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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병조 «유랑기담»
2차/old 2019. 10. 24. 19:11

 햄프셔의 해안선을 따라 이어진 허스트 도로에는 간의 카페들이 열려 있었는데, 그 중 일부는 새벽 운전자를 위해 스물네 시간 운영되었다. 알렉스 스튜어트가 그중 한 곳에 도착했을 때는 시계가 이미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비가 내려서 헤드라이트와 카페 불빛을 제외한 주차장의 대부분이 축축한 어둠 속에 잠겨있었다. 다행히 바람은 심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코트 깃을 올리며 차에서 내렸다. 키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어깨를 움츠리자 오한이 솟았다. 주차장에는 차가 몇 대 없었다. 그는 비를 뚫고 주차장을 가로지르다 멈추어 섰다. 그리고 뒤를 돌아 랜드로버를 바라보았다.

 주차장 맨 앞줄엔 그 남색 랜드로버 한 대만이 주차되어 있었다. 쇼윈도로부터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보닛이 거의 갈색처럼 보였다. 또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뻣뻣하게 서서 트렁크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가느다랗게 겁에 질린 음성이 새어나왔다.

 “살려 주세요…….”

 알렉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주차장에 누군가 있을 리는 만무했다. 트렁크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은 틀림없는 여자아이의 목소리였다.

 “거기 누구 있으면 살려 주세요…….”

 알렉스는 호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랜드로버를 지나쳐 카페로 들어왔다. 입구에 매달린 종이 짤랑거리자 클리브 잭슨은 걸레질을 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는 알렉스를 발견하고 카운터로 들어왔다.

 “일은?”

 “해결했어.”

 알렉스는 머리에 붙은 물방울을 매트 위로 마구 털어냈다.

 “내 차는?”

 “세 번째 줄에 주차해놨어.”

 “기스 났으면 두 배로 청구할 거야.”

 클리브가 장난스럽게 던졌다.

 클리브 잭슨은 이 Needles Eye Cafe의 주인 둘째아들로, 야간 시간동안 홀을 지키며 몇 안 되는 주문을 받고 아침 장사를 준비하는 역할을 도맡고 있었다. 그는 그 일을 죽기보다 싫어했다. 이따금 파트타이머를 내버려두고 근처 오두막에서 농땡이를 피우다가 새벽이 될 무렵 슬그머니 돌아오는 게 그의 유일한 낙처럼 보였다. 알렉스 스튜어트는 햄프셔에 머문 이주일 동안 거의 빠짐없이 밤마다 이곳을 드나들었는데, 클리브는 세 번에 한 번 꼴로 홀에서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지난주 그의 아지트로 출발한지 거의 오십분 만에 사색이 되어 카페로 돌아왔다. 오두막은 매장으로부터 약 한 시간이나 떨어져 있었는데, 클리브가 얼마나 밟아댔는지는 신만이 아실 일이었다. 그는 문을 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매트 위로 주저앉았고, 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덜덜 턱을 떨었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께 맹세하고 고하길, 소파 옆에 있던 탁자가 마룻바닥으로부터 약 3피트 정도 허공에 떠올랐다는 것이다. 그가 비명을 지르자, 집안 전체가 따라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클리브는 자신이 어떻게 차를 타고 돌아왔는지도 거의 기억하지 못 했다.

 알렉스는 보통 이런 일에는 돈을 받지만, 클리브가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기에 그냥 차키를 가져가기로 했다. 그리고 왕복 2시간 정도 되는 그곳으로 차를 몰았다. 오두막집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었다. 그는 십분도 채 되지 않아 그곳을 평범한 공간으로 돌려놓았다. 다시 카페로 돌아왔을 때, 클리브는 경찰에게 연락을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도 스스로를 바보 같다고 여기고 있었다. 확실히 그건 경찰이 해결할 수 있는 사건은 아니었다. 알렉스는 키를 돌려주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클리브는 한동안 오두막집은 얼씬도 하지 않고 그 누구보다 성실하게 카페를 지켰다. 나중에 그는 값을 지불하겠다고 했고, 알렉스는 돈 대신 차를 한 번 빌려달라고 했다. 여기서 차로 두 시간은 떨어진 뉴 포레스트 부근에서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알렉스는 히치하이킹에는 소질이 없었다.

 “빌려줘서 고맙다.”

 알렉스가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 카운터로 던졌다.

 “뭐, 내게도 갚을 게 있었으니까.”

 클리브가 어깨를 으쓱였다.

 “주차장에 못 보던 차가 있던데.”

 알렉스가 마른세수를 했다.

 “차주가 누구야?”

 “랜드로버?”

 클리브가 물었다.

 “그래, 남색 랜드로버.”

 “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

 클리브는 턱짓으로 홀을 가리켰다.

 홀에는 클리브와 알렉스를 포함한 총 다섯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60대 노인이 창가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나머지 둘은 주방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어두운 표정으로 이따금 고개를 들어 짧은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보였는데, 음악소리가 커서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다.

 “한 시간 째 앉아있어. 윈체스터로 간다던데. 확실히 여기 주민은 아니지.”

 클리브가 말했다.

 “음악 좀 줄여, 클리브.”

 알렉스가 입술을 핥았다.

 그는 테이블로 갔다. 머리 위로 진 그림자 때문에 벽 소파에 앉은 청년이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알렉스는 그가 청년이라기보다 차라리 소년에 가깝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년은 왜소한데다가 창백했고, 희미한 주근깨가 콧잔등을 중심으로 뺨에 포진해 있었다.

 “무슨 일 있나요?”

 소년이 먼저 잔뜩 날 선 목소리로 물었다. 알렉스는 당황하지 않았다.

 “저 앞에 세워둔 랜드로버의 차주 분 되시는지?”

 “네, 그런데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소년이 방어적으로 대꾸했다.

 “네가 운전할 것 같지는 않은데. 이쪽 신사 분?”

