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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포커»
2차/old 2019. 10. 24. 19:10

 한동안 개롯의 레스토랑은 군인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 레스토랑은 워킹 역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있으며, 가게 우측으로는 16번 국도가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를 향해 길게 뻗는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도무지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 이차선 도로가 산등성이 너머의 또 다른 산등성이로, 또 그 너머의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개롯은 도로의 부산스러운 인구 이동을 기대하며 이 가게를 열었는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개점 당시엔 그닥 수완이 좋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기차 때문이었다. 워킹의 거주민들은 차를 끌고 다니기보다 기차를 자주 이용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털털거리는 고물 트럭보다 아무렴 철마가 좋다는 것이 주된 의견이었고, 바로 그런 연유로 16번 국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기야 정부는 이 국도를 좁아터진 이차선으로 결정했을 때부터 ‘어떤 운명’을 분명하게 예감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작 워킹에 기차를 배치할 계획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개롯의 주장은 후자였다. 그는 국가 토지 개발 사업이 이룩한 전유물의 힘을 빌려볼 요량으로 사업을 벌여놓곤, 바로 그 이유로 폭삭 망하게 생겼던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전쟁 이전에 그곳을 방문했다면, 텅 빈 레스토랑 구석에서 정부를 향한 개롯의 끝없는 투덜거림을 곤욕스럽게 듣고 있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터진 후 개롯의 기대를 충족시켜준 것은 ‘그 빌어먹을 기차’였다. 열차가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백 명의 군인들을 워킹 역으로 쏟아 붓게 되면서 작은 숙박업소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워킹에 남은 청년들은 역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은 후, 아침부터 밤까지 유령처럼 곳곳을 쏘다니고 박혀 있었다. 얼마 뒤 개롯의 작은 레스토랑에도 바로 그 유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곧 모든 테이블이 차지되었다. 개롯은 이제 아주 만족스러운 레스토랑의 경영주가 된 것이다.

 3주 정도 그 레스토랑 테이블에 신세를 진 후, 마침내 알렉스 스튜어드와 토미 테일러는 움직이기로 ‘합의’했다. 그것은 충동적인 결심이 아니라 2주 동안의 고민과 신중함, 그리고 망설임으로 점철된 결론에 가까웠다. 그들은 워킹을 떠나 스튜어드 별장으로 가 볼 생각이었고, 그건 전적으로 알렉스의 의견이었다. 놀라운 지점은 이 모험을 시도하기로 마음먹기 전까지 둘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건 놀라운 일이기 이전에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개롯의 레스토랑 아침 영업시간에는 침묵을 지킨 채 카드 패를 돌리는 군인들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저녁부터 밤까지는 비교적 시끄러워졌는데, 그건 지당하게도 술 때문이었다.) 토미와 알렉스 역시 카드 게임을 했다. 아주 많이 했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이따금 알렉스가 조지게일 상표의 에일을 얻어오긴 했지만 작정하고 그 레스토랑에서 음주를 한 적은 없다. 그들은 아침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개롯의 테이블로 등장했다가, 저녁이 되면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들의 숙소는 역 근처에 있었는데,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에는 이미 서넛 쌍이 넘은 군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지내다보면 각자의 짝이 생기는 것일까?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당시 워킹엔 짝 지어 돌아다니는 군복 입은 청년들이 많았고 토미와 알렉스는 개들 중 한 쌍이었다. 그러나 저녁부터 밤까지 그 많은 짝들이 개롯의 레스토랑에 몰려가 술을 마시고 있을 무렵, 둘은 조용하기 그지없는 여관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둘은 같은 침대를 썼는데-방이 비좁아 침대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토미가 벽 쪽, 알렉스가 바깥쪽에서 잤다. 그래서 그 둘이 잠을 청할 때, 토미는 주로 벽을, 알렉스는 천장을 보고 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보면 알렉스가 토미의 등에 바짝 붙어있거나 토미가 알렉스 쪽으로 돌아누워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한 번은 서로 끌어안은 채 깨어난 적도 있는데, 먼저 일어나는 알렉스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토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특별히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설령 알게 된다고 한들 달라질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워킹 곳곳에 포진한 짝들이 이따금 서로로부터 그들의 욕망을 뒤적인다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였지만, 알렉스와 토미에게 그것은 아주 먼 일이었다. 너무 멀어서 도무지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들 스스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알렉스는 어떻게 하면 같은 남자로부터 성적인 욕망과 충동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쪽이었고, 토미는 만사가 피로해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기로 마음먹은 건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어쨌든 워킹 역에 떠도는 소문에는 어느 정도 진위성이 있었던 셈이다.

 스튜어드 별장은 워킹에서 차로 어림잡아 다섯 시간을 달려야하는 곳에 있었다. 철로가 깔려있지 않은 곳이라 기차로는 갈 수가 없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바로 전날까지 둘은 개롯의 레스토랑 구석에 박힌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채 이 문제에 대해 제법 진지한 논의를 주고받았다. 알렉스는 기차로 갈 수 있는 만큼은 갔다가 내려서 도보로 이동하자는 쪽이었고 토미는 결코 차를 이용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어디서 어떻게 차를 장만할 건데. 히치하이킹이라도 할 거야?”

 알렉스가 물었지만 16번 국도엔 히치하이킹을 할 만큼 많은 차가 지나다니지 않았다. 둘 다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마저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었다.

