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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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4 not found «목요일»
1차/old 2019. 10. 30. 01:04

땅이 흔들리고 진동이 점차 구멍에서 구멍으로 빠져나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매캐하고 텁텁한 연기가 바닥에 내려앉고, 진동이 서서히 멎을 무렵, 'D역'은 눈을 감았다. 몸을 밟고 지나가는 무수한 사람들, 무쇠로 된 뱀의 열차와 곳곳에 깔린 노란 안전 보도블럭. 이곳은 역이다. 하루 수십 명이 지나는 이곳은 작은 세상이었다.

그것은 정말로 진풍경이었으리라. 개미처럼 제 위를 걷는 사람들의 파도를 'D'역은 언제나 관조하고 있었다. 실로 흥미로운 관찰이 아닐 수 없었다. 제 안에는 바닥을 보고 걷는 사람이 있고, 바쁘게 뛰는 사람이 있고, 길을 잃은 미아가 있고,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소매치기와 하이힐을 신은 아가씨들이 있었다. 걸인이 있고, 흥에 취해 기타를 퉁기는 거리의 연주가들이 있고, 잡상인이 열차 곳곳을 돌아다니며 목청을 높였다. 제 위를 흐르는 열차들은 대게 다혈질적이고 감정적이어서, 말을 걸 때마다 코웃음을 치며 사람들을 싣고 빠르게 그를 스쳐가곤 했다. 'D역' 은 제 안을 흐르는 모든 소음을 작은 세상이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작은 세상이었기 때문에 'D역‘ 은 그리움과 쓸쓸함을 알지 못했다. 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에 알맞게 알림을 울리거나, 승객의 돈을 냉큼 삼켜버린 심술궂은 자판기를 달래주거나, 잔뜩 골이 난 채 터널을 달리는 지하철들에게 썰렁한 농담을 던지는 것을 빼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되지 않았기 때문에, ’D역‘ 은 이내 많은 부분을 그저 버려두는 것이 습관이 된다. 그것마저 성에 차지 않았을 때, ’D역‘ 은 사람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저렇게 많은 사람들은 대체 어디서부터 쏟아져서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그것은 아무도 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다 똑같은 사람들인데 전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지 않구나, 라던가, 혹은, 저 조그만 사람들은 얼만큼의 시간을 들여야 양복을 입고 하이힐을 신는 어른이 되는 걸까? 라던가, 그런 질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가장 궁금해 했던 것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저 피곤한 표정을 달고 그들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가버리는 것일까. 생각이 자랄수록 배수관의 쥐들은 늘어나고 조금씩 커가는 사람들은 여전히 각자의 표정을 뒤집어쓰고 열차에 올라 사라졌다가 돌아왔다가 쏟아졌다가, 다시 사라졌다.

‘D역’ 은 오랜 시간을 들여 조금씩 사람들의 세계에 녹아들었다. 언어를 터득하고 짐작했다. 저것은 저것이고, 이것은 이것이고, 그래, 오늘도 당신들은 출근을 하는구나. 피곤함을 달고 돌아오는 사람들을 보면 으레 선심을 쓰며 온몸을 판판하게 펼치곤 했지만, 사람들이란 둔하기 짝이 없어서 ‘D역’의 말과 행동을 알아듣지 못했고, 대게는 그 위를 구둣발로 밟고 지나갔기 때문에 아무짝에 쓸모없는 위안이었다. 그래도 ‘D역’ 은 정해진 시간만 되면 나타나는 그 피곤한 얼굴들을 좋아했다. 재미있던 것은 요일마다 달라지는 사람들의 표정이었다. ‘D역’ 은 목요일의 그들을 안쓰러워했다. 부쩍 지쳐 보이는 사람들은, 그러나 내일은 주말을 앞둔 평일의 마지막 요일이 다가온다는 기대감이 반짝이는 눈으로 열차에 올랐다. 동시에 수요일을 거쳐 피로에 찌든 몸뚱이가 옮기는 발걸음은 무거웠다. 제 위로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를 가늠하면서 ‘D역’ 은 일주일을 셌다. 가장 무거우면 목요일이었다. 그래서 ‘D역’ 의 머리 위로 무게가 꾹 꾹 짓누르면, 아, 목요일이구나, 했다.

‘D역’ 이 유심히 살피던 청년이 있었다. 잔뜩 움츠리고 긴장한 표정의 그는, 그러나 어딘지 희망차보였고 기대감으로 부풀어 있었다. 둥그스름한 안경 아래로 반짝이는 눈이 있었다. 단정히 손질한 머리에 어정쩡하게 양복을 갖춰 입은 청년은 초조한 듯 시계를 살피며 종종걸음으로 열차에 올랐다. 그 익어가는 청춘의 냄새를 ‘D역’ 은 맡을 수 있었다. 첫 출근이구나! 행운을 빌어, 라고. 제 위를 밟고 안전선을 겅중겅중 뛰어 열차에 오르는 청년의 아래에서 그는 힘껏 몸을 펼쳐 배웅했다. 그러나 한참을 기다려도 그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궁금해서 기다렸고, 기다렸으나 소식이 없어서 자꾸만 기다려야 했다. 한참 후에 돌아온 지하철이 수상한 냄새를 달고 올 때까지만 해도 그는 아무 것도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계속 기다려야만 했다. 

“네게서 피 냄새가 나.”

‘D역’ 은 불쾌한 듯이 움츠렸다.

“내가 사람을 먹었거든.”

지하철이 킬킬거렸다.

“한 남자가 내 발 밑에 떨어진 애를 구하고 깔려죽었어. 그래서 내가 그를 먹어버렸지.”

지하철의 발밑에서는 채 다 익지 못하고 터져 죽은 청춘의 냄새가 났다. ‘D역’ 은 그 냄새의 주인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분노했다. 그러나 무엇을 위해 분노하는지 알 수 없었다.

“너를 미워할 거야."

나는 진작부터 너를 미워하고 있었어. 그 말을 끝으로 지하철은 입을 다물고 만다. 몇 분도 되지 않아 지하철은 다시 어두운 터널 속으로 내달렸다. 피 냄새가 흐릿해지고 진동이 다시 멀고 먼 어둠 속으로 사라질 무렵, 분노한 역은 더 이상 알림을 울리지 않는다. ‘지금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의 목소리를 삼킨 지하철은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미움을 배운 ‘D역’ 은 끝이 없는 꿈을 꾸었다. 지하철이 하염없이 그의 안을 돌아다니고 사람들은 여전히 쏟아져 내렸지만, 'D역‘ 은 그가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의 안에는 매일 밤 운행이 중지된 제 안의 아래로, 아래로 떨어져 내리는 청년이 있었다. 너는 죽어버린 거니? 지하철 역 ’D‘ 는 되물었지만 그것은 또한 아무도 대답해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매일 꿈을 꾸고 매일 아무것도 하지 않는 'D역’ 이 폐쇄된 것은 정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자판기는 죽어가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새로 역을 만들었다더군. 새로운 ‘D역’ 으로 사람들이 쏟아질 거야.

그럼 나는 버려진 건가. ‘D역’ 이었던 그는 대답한다.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지. 나는 아주 오래된 역이었고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으니까.”

조금 서글펐다. 다시는 제 위를 지나는 발걸음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고, 사람들의 거무죽죽한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그 많던 하이힐과, 운동화와, 음악소리와 자판 소리가 들리지 않을 작은 세계의 종말을 ‘D역’ 이었던 무언가는 슬픔으로 천천히 받아들인다. 자판기는 희극적으로 키득거렸다. 그거 참 서글픈 일이군.

“앞으로 무엇을 할 거지?”

'D역‘ 이었던 그는 생각한다. 눈을 감자 제 안으로 떨어지는 죽은 청년이 있었다. 둥그스름한 뿔테 안경, 어쩐지 움츠린 어깨와 초조한 낯빛, 그럼에도 희망이 있던 눈과 두툼한 서류철. 익어가는 청춘의 냄새를 품고 돌아오던 지하철. ’D역‘ 은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꿈을 꿀테지.”

