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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가지의 단편 모음
1차/old 2019. 10. 30. 17:32

이것은 나의 교본이다. 앞서서 걸어간 사람의 뒤를 쫓은 건 유일한데, 그 사람은 망령이나 마찬가지라 감히 이름을 붙일 수가 없다. 그 누군가가 나를 위해 만들어준 것을 이곳에 옮겨 쓴다.  

Oth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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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이어 성을 떠난 지 두 달째에, 잼은 북쪽 어디쯤에 있는 작은 마을을 방문했다. 그곳에도 성당이 있었고, 그 안에는 에온이 있었다. 잼은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근방을 빙빙 돌며 건물을 구경했다. 저녁이 오고 있었고, 미사가 끝난 사람들이 마을 곳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스테인드글라스에 비친 투명하고 다채로운 색들이 보석처럼 에온의 석상을 감싸는 것을 보았다.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언젠가 내 집이 생긴다면. 잼은 생각했다. 창문 하나쯤은 저런 거였으면 좋겠는걸. 물론 잼에게 집은 의미가 없는 것이었고, 그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기대조차 하지 않았으나, 어쨌든 상상은 즐거운 것이다. 성당 기둥에 기대어 웅크리던 잼은 어느 순간 짧은 잠에 빠졌다.

잼은 그곳에서 꿈을 꾸었다. 그녀는 이스마이어 성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알랑과 함께였다. 많은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다. 그런데 복도 뒤쪽으로 발소리가 가까워진다. 가볍고 사뿐사뿐하며 몹시 재빠르게 다가온다. 그리고 곧 잼의 팔을 붙잡는다. 잼과 알랑은 오셀로를 돌아본다. 오셀로가 말한다.

“천국에 대해 이야기를 했었잖아요.”

“생각해보니 그런 건 없죠.”

“그리고 저희가 살고 있는 곳은 둥글고.”

“어쨌든 돌고 있어요.”

“어쩌면 신도 죽었을지도 몰라요.”

꿈속의 잼은 신을 막 죽이기로 결심한 불온하고도 신성하며, 오만하고도 진중한 어린 천재를 내려다보며 대답한다.

“그렇지 않아, 오셀로. 신은 있어. 그게 우리들의 신이 아닐 뿐이야.”

“아니기 때문에… 다들 그 자신들의 신을 만들어온 거야.”

그러자 꿈속의 세계가 잼에게 축복을 내려주었으니. 어딘가에서 목소리가 쏟아져 내렸다. 목소리는 눈으로 확인하니 온통 빛처럼 보였다. 빛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잼이 고개를 젖혔을 때, 둔중한 종소리가 울렸다.

잼은 잠에서 깨어나 고개를 들었다. 성당이 저녁 종을 울리고 있었다. 노을이 거의 다 져서 사위가 벌써 캄캄했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투과하던 빛은 사라지고, 화려하게 빛나던 에온의 석상이 어둠속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 신이 있음을 잼은 알 수 있었다. 신을 알고 있는 자는 신의 형상이 필요 없다.

잼은 성당의 창문 앞에 서서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어둠이 있음에 감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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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을 보살펴주던 소작농 부부의 이름은 메리와 젠이다. 메리는 튼튼하고 건강한 몸을 가졌고, 금슬이 좋은 남편을 뒀다. 그녀는 열여섯 살에 젠과 결혼하여 다섯 명의 아이를 낳았고, 잼을 떠맡기 직전 한 명의 아이를 더 출산했다. 그럼에도 육아에 다소 서툴렀으며, 반면 자수는 몹시 출중하여 아이들 옷에 곧잘 수를 놓아주었다. 잼에게 수를 놓아준 것은 단 한 번뿐이다. 잼은 그 원피스를 퍽 마음에 들어 했으나, 이틀 만에 놈팽이와 싸우다 못 쓰게 만들었다. 잼은 그 때 처음으로 죄책감을 느꼈다.

메리는 밤샘작업을 하며 평생 남의 옷을 기웠다. 잼은 이따금 화로 앞에서 잠든 메리의 손을 붙잡고 뒤집어보곤 했다. 그녀의 손가락은 더 이상 물집이 잡히지 않을 만큼 단단했고 곳곳이 옴폭해져 있었다. 그것은 삶의 흔적이고 우리가 굳은살이라 부르는 것이다.

용병이 된 이래로 잼 역시 도구를 사용하게 되었다. 손가락이 자라는 동안 많은 물집이 잡히고 터져나갔다. 열일곱 살이 끝나갈 무렵, 잼이 손바닥을 들여다보니 창을 잡던 부위가 오목해져 있고 그 주변이 몹시도 단단하였다.

그 뒤에도 잼은 이따금 화로 곁에 의자를 두고 잠든 메리의 앞에 앉아 그녀의 손을 뒤집어보았다. 그리고 그 손바닥을 만질 때마다 전사를 생각했다.


파멜라 항만 골목에는 전사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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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에게는 아주 어릴 적부터 때때로 찾아오던 일정한 꿈이 있다. 꿈속의 잼은 無의 공간에 앉아있고, 건너편에는 잼의 운명이 앉아있는 것이다. 잼의 운명은 잼과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고, 성격이 나쁘다. 잼은 그녀를 여덟 살에 처음 보았다. 폭풍우가 치던 날이었다. 지붕으로 비가 새서 메리와 젠이 양동이를 가져다 놓았다. 밤새도록 양동이 속으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잼은 어느 순간 잠이 들었는데, 어둠 속에서 운명이 나타나더니 잼에게 제리가 죽을 거라고 말했다. 제리는 잼과 같은 해에 태어난 메리와 젱의 아들이다. 잼은 제리가 비록 자신의 밥그릇을 실수로 엎거나 이따금 심하게 잠꼬대를 하며 자신을 발로 차긴 하지만, 그것은 별로 유감이 아니므로 이왕이면 제리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운명은 어깨를 으쓱이곤 어쩔 도리가 없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곳에 온 건 제리가 죽어서 잼에게 한동안 나쁜 일이 닥칠 거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라고 말했고, 잼은 잠에서 깨어났다. 천둥이 번쩍 쳤다. 잼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제리의 침대로 달려갔다. 제리는 불처럼 뜨거웠다. 잼은 아픈 사람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메리와 젱을 깨웠다. 그리고 제리에게 돌아왔을 때, 제리는 죽어있었다. 제리의 이마는 미지근해져 있었다.

그 때, 잼은 제리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감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유감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까? 잼은 그 공백에 이름을 붙여주고 싶었으나 도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알고 있는 단어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알고 있는 게 많았다고 해도 어쩔 도리는 없었을 거라고, 나중에 잼은 생각했다.

폭풍우는 한동안 파멜라 항만의 골목 곳곳을 뒤엎어놓다가, 일주일 째 되던 날 마침내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메리와 젱은 양동이를 치우고 물을 비웠다. 그리고 숲 근처에 제리를 묻어주었다.

그 날 밤은 몹시 조용했다.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도 없었고, 천둥도 치지 않았다. 잠꼬대를 하며 돌아다니던 제리가 잼의 침대로 기어들어가 그녀를 발로 차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잼은 그 고요함 속에 웅크린 채 뜬눈으로 생각했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공백을 하나 가지게 되는 일은 성가시구나. 그렇군, 이게 네가 말한 나쁜 일인가. 그러자 운명이 제리의 침대에서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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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멜라 항만의 가장 높은 언덕은 성당의 첨탑보다도 높아서 무엇이든 내려다볼 수 있다. 정면으로는 거대한 수평선이 펼쳐지고, 왼쪽에는 큰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일곱 살의 잼은 어느 날 길을 헤매고 싶다는 생각을 했고, 모르는 길을 따라 마을 뒤쪽으로 걸어 나갔다. 고의로 미아가 되었으니 걱정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의지대로 만난 불행 앞에서 두려워할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그리하여 잼은 비탈을 따라 이어지는 그 언덕을 만났다.

잼은 심심할 때마다 그 언덕을 올라 정면으로 펼쳐진 거대한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손바닥을 펼쳐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대고 눈을 가늘게 뜨면 바다를 건너서 돌아오는 거대한 범선들이 보였다.

“아주 마음에 드는 걸. 여긴 이제부터 내 땅이야.”

그래서 그 언덕은 잼의 땅이 되었고, 잼은 원하는 대로 그곳을 마음껏 사용했다. 열한 살에 그녀는 스승을 그곳에 묻어주었고, 열여섯 살에는 처음으로 그곳에 누군가를 초대했다. 오셀로가 말하길,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는데. 잼은 정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군요…. 둘은 종종 그곳을 뒹굴거나 아래를 내려다보거나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낮잠을 잤다.

하루는 오셀로가 나무뿌리 사이에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잼은 오셀로에게 그 아래에 사람이 묻혀있다고 말했고, 오셀로는 고개를 들어 그렇다면 그게 누구의 시체냐고 물었다. 잼은 자신의 스승이라고 대답했다. 오셀로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여기 계속 앉아있어도 되냐고 되물었다. 잼은 오셀로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고 대답했다.

“이 언덕에서 네가 원하는 건 다 해도 좋아.”

그것은 잼의 선심이었는데, 머리가 좀 더 큰 후에는 토지 소유권을 사실상 오셀로에게 넘겨준 셈이 아닌가 고민하게 되었다. 오셀로의 어떤 것들이 때때로 잼의 것이 되듯, 잼의 어떤 것들 역시 때때로 오셀로의 것이 되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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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멜라 항만에 여름축제가 열렸다. 달이 가장 가깝고 크게 뜨던 밤이었다. 저녁이 끝날 무렵 모두가 불을 밝히고 등불을 올려 세상을 환하게 만들었다. 잼과 오셀로는 영원히 빛날 것만 같은 거리를 거닐며 설탕을 녹여 만든 상상 속 동물 모양의 사탕을 핥아먹었다. 사람들이 박수를 치면 흥에 겨운 누군가들이 뛰쳐나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술집마다 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테이블 위로 고기가 올라오고, 잔마다 가득 와인이 들어찼다. 건배를 외치면 휘파람 소리가 들렸다. 잼은 오셀로를 끌고 아무 술집에나 들어갔다가 쫓겨나고 말았다.

“이건 다 네가 땅딸막한 탓이야. 너만 없었어도 꼬맹이 취급은 안 받았다구?”

잼이 투덜거리자 오셀로가 대답했다.

“잼도 그렇게 크진 않아요.”

둘은 시장을 몇 바퀴나 빙글빙글 돌며 평소에는 먹을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뱃속으로 밀어 넣었다. 사실 오셀로는 먹는 것보다 장신구들에 더 관심이 있었다. 오셀로는 새 반지를 다섯 개나 샀다.

“예쁘지 않아요?”

오셀로가 묻자 잼이 대답했다.

“보석이 무지막지하게 커서 무지막지하게 빛난다는 것 외에는 잘 모르겠는데.”

오셀로는 씩 웃으며 말했다.

“그거면 됐어요.”

축제의 말미에는 사람들이 광장에 모였다. 바다를 배경으로 지은 소극장에 극이 올라갔다. 막의 시작을 알리는 피리소리가 울리자 사람들이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박수를 쳤다. 오셀로는 키가 모자라 인파 사이에서 서성일 뿐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보고 싶어?” 잼이 물었다.

“가능하다면요.” 오셀로가 대답했다.

잼은 오셀로의 손을 잡고 인파로부터 벗어났다. 그리고 무대와 가장 가까운 천막에 판자를 얹어 계단을 만들었다.

“남의 천막인데 괜찮을까요?” 오셀로는 그렇게 말하는 사람치곤 크게 걱정하는 투가 아니었다.

“걸리면 도망치지 뭐.” 잼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잼은 오셀로가 무사히 천막에 올라갈 수 있도록 손을 잡고 균형을 맞춰주었다. 그리고 극이 끝났을 때, 까치발을 들고 팔을 뻗어서 오셀로의 허리를 붙잡았다. 잼은 오셀로를 가볍게 들어 땅에 도로 내려주었다.

“어땠어?” 잼이 묻자, 오셀로가 옷을 털며 대답했다.

“생각한 대로 진행되어 좋았어요.”

잼은 그것을 이상한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잼은 어땠어요?” 오셀로가 묻자, 잼은 어깨를 으쓱였다.

“너 대신 망보느라 제대로 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는걸.”

“말하지 그랬어요. 미안한 걸요.”

“난 원래 극에서 재미를 못 찾는 사람인 걸. 괜찮아. 아쉽지도 않고, 상관도 없어.”

“그렇구나.” 오셀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오는 길에, 오셀로는 잼에게 아까의 극이 자신이 쓴 극이라고 말했다. 잼은 그 말을 믿는 대신 큰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곤, 이왕 허풍을 떨 거라면 수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극도 본인이 쓴 거라고 말해보지 그러냐고 대꾸했다. 그러나 잼이 대꾸하는 모든 것들은 언제나 오셀로의 업적이었거나 업적이 될 예정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나치게 뒤쳐졌거나 때때로 예언자였던 셈이다. 

일 년 뒤에 오셀로는 수도에 극을 올렸고, 많은 인기를 얻으며 명성을 쌓았다. 한편 잼은 용병을 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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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멜라 항만의 가을에는 특별한 상인들이 찾아온다. 동방국가를 떠돌며 수집한 진귀한 새들을 취급하는 판매상들이다. 새 시장은 마을과 제법 떨어진 변두리 골목에 세워지는데, 그 무렵 마을 변두리에는 오뉴월의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 몹시 장관이다. 양 골목으로 각각의 새장이 매달리고, 새들이 지저귀며, 꽃이 만개한 그곳은 꼭 별천지처럼 보인다. 잼은 그곳에서 오셀로를 졸라 작은 분홍색 새 한 마리를 샀다. 철장을 금으로 만들어 값이 꽤 나갔다. 잼은 나중에 갚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큰소리를 쳤고, 오셀로는 잼이 살아 돌아오는 것을 걱정하는 편이 빠르겠다고 대꾸했다. 그 무렵 잼은 돈을 벌기 위하여 용병을 뛰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시장을 벗어나자마자 새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잼과 오셀로는 언덕으로 올라가 새에게 바람을 쏘였다. 그러나 새는 여전히 지저귀지 않았다.

“풀어줘야 할 것 같아요.” 오셀로가 말했다.

“아까워.” 잼은 새의 섬세한 분홍색 날개와 아름다운 꼬리깃을 보며 중얼거렸다.

잼은 그 새가 정말 마음에 들었고, 가능하면 오래 곁에 두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 함을 알고 있는 것과 그것을 행하는 일은 각각 다른 범주에 있으며, 후자를 실행하기란 인간에게 몹시 힘든 것이다.

“더 좋은 새를 구해줄게요.” 오셀로가 말했다.

“이것만큼이나 내 마음에 드는 녀석은 없을 거야!” 잼이 대꾸했다.

오셀로는 대답대신 옅은 미소를 달고 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인간의 욕심을 버리고 생명의 도리를 선택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잼이 긴 한숨을 내쉬며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대로 둬봤자 내 곁에 오래 있어주지 못 하겠지….”

잼은 철창을 열고 부드럽게 새를 쥐어 밖으로 꺼냈다. 그리고 손바닥을 펼쳐 새를 풀어주었다. 새는 곧장 날아가지 않고 잠시 잼의 손가락에 머물러 있었고, 그것은 잼을 더욱 슬프게 만들었다. 잼이 말했다.

“네가 오래 내 곁에 있어줬으면 했는데.”

그러나 새는 날아갔다. 잼과 오셀로는 날개를 펼쳐 날아가는 한 마리의 아름다운 새를 올려다보았다. 새는 창공으로 비상하여 지평선을 따라 바람과 함께 흘러갔다.

“철창 속에 있을 때보다 더 눈부시구나.” 잼이 말했다.

“그러게요.” 오셀로가 대답했다.

오셀로는 의기소침한 얼굴로 언덕을 내려오는 잼을 뒤따라 걸었다. 그리고 잼에게 팔짱을 걸며 약속했다.

“당신의 곁에 오래 있어줄 새를 반드시 구해줄게요.”

며칠 뒤 다시 만난 오셀로는 잼에게 작은 브로치를 하나 건네주었다. 그것은 금으로 만든 새였다. 둘이 언덕에서 풀어준 바로 그 새였다. 꼬리깃이 아름답고 날개깃이 섬세하게 세공되어 있었는데, 오셀로가 빈 철창을 녹여 다시 만든 것이다. 잼은 그 브로치를 따로 간직했다가,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 사용했다.

잼의 푸른 숄과 붉은 숄이 바로 그 새로 고정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새는 결코 잼을 떠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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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여섯 살에, 잼은 북쪽 산을 내려와 강을 건너 남부로 떠났다. 이베르타의 남부는 드넓은 평야지대로, 마차가 달리기 수월하고 통신이 빨라 서신을 치기에 용이하다. 잼은 한 마을에 들러 오셀로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런 후 마을을 둘러보았다.

그 마을은 잼이 도착하기 몇 달 전 이유를 알 수 없는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남은 사람들은 떠나고, 병자들이 남아 밤낮으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었으므로 집은 몇 채 남지 않았고, 마을이라기보다 마을이 있던 터처럼 보였다. 잼은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우물에 두레박을 내리고 물을 떠서 마셔보았다. 그리곤 구역질을 하며 뱉어냈다. 물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

잼은 오셀로에게 우물에 관하여 서신을 썼다. 얼마 후 오셀로로부터 답신이 도착했다.

 

우물은 땅속을 흐르는 지하수를 괴게 한 것이지요. 그 물이 썩었다면 수맥이 끊겨 더는 흐르지 않는 것이니 그 우물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요. 그러나 수맥은 끊기는 한이 있더라도 마르는 법이 없으니 근방의 지하에는 여전히 물줄기가 흐르고 있을 것입니다. 새 우물을 파는 편이 좋겠네요. 초목이 유난히 울창한 지대를 훑어보도록 해요.

 

다음 날, 잼은 삽을 들고 마을 근방을 샅샅이 뒤졌다. 그리고 작은 숲이 자라고 있는 평야에 천막을 치고 땅을 파기 시작했다. 사흘 째 되던 날 바위를 깨자 물이 솟아올라 흙이 습윤해졌다. 잼은 발목까지 차오른 물에 손을 넣어보았다. 차갑고 깨끗했다.

그녀는 돌축을 쌓고 물이 충분히 고일 때까지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우물이 완성되자, 두레박을 달아 물을 길어 올렸다. 그녀는 첫 번째로 길어 올린 깨끗한 물을 자신의 당나귀에게 주었다.

잼은 마을에 남은 병자들을 위하여 새 우물 근처에 천막을 쳤다. 그리고 그들을 천막에 눕혀 매일 보살펴주었다. 깨끗한 물을 길러 머리맡에 두고, 천막 입구를 걷어 따뜻한 볕과 선선한 바람을 쏘일 수 있게 했다. 한동안 그녀는 동이 틀 무렵 일어나 우물에 두레박을 던지고 차갑고 깨끗한 물을 길렀다. 그리고 오후가 되기 전까지 천막을 돌며 병자들을 보살피고, 저녁이 될 때까지 빨래를 하고 밥을 지었다. 나중에는 정신을 차린 몇몇의 사람들이 그녀의 일을 도와주었다.

