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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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은 기억하는 것보다 작았다. 오는 데만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출발할 때만 해도 밤이었는데 도착했을 땐 새벽이었다. 고모부가 트렁크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기재는 조수석에서 내릴 때 일부러 차문을 약하게 닫았다. 아영과 아진은 뒷좌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기재는 마당에서 심어진 나무가 훌쩍 2층 높이까지 자란 것을 올려다보았다.

“나무가 자랐네요.”

“나무?”

고모부는 기재의 시선을 따라 이동한 후에야 어떤 나무를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아, 저거. 기재 네가 마지막으로 여기 왔을 때가 5년 전이던가?”

기재의 입에서 입김이 피어올랐다.

“저 열한 살 때요.”

“그래……. 그 정도면 많이 자랐다고 느낄만하지. 올해 가을엔 열매도 열렸어.”

“기재 형.”

고모부와 기재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수가 서있었다. 기재는 놀랐다. 처음엔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 했다.

“어… 지수구나.”

“형은 변한 게 없네.”

“너는 많이 변했다.”

기재는 진심으로 대꾸했다. 지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내 키가 좀 크긴 했다.”

지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기재 앞에 서자 눈높이가 거의 같았다. 기재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굽 차이를 고려하면 지수가 기재보다 더 클 지도 몰랐다.

“형, 들어가자.”

지수는 기재의 손을 아주 자연스럽게 쥐었다 놓았다.

 

주택 안은 변한 게 없었다. 잘 닦인 복도를 따라 방문이 나란히 늘어져 있고 현관 앞엔 꽃이 화분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냄새나 신발장에서 풍기는 방향제 냄새도 여전했다. 지수는 기재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고모가 벌써 방에 다녀간 모양이었다. 기재가 자게 될 지수의 방엔 지수 몫이라기엔 너무 많은 양의 이불가지가 정돈되어 있었다.

“기재 형, 맘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라.”

지수의 목소리에선 사투리 억양이 강하게 묻어났다. 기재는 지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수가 무엇이든 물어볼까봐 두려웠다. 한 달 간 김기재와 두 여동생은 지수네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보다 오래 지낼 수도 있었다. 고모와 고모부가 그 사정을 설명했다면, 지수는 분명 기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수는 무언가를 묻는 대신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형 중간에 깨서 그런데 나 너무 졸려.”

“다시 잘 거야?”

“형은 안 졸려?”

“차에서 조금 잤어.”

“낮까지 자. 어차피 학교도 안 가는데.”

“그럴까.”

“응. 아, 맞다, 형.”

지수는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키득키득 웃었다.

“나 불 좀 꺼줘.”

기재는 불을 끄고 지수 옆에 쌓인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새벽녘의 푸른 기운이 어스름하게 창문을 넘고 있었다. 지수는 금방 잠들었지만 기재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뒤척였다. 서울에 두고 온 것들이 떠올랐다. 집이 그리웠고 어머니가 그리웠다. 지수가 뒤척이며 이불을 발로 뻥 찼다. 기재는 자는 지수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좋은 생각을 하려 애썼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수마저 없었다면 자신은 정말로 울어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지수는 옆에 없었다. 아래층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기름에 튀겨지고 있었다. 기재는 층계를 내려왔다. 아영과 아진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지수는 보이지 않았다.

“오빠 안녕.”

“오빠 좋은 아침.”

“고모, 지수는요?”

“지수?”

고모는 기름이 팔팔 끓는 냄비 안에서 가지튀김 몇 개를 건져내곤 불을 내렸다. 접시에 키친타올을 깔고 튀김을 옮겨 담은 후 식탁 앞으로 밀었다. 기재 앞으로 분주히 상이 차려졌다.

“지수는 벌써 일어나서 밥 먹고 나갔지. 아마 또 동네 쏘다니고 있을 거다.”

기재는 식탁에 앉아 밥과 가지튀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모가 맑은 된장국을 퍼서 밥 옆에 차려주었다. 출렁이는 된장국 안으로 기재의 얼굴이 비쳤다. 젓가락을 들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밥을 남겨도 고모는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기재는 가지튀김 두 개를 집어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모가 식탁을 치우다 말고 멈춰서 거의 비워지지 않은 기재의 밥그릇을, 그리고 기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언가 묻고 싶지만 예의상 물을 수 없는 것들이 있을 때 짓는 어른들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재는 어물거렸다.

“죄송해요.”

“아니야, 고모는 괜찮아.”

그것은 기재가 원하던 전개였고 예상했던 말이었으나 거북하게 느껴졌다. 기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거실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엾은 고모를 더 죄송스럽게 만들 수는 없었다.