‘D역’ 은 피곤한 목소리였다.

“내내 꿈을 꿀거야.”

그 날은 목요일이었다.

 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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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졸업»
1차/old 2019. 10. 30. 01:02

1.

작년에는 온도가 무려 영하 5도까지 내려갔다. 강당에 히터를 빵빵하게 틀어놨는데도 입김이 나와서 학생이며 학부모며 할 것 없이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난다. 기재는 그 때, 졸업이고 뭐고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추워 뒤지겠다. 그게 기재가 기억하는 자신의 졸업식이다. 눈물콧물 빼거나 아련한 기억 같은 건 없었다. 그게 교복 입고 맞이하는 마지막 졸업식이라고 해도.

김기재가 낙대부고로 돌아온 건 이번이 두 번째다. 한 번은 근처 사는 친구가 불러서, 또 한 번은 후배 졸업식 때문이다. 부르는 녀석들이 많았다. 과연 마당발이란 말이 민망하지 않을 만큼은 연락이 왔다. 처음에는 갈 생각이 없었는데, 어쩌다보니 마음이 바뀌어서 학교까지 오게 되었다. 그렇게 된 거다. 그러니까 기재는 지금 낙대부고에 있다는 소리다.

쌀쌀하긴 했지만 또 무지막지하게 추운 것도 아니었다. 나갈 때 어플을 확인하니 영하 3도였다. 작년보다 고작 1도 올라간 건데, 작년보다 이렇게나 따뜻하게 느껴지다니. 하지만 작년에 기재는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까, 조금 다른 걸지도 모른다. 학생인 것과 학생이지 않은 것의 차이. 학교에 소속된 자들은 그 세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에 요란하게 반응하게 되니까 말이다. 요컨대 맛있는 급식이 나오는 날이면 짧은 경주가 벌어지고, 작은 추위에도 금세 오들오들거리고, 히터를 틀면 금방이고 곯아떨어지고. 치열한 인생. 치열한 일상. 기재는 이제 대학생이 되었다. 대학교는 몹시 크고 왁자하지만 다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흘러가는 것처럼 보인다. 맛있는 학식이 나온다고 몰려가지 않는다. 추우면 아무 옷이나 더 걸치고, 더우면 아무 곳에서나 훌렁훌렁 벗어둔다. 교복을 입는 사람도 없다.

강당에는 일렬로 의자가 늘어서있고, 아이들이 빠짐없이 앉아있었는데, 하나같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서 누가 누군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 예전엔 뒤통수만 보고도 이름을 부를 수 있었는데 고작 일 년 만에 그 뒤통수가 그 뒤통수가 됐다. 아는 후배들이 적어도 저 틈바구니에 스무 명은 될 텐데,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뒤통수를 긁다가 엉거주춤 벽에 기대어 섰다. 학부모도 아닌데 학부모 석에 앉고 싶지는 않았다. 어른들 틈에 껴있는 건 아무리 기재라도 불편하다. 차라리 어색한 애와 한 시간 동안 밥을 먹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도중에 강당 문이 닫혀서, 아 졸업식 시작하네. 하고 앞을 보았다. 교가가 울리면 기재가 고개를 빼고 뒤통수들을, 그 많은 뒤통수들을 바라본다. 김기재가 누군가를 찾고 있다.

기재는 사실 보러온 사람이 있었다.

 

 

2.

김기재는 3학년이 되자마자 육상부를 그만두었다. 특별히 붙잡거나 설득하는 사람은 없었다. 기재는 2년 간 열심히 뛰었고, 프로가 될 만큼 잘 뛰지는 않았고, 스스로도 프로가 될 마음은 없었으며, 슬슬 대학에 갈 준비를 해야 했다. 실제로 대다수의 아이들이 3학년에는 부 활동을 그만두었다. 부활동 미지망에 동그라미를 치고 종이를 제출하고 돌아오던 날, 중앙계단에서 소성단을 보았다. 성단은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는데, 겨울 방학동안 머리카락이 길어서 말꼬리가 출렁거리고 있었다. 기재는 성단이 겨울방학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겨울방학에 너는 뭘 하고 지냈냐고 묻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 질문이 끝난 후 성단이, “선배는요?”라고 묻지 않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어색해지고, 그럼 또……. 그러는 사이에 성단은 계단 끝까지 내려갔고 난간을 따라 방향을 바꿨는데, 하필 기재가 너무 눈에 띄는 곳에 서있던 모양인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아, 이런 타이밍은 보통 로맨스의 시작인데 말이야… 기재는 어째 죄지은 사람처럼 굳었다가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올렸다. “안녕?”

“네, 안녕하세요.” 성단은 덤덤한 표정으로 반쯤 고개를 숙이곤 기재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이제 기재가 뭔가를 말할 차례인가? 그런데 무엇을 말해야 저 애와 덜 어색하게, 덜 이상하게, 그러니까 덜… 애써보이도록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 보통 애들하고 뭐하고 떠들더라? 진짜 바보 같은 고민이었다. 기재가 뭘 더 시도하기도 전에 성단은 반대편 계단으로 사라졌다. 계단을 탕탕 내려가는 소리가 멀어지면서 바짝 굳어있던 어깨도 풀렸다. 정신을 차린 후에야 기재는 제 손이 우스꽝스러울 만큼 위로 솟구쳐 있다는 걸 깨달았다. 앞으론 절대 반사적으로… 인사하지 말아야지. 손바닥을 교복 바지에 문지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3.

“헐.”

기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A가 입을 벌렸다. A는 긴 치마를 입고 있었다.

“잘 지냈냐.”

기재가 히죽 웃자 A가 달려와 기재의 엉덩이를 가볍게 걷어찼다.

“뭘 웃어, 뭘 웃어.”

“야, 뭘 때리고 그르냐, 정 없게…….”

기재는 움츠리는 척하면서도 A의 발길질을 다 받아주었다. 맞을 만 하다고 생각했다. A와 마지막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지 벌써 두 달은 다 된 것이다. 그럼 좋은 선후배 사이로 지내자. A가 그렇게 말했는데 기재는 그 카톡에 답도 안 했다. 그러다 졸업한다고 찾아오기나 하고. 여하튼 자기가 생각해도 좀 개새끼였다.

“나 진짜 올 줄 몰랐다고…….”

A가 얼굴을 붉히며 우는 시늉을 했다.

“나도 안 올까 하다가 온 거야.”

기재가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다른 애들한텐 오늘 온다구 말했어? 다들 선배 안 오는 줄 알아. 메시지 다 씹었다며?”

“그러니까 그게 씹은 게 아니고 고민을 한 거라니까….”

“여하튼 김기 선배 대학가더니 완전 매정해졌어.”

A는 투덜거리다 말고 언제 그랬냐는 듯 히죽히죽 웃었다.

“나보러 온 거야?”

기재는 세 달 전에 A의 고백을 걷어찼다.

“…좀 미안해서.”

기재는 돌려서 대답했다.

“염치는 있네, 그래!”

A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어깨를 으쓱였다.

“근데 나 오늘 선약 있어서 같이 밥은 못 먹어준다? 애들한테 말해놓을 테니까 밥 먹고 갈 거면 말하구.”

“됐어. 밥까지 같이 먹을 생각으로 온 거 아니야.”

“아 그렇다고 그냥 보고 가게? 그것도 좀 웃기잖아. 뭐라도 같이 먹어.”

A는 기재의 대꾸도 없이 몸부터 돌렸다.

“나 애들한테 말하러 간다?”

붙잡을까 말까 고민하는 와중인데 순식간에 뛰어갔다. A가 인파속으로 사라지자마자 학생들이 대거 우르르 이동했다. 각자 가족을 찾거나 일행을 찾는 것이다. 기재는 꽃다발과 약간의 울음, 사진 플래시 속에서 엉거주춤 서있다 말고 다시 한 번 뒤통수를 긁었다. 진짜 얼굴만 보다 갈 생각이었는데……. 그러다 그대로 멈칫, 굳어버리고 말았다. 뒤통수. 기재는 뒤통수를 보았다. 긴 머리카락이 출렁거리며 기재 옆을 스쳐갔다. 순간 얼이 빠졌다. 생각과 함께 정신이 마치 길게 늘어난 고무줄이 결국 탄성을 이기지 못 하고 되돌아오는 것처럼 한꺼번에 퉁겨져 왔다. 쾅, 한 대 맞은 기분으로 기재가 눈을 끔뻑였다. 어? 진짜 그 소리밖엔 안 나왔다. 어?

