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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체가 처음으로 몸을 구상하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때 힘썬과 리체는 판판한 지형에서 불과 몇 밀리미터 정도 부유한 채 나란히 떠있었다. 둘의 머리 위로는 마치 은하수처럼 아주 작고 미세한 빛의 알갱이들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살아있지만 마법사들과 달리 지성이 없고 의사소통이 되질 않아 ‘작고 조용한 친구’로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힘썬의 경우에는 그들을 ‘쥼쥼’이라고 불렀다. ‘쥼쥼’은 지구로 따지면 식물에 가까웠다.

  힘썬이 리체를 인간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은 인간의 외형이었다. 두 개의 팔과 다리가 있으며 여러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 있고 각 기관이 유기적으로 바쁘게 생명활동을 한다. 얼굴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은 개개인을 식별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고 총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눈, 코, 귀에 각각 두 개씩 분배하고 코 아래에 마지막 하나를 분배하는데 신경 써서 크게 만드는 편이 좋다. 그게 입이다.

  리체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았다. 신이 나있었지만 학습의 기쁨을 누리고 있지는 않았다. 제대로 설명을 듣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쨌든 누군가를 가르치는데 필요한 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힘썬은 설명을 계속해나갔다. 인간의 신진대사를 담당하는 장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중요한 기관이야.” 힘썬이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지 않아. 원하지 않으면 생략하고 몸만 만들어도 좋아.” 실제로 힘썬은 인간으로 변신할 적 많은 기관을 생략해왔다.

  리체가 돌발 행동을 한 건 그때였다. 단숨에 솟구쳐 오르더니 사방으로 입자를 뿌리며 번쩍번쩍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한동안 리체는 그런 식으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말고 변덕스럽게 ‘쥼쥼’의 군집으로 뛰어들었다. ‘쥼쥼’들은 깜짝 놀란 것처럼 리체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가루를 뿌려댔다. 힘썬이 쏜살같이 쫓아와 리체의 이름을 불렀지만 리체는 깔깔거리며 ‘쥼쥼’ 사이를 뒹구느라 정신이 없었다. 힘썬은 리체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그 앞에서 변신했다. 두 개의 팔과 다리를 만들고 볼록한 몸의 굴곡과 빛나는 눈동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단단한 손톱을 만들자 리체가 깜짝 놀란 것처럼 멈추어 섰다.

  “그게 무엇이냐?”
  리체가 물었다.
  “[  ]. 그건 무슨 형태인가?”
  힘썬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인간 남자’야. 

  힘썬은 리체 앞에서 빠르게 세 번 정도 변신했다. 처음에는 젊은 남자였다가 점점 나이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수명이 마법사들보다 반절쯤 짧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학습시키자, 리체는 힘썬의 변신 과정을 유심히 살피다 말고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힘썬은 리체를 이루는 빛의 입자가 주변의 분자를 끌어 모아 하나의 운집을 이루고, 무형에 가까웠던 형태가 덩어리를 갖추는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잠시 후 리체가 몸을 만들었다. 의외로 리체의 몸은 완성도가 있었다. 리체는 힘썬과 똑같은 얼굴의 남성이 되어 마주보았다. 힘썬이 만든 몸의 점 하나까지 똑같이 복사한 육신이었다. 힘썬은 리체가 자신의 설명을 아주 흘려듣지는 않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리체가 물었다.
  “어떤가?”
  “오, 훌륭히 잘 해낸 것 같아.”
  힘썬은 간단하게 감상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넌 뭔가 잘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바로 그걸세.”
  리체는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전혀 색다른 기분이 들지 않거든.”

  그러니까 리체는 힘썬의 모습을 취하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힘썬은 가까이 다가가 리체가 만든 몸을 직접 주무르고 만져보았다. 가슴팍에 귀를 바싹 대고 소리를 들어보기도 했다. 힘썬은 곧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아차렸다. 리체가 인간의 내부를 전혀 복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리체가 만든 몸에는 심장이나 핏줄, 신경이나 조직이 전혀 없었다. 리체가 만든 최초의 몸은 인간의 육신이라기보다 단백질로 만든 인형에 가까웠다. 그저 부유하던 평소의 상태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을 했을 뿐이므로 색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볼 수 없었다. 힘썬은 리체에게 처음부터 설명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썬은 리체에게 생식의 행위와 번식의 과정, 세포의 무한복사와 생성부터 다시 가르쳤다. 이미 한 번 인간의 육신을 만드는데 매료된 리체는 아까보다 훨씬 더 협조적으로 학습에 임했다. 리체는 힘썬으로부터 난생과 태생, 난태생에 대해 배웠고 또 때때로 토론도 했으며 그것에서 답을 찾기 위해 골몰하기도 했다. 마침내 리체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몸을 재생성하기 위해 웅크렸을 때, 힘썬은 이번에는 리체가 성공할 것임을 알았다. 리체는 보기 좋게 해냈다.