바깥으로 빠져나온 기재는 방금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냈다. 벽을 짚고 서서 더 이상 게울 것이 없을 때까지 침과 오물을 뱉었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절로 기운이 달렸다. 쭈그려 앉은 기재의 뒤로 인기척이 났다. 기재는 고개를 돌렸다. 지수가 서서 기재를 보고 있었다. 철렁했다.

“어…….”

지수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형.”

지수가 손을 까딱거렸다.

“가자.”

지수의 뒤를 따라 오솔길을 걷는 동안 기재는 생각해보았다. 어디까지 봤을까? 지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건 아니지 않을까? 지수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지수의 등은 아주 넓고 컸다. 운동화로 갈아 신은 지수의 키가 기재를 미묘하게 추월하고 있었다. 다음 해엔 기재보다 훨씬 더 클 지도 몰랐다. 기재는 지수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땐 기재가 더 컸다. 지수는 구석에 있었고 말수가 적었고 눈치를 보는 동생이었다. 왁자한 친척 아이들 틈에서 자리를 잡지 못 하고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맴도는 건 기재가 된 것 같았다.

“지수야, 우리 어디 가는 거냐.”

“응? 걍 걷는 기다.”

지수는 능숙하게 오솔길을 누비며 씩 웃었다.

“아침 묵었으니 산책 해야제.”

“어디까지?”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돌아오면 되지 뭐.”

“길 잃어버리면 어떡하냐.”

“뭐?”

지수는 아주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박장대소 했다.

“뭔 소리고, 내가 여서 길을 왜 잃는데.”

오솔길은 뒷산으로 이어졌다. 길이 가팔라지고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둘은 이제 겨울산 속에 있었다. 황량하고 앙상한 풍경이 이어졌다. 눈이 오지 않은 산은 어쩐지 무서웠다. 귀신이 나타날 것도 같았다. 지수는 산 동물처럼 잘도 껑충껑충 앞서 나갔다. 중턱까지 올라갔을 때, 둘은 나무 한 그루 앞에 멈춰 섰다. 가지에 반쯤 찢어진 연 하나가 걸려 있었다. 지수는 그 연을 가리키며 다음엔 연 놀이를 하자고 말했다.

“있제, 따분하게 보여도 생각보다 재밌다.”

“롤보다 재밌을까?”

“아, 그건 그렇다.”

겨울바람이 불었다. 둘은 중턱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몇 몇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개 한 마리가 좁은 길을 마구 내달리고 있었다. 기재가 불쑥 말했다.

“롤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

“그제. 맞다.”

지수가 동의했다.

“내가 해본 게임 중에선 제일 재밌더라.”

“롤보다 재미있는 게 나올까?”

“새로운 겜은 계속 나오니까 언젠가 함 나오겠지 뭐.”

“그 땐 우리 집에 또 놀러와.”

거기까지 말하던 기재는 잠시 머뭇거렸다. 집, 이라고 발음하자 입안이 깔깔해지는 것 같았다. 기재의 집은 불에 탔고 지수가 다시 서울에 올라온다고 해도 그 집에서 재워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새 집을 빠른 시일 내에 구해오겠다고 약속했다. 더 크고 좋은 집을 찾고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니까 지수가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면, 그 땐 새로운 집에서 기재와 게임을 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집엔 치명적으로 무언가 빠져있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기재를 지수가 묵묵히 바라보았다. 눈치를 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고 기재가 갑자기 입을 다문 이유를 알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기재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일부러 먼 곳을 보았다.

“야, 김지수. 먼저 내려갈래?”

지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천천히 내려온나.”

지수가 내려간 뒤 기재는 바위에 앉아 조금 훌쩍였다. 어린 애처럼 울고 싶지는 않아서 숨을 죽일 생각이었지만 생각한 것보다 울음은 금방 그쳤다. 기재는 천천히 바위에서 일어났다. 지수가 오솔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게 보였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여자애였다. 지수가 낄낄거리며 팔을 벌렸다. 친구일까? 아니면 애인? 기재는 지수의 품에 찰싹 달라붙은 긴 머리카락의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택으로 돌아왔을 때 기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신발들이었다. 낯선 신발도 하나 껴있었다. 아까 지수가 껴안아준 여자애의 것일지도 몰랐다. 기재는 층계 쪽을 올려다보았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층계를 따라 올라가는 동안 소음은 점점 선명해졌다. 기재는 저도 모르게 난간을 붙잡고 멈춰 섰다. 소리는 지수의 방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수가 누군가를 어르고 달래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기재는 당혹스러움에 휩싸였다. 무슨 상황인지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치 그래야 했던 것처럼, 기재는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여자가 교성을 질렀다. 둘은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기재는 못 박힌 듯 그 앞에 서서 지수가 욕설을 내뱉는 걸 묵묵히 들었다.