 “차를 훔치지 않는 이상은 우릴 거기까지 태우고 갈 사람을 찾는 것도 드문 일일 걸.”

 “그럼 훔치자.”

 토미가 카드 패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토미를 바라보았다. 토미는 진지하게 스페이드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투 페어.”

 “진심이야?”

 “내가 이겼어.”

 그런 후, 토미가 알렉스를 마주보았다. 흘끗거리기엔 길고 대화를 의도하기엔 짧은 시선이 교환되었다. 건너편에서 한 군인이 시가를 피우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매캐하게 레스토랑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개롯이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 찌그러진 종이 마구 짤랑거렸다.

 “음, 그럼 누가 훔치지?”

 알렉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토미는 자신의 카드 패를 전부 테이블 위로 던졌다.

 “네가.”

 “정말 웃기는데.”

 알렉스가 말했다. 토미의 남은 패는 전부 쓰레기였다. 알렉스는 엎어진 패 위로 자신의 하트10을 던졌다.

 “풀하우스. 유감스럽지만 이건 내가 이겼어.”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스는 문득 이 모든 일이 시시하고, 시시하기 때문에 평화롭고, 평화롭기 때문에 대단하며, 동시에 끔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간밤에 수음을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테이블을 놓고 포커를 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카드만 만지고 있을 거야?”

 “알렉스.”

 “난 지겨워. 토미, 알겠어? 모든 일이 지겹다고.”

 그는 거의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그곳에 토미를 버려둔 채 가게를 박차고 나왔다. 저녁도 아닌데 레스토랑 바깥으로 나와 보긴 처음이었고, 토미를 두고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16번 국도의 반대편을 가로지르고 있을 무렵 누군가 따라붙었다. 알렉스는 돌아보지 않고도 그게 토미의 그림자임을 알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른 낮에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방에서 누군가들이 섹스를 시작했다. 알렉스는 이따금 복도에서 마주치던 옆방의 남자 둘을 떠올렸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토미의 눈치를 보았다. 토미는 시트에 누운 채 도무지 참기 힘든 것을 간신히 참아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겨워.”라고 토미가 중얼거렸는데, 그건 꼭 알렉스를 향한 말처럼 들렸다.

 “뭐라고?”

 알렉스가 되물었다. 토미는 천장을 노려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역겹다고.”

 둘은 숨조차 쉬지 않고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난잡한 난교에 귀를 기울였다. 알렉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손이 온통 흥건했다. 발기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조금도 흥분해있지 않았다.

 “토미,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알렉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토미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은 무언가를 힐난하거나 캐묻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순간, 알렉스는 토미가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토미는 모두 알고 있다.

 

 

 워킹에 머무른 3주 동안 그들 사이에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토미는 워킹을 한 번 떠났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그들은 3주 내내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같은 테이블에서 포커를 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알렉스는 토미가 떠난 일주일 동안 작은 일인용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잠을 잤다. 천장을 보고 두 손을 흉부와 복부 사이에 가지런히 모은 뒤 눈을 감는다. 이따금 숙소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겠지만 모르는 척 한다. 그리고 그것에 성공하면 잠들 수 있다. 꿈조차 없이, 총에 맞은 병사처럼 비척거리는 의식이 무의식의 세계로 엉거주춤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버틸 수 없는 날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아무 곳이나 쏘다녔다. 개롯의 레스토랑을 발견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끝없는 16번 국도의 한복판에 지어진 그 건물은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고, 간판도 아주 낡아서 반은 허물어져 있었다. 그곳이 영업 중이지 않았더라도 알렉스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게는 열려있었다. 문을 열자 달아놓은 종이 마구 짤랑거렸다. 종은 찌그러져서 다소 혼탁한 소리를 냈다.

 가게는 바깥에서 예상하던 것보다 좀 더 크고, 또 예상한 것만큼만 지저분했다. 테이블은 총 열다섯 개였고 바닥은 탁한 파란색 타일로 덮여 있었다. 입구 쪽은 전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한산한 16번 국도가 보였고, 그 날은 날씨가 좋아서 햇빛이 잘 들었다. 먼지가 마구 산란하는 가운데 싸구려 레코드판으로 재즈 음악이 흘렀다. 가게 한가운데엔 작은 바가 있었다. 가게의 주인이 바로 그 너머에서 허리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개롯은 알렉스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군인, 군인, 또 군인이군.”

 그는 툴툴거렸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쁨이 담겨있었다.

 “아무 곳에나 앉으시오.”

 알렉스는 맥주를 주문했는데 개롯이 술 종류는 저녁부터 밤에만 서비스할 수 있는 것이라고 거절했다. 그래서 알렉스는 가장 싼 커피를 시켰다. 씁쓸하고 찝찔한 맛의 아메리카노였다. 향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아주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게에는 알렉스 외에 다른 손님이 없었는데, 그 애매모호한 커피를 마시며 알렉스는 ‘과연’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개롯은 구석에 앉아 혼자 포커를 치고 있었다. 정말 지루한 광경이었다. 알렉스는 커피를 반쯤 남겨놓고 테이블을 옮겼다. 개롯은 그를 끼워주었다.

