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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커플 타투»
1차/old 2019. 10. 20. 00:52

 힘썬은 아라를 통해 강시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강시는 중국 귀신인데 굳어진 시체라는 뜻으로, 죽었지만 움직이며 사람을 해치는 요물이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본 강시는 아라의 강시보다 귀엽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아라가 의도한 강시는 중국의 강시와는 다른 종류일 지도 모른다. 휴식시간이 주어졌을 때 아라에게 그 소리를 했더니 아라가 두 손을 모으고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지금도?” 하지만 아라는 여전히 귀여웠기 때문에 힘썬은 대답했다. “응, 지금도.”

 깜깜한 교실에 한 시간이 좀 넘게 박혀 있다가 휴식시간을 받고 바깥으로 나오니 눈이 부셨다. 힘썬은 시야에 빛이 익숙해질 때까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몇 번 정도 깜빡인 후에야 곁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는 아라가 눈에 들어왔다. 아라는 힘썬을 보고는 히죽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가, 힘썬이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머리에 박힌 나사를 돌리기 시작하자 웃음이 터져 겁주는 포즈를 그만두었다. “안 무섭다, 큰일이야!” 아라가 즐겁게 말했다. 힘썬은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야?” 힘썬이 되묻자 아라가 정정했다. “사실 그렇게 큰일은 아니야.” 왜냐하면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니니까 누군가를 겁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귀신의 집이 잠시 정리에 들어간 동안, 두 사람은 부스를 돌기로 했다. 힘썬은 머리에 박힌 나사를 뽑아 창가에 기대놓았다. 아라는 햇빛 아래서 반짝이는 거대한 나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운동장에 가보자고 말했다.
 “뭔가 있을 거 같아. 아까부터 사람들이 자꾸 들락거리더라!”
 그래서 두 사람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힘썬은 아라의 손을 흘끔거리다가 타이밍에 맞춰 쑥 집어넣었다. 아라는 깜짝 놀란 기색 없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잠깐 생각하다가 손을 잡아주었다. 힘썬의 눈동자 광채가 바쁘게 빙글빙글 돌더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힘썬은 발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면서 아라에게 물었다.
 “운동장에 가서 뭘 할 거니?”
 “흠, 재미있어 보이는 걸 하자.”
 아라는 즐겁게 대답했다.
 “둘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더 좋겠지.”
 운동장에는 천막이 구석구석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파란 지붕이 운동장의 풍경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시원해보였다. 운동장 한구석에서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물 로켓이 보였다. 와글거리는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게 보였다. 힘썬은 발걸음을 멈추고, 앞서 가려는 아라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아라가 습관처럼 들리는 “응?”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힘썬은 천막 아래에 붙은 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어떠니, 아라?”
 아라는 힘썬의 손끝을 읽고는 대답했다.
 “난 좋아.”
 의자에 앉아 팔을 내밀면서, 힘썬은 옆자리에 앉아 똑같이 팔을 내밀고 있는 아라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아라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힘썬은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웃었고, 그건 좋은 신호가 된 것 같았다. 아라가 마주 웃어주자 꼭 그녀가 고양이처럼 보였다.
 “저기, 뭐로 하실 거예요?”
 두 사람의 손목을 번갈아 두드리던 부스 학생이 물었다.
 힘썬이 고개를 돌리며 습관처럼 입을 벌렸다.
 “오-,”
 학생이 두 사람을 위해 타투 종류를 정리한 표를 내밀었다.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아라가 옆으로 고개를 내미는 게 느껴졌다. 힘썬은 옆으로 조금 비켜나며 아라의 옆모습을 한 번 더 훔쳐보았고, 그 순간 마음을 결정했다.
 힘썬이 손가락으로 고양이 모양을 가리키며 비장하게 말했다.
 “나 이게 좋아.”
 아라는 강아지 모양 타투를 쳐다보다 말고 힘썬의 손가락 쪽으로 시선을 이동했다.
 “고양이?”
 “오, 맞아. 아라 너를 닮은 것 같아.”
 그런 후 힘썬은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강아지도 좋단다.”
 아라는 고양이를 가리켰다.
 “이걸로 해주세요.”
 타투를 받는 동안 힘썬은 아라에게 강아지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라가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 퐁퐁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의 배경화면이 퐁퐁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아라의 목소리에는 확신으로 가득 찬 긍정적 감정이 느껴졌다. 힘썬은 퐁퐁을 만나보지 않았는데도 벌써 퐁퐁이 좋아졌다.
 “나중에 만나보고 싶어.”
 힘썬이 그렇게 말하자, 아라는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똑같은 타투를 달고 천막 아래를 빠져나왔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힘썬은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대고, 햇빛을 향해 발사되어 날아가는 물로켓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라가 손목을 매만지며 즐거워했다.
 “타투하길 잘한 것 같아.”
 “맞아, 아라 너와 똑같은 타투를 해서 기뻐.”
 힘썬이 차양을 만들던 손바닥을 떼어내고는 아라를 보며 씨익 웃었다. 똑같은 무언가를 몸에 새기는 일이 가지는 특별함에 대한 단어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어렵지 않게 그 비슷한 단어가 떠올랐다. 힘썬이 말했다.
 “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방금 ‘커플’ 타투를 하고 나온 거야. 그렇지?”
 그러자 아까 전, 복도를 걷다 말고 느닷없이 썬의 손바닥이 아라의 손을 붙잡았을 때처럼, 아라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흔쾌히, 기꺼이 혹은 그에 합당하게 웃어주면서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맞아, 완전 귀여운 커플타투 했어.”
 그러자 힘썬의 눈동자 광채가 바쁘게 빙글빙글 돌더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19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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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청춘! 유성우»
1차/old 2019. 10. 10. 18:20

