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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원보기 트리오»
1차/old 2019. 10. 30. 00:57

1.

행성 같은 사람을 보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같은 반이던 W는 어디 서든 아이들을 끌어 모았다. 서있으면 절로 눈길이 갔다. 단지 잘생겨서만은 아니었다, 분명 뭔가 있었다. W에게서 페로몬이 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W와 어울리고 싶어서 다들 정말이지 침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기재도 그 무리에 껴있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W의 가장 가까이서 돌 수만 있다면, 가장 크고 가까운 위성이 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다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조가 되어야 하고 방과 후엔 같이 피씨방에 가야만 했다. 기재는 의외로 순순히 W의 가까운 위성이 되었다. W의 짝꿍으로 앉은 한 달 동안 별의별 이야기를 다 나눈 탓이었다. W는 종종 “내 베프야.”하고 기재를 소개했다. 그럴 때면 괜히 우쭐해졌다.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가슴이 붕 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겨울방학 때 몇 명의 친구를 더 사귀었다. 옆 동네 사는 옆 초등학교 애들은 기재보다 키가 큰 아이들이 더러 껴있어 보다 어른스러워보였다. 어디서든 중심이던 W는 자신의 무리를 끌고 옆 동네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어디 초 다니냐? 아, 옆이네. 너희도 놀 거지? 기재는 W보다 조금 뒤에 서있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옆 동네 무리의 중심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곳에도 행성은 있었다. 기재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애는 씩 웃었다. 잘생긴

그러니까 이것은 엄보윤 너에 대한 이야기다.

 

2.

“아 존나 더워.”

“여름이잖아.”

“누가 모른대?”

“누가 엄씨 아니랄까 봐 엄살 쩐다.”

“김기 시비 거냐.”

보윤이 기재 쪽으로 발길질을 했다. 기재는 능숙하게 엉덩이를 빼며 물러났다. 낄낄거리며 짧게 술래잡기를 했다. 오래된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드레일을 두고 차 한 대가 느릿느릿 지나갔다. 둘은 금방 지쳤고 뛰기를 그만뒀다. 보윤이 입맛을 다시며 땀을 닦았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기재가 동의했다.

“나도.”

“진짜 존나 더워 진짜 진짜로.”

“알아.”

“아랫동네는 덜 덥겠지?”

“아마 과학시간에 배우기로 그랬던 것 같다.”

둘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아랫동네, 하고 떠오른 누군가 때문일 테였다. 버스 한 대가 지나쳐갔을 때 뜨거운 배기가스가 훅 끼쳤다. 보윤이 얼굴을 찡그렸다.

“최원호한텐 연락 없냐?”

“원호? 매일 하지.”

“와, 최원 존나 나빴다. 나한텐 꼴랑 삼일에 한 번 하는데.”

“내가 매일 연락해서 그런 걸 걸.”

그렇게 말하는 기재의 목소리는 아주 미묘하게 풀이 죽어있었다.

“내가 매일 깨톡 안 보내면 걔도 그렇게 자주는 연락 안 할 것 같은데.”

엄보윤과 김기재의 친구 최원호는, 그러니까 W는 작년 겨울 전학을 갔다. 경기도보다 조금 더 아래 있는 동네라고 들었지만 지역명은 언제 들어도 가물가물했다. 거기서도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W의 입으로 들은 것이지만 기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W에겐 W만의 중력이 있어서 언제든 사람이 이끌려 맴돌게 됐다.

“어제 듣기론 원호 걔 여친도 생겼다더라.”

“와, 빠르다. 하긴 걘 원래부터 조온나 인기가 많았으니까.”

보윤은 알만 하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허공으로 젖혔다.

“야 이거 어째 원보기 트리오의 위상을 이어가는 건 이제 최원호뿐인 것 같다?”

기재는 보윤의 옆모습을 훑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넌 그래도 계속 고백 받잖아.”

“아니, 뭐, 그거야 내가 좀 잘나서.”

“얼씨구.”

“그러니까 우리 김기도 노력합시다, 응?”

“지랄하지 말고.”

둘은 이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몇 미터를 앞두고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연습을 마치고 걸을 때만 해도 햇볕은 이렇게까지 뜨겁지 않았다. 좀 멀리까지 걸어보자고 했던 건 분명 생각 없는 짓이었다. 기재는 보윤에게 조금의 미안함을 느꼈지만 보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엄보, 우리 남은 거리는 버스 타고 가자.”

“어, 그래.”

“거절하면 죽빵 갈길 생각이었는데 존나 다행이다.”

