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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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썬은 난초방에 배정되어 기뻤다. 그곳에 강아와 닻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두 사람을 좋아한다. 그렇다고 특별히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방으로 들어온 첫날, 힘썬은 짐을 정리하는 강아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신이 도와줄 일이 없냐고 물었다. 닻이와 힘썬은 마법사였으므로 아무것도 들고 오지 않았던 것이다. 강아는 이미 거의 다 끝냈으니 괜찮다고 씩씩하게 웃었다. 날이 좋아 태양빛이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속에 서있는 강아는 정말이지 반짝반짝 빛났다. 힘썬은 기쁨으로 얼굴이 흐물흐물해지는 걸 느끼면서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닻 쪽으로 고개를 숙이며 우리가 열심히 해야겠다고 속삭였다. (뭘 열심히 해? 그것은 힘썬 자신도 잘 몰랐다.)

 원래 차원에서는 공간을 소유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누군가 한 자리에 오래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자리가 아니라 그 자가 가장 좋아하는 자리 혹은 그 자가 가장 자주 발견되는 자리로 이해되었다. 방을 배정받는다는 것은 어딘가에 소속되어 특정한 공간을 보장받는다는 의미와 비슷했다. 힘썬은 침대를 나누고 칫솔이나 양치 컵을 지정하는 과정이 새로웠다. 닻이에게 닻이 몫의 칫솔을 건네주면서 그녀가 했던 말은 이것이었다 : 나는 이것을 건드릴 수 없어. 사용할 수도 없어. 왜냐하면 이건 닻이 네 거든. 그런 후 덧붙였다. 정말 신기하지? / 뭐가? / 소유하는 거 말이야.

 하지만 방이라는 게 힘썬에게 소유의 과정만을 학습시킨 것은 아니었다. 세 사람은 한 공간을 공유하며 여러 가지를 했다. 침대에 누운 채 대화를 나누거나 샴푸 혹은 린스를 번갈아 나누어 쓰는 일들. 힘썬은 배구수로 빨려 들어가는 강아의 머리카락 한 올을 집어 올리며, 공유 이후에 남는 흔적의 개념을 배웠다. 마법사들은 한 장소에서 쏜살같이 벗어날 수 있었고, 흔적을 남기지 않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들은 마법사들보다 훨씬 더 많은 걸 자신이 나누거나 사용한 장소에 남기고 떠났다. 힘썬은 강아의 머리카락, 강아가 사용하는 침대 주변을 거닐면 맡을 수 있는 냄새들, 강아가 사용하다 조금씩 부러뜨린 샤프심 따위를 경험하며 강아가 남기는 흔적을 오래 기억하겠다고 결심했다. 그것이 새로운 경험이었기 때문이고, 강아에게서 떨어져 나온 그녀의 파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힘썬이 학습한 것은, 강아라는 존재가 가지는 무궁무진한 호기심과 가능성이 그녀를 더욱 빛나보이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강아는 정말이지 힘썬에게 많은 것을 물어보았다. 힘썬이 살아가던 차원, 다녀본 곳, 그곳의 언어, 행동양식, 사회구조, 개체 수 처음에는 생물학적이거나 통계적이거나 사회적인 질문이 주를 이었지만, 마침내 강아는 이런 것들을 물어보게 되었다.

 “마법사들도 특별히 소중히 여기는 단 하나의 존재가 있어?”

 “마법사들도 고통스러운 감정을 느껴?”

 “마법사들은 누군가를 어떻게 추억해?”

 “너는 슬퍼한 적이 있니?”

 그것은 상냥함에 대해 알고 있기에 할 수 있는 질문이었으므로 힘썬은 종종 침대에 두 다리를 뻗고 누워 강아의 호기심에 심취했다. 힘썬 역시 강아에게 학생들의 관습, 행동, 벌점제도(이제는 폐지되었지만 말이다), 유행가 따위를 물어보기는 했지만 그것이 강아에게 어떤 감화를 줄 수 있는 질문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자신을 드러내는 질문이 아니라 인간세상을 관찰하고 적응하는데 필요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썬은 언젠가는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강아에게 상냥함을 전달할 수 있는 질문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강아가 처음으로 가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말했을 때, 힘썬은 혈연의 개념을 이해하고 있다고 대답했다. 인간은 직접 번식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후세대에 물려주며 대를 이어가는 존재이므로 갑자기 나타나는 마법사와는 달랐다. 그러니까 마법사들은 특별히 누군가와 가깝게 지내야만 한다는 의무도 없었고, 서로의 특징을 물려주어 닮아있는 자들 역시 없었다. 힘썬은 강아에게 물었다.

 “강아에게도 개인적인 관계의 혈육이 있니?”

 분명 있을 것이다. 강아가 대답했다.

 “가족 말하는 거지? 있지! 우리 부모님이랑, 동생이 하나 있어.”

 “동생?”

 “. 여동생 말이야.”

 강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힘썬에게 물었다.

