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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Stellar Circle «진부한 이야기»
1차/old 2019. 10. 30. 00:13

0.

공사장, 가난과 죽음, 향냄새, 기름 뜬 육개장과 차가운 수육, 사람들.
증오.
이것은 진부한 이야기다.

 

1.

남자는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매달려 있다가,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2.

간판이라도 빛나고 있는 건가. 분명 전기를 꺼달라고 했을 텐데. 차유진은 그 때, 고개를 드는 동안 고작 이런 생각들을 했다.

 

3.

“산 사람은 살아야죠.”
맞다,
지나간 일이다.

 

4.

사람들이 노란선 앞으로 몰려들었다. 차유진은 귀에 꽂은 이어폰을 뽑아냈다. 플랫폼으로 끊임없이 안내방송이 울렸다. 지하철이 들어왔다.

2호선은 멈추지 않는 노선이다. 종착역 없이 순환하는 기차는 끊임없이 사람들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실어 날랐다. 대학가와 번화가를 지날 때면 언제나 행인이 되는 승객보단 승객이 되는 행인들이 더 많았고, 걸핏하면 열차 안은 만원이었다. 차유진은 종종 제 자리를 지키지 못 하고 인파에 떠밀렸다. 문 앞, 취객이 앉은 노약자석 끄트머리, 간밤에 누군가 토한 흔적은 종종 차유진의 자리가 됐다. 탐탁찮은 장소에 머무는 일은 이제 거의 운명처럼 느껴졌다. 차유진은 그곳에서 종종 남은 노선을 세어보곤 했다. 다섯 정거장이 남았을 때도 있었고, 두 정거장이 남았을 때도 있었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목적지는 조금씩 달라졌다. 때론 2호선이 아니기도 했지만 대체로는 2호선이었다. 멈추지 않는 열차는 차유진의 청년 시절을 싣고 달려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처럼 보였다. 스물네 살이 된 차유진은 여전하게도 2호선을 타고 시청으로 향하고 있었으니.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건 아버지의 슬로건이었다. 짜장면, 짬뽕, 새우볶음밥과 깐풍기, 탕수육, 군만두를 지지고 볶고 튀기면서 두 아들을 키워낸 노년의 자부심 같은 소리였다. 그 말은 진부해서 종종 아버지 외의 다른 사람의 입에서도 튀어나왔다. 이를테면 선별급식 기초생활수급자에 포함되던 날 교무실에 유진을 앉혀둔 담임들의 입에서, 가정 사를 읊다말고 담배를 태우던 선배의 입에서, 저를 취직시켜준 물류창고 담당부장의 입에서. 가난은 부끄러운 게 아니니까 말이야. 그들은 힘내라는 듯 어깨를 툭툭 쳐내고, 입술을 씰룩이며 웃었다. 그게 몇 년쯤 반복되자 정말로 부끄럽지도 않게 됐다. ‘가난’과 ‘부끄러움’에선 언제나 지글거리는 고추기름냄새가 났다. 고등학교 졸업 후 잠시 세탁소에 취직했던 유진은 언젠가 자신의 입에서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는 말이 튀어나올지, 그렇다면 과연 거기선 기름 냄새가 날지, 아님 섬유유연제 수증기의 냄새가 날지 상상하곤 했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까지 유진의 집은 언제나 서울 근처를 맴돌았다. 수도권에서 벗어난 적은 없지만 서울에 입성해본 적도 없었다. 서울 집값은 올라갈 줄만 알지 떨어질 줄 몰랐다. 수도권 신도시 개발이 줄줄이 시작된 가운데 서울과 몇 분 거리라는, 근처에 역이 들어선다는, 대충 그런 조건의 땅덩어리들 가격도 마찬가지였다. 서울과 가깝다는 이유가 그들 몸값을 배로 불렸다. 유진의 가족은 세 번 이사했다. 파주, 동두천, 그리고 다시 파주. 신도시 개발에서 밀려난 주택단지와 빌라는 구석에 방치돼 서서히 부식했다. 발정 난 고양이들이 애옹애옹 울어대고, 술 취한 사내들이 아무렇게나 바지를 내리고 오줌을 지리는 곳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다세대 주택 근처에 올린 15층짜리 아파트에 이사했을 때, 유진은 중학교 삼학년이었고 그의 형은 스물 셋이었다. 학비를 벌겠다고 형은 물류창고에 들어갔고, 유진은 방학이면 거기 가서 소포와 박스를 날랐다. 저녁부터 새벽까지 컨베이어 밸트가 뱉어내는 소포를 트럭에 쌓는 일이었다. 고된 일이었기에 사람들은 자주 도망갔고, 유진은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할 때마다 한 달 오만 오천원치 휴대폰 요금을 떠올렸다. 하루 일당이 끝나면 사무실에서 수고했다고 충무김밥 팩을 나눠줬다. 그걸 우걱우걱 씹을 땐 벌써 막차 끊긴 새벽 2시였다. 집은 언제나 트럭 운전하는 부장이 데려다줬다. 형 차진한과 유진은 뒷좌석에 앉아 딱딱한 김밥을 쉴 새 없이 입에 욱여넣었다. 그렇게 집에 도착하면 대충 새벽 2시 20분이었다. 이부자리에 누우면 씻을 기운이 나지 않았다. 땀 냄새와 함께 몸이 고통으로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유진은 그게 남들보다 빨리 늙어가는 감각임을 알았다. 어둠 속에서 종종 진한이 속삭였다.

“너무 오래 가난했더니 가난이 뭔지도 잘 모르겠다.”

그 무렵엔 그게 차진한의 슬로건이었다.

서울 곳곳에 구멍이 뻥 뚫리고 사람들이 죽은 날에도 두 형제는 컨테이너 밸트 앞에 서서 박스를 나르고 있었다. 차유진은 서울대재난을 라디오로 기억한다. 한산한 새벽 도로를 달리는 트럭 안에서 둘은 충무김밥을 먹다 말고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담당 부장이 지나가는 말처럼 ‘서울에 무슨 테러가 있었다더라.’했다.

“얼마나 죽었는데요?”

차유진은 그렇게 물었고,

“얼마나 무너졌는데요?”

차진한은 그렇게 물었다.

그 때의 간극이 기묘해서, 차유진은 한참 뒤에도 종종 그 순간을 떠올리곤 한다. 여하튼 그 때 부장은 “글쎄다, 어쨌든 많이 죽고 무너졌겠지.”라는 모호한 대답을 내놓았고, 둘을 집 앞에 내려준 뒤 내일 보자며 손을 흔들었다. 컨테이너 밸트는 사람이 죽었든 건물이 무너졌든 계속해서 소포를 뱉어냈기 때문에 차유진은 얼마 뒤 서울대재난이라던가, 사람의 죽음이라던가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하지만 차진한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인지 한 달 뒤 불쑥 일을 그만뒀다. 그리곤 집을 나갔다. 남겨진 유진은 진한 없는 물류창고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철가방을 들었다. 유진의 동네엔 아파트보다 주택이 많았고, 주택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아버지의 짬뽕, 짜장면이 불지 않게 뛰어다니면서 유진은 주말과 여름방학을 보냈다. 일은 계속됐고 돈은 다달이 부족했다. 성적을 용케 유지한 게 놀라울 정도였다. “넌 영리한 애니까. 그래, 대학은 가야지. 좋은 곳으로 가야지.” 세 달 만에 연락한 진한은 유진의 학기 성적을 전해 듣곤 그 소리를 했다. 그 무렵의 진한은 어디서 벌었는지도 모를 돈을 유진의 통장으로 꽂아주며 떵떵거리길 좋아했다. 얼핏 듣기론 대재난 이후 대대적으로 진행된 보수 공사판에서 구르고 있다고 했지만 진한은 유진에게 아무것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것은 그저 추측이 됐다.

