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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haircsis «11-13»
1차/old 2019. 10. 8. 19:12

 나는 열한 살쯤 어른이 된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이불을 걷었더니 거시기에 털이 나있었다. 빨랐던 건가? 남들에게 거시기 털이 몇 살쯤 났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영영 알 수가 없을 테다.

 그 해 겨울에는 원인 모를 병이 돌아서 거리의 많은 거지들이 죽었는데, 나의 스승 이곤도 거지였다. 그의 시체가 열흘 동안 골목 구석에 누워있었다. 열흘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를 수레에서 찾았다. 마침 시체를 쌓으러 가는 길인데, 아는 사람이냐고 수레지기가 물어보았다. 나는 그 놈의 다리를 힘껏 걷어 차주었다.

 그의 몸이 기억난다.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잘 때 왼쪽으로 웅크리고 자는 버릇이 있는데, 이곤은 자는 게 아니라 죽은 것이다. 그것의 차이는 간단하다. 나의 이마는 잘 때마다 모락모락 열이 피어오르는데, 죽은 이곤의 이마는 딱딱하고 차갑다. 그의 눈을 감겨줄 때, 이마를 만져보았다가 그 온도에 깜짝 놀랐다. 그 전까지 나는 시체를 가까이서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마흔한 살 먹은 장성을 업고 언덕을 오르는 일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 혼자 걸을 땐 금방인데, 등에 시체를 지고 있으니 세 배는 더 걸렸다. 죽은 스승이 나의 등에서 어린 아이처럼 늘어졌다. 오르막을 오르는 내내 등 뒤에서 질질 발 끌리는 소리를 들었다. 언덕에 도착하고 나서 이곤의 왼발에 신겨져 있던 구두가 사라졌음을 알았지만, 되돌아 갈 힘이 없어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돌아올 때 찾아보았는데, 못 찾았다. 아무래도 누가 가져간 것 같다. 어쨌든 난 그를 바다가 보이는 높은 언덕에 묻었다. 이곤의 영혼은 이베르타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베르타에서 죽었으므로, 그가 축복을 받았다면 에온과 같이 있을 것인데, 구두가 한 짝뿐이니 내내 깽깽이 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조금 눈물이 났고, 이곤에게 미안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열한 살 겨울에 영영 지울 수 없는 마음의 빚이 생기고 만 것이다.

 열두 살에는 항구에서 제일가는 무법자가 되었다. 남자애들이고 여자애들이고 할 것 없이 내 막대기 앞에서 바짝 쫄아 꽁무니를 빼기 바빴다. 스승을 잃었지만 나는 무사하였다. 계속해서 싸우고 지배하고 정복하고 또 자비를 베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쨌거나 나는 인생에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열두 살 가을 무렵에는 말이 필요해서 트리아즈 상단을 습격했다. 거기서 쫓겨나는 대신, 나는 유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유리아는 트리아즈 상단주였고,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었는데 때마침 내가 나타나 기분이 퍽 유쾌해보였다. 유리아는 말을 거저 주는 대신 몇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나는 그것을 내기로 이해하였다. 이겼는지 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이겼을 것이다. 유리아는 나에게 말을 고를 기회를 주었고, 나는 당나귀를 골랐다. 나는 나의 당나귀에게 과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열세 살에 나는, 단단하고 낡은 나무작대와 튼튼하고 어린 당나귀가 있었고,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나의 스승이 묻힌 바로 그 장소에서, 종종 엉덩이를 깔고 먼 바다를 보았다.

 나는 바람이 결을 나누는 곳을 보았다.
 나는 배가 떠나고 돌아오는 곳을 보았다.
 나는 이단자들의 무덤을 보았다.

 
 그 무덤은 나의 스승을 묻은 곳처럼 판판하고 반듯하지 않았다. 필시 시체가 너무 많은 탓일 테지. 시체가 많은 구덩이는 아무리 다져도 판판해질 수가 없지. 무엇으로 가득 찼다면 반드시 부풀어 오를 테지. 요컨대 저 바다도 분명 부풀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바다는 판판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세상에 끝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갈 수 있을 때까지는 가봐야지. 열세 살의 나는 마침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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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30-0.»
1차/old 2019. 10. 8. 19:07

 0.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 7:24)

 

 1.

 월초에 돈이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들어오긴 했지만, 합치면 총 50만원이다.

 통유리로 된 자동화기기 건물 안은 에어컨 고장으로 찜통이었다. 삼신은 ATM 기기에서 돈을 꺼내 흰 봉투에 넣곤 곧장 체크카드를 잡아 뺐다.

 밖은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매미가 드문드문 울었다. 삼신은 가로수 그림자 안으로 걸었다. 초여름이구나. 방학 전에 목표를 이뤄서 다행이야. 삼신은 자신의 샌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차도 쪽으로 버스 두 대가 빠르게 지나갔다.

 삼신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돈을 벌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동네 학원 몇 군데에서 시험지와 영어 독서록을 받아와 채점하는 일이었다. 모의고사 혹은 내신 점수가 수강생 전체의 0.5%에 들면 과목 당 10만원을 주는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서 돈을 벌기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30만원이고 40만원이고 벌 수 있다는 사실은 삼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 삼신은 290만원을 모았고, 고등학교 2학년 첫 고사 기간을 거친 후 340만원을 모았다. 300만원이 모이면 적금을 들어 대학 등록금으로 쓰고자 했는데, 40만원이나 더 번 셈이다.

 ‘부자가 된 기분이야…….’

 삼신은 신호등에 기댄 채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내가 부자였던 적이 있었나? 하지만 삼신은 좀 전까지 ATM 기기 액정에 찍힌 액수를 보고 오는 길이었고, 날은 무더워지기 시작했으며, 꿈은 아니었다. 갑자기 삼신은 하늘로 붕 떠오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만약 인간에게 날개가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기분이 좋은 탓에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40만원은 금란이 학원 비로 보태 쓰라고 하자.’

 삼신은 어젯밤 금란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소릴 들었다. “은주야…….” 그 애는 행여나 부모님이 깰까봐 숨을 죽이면서도 끄윽끄윽 울음을 멈추지 못 했다. “내 친구들 중에서 나만 학원을 안 다녀 걔넨 나 없이 단톡도 만들었어. 이런 거 왕따라고 하는 거지?” 금란은 자존심도 세고 욕심도 많고 물욕도 많고 외로움도 많이 탔다. 그 탓에 삼신과 자주 부딪치고 싸웠다. 금란은 삼신을 가장 많이 닮았고, 가장 삼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이었다.

 삼신의 눈앞으로 버스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우리 집에 좀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모난 성격이 되진 않았을 텐데.’

 사거리는 신호가 길었다.

 많은 걸 포기한 사람은 둘로 나뉜다. 죽거나 죽여 버린다. 그리고 두 선택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떼를 쓰던 금란의 눈은 필사적으로 죽여 버릴 것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무언가를 죽여야만 할 때가 오면 그 애는 이불로 숨어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런 거 왕따라고 하는 거지…….” 어젯밤 금란의 울음소리는 꼭 항복 선언처럼 들렸다. 한 달 학원 비는 바이올린의 그것보다 못 해도 10만원은 더 불러야 했고, 목욕탕 단골도 줄어든 마당에 부모님이 그걸 보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금란은 떼를 써서 될 일과 그럼에도 되지 않을 일을 정말 잘 구분하는 아이였다 항상 그랬다. 금란은 언젠가의 삼신이 그랬듯이 학원가를 서성이며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봐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가난뱅이라서 정말 싫어.’

 금란은 그 말을 끝으로 울음을 그치고 입을 다물었다. 은주가 금란을 껴안았다. 잠들지 못 한 삼신은 어둠 속에서 둘을 바라보았다. 살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삼신은 금란이 부모님의 마음을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 종종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부터는 쉬운 일이 될 테니까. 가난은 칼자루 없는 칼이고, 어느 쪽으로 쥐던 결과는 같으니까.

 ‘그 애는 나처럼 살면 안 돼.’

 걘 이렇게 못 살아. 삼신은 바닥을 봤다. 마구 헤진 낡은 가죽 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야. 난 장녀니까.’

 마음을 정했다. 40만원은 부모님께 드리자. 금란의 학원 비로 써달라고 슬쩍 언질을 주면 두 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 돈이면 첫 달은 어떻게든 되겠지.

 삼신은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주머니 안쪽에 구겨 넣은 흰 봉투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340만원 어치의 무게는 실로 그러했다.

 

 2.

 이번 달부터는 하복을 입었다. 교칙이 바뀌고 아이들의 옷차림은 한결 가벼워졌다. 삼신은 거울 앞에 서서 하복 와이셔츠 단추를 잠가봤다. 작년에도 가슴이 좀 꼈는데 올해도 여전했다. 체중은 작년보다 3kg가 늘었고, 삼신은 그 살이 다 팔뚝에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삼신은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거울 앞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아봤다. 치마는 좀 더 짧아졌고(키가 컸기 때문이다) 가슴이 좀 커보였고(좋은 일인 진 모르겠다) 머리가 미묘하게 길어졌다(늘 그렇듯이). 그것 외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가디건 덕분에 늘어난 살집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대신 숨쉬기가 답답했다. 삼신은 와이셔츠를 위로 말아 올렸다. 브레지어 끈에 눌린 살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땀으로 습한 가슴 사이가 찝찝했다. 삼신은 부어오른 가슴 안쪽으로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와이어를 당겼다.

 ‘속옷도 새로 사야겠구나.’

 남은 300만원에서 3만원을 제한다고 당장 큰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적금을 들고 오는 길엔 매장에 들러 새 속옷을 사자. 두 개 정도의 여유분을 사야 빨래할 때 곤란하지 않겠지. 삼신은 속으로 계산해봤다. 10만원만 빼놓을까. 그 정도면 살 수 있으려나. 빈 금액은 다음 달에 더 열심히 벌어서 채워 넣으면 된다. 340만원도 벌었는데 못할 게 뭐가 있으랴.

 삼신은 걷어 올렸던 와이셔츠를 내리고 양말을 바로 신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곤 화장대 앞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하얀 봉투, 삼신의 자부심, 그녀의 340만원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삼신은 봉투 하나를 더 꺼내 40만원을 나누어 넣었다. 그리곤 300만원 봉투를 서랍 아래쪽에 넣고, 40만원을 서랍 맨 위에 얹어놓았다.

 “누나, 뭐야?”

 동래가 이불 위를 뒹굴다 말고 물었다. 삼신은 건성으로 니네 누나 학원 비.”라고 대답했다. 동래는 이불을 더 뒹굴다 말고 잠이 들었다. 삼신은 그 애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곤 밖으로 나왔다. 금란이 문 앞에 멀뚱히 서있었다.

 삼신이 팔짱을 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내 학원 비야?”

