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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새로운 시도»
1차/old 2019. 10. 8. 18:44

 삼신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았는데도 반짝 눈을 떴다. 토요일 오전 7 50분이었다.

해는 이미 떠올라서 창밖으로 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눈곱 낀 눈이 찝찝했다. 삼신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발치에서 금란이 데굴데굴 굴러다니고 있었다. 금란은 가족 중 잠버릇이 제일 나빠서 일찍 일어나면 꼭 저런 진풍경을 연출했다. 쌍둥이 동생 은주는 얌전한데 왜 저 혼자 좁아터진 방을 정복하려고 저럴까. 한 배에서 거의 똑같은 시간에 비슷한 얼굴로 태어난다고 해도 사람은 결국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머리를 묶고 부엌으로 나온 삼신은 주방 쪽으로 난 작은 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 솥에 쌀을 담아 불을 올렸다. 어제 남은 된장국이 있으니 계란만 구워주면 된다. 미리미리 해두면 할 일을 더는 법이다. 살아가는 방법은 결국 다 거기서 거기다. 공부든 요리든 집안일이든, 미리미리 해놓으면 결코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는다. 삼신은 진작부터 그런 일들을 깨우쳤다.

 냉장고를 연 삼신은 파와 계란 다섯 알을 꺼내 올려놓곤, 칼을 꺼내 도마를 내리쳤다. , 하고 올라오는 충격이 손바닥에 가득 찼다. 찌릿찌릿했다. 삼신은 한동안 칼자루를 쥐고 만지작거리며 얌전히 서있었다. 싸늘한 새벽바람이 불었다. 앞머리가 흔들리자 이마가 간지러웠다. 삼신은 칼을 바로잡곤 파를 썰기 시작했다. 된장국이 부글부글 끓었다.

  밥솥에서 김이 솟는데도 동생들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삼신은 계란을 신경질적으로 마구 풀었다. 녹색 파가 노란 물 안으로 침몰했다가 솟아올랐다가 했다. 소용돌이 속에서 거품이 났다. 삼신은 프라이팬을 꺼내고 불을 올리고 기름을 둘렀다. 달궈질 때까지 기다리면서 계속 계란을 저었다. 거품이 나면 멈춰서 소금을 조금씩 뿌렸다. 그리곤 프라이팬에 그걸 전부 부어넣었다. 익는 냄새가 황홀했다. 삼신은 계란말이를 제일 잘 한다. 그 다음으로 잘 하는 건 김치찌개다. 하지만 후자는 많이 하지 않았다. 계란말이보다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아침 8시 반이 됐다. 된장국도 팔팔 끓었고 계란말이도 다 됐다. 밥솥을 열자 쌀밥에서 김이 모락모락 올랐다. 이제 삼신은 동생들을 깨워야했다. 깨우기 싫었지만, 금란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올해부터 가까운 백화점 문화 강습센터에서 바이올린 레슨을 시작한 금란은 주말 아침마다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다. 레슨은 한 달에 삼십 오만원이나 한다. 늦잠 자는 걸 방치하다간 돈을 날리게 될 것이다.

  삼신은 문을 열어젖히고 동생들을 발로 찼다. 세게 차진 않았다. 그건 폭력이니까.

 대신 소리를 질렀다.

  금은동! 일어나!”

  삼신에겐 세 명의 동생이 있다. 여동생 둘, 남동생 하나. 둘은 쌍둥이고 한 명은 막내아들이다. 각각 이름은 이금란, 이은주, 이동래고, 삼신은 이 셋을 금은동이라 불렀다. 하지만 셋이 금은동만큼 값지고 귀하다고 느껴진 적은 없었다.

  금은동들이 꿈틀거리며 이불로 기어들어갔다. 삼신은 이불을 성큼성큼 밟고 걸어가 금의 등을 빵 찼다. ! 금란이 비명을 지르며 일어났다.

  , 미쳤어! 왜 차! 왜 차?”

 “밥 먹고 튀어나가도 늦을 판이라서 찼다, 어쩔래! 너 레슨 아홉 반에 하잖아. 지금 몇 신지 알아?”

  금란은 시계를 확인하고도 밍기적거리며 누워있었다. 삼신은 그 게으른 태도가 정말 화가 났다. 하지만 한 번 더 발로 찼다간 진심으로 걷어찰 지도 몰라서, 대신 한 번 더 소리만 질렀다.

  너 바이올린 배우고 싶대서 엄마가 무리해서 돈 대주신 거잖아! 너도 하고 싶다고 졸라서 시작한 일이잖니? 왜 자기가 좋다고 시작한 일에도 게으름을 피우는 거야? 그 돈이 아깝지도 않아?”

  금란은 입을 빼죽 내밀곤 보란 듯이 이불을 뻥 찼다. 그리곤 짜증난 얼굴로 일어났다.

  오늘 아침 뭐야?”

 “된장국이랑 계란말이.”

 “, 싫어! 된장국 어제도 먹었단 말이야!”

 “어쩔 수 없잖아.”

 “아악! 진짜!”

  금란은 투덜거리면서 밥상에 앉았다. 삼신은 계란말이를 썰어서 네 개씩 나눴다. 오늘의 계란말이는 아주 예쁘게 됐다. 금란은 젓가락으로 쿡 집어보곤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맛있었는지 불평은 싹 잊고 금방 다 먹었다. 된장국은 조금 남겼다. 레슨 시간까지 삼십분이 좀 남았다. 그제야 조급해진 금란은 옷을 갈아입고 가방을 메고 얼굴을 씻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삼신은 금란이 먹고 간 그릇을 싱크대에 담아놓고 밖으로 나왔다. 날씨는 맑았지만 쌀쌀해서 입김이 나왔다.