1.

언젠가는 변덕을 부리고 싶어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유성우가 내리던 날이었다. 힘썬은 구태여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것, 대기권을 뚫고 떨어지는 수많은 돌 알갱이들과 박자를 맞추기로 했다. 원한다면 100km도 넘게 질주할 수 있었지만 힘썬은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불타 사라지고 있는 그들처럼 빛을 뿜으며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평균 50km/s의 속도로 떨어지는 별들-그것은 사실 별들이라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별로 취급되었다-과 함께 추락하던 순간을… 힘썬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그 날에 태어난 누군가와 만나게 된 이후에는 그것을 꽤 낭만적인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힘썬은 달리는 성우의 등을 보면서 속도를 늦췄다. 눈을 크게 뜨고 있어서 성우의 이마에서 흩어지는 작은 땀방울 하나하나의 광채를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었다. 조금 젖은 뒤통수, 앞서 나가기 위해 좌우로 흔드는 두 팔을 보고 있자면 의도하지 않아도 속도가 절로 느려지고는 했다. 성우는 단숨에 앞서 나갔고, 얼마 가지 않아 결승선에 도달해 발을 멈추었다. 힘썬은 성우보다 다섯 발자국 정도 늦게 도착했다. 성우는 옅은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힘썬을 돌아보았다. 힘썬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성우처럼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닦아내야할 만큼의 양이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다음번에 뛸 때는 보다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힘썬은 생각했다. 성우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숨이 가빠보였다.

“한 판 더해!”

“오, 하지만 네가 이겼는걸.”

힘썬이 기분 좋게 말했다.

“보통 그 대사는 진 쪽이 하는 것 아니니, 성우?”

성우는 흠, 하고 힘썬을 쳐다봤다.

“역시 일부러 져준 느낌이 든단 말이야.”