  “와!”
  힘썬은 리체의 가슴팍에 귀를 대보고는 기쁜 듯 말했다.
  “모든 게 완벽해, [  ].”
  “[  ]의 도움이 컸다네.”

  리체는 성취의 기쁨에 흥분해서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피가 건강하게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체는 육신이 주는 감각에 도취해 당장에 지구로 내려가 보고 싶어 했지만 발가벗고 있었으므로 힘썬에 의해 제지당했다. 힘썬은 그대로 지구로 내려갔다간 인간들이 질겁할 것이라며 리체를 말렸다.

  “오, 나도 맨 처음에 그런 실수를 했다가, 많은 인간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단다.”
  힘썬이 말했다.
  “물론 너는 지금 ‘남성’이기 때문에 설령 이 상태로 누군가에게 노출될 지라도 아주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기억해줘. 네가 ‘여성’으로 있을 때는 많은 게 교묘한 방식으로 달라질 거야.”
  “네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 [ ].”
  리체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인간사회의 유행을 알기 위해 우주로 이동한 다음, 지구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인공위성 하나에 내려앉아서 마음에 드는 전파를 골라잡았다. 리체가 일정하고 빠른 리듬에 따라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멋진 영상을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춤을 추는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클로즈업 되면서 눈동자가 반짝이거나 조명이 번쩍이는 연출이 반복되었다. 힘썬은 그게 ‘한국의 가요’라고 알려주었다. “이건 방금 내가 이 전파들을 뒤져보며 알게 된 사실인데, 이것들을 ‘케이팝’이라고 부르기도 하더구나.” 리체는 케이팝 패션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 것인지 이런류의 옷을 입어보자고 말했고, 힘썬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이번에도 리체는 약간의 실수를 저질렀다. 피부조직을 움직여 색깔을 만든 후 몸 바로 위에 옷을 입은 것처럼 ‘무언가’를 생성하려 했던 것이다. 힘썬은 옷은 살아있는 게 아니므로 세포의 생명활동 방식을 카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지만, 리체는 이런 편이 재미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힘썬은 남성의 나신으로 위성에 앉아 리체가 자신의 육신 위에 흥미롭고도 그로테스크한 시도를 반복하는 것을 얌전히 지켜보면서 때때로 송신되는 전파에 귀를 기울였다. 힘썬의 예상대로 리체가 그 행위에 질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리체가 도로 나신의 남성으로 돌아가자, 힘썬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체에게 시범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내 방식은 네게 너무 지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힘썬은 전파 하나를 리체에게 보여주면서 두 팔을 벌렸다.
  “그래서 네게 도움이 될 만한 걸 함께 보여줄게.”

  그런 후 힘썬은 곧장 여성의 몸으로 변신했다. 다음 순간 힘썬의 육신이 강하게 빛나더니 몸의 윤곽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힘썬은 빙글빙글 돌면서 그대로 다이빙했다. 주변에 생성된 빛 무리가 힘썬을 따라 쏜살같이 떨어졌다. 그녀가 두 팔을 벌리며 빙글빙글 돌자, 빛 무리가 형태를 갖추며 육신에 달라붙었다. 다음 순간 그것들이 유리처럼 깨지며 빛을 하나씩 터뜨렸고 곧 하나의 의복이 되었다. 힘썬은 매혹적으로 돌면서 솟구치다가 화려한 포즈로 인공위성 안테나 위에 착지했다.

  리체는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방금 우리가 본 게 무엇이었지?”
  “주로 어린 인간 아이들이 보는 영상물이야.”
  힘썬이 말했다.
  “인간 어른들이 흔히 마법소녀물이라고 부르던데, 여기서는 인간들도 변신을 해.”

  리체는 마법소녀의 변신 과정을 통해 의복을 ‘생성하고’ ‘입는다’는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았다. 거기 더불어 힘썬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변신하기까지 했다. 힘선은 위성 안테나에 앉아, 리체가 우주쓰레기들 틈을 능숙하게 돌며 자신의 에리어를 형성하고 장미와 반짝이를 흩뿌리며 아름답게 의복을 만들어 입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마침내 리체가 돌아왔을 때, 힘썬은 더는 자신이 리체에게 전달할 사항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리체의 주변에는 아직도 꽃과 반짝이가 떠다니고 있었다.

  “오, 내일은 네 이름을 짓자.”
  힘썬이 즐겁게 말했다.
  “분명 신나는 일이 될 거야.”
  “그 전에 하고 싶은 게 있다네.”
  리체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여기에 뭔가를 좀 걸고 싶은데, 인간의 방식이면 좋겠어.”

  힘썬은 리체가 귀걸이를 걸기 위해 귓불을 뚫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흐름을 경험하다보면 인간사회에 보다 무사히 적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리체는 원래부터 예측 불가한 빛이었으므로 지금의 사회에서도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는 편은 아니었고, 힘썬은 그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에 그녀를 가르치는데 많은 순간을 인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귀쯤이야 간단히 뚫어줄 수 있었다.