  삼신은 주말엔 할 일이 아주 많다. 학교 다닐 때보다 더 바빴다. 겨울방학을 맞이한 이후엔 거의 매일 집안일을 했다. 아침밥을 하고, 잠깐 산책을 하고, 돌아와서 장을 보고, 나머지 공부를 하고, 저녁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내려와서 탕 청소를 돕고, 다시 올라와서 화장실 변기를 닦고 거실도 박박 쓸고 닦았다. 집안일을 항상 하는 건 아니어서 가끔 혼자 시내에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좀처럼 할 일을 찾을 수 없어서 그냥 걸어 다니다 돌아와야만 했다. 삼신의 휴대폰엔 번호가 아주 많았지만 방학이나 주말에 따로 놀러가자고 할 수 있을 만한 그룹은 없었다. 하지만 삼신 휴대폰에 들어있는 모두는 길거리에서 가끔 삼신을 마주칠 때마다 반갑게 안녕.”하고 웃어주었다. 얼마 전엔 같이 수행평가를 했던 A T를 만났다. 둘은 이번 겨울방학에 리조트로 여행을 갈 거라고 했다.

  삼신아, 너도 한 번 가 봐. 홈페이지에서 봤는데 거기 온천 풀장도 있다더라. 스키장도 8시까지 해.”

  그들은 같이 가자, 대신 한 번 가 봐, 라고 했다. 삼신은 그게 별로 서운하다거나 하진 않았지만, 설령 같이 가자 말했어도 그러마.”라고 하지 못 했을 것이다. 리조트는 너무 비싸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신은 아주 바빠서 혼자 그곳으로 떠날 수 없었다. 하지만 스키나 보드, 설산과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거대한 욕탕 같은 건 드라마에서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고마워. 나중에 한 번 찾아볼게.”

  삼신은 웃으며 둘에게 손을 흔들었다. 둘도 삼신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곤 학원 가방을 매고 상가 안으로 사라졌다. 삼신은 고개를 들어 거대한 상가 건물을 바라봤다. 사거리엔 언제나 학원 간판이 빽빽했다. 그건 밤새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보였다. 삼신은 언제나 그 속이 궁금했지만, 한 번도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학원을 다니는 애들은 다 학원이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는데, 그것도 공감대라는 것일까? 학원에도 소속감이라는 게 있을까? 학교보다 더 시끄러운 곳일까? 교실이 학교 교실만할까? 이런 건 드라마에선 나오지 않는다. 학원이 어떻게 생겼는지, 애들은 어떻게 노는지, 어떤 말을 하고 살아가는지 보여주지 않는다. 드라마에는 언제나 사랑과 배신이, 질투와 분노가, 격정과 의심이 있었고, 대체로 그런 것만을 보여줬다. 그러니까 통상적으로 재미있을 법한 것들. TV는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법한 세상사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학원이나 십대 아이들의 가십거리 같은 건 그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기에 방영하지 않는 것일까? 이미 다들 알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삼신은 모른다. 모르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세상 그 누구도 궁금해 하지 않는 세상에 대해 궁금해 하는 유일한 아이가 된 것만 같다. 삼신은 문득 A T 같이 가자고 말해줬으면 좋았을 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했다. 하지만 금방 떨쳐냈다.

  그러나 오늘은 학원가에 가지 않을 것이다. 삼신은 따로 갈 곳이 있다. 학원가에서 좀 더 떨어진 곳, 알파 문구점 건너편에 있는 건물. 신호가 좀 길지만, 길을 건너면 아주 큰 음반매장이 있다. 삼신이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거기선 돈을 내지 않아도 원하는 음반을 세 곡 들을 수 있다. 음악도 아주 많아서 어지간한 건 다 찾아서 들을 수 있었다. 히터도 빵빵하게 나온다.

 자동문을 열자 따뜻한 바람이 쏟아졌다. 추위로 새빨개진 볼을 문지르며, 삼신은 목도리를 벗고 벙어리장갑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사람이 얼마 없었지만 아주 없는 것도 아니었다. 삼신은 구석에 서서 헤드폰을 눌러쓰고 노래를 검색했다. 그리곤 재생버튼을 눌렀다. 오늘은 팝송을 들을 것이다. 차유성이 알려준 곡인데 째지는 보컬의 목소리가 아주 마음에 들어서, 주말이 되면 꼭 여기서 다시 들을 거라고 다짐했었다. 유성이는 좋은 소꿉친구다. 드라마엔 나오지 않는 곡들도 알려주니까. 차유성은 어디서 그런 노래를 찾아다 듣는지 모르겠다. 그 앤 클래식도 듣고 락음악도 듣고 헤비메탈도 듣고 아리아도 들었다. 삼신은 그 옆에 붙어서 아무 노래든 다 들었다. 가끔은 그 애랑 영화도 봤다. 차유성은 음악처럼 아무 영화나 잘 들고 왔고, 삼신은 들고 온 거라면 무엇이든 다 봤다. 최근에 본 것 중에선 타이타닉이 제일 좋았다. 사랑과 죽음이 그렇게 세련될 수도 있다니! 왜 한국 드라마는 저런 걸 만들지 않는 것일까? 삼신의 가족은 음악이나 영화와는 거리가 멀었으므로, 유성이 없었다면 삼신은 평생 타이타닉을 보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유성아, 나는 아주 다른 삶을 살고 싶은데, 너랑 있으면 그런 걸 미리 경험하는 것 같아서 좋아.”

 바닥에 엎어진 채 삼신이 이어폰 줄을 풀며 중얼거렸다. 유성이는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잘 됐네. 그럼 이것도 들어 봐. 이어폰 줄 그냥 안 풀어도 돼. 꼬인 채로 들어.”

 “그래도 돼?”

 “안 될 거 있어?”

  유성은 삼신의 이어폰을 잭 구멍에 연결했다. 노래가 아주 커서 삼신은 깜짝 놀랐다.

  !”

 “, 거기선 커?”

 유성은 볼륨을 줄였다. 삼신은 귀를 감싼 채로 노래를 들었다. Party girl, don't get hurt, Can’t feel anything, when will I learn……. 보컬은 여자고, 째진 목소리에, 날카롭고 서늘했다.

 “누군데?”

 “Sia.”

 삼신은 클라이막스를 듣다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 이거 알아!”

 “Chandelier가 유명하긴 하더라.”

 유성은 삼신의 휴대폰으로 메모를 해줬다.

 “맘에 들면 가서 들어.”

 삼신은 휴대폰을 열어 메모장을 켰다. 유성이 써준 메모는 제일 위에 있었다. 그 아래도 유성의 메모였다. 그 아래도, 그 아래도…… 삼신은 휴대폰 메모장을 잘 쓰지 않아서 대부분은 유성이 알려준 곡 메모밖엔 없다.