소문을 듣고 돌아온 병자의 가족들과 떠돌이들이 새롭게 천막을 치면서 그 지대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북적이게 되었다. 잼은 오셀로에게 이 일에 대한 서신을 썼고, 오셀로는 답신으로 이렇게 말했다. 그야말로 dig (a) well이군요.

잼이 떠난 후에도 그 지대에는 사람들이 남았고,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는 작은 우물을 중심으로 새로운 마을이 지어졌다. 모두가 그 마을을 디거웰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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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를 숭상하는 민족이 있었는데, 그 민족들은 하나같이 탁한 금색의 머리카락과 눈을 가졌다. 그 모습으로 강가에 모여 살았으므로 갈대의 민족이라고 불렸다. 투생이 태어났을 때, 전쟁은 끝나있었고 민족은 뿔뿔이 흩어져 더는 그 역사가 이어지지 않았다. 투생은 마구간 집 아들이었고 네 살 터울의 어린 여동생이 있었다. 그러나 다음 해에는 기근과 역병이 찾아왔고, 말들은 모조리 죽고 말았다. 투생은 여동생과 함께 남부평야로 건너왔으나, 얼마 안 있어 여동생도 죽었다. 투생은 남부에서 가장 큰 경마장으로 들어가 숙식을 제공받고 빚을 얻어 그곳에 일자리를 마련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젱킨스를 만났다.

둘은 만나자마자 서로가 갈대의 민족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젱킨스에게도 투생에게도 대수로운 일이었다. 그들의 민족은 이제 겨우 열 손가락 남짓 남아 세상을 떠돌고 있었으므로, 만나게 되는 일은 몹시 드물었던 것이다.

“너 이름이 뭐야?” 젱킨스가 물었다.

“투생.” 투생이 대답했다.

“참새의 꼬리구나.”

젱킨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투생이 되물었다.

“너는?”

“난 매의 날개야.”

“그럼 넌 젱킨스겠네.”

그들의 민족은 이름으로써 새를 숭상한다.

 

젱킨스는 투생보다 고작 하루 일찍 들어온 선참으로, 꼼꼼한 일보다 지시하는 일에 적성이 잘 맞았다. 일을 능률적으로 처리하고 어떻게든 편리한 방법을 찾아내어 꾀를 부렸다. 반면 투생은 일정한 시간 안에 성실하게 공들여야만 성과를 낼 수 있는 일을 잘했고, 사실 그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할 수 있는 것이다-이것은 투생의 생각이고, 젱킨스는 실제로 투생의 그런 부분을 높게 쳤다.

어쨌거나 젱킨스는 일을 잘했다. 남들이 잘 하지 못 하는 방식으로 특출 났기에 곧 경마의 바람잡이로 투입되었다. 젱킨스가 화폐를 나르고 판돈을 올리는 동안 투생은 마구간 안에서 짐승의 배설물을 치우고 짚을 갈아주거나, 숙소를 청소하고 쓰레기를 비웠다. 투생은 그 일을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좋아하는 쪽에 속했다. 그는 인간들에 둘러싸인 것보다 짐승들에게 둘러싸이는 쪽을 선호했다. 말과 머리를 맞대고 갈기를 쓸어주면 다정한 숨소리와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젱킨스가 인간에게 쉽게 사랑을 얻는 재능을 가졌다면 투생은 짐승에게 쉽게 사랑을 얻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잼이 남부에 도착했을 때, 젱킨스와 투생은 여전히 그 경마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잼은 과과를 근처 상단에 맡겨놓고 경마장을 찾았다. 경마가 막 시작되려는 참이었다. 그녀는 제일 높은 곳에 턱을 괴고 앉아 경기를 구경했다. 한창 바람을 잡으며 상자 가득 돈을 모아오던 젱킨스가 그녀에게 붙어 말했다.

“몇 번에 거시겠어요? 이번 말들은 다 상태가 제각각이라 아주 많은 변수가 있답니다.”

잼은 젱킨스를 들여다보곤 씩 웃었다.

“돈을 걸 생각은 없어.”

“에이, 빼지 마셔요.”

젱킨스가 그녀의 옆에 앉았다.

“저기 세 번째 말 보이시죠? 저 말에겐 걸지 마세요. 투생이 그러는데 그제부터 상태가 이상했다더군요.”

젱킨스가 정보를 흘리며 잼의 눈치를 살폈으나 잼은 어깨를 으쓱이곤 되물었다.

“투생도 너처럼 그런 이야기를 술술 흘리고 다닌다니?”

“걘 바람잡이가 아니라 마구간에서 일한답니다. 기수 옆에 붙어서 말의 상태를 점검하기도 하죠.”

“보이질 않는데.”

“세 번째 말을 내보내지 말라고 말했다가 주인한테 뺨을 얻어맞았거든요.”

“저런.” 잼은 턱을 괸 채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시작하려나보네. 내겐 한 장도 못 팔았구나. 유감이네.”

“그러게요.” 젱킨스가 빙긋 웃었다.

“차라리 다른 사람에게 붙을 걸 그랬어요. 티켓 열 장은 팔았을 텐데 말이죠.”

경기가 시작되자 관중들이 비명에 가까운 응원을 내질렀다. 잼은 말들이 달리는 것을 보았다. 기수들은 솜씨가 좋지 않았다. 말을 달린지 오래 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마침내 코너를 돌 때, 세 번째 말이 비틀거리다 말고 트렉을 이탈하여 그대로 넘어졌다. 관중석 곳곳에서 욕지거리와 함께 탄식이 터져 나왔다. 젱킨스가 잼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투생의 말이 옳았군요.”

“다리가 부러졌을까?”

“분명 그럴 거예요. 빠르게 달리고 있었던 데다가 가파른 길을 꺾고 있었잖아요?”

경기장 끝에서 나타난 한 소년이 절룩거리는 말을 향해 뛰어갔다. 잼은 그 소년을 유심히 내려다보며 대답했다.

“그렇군.”

경기가 끝난 후에 그녀는 경마장의 마구간을 방문했다. 투생은 마구간 입구 앞에 앉아 쓰러진 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왼쪽 뺨이 퉁퉁 부어있었다.

“네가 투생이지?” 잼이 물었다.

투생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어 그녀를 보았다.

“그런데요.”

“왜 울고 있니?”

“말이 죽을 것이기 때문이에요.”

투생은 다시 고개를 숙여 말을 끌어안았다. 말의 입가로 흰 거품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생명은 언젠가 죽기 마련인데, 그럼에도 너는 우는구나.” 잼이 말했다.

“하지만 인간에 의한 죽음이 아닌가요.”

잼은 투생의 목소리에 깃든 증오와 분노를 느꼈다.

“주인에게 뭐라 말해서 얻어맞았니?”

그러자 투생이 고개를 들고 잼을 바라보았다.

“욕심을 버리고 도리를 다해달라고 부탁했어요.”

잼은 투생을 일으켜 세우고 눈물을 닦아주었다.

“저 말을 살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다시는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도와주마.”

그녀가 말했다.

“그러니까 너는 나를 따라가자.”

잼은 투생의 빚을 전부 갚고 말의 시체도 샀다. 그리고 그 말을 수레에 실어 이동하는 데에도 돈을 썼고, 투생이 말을 묻는 것도 도와주었다.

투생이 짐을 챙기기 위해 숙소로 돌아왔을 때, 젱킨스가 입구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이야? 다들 네가 빚을 다 갚아서 떠날 거라고 말하던데.”

“맞아. 새로 고용된 곳이 있어.”

투생은 과과를 끌고 돌아오는 잼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젱킨스가 잼을 알아보고 소리쳤다.

“아, 저 여자! 티켓 한 장도 안사기에 땡전 한 푼도 없는 줄 알았는데!”

“할 일이 있대. 일손이 부족해서 누군가 필요하다나봐.”

“넌 그래서 저 여자를 위해 무엇을 하는데?”

그러자 투생이 어깨를 으쓱이곤 말끝을 흐렸다.

“글쎄… 짐꾼?”

“짐꾼 하나 고용한다고 네 빚을 다 갚아줬다고?”

“투생, 이제 가자.”

잼이 투생을 불렀다. 투생은 짐을 끌어안고 몸을 돌렸다.

“안녕, 젱.”

둘이 언덕을 넘어왔을 때, 누군가 둘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잡았다. 잼과 투생이 뒤를 돌았더니 그곳에 젱킨스가 서있었다. 젱킨스는 일할 때 메고 있는 상자와 상자 속에 모아둔 돈을 그대로 들고 있었다.

젱킨스가 능청맞게 웃었다.

“저도 데려가주시면 안 돼요?”

잼은 젱킨스의 상자를 가리켰다.

“그건 어쩔 셈이니?”

젱킨스는 잼과 상자를 번갈아 바라보곤, 어깨를 으쓱이며 상자를 던졌다. 눈앞에서 돈뭉치가 우수수 날아가고 동전들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잼은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좋아. 따라오는 건 네 자유야. 하지만 짐을 챙겨올 시간은 줄 수 없어. 우리는 산을 넘어야하거든.”

그러자 젱킨스가 대답했다.

“난 늘 짐 같은 거 만들지 않고 살았어요.”

이렇게 해서 잼은 언젠가 떠나가거나 남게 될 두 마리의 새를 곁에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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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생과 젱킨스는 잼과 함께 산을 넘었다. 남부의 산은 높지 않고 완만하였다. 잼은 때때로 앞서나가다 되돌아왔고, 두 아이들은 바람처럼 움직이는 그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사실 신이나 유령인 거 아냐? 속닥거리는 젱킨스의 말을 무시하며 투생은 꿋꿋하게 걸었다.

산을 내려온 그들은 마차를 타고 남부를 완전히 벗어났다. 그리고 며칠을 더 달려 북쪽으로 들어섰다. 투생과 젱킨스는 거대한 산맥을 경이로운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결코 녹지 않는 단단한 얼음이 정상을 지배하고, 깎아지를 듯한 절벽 아래로 드문드문 피어난 작은 풀꽃들이 곳곳에 녹색을 이루었다. 북부의 봄은 남부의 겨울보다 더 쌀쌀하거나 추웠다.

“이제부터 우리는 이 산을 오를 거야.” 잼이 말했다.

두 아이들은 잼과 함께 험준한 산을 올랐다. 마을이 가까워지면 잼은 자리를 잡고 천막을 쳤다. 두 아이들도 곧 천막을 치고 걷는 것에 익숙해졌다. 잼은 둘에게 독초와 식용 풀꽃을 구분하는 법을 가르치고 약초를 어떻게 말려 보관하는지 보여주었다. 젱킨스는 빨리 배웠고, 투생은 어려워했다. 투생은 잼의 샌들을 기우거나 빨래를 하는 일이 더 즐겁다고 말했다. 잼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고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루는 배가 찢어진 사람이 수레에 실려 왔다. 지붕 수리를 하다가 울타리 근처에 떨어지며 살이 찢어졌다고 했다. 잼은 천막을 걷어 올리고 물과 천, 바늘과 실을 가져왔다. 투생과 젱킨스가 부상자의 팔다리를 잡는 동안 그녀가 상처 위를 깨끗하게 닦고 진통 효과가 있는 완화제를 바른 후 망설임도 없이 살갗에 바늘을 꽂아 넣었다. 두 아이들은 부상자에게 필사적으로 매달린 채 장기가 번들거리는 뱃가죽을 오므려 기워 넣는 잼의 손놀림을 지켜보았다.

수술이 끝났을 때, 두 아이들은 기진맥진하여 바닥에 쓰러졌다. 잼은 팔팔하게 날아다녔다. 그녀는 혼자 새 천막을 치고 환자가 편하게 누울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상처가 다 낫기 전까진 산을 내려가지 마세요. 가능하면 움직이지도 말고요. 일이 있으면 나나 저 아이들을 부르면 됩니다. 도울 수 있는 선에서 도와드리죠.” 그녀가 말했다.

그날 밤 세 사람이 모닥불에 모여 앉았다. 젱킨스가 말했다.

“앞으로 저희는 이런 일을 하게 되겠군요.”

“맞아.” 잼이 대답했다.

“당신을 뭐라고 부르면 좋을까요?” 젱킨스가 물었다.

“글쎄….”

잼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냥 잼이라고 부르렴.” 

그 뒤로 젱킨스는 그녀를 스승이라고 불렀고, 투생은 잼이라고 불렀다. 투생이 그녀의 제자가 되는 것은 한참 뒤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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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많이 부는 밤, 언덕을 넘어 한 여인이 찾아왔다. 잼은 천막을 걷고 그녀를 부축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양수가 터져 흐르고 있었다. 투생과 젱킨스가 불을 밝혀 천막을 환하게 만들었다. 잼은 그녀를 눕히고 이마를 짚어보았다. 불덩이 같았고, 땀이 아주 많이 났다.

잼은 출산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잼은 투생을 시켜 마을의 산파를 찾도록 지시했다. 투생이 언덕을 내려가는 동안, 젱킨스와 잼은 천막에 남아 여인의 손을 잡아주었다. 그러나 진통이 시작되었으므로 그녀에겐 그 이상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투생이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이 아주 많이 불었다. 천막이 통째로 흔들리며 무시무시한 소리를 냈다. 촛불 위의 불꽃이 망토를 두른 죽음의 사자처럼 길게 휘어지면서 타올랐다. 잼은 결단을 내렸고, 여자 곁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잠시 후 두 번째 진통이 찾아왔고, 출산이 시작되었다.

잼은 서툴렀지만 제대로 해냈다. 그러나 상황이 나빴고, 산모의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다. 아이의 머리도 너무 컸다. 잼은 마침내 선택을 해야만 했다. 그녀에겐 고민할 시간조차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잼은 결국 한 사람을 선택했다. 아이가 죽었고, 산모는 살아남았다.

새벽이 될 무렵 바람이 그치고, 여명과 함께 두 사람이 언덕을 올라왔다. 땀투성이가 된 투생과 늙은 산파였다. 잼은 천막 앞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산파가 상황을 둘러보고 돌아온 후 포대기에 죽은 아이를 감쌌다. 그리고 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녀는 잼에게 단 한 마디도 건네지 않았다. 그건 그 누구도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미리멈은 자신을 쥐고 놓아주지 않는 끝없는 고통과 열기 속에서 몸부림치다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누군가 자신을 흔들어 깨우는 소리를 들었다. 지옥 같은 통증이 아랫배와 다리를 찢어발기고 있었고, 불꽃이 일렁이며 춤을 추었다. 그녀는 두려움 속에서 어머니를 불렀다. 그리고 신에게 도와달라고 빌었다. 바람이 우우 불었다. 마침내 눈앞으로 흰 가닥의 선이 아주 빠르게 지나갔는데, 어떤 계시를 받은 사람이 으레 느끼는 것처럼, 그녀는 신이 선택을 내려줬다고 믿었고, 혹은 신의 대리인이 그 일을 해줬을 거라고 믿었다. 마침내 부글부글 끓어오르던 열과 통증이 암흑으로 떨어지고 오랜 평온이 찾아왔다. 미리멈은 처음 숨을 들이쉬는 사람처럼 입을 크게 벌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천막에 누워있었고, 머리맡으로 여명이 밝아오고 있었다. 산파가 그녀의 이마를 어머니처럼 짚어주면서 말했다. “다 끝났단다.”

천막을 걷자 햇빛이, 타오르는 날것의 빛과 분홍빛으로 물든 하늘이 보였다. 미리멈은 그렇게 깨끗하고 차가운 공기는 처음 마셔본다고 생각했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뺨을 타고 환희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산파가 포대기를 안고 돌아왔을 때, 그녀는 자신이 왜 이 언덕에 올라왔는지를 기억해냈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갑자기 아주 늙어버린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되었던 것이다. 미리멈은 소리 높여 울기 시작했다.

여명이 터 오르는 것을 지켜보며, 투생과 젱킨스는 천막 바깥에 앉아 대화를 나누었다.

“난 역시 죽는 게 두려워.” 투생이 말했다.

“난 죽지 않을 거야.” 젱킨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 투생은 생각했고,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면서도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결국 그들 자신이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젱킨스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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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듯하게 누워서 자던 잼이 눈을 떴을 때, 운명이 그녀 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몇 년 만의 방문이었다.

“안녕.” 운명이 말했다.

“안녕.” 잼이 대답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걸.” 잼이 말했다.

“넌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 걸.” 운명이 대답했다.

운명은 잼의 몸에서 일어나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었다. 잼은 책상다리로 앉아 그것을 구경했다. 그리고 자신이 저것보다 훨씬 잘 출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운명에게는 작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잼은 자신의 작대를 이용해서 더 멋진 춤을 출 수 있다.

운명은 마침내 손으로 땅을 짚고 한 바퀴를 돌았고, 고개를 들었을 땐 오셀로가 되어있었다. 잼은 그녀에게 달려들어 그대로 쓰러뜨렸다. 운명을 타고 올라간 잼이 단도를 들어 목에 겨누었다. 오셀로의 얼굴로 운명이 후후, 웃음을 흘렸다. 이상한 꿈이구나, 라고 잼은 생각했다.

다음 날, 잼은 두 아이들을 데리고 북부의 큰 마을을 찾았다. 그곳에는 수배령이 내려져 있었는데, 수도에서 내려온 것이고 잼의 이름도 그 리스트에 있었다.

 

오셀로는 간밤에 아주 짧은 꿈을 꾸었다. 어떤 것을 깨뜨리는 꿈이었다. 다음 날 그는 석상에 매달려 조각을 했다. 그는 간만에 잡은 망치와 끌개로 무엇이든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강한 동풍이 불어와 그가 매달린 의자를 사정없이 흔들었다. 오셀로는 그만 망치를 놓치고 말았다. 그는 무엇인가 깨지는 소리를 들었다. 꿈속의 일이 떠오른 그는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조각은 무사했고 깨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이상한 일이구나, 라고 오셀로는 생각했다.

 

공교롭게도 성기사가 잼을 발견했다. 잼은 두 아이들을 내보내고 쏜살같이 달아났다. 성기사는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었고, 그녀는 가볍고 아름다운 천을 두르고 있었다. 기사들은 그녀를 순식간에 놓치고 말았다. 잼은 바람처럼 달렸다. 골짜기 위로 올라섰을 때, 어디선가 화살이 날아왔다. 잼은 두 아이들이 자신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것을 들었다. 그녀가 고개를 돌렸을 때, 화살이 날아와 그녀의 어깨를 꿰뚫었다. 잼은 비틀거리다 말고 넘어졌다. 투생과 젱킨스가 달려와 그녀를 흔들었다. 어쩔 줄 모르는 두 아이들의 얼굴 너머로 구름이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잼은 누군가 올라탄 것처럼 묵직한 기분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걱정 마. 빗맞았어. 결국 올라탄 건 나였으니.”

그러자 어디선가 운명이 낄낄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하.” 잼은 웃음을 터뜨렸다. 

“이번에는 좀 약 오르는 걸….”

그런 후 하늘이 온통 캄캄해졌다.