 “마법사들은 가족이 없어?”

 힘썬은 모두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활동하기는 하지만, 인간들의 가족 공동체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말해주었다. 마법사들에게는 형 누나 동생의 구분이 없다는 것도. 서로를 닮은 존재 역시 없다는 것도.

 “강아, 너의 동생이 궁금하다. 너를 조금은 닮았겠지?”

 힘썬은 속으로 강아를 축소시킨 뒤에 조금 더 어린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것은 강아의 크기와 나이만을 줄여놓은 것뿐이지 개별의 존재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강아의 동생은 강아의 분신이 아니라 별개의 존재다.

 강아가 대답했다.

 “주변에서 닮았다고 많이 말해.”

 그러자 힘썬은 강아의 동생이 무척이나 궁금해졌다.

 “보고 싶어.”

 힘썬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보고 싶어!”

 “좋아.”

 강아는 기쁜 듯 흔쾌히 수락했다.

 “그럼 이번 주 주말에 내가 소개시켜줄게.”

 힘썬은 주말을 기다리느라 그 주에는 한숨도 자지 않았다. 어차피 숙면을 취하지 않아도 특별히 피곤하거나 괴롭지는 않았다. 그런 식으로 몸을 만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힘썬은 밤에도 원한다면 언제든 깨어있을 수 있었다. 생각할 거리가 있다면 말이다.

 주말이 다가오자 힘썬은 아침부터 교복을 단정하게 입은 뒤에 침대에 반듯하게 누워 강아가 깨어나기를 기다렸다. 강아의 침대에서 하품 소리가 들리자, 힘썬은 헤드에서 고개를 내밀고 강아를 내려다보았다.

 “강아.”

 강아가 기지개를 켜며 응? 하고 대답했다.

 “주말이야.”

 힘썬이 말했다.

 “이제 가도 되니?”

 강아는 잠이 덜 깬 얼굴로 푸스스 웃다가 눈을 비비고는 예의 그 반짝반짝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나 준비할게. 조금만 기다려줘.”

 강아가 세수를 하고 양치를 끝낸 뒤에 옷을 갈아입고 나왔을 때, 힘썬은 문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강아는 가방을 챙기면서 외출증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힘썬은 비장한 얼굴로 품에서 두 개의 외출증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마치 은밀한 거래를 하는 것처럼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강아는 힘썬이 내민 외출증을 읽어보았다. 재구 선생님이 끊어주신 거였다.

 두 사람은 아직 조금 쌀쌀한 초봄의 거리를 걸으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힘썬은 교복을 전부 차려입었고, 강아는 사복차림이었다. 힘썬은 하나도 춥지 않았지만 강아는 몇 번 정도 그녀에게 정말 추운 거 아니지? 정말이지?”라고 물어보았다. 강아의 코끝은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거리를 걷는 사람들 중에서 외투를 입지 않은 사람은 힘썬뿐이었다.

 ‘다음에는 코트를 만들어서 입고 나와야겠다.’

 힘썬은 거리의 사람들을 유심히 살피며 생각했다.

 두 사람은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가지 않아서 내렸다. 걸으면서 강아가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다. 힘썬은 주변을 둘러보면서 강아랑 비슷한 사람이 보이는지 연거푸 확인했다. 혹시라도 지나칠까봐 걱정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강아는 동생에게 제대로 문자를 보냈고, 동생은 약속장소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힘썬은 몇 발자국을 남겨두고 그 자리에 우뚝 서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아가 손을 들면서 동생의 이름을 불렀다.

 “단미야!”

 단미가 고개를 돌렸을 때를 힘썬은 영영 잊지 못할 것이다. 강아가 아주 작아진 모습이 거기 서있었기 때문이다.

 힘썬은 할 수 있는 한 눈을 크게 뜨고 온 힘을 다해 단미의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단미는 강아에게 달려오다가 뒤에 우두커니 서있는 힘썬을 보고 머뭇거렸다. 잠시 후 단미가 강아의 종아리 뒤로 몸을 숨겨버렸다. 힘썬은 정신을 차렸다. 버스가 지나가며 매연을 날리는 바람에 주변이 잠시 희뿌옜다.

 “안녕!”

 힘썬이 큰 소리로 말했다.

 “들리니?”

 단미는 여전히 강아의 종아리 뒤편에 숨어있었다.

 힘썬은 잠시 고민하다가 강아 앞으로 다가갔다.

 “안녕.”

 강아가 몸을 비켜주었다. 단미는 아까보다 낮고 부드러운 소리를 내는 힘썬을 올려다보았는데, 아마 단미 눈에 힘썬은 거인으로 비추어졌을 지도 모른다. 힘썬은 손을 뻗을지 말지 고민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단미가 힘썬의 종아리로 옮겨가 눈치를 보며 달라붙었다. 힘썬의 머리카락이 기쁨으로 쭈뼛 섰다. 강아가 힘썬의 머리카락을 신기한 듯 만지기 시작했다.