“누나, 아, 존나…….”

지수의 목소리엔 많은 숨이 섞여 있었다. 사투리의 억양도 잘 들리지 않았다. 지수의 목소리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기재가 늘 들어오던 느낌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을 열 수는 없었다. 누가 됐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머뭇거리던 기재는 복도를 지나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등지고 주르르 미끄러졌다. 옆방은 여전히 쿵쿵거리고 있었다. 기재의 손바닥이 축축했다. 기재는 마른세수를 했다. 뺨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교성에 칭얼거림이 섞이며 상황은 보다 노골적으로 변했다.

“지수야, 그건 아파!”

“아, 쫌만.”

“아, 진짜, 김지수…….”

원하지 않아도 상황이 그려졌다. 기재는 보이지도 않는 방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야한 소설을 읽을 때 느끼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기재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헤어진 여자 친구가 떠올랐다. 그 애도 머리카락이 길었던 게 생각났다. 지수가 안고 있는 누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것도 같았다.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멋대로 그렇게 상상되고 있었다. 이제 기재는 죄악감을 느꼈다. 바지춤이 부풀어 있었다.

기재는 검지를 문 채 수음을 했다. 신음하면서 조금 울었다. 외로웠다. 외로웠는데, 너무 큰 일이 닥쳐버려서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 하는 일도 나쁜 일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나쁜 일일 지도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수는 방 너머에서 사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수야아, 하고 지수의 ‘누나’는 울었다. 기재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헐떡거리며 성기에서 손을 떼어냈다. 손바닥이 축축해져 있었다.

 

그 날 밤에도 지수는 먼저 자리에 누웠다. 이불에 눕다 말고 기재가 머뭇거렸다. 지수는 고개를 돌려 씩 웃었다. 기재의 가슴이 순간 철렁했다.

“형.”

“어, 어?”

“불 좀 꺼줘.”

“아……. 그래.”

기재는 불을 끄고 지수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지수가 들어가서 데워놓은 이불 속은 따뜻하고 건조했다.

“형 언제 들어왔어?”

“음.”

기재는 지수의 아는 누나가 나간 시간을 대충 떠올리며 둘러댔다.

“너 내려가고 한 시간쯤 뒤에.”

“아, 그래? 오래 있었네. 난 형이 금방 내려올 줄 알았다.”

“겨울 산이 또 있어보니 좋더라.”

“그렇나…….”

지수가 베개 위로 엎어졌다. 얼굴을 마구 부비다 기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씩 웃었다. 기재는 지수가 섹스를 한다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잘 되지 않았다.

“형, 형이 여 오니까 좋다.”

“그래?”

“어.”

지수가 이불 속으로 웅크렸다.

“불 꺼줄 사람이 생겨서.”

“그게 뭐냐.”

기재가 장난스럽게 지수의 다리를 발로 찼다. 지수는 낄낄거렸다. 이불 속은 조금만 뒤척여도 금방 뜨거워졌다. 몇 번 발차기를 주고받다가 똑바로 누웠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천장이 보였다. 지수는 역시 금방 잠이 들었다. 오늘도 잠들 수 없는 건 기재뿐이었다. 지수는 코를 골았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기재가 천천히 일어났다. 손으로 지수의 얼굴 언저리를 훑었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 기재가 속삭였다.

“김지수.”

“…….”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아님 정말 모르는 거야.”

그러나 세상이 다시 움직였다. 지수의 코골이는 안정적이었고 흐트러지지 않았다. 기재는 맥이 풀렸다. 그러니까 지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안심되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기재를 두렵게 했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이 겨울에 일어난 재난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가족도, 심지어 지수마저 묻지 않는다면, 김기재는 어디 가서 그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지만 기재가 먼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해 겨울은 기재에게 아주 길었다. 종종 뒤척이고 잠을 이루지 못 하는 밤이 이어졌다. 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혹은 네가 섹스하는 소리를 들었어. 그 무렵 기재의 몸속은 그런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말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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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새학기, 새마음»
1차/old 2019. 10. 30. 00:54

 기재는 스타팅 라인에 섰다. 등판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미적지근했다. 여름이 끝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겨운 더위가 끝나고 에어컨을 끌 때가 돌아왔다는 것이 믿겨지질 않았다. 어떤 계절들은 가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기재에겐 재작년 겨울과 올해 여름이 그러했다.

 “김기!”

 “왜!”

 겨운이 소리를 높였다.

 “너 멍 때리다간 넘어진다!”

 “정겨운, 걱정도 많아.”

 기재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낄낄 웃었다.

 “야, 이래봬도 이 년째 무사태평한 몸이거든.”