어쨌든 살아간다는 것은 지난한 일임과 동시에 어떻게든 계속되는 일이다. 아파트에 이사하고부터 아버지의 짜장면 집이 보다 잘 됐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대상자에서 간신히 벗어난 그는, 국가가 마련한 안전망을 벗어난 까닭에 별다른 지원을 받지 못 하던 참이었다. 그게 꼭 이 세상엔 너보다 가난한 사람은 얼마든지 있다고, 그러니 징징거리지 말라는 세상의 경고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유진은 진한이 달마다 보내주는 돈으로 대부분의 것을 유지했다. 영어 학원을 등록했고 계속해서 공부했다. 이제 진한의 전화는 생명 줄처럼 느껴졌다. 진한의 떵떵거림이 계속될수록 차유진은 비굴하지 않은 어투로도 넌지시 부탁하는 법을 배웠고, 그럼에도 차진한은 유진이 제게 비굴해지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유지하는 아파트에서 차진한이 유지하는 학원을 다니는 것은 대체로 비굴함과 비굴하지 않음의 줄다리기였다. 차유진은 살아가는 법이란 과연 비굴함과 비굴하지 않음의 사이, 그러니까 -함과 -하지 않음의 사이를 절묘하게 유지하는 일이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동안 수험이 다가왔다. 차유진은 뜻하지 않은 성인이 되고 말았다. 높게 쓴 대학 두 군데가 붙었고 성적에 맞춰 쓴 곳 한 군데가 붙었다. 차유진은 전액 장학금을 주는 곳으로 서류를 밀어 넣었다. 그 무렵엔 차진한의 전화도 드문드문했다. 그가 대입 축하와 함께 마지막으로 유진에게 마련해준 것은 강서구에 위치한 작은 자취방이었다. 연락은 그것을 마지막으로 뚝 끊어졌다.

서울에 입성한 차유진과 2호선의 굴레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었다. 대학 입학을 기다리던 유진은 교통비를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다. 단기적이고 보수가 센 아르바이트, 이를테면 높은 빌딩에 매달려서 창문을 닦거나 공사판을 구르는 일 따위들, 그러니까 죽음이 도처에 있다는 이유로 시급이 배로 뛰는 일들 말이다. 차유진에게 그것들은 컨테이너 밸트의 짐을 나르는 일과 비슷하거나, 혹은 더 쉽게 느껴지곤 했는데, 도처에 있는 죽음만 무시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을 잊으면 63층이고 15층이고 매달릴 수 있었고 가느다란 판자를 밟고서도 마르지 않은 시멘트 건물 사이사이를 뛰어다닐 수 있었다. 와중에도 아버지와의 연락은 지지부진한 여우비처럼 이어졌다. 잘 지내고 있니? 서울은 좋고? 진한이랑은 연락 되니? 차유진은 모든 것에 no를 붙이고 싶었고 동시에 모든 것에 yes를 붙이고 싶었다. 그 진부한 질문마다 어떤 대답을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버지의 죽음 직전, 그러니까 차유진의 스무 살은 안개에 감싸인 것처럼 비슷하고도 흐릿한 풍경의 반복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가장 강렬한 기억은 철과 빛과 피와 헐떡거림과 희수의 얼굴뿐이었다. 나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기억하는 것은 그것이면 충분했다.

유진의 아버지가 서울에 올라오기로 결심한 것은 차유진이 대학에 입학하기 꼭 일주일이 남은 무렵이었다. 입춘이 지났다지만 날씨는 겨울이나 마찬가지였고, 차유진은 공사판에서 장갑을 낀 채 조금씩 입김을 뱉어내고 있었다. 번화가에서 진행되는 건물 보수 작업이었다. 아니다, 아직 지어지기 전 건물이었던 것 같다. 아니아니, 사실 잘 모르겠다. 기억나지 않는다. 근무 도중 유진은 휴대폰 진동을 느꼈고, 줄에 매달린 채로 전화를 받았다. 너 지금 일하는 곳이 어디 역 근처랬니? 차유진이 늘 바쁘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아들의 얼굴을 보고 싶었고, 진한이 집을 떠난 이후론 특히 유진에게 더욱 지극정성이었다. 이것저것 챙겨왔다. 지금 근처니까 잠깐만 보자. 아버지는 그렇게 말했다. 차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하며 줄을 잡아당겼다. 오층 높이에 매달려 있던 몸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왔다. 고개를 들면 역이 보였고, 아버지는 인파에 섞여 차유진이 매달린 건물을 향해 걷고 있을 것이었다.

불길한 느낌을 받은 건 그 때였다. 머리 위로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소름이 끼쳤다. 무언가 잘못될 것임을 직감한 자들이 으레 그러하듯이. 차유진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보았다. 자신의 머리통 위에 매달려 있던 남자가 갑자기 몸을 웅크리는 것을. 남자는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고통에 몸부림치며 매달려 있다가, 이내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직감하는 순간부터 이미 한참 늦은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죽음 같은.

그 때 차유진이 예감한 것은 죽음이었다.

 

5.

간판이라도 빛나고 있는 건가. 분명 전기를 꺼달라고 했을 텐데.
아, 고작 그런 생각들이라니.

 

6.

행인들은 3층 높이에서 떨어진 남자를 둘러싸고 모여들었다. 차유진은 헐떡이며 줄을 잡고 매달려 있었다. 누군가 전화로 앰뷸런스를 불렀다. 남자는 미동도 없이 누워 있었다. 죽었어? 떨어졌대? 저기서? 공사하다가? 사람들은 저마다 공포와 놀라움으로 떠들어댔고 남자는 여전히 누워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깨진 머리통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그는 비명을 질렀다. 머리를 감싸 쥐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저를 구경거리 보듯 하는 행인들에게 분노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람이 떨어졌는데 휴대폰을 들이대는 미친 짓거리를 용서하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는 미쳐서 날뛰기 시작했다. 공사판엔 손에 쥘 수 있는 많은 흉기가 있었고, 그는 보도에 깔다 만 블록을 들었다. 차유진은 공중에 매달린 채로 남자가 행인 한 명을 때려죽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났다. 남자는 멈추지 않고 인파를 쫓았다. 그가 다음으로 잡은 것은 인파에 떠밀려 주저앉은 늙은 남자였다.

고백하자면 차유진은 처음엔 그 사람이 제 아버지인 줄 몰랐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건 요컨대 모든 걸 작아 보이게 만들었으니까. 보도블록에 얼굴과 어깨를 가격 당한 늙은 남자는 유진의 아버지라기엔 너무 왜소했고, 쓰러질 때조차 목소리 한 번 내지 못 했다. 하지만 차유진은 문득, 저 남자가 입은 파카가 너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얼굴을 떠올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유진은 다급하게 바닥으로 내려오다 말고 헛디뎌 떨어졌다.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말고 벌떡 일어난 유진은 흙먼지를 뒤집어 쓴 채 쓰러진 아버지를 향해 내달렸다. 빛을 뿜으며 추락한 남자는 이제 차유진의 아버지를 넘어 다른 누군가를 쫓아 도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비명을 지르면서도 계속해서 이 소란으로 몰려들어 기웃거리기를 반복했다. 운전자들이 클락션을 때려댔다. 도로가 마비되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차유진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피를 흘리고 있는 아버지를 흔들었다.

“아버지…….”

목소리가 덜덜 떨리고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 들리세요?”

아버지는 차유진의 손 안에서 힘없이 늘어졌다. 이명이 돌았다. 세상의 소음은 하나의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유진의 귀를 후벼 파기 시작했다. 차유진은 얼굴을 찡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세상은 여전히 빙글빙글 돌고 있었고 차는 빵빵거렸다. 행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가운데 미쳐 날뛰기 시작한 살인마는 이제 아무나 잡히는 데로 때려죽일 것처럼 굴고 있었다.