 

그날 밤 오셀로는 꿈속에서 바닥을 더듬어 깨진 조각을 찾아냈다. 그것은 몹시 날카롭고 작았다. 오셀로는 그것을 집어 들다말고 손가락을 베였다. 핏방울이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오셀로는 손가락을 입에 물고 피를 핥아냈다. 상처가 깊지 않았는데도 자꾸만 피가 났다. 오셀로는 피가 멈출 때까지 손가락을 문 채로 상처를 공들여 핥거나 빨아들였다. 긴 꿈이었다.

다음 날 느지막이 작업장을 갔더니, 조각의 일부분이 깨져 일꾼들이 바닥을 치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오셀로가 어떻게 된 일인지 묻자, 바람이 불어 작업장 도구가 떨어지면서 부딪힌 것 같다고 일꾼 하나가 대답했다. 그는 오셀로가 일찍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말하며 조각상이 떨어진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파편이 떨어진 곳은 오셀로가 매달려 작업하는 장소 바로 머리 위였다. 오셀로는 그곳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상한 일이 아니었구나.

 

투생과 젱킨스는 화살에 맞은 잼을 과과의 등에 지고 산을 넘어 도망쳤다. 마을로부터 멀리 달아났다고 느꼈을 때, 그들은 천막을 치고 그녀의 어깨에서 화살을 뽑아냈다. 화살은 빗맞았지만 아주 깊숙이 박혀있었다. 피가 많이 났다. 두 아이들은 잼이 살아남지 못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투생과 젱킨스는 돌아가며 밤을 샜다. 그녀의 어깨를 압박하고 붕대를 자주 갈아주었다. 그리고 간간이 깨끗한 물을 천에 적셔 상처를 닦아주었다. 새벽이 되자 거짓말처럼 피가 멎었다. 물을 길러온 투생이 그녀의 곁에 무릎을 접고 앉아 붕대를 풀어보았다. 그러자 마치 누군가 공들여 염원한 것처럼, 막 아물기 시작한 상처가 불빛 속에서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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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멜라 항만의 해변 끝을 걷다보면 백색 절벽이 나온다. 고도는 높지 않지만 뒤쪽은 물로 차있어 제대로 걸을 수가 없다. 그곳에는 에온의 사자가 살고 있다는 미신이 있었다. 

잼과 오셀로는 손을 잡고 그 해안의 절벽까지 걸어본 적이 있다. 잼이 열여덟, 오셀로가 열두 살 때다. 바닷물은 몹시 맑았고, 파도는 잔잔했으며, 암석 주변의 물이 에메랄드 빛깔로 고여 있었다. 투명해서 하얀 모래와 작은 갑각류가 기어가는 모습들이 훤히 보였다. 물이 차오르자 둘은 옷을 접고 절벽을 붙잡은 채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절벽 뒤쪽에는 깊은 해안동굴이 있었다. 둘은 입구에 서서 그 깊고 어두컴컴한 구멍을 바라보았다. 야! 잼이 비명을 지르자 한참 뒤에 메아리가 돌아왔다. 둘은 서로를 마주보았다.

“계속 가볼까?”

“무슨 일이 일어나면 잼의 책임이에요.”

둘은 동굴 벽을 짚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한곳에 오래 고여 있던 어둠은 햇빛으로도 몰아낼 수가 없는 모양인지, 얼마 가지도 않아 주변이 금세 깜깜해졌다. 잼과 오셀로는 손을 잡았다. 바람이 끊임없이 불어왔다.

“이 동굴은 아주 깊을 뿐, 어딘가 끝이 있어요. 바람이 안으로부터 불어오니까요.” 오셀로는 더 이상 이 동굴이 무섭지 않은 모양이었다.

잼은 뒤를 돌아보았다. 빛은 이제 점처럼 응집되어 둘과 동떨어진 곳으로 밀려나있었다. 입구가 까마득하게 멀어지고 있는데도 오셀로는 뒤돌아보지 않고 잼의 손을 붙잡은 채 자꾸만 앞으로 나아갔다. 잼은 동굴의 벽을 손으로 짚어보았다. 축축하고 습윤하고 미끌미끌했다.

잼과 오셀로는 계속해서 어둠 속을 나아갔다. 잼은 오셀로의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손바닥으로 동굴의 벽을 천천히 쓸면서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멈추어 섰다.

“끝이 있다는 걸 안다고 해도 지금 당장 너무 깊이 가지는 마.” 잼이 말했다.

“나는 여기에 무엇이 있는지도 보고 싶단 말이야.”

그런 후 그녀는 호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부싯돌에 긁었다.

타오른 빛이 두 아이를 감싼 세상을 밝혔다. 오랜 어둠 속에서 그 조그만 불빛 하나는 굉장한 힘을 가지는 것이다. 번들거리는 암석과 작고 둥그런 자갈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바다지네 한 마리가 벽을 기어 황급히 사라졌다. 동굴은 둘이 짐작하던 것 이상으로 몹시 넓었다. 천장이 높고 판판했다. 공간은 입구에서 볼 때보다 훨씬 팽창해 있었다. 잼과 오셀로는 잠시 말을 잃은 채 고개를 젖히고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벽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아주 이상한 동물의 뼈가 박혀 있었다. 벽 전체를 차지하고도 모자라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잼은 찰팍거리며 벽 앞으로 다가가 한 팔을 전부 써서 그것을 껴안듯 훑어 내렸다. 살아있을 적 이 동물은 잼보다 다섯 배는 거대하고 혹은 그 이상으로 거대할 것이란 확신을 주었다.

“고래의 뼈일까?” 잼은 뼈가 이어지는 부분 부분에 손가락을 대고 천천히 움직이며 속삭였다.

“아뇨, 저것은 날개가 있는 걸요.” 오셀로가 숨죽여 말했다.

“그럼 이것은 어떤 동물이니?” 잼이 물었다.

오셀로는 한참을 침묵하다가 마침내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요.”

성냥이 닳아 꺼지기 전에 잼은 새 성냥을 꺼내 태웠다. 불은 희미해지다 말고 다시 한 번 더 환하게 타올랐다.

“네가 모르는 것도 있니?” 잼이 물었다.

“그럼요.” 오셀로가 대답했다.

“제가 알고 있는 건 지금 현재에 남겨진 전부의 기록과 미래의 일부분뿐인 걸요.”

“그렇다면 이것은 네가 모르는 아주 먼 과거의 것이구나.”

“네, 이건 제가 모르는 아주 오래 전의 것들이겠죠.”

그렇구나. 잼은 고개를 들어 경이로운 눈으로 그 뼈를, 고대의 동물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주 오래 전의… 동물이구나.”

그 순간,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불이 꺼지고 연기냄새가 맹렬해졌다. 어둠이 둘을 떠밀며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그 속에서, 둘은 우우 우는 소리를 들었다. 잼과 오셀로는 아주 깊은 곳, 아주 먼 곳, 아주 오래 전의 어떤 곳으로부터 시작되어 올라온 태고의 울음소리를 들었다. 날갯짓하는 거대한 짐승의 움직임을, 손바닥만 한 눈동자가 데룩데룩 굴러가는 모양새를. 둘은 어둠속에서 모든 것을 느꼈고, 그것은 무척이나 섬뜩한 경험이었다. 오싹할 만큼 거대한 존재가 막 둘을 스치고 지나간 참이었다. 그러나 그 공포는 분명 기분 좋은 공포였다. 불안의 성질이 아닌 압도와 경이의 성질로 이루어진 아주 단단한 감정이었다. 마침내 잼이 다시 성냥불을 밝혔고, 고대의 생물은 순식간에 썩어들고, 어둠에 삭혀지고, 날개와 살과 핏줄을 잃고, 결국 조각조각의 뼈가 되어 두 아이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오셀로, 신을 만난 기분이야.” 잼이 말했다.

그 뒤로는 잼이 앞서나갔다. 겅중겅중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다니며 동굴 곳곳을 빛으로 환하게 채웠다. 오셀로가 뒤따라 걸으며 잼이 밝힌 길을 올려다보았다. 그 등뼈와 발톱들… 한 때 심장과 장기를 감쌌을 갈비뼈들, 날개와 가시, 이빨과 톱니. 그러다 어느 순간에 인간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뼈를 남기는 대신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림들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오셀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벽으로 다가섰다. 손바닥을 펼쳐 그림들을 쓸어보았다. 손가락으로 따라가 보았다… 인간들이 불가에 모여 두 팔을 벌린 모습, 거대한 황소와 말들, 아이들과 어머니… 칼을 쥐고 높게 들어 올린 역동적인 전사들. 마침내 오셀로가 소리쳤다.

“이건… 사냥을 하는 그림이군요.”

잼은 새 성냥을 들었다.

“이것도 아주 오래 전의 그림이겠지?” 

“그럴 거예요.”

잼은 오셀로에게 불을 들게 했다. 그리고 다 탄 성냥 끝으로 벽에 그림을 그렸다. 오셀로는 그녀가 무엇을 그리는지 지켜보았다. 잼이 벽에서 떨어지자, 그림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셀로는 곧장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그녀의 당나귀 과과였다.

오셀로는 잼에게 불을 돌려주고 자신도 무언가를 그렸다. 오래 걸리지 않았으나 제법 밀도 있는 그림이 완성되었다. 잼이 불을 가까이 해 손가락으로 그것을 짚어보았다. 그것은 과과의 고삐를 쥔 잼이었다.

“왜 네 모습은 그리지 않았니?” 

잼이 묻자, 오셀로가 대답했다.

“저는 여기에 그림을 그린 것만으로 충분해요.”

둘은 다시 손을 잡고 계속해서 걸어 나갔다. 마침내 동굴의 끝이 나타났다. 빛을 머금은 바닷물이 느긋하게 찰랑거리고 있었고, 바람이 불어와 두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둘은 동굴 밖으로 나와 뒤를 돌아보았다.

그 깊고 거대한 동굴은 아주 조그만 통로처럼 보였다. 누군가에겐 수상쩍고 사소한 입구가 될 것이었다. 그러나 동굴을 걸어온 사람은 그 길이 얼마나 사소할 수 없으며 아주 멀고도 깊고, 어두컴컴하면서도 경이로운지 알고 있었다. 그 길이 입구가 될 수도 없었다. 그건 사실상 어떤 출구였다.

잼은 백색절벽 앞에 쭈그리고 앉아 손바닥을 대보았다. 맨 아래층에 깔린 암석은 붉은 끼가 돌고 있었다. 그 위는 아래층보다 더 노랬다. 그리고 그 위는 좀 더 탁한 노란색이었으며, 그 위층은 잿빛이었다. 멀리서 볼 때 하얗게 보이던 절벽은 층층이 무엇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이력이었다. 마침내 잼이 허리를 펼치고 오셀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셀로가 말했다.

“절벽 뒤쪽에 에온의 사자가 있다는 건 거짓말이었어요.”

“그래, 동굴에도 그런 건 없었지.” 잼은 천천히 절벽에서 떨어져 나왔다.

“그렇게 어두컴컴한 길을 우리는 겁도 없이 걸어 나왔구나.”

“불도 있었고, 잼도 있었으니까요.”

“맞아.”

잼이 중얼거렸다. 

“불과 네가 있으니, 그 어둠을 걷는데도 하나도 외롭지가 않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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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이 이스마이어 성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오셀로는 자주 울고 있었으며, 잼은 종종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별을 생각했다. 동부는 여전히 맑고 따뜻했으며, 북부는 종종 흐리거나 눈이 왔다. 어느 날 오셀로는 감기에 걸렸다. 잼은 감기에 걸리지 않았다.

정말 지독한 감기였다. 오셀로는 간만에 끙끙 앓았다. 언젠가 지나갈 열병임을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몸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무척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그것은 이별의 과정과 비슷한데, 그러므로 이별은 때때로 관념적 통증이 아닌 물리적 통증으로 다가온다. 이별이란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될 것을 알고 있음에도 눈물이 나거나 하늘을 올려다보게 되는 것. 통증이 가슴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 온몸으로 열이 끓거나 저릿저릿해지는 것. 오셀로는 이 열이 내리면 어떤 것들이 바뀌게 되거나, 혹은 받아들이게 될 거라는 막연한 예감 속에서 뒤척였다.

한편 잼은 그 날 파멜라 항만을 걷는 꿈을 꾸었다. 깊은 밤이었다. 그녀는 길거리를 헤매다 말고 움직이는 빛을 발견했다. 아름다운 황금빛이었다. 그녀가 그것을 쫓자, 빛이 자꾸만 그녀를 넓고 큰 길로 인도하였다. 마침내 잼은 큰 저택의 문 앞에 당도했다. 그녀는 문을 열고 계단을 올랐다. 열린 문으로 희미하게 빛이 새어나오는 방이 있었다. 그 방에는 넓은 침대가 있었고, 이불속에 오셀로가 웅크린 채 누워있었다. 오셀로는 이따금 뒤척이거나 끙끙거리고 있었다. 잼은 손바닥을 펼쳐 오셀로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절절 끓는 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녀는 언젠가 메리가 제리와 다른 아이들을 위해 불러주었던 노래를 오셀로에게 불러주었다. 달빛이 기울어져 침대에 누운 소년을 비추었다. 선선하고 쾌청한 바람이 불자 커튼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잼은 두 손바닥으로 오셀로의 양 뺨을 감싸고 열을 모조리 빼앗아주었다. 그러자 가슴이 어쩐지 황금빛으로 가득 들어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구나. 잼은 생각했다. 아까의 불빛은 너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이었구나. 잼은 계단을 내려와 다시 파멜라 항만의 길거리로 들어섰고, 쏜살같이 날아가 언덕을 넘고 벌판과 돌산을 지나 천막으로, 험준한 북쪽 산맥 어딘가에 웅크린 채 누워있는 자신의 육신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가 뒤척였을 때, 꿈은 끝나고 잠의 바다에서 의식의 쪽배가 떠올랐다. 잼은 천천히 눈을 떴다.

오셀로는 이른 오전에 침대에서 일어났다. 새벽이 오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댔다. 그리고 비로소 열병이 끝나고 온기만이 남았음을 깨달았다. 작게 열린 방문 틈으로 부드러운 바람 한줄기가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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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이 델마에 도착했을 무렵, 마을은 흉흉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델마는 수도와 멀리 떨어지지 않은 북부의 작은 지역이다. 그곳은 몇 달 전부터 원인 모를 병이 돌기 시작해 사람들의 팔과 다리가 썩어가고 있었다. 곪은 살에서 심한 악취가 풍기기 시작하자 병에 걸리지 않은 나머지 사람들이 환자들을 격리하고 마을 구석으로 내몰았다. 에온의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그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잼은 환자들이 모인 집을 방문했다. 집은 몹시 작고, 침대는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고름의 악취가 코를 찔렀고, 제대로 보수하지 않은 지붕에 물이 고여 곰팡이가 슬어 있었다. 그 집에는 손으로 어림잡아 스무 명도 넘는 환자들이 누워 신의 용서를 빌고 있었다. 잼은 붕대를 풀고 그들의 피와 고름을 닦아주었다. 그러나 아무리 닦아도 악취는 사라지질 않았다. 용암처럼 뜨거운 피와 고름이 부어오른 살갗 위로 끊임없이 솟아올랐다. 잼의 두 손은 누런 액으로 진득진득해져, 바깥으로 나왔을 땐 악취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온 잼은 과과에게 여물을 먹이며 환자들의 집으로 통하는 길목을 지켜보았다. 저녁이 되도록 아무도 드나들지 않았다. 그 집은 격리되어 버려졌던 것이다.

다음 날, 그녀는 과과의 양옆으로 짐을 싣고 마차 두 대를 빌렸다. 그리고 환자들을 전부 태우고 벌판을 가로질렀다. 델마의 서쪽으로는 하류가 흐르고 있었다. 국경선을 가로지르는 상류의 물이 산과 언덕, 들판을 쪼개며 흘러들어온 것이다. 잼은 강가에 마차를 세우고 환자들을 한 명 한 명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그곳에 천막을 쳤다.

이른 오후, 잼은 스물다섯 명의 환자들을 부축해 강으로 향했다. 바람이 불 때면 흔들리는 수면을 따라 햇빛이 수십 개의 파편으로 부서지는 좋은 날씨였다. 잼과 스물다섯 명의 사람들은 더러운 옷과 붕대를 벗었다. 그리고 잔잔한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은 차갑고 깨끗한 존재 속으로 들어가야만 얻을 수 있는 환락을 경험했다. 잼은 환자들의 죽어가는 살갗을 더듬어 고름을 짜내고, 부풀어 오른 종기를 닦아주고, 깨끗한 물로 끊임없이 씻어냈다. 자연이 준 축복으로 자연이 가진 불행과 맞서 싸웠다. 기록되지 않을 신성神聖한 목욕이었다.

저녁이 되자 스물다섯 명의 사람들은 악취의 허물을 벗은 깨끗한 육신을 바람에 쏘였다. 그리고 그들의 옷을 한곳에 모아 빨래를 했다. 잼은 천막과 천막 사이에 줄을 걸고, 작대를 이용하여 모두의 빨래를 허공으로 높이 띄웠다. 바람이 불자 강가의 물결처럼, 천들이 흩날리며 물방울을 털어냈다. 바람과 물결의 축복 속에서, 스물다섯 명의 사람은 처음으로 신의 존재란 인간의 고난이 아닌 보이지 않는 손길의 어루만짐으로 증명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제 그랬다.

그 날 밤, 잼은 장작을 올리고 아름다운 불꽃을 피워 올렸다. 그 불꽃을 보고 있자니 어느 누구도 어둠 속에 버려진 느낌이 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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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이 열세 살 때였다. 산처럼 우직하고 파도처럼 강인한 자들이 파멜라 항만에 정박했다. 그들은 단단하고도 단순한 구조의 갑옷을 입었고, 붉은 돛을 달고 있었다. 그들은 룬문자와 앵글로색슨어를 쓸 줄 알았으며, 낯선 향이 나는 육포와 양초를 가득 싣고 있었다.

며칠 뒤 트리아즈 상단의 마차가 파멜라 항만에 도착했다. 유리아도 그 마차에 타고 있었다. 부둣가에 앉아있던 잼이 그를 발견하곤 쏜살같이 뛰어갔다.

“유리아!”

유리아가 두 팔을 벌려 그녀를 맞이했다. 잼이 그 품으로 냅다 몸을 내리꽂자, 그가 휘청거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너 내가 섬세한 몸이라는 거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유리아가 너무 약골인 거야!” 잼이 낄낄거렸다.

유리아와 트리아즈 상단은 특별한 상인들과 거래하기 위해 항만을 방문한 것이었다. 그 상인들은 바이킹이라고 불리는 자들이고, 강인한 바다의 전사들이며, 며칠 전 파멜라 항만에 정박한 갑옷을 입은 자들이었다.

“그들은 바다에서 서식하며 육지동물처럼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동물들을 사냥하여 육포를 만들지. 풍미가 좋고 적은 양으로도 금방 배가 부르니 전쟁물자로 취급하기 좋단다.” 유리아가 말했다.

유리아가 바이킹의 선장과 독대하는 동안, 잼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내용을 엿들었다. 낯선 이국의 언어 속에서 드문드문 특정한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이베르타에서 취급하는 모든 것들은 이베르타의 언어로만 일컬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리는 단어가 점점 많아졌으므로 잼은 유리아가 많은 것을 거래품목으로 내걸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잘 풀리지 않는 건가? 잼은 생각했다.