 삼신은 트렉을 찾았다. Sia는 곡을 아주 많이 냈는데, Chandelier옆엔 HOT표시가 떠있었다. 그 말은 즉 히트곡이란 뜻이다. 삼신이 알고 있으니 히트곡인 것도 무리는 아닐 터다. 노래를 클릭하자 가사가 떴다. 삼신은 가사를 읽었다. 파티걸들은 상처입지 않아, 아무 것도 느끼지 못 해, 난 언제쯤 배울 수 있을까…….

 가사가 난해하네.’

 삼신은 멀뚱멀뚱 서있었다.

 ‘하지만 뭘 말하고 싶은지는 알겠어.’

 삼신은 나머지 두 곡으로 Sia의 다른 곡을 들었다. 그 곡들도 좋았다. 좋아하는 아티스트가 생긴 것이다. 유성이는 언젠가 그걸 취향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게 하나 둘 모이면 네 취향이 되는 거지. 그걸 만들어 놓으면 나중에 엄청 많은 곡에 둘러싸여도 네 맘에 드는 걸 금방 찾을 수 있어.”

 그 뒤로 삼신은 유성의 메모를 지우는 대신 쌓아두기 시작했다. 휴대폰이 초기화 된다면 몹시 슬플 것이다. 유성의 메모가 아주 많으니까.

 음반 가게를 나온 삼신은 버스를 타고 돌아와 마트에 들렀다. 지갑의 돈을 확인하고 스팸과 통조림 등을 샀다. 집에 돌아오니 저녁 7시쯤이었다.

 누나 왔어?”

 언니 왔어?”

 언니! 오늘 저녁은 뭐야?”

 거실에서 TV를 보던 금은동이 현관 쪽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스팸찌개!”

 삼신이 봉투를 흔들었다. 금과 은과 동은 와하하 웃었다.

 “무한도전 다 보고 먹을게!”

 “나도!”

 “언니도 무도보자!”

 “난 안 볼 거니까 문 닫아.”

 “공부할 거야?”

 “. 볼륨도 좀 줄여.”

  금은동은 문을 닫고 볼륨을 줄였다. 삼신은 마트봉투를 내려놓고 식탁에 앉았다. 그리곤 간밤에 채 다 하지 못 한 시험지를 풀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전교 10등 안에 드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조금도 게을리 공부해선 안 됐다. 중학교 겨울방학은 선행학습을 위해 마련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삼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학원을 다니지 않으니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됐다.

  푸는데 얼마 걸리진 않았다. 수학은 늘 빨리 쉽게 풀렸다. 삼신은 채점을 해봤다. 마흔 다섯 개의 문제 중에서 두 개를 틀렸다. 이 정도면 괜찮다. 아니다, 괜찮지 않다. 돌아오면 복습을 하자. 그러면 된다.

  삼신은 남은 된장국을 한쪽에 치워놓고 솥에 남은 밥을 확인하고 새 냄비를 꺼내고 물을 담고 고추장을 퍼내고 스팸을 따고 불을 올렸다. 아침에 계란말이에 넣다 만 썰어놓은 파도 같이 넣고 저었다. 스팸찌개 냄새가 나자 무한도전 다 보고 먹겠다는 금은동이 뛰쳐나왔다. 삼신은 모락모락 김이 오르는 찌개를 밥그릇 안에 말아줬다. 동생들은 빨리 많이 먹었다. 삼신은 천천히 조금 먹었다. 다 먹고 설거지를 했다. 어쩐지 싸늘하다 싶었는데 아침에 열어둔 창문을 닫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다. 삼신은 고무장갑을 널며 창문을 닫았다.

 탕 청소를 하러 내려가자, 아빠가 먼저 반겨줬다.

 우리 신이 왔냐!”

 아빠가 삼신을 꼭 껴안았다. 삼신은 낄낄 웃으면서 그 품에 매달렸다가 떨어졌다. 아빠는 삼신에게 고무장갑과 솔과 락스를 주었다.

 여탕 손님 다 빠졌으니까 들어가서 해도 될 거다.”

 엄마는?”

 “오늘은 엄마가 카운터 보는 날이야.”

 “힘들었겠네.”

 “인마, 아빠도 고생했어.”

 “알아요.”

  삼신은 캐비닛을 지나 빈탕으로 들어섰다. 사람이 빠진 탕은 언제나 좀 차가워 보인다. 실제론 습하고 따뜻한데도 뭔가 좀 부족해 보인다고나 할까 삼신은 턱을 괴고 탕의 물이 모두 빠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바지와 소매를 걷고 안으로 들어갔다. 락스를 뿌리고 솔로 박박 닦았다. 땟국물 자국도 싹싹 씻었다. 목욕탕 청소는 힘들다. 락스를 부을 땐 쭈그리고 앉아야 한다. 엉덩이가 무거워서, 삼신은 그 자세가 힘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서서 부으면 여기저기 튀고, 그렇게 되면 샤워기를 틀어서 씻어내야만 한다. 그럼 물 낭비라고 엄마에게 등짝을 맞겠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기 싫은 일에는 늘 심통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심통을 부려도 좋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삼신은 언젠가 부턴 투덜거리기를 관뒀다. 살아간다는 건 변하지 않는 벽을 마주보는 일과 같았다. 그걸 넘어갈 수 있는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이 부러웠지만 부러워만 한다고 되는 일이었다면 세상을 살아가는 건 너무 쉬웠을 것이다. 삼신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당장에 해야 하는 일들에 충실했다. 그럼 부모님께 칭찬도 받고, 전교 1등도 되고, 선생님들의 예쁨도 받았다. 대체로 그런 삶을 행복하다고 하는 거겠지? “삼신아, 네가 참 부러워!”라는 여자애들의 감탄사는 별로 위로가 되진 못 했지만.

  삼신은 탕 두 개만 청소하고 나가면 된다. 나머진 엄마가 알아서 할 것이다. 그런데도 힘들어서 삐질삐질 땀이 났다. 얼굴을 씻고 밖으로 나오니 등이 흥건했다. 아빠는 삼신에게 포카리스웨트를 줬다.