어라?

그 뒤통수는 분명 파란 목도리를 하고 있었다.

 

 

4.

그러니까 이건 한참 오래 전의 이야기다. 다시 기재의 고3 첫 생활로 돌아가야 한다. 육상부를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등교할 시간이 아닌데도 번쩍 번쩍 눈을 뜨고 그랬다. 연습도 없고, 일찍 등교할 필요도 없는데도 괜히 밖을 나와 쏘다니다가 등교하고, 또 쏘다니다가 하교했다. 담벼락 앞에서 멈추어본 적도 있다. 여전하게도 낙대부고 담벼락에는 가방과 학생들이 쏟아졌다. 시간이 지나도 땡땡이치는 사람들은 영원할 테지. 이건 역사다. 역사의 한 장면이다.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면서 호주머니에 손을 찔러놓고 그 애들을 오래 보고 있었다. 솔직해지자면 조금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했다. 어쨌거나 기재는 육상부를 그만둘 때까지 단 한 사람과 친해지지 못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그런 걸 신경 쓰고 있었다. 뭐라고 부르지 그걸. 마지막 기회? 딱히 뭘 더 해보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딱 한 번만 더 마주치면 좀 덜 어색하게 인사하고, 좋게 끝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소성단과 마주칠 수가 없었다. 육상부를 나온 것뿐인데 무슨 얘가 하늘로 솟은 건지 땅으로 꺼진 건지. 이런 게 운명인가? 아, 신이시여. 저는 정녕 그 무뚝뚝한 후배랑은 망한 관계로 남는 건가요?

그러자 신이 기재를 가엾게 여겨 작은 기회를 하나 만들어주었다. 담벼락에 서서 실없이 땡땡족들을 구경한지 일주일 째 되는 날, 기재는 내리막길을 따라 내려오고 있던 성단을 마주치게 되었다. 이번에 기재는 준비되어 있었다! 반사적으로 올라가던 손을 내리곤 잠시 주먹을 쥐었다가 타이밍 좋게 웃었다. “안녕.”

성단도 인사했다. “아, 안녕하세요.” 그런 후에 성단은 잠시 멈췄고, 기재는 고민했다. 잠시 후 기재가 다시 말을 꺼냈다. “오늘은 연습 없어?” “아, 자율이에요.” “그러냐.” 그리고 침묵이었다.

둘은 천천히 내리막길을 함께 걸었다. 성단은 말수가 많은 후배가 아니기 때문에 대체로 기재 쪽이 일방적으로 열심히 떠들어야 했는데, 대체로 날씨와 취향, 계절과 색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같은 육상부였으니까 연습이나 달리기 이야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기재는 육상부가 아니고, 성단과 할 시시한 이야깃거리는 동이 났기 때문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둘은 정말 아무 말도. 아무 말도 없이. 언덕을 내려왔고, 도로변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신호등 옆에 포장마차가 열려 있었다. (이게 바로, 신이 기재를 가엾게 여겨 내려주신 기회였다.) 기재가 고개를 돌려 포장마차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성단아, 너 타코야끼 좋아하냐?”

“타코야끼요?”

성단도 기재가 바라보는 쪽을 바라보았다. 포장마차는 녹색이었다.

성단이 대답했다.

“네, 좋아하는데요.”

“사줄까?”

“아…….”

“사줄게.”

성단은 아주 짧은 시간 고민하다가 흔쾌히 대답했다.

“네, 그래요.”

그래서 둘은 타코야끼를 먹게 되었다. 3월 중순의 어느 날. 아직 날씨가 다 풀리기도 전이라 쌀쌀하고, 벚꽃전선이 유독 느리게 확산되던 그 해에, 세상에서 제일 어색한 선배와 후배가 학교 앞 포장마차에서 타코야끼를 주문했다. 성단은 타코야끼를 잘 먹었다. 기재는 두 판이나 더 주문했다. 둘은 도합 24개의 타코야끼를 먹어치웠다.

“너… 진짜 잘 먹는다.”

기재가 그렇게 말하자 성단이 타코야끼 접시를 들다 말고 기재를 바라보았다. 기재는 금세 머쓱해졌다.

“아니… 눈치 주려고 그런 게 아니고……. 많이 먹어. 잘 먹어서 좋다고.”

성단이 딱히 뭐라고 한 게 아닌데, 늘 이런 식이었다. 왜 얘 앞에선 긴장하게 되지? 로맨스 텐션은 아니었다. 그냥 자신과… 극도로 잘 안 맞는 사람 앞에서 잘 보이고 싶게 되는 뭐 그런 거? 하지만 기재가 뭘 어쩔 수 있을까? 기재는 여태까지 대부분의 유형의 사람들과 잘 지내올 수 있었다. 성단과는 잘 안 됐다. 농담을 하다가 오히려 백만 배는 멀어진 느낌이다. 학기 말까지 그런 식으로 빙 거리를 두다가 완전 어색해졌다. 적어도 기재가 생각하기엔 그랬다. 성단과 친해지기 위해서는 의식하거나 애쓰지 않아야 한다는 걸,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에 맡기며 그 애의 일상에 놓여 져야 한다는 것을 한참 나중에야 알았다. 전략도 실패했고 시기도 놓친 기재는 그러니까, 이대로 영영 후배와 멀어지게 되는 건가?! 하지만 신이 기재에게 타코야끼를 내렸으니, 지금 그 후배는 옆에서 따끈따끈한 문어 빵을 맛있게 먹고 있다. 성단을 흘끔거리던 기재는 갑자기 배가 더부룩해져서 접시를 내려놓았다. 가쓰오부시가 소스와 함께 접시 벽면에 달라붙어 있었다.

“소성단, 너도 3학년에는 육상부 그만둘 거야?”

성단은 왜 갑자기 그런 걸 묻냐는 얼굴이었지만 특별히 불쾌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왜요?”

“그냥. 궁금해서…….”

기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대학 가면 너랑은 아예 못 보겠네.”

“그렇겠죠.”

성단은 마지막 타코야끼를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지금도 자주 연락하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도 타코야끼는 맛있었지?”

기재가 맥락 없이-그러나 엄밀하게 맥락이 있는 것처럼-물었다. 성단은 왼쪽 볼로 타코야끼를 옮겨서 꼭꼭 씹어 먹더니(귀여웠다) 다시 한 번 대답했다.

“그럼요. 타코야끼는 맛있었죠.”

그 말에 기재는 낄낄거리며 웃어댔다. 성단이 이상한 사람을 보는 눈으로 기재를 바라보았으나 이내 덤덤해졌다. 성단도 이제는 기재가 실없이 웃어대는 게 자신을 놀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이미 오래 전에, 트렉 앞에서 끝낸 참이었다.

“어디가 재미있는 건지 잘 모르겠는데요.” 성단이 말했다.

“괜찮아.”

기재는 성단의 파란 목도리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늘 네가 재미있었어.”

원래 목도리는, 목도리라는 것은 따뜻하기 위해 두르는 것인데 그렇게 차갑고 진한 색을 목에 두르고 서있다니. 언젠가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5.

소성단! 하고 불렀더니 파란 목도리가 뒤를 돌았다. 진짜 소성단이다. 기재는 인파를 헤치고 조금 빠른 속도로 걸었다. 성단이 겨울의 햇살 앞에서 멈추어 섰다. 기재는 강당 차양의 그림자 앞에서 멈추어 서서 그 애를 바라보았다. 쌩글거려도 될까? 하지만 이제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행동하기에 둘은 연락도 안 하고 더 이상 같은 학교를 다니지도 않는다. 기재는 그래서 활짝 웃었다.