힘썬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대답하지 않을 자유는 있었으므로 미지근하고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대답해야만 한다면 몇 가지 변명을 할 생각이었다. 첫째로 힘썬의 몸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고-심지어 제대로 완성되어 있지 않다-둘째로 어느 정도의 속도가 공평한지 몰랐기 때문이다. 달리기 시합을 위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로 신체를 조정하고 맞춰야 하는지 아직 힘썬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성우에게 관용을 베풀기 위해 고의적으로 승부를 조작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성우가 처음 달리기 시합을 신청했을 때, 힘썬은 흔쾌히 대답하면서도 왜 성우가 그런 것을 원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성우는 힘썬에게, “네가 빛의 속도로 달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그것 역시 곰곰이 뜯어보면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이 질 것을 상정하고 승부를 신청했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인간세상에서 승부란 이기기 위한 게임이 아닌가. 성우는 이기지 않아도 상관없는 승부를 힘썬에게 신청해서 과연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첫날 두 사람은 운동장에 나란히 서서 한 트랙을 코스로 잡고 3을 거꾸로 셌다. 그런 후 쏜살같이 튀어나가 두 팔과 다리를 열심히 흔들어대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힘썬은 지금보다 훨씬 못 달렸다. 성우의 속도를 손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속도를 의도적으로 자꾸만 늦췄고, 그래서 결승선에 도착했을 땐 성우도 자신의 승리가 어느 정도 힘썬의 의도가 들어간 성적임을 눈치 챘다. 성우는 힘썬을 돌아보자마자 “한 판 더!”를 외쳤다. “한 번만 더 달리자구.” 힘썬은 달아오르기 시작한 성우의 두 뺨을 바라보면서 좋다고 대답했다. “좋아, 계속 달리자.” “이번엔 봐주지 말고.” 성우가 힘주어 말했다. “정말이야, 봐주기 없음이야.”

하지만 봐준다던가, 혹은 전력을 다한다던가 하는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힘썬의 몸이 인간에 보다 가까워져야했기에 성우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힘썬은 점점 성우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아슬아슬하게 결승선을 넘었지만, 성우는 여전히 힘썬의 어떤 것들이 궁금한 것처럼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몇 주째 같은 트렉을 돌고 또 돈 후에야 힘썬은 어렴풋하게 성우가 사실은 이기거나 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힘썬’이라는 마법사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달리기 시합을 신청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쩌면 성우는 인간을 흉내 내어 페어플레이를 하자는 게 아니라, 마법사인 채로 남아 일시적이지만 동일한 목표를 자신과 함께 달성해주기를 바랐던 걸지도. 그러자 달리기 시합에서 더는 발을 맞추기 위해 애쓰거나 자신의 몸 상태를 조정하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힘썬은 달리는 성우에 대해 관찰하기 시작했고, 곧 달리는 인간이란 굉장히 근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힘썬은 젖은 등, 흩날리는 땀방울, 달리느라 긴장된 몸의 상태와 빠른 호흡 따위를 사랑하게 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 없이 성우보다 늦게 결승선에 도착했음에도 과정이 달라져 있었으므로 의미가 있었다.

하루는 운동장을 연속으로 다섯 바퀴째 돌았다. 힘썬조차 기진맥진할 만큼 뛴 후에 두 사람 모두 결승선보다 몇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벌렁 드러누웠다. 성우는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갈라진 숨소리를 냈다. 땀이 쩔쩔 흘러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힘썬은 자신의 두 뺨을 더듬거리며 만져보았다. 무척이나 뜨거웠고, 보통의 인간 같았다. 어쩌면 다음 시합에서는 전력을 다해도 성우에게 질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도 성우는 내가 의도적으로 지고 만 거라는 생각을 할까. 성우를 기쁘게 해주려면 정말 빛의 속도로 뛰어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고 있는데, 성우가 헐떡이며 말했다.

“정말로, 아, 진짜 힘들다.”

힘썬도 마찬가지로 헐떡이며 대답했다.

“나도, 힘들어.”

“내가 더, 힘들 걸?”

“아니야, 똑같이, 힘들어.”

힘썬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랑 달릴수록, 진짜로, 인간의 몸으로 변하고 있거든!”

성우는 잠시 그 자리에 누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이마 언저리가 무척이나 시원했다. 힘썬은 저절로 눈이 감겼다. 갑자기 끝내주게 좋은 기분이 되어 당장에 잠들고 싶었다. 운동장 트렉 한 가운데서 자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태함을 배워가고 있는 것일까? 그때 갑자기 성우가 말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꼭 소년만화의 한 장면 같아.”

힘썬은 소년만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성우는 고개를 돌려 힘썬을 바라보고는 킬킬거렸다.

“완전 청춘! 같은 느낌의 이야기 말이야.”