 알렉스가 맞은편으로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깁슨은 프랑스인이라 영어를 몰라요.”

 “프랑스인이라도 운전은 할 줄 알잖아.”

 알렉스가 남자의 넓은 어깨를 붙잡아 흔들었다.

 “이봐요.” 

 남자는 거의 졸고 있던 모양이다. 알렉스가 흔들자마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몹시 피곤한 얼굴이었다. 다크서클이 길게 내려온 눈은 둥그렇고 선해보였고, 인중은 면도한지 얼마 되지 않아 깔끔했다. 이마로 흘러내린 곱슬머리가 진한 눈썹을 따라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눈앞의 낯선 얼굴 때문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소년을 바라보았다.

 “당신 운전하지 마요.”

 알렉스가 말했다.

 “알겠어요? 오늘 밤에는 운전하지 말아요.”

 “그쪽이 뭔데요?”

 소년이 날카롭게 대꾸했다.

 “토미, 누구야?”

 깁슨이 물었다.

 “말할 줄 아네?”

 알렉스가 토미를 바라보자, 토미는 사나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쪽이 누군데 저희한테 이러시는 거죠?”

 “너희 밀퍼드에서 오는 길이지.”

 알렉스가 혀로 입술을 축이며 이죽거렸다. 토미는 입을 벌렸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 부근에서 실종 신고가 있었거든.”

 알렉스는 손을 비비며 토미와 깁슨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내 생각에 그게 너희랑 관계가 있는 것 같아서.”

 “모르는 일이에요.”

 토미는 그렇게 대꾸했지만 어쩐지 불안한 눈치였다.

 “저흰 가봐야 해요. 깁슨, 일어나자. 이 사람 미친 사람이야.”

 “사람 면전에 대고 미쳤다고 하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알렉스가 투덜거렸다.

 토미는 벌떡 일어섰다. 깁슨도 엉거주춤 따라 일어나 둘의 눈치를 살폈다. 토미는 눈짓으로 창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알렉스를 밀친 후 황급히 카페를 뛰쳐나갔다. 성난 종소리가 매장 음악을 추월했다. 깁슨은 나가기 전까지 머뭇거리며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토미는 랜드로버 앞에서 초조하게 깁슨을 기다리고 있었다. 깁슨이 휘청거리며 현관 계단을 밟고 내려갈 때, 알렉스가 달려 나갔다.

 빗줄기는 아까보다 굵어져 있었다. 깁슨이 차키를 꽂자, 토미가 다급하게 뒷좌석 문을 열어젖혔다. 알렉스는 세 칸짜리 계단을 한 번에 뛰어넘었다. 그리고 단숨에 랜드로버까지 도달한 후, 조수석을 활짝 열었다.

 “뭐 하는 짓이에요?”

 토미가 차안에서 비명을 질렀지만 알렉스는 아랑곳 앉고 조수석에 몸을 욱여넣었다. 운전석에 앉은 깁슨이 당황스럽게 그를 바라보았다.

 “출발해.”

 “당장 내려요.”

 토미가 경고했다. 알렉스는 백미러로 토미를 내다보았다.

 “지금 출발할 거라면 나도 동승시켜야 할 거야.”

 “왜요?”

 “아님 너희 둘 다 죽을 테니까.”

 알렉스는 코트 안쪽에 손을 집어넣고 둔중한 화기를 붙들었다. 곧 품속에서 희미하게 철컥, 소리가 났다. 보닛을 때리는 빗소리가 요란한 가운데, 차 안은 침묵에 휩싸였다.

 “어쩔래?”

 알렉스가 물었다.

 백미러로 성난 한 쌍의 녹색 눈동자가 죽일 듯이 알렉스를 노려보았다. 마치 고양이 같군. 알렉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한참 후, 토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깁슨, 출발해.”

 “그래도 돼?”

 깁슨이 물었다.

 “응.”

 토미는 여전히 알렉스를 노려보는 채 대답했다.

 깁슨은 와이퍼를 올리고 시동을 걸었다. 야간 카페의 네온사인이 멀어지는 동안 셋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앉아 있었다. 허스트 도로에 들어서자, 가로등 덕에 시야가 다소 밝아졌다. 깁슨은 불안한 눈빛으로 조수석과 백미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좌측 가드레일 너머로 아득한 밤바다가 이어졌다. 절벽 아래에 깊은 어둠이 고여 있었다.

 “밀퍼드로 운전해.”

 알렉스는 길게 한숨을 쉬며 등받이에 힘껏 기댔다.

 “왜요?”

 토미가 물었다.

 “실종자를 찾았으니까.”

 알렉스가 말했다.

 “도로 있던 곳에 돌려놓자고.”

 “밀퍼드에서 오는 길은 맞지만 저흰 관계없어요.”

 “아니, 너희는 관계있어.”

 알렉스가 단호하게 말하자, 이번에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다시 한 번 코트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철컥. 그 소리는 여전히 효과가 있었다. 토미는 긴 한숨을 내쉬곤 깁슨에게 부탁했다.

 “저 사람이 말한 곳으로 운전해줘.”

 “밀퍼드로?”

 깁슨이 물었다.

 “응.”

 한 박자 느리게 토미가 대답했다.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다. 와이퍼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주변이 다시 어두컴컴해졌다. 그들은 허스트 도로를 벗어나 웨스토버로 들어섰다. ‘밀퍼드 온 시, 앞으로 50마일’이라는 표지판을 지나칠 무렵,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소녀는 트렁크 안에서 날뛰고 있었다. 등을 바닥에 붙이고 다리로 뚜껑을 걷어차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그러면서 울부짖었는데, 처음엔 아이 울음처럼 가느다랗고 겁에 질려 있다가, 끊어질 무렵 갈라지면서 묵직하고 잔뜩 쉰 저음을 냈다. 늙은 개가 짖어도 그런 소리를 내지는 못 했을 것이다. 째진 고음이 드라이버에 철판을 대고 마구 긁는 소리처럼 들렸다.