 김기재는 재작년 봄에 육상을 시작했다. 순전히 W의 부추김 탓이었다. 김기, 한 번 달리자. 너 잘 달리잖아, 축구도 잘하고. W의 입 바람은 사실 그렇게까지 애원조는 아니었다. 그렇게 매혹적인 제안이지도 않았다. 기재가 거절했다면 W는 다른 놈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기재는 육상부에 들어가게 됐다. 넌 W가 하는 건 다 오케이해주더라. 나중에 기재와 자주 어울리던 친구 한 명이 심심한 감상을 말해주었다.

 햇발이 강해지고 바람이 조금 불기 시작했다. 겨운은 앞에서 타이머를 쥐고 있었다. 기재, 잘해라! 누군가 외쳤다. 호각이 불렸다.

 기재의 몸은 유연하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람과 맞서며 다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아주 빠르지는 않았다. 달려야 할 거리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지치면 힘내지 못 한다는 사실을 기재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W가 물었다. 야,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 하냐. 기재는 그게 아주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넌 달리면서 생각도 하냐?

 하지만 김기재는 오늘 W를 생각하고 있다. 재작년 여름의 일이고 아직 기재의 어머니가 불 때문에 죽기 전의 일이다. 상상 속의 W가 머쓱하게 웃는다. 야, 김기 넌 집중을 존나 잘하나 보다. 난 그런 게 잘 안 되거든. W는 작년 겨울 전학을 갔다. 가기 전에 머쓱하게 기재의 어깨를 툭 쳤다. 잘 지내라. 연락 자주 하고. 기재는 W가 조금 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호각 소리가 들렸다. 기재는 헐떡이며 멈춰 섰다. 정겨운이 스타팅 라인 쪽에서 기재의 지점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기재는 흐르는 땀을 닦았다. 티셔츠를 잡아 마구 흔들었다. 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게 내버려두었다.

 “김기재 너 제대로 안 뛰지!”

 “왜, 기록 많이 나빠?”

 겨운은 대답 대신 기재의 엉덩이를 찼다. 기재가 악, 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냐!”

 “에이, 친구 때문에 들어온 것치곤 꽤나 근성 있는 놈에게 너무 눈물겨운 취급이다 이거.”

 “하여튼 김기… 콱 관둬버리던가.”

 “안 돼, 나 여기 좋아해.”

 “그럼 잘해 바보야.”

 “알겠어.”

 겨운이 다시 스타팅 라인으로 돌아가는 동안 기재는 고개를 숙여 운동화 끈을 묶는다. 묶으면서 생각한다.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 하냐? 기재는 W가 무슨 생각을 하며 뛰었던 걸지 한 번도 물어보지 못 했다. 그 땐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W 때문은 아니었지만 기재는 이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정말이지 묻고 싶었다. 생각하면서 달린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의 길을 가지고 달리는 동안 그것을 생각하고 만다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 아닌지. 네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

 기재는 천천히 라인 앞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트랙 앞에 줄지어 서있었다. 여름이 끝나고 있는 것 같았다. W가 떠나고 어머니는 죽었는데 이 계절이 다시 돌아왔으며 다시 떠나고 있다는 게 믿겨지질 않는다. 어떤 계절들은 가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기재에겐 재작년 겨울과 올해 여름이 그러했는데, 이번 가을은 어떠할지 묻는다. 그러니까 김기재, 너는 이제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달리는가.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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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의 밤 «산다의 밤» 비밀글
1차/old 2019. 10. 30.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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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의 밤 «폭우의 전복성»
1차/old 2019. 10. 30. 00:48

그로부터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염하는 인생에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다. 삶을 뒤바꿀 뾰족한 수를 떠올리는데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고, 신세를 한탄하는데 눈물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달리 말하자면 삶에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셈이다.