 금란은 삼신만큼이나 눈치가 빨랐다.

 삼신은 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

 금란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삶을 발견한 눈빛은 아름답구나, 라고 삼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큰돈은 아니야.  40만원이거든. 대신 열심히 다녀야 돼. 한 달 다녀보고 결정하는 거야.”

 “.”

 “별로 할 마음이 안 들면 깔끔하게 그만두는 거야.”

 “.”

 “나랑 약속해.”

 금란이 갑자기 와락 삼신을 껴안았다. 삼신은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약속할게.”

 삼신은 가슴팍이 조금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금란이 말했다.

 “언니 사랑해.”

 삼신은 엉거주춤 들었던 손으로 금란의 등을 감쌌다.

 “나도 알아.”

 문 너머에서 동래가 이불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삼신은 금란이 자길 놓아줄 때까지 얌전히 서있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괜찮은 선택지를 발견한 품은 억세고 충만했다. 금란은 오래도록 삼신을 놓지 않았다. 40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품이구나, 라고 삼신은 그 애에게 안겨진 채로 오래오래 생각했다.

 

 3.

 그 다음 날, 삼신은 교무실을 나오다 말고 G를 마주쳤다. 삼신은 G를 보지 못 했지만 G는 삼신을 발견했고, 삼신의 포니테일을 아래로 훅 잡아당겼다. 삼신은 너무 놀라서 휘청거리다 말고 주저앉을 뻔했다. G는 삼신의 어깨를 붙잡고 제 쪽으로 돌렸다.

 “!”

 G는 놀란 삼신의 얼굴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왜 모르는 척 해! 키 많이 컸네!”

 “!…….”

 삼신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 하고 G를 바라보았다.

 “유학가신 줄 알았는데.”

 “갔다가 삼 개월 만에 때려 치고 돌아옴.”

 G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찡그렸다.

 “보고 싶었지?”

 삼신은 바닥을 봤다.

 “선배가 절 보고 싶으셨겠죠.”

 G는 이번에도 박장대소했다.

 “, 맞아.”

 그리곤 삼신의 정수리를 마구 헝클었다. 삼신의 앞머리와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삼신은 G의 손을 쳐내곤 뒤로 물러났다. G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었다.

 “교무실은 왜? 또 사고 쳤어? 우리 신이는 중딩 때랑 달라진 게 없구나.”

 “아니에요.”

 삼신은 변명했다. 변명이 아니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모의고사 때문에 그래요.”

 “1등해서?”

 “우리 학년 중엔 제일 잘 봤대요.”

 삼신은 어쩐지 자신이 자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고, 자신이 어린 애가 된 것 같다고 느꼈고, 그래서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G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삼신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우리 씬이는 공부의 천재야.”

 예비종이 쳤다. G는 고개를 들고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를 바라봤다.

 “난 갈게. 나중에 보자.”

 그림자 속에서 G는 손을 흔들었다.

 삼신은 가만히 서서 G의 뒤통수가 복도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물소 떼처럼 삼신 옆을 우르르 스쳐지나갔다. 삼신은 G가 사라진 복도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키 더 크셨네…….’

 주변은 조용했다. 삼신은 천천히 머리를 풀었다. 어깨를 넘어 가슴께까지 부드럽게 늘어진 머리카락에서 샴푸냄새가 났다. 손가락으로 빗질을 했지만 헝클어진 잔머리를 돌려놓기란 쉽지 않았다. 삼신은 힘주어 빗었다. 그리곤 다시 머리카락을 묶었다. 더 높고 더 빡빡하게. 그러자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삼신은 손을 벌려 자신을 안아보았다.

 ‘가디건 입길 잘했다…….’

 수업종이 쳤다.

 

 4.

 삼신이 다니던 중학교엔 전교에서 가장 인기 없는 교사가 있었다. 50대의 미혼인보수적인 남성 교사였다비쩍 말라 송곳 같은 인상이었는데당시엔 학생 인권조례니 뭐니 시끌벅적할 때가 아니라 체벌도 존재했고그는 매로 꼭 효자손을 들고 다녀서애들 사이에선 그 효자손으로 통했다효자 노릇할 자식도 없는데 효자손이 웬 말이냐고하긴그러니까 효자손이라도 들고 다니는 거 아니겠냐고. G는 일이 벌어진 이후에도 오래도록 효자손을 씹고 다녔다.

 어쨌든 효자손이 중학교 2학년 삼신의 반 담임이 됐을 때까지만 해도 삼신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이삼신은 전교에서 제일가는 우등생이었고, 어디서든 예쁨 받았으며, 교사들의 칭찬을 후광처럼 달고 다녔으니까. 요컨대 흠잡을 곳이 없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체벌과는 먼 세계에 있었다.

 하지만 이삼신이 간과한 게 있었으니, 세상엔 마음이 너무 기울어져서 더는 한 인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이야기는 하기도 싫다. 어쨌든 좋은 기억들은 아니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이삼신은 체벌을 겪었다. 그게 다다. 하지만 그게 삼신의 잘못은 아니었다. 반 아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걸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 했다는 점에서, 그 사건은 작은 비극으로 남았다. 이삼신은 금방 그 일을 떨쳐냈지만, 어쨌든 유쾌하지 못 한 일이었단 데에 동의했다.

 “그 사람 별로 좋은 담임은 아니었지.”

 라며 삼신은 후에 유성과 통화하며 깔깔 웃었다.

 “다신 그런 고약한 교사를 만나지 않겠어!”

 유성도 따라 웃었다.

 “그게 마음대로 되냐.”

 “만나면 자퇴해버릴 거야.”

 “, 쎈데.”

 삼신은 이불 위에 엎어진 채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맞아, 방금 말은 너무 세다. 취소, 취소. 중졸은 어디 취직도 힘들겠다.”

 “, 씬이의 가벼운 주둥이가 또 시작 됐나요…….”

 “아아, 유스타 요원, 또 태클 거나요…….”

 이 통화가 아마 중학교 3학년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그 때까진 둘이 주일에 다섯 번 꼴로 통화를 했었다. 가끔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 대화하기도 했다. 아직 삼신이 많이 바빠지기 전이었다. 유성이는 그 때도 여자가 많았다. 여하튼 인기쟁이 소꿉친구였다.

 

 #5.

 점심시간 중학교 교무실. 교사들이 각자의 자리에 착석해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다. 의자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교사와 뒷짐을 지고 얌전히 선 학생이 보인다. 효자손과 삼신이다. 효자손은 다리를 한 쪽 올려 불량한 자세를 취하고, 손에는 가정 실태 조사 프린트(정말 그 따위 이름이었다)가 들려있다. 삼신의 표정은 앵글의 사각지대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효자손 : (조소가 섞인 목소리로) 이삼신이, 부모 잘못 만났네.

 삼신 : (똑 부러지게) 형편이 어려운 게 저희 부모님 잘못은 아니니까요.

 효자손 : 1학년 때부터 지원 받았어?

 삼신 : .

 효자손 : (조소) 니 부모는 애 학교에서 밥 맥일 돈도 없대냐?

 삼신 : (뒷짐 진 손에 힘을 쥐며) 아뇨. 내실 수는 있지만 제가 받겠다고 했어요. 조건이 맞는다면 받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효자손 : (혼잣말 하듯) -단한 효녀 나셨어요. 그래, . (삼신을 위 아래로 훑으며) 보탬은 되겠어? 성적 보니 시집은 잘 가겠네.

 

 이삼신,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삼신 쪽에서 대답이 없자 정적이 흐른다. 잠시 후, 효자손이 쯧, 혀를 찬다.

 

 효자손 : 대학은 뭐, 여대 갈 거냐?

 삼신 : 아뇨, 서울대 갈 거예요. (고기는 역시 비싸려나, 하고 금액 계산 중이다)

 효자손 : (효자손으로 뒷목을 긁으며) 주제에 꿈도 참…….

 삼신 : (능청스럽게) 역시 하버드가 나을까요? 거기도 전액 장학금 제도 있을 텐데. 영어만 좀 잘했으면 좋았을 걸 아까운 것 같아요.

 효자손 : 그런 건 유학 갔다 올 애들한테나 주어진 선택지야, 임마. (삼신의 가슴을 효자손으로 두 번 찌른다) 급식비도 못 내는 애가 뭔 헛소리야.

 삼신 : (효자손의 효자손을 피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어머, 1등해서 전액 장학금 받으면 그만이죠. 여기서도 1등 해봤는데 다른 곳이라고 갑자기 꼴등하진 않을 거 아녜요? 고등학교 가서도 전 1등 할 건데요! (오늘 저녁은 함박 스테이크를 먹어야지. 유성이도 부를까?) 정 뭐하면 선생님이 응원해주시면 되겠네요! 돈을 보태주시진 않을 거 아녜요? (, 함박 스테이크~)

 

 앵글이 뒤로 빠지며 다시 교무실의 풍경이 잡힌다. 두 책상 건너에서 남학생 한 명이 효자손과 삼신 쪽을 보고 있다. G.

 

 6.

 “재밌는 애네!”

 ……라고 생각했지!”

 G는 학생부실을 한 바퀴 돌며 몸짓을 마구 과장했다.

 우리 씬이 간지 철철! 개멋있었죠~ 아주!”

 아니에요.”

 삼신이 창피하다는 듯 부실 책상에 엎어졌다. G는 삼신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마구 웃었다.

 , 이삼신 존나 귀여워. 귀 빨개진 거 봐.”

 강준아 애 좀 그만 놀려라.”

 뭐 어때요?”

 G는 학생부실에 앉은 모두를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내가 구해준 애니까 애착관계를, ? 이제 형성해야지.”

 삼신의 귀 끝이 더욱 빨개졌다.

 

 7.

 G가 양동이 사건으로 유명해진 건 여름 무렵의 일이었다. 교칙 위반도 아닌 치마를 가지고 벌점을 매기기 위해 교정을 달려가던 효자손 머리 위로 물 양동이가 쏟아졌다. 악취가 나는 물이었다. 걸레를 빤 물이라 좀 냄새가 날 거거든요! 누군가 2층 창문에서 박장대소하는 G를 봤다고 진술했다.

 효자손은 노발대발했다. 그리곤 G를 쫓아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삼신은 효자손에게 쫓기다 말고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됐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봤다. G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름 햇살이 따가웠다.

 네가 그 효자손에게 찍혔다는 여자애지?”

 믿을 수 없게도 G는 이층에서 뛰어내렸다. 삼신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무엇인지 그 때 알게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G는 이층 창문 근처의 나뭇가지를 타고 중간까지 내려왔다가 뛰어내린 것이다. 다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은 G를 더욱 기묘하게 만들었다. 삼신은 그 멜랑꼴리한 기분을, ‘운명인가라고 생각했다. G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자 그 기분은 곧 확신이 됐다.