차유진은 누군가 인파를 뚫고 오는 것을 보았다. 차유진 또래의 청년이었다. 그는 멍하니 앉아 있는 유진과 쓰러진 유진의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곤 유진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의료인, 응급, 이라는 단어가 드문드문 들리다 말았다. 그의 목소리는 물속에서 듣는 가사처럼 잘 들리지 않고 먹먹하게 울렸다. 차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대답 대신 계속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무슨 말을 하시는지 모르겠어요. 두 번 정도 그렇게 중얼거리자, 남자는 곧 유진에게 말을 거는 것을 그만두었다. 그리곤 엎드린 채 유진의 아버지 쪽으로 붙었다.

차유진은 제 아버지를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이 낯설고 낯선 청년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세상은 끔찍할 만큼 조용했는데 바람이 계속 불어서 둘의 머리카락을 자꾸만 흩날리게 했다. 차유진은 모든 게 멈춰버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은 멈춰야 했다. 하지만 남자는 멈추지 않고 쓰러진 차유진의 아버지를 붙잡아 가슴을 눌러댔다. 아버지는 경련하지도 않았고 헐떡이거나 비명을 지르지도 않았다. 차유진은 갑자기 분노를 느꼈다. 멈추지 않는 것들에 대한 분노였다. 차유진은 고개를 들어 거리를 내달리는 미친 남자를 노려보았다. 죽여 버려야지. 찢어 죽여야지. 터뜨려 죽여야지. 으스러뜨려 죽여야지. 그럼 멈추겠지. 그럼 바람도 멈추고 이명도 멈추고 아버지의 죽음도 멈출 지도 모른다.

하지만 차유진이 거리를 향해 내달리기도 전에 누군가 차유진을 단단히 붙잡았다. 차유진은 몸부림치며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애썼다. 중얼거리면서 애원했다. 놔주세요. 저희 아버지나 봐주세요. 놔주세요. 가서 죽여야 해요. 제가 가서 다 멈춰야 해요. 하지만 청년은 차유진을 놔주지 않았다. 구급차가 도착하고 미친 남자가 도로를 내달리다 말고 사라지기 전까지, 차유진의 모든 증오와 분노와 무력함은 제지되었다. 그것이 종국엔 차유진을 살렸음을 알았지만, 어쨌든 구급차에 타는 도중까지도 유진은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었다고, 모든 게 끝난 뒤 누군가가 유진에게 말해주었다.

 

7.

양희수는 그 날 차유진의 아버지를 살리진 못 했지만, 차유진을 살릴 수는 있었다.

고마워해야 하는 일일까?

훗날 차유진은 계속해서 그 생각을 곱씹어야만 했다.

하지만 종국엔 빚을 진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차유진은 죽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으니까.

잘된 일이다.

 

8.

장례식은 빠르고 조촐하게 끝났고, 그 언젠가 사람이 죽고 건물이 무너져도 계속 움직이던 컨테이너 밸트처럼 차유진의 삶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뒤 유진은 희수를 만날 기회가 더 있었지만 희수에게 많은 걸 묻지는 못 했다. 훗날 양희수가 결국 차유진에게 내놓은 대답이란 이런 것이었다 : “산 사람은 살아가야만 하는 것.” 차유진이 그 말에 대체 무어라 대답할 수 있었을까? 어떤 대답이었던 충분치는 못 했을 것이다. 그 날 구급차에 앉아 아버지의 사망 선고를 듣던 유진과 희수에겐 끊어낼 수 없는 감정의 고리가 생겼고, 그건 돌이킬 수 없었다. 차유진은 그걸 죄책감이라 생각했다. 양희수가 그걸 어떻게 생각할 진 모르겠지만 적어도 유진은 그것을 죄책감이라고 생각하려 애썼다. 그리고 그걸 잊지 않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그 사건을 곱씹었다. 트라우마였다.

 

9.

차유진이 가진 모든 불행은 진부했고, 그런데도 계속 대학을 다니고 일을 찾아야 했다는 점에서 모든 서사는 비극적이고도 희극적이었다. 아버지의 죽음은 너무 빠르게 ‘지난 일’이 되어버렸는데, 차유진이 2학기를 마치고 방학을 맞이했을 즈음엔 모든 게 그럭저럭 무뎌져 있었다. 그 무렵 차진한은 국회의원이 됐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진한반점’을 정리하느라 바빴던 차유진은 그에게 따로 연락하지 않았다. TV 지역방송엔 종종 진한이 나왔다. 가난이라곤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야망에 찬 얼굴이었다. 자신과는 동떨어진 세계에 성공적으로 안착한 자가 지을 수 있는 표정이었달까. 여하튼 그래서 마법부니 뭐니 하며 나타난 두 사람이 차유진에게 몇 가지 제안을 늘어놓았을 때, 차유진은 순간 ‘왜 형이 아닌 내게 왔을까’를 생각해야만 했다.

마법이라니.

차유진과는 너무 동떨어진 세계였던 것이다.

확실히,

그런 건 차진한하고 더 어울렸다.

 

10.

하지만 차진한은 아버지의 죽음을 모른다. 빛나는 남자를 본 적도 없었다. 가난을 벗어나 새 궤도에 올라 있었고, 죄책감을 몰랐고, 죽음에 대해 직감해 본 적도 없었고, 그리고…
다시 말하자면 마법 같은 건 필요도 없는 지점에서…….
아니, 어쨌든
지나간 일이다.

 

11.

장례식이 끝났던 봄날엔 벚꽃이 우수수 떨어졌고, 눈을 감았다 뜨니 겨울이었고, 마법에 대해 들었고 선택지를 받았다. 차유진이 시청을 찾아가기로 한 데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충분한 생활 비-하나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그 날 밤 차유진이 끊임없이 빛나다 말고 미쳐버린 남자와 깨진 머리통들, 피와 헐떡거림과 철의 냄새를 떠올리는 것은 필연적인 일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국엔 그런 것들이 그를 시청으로 떠미는 데 힘을 보탰다. 3년 후 그곳에서 다시 양희수를 마주칠 거란 것을 알았더래도 차유진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그건 변하지 않는다. 아버지를 살려내지 못 했다고 증오하기엔 희수가 너무 가엾다. 하지만 동시에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에 그 증오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희수만큼은 기억해야 한다. 그 날 아버지가 죽었다는 것을. 가능하면 제 얼굴을 보며 오래 곱씹어주길 바랐다. 그러니까 성륜에 희수가 들어올 것을 알았더라 하여도 차유진은 변함없이 마법이라던가, 죽음이라던가 그딴 것들을 선택할 수밖엔 없었을 것이다. 결국은 다 돈 때문이라고 변명하면서. 죄책감 같은 건 계속 지고 다니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죄책감의 양면이 증오라는 것을 굳이 부정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삶이란 그런 식으로 지지부진 이어져왔던 것이니까.

그래서 차유진은 여전히 2호선을 타고 시청으로 향한다. 말했지만 그리하여 죄책감으로부터 시작된 이것은 진부한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

이것은 진부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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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심문실» 비밀글
1차/old 2019. 10. 23. 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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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철학의 기회»
1차/old 2019. 10. 23. 01:22

1.

클라리스 대위가 달리기 시작했을 때, 아나렉샤는 총을 뽑았다.

디킨스는 3km가량 곧게 뻗은 중앙복도로 유명한 함선이다. 전 대원의 공평한 노동으로 유지된 희고 뽀득뽀득한 바닥이 피로 흥건하게 젖은 상황을 고려할 때, 클라리스 대위는 제법 잘 뛰고 있었다. 그녀가 실수한 게 있다면 도망칠 경로를 고르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적어도 3km를 뛰기 전까지는 방향을 바꾸기가 불가능했다. 등 뒤를 방어할 수단 역시 전무했다. 어쩌면 클라리스 대위는 불과 30분 전까지 자신과 차를 마시던 어린 소위가 자신을 쏘는 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그건 타당하다. 그 순간까지도 아나렉샤는 사람을 죽여본 적 없었고 그것을 기대하지도 않았다.

제라스가 아나렉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경직된 어깨를 부드럽게 주무르던 손길이 곧 복종의 요구로 이어졌다. 억센 손아귀 때문에 아나렉샤는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느세파 소위.”