 “수고했다. 올라가자.”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아빠는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삼신은 귀담아 듣지 않는 대신 말이 끝날 때마다 정말요?” “세상에!” “그러게요.” 따위의 말을 중얼거렸다. 너무 피곤했다.

 “엄마가 미안해하더라.”

 정말요?”

 그럴 만도 하지 사실 나도 거기엔 책임이 있고.”

 세상에!”

 금란이가 어찌나 떼를 쓰던지 우리도 어쩔 수 없었다. 이해해주렴. 예전엔 형편이 안 됐지만 지금은 하고 싶다고 하면 어느 정도는 해줄 수 있잖니?”

 그러게요.”

 삼신은 중얼거리다말고 얼굴을 찡그렸다.

 , 잠깐만. 뭐라고요?”

 금란이 바이올린 강습 말이다.”

 아빠는 현관문을 열며 삼신을 바라봤다.

 너도 중학교 올라가기 전에 하고 싶다고 졸랐잖니.”

 삼신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  기억하고 계셨네요.

 기억하다마다. 금란이만큼은 아니었지만 신이 너도 졸랐잖니? 그렇게 간곡하게 부탁하는 것도 처음이었지. 그 땐 어쩔 수 없었지만 , 예전 일이니까. 넌 이제 고등학교에 올라가잖니.”

 아빠는 문을 열었다.

 “집 형편 늘 이해해줘서 고맙다.”

 삼신은 바닥을 쳐다봤다.

 “아니에요.”

 삼신은 상냥한 목소리를 내려고 애썼다.

 “아빠 말대로 예전 일인데요.”

 “그래…… 예전 일이지.”

 금은동이 뛰쳐나왔다.

 “아빠!”

 아빠는 품을 벌려 그 셋을 한꺼번에 껴안았다. 삼신은 신발을 벗고 들어와 물을 마셨다. 갑자기 목이 말랐다. 삼신은 다섯 컵이나 가득 따라 마셨다.

 

 그 날 밤엔 오줌을 많이 쌌다. 내일이 입학식인데 난 몰라! 새벽 두 시까지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뒤척이던 삼신은 다시 한 번 찾아온 요기 때문에 발딱 일어났다. 화장실을 다녀왔을 때, 삼신의 자리에 금란이 팔을 올려놓고 있었다. 삼신은 드르륵 문을 닫았다. 그리곤 금란을 내려다보았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창문이 조금 흔들렸다.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이 희미하게 이불 위로 줄무늬를 그렸다. 금란은 새근새근 잤다. 친구랑 바이올린 강습에 가고 싶다고 떼를 쓸 땐 울고불고 난리를 피우며 휴지 곽을 집어던졌던 주제에 숨소리는 새근새근 얌전했다. 엄마와 아빠는 금란을 달래기 위해 절절 매며 손을 들었다. “금란아, 알겠다. 어떻게든 알아보마. 싼 곳도 있을 거다.”라는 대답을 들을 때까지, 금란은 떼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리곤 얼마 후 정말 레슨을 받기 위해 백화점에 갔다.

 삼신은 3년 전 자신도 휴지 곽을 집어던졌더라면 바이올린을 배울 수 있었을까를 생각했다. 좀 더 울며불며 난리를 쳤어야 했나. 아니면 좀 더 소리를 질렀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의젓한 척을 하느라고 너무 약하게 나갔던 걸지도 모른다. 삼신은 3년 전 부모님이 삼신에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미안한데, 신아. 우리 형편 알잖니. 잘 하다가 왜 갑자기 떼를 쓰고 그러니? 엄마 아빠 힘든 거 알잖아…….” 그 때도 목욕탕을 했었다. 빚도 있었고, 두 분은 늦게까지 일을 했다. 지금이랑 다를 바는 없었다.

 삼신은 자고 있는 금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곤 그 애의 얼굴 위로 천천히 발을 들어올렸다. 삼신은 계속해서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밟아버릴 수도 있었다. 바람이 한 번 더 세게 불어서 창문이 마구 흔들렸다. 금란이 얼굴을 찡그리곤 입술을 오물거리며 이를 갈았다. 삼신은 갑자기 마음이 텅 빈 것을 느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갑자기 그렇게 느꼈다. 누군가 나쁜 것들을 소각해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좋은 것들까지도. 삼신은 발을 내려놓곤 금란의 팔을 치우고 제 자리로 기어들어갔다. 이불 속은 미지근했다.

 ‘괜찮아. 이제 와서 바이올린 같은 거 배워서 뭐하겠어.’

 삼신은 좋은 것들이 제 속에서 타고 있다는 걸 느꼈다. 가슴이 뜨거웠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서운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삼신은 빨리 다른 생각을 하려고 애썼다. 입학식 같은 것들. 삼신의 소꿉친구 차유성은 이래고등학교에 간다. 삼신이랑 똑같다.

 ‘내일 유성이랑 같은 반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난 거기서 일등을 하는 거야.’

 ‘학년 대표로 학생 선서도 읽는 거지.

 ‘내가 일등일까? 중학교에선 내가 전교 일등이었는데.’

 ‘일등이면 좋겠다.’

 ‘장학금도 줄까?’

 삼신은 새벽 3시 무렵에 잠들었다.

 

 꿈을 꿨다. 학년 대표로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는 꿈이었다. 삼신은 교정 앞으로 나가 선서를 했다. 전교생이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다음 날, 삼신은 정말 신입생 대표로 불려나갔다. 데자뷰라는 게 정말 있구나. 삼신은 선서를 외치며 그렇게 생각했다.

 “-!”

 입학식이 마무리 되고, 남은 지시를 기다리고 있을 무렵, 삼신은 유성을 찾았다. 삼신은 방학 동안 뜨문뜨문 봤던 소꿉친구의 뒤통수가 많이 자라있는 것을 보았다. 머리카락이 어깨 근처에 있었다.

 “너 머리 많이 길었네!”

 유성은 낄낄 웃었다.

 “~ 신입생대표~ 넌 키가 하나도 안 자랐어.”

 “괜찮아! 우리 엄마도 고1때 갑자기 컸대. 나도 그럴 거야.”

 과연…….”

 삼신은 헤실헤실 웃었다.