 알렉스는 포커 초짜였다. 개롯은 서두르지 않았다. 룰을 알려주고 카드 패를 참을성 있게 돌렸다. 알렉스가 룰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 해 자신의 기회를 놓치게 되면 반드시 짚어주었다. 개롯은 게임에 있어선 정직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 역시 게임과 같지.”

 개롯이 말했다.

 “얻거나 잃어서 승리하거나 패하게 되니까.”

 토미가 워킹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알렉스는 아침마다 그곳에서 개롯과 포커를 쳤다. 배팅을 할 때도 있었고 아무 것도 걸지 않고 칠 때도 있었지만 걸어보았자 펜스 단위였다. 정오가 지나면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의 포커 역시 중단되었다. 개롯의 말대로 이곳을 찾는 대다수는 ‘군인, 군인, 또 군인’이었다. 알렉스는 테이블이 꽉 찰 기미가 보이면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레스토랑으로 옮겨간 몇 쌍의 군인들이 밤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잠드는 일은 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알렉스는 그럭저럭 혼자에 적응해나갔다. 그리고 토미가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방세를 함께 지불한 친구가 떠났어요.”

 알렉스는 그것을 말할 때 gone, 이라는 단어를 썼다. 개롯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담하건대 그 빌어먹을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요.”

 그는 덧붙였다.

 “여기선 흔한 일이지. 저런 거대하고 편리한 운송수단을 가진 고장의 인간들은 도통 박혀 있지 못 하고 아무 곳이나 떠돌아다닌다오. 경적소리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언제든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지. 하지만 곧 돌아오게 되어있소.”

 “돌아오게 되어 있다뇨?”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개롯은 패를 뽑으며 대답했다.

 “떠난 사람들은 자신이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게 되어있거든. 아직 잃지도 않았고, 잃을 걱정도 없으니까. 워킹 역으론 끊임없이 사람들이 돌아오지. 자네의 친구 역시 돌아올 테니 두고 보시오. 아마 고향에 있을 여자를 만나러 갔겠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혼한 걸 테고, 돌아온다면 여자가 이미 결혼해버렸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일주일 만에, 토미는 돌아왔다. 알렉스가 눈을 떴을 때, 토미는 벽 쪽에 붙어 있었다. 알렉스는 생각한 것보다 놀라지 않았는데, 어쩌면 개롯의 ‘돌아올 테니 두고 보라’는 말 때문일 지도 몰랐다. 그는 토미를 흔들어 깨웠다. 토미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사납게 얼굴을 찡그렸다.

 “좀 더 재워줘.”

 “언제 왔어?”

 알렉스가 물었다.

 “한밤중에.”

 이불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으며 토미가 대답했다.

 그들은 다음 날 개롯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개롯은 뒤따라 들어온 토미를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날은 셋이서 포커를 쳤다. 토미는 포커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개롯의 레스토랑이 오전에도 점점 분주해지기 시작하자 포커는 둘 만의 일이 되었다. 토미와 알렉스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패를 돌린 후,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킹과 퀸 따위를 보여주며 번갈아 승리하거나 패했다. 토미의 승리가 훨씬 빈번했다. 언젠가부터 알렉스는 패를 받으면 토미의 얼굴부터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이길 만 한 패를 쥐었을 때 미묘하게 왼쪽 눈썹을 찡긋거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알렉스는 이를 이용한 심리전으로 몇 번 이겼고, 자신의 관찰이 유의미하다는 증거를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변명 삼아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토미에 대한 관심을 이어나갔다. 얼마 뒤 알렉스는 더 많은 것을 관찰해낼 수 있었는데, 이를테면 토미는 언제나 커피를 남겼고, 그의 오른쪽 귓불에는 피어싱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가끔 손님 중 하나가 시가를 뻑뻑거릴 때면 가게가 온통 자욱해졌다. 연기 너머에 앉은 토미의 신중한 얼굴은 때때로 신의 불가해한 예언처럼 보였다. 그 때마다 알렉스는 개롯의 말을 상기해보았다. ‘떠난 사람들은 자신이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게 되어있거든. 아직 잃지도 않았고, 잃을 걱정도 없으니까.’ 그러다 촘촘한 토미의 눈꺼풀이 위로 치솟을 때면, 알렉스는 숨을 멈추고 자신의 패만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죄를 저지르다 발각된 사람처럼 심장이 뛰곤 했다. 토미가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하여 돌아온 것인지 해명을 구하고 싶었다. 알렉스는 그 뒤에도 종종 포커에서 졌다.