제라스가 부드럽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쏴.”

멀어지는 클라리스 대위의 등으로 총구를 겨누며, 아나렉샤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 상상을 했다.


2.

가르강튀아는 아름다운 아이보리색 몸체를 지닌 초대형 함선이다. 아나렉샤가 루이스와 그곳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감찰 시즌을 맞아 몸체가 평소의 절반으로 줄어들어 있었다. 두 사람이 셔틀에서 목격한 건 8대의 소형 감찰선과 2대의 중형 감찰선으로 몸을 분리하고 남은 마더쉽mothership형태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캄캄한 우주 한가운데에 우뚝 선 가르강튀아의 아우라는 두 사람에게 압도적인 인상을 남겼다. 개복하고 나온 아나렉샤는 제복 차림의 루이스를 쿡 찌르며 웃었다.

“잘 어울린다.”

“싸샤 너도야.”

루이스는 쑥스러워하다 긴장된다는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함선이 너무 거대해 도킹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셔틀은 20여분도 채 걸리지 않아 내부로 들어왔다. 루이스는 거의 넋을 빼놓고 있었다. 내리기 전 아나렉샤는 루이스를 툭 치며 어떻게든 인사를 전달하려 애썼지만 오히려 빳빳하게 굳은 그 애의 어깨 때문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루이스!”

“…응, 싸샤.”

“우리 지금 가르강튀아에 있어.”

“응. 맞아.”

셔틀은 함선 내부에 위치한 셔틀 정거장까지 족히 5분은 날고 있었다. 레일의 끝이 까마득해 이대로 영원히 함선 내부를 떠돌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리자, 루이스가 반 박자 늦게 아나렉샤를 마주보았다.

“평소에는 이것보다 더 크대.”

“그렇다더라.”

“이름 뜻에 걸맞지 않니?”

“그래.”

루이스가 작게 읊조렸다.

“‘가장 멀리 보는 눈’.”

셔틀에서 내리자마자 두 사람은 반대 방향으로 쪼개졌다. 아나렉샤는 이따 의무실에서 보자고 다급하게 다음을 기약했지만, 실제 아나렉샤가 그곳에 내려갈 시간을 얻기까지 족히 한 달 반이 걸렸다.

아나렉샤를 데리러 온 장교는 무뚝뚝한 여성으로 자신을 ICOTS 출신이라고 소개했다. 먼저 물어보기도 전에 그녀가 딱 잘라 일갈했다.

“ACOTS 출신은 네가 유일해.”

제2 헌병단은 아나렉샤를 제외하고 ICOTS 출신의 장교로 꾸려져있었다. 그녀의 상관이 될 부함장 유글라스 제라스는 170대 후반의 남성으로, 깡마른 인상이었지만 말투가 유들유들하고 손이 매웠다. 첫날 아나렉샤는 헌병단의 기본수칙과 생활, 개인실 규정과 함선 내부 지도를 안내받았고, 충분한 적응기간 없이 곧장 둘째 날부터 본격적인 실제 업무에 들어갔다. 제라스의 손이 맵다는 것을 알게 된 건 다섯째 날 200여개에 달하는 감찰 데이터를 파악하다 한순간 더듬거렸을 때였다. 그 자신이 실수했음을 인정하고 시정하기 직전 제라스가 기다렸다는 듯 아나렉샤의 따귀를 후려갈겼다. 휘청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간신히 꼿꼿하게 선 아나렉샤는 순간적으로 표정을 관리하지 못 하고 딱딱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공포보다 분노가 앞섰다. 단 한 번도 이런 식으로 취급받아본 적 없었기 때문이었다.

복종 이전의 반발심을 읽어낸 제라스가 말없이 반대쪽 뺨을 후려갈기자, 아나렉샤의 얼굴이 충격으로 하얗게 물들다 말고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제야 제라스는 손을 내렸다.

그는 사무적이면서도 묘하게 부드러운 어투로 아나렉샤가 누락한 감찰 데이터를 읊어주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금의 폭력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위해 행사되었는지는 결코 언급하지 않았고, 그 침묵은 아나렉샤가 표정을 숨기지 않는 한 지속될 폭력을 암시하고 있었다. 가르강튀아의 헌병대가 가진 특유의 엄격하고 수직적인 분위기가 무엇에서 기인하는지 체감한 순간이었다. 아나렉샤는 둔했지만 멍청하지는 않았다. 이곳에서 버티는 법을 배워야할 때였다. 다만 적응기간이 너무 길지만은 않기를 바랐다. 꺾이지 않을 자신은 없었다. 


3.

[ 가르강튀아는 너무 커서 셔틀이 내부 정거장에 도착하는 데만 10분이 족히 걸렸어. 내리자마자 제2 헌병단으로 배치 받았는데, 당연하지만 내가 제일 막내야. ACOTS 출신은 한 명도 없더라. 찾아보는 중인데 여기서 ACOTS 출신은 30%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아. 역사가 오래된 함선이라 그런 거겠지? ]

[ 음. 내 사령관은 가르강튀아 부함장인데, 생각보다 좀 부실해보인달까. 대련으로 이길 수 있을 지도. (농담이야) 제1 헌병단의 사령관은 함장인데, 아직 만나보질 않았어. 감찰 시즌이라 모두가 바쁘대. 내일부터 당장 업무 돌입이야. 정신 없겠지. 그래도 역시 기대된달까. ]

[ 나도 알아. 잘 할 수 있을 거야. ]

[ 응. 고마워. ]


[ (제복을 입고 찍은 셀카) ]

[ 유리~ 약속 지켰어. 부끄러우니까 이 사진 너만 봐! ]

[ 인나니아그램? 알겠어. 이따 자기 전에 꼭 확인할게. ]


[ 응, 요나스. 도착했어. 네 시범근무지 변한 거 있어? ]

[ 글쎄… 내 시범근무지는 변한 게 없을 것 같아. 다시 갈 일이 있으려나 모르겠다. ]

[ 응, 우리 오늘도 85%. ]


[ 지안카를라, 아직 셔틀 안이야? ]

[ 보습 크림 잊지 마. 난 도착해서 내일부터 업무야. ]

[ 맞다, 프로필 사진 바꾼 거 너무 예뻐. 넌 역시 장교복도 잘 어울리네. ]


[ 코스챠, 자고 있구나? 이상하다… 이 시간에는 항상 온라인이었는데. ]

[ 로는 어때? 가르강튀아는 너무 커. 아마 로보다 더 클 거야. ]

[ 너 벌써 나 보고 싶지? ]


[ 그나저나 일라이 넌 아직 아이오워스? ]

[ 장담컨대 네 사진을 보여주면 이틀도 채 되지 않아 넌 가르강튀아의 유명 인사가 될 거야. ]

[ 팔찌 당연히 차고 있지! 바보구나. ]


4.

초반에 아나렉샤는 감찰선들이 마더쉽으로 돌아오는 즉시 데이터를 받아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했다. AI는 아나렉샤를 도와주지 않았다. 교육의 과정이었다. 본래 AI가 맡아서 해야 할 일을 떠맡은 아나렉샤는 한동안 힘겨워하다가, 어느 순간 매일 수백 개의 데이터와 마주하는 일에 익숙해졌다. ACOTS에서 쌓은 지식 중에서 가장 자주, 유용하게 사용된 것은 군법이었다. 눈을 감고도 읊을 수 있었다. 틀릴 때마다 제라스에게 뺨을 얻어맞았지만 자주 일어난 일은 아니었다.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전 우주에 뿔뿔이 흩어진 함선과 나니아를 감찰하는 가르강튀아의 특성상 대원들은 땅에 발붙일 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나렉샤는 차츰 자신을 잡아끄는 행성의 중력과 피부에 와 닿는 날씨의 감각을 잊어갔다. 근무 시간이 끝나면 곧장 개인실에 엎어져 쪽잠을 자고, 어떻게든 한 시간을 남기고 일어나 동기들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메신저나 SNS를 돌다보면 그들이 여전히 우주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동기들은 여전히 그녀에게 애정과 신뢰를 보여주었다. 그러므로 아나렉샤는 그럭저럭 버텼고, 익숙해지기 시작할 무렵에는 꽤 괜찮게 지내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게 됐다.