“야, 간만이네.”

“아, 안녕하세요.”

성단은 기재를 (다행스럽게도) 알아보았다. (다행인 일인가?)

“야 이 년밖에 안 됐는데 왜 이렇게 그것보다 오래 전에 봤던 애 같냐, 너는.”

기재가 실없이 말했고, 성단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집 가는 거야?”

“일단 하교하는 거죠.”

“야, 나도 가는 길인데 같이 내려가자.”

“집 다르잖아요.”

“매정한 녀석. 언덕만 같이 내려가자는 거야.”

성단은 기재가 이사한 줄 알고 있을까? 어쨌든 이사를 한 거나 이 동네에서 계속 살고 있는 거나 성단에게는 다를 게 없을 것이다. 만나지 못 한다는 것도 똑같고,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도 그렇다. 기재와 성단은 거의 이 년 만에 같이 언덕을 내려갔다. 그 담벼락을 지나쳤다. 겨울이라 담쟁이 넝쿨이 다 죽어서 시뻘겋게 줄기만 매달린 그곳을. 올해는 작년보다 따뜻했다. 제작년보다 따뜻한 것도 같았다. 졸업식이라 담을 넘는 사람은 없었다. 기재나 성단이 도중에 멈춰서 그 애들의 가방을 받아주거나 무시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둘은 천천히, 그러나 동시에 한없이 빠르게 그 언덕을 내려가면서 몇 가지 실없는 대화를 했는데, 역시 기재 쪽이 물어본 것이고 성단은 대답을 한 것이다. 그래도 무척 어색하지는 않았다. 그냥 간만에 본 선후배 같았다. 그러나 언덕을 내려올 즈음에는 할 말이 다 떨어져서, 약속이나 한 듯 기재는 입을 다물고 말았다.

신이시여, 도와주세요! 사실 기재가 그렇게 간절하게 기도를 한 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런 식으로 기도한 적도 없다. 그래도 이 언덕의 신은 기재가 구제하기 힘든 상황에 막혔을 때, 가끔 이렇게 기적을 내려주는 법이다. 기재는 그 횡단보도 앞에서 녹색 포장마차를 보았다.

타코야끼!

기재가 성단을 바라보았는데, 소성단은 시선을 느끼곤 덤덤하게 기재를 마주보았다. 기재는 웃을까 말까 고민하다가-그렇다, 다시 고민이 시작된 것이다-그냥 또다시 웃어보였다.

“야, 소성단. 타코야끼 먹을래?”

마법의 주문을 불러요~

“사주시려고요?”

어색한 후배와 더 이상 어색하지 않게 해주세요~

“당연하지. 내가 후배한테 얻어먹겠냐? 그것도 막 졸업한 애한테.”

랄랄라~

그래서 둘은 이 년 만에 타코야끼를 먹게 되었다.

포장마차의 가격이 작년보다 한 접시 당 300원 올라있었다. 하긴, 이 년이면 물가도 오를 수 있다. 요즘은 일 년만 지나도 세상이 뒤집어 지는 시대다. 기재는 주말마다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300원의 물가 상승쯤이야 거뜬하다. 기재는 시작부터 두 접시를 주문했다.

“많이 먹어, 야.”

“감사합니다.”

성단은 예나지금이나 타코야끼를 잘 먹었다. 기재는 타코야끼를 먹으며 생각했다. 예전보다 맛있는 것 같은데? 이 년간 사장님이 스킬을 올렸나? 하지만 알 수는 없는 일이었고 사장님께 저기요, 혹시 새 비법을 손에 넣으신 건가요? 라고 물어보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그것은 영영 시시껄렁한 의문과 비밀로 남았다. 여하튼 둘은 비밀의 타코야끼를 ‘예전에도’ 그랬듯이 ‘오늘도’ 맛있게 먹어치웠다. 성단은 정말로 잘 먹었다. (귀여웠다)

“졸업식 때 울었어?”

기재가 물었다. 성단은 타코야끼 한 알에 푹 꼬치를 쑤셔 넣으며 대답했다.

“? 아뇨.”

“하긴, 나도 그랬어.”

기재가 타코야끼를 입에 넣었다. 씹으면서 말했다.

“나도 내 졸업식 땐 진짜 덤덤했거든. 게다가 졸라 추워서. 뒤지는 줄 알았다. 빨리 끝내고 집에 가고 싶었어.”

“아, 저도요.”

성단이 공감했다.

“강당이 좀 추웠죠. 히터가 한쪽이 고장 났대요.”

“진짜? 난 따뜻했는데.”

“선배는 코트 입고 있잖아요.”

성단이 지적했다.

“전 추웠어요.”

“그러냐.”

기재는 타코야끼 한 판을 더 주문했다. 성단의 접시에는 타코야끼가 두 알 남아있었다. 새 타코야끼 판을 받자마자 기재는 성단의 접시에도 타코야끼를 추가해주었다. 성단은 군말 없이 따뜻한 타코야끼를 받아서 또다시 먹기 시작했다.

“근데 난 아까 교가 다시 부를 때 말이야. 식 시작할 때 말고 끝날 때. 그 앞에 슬픈 노래 나오고 나서 니들 다 같이 일어나서 다시 부를 때 말이야.”

성단이 기재를 바라보았다. 기재는 실없이 웃었다.

“난 그 때, 진짜 웃긴데, 좀 슬퍼서 눈물 나오더라. 내 졸업식도 아닌데.”

“그러게요, 웃기네요. 선배 졸업식도 아닌데.”

성단이 맞장구를 쳤지만, 진짜 웃기다는 사람의 표정은 아니었다. 기재는 그게 우스웠다. 우습다고 한 건 소성단인데 왜 또 기재가 웃어? 하지만 둘의 관계는 늘 그런 식이었으므로 새삼스러울 것은 없었다.

“근데 진짜 왜 슬펐어요?”

성단이 드물게 질문을 했다.

기재는 어깨를 으쓱이며 성단의 파란 목도리를 바라보았다.

“몰라, 나는 그렇더라. 멀리 떨어진 것들에게 아쉽고 절박해지나봐.”

성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런 후에 둘이 포장마차를 나왔더니 글쎄 벚나무마다 꽃봉오리가 올라와 있었다. 역시 오늘날은 지난날들보다 따뜻하고 다정한 모양이었다. 졸업식에는 담벼락에서 아이들이 떨어지지 않고, 제작년에는 히터가 고장 나지 않았지만 추웠으며, 기재는 자기 졸업식보다 남의 졸업식이 더 슬펐다. 그래도 성단은 여전히 파란 목도리를 하고 있었고, 포장마차에서는 타코야끼를 팔았다. 변하는 것들과 함께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성단과 기재의 사이는 변했지만 둘은 변하지 않았고 그건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변하지 않고도 가까워지거나 멀어질 수 있는 관계라는 것도 분명 있는 것이다.

기재는 또 실없이 벚나무를 올려다보다 말고 신호 앞에서 성단을 돌아보았다. 횡단보도가 초록 불이었다. 기재는 건너가야 하는데 성단은 그대로 직진이었다. 기재는 뒤통수를 긁다가 먼저 작별했다.

“나 가야 돼. 잘 있어.”

성단은 노란색 시작장애인 안내 보도블록을 밟고 서서 기재를 향해 짧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안녕히 가세요.”

“졸업 축하해.”

“네, 타코야끼 감사해요.”

“건강하고.”

“네, 선배도요.”

그리고 기재는 길을 건넜다. 신호가 끊어지기 전에 길을 건너서 뒤돌아보니 성단도 직진으로 걷고 있었다. 쟤는 뒤돌아보지 않겠지? 언젠가 언덕을 내려오면서 그랬던 것처럼. 그래도 기재는 뒤돌아보는 사람이니까 가끔은 타코야끼가 먹고 싶겠지. 그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휴대폰이 징징 울려댔는데 기재는 그냥 받지 않고 마저 걸어 나갔다. 벚꽃 아래를 걸으면서 어떤 나날들을 상상했다. A나 A의 친구들이나 기재의 여타 후배들에게 몰매를 맞게 될 앞날도 모르고. 그래도 그것 나름대로 좋았다. 성단과 기재가 그렇게 헤어졌다.