 깁슨은 터질 것처럼 하얗게 질린 손으로 운전대를 움켜쥐고 있었다. 알렉스는 운전자의 얼굴을 살폈다. 그가 지나치게 겁에 질려있다면 차를 멈출 생각이었던 것이다. 밀퍼드에 도달하지는 못 했지만 이 정도 거리라면 그럭저럭 해 볼만도 했다. 그러나 깁슨은 의외로 침착했다. 그는 이 낯선 청년이 트렁크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이미 알고 있으며, 왜 이 차에 탑승했는지도 깨달은 것 같았다.

 그는 알렉스를 돌아보았다.

 ‘모른 척 해줘.’

 알렉스는 대답 대신 웃어주었다.

 “네 이름이 토미라고 했었나?”

 바로 그 순간, 찢어질 것 같은 비명소리가 트렁크로부터 터져 나왔다.

 “그쪽은 우릴 죽일 생각인가요?”

 토미가 창백한 얼굴로 물었다.

 “아니, 그 반대야.”

 비명소리가 너무 커서 알렉스는 얼굴을 찌푸렸다.

 “난 너희의 구세주지.”

 “총으로 협박하는 구세주도 있나요?”

 “오, 토미. 그렇지 않으면 넌 내 말을 듣지 않았을 거잖아.”

 그러나 알렉스가 가진 것은 사실 총이 아니었다.

 알렉스는 저녁 내내 뉴 포레스트를 빙글빙글 돌았다. 그곳에는 포트머스와 본머스 사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국립공원이 있다. 실상 관광요소는 몇 가지 없는 곳인데, 유일한 볼거리가 있다면 조랑말들이다. 공원 도로를 따라 차를 몰다보면 울타리 너머로 풀을 뜯는 지역 조랑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몇 주 전부터 밤마다 불 탄 말들이 나타나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절뚝거리는 폼을 수상히 여긴 사람들이 울타리를 넘었다가, 고기 탄내를 풍기며 침을 흘리는 끔찍한 조랑말 시체를 보고 질겁한 게 한 두 번이 아니라고 했다. 관리인은 공중 화장실에 붙은 광고를 보고 전화를 걸었다. 마침 알렉스의 ‘영적인’ 도움을 받은 햄프셔의 일가가 진위를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에, 관리인은 전화상에서부터 그가 벌써 사건의 반은 해결한 것처럼 굴고 있었다. 알렉스는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서 그것들을 직접 보았는데, 그들은 악령이 아니었기 때문에 죽일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그는 공원 입구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낯선 소녀를 보았다.

 “무슨 일이야?”

 알렉스가 물었다.

 “내 몸을 도둑맞았어.”

 소녀는 검은자가 없었다. 동공이 있어야 할 자리는 깔끔하게 지워져 있고 흰자가 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마치 동상처럼 보였다.

 “무덤이 엉망이 된 걸 부모님이 아시기 전에 원래대로 되돌려놓고 싶어.”

 “어쩌다 그 꼴이 된 건데?”

 “도굴꾼이 내 몸을 가져갔거든. 나는 곧 떠날 계획이었는데, 덕분에 다 틀어져버렸어. 몸이 어디 있는지는 알지만, 나는 따라잡을 수가 없어. 그게 움직이고 있거든.”

 “그래서?”

 “네가 그걸 멈춰줬으면 좋겠어.”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좋아. 그럼 넌 내게 뭘 줄 건데?”

 소녀가 알렉스가 서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젖혔는데, 두 팔을 단단히 양 옆구리에 붙인 채 얼굴만 움직였기 때문에 그 몸짓은 마네킹을 떠오르게 했다.

 “난 줄 게 없어.”

 소녀가 딱딱거렸다.

 “대신 네가 부르면 딱 한 번 달려와서 필요한 만큼 일할게.”

 “필요한 일이 있을지 모르겠는데.”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하지만 좋아.”

 그러자, 소녀가 입술을 말아 올렸다. 알렉스의 생각에, 그 애는 미소를 지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소녀는 이미 웃는 법을 잊어버려서, 그 비슷한 것만 끔찍하게 겨우 흉내 낼 수 있었다. 뒤집힌 입안으로 단단하게 다물린 새까만 이가 드러났다. 그 속에서 웅웅거리는 벌레의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네 이름이 뭐야?”

 알렉스가 물었다.

 “라일리.”

 소녀가 대답했다.

 “좋아, 라일리. 넌 어디서 왔지?”

 “밀퍼드.”

 “거기에도 무덤이 있어?”

 “응.”

 “지금 네 몸이 어디 있는데?”

 “허스트.”

 소녀가 말했다.

 “내 몸은 움직였다가 멈췄다가 해.”

 “네 시체가 끝내주게 혈기왕성한 게 아니라면 어딘가에 실려 운송되고 있는 것이겠군.”

 알렉스가 입을 쓸어내렸다.

 “어쨌든 알겠어.”

 알렉스가 구울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열두 살 때였다. 스튜어트 가문이 소유한 버크셔의 여름 별장에는 여러 가지 잡동사니가 쌓여 있다. 그의 부모님은 가업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그곳에 구비해두고 때때로 알렉스와 그의 형에게 사용법을 알려주곤 했다. 알렉스가 기억하는 가장 흥미로운 도구는 궤짝이었다. 평범한 나무 상자처럼 보였지만 걸쇠를 걸면 무슨 수를 써도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그건 사실상 궤짝이 아니라 감옥에 가깝다고 아버지 위넌트가 설명해주었다. “알렉산더, 그러나 영혼을 가둘 수는 없단다. 이곳에 가둘 수 있는 건 이미 영혼을 상실한 존재들뿐이다.” 요컨대 위넌트 스튜어트는 악마나 그 엇비슷한 것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 테다. 그 해 여름, 어머니 마거릿 스튜어트가 그곳에 갇혔다. 그리고 영영 빠져나오지 못 했다. 아버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대로 설명해주지 않았지만, 궤짝에 그녀를 가둔 건 다름 아닌 알렉스였다. 그가 망설임 없이 걸쇠를 걸 수 있었던 건 어머니의 영혼이 거실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검은자를 상실한 흰 눈으로 소파에 앉아 입을 벌리고 있었다. 입에서는 악취가 솟아올랐고 벌레가 그 주변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녀는… 영혼의 상태로도 거의 죽은 것처럼 보였다. 영혼은 죽을 수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몸은 어디다 두셨어요?”