  힘썬은 단지 리체가 신경세포를 너무 많이 만들어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상태가 아니기를 바랐다. 귓볼을 뾰족한 무언가로 관통시키는 일은 고통을 수반했기 때문이다.

  힘썬이 대답했다.
  “오, 그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리체라면 고통마저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썬 역시 아픈 게 아주 싫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고통 같은 것들마저도 때때로는 즐거움이 된다. 영원히 지루할 바에야 차라리 간악하거나 혹독하게 만드는 동물적인 감각에마저 유희를 느끼게 되는 걸지도. 그럼 마법사들은 다 마조히스트일까? 어쩌면 다들 변신마법소녀가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 수 없다. 마법사들이라 한들 앞날을 예측하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힘썬은 그럼에도 알기 위해 올바른 인간의 형상으로 지구에 내려갈 것이다. 지루함에 대해 알기 위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  ]! 

  리체가 반짝이는 몸으로 그녀를 불렀다. 한 번 더 변신하려는 모양이었다. 힘썬은 생각에서 벗어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리체의 주변을 감싼 (반짝이와 장미꽃으로 가득한)변신 배리어가 보였다. 아마 저것은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보라색 블랙홀일 것이다. 리체가 힘썬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함께해주게나! 

  힘썬은 사양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온몸을 쭉 뻗었다. 그런 후 곧장 빛 무리를 만들며 인공위성 안테나에서 뛰어내렸다. 멋진 다이빙이었다.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지구를 열 바퀴도 스무 바퀴도 넘게 돌 수 있었다. 변신소녀는 원래 무적이야!

1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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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솟구치는 것»
1차/old 2019. 10. 8. 23:32

  그 세계에는 빛 덩어리들이 지능과 재능을, 개성과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덕과 윤리를 알고 문명과 역사의 기록을 기억하고 있었다. 썬은 높게 날던 빛이고 무척이나 따뜻한 편에 속했지만, 모든 빛들이 항상 치솟거나 번개처럼 번쩍이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하는 한 염은 게을렀다. 그래서 높게 부유하지 않고 종종 바닥에 가라않고는 했고, 바닥에서 간신히 떠오른 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으로 모든 일과를 대신할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종종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썬은 그를 좁은 지형이나 어둠이 고인 깊은 고랑에서 찾아내고는, 마치 잔소리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온몸을 부풀렸다. 썬은 염을 보살피는 주요한 마법사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조금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썬은 종종 엄숙하게 선언하듯 염에게 말하곤 했다. “정말이야, 그렇게 바닥에서 간신히 떠오르기만 해서는 솟구치는 법도 잊어버릴지 모른단다.” 염은 그 말에도 태평했지만, 썬은 처음 염이 바닥에만 붙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솟구치는 법을 모르는 빛일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가르쳐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을 거라고 염려한 적도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썬 역시 염이 그저 게으르고, 어둡고 좁은 곳을 좋아하는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염뿐만의 일은 아니었다. 마법사들 모두가 제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썬은 염과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마법사였고, 유희를 위해 다른 차원을 넘나드는 여타 부지런한 마법사들처럼 부지런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몹시 아주 무척이나 부지런한 편이었다. 그래서 종종 바깥으로,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차원을 넘나들며 여러 세계와 행성을 경험하곤 했다. 염이를 자주 보살펴줄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래도 썬은 탐사를 다녀오기 전에 반드시 자신이 가르치고 보살피고 있는 어린 마법사들을 위해 방문지의 공기를 이루는 입자, 작은 미생물, 암석 따위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염은 게으르고 반응이 다소 느릿한 편이기는 했지만 썬이 가지고 오는 것들에만큼은 무척이나 빠른 감정의 변화와 태도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썬은 염이 새로운 세계로부터 오는 물질들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꿈틀거리며 빛의 입자를 마구 뱅글뱅글 돌리는 것을 보았고, 그 애가 관찰하고 사고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동이 굼뜨다고 해서 사고의 속도마저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솟구치는 법을 잊어버릴 빛이 아니었다. 바로 그 때부터 썬은 염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차원에 내려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린 마법사들이 분주히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며 새로운 외교의 장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썬은 이번만큼은 염을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원래부터 썬은 잔소리가 많기는 했어도 일정 이상 개입하지는 않고 선을 지키는 편에 속했지만, 인간사회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두고 어두운 고랑에 박혀있을 염을 생각하자니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어린 마법사들이 1년씩이나 자리를 비우는 상황에서 과연 염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고랑에 틀어박힌 그를 찾아줄 이들이 얼마나 될까? 마법사들은 이타적이고 사려 깊은 존재였으나 그만큼 개성이 뚜렷하고 개개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니 스스로 원해 바닥에 붙어있는 빛에게 있는 힘껏 개입하거나 잔소리를 늘어줄 이들은 아마 썬처럼 부지런하며 유난인 마법사를 제외하면 정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썬 외에는 없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로, 썬은 어른 마법사들에게 염을 외교대사로 추천했다. 어차피 어린 마법사들이 많지는 않았으므로 썬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염은 반드시 그곳에 내려가야만 했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썬이 행동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가 되기로 결심한 썬이 ‘그’ 혹은 ‘그녀’가 될지도 모를 염을 ‘그’와 ‘그녀’가 존재하는 세계로 끌어당기는 일. 썬은 염의 이름을 추천하고 돌아오는 길에 쪼개진 틈 사이로 몸을 욱여넣고 있는 익숙한 빛을 보았고, 쏜살같이 바닥으로 내리 떨어졌다. 염은 썬을 보자마자 온몸을 움츠리면서 하품하는 소리를 냈다. 그건 썬에 대한 인사였으므로 썬 역시 반갑게 몸을 부풀렸다.