20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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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기재와 성단»
1차/old 2019. 10. 30. 00:58

1.

김기재는 소성단을 운동장에서 처음 보았다.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예비 소집일이 있어 전교생이 각자의 반이 정한 시간대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있었다. 운동장으로 쏟아지는 입학생들 틈에서 키가 큰 성단은 조금 눈에 띄었다. 새파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원래 목도리는, 목도리라는 것은 따뜻하기 위해 두르는 것인데 그렇게 차갑고 진한 색을 목에 두르고 서있다니. 아주 나중에도 그 이미지는 종종 색깔 그대로 남아 기재 속의 소성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건 둘 사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다.

기재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알람으로 맞춘 시간보다 10분을 추월한 셈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감싼 랩이 아직 따끈따끈했다. 기재는 밥그릇 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오늘도 잘 달리기. 문장 끝에 작은 이모티콘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타임 트라이얼이 있었다. 특별히 강조한 적도 없는데 아버지가 기억한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기재는 동생들 밥그릇 앞에 붙여진 포스트잇도 읽었다. 숙제 잘 하고, 성적 떨어졌더라, 너무 늦게 다니지 마라, 어제 안색 안 좋던데 무슨 일 있니? 눈으로 훑던 기재는 그 이상 읽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밥을 조금 남겼다.

버스가 금방 왔다. 가방에서 막 꺼낸 이어폰이 엉키지 않은 채 딸려 나왔다. 에어컨이 잘 나오는 창가 자리가 비어있었다. 음악을 틀자 듣고 싶던 곡이 랜덤 재생되었다. 기재는 조금 졸았다. 눈을 떴을 땐 학교까지 두 정거장이 남아 있었고 버스 안이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가 뒤로 내팽겨 쳐졌다. 기재는 이어폰을 빼냈다. 창밖으로 성단이 지나가고 있었다. 창문을 열까 고민했으나 순식간이었다. 기재는 그대로 카드를 찍고 내렸다. 내린 사람은 기재뿐이었다. 이어폰 줄을 마구잡이로 가방에 쑤셔 넣으며-그럼 엉킬 걸 알면서도-빨리 걸었다. 성단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기재가 내린 건 일찍 학교에 도착할 게 빤하다면 걷고 싶어서였다. 교문 앞까지 기재와 성단은 나란하기엔 조금 어긋난 거리와 틈을 유지하며 걸었다. 교정 담벼락엔 담쟁이 넝쿨이 늘어져 한 계절만큼의 분량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기재는 거기서 불쑥 치고 나왔다. 성단은 별로 놀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아까 봤는데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서.”

기재가 씩 웃자 성단은 또 이러네…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응, 그렇지.”

기재는 딴청을 피웠다. 잠시 정적이 있었다. 잠시 후 기재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벼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없나 봐.”

성단이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 아주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아, 뭐.”

“항상 담 넘을 일이 생기는 건 아닐 테니까요.”

기재가 웃었다.

“그런가.”

“그렇죠.”

낙대부고 담벼락에서는 종종 학생들이 무거운 열매처럼 떨어졌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가거나 수업을 재끼기 위해서다. 소녀들일 때도 있고 소년들일 때도 있었고 혹은 둘 다일 때도 있었다. 그들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피난민들처럼 가방을 집어던진 후 낙하 자세를 잡는다. 엉덩이를 바싹 붙이고 어떻게든 바닥과 가깝게 만든다. 가끔 담벼락 아래로 누군가 지나갈 때도 있다. 그럼 그들은 누군가들을 불러 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저기, 안 밟게 내 가방 좀 치워줘.

“아쉽다. 나 이번에 걔네 또 마주치면 너처럼 깔끔하게 무시할 자신 있었는데.”

“아쉬운 일인가요.”

둘은 중앙현관 앞에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기재가 먼저 일어섰다. 너무 많이 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성단과 나눈 대화는 고작 해야 열 마디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성단과 기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성단과 대화를 이어갈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일 지도 몰랐다. 성단이 일어섰을 때, 기재는 먼저 인사했다.

“안녕, 다음에 또 보자.”

“이따 볼 텐데.”

성단은 덤덤하게 말했다. 기재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건 그렇다.”

둘은 배웅이나 친밀한 인사 같은 것은 하나도 주고받지 않은 채로 중앙계단에서 헤어졌다.

 

2.

초봄에는 어쩌다보니 벌어지는 일들이 많다. 어쩌다보니 짝꿍이고, 어쩌다보니 같은 부고, 어쩌다보니 도서부가 된다. 새 학기를 맞이한 다수들이 매달리는 건 그 ‘어쩌다보니’일 것이다. 우연과 조금의 운으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관계를 어떻게 다듬어 나가냐에 따라 그들은 친구로 남거나 어색한 사이로 남거나 혹은 영영 멀어진다. 김기재에겐 그 ‘어쩌다보니’의 관계가 참 많았다. 아는 선배들, 아는 후배들, 같은 반 여자애들, 학원 같이 다니던 친구들, 초등학교 동창 혹은 전에 만나 뵈었던 선생님. 기재가 복도를 지날 때 한 명쯤은 반드시 그를 불렀다. “김기!” 혹은 “기재야!”였다. 기재는 어디든 불려 다녔고 어디든 서있었다. 세상 인구의 절반 정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여러분 역시 기재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 복도, 운동장, 학교 근처 피씨방, 운동장과 계주 트랙 앞에 김기재는 서있다. 당신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할 지도 모른다. “안녕, 우리 또 보네. 그렇지?” 그럼 웃어주기를.

하지만 성단은 웃어주는 쪽은 아니었다. 초봄이었다. 둘은 어쩌다보니 함께 하교하고 있었다. 아마 육상부에 신입생이 들어오고 있는 첫 모임이 해산된 이후였던 것 같다. 성단이 앞서 걷고 기재는 조금 뒤쳐진 채 따라 걷고 있었다. 대화하거나 웃고 떠들지 않았고 지극히 모르는 사이처럼 보였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도 않았다. 담벼락에서 누군가들이 둘을 불렀을 때, 둘은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담벼락에 매달린 학생들이 가방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 둘! 이것 좀 받아주라! 기재는 그대로 자리에 멈췄다. 성단은 다시 걸어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기재가 성단을 불러 세웠다.

“안 도와줄 거야?”

“굳이 왜요?”

“어…….”

기재는 말문이 막혀서 그저 웃었다.

“쟤네가 도와달라잖아.”

말하고 보니 스스로가 정말 바보 같이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성단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전 갈게요.”

“뭐?”

하늘에서 가방이 떨어졌다. 멍청하게 성단의 뒤통수만 보던 기재가 정통으로 하나를 얻어맞았다.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기재는 손을 거두고 머뭇거리다 성단을 쫓아 뛰었다.

“정말 안 도와줘도 돼?”

  “굳이…….”

  성단은 얼굴을 미묘하게 찡그렸다.

  “그래야 하나.”

  김기재는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호의를 베풀며 안정을 찾는 타입이 아니었다. 단지 거절했을 때 돌아올 서운함과 불호의 감정이 싫었다. 인간관계란 가늘고 성가시기만 해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금이 가거나 부서질 수 있었다. 기재는 단지 그것을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심적 부채감을 소유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들로부터 내쳐질 상황이 왔을 때 성공적으로 다른 무리에 들어간다면 좋을 테였다. 하지만 기재는 때때로 생각하고 말았다. 아, 삶이라는 건 몹시 지겹고도 피곤해서 안정이나 행복 같은 건 도통 가까이 오기 힘든 걸지도.