 우리 같은 반일까?”

 “글쎄!”

 유성은 어깨를 으쓱했다. 귀에 붙은 십자가가 햇살 아래서 반짝거렸다. 아이들이 흘끔흘끔 유성과 삼신을 바라보았다. 혼자였다면 신경을 썼겠지만 유성과 함께 있어서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다.

 여기 동아리 되게 많대! 음악 동아리도 있을까? 넌 뭐 들을 거야? 나도 같이 들을까?”

아직 안 정했는데 학생회도 괜찮대서. 동아리 말고 거기 들어가는 것도 생각 중이야.”

  학생회라는 말에 근처에 선 여자애가 흘끔, 유성을 돌아보았다. 그리곤 뒤돌아 제 친구들과 무언가를 속닥이기 시작했다. 삼신은 유성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눈치 챘지만 유성은 눈치 채지 못 했다. 어쩌면 알고 있는데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유성은 늘 그랬다. 삼신은 항상 그게 신기했다.

 ! 학생회 좋지! 넌 잘 할 거야.”

 삼신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여기도 점심시간에 음악을 틀까? 네가 방송부에 들어가면 끝내주는 DJ가 될 텐데. 그런데 방과 후에 남아서 할 일이 많으면 난 못 하겠다.”

 “내가 알기론 여기 동아리 강참일 걸? 넌 여유로운 데 알아봐야겠다.”

 “여유로울만한 곳이 있을까?”

 “찾아보면 어디든 있겠지.”

 “그렇겠지…….”

 삼신은 교정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입학식이 끝나고 교사의 지시를 기다리는 학생들은 어수선하게 흩어져있었다. 벌써 어색하게나마 통성명을 마치고 말을 트는 아이들도 여럿 보였다. 삼학년은 이미 몇 명은 교실로 돌아가고 있었고, 이학년들은 근처에 모여 휴대폰을 만지거나 농담 따먹기를 하고 있었다. 삼신은 운동화 끝으로 돌을 굴리며 바닥을 보고 있는 이학년을 보았다. 삼신보다 한 줄 너머에 있어 얼굴이며 뒤통수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학년 줄에 있었으므로 선배처럼 보였다. 휴대폰을 만지거나 다른 친구들과 떠들지 않아서 분위기가 좀 차분해보였다고나 할까.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 허겁지겁 걸어와선, 그 이학년을 붙잡았다. 삼신은 궁금해서 등을 젖히곤 그쪽을 바라보려 애썼다. 소리는 뜨문뜨문 잘 들리지 않았다.

  소방서…… 베란다 전기장판……. 병원 미안하다…….”

 가족일까?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일까? 어쨌든 병원이라고 했으니 좋은 소식은 아닐 것이다. 삼신은 이학년이 우뚝 서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는 걸 보았다. 금란이도 불안하면 저렇게 하는데…….

 “! 뭐해, 가자!”

 줄이 이동하는데도 뒤에서 움직이지 않는 삼신을 부르며, 유성이 걸어왔다. 삼신은 자세를 바로하곤 기지개를 폈다. 그리곤 다시 흘끔 그쪽을 바라봤다. 이학년과 남자가 운동장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유성아!”

 삼신이 유성의 등에 바짝 붙으며 앞으로 걸었다.

 오늘이 누군가한텐 너무 나쁜 일이 벌어진 날인가 봐.”

 “육십억 인류가 빠짐없이 행복에 젖은 날은 아주 드물 거야.”

 유성은 삼신이 바라보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저 선배한테 나쁜 일이 벌어졌단 소리지?”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삼신은 더는 그쪽을 쳐다보지 않고 앞으로만 걸었다.

 “하지만 누군가의 불행을 열심히 추론하는 건 실례니까 그냥 미스터리로 접어둘래.”

 

 며칠 뒤, 삼신은 부 활동 게시판에서 미스터리 부를 발견했다. 뭐 기막힌 우연, 입학식의 기억, 그런 건 아니었다. 다만 이름에 끌려 공고를 훑어봤을 뿐이다.

 ! 이런 부도 다 있네.”

 삼신이 깔깔거렸다.

 진짜 웃기다 미스터리 부래!”

 “신입생, 우리 부 이름이 웃겨?”

 “엄마야!”

 삼신이 주춤 물러났다. 언제 왔는지 게시판 근처에 기댄 남학생이 저를 보고 있었다. 삼신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가슴으로 향했다. 명찰이 초록색이었다. , , .

 , 2학년이다…….’

 “비웃음의 의미는 아니었어요, 선배님!”

 삼신이 양손을 모았다.

 이름이 너무 창의적이잖아요! 무슨 활동을 하는지 종잡을 수 없어서요!”

 “그래서 미스터리부지.”

  현진은 안경 너머로 눈을 가늘게 떴다. 무섭다! 삼신은 그가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 그런데 선배님도 미스터리부이신가요?”

 “내가 부장이야.”

 “!”

 반사적으로 감탄사를 뱉어놓고, 삼신은 할 말을 찾는다고 꿈질거렸다.

 쩐다!”

 “뭐가 쩔어.”

 “그냥요!”

 삼신은 헤실헤실 웃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아주 크게 떴다.

 “!”

 “또 왜.”

 “저희 아는 사이에요!”

 삼신은 현진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저 다크서클 저 얇은 손목…… 확실해! 선배는 유성이네 옆집 사는 오빠죠?!”

 “유성이?”

 현진이 삼신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였지만, 오래 걸리지 않고 해답을 찾았다.

 , 너 걔네 집 들락거리는 애구나.”

 “맞아요! ! 유성이네 옆집에 미스테리부 부장님이 살고 계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나도 네가 우리 학교 들어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우연이 기막히네요!”

 현진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런 게 기막혀? . 우리 부 들어오게?”

 “몰라요. 거기 방과 후에도 할 일 많아요?”

 현진은 즉답했다.

 아니.”

 그리곤 덧붙였다.

 “근데 네가 원하면 너 알아서 만들 수도 있고.”

 “잘 됐다! 전 바빠서 활동 많은 동아리는 못 들어가거든요.”

 삼신은 기뻐하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마음을 결정하면 문자할게요. 번호 주세요.”