“청춘! 같은 느낌은 어떤 느낌이지?”

“으음.”

그러자 성우는 두 손을 몸 위에 얹고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힘썬은 성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맑고, 구름이 많아서 바람이 어디로 흐르는지가 잘 보였다.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구름들이 천천히 좌측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인공잔디에서 희미하게 고무냄새가 올라왔다.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느낌?”

성우는 천천히 눈을 감고 기분 좋게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마법사 친구랑 만나서 이런 날씨에 달리기를 하고 말이야. 완전 운명이라니까.”

그건 성우의 말버릇(우리는 운명) 중 하나였다. 힘썬은 운명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성우를 흉내 내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바람의 결들을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게 청춘이거나 운명일까. 마음이 놓이면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그래서 어디서든 자고 싶어지는 이런 기분이 청춘! 이라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운명이 무엇인지는 조금 알고 있었다. 그건 어떤 극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마법 같지만 마법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기막힌 우연을 성우는 운명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 힘썬도 어느 정도는 할 말이 있었다. 있지, 라고 힘썬이 말했다.

“지난번에 발표를 할 때, 성우 네가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우가 쏟아지던 날에 태어났다고 했잖아, 그렇지.”

힘썬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맞고 있는 성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내가 그 날 떨어지던 별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어. 네가 태어나던 날에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성우 네 이름은 유성우가 되었고 말이야.”

성우가 눈을 뜨고 힘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성우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조금 벌리고 있었다. 힘썬이 물었다.

“성우, 이것도 운명이니?”

성우의 귀가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힘썬은 생각했다.

음, 이 순간 역시도 청춘! 인가!

(혹은 낭만일 지도.)

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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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은 의도적으로 그늘 바깥에 서있었다. 보송보송하고 건조한 햇발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레이첼은 느긋하게 나무 그늘을 요리조리 피하며 운동장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교실을 빠져나온 힘썬은 스탠드 쪽으로 걸어갔다. 운동장 중앙에서는 축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을 차거나 패스해 골대에 넣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몸을 사용하기 때문에 스포츠라고 한다. 남자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패스! 패스!”

 “패th해!”

 다음 순간, 뻥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공이 날았다. 힘썬은 눈을 크게 떴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질 위치에 레이첼이 걷고 있었다. 힘썬은 어렵지 않게 머리통에 직격으로 강타한 공의 위력이 가져올 비극을 떠올렸다. 상상속의 레이첼이 운동장 바닥에 누워 쓰러져 있다. 피가 흐르거나 흐르지 않는다. 어쨌든 레이첼에게 나쁜 일이 닥쳐 모두가 모인다. 힘썬은 레이첼을 지키지 못해 스스로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다음 순간 노란 빛 한줄기가 스탠드로부터 운동장 가장자리를 쏜살같이 가로질렀다. 레이첼이 악 소리와 함께 인공 잔디 위로 엎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공이 나무를 맞고 튕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힘썬은 조금 뒤에 정신을 차렸다. 레이첼이 자신의 큼지막한 몸 아래에 깔려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멍한 얼굴이었다. 힘썬은 질겁하며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오, 어떡해!!”

레이첼은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힘썬이 시야를 가렸다. 레이첼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내가, 부딪쳐서, 레이첼 너 괜찮니?!”

“야, 누가 공 좀 주워!”

힘썬이 레이첼을 안절부절 못하며 일으켜 세웠다. 레이첼은 아야야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가 다시 한 번 힘썬을 쳐다봤다. 힘썬은 레이첼의 머리카락에 붙은 인공잔디를 보았다.

“야, 김민수 너 공 주워와!”

땀을 뻘뻘 흘리며 남자아이 하나가 두 사람을 스쳐갔다. 레이첼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힘썬은 레이첼이 무언가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손끝이 서늘해지더니 곧 온몸이 허예졌다.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지면 좋지? 그러나 잠시 후, 레이첼의 눈동자에 광채가 돌아왔다. 레이첼은 힘썬의 표정을 보더니 갑자기 입을 벌리고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힘썬은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심각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레이첼의 머리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버린 게 분명했다!

“오, 레이첼!!”