 그 일은 토미가 돌아온 지 5일이 지난 한밤중에 일어났다. 옆방의 남자들이 그것을 시작한 것이다. 토미는 자고 있었고, 알렉스는 습관처럼 손을 포개어 놓고 천장을 노려보고 있던 중이었다. 벽에서 쿵, 하고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허겁지겁 주고받는 숨소리가 훤히 들렸다. 알렉스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맞잡아 포갠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속삭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티미, 티미, 나를 봐…….” 알렉스는 눈을 감고 역겨운 것들, 축축한 늪과 부패한 가축의 장기, 피가 섞인 토사물 따위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갑자기 그 풍경 위로 자욱한 안개가 덮이더니, 모든 게 온통 흐릿해졌다. 곧이어 그 속에서 유령처럼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알렉스는 그 얼굴이 짓는 신중한 표정, 귓불에 남은 선명한 흉터를 볼 수 있었다. 사실 자욱한 것은 안개가 아니라 담배연기였던 것이다. 풀하우스. 얼굴이 말했다. 알렉스는 눈을 떴다. 토미가 뒤척이며 한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건너편에서 계속 섹스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일어나서 토미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토미는 분명 잠들어 있었는데,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굳이 따지자면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무서울 만큼 공허한 얼굴이었고, 지쳐 있었고,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오, 찰스. 제발, 찰스…….” 알렉스는 갑자기 아주 어릴 적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는 여덟 살이었고, 별장 건너편의 농장에서 사과 두 개를 훔친 후 달려가는 중이었다. 배가 고파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해서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는 처벌받지 못 할 비밀스러운 죄를 소유하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그는 사과를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먹어버렸는데, 죄의식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 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알렉스는 사과 두 알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고 건너편 방에선 두 사내가 동성애를 한다. ‘게임에 있어선 정직해야 한다오.’ 알렉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토미의 눈꺼풀 아래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토미는 분명 잠들어 있었다.

 그 뒤로, 알렉스는 시체처럼 잠들 수가 없게 되었다. 눈을 뜨면 그는 토미의 쪽으로 돌아누워 있거나, 혹은 그 등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가 의도하거나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알렉스는 말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토미도 때때로 돌아누웠고 그럼 알렉스는 잠들지 않고 토미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볼 수 있었다. 볼록하고 창백한 이마, 흔들거리면서도 일직선을 유지하며 떨어지는 콧날, 촘촘하고 새까만 속눈썹과 힘주어 다물린 입술, 턱 끝에 붙은 점, 그리고. 그리고……. 그러다 잠들었다.

 포커는 계속되었다. 둘은 말없이 패를 섞고 돌리고 이기거나 패했다. 무언가를 거는 일은 없었다. 토미는 여전히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이따금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주로 스튜어드 별장에서 여름을 났던 시절에 대해서였다. 깨끗한 개울이 흐르고, 별이 잘 보이며, 다락에는 오리털 이불과 싸구려 잡지 희곡이 굴러다닌다. 그 시절에선 청명하고 아득한 바람 냄새가 났다. 알렉스는 곧 토미에게 그 별장에 대한 모든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보낸 유년시절이야말로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괜찮은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사과를 훔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토미는 패를 들여다보며 아주 가끔, “그래” 혹은 “멋지네”라고 대답하곤 했다. 스튜어드의 별장은 몇 년 전부터 발길이 끊겨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이야기는 늘 마무리되었다. “언젠가는 그곳으로 가자.” 알렉스는 지켜질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그 말을 공허하게 뱉었다. 그러면 토미는, 또 “그래” 혹은 “글쎄”로 이따금 그에 응답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별장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너무 멀어서 도무지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들 스스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위법행위처럼. 그래, 마치 그것처럼.

 그들이 함께한지 2주쯤 지났을 때, 워킹 역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교회에서 나온 남자가 팸플릿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나란히 걷는 군인들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알렉스와 토미도 그것을 받았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문구를 읽은 알렉스가 고개를 들자, 남자는 보란 듯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는 며칠 만에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듣기로는 누군가 두들겨 팬 후 풀숲에 버렸다고 한다. 죽었다는 말도 떠돌았는데 알렉스는 그가 조용한 얼굴로 교회 정원에 서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토미는 팸플릿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접어 방 한쪽에 치워놓았고, 이따금 실없이 혼잣말을 했다.

 “알렉스, 지옥이 뭘까?”

 “글쎄.”

 알렉스가 대답하면 토미는 또 홀로 어떤 것에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난 거기 안 가.”

 팸플릿 사건 이후 토미는 그전까지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던 모든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거리를 걷다 나란히 걷는 군인들을 마주쳤을 때 고개를 들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식이었다. 마치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는 어떤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면, 비로소 나란히 걷고 있는 알렉스를 흘끔 바라본 후,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좁아터진 한 침대에서 잠을 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포커를 쳤다. 알렉스는 토미가 아무것도 모르는 만큼 자신 역시 아는 게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알렉스는 토미를 도무지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령 토미를 별장에 데려갈 수 있다한들 그곳에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포커다. 고작 포커를 치기 위하여 깨끗한 개울이 있고 별이 잘 보이고 오리털 이불과 희곡이 있는 별장으로 간다. 그리고 걷는 것이다. 그곳에는 정말 둘뿐이라 쌍을 이루는 군인도 팸플릿도 마주칠 수가 없다. 그럼 토미 테일러는 어떻게 할까? 그럼에도 알렉스를 흘끔, 바라본 후 거리를 벌릴까. 그를 두렵게 할 존재가 그 무엇도 없는 그곳에서도 그는 과연 거리를 벌릴까.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알렉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어떻게 해야만 좋은 것인가. 그리고 그곳은 분명 한밤중일 것이다. 죄가 유보되거나 은폐되기에 좋은 시간인 것이다.

 “별장에 갈까.”

 불쑥 말한 것은 토미였다. 알렉스는 패를 돌리다 말고 카드를 전부 엎을 뻔했다.

 “뭐라고?”

 “슬슬 떠나자고.”

 토미는 덤덤하게, 마치 당장이라도 실현될 수 있는 것을 늘어놓는 사람처럼 말했다. 알렉스는 그로부터 어떤 신호나 낌새를 알아차리기 위해 애썼지만, 그 어떤 의도도 욕망도 발각할 수 없었다. 알렉스는 토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 하고 뜸을 들였다.