얼마 뒤에 문이 열리고 선장과 유리아가 나란히 빠져나왔다. 선장은 문 앞에 쭈그리고 앉은 잼을 발견하곤, 유리아와 번갈아보았다. 잼이 유리아를 향해 두 팔을 벌리자 유리아가 익숙하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Is e ur daughter? (딸인가?)” 선장이 물었다.

“e is my precious daughter. (하나뿐인 소중한 딸이죠.)” 유리아가 느긋한 웃음을 달고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트리아즈의 숙소로 돌아온 유리아는 잼을 내려놓고 문서를 정리했다. 잼이 그의 등 뒤에서 까치발을 들었다.

“어떻게 됐어?”

“일단 거래는 성사.” 유리아가 종이를 모아 책상에 두드려 높낮이를 맞췄다.

“육포 전량 매입 거래는 이틀 뒤에.”

“그러면?”

“이틀 동안 그들 마음에 드는 제안을 내놓거나 그들과 친분을 쌓아야겠지?”

“네가 잘하는 거네!” 잼이 말했다.

“글쎄.” 

유리아는 미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귀에 주렁주렁 매달린 장신구가 서로 맞부딪히며 오묘한 소리를 냈다.

“바이킹들의 장단을 맞추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

“그럼 못 하는 거야?”

“어렵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유리아가 손을 뻗어 잼의 정수리를 헝클어뜨렸다.

다음 날 잼이 부둣가로 나갔을 때, 바이킹들은 선박에 올라 칼과 창을 갈고 있었다. 트리아즈가 취급하는 무기들이었다. 어제의 거래로 함께 받아온 것일 테지. 그렇다면 그들은 트리아즈에게 무엇을 주었을까? 뱃머리에 앉아있던 선장이 잼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잼이 가까이 다가가니 선장이 육포를 뜯어 건넸다.

“고래 육포다.” 그녀가 말했다.

잼은 까맣게 말린 고기를 뜯어먹으며 뱃머리에 걸터앉았다.

“우리말을 할 줄 아네요!”

“당연하지.”

“그런데 왜 어젠 쓰지 않았죠?”

“필요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갈매기가 낮게 날고 있었다. 선장은 햇빛 때문에 얼굴을 찡그린 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부둣가에 자주 오나?”

“거의 매일요.”

“내일은 오지 않는 게 좋을 거다.” 그녀가 말했다.

“폭풍우가 올 거거든.”

다음 날, 그녀의 말대로 새벽부터 하늘이 캄캄해지더니 먹구름이 몰려왔다. 오전 무렵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더니, 점심 무렵 거센 비바람이 몰아쳤다. 잼은 부둣가로 나가보았다. 바람이 사나워 온몸이 비틀거렸다.

잿빛 수면 위로 떠오른 배들이 마구잡이로 흔들리며 음산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잼은 눈을 가늘게 떴다. 바이킹들의 배가 보였다. 뱃머리마다 등불이 매달려 있었다. 잼이 뱃머리로 다가가자 시야에 사람들이 나타났다. 바이킹들이 출항준비를 하고 있었다. 잼을 발견한 남자가 돛대에 매달려 있다 말고 갑판으로 뛰어내렸다. 물이 튀겨서 발목이 흠뻑 젖었다.

“그 상단주를 찾으러 온 거냐?”

“유리아가 있어요?”

“그럼.” 그가 갑판을 가리켰다.

“이 아래에 있지.”

“거래 중이겠네요?”

“그래.”

“그런데 당신들은 떠날 작정이고요.”

“폭풍은 금방 지나갈 거야.”

“유리아에게 원하는 것을 줄 거예요?”

“그가 선장 마음에 든다면. 아래로 내려갈 거냐?”

“아뇨.” 잼은 갑판을 분주하게 움직이는 바이킹들을 눈으로 쫓으며 대답했다.

“여기 있을래요.”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바람이었다. 바이킹들은 화살처럼 내리꽂는 빗줄기를 뚫고 분주하게 움직였다. 궤짝을 옮기고, 닻을 점검하고, 망치를 들어 휘어진 연결고리를 힘차게 두드렸다. 그들이 폭풍을 아무렇지도 않게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잼 역시 두렵지 않았다. 그녀는 험하게 흔들리는 갑판에 앉아, 파도를 따라 오른쪽과 왼쪽으로 번갈아 미끄러지는 자신의 몸에 낄낄거렸다. 천둥이 치자 바이킹들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노동요였다. 발을 구르며 박자를 맞추고 망치를 휘둘러 추임새를 넣었다. 흥얼거림에 가까웠으므로 가사를 제대로 들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몹시 흥겨웠으므로, 잼은 다리를 흔들거리며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그 노래는 자연의 거대한 힘과 맞서 싸우는 자들을 위한 노래였다. 인간을 베고 죽이는 들판의 전사들과는 다른 영역에 있었다. 파도를 가르고, 바다를 지배하고자 칼을 뽑아든 전사들의, 그럼에도 강인하기 그지없는 자연에 대한 예찬이었다. 잼은 자리에서 일어나 춤을 추었다. 폭우가 얼굴을 때리고 등을 후려쳤지만 노래가 끝나질 않으니 무엇 하나 두렵지가 않았다. 돛대에 매달려 있던 자, 뱃머리에 서있던 자, 망치를 들던 자, 밧줄을 매달던 자 모두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이 그녀의 발놀림에 맞추어 박수를 치고 가사를 붙이기 시작했다. 잼의 발바닥이 갑판을 내리칠 때, 망치가 철판의 이음새를 때렸다. 불꽃이 타오를 때 그녀의 손이 하늘로 솟구쳤다. 바람이 불자 목소리가 드높아졌다. 천둥이 칠 때면 환호성을 질렀다.

“잼!” 유리아가 소리 높여 그녀를 불렀다.

잼이 뒤돌아섰다. 유리아와 선장이 갑판 위에 서있었다.  

“나 기다렸어? 쫄딱 젖었구나. 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거람.” 그녀를 안기 위해 팔을 벌리던 유리아가 손을 거뒀다.

잼은 물이 뚝뚝 떨어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쥐어짰다. 그러자 선장이 그녀에게 두 팔을 벌렸다. 잼이 낄낄거리며 그녀에게 올라탔다.

“이 노래가 마음에 들었나?” 선장이 물었다.

“폭풍우를 뚫고 바다를 항해하는 자들에게 꼭 필요한 노래라고 생각해요.” 잼이 대답했다.

“바다를 사랑하는구나.”

“그럼요.”

“언젠가 배를 타고 나가겠군.”

“때가 되면요.”

“이 나라 사람들은 바다 끝에 저승이 있다고 믿지 않았나. 넌 그렇지 않은 모양이지?”

잼은 고개를 기울여 그녀의 귓가에 손을 가져다댔다.

“저는 이단자거든요.”

선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나도 비밀을 알려주지.”

그녀는 얼굴을 기울여 잼에게 가까이 붙었다.

“우리는 만을 건너서 왔단다.”

폭풍은 곧 잠잠해졌다. 바이킹들은 출항준비를 마치고 짐 몇 십 짝을 부둣가에 내려놓았다. 밧줄을 풀고 붉은 돛을 펼치자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유리아와 잼은 수평선을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배를 바라보며 잠시 부둣가에 서있었다.

“거래는 어떻게 됐어?”

“내가 누군데. 저 궤짝들이 다 뭐겠어? 성사시켰지.”

“폭풍을 뚫고 온 허약한 유리아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나보네.”

“그럴 리가.” 유리아가 느긋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저 신을 믿지 않는다고 말했을 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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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멜라 항만의 동쪽에 큰 저택 하나가 지어졌다. 수도에서 사업을 접고 내려온 상인의 저택이었는데, 오셀로가 그 지붕에 올라갈 석상 하나를 다듬게 되었다. 자택에서 꽤 떨어진 곳이었으므로 작업이 늦어지는 날이면 여관을 빌려야했다. 그 여관에는 스물다섯 살 먹은 외동딸이 있었다. 오셀로보다 세 살이 많았고, 호쾌하고 상냥한 성격이었다. 작업 기간 동안 오셀로는 종종 여관에 들러 그녀와 오랜 시간을 보냈다. 동방 서적에서 읽은 동화 이야기를 하거나, 손등에 입을 맞추거나, 이따금 기분이 내키면 전라로 뒹굴기도 했다. 

마침내 저택의 지붕 위로 경이로운 작품이 얹어지고, 돌아가야 할 때가 왔다. 마지막 날 아침, 오셀로는 여관 주인 앞에서 주머니를 뒤지다 말고 지갑을 놓고 왔음을 깨달았다. 빈 주머니를 더듬는 오셀로를 내려다보던 주인의 표정이 일순 험악해졌다.

“돈이 없어?”

“아, 지금 당장은 없는데 제가, 곧 드릴 수 있답니다.” 오셀로가 그녀를 향해 웃어보였다.

“사실 저는 이베르타의 황금별인데, 잠시만 기다려주시면….”

오셀로는 맨발로 쫓겨났다.

이런 일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 뒤에도 종종 그는 어느 집 여인 혹은 청년과 입을 맞추거나 뒹굴었으며, 술을 마시거나 약을 피웠다. 그는 방종하였으나 천재인 까닭에 명성이 땅으로 떨어질 일이 없었다. 그러니 소문만 화려하고 거창해졌다.

몇 달 뒤 잼이 항만을 방문했더니 못 보던 저택이 생겼는데, 지붕이 아름다워 절로 눈길이 갔다. 그녀는 오셀로의 자택으로 들어가 늘 그렇듯 그곳에 틀어박혀 지냈으며, 투생은 그 거대한 저택 근처의 여관에 묵게 되었다. 투생은 그곳에서 어떤 소문을 들었고, 돌아오는 길에 잼에게 미심쩍은 투로 물었다.

“스승님을 도와준다는 그 황금별 말이에요.”

“응.”

“믿을 만 한 사람인 건가요?”

잼은 가던 길을 멈추고 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런 걸 묻는 거니?”

투생은 자신이 들었던 소문의 일부를 이야기해주었다. 주로 정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잠자코 듣던 잼이 결국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리가 휠 정도로 한참을 폭소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투생.”

잼은 머릿속으로 오셀로를 떠올려보았다. 그러자 열 살의, 망토 속에 감싸일 정도로 작고 어린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잼이 떠올리는 오셀로의 최초의 모습은 늘 열 살이다. 그리고 열 살의 오셀로는 소문 속의 업적을 세우기엔 지극히 순진하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란다.” 잼이 대답했다.

오셀로는 늦은 점심 잠에서 깨어나 끼니를 걸렀다. 그가 깰 때까지 누워 기다리던 여인이 기다렸다는 듯 오셀로의 머리카락을 즐겁게 땋아주었다. 긴 머리카락을 세 갈레로 나누어서 촘촘하게 땋는 동안, 오셀로는 긴 하품을 했다. 약에 취한 정신이 제대로 깨지 않아서 온몸이 늘어지고 있었다.

“어제는 유독 귀엽더라.” 여인이 말했다.

“그런가요?” 오셀로가 잠긴 목소리로 실실 웃었다.

“꼭 외로움 타는 어린애 같던 걸.”

“그렇지만도 않아요.” 오셀로가 대답했다.

“심심하거나 외로운 건 진작 잊어버렸는걸요.”

누구든 공백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한 법이다. 그리고 때때로 그것은 누군가에게 영원한 비밀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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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물아홉 살. 잼은 자신의 당나귀와 투생을 끌고 이베르타의 최북단 국경선을 넘는다. 마지막 산을 넘자 빽빽한 침엽수지대가 펼쳐졌다. 안개가 자욱하고 기분 나쁜 울음소리의 새들이 울어댔다. 그러나 계속해서 걸어 나가면 얼마 가지 않아 작은 마을이 나타나고, 그곳에서 마차를 얻어 타면 이틀 안에 도시에 도달할 수 있다. 잼은 한 마구간에 돈을 주고 과과를 맡긴 후 투생과 함께 다시 마차를 타고 더 큰 도시로 나아갔다. 이번에는 사흘이 넘게 걸렸다. 마차에 올라탄 동안 잼과 투생은 이베르타에서 보지 못 했던 것들을 가끔 목격하였고, 동시에 이베르타와 비슷한 부분이 많음에 새로워하기도 했다. 낯선 땅에선 낯선 것들보다 동일한 것이 오히려 놀라움을 가져다주었다.

잼은 그 나라의 수도에서 보석을 갈아 만든 물감 한 통과 화려한 천 한 필, 보지 못 한 약재와 서적을 샀다. 화폐가 통하질 않아 금을 냈다. 상인들은 이베르타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만 자주 교역하지는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취급하는 것들이 비슷하고, 자원도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경은 오로지 험준한 북방과 맞닿아 있었고, 이베르타의 수도까지 교역하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같은 언어를 쓰고 비슷한 얼굴을 했으나 명백히 다른 공간이었다.

돌아가기 전, 잼과 투생은 큰 벌판 근방에 마차를 세웠다. 벌판에는 작은 성곽 하나가 지어져 있었고, 망루에 사람이 올라서 있었다. 잠시 후 망루로부터 대포 한 발이 발사되어 벌판 정중앙에 내리꽂혔다. 일순 침묵이 있었다. 그런 후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었다. 산산조각 난 바위가 허공으로 떠오르고, 흙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화염으로 새까맣게 탄 풀꽃 뿌리에서 불붙은 재가 날렸다. 잼과 투생은 큰 충격을 받았다.

“저런 화력은 처음 보는구나.”

잼이 중얼거리자, 마부가 무척이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새로 만든 놈이지. 여긴 땅이 넓고 농사를 짓는 곳도 아니라서 종종 시험 삼아 쏘아본다우. 근방에 살았으면 귀청이 떨어져 뒈질 뻔 했어.”

마차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턱을 괸 채 마차 바깥으로 펼쳐진 풍경을 바라보며, 이따금 돌부리에 걸린 바퀴 때문에 덜컹거리는 차체와 함께 흔들릴 뿐이었다. 벌판 어딘가에서 불어온 바람을 타고 이따금 거대한 폭발음이 실려 왔다.

그들은 일전의 도시에 들러 과과를 찾았다. 그리고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이틀째에는 침엽수지대에 도달했고, 사흘째에는 다시 안개를 뚫고 북방의 산으로 되돌아왔다. 험준한 산을 익숙하게 올라, 두 사람은 안개에 감싸인 숲을 내려다보았다. 그 숲 너머에는 작은 마을이, 그 마을 너머에는 도시가, 그리고 그 도시 너머에는 수도가 있었다. 수도로 통하는 시골길의 어딘가에서는 이따금 대포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으리라. 폭발이 끝난 땅은 옴폭 패여 축축하고 까만 흙이 드러날 정도였다. 그 때, 잼과 투생의 머릿속에 동시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투생은 곧 받아들였으나, 잼은 쉽사리 그 생각을 떨쳐내지 못 하고 오래도록 곱씹어야만 했다. 그것은 전쟁에 대한 것이었다.

산을 내려오는 길에 잼과 투생은 폐허를 지나게 되었다. 북방의 산을 오르내리다보면 종종 만나게 되는 과거의 흔적이었다. 이베르타의 긴 통일전쟁 속에서, 많은 민족이 멸망하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들의 문화와 역사는 윤곽만 남은 성벽, 터만 남은 집, 썩은 울타리 따위로 버려졌으며, 잼과 투생은 떠돌며 종종 그것들을 목격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허물어진 성벽 근처에 지붕을 씌우고 불을 피웠다. 

그 날 새벽, 투생이 싸늘한 기운에 깨어났더니 잼이 성벽에 앉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투생이 그녀에게 물었다.

“주무시지 않고 무엇을 보고 계시나요?”

“이베르타를 보고 있었다.” 잼이 대답했다.

투생은 잼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차렸지만, 구태여 말을 보태지 않고 그대로 앉아있었다. 마침내 잼이 읊조렸다.

“이베르타는 언젠가 사라지겠지.”

“제게 물어볼 필요도 없이 이미 알고 계시던 사실이 아닌가요.” 투생은 다시 자리에 누웠다.

“모든 국가는 멸망합니다. 어떤 역사는 빠르게, 또 어떤 역사는 느리게 사라지겠죠. 스승님이 말씀하셨듯, 인간이 만든 것에 영원永遠은 없는 법이니까요. 인간을 무척이나 닮아있다고… 하물며 신까지도…. 그러니 국가 하나쯤 멸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요.”

투생은 그 모든 사실을 무척이나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서쪽으로부터 싸늘하고 쓸쓸한 바람이 불어오고, 새벽의 푸른 달빛이 소년의 갈대 같은 머리칼을 비추었다. 그러자 마치 참새의 꼬리처럼, 소년의 머리카락이 잊혀 지거나 잊혀 질 것이거나 뿔뿔이 흩어져버린 자들의 속삭임이 되어 흩날렸다.

멸망의 가능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점에서 우리 모두의 존재는 결국 하나의 잔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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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이 마을에 있겠노라고 잼이 전보를 친지 일주일 만에 알랑이 북부에 도착했다. 잼이 마을 입구에서부터 달려 나와 오랜 친우를 기다렸다. 마침내 알랑이 마차에서 내리고, 잼이 두 팔을 벌렸다. 두 사람은 정답게 포옹한 후 떨어졌다. 근 일 년 만의 만남이었다.

“오랜만이군요. 공은 변한 게 없으십니다.” 알랑이 즐겁게 웃자, 잼 역시 낄낄거리며 대답했다.

“너 역시 그렇구나, 알랑.”

그 날 저녁 둘은 세드릭 조합의 큰 천막에서 만나 술을 나누어 마시며 정답게 회포를 풀었다. 주로 근황에 대한 이야기였고, 간간이 오셀로의 이름도 나왔다. 화젯거리가 떨어지면 대화의 노선이 바뀌었다. 마침내는 사교계 이야기로 흘러갔다. 잼은 귀족들이 추는 우아한 춤사위가 궁금하다고 말했다. 정해진 박자에 따라 일정한 양식으로 움직이는 그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취기가 오른 알랑이 벌떡 일어나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지금 가르쳐준다는 거지? 잼이 낄낄거리며 그 손을 잡았다.

둘은 술에 거나하게 취한 채 책상과 테이블을 한쪽으로 치우고 홀을 만들었다. 음악은 없었지만 흥이 올라있으니 상관없었다. 알랑은 잼이 충분히 춤의 순서를 외울 수 있도록 같은 동작을 느릿느릿 반복했다. 그의 춤은 그를 몹시 닮아있었다. 군더더기가 없고 깔끔했으며, 불필요한 접촉도 없었고, 무척 단정한 스텝을 밟았다. 잼은 금방 그를 따라잡았다. 잼이 타고난 많은 것들이 있는데, 그 중 몇 가지 으뜸을 뽑자면 단연 춤이었다. 잼은 곧 알랑의 움직임을 추월했다. 리드가 바뀌고 흐름을 가져갔다. 잼이 그의 허리를 젖히자, 알랑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빠르게 배우시는군요.”