한 달 반 만에 데이터 처리반 신세에서 벗어난 아나렉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의무실로 내려가 루이스를 만나는 것이었다. 얼굴을 보는 눈물이 핑 돌았다. 꽉 끌어안는 아나렉샤의 등을 두들기며 루이스가 머쓱하게 중얼거렸다.

“싸샤, 반쪽이 됐구나.”

아나렉샤는 웃음을 터뜨렸다.

“내일부터는 더 힘들어진대.”

“들었어. 감찰선 탄다며?”

“응. 돌아오자마자 보러올게.”

“몸 조심해.”

“너도.”

다음 날 아나렉샤는 중형 감찰선에 올랐다. 마더쉽과 분리된 감찰선은 서쪽 은하계를 돌며 총 12대의 함선과 5개의 나니아를 순차적으로 방문했다. 이때 아나렉샤는 가르강튀아 헌병대 완장을 받았다. 일원으로 인정받은 기분은 들지 않았는데, 아무도 그녀에게 축하한다고 인사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제2 헌병대는 아나렉샤를 어려워하거나 거리를 두거나 대놓고 경멸했다. 출신에 의한 파벌이 아나렉샤의 인간관계를 극단적으로 좁혀 놓았다. 꼭 가든 때로 돌아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나렉샤는 자신과 거리를 두고 걷는 헌병대원들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5.

[ 가르강튀아 근무에서 내가 예상하지 못 한 게 있다면, 설령 동기들이 근무하는 함선에 방문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서로 만날 시간이 전혀 없다는 거야. 난 주로 마더쉽에 남거나 감찰선을 지키고 있어. 막내라서 그런가 봐. 그런데도 바쁘고… 바빠서 지루한 지는 잘 모르겠다. 피곤해죽겠어. 잘 지내고 있는 거지? ]

[ 아니야, 가끔 나니아에 들릴 때도 있어. 대신 내릴 틈이 없다는 거지. 바로 주둔함선에 도킹해서 장교를 잡으러 가거든! 잡은 뒤에는 관광을 즐길 새도 없이 바로 떠나고 말이야. 음, 그래. 나 아직 장교들 잡아본 적 없어. 그래도 언젠가 하게 될 테고, 그럼 넌 더 조심해야 할 걸. 내 손에 붙잡히면 꽤 아플 거야. ]

[ 나, 애들이 보내주는 풍경들 잘 보고 있어. 바다 궁금하다. 제대로 가본 적이 없어서. 우리 함선은 정원도 없거든. 삭막함의 극치라고나 할까. 나 슬슬 초록색이 뭔지 잊어버릴 것 같아. (농담이야) ]


[ 어째 불공평하네. 일라이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데 나랑 정반대의 생활을 하고 있달까. ]

[ 아, 느세파에 들렀어? 어떤 곳이야? 정작 나는 느세파란 이름을 달고 있는데도 그곳을 가본 적이 없어. 가든 안에서만 지냈으니까… 정말로 거기 숲은 전부 열대우림? 얼마나 더워? 비가 오기도 하니? 가든의 정원처럼… 그곳의 잎사귀들은 종종 사람들을 가릴 만큼 거대하게 자라고는 하니? ]


[ 말도 마, 지안카를라. 내 상관도 진짜 완전 짜증남. 어제 내 머리 벽에 박았음. 이젠 하다하다 사람을 벽에 처박는다니까. ]

[ ㅋㅋㅋ 아 그러니까. 진심 XXX XXXX XXX 싶다… 앗 농담. ]

[ 아니 다치진 않았지. 나 딴딴한 거 알잖아~… 당연히 기분은 완전 구리고. ] 

[ 너도 고생이구나. 그래도 상관에게 대놓고 대들고, 이러는 거 아니지? 그냥, 걱정되네. ]

[ 그럼 됐어! ]


[ 키아라, 이번 추천 차트도 고마워. 잘 들어볼게. 사실 나 요즘 바빠서 음악 들을 시간이 없어… 그래도 이주일 안으로 들어보려고 노력할게. 지금 하나 들어보는 중인데 어째 보내주는 곡들이 점점 가사가 줄어드는 것 같네. ]

[ 응, 그 영화 봤어? 재밌지. 어쩔 도리 없이 거대한 괴수가 나오는 이야기들 왜 이렇게 재밌는 걸까 모르겠어. 영화 안 본 지 너무 오래됐네. 이제 <딥투스> 내용이 까마득해. ]

[ 방금 거 당연히 농담. ]


[ 응, 아담. 오랜만이네. ]

[ (인형 사진) ]

[ 소개할게. 내 개인실 상전이야. ]

[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그럴 거라고 생각해. 너라면. ]


[ 얀, 네 청소가 그리워. ]

[ 보습 오일 잘 바르고 있지? ]

[ 아. 아담에게 이거 묻는 거 잊었다. ]

[ 응, 걔도 줬거든. 걘 보습 크림. ]


[ 코스챠, 많이 바빠? ]


6.

근무 세 달 째에 아나렉샤는 마더쉽으로 돌아갔다. 제라스의 호출이 있었다. 함선 매큐언으로부터 내부고발이 들어왔다는 전언 때문이었다. 아나렉샤는 돌아오자마자 의무실에 들리겠다는 루이스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 했다. 출발 준비를 마친 가르강튀아가 근 몇 주 만에 목적지를 얻어 움직이기 시작하자, 창밖에 단지 고여 있던 어둠이 일순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아나렉샤는 흐르는 우주 공간을 응시하며 문득 자신이 처음으로 군형법에 입각한 범죄자를 처분하는 자리에 동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수하지 않기 위해 매큐언에 도착하기 전까지 아나렉샤는 매뉴얼을 수십 번은 되뇌었다. 첫째, 선언한다. 둘째, 경고한다. 셋째, 연행한다. 군형법 제 1장 1조, 반란의 죄, 작당하여 병기를 휴대하고 반란을 일으킨 사람은 다음 각 호의 구분에 따라 처벌한다….

매큐언은 나니아 솔 대기권에 주둔한 순양함으로 현재는 주둔함선으로 쓰이고 있었다. 최근 대대적인 인원교체가 이뤄지며 장교 여럿이 대위 직에 올랐는데, 내부 고발자가 인원 교체 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다고 가르강튀아 직통 메시지로 진술한 것이다. 가르강튀아는 솔 근방에 도착한 후에야 매큐언과 통신했다. 처분을 예정한 감찰은 예고 없이 이루어졌다. 함선 매큐언의 대원들은 아나렉샤를 포함한 제2 헌병단을 보고 표정을 굳혔다. 전 우주를 통틀어 가장 환영받지 않는 함선이 있다면 가르강튀아일 거라고 아나렉샤는 생각했다. 그 분노, 공포, 긴장과 경멸… 환영받을 수 없는 위치에서 앞으로 영영 우주를 떠돌아다녀야만 하는 거라고. 그게 어떤 의미인지 곱씹고 싶지 않았다. 아나렉샤는 익숙하게 사고를 통제하고 의도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가르강튀아의 제2 헌병단은 내부 고발자가 지목한 세 명의 대위와 관련된 모든 것을 털었다. 그 과정에서 나니아 솔의 특산물 유통과정에서 빼돌린 자금의 규모와 세탁 정황이 밝혀졌으나, 보직과 관련된 뇌물수수 혐의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감찰 대상은 내부 고발자로 이동했다. 헌병단은 AI 매큐언의 감시 데이터를 통해 혼자 대위 직에 오르지 못 한 내부 고발자의 사적 불만과 복수심을 오로지 정황으로 짚어냈다. 처벌 대상은 전원으로 바뀌었고 아나렉샤는 제라스가 손가락 하나로 네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을 한 발짝 뒤에서 바라보았다.