 알렉스가 놀라서 물었다. 그녀는 말없이 손만 들어 올려 다락을 가리켰다. 어머니의 영혼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알렉스가 다락으로 올라갔을 때, 마거릿의 몸은 누운 채 팔을 뒤로 꺾어서 네 발로 기어 다니는 중이었다. 둥글게 치솟은 배가 하얗게 질려 있었는데, 팽팽하게 당겨진 살가죽 아래로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게 몸을 뒤틀 때마다 마거릿의 뱃가죽이 고무 같은 소리를 내면서 찢어질 것처럼 위태롭게 늘어났다. 알렉스는 악마가 들어간 몸은 뒤집혀 걸어 다닌다는 걸 들은 적이 있었다. 마거릿의 몸은 이미 어머니가 아니었다. 알렉스는 뱃속의 그것이… 탄생하기 전에 빨리 해치워야 한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궤짝을 열어 그녀를 욱여넣었다.

 걸쇠를 걸기 전, 그게 말을 하기는 했다. 어머니의 목소리로 울면서 애원하였다. 알렉스는 듣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사태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 아버지는 짤막하게 한 마디만을 전했다. “잘했다.” 그는 그게 구울의 짓이라고 나중에 설명해주었다. “구울이라는 것은, 사막에서 살던 악마의 자손들이다. 악마가 되고자 했으나 실패한 것들이지. 아랍의 흑마술과 연관이 있을 거라고 추측한단다. 이제 자력으로 구울이 될 수 있는 방법은 기록으로 거의 남아있지 않다. 그들은 낮에는 움직일 수가 없어 짐승의 가죽을 뒤집어쓰거나 다른 모습에 빗대어 살아가야만 하지. 그러나 밤에는 여행객들을 잡아먹고 살았다. 유럽으로 넘어와선 묘지와 폐가에 기생하면서 시체를 파먹었고, 그걸 죽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배를 갈라 불태우는 것뿐이야. 만약 네가 배를 가르면 그게 부탁할 거다. 다시 한 번 자신을 갈라달라고 말이다. 그 때 절대 부탁을 들어주어서는 안 돼. 그건 거꾸로 뒤집어진 십자가와 같은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부활하면 너로서는 도무지 죽일 방법이 없을 거다. 다른 가문을 찾아가 부탁해야 해. 게다가 구울은 교활하고 끈질기지. 손가락만 남아도 움직일 수 있다. 아주 작은 조각이라도 어딘가에 파고들어 숙주를 조종할 수 있는 게 바로 구울이다. 마거릿의 몸에 바로 그 조각이 있다. 네 어머니는 그걸 죽이는데 실패했고, 당장 우리로서는 그녀를 어찌할 방법이 없다. 마거릿의 영혼도 마찬가지다. 몸을 잃은 영혼들이 다 저런 모습을 하는 것은 아니다. 몸을 절대 빼앗겨선 안 될 것에게 빼앗겼을 때, 영혼은 저주를 받는다. 처벌을 받는 셈이지. 구울은 주인 있는 육신으로는 초대를 받지 않는 한 들어올 수가 없기 때문이다…….”

 허스트 도로를 따라 간의 카페로 향하는 동안, 알렉스는 몇 가지 가능성에 대하여 생각했다. 소녀의 영혼은 나무토막처럼 뻣뻣했고, 뉴 포레스트 국립공원 울타리 너머에는 불에 타 죽은 짐승의 시체들이 절뚝거리며 돌아다닌다. 그리고 말들의 복부에는 갈라진 상흔이 있었다. 알렉스는 그들을 다시 갈라서 모조리 불태웠다. 불꽃은 비명소리를 냈다. 누군가 구울을 죽이려다 실패했다. 그게 누굴까?

 “차가 흔들리는 것 같아.”

 토미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트렁크가 쿵쿵거리는 것 같은데.”

 “착각이겠지. 이야기 좀 끊지 마, 토미.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조랑말들.”

 깁슨이 대답했다.

 “고맙다, 프랑스 운전자야.”

 알렉스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전화로 듣기엔 이상한 문제였어. 동물들은 영혼이 없거든. 그러니까 악령은 아니었지. 게다가 짐승이 좀비가 되는 것도 아주 드문 일이야. 의도적으로 만들지 않는 한 짐승형의 좀비는 존재할 수가 없어. 하지만 내가 알기로, 영국에서 그런 짓을 할 전도유망한 미치광이는 없거든……. 그래서 밤이 되기를 기다렸어. 직접 봐야만 알 것 같았거든.

 노을이 질 무렵부터 짐승들의 움직임이 뜸해지기 시작했어. 그리고 곧 밤이 됐지. 말들이 서서 자더군. 초식동물이 서서 잔다면, 그건 주변에 적이 있어 경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야. 그런데 뉴 포레스트의 평원에는 말을 사냥할 만큼 큰 육식동물이 살지 않아. 관리인이 말하길, 이곳의 말들은 눕거나 앉는 게 익숙하다고 하던데 맹세코 단 한 마리도 그렇지 않더군. 다들 바짝 경계한 채로 서있었고, 쉽게 잠들지 못 했어. 나는 안전벨트를 풀고 적당한 곳에 차를 댄 후, 아주 오래도록 기다렸지. 라디오가 없었으면 지루해서 죽었을 지도 몰라.