“맞아. 아주 쉬운 걸.” 잼이 말했다.

둘은 천막을 몇 바퀴 더 돌며 남녀가 바뀐 춤을 추었다. 그러다 마침내 잼이 멈추어 섰고, 알랑이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즐거웠어.” 잼이 낄낄거렸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이제 내 방식대로 춰보지 않을래?” 잼은 알랑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꺼이.” 알랑이 그 손을 잡으며 대답했다.

잼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손을 붙잡고 천막 밖으로 끌었다. 천막 바깥에는 작은 모닥불이 바람결에 흔들리고 있었다. 잼은 신발을 벗고 모닥불에 장작을 던져 넣었다. 그러자 불꽃이 흩날리며 사위가 보다 밝아졌다. 불빛에 따라 일렁이는 그림자가 마치 군중처럼 보였다. 잼은 두 팔을 벌리고 바람을 맞다가, 불꽃 앞에서 춤을 추기 시작했다. 격식도 없었고 형식도 없었다. 술에 취한 취객이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쓰러질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어디서든 출 수 있고 언제든 그만둘 수 있는 춤… 저 춤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알랑은 생각했다.

둘은 불꽃 앞에서 밤새도록 춤을 추었다. 잼이 소리를 지르자 보기 드물게 알랑 역시 소리 높여 웃었다. 그들의 행위는 마치 의식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염원하지 않고 그 어떤 신성도 믿지 않는다는 점에서 불경해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단자라는 것을 어찌 알 수 있을까? 삶을 축복하고 만끽하는 순간을 획득한 자들에게 어찌 손가락질 할 수 있는가? 잼과 알랑은 머릿속이 텅 빌 때까지 몸을 흔들었고, 마침내 땀으로 범벅이 되어 나란히 쓰러졌다. 어때, 즐거웠지? 잼이 숨을 고르며 묻자, 알랑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공 역시 즐거워 보이시더군요. 그러자 잼이 하하, 웃음을 터뜨리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그럼. 행복한 순간이 또 하나 늘었다고 막 생각한 참이었지.

그 날 알랑은 꿈을 꾸었는데, 어둠속에서 큰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장작을 아주 높게 쌓아 피워 올린 거대한 화염이었다. 이단자들이 그 불을 얼싸안고 돌며 춤을 추고 있었다. 때때로 그들은 박수를 치고 노래를 불렀으며, 하늘을 가리키며 별에 대해 읊어댔다. 알랑은 장작 위로 올라선 한 여인을 보았다. 그녀는 화염 속에서 맨발로 춤을 추고 있었다. 그녀는 이단자들이 하늘의 별을 가리킬 때 그것을 황금별이라 말했으며, 박수소리가 들리면 에온을 조롱하며 두 팔을 벌렸다. 꿈속에서 알랑은 어쩐지 그녀의 이름을 떠올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여인이 하늘로 솟구쳐 하나의 불꽃이 되었고, 폭죽처럼 터지며 곳곳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어둠속에 환해지고 거센 바람이 불었다. 알랑은 빛으로 감싸인 세상에서 생각했다. 그 춤은 빛을 몰고 오는 춤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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잼과 투생이 다섯 달 만에 파멜라 항만을 찾았을 때, 항만은 여름을 맞이해 몹시 시끌벅적했다. 달이 가장 가깝고 크게 뜨던 밤이었다. 투생이 과과를 끄는 동안 잼은 천막을 돌며 설탕을 녹여 만든 상상 속 동물 모양의 사탕을 깨물어먹었다. 술집마다 사람들로 왁자하고, 테이블에는 통통한 고기와 제철 과일이 올라와있었다.

“스승님, 분위기가 요란하네요. 술집에 가실 건가요?” 투생이 묻자, 잼이 사탕조각을 씹으며 대답했다.

“아니, 막상 가보면 별 게 없더라고. 혼자 가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놀려먹을 동행인이 필요한데 넌 너무 어려보이잖아? 분명 쫓겨나고 말 거다.”

축제의 말미에는 광장으로 사람들이 몰렸다. 굉장한 인파였다. 자리를 지키던 상인들도 천막을 닫았다. 모두가 극을 보기 위해 모이는 것이었다. 바다가 보이는 방향에 작게 지어진 무대 위로 배우들이 올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막의 시작을 알리는 피리소리가 울렸다. 기다렸다는 듯 잼은 인파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당황한 투생이 과과를 끌고 오는 동안 그녀는 디딤대도 없이 가장 가까운 천막에 뛰어올라갔다. 지붕에 앉아 자신을 내려다보는 잼을 발견한 투생이 경악에 찬 얼굴을 했다.

“거긴 어떻게 올라가신 거예요? 걸리면 저도 난감해진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네가 망 좀 봐줘. 어쩔 수 없잖아?” 잼이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투생은 구시렁거리며 잼의 발아래에 쭈그리고 앉았다. 잼이 씩 웃으며 그 둥그런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넌 저 극이 궁금하지 않니? 아뇨. 투생이 입을 삐죽였다. 저는 연극 같은 거 잘 보지 않아요.

극은 길지 않았지만 곡조가 아름답고 균형 있었다. 신에 대한 찬미처럼 들렸는데, 어딘지 의심하고 있었다. 막 알을 깨고 나와 세상을 둘러보는 새처럼. 열 살의 터번 두른 소년이 떠올랐다. 잼의 입 꼬리가 유쾌하게 말려 올라갔다.

“극은 어땠나요?”

극이 끝나자마자 재빨리 천막을 내려온 잼에게 투생이 물었다. 잼은 과과의 고삐를 붙잡고 거리를 걸으며 대답했다.

“생각보다 흥미롭던 걸.”

“스승님은 그런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

“네. 소설이나 신화 같은 거… 잘 읽지 않는다고 하셨잖아요. 인간이 만든 가상의 이야기를요.”

잼은 후후, 하고 작게 웃었다.

“그렇지도 않더구나.”

광장에 모였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있었다. 무대 앞에 붙어 까치발을 들었던 아이들이 경주를 하는 모양인지 쏜살같이 골목을 달려 사라졌다. 거리는 금세 빽빽해지고, 즐거운 노랫소리가 가득 들어찼다. 배우들이 부르던 노래였다. 군중들은 신을 찬미하기 위해 그 곡을 소리 높여 부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신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는 것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은 먼 옛날, 어린 천재가 품었던 호기심이고 그가 남긴 의심의 싹이었다. 세상에 거대한 질문을 품은 자들이라면 단숨에 그 질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으리라.

골목 끝에 한 소년이 서있었다. 인파 속에 멈추어 서서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잼과 눈이 마주쳤다. 소년은 터번을 두르고 여러 겹의 반지를 끼고 있었다. 잼은 무지막지한 보석들이 무지막지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투생, 결국 완벽한 가상의 이야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구나.”

잼이 중얼거리자, 소년은 고개를 돌리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눈을 깜빡이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소년이 지나간 자리마다 노랫소리가 남았다. 신을 향한 무수한 질문들이. 그녀와 그녀의 조수가 그 길을 걸어 나갔다.

“아름다운 극이구나.”

그녀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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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가 쌓은 저택은 아름답고, 그 언덕은 여전히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며, 여름이면 사람들은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른다. 그것이 이단의 노래인 줄도 모르고. 

겨울에도 바람은 따뜻하고, 수평선은 둥글며, 골목들은 겨우내 나무뿌리처럼 불규칙적으로 뻗어가고, 인간들의 머리 위로 별들이 돌고 돈다. 그럼에도 불변하는 단 하나의 황금별.

기록물을 바닥에 늘어놓고 밤을 새다가 어느 순간 잠들곤 한다. 눈을 뜨면 햇빛이 새어 들어오고, 웅크린 몸 위로는 부드러운 담요가 덮여있다. 때때로 소년 역시 그녀의 곁에 잠들어 있기도 한다. 잼은 손바닥을 펼쳐 소년의 얼굴 위로 그림자를 만들고 논다. 오셀로가 깰 때까지.

행복한 순간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찾아오곤 한다. 잠든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볼 때, 바닥에 펼쳐진 어마어마한 양의 종이들을 볼 때, 마르지 않은 잉크와 구석에 쌓여있는 책을 볼 때, 그리고 마침내 잠에서 깨어난 소년이 그녀를 올려다 볼 때 특히 그러하다. 잼, 뭘 하고 있었던 거예요? 그럼 그녀는 소년의 눈 위로 손바닥을 덮으며 대답하곤 하는 것이다.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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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헌정사
1차/old 2019. 10. 30. 17:14

 암흑의 시대가 있었다. 크고 작은 국가들이 건국되거나 멸망하였으며, 무지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중세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한 시대다. 사료가 희박하고, 사건 간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은 더없이 까다로우며, 역사적 인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캄캄한 밤을 등불 없이 헤매는 일과 같다. 암흑의 시대라는 것은 야만과 몰지성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중세의 시대적 배경을 꼬집는 것 이상으로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중세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면서 학계의 조명을 받은 고대국가는 단연 이베르타다. 역사상 가장 긴 전쟁을 치르고, 가장 짧은 통일시기를 누린 것으로 알려진 이 고대국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중세 국가를 통틀어 가장 많은 기록물을 남겼다. 시대를 앞서 걸어온 천재가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황금별. 이베르타에는 그 자신의 역사와 시간의 흐름을 낱낱이 포착하고 증명하고 고발하고 기록할 황금별이 있었다.

 오셀로 C.카르스텐(Before Esther.4(?)~Esther.26(?))은 이베르타의 중세를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천재다. 그는 화가이자 극작가, 발명가, 건축가, 조각가, 식물학자, 해부학자, 도시 계획가, 천문학자, 지리학자, 음악가, 조선공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창조적인 인간이었으며, 어려서부터 세상만물을 사랑하고 관찰할 줄 알았다. 그는 종전 직전에 출생, 귀족 카르스텐 가문의 사생아였으나 그 재능을 인정받아 본적에 들었고, 후원을 받기 시작하면서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는 에스더라고 불리는 이베르타의 짧은 전성기를 누렸으며, 격동의 시대였던 중세의 변화 그 자체를 대표하는 인물로 남았다. 또한 그는 중세 최초로 금성을 관측하고 기록을 남긴 인물로서 이베르타의 황금별로 불리고 있기도 한다.

 오셀로 C.카르스텐의 대표적 저서로는 총 7권의 분량에 달하는 해부학서적이 있다. 나란히 쌓아두면 그 높이가 성인 남성의 평균 키를 압도하는 방대한 분량으로, 생가에 남겨진 후술 자료를 포함하면 그 무게가 72.6kg에 육박한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저술된 내용이 단순 해부학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저서에는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의 효능과 섭취·제조 방법, 이베르타 전역의 지리와 그에 따른 민간 생활양식, 지역에 따른 진단법, 부상의 경도를 다섯 단계로 나누어 만든 응급치료법, 외과시술의 성공과 실패의 기록이 포함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7권의 저서는 중세시대에 막 싹트기 시작했던 의학의 발상을 총망라하는 집성체이자 근대의학의 기초가 되는 뿌리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 저서에 기록된 방대한 의학지식들이 민간으로 전파되어 오늘날까지 다양하게 쓰이고 있으며, 실제 에스더 시대 이후의 많은 이들이 남겨진 민간의학을 통해 목숨을 구했다. 그가 해부학자, 식물학자, 지리학자로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 저서에는 많은 설이 잇따른다. 오셀로 C.카르스텐의 짧은 생애의 대부분은 동부에 위치한 파멜라 항만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타지생활은 서른 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하기 전 2년 간 북부 산맥의 작은 마을에 거주한 것이 유일하다. 이베르타 전역은 물론 국경선 너머의 고산지대, 바다 건너의 동방국가의 기록물을 포함하고 있는 저서를 기록하기에 그가 가진 전생全生의 반경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좁은 것이다. 오셀로 C.카르스텐 역시 서두에 밝히고 있듯, 실제 본 저서 대부분의 초안을 작성했을 중요한 조력자가 있었다. 그리고 이 조력자의 존재는 오랜 시간 학계의 주요 연구대상이었다. 사료가 풍부하고, 사건 간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이 비교적 용이하며, 발자취를 따라가는 일 역시 고되지 않았던 이베르타의 황금별의 일생이 우리에게 남긴 유일한 암흑이 있다면 바로 이 조력자의 존재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중세가 낳은 천재 오셀로 C.카르스텐의 생애가 암흑의 시대로 불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는 그 자신의 생애로 시대 그 자체를 증명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암흑 속에서 등불을 들었으니. 우리의 임무는 그가 생애 곳곳에 남긴 기록의 조각을 모아 조력자의 퍼즐을 완성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름을 우리 모두가 알게 되었을 때, 어두컴컴한 길을 걸어 나갔던 그가 앞서서 걸어놓은 등불들이 일제히 타오르고, 문 앞에 선 누군가가 고개를 돌릴 것이며, 마침내 시대는 새벽을 맞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그곳에 새벽의 시대가 있었노라고 우리 모두가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 시대를 기다리던 유일무이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위하여.

 이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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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1-4»
1차/old 2019. 10. 30. 01:19

1.

기억하기로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날씨가 좋았을 것이다. 찬락은 창가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점심시간엔 아무래도 그 자리가 제일 볕이 잘 드는 것 같았다. 바람이 잘 불고 커튼이 들썩여서 찬락의 몸은 성공적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무도 깨우지 않았던 건 그 탓인지도 모른다. 축구에도 불려가지 않았고 식후땡 모임에도 소환되지 않았다. 완전 혼자였다.

햇빛이 기울어질 무렵에 누군가 공을 던지기 시작했고 소리가 계속됐다. 찬락은 뒤척였다. 들썩이다가 한 번 움찔거렸다. 그러다 깼다. 고개를 돌리니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누군가 개나리를 잘라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개나리는 아무데서나 심어도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찬락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테니스부가 줄지어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체육복을 갖춰 입고 테니스 체를 흔들면서 일렬로 선 무리를 보고 있자니 하품이 나왔다. 키 큰 애, 마른 애, 작고 통통한 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애, 체육복이 큰 애…… 눈으로 훑다가 아는 얼굴을 보았다. 같은 반 애였다. 반장? 부반장? 아니다, 서기? 음 그냥 아무것도 아닌 애였을 지도. 어쨌든 예뻤다. 그래서 계속 봤다.

찬락 안의 테니스는 펄쩍 뛰어오른 후 공을 내려치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김찬락은 서브밖에 모르는 애송이였던 셈이다. 여자애는 뛰어 올랐고, 한순간 머물렀고, 내리쳤다. 하지만 찬락이 상상 속에서 기대한 파워의 서브는 아니었다. 공은 벤치를 맞고 부원들의 발치로 굴러왔다. 여자애가 공쪽으로 허리를 굽혔을 때, 찬락은 개나리를 쥐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개나리를 마구 흔들었다. 꽃잎이 우수수 3층 높이에서 추락하고 있었고 그것은 찬락의 상상 속에서 제법 드라마틱하고 멋진 이미지로 치환됐다. 여자애는 반응이 없었다. 조금 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자리로 돌아갔다. 싱거운 엔딩이었다.

“차였네.”

대수롭지 않은 실패였으므로 찬락 역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책상으로 돌아와 엎드렸다. 눈을 감았다. 공이 튀겨 솟구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손쉽게 잠이 몰려왔다. 개나리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딱 점심시간까지만 살아있었다. 꽃은 자는 동안 죽었다.

 

2.

김찬락의 집은 매 달 집안모임이 있다. 장소로는 주로 레스토랑이나 호텔을 잡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강제적으로 참석해 집안어른들의 덕담을 듣는다. 이야기는 뻔했다.

“성적 좀 신경 써라.”

“쟤 요즘 공부 안 해.”

“네 사촌 좀 본받아.”

“한심하게 살지 마라.”

그러니까 잘 살기 위해 쌓아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은 아직 고리타분해서 고학력과 스펙, 영어 점수를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 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어르신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그랬다. 실제로 그렇게 자라온 어른들이 레스토랑과 호텔에 거리낌 없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카드를 긁고 있으니 그 말은 제법 신빙성이 있었다. 부모들은 말했다. 비싼 곳에서 질 좋은 음식에 돈을 지불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행복이야. 그런 것 같아요. 부드러운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동안엔 찬락 역시 순순히 납득했다. 자본, 을 발음하는 일은 달콤하고 편안하고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느낌을 줬다. 언젠가는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찬락은 생각했다. 자유? 오토바이? 무엇이 됐든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좀 더 놀아도 괜찮았다.

 

3.

64가 등 뒤에 매달려 있다. 김찬락은 오토바이를 몰고 쏜살같이 내달린다. 더 빨리 가야해, 더 빨리, 아니야, 그만해 나 무서워. 뒷자리에 앉힌 64가 중얼거릴 때까지 풍경은 자꾸만 뭉개지고 있었다. 찬락은 오토바이를 멈추고 길가에 세웠다.

“야, 미쳤어! 나 죽는 줄 알았어.”

64는 오토바이에서 내리자마자 찬락의 등을 마구 쳤다. 가까이 다가온 64에게선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어디 꺼야?”

찬락이 64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쥐고 인중까지 들어올렸다. 64는 몸을 움츠렸다.

“걍 로드샵에서 샀는데.”

“얼만데?”

“왜, 사주게?”

“미쳤냐, 내가 왜?”

찬락이 낄낄거렸다.

“걍 물어본 거야.”

“난 또 사주려는 줄 알았지.”

64는 입을 삐죽였다.

“너 완전 돈 많아 보여.”

“왜?”

“오토바이 가지고 있잖아.”

“내 거 아니고 빌린 거야.”

“그렇구나.”

“그렇지.”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둘은 오토바이에 오르기 전 소주 한 병을 반씩 나눠 마셨다. 새벽 두 시엔 도로가 비어서 아무렇게나 달려도 괜찮았다. 찬락은 눈을 깜빡였다. 가드레일 너머로 줄지어 선 가로등이 겹쳐졌다가 흐릿해지며 마구 뭉개졌다. 주황빛들은 모든 감각이 마구 뒤섞이고 있다는 경고등처럼 보이기도 했다. 찬락은 향수냄새 속에서 64의 얼굴을 찾아냈다. 찾아내서, 붙잡았다. 끌어당겨서 입을 맞췄다. 64가 웃으며 더듬더듬 찬락의 팔 안쪽을 뒤졌다. 줄기가 똑, 하고 꺾였다. 향수 때문에 베고니아에서 아무 냄새도 맡지 못 했다.

“집까지 데려다 줘.”

“그럼 다시 타.”

둘은 동네를 빙 둘러 아파트 단지 사거리까지 오토바이를 몰았다. 64가 찬락 등을 자꾸 밀었다. 찬락아, 아무도 태우면 안 돼. 왜? 이제부터 여기 내 자리야, 알겠지? 찬락은 대답을 내뱉는 대신 삼켰다. 그게 될까? 얼마 후 64는 57로 바뀌었다. 헤어질 때 64는 베고니아를 도로에 버렸다.

 

4.

최유현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유현은 잠깐 표정을 굳히고 있었는데, 곧 이어 반달처럼 눈을 접었다.