  썬이 말했다.
  “너 이제 지구에 가게 될 거야.”
  염은 잠깐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염이 물었다.
  “왜?”
  “인간들하고 지내게 될 어린 마법사가 필요하거든.”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썬은 공중으로 붕 떠오른 다음, 염이 자신을 따라 나올 때까지 빛을 환하게 내뿜었다. 얼마 뒤 썩 탐탁찮은 기색으로 틈 사이에 박혀있던 염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난 정말 괜찮은데….”
  “오, [ ]. 부디 그러지마.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느낄 수 없어.”
  “나는 [ ]이 가지고 오는 미생물로도 충분히 다른 행성을 느끼고 있는 걸.”
  “직접 느끼는 것과는 달라.”
  썬은 상상과 현실에 대한 낙차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때때로 현실이 상상보다 더 높이 부유할 수 있다는 것도. 부유하지 않는 네가 부유하는 법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염이 대답했다.
  “으음.”

  그게 대답이었지만 썬은 염이 자신의 말에 대꾸했으므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임을 알았다. 비척비척거리고, 다소 느리게 움직인다고 한들 염은 호기심과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욕망이 염에게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염 역시 마법사였으므로 어떤 무료함, 마법사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루함과 공허 따위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염이 이토록 권태로운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썬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게 괴롭기 때문이지만 염은 그 반대가 아닐까. 결국 우리들은 같은 문제에서 다른 방식으로 해결방안을 찾아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썬은 이번에는 염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여보기를 바랐다. 자신이 때때로 염을 이해하기 위해 고랑에 누워, 가만히 빛을 죽여 보는 것처럼.

  염이 말했다.
  “응, [ ].”
  염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알겠어…. 어쩔 수 없지.”

  그러자 썬이 빙글빙글 돌더니 염을 끌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는 방식이었지만 염은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부유하는 법을 잊지 않은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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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번개 모양»
1차/old 2019. 10. 8. 23:31

