해가 되지는 않을게요. 결과적으로 소년은 그 말을 지켰다.

 

구축함을, 구축함을 잊을 수가 없다. 조지는 구축함을 보았다. 함선을 타고 되돌아오는 지친 청년들을 똑똑히 보았다. 문스톤호가 바다로 나간 지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았을 즈음의 일이었다. 파도를 가르며 거대한 구축함이 도버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파도는 높았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갑판에 앉아 조지는 구축함을 올려다보았다. 갑판에 매달린 청년들은 일종의 망령처럼 보였다. 하나같이 때가 낀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치고, 죽음에 질렸으며, 늙어있었다. 그랬다, 청년들은 하나같이 늙어있었다. 덩케르크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앗아갔는데, 그중에 분명 생도 있었으리라. 그들이 돌아오지 못 한다면 그것은 바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앞바다에서 인간들이 벌인 재앙이 인간들을 삼키고 있었다. 거대한 상실과 분노가 그곳을 뒤집어 삼키고 있었다. 인간들을… 돌려주지 않았다. 조지는 바로 그곳으로, 전쟁터로 가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괜히 따라왔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배를 돌릴 수는 없었다. 구축함이 마침내 문스톤호를 완전히 지나쳤을 때, 조지는 어떤 것들을 바로 그곳에서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축함에 매달린 망령들이 조지의 안에서 어떤 것들을 잡아채버렸는데, 그 공허함이 가져간 것들 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었다. 좋은 것은 조지의 생. 조지의 일부분. 가지고 있던 믿음. 돌아올 수 있을 거란 도버의 불문율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쁜 것은 그럼으로써 발생하게 될 조지의 두려움이었다. 요컨대 조지는 죽을 수도 있다는 감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깨우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소년의 용기가 되었고, 소년의 마지막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조지는 허탈하지 않을 수 있었다. 

 

3

조지는 결과적으로 분노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이란 원래 불구덩이, 인간의 분노와 어리석음의 응집체, 그 응집체로부터 퍼져 나온 거대한 재앙이다. 조지는 총도 칼도 들지 않았으나 그 분노에 맞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는데, 우리는 그래서 조지의 죽음을 전사라고 말할 수 있다. 조지의 죽음을 그 누구도 어리석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년이 스스로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그걸 멍청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1940년 5월, 바람이 유난히 불고 파도가 높던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를 구조한 조지는 그에게 담요와 홍차를, 그리고 이성을 건넸다. 덩케르크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남자가 키를 잡고 있던 도슨 씨에게 돌진했을 때, 조지는 손을 뻗었고, 그 일순간 불꽃을 보았다. 남자의 몸으로 타오르는 불꽃. 그것은 원래는 남자의 것이 아니었는데, 덩케르크에서 가지고 온 것이고, 마침내 온전히 그의 것이 된 참이었다. 분노. 조지는 그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았다. 무엇에 분노해야하는 줄도 모르고, 분노하고 있었다. 

 

4

브라이언 형.

나는 형이 죽은 게 슬프고

또 슬프고

또…

 

5

It’ok를 말할 수는 없는 때라는 게 있다. 조지는 그것을 알고 있는 소년이었다. It’s ok보다 더 간단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고 또 그럼에도 꼭 필요한 깨달음 말이다. 말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때, 그 말들이 힘을 잃을 때,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쳤을 때, 혼자의 힘으로 도무지 해낼 수가 없을 때, 누군가의 분노를… 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맞서야만 할 때. 바로 그 때. 조지는 몸을 던졌다. 진정하세요! 소년은 그 말을 온몸으로 말했다. 계단을 구르는 동안 머릿속으로 어떤 환각이 떠올랐다. 눈앞이 번쩍 빛나더니 오래 전으로 돌아가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곳에서 조지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침대에 앉아 창문에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는데, 여자의 목소리였고, 피터의 집이 거기 있었다. 도슨 가의 거실에 매달린 전등이 좌우로 위태롭게 흔들렸다. 깜빡이면서 꺼졌다가 밝아졌다가 했다. 경고등처럼 보였다. 돌아오지 못 할지도 몰라, 라고 조지가 중얼거렸다. 돌아오지 못 할 거야. 그러자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조지는 고개를 돌렸고, 거대한 바다를 보았다. 바다를 가르며 돌아오는 함선을. 조지는 어느새 문스톤호 갑판에 앉아있었다. 구축함이 소년에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조지는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조지는 순식간에 어른이 되었다. 조지는 늙어버리고 만 것이다. 