 , 도망치자! 효자손 새끼 분명 나도 너도 잡으러 올 거야!”

 G는 삼신의 손을 쥐고 마구 달렸다. 삼신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질질 끌려갔다. 달리는 동안, 삼신은 땀이 송글송글 맺힌 G의 얼굴과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저렇게 잘생긴 사람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여름 햇살이 마법 같이 느껴졌다.

 

 8.

 내가 구해준 애니까 애착관계를, ? 이제 형성해야지.

 

 9.

 솔직히 삼신은, G가 자길 구해줬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삼신이 G를 좋아했던 건 순전히 그냥 멋있어서였다.

 잘생기고 키 커서.

 원래 사랑의 순간은 단순하다. 적어도 삼신의 역사에선 그랬다.

 하지만 G는 아직도 자신이 그녀를 구해줬기 때문에 삼신이 자길 좋아한다고 믿는다. 비극인가? 아닐 지도…….

 어쨌든 그 이후로 3년이 흘렀고, 삼신은 더는 G를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사랑은 원래 이동하거나 사라지거나 죽어버리는 것. 이삼신은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익숙했다. 그것은 가난이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었다. 아주 유용한…….

 

 10.

 , 내가 뭐라고 하면 겉으론 툴툴거려도 다음 날엔 싹 고쳐서 온다니까! 진짜 귀엽지 않냐.

 근데 왜 나 좋다는 애가 몸매 관리는 못 하지? 그것만 아니면 사귀었을 텐데…….

 

 11.

 G와 거의 1년 만에 조우한 다음 날, 삼신의 고등학교 2학년 내신 등수가 나왔다. 1등은 아니었다. 반에서도 1등은 아니었다. 삼신의 반 1등은 전교에서도 1등이었다. 삼신은 반 3등에 전교 6등을 했다.

 전교 1등하고 점수 차이가 얼마나 나지?’

 삼신은 다른 것에 비해 영어와 국어를 못 했다. 나머진 만점인데 영어와 국어는 꼭 하나씩 틀렸다. 특히 국어는 서술형 점수가 나가서 짜증나는 과목이었다. 서술형 점수는 하나에 6점씩이나 했다. 하나가 틀리면 등수가 훅 밀리는 것이다. 이번엔 부분 점수를 받았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삼신은 국어에서 4점을 빼앗겼다. 전교 등수엔 분명 타격이 컸을 것이다. 영어도 두 문제나 틀렸다. 자신을 쥐어박고 싶었다.

 등급을 놓치진 않았으니까 1등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어…….’

 삼신은 햇살이 내리쬐는 미지근한 나무 책상에 엎어진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열심히 했으니까 1등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바람은 불지 않고, 공기는 더워졌다. 괴담엔 발전이 없는데 해마다 여름만 혹독해진다. 바깥은 초여름에서 여름으로, 계절의 정중앙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꼭 낀 브레지어가 답답했다. 삼신은 와이셔츠 속으로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어 와이어를 당겼다. 숨쉬기가 한결 편해지자 머릿속도 조용해졌다.

 오늘 집에 가서 봉투 챙기고 부모님한테 금란이 학원 비에 대해 말하고 내일은 적금을 들고 꼭 속옷도 사고…….’

 삼신은 엎어진 채로 잠이 들었다. 다음 교시는 어차피 자습이었다.

 

 12.

 꿈을 꿨다. 중학생 교복을 입은 G가 나왔다. 꿈속의 삼신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 언젠가 이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라고 꿈속의 삼신은 생각했다.

 G와 삼신은 스탠드에 앉아 운동장을 보고 있었다. G가 삼신의 어깨에 기댔다. 삼신은 가슴이 떨려서 일부러 운동장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정글짐, 철봉, 고무 타이어……. 바람이 불자 G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멜랑꼴리, 라고 삼신은 생각했다.

 , 넌 효자손이 안 무섭냐?”

 G가 물어서, 삼신은 대답했다.

 전 정의롭지 않은 사람에겐 기죽지 않아요.”

 정의이?”

 G가 웃었다.

 개웃기다. 나 정의 소리 하는 애 존나 도덕책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어.”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울리긴 한다. 넌 존나 정의로운 애처럼 보여. 정의의 사도 이삼신.”

 그래서 그렇게 대드는 거야?”

 G가 여전히 웃고 있었으므로, 삼신의 어깨는 G의 숨소리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삼신은 그 떨림을 가만히 느끼다가 조용히 대꾸했다.

 전 그렇게 안 대들어요. 대들고 싶었다면 한 대 갈겼겠죠.”

 삼신은 얼굴을 찡그렸다.

 대드는 건 선배가 하는 일이고요! 전 그냥 넘기는 것뿐이에요. 좋지 않은 일을 제 안에 들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게 돼?”

 G가 물었다.

 삼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

 바람이 불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운동장으로 모래가 마구 날리는 게 보였다. 햇빛이 더욱 뜨거워졌다. G가 중얼거렸다.

 넌 망가졌구나…….”

 헛소리하네. 삼신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G가 계속 자기 어깨에 기대 있었으면 한데다가 우수에 찬 눈빛으로 감성에 젖은 G의 얼굴이 더욱 잘생겨 보여 태클은 걸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삼신이 말했다.

 전 정의롭게 살 거예요.”

 계속 대들면서?”

 G가 되물었다. 대드는 게 아니라니까. 삼신은 G가 멋대로 자신의 행동을 폄하하는 게 짜증났지만 잘생겼으니 봐주기로 했다.

 .”

 G가 물끄러미 삼신을 바라보았다.

 “그건 정의로운 게 아니야. 그냥 못마땅한 거지.”

 G의 목소리는 약간 사이비 교주 톤처럼 들렸다.

 누군가 네 안에 미움을 심어둔 거야.”

 한 대 칠까? 삼신은 생각했지만, G의 마지막 말에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G는 삼신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난 네 미움이 마음에 들어.”

 삼신은 가능하면 그 말을 오래 음미하고 싶었다. 네 미움이, 말고, 마음에 들어, 를 말이다. 운동장은 충분히 뜨거웠고 머리도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G가 삼신의 어깨에서 일어났다. G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 이거 타이밍인가 라고 삼신은 생각했다. G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G의 얼굴이 더욱 바싹 다가왔다. 삼신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G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삼신은 순간 일시적인 거북함을 느꼈다.

 대놓고 알려줘도 날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과 키스해도 괜찮을까?’

 삼신은 눈을 감을까 말까 고민했다.

 잘생긴 오빠니까 괜찮지 않을까.’

 귓불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G의 냄새가 아주 가까이서 났다. 기분 좋은 샴푸 향이었다. 삼신은 자신의 거북함에 대들지 않기로 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바람이 멈췄고 세상이 조용했다.

 G의 입술은 따뜻하고 침이 좀 있었다. 키스는 아주 빨리 끝났다. 삼신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혀를 쓰지 않아서 다행이야. 날아가는 기분은 없었다. 삼신은 손등으로 G의 침이 묻은 입술을 닦아냈다.

 삼신아, 너 키스 처음이지.”

 G가 물어서, 삼신은 입술을 닦으며 끄덕거렸다.

 못 한다.”

 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야해질 수 있어요.”

 삼신은 결국 짜증냈다.

 하지만 선배는 나랑 다른 세계에 살잖아요.”

 그럼 안 돼?”

 여기로 올 수 있어요?”

 아니, 난 우등생은 무리.”

 그런 소리가 아닌데. 삼신은 생각했고, 실망했고, 다시 기대하기로 했다. 어쨌든 키스는 했으니까.

 역시 선배랑은 안 되겠어요.”

 그렇구나…….”

 G는 조금 서운한 눈치였다.

 그런데 삼신아, 너 땀 냄새 나더라.”

 삼신은 G가 자길 무안 주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 챘지만 그 말은 직격 타처럼 자신의 가슴에 와 박혔다. 가슴에 들이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스트라이크 당했다. 하필 첫 키스 이후에 공격이라니, 비겁해. 삼신은 G의 다리를 걷어차곤 일어났다.

 어떻게 키스하자마자 심술을 부릴 수 있어요?”

 삼신은 눈을 흘겼다. G는 제가 실수했음을 알고 미안하단 듯 힘 빠지게 웃다가 시선을 피했다.

 미안.”

 됐어요.”

 그 날 삼신은 방과 후 올리브 영에서 핸드크림과 로션을 샀다. 향수를 사지 못 한 건 비싸서였다. 가난의 향기인가, 라고 삼신은 복숭아 모양 핸드크림 용기를 열며 생각했다.

 그 뒤로 삼신의 몸에선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여름이 가는 동안 G와는 종종 혓바닥 없는 키스를 했고, G는 더는 삼신의 땀 냄새를 가지고 심술을 부리지 못 했으며, 삼신은 G가 언제쯤 제게 고백을 할지, 만약 한다면 받아줘야 할지, 받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가을이 오기 전에 G가 실수를 저질렀다. 큰 실수였기 때문에 삼신은 이번엔 어쩔 도리가 없이 상처를 받았다. 그 뒤로 둘은 흐지부지해졌고 감정이니 밀고 당기기니 멜랑꼴리는 전부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겉으론 서로 늘 그랬던 것처럼 인사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고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웃어주었다. 둘은 이상한 구석에서 자존심이 강했다.

 그렇지만 삼신 쪽은 두 번 울었다. G는 울었을까? 꿈속의 삼신은 생각했다. 안 울었을 것 같다. 그 사람은 날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왜냐하면 난 엄청 예쁘지도 않고 또…….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3.

 눈을 뜨니 자습시간이 끝나있었다. 바람이 넘실거리며 삼신의 머리 위로 커튼을 흔들었다. 타종 몇 분 전 교실은 벌써부터 어수선했다. 다들 가방을 챙기거나 부스스 일어나거나 제 옆자리와 떠들고 있었다.

 젠장.’

 기분 나쁜 꿈을 꿨다고 생각하며 삼신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비볐다. 이게 다 G를 다시 만나서 그런 것이다. 그 인간, 미국에 있을 것이지 왜 돌아왔대? 삼신은 다리를 쭉 피고 스트레칭을 했다. 이래고등학교에 온 게 G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입학을 결정한 이후에도 종종 G 생각을 했었다. 뭘 하고 살까?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G와 중학교 3학년이 된 삼신 사이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G는 자신이 삼신에게 실수했음을 알았지만 사과하지 않았고(사과하기에도 좀 뭐한 것이었다) 사실 사과 받아도 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게다가 G는 멀쩡한 가슴에 상처를 냈다기 보단 이미 벌어진 틈에 곡괭이를 쑤셔 넣었다 정도의 일을 해냈으니까 어쨌든 지난 일이다. 삼신은 생각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 필통을 가방에 욱여넣었다. 종이 쳤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동안, 삼신은 전화를 했다. 엄마에게 했지만 받지 않아서 두 번째엔 아빠에게 걸었다. 아빠는 평소보다 몇 초는 더 삼신을 기다리게 했다.