“막말 쩌네.”

보윤은 시원스럽게 웃다 말고 턱짓으로 정류장을 가리켰다.

“야, 김기.”

“왜.”

“저기까지 시합할래?”

“미친…….”

“하는 거다, 시작!”

보윤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기재의 몸이 절로 그를 쫓아 움직였다. 육상부에 들어와 가지게 된 버릇이 있다면 추월하는 사람을 따라 몸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땡볕을 달리는 동안 매미소리가 멀어졌다. 둘은 땀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으헉 으헉 숨을 몰아쉬었다. 버스정류장 위엔 나무 그늘이 있어 조금 시원했다.

이긴 건 보윤이었다.

‘엄보윤 죽인다.’

땡볕을 걷게 해서 미안했던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보윤 역시 미련한 짓을 했으니 쌤쌤인 셈이다. 호흡을 정리하던 기재는 보윤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엄보윤 뒤질래?”

“아, 학, 하학, 김기, 표정존, 나 웃겨.”

“그만 쳐웃어. 숨 넘어 가겠다.”

매미소리가 다시 짙어졌다. 기재는 헐떡이며 웃다 말고 고꾸라지는 보윤을 일으켜 세웠다. 보윤의 축축한 손이 기재의 팔꿈치를 잡았다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기재는 보윤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을 잡으며 보윤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둘은 의자에 앉아 전광판을 바라봤다. 같은 버스를 타야 했다. 갈 곳이 있었다. 

“아주 편지라도 쓰지 그러냐.”

정성에 탄복한다는 듯 보윤이 웃었다. 잠시 후 도착 버스에 둘이 타야 할 버스 넘버가 떴다. 기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래. 맨날 연락하는 사이에 존나 낯간지럽게 편지까지.”

그러니까 둘은 W에게 보낼 과자를 사러가는 길이었다.

 

3.

엄보윤은 W와 아주 빠르게 친해졌다. 그 날, 양 측의 초등학교가 겨울방학을 맞이하던 날 뒤엉켜 놀던 소년들은 아주 많았지만 껌딱지처럼 붙게 된 건 그 둘뿐이었다. 태생적으로 죽이 잘 맞는 관계라는 게 있다면 보윤과 W일 지도 몰랐다. 기재는 그 사이에 얼결에 끼게 됐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보윤과 W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었다. 둘은 어디서든 정말이지, 인기가 많았고 중심에 있었다. 둘이 없다면 기재가 중심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둘이 있는 이상 그것은 기재의 특성이 될 수 없었다.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탐나는 것도 아니었다. 욕심도 없었고 무리에 어울려 즐겁다면 그만이었다. 그런 이유로 W와 보윤, 그리고 기재는 아주 빠르게 친해졌다. 동네 탓에 중학교 역시 갈라졌지만 문제없었다. 수업이 일찍 끝난 날엔 W와 함께 보윤의 학교에서 아이들이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반대의 날엔 보윤이 그들의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양쪽 학교의 아이들은 셋을 묶어서 원호보윤기재, 줄여서 원보기 트리오라고 불렀다. 소규모지만 나름 팬도 있었다. 수학여행 때면 타 학교 학생인데도 이름이 종종 불렸다. 원체 고백을 많이 받던 W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보윤도 비슷한 눈치인 것 같았다. 기재는 중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진 특별히 진중한 고백을 받아본 적이 몇 번 없었기에 쏟아지는 관심이 얼떨떨했다. W와 보윤 사이에 서있으면 기재 같은 소년도 총애를 받는 모양이었다. 기재는 자신이 명왕성 같았다. 행성으로 불리고 있지만 언제든 밝혀져 위성으로 퇴출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까진 이 애들과 어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보윤과 W가 좋았다. 으스대는 마음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 친구라고 여겨졌던 까닭이었다. 사랑했다. 오래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중학교 1학년 중반 무렵 W가 선언했다.

“야, 나 여친 생겼다.”

보윤은 카페테리아에 앉아 무심하게 휴대폰을 누르며 오, 축하한다, 라고 대꾸해주었다. 기재도 별 생각 없이 축하한다고 대답했다. W는 히죽히죽 웃었다.

“사진 볼래? 존나 예뻐.”

“됐어, 금방 바뀔 거잖아.”

“야이씨, 김기재 진짜……. 그건 모르는 일이지 임마.”

W가 기재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보윤이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발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둘을, 정확히는 W의 다리를 찼다.

“와, 우리 김기한테 왜 그러냐. 최원 존나 애를 갈구네 갈궈.”