 현진이 다시 한 번 눈을 가늘게 떴지만, 삼신은 가능하면 무서워하지 않으려 애썼다. 현진이 번호를 찍었다. 삼신이 저장했다. 저장명은 미부 부장님이었다.

 “안녕히 계세요. 부장!”

 삼신이 손을 흔들었다. 현진은 흔들지 않았다. 대신 잘가라고 말했다. 그리곤 게시판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과 후에, 삼신은 버스를 타고 사거리로 나갔다. 음반 매장에 들릴 참이었다. 봄이라 히터는 틀어놓지 않았지만 여전히 인공적인 공기의 냄새가 났다. 삼신은 자동문을 열고 들어갔다. 같은 교복을 입은 학생이 여럿 보였다. 엑소 코너에 여학생들이 몰려 있었다. 엑소는 잘생겼다. 하지만 그게 삼신의 마음을 끌어본 적은 없었다. 춤도 노래도 잘 추고 잘 부르겠지만 어쨌든, 그런 것들을 쫓다보면 공부가 싫어질 지도 모르니까. 신곡이 나온 거겠지. 삼신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코너로 갔다. 늘 가는 그 장소에 서서 헤드폰을 썼다.

 오늘은 무엇을 들을까. 삼신은 발가락을 꼼질거리며 잠깐 고민했다. Sia 노래를 두 곡 들었다. 한 곡이 남았다. 뭘 듣지? 고민하던 삼신은 머뭇거리다가 바이올린 소나타를 틀었다. 악마의 트릴은 삼신이 제일 좋아하는 바이올린 곡이다. 이것도 유성이가 들려줬다. 악마의 트릴은 3악장으로 구성된 16분짜리 곡으로, 바이올린 연주의 대가였던 주세페 타르티니의 작품답게 기교가 많고 화려했다. 삼신은 곡보다 그 일화를 더 좋아했다. 어느 날 주세페는 악마와 계약하는 꿈을 꾼다. 악마는 소원을 죄다 들어주었는데, 그는 악마가 어떤 음악을 연주하는지 알고 싶어 악마에게 자신의 바이올린을 건네준다. 그리곤 놀라움을 금치 못 한다. 악마가 너무 아름답게 바이올린을 연주해냈던 것이다! 그건 그가 평생토록 꿈꾸어 왔거나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음악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바이올린을 들고 방금 전 자신이 들은 것을 악보로 옮겨 보았지만, 결국엔 헛된 일이었다. 그 덕분에 자신의 작품 가운데 가장 훌륭한 작품인 악마의 소나타를 작곡할 수 있었음에도, 꿈에서 들었던 악마의 감동적인 음악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던 것이다.

 주세페는 부자였나 봐. 악마한테 덥석 바이올린을 줄 수 있었으니까 말이야.’

 노래를 들으며, 삼신은 생각했다.

 ‘금란이가 떼를 쓰면 엄마 아빠는 걔한테 바이올린도 사줄까?’

 하지만 그런 것들을 생각해서 무슨 의미가 있지? 삼신은 천천히 헤드폰을 내려놨다. 악마의 트릴이 조금씩 헤드폰 밖으로 새어나왔다. 주먹을 쥐었다 펴봤다 해볼까. 금란이처럼, 아니면 입학식의 그 이학년처럼. 그 이학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건 나쁜 일이었을까? 떼를 쓰고, 울부짖고, 휴지 곽을 던져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나쁜 일은 그런 걸론 도저히 막아지지 않는 법이니까. 바이올린은 너무 오래 전의 일이었고, 삼신은 그 때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까마득해서 떠올릴 수 없었다. 기억은 생생한데 감정은 저 너머로 소실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입학식 전날 태워버렸던 것들 중에 그것도 껴있었을 지도 모른다. 태운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렇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었으므로. 때론 기억나지 않는 것들이 더는 궁금해 해선 안 되는 것들일 때도 있다. 그 감정을 떠올린다고 해서 지금 자신에게 득 될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때론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것이 스스로를 지켜내는 때도 있는 법이다. 삼신은 삶이 중요했다. 삶을 지켜야 했다. 계속 살아서 돈을 많이 벌고 싶었다. 돈을 많이 벌면 언젠가 악마가 내게 찾아왔을 때 바이올린도 줄 수 있겠지. 그럼 그건 성공한 인생일 지도 모른다.

 

 삼신은 휴대폰을 열고 자판을 눌렀다. , , , , . 그리곤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하지만 오래 걸릴 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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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나이 먹기»
1차/old 2019. 10. 8. 18:33