“또 같은 반이라니 신기하고 질린다.”

“농담인 거 알지?”

찬락은 최유현의 표정이 상냥함으로 빽빽해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질릴 리가 있냐. 잘생긴 나한테.”

그렇게 대꾸한 후 자리에 앉았다. 교실 앞에는 훈화가 붙어 있었다. 어디가 끝일까, 너희들의 잠재력. 제법 비장한 감탄사였다. 하지만 잠재력에도 끝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력이 아니지 않은가.

“방학엔 뭐했어?”

“나야 뭐 똑같지. 술 까고 학원 재끼고.”

“김찬락 그러다 진짜 훅 간다.”

“야, 설마 죽기야 하겠어.”

둘은 방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난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에 대해서다. 꽃이 피지 않는 계절에 찬락은 오토바이를 몰았고 유현은 선행학습을 했다. 그것을 찬락은 능청스럽게, 유현은 사무적으로 늘어놓았다. 매번 똑같았다. 김찬락은 놀고, 최유현은 공부한다. 김찬락은 튀기 위해 노력하고 최유현은 돋보인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다.

“너 어제 또 오토바이 탔지?”

“어떻게 알았냐.”

“어제 봤어.”

“하긴 내가 좀 까리하게 동네를 쏘다니긴 했어, 그렇지?”

“착각도 병이래, 찬락아.”

유현은 조금 웃었다. 백만불짜리 미소고 빽빽하게 상냥함으로 무장되어 있다. 누구나 상냥한 것을 좋아한다. 지난 몇 년간 찬락은 제법 가까운 곳에서 남자애들이 종종 최유현에게 고백하거나 치근덕대는 걸 보았다. 한 때는 찬락도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고 아마 수요일이었고 날씨가 좋았을 즈음의 일이다. 테니스를 치던 최유현은 예뻤다. 정말로, 예뻤다.

“너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는 거냐.”

“응, 그렇겠지…….”

“진짜 내 주변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애 최유현 밖에 없다.”

“나도 내 주변에서 막 나가는 애 너밖에 없어.”

“그래?”

이번엔 찬락이 웃었다.

“그거 존나 까리하네.”

언젠가 찬락은 도로를 달리다 말고 신호 앞에서 유현과 마주친 적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 하고 눈을 둥그렇게 뜬 유현을 보고 뒷자리에 앉은 70이 물었다. 누구야? 찬락은 시동을 걸었다. 부러 크게 오토바이의 배기음 소리를 높이자 김찬락은 도로에서 제일 시끄러운 존재가 됐다. 내 친구야. 찬락은 소리를 질렀다. 야, 쟤 완전 모범생이야. 존나 까리하지? 내 친구다! 그 날은 아주 빠르게 너무 많이 달렸고 집에 돌아와 볼기짝을 얻어맞았다. 네 친구 좀 닮아라! 험상궂게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김찬락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유현하고 저는 진짜 완전 종족부터가 다르다니까요. 걘 진짜 모범생의 표본이고요, 저는

그러니까 대충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뒷좌석에 앉힐 여자애는 매번 바뀌었다. 67일 때도 있고 71일 때도 있고 혹은 65거나 64거나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마다 여자애가 허리를 감아주는 게 좋았다. 술을 마시고 된소리 심한 욕을 내뱉으며 폼을 잡으면 베고니아가 피었다.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하는 여자애들은 그런 것들 앞에서 꽃을 피워줬다. 많은 꽃을 꺾어보고 피워보고 버려보았다. 종종 김찬락의 꽃도 피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꺾거나 피우거나 버리거나 했을 것이며 64가 버린 베고니아는 도로에 짓눌려 시들어 버렸을 것이다. 김찬락은 묻고 싶었다. 왜 하필 베고니아인지. 여자애들 이름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비슷한 것처럼 느껴지는지. 사랑은 왜 그딴 줄기식물처럼 탄생하고 죽어버리는지. 최유현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무렵 테니스를 그만뒀다. 그리곤 다시는 서브를 치지 않았다. 부상 때문이라고 하며 유현은 준비된 웃음을 지었다. 비가 오면 아직도 거기가 막 쑤신다니까. 유현의 미소는 각오한 사람의 결과물처럼 보였고 상냥함으로 빽빽해 파고들 기미가 없었다. 찬락은 그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내 뒷자리에 태워줄게.”

최유현은 눈가를 찡그렸다.

“거긴 네 여친들만 태우는 걸로 해.”

하지만 최유현이 정말 김찬락의 뒷자리에 탄다한들 그 애가 68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유현은 최유현으로 남는다. 비가 올 때마다 쑤신다는 유현의 왼팔로는 찬락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을 수 없다. 그러니까 찬락은 유현을 태운다한들 최고 속력으로 세상을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찬락은 한 번 차였다. 한 번? 두 번? 셀 수 없다. 꽃은 시들었다. 딱 점심시간까지만 살아있었다. 꽃봉오리들은 자는 동안 죽었다. 베고니아도 아니었다. 아무데서나 잘 자랄 수 있는데도. 아무데서나 잘 자랄 수 있었는데도. 아무데서나 잘 자랄 자신이 있었는데도.

“김찬락, 일어나. 수업 시작한다.”

“나 잘 거니까 깨우지 마.”

“수업 좀 듣지.”

“시끄러워.”

최유현, 이라고 발음하는 건 자본, 이라고 발음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편안하고 안락한 세계에 소속된 존재들은 다 그런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최유현은 그 세계로 완전하게 떠날 것이고 김찬락은 몇 가지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자유. 이를테면 오토바이. 이를테면 무수한 64들과 71들과…… 그것이 아쉽다면 좋을 텐데. 아쉽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수업종이 친다. 김찬락은 눈을 감는다. 잠에 빠진다. 좀 더 막 살아도 괜찮을 것 같으니 좀 더 이렇게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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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밤 «허공의 사나이»
1차/old 2019. 10. 30. 01:18

 1.
 최진명이 교사가 된 것은 그녀가 스물아홉이 되던 봄의 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진명은 선배들이 운운하던 첫 발령지의 불운-“첫 발령지에 좋은 학교에 가는 건 글러먹은 일이다”-에 대해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당시 진명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좋은 학교는 학생과 교사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후 진명은 일산 변두리에 위치한 공장 단지 부근의 남자 고등학교(학교폭력 문제로 빈번이 시끄럽던 학교였다)로 첫 발령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선배들이 말한 첫 발령지의 불운은 어느 정도 증명이 된 셈이다. 훗날 동료 교사는 그녀의 발령지를 두고 “그곳은 최악의 공간이었다.” 라 말하기도 했다. 당시 임산부였던 진명의 건강을 염려한 남편 이준호 씨는 그녀에게 공기청정기를 선물했는데, 이를 두고 최진명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가 걱정한 것은 일산 공단의 탁한 공기가 아니라 음울한 학교의 분위기였다. 발령지에 근무하기 시작한 진명은 일기장에 자주 이런 문장을 썼다. ‘나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몇 달 뒤 최진명은 한 언론 사이트에 인터뷰를 요청했고, 포털 사이트에서 몰매를 맞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된다. 동료 교사는 교직에 있던 시절 진명이 불안 증세를 자주 보였다고 증언했다.
 남편 이준호는 그녀의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까지 그녀가 겪고 있던 성희롱과 성추행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그녀의 일기장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이내 진술을 번복하고 일부 사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그가 부인한 일기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배는 나를 방치하고 있다.’ ‘선배가 나를 바닥에 밀치고 고함을 질렀을 때, 나는 이 남자 앞에서 다시는 울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준호 씨는 진명이 교직을 그만 둔 6월 진명으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았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진명의 교직 생활이 그녀의 유산에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P모군은 진명이 자신을 도우려다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 애들은 수업 시간이면 선생님에게 그렇게 하고, 쉬는 시간이면 나한테 그렇게 했어요.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만 하니까 애들이 재미있다고 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더러운 말들이죠. 난 주먹으로 두들겨 맞았지만 선생님은 말로 두들겨 맞은 거예요.” 당시 인터넷을 떠돌던 영상 안에서, 진명은 집단 린치를 당하고 있던 P모군에게 달려가다 말고 한 학생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 이후 영상은 끊어졌다가 편집된 장면부터 이어지는데, 그녀가 린치의 주동자 학생으로 추측되는 검은색 파카의 뺨을 강하게 내려치는 장면은 각종 커뮤니티 내에 캡처 화면으로 올라가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었다. ‘대한민국 학생 인권의 현실.’ 모자이크 처리된 진명의 얼굴은 SNS 내에서 신상 털이로 이어졌으며, 진명은 두 달 동안 총 세 차례 휴대폰을 교체해야만 했다. 그녀는 우울증과 함께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당시 진명이 쓴 일기장의 내용을 보면 환청에도 시달리고 있었던 듯하다. 다음은 일기의 전문이다. ‘밤마다 내 휴대폰으로 카톡과 문자가 밀려드는 상상을 한다. 나는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눈치다. 휴대폰을 바꾸었지만, 그런 문자와 카톡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오늘 받은 문자에서 34로 시작하는 번호는 나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고 협박했다. 어떤 문자들은 현실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몇 주 전에는 웬 어린 학생들이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삼십분 동안 두려움에 떨었다. 선배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학교 측은 진명이 받은 모든 정신적 물리적 피해를 부정했다. “교사 하나의 문제를 들고 저희 측에 뭘 요구하시면 저희도 곤란합니다……(이하 생략) 애들이 가해자라니요. 보복성 린치죠. 학교 폭력 운운하면서 한 아일 과하게 감싸주니까 사태가 커진 겁니다. 듣자하니 가해자 학생들을 대놓고 차별하기도 했다더군요. 수업 시간에 질문해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고.” 학교 측은 실제로 사건이 공론화 되자 가장 먼저 나서 비슷한 진술의 인터뷰를 수차례 한 전적이 있다. 왜곡된 기사가 포털 사이트에 올라가자 누리꾼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녀를 물어뜯었다. 가해자 학생 측과 학교 측은 사건을 은폐하고자 동영상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카페와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동영상(문제의 2분 21초)캡처본이 떠돌아 다녔고 여론은 분노로 물들었다. 교사로부터 학교 폭력을 경험했다는 피해자 학생들의 회고록이 이어지며 댓글 창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모 SNS 상에는 해시태그를 이용한 학교 폭력 근절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진명의 행동을 지탄하고 있었다. 몇 달 후 한 케이블이 짧게 교사 최진명과 학교 내에서 벌어졌던 성희롱과 학교 폭력에 대한 진상 규명을 다루었고 두 차례의 정정 기사가 떴지만, 며칠 후 터진 연예인 세금 비리로 인해 큰 조명을 받지 못 했다. 교사 최진명을 죽인 사건은 그렇게 잊혀졌다.
 ‘사람의 존재가 아 걔? 로 압축되는 순간, 누군가는 기꺼이 죽을 결심을 할 수 있다.’ (최진명 일기장 발췌) 그 이후의 그녀의 행적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남편은 진명이 이혼 이후 자신의 연락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카카오톡도 안 받고 번호도 자주 바꿔서 연락할 방도가 없었어요.” 아직 진명에게 미련이 남아 있던 진호는 진명의 지인들에게 그녀의 행방을 추적했다고 하는데, 진명의 마지막 바깥 행적은 산부인과에서 끊겨있었다. 진호는 착잡한 목소리로 고했다. “유산이었어요.” 가을, 임신 4개월 차의 일이었다. 그러나 진명이 교단을 내려온 데에는 좀 더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했던 것 같다. 최진명 사건에 대한 정정기사가 뜨던 날, 진명은 해당 기사를 일기장에 스크랩한 후 아래에 이렇게 썼다. ‘짐을 정리하던 날 편형이 나를 찾아와 고백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그 동영상 제가 올렸어요. 그 말을 듣는데 무어라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편형이가 엉엉 울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맞을까 봐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올렸다는 그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편형은 학교 폭력 피해자 P모군이다) 각종 기사와 언론 물타기로 몰매를 맞으면서까지 보호하려 들었던 피해자 학생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 동영상의 최초유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진명은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놀랄 만큼 평화로웠다. -고 진명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서술했다. ‘약을 사기 위해 총 다섯 군데의 약국을 돌아다녔다. 살고 싶다는 생각은 마지막까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흘끔거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 돌을 던지면, 맞아서 그대로 죽어버려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국을 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명은 한 전시회장을 보게 된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활동하는 작은 미술의 집이었다. 진명이 그곳을 방문한 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진명의 생을 연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진명은 전시회장에 걸린 캔버스에서 붉고 아름다운 행성 하나를 목격한다. 호주머니엔 학창시절부터 진명이 즐겨 들고 다니던 워크맨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비틀즈의 Let it be가 녹음된 테이프가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과 아름다운 그림만으로 감화되기에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지만 진명은 비틀즈가 부르는 “그냥 내버려 두세요”를 들으며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진명은 돌아오는 길에 약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리고 거실에 앉아 TV를 틀었다. ‘몇 달 만에 듣는 외부의 소리들을 받아들이느라 나는 뉴스 내내 진땀을 뺐다. 어딘가에는 분명 내 이름이 존재할 것 같았는데, 세상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정치인 둘이 뇌물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뉴스를 껐을 때 몸은 땀으로 온통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샤워를 했다.’ 진명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냉장고에서 차가운 우유를 쉬지 않고 마셨다. 차가운 기운은 진명의 곤두선 기운을 조금 달래주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진명은 다시 TV앞으로 돌아와 쉬지 않고 채널을 돌아가며 모든 방송을 시청한다. 멈출 수 없었고 멈춰서도 안 되었다. 진명의 모든 트라우마가 그곳에 있었고 마침내 진명은 다시 그것을 마주했기에 버릴 수 없었다. 진명은 그렇게 며칠 내내 TV앞에 매달려 모든 채널과 방송을 섭렵한다. ‘놀랍게도 세상은 나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살아남으면 잊혀 질 권리를 얻는 것인가를 고민했다. 내가 돌에 맞았다는 것조차 잊은 그들은 저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건배를 하고 세상사를 읊고 웃고 떠들고 사랑하고 증오한다.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무감한 세상을 목도하며 진명은 억울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안도했고, 마침내는 인정했다. ‘나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세상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진명의 'Let it be'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대규모 화성 이주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3년 쯤 지났을 무렵 혜성같이 등장한 환상 야구는 당시 진명이 죽음과 생의 경계에서 고민을 거듭할 무렵 대한민국을 강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스포츠에 완벽한 문외한이었던 진명이 환상 야구를 접한 것은 순전히 이런 까닭에서였다. 전투적으로 TV채널을 시청하던 진명은 모든 뉴스와 스포츠 채널이 하나의 종목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지금 화성의 전파 상태가 좋지 않아 화면이 종종 끊어지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라는 하단의 안내 메시지는 진명이 일전에 마주한 붉고 아름다운 행성 그림 하나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공을 향해 달리는 야구선수의 표정이 클로즈업될 때, 진명은 완전히 그 경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그는 환상야구 시즌제 리그에서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장면 중 하나인 ‘허공의 사나이’를 종종 연출하기로 유명한 환상야구단 프로 선수였고, 이 장면은 진명이 화성 여행을 가기로 결심하는 아주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환상 야구는 분명 보통 야구와는 다르다. 장면 하나하나를 보기에도 이를 그냥 야구라고만 명명하기엔 크나큰 실례다. 사람들은 분명 그래서 환상, 이라는 말을 붙였겠지. 중력과 맞서 날아오르는 청년들이 느릿느릿 던져지는 공을 쫓는다. 그들은 경기장 일부에 도달해선 또다시 뒤바뀐 중력 때문에 쏜살같이 튀어나갈 공의 운명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허공의 마임을 향해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날린다. 아무도 그들을 우습다고 말하지 않는다. 환상야구란, 단단하고 작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짓누르는 힘과 끊임없이 싸우는 모든 삶들의 대변이다.’ 경기가 끝나자 진명은 컴퓨터 앞으로 기어가 환상 야구 시즌별 경기 날짜를 확인한 후 여행 일정을 짰다. 화성 급행열차 티켓은 왕복 130만원이었다. 미국 비행기 왕복 표 값이군, 진명은 결제 버튼을 누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2.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지구 정류장으로 떠나는 날 진명은 전 남편 이준호에게 전화를 건다. 오 개월만의 일이었다. “선배, 나 좀 양평까지 태워주라.” 그는 깜짝 놀라 “어디를 데려다 달라고?” 라고 되물었지만 진명은 두 번 대답하지 않았다. 한겨울을 관통하던 날씨는 산속에 도착했을 때 절정에 치달았다. 벌벌 떨며 발가락을 오므리는 진명의 하이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호는 “신발 줄까?”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담배나 한 갑 주라.” 진명은 대답했다. “네가 담배도 폈니?” “그렇게 되었어.” 진호는 근처 편의점까지 직접 뛰어 담배 한 보루를 사왔지만, 진명은 한 갑만 받아들고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내렸다. “진명아, 연락해!” 다시 대학 선배로 되돌아 온 준호는 진명의 등 뒤에 대고 그렇게 외쳤다. 진명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있을 무렵 진명은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나는 유산 이후 베란다에서 내내 담배를 피웠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연기를 마셨다간 빼도 박도 못 하게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진명은 일기에 짧게 기록한 뒤 기둥 근처 의자에 늘어졌고, 핸드백에서 시집을 꺼내들었다. 우울을 달래기 위해 최진명이 삶을 거치는 동안 발굴한 몇 가지 방법이 있다면 하나는 흡연이었고 하나는 시집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에 진명은 그냥 마음으로 문장을 새겨 넣기로 결심했다. 그 애는/우리, 라는 말을 저 멀리 밀쳐놓았다/죽지 못해 사는 그 애의 하루하루가/죽음을 능가하고 있었다……. 시는 아름다웠고 삶은 계속되는 중이었다. 히터 바람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진명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말을 건 누군가가 없었다면 진명은 바닥에 엎어졌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런 시를 놔두고 졸고 계시다니요.”
 졸음에서 벗어난 진명이 고개를 드니 거기엔 한 명의 청년이 있었다.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눈매는 담백했다. 끼고 있는 안경테는 얇았다. 진명은 벌어진 다리를 오므리곤 옷매무새를 갈무리했고 어색하게 웃었다.
 “……피곤해서요.”
 “이소연 시인 좋죠.”
 청년은 시인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진명은 동의를 표했다.
 “네, 좋죠. 아직 반도 못 읽었지만.”
 “졸고 계셨으니까요.”
 청년의 말에 무안해진 진명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화성으로 가시나요.”
 “예, 화성 갑니다.”
 진명은 대답하는 청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학생이신가 봐요.”
 “휴학생이에요. 바로 알아보시네요.”
 “그 나이 대는 보통 대학을 다니고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말한 진명은,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덧붙였다.
 “사실 교사였거든요.”
 청년은 예리했다.
 “과거형이시네요.”
 “네,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비슷한 처지네요.”
 “네, 비슷한 처지죠.”
 둘은 그 이후에도 시시콜콜한 몇 가지 대화들-시집과 가방에 대한 것-을 주고받았다. 진명은 청년에게 조금의 친밀감을 느꼈고, 청년이 통성명을 제안했을 때 순순히 “최진명 입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제 일어나봐야 해요.”
 아쉬움 없이 진명은 그에게 “열차에서 봬요.” 라 인사했다. 청년 역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 관계는 더욱 깔끔하고 괜찮은 것으로 느껴졌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둘은 서로의 관계가 이것보다는 좀 더 복잡했음을 알게 되지만 당시 진명은 그 청년의 까만 캔버스 운동화를 보면서도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 했기 때문에 그를 잡지 않았다. 후에 말하기를, 이 청년이 “배차현”이다.
 화성 행 급행열차가 대기권을 돌파할 때 기차는 아주 심하게 흔들렸다. 진명은 침대 위에 얹어둔 캐리어가 머리 위로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하느라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다. 열차는 10여분 정도 그렇게 흔들리다가 갑자기 돌변해 완벽하게 평화로워졌다. 궤도를 잡은 열차는 매끄럽게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흔들림이 없을 것이란 확신이 서자 진명은 객실 바깥으로 나왔다. 열차 내에는 작은 식당과 편의 시설이 있었다. 커피를 주문한 진명은 창밖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눈물겨우며 놀랄 만큼 텅 비어있고 동시에 놀랄 만큼 빼곡하게 들어 찬 그 까만 공간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진명을 꽤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아서 지금까지는 다행히도 괜찮았다.’ 진명은 객실에 돌아와 이런 문장을 쓴 뒤, 전 남편에게 받은 담배 한 갑을 들고 흡연실로 향했다. 거기엔 “배차현” 이 있었다.
 “진명 씨, 담배 피우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차현은 우주가 흐르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진명은 연기를 뱉으며 캄캄한 베란다를 떠올렸다.
 “얼마 안 되었어요. 일 년?”
 “초심자시네요.”
 “초심자랄 것까지 있나요.”
 “전 대학 들어가서 폈는데.”
 차현은 씁쓸하게 덧붙였다.
 “이상은 너무 쉽게 무너지네요.”
 진명은 배차현이란 청년이 가진 이상이 무엇일까 고민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었고 또 시도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짐작하는 일이 그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Let it be' 가 알려준 세상사란 아주 단순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누군가 집단 린치를 당해도, 누군가 그녀의 엉덩이를 좀 더듬어도, 누군가 그녀를 향해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손가락질을 해도 ‘Let it be’ 하다보면 세상은 곧 그녀에게 흥미를 잃었다. 진명은 배차현에게 자신의 ‘Let it be'를 적용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진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원래 이상은 이상으로 남아서 이상인 거고, 그런 거죠.”
 차현은 진명을 보며 담담하고 옅게 웃었고, 대답 대신 담배 연기를 뱉었다. 희미한 시야 속에서 이상하게도 진명은 그 순간 한 학생을 떠올렸는데, 공교롭게도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가물가물했지만 그 애는 아름다운 언어에 감탄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 애가 시를 쓰겠다고 영어 과외를 그만두기 전까지 진명은 주일에 한 번 영시를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방금 문장 뭐에요?”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 애는 꼭 지나치지 않고 진명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이따금 시집을 빌려가기도 했는데, 진명이 마지막으로 읽어주었던 구절은 이것이다. “이 두려움 떠는 침상 위에 / 찬란한 빛이 비치게 하라.” 에밀리 디킨슨의 시였다. 그 애가 그 시집을 빌려간 후 영영 되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진명은 그를 ‘시를 쓰기 위해 홀연히 사라진 이상의 아이’로 종종 회고하곤 했다. 진명이 배차현과 그 애를 연관시킨 건 순전히 그 애가 가진 ‘이상’이 떠올라서였다. 진명은 웃음이 나와 고개를 숙였고 차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웃으세요.”
 “그냥…전에 가르치던 제자가 생각이 나서.”
 진명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제자는 그 애 하나뿐이었다. 좋은 기억이었지, 하고 진명은 생각했고, 곧이어 참 좋은 시절이었어, 라고 생각했다. 차현이 “그러고 보니 저도 고1때 영어 과외를 받았었죠.” 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 애는 진명의 오랜 시절 전으로 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차현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가르치던 쌤이…시를 읽어줬었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그래서 시는 되게 기억에 많이 남네요. 시집 빌렸던 거 하나 못 돌려줬었는데 제가 중간에 그만둬서…….” 진중하게 이야기를 듣던 진명의 표정은 시집에 이르러 묘하게 변했다. 진명의 시선이 꼼꼼하게 청년의 얼굴을 더듬기 시작하자 차현은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진명은 작게 웃으며 기둥에 기대섰다. “차현 씨.” 라고 진명은 그를 불렀고, 한 번 더 웃었다.
 “에밀리 디킨슨 좋아해요?”
 “아.”
 “맞죠.”
 이 기묘한 7년 만의 재회에 대해, 진명은 이렇게 썼다. ‘에밀리 디킨슨 좋아해요, 라는 말로 이어질 수 있는 인연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찬탄한다. 어쩌면 나는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이 열차에 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쫓던 야구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단언컨대 그 애와 보냈던 짧은 계절은 내 인생 가장 찬란한 순간을 관통하고 있었다.’
 