  그 날, 성단이 뱉은 ‘굳이’는 별 것이 아니었는데도 기재의 마음속에 자국을 남겼다. 언덕을 내려온 이후에도 기재는 담벼락 쪽으로 자꾸만 뒤를 돌았다. 앙심을 품진 않으려나? 성단은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아무 것도 걱정하거나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기재는 뒤돌아보고 성단은 뒤돌아보지 않아서 자꾸만 거리가 벌어졌다. 버스정류장까지 왔을 무렵 기재는 마침내 뒤돌아보기를 관뒀다.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빨리 걸었다. 성단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더는 틈을 벌리지 않았다.

그 뒤에도 아주 가끔 둘은 같이 하교할 일이 있었다. 담벼락에선 여전히 아이들이 쏟아지거나 가방이 떨어졌다. 기재는 그 후에도 몇 번 담 앞에 멈추거나 머뭇거리곤 했다. 그러나 곧 관두고 성단의 뒤를 쫓았다. 기재가 머뭇거릴 때마다 둘의 틈은 시시때때로 벌어졌으나 언젠가 부터는 유지되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서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3.

타임 트라이얼을 앞두고 다들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보윤이 다가와 기재의 등을 툭 쳤다. 김기, 긴장했냐? 기재는 시선으로 운동장을 훑다 말고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보여? 성단은 스탠드 쪽에 서서 멀거니 트랙을 보고 있었다. 방송이 울리자 아이들이 대열을 이루며 몰려들었다. 기재는 제 건너편에 선 성단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엄보, 넌 노력했는데 잘 안 되는 일엔 어떻게 하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태클 걸지 말고 대답 좀 쥐어짜봐.”

기재가 툭 보윤의 운동화를 가볍게 밟았다. 아, 진짜! 보윤이 펄쩍 뛰며 기재의 다리를 찼다.

“씨바, 몰라.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다르지.”

“그런가.”

“그래, 임마.”

성단은 장거리 선수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보고 있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성단은 대체로 게임 안의 NPC들처럼 움직였다. 정해진 시간과 패턴이 있었고 한정된 범위 안에서 단조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보윤이 기재를 붙잡고 웃었다.

“야, 너 기록 안 나올까 봐 그러는 거지.”

기재는 보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고민하다가 다시 한 번 웃었다.

“글쎄다.”

“뭘 글쎄야, 맞잖아.”

“마음대로 생각하셔.”

“이 새끼 또 이러네. 말을 해야 알지, 답답하게 진짜.”

“그런가.”

교사들이 모여 짧은 연설을 했다. 계주 뛰기 싫다고 대충 달리는 놈, 무리하다가 자빠지는 놈, 각오들 해 아주. 기재는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운동화로 바닥을 긁었다. 아버지의 포스트잇 생각이 났다. 오늘도 잘 달리기. 아버지는 언제나 격려나 칭찬을 했다. 사실 싫은 말을 쓴 적이 없었다. 잔소리나 심술 맞은 말들은 동생들의 것이었다. 기재는 그것을 서운하다고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기재는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모두의 남이었다. 그리고 상냥한 사람은 대체로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한다.

“야, 엄보.”

“왜 또.”

“우리, 육상부지.”

“존나 뜬금없네. 어. 당연하지.”

기재는 고개를 들고 육상부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비슷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기재는 처음부터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소속되어 있음이 명징한 상징들이 도처에 있는 게 좋았다.

“그럼 됐어.”

기재는 웃으며 보윤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잘 달리자.”

그렇게 말하면서 기재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포스트잇을 구겨버렸다.

선수 호명에서 이름이 불렸을 때 기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트랙 앞으로 나왔다. 준비운동을 하면서 스탠드 쪽을 바라보았다. 성단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 시선으로 아이들을 훑고 있었다. 마침내 성단이 기재를 발견했다. 스탠드와 트랙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 기재가 손을 뻗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와 검지를 펼쳤다. 트리거를 당기듯 손가락을 퉁겼다. 

 

4.

그럼 웃어주기를.

 

5.

굳이…….

그래야 하나.

 

6.

타임 트라이얼은 한 가지를 빼곤 전부 엉망이었다. 단거리를 잘 뛰어본 적이 없어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힘주어 뛰고 말았다. 괜히 무리했다. 다리에 힘이 다 풀려 있었다. 아버지의 포스트잇 때문은 아니었는데, 그냥 뛰다보니 진심이 되었던 모양일 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짐을 정리해 돌아가고 있었다. 스탠드에 앉아 있는 건 기재뿐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계단에 앉아 성단이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눈치인 것 같았다. 잃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일전에도 성단은 수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 때도 가방을 뒤지다 말고 앞에 멀뚱히 서있었다. 기재는 그 뒤로 천천히 다가가 아주 가까이서 물어보았다. 뭐 잃어버렸어? 네, 수건 잃어버렸어요. 그러게, 엄청 속상해보이네. 수건 때문은 아니고요. 성단은 뚱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절 칠칠맞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요. 그 때, 기재는 진심으로 웃고 말았다. 소성단, 너 진짜 재밌다. 진짜 재밌는 후배 같아. 성단은 무뚝뚝했다. 참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네요. 기재는 습관처럼 자신을 숨기며 되물었다. 왜 농담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성단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진담이면 무섭네요. 그런 후 성단은 팩 돌아서 가버리고 말았다.

기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성단이 가방을 뒤적이다 말고 지퍼를 닫았다. 그러니까 성단은 잃어버린 게 없는 모양이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스탠드로 그늘이 져서 기재가 서있는 곳은 온통 어둡고 서늘했다. 기재는 성단이 서있는 양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섯 발자국 정도만 걸으면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재는 움직이지 않고 생각했다. 길이 보이지 않아.

“소성단.”

성단이 멈추어 섰다.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기재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번엔 기재도 웃지 않았다.

“나 너 우습게 여긴 적 없어.”

성단은 대답했다.

“알아요.”

성단은 말을 아주 멀리 밀쳐놓았다.

“선배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기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소진되었다. 용기 혹은 비겁함 혹은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면 그 무엇으로라도 불릴 수 있는 상반되는 감정들. 기재는 결국 다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힘빠진 웃음이었다.

“그런가.”

“그렇죠.”

“내일 보자.”

“네.”

성단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구름이 지나가고 그림자가 사라졌다. 이제 양지는 어디에나 존재했지만 기재는 그대로 못 박힌 듯 서서 성단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둘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애매모호하거나 가깝지 않았다. 아주 멀었다.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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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원보기 트리오»
1차/old 2019. 10. 30. 00:57

1.

행성 같은 사람을 보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같은 반이던 W는 어디 서든 아이들을 끌어 모았다. 서있으면 절로 눈길이 갔다. 단지 잘생겨서만은 아니었다, 분명 뭔가 있었다. W에게서 페로몬이 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W와 어울리고 싶어서 다들 정말이지 침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기재도 그 무리에 껴있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W의 가장 가까이서 돌 수만 있다면, 가장 크고 가까운 위성이 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다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조가 되어야 하고 방과 후엔 같이 피씨방에 가야만 했다. 기재는 의외로 순순히 W의 가까운 위성이 되었다. W의 짝꿍으로 앉은 한 달 동안 별의별 이야기를 다 나눈 탓이었다. W는 종종 “내 베프야.”하고 기재를 소개했다. 그럴 때면 괜히 우쭐해졌다.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가슴이 붕 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겨울방학 때 몇 명의 친구를 더 사귀었다. 옆 동네 사는 옆 초등학교 애들은 기재보다 키가 큰 아이들이 더러 껴있어 보다 어른스러워보였다. 어디서든 중심이던 W는 자신의 무리를 끌고 옆 동네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어디 초 다니냐? 아, 옆이네. 너희도 놀 거지? 기재는 W보다 조금 뒤에 서있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옆 동네 무리의 중심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곳에도 행성은 있었다. 기재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애는 씩 웃었다. 잘생긴

그러니까 이것은 엄보윤 너에 대한 이야기다.

 

2.

“아 존나 더워.”

“여름이잖아.”

“누가 모른대?”

“누가 엄씨 아니랄까 봐 엄살 쩐다.”

“김기 시비 거냐.”