 아빠, 통화 가능하세요?”

 , 가능하지. 우리 신이, 무슨 일인데?”

 삼신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개 한 마리가 달려 나와 종아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삼신은 휴대폰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개의 정수리를 쓰다듬어줬다. 눅진한 혀가 마구 손바닥을 핥았다.

 , 별 건 아니구요. 제가 사실 조금씩 돈을 모았거든요 용돈 혼자 벌면서 남은 돈 모은 건데.”

 삼신은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많은 건 아니에요 이번에 금란이 학원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그걸로 보태 쓰면 좋겠다 싶어서.”

 …….”

 수화기 너머에서 말이 없었다. 삼신은 아빠가 코를 훌쩍이는 걸 분명히 들었다. 삼신은 이제 정말 쑥스러워졌다.

 저희 화장대 서랍 맨 위에 있는 봉투거든요. 흰 색인데 나중에 퇴근하면 확인해주세요. 금란이도 알아요. 미리 말했어요.”

 삼신은 금란이 저를 껴안고 울었던 걸 떠올렸다. 왜 가족들은 이런 일엔 눈물을 보일까? 삼신은 그런 것들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눈물은 자신이 해낸 일들이 굉장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고작 340만원 중에서 40만원인데 말이다. 정말 착한 딸이었다면 300만원도 마저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대학 등록금은 전액 장학금으로 해치워버리는 것이다. 삼신이 300만원을 꺼내놓지 않은 건 그 최상의 시나리오를 해낼 자신이 없어서였을 뿐이다. 능력이 안 될 지도 모르니까. 이번 시험은 삼신의 불안을 더욱 심화시켰다. 밀린 등수는 삼신이 정말 그럴 능력이 안 될 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이따 봬요.”

 삼신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아빠가 다급하게 잡았다.

 삼신아, 늘 고맙다.”

 아빠의 목소리는 습윤했다.

 사랑한다, 내 딸.”

 , 저도요.”

 삼신은 갑자기 목이 멨다.

 사랑해요.”

 그 말은 족쇄 같았다.

 

 14.

 차유성은 집에 없었다. 차유성 마미는 삼신을 향해 웃었다.

 신이 왔니? 이를 어째, 유성이 잠깐 어디 나갔는데…….”

 삼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에서 기다릴게요.”

 금방 올 거야.”

 유성 마미는 삼신에게 유자차를 타줬다. 아줌마도 참. 여름인데 뜨거운 유자차라니 삼신은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컵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부엌 냉장고를 열어 얼음 다섯 개를 꺼냈다. 뜨거운 물속에서 침몰하는 얼음을 보고 있자니 타이타닉이 떠올랐다.

 다섯 번째 얼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무렵 차유성이 돌아왔다. 유성은 현관에 놓인 삼신의 운동화를 발견했다.

 헤이, ! 운동화 바꿨네?”

 안나가 사줬지롱.”

 삼신은 테이블 아래로 긴 다리를 쭉 뻗으며 히죽 웃었다. 유성은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 걔 너한테 푹 빠졌어.”

 내가 원래 한 매력 하지.”

 삼신이 으스대며 유자차를 홀짝였다. 유성이 씩 웃었다.

 ~ 내가 전수해준 거다.”

 어얼씨구?”

 뭔 일로 왔어.”

 “CD 반납하러.”

 좋았어?”

 끝내줬어…….”

 유자차를 마신 삼신은 유성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성은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었다. 삼신은 유성의 침대에 엎드려서 가방을 마구 뒤졌다. 그리곤 CD를 건네주었다.

 나는 4번 트렉이 제일 좋아.”

 유성은 노트북을 두들기며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 난 네가 3번 좋아할 줄.”

 그것도 좋았는데 4번이 제일 좋음.”

 파일 줄까?”

 삼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유성이 노트북을 펴고 앉은 곳까지 조금 모자란 거리였다. 삼신은 낑낑거리며 손을 보다 앞으로 뻗었다. 유성은 일부러 받지 않고 모르는 척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었다.

 , 유스타!!”

 삼신이 애타게 불렀다. 유성의 입 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삼신이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유성이 재빠르게 받았다. 삼신은 기운이 빠진 듯 침대에 엎어졌다.

 네가 그거 못 받았으면 난 울었을 거야…….”

 , 내가 못 받고 맞으면 울어야지…….”

 유성은 USB를 연결해 삼신의 휴대폰으로 곡을 전송해줬다.

 “4번 트렉만?”

 .”

 삼신은 침대에서 꾸물꾸물 내려와 유성 옆까지 데굴데굴 굴러왔다. 그리곤 잭에서 제 휴대폰을 분리했다. 시험 삼아 노래를 틀자 체리필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완벽해. 앞으로 당분간 이것만 들어야지.”

 넌 대체로 락을 좋아하더라. 시끄러운 거.”

 그럼. 난 락이 좋아. 시끄러운 거.”

 삼신은 휴대폰을 만지며 키득키득 웃었다.

 나 대신 소리 질러 주고 좋잖아.”

 저녁 무렵 삼신은 유성의 집을 나왔다.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유성 대디를 마주쳤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유성 대디가 말했다.

 신이냐! 저녁 먹고 가지 그래. 집사람이 안 붙잡든?”

 괜찮아요!

 삼신이 로비 문을 열며 대답했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야 해서요.”

 

 15.

 삼신은 도착하자마자 현관까지 달려 나와 저를 껴안는 엄마 때문에 깜짝 놀랐다. 우리 신이, 라는 엄마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삼신은 제가 무슨 의대 합격이라도 한 줄 알았다. 아님 하버드나. 둘 다 아니지만.

 신아,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는 삼신이 신발을 제대로 벗을 새로 없이 손을 끌었다. 삼신은 휘청거리며 따라 끌려갔다. 손끝부터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간지러워서 날아갈 지경이었다. 어쩌면 정말 날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부엌 식탁 위엔 삼신의 자부심의 일부, 40만원 봉투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너희 아빠는 뒷정리하고 온다고 좀 늦을 거야. 먼저 퇴근하려고 하니까 붙잡더니 너랑 통화했다고 말해주더라. 네가 돈을…….”

 삼신의 엄마는 말을 잇지 못 하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금란이 학원 비를 모았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모았다니! 난 상상도 못 했다…….”

 엄마의 호들갑에 세 동생이 쪼르르 달려 나와 문간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삼신은 금은동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곤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삼신의 손을 붙잡았다. 아주 따뜻하고 거칠고 많이 고생했고 또……. 엄마는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너한텐 큰돈이 아니니? 정말 써도 괜찮겠어?”

 엄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삼신은 너무 부끄러워서 식탁 바닥을 봤다.

 아니, , 큰돈이긴 한데 또 그렇게 큰돈이 아닌 것도 같고 아이고, 내가 뭐래! 그냥 쓰세요.”

 삼신은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했다. 엄마는 다시 한 번 감격해서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 삼신을 끌어안았다. 어깨 너머로 금란과 눈이 마주쳤다. 금란은 입을 다물곤 시선을 피했다.

 엄마가 삼신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300만원이면 큰돈이지, 이 가스나야. 기특하기도 하지…….”

 삼신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다.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엄마는 이제 삼신을 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삼백이면 은주랑 금란이 둘 다 보낼 수 있겠다.”

 ?”

 삼신은 금란을 바라봤다. 금란은 고개를 돌린 채로 눈을 내리깔았다가, 방안으로 도망쳤다. 날아가던 기분이 갑자기 거대한 우물로 바뀌었다. 삼신은 발밑이 쑥 꺼지는 것을 느꼈다. 어둡고 음습했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엄마.”

 삼신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춤을 추다 말고 삼신을 놓아주었다. 삼신은 엄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주름살이 보였다. 깊고 음습한 우물이 숨은 그 주름살들 말이다. 그런데 엄마의 눈은 너무나 기쁨으로 충만해서 반짝이고 있었다. 엄마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신이.”

 엄마가 웃자 주름살 곳곳에 스며든 우물의 물들이 기쁨의 두레박으로 걷어 올려졌다. 환한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삼신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턱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하지? 어떻게 말하지?

 삼신은 그냥 떠오르는 이름을 불렀다.

 이금란!”

 이금라안!!”

 이금라아아안!!”

 금란이 방 안쪽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거의 비명처럼 들렸다. 그 애는 사실 웃는 듯 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16.

 삼신은 봉투 하나를 더 꺼내 40만원을 나누어 넣었다. 그리곤 300만원 봉투를 서랍 아래쪽에 넣고, 40만원을 서랍 맨 위에 얹어놓았다.

 누나, 뭐야?”

 동래가 이불 위를 뒹굴다 말고 물었다. 삼신은 건성으로 니네 누나 학원 비.”라고 대답했다.

 

 17.

 많은 걸 포기한 사람은 둘로 나뉜다.

 죽거나 죽여 버린다.

 

 18.

 금란이 방에 들어왔을 땐 잠에서 깬 동래가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 뭐하는 거야. 금란이 동래의 손을 붙잡으며 정색했다. 동래가 손가락으로 뒤집어진 서랍 안쪽을 가리켰다. 금란은 짜증난 표정으로 서랍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가장 밑바닥에서 봉투를 발견했다. 똑같이 희고, 조금 더 두툼한 금란은 화장대에 앉아 봉투를 조금 벌려보았다.

 그곳엔 삼백 만원이 들어있었다.

 

 19.

 우리 집에 좀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모난 성격이 되진 않았을 텐데.

 

 20.

 이금란!”

 삼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금란은 귀를 틀어막았다. 이금라안!! 그 소리가 꼭 비명처럼 들렸다. 삼신의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죽여 버릴 것을 찾고 있었다.

 금란은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기가 사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줄은 몰랐다.

 

 21.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22.

 난 언니처럼은 못 살아.

 언젠가 금란이 그랬다. 사실 입버릇처럼 말했다.

 언니, 난 절대…….

 

 23.

 바울은 모든 생명을 송두리째 바친 사도이지만 세상을 향해 충동하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꾸짖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고 탄식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How to~) 이 문제를 해결하랴?’고 물은 것이 아니라 누가(Who is~) 나를 구원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24.

 언니 사랑해.”

 삼신은 엉거주춤 들었던 손으로 금란의 등을 감쌌다.

 나도 알아.”