 자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 어둠 속에서 한 무리의 그림자가 평원 끝에서부터 울타리를 향해 절뚝거리며 다가오는 게 보였어.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확실히 사람의 키는 아니었지. 그건 확실히 말들이었어. 세 마리 정도 됐지. 아니, 세 마리였어. 차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가는데, 울타리 앞에서부터 악취가 코를 찌르더군. 분뇨 냄새는 아니었어. 정말 끔찍할 정도로 지독해서 코가 떨어져나갈 것 같았어. 비가 오면 젖은 흙냄새가 피어오르지만 그 땐 정말이지, 그 냄새 외에는 맡을 수가 없더군.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야 그 악취의 원인을 알 수 있었지.

 정말 그 말들은 죽어있더군. 갈기는 불에 모조리 타서 거의 심지만 남아있었고, 가죽은 오그라들어서 등판에 쪼글쪼글하게 들러붙어있었어. 피부가 떨어져나간 살갗은 새빨갛게 드러나 있고, 불에 그을린 부분은 어두운 분홍색으로 번들거렸어. 한 놈은 점박이 무늬가 있었던 건지 엉덩이 부분만 색이 달랐는데, 거긴 자주색으로 썩어가고 있던 게 기억나. 그리고 그것들의 배는……. 배가, 찢어진 것도 아니고 아주 깔끔하게 갈라져 있었는데, 분명 누군가 고의적으로 갈라버린 거였어. 장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새까만 조직들이 부패해가고 있었고, 그 속에는 벌레가 들끓고 있었어. 움직일 때마다 주렁주렁 붙은 그 벌레고치와 썩은 조직들이 흔들거렸는데, 이따금 바닥으로 누런 진물이 뚝 뚝 떨어져 썩은 내를 풍기더군. 그 말들은……. 마지못해 움직임을 종용당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어. 나 같아도 할 수만 있다면 더는 움직이지 않고 바닥에 처박혀 마저 썩어가고 싶었을 거야. 제 때 대지로 돌아가지 못 한 것에 용서를 구하면서……. 지금이라도 영원히 잠들 수 있음에 감사했겠지.

 난 그 말들을 살려내거나 죽인 적이 없는 인간이었기 때문에, 그놈들의 배를 다시 한 번 갈라주었어. 말들은 목구멍으로부터 끓어오르는 소리를 내면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픽픽 쓰러졌지. 반항을 하거나 달려들지는 않았어. 말했지만 그 어떤 의지도 상실한 몸뚱이였거든. 그놈들을 움직이게 종용하던 것들도 더는 그 불쌍한 짐승들의 몸에 미련이 가지지 못 했을 거야.

 난 한 마리씩 남김없이 태웠어. 마지막 한 마리를 태울 때, 그건 바닥에 목을 꺾은 채 주둥이를 위로 쳐들고 누워있었지. 가까이 다가가자 그게 눈동자만 굴려서 나를 바라보더군. 찌그러진 동공에는 구멍이 나있었는데, 눈동자가 움직이는 바람에 거기서 검은 국물이 흘러내렸어. 그래서 꼭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더라… 장난 아니게 역겨웠지만 불쌍한 마음이 든 건 순전 그 때문이었어. 그 때, 그게 입을 벌려서 말을 했지. 그건 짐승소리가 아니라 인간의 목소리처럼 들렸어. ‘아에에에…….’ 말의 입술 사이로 언뜻 보이는 이빨이 꼭 인간의 어금니처럼 보였어. 그건 계속 울부짖었어. ‘아에에에……. 아에에에…….’ 목구멍으로부터 뭔가 솟아오르고 있었고, 장담컨대 가래나 진물이었을 것이고, 공기가 들락거리는 바람에 끓기 시작한 것 같았고, 그래서인지 그 소리는 더욱 기괴해졌어. 마지막엔 입을 오물거려서 무슨 말인가를 했지. 발음이 불분명해서 잘 알아듣지는 못 했어. 하지만 아마 이렇게 말하려고 했을 거야. ‘제발 다시 한 번 갈라줘.’

 프랑스 놈, 너 이름이 뭐랬지? 그런 말을 하는 존재가 뭔지 너는 알고 있지?”

 “그래.”

 깁슨이 대답했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걸 막을 수가 없어.”

 그들은 밀퍼드에 도착했고 A13도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트렁크의 소녀가 날뛰기 시작해서 차체가 통째로 마구 흔들렸다. 토미의 얼굴이 더욱 창백해졌다.

 “차가 흔들리고 있어.”

 토미가 헐떡였다.

 “깁슨?”

 “꺼내달라고 했잖아!!!”

 쾅쾅쾅.

 “괜찮아, 토미. 별 일 아니야.”

 깁슨이 대답했다.

 “차를 세워.”

 알렉스가 말했다.

 랜드로버는 갓길에 멈추어 섰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고 있었다. 코트 깃을 올리는 게 아무 짝에 쓸모가 없었다. 알렉스는 뻣뻣하게 굳은 채 앉아 있는 토미를 백미러로 내다보면서 깁슨에게 명령했다.

 “쟤가 이 이상 듣지 못 하게 해.”

 “내가 뭘 듣지 못 하는데?”

 토미는 백미러로 알렉스와 시선을 맞추면서 깁슨에게 물었다.

 “네가 늘 듣지 못 하던 것들.”

 깁슨이 대답했다.

 “이번에는 네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야?”

 토미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응. 토미, 나는 할 수 없어.”

 깁슨이 작게 중얼거렸는데, 죄책감으로 가득 차있었다.

 “이 친구는 뭔가를 죽일 수는 없어, 토미.”

 알렉스가 코트 속에서 지포라이터를 꺼냈다. 라이터는 거의 알렉스의 손바닥만 했다. 은으로 만들어져서 묵직했고, 십자가를 둘러싼 가시나무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었다. 알렉스가 그것을 엄지로 밀어서 열자, 둔중한 철컥 소리가 났다. 그는 몸을 돌려 토미를 마주보았다. 그리고 라이터에 불을 올렸다. 주변이 환해져서 토미도 알렉스의 손에 들린 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유감스럽게도 난 총으로 누굴 협박하는 깡패는 아니거든.”