제라스는 헌병을 끌고 함선 중앙 복도로 향했다. 내부 고발자 소위와 대위 셋이 간격을 두고 뻣뻣하게 서서 제라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턱을 치켜들고 걷던 제라스는 네 사람 앞에서 돌연 태도를 바꾸고 곤봉을 빼들었다. 아나렉샤가 가르강튀아에서 예상하지 못 한 일은 바로 다음 순간 일어났다. 제라스가 내부 고발자를 향해 곤봉을 휘둘렀다. 비명도 없이 소위가 발 아래로 고꾸라졌다.

제라스가 조용히 읊었다.

“가르강튀아를 사적 복수에 동원하지 않을 것.”

형식적이고 분노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군인은 제국의 봉사자인 동시에 제국민으로서 특별한 보호와 혜택을 받는다. 군형법에는 총살이 명시되어 있었지만 실제 범죄자들은 연행되어 재판을 받고 수감되는 일이 훨씬 잦았다. 고립된 우주선에서 벌어지는 사건사고를 제외하고서라도… 어쨌든 인간을 인간으로, 인간으로서 통제하기 위해 존재하는 법이라고 아나렉샤가 내심 믿어온 것들이 분명 있었다. 폭력을 예상하지 못할 만큼 순진하게 자라온 건 아니었으나 그것을 어떻게 다루고 사용하는지에 따른 견해는 극명하게 달랐다. 같은 제국민에게 행사된다는 점에서 그 충격은 두 배로 다가왔다.

무자비하고 이유 없는 폭력이 15분은 더 지속됐다. 곤봉이 사람을 때릴 때마다 소리가 바뀌었다. 비명도 눈물도 없이 한 사람이 곤죽이 되었다. 그건 필요한 처벌도 아니었고, 매뉴얼에도 없었다. 달리 그 광경을 납득시켜줄 그 어떠한 이유도 제공받지 못 한 채로 아나렉샤는 한 사람의 얼굴이 주저앉는 광경에 여과 없이 노출되었다. 제2 헌병단원들이 익숙한 듯 미동도 없이 뒷짐을 지고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나렉샤는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필사의 힘을 다해야했다. 그러나 얼굴만큼은 숨길 수 없었다. 예전부터 그것만큼은.

제라스가 곤봉에서 피를 털어내다 말고 그 얼굴을 봤다.

그 순간 아나렉샤는 숨 쉬는 법을 잊었다.

그리고 결국 고개를 숙였다.


7.

가르강튀아의 마더쉽은 감찰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었다. 그것은 오로지 처분을 위해서만 움직였다. 가르강튀아가 나니아에 도착한다면 그건 반드시 또 다른 함선의 누군가가 죽거나 다치거나 끌려간다는 걸 의미했다. 헌병대 전원이 그것에 익숙했다. 위압감은 거기서부터 왔다. 그러므로 누구도 그들을 환영하지 않았다. 


8.

[ 나 에오르에 들리게 됐어. 네 명의 장교가 연행될 예정이거든. 긴 비행이 될 것 같아. 이주일을 꼬박 날게 될 거야. 임관하고 처음으로 돌아오는 건데, 아마 에오르 땅을 밟는다고 해도 고작 한 시간 정도일 것 같아. 이러다 영영 아이오워스로 돌아오지 못 하고 죽게 될 지도? ]

[ 그나저나 코스챠 너 답장 정말 느리네. ]

[ 있지, 깜짝 놀랄 소식이 있는데…, 답장 이것보다 빨리 주면 말해줄게. ]


[ 유리, 인나니아그램 봤어.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

[ 나는… 조금 후회 중이야. ]


[ 지안카를라. ]

[ 음, 아무것도 아니야. ]

[ 나, 나흐트가 그리워. ]

[ 아냐, 역시 나흐트가 그립지는 않아. ]


[ 아담, 너 괜찮은 거야? ]


[ 일라이, 뒤돌아보지 않는 이야기를 해줘. ]

[ 동화라던가? ]


[ 키아라에게. 난 이번 키아라 차트 8위곡이 제일 좋아. ]

[ 소리를 지르지 않는다는 점에서. ]


[ 타이탄 태평하구나. 홀로그램으로 가이아 풍경 봤어. 나도 가보고 싶은데, 개인적으로는 가르강튀아가 노바에 도착할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어. ]


[ 아티야, 나 브라우니 먹고 싶어. ]


9.

“나 진짜 복수할 거야.”

아나렉샤가 으르렁거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루이스는 재빨리 주변을 둘러보고는 목소리를 낮췄다.

“고발 같은 거 못 하나?”

“할 수 있겠어?”

아나렉샤가 얼굴을 들이밀자, 루이스가 조심스럽게 거즈로 이마를 닦아내기 시작했다. 눈썹이 피로 흥건했다. 따가워서 자꾸만 얼굴을 찡그리고 눈물을 글썽이게 됐다. 루이스는 아나렉샤의 좌측 눈썹에서 우측 이마 끝을 찢어발기며 가로지르는 상처를 손가락으로 짚어보았다.

“흉터 남을까?”

아나렉샤는 정말 그것만큼은 원하지 않는다는 투로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러지 않도록 네가 잘 해줄 거지, 루이스, 그치?”

“당연하지… 좀 더 숙여줄래, 싸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붙어있었다. 아나렉샤는 의무실 바닥으로 떨어지는 선명한 핏방울을 쏘아보며 숨을 골랐다. 반복해서 주먹을 쥐었다 푸는 동안 고통이 점점 익숙해졌다. 루이스가 천천히 떨어져 손가락 끝으로 머리카락을 걷어보았다. 아나렉샤는 일부러 능청스러운 얼굴을 했다.

“어때?”

루이스가 진지하게 대답했다.

“흉터 안 남을 거야.”

“응. 나 곧 있으면 코스챠 만날 거라서 얼굴은 진짜 안 돼.”

아나렉샤는 한숨을 쉬며 불량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진짜 상관 더럽게 잘못 걸렸다….”

“그러고 보니 이오타에 들린댔지.”

“응. 루이스도 코스챠 만날 거지?”

“만날 수 있으면 만나야지.”

그런 뒤 루이스는 잠깐 침묵했다.

“싸샤.”

“응.”

“다음에 내가… 네 상관 오면 주사 진짜 아프게 놔줄게.”

아나렉샤는 의무실 책상을 두들기며 웃었다.

“귀여운 위로 고마워.”

정말로 흉터는 남지 않았다.


10.

[ 안녕하세요, 느세파 콘스탄틴 소위님. 약속시간에 20분이나 늦는 건 로에서 배운 버릇인지? 왜 그렇게 꾸물거렸는지 전혀 알 수가 없네요. 어째 이오타에서도 메시지가 느리니 근무지가 한가롭다는 말은 다 거짓말인 걸로 알겠습니다. 덕분에 15분도 못 봤군요. 정확히 12분입니다.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는지. ]

[ 저기, 진짜 답장 안 줄 거야? 너 진짜 이러기야? 나 진짜로 화난 건 아니었거든? ]

[ 있잖아, 코스챠. 얼굴 좋아보여서 다행이야. ]

[ 콘스탄틴 소위님, 제 패드에 저장된 영상이 있는데, 풀 영상 필요하신지? ]

[ 소위님~ 저기요~ ]


11.

올해 제국 차트 12주 연속 1위를 달리고 있는 바로 그 분들을 모셨습니다. 여러분, 소개합니다. 몽환적 컨셉, 뛰어난 가창력으로 무장한 무시무시한 미의 여신들, 오마이코스모스!

오마코 : 안녕하세요, 시민 여러분! <다섯 번째 나니아> 여전히 잘 부탁드립니다! 


무대가 솟구치면 반주가 흘러나온다.


12.