그녀가 열다섯 때까지 나고 자랐던 뉴 글로레스 항구엔 창고가 줄지어 선 신식 공장들이 있었는데, 출근을 하기 위해선 반드시 그 구역을 지나가야만 했다. 빠르게 항구가 개발되던 시기였다. 계절마다 공장과 창고가 들어서면 새롭게 고용된 남자들이 멈추지 않는 기계 앞에서 단순노동을 했다. 그들 대부분은 형편없는 임금과 가벼운 주머니 사정으로 삶을 환멸하고 있었는데, 불행한 점은 그들 모두가 최소한의 근로 소득이 법적으로 보장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할 기회를 단 한 번도 얻지 못 했다는 것이다. 뉴 글로레스 항구의 남자들은 아침과 저녁마다 쏟아져 나오는 여자들이야말로 삶의 유일한 낙이라고 생각했다. 공장단지를 걷다보면 노인, 중년과 청년, 앳된 소년들이 벽에 기대서서 여공들을 보며 휘파람을 불거나 질 나쁜 농담을 던지는 걸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염하를 포함한 모든 여성들은 고개를 숙이거나 불편하게 시선을 피함으로써 불쾌함을 ‘은근하게’ 드러내야 했다. 침을 뱉거나 욕지거리를 하는 여인들도 이따금 있었지만, 남자들이 주먹을 휘두르거나 뺨을 갈겨 보복했으므로 곧 얌전해졌다. 그들은 저들이 벌어온 돈으로 먹고 사는 주제에 괘씸하다고 떠들어대며 그 모든 폭력을 정당화했다. 그들이 방금 주먹으로 갈긴 건 다름 아닌 노동자 계급의 여성이었는데도 말이다. 항구의 남자들은 자신의 시선을 받아내는 모든 여성들이 불편과 증오를 감추거나, 혹은 일부만 정제하여 드러내길 원하는 것 같았다. 그런 주제에 본인들은 서슴없이 여공들의 얼굴, 가슴과 다리 사이를 논하며 낄낄거렸고, 그것에 아무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뉴 글로레스에서 거주하는 동안 염하가 깨달은 몇 가지 중 하나는 남자들이 노소와 미추의 법칙으로부터 자유롭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 가슴과 다리 사이를 품평하거나 논하며 낄낄거리는 여공들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딱히 아무도 그것을 궁금해 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여하튼 세상은 여성인 염하에게 지극히 관심이 많아 무엇이든 논하려 들었는데, 그녀가 열세 살이 될 무렵엔 그 모든 것으로부터 환멸을 느꼈다. 항구에서 자란 지난 세월동안 남성들의 무지몽매한 조롱으로부터 염하가 취할 수 있는 저항은 고작 속으로 그들을 용모와 청결 순에 따라 줄을 세우는 일뿐이었던 것이다. 마치 그들이 염하와 여타 여성들에게 그래왔듯이. 뉴 글로레스에서의 생활은 모든 여성의 정신 깊숙한 곳에 체념과 무딤, 그리고 의식적 무지를 거듭 반복해 새겼으며, 염하는 단 한 번도 인생에서 그 세 가지를 배제시키려 시도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염하뿐 아니라 모든 항구의 여성들이 인생에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던 셈이다.

염하의 어머니는 바로 그 세 가지 속에서 성장한 항구의 여성상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작부터 결혼을 염두하던 그녀는 열여섯 살이 되자마자 작은 공장을 소유한 스물아홉 남자의 청혼을 덜컥 받아들이고 동거를 시작했다. 그녀가 사랑 한 톨 없는 결혼을 감행한 건 순전 그가 소유한 공장과 자본 때문이었는데, 그 이유 하나로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결코 무모하지 않다고 평생을 자부하며 살 수 있었다. 그들의 생계는 결혼한 지 고작 일 년 만에 등장한 아르피아인 소유 신식공장들로 인해 어려워졌으나, 발 빠르게 공장을 정돈하고 하역장 일을 시작하면서 차츰 안정을 되찾았다. 한 마리 당 몇 kg이 넘는 생선을 배에서 내려 크기와 질에 맞게 분류하고 시장에 내놓기 전까지 창고에 수용하는 일은 두 부부에게 그럭저럭 꾸준한 수입을 만들어주었다. 그것은 감자와 당근이 큼지막하게 썰어진 수프와 생선살을 발라 넣은 맑은 국, 헤지지 않은 따뜻한 이불과 불을 꺼뜨리지 않을 충분한 기름이 유지되는 생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므로 그녀는 순조롭게 출산과 육아를 고려해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가 스무 살이 되던 해 아르피아 여객선 한 대가 항구에 정박하면서 모든 계획은 완전히 틀어지고 만다. 자세히 말하자면, 그녀는 여전히 출산과 육아를 꿈꾸고 있었다. 단지 상대가 호화 여객선에서 막 내린 주황머리의 백인으로 바뀌었다는 점만 달랐을 뿐이었다. 그렇다. 어쩔 수 없게도 그녀는 사랑에 빠져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염하는 태어났을 때부터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날 때까지 그녀와 아버지의 첫 만남에 대해 지겹도록 들어왔다. 과장된 묘사와 왜곡된 기억 속에서 어머니의 행복이 고양되는 걸 지켜보고 있자면, 염하는 사랑을 곧 출산과 육아로 연결하는 면모가 정말 어머니답지 않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곤 했다. 여하튼 어머니는 발주를 위해 항구에 나와 있던 참이었고, 그 날은 거리에 사람들이 몰려 유독 정신이 없었다. (그녀는 훨씬 나중에야 알았지만)당시 항구엔 총독부와 연합군사령부의 낙하산들과 일부 자산가들이 탑승한 호화 여객선이 막 정박한 참이었다고 한다. 인파에 휩쓸리던 그녀는 결국 정박한 객선 앞까지 떠밀리는데, 넘어지기 직전 팔을 붙잡아 준 것이 바로 염하의 아버지였다. “주황색 머리가 햇빛을 받아 불처럼 타오르고 있었단다.” 어머니는 그 말을 할 때마다 꿈꾸는 표정을 지었다. “날 일으켜세우곤 뭐라고 말하더구나. 솔직히 말하자면 아무 것도 알아듣지 못 했어.” 평생 묵해 너머의 국토는커녕 만춘조차 궁금해 해본 적 없던 어머니는 그 이후 무섭도록 아르피아의 모든 걸 추적하기 시작한다. 더듬더듬 간단한 아르피아어 인사말을 외우고 헌 서고에서 지리책을 사다 읽으며, 밤이면 주황색 머리카락의 남자를 속으로 그려보았다. 괜히 항구를 서성거리기도 했으나 남자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다.