  왁자한 교실에서 힘썬은 쭉 뻗은 긴 다리와 부리부리한 인상의 얼굴을 보았다. 힘썬이 눈을 깜빡인 다음 순간, 그 애 역시 힘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힘썬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애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힘썬은 그 애와 대화하기 위해 특별히 허리를 숙이거나 고개를 젖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애는 힘썬과 키가 거의 비슷했다.
  힘썬이 말했다.
  “걷고 싶다.”
  “그래? 그럼 걸어.”
  “너랑 걷고 싶어.”
  힘썬은 그 애의 긴 다리처럼 자신 역시 긴 다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지만, 다짜고짜 다리 길이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애가 당혹스러워 할 수도 있음을 알았기에 그냥 이렇게만 덧붙였다.
  “복도를 조금만 걷다오지 않을래?”
  “음.”
  그 애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귀찮은데.”
  힘썬은 그 대답에 주눅 들어야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래? 그럼 여기서 네 이름에 대해 물어보면 되겠구나.”
  힘썬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지 않을래? 이때까진 악수를 하지 않고 나를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악수를 하면서 통성명을 해보고 싶어.”
  그 애는 힘썬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순순히 손을 잡아주었다.
  “좋아.”
  “나는 힘썬이야.”
  “너 마법사야?”
  “그럼.”
  “나는 김혜나.”
  “오.”
  힘썬이 기뻐했다.
  “김 씨구나. 김 씨는 내가 한국에 내려와 가장 먼저 알게 된 성이야.”
  혜나는 어딘지 허탈하게 들리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겠지. 한국에서 제일 흔한 성이니까.”
  두 사람은 손을 몇 번 더 흔들었다. 잠시 후 혜나가 물었다.
  “이거 언제까지 흔들어야 돼?”
  “음, 이제 만족했어. 고마워.”
  힘썬이 정중하게 손을 놓았다. 혜나는 운동복에 손을 찔러 넣었다가 힘썬의 정수리 부근을 쳐다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있었지만 힘썬은 그것에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침묵이 얼마나 지속되면 문제가 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힘썬이 말했다.
  “내가 너에게 다가온 건, 우리가 눈이 마주쳐서야.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막 인식한 거지. 그래서 네 이름이 알고 싶었어. 혜나. 혜-나. 이름이 무척 좋아. 받침이 없잖아. 발음하는 게 좋아.”
  “어차피 성은 김 씨지만 뭐, 고마워.”
  힘썬은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다.
  “혜나, 놀랍게도 우리는 키가 거의 똑같은 것 같아.”
  “아.”
  혜나는 감흥 없이 대꾸했다.
  “그런 것 같네. 너 키 몇이냐?”
  “175cm야.”
  “비슷하네. 난 178임.”
  “맙소사, 오 정말 아깝다. 내가 3cm만 더 크게 만들었더라면, 우리 사이에 엄청난 공통점이 생기는 거였을 텐데.”
  혜나는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힘썬의 사고방식이 자신과 다름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그녀는 대꾸하기 좋은 말을 찾는 것 같았고, 잠시 후 대답했다.
  “안 됐네.”
  힘썬은 혜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혜나가 아까부터 흘끔거리곤 하던 자신의 번개모양 머리 삔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혜나, 내 머리 삔 말이야.”
  “어. 귀엽네.”
  이번에 혜나는 갑작스럽게 주제가 바뀌었음에도 조금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힘썬이 머리 삔이 잘 보이도록 고개를 슬쩍 꺾으며 조잘거렸다.
  “더 잘 볼 수 있도록 떼어내고 싶지만, 아직은 ‘조절’이 쉽지 않아. 그러니까 이렇게만 봐줘. 너는 번개모양을 좋아하니? 인간들은 빛에도 여러 심볼을 만들어서 사용하더구나.”
  “무슨 소린진 잘 모르겠는데, 일단 귀엽긴 해.”
  “네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니?”
  혜나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응.”
  힘썬은 혜나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곧 그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혜나의 책상을 굴러다니던 볼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힘썬이 볼펜을 혜나의 미간 사이에 두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번개 모양을 줄게. 잘 될 거야.”
  혜나가 그 말의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힘썬은 볼펜 끄트머리를 부드럽게 쥐고 ‘그것’을 만들었다. 힘썬은 자신의 손을 타고 흐르는 아주 익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시에 손의 고랑을 타고 흐르는 그 에너지들이 정말이지 낯선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썬이 손을 떼어냈을 때, 그녀의 마법은 제대로 작동했다. 혜나의 볼펜 끄트머리에 힘썬의 머리 삔과 꼭 똑같은 번개모양이 생겨난 것이다.
  힘썬은 볼펜을 신중하게 돌리며 다각도로 그 번개모양을 점검했다.
  “으음, 잘 된 것 같아. 생각보다 조금 작게 만들어졌지만.”
  혜나는 볼펜을 받았다. 그녀는 볼펜을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뒤집어보았다.
  “방금 마법쓴 거야?”
  “오, 그럼.”
  힘썬이 뿌듯하게 말했다.
  “오로지 너를 위해서 썼어.”

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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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haircsis «태양의 광장»
1차/old 2019. 10. 8. 22:52

 신속하게 사람을 넘어뜨리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거다. 두 번째는 막대로 등허리를 세게 후려친다. 이러면 상대가 알아서 고꾸라진다. 세 번째는 정통으로 정수리에 주먹을 내리꽂는 것이다. 적당히 힘만 들어가면 반으로 접힌 상대가 발치에서 뒹구는 꼴을 볼 수도 있다. 
 잼에게 이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은 동쪽항만으로 흘러들어온 패잔병이다. 그 남자는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며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었다. 눈빛이 형형해서 언젠가 말을 타고 칼을 다뤘을 거라는 인상을 주었다. 구걸하지 않을 때는 바닥을 보며 지난 세월을 눈으로 더듬어 나가고 있었다. 잼은 항구의 뒷골목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는 마흔 살이었고 잼은 열 살이었다. 
 “안녕하세요.” 잼이 말했다. 
 “이것 좀 드실래요?” 
 잼은 그의 손위에 고기 한 덩어리를 얹어놓았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조로하고 비굴했으나. 잼은 생각했다.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일 거야.’ 
 “무기를 만져본 손이에요, 그렇죠?” 
 잼은 남자의 더러운 손을 주워들고, 작은 손바닥을 펼쳐서 그의 굳은살을 꼼꼼히 만졌다. 
 “언젠가 당신 짐을 빼앗으려고 덤벼든 사람을 귀신처럼 해치우던 걸 본 적 있어요. 나한테 그걸 알려주면 매일 필요한 걸 하나씩 가지고 올게요.” 
 잼은 남자의 나머지 한손에 창처럼 길쭉한 작대 하나를 얹어주었다. 
 “당신 앞에는 고기 한 덩어리가 있지만 또한 당신은 이걸 선택할 수도 있어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잼을 바라보았고, 잼은 그의 눈동자 너머로 무엇이든 읽기 위해 노력했다. 굶주렸다면 고깃덩어리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용사도 배가 불러야 포효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잼은 남자의 눈에서 어떤 빛, 오로지 비굴하기 위해서만 하늘을 바라보게 된 삶의 지층에 깔려있던 그것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았다. 땅을 보며 굴종하고, 하늘을 보며 영광을 알던 기사의 시절이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잼은 똑똑히 보았다. 늙은 남자의 운명이 전복(顚覆)되는 순간을 열 살의 잼은 똑똑히 보았다. 
 남자가 말했다. 
 “좋다. 내 이름은 이곤이다. 네 이름은 무어냐?” 
 “잼.” 
 남자는 작대를 잡았다. 
 “오늘부터 널 가르쳐주지.” 
 이것이 잼이 스승을 얻게 된 일화이자, 평생을 걸쳐 써먹게 될 세 가지 맨손 격투를 배우게 된 발단이다. 