조지, 조지. 흐릿한 인영과 함께 정신이 다시 눈앞으로 끌려왔다. 눈을 깜빡이자 붉은 스웨터가 보였다. 조지, 내 말 들려? 조지! 피터는 헐떡이고 있었다. 조지는 피터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곧 강렬한 통증을, 머리를 짓누르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조지는 피터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입을 벌리니 나오는 것은 온통 신음뿐이었다. 말을 잃어가고 있구나. 눈앞이 자꾸만 깜빡거렸다. 머릿속으로 촛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말보다 더 빨리 잃을 게 생길지도 모르겠어… 조지는 눈을 감았다가 떴으나, 빛을 볼 수가 없었다. 빛이 보이지 않았다. 천장과 갑판, 피터의 붉은 스웨터가 보이지 않았다. 조지는 손을 뻗었다. 누군가 그 손을 잡았는데, 조지는 그게 피터임을 알 수 있었다. 피터… 라고 조지가 말했다. 하지만 그 이상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이든 지껄이고 싶어서 무엇이든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잘한 건 해군단 뿐이었어. 아빠한테 그랬어. 공부는 못 했지만 언젠간 큰일을 해서, 지역신문에 나고 선생님들도 보게 될 거라고. 피터의 호흡이 단정하지 못 했다. 괜찮아지면 올라와. 피터의 말에는 마지막 희망이 내포되어 있었으나. 조지는 동시에 그곳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조지는 고개를 저었다. 앞이 안 보여.

 

조지의 마지막 순간에는 하늘 위로 스핏파이어가 떨어지고 있었다. 피터가 갑판 위에서 소리를 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조지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숨을 뱉었다. 죽음을 각오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실감하기도 했는데도 소년은 몹시 두려웠다. 두려웠음에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옆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았다. 불문율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자 눈물이 나왔고, 그것은 창피하지 않았다. 눈앞으로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리다 말고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타올랐다. 그런 후 바람소리와 함께 캄캄한 어둠이 몰려왔다. 조지의 머릿속이 완전히 암전되는 순간이었다. 조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손가락을 떨었다. 죽는 것은 무섭구나. 그런데 그 임종의 직전, 무시무시한 뜨거움이 찾아왔다. 조지를 슬프게 만들거나 괴롭게 했던. 두려움을 가르치고 청년들의 생을 앗아갔던. 마침내는 열여덟 살의 조지를 갑판 아래로 밀쳐버린. 그 힘. 그 불꽃. 그 화염.

조지는 분노가 자신의 몸을 덮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분노가 아니었다. 시대를 압도할 인간들의 재앙이, 재앙이 그 속에 있었다. 무수한 죽음과 무고한 바다가 그곳에 있었다. 덩케르크와 도버가 그곳에 있었다. 영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지는 오히려 그 분노 속에서 기묘할 정도의 평안을 찾았다. 하얀 빛이 눈앞을 가득 채우며 폭죽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소리라니! 조지는 고개를 젖히곤 마지막 숨을 뱉었고… 그 빛 무리 속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6

브라이언 형.

나는 형이 죽은 게 슬프고

또 슬프고

또…

화가 났어.

 

7

나에게 화를 내도 괜찮아.

 

8

오, 피터, 피터!

 

9

조지 밀스는 1922년 도버에서 출생하여 1940년 바다에서 전사하였다. 소년이 시체가 되었음을 한 병사가 알렸다. 피터는 갑판에서 자신의 전우를 내려다보며 막연함을 느꼈는데,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어떤 두려움에 대한 감정은 아니었다. 덩케르크가 청년들의 생을 탈환하고, 조지가 불꽃에 맞섰을 때, 피터 도슨 역시 어떤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은 도버가 키워온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조지가 구축함을 마주하며 벗어던진 그것. 그것은 되돌아올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바다로부터 떠난 사람들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브라이언 도슨이 피터에게 그것을 남겼으나 피터는 분노함으로써 그를 거부했고, 그것을 조지가 받았으며, 결론적으로 조지는 그 불꽃을 품고 죽었다. 그리고 이번에 피터는 그것을 받게 되었다. 그 날 피터가 울었는지 우리는 끝끝내 물을 수가 없을 것인데, 그건 누군가는 조지를 위해 울었기 때문이고, 그러니까… 그런 걸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10

피터는 조지의 죽음을 아주 오래 기억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래 기억하기 위하여 신문에 소년의 이름을 기고했고,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확신하지 못 했다. 도슨씨는 그것에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래서 피터는 신문을 내려놓고 라디오를 틀었으며, 접시에 시선을 박고 수저를 들었다. 거기엔 맛을 느낄 수 없을 스크럼블 에그와 잼 바른 빵이 놓여있었고, 피터는 어쩐지 자신이 멍청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을 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런 후에 피터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뜨거워졌다가 마침내 무거워졌다. 피터는 천장에 혓바닥을 붙인 채 조지, 하고 웅얼거렸다. 조지, 오, 조지. 

It’s not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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