 금란은 그 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신도 포기했다. 퇴근한 아빠가 거의 울면서 삼신을 껴안자, 삼신은 그 품에 매달려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견디지 못 한 금란은 현관을 박차고 뛰쳐나가 저녁 내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삼신은 금란이 이번엔 뭘 죽일까를 생각했다. 아마 자신을 죽이겠지 아빠의 품에서 삼신은 눈을 감았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울지 않았다. 슬픈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운한 것도.

 삼신은 그런 감정을 모른다.

 

 25.

 그 날 밤, 삼신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꿈을 꾸었다. 이번엔 G가 나오는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악몽이었다. 꿈 내용은 이렇다. 사랑할 때마다 찔려 죽는 세상에 버려진 것이다. 삼신의 가슴엔 가시가 아주 많이 박혀 있었다. 그것들이 자신의 가슴에서 솟아오른 게 아니란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남이 박은 것은 스스로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신은 뛰고 싶었고, 때론 날고 싶었는데, 가난의 가시가 너무 깊어서 뽑을 때마다 가슴이 다 뜯겨져 나갔다. 삼신은 달릴 수 있는 몸을 자꾸만 주저앉히고 가슴을 더듬었다. 그리곤 힘주어 가시를 뽑아냈다. 따뜻한 피가 솟았지만 손은 차가웠다. 가시는 아직도 많았지만 삼신은 멈추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고 계속 사랑했고 그럼 또 가시가 박히고 또……. 삼신은 자꾸 주저앉다가, 달리고 싶었다거나 날고 싶었다거나 하던 사실을 잊었다. 그럼 삼신은 그런 소망을 바란 적이 없게 되는 것이다.

 완벽한 꿈이었다.

 

 26.

 다음 날, 삼신은 G를 마주쳤다.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손을 흔들고 인사를 했을 것이다. G는 저를 지나가려는 삼신의 포니테일을 아래로 죽 당겼다. 삼신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 아프구나.”

 G는 삼신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삼신의 앞머리는 땀으로 축축했다.

 보건실 가.”

 G는 삼신을 놀리지 않고 그대로 보내주었다.

짜증이 난 삼신은 대꾸도 없이 복도를 계속 걸었다. 바닥이 흐물거려서 걷기가 좀 힘들었다. 게을러진 모양이지 삼신은 햇살이 너무 따가워 얼굴을 찡그렸다. 교무실을 지날 무렵 담임이 삼신을 붙잡았다. 삼신은 온화한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써서 성공했다.

 , 선생님.”

 담임교사가 물었다.

 이삼신이, 아직도 미스터리 부에 있냐.”

 아무렴요.”

 그렇게 문제 많은 부엔 왜 들어가선…….”

 어머, 말썽쟁이 부라고 하셨지 문제 많은 부라고 안 하셨거든요.”

 삼신은 입을 빼죽이다 그만뒀다. 그럴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년 전 물어봤을 땐 무슨 말썽이냐고 그렇게 캐물어도 대답도 안 해주시더니. 갑자기 문제 많은 부라고 매도하시면 어떡해요?”

 하이고오.”

 삼신의 담임교사는 2학년 6반의 담임으로, 학생주임이었다. 삼신을 예뻐해 주는 뭐 대충 그런 포지션을 맡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삼신에게 미리 일러두는 그런 사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담임 입에서 미스터리 부가 나왔으니 좋은 소식은 아닐 터다. 삼신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가슴이 꽉 막혀 숨을 멈췄다. 담임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니네 부 없어진 댄다.”

 이명이 찾아왔다. 바깥의 매미소리가 갑자기 아주 크게 들렸다. 삼신은 속이 울렁거려서 담임이 뭐라고 덧붙이는지 제대로 듣지 않았다.

 확정은 아닌데 말이 나왔으니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걸…….”

 삼신은 가슴을 꽉 눌렀다 뗐다.

 학생부 쪽에서 말이 나왔으니…….”

 삼신은 물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더위가 강렬했다. 삼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몸조리 잘 하고. 낯빛이 안 좋구나.”

 삼신은 교무실 옆 화장실로 들어갔다. 교사 화장실이지만 혼나진 않을 것이다. 혼나게 되면 될 대로 되겠지. 수리 중이라는 팻말이 붙은 가장 끝 칸으로 몸을 욱여넣은 삼신은 손을 더듬어 가슴 안쪽을 닦아냈다. 브레지어 와이어 하나가 바깥으로 튀어나와 살을 마구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삼신은 흥건한 손을 펼쳐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다.

 

 27.

 완벽한 꿈.

 

 28.

 그러니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그러면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29.

 삼신은 변기 커버를 내리곤 그대로 그 위에 엎어졌다. 이마가 온통 축축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휴대폰이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삼신은 주워들고 이어폰을 귀에 쑤셔 넣었다. 트렉 4가 흘러나오자 가슴이 조금씩 진정됐다. 환풍기 날이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해졌다. 창문으로부터 여름 공기가 키운 바람이 쏟아져 삼신의 앞머리를 쓸어주었다.

 죽도록 모았는데…….’

 삼신은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으니 다시 모을 수밖에…….’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지. 1등도 해야지. 절벽에 내몰렸으니 칼을 빼들어야지. 수세에 내몰렸으니 필사의 힘을 다해야지. 삼신은 등을 더듬어 브레지어 끈을 풀어버렸다. 갑자기 가슴이 너무나 가벼워져서 꼭 증발해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속옷은 그럼 언제쯤 사지…….’

 하지만 바람이 기분이 좋아서, 변기 커버가 시원해서, 땀이 말라가는 감각이 온화해서, 삼신은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이어폰으로 체리필터는 자꾸만 소리를 질러줬다. 삼신을 대신한 필사의 힘일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역시 락은 좋구나, 라고 삼신은 생각했다. 눈가가 축축해졌지만 땀은 곧 마를 것이다. 세상이 필사의 힘을 다해 축축해진 삼신을 건져 올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분 좋다…….’

 삼신은 작게 웃었다. 시원한 바람이었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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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새로운 시도»
1차/old 2019. 10. 8. 18:44

 삼신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반짝 눈을 떴다. 토요일 오전 7 50분이었다.

해는 이미 떠올라서 창밖으로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눈곱 낀 눈이 찝찝했다. 삼신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치에서 금란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금란은 가족 중 잠버릇이 제일 나빠서 일찍 일어나면 꼭 저런 진풍경을 연출했다. 쌍둥이 동생 은주는 얌전한데 왜 저 혼자 좁아터진 방을 정복하려고 저럴까. 한 배에서 거의 똑같은 시간에 비슷한 얼굴로 태어난다고 해도 사람은 결국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를 묶고 부엌으로 나온 삼신은 주방 쪽으로 난 작은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 솥에 쌀을 담아 불을 올렸다. 어제 남은 된장국이 있으니 계란만 구워주면 된다. 미리미리 해두면 할 일을 더는 법이다. 살아가는 방법은 결국 다 거기서 거기다. 공부든 요리든 집안일이든, 미리미리 해놓으면 결코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삼신은 진작부터 그런 일들을 깨우쳤다.

 냉장고를 연 삼신은 파와 계란 다섯 알을 꺼내 올려놓곤, 칼을 꺼내 도마를 내리쳤다. , 하고 올라오는 충격이 손바닥에 가득 찼다. 찌릿찌릿했다. 삼신은 한동안 칼자루를 쥐고 만지작거리며 얌전히 서있었다. 싸늘한 새벽바람이 불었다. 앞머리가 흔들리자 이마가 간지러웠다. 삼신은 칼을 바로잡곤 파를 썰기 시작했다.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었다.

  밥솥에서 김이 솟는데도 동생들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삼신은 계란을 신경질적으로 마구 풀었다. 녹색 파가 노란 물 안으로 침몰했다가 솟아올랐다가 했다. 소용돌이 속에서 거품이 났다. 삼신은 프라이팬을 꺼내고 불을 올리고 기름을 둘렀다. 달궈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계속 계란을 저었다. 거품이 나면 멈춰서 소금을 조금씩 뿌렸다. 그리곤 프라이팬에 그걸 전부 부어넣었다. 익는 냄새가 황홀했다. 삼신은 계란말이를 제일 잘 한다. 그 다음으로 잘 하는 건 김치찌개다. 하지만 후자는 많이 하지 않았다. 계란말이보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아침 8시 반이 됐다. 된장국도 팔팔 끓었고 계란말이도 다 됐다. 밥솥을 열자 쌀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이제 삼신은 동생들을 깨워야했다. 깨우기 싫었지만, 금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올해부터 가까운 백화점 문화 강습센터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한 금란은 주말 아침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레슨은 한 달에 삼십 오만원이나 한다. 늦잠 자는 걸 방치하다간 돈을 날리게 될 것이다.

  삼신은 문을 열어젖히고 동생들을 발로 찼다. 세게 차진 않았다. 그건 폭력이니까.

 대신 소리를 질렀다.

  금은동! 일어나!”

  삼신에겐 세 명의 동생이 있다. 여동생 둘, 남동생 하나. 둘은 쌍둥이고 한 명은 막내아들이다. 각각 이름은 이금란, 이은주, 이동래고, 삼신은 이 셋을 금은동이라 불렀다. 하지만 셋이 금은동만큼 값지고 귀하다고 느껴진 적은 없었다.

  금은동들이 꿈틀거리며 이불로 기어들어갔다. 삼신은 이불을 성큼성큼 밟고 걸어가 금의 등을 빵 찼다. ! 금란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 미쳤어! 왜 차! 왜 차?”

 “밥 먹고 튀어나가도 늦을 판이라서 찼다, 어쩔래! 너 레슨 아홉 반에 하잖아. 지금 몇 신지 알아?”

  금란은 시계를 확인하고도 밍기적거리며 누워있었다. 삼신은 그 게으른 태도가 정말 화가 났다. 하지만 한 번 더 발로 찼다간 진심으로 걷어찰 지도 몰라서, 대신 한 번 더 소리만 질렀다.

  너 바이올린 배우고 싶대서 엄마가 무리해서 돈 대주신 거잖아! 너도 하고 싶다고 졸라서 시작한 일이잖니? 왜 자기가 좋다고 시작한 일에도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그 돈이 아깝지도 않아?”

  금란은 입을 빼죽 내밀곤 보란 듯이 이불을 뻥 찼다. 그리곤 짜증난 얼굴로 일어났다.

  오늘 아침 뭐야?”

 “된장국이랑 계란말이.”

 “, 싫어! 된장국 어제도 먹었단 말이야!”

 “어쩔 수 없잖아.”

 “아악! 진짜!”

  금란은 투덜거리면서 밥상에 앉았다. 삼신은 계란말이를 썰어서 네 개씩 나눴다. 오늘의 계란말이는 아주 예쁘게 됐다. 금란은 젓가락으로 쿡 집어보곤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맛있었는지 불평은 싹 잊고 금방 다 먹었다. 된장국은 조금 남겼다. 레슨 시간까지 삼십분이 좀 남았다. 그제야 조급해진 금란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고 얼굴을 씻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삼신은 금란이 먹고 간 그릇을 싱크대에 담아놓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맑았지만 쌀쌀해서 입김이 나왔다.