아나렉샤의 시범근무지는 일루어스-나흐트였다. 함선 갈리모프의 AI는 너그러웠고, 종종 대원들 사이에서 그녀로 불렸다.

태평한 곳이었다. 장교들은 종종 약을 빨거나 술을 퍼마시고 드러누웠다. 유일하게 제 일을 다 하고자 했던 장교가 있었지만, 이제는 이름이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나렉샤가 의도적으로 기억에서 누락했다.


13.

함선 매큐언에 다녀온 후 제라스는 아나렉샤를 완전히 찍은 것 같았다. 추정키로 얼마만큼 버틸 수 있는지 누군가와 내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아나렉샤에게는 대련으로 다져진 몸이 있었고, 그 몸은 누군가가 있는 힘껏 자신을 집어던지거나 때리는 일에 이미 익숙했다. 그러므로 그 폭력에서 많은 걸 잃지는 않았다. 다만 짜증이 늘었고 매번 뒤척이며 잠들었다. 이마, 손, 허벅지와 허리가 종종 찢어졌다가 붙기를 반복했다. 때때로 골절되었으나 루이스가 조치했으므로 금방 괜찮아졌다.

날 것의 폭력이 아나렉샤를 길들이는 동안에도 감찰시즌은 멈추지 않고 이어졌고 매순간 일은 고되게 다가왔다. 점점 메시지를 확인하거나 보내는 일이 뜸해진 건 그 무렵이었다. 실제 보이는 인간들이 전부 날이 서있었고 피로했으며 불친절했다. 루이스를 제외한 함선의 모두가 적처럼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함선 바깥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함선 바깥에서, 그러니까 다른 함선에서 아나렉샤는 모두의 적이었다.

의식하지 않는 사이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기대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온도가 점점 낮아졌다. 어느 순간 아나렉샤는 자신이 천천히 굴복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달리 무슨 수를 써야만 자신이 잃어가고 있는 이 무언가를 지킬 수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과거는 까마득했고 현재는 고달팠으며 미래에는 기대감이 없었다. 매일이 반복이었지만 그 속에는 평화가 없었다. 폭력뿐이었다. 의지할 사람이 있다면 루이스뿐이었으므로 아나렉샤는 종종 마음이 고달플 때면 차라리 제라스가 자길 걷어차서 어딘가를 또 찢어줬으면 했다. 한 번 의무실에 내려가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아나렉샤는 가르강튀아에서 그런 식으로 버텨나갔다.

근무 반 년 만에 아나렉샤는 곤봉을 받았다.


14.

그리고 넌 작은 싹을 틔워

금세 자라난 아름드리 짙은 초록의 색깔로

넌 내 하늘을 채우고


15.

[ 트리시에게. 일이 있어서 하루종일 비가 내리는 나니아에 정박해 있어. 네 말대로 하루종일 비만 쳐다보고 있으니까 기분이 좋질 않네. 어쨌든 곧 여기도 떠나게 되겠지만. ]

[ 졸업하기 얼마 전까지 쏟아지던 폭우 기억해? 그 폭우는 좋았는데…. ]

[ 여기 나니아민들은 비를 ‘눈물’이라고 써. 신기하지? 뜻은 비인데, 발음하면 아칸어로 눈물이야. 그러니까… 내가 이 비를 보고 괜히 우울한 게 아니란 소리지. 언어는 사고와 연결되어 있으니까. (4학년 심리학 레포트 주제 기억하지?) ]

[ 음, 나 이제 가봐야겠다. 메시지 늦어도 상관없으니까 답장은 언제든 편하게 줘. ]

[ 나도 바빠서 그래. ]


16.

의무실 진료 기록_ 4월 12일, 3918년 13:21
느세파 아나렉샤 / F / 21
진료과 : 응급의학과, 외과
관련 신체기관 : 귀
관련 질병 : 왼쪽 귓불 외상 및 이륜 열상. 외부의 힘으로 귀걸이를 잡아뜯어 통째로 찢어짐.

“내 안에 남은 건 증오뿐이야….”

“이해해. 진짜로 네 상관 죽이자. 약물 제조해줄게.”

“루이스, 네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으면 어떡하지.”

“이런. 싸샤, 나도 아주 농담은 아니야.”

“위안이 되는 농담 정말 고마워.”

“우리 만담하는 거지…?”

“비슷해.”


17.

[ 콘스탄틴 너 진짜로 내 메시지에 제대로답장안할래?어떻게지내고있는지는한마디도안하고진짜짜증나다시는안볼거야꼴보기싫어거짓말쟁이같으니나안보고싶어? ]

이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다.


[ 오르카 나 개고생 중. ]

이 메시지는 보냈다.


[ 지안카를라 제발 나 효과적으로 상관 죽이는 법 좀. ]

이 메시지도 보냈다.


18.

지각변동은 너로부터

난 달라진 것만 같애

저기 멀리 나무 뒤로

다섯 번째 나니아가 보여 난 (처음 느낀 설렘이야)


19.

태어나보니 아칸의 아이였으므로 가든 시절 아나렉샤는 크게 고민할 필요도 없이 삶의 방향을 정했다. 그건 곧 평생 존재 의의로 헤매거나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절대적인 목적을 받은 삶은 꽤 괜찮게 느껴졌다. 막연한 목표를 내면화하고 장교가 되기로 결심한 뒤부터 아나렉샤는 절대 꺾이지 않을 것처럼 굴었다. 노력한 만큼 성과를 거뒀기 때문에 그것은 점점 확신으로 느껴졌다. 사관생도로서의 매 년은 그 확신의 반복이었다. 타고나기를 풍부한 감성은 군대에 맞지 않았지만, 분위기에 쉽게 수긍하고 명령에 대해 깊게 사고하지 않는 성정이 그녀를 지탱했다. 공감능력이 뛰어난 동시에 폭력적인 상황에 둔감했고, 고통과 우울을 금방 잊는 재능이 있었다.

그러므로 아나렉샤는 매순간 빠르게 결정하고 판단했다. 무엇을 선택하든 후회가 남을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충분히 숙고하지 않았다. 선택하면 돌아보지 않으려 애썼고 실제 그랬다. 과거보다는 미래를 보살피는데 힘썼다. 불행한가? 알 수 없었다. 불행할 예정인가? 그렇다면 아니라고 말할 테다. 어느 쪽을 스스로에게 질문하는 게 이로운가? 자신을 보살피는데 필요한 질문은 현재를 지목해야 하나, 아니면 미래를 가정해야 하나?

개인으로 행복할 수 있는가?

제국의 일원으로서는?


20.

스물한 살이 되던 날, 아나렉샤는 루이스와 함께 오랜만에 술을 마셨다. 루이스는 한 모금 마시더니 관두겠다고 선언하고는 담배를 피웠다. 아나렉샤는 연기 속에서 흐릿해지는 루이스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다 말고 턱을 괴었다.

“다른 건 책임질 수 있겠는데, 내 인생을 책임지는 일은 못 하겠어.”

루이스는 대답 대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은 공간이 끝없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렀다.

“가르강튀아에 탄 걸 후회해?”

아나렉샤는 바닥을 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넌?”

루이스가 잔을 들었다.

두 사람은 건배한 뒤 한 잔을 원샷했다.


21.

생도, 사관학교 졸업생의 3할은 시범근무지역을 선택합니다. 

갈리모프로 돌아오면 어떻겠습니까? 


22.

싸샤는 무서워하는 거 없지?

넌?

나는… 싸샤도 이미 알고 있지 않아?


23.

21살 어느 날, 루이스가 눈을 다쳤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찰선에서 막 돌아온 아나렉샤는 소식을 듣는 즉시 일 년 치 휴가를 내고 의무실로 달려갔다. 그리고 밤새 그곳에 처박혀 있었다. 피로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붕대를 감은 루이스의 얼굴을 보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던 게 떠오른다.

