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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번째 사인 판을 채운 힘썬은 벌써부터 의지가 충만해졌다. 동아와 힘주어 악수한 뒤에는 그야말로 에너지로 가득 찬 기분이 되었다. <4. 나보다 키 큰 사람>을 채웠으면 모름지기 <5. 나보다 작은 사람>도 채워주는 게 인지상정이 아니겠는가. 힘썬은 긴 다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어렵지 않게 성큼성큼 이동했고 곧 사인 판을 내밀 친구를 발견했다. 그 애는 힘썬보다 키가 작기는 했지만 어쩐지 곁에 서자 힘썬보다 훨씬 키가 크게 느껴졌고, 그래서 힘썬은 사인판을 내밀려다 말고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 애가 먼저 말했다.

 “안녕!”

 “안녕.”

 힘썬은 그 애에게서 강한 생명력과 굳센 기운을 느꼈다. 그래서 손쉽게 매료되었고 그녀의 곁에 더욱 바짝 붙고 싶었지만, 그것이 무례하게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제자리를 지켰다. 이번에도 그 애가 먼저 말했다.

 “사인 받으러 온 거지?”

 “오, 맞아. 알아줘서 고마워.”

 힘썬은 아직 채워지지 않은 그 애의 사인 판을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너의 명찰을 읽으면 된다는 걸 알지만, 그래도 이름을 물어보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 묻고 있어. 나는 힘썬이야. 네 이름은 뭐니?”

 “강아야. 성은 윤 씨야.”

 “오, 그 성 씨는 처음 들어봐.”

 “알고 있는 게 몇 개인데?”

 “흠.”

 힘썬은 다섯 손가락을 펼쳤다가 한 손을 더 사용해 총 여덟 번 접었다. 그것은 그녀가 셈에 서투른 게 아니라, 셈에 서투를 수도 있는 인간을 배려하기 위한 행동이었는데 강아는 그런 게 필요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힘썬은 혹시 몰라서 손을 접었다.)

 “난 김씨와 최씨, 박씨, 이 씨, 정 씨, 조 씨, 남궁 씨, 육 씨를 알고 있어.”

 대답을 마치고 고개를 드니 강아가 또렷하고 맑은 눈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힘썬은 인간의 눈동자에 비치는 자신을 본 적이 얼마 없었기 때문에 그것이 너무나 새로운 경험이라고 생각했다.

 강아가 물었다.

 “마법사들도 성 씨가 있어?”

 “오, 없어. 우리는 가문이 없거든. 우리는 이름에 역사를 물려주지 않아.”

 강아는 새로운 정보를 꼼꼼히 머릿속에 기록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구나.”

 “하지만 다르지 않아. 우리에게도 이름은 아주 중요한 것이거든.”

 “네 이름은 네가 지은 거야?”

 “오, 물론.” 힘썬이 당당하게 말했다.

 “나는 내 모든 이름을 내가 직접 지어.”

 그런 후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사인 판을 든 채로 몇 가지 대화를 나누었다. 힘썬은 강아의 눈동자에서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고(왜냐하면 힘썬 자신의 모습이 정말 잘 보였기 때문이다. 강아의 눈동자는 정말이지 무척 또랑또랑했다.) 결국에는 이렇게 말해버리고 말았다.

 “너의 눈동자가 정말 좋아.”

 힘썬은 자신이 저지르고 만 실수에 깜짝 놀랐다. 하지만 강아는 호쾌한 움직임으로 입을 크게 움직여 미소를 만들었다.

 “고마워.”

 그 말은 힘썬을 너무너무 기분 좋게 만들었다.

 이제 사인 판에 사인을 해야 했기에 강아는 펜을 꺼내들었다. 하지만 강아가 힘썬의 다섯 번째 동그라미에 사인을 하려고 할 때, 힘썬이 두 손을 뻗어 종이를 붙잡았다.

 “오, 마음이 바뀌었어. 다른 곳에 해줄래?”

 “다른 곳?”

 힘썬은 손끝으로 입술을 밀고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다 ‘친해지길 바라! 리스트!’의 가장 마지막 문항을 가리켰다.

 “여기에 사인해줄 수 있니?”

 아주 잠깐의 고민을 거친 것처럼 보이겠지만 힘썬은 정말 오래 고민한 것이다.

19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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