힘썬이 레이첼의 어깨를 붙잡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레이첼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땅을 치며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기세에 깜짝 놀란 힘썬이 입을 다물었다. 햇발이 레이첼의 눈동자를 자꾸만 투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레이첼이 말했다.

“썬아, 큰일이야. 나 머릿속에 인공잔디가 들어가 버렸어….”

힘썬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뭐라고?!”

“아, 느껴져, 지금… 안에서 쑥쑥 자라고 있어. 어, 막 간지러워. 어떡하지?”

“아악!!!”

힘썬은 벌떡 일어나 두 뺨을 붙잡았다.

“오, 어떡해!! 그런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물론 난 침착할 테지만-아니야, 침착할 수 없어! 하지만 이 일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우선 그게 다 자라서 레이첼 너의 뇌의 통제권을 앗아가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겠어!”

레이첼은 이제 거의 죽으려고 했다. 너무 웃어대서 기운이 없어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 축 늘어져서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호흡을 정돈하기에 이르렀다. 그 모습이 힘썬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레이첼을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리고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레이첼이 손을 뻗으며 다리를 퍼덕였다.

“잠깐, 잠깐만!”

급정거하는 바람에 힘썬 주변으로 먼지가 날렸다. 레이첼은 힘썬의 품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후 머리카락에 붙은 인공잔디를 떼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과학자가 신소재를 발견한 것처럼 엄지와 검지로 들어올렸다. 힘썬은 걱정스럽게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레이첼이 말했다.

“이제 괜찮아, 짠, 봤지? 떼어냈어.”

“머리에 들어갔다며!!”

“아, 사실 거짓말이야.”

“거짓말?!”

힘썬은 그 말을 뒤늦게 이해하곤 갑자기 침착해졌다.

힘썬이 되물었다.

“거짓말이야?”

“응, 거짓말!”

레이첼은 조금 미안한 것처럼 웃었다.

“금방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다친 곳은 없는 거니?”

힘썬은 여전히 걱정스러워보였다.

“우리는 너무 세게 부딪쳤고 한바탕 뒹굴었잖아!”

“음, 너무 깜짝 놀라서 아픔 같은 건 잊어버린 것 같아. 안심해!”

레이첼은 옷을 털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왜 갑자기 날아온 거니?”

그래서 힘썬은 드디어 레이첼에게 말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 내내 레이첼을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나무그늘을 피해 천천히 걷고 있던 레이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는 것, 그런데 갑자기 날아온 공에 레이첼이 그만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털어놓자 레이첼이 눈을 찡긋거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마 난 피할 수 있었을 거야.”

“나무그늘을 피해서 걷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어.”

힘썬이 진지하게 레이첼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네가 혹시나 다치면 미안해서 물어볼 수가 없잖니!”

“그렇지만 다치지 않았으니 이제 물어볼 수 있겠다.”

레이첼이 즐겁게 말했다.

“내 목숨을 구해줘서 고마워.”

두 사람은 다시 운동장 가장자리를 천천히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자신이 ‘상상 중’이었다고 말했다. 나무그늘을 아슬아슬 피해서 걷다보면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이를테면 명림 국제고등학교가 지어지기 전 고대 주술사가 걸어놓은 비밀퍼즐의 작동 방법이 바로 나무그늘을 30번 피해 걷기라면? 그렇다면 느닷없이 발아래가 진동하고 땅에 묻혀있던 비밀의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까? 그것은 단순한 상상의 이야기였고, 힘썬 역시 그 과정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걱정하거나 어떤 일을 대비하기 위해 종종 사용하던 방법이기 때문이다. 레이첼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기 전에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었다. 힘썬은 그것을 ‘수많은 가설’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레이첼은 그 모든 과정을 포괄해 ‘상상’이라고 부르는 듯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나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애라고 생각해.”

레이첼은 여전히 그늘 바깥으로 아슬아슬 걷고 있었다.

“그걸 걱정하는 데에만 쓰고 있을 뿐이지!”

“오, 하지만 걱정이 멈추지 않는 걸, 레이첼. 나쁜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난 우리가 모두 그런 가능성에서 안전하길 바라.”