보윤이 기재 쪽으로 발길질을 했다. 기재는 능숙하게 엉덩이를 빼며 물러났다. 낄낄거리며 짧게 술래잡기를 했다. 오래된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드레일을 두고 차 한 대가 느릿느릿 지나갔다. 둘은 금방 지쳤고 뛰기를 그만뒀다. 보윤이 입맛을 다시며 땀을 닦았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기재가 동의했다.

“나도.”

“진짜 존나 더워 진짜 진짜로.”

“알아.”

“아랫동네는 덜 덥겠지?”

“아마 과학시간에 배우기로 그랬던 것 같다.”

둘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아랫동네, 하고 떠오른 누군가 때문일 테였다. 버스 한 대가 지나쳐갔을 때 뜨거운 배기가스가 훅 끼쳤다. 보윤이 얼굴을 찡그렸다.

“최원호한텐 연락 없냐?”

“원호? 매일 하지.”

“와, 최원 존나 나빴다. 나한텐 꼴랑 삼일에 한 번 하는데.”

“내가 매일 연락해서 그런 걸 걸.”

그렇게 말하는 기재의 목소리는 아주 미묘하게 풀이 죽어있었다.

“내가 매일 깨톡 안 보내면 걔도 그렇게 자주는 연락 안 할 것 같은데.”

엄보윤과 김기재의 친구 최원호는, 그러니까 W는 작년 겨울 전학을 갔다. 경기도보다 조금 더 아래 있는 동네라고 들었지만 지역명은 언제 들어도 가물가물했다. 거기서도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W의 입으로 들은 것이지만 기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W에겐 W만의 중력이 있어서 언제든 사람이 이끌려 맴돌게 됐다.

“어제 듣기론 원호 걔 여친도 생겼다더라.”

“와, 빠르다. 하긴 걘 원래부터 조온나 인기가 많았으니까.”

보윤은 알만 하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허공으로 젖혔다.

“야 이거 어째 원보기 트리오의 위상을 이어가는 건 이제 최원호뿐인 것 같다?”

기재는 보윤의 옆모습을 훑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넌 그래도 계속 고백 받잖아.”

“아니, 뭐, 그거야 내가 좀 잘나서.”

“얼씨구.”

“그러니까 우리 김기도 노력합시다, 응?”

“지랄하지 말고.”

둘은 이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몇 미터를 앞두고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연습을 마치고 걸을 때만 해도 햇볕은 이렇게까지 뜨겁지 않았다. 좀 멀리까지 걸어보자고 했던 건 분명 생각 없는 짓이었다. 기재는 보윤에게 조금의 미안함을 느꼈지만 보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엄보, 우리 남은 거리는 버스 타고 가자.”

“어, 그래.”

“거절하면 죽빵 갈길 생각이었는데 존나 다행이다.”

“막말 쩌네.”

보윤은 시원스럽게 웃다 말고 턱짓으로 정류장을 가리켰다.

“야, 김기.”

“왜.”

“저기까지 시합할래?”

“미친…….”

“하는 거다, 시작!”

보윤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기재의 몸이 절로 그를 쫓아 움직였다. 육상부에 들어와 가지게 된 버릇이 있다면 추월하는 사람을 따라 몸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땡볕을 달리는 동안 매미소리가 멀어졌다. 둘은 땀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으헉 으헉 숨을 몰아쉬었다. 버스정류장 위엔 나무 그늘이 있어 조금 시원했다.

이긴 건 보윤이었다.

‘엄보윤 죽인다.’

땡볕을 걷게 해서 미안했던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보윤 역시 미련한 짓을 했으니 쌤쌤인 셈이다. 호흡을 정리하던 기재는 보윤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엄보윤 뒤질래?”

“아, 학, 하학, 김기, 표정존, 나 웃겨.”

“그만 쳐웃어. 숨 넘어 가겠다.”

매미소리가 다시 짙어졌다. 기재는 헐떡이며 웃다 말고 고꾸라지는 보윤을 일으켜 세웠다. 보윤의 축축한 손이 기재의 팔꿈치를 잡았다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기재는 보윤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을 잡으며 보윤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둘은 의자에 앉아 전광판을 바라봤다. 같은 버스를 타야 했다. 갈 곳이 있었다. 

“아주 편지라도 쓰지 그러냐.”

정성에 탄복한다는 듯 보윤이 웃었다. 잠시 후 도착 버스에 둘이 타야 할 버스 넘버가 떴다. 기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래. 맨날 연락하는 사이에 존나 낯간지럽게 편지까지.”

그러니까 둘은 W에게 보낼 과자를 사러가는 길이었다.

 

3.

엄보윤은 W와 아주 빠르게 친해졌다. 그 날, 양 측의 초등학교가 겨울방학을 맞이하던 날 뒤엉켜 놀던 소년들은 아주 많았지만 껌딱지처럼 붙게 된 건 그 둘뿐이었다. 태생적으로 죽이 잘 맞는 관계라는 게 있다면 보윤과 W일 지도 몰랐다. 기재는 그 사이에 얼결에 끼게 됐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보윤과 W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었다. 둘은 어디서든 정말이지, 인기가 많았고 중심에 있었다. 둘이 없다면 기재가 중심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둘이 있는 이상 그것은 기재의 특성이 될 수 없었다.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탐나는 것도 아니었다. 욕심도 없었고 무리에 어울려 즐겁다면 그만이었다. 그런 이유로 W와 보윤, 그리고 기재는 아주 빠르게 친해졌다. 동네 탓에 중학교 역시 갈라졌지만 문제없었다. 수업이 일찍 끝난 날엔 W와 함께 보윤의 학교에서 아이들이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반대의 날엔 보윤이 그들의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양쪽 학교의 아이들은 셋을 묶어서 원호보윤기재, 줄여서 원보기 트리오라고 불렀다. 소규모지만 나름 팬도 있었다. 수학여행 때면 타 학교 학생인데도 이름이 종종 불렸다. 원체 고백을 많이 받던 W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보윤도 비슷한 눈치인 것 같았다. 기재는 중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진 특별히 진중한 고백을 받아본 적이 몇 번 없었기에 쏟아지는 관심이 얼떨떨했다. W와 보윤 사이에 서있으면 기재 같은 소년도 총애를 받는 모양이었다. 기재는 자신이 명왕성 같았다. 행성으로 불리고 있지만 언제든 밝혀져 위성으로 퇴출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까진 이 애들과 어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보윤과 W가 좋았다. 으스대는 마음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 친구라고 여겨졌던 까닭이었다. 사랑했다. 오래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중학교 1학년 중반 무렵 W가 선언했다.

“야, 나 여친 생겼다.”

보윤은 카페테리아에 앉아 무심하게 휴대폰을 누르며 오, 축하한다, 라고 대꾸해주었다. 기재도 별 생각 없이 축하한다고 대답했다. W는 히죽히죽 웃었다.

“사진 볼래? 존나 예뻐.”

“됐어, 금방 바뀔 거잖아.”

“야이씨, 김기재 진짜……. 그건 모르는 일이지 임마.”

W가 기재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보윤이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발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둘을, 정확히는 W의 다리를 찼다.

“와, 우리 김기한테 왜 그러냐. 최원 존나 애를 갈구네 갈궈.”

“악, 미친아! 엄보윤 씨발 지금 너 내 다리 차고 있거든?”

기재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보윤과 W는 박장대소하며 테이블에서 뒹굴었다.

“아, 말을 하지.”

“씨바 편을 들어줄 거면 제대로 보고 차야지!”

그런 나날들이었다. W가 연애를 했다고 트리오가 해산되는 일은 없었다. 기재의 말대로 W의 여친은 금방 바뀌었다. 셋은 여전히 패스트푸드점, 카페테리아, 분식집에서 결성해 마구잡이로 떠들어댔다. 주로 새로 사귄 여자친구, 어제 받은 고백이야기 혹은 그제 키베 뜬 온라인 어그로꾼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종종 흐름이 끊어질 때가 있었다. W의 휴대폰이 울리면 기재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됐다. 여자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W는 대화를 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왜?”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재와 보윤은 종종 둘만 남겨졌는데, 가을이 끝날 무렵엔 보윤 역시 여자 친구가 생겨 W와 똑같이 굴었다. “어, 왜?” 그렇게 말한 후 W 혹은 보윤은 기재를 두고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이면 볼 수 있었고 원한다면 당장 밤에 불러낼 수 있었는데도 기재는 그 순간이 서운했다. 그래서 평소 조금 눈여겨보던 여자아이가 고백해왔을 때 거절하지 않고 받아버리고 말았다. 조금의 오기가 있던 셈이었다.