  삼신은 주말엔 할 일이 아주 많다.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바빴다. 겨울방학을 맞이한 이후엔 거의 매일 집안일을 했다. 아침밥을 하고, 잠깐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장을 보고, 나머지 공부를 하고, 저녁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내려와서 탕 청소를 돕고, 다시 올라와서 화장실 변기를 닦고 거실도 박박 쓸고 닦았다. 집안일을 항상 하는 건 아니어서 가끔 혼자 시내에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좀처럼 할 일을 찾을 수 없어서 그냥 걸어 다니다 돌아와야만 했다. 삼신의 휴대폰엔 번호가 아주 많았지만 방학이나 주말에 따로 놀러가자고 할 수 있을 만한 그룹은 없었다. 하지만 삼신 휴대폰에 들어있는 모두는 길거리에서 가끔 삼신을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안녕.”하고 웃어주었다. 얼마 전엔 같이 수행평가를 했던 A T를 만났다. 둘은 이번 겨울방학에 리조트로 여행을 갈 거라고 했다.

  삼신아, 너도 한 번 가 봐. 홈페이지에서 봤는데 거기 온천 풀장도 있다더라. 스키장도 8시까지 해.”

  그들은 같이 가자, 대신 한 번 가 봐, 라고 했다. 삼신은 그게 별로 서운하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설령 같이 가자 말했어도 그러마.”라고 하지 못 했을 것이다. 리조트는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신은 아주 바빠서 혼자 그곳으로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스키나 보드, 설산과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거대한 욕탕 같은 건 드라마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나중에 한 번 찾아볼게.”

  삼신은 웃으며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도 삼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학원 가방을 매고 상가 안으로 사라졌다. 삼신은 고개를 들어 거대한 상가 건물을 바라봤다. 사거리엔 언제나 학원 간판이 빽빽했다. 그건 밤새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보였다. 삼신은 언제나 그 속이 궁금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학원을 다니는 애들은 다 학원이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는데, 그것도 공감대라는 것일까? 학원에도 소속감이라는 게 있을까? 학교보다 더 시끄러운 곳일까? 교실이 학교 교실만할까? 이런 건 드라마에선 나오지 않는다. 학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애들은 어떻게 노는지, 어떤 말을 하고 살아가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드라마에는 언제나 사랑과 배신이, 질투와 분노가, 격정과 의심이 있었고, 대체로 그런 것만을 보여줬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재미있을 법한 것들. TV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법한 세상사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학원이나 십대 아이들의 가십거리 같은 건 그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기에 방영하지 않는 것일까? 이미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삼신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세상 그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궁금해 하는 유일한 아이가 된 것만 같다. 삼신은 문득 A T 같이 가자고 말해줬으면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떨쳐냈다.

  그러나 오늘은 학원가에 가지 않을 것이다. 삼신은 따로 갈 곳이 있다. 학원가에서 좀 더 떨어진 곳, 알파 문구점 건너편에 있는 건물. 신호가 좀 길지만, 길을 건너면 아주 큰 음반매장이 있다. 삼신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거기선 돈을 내지 않아도 원하는 음반을 세 곡 들을 수 있다. 음악도 아주 많아서 어지간한 건 다 찾아서 들을 수 있었다. 히터도 빵빵하게 나온다.

 자동문을 열자 따뜻한 바람이 쏟아졌다. 추위로 새빨개진 볼을 문지르며, 삼신은 목도리를 벗고 벙어리장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사람이 얼마 없었지만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삼신은 구석에 서서 헤드폰을 눌러쓰고 노래를 검색했다. 그리곤 재생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팝송을 들을 것이다. 차유성이 알려준 곡인데 째지는 보컬의 목소리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주말이 되면 꼭 여기서 다시 들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유성이는 좋은 소꿉친구다. 드라마엔 나오지 않는 곡들도 알려주니까. 차유성은 어디서 그런 노래를 찾아다 듣는지 모르겠다. 그 앤 클래식도 듣고 락음악도 듣고 헤비메탈도 듣고 아리아도 들었다. 삼신은 그 옆에 붙어서 아무 노래든 다 들었다. 가끔은 그 애랑 영화도 봤다. 차유성은 음악처럼 아무 영화나 잘 들고 왔고, 삼신은 들고 온 거라면 무엇이든 다 봤다. 최근에 본 것 중에선 타이타닉이 제일 좋았다. 사랑과 죽음이 그렇게 세련될 수도 있다니! 왜 한국 드라마는 저런 걸 만들지 않는 것일까? 삼신의 가족은 음악이나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유성이 없었다면 삼신은 평생 타이타닉을 보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유성아, 나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싶은데, 너랑 있으면 그런 걸 미리 경험하는 것 같아서 좋아.”

 바닥에 엎어진 채 삼신이 이어폰 줄을 풀며 중얼거렸다. 유성이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잘 됐네. 그럼 이것도 들어 봐. 이어폰 줄 그냥 안 풀어도 돼. 꼬인 채로 들어.”

 “그래도 돼?”

 “안 될 거 있어?”

  유성은 삼신의 이어폰을 잭 구멍에 연결했다. 노래가 아주 커서 삼신은 깜짝 놀랐다.

  !”

 “, 거기선 커?”

 유성은 볼륨을 줄였다. 삼신은 귀를 감싼 채로 노래를 들었다. Party girl, don't get hurt, Can’t feel anything, when will I learn……. 보컬은 여자고, 째진 목소리에, 날카롭고 서늘했다.

 “누군데?”

 “Sia.”

 삼신은 클라이막스를 듣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이거 알아!”

 “Chandelier가 유명하긴 하더라.”

 유성은 삼신의 휴대폰으로 메모를 해줬다.

 “맘에 들면 가서 들어.”

 삼신은 휴대폰을 열어 메모장을 켰다. 유성이 써준 메모는 제일 위에 있었다. 그 아래도 유성의 메모였다. 그 아래도, 그 아래도…… 삼신은 휴대폰 메모장을 잘 쓰지 않아서 대부분은 유성이 알려준 곡 메모밖엔 없다.

 삼신은 트렉을 찾았다. Sia는 곡을 아주 많이 냈는데, Chandelier옆엔 HOT표시가 떠있었다. 그 말은 즉 히트곡이란 뜻이다. 삼신이 알고 있으니 히트곡인 것도 무리는 아닐 터다. 노래를 클릭하자 가사가 떴다. 삼신은 가사를 읽었다. 파티걸들은 상처입지 않아, 아무 것도 느끼지 못 해, 난 언제쯤 배울 수 있을까…….

 가사가 난해하네.’

 삼신은 멀뚱멀뚱 서있었다.

 ‘하지만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삼신은 나머지 두 곡으로 Sia의 다른 곡을 들었다. 그 곡들도 좋았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생긴 것이다. 유성이는 언젠가 그걸 취향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게 하나 둘 모이면 네 취향이 되는 거지. 그걸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엄청 많은 곡에 둘러싸여도 네 맘에 드는 걸 금방 찾을 수 있어.”

 그 뒤로 삼신은 유성의 메모를 지우는 대신 쌓아두기 시작했다. 휴대폰이 초기화 된다면 몹시 슬플 것이다. 유성의 메모가 아주 많으니까.

 음반 가게를 나온 삼신은 버스를 타고 돌아와 마트에 들렀다. 지갑의 돈을 확인하고 스팸과 통조림 등을 샀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 7시쯤이었다.

 누나 왔어?”

 언니 왔어?”

 언니! 오늘 저녁은 뭐야?”

 거실에서 TV를 보던 금은동이 현관 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스팸찌개!”

 삼신이 봉투를 흔들었다. 금과 은과 동은 와하하 웃었다.

 “무한도전 다 보고 먹을게!”

 “나도!”

 “언니도 무도보자!”

 “난 안 볼 거니까 문 닫아.”

 “공부할 거야?”

 “. 볼륨도 좀 줄여.”

  금은동은 문을 닫고 볼륨을 줄였다. 삼신은 마트봉투를 내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곤 간밤에 채 다 하지 못 한 시험지를 풀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전교 10등 안에 드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조금도 게을리 공부해선 안 됐다. 중학교 겨울방학은 선행학습을 위해 마련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삼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으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푸는데 얼마 걸리진 않았다. 수학은 늘 빨리 쉽게 풀렸다. 삼신은 채점을 해봤다. 마흔 다섯 개의 문제 중에서 두 개를 틀렸다. 이 정도면 괜찮다. 아니다, 괜찮지 않다. 돌아오면 복습을 하자. 그러면 된다.

  삼신은 남은 된장국을 한쪽에 치워놓고 솥에 남은 밥을 확인하고 새 냄비를 꺼내고 물을 담고 고추장을 퍼내고 스팸을 따고 불을 올렸다. 아침에 계란말이에 넣다 만 썰어놓은 파도 같이 넣고 저었다. 스팸찌개 냄새가 나자 무한도전 다 보고 먹겠다는 금은동이 뛰쳐나왔다. 삼신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찌개를 밥그릇 안에 말아줬다. 동생들은 빨리 많이 먹었다. 삼신은 천천히 조금 먹었다. 다 먹고 설거지를 했다. 어쩐지 싸늘하다 싶었는데 아침에 열어둔 창문을 닫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삼신은 고무장갑을 널며 창문을 닫았다.

 탕 청소를 하러 내려가자, 아빠가 먼저 반겨줬다.

 우리 신이 왔냐!”

 아빠가 삼신을 꼭 껴안았다. 삼신은 낄낄 웃으면서 그 품에 매달렸다가 떨어졌다. 아빠는 삼신에게 고무장갑과 솔과 락스를 주었다.

 여탕 손님 다 빠졌으니까 들어가서 해도 될 거다.”

 엄마는?”

 “오늘은 엄마가 카운터 보는 날이야.”

 “힘들었겠네.”

 “인마, 아빠도 고생했어.”

 “알아요.”