 토미가 되물었다.

 “싫어?”

 “그럼 넌?”

 알렉스가 대답을 회피했다. 토미는 즉답했다.

 “난 지겨워.”

 그는 씹어뱉었다.

 “여기가 지겨워.”

 그들은 이른 저녁 숙소로 돌아왔다. 토미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방 한구석에 박아놓았던 팸플릿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알렉스를 노려보며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h, e, l, l들이 먼지처럼 허공을 날았다. 알렉스는 토미의 분노가 언제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따라잡고 싶어 무엇이든 되짚어 보았으나 곧 그만두었다. 어딘가에서 헐떡거림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미와 알렉스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숙소의 어떤 군인 한 쌍이 뒹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로 다음 순간, 토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작게 우는 신음을 냈다. 알렉스는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토미는 발기해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알렉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렉스는 다리를 벌리고 왼쪽 허벅지에 토미를 앉혔다. 그리고 토미가 그 깊은 분노와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토미는 수음을 받는 내내 결코 알렉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사정을 할 때는 그의 목에 단단히 손을 감았다. 밀어내거나 거리를 벌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알렉스가 손을 씻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토미는 자리에 없었다. 알렉스는 그를 기다렸지만, 한밤이 지나도록 토미가 돌아오지 않아서 이번에야말로 그가 영영 떠나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렉스는 방에서 홀로 수음을 했다. 그리고 잠들었다. 토미는 새벽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돌아왔다. 그는 벽에 바짝 붙어 돌아누웠는데, 알렉스가 일어났을 땐 그를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알렉스는 품에 안긴 토미의 얼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볼록하고 창백한 이마, 흔들거리면서도 일직선을 유지하며 떨어지는 콧날, 촘촘하고 축축한 속눈썹과 힘주어 다물린 입술, 턱 끝에 붙은 점, 그리고. 그리고……. 눈가가 잔뜩 짓물러 있었다. 밤새 울고 왔을 지도 모른다. 울고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미는 어째서 울었을까? 알렉스는, 언젠가처럼 그 얼굴로부터 신의 불가해한 예언을 보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말았고, 그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언은 오지 않았다. 똑같았다. 둘은 그 날 개롯의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 포커를 쳤고, 이번에는 3팬스를 걸었다. 알렉스가 이겼다. 그런 후 그들은 별장에 어떻게 하면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을 심심하게 교환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알렉스는 무엇이든 말해보려고 시도했으나 토미가 너무 일찍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토미는 거의 전투적으로, 증오하다시피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다음 날에도 그들은 포커를 쳤고, 별장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날엔 또다시 수음을 했다. 하지만 일상은 계속되었다. 그런 짓을 세 번 정도 반복한 후에, 토미가 말했다.

 “우리는… 아직은 괜찮아.”

 yet, 을 발음하는 토미의 눈이 절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되새겼다.

 “알겠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했잖아.”

 물론이다. 그들은 성교하지 않았다.

 ‘넌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라.’

 알렉스는 생각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이야.’

 하지만 토미는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문제가 생겼어.”

 토미가 말했다. 알렉스는 대꾸하는 대신 창문을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한낮이었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데, 차를 훔치거나 도로에 서서 엄지를 들어 올려야만 하는데, 토미는 무엇을 알고 싶은 거지? 이제 와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너는 나로부터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 거지? 알렉스가 침묵하자 토미가 눈을 부릅떴다.

 “우린 하나도 괜찮지 않아.”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알렉스가 재빨리 대답했다. 토미는 으르렁거렸다.

 “네가 가게를 박차고 나왔잖아.”

 “그래서?”

 “넌 지금 들리는 소리를 역겹다고 생각하지 않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난 잠든 적이 없으니까.”

 토미는 빌어먹을, 이라고 중얼거렸다.

 “너 때문이야. 전부 네가 잘못했어.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는 갑자기 내게…….”

 “정말 알고 있었어?”

 알렉스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되물었다.

 “넌 알고 있었는데도 이 지경으로 굴었어?”

 “역겹게 굴지 마, 알렉스.”

 “역겹다고!”

 알렉스가 화를 냈다.

 “그래놓고 넌 내 허벅지 위에서 쌌잖아.”

 “입 닥쳐.”

 토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렉스는 계속 지껄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그래놓고 잘도 낮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입을 닦았지. 깨끗한 척 굴지 마, 토미. 너도 알고 있잖아.”

 “지옥에나 떨어져버려.”

 “오, 그럼 내 옆구리엔 너를 껴야겠네.” 

 알렉스가 빈정거렸다.

 “넌 무서워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난 너한테 화내고 있는 거야.”

 “그래, 무서워서 화가 나는 거야.”

 알렉스가 힐난했다.

 “넌 내가 무서운 거야. 그렇지, 토미? 난 다 알고 있어. 모를 수가 없어. 모를 수가 없다고. 너만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워킹에 돌아온 순간부터 우린 이렇게 될 거였어. 빌어먹을 토미, 넌 돌아와서 이주일 내내 나랑 여기 처박혀 있었잖아. 뭘 기대했어? 뭘 기대한 건데?”