“악, 미친아! 엄보윤 씨발 지금 너 내 다리 차고 있거든?”

기재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보윤과 W는 박장대소하며 테이블에서 뒹굴었다.

“아, 말을 하지.”

“씨바 편을 들어줄 거면 제대로 보고 차야지!”

그런 나날들이었다. W가 연애를 했다고 트리오가 해산되는 일은 없었다. 기재의 말대로 W의 여친은 금방 바뀌었다. 셋은 여전히 패스트푸드점, 카페테리아, 분식집에서 결성해 마구잡이로 떠들어댔다. 주로 새로 사귄 여자친구, 어제 받은 고백이야기 혹은 그제 키베 뜬 온라인 어그로꾼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종종 흐름이 끊어질 때가 있었다. W의 휴대폰이 울리면 기재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됐다. 여자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W는 대화를 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왜?”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재와 보윤은 종종 둘만 남겨졌는데, 가을이 끝날 무렵엔 보윤 역시 여자 친구가 생겨 W와 똑같이 굴었다. “어, 왜?” 그렇게 말한 후 W 혹은 보윤은 기재를 두고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이면 볼 수 있었고 원한다면 당장 밤에 불러낼 수 있었는데도 기재는 그 순간이 서운했다. 그래서 평소 조금 눈여겨보던 여자아이가 고백해왔을 때 거절하지 않고 받아버리고 말았다. 조금의 오기가 있던 셈이었다.

중학교 1학년 말 겨울, 마침내 트리오 중 가장 늦게 김기재가 보고했다.

“야, 나 여자 친구 생겼다.”

두 친구는 정말 당연한 일을 들었단 듯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축하해.”라고 대꾸했다. 그들은 기재가 인기가 있다거나 고백을 받는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제 셋은 동시에 연애를 하게 된 셈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어, 왜?”는 계속됐다. 기재의 여자친구는 조용한 모범생이었고 기재와 함께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손바닥이 따뜻하고 조곤조곤 말하며 눈이 예쁘고 총명해서 기재를 종종 붕 뜨게 만들었다. 얼결에 시작한 연애지만 기재는 정말 그 애가 좋아졌고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 무엇이든 해줬다. 100일엔 엄보윤과 W를 불러다 노래방에 양초를 깔고 발라드를 불러주기도 했다. (다시 생각하자면 정말 오글거리는 짓이다. 그 때 엄보윤이 얼마나 투덜거렸던지.) 그러나 한 가지 일만큼은 해주지 않았다. 기재는 여자 친구가 예고도 없이 전화를 걸었을 때 두 친구와 함께 있다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어, 왜?”를 위해 시작한 연애였는데 “어, 왜?”는 해보지도 못 한 셈이었다. 이유를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싫었다. 둘과 함께 있을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고 막연하게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져서, W는 겨우 같은 고등학교에 올라오자마자 전학을 가버리고 말았다. 떠날 때 의외로 울음을 터뜨린 건 W와 보윤이었다. W는 울음을 겨우 참았고 보윤은 조금 눈물을 보였다. 기재만이 얼떨떨하게 서있었다. 분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볼 건데. 고깟 거리가 조금 멀어진다고 붕괴되는 거 아닌데. 우리는 트리오니까. 우리는 트리오니까 말이다.

그러나 종국엔 기재 역시 그 때 울어버리고 말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됐다. 

 

4.

마트는 에이컨이 빵빵했다. 보윤이 환희에 찬 몸짓으로 티셔츠를 마구 잡아 흔들었다. 기재는 카트를 끌고 느릿느릿 보윤 옆에 섰다. 해피해피해피이마트. 노래가 산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평일 낮에도 대형 마트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야, 뭐 살 거냐.”

“몰라, 보고.”

“김기, 돈 많나보다.”

“돈이 많으면 이런 대형할인마트에 오겠냐. 씨바 면세점을 쓸지.”

“개웃기다. 최원호 존나 샤넬, 루이비통 이런 거 두르고 막.”

보윤이 낄낄거렸다. 둘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료품 코너 쪽으로 이동했다. 에어컨 바람에 보윤의 뒤통수가 자꾸만 오소소 날렸다. 기재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야, 엄보윤.”

“왜?”

보윤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마주쳤다가 미끄러졌다. 기재는 고개를 돌리며 씁, 혀를 찼다.

“아니다.”

“싱겁긴.”