 알렉스가 씩 웃었다. 토미는 잠시 입을 다문 채 앉아있었다.

 “너도… 깁슨이랑 비슷한 사람이야?”

 갑자기 트렁크에서 짐승같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작은 주먹이 트렁크를 미친 듯이 두들겨대기 시작했다. 차는 마치 춤추는 것처럼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아니, 저 친구는 사람이 아니잖아.”

 알렉스는 지포라이터를 닫았다.

 “난 사람이고, 사냥꾼에 가깝지.”

 차가 다시 어둠 속에 휩싸이자 모든 소리가 더욱 크게 다가왔다. 토미는 아무 것도 듣지 못 한 채 앉아 있었지만, 듣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을 것이다. 알렉스가 손가락으로 토미와 깁슨을 차례로 가리켰다.

 “넌 내리지 말고, 너는 내가 부르면 내려.”

 트렁크는 이미 솟아오른 모양새로 찌그러져 있었다. 뚜껑을 열기 전, 알렉스는 덜컹거리는 차안에 앉아 헐떡이는 토미의 뒤통수를 곁눈질로 확인했다. 백미러로 그를 내다보던 깁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알렉스가 능숙하게 잡아채지 못 했더라면 목을 물어 뜯겼을 것이다. 한 손으로 목을 붙잡고 트렁크 바닥으로 처박자 차체가 충격을 받아 통째로 출렁거렸다. 알렉스는 나머지 손으로 소녀의 대가리를 짓눌렀다.

 “안 돼.”

 소녀가 그륵거리는 쇳소리를 냈다.

 “안 돼, 안 돼, 안 돼.”

 소녀의 몸은 뱃머리에 던져진 생선처럼 거칠게 꿈틀거렸다. 알렉스의 손목을 할퀴고 때리며 비명을 질러댔다. 이따금 작은 나뭇가지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는데, 알렉스는 꽤 나중에야 그것이 손톱이 꺾어나가는 소리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들은 부패한 손가락에 너무 오래도록 헐겁게 매달려 있던 나머지 충분히 공격하거나 위협할 수가 없었다. 소녀의 목은 미끌미끌해서 계속 붙잡고 있기가 몹시 힘들었다. 피부조직이 기름진 생선껍질처럼 누렇게 벗겨져 손바닥 곳곳에 들러붙고 있었다. 알렉스는 역겨움에 신음하면서도 결코 놓지 않았고,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마침내, 소녀의 얼굴가죽 너머로 어떤 벌레 같은 것이 아래쪽에서부터 빠른 속도로 기어 올라왔다. 소녀가 입을 달싹거리며 어떤 말이든 하고자 애썼다.

 “아에에에엑…….”

 그러나 그 벌레는 멈추지 않고 피부를 뚫을 기세로 눈구멍을 향하여 전진했다. 바로 다음 순간, 왼쪽 동공을 뚫고 무언가 솟구쳐 올랐다. 바싹 마른, 길고 쭈글쭈글한 갈색 손가락이었다.

 바로 구울의 조각이었다.

 “알렉산더!!!”

 시체가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부르르 떨더니 축 늘어졌다.

 손가락은 곧장 알렉스를 향해 튕겨져 올라왔다. 그는 거의 놓칠 뻔 했고, 눈앞에서 간신히 그걸 붙잡을 수 있었다. 그게 몸을 뒤틀면서 끽끽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것은 알렉스를 원하고 있었다.

 그렇게 되기 전에, 알렉스가 재빨리 지포라이터를 열었다. 손가락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가 웅덩이 위로 떨어졌다. 알렉스는 한 발짝 물러나 손가락이 꺼지지 않는 화마 속에서 죽어가는 걸 끝까지 지켜보았다. 잠시 후, 그것이 마지막 힘을 다해 꿈틀거리다가, 머리를 처박고 웅덩이 속으로 쓰러졌다. 그리고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서쪽에서부터 느닷없이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알렉스는 차에 기댄 채 바람이 불어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비 내리는 한밤의 풍경이 제대로 보일 리는 만무했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 가려져 인영만 드문드문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그 덩어리들을 뚫고, 아주 희미한 등불 같은 것이 수백 마일 떨어진 곳에서 불쑥 나타났다.

 알렉스가 차를 두들겼다.

 “이제 네가 할 일이 생긴 것 같은데 좀 나오지.”

 깁슨은 기다렸던 것처럼 튀어나왔다. 그들은 거리를 두고 서서 서쪽으로부터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오는 하얀 불꽃같은 것을 지켜보았다. 그것은 라일리로, 몇 백 마일이나 떨어진 뉴 포레스트에서 밀퍼드까지 양 옆구리에 손을 붙인 채 뻣뻣하게 굳은 그 상태 그대로 자신의 몸을 향해 날아오고 있는 것이었다. 그녀는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내 생각엔 쟤가 천국행 티켓을 끊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알렉스가 깁슨을 흘끔거렸다.

 “가능하다면 끊어서 보내주는 편이 좋겠지.”

 “나는 원칙대로 수행할 뿐이야.”

 깁슨이 대답했다.

 알렉스는 트렁크에 반쯤 걸친 채 늘어진 라일리의 시체를 훑어보다 말고 원하는 걸 발견했다. 그건 작은 칼이었고, 대체 라일리가 어디서 그런 걸 얻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건 라일리의 것이었다. 알렉스는 칼을 슬그머니 빼내어 뒷짐을 졌다.

 라일리의 영혼이 랜드로버에 도달했을 때, 알렉스와 깁슨은 마치 트렁크의 문지기 마냥 양쪽에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 라일리.”

 알렉스가 인사했다.

 “안녕, 스튜어트.”