 바로 그 다음 순간, 토미가 알렉스에게 달려들었다. 알렉스는 주먹을 맞고 휘청거리다가 반격했다. 그는 토미를 덮쳤다.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둘은 침대 위로 쓰러져 뒹굴었다. 토미가 알렉스의 얼굴을 마구 할퀴자, 알렉스는 그를 깔아뭉갠 채로 주먹을 내질렀다. 토미가 미친 듯이 바둥거렸다. 씨큰거리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토미는 알렉스의 목을 쥐었다. 알렉스가 컥컥거리며 뒤집혔다. 이제 토미가 알렉스의 위에, 알렉스가 토미의 아래에 있었다. 토미는 그대로 그의 숨통을 조였다.

 “네가 끔찍해.”

 토미의 손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토미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손아귀가 느슨해지자 알렉스는 헐떡거리며 토미를 발로 찼다. 토미는 순순히 치워졌다. 알렉스는 거칠게 숨을 고르며 그 위로 올라탔다. 토미는 눈을 깜빡이다 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길고 마른 손가락 사이로 작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알렉스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고, 그건 고통에 가까웠다. 그는 토미의 목을 쥐다 말고 그대로 감싼 채 엎어졌다.

 “제기랄.”

 알렉스가 씹어뱉으며 토미의 손목을 쥐었다. 그 아래에는 축축한 얼굴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곳에 깊게 입을 맞췄다. 토미가 나지막이 비명 같은 걸 질렀다. 그러나 결코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내는 법이 없었다.

 알렉스는 몇 번 더 토미의 축축한 눈 위에 입을 맞췄다. 둘은 다시 한 번 침대 위를 뒹굴었다. 이번에는 몸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때때로 몸싸움처럼 보였다. 그들은 축축해져서 비빌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비비며 파고들었다. 정신없이 서로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끝까지 가는 데는 실패했다. 삽입은 어려운 일이었다. 

 토미는 울었다. 많이 울었다. 알렉스는 방 곳곳에 흩날리던 무수한 h와 e와 l을 떠올렸다. 그는 거기서 l을 빌려왔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열해보았다.

 “잘 들어 봐, 토미.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알렉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이걸 이해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토미는 훌쩍거리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토미는… 마치 신의 불가해한 예언을 보는 것 같은, 그래서 앞으로 어떤 비극이 벌어지고 말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의 눈 같은 걸 하고 있었다. 토미가 알렉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 내가 워킹을 떠났던 지난 일주일 동안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알아?”

 “아니.”

 “나는 고향에 있는 내 애인을 만나고 왔어.”

 토미가 말했다.

 “그리고 난 우리에 대해 기대한 적 없어.”

 끔찍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토미가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횡설수설하며 훌쩍였다.

 “여길 나가야겠어. 미쳐버릴 것 같아. 남자랑 남자가 사랑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잖아. 여긴 현실이 아니야. 취해버리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알렉스가 두 팔을 벌렸지만 이번에 토미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 그리고 그 몸짓은 분명하게 알렉스의 무언가를 관통했다. 막을 수 없는 구멍이 생겨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토미의 얼굴, 그를 밀어낸 자신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은 것처럼 깜짝 놀라 굳어 있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모조리 무너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재건되었다. 그곳에선 그 어떤 사랑도 불법이 아니었다.

 “토미, 이러지 마.”

 알렉스가 간절하게 말했다.

 “우리는 괜찮을 거야.”

 “제발 떠나자.”

 토미가 애원했다.

 “난 더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우린 차가 없어.”

 “훔치면 돼.”

 토미는 눈가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우린 이미 범법자야.”

 그러니까 토미도 마침내 인정한 셈이었다.

 그들은 숙소 바깥으로 나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오래된 주차장이 있었는데, 둘은 레스토랑과 숙소를 오며가며 종종 그곳을 눈으로 둘러보곤 했다. 그리고 기억하건데 그 주차장 한쪽에는 내내 처박힌 채 아무도 몰 것 같지 않은 낡은 고물 트럭이 한 대 버려져 있었다. 알렉스는 창문을 깬 뒤 문을 열어서 계기판을 확인해보았는데, 놀랍게도 신은 그 트럭에 키와 몇 갤런 정도의 기름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알렉스는 포커에는 초짜였지만 운전을 할 줄 알았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올라타.”

 알렉스가 말했다.

 “가는 길을 알아?”

 토미가 물었다.

 “아니.”

 알렉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곳의 도로는 하나뿐이잖아.”

 둘은 트럭에 앉아 숙소의 모든 사람들이 레스토랑으로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노을이 지면서 주차장 팬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까마귀가 그 위에 앉아 몇 번이고 울었다. 그리고… 저녁이 끝났다. 까마귀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알렉스는 시동을 걸었다. 몇 번 실패했지만 마침내 걸렸다. 그는 주의 깊게 핸들을 꺾어서, 찔끔거리며 후진을 두어 번 하고, 입구에서 한 번 긁힌 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16번국도 입구에 진입했을 때, 도로에 외따로 세워진 개롯의 레스토랑에서는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둘은 술과 접시를 주고받는 왁자한 군인들의 무리를 시트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개롯은 바에 있는 것인지 보이질 않았다. 알렉스는 페달을 밟아 그곳을 벗어났다. 레스토랑은 빠르게 멀어졌다.