둘의 카트는 자꾸만 시식코너 앞에 멈췄다. 군만두와 불고기를 지나 떡갈비, 홍초 주스와 꼬깔콘을 돌고 돌았다. 둘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계속 집어먹었고 세 번째 돌았을 때는 매장 직원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직원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제발을 저린 기재가 먼저 사과한 후 카트를 끌고 도망쳤다. 야, 어디가! 보윤이 쫄래쫄래 따라왔다. 둘은 시식코너로부터 멀어졌다. 과자코너 쪽에 도착했을 때 보윤이 카트에 탔다. 기재는 무거워서 운전하기 어렵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내리라곤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이걸 다 쓸어가는 거야. 네가 안 떨어지게 잘 받아서 넣어.”

기재는 보윤의 품으로 과자봉투를 마구 집어던졌다. 보윤이 받기엔 너무 많은 양이 아주 빠르게 카트 안으로 들어왔다.

“씨바 좀 천천히 조준해!”

“아, 요령이 없어, 요령이!”

둘은 과자봉투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기재가 카트를 끌고 쏜살같이 코너 끝에서 끝으로 달렸다. 보윤은 카트에 다리를 쭉 걸친 채로 손만 뻗어 빼빼로를 쓸어 담았다. 코너 끝에 도착했을 때 보윤은 과자에 가득 파묻혀 있었다. 보윤이 가슴팍에 얹어진 콘칩 봉지를 한쪽으로 치우며 투덜거렸다.

“진짜 최원호는 우리한테 존나 고마워해야해.”

“당연한 거 아니냐. 눈물도 흘려야지.”

“이별의 날 때보다 더 흘리라고 해.”

“야, 당연하지. 그건 운 것도 아니었지. 엄보만큼은 울어야 울었다고 할 수 있는 건데.”

“야이씨,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그거. 쪼금 훌쩍거린 거 가지고…….”

보윤은 민망한 듯 입맛을 쩝, 다시다 기재를 올려다보았다.

“넌 진짜 그럴 때 안 울고 대체 언제 울어.”

“나?”

기재는 미묘하게 웃었다.

“몰라, 그냥 울 땐 울어.”

“최원은 너 우는 거 본 적 있다는데 왜 씨바 나한텐 안 보여 주냐. 나도 두고두고 놀릴 자신 있는데. 언제 울어줄 거야.”

“울겠냐?”

기재가 낄낄거리며 손을 뻗었다. 보윤은 단단히 그 손을 붙잡고 위태롭게 내렸다. 보윤의 몸이 카트를 빠져나올 때 과자 몇 봉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둘은 카트를 끌고 계산대까지 걸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기재는 보윤의 얼굴을 한 번 더 훑다가 그만뒀다. 말은 목구멍에서 막혀 올라오지 않았다. 그 땐 미안해.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보윤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할 지도 모른다. 됐어, 뭘. 그렇게 넘겨버릴 것이다. 하지만 기재는 이따금 보윤이 두려웠다.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명왕성은 소행성 134340가 되어버렸다. 그건 언젠가 기재는 보윤 주변을 맴돌 134340명의 위성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예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늘 잘 보이고 싶었고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확실한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가족에게조차 느끼지 못 하는 그것을 주던 원보기 트리오에게 인생의 일부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W는 떠나버리고 말았으며 차차 멀어지고 있었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지만 그뿐이었다. W는 새 여친이 생겼고 육상을 그만뒀다. 그리고 경기도보다 더 아래에 있는 시골 촌 동네에 있었다. 다신 카페테리아에 모이거나 함께 어울릴 수 없었다. 보윤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까?

계산대 앞에 선 채로 기재는 가정해본다. 엄보윤에게, 그 때 엄보윤에게 가장 먼저 뛰어갔더라면.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가장 먼저 뛰어가서 울어버렸다면. 그럼 좋았을까. W보다 보윤을 더 오래 보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기재는 잘못 선택한 것 아닌가. 그 순간을 나눠야하는 건 엄보윤이어야 했을까.

“야, 엄보윤.”

“또 왜.”

“……쓰읍, 아니다.”

“아, 이 새끼 또 이러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말은 여전히 목구멍에 단단히 박혀 있고 기재는 아무래도 몇 번의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계산이나 하자.”

“편지 안 쓰냐?”

“닥쳐, 좀.”

미안해, 혹은 너희를 정말 사랑해. 때를 놓친 말은 왜 이렇게 무겁거나 너무 가볍게 혹은 너무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기재는 입을 다물고 웃었다. 카트를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엄보윤을 태우고 자꾸만 나아가고 싶었다.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가능하다면 인생 정중앙까지.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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