  삼신은 캐비닛을 지나 빈탕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빠진 탕은 언제나 좀 차가워 보인다. 실제론 습하고 따뜻한데도 뭔가 좀 부족해 보인다고나 할까 삼신은 턱을 괴고 탕의 물이 모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지와 소매를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락스를 뿌리고 솔로 박박 닦았다. 땟국물 자국도 싹싹 씻었다. 목욕탕 청소는 힘들다. 락스를 부을 땐 쭈그리고 앉아야 한다. 엉덩이가 무거워서, 삼신은 그 자세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서 부으면 여기저기 튀고, 그렇게 되면 샤워기를 틀어서 씻어내야만 한다. 그럼 물 낭비라고 엄마에게 등짝을 맞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기 싫은 일에는 늘 심통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심통을 부려도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삼신은 언젠가 부턴 투덜거리기를 관뒀다. 살아간다는 건 변하지 않는 벽을 마주보는 일과 같았다. 그걸 넘어갈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부러워만 한다고 되는 일이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건 너무 쉬웠을 것이다. 삼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당장에 해야 하는 일들에 충실했다. 그럼 부모님께 칭찬도 받고, 전교 1등도 되고, 선생님들의 예쁨도 받았다. 대체로 그런 삶을 행복하다고 하는 거겠지? “삼신아, 네가 참 부러워!”라는 여자애들의 감탄사는 별로 위로가 되진 못 했지만.

  삼신은 탕 두 개만 청소하고 나가면 된다. 나머진 엄마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런데도 힘들어서 삐질삐질 땀이 났다. 얼굴을 씻고 밖으로 나오니 등이 흥건했다. 아빠는 삼신에게 포카리스웨트를 줬다.

 “수고했다. 올라가자.”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아빠는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삼신은 귀담아 듣지 않는 대신 말이 끝날 때마다 정말요?” “세상에!” “그러게요.”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피곤했다.

 “엄마가 미안해하더라.”

 정말요?”

 그럴 만도 하지 사실 나도 거기엔 책임이 있고.”

 세상에!”

 금란이가 어찌나 떼를 쓰던지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이해해주렴. 예전엔 형편이 안 됐지만 지금은 하고 싶다고 하면 어느 정도는 해줄 수 있잖니?”

 그러게요.”

 삼신은 중얼거리다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 잠깐만. 뭐라고요?”

 금란이 바이올린 강습 말이다.”

 아빠는 현관문을 열며 삼신을 바라봤다.

 너도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하고 싶다고 졸랐잖니.”

 삼신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  기억하고 계셨네요.

 기억하다마다. 금란이만큼은 아니었지만 신이 너도 졸랐잖니?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도 처음이었지. 그 땐 어쩔 수 없었지만 , 예전 일이니까. 넌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가잖니.”

 아빠는 문을 열었다.

 “집 형편 늘 이해해줘서 고맙다.”

 삼신은 바닥을 쳐다봤다.

 “아니에요.”

 삼신은 상냥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아빠 말대로 예전 일인데요.”

 “그래…… 예전 일이지.”

 금은동이 뛰쳐나왔다.

 “아빠!”

 아빠는 품을 벌려 그 셋을 한꺼번에 껴안았다. 삼신은 신발을 벗고 들어와 물을 마셨다. 갑자기 목이 말랐다. 삼신은 다섯 컵이나 가득 따라 마셨다.

 

 그 날 밤엔 오줌을 많이 쌌다. 내일이 입학식인데 난 몰라! 새벽 두 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뒤척이던 삼신은 다시 한 번 찾아온 요기 때문에 발딱 일어났다.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 삼신의 자리에 금란이 팔을 올려놓고 있었다. 삼신은 드르륵 문을 닫았다. 그리곤 금란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창문이 조금 흔들렸다.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이불 위로 줄무늬를 그렸다. 금란은 새근새근 잤다. 친구랑 바이올린 강습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쓸 땐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휴지 곽을 집어던졌던 주제에 숨소리는 새근새근 얌전했다. 엄마와 아빠는 금란을 달래기 위해 절절 매며 손을 들었다. “금란아, 알겠다. 어떻게든 알아보마. 싼 곳도 있을 거다.”라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금란은 떼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곤 얼마 후 정말 레슨을 받기 위해 백화점에 갔다.

 삼신은 3년 전 자신도 휴지 곽을 집어던졌더라면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좀 더 울며불며 난리를 쳤어야 했나. 아니면 좀 더 소리를 질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의젓한 척을 하느라고 너무 약하게 나갔던 걸지도 모른다. 삼신은 3년 전 부모님이 삼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미안한데, 신아. 우리 형편 알잖니. 잘 하다가 왜 갑자기 떼를 쓰고 그러니? 엄마 아빠 힘든 거 알잖아…….” 그 때도 목욕탕을 했었다. 빚도 있었고, 두 분은 늦게까지 일을 했다. 지금이랑 다를 바는 없었다.

 삼신은 자고 있는 금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 애의 얼굴 위로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삼신은 계속해서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밟아버릴 수도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더 세게 불어서 창문이 마구 흔들렸다. 금란이 얼굴을 찡그리곤 입술을 오물거리며 이를 갈았다. 삼신은 갑자기 마음이 텅 빈 것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그렇게 느꼈다. 누군가 나쁜 것들을 소각해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좋은 것들까지도. 삼신은 발을 내려놓곤 금란의 팔을 치우고 제 자리로 기어들어갔다. 이불 속은 미지근했다.

 ‘괜찮아. 이제 와서 바이올린 같은 거 배워서 뭐하겠어.’

 삼신은 좋은 것들이 제 속에서 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가슴이 뜨거웠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서운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신은 빨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입학식 같은 것들. 삼신의 소꿉친구 차유성은 이래고등학교에 간다. 삼신이랑 똑같다.

 ‘내일 유성이랑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난 거기서 일등을 하는 거야.’

 ‘학년 대표로 학생 선서도 읽는 거지.

 ‘내가 일등일까? 중학교에선 내가 전교 일등이었는데.’

 ‘일등이면 좋겠다.’

 ‘장학금도 줄까?’

 삼신은 새벽 3시 무렵에 잠들었다.

 

 꿈을 꿨다. 학년 대표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꿈이었다. 삼신은 교정 앞으로 나가 선서를 했다. 전교생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날, 삼신은 정말 신입생 대표로 불려나갔다. 데자뷰라는 게 정말 있구나. 삼신은 선서를 외치며 그렇게 생각했다.

 “-!”

 입학식이 마무리 되고, 남은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삼신은 유성을 찾았다. 삼신은 방학 동안 뜨문뜨문 봤던 소꿉친구의 뒤통수가 많이 자라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어깨 근처에 있었다.

 “너 머리 많이 길었네!”

 유성은 낄낄 웃었다.

 “~ 신입생대표~ 넌 키가 하나도 안 자랐어.”

 “괜찮아! 우리 엄마도 고1때 갑자기 컸대. 나도 그럴 거야.”

 과연…….”

 삼신은 헤실헤실 웃었다.

 우리 같은 반일까?”

 “글쎄!”

 유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귀에 붙은 십자가가 햇살 아래서 반짝거렸다. 아이들이 흘끔흘끔 유성과 삼신을 바라보았다. 혼자였다면 신경을 썼겠지만 유성과 함께 있어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여기 동아리 되게 많대! 음악 동아리도 있을까? 넌 뭐 들을 거야? 나도 같이 들을까?”

아직 안 정했는데 학생회도 괜찮대서. 동아리 말고 거기 들어가는 것도 생각 중이야.”

  학생회라는 말에 근처에 선 여자애가 흘끔, 유성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뒤돌아 제 친구들과 무언가를 속닥이기 시작했다. 삼신은 유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눈치 챘지만 유성은 눈치 채지 못 했다. 어쩌면 알고 있는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유성은 늘 그랬다. 삼신은 항상 그게 신기했다.

 ! 학생회 좋지! 넌 잘 할 거야.”

 삼신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여기도 점심시간에 음악을 틀까? 네가 방송부에 들어가면 끝내주는 DJ가 될 텐데. 그런데 방과 후에 남아서 할 일이 많으면 난 못 하겠다.”

 “내가 알기론 여기 동아리 강참일 걸? 넌 여유로운 데 알아봐야겠다.”

 “여유로울만한 곳이 있을까?”

 “찾아보면 어디든 있겠지.”

 “그렇겠지…….”

 삼신은 교정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입학식이 끝나고 교사의 지시를 기다리는 학생들은 어수선하게 흩어져있었다. 벌써 어색하게나마 통성명을 마치고 말을 트는 아이들도 여럿 보였다. 삼학년은 이미 몇 명은 교실로 돌아가고 있었고, 이학년들은 근처에 모여 휴대폰을 만지거나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삼신은 운동화 끝으로 돌을 굴리며 바닥을 보고 있는 이학년을 보았다. 삼신보다 한 줄 너머에 있어 얼굴이며 뒤통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학년 줄에 있었으므로 선배처럼 보였다. 휴대폰을 만지거나 다른 친구들과 떠들지 않아서 분위기가 좀 차분해보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허겁지겁 걸어와선, 그 이학년을 붙잡았다. 삼신은 궁금해서 등을 젖히곤 그쪽을 바라보려 애썼다. 소리는 뜨문뜨문 잘 들리지 않았다.

  소방서…… 베란다 전기장판……. 병원 미안하다…….”

 가족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어쨌든 병원이라고 했으니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삼신은 이학년이 우뚝 서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걸 보았다. 금란이도 불안하면 저렇게 하는데…….

 “! 뭐해, 가자!”

 줄이 이동하는데도 뒤에서 움직이지 않는 삼신을 부르며, 유성이 걸어왔다. 삼신은 자세를 바로하곤 기지개를 폈다. 그리곤 다시 흘끔 그쪽을 바라봤다. 이학년과 남자가 운동장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유성아!”

 삼신이 유성의 등에 바짝 붙으며 앞으로 걸었다.

 오늘이 누군가한텐 너무 나쁜 일이 벌어진 날인가 봐.”

 “육십억 인류가 빠짐없이 행복에 젖은 날은 아주 드물 거야.”

 유성은 삼신이 바라보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선배한테 나쁜 일이 벌어졌단 소리지?”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삼신은 더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앞으로만 걸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행을 열심히 추론하는 건 실례니까 그냥 미스터리로 접어둘래.”

 

 며칠 뒤, 삼신은 부 활동 게시판에서 미스터리 부를 발견했다. 뭐 기막힌 우연, 입학식의 기억,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이름에 끌려 공고를 훑어봤을 뿐이다.

 ! 이런 부도 다 있네.”

 삼신이 깔깔거렸다.

 진짜 웃기다 미스터리 부래!”

 “신입생, 우리 부 이름이 웃겨?”

 “엄마야!”

 삼신이 주춤 물러났다. 언제 왔는지 게시판 근처에 기댄 남학생이 저를 보고 있었다. 삼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향했다. 명찰이 초록색이었다. , , .

 , 2학년이다…….’

 “비웃음의 의미는 아니었어요, 선배님!”

 삼신이 양손을 모았다.

 이름이 너무 창의적이잖아요! 무슨 활동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요!”

 “그래서 미스터리부지.”

  현진은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떴다. 무섭다! 삼신은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선배님도 미스터리부이신가요?”

 “내가 부장이야.”

 “!”

 반사적으로 감탄사를 뱉어놓고, 삼신은 할 말을 찾는다고 꿈질거렸다.