 트럭은 탈탈거리며 한산한 16번 국도를 마구 달렸다. 깨진 운전석 창문 안으로 바람이 자꾸만 들어왔다. 토미는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가운데 산등성이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공기가 점점 더 서늘해지고 있었다. 숲을 지날 무렵, 토미가 물었다.

 “너는 무섭지 않아?”

 “넌?”

 “무섭지 않아.”

 토미가 대답했다. 알렉스는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었는데, 고장이 났는지 작동하질 않았다. 알렉스는 핸들을 쥔 채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 모든 게 무서워.”

 한밤의 숲은 지독하게 새까맣고 무서웠다. 그리고 정말 추웠다. 바람이 너무 서늘해서 둘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이마를 칠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다. 긴장한 알렉스가 너무 세게 밟고 있었다. 풍경이 뭉개져서 사방이 온통 흐지부지 칠해진 까만 도화지처럼 보였다. 토미는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알렉스가 토미를 흘끔거렸다. 그는 중얼거리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so this is the part where we say goodbye…….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야.)”

 토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알렉스는 요란한 바람소리 속에서도 뚜렷하게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I promise I'll try to make it stick this time. (이번엔 정말 잘 이겨내 볼게.)”

 “누구 곡이야?”

 “original.”

 토미가 대답했다.

 

 So this is the part where we say goodbye.
 이제 우리 헤어질 시간이야
 I promise I'll try to make it stick this time.
 이번엔 정말 잘 이겨내 볼게
 I always loved breaking up with you cause
 난 늘 너와 헤어지는 걸 좋아 했어
 The more bitter it was the better the making up with you was.
 마음이 아플수록 더 화해하고 싶었지
 And I think we can agree,
 그래, 이제 우리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
 On the following things
 왜냐하면


 그것은 토미 자신에 대한 곡이었다.


 I am an asshole,
 난 쓰레기야
 And you're kinda needy.
 넌 그저 사랑을 원했고
 We said it was casual,
 아무 문제없어 보였지
 And you pretended to believe me.
 넌 나를 믿는 척 했어


 16번 국도는 끝이 없었고 숲은 연거푸 이어졌다. 알렉스의 손 떨림이 잦아들었다. 토미의 목소리가 바람소리를 추월했다. 트럭은 아까보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하나가 깜빡거리다 나가버렸다. 모든 게 나빠질 지도 몰랐지만 토미의 노래는 듣기 괜찮았다. 객관적으로, 그런 느낌이었다. 토미는 자신이 고향에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걸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만나고 왔던 애인, 그러니까 토미가 십대 시절 사랑했던 여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꿈속에서도 그린 것처럼 늘어놓았고, 그건 알렉스가 스튜어드 별장의 시절을 늘어놓을 때와 꼭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토미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절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토미는 그녀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해왔다고 고백했다. 이어서 토미는 워킹을 떠났던 일주일 동안 고향에 그 모든 것을 두고 왔다고 털어놓았다. 사랑은 늘 증오와 같았어, 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죽여 버리고 싶었고 동시에 용서하고 싶었지. 알렉스는 토미의 말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완성된 곡이 아니야.”

 토미는 자신의 노래가 뒤죽박죽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뒤의 가사를 쓴다면, 분명 너에 대해 말하게 되겠지…….”

 그 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알렉스를 흥분하게 했다.

 토미는 그 뒤로는 별다른 말없이 미완성의 곡을 완성한 만큼만 불렀다. I only love you when you're leaving… 곡의 말미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only. 난 네가 나를 떠날 때만 사랑했어.

 

 둘은 밤의 정점에 샛길로 빠져서 트럭을 세웠다. 눈을 좀 붙일 필요가 있던 것이다. 도로가 너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풀벌레들이 울었고 먼 곳에서 맹금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잦아들자 흙냄새가 사방에서 끓어올랐다. 알렉스는 생각했다. 아침이 되면, 낮이 오면, 언덕을 넘어서 산으로, 산을 지나서 별장으로 가자. 그리고 거기서 삽입을 해보자. 거기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두려워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세상에는 그런 곳도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잠이 들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개롯이, 그의 옆 좌석에는 한 소녀가 앉아 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토미가 말한 대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토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면사포를 쓰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토미는 그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베팅을 해.”

 그녀가 말했다.

 “어… 6펜스?”

 알렉스가 걸었다. 소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는 토미를 걸 거야.”

 “그리고 난 레스토랑을 걸겠소.”

 개롯이 대답했다.

 그들은 포커를 쳤다. 커피가 있었지만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곳은 개롯의 레스토랑이었는데, 어쩐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통유리로 희끄무레한 빛이 드문드문 쏟아지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실링팬이 천천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한 때 토미의 것이었고 동시에 토미를 소유했던 소녀는 결혼식 장갑을 낀 채로 패를 던졌다.

 “트리플.”

 “한 방 먹었군.”

 개롯이 낄낄거렸다.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웃을 때가 아닌데요.”

 “오, 그럼. 웃을 때가 아니지.”

 개롯이 중얼거렸다.

 “난 항상 진지했다오.”

 그들은 계속 쳤고 카드를 뽑았고 패를 돌렸다. 첫 판은 알렉스가 이겼는데, 소녀는 알렉스에게 무릎을 꿇고 토미를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난 모든 걸 잃었고 토미마저 없으면 난 죽어버리고 말 거야. 그러나 어쨌든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판은 개롯이 이겼다.