 개 짖는 소리를 들었다. 이삼신은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봤다. 
 운동장엔 몇 백 명의 학생이 빽빽하게 서서 앞을 보고있다. 징글징글할 정도로 많은 정수리들이다. 신입생들은 헐렁하고 빳빳한 교복 같은 표정을 짓고, 윗 학년들은 자세를 풀고 늘어져있었다. 삼 년 동안 딱 세 번만 견디면 다 되는 일인데 그걸 참기가 힘들다. 하긴, 그렇게 치면 시험도 일 년에 고작 두 번이다. 하기 싫은 일은 설령 백 년에 한 번이라도 참기 힘들겠지. 뭐 그렇게 시시콜콜한 생각을 하고 있는데, 개가 짖었던 것이다. 
 ‘컹!’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삼신은 분명히 들었다. 빽빽한 정수리 가운데 머리 하나가 먼 풍경으로 팩, 젖혀졌다. 
 갈색일까? 아니, 까만색일 것이다. 이 동네 갈색 개들은 다 캉캉 짖는다. 컹컹 짖는 건 까만 놈들이다. 털처럼 소리도 짙고 우렁찬 것이다. 삼신이 매일 저녁밥을 먹이고 있으니 목청도 분명 그 밥심 덕일 테다. 학교 오르막길을 내려와 좁은 골목길을 누빌 때면 떠돌이 개들이 귀신같이 삼신 냄새를 맡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왔다. 지갑이 여유로운 날엔 대형마트에 들러 애견용 간식을 샀지만, 대게는 그렇지 않아서 삼신은 그들을 향해 빈 두 손을 흔들어 보이곤 했다. “미안한데 오늘은 네들 몫이 없다.” 그래도 개들은 멈추지 않고 삼신의 뒤를 따라왔다. 이발소를 지나고 전봇대를 지나면 낡은 동네 목욕탕이 나왔다. 굴뚝에서 연기가 펄펄 솟으면 영업을 하고 있다는 소리다. 동네 어르신들이 ‘빠께스’를 들고 벅벅 때를 밀고 가는 곳이다. 삼신의 집은 목욕탕 건물 삼층이다. 삼신은 고개를 들어 옥상에 옷이 널려있나 확인한다. 하지만 쌍둥이 여동생들은 집안일에 보탬이 된 적이 한 번도 없다. 옥상에 옷을 너는 건 항상 삼신 몫이었다. 
 그 때까지 따라온 개들이 목욕탕 입구에서 컹컹 캉캉 짖어대면 삼신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여긴 따라오지 마. 얼른 가.” 떠돌이 개들은 조금만 잘해줘도 꼬리를 흔들어서 좋았다. 백 날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줘 봐야 동생들은 삼신 속만 긁는데, 개들은 아니었다. 삼신은 동생들 밥 챙기는 일보다 마트에서 개껌 사는 일이 더 즐거웠다. 취직하면 이놈의 집을 박차고 나와야지. 그렇게 중얼거리면 밤에도 공부를 할 마음이 생겼다. 일학년 성적은 좋았으니 이 년만 더 잘하면 됐다. 개들에게도 작별인사를 할 것이다. 이미 멘트는 다 준비해뒀다. 편식심한 우리 막내 남동생이 남긴 밥을 해치워줘서 고마웠어. 너희들 덕분에 음식물 쓰레기봉투 값도 아끼고 좋았단다. 20리터 한 장에 570원이나 하거든. 모쪼록 다들 개장수 조심하고 열심히 살길 바란다. 
 어쨌든 개들은 헤어질 때도 만날 때도 컹컹 캉캉 짖어대는 정다운 짐승들이다. 이삼신은 이 동네 떠돌이들의 ‘짖음’을 먹여 살리는 일꾼이었다. 컹컹이든 캉캉이든 다 좋았다. 어디서 울려 퍼지던 귀를 기울여 들을 자신이 있었다. 언젠가 목욕탕 꼭대기 옥탑 방을 떠나게 되면, 동생들이야 울며불며 매달리겠지만 개들은 늘 그랬듯 컹컹 울어줄 것이었다. 정다운 짐승들. 울음소리를 들으면 이삼신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이따금 밤마다 우우우, 컹컹컹 짖는 놈들의 연설에 함께하고 싶었다. 짝짓고 머물고 떠돌고 배를 굶주리고 배를 채우는 삶에 대한 연설 말이다. 튼튼한 발바닥을 가진 떠돌이 개들은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삼신에게도 튼튼한 발바닥이, 삶에 대한 굳은살이 필요했다. 하지만 삼신은 사람이고 학생이라서, 혀를 쭉 내밀고 거리를 쏘다니는 걸론 그 굳은살을 키울 수가 없었다. 대신 그녀는 등급과 내신, 모의고사와 싸웠다. 붐비는 학원버스가 제 또래 학생들을 가득 태우고 사거리로 떠날 때, 채점하다 아는 문제를 틀렸을 때, 밤마다 초등학교 영어교실에서 받아온 시험지를 채점할 때, 가슴은 느닷없이 답답해졌다가 아주 단단해졌다. 삼신은 그게 자신의 굳은살이라고 믿었다. 
 그러니까, 입학식 때 말이다. 그 느닷없는 컹! 이 들이닥쳤을 때, 삼신은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교정에 맑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교장의 훈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새 학기가 되고 후배가 생긴다는 건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열심히 살면 복이 오겠지. 돈도 많이 벌고 개도 키워야지. 성장은 가진 로망을 깨부수면서 찾아온다는 점에서 불유쾌하지만, 성인이 된다는 건 결국 제 한몫을 해내기 위해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이다. 굳은살을 충분히 만들어 놓지 않으면 어디를 떠돌아야 하는 지도 모르고 짖는 법도 잊다가 개장수에게 끌려갈 것이다. 
 이삼신은 성공할 것이다. 컹! 이 살아있는 한은. “취직하면 이놈의 집을 박차고 나와야지.”는 삼신의 컹컹컹이었고, 아직 그녀는 짖는 법을 잊지 않았다. 그걸 잊지 않으려고 열심히 산다. 좋은 일인진 모르겠다. 
 이 학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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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마음이 바뀌었어»
1차/old 2019. 10. 8. 18:29

 네 번째 사인 판을 채운 힘썬은 벌써부터 의지가 충만해졌다. 동아와 힘주어 악수한 뒤에는 그야말로 에너지로 가득 찬 기분이 되었다. <4. 나보다 키 큰 사람>을 채웠으면 모름지기 <5. 나보다 작은 사람>도 채워주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힘썬은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성큼성큼 이동했고 곧 사인 판을 내밀 친구를 발견했다. 그 애는 힘썬보다 키가 작기는 했지만 어쩐지 곁에 서자 힘썬보다 훨씬 키가 크게 느껴졌고, 그래서 힘썬은 사인판을 내밀려다 말고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애가 먼저 말했다.

 “안녕!”

 “안녕.”

 힘썬은 그 애에게서 강한 생명력과 굳센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손쉽게 매료되었고 그녀의 곁에 더욱 바짝 붙고 싶었지만, 그것이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제자리를 지켰다. 이번에도 그 애가 먼저 말했다.

 “사인 받으러 온 거지?”

 “오, 맞아. 알아줘서 고마워.”

 힘썬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그 애의 사인 판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너의 명찰을 읽으면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름을 물어보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 묻고 있어. 나는 힘썬이야. 네 이름은 뭐니?”

 “강아야. 성은 윤 씨야.”

 “오, 그 성 씨는 처음 들어봐.”

 “알고 있는 게 몇 개인데?”

 “흠.”

 힘썬은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가 한 손을 더 사용해 총 여덟 번 접었다. 그것은 그녀가 셈에 서투른 게 아니라, 셈에 서투를 수도 있는 인간을 배려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강아는 그런 게 필요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힘썬은 혹시 몰라서 손을 접었다.)