염하의 어머니는 그와 일생에 단 세 번 마주쳤다. 한 번은 항구에서, 한 번은 창고에서, 또 한 번은 염하가 열여섯 살이 되던 해 기차역 앞에서였다. 창고에서의 재회는 기대한 것만큼 극적이거나 로맨틱하지 않았다. 하역장을 둘러보러 온 사업자들 사이에 껴있던 남자가 근무 내내 저를 흘끔거리는 조그만 체구의 람족 여성을 의식하지 않았다면 그 만남은 맥없이 무산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염하도 세상에 태어날 일이 없었을 텐데.) 어머니는 재회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사업자들 사이에 껴있는 키 크고 멀쑥한 아르피아인의 경제적 능력은 그녀가 한 번도 경험하거나 가늠해보지 못 한 세계의 것처럼 보였다. 그 세계는 자신이 지난 사년 여간 참고 살아온 남편의 수입을 순식간에 형편없게 느껴지도록 만들었으며, 강렬한 사랑 속에서도 미약하게나마 존재하던 죄책감을 깨끗하게 지워버렸다. 그녀는 주황머리의 아르피아인을 어설픈 인사말로 조르고 매달려 간음했다. 아이를 배면 결혼해 어디로든 떠날 생각이었다. 그는 아주 부자처럼 보였다. 만춘으로 갈 거라는 소문을 들었다. 아이를 가진다면, 그렇게 된다면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만춘에 갈지도 모른다. 아니, 그는 원한다면 그녀를 더 먼 곳으로 데리고 떠나줄 수도 있었다. 지리책엔 너무 많은 영토와 국가가 존재했다. 사시사철 뜨겁고 영원히 울창한 숲이, 혹은 뜨겁고 영원히 메마른 사막도 있었다… 그들은 원한다면 세계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얼마 뒤 남자는 철마를 타고 만춘으로 떠났다. 그녀는 임신했다. 계절과 기차가 끊임없이 떠나고 되돌아왔다. 염하가 태어났고 그녀는 언젠가 떠나게 될 열대우림과 사막 따위를 떠올리며 아이에게 이름(炎夏林)을 지어주었다. 염하(炎夏)라는 건 본디 불타는 계절인데, 그 계절에 영영 갇힌 숲(林)이라면 과연 사랑과 영원의 낙원일 것이 분명하다는 그녀의 개인적인 소망이 담겨져 있는 함자였다. 염하는 한동안 炎夏林, 그러니까 염하림 혹은 옌시아린으로 살았으며, 항구의 여성성을 익혔고 수긍했고 체념하며 꾸준하게 성장하였다. 남자는 오지 않았고 그녀의 어머니는 남편이 아이를 목 졸라 죽이려 들 때마다 “당신 주 거래처랑 아주 잘 아는 남자야, 당신도 기억하지? 걔 죽이면 우리 밥줄도 다 끊기고 말 걸!”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염하의 주황색 머리카락은 그 택도 없는 주장에 근거 없는 신빙성과 두려움을 심어주었고 종국엔 염하의 목숨을 살리게 됐다. 어쨌든 남자가 오지 않는 건 변함없었다. 염하의 존재란 기약 없는 약속의 상징이었고 버려진 여자의 유물이었다. 어머니의 푸념과 망상에 이골이 난 염하는 열 살이 되자마자 자진해서 하역장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리고 열다섯 살 때까지 박스와 거대한 생선을 나르며 살았다.