 이곤이 잼을 오래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다. 잼이 격투를 배운 건 고작해야 일 년 남짓이다. 그래도 잼은 계속 “했다.” 
 항구에는 몸집을 믿고 어슬렁거리는 장성들이 많았다. 소위 놈팽이들이 자릿세를 뜯거나 어리숙한 귀족 아이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항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주택가가 나왔고, 거미줄처럼 늘어진 길거리가 도시 구석구석을 관통하며 흘렀다. 그 거미줄마다 시정잡배들이 놈팽이 흉내를 냈다. 키만 컸지 근육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들이 몰려다니며 어린 애들을 겁주고 간식거리를 뜯어가는 것이다. 잼은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발을 걸거나 등허리를 후려쳤다. 주먹이 좀 더 단단해진 후에는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기분이 좋을 때면 으레 그렇게 했다. 기분이 나쁠 땐 잡배들에게 둘러싸인 아이가 훌쩍거려도 행인들을 모으고 종종걸음으로 벗어나곤 했다. 평민이 항상 용사일 수는 없잖아? (그녀가 귀족임을 알게 되는 건 좀 더 이후의 일이다) 
 오셀로를 만났을 때, 잼은 열여섯 살이었고 당나귀를 끌고 길거리를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기분이 좋았다. 오셀로는 열 살이었고 잡배들에게 둘러싸인 채 골목에서 떨고 있었는데, 분명 죽을 맛이었을 거다. 잼은 그 애를 도와주기로 결심하자마자 “과과”의 등에 올라탔다. (과과는 열 살에 잼이 얻은 당나귀다. 이 친구를 얻게 된 경위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그 날, 골목에서 잼이 벌인 싸움은 싱거우리만큼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잼에게 얻어맞은 우두머리 아이가 울기 시작해 나머지 아이들이 부리나케 도망을 쳤기 때문이다. 냅다 달려온 게 무색할 정도였다. 과과를 급하게 멈춰 세우자 발밑으로 흙먼지가 잔뜩 일었다. 
잼이 나귀에서 뛰어내렸을 때, 잼의 크림색 망토는 바람 덕분에 한껏 하늘로,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고, 때마침 햇빛이 직각으로 내리쬐어서 사방이 반짝반짝했다. 오셀로의 얼굴 위로 커다란 망토 그림자가 졌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장면이 느리게 전개되었다. 잼이 그 순간을 느리게 기억하는 것은 오셀로의 눈동자 때문이다. 
 그 애는 홍안이었다. 

 삐뚤빼뚤한 골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과과는 몇 번 더 크게 히힝, 울음을 토했다. 잼은 과과가 오셀로를 깨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흥분한 당나귀를 귀족 출신 꼬맹이와 놔둘 수는 없는 것이다. 
 잼은 슬그머니 과과를 바깥쪽으로 몰면서 딴청을 피웠다. 
 “넌 왜 귀족이면서 호위병 하나 안 달고 다니냐?” 
 “그야, 집에서 몰래 나왔으니까요…….” 
 오셀로가 작게 중얼거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귀족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 
 “바보냐? 돈 많은 빨간 눈깔은 다 카르스텐 가 사람이니까 그렇지.” 
 ‘완전 띨띨한 녀석이네.’ 잼은 생각했다. 
 “아무튼 잘 됐다. 너 돈 넉넉하지? 나 마침 배고픈데 시장에서 과일 좀 사다주라. 과과 녀석도 먹일 거야.” 
 “과과요?” 
 “응, 얘 말이야.” 잼은 바깥쪽으로 걷고 있는 당나귀를 가리켰다. 
 오셀로는 회색 털을 가진 다부진 당나귀를 바라보았다. 
 “얘 이름이 과과예요?” 
 “응, 근데 가까이 다가가지 마. 성질 사나워서 막 물어.” 잼은 괜히 겁을 줬다. 
 “누나도 무나요?” 
 “바보야, 내가 주인인데 날 물겠냐?” 
 잼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진짜 띨띨이.’ 
 “누나는 어쩐지 연극에 나오는 기사님 같네요.” 오셀로가 말했다. 
 “말을 타고 망토를 두른데다가 무척 강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오셀로는 한 발짝 뛰쳐나가 잼을 향해 똑바로 섰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육포랑 과일이랑 드시고 싶은 만큼 사드릴 테니까 오늘 저녁까지 저랑 같이 있어주면 안될까요?” 
 잼은 과과를 멈춰 세우고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고 통통하게 젖살이 올라서 아주 둥글었다. 사랑을 넘치게 받아서 어떻게든 쏟고 싶어 안달이 난 눈처럼 보였다. ‘내가 조금만 더 배를 곯으며 살았어도 저 애를 증오했을 것이다.’ 라고 잼은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 티끌만큼의 차이일 것이다, 라고. 
 잼이 말했다. 
 “얘, 너 내가 한가한 줄 아니?” 
 오셀로가 벌리고 있던 양팔을 내렸다. 그리고 엉거주춤 서서 고개를 기울이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잼의 마음에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은 강하지는 않았음에도 몹시 거슬릴 만큼은 따끔거렸다. 이런 주먹을 뭐라 부르더라? 
 잼은 입을 샐쭉하게 내밀며 슬그머니 덧붙였다. 
 “뭐, 오늘은 한가하니까…….” 
 오셀로가 환하게 웃는 것을 팔짱을 끼고 모른 척했다. 