 라일리가 검은 이를 드러내며 즐겁게 웃었다.

 “옆은 누구야?”

 “티켓 끊어주실 분.”

 “오, 천사구나.”

 라일리가 낄낄거렸다.

 “유감스럽게도 난 필요 없어. 안 가.”

 “널 지옥에 보내지는 않을 거야.”

 깁슨이 말했다.

 “지옥에 가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라일리가 대꾸했다.

 “어서 비켜달라고, 너희 둘 다! 내 길을 막고 있잖아!”

 그런 후, 라일리는 곧장 자신의 몸속으로 뛰어들었다. 알렉스가 당황한 눈으로 깁슨을 바라보았는데, 깁슨 역시 마찬가지였다.

 “쟤가 지금 뭘 한 거야?”

 알렉스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말했다.

 라일리의 시체가 휘청거리면서 일어났다. 그건 중심을 제대로 잡지 못 해서 좌우로 흔들렸는데, 라일리가 번쩍 고개를 쳐든 순간 구멍 난 왼쪽 눈동자로부터 줄줄 검은 국물이 샜다. 라일리는 얼굴을 찡그리며 피부가 벗겨진 손바닥으로 눈 주변을 더듬었다.

 “정말 훌륭한 모양새가 됐구나, 라일리. 그 몸으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놀랍다.”

 알렉스가 빈정거렸다.

 “거기서 나와, 라일리. 이런 식이면 이 천사놈도 널 어떻게 해줄 수가 없단 말이야. 우린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어. 네가 빌어먹을 구울과 거래를 했다는 것 정도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고. 정말 어리석은 짓을 했구나, 라일리. 정말 어리석었어.”

 “어쨌든 내가 이겼잖아.”

 라일리가 쇳소리를 내며 딱딱거렸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어마어마한 악취가 솟았다.

 “그건 네가 이긴 게 아니라 운이 좋았던 거지.”

 알렉스가 고쳐주었다.

 “구울에게 일단 몸을 넘겨주면 끝이야. 무슨 수를 써도 이길 수 없다고. 무슨 생각으로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야?”

 “난 죽은 지 고작 삼일밖에 안 됐어.”

 라일리는 으르렁거렸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살아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어! 난 아직 다 썩지도 않았고, 아직 신선한(…fresh) 상태였다고.”

 “네가 무슨 신선식품 같은 건줄 알아? 죽으면 끝이야, 라일리. 그냥 끝난 거야. 그게 네게 어떤 감언이설을 한다한들 네가 살아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 넌 그냥 네 시체를 구울에게 넘겨준 거야. 칼을 쓴 건 영리한 일이긴 했지만… 아니, 영리한 일도 아니지. 시체 주제에 그걸 완벽하게 해낼 수도 없었을 테니까. 덕분에 난 네가 처리 실패한 구울 조각들 수습한다고 밤새 국립공원이나 뛰어다녀야 했거든. 네 몸뚱이 제 때 못 찾았으면 저 뒷좌석에 앉은 불쌍한 토미도 뒤졌을 거야. 너 쟤가 어떤 상태인지 보여?”

 라일리는 관심 없다는 것처럼 다리를 흔들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몰라, 그냥 맛있는 냄새가 나는데.”

 “바로 그게 문제야, 라일리. 네 몸은 이제 썩 정상적인 시체도 아니고, 구원받을 수도 없는 영혼이 들어가 있고, 죽지도 않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거라고도 볼 수 없어.”

 “그건 쟤도 마찬가지인 것 같은데.”

 “토미는 시체가 아니거든. 너랑 달라.”

 알렉스가 짜증을 냈다.

 “어쨌든 넌 운이 좋은 편이야. 널 어떻게든 해줄 놈이 여기 있으니까. 그러니까 현명한 선택하고 광명을 찾자고. 오케이?”

 “No.”

 라일리가 단호하게 말했다.

 “난 집에 갈 거야.”

 “그 꼴로?”

 “멀리서 지켜만 볼 거야.”

 그렇게 말할 때, 라일리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나도… 내 꼴이 어떤지는 알아!”

 라일리는 트렁크에서 뛰어내렸다. 그러자 눈동자로부터 후두둑 검은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녀는 엉거주춤 두 팔을 벌리고 비틀거리며 중심을 잡다가, 알렉스 앞에 똑바로 섰다. 라일리의 키는 알렉스의 허리까지 왔다. 그녀가 알렉스를 올려다보자, 뺨을 타고 그 검은 국물이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제발!”

 라일리가 말했다.

 알렉스는 깁슨을 바라보았고, 깁슨은 그저 어깨를 으쓱였다. 그로서도 당장 뭘 어찌할 도리는 없다는 소리였다. 알렉스는 다시 라일리를 바라보았다.

 “…좋아! 알아서 해.”

 라일리가 환호성을 질렀다. 그녀는 두 팔을 벌려 알렉스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알렉스는 기겁하며 두 손을 들었는데, 그녀를 밀쳐내지는 못 한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라일리의 몸 상태가 지독했으므로 조금이라도 만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잠시 후, 라일리가 천천히 물러났다. 알렉스는 떨떠름하게 자신의 코트에 묻은 검고 묽은 액체를 내려다보았다.

 “그래… 이제 가 봐.”

 “약속을 너무 오래 묵혀 두지는 마.”

 라일리의 왼쪽 눈동자가 폭삭 찌그러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뻗어 그걸 제대로 맞춰보려고 애쓰다가, 이내 포기하곤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면 애꾸눈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시키던가.”

 “알겠으니까 빨리 꺼져.”

 알렉스가 악취 때문에 얼굴을 찡그렸다.

 라일리는 갓길의 가드레일을 넘어 겅중겅중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는 마구 꺾인 풀과 진흙발자국만이 남았다. 빗줄기가 잦아들고 있었다.

 둘이 차로 돌아왔을 때, 토미는 뒷좌석 유리창에 붙어 바깥을 내다보고 있었다.