남자가 뉴 글로레스로 돌아온 건 순전히 사업상의 명목 때문이었으나, 그녀의 어머니는 진작부터 염하를 씻기고 입혀 역까지 끌고 나갔다. 다시 생각해보면 염하는 어머니가 가진 최초이자 마지막 복권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남자는 자신이 남기고 온 딸, 그러니까 어머니의 복권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인지 거절하지 않고 취했다. 그건 어머니가 원하던 결말은 아니었다. 남자가 만춘으로 데리고 간 건 오직 염하뿐이었던 것이다. 기차에 오른 염하는 맞은편에 앉은 생부의 얼굴을 어색하게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유쾌하게 웃어주었다. 그리곤 휘파람을 불었다. 그건 염하가 지난 몇 년 동안 항구에서 들어오던 것과 다르지 않은 성질을 가지고 있었다. 비슷한 결의 욕망을 감지한 염하는 단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고개를 숙이거나 불편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함-을 시도했다. 창밖으론 바다가 차차 풍경 너머로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아, 땅으로, 땅으로 계속 달리면 바다가 멀어지기도 하는구나. 그러니까 염하는 열여섯 살에 처음으로 항구와 지리멸렬한 비린내, 고된 노동과 가벼운 임금의 굴레에서 벗어나 만춘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남자, 남자들의 시선, 남자들이 누리는 자유로부터 벗어나지는 못 했다는 점에서 그 탈출은 별반 의미가 없었다. 단지 남편의 아이에서 아르피아인의 아이를 원하게 됐던 어머니의 욕망처럼, 세계의 어떤 갈망들은 방향만 바꾼 채 비슷한 결을 유지하며 계승되는 중이었다. 염하는 그것을 ‘의식적’으로 인식했으나 ‘무지’하기로 결심해 ‘체념’했으며, 곧 ‘무뎌질 것’을 기다렸다. 그녀는 영리한 까닭에 필연적으로 무기력했다. 염하가 단지 깨닫지 못 한 유일한 사실이 있다면, 만춘으로 향하고 있는 건 오직 자신의 몸뿐이며 영혼은 여전히 항구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는 것뿐이었다. 요컨대 염하는 어머니와 조금도 다른 구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이 인생에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다는 점에서 오히려 어머니의 욕망보다도 뒤쳐져 있었다.

염하와 아버지가 막 만춘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여름이었고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태풍이었을 지도 모른다. 번개가 치고 천둥이 무너지는 가운데 행인들이 뒤집어진 우산을 쓰고 허리를 숙인 채 아무 건물로나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과연 어머니의 기대대로 부유한 모양이었고, 역에서 기다리는 차를 타고 곧장 호텔로 향했다. 그들은 얼마 젖지도 않았다. 모든 게 신기한 동시에 따분했다. 창밖을 내다보았으나 빗방울이 세고 굵어서 풍경이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 때, 차가 급정거하며 멈춰 섰다. 염하는 깜짝 놀랐다. 아버지도 그랬던 모양인지 아르피아어로 욕지거리를 하며 일어섰다. 운전사가 밖으로 나가 상황을 확인하곤 바깥에서 손을 흔들었다. 염하는 아버지의 어설픈 만류를 뿌리치고 차문을 열어젖혔다. 나무 한 그루가 쓰러져 길을 막고 서있었다. 비바람이 무너뜨린 것이 분명해 보였다. 과연 바람이 염하의 등을 자꾸만 후려쳐서 몸이 휘청거릴 지경이었다. 정말이지 억세고 강한 폭풍이었다. 염하는 손을 뻗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굵은 빗방울이 사정없이 얼굴을 때리고 흩어졌다. 그녀는 눈을 감고 주먹을 쥐었다. 아버지가 사다 입힌 인형 같은 옷과 치마가 젖어들도록 내버려두었다. 염하의 영혼이 항구로부터 바람에 떠밀려 오고 있었다. 그것은 쏜살같이 날아와 염하의 정중앙을 관통했다. 아버지가 차 안쪽에서 축축한 염하의 손목을 붙잡았다. “들어와.” 그는 명령조로 이루어진 람어를 썼다. 염하는 눈을 떴다. 마법과 환상의 시간이 깨지고 염하의 영혼은 다시 바람에 떠밀려 사라지는 중이었다. 염하는 그를, 자신의 친부를, 앞으로 자신을 강간하거나 착취하게 될 남자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보았다. 번개가 쳤다. “네, 그래요.” 염하는 아르피아어로 대답했다. “알겠어요.” 그러니까 그녀는 인생에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다.