 이곤은 스무 살적부터 기사로 전장을 누비며 승리를 누렸다. 이베르타가 통일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영지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국에 멸망이 닥쳤을 때, 이곤의 운명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황량한 북쪽 산맥을 떠돌던 그는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혹은 동쪽으로 비틀거리며 걷거나 달렸고, 마침내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 땅에 도달했다. 바다를 얻고 상인이 번성하는 도시였다. 길거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다보면 빵조각을 얻었다. 부유는 부드러운 검이었다. 북쪽산맥은 얼어 죽게는 만들지언정 기사의 이름을 빼앗을 수 없었으나, 도시의 번영은 시간을 들여 이곤의 이름을 탈환하였다. 당장의 배곯음 앞에서 굴종하기 시작한 남자는 거지가 되었다. 검을 내려놓고 찾아온 두 번째 인생이었다. 
 잼은 그에게 세 번째 인생을 주었다. 
 “난 이곤이 나한테 두 번째 인생을 만들어 줬다고 생각해요.” 잼이 남자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들은 골목에서 작대를 창으로 삼아 짧은 창술을 겨루던 참이었다. 잼이 늘 졌고, 마지막에는 씩씩거리며 나뒹굴었는데, 처음으로 잼이 이겨서 둘 다 몹시 기분이 들떠있었다. 
 “두 번째 삶?” 이곤이 되물었다. 
 잼은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채 발을 까딱거렸다. 
 “응, 두 번째 삶. 난 이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내 삶을 어쩌면 좋을지 도무지 감도 못 잡고 있었거든요.” 
 잼은 노래처럼 중얼거렸다. 
 “기사를 발견했으니 기사가 되기로 했죠. 용병으로 뛰게 되면 이곤이 가르쳐준 것들을 더 잘 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열한 살짜리가 무슨 용병이냐, 완전 꼬맹이구만 그래.” 이곤이 낄낄거렸다. 
 잼은 혀를 쭉 내밀었다. 
 “흥, 나이가 차면 당장 용병으로 뛸 거예요. 다음 해에는 말도 얻어낼 작정이라구요?” 
 “그러시던가.” 이곤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잠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쓰느라 너무 지쳤던 것이다. 
 머리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태양 빛이 거리로 쏟아졌다. 바닥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서 꼭 잼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잼은 빛으로 촘촘하게 채워진 바닥의 타일들을 눈으로 쓸어보았다. 그것들은 몹시 아름다워서, 먼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그 때 고깃덩어리 대신 작대를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잼이 이곤에게 말했다. 
 “나는 이곤이 아마 고기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곤은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노을에 감싸인 잼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거의 오렌지색처럼 보였다. 불꽃처럼. 혹은 생명. 어쩌면 그것보다 더 무한하고 넓은 것. 확장되는 에너지. 죽어가는 것들을 일으켜 세우는 의지 같은 것들. 요컨대 굴종 속에 파묻힌 전사의 이름을 불러 세우는 힘. 
 처음 만났던 잼의 눈동자 속에도 어김없이 담겨있던 그것들. 
 이곤은 그 때, 이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영광 없는 삶에 익숙했더라면 저 애를 증오했을 것이다.’ 
 이곤이 말했다. 
 “나는 고깃덩어리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정말?” 잼이 고개를 기울이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작대를 잡았죠?” 
 이곤은 잼의 눈동자를, 타오르는 불꽃을, 보석 같은 힘을,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았다. 
 “명예가 걸렸거든.” 그가 대답했다. 
 “내 자신에 대한 명예 말이야. 네 녀석 말고.”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잼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온 삶에 배반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라는 거야, 알겠냐.” 
 이곤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누가 심장에 주먹을 때리는 것처럼 거슬리고 아프거든.” 
 이곤은 마흔 한 살 겨울에 페스트로 죽었다. 