 쩐다!”

 “뭐가 쩔어.”

 “그냥요!”

 삼신은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아주 크게 떴다.

 “!”

 “또 왜.”

 “저희 아는 사이에요!”

 삼신은 현진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저 다크서클 저 얇은 손목…… 확실해! 선배는 유성이네 옆집 사는 오빠죠?!”

 “유성이?”

 현진이 삼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오래 걸리지 않고 해답을 찾았다.

 , 너 걔네 집 들락거리는 애구나.”

 “맞아요! ! 유성이네 옆집에 미스테리부 부장님이 살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나도 네가 우리 학교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연이 기막히네요!”

 현진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게 기막혀? . 우리 부 들어오게?”

 “몰라요. 거기 방과 후에도 할 일 많아요?”

 현진은 즉답했다.

 아니.”

 그리곤 덧붙였다.

 “근데 네가 원하면 너 알아서 만들 수도 있고.”

 “잘 됐다! 전 바빠서 활동 많은 동아리는 못 들어가거든요.”

 삼신은 기뻐하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마음을 결정하면 문자할게요. 번호 주세요.”

 현진이 다시 한 번 눈을 가늘게 떴지만, 삼신은 가능하면 무서워하지 않으려 애썼다. 현진이 번호를 찍었다. 삼신이 저장했다. 저장명은 미부 부장님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부장!”

 삼신이 손을 흔들었다. 현진은 흔들지 않았다. 대신 잘가라고 말했다. 그리곤 게시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과 후에, 삼신은 버스를 타고 사거리로 나갔다. 음반 매장에 들릴 참이었다. 봄이라 히터는 틀어놓지 않았지만 여전히 인공적인 공기의 냄새가 났다. 삼신은 자동문을 열고 들어갔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 여럿 보였다. 엑소 코너에 여학생들이 몰려 있었다. 엑소는 잘생겼다. 하지만 그게 삼신의 마음을 끌어본 적은 없었다. 춤도 노래도 잘 추고 잘 부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것들을 쫓다보면 공부가 싫어질 지도 모르니까. 신곡이 나온 거겠지. 삼신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코너로 갔다. 늘 가는 그 장소에 서서 헤드폰을 썼다.

 오늘은 무엇을 들을까. 삼신은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잠깐 고민했다. Sia 노래를 두 곡 들었다. 한 곡이 남았다. 뭘 듣지? 고민하던 삼신은 머뭇거리다가 바이올린 소나타를 틀었다. 악마의 트릴은 삼신이 제일 좋아하는 바이올린 곡이다. 이것도 유성이가 들려줬다. 악마의 트릴은 3악장으로 구성된 16분짜리 곡으로, 바이올린 연주의 대가였던 주세페 타르티니의 작품답게 기교가 많고 화려했다. 삼신은 곡보다 그 일화를 더 좋아했다. 어느 날 주세페는 악마와 계약하는 꿈을 꾼다. 악마는 소원을 죄다 들어주었는데, 그는 악마가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 알고 싶어 악마에게 자신의 바이올린을 건네준다. 그리곤 놀라움을 금치 못 한다. 악마가 너무 아름답게 바이올린을 연주해냈던 것이다! 그건 그가 평생토록 꿈꾸어 왔거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바이올린을 들고 방금 전 자신이 들은 것을 악보로 옮겨 보았지만, 결국엔 헛된 일이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인 악마의 소나타를 작곡할 수 있었음에도, 꿈에서 들었던 악마의 감동적인 음악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주세페는 부자였나 봐. 악마한테 덥석 바이올린을 줄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노래를 들으며, 삼신은 생각했다.

 ‘금란이가 떼를 쓰면 엄마 아빠는 걔한테 바이올린도 사줄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생각해서 무슨 의미가 있지? 삼신은 천천히 헤드폰을 내려놨다. 악마의 트릴이 조금씩 헤드폰 밖으로 새어나왔다. 주먹을 쥐었다 펴봤다 해볼까. 금란이처럼, 아니면 입학식의 그 이학년처럼. 그 이학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나쁜 일이었을까? 떼를 쓰고, 울부짖고, 휴지 곽을 던져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쁜 일은 그런 걸론 도저히 막아지지 않는 법이니까. 바이올린은 너무 오래 전의 일이었고, 삼신은 그 때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까마득해서 떠올릴 수 없었다. 기억은 생생한데 감정은 저 너머로 소실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입학식 전날 태워버렸던 것들 중에 그것도 껴있었을 지도 모른다. 태운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때론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더는 궁금해 해선 안 되는 것들일 때도 있다. 그 감정을 떠올린다고 해서 지금 자신에게 득 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때론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것이 스스로를 지켜내는 때도 있는 법이다. 삼신은 삶이 중요했다. 삶을 지켜야 했다. 계속 살아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면 언젠가 악마가 내게 찾아왔을 때 바이올린도 줄 수 있겠지. 그럼 그건 성공한 인생일 지도 모른다.

 

 삼신은 휴대폰을 열고 자판을 눌렀다. , , , , . 그리곤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오래 걸릴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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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나이 먹기»
1차/old 2019. 10. 8. 18:33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이삼신은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 
 운동장엔 몇 백 명의 학생이 빽빽하게 서서 앞을 보고있다. 징글징글할 정도로 많은 정수리들이다. 신입생들은 헐렁하고 빳빳한 교복 같은 표정을 짓고, 윗 학년들은 자세를 풀고 늘어져있었다. 삼 년 동안 딱 세 번만 견디면 다 되는 일인데 그걸 참기가 힘들다. 하긴, 그렇게 치면 시험도 일 년에 고작 두 번이다. 하기 싫은 일은 설령 백 년에 한 번이라도 참기 힘들겠지. 뭐 그렇게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개가 짖었던 것이다. 
 ‘컹!’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삼신은 분명히 들었다. 빽빽한 정수리 가운데 머리 하나가 먼 풍경으로 팩, 젖혀졌다. 
 갈색일까? 아니, 까만색일 것이다. 이 동네 갈색 개들은 다 캉캉 짖는다. 컹컹 짖는 건 까만 놈들이다. 털처럼 소리도 짙고 우렁찬 것이다. 삼신이 매일 저녁밥을 먹이고 있으니 목청도 분명 그 밥심 덕일 테다. 학교 오르막길을 내려와 좁은 골목길을 누빌 때면 떠돌이 개들이 귀신같이 삼신 냄새를 맡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지갑이 여유로운 날엔 대형마트에 들러 애견용 간식을 샀지만, 대게는 그렇지 않아서 삼신은 그들을 향해 빈 두 손을 흔들어 보이곤 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네들 몫이 없다.” 그래도 개들은 멈추지 않고 삼신의 뒤를 따라왔다. 이발소를 지나고 전봇대를 지나면 낡은 동네 목욕탕이 나왔다. 굴뚝에서 연기가 펄펄 솟으면 영업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동네 어르신들이 ‘빠께스’를 들고 벅벅 때를 밀고 가는 곳이다. 삼신의 집은 목욕탕 건물 삼층이다. 삼신은 고개를 들어 옥상에 옷이 널려있나 확인한다. 하지만 쌍둥이 여동생들은 집안일에 보탬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옥상에 옷을 너는 건 항상 삼신 몫이었다. 
 그 때까지 따라온 개들이 목욕탕 입구에서 컹컹 캉캉 짖어대면 삼신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여긴 따라오지 마. 얼른 가.” 떠돌이 개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꼬리를 흔들어서 좋았다. 백 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줘 봐야 동생들은 삼신 속만 긁는데, 개들은 아니었다. 삼신은 동생들 밥 챙기는 일보다 마트에서 개껌 사는 일이 더 즐거웠다. 취직하면 이놈의 집을 박차고 나와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면 밤에도 공부를 할 마음이 생겼다. 일학년 성적은 좋았으니 이 년만 더 잘하면 됐다. 개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할 것이다. 이미 멘트는 다 준비해뒀다. 편식심한 우리 막내 남동생이 남긴 밥을 해치워줘서 고마웠어. 너희들 덕분에 음식물 쓰레기봉투 값도 아끼고 좋았단다. 20리터 한 장에 570원이나 하거든. 모쪼록 다들 개장수 조심하고 열심히 살길 바란다. 
 어쨌든 개들은 헤어질 때도 만날 때도 컹컹 캉캉 짖어대는 정다운 짐승들이다. 이삼신은 이 동네 떠돌이들의 ‘짖음’을 먹여 살리는 일꾼이었다. 컹컹이든 캉캉이든 다 좋았다. 어디서 울려 퍼지던 귀를 기울여 들을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 목욕탕 꼭대기 옥탑 방을 떠나게 되면, 동생들이야 울며불며 매달리겠지만 개들은 늘 그랬듯 컹컹 울어줄 것이었다. 정다운 짐승들. 울음소리를 들으면 이삼신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이따금 밤마다 우우우, 컹컹컹 짖는 놈들의 연설에 함께하고 싶었다. 짝짓고 머물고 떠돌고 배를 굶주리고 배를 채우는 삶에 대한 연설 말이다. 튼튼한 발바닥을 가진 떠돌이 개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삼신에게도 튼튼한 발바닥이, 삶에 대한 굳은살이 필요했다. 하지만 삼신은 사람이고 학생이라서, 혀를 쭉 내밀고 거리를 쏘다니는 걸론 그 굳은살을 키울 수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등급과 내신, 모의고사와 싸웠다. 붐비는 학원버스가 제 또래 학생들을 가득 태우고 사거리로 떠날 때, 채점하다 아는 문제를 틀렸을 때, 밤마다 초등학교 영어교실에서 받아온 시험지를 채점할 때, 가슴은 느닷없이 답답해졌다가 아주 단단해졌다. 삼신은 그게 자신의 굳은살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입학식 때 말이다. 그 느닷없는 컹! 이 들이닥쳤을 때, 삼신은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교정에 맑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교장의 훈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새 학기가 되고 후배가 생긴다는 건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열심히 살면 복이 오겠지. 돈도 많이 벌고 개도 키워야지. 성장은 가진 로망을 깨부수면서 찾아온다는 점에서 불유쾌하지만, 성인이 된다는 건 결국 제 한몫을 해내기 위해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이다. 굳은살을 충분히 만들어 놓지 않으면 어디를 떠돌아야 하는 지도 모르고 짖는 법도 잊다가 개장수에게 끌려갈 것이다. 
 이삼신은 성공할 것이다. 컹! 이 살아있는 한은. “취직하면 이놈의 집을 박차고 나와야지.”는 삼신의 컹컹컹이었고, 아직 그녀는 짖는 법을 잊지 않았다. 그걸 잊지 않으려고 열심히 산다. 좋은 일인진 모르겠다. 
 이 학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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