 “끝났어?”

 토미는 이런 일들이 익숙한 사람처럼 물었다.

 “그래, 다 끝났어, 토미.”

 깁슨이 대답했다.

 “네가 한 거야?”

 토미가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래, 내가 한 거야.”

 알렉스는 피곤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너희 윈체스터로 간다고 했지?”

 “그런데?”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따라가려고?”

 “이왕 가는 거 날 태워주면 좋지.”

 알렉스가 말했다.

 “너희가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닐 걸.”

 “네가 뭔지도 모르는데?”

 “일단 난 사람이고 악마는 아니야.”

 알렉스가 킬킬거렸다.

 “그리고 유령이나 괴물 같은 걸 죽이지.”

 “악마는?”

 “악마는 죽일 수 없어, 토미.”

 “깁슨은 죽였어.”

 “그래, 깁슨은 가능할 거야.”

 알렉스가 귀찮은 듯이 대꾸했다.

 “어쨌든 같이 가자고. 그리고 가는 내내 너희도 나에게 설명을 좀 해줘야 할 거야. 나도 너희가 대체 뭘 하는 놈들인지 모르겠단 말이지.”

 깁슨은 대답 없이 시동을 걸었고, 토미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둘 다 그에게 내리라는 소리는 하지 않았으므로, 알렉스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차가 천천히 갓길을 벗어났고, 셋은 또다시 침묵 속에 놓이게 되었다. 마침내 알렉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는 이야기를 시작했다. 버크셔에 있는 여름 별장에 대해서. 스튜어트 가문이 오래 전부터 이어온 가업과 평생의 사업에 대해서. 다락과 궤짝에 대해서. 그의 어머니에 대해서…….

 랜드로버가 햄프셔를 벗어나는 동안, 알렉스 스튜어트는 내내 떠들어댔고, 그건 순전히 말수가 적은 두 동행자 때문이었다. 아주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실제 그랬다. 이 만남을 시작으로 그들은 거의 반 년 간 영국 곳곳을 누비게 된다.

 이제 나는 이 셋의 수상한 유랑기에 대해 적어볼까 한다.

 

 -

 영안은 없는데 귀신과 크리쳐가 잘 꼬이는 토미, 수수께끼 프랑스인 깁슨, 엑소시스트 집안 막내 알렉스라는 설정으로 쓴 것. 사실 세부적인 설정은 다 짜놨는데 고어+호러물을 한 번도 써본 적이 없어서 이 글을 쓰는데만 해도 엄청난 시간이 걸렸고.. 결과적으로 다신 꺼내보지 않았다. ㅋㅋㅋㅋㅋㅋ 호러물 잘쓰는 사람을 정말 부럽다...

 

 글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글의 기반이 된 개인적인 설정을 주절주절 풀어보자면, 토미 일가는 아빠가 부정하게 들여온 골동품에 악마가 깃들어 있던 바람에 저주를 받아 몰살 당했음. 그때 토미는 한 번 지옥불에 떨어진다... 뒤늦게 천사가 강림했는데 그게 깁슨임. 애초에 골동품 자체가 좀 문제가 많았음. 사람을 몇백명 죽인 사형도구 비슷한 거 ㅇㅇ 토미 부모님은 그 모든 사실을 알고서도 모종의 이유로 이 도구를 들여온다고 애를 많이 쓴 사람들인지라 죄가 많아서 깁슨은 토미의 부모를 구원해줄 수는 없었고, 어린 토미만 지옥불에서 꺼내온다. 결과적으로 토미는 한 번 죽었다가 사흘만에 부활한 몸이 된 것이다.

 사흘.. 그 뒤로 토미에게는 악령이며 온갖 크리쳐가 꼬이는데 토미한테서 성물의 냄새가 나서임. 사흘 만에 부활한 사람 중 가장 유명하신 분, 그러하다 예수 때문이다. 깁슨은 토미가 본래 살아야 했던 수명을 다할 때까진 토미 곁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함. 그래서 인간의 모습으로 토미와 함께 돌아다니기 시작했음 > 이 상태에서 알렉스 만남 (글의 시점은 여기)

 깁슨은 징벌의 천사인데, 그가 지옥불을 뚫고 강림했을 때 토미는 깁슨과 딜을 했음. 부모님의 죄를 덜어달라는 부탁이었는데, 천국으로 보낼 수는 없지만 죄를 덜어서 지옥에서 꺼내달라는 그런 딜이었음. 어차피 그래봤자 림보(천국과 지옥 사이에 놓인 연옥의 세계)에 떨어지는 것밖엔 안 되겠지만.. 그래서 토미는 부활한 후에 부모의 원죄를 뒤집어쓰고 일생동안 죄악의 존재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됐음. 토미의 체질을 그대로 두는 것도, 토미의 고통을 관전하는 것도 깁슨의 할 일인 것이다. 토미를 보호하는 건 토미가 부모의 원죄를 덜기 전에 죽어버리면 안 되기 때문이고, 죽어서 징벌을 제대로 받지 못 하면 안 되기 때문이다. 애초에 토미가 딜할 거 알고 신이 징벌의 천사를 보내준 것이기도 함 ㅇㅇ 깁슨은 그래도 애가 어리고 자길 잘 따르니까 금방 정이 들었는데 토미가 룰에서 어긋나는 순간에는 본모습으로 돌아가서 매섭게 몰아붙이기도 한다는 그런 설정임. 애초에 그건 깁슨 의지라기보다 신의 명령에 따른 천사의 모습인 거겠지만.

 알렉스는 엑소시스트로 유명한 집안의 막내 아들이고, 엄마는 구울 때문에 죽었음. 돌아다니면서 엑소시즘을 하며 살고 있는 초짜(but 그 집안 사람들이 그렇듯 천재)엑소시스트인데 도중에 깁슨이랑 토미를 만나서 벌어지게 되는 그런.. 삼류.. 오컬트 소설이었다.

20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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