 오셀로와 시장을 두 바퀴째 돌고 있을 무렵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오셀로는 종종걸음으로 잼을 쫓았고, 잼은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천막을 쑤시고 다녔다. 
 “누나, 벌써 체리만 두 봉지 째에요. …다른 건 안 먹어요?” 
 오셀로가 잼의 체리봉투를 안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쓸데없는 참견이야. 어련히 알아서 다 먹는다구.” 
 잼이 오셀로의 가슴팍에서 체리 하나를 꺼내 물며 구시렁거렸다. 
 “음, 과일만 먹으니 짭짤한 게 당기는데. 육포 먹을까?” 
 “누나는 정말 배가 크시네요…….” 
 오셀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잼은 그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였다. 오셀로가 펄쩍 뛰었다. 
 “아야, 왜 때려요!” 
 “그냥 때려보고 싶었어, 띨띨아.” 
 “너무해요…….” 
 오셀로가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호쾌하게 먹고 마시는 것까지 기사를 닮았다는 뜻이었다구요….” 
 “누가 뭐래?” 
 잼이 콧방귀를 뀌자 오셀로가 바짝 따라붙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것 때문에 때린 거 아니에요?” 
 “아니거든!” 잼은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난 기사가 아니라구.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나는 기사는 못 돼.” 
 “왜요?” 
 “진짜 기사를 알고 있거든. 함부로 흉내 내다간 비웃음 당하고 말 걸.” 
 둘은 대로변에 세워진 천막을 지나 골목마다 세워진 조그만 잡화상 사이를 지났다. 길이 충분히 넓지 않아서 과과가 뒤처지게 되었다. 과과는 걷는 도중 오셀로의 손등에 축축한 주둥이를 가져다 대서 오셀로를 조금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난폭한 당나귀는 소년의 손등을 다정하게 핥아주었고, 이번에는 잼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너 이 자식, 왜 낯선 녀석에게 다정해지는 거야?” 
 잼은 서운함과 괘씸함이 뒤섞인 눈으로 과과를 바라보았다. 
 “완전 배신자야!” 
 “과과도 누나처럼 나를 좋아하나 봐요.” 오셀로가 웃었다. 
 잼은 오셀로의 정수리에 한 번 더 ‘정의의 철퇴’를 한 방 먹여주었다. 오셀로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둥그런 머리통을 감싸고 눈물을 그렁그렁 달며 물러났다.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오셀로가 항의했다. 
 “아파죽어요! 누나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아세요?” 
 “능청을 떨어대니까 얄미워서 한 방 먹인 거지.” 
 “능청이라뇨! 그럼 누나는 절 왜 도와주신 거예요?” 
 “도와주는 데에도 이유가 있냐?” 
 둘은 코너를 돌았고, 아까보다 좁은 길이 펼쳐졌다. 과과를 데리고는 도무지 이동할 수가 없는 골목이었다. 집과 집 사이가 몹시 좁아서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그 사이를 넘어가면 작은 광장이 나왔다. 노을 때문에 타일이 붉은색으로 온통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좁은 틈사이로도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둘은 잠시 멈추어 서서 그 골목 너머에 존재하는 많은 빛들-쏟아지고 부서지고 붉게 타오르는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어.” 
 잼은 불쑥 말해놓고도 누군가를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셀로가 잼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저를 구해주신 거예요?” 
 “기분이 좋았거든.” 잼이 대답했다. 
 “그런데 널 무시하고 지나치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어!” 
 잼은 손을 들어서 가슴언저리를 문질렀다. 
 “마음이 콕콕 찔려서, 엄청 거슬리는 거 있지. 이때까지 잘 살아왔는데, 고작 그 순간을 지나치는 게 내 삶을 배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이런 기분을 뭐라 부르는지 알아?” 
 잼이 중얼거렸다. 
 “난 예전에는 알았던 것 같은데, 다 까먹고 말았어….” 
 하늘이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셀로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오셀로는 벽과 벽의 좁은 어둠 너머로 일렁이는 빛 조각들을,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오셀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건 아마 누나의 긍지 같은 걸까요.” 
 “긍지.” 
 잼이 되뇌었다. 
 “그래, 나는 긍지를 지키면서 살고 있는 거구나.” 
 이번에는 누군가를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잼은 그것이 좋았다. 그리고 조금 슬퍼졌는데,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영영 상실한 기분이 들었다. 타오르다 지는 순간을 보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누나, 다음에도 저 구해주실 거죠?” 
 오셀로가 말했다. 
 “아니면 내가 누나 동생이라고 허풍을 떨어볼까요? 우리 눈동자 색도 비슷하잖아요. 머리도 땋았구….” 
 “야 임마, 너 같은 띨띨이가 내 동생이라고 자처하고 다니면 내 명예는 어떡하란 거야.” 
 잼이 면박을 주긴 했지만 꿀밤을 먹이진 않았다. 
 오셀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긍지랑 명예는 멀리 있지 않다구요.” 
 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후에, 두 소년소녀는 어둠이 고인 틈과 틈 사이로 보이는 태양의 광장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노을 같은 것을 오래 보고 있는 게 아니었는데. 번영과 멸망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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