중학교 1학년 말 겨울, 마침내 트리오 중 가장 늦게 김기재가 보고했다.

“야, 나 여자 친구 생겼다.”

두 친구는 정말 당연한 일을 들었단 듯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축하해.”라고 대꾸했다. 그들은 기재가 인기가 있다거나 고백을 받는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제 셋은 동시에 연애를 하게 된 셈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어, 왜?”는 계속됐다. 기재의 여자친구는 조용한 모범생이었고 기재와 함께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손바닥이 따뜻하고 조곤조곤 말하며 눈이 예쁘고 총명해서 기재를 종종 붕 뜨게 만들었다. 얼결에 시작한 연애지만 기재는 정말 그 애가 좋아졌고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 무엇이든 해줬다. 100일엔 엄보윤과 W를 불러다 노래방에 양초를 깔고 발라드를 불러주기도 했다. (다시 생각하자면 정말 오글거리는 짓이다. 그 때 엄보윤이 얼마나 투덜거렸던지.) 그러나 한 가지 일만큼은 해주지 않았다. 기재는 여자 친구가 예고도 없이 전화를 걸었을 때 두 친구와 함께 있다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어, 왜?”를 위해 시작한 연애였는데 “어, 왜?”는 해보지도 못 한 셈이었다. 이유를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싫었다. 둘과 함께 있을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고 막연하게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져서, W는 겨우 같은 고등학교에 올라오자마자 전학을 가버리고 말았다. 떠날 때 의외로 울음을 터뜨린 건 W와 보윤이었다. W는 울음을 겨우 참았고 보윤은 조금 눈물을 보였다. 기재만이 얼떨떨하게 서있었다. 분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볼 건데. 고깟 거리가 조금 멀어진다고 붕괴되는 거 아닌데. 우리는 트리오니까. 우리는 트리오니까 말이다.

그러나 종국엔 기재 역시 그 때 울어버리고 말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됐다. 

 

4.

마트는 에이컨이 빵빵했다. 보윤이 환희에 찬 몸짓으로 티셔츠를 마구 잡아 흔들었다. 기재는 카트를 끌고 느릿느릿 보윤 옆에 섰다. 해피해피해피이마트. 노래가 산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평일 낮에도 대형 마트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야, 뭐 살 거냐.”

“몰라, 보고.”

“김기, 돈 많나보다.”

“돈이 많으면 이런 대형할인마트에 오겠냐. 씨바 면세점을 쓸지.”

“개웃기다. 최원호 존나 샤넬, 루이비통 이런 거 두르고 막.”

보윤이 낄낄거렸다. 둘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료품 코너 쪽으로 이동했다. 에어컨 바람에 보윤의 뒤통수가 자꾸만 오소소 날렸다. 기재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야, 엄보윤.”

“왜?”

보윤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마주쳤다가 미끄러졌다. 기재는 고개를 돌리며 씁, 혀를 찼다.

“아니다.”

“싱겁긴.”

둘의 카트는 자꾸만 시식코너 앞에 멈췄다. 군만두와 불고기를 지나 떡갈비, 홍초 주스와 꼬깔콘을 돌고 돌았다. 둘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계속 집어먹었고 세 번째 돌았을 때는 매장 직원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직원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제발을 저린 기재가 먼저 사과한 후 카트를 끌고 도망쳤다. 야, 어디가! 보윤이 쫄래쫄래 따라왔다. 둘은 시식코너로부터 멀어졌다. 과자코너 쪽에 도착했을 때 보윤이 카트에 탔다. 기재는 무거워서 운전하기 어렵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내리라곤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이걸 다 쓸어가는 거야. 네가 안 떨어지게 잘 받아서 넣어.”

기재는 보윤의 품으로 과자봉투를 마구 집어던졌다. 보윤이 받기엔 너무 많은 양이 아주 빠르게 카트 안으로 들어왔다.

“씨바 좀 천천히 조준해!”

“아, 요령이 없어, 요령이!”

둘은 과자봉투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기재가 카트를 끌고 쏜살같이 코너 끝에서 끝으로 달렸다. 보윤은 카트에 다리를 쭉 걸친 채로 손만 뻗어 빼빼로를 쓸어 담았다. 코너 끝에 도착했을 때 보윤은 과자에 가득 파묻혀 있었다. 보윤이 가슴팍에 얹어진 콘칩 봉지를 한쪽으로 치우며 투덜거렸다.

“진짜 최원호는 우리한테 존나 고마워해야해.”

“당연한 거 아니냐. 눈물도 흘려야지.”

“이별의 날 때보다 더 흘리라고 해.”

“야, 당연하지. 그건 운 것도 아니었지. 엄보만큼은 울어야 울었다고 할 수 있는 건데.”

“야이씨,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그거. 쪼금 훌쩍거린 거 가지고…….”

보윤은 민망한 듯 입맛을 쩝, 다시다 기재를 올려다보았다.

“넌 진짜 그럴 때 안 울고 대체 언제 울어.”

“나?”

기재는 미묘하게 웃었다.

“몰라, 그냥 울 땐 울어.”

“최원은 너 우는 거 본 적 있다는데 왜 씨바 나한텐 안 보여 주냐. 나도 두고두고 놀릴 자신 있는데. 언제 울어줄 거야.”

“울겠냐?”

기재가 낄낄거리며 손을 뻗었다. 보윤은 단단히 그 손을 붙잡고 위태롭게 내렸다. 보윤의 몸이 카트를 빠져나올 때 과자 몇 봉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둘은 카트를 끌고 계산대까지 걸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기재는 보윤의 얼굴을 한 번 더 훑다가 그만뒀다. 말은 목구멍에서 막혀 올라오지 않았다. 그 땐 미안해.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보윤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할 지도 모른다. 됐어, 뭘. 그렇게 넘겨버릴 것이다. 하지만 기재는 이따금 보윤이 두려웠다.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명왕성은 소행성 134340가 되어버렸다. 그건 언젠가 기재는 보윤 주변을 맴돌 134340명의 위성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예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늘 잘 보이고 싶었고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확실한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가족에게조차 느끼지 못 하는 그것을 주던 원보기 트리오에게 인생의 일부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W는 떠나버리고 말았으며 차차 멀어지고 있었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지만 그뿐이었다. W는 새 여친이 생겼고 육상을 그만뒀다. 그리고 경기도보다 더 아래에 있는 시골 촌 동네에 있었다. 다신 카페테리아에 모이거나 함께 어울릴 수 없었다. 보윤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까?

계산대 앞에 선 채로 기재는 가정해본다. 엄보윤에게, 그 때 엄보윤에게 가장 먼저 뛰어갔더라면.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가장 먼저 뛰어가서 울어버렸다면. 그럼 좋았을까. W보다 보윤을 더 오래 보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기재는 잘못 선택한 것 아닌가. 그 순간을 나눠야하는 건 엄보윤이어야 했을까.

“야, 엄보윤.”

“또 왜.”

“……쓰읍, 아니다.”

“아, 이 새끼 또 이러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말은 여전히 목구멍에 단단히 박혀 있고 기재는 아무래도 몇 번의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계산이나 하자.”

“편지 안 쓰냐?”

“닥쳐, 좀.”

미안해, 혹은 너희를 정말 사랑해. 때를 놓친 말은 왜 이렇게 무겁거나 너무 가볍게 혹은 너무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기재는 입을 다물고 웃었다. 카트를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엄보윤을 태우고 자꾸만 나아가고 싶었다.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가능하다면 인생 정중앙까지.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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