 3.
 진명과 차현은 그 뒤에도 종종 객실 복도에서 마주쳤다. 지구에서 화성까진 이주일 반이 걸렸고 정거장은 세 개나 남아 있었다. 차현은 진명이 오래 전 어물어물 헤어진 과외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녀를 “선생님”이라 불렀지만 진명은 여전히 그를 “차현 씨”라 불렀다. 차현에게 “선생님”으로 불릴 때마다 진명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는데, 정작 그녀는 교단 위에서 제대로 “선생님”이라 불린 기억이 거의 없는 까닭이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진명과 차현은 종종 커피를 마시는 사이가 되었고 7년 만에 재회한 7년 터울의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되었다. 진명과 차현에게는 서로가 가진 선과 거리감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틈이 둘 사이를 친구로 묶어주는 것 같았다”고 당시 함께 열차에 탑승한 승객 하나는 진술했다. 진명은 그 틈에서 안정감을 느꼈기 때문에 배차현에게 느끼던 개인적인 호감을 묵살해버린다. 이는 진명이 인생에서 택한 최악의 결정이었다고 “최진명 최후에 순간”에 회자된다. 차현은 진명에게 칠 년 전 빌렸던 시집을 돌려주었는데 진명은 받은 이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시집을 제대로 펼쳐보지 않았다. 하지만 차현이 빌려준 시집과 소설은 빠짐없이 읽었고, 마음에 박히는 문장은 일기장에 필사했다. ‘내가 당신 생각을 할 때, 당신도 나를 생각할까 / 아니겠지 / 아닐 것이다 /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막막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 속 나의 이름은 고작 / '너를 앓으며 사랑했던 소년 1'이었다.’ ‘비겁하게도 나는 사랑에도 행복에도 한 걸음 물러나 비켜서고 싶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린 것은 우연처럼 되돌아와 거대한 바다를 뒤엎는 해일처럼 한순간 삶을 송두리 채 뒤흔들어 놓는다.’ 어느 순간부터 진명은 자신이 쓰는 모든 구절과 문장이 사랑과 통증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그녀는 시인도 소설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관통하고 무참하게 학살할 문장들은 이 세상에 무수했다. 진명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개인 객실에 길게 누워 진명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나쁘지 않았다. 따스했다. 최진명은 그렇게 천천히 자신을 살해해갔다.
 칠천만 킬로미터를 횡단하는 열차 위에서 승객들은 우주를 목도하며 자신들이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거듭하여 깨달았다. 진명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종종 우주에 대한 생각을 일기장에 썼다. ‘이런 곳에선 Let it be를 외친다한들 모든 사건들이 너무나도 외롭고 사소한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어리석은 진명은 그 때 자신이 더는 ‘Let it be’를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 했다. 진명은 차현을 그렇게 내버려두었다. 커피를 마실 때에도, 담배를 피울 때에도, 복도에서 젖은 머리카락으로 마주칠 때에도, 그렇게, 차현은 성실한 청년으로 남았으며 진명은 나태한 독자로 남았다. 진명은 그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K-20은 달 정거장 다음으로 존재하는 인공 행성이다. 자동차를 연구하고 제조하는 공장 연구 단지가 존재하고, 행성 전체가 도로로 덮여있다. 상주인구는 없지만 연구소 직원들은 종종 이곳에서 밤을 샜다. 작은 행성이기 때문에 계절은 하나뿐이었고, 도로를 달릴 때마다 기온은 조금씩 변했다. 눈 쌓인 타이가 숲을 달리다 보면 펼쳐지는 오로라가 장관이라 자동차 CF에는 종종 K-20이 등장했다. 진명이 열차에서 내렸을 때 차현은 근처에서 외투를 싸매고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명이 차 키를 대여한 것은 아주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차현 씨, 오로라를 보러 갈래요?” 진명이 물었고, 차현은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우습게도 그 때 하늘엔 아직 오로라가 없었다. 어쨌든 둘은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오픈카였지만 생각보다 춥진 않아서 진명은 속도를 냈다. 조수석에 기댄 채 차현은 별다른 말없이 하늘 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타이가 숲에 들어서자 하늘 위로는 커튼처럼 떨어지는 빛 무리가 펼쳐졌다. “와.” 차현이 짧게 탄성을 질렀기 때문에 진명은 속도를 늦췄다. ‘나는 그 애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선명하고 또렷하게, 그 아이는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 역시도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아이 역시도 알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를 쓰겠다고 종종 말하곤 했던 걸까.’ 속도를 늦추던 진명은 아예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대곤 좌석을 눕혀 완전히 몸을 젖혔다. 차현이 진명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곧 다시 오로라를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하늘 위로 드리운 초록색 커튼은 곧 노란색으로 일렁이다가 사라지는 듯 앞으로 나아갔다. 춤을 추는 빛은 신이 나있었다. 꼭 노래 같구나, 라고 진명이 생각하는데, 차현이 불쑥, “저건 어쩌면 하늘의 노래일까요.” 라고 물었다. 진명은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겠지.” 진명은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렇겠지.” 둘은 그 뒤 말없이 역으로 되돌아 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4.
 승객들이 화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열차가 화성의 위성 중 하나인 포보스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간이정거장을 지나쳐야만 했지만 다른 위성인 데이모스 정거장을 지나치고 나면 그들은 덜컥 화성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포보스에는 역 근처에 위치한 작은 술집 하나가 있었는데 명물이었다. 화성에 가기 전 으레 들러 블랙 맥주를 마시는 것이 승객들 사이에선 일종의 관계가 되어 있었다. 비즈니스를 이유로, 야구 경기 관람을 이유로, 관광을 이유로, 죽음을 이유로, 생존을 이유로 이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은 저마다 술렁거렸다. 열차 내에선 음주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술을 고파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누군가 “마시자”고 외쳤고, 구호처럼 사람들은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행성에 내리기 전, 진명은 좌석에 붙은 정거장 안내표를 읽었는데, 거기엔 포보스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최고의 맥주를 만드는 주재료를 생산하는 행성.’ 아래엔 자잘한 설명이 붙어있었는데, 진명은 그것보다도 아래에 붙은 경고 표시에 더 눈이 갔다. ‘절대, 마을로 내려가지 마시오.’ 요약하자면 대규모 화성 이성 프로젝트가 진행될 무렵 불법 이주를 시도하다 내쫓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지구에 가던 도중 열차에서 무단이탈해 점거한 행성이 포보스라는 것이었는데, 포보스의 대규모 슬럼가는 치안률이 아주 낮고 사실상 치외법권 지역이기 때문에 승객들이 호기심에 내려갔다가 종종 변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슬럼가는 포보스 행성에서 대규모로 재배되는 작물을 팔아 수입을 유지하고 있지만, 생활이 넉넉지 않은 건 매한가지라 승객들의 소지품 도난을 위해 열차에 무단침입을 시도하는 거주자도 더러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거장 안내표는 이야기를 끝맺고 있었다. 안내 책자를 다시 의자 사이에 끼워 넣은 진명은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 너머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은 온통 푸른 어둠이었다. 이 행성의 하늘은 몇 시간이고 늦저녁이었다. 진명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빽빽하게 늘어진 판자촌을 보았다. 아주 희미한 불꽃이 일렁이는 슬럼가에는 으스스한 실루엣들이 이따금 스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명은 객실에 가지런히 정리해둔 차현의 시집들을 떠올렸고, 그들이 이런 책을 가져가진 않겠지만, 만약 가져간다면 몹시 슬픈 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진명은 포보스를 설명하는 안내 책자를 다시 꺼내들었다. ‘절대, 마을로 내려가지 마시오. 강간, 절도, 도박, 구타, 살해, 실종의 위험이 있음.’ 진명은 두 번째 문장을 아주 오래도록 읽었다. 누워서도 읽었고, 엎드려서도 읽었다. 그리곤 나중에 일기장에 그대로 필사했다. ‘절대, 마을에 내려가지 마시오. 강간, 절도, 도박, 구타, 살해, 실종의 위험이 있음.’
 
 5.
 간이정거장에서 연료를 충전한 열차는 몇 번의 동력 점검을 마친 후 다시 우주를 가르며 출발했다. 포보스에서 잔뜩 취하고 돌아온 승객 하나가 복도에 구토를 했기 때문에 한동안 복도에선 시큼한 냄새가 났다. 로봇 청소기와 공기 청정기는 한동안 진명의 객실 앞을 서성거리며 승객이 뱉어놓은 토사물의 흔적을 치운다고 법석이었다. 진명은 차현을 찾지 않았고 대신 객실에 앉아 차현이 빌려준 시집을 몇 번 더 읽었다. 7년 동안 한 시집을 장기 대출한 전적이 있어서였는지도 몰랐지만, 차현 역시도 꽤 오래도록 진명이 빌려간 시집을 돌려주지 않음에도 먼저 말을 꺼내거나 하진 않았다. 진명은 그것 역시 저와 차현 사이에 존재하는 ‘틈’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이따금 사려 깊지 않은 대담함을 가지길 바란다.’ (진명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지만, 이 페이지는 후에 진명의 손에 의해 직접 훼손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착실하게 열차는 나아갔고 곧 데이모스에 도착했다. 화성에 도달하기 전 정차하는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안내 책자를 읽지 않아도 진명은 이 위성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데이모스는 이미 학원도시로 유명한 화성의 작은 위성이었고 승객들 중 일부는 학원도시 입학을 목적으로 한 학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내 노을이 지고 있어서 ‘영원한 노을’로도 유명한 위성이었다. 진명이 열차에서 내려 모래사장을 밟고 있을 무렵에도 하늘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 위성의 팔십팔 퍼센트는 물이었고, 나머진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레몬 색 모래사장에선 신 냄새가 났다. 해수욕장 입구 앞에는 뜬금없게도 포장마차가 있었다.
 “처자, 저 물에 뛰어들지 마. 바다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도 말고. 저 안에는 사람 맛을 아는 괴물 물고기들이 살고 있어.”
 어묵 탕을 주문해 홀짝이고 있으니 주인장 되는 아주마니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역이 위치한 해수욕장과 거대한 섬-번듯한 빌딩이 세워진 하나의 도시였다-을 연결하며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교를 바라보았다. 다리 아래에 아주 거대하고 시커먼 그림자가 조금씩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이곳은 바다에 파도가 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의 파동이라도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게 그 물고기들인가요?”
 진명이 묻자, 아주마니는 대답했다.
 “애들이 공부하다 미치면 빌딩에서 뛰어 내려. 저 바다 쪽으로. 처음엔 안 그랬는데, 나중엔 시체 건지기가 그렇게 힘들어지더래. 알고 보니 쟤네들이 다 주워 먹더란 거야. 쟤네가 인간 맛을 알게 된 거지. 살아있는 사람도 꿀떡 삼킬지 누가 알아? 비늘 하나가 성인 남자만 하더만.”
 진명은 데이모스 학원 도시의 실태에 대해 떠들어 대던 뉴스와 언론사들을 기억한다. 교사들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수천 명의 학생들만이 그 높은 최첨단의 빌딩에 살고 있다는 기적 같은 학원 도시의 이야기들. 관리자들은 몇 달에 한 번만 빌딩의 유비쿼터스 시스템을 점검하고 모든 수업은 인터넷 강의로 이루어진다. 빌딩의 방 하나하나가 호텔 스위트룸처럼 넓고 아늑했다. 창밖으론 지지 않는 영원한 노을이 있었고 학원 도시 안에는 모든 생필품이 갖춰져 있었다. 부족해질 일도 없었고 차고 넘치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해마다 학생 수십 명이 빌딩에서 몸을 던졌다.
 “왜 그러는 걸까요.”
 진명은 잔잔하고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학원 도시 섬을 바라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주머니는 진명의 빈 그릇을 치웠다.
 “눈 뜨자마자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공부하다가 다시 밥 먹고 자러가는 게 뭐가 즐겁겠나 싶지. 그래도 졸업장 따면 바로 취직이니까 4월에는 사람들이 또 꾸역꾸역 여기로 몰려와. 아줌마, 여기 좋아요? 그렇게 묻는데 대답을 못 해주지.”
 데이모스 학원도시는 3년을 버티면 졸업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따면 졸업장을 준다. 특수한 기술을 배우기 때문에 데이모스 학원도시 출신들은 전부 K-20의 연구 단지의 연구원이 되거나 화성 지부에 있는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 수많은 청년들이 가방으로 매고 이곳으로 몰려든다. “어쩔 수 없잖아요.” 라는 표정을 짓고. 여기서 몇 명은 죽음을 꿈꾸며 살아남고 또 몇 명은 어느 날 불현 듯 이 노을이 너무도 지겨워져 발코니 창문으로 나가 바다로 몸을 던진다. 살아남은 자들의 성공이 TV에 중계되고 또 중계되기 때문에 데이모스 학원도시 내 학생 자살률은 해마다 증가하지만 아무도 손쓰지 않는다. 이 영원한 노을이 지겹다고 몸을 던지는 학생들의 삶을 이해하는 일은 너무나도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들을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 아름다운 노을은 한없이 지겹게만 느껴지는 것인데도.
 세상이 버리기로 결심한 최진명은 노을의 지겨움을 아는 사람. 그녀는 이곳에 적용된 룰을 한 번에 알아본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 Let it be 같은 것이군요.”
 아주머니는 동의한다.
 “분명 그런 거겠지.”
 열차로 돌아온 진명은 일기장에 이렇게 쓴다. ‘나는 이 바다에 뛰어들 수 없다. 이 바다는 나의 죽음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그런 느낌이 든다. 물고기들이 나를 삼키지 않아서 나는 다만 시체로서 발견될 것이다.’ 그 날 밤 진명은 꿈을 하나 꾼다. 데이모스 학원도시의 빌딩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꿈이었다. 빌딩 창문을 열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바다로 몸을 던진다. 퐁당퐁당 떨어지는 까만 점들 위로는 영원한 노을이, 아래로는 거대한 그림자가 헤엄치는 바다가 있다. 물고기들은 다만 입을 벌린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Let it be’ 였다.
 