만춘으로 올라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염하는 개명(炎夏霖)을 신청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꿈꾸던 무성한 숲을 베어버리기로 결심한 셈이었다. 림(林)이든 림(霖)이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보였다. 다만 염하는 세계의 한순간을 뒤엎는, 그리하여 마침내는 고작 나무 한 그루로 부유한 타국의 차를 멈추게 만드는 그 거대한 힘, 폭우가 주는 전복성에 마음을 사로잡혔다고 솔직하게 인정하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 순간에만큼은 정말 영혼을 걸었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그런 감각이 다시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염하의 아버지는 개명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화를 내거나 다그치거나 이유를 묻지 않았다. 단지 원래 그래야 했었다는 것처럼, 림(林)이든 림(霖)이든 달라질 것 없는 마지막 한 글자를 지우는 것에 만족했다. 평생을 염하림, 혹은 옌시아린으로 살았던 염하가 마침내 炎夏가 되던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스물두 살이 될 때까지, 염하는 여전하게도 인생에 많은 기대를 걸지 않았다. 삶을 뒤바꿀 뾰족한 수를 떠올리는데 시간을 허비하지도 않았고 신세를 한탄하는데 눈물을 낭비하지도 않았다. 아버지는 만춘에서 제일가는 규모의 다방 혹은 무도회장을 운영하며 사치를 부렸고 염하에게 매일 질 좋은 고기와 빳빳한 시트, 최신형의 매트리스 따위를 제공하며 부유에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밤마다 남자들이 무도회장으로 찾아와 염하에게 휘파람을 불었다. 염하는 테이블에 앉아 정산을 했다. 계산을 하고 서류를 정리하고 또 계산을 하고 또……. “딸입니다.” 아버지는 그녀를 그렇게 소개했지만 염하는 불만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 해 고개를 숙이거나 시선을 돌려야 했다. 그러니까, 세상 아버지들은 딸을 강간하기도 하는 건가? 남자들을 말이다. 남자들을 어떻게 하면 좋은지, 어떻게 하면 무시하거나 세상에서 완전히 내쫓을 수 있는지 말이다. 알 수 있다면 좋겠다. 영원히 그치지 않는 폭염과 비속에서 절절 절여지다보면 영혼이 거기 있는 줄도 모르고 태평하던 인간들이 모두 쓸려가지 않을까? 그리하여 영혼을 잃은 여인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영혼을 줍고 또 줍고 또……. 아니, 아니다. 염하의 ‘霖’은 삭제되었다. 폭풍은 오지 않는다.

아버지의 다방 不落花는 아침엔 커피를 팔고 밤에는 재즈와 춤곡, 무대를 판다. 염하의 역할은 그 모든 운영으로부터 오는 돈을 계산하고 받아 적는 업무를 다하는 것이다. 염하는 영악하기도 해서 이따금 돈을 꿍치거나 빼돌려 장부를 작성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아직 정말 그렇게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마음을 먹는다면 언제든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밤마다 제게 휘파람을 부는 남자들을 속으로 외모부터 청결 순으로 줄을 세워본다. 만춘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멀쑥해서 청결 순으로 줄을 세우기란 어려운 것이고 또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오는 재미가 있다. 남자들은 염하를 “재수 없고 불친절”하다고 말하지만 염하의 얼굴을 보고 있자면 “튕기는 맛”이 있어 좋다고 정정한다. 하지만 아무리 염하가 예쁘장하고 귀여운들 그녀의 ‘줄 세우기’를 들었다면 길길이 날뛰며 뺨을 갈겼을 것이다. 항구에서든 만춘에서든 영혼의 존재를 모르는 인간들이란 그런 식으로 나태하고 비극적인 존재가 되고 마는 것. 염하가 욕망한다면 좋겠다. 스스로도 바란다. 그렇다면 가장 먼저 무엇을 가지고 싶은가?

아니, 무엇부터 “돌려받길” 원하는가? 18연대 3대대는 무엇을 “되찾기” 위하여 싸우는가?

염하는 자신이 궁극적으로 원하는 모든 것은 이 시대 안에 달성되지 않을 것임을 거듭 깨닫고 있다. 무섭도록 영리하기 때문에 무기력하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한 “무딤”과 “체념”속에서 “의식적으로” “무지해졌다.” 그래도 되찾고 싶다. 욕망하고 싶다.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국가의 영혼을 되찾길 염원하는 3대대와 염하의 이해관계는 일치한다. 시대를 바꿔야 한다면 그 흐름에 편승하겠다. 폭풍 앞에서 기꺼이 비를 맞았던 순간처럼. 그러나 비장하거나 무거운 결심은 아니다. 염하는 인생에 많은 기대를 걸지 않는다. 누군가 그녀 삶에서 또 다른 霖을 지워나간다면, 굴복하는 수밖엔 도리가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시대가 뒤바뀔 때까지 살아있다면, 아, 땅으로, 땅으로 계속 달리면 바다가 멀어지기도 하는구나. 그렇게 생각하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산으로, 산으로 계속 달려서 하늘과 가까워져야지. 내 폭풍을 되찾으러 가야지.

요컨대 염하는 포부에 비해 삶에 다소 소극적인 태도를 취했던 셈이다.

그런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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