 “점점 흥미진진해지는군.”

 개롯이 말했다.

 “내가 이기면 더 흥미진진해지는 셈이지.”

 소녀가 대답했다.

 세 번째 판이 시작되기 전에, 알렉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토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트럭에서 토미의 실루엣이 창문의 밤하늘을 등진 채 선명하게 드러났다. 알렉스는 시트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I'm sorry I hurt you,
 너에게 상처 줘서 미안해
 And for pissing you off and,
 널 보내려고 그랬어……

 
 뒤척거리는 소리에 토미가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I'm sorry for not hurting you,
 너에게 조금 더 자주
 A little more often.
 상처주지 않아 미안해…

 

 “토미.”

 알렉스가 손을 뻗었을 때, 토미는 고개를 숙여 뺨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결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의 불가해한 예언이 있다면, 이해해야만 하는 순간이 여기 있었다. 알렉스는 이해하고자 했다. 토미가 그렇게 하자고 방금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했다. 이번엔 성공했고, 그것은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그러나 토미의 두려움은 거기서 다 끝났다. 알렉스는 포커를 떠올렸다. 무엇도 걸지 않았음에도 이기거나 졌던 토미와의 포커를. ‘게임은 인생과 같다오. 얻거나 잃어서 승리하거나 패하게 되니까.’

 ‘하지만 인생은 게임이 아니야.’ 알렉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사과 두 알을 훔친 후 어떻게 되었는지가 떠올랐다. 그는 도둑질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서 사과를 전부 먹어 버렸고, 그 과정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배가 너무 찼기 때문이었다. 죄의식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행위에 대한 만족감과 행복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내가 강탈하였다, 혹은, 영영 소유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싱거워지고 말았다. 토미가 아래에서 헐떡거리며 알렉스를 껴안았다. 뜨거운 두 뺨이 알렉스의 서늘한 목덜미에 닿았을 때, 마음속으로 화염이 끓어올랐다. 알렉스는 강렬한 죄의식을 느꼈다. 하지만 괜찮다. 아주 한밤중이므로 그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는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⑴ 알렉스는 토미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 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토미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알렉스는 토미의 어떤 것이 재건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재건에 알렉스가 일조하고 있음을 직감했으나,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건이 항상 좋은 쪽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토미는 다만 산산이 부서졌다가 ‘무엇으로든’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입을 맞추면서 속으로 물어보았다. 토미, 그곳에도 사랑이 불법이야? 토미가 대답할 수 있을 리는 물론 만무했다.

 둘은 끌어안고 잠들었고, 동이 틀 무렵 16번 국도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 그들은 더 이상 스튜어드 별장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건 너무 멀리 있었음에도 간밤에 이미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토미는 밤새 바로 그 별장을 재건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토미의 마음속으로 깨끗한 개울이 흐르고, 별이 잘 보이며, 오리털 이불과 싸구려 잡지 희곡이 굴러다닌다… 그리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 토미는 그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절을 갱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차역에서 헤어졌다. 떠나기 전에 토미가 플랫폼에서 알렉스를 끌어안았다. 알렉스가 속삭였다.

 “우리는 지옥에 갈 거야.”

 “그래, 고물 트럭을 훔쳤으니까.”

 토미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제 돌려놨으니 아무 상관없어.”

 기차가 경적을 울렸다. 토미는 천천히 떨어졌는데, 그 과정에 알렉스는 토미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묻혔다’고 생각했다. 그건 토미가 원해서 혹은 알렉스가 원해서 옮겨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달리 그렇게밖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토미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제 알렉스의 일부가 된 셈이었다. 알렉스는 언젠가 토미가 자신을 멀리 밀쳐냄으로써 관통시킨 구멍이 단단히 틀어 막혔음을 알 수 있었다. 방 곳곳에 흩날리던 무수한 h와 e와 l속에서 다시금 배열된 단어가 떠올랐다. 알렉스는 물러나는 토미를 붙잡아 귓가에 그 문장을 쏟아 넣었다. 흉터가 분명하게 남아있는 토미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토미는 입을 맞추는 대신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기차가 출발할 때, 알렉스는 머릿속의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소녀와 개롯은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거기서 마지막 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토미는 돌아올 거야.”

 소녀가 심술궂게 웃었다.

 “그리고 넌 이 게임에서 이겨도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 없어.”

 “이제 아무 상관없어.”

 알렉스가 대답했다.

 “정말 아무 상관없어.”

 기차가 멀어지는 가운데, 알렉스는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패를 던진다. 개롯이 대신 소리쳐준다. 소녀가 퇴장하고, 연기가 깨끗하게 걷힌다. 개롯의 레스토랑은 이제 알렉스의 것이고 통유리로는 맑은 햇살이 쏟아진다. 알렉스는 개롯의 레스토랑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토미를 볼 수 있다. 자, 이제 끝났다. 알렉스는 모든 게임에서 승리한 것이다. 

 알렉스는 손을 흔드는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묻는다. 풀하우스, 라고 알렉스는 중얼거린다. 풀하우스. 토미, 그리고 사랑해. 너를 사랑해. 그리고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 ■

 

⑴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 김승옥, 무진기행 中

 

토미가 부른 곡은 Asshole (러덜리스 soundtrack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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