 6.
 진명이 화성에 도착한 것은 열차에 탑승한지 정확히 이주일 하고도 4일이 지났던 2015년 12월 6일의 무렵이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날씨 때문에 화성은 조금 쌀쌀하기만 할 뿐 겨울의 기미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캐리어를 내린 진명은 차현이 화물칸에서 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인사하지 않았다. “진명 씨는 그 때 아주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든 사람처럼 보였어요.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어찌나 빨리 역에서 사라지던지.” 진명의 옆 객실에 탑승하던 승객은 그렇게 증언했다. “아마도 야구 경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시즌 리그의 가장 중요한 경기가 3시간 뒤에 시작이었거든요.” 실제로 진명은 환상 야구의 경기장을 찾았고 미리 끊어둔 티켓을 수령한 뒤 경기장 끝자락에 앉아있었다. 그 날의 경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다고 전해진다. 삼성 ‘매트 비’를 재치고 작은 구단인 ‘솔라’가 역전승을 거뒀는데, ‘솔라’에는 진명이 그토록 보고 또 보았던 ‘허공의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경기장 곳곳이 구역마다 다른 중력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중력이 무겁거나 가벼워지면 다른 선수들은 으레 속도를 줄이거나 늘렸는데, 그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꾸만 앞으로 달려 나갔다. 8회 말 무렵, ‘허공의 사나이’가 연출되었다. 힘차게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한 남자는, 그렇게 흙과 먼지를 튀기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객석이 환호하며 기립했고 경기의 스포트라이트는 그를 향했다. 진명의 좌석은 그의 측면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지금, 아, 나오는군요! 여러분, 박수 쳐주세요, 그가 공을 향하여 달립니다. 그렇습니다, 허공입니다. 허공의 사나이입니다!” 온 세상을 뒤집어엎을 듯 쩌렁쩌렁 방송이 울리는 그 때, ‘허공의 사나이’를 보며 앉아있는 서른한 살의 최진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장면 하나를 위해 칠천만 킬로미터를 날아온 여자는 그 경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성에 도착한 이후로 진명은 일기장을 쓰지 않았기에 우린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명이 결국 ‘허공의 사나이’를 목격했다는 것이고, 그게 그녀에게 어떤 결심을 안겨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경기가 끝마친 후 진명은 인파를 피해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진명은 곧장 다시 열차를 탈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 일어난다. 진명이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거기엔 “배차현 씨”가 있었다.
 “아, 선생님.”
 차현이 먼저 인사했기 때문에 진명은 그를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진명은 인사했다.
 “차현 씨, 야구 봤나 봐요.”
 “예, 뭐. 그렇죠.”
 차현은 머쓱하게 웃었다. 진명은 그 얼굴을 보며 갑자기 자신이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했고,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먹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진명이 차현에게 물었다.
 “같이 밥 먹을래요?”
 차현은 대답했다.
 “지금은 햄버거가 좋네요.”
 둘은 버거킹으로 가서 버거 세트를 하나씩 사먹었다. 진명이 카드를 긁었고, 차현은 조금 미안해했다. 머쉬룸 스테이크 버거는 아주 맛있었다. 진명은 차현이 햄버거를 베어 무는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차현이 어색하단 표정으로 입술 주변을 비비자 진명은 시선을 내리깔곤 핸드백을 뒤졌다. 찾을 건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아니에요. 그냥.”
 차현과 진명은 그 뒤에도 소소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콜라 속에 담긴 얼음이 녹아 부서질 때까지. 시집, 소설과 문장들, 우리가 지나쳐온 행성과 위성에 대해서 그들은 말하고 또 말했다. 패스트푸드점은 냉방이 잘 되었기 때문에 진명은 곧 으슬으슬한 추위를 느꼈고, 하이힐을 신은 발가락을 오므렸다. 차현은 진명을 보곤 물었다.
 “선생님, 옷 빌려드릴까요?”
 진명은 잠깐 굳었다가 이내 대답했다.
 “괜찮아요.”
 차현은 진명에게 몇 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둘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과거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배려라기 보단 그들 스스로가 꺼내기에 유쾌한 이야기들이 아니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진명은 차현이 자신의 과거를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차현은 최진명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당시 군대에 있었다.
 “혹시 폭력 교사 관련으로 떠들썩했던 거 기억나나요. 재작년 여름 무렵이었는데.”
 진명은 괜히 그렇게 물었지만, 차현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겠어요. 재작년이면 막 재대했을 때라서.”
 진명은 그 얼굴을 보며 안심했고, 더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차현은 다른 주제를 좀 더 이야기했다.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 화성 도서관은 지구와 화성을 통틀어 가장 큰 도서관이래요.”
 절판된 도서와 고대 서적들, 학회 자료를 보관하는 곳이다. 최근엔 시대적 착오에 의해 사라진 도서들을 복원해놓는 시도도 하고 있다. 어쩌면 교과서에 이름만 남은-혹은 이름을 남기지도 못 한 외로운 시인들의 시집이 거기 있을 지도 모른다. 차현은 도서관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을 이야기했다. 진명은 다 녹은 콜라를 빨대로 천천히 저으며 주의 깊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차현 씨는 거기 가봤나요?”
 진명이 물었을 때 배차현은 으음, 하는 표정으로 옅게 웃었다.
 “선생님, 우린 그 열차에서 내린 지 아직 하루도 안 되었거든요.”
 차현은 야구 경기장 쪽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일정이 된다면 가보겠지만 잘 모르겠어요.”
 바깥은 늦은 저녁이었다. 곳곳 간판에 불이 들어오고 패스트푸드점은 연인들로 북적였다. 응원 복을 입고 앉은 한 무리의 사람들 등판으로 시큼한 땀 냄새가 올라왔다. 진명은 미지근한 콜라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오늘 거기 가봐야겠어요.”
 이것은 충동적인 결심이 아니다. 하지만 차현이,
 “마음에 드는 시집을 발견하신다면 추천해주실래요? 돌아오는 열차에선 제 시집을 돌려주러 와주세요.”
 라고 말했을 때, 진명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어떤 시, 이를테면 사랑과 통증을 수반하는 문장들을 죄다 그의 가슴 속으로 끌어오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일기장에 필사했던 그 모든 문장들처럼 아름답고 잔인한 이 세상 모든 언어를 하나하나 손수 박아 차현을 그 속에 죽이고 싶었다. 천천히 담갔다 꺼내곤 흔들며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배차현 씨, 여기엔 내가 하고픈 말이 단 한 마디도 없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배차현 씨, 죽지 마세요, 이제 내가 하고픈 말을 할게요.” 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문장으로 축축하게 젖은 스물네 살 청년의 하얗고 볼록한 이마를 내려다보며, 최진명, 그럼 결심하겠지. 그러니까 최진명은 기어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배차현 씨, 나는 아무래도 당신을 사랑하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배차현은 이제 펜을 꺾고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문청일 뿐이다. 최진명이 찬탄하던 그 시절의 배차현은 아주 오래 전에 목을 매달고 죽어버렸다. 그가 쓰는 문장은 이제 보고서와 서류 위에 걸맞은 성질을 가지고 빌딩 위를 기어오를 테였다. 기어오르고 기어오르고 기어오르다가, 그 도시의 아이들처럼 바다로 몸을 던져버릴 거니. 서른한 살이 된 최진명은 두렵다. 최후의 배차현이 죽어버릴까 봐. 이 시절도 결국 그 시절이 되어버릴까 봐. ‘Let it be’ 란 그런 식으로 진명을 방치하고 차현의 문장을 토막 내고 재구성했다. 진명은 세상이 가진 ‘Let it be’ 는 비틀즈가 부르는 아름다운 한 곡의 일부처럼 평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컨대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배차현 씨, 나는 아무래도 당신을 사랑하는 모양이에요.” 라고 말하면, 영영 배차현을 만날 수 없게 될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여자였다.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느끼며 진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이 벌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말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진명은 차현에게 인사했다.
 “돌아오는 열차에서 만나요.”
 차현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그녀를 배웅했다.
 “예, 그 때 봬요.”
 진명은 차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7.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밤 10시였다. 진명은 도서관이 문을 닫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도서관이 문을 닫는 시간은 밤 12시였다. 진명은 800번 대에 가기 위해선 몇 층으로 가야하냐고 물었다. 로봇은 친절하게도 2층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진명은 달팽이집처럼 빙글빙글 이어지는 계단을 쉼 없이 올라 아주 넓은 홀에 도착했다. 수많은 서적들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진명은 핸드백에서 일기장을 꺼냈지만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시집을 더듬거리며 자꾸만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속 더듬고 계속 더듬다가 책장이 끝나자 멈추어 섰다. 진명은 그곳에서 아주 낡은 시집 한 권을 발견했다. 시인의 이름을 읽었지만 누군지 알지 못 했다. 나중에 찾기를, 그 이름은 1930년 대 시인하면 떠오르는 시인들 중 하나의, 부인 되는 사람의 것이었다. 시집은 아주 얇았고 잘못 손대면 바스라질 것 같았기 때문에, 진명은 핸드백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시집을 펼쳤다. 시집에는 딱 두 편의 시가 쓰여 있었다. 하나는 남편에 관한 시였고 또 하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간 그녀의 아이에게 쓴 시였다. 실제로 이 시집은 복원될 당시 특히 두 번째 시의 마지막 구절로 인해 많은 시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는데, 시인은 될 수 없었을지언정 시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던 진명 역시도 이 마지막 구절에 압사당하고 만다. 그 후 3박 4일 만에 지구로 되돌아오는 화성 급행열차에서, 진명은 일기장에 그 구절을 꼼꼼하게 필사한다. 절박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결국 우리는 알게 되겠지만/해가 지는 동안에도 나는 끊임없이 물을 것이다/너는 나의 딸이었을까 아들이었을까’
 
 8.
 돌아오는 내내 진명은 아주 평온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함께 열차에 탑승한 승객 하나는 당시의 진명을 “데이모스의 바다와 같았다”고 표현했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저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죠. 겉보기엔 아주 평화로웠거든요. 그 자주 다니는 청년이랑 똑같은 시간에 앉아서 커피 마시고, 돌아와선 또 객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거대한 물고기가 그 속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진명은 흘러가는 우주가 있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밤새도록 소리 내어 천천히 시집을 읽었다. 차현이 빌려준 시집 세 권은 그렇게 진명의 입에서 말이 되고 소리가 되어 느릿느릿 쏟아졌다. 이따금 진명은 발가락을 오므리곤 작게 들썩이며 숨을 내쉬었지만 코끝의 시큰함이 가라앉으면 다시 시를 읽었다. 최진명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날이 있다면 이때였을 것이다. 진명은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말하지 않고 죽는 법을 배울 수 없다.’ 포보스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일기장을 넘기자 거기엔 진명이 지구에서 화성으로 날아가던 이주일 반 동안 필사한 문장들이 있었다. 진명은 그 중에서 그 언젠가 썼던 문장 하나를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절대, 마을에 내려가지 마시오. 강간, 절도, 도박, 구타, 살해, 실종의 위험이 있음.’ 진명은 거기서 ‘실종’을 지워냈다. 그래서 그것은 그녀에게 더는 아무런 위험도 되지 못 했다.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 진명은 캐리어를 꺼냈다. 그리곤 배차현의 객실을 찾아갔다. 차현은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라고 묻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시를 다 읽으셨나요?”
 진명은 그래서 웃었다.
 “네, 돌려주러 왔습니다.”
 진명은 시집 세 개를 차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차현 씨, 여기 맥주가 유명하대요.”
 차현이 무슨 소리냐는 듯 진명을 바라보았다. 진명은 차창 너머로 펼쳐진 끝없는 늦은 저녁의 하늘을, 그 아래의 판자촌 슬럼가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차현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진명은 웃을 기운이 없어 그냥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같이 맥주 마시지 않을래요.”
 차현이 거절하면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차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그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진명은 끝끝내 알지 못 했다.
 
 9.
 둘은 작은 포보스 정거장에 내려 바깥으로 나왔다. 선선한 공기에 바람이 불었다. 차현은 진명이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것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지만 따로 이유를 묻진 않았다. 진명은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둘 사이의 ‘틈’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여전하게 안온함을 느꼈다.
 바에 들어선 둘은 아무 자리에나 앉아 블랙 맥주를 주문했다. 진명은 카드를 내밀었지만 늙은 노인은 이곳은 카드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제가 낼게요.” 라며 차현이 지폐를 내밀었다. 맥주는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다.
 차현과 진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지구에 가면 뭘 할 거예요?” 차현이 침묵이 이어지던 도중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진명은 대답 대신 작게 웃기만 했다. 차현은 진명이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진명은 차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턱을 괴었다.
 “차현 씨, 과거형이네요.”
 “대게 그렇지 않나요.”
 “아니에요.”
 진명은 차현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번엔 웃지 않았다.
 “지금이 좋아요.”
 차현은 진명의 시선을 응시하다가 잔을 기울였다.
 “……그렇군요.”
 둘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술집에 앉아있었던 승객이 말하기를, 둘은 “너무나도 말을 아끼고 있는” 눈치였다고 한다. 차현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진명은 그 때 정말 그러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진명에겐 할 일이 있었고, 그리하여 이 모든 순간이 최후였다. 진명은 차현에게 무얼 해주면 좋을지를 생각했다. 이 스물네 살의 청년에게 무얼 말하면 좋을지를.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고민해도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차현은 혼자 맥주 한 병을 비웠고 이내 조금씩 휘청거리고 있었다. 졸음과 취기가 쏟아지는 눈을 깜빡이며 차현이 진명 앞에서 기울어졌다. 진명은 그의 이마가 테이블과 자꾸만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가 테이블에 엎드렸을 때, 진명은 차현이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 좋은 시는 찾으셨나요.”
 진명은 화성의 패스트푸드 점에서 차현과 했던 약속을 기억해냈다.
 “네.”
 진명은 대답하고 목이 메어 잠깐 숨을 삼키다가 다시 대답했다.
 “……네, 찾았어요.”
 “그렇군요…….”
 차현은 길고 나른한 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다. 진명은 그의 뒤통수를, 언젠가 시인이 되려고 했던 배차현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는데 거기엔, 그러니까 동그란 이상이 있었다. 여전히 모난 곳이 없는 뒤통수였다. 진명은 문득 부르고 싶어져 머뭇거렸고, 결국 조용히 시인의 이름을 불렀다.
 “차현아.”
 사방이 고요해진 것 같았다. 배차현이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진명은 다시 한 번 부를 수 있었다.
 “차현아.”
 “…….”
 진명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딸이었을까 아들이었을까.”
 차현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기에 진명은 마음 놓고 울음을 억누를 수 있었다. 손을 뻗은 진명은 머뭇거리다가 배차현의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위로 정돈해주었다. 차현이 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다. 얼굴 각도가 달라져서, 진명은 아주 가까이에서 차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손을 거둔 이후에도 그 얼굴을 아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가슴은 아프지 않았다.
 진명은 핸드백에서 여행 내내 가지고 있던 시집을 꺼냈다. 차현이 칠 년 전 빌려다 얼마 전 돌려주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이었다. 진명은 그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큰 도서관을 다 뒤져도 당신이 쓴 시가 없어요.”
 진명은 그 시집을 엎드린 차현 쪽으로 밀었다.
 “그래서 내가 찾은 시집은 이게 전부입니다.”
 허공으로 달리는 남자를 생각한다. 그 작은 공 하나를 쫓겠다고 우스꽝스러운 폼으로 공중에서 온몸을 비틀고 손을 뻗는 그 남자. 아무도 그를 비웃지 않는다. 허공의 마임이 격렬해질수록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날린다. 아무도 그가 쫓는 것을 'Let it be'라 부르지 않는다. 북적이는 관람객석에 앉아, 진명은 'Let it be'가 적용되지 않는 세상의 한 장면을 목격한다. 진명은 생각한다. ‘왜 내가 그 작은 공 하나를 쫓는다고 발버둥을 쳤을 때, 사람들은 돌을 던졌나.’ 하지만 진명은 동시에 알고 있다. 세상이 'Let it be' 하지 않을 땐, 삶 역시도 'Let it be' 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주가 도는 동안 화성으로 기차가 달린다. 아름다운 오로라를 아래에 두고 차를 몰며 타이가 숲을 지나치자. 눈을 감고 거대한 물고기를 떠올리면 빌딩 아래의 배차현이 펜을 꺾고 세상으로 걸어 들어간다. 진명은 교편을 내려놓고 비로소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배차현의 뒤를 따르는 일은 아니다. 진명에겐 따로 가야한다고 결심한 길이 있다. 마지막이다. 진명은 조금 울면서, 천천히 얼굴을 감쌌다.
 “차현 씨, 안녕히 계세요.”
 진명은 중얼거렸다.
 “나는 시를 쓰지 못 합니다. 쓰지 않고 말합니다. 사랑합니다.”
 모든 마음을 내려놓은 후에 진명은 잠든 차현을 거기 내버려 둔 채 캐리어를 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전해준 것은 술집에 앉아 있던 다른 승객이었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엔 차현 씨를 깨워달라고 하더군요. 그는 기차를 놓치면 안 되니까요.” 진명은 비틀거리며 걷다가 문득, 하이힐 굽 하나가 부러진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신발을 벗었다. 술집 아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그 아래는 죄다 슬럼가였다. 한참을 내려가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어쨌든 그 아래엔 뭔가 있었고 사람도 살고 있었다. 진명은 희미한 불빛이 일렁거리는 낡은 판자촌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걸었다. 등 뒤로 뿌우, 하고 열차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진명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열차가 출발을 예고하는 경적을 한 번 더 울리며 요란하게 종을 쳤다. 뿌우우, 하는 소리가 바람과 함께 들이닥쳤다. 진명은 열차에 올라탈 승객들을 상상했고, 얌전하게 개어놓은 자신의 개인 객실의 이부자리를 상상했고, 지구에 도착한 후 얼마나 지나서야 자신의 실종 처리가 이루어질 지를 상상했다. “진명아, 연락해!” 라고 외치던 전 남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진명은 그에게 손을 흔들지 않았다. 다녀온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열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진명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며 진명의 단발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아.” 하고 진명은 탄식했고 동시에 저 열차를 향해 달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 모든 충동이 한 사람으로 비롯되었던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제야 진명은 배차현에게 제대로 된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지 말 걸.” 이라며 진명은 중얼거렸다. 코끝이 시큰해졌으므로 진명은 조금 더 울었다. 후회가 찾아왔기에 더는 평화로울 수 없는 속이 절절 끓었다. 진명은 달리는 열차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고 발을 구르고 자신을 원망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진명은 손을 길게 뻗어 흔들어주었다. 그 열차 어딘가에 탄 배차현 씨를 위하여 진명은 손을 흔들었다. “어쩌면, 저것은 하늘의 노래일까요.” 진명은 멍하니 중얼거렸는데, 열차가 완벽히 떠나고 나서야 진명은 그게 그 언젠가 차현이 조수석에서 중얼거렸던 오로라의 시였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읊은 아주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최진명은 하이힐을 풀숲에 버리곤 맨발로 섰다. 캐리어를 끌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비틀거리는 진명의 뒷모습은 이따금 조금 들썩였지만 대체로 평온했다. 진명은 그렇게 자신이 선택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속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최진명 최후의 순간”은 그래서, 대체로 평온했다.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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