 “난 김씨와 최씨, 박씨, 이 씨, 정 씨, 조 씨, 남궁 씨, 육 씨를 알고 있어.”

 대답을 마치고 고개를 드니 강아가 또렷하고 맑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힘썬은 인간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본 적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강아가 물었다.

 “마법사들도 성 씨가 있어?”

 “오, 없어. 우리는 가문이 없거든. 우리는 이름에 역사를 물려주지 않아.”

 강아는 새로운 정보를 꼼꼼히 머릿속에 기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구나.”

 “하지만 다르지 않아. 우리에게도 이름은 아주 중요한 것이거든.”

 “네 이름은 네가 지은 거야?”

 “오, 물론.” 힘썬이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내 모든 이름을 내가 직접 지어.”

 그런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사인 판을 든 채로 몇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힘썬은 강아의 눈동자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고(왜냐하면 힘썬 자신의 모습이 정말 잘 보였기 때문이다. 강아의 눈동자는 정말이지 무척 또랑또랑했다.) 결국에는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너의 눈동자가 정말 좋아.”

 힘썬은 자신이 저지르고 만 실수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강아는 호쾌한 움직임으로 입을 크게 움직여 미소를 만들었다.

 “고마워.”

 그 말은 힘썬을 너무너무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제 사인 판에 사인을 해야 했기에 강아는 펜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강아가 힘썬의 다섯 번째 동그라미에 사인을 하려고 할 때, 힘썬이 두 손을 뻗어 종이를 붙잡았다.

 “오, 마음이 바뀌었어. 다른 곳에 해줄래?”

 “다른 곳?”

 힘썬은 손끝으로 입술을 밀고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친해지길 바라! 리스트!’의 가장 마지막 문항을 가리켰다.

 “여기에 사인해줄 수 있니?”

 아주 잠깐의 고민을 거친 것처럼 보이겠지만 힘썬은 정말 오래 고민한 것이다.

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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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나보다 큰 사람»
1차/old 2019. 10. 8. 18:27

 처음부터 그랬지만 변재구는 참 열심히 하는 교사인 듯싶었다.

 힘썬은 투박한 선과 최선을 다해 쓴 흔적이 남아있는 글씨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리스트의 내용을 읽었다. 이름하야 ‘친해지길 바라! 리스트!’…. 느낌표는 강조하고자 하는 대상 뒤에 놓이는 문장부호인데, 그것을 두 개나 찍었으니 변재구는 분명 강조하고 싶은 게 많았던 모양이었다. 힘썬은 외교반의 첫 시작을 위해 화합을 도모하는 변재구 선생님의 태도가 무척이나 훌륭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리스트를 수행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나저나 아이패드가 뭐였더라?)

 가장 무서워 보이는 사람을 물색하기 위해서는 교실 한 바퀴를 돌아야했다. 힘썬은 왁자한 교실에서 느닷없이 벌떡 일어나 큰 다리로 주변을 활보하기 시작했는데, 바닥 대신 얼굴들을 보느라 하마터면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고개를 번쩍 든 후에야 힘썬은 그것이 누군가의 긴 다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힘썬은 시선으로 다리의 길이를 어림잡은 후 머릿속으로 신장을 계산해보았고, 고개를 완전히 들어 다리의 주인과 마주했을 때는 그의 대략적인 기장을 모조리 파악한 상태가 되었다. 힘썬은 머릿속으로 <4. 나보다 키 큰 사람>을 하나 지웠다.

 힘썬이 남자 아이에게 말했다.

 “안녕?”

 그 애는 이어폰을 끼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듣고 있지는 않았다. 만약 무언가를 듣고 있었더라면 힘썬은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반드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잠시 후 그 애가 대답했다.

 “안녕.”

 힘썬은 그 애의 목소리가 가지는 차분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손바닥을 펼쳐 그 애의 눈앞에 가져다댔다.

 “너는 키가 183cm정도 될 거야, 그렇지?”

 그 애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조금 뒤에 그 애가 말했다.

 “맞아. 정확해.”

 (아주 정확히 맞췄다! 힘썬은 이로써 그 애에게 어느 정도 호감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생각했다!)

 “나는 힘썬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

 조금 뒤늦게 통성명을 시도했지만 그 애는 조곤조곤 대답해주었다.

 “이동아.”

 “동아야, 나는 키가 175cm야!”

 이번에 동아는 대답하지 않고 힘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힘썬은 동아가 대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잠시 후 동아가 여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판에 사인을 해달라는 거지?”

 힘썬은 너무 성급하게 사인 판을 내밀어서 대답을 한 박자 느리게 하고 말았다.

 “오, 맞아. 너 정말 눈치가 빠르구나?”

 동아는 이번에도 어떤 긍정이나 부정을 하지 않았다. 힘썬은 그 애가 꼭 자신의 목소리와 비슷하게 행동한다고 생각했고, 혹은 그렇게 행동하기 때문에 목소리가 꼭 닮은 것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힘썬은 자신의 빛과 온도, 행동거지와 목소리를 꼼꼼히 떠올려보았고, 그것이 동아처럼 자신에게 잘 어울리고 있는지 고민해보았다. 그러자 동아가 그러하듯, 자신을 이루는 개성 하나하나가 자신에게 무척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아에겐 어떻게 보일지 모르겠다.

 동아가 펜을 꺼내자 힘썬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자신의 판 네 번째 동그라미를 가리켰다. 그런 후 덧붙였다.

 “너는 친절하구나. 그리고 조용한 편이고. 너를 이루는 모든 게 아주 잘 어울린다고 말하고 싶어. 지금 말해버렸구나! 원한다면 우리 사인을 교환하자. 왜냐하면 나는 너보다 키가 작으니까 다섯 번째 동그라미에 사인을 할 수 있어.”

 힘썬은 동아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동아의 펜부터 들었다. 벌써부터 사인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하지만 곧 힘썬은 어떤 행위를 할 때 대체로 허락받아야만 하는 교실의 특성을 뒤늦게 떠올렸고, 그래서 허락을 구하는 눈으로 동아를 바라보았다.

 “나 역시 네게 돌려줄 항목이 있다는 게 기뻐.”

 힘썬이 말했다.

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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