힘썬은 레이첼의 손목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운동장을 달리는 소년들은 거리낌 없이 부딪치거나 뒹굴면서 공을 차고 있었다. 이곳만 해도 그렇다. 위험은 어디서든 도사리고 있었다. 힘썬 자신조차도 누군가의 위험이다.

“하지만 힘썬, 살아가는 건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잖아.”

레이첼이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그런 일에 익숙해.”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프지 않니?”

“난 그런 일들을 상상하는 게 즐거운 걸.”

레이첼은 선선한 바람처럼 웃었다.

“나쁜 일만 오는 게 아니잖아. 나는 방금 공을 맞을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너와 멋진 대화를 하며 걷고 있으니까 말이야.”

힘썬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들어 레이첼을 바라봤다. 운동장 중앙에서 또다시 뻥 공을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에 힘썬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대신 발밑에 있을 지도 모를 비밀의 통로가 떠올랐다. 땅 밑이 진동한다면 그건 상상의 실현이 아니라 지진이 일어난 것일 테였지만, 그때가 된다면 힘썬은 레이첼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안아 올려서 쏜살같이 뛸 자신도 있었다. 힘썬은 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레이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힘썬이 미소 지었다.

“네 말이 맞아, 레이첼. 지구에 오기까지 나는 무척 많은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너와 멋진 대화를 하며 운동장을 걷고 있어.”

두 사람은 운동장을 한 바퀴 더 돌았고, 레이첼은 놀이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늘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어쨌든 날이 따뜻했으므로 그늘이든 아니든 간에 어느 곳이든 춥거나 외롭지 않았다. 공평하게 모든 곳이 온화했다. 축구를 하던 소년들이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모든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레이첼이 교정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말했다.

“조금만 있으면 너도 나처럼 재미있는 농담을 하게 될 것 같아.”

“오, 사실은 우리가 걷는 동안 한 가지 생각한 게 있어.”

힘썬이 말했다.

“네 말대로 우리 발밑에서 무언가 솟구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야. 혹시 알겠니, 레이첼? 정말 우리 밑에 무언가 있었는지도 몰라.”

“아하, 괜찮은 시도였어.”

레이첼이 즐겁게 맞장구쳤지만, 힘썬은 여전히 진지했다.

“정말이야. 터무니없는 너의 상상도 현실이 될지 몰라.”

“흠.”

레이첼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대답했다.

“맞아, 그럴 지도.”

“역시 그렇지?”

“그럼.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도 언젠가는 이루어질지 몰라. 너희들을 만났잖아. 내 상상 중 하나는 벌써 여기 있는 걸.”

레이첼은 덧붙였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오, 알고 있어.”

힘썬이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 또 네가 거짓말이라고 했더라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농담을 알아들었을 거야.”

레이첼과 계단을 오르던 힘썬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팩 젖혔다. 눈을 가늘게 뜨자 그것이 무척 잘 보였다. 그것은 나무 그늘과 양지의 경계선에 떨어져 있었다. 힘썬은 계단을 거의 다 오른 레이첼의 뒷모습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떨어진 그것은 안경이었다. 힘썬은 허리를 숙여 안경을 주워들었다. 레이첼이 늘 머리 위에 얹고 다니는 큼지막한 알의 안경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힘썬은 그것을 한 번 눈가에 가져다댔다가, 그대로 몸을 틀어 계단 쪽을 바라봤다. 레이첼은 이미 교실로 돌아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힘썬은 기분 좋은 상상을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이첼이 말해준 한 가지는 제대로 이해했다.

“예측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다….”

힘썬은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어떤 불안을, 자신을 통제하거나 괴롭게 만들었던 한 가지를 깨끗하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내일 있을 요한과의 촬영이나, 복도를 돌 때 이따금 마주치곤 하는 헤르만의 딱딱한 눈빛이 생각보다 무겁게 취급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며 걱정을 키우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레이첼의 손을 잡거나 안아 올리는 것과 비슷한 일들이, 혹은 그것보다 좋은 일, 레이첼과 함께 따뜻한 교정을 걷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번에 만나면 농담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리고 있었다.

힘썬은 안경을 내려놓고 천천히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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