아나렉샤는 루이스의 손끝을 잡고 눈을 감았다. 따뜻한 것들은 왜 자꾸만 빠져나가는 것일까 생각했다. 

“루이스… 나 이주일 밖에 못 있어. 함선 디킨스에서 내부고발이 들어왔대. 괜찮아? 그래도 계속 곁에 있을게. 참고로 나 울고 있는 거 아니니까 놀라지마. 거의 울 뻔한 거야.”

아나렉샤는 이번에도 약속을 지키지 못 했다. 일주일 만에 호출을 받고 올라간 아나렉샤는 제라스에게 몇 대를 얻어맞은 뒤 디킨스로 이동할 준비를 마쳤다. 굳은 표정으로 일어나는 아나렉샤를 내려다보며 제라스가 제국을 위해 봉사하는 아칸의 아이들의 운명론을 읊어대며 빈정거렸다. 

개인실로 돌아갈 시간이 있었더라면 이번에야말로 ‘상관을 쥐도새도 모르게 죽이는 법’을 검색해보았을 것이다. 진심으로.


24.

함선 디킨스의 대원들은 제2 헌병대를 꽤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감찰 결과가 나올 때까지 차를 대접하겠다고 나섰다. 감찰 결과에 꽤 자신 있어 보이는 얼굴들이었다. 내부 고발자는 보이지 않았다. 고발 대상인 클라리스 대위는 다리를 꼰 채 아름다운 찻잔을 들고 차를 몇 모금 홀짝였다. 그러더니 가르강튀아의 일이 힘들지 않냐고 물었다. 아나렉샤는 제라스의 눈치를 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클라리스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난 제3 헌병단이었어.”

처음 듣는 소리였다. 아나렉샤가 얼굴을 찡그리자, 이번에는 클라리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난 비리 같은 거 안 저질러. 어떻게 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거든.”

제국의 눈을 속일 수는 없어, 라고 클라리스가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아나렉샤는 등 뒤에서 제라스가 냉소적으로 비웃는 소리를 들었다.

바깥에서 총성이 울렸다. 아나렉샤는 반사적으로 곤봉을 움켜잡았다가 실수했음을 깨닫고 손을 옮겨 총자루를 쥐었다. 클라리스는 찻잔을 내려놓았다. 흔들림 없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똑바로 제라스를 쳐다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부함장님, 정말 이럴 겁니까?”

“제국의 눈을 속일 수 없다며?”

“그렇죠. 제국의 눈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부함장님.”

아나렉샤는 사태를 파악하지 못 하고 눈을 깜빡였다.

제라스가 총을 빼들었다.

“달릴 수 있는 데까지 달려 봐.”

“세상에 결백한 사람이 있을 것 같습니까?”

제라스는 대답 대신 아나렉샤의 뺨을 후려갈겼다.

“총을 뽑아, 느세파 소위.”

다음 순간 클라리스 대위가 업무실 바깥으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제라스가 발포했다. 총은 빗나갔고 클라리스 대위는 뛰기 시작했다.


25.

있잖아, 사랑이면 단번에 바로 알 수가 있대

헷갈리지 않고 반드시 알아볼 수가 있대

이제 난 그 사람이 누군지 (확신했어)


26.

고백하고 싶은 게 하나 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일루어스 나흐트에서 아나렉샤는 내내 죄책감에 시달렸다. 근무시간이 갈릴 때면 지안카를라를 두고 셔틀에 올라 매번 그 골목으로 돌아갔었다. 그곳에서 아이를 찾아보려고 노력했었다. 자신이 두고 온 게 무엇인지 확인하려고,

선택을 제대로 후회해보려고 아나렉샤는 그 골목으로 돌아갔었고,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 했다.

아나렉샤는 그것에 내심 안심했다. 죄책감은 어두컴컴한 골목 끄트머리에 숨어있던 아이의 실루엣으로만 남았고, 현실의 문제로 실현되지 않았다. 책임져야만 하는 게 없었기 때문에 아나렉샤는 안심했다. 그녀는 여전히 제국의 일원이 될 수 있었다.


27.

멀어지는 클라리스 대위의 등으로 총구를 겨누며, 아나렉샤는 가정했다. 여기가 분기점일까? 선택할 수 있는 지점인가? 지금 왜 나는 총을 겨누고 있나? 왜 저 대위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받았나? 그 명령에는 무엇이 숨어있나? 이것은 정의인가? 정당한가? 나는 이 순간을 감당하며 살아갈 수 있는가?

나는 책임질 수 있는가? 

정말로?


28.

“느세파 소위.”

“쏴.”


29.

저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거절하겠습니다.


30.

아나렉샤는 총구를 내렸다. 


31.

내 인생을 책임지는 일이 두려워.


32.

총성이 울렸고, 클라리스 대위가 쓰러졌다.

한순간 아나렉샤는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자신이 경련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제라스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손에 들린 곤봉에서 스파크가 튀기는 게 보였다. 아나렉샤가 고통으로 헐떡이며 고개를 들자, 제라스가 발끝으로 얼굴을 걷어찬 다음 뒤통수를 짓눌렀다. 와작, 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인중이 피로 흥건해지는 게 느껴졌다. 끔찍한 고통이 자비없이 몸을 휘젓고 빠져나갔다. 비명을 지를 수도 없었다. 아나렉샤는 몸부림치다 말고 힘없이 늘어졌다.

제라스는 총을 집어넣고 곤봉을 들이밀며 발로 아나렉샤를 굴렸다. 아나렉샤는 얼굴을 찡그리며 사위를 파악하려 애썼지만 온통 피범벅이었다. 고통 때문에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지도 몰랐다. 세상은 극단적으로 하얗거나 빨갰다. 

제라스는 푸, 숨을 몰아쉬고는 누군가에게 손짓으로 명령했다. 헌병단원 두 명이 바닥에 늘어져 간신히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나렉샤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그들이 아나렉샤를 쓰레기처럼 질질 끌기 시작했다.  

아나렉샤는 눈을 감았다.


33.

내 안에 남은 건 증오뿐이야.


34.

하지만 인생을 책임지지 않는다면 무엇이 남지? 아나렉샤는 살아가는 매순간 선택했다. 그것이 그녀의 삶을 한 방향으로 이끌었다. 이제 아나렉샤는 코뼈가 부러진 채 피투성이가 되어 바닥에 누워있고 가르강튀아로 돌아가면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 받을 것이다. 어쩌면 죽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아나렉샤가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던 무엇인가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아나렉샤는 예감했었다. 꺾이지 않을 자신은 없다고 스스로 생각했었다. 너무 늦었다고도. 왜냐하면,

정작 선택할 수 있다고 믿고 움직인 순간에 이미 모든 선택이 끝나있었다. 이제는 그 선택이 아나렉샤의 삶에 책임을 묻는 타이밍에 가까웠다. 선택의 순간을 어영부영 놓치며 오늘 날에 이르렀다.

미르 대위의 제안 앞으로,
가르강튀아의 지원서를 쓰기 직전으로,
무도회장 정원에서 콘스탄틴 앞에 섰을 때로,
돌아갈 수가 없으므로 이제 모든 선택은 아나렉샤에게 책임을 묻는다.

태어난 목적을 되새길 때마다 정의와 도덕, 국가의 역할, 정체성의 개념과 개인의 가치를, 사랑을 고민할 기회를 상실해왔다. 하나의 목적을 받은 아칸의 아이이기 때문에 오히려 박탈당한 무엇이 있었다. 기절하기 직전 아나렉샤는 생각했다. 그렇지, 나 오래 전에 잃어버렸구나. 너무 오래 전에 포기했구나. 철학의 기회를, 너무 오래 전에 빼앗겼구나.


35.

lalalalalalala 네가 내게 피어나 아지랑이처럼 어지럽게

lalalalalalala 네가 내게 밀려와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뜨는 꿈

사랑이란 꿈


박수소리는 비처럼 쏟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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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의 궤도 «● REC» 비밀글
1차/old 2019. 10. 23. 0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