 “안녕, 난 힘썬이야. 네 이름은 뭐니?”

 힘썬은 아까 강아가 단미를 부르는 것을 들었음에도 그렇게 물었다.

 단미는 수줍게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미.”

 “단미!”

 단미는 가까이서 보니 정말 강아와 똑 닮은 얼굴이었다. 하지만 수줍음을 타고 관계에 소극적인 지점은 강아와 무척이나 달랐다. 그래서 힘썬은 단미가 강아로부터 떨어져 나온 강아의 분신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차이가 힘썬을 설레게 했다. 그녀가 단미의 머리통을 부드럽게 잡고 이리저리 살피기 시작하자, 단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힘썬을 올려다보았다.

 “언니.”

 “.”

 힘썬이 황급히 손을 떼어내고는 실수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해, 허락 맡는 걸 잊고 말았어.”

 단미는 둥그렇고 축축한 갈색 눈동자로 힘썬을 꼼꼼히 살폈다. 힘썬은 어쩐지 긴장하게 됐다. 잠시 후 단미가 힘썬에게 고개를 젖히더니 입을 가리며 소곤소곤 말했다.

 “언니는 빛이 나는 것 같아.”

 힘썬은 눈을 크게 떴다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단미를 꽉 끌어안아주었다.

 “맞아, 나는 빛이었어.”

 단미에게서도 강아와 비슷한 냄새가 났다. 미묘하게 달랐지만 분명 비슷한 지점이 있었다. 힘썬이 기숙사를 드나들 때마다 맡았던 그 냄새의 특징이다. 힘썬은 단미가 성격 말고는 모든 게 강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고, 이렇게나 같다면 서로에 대한 공감능력이나 대화의 방식이 발달해있을 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그래서 단미를 껴안은 채로 강아에게 물었다.

 “강아, 혹시 너희 둘은 생각이나 감정을 공유하기도 하니?”

 강아는 잠깐 고민하다가 능청맞게 오, 하고 대답했다.

 “맞아, 알아차렸구나? 우리 둘은 텔레파시를 써.”

 단미가 톡톡 힘썬을 두드리더니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이야, 힘썬 언니.”

 “단미야, 넌 너무 양심적이야!”

 강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힘썬은 이 대화의 흐름을 한 박자 늦게 이해하고는 단미의 정직함에 감사하면서 강아에게, 혹시 방금 그것이 강아의 농담이었는데 자신이 못 알아듣는 바람에 강아를 거짓말쟁이라고 만든 거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아까까지는 마냥 즐겁던 강아가 갑자기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야 그렇지는 않아.”

 강아가 말했다.

 어쨌든 세 사람은 만났고 힘썬은 기분이 좋았다. 단미 역시도 기분이 좋아보였다. 오늘 강아 언니와 언니의 친구와 함께 놀이동산에 갈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아는 익숙하게 단미의 손을 잡고 앞으로 끊임없이 걸어 나갔고 힘썬은 일부러 발을 늦추면서 두 사람을 하나의 풍경으로 지켜보았다. 그리고 가족, 혈육, 더 좁게 말해 자매의 관계가 무엇인지 고민해보았다. 모두가 사이가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공간을 공유하며 비슷한 흔적을 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분명 힘썬은 결코 알 수 없을 감정을 소유하고 있을 것이다. 힘썬은 강아가 가족으로 인해 행복한지를 물어보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은 물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에 입을 다물었다. 자신을 드러내면서도 상냥함을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질문을 던지지 않고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것이었구나. 라고 힘썬은 생각했다.

 단미가 손을 뻗었으므로 힘썬이 앞으로 내달렸다. 그녀는 작은 단미의 손을 붙잡고 빙글빙글 돌면서 강아에게 말했다.

 “나도 동생이 있으면 좋겠어!”

 “그래?”

 “, 또 강아가 내 가족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단다!”

 강아는 웃음을 터뜨리더니 놀이동산에 가서 3인 가족처럼 실컷 놀자고 말했다. 힘썬은 낄낄거리면서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 3명이서 그것을 하면 좋겠다고 대답했다. 강아는 상냥하므로 분명 그것을 물어볼 것이다. 그러면 힘썬은 3명이서 츄러스를 나누어 먹는 일이라고 대답할 생각이었다.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야! 어쩌면 단미도 츄러스를 좋아할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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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마음의 거리»
1차/old 2019. 10. 8. 23:32

 최초로 만난 인간은 남성이었고, 열다섯 남짓 먹은 유라시아인이었다. 그때는 인종이나 성별을 제대로 구분할 수 없었으므로 이것들은 훗날 알게 된 사실이다. 눈앞의 존재가 너무나 신기해 어쩔 줄 몰랐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힘썬은 얼굴을 바짝 붙이고 엄지로 그 아이의 턱을 들어 올린 뒤, 큰 손바닥으로 뺨을 어루만졌었다. 그것이 무례한 일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어린 유라시아인은 힘썬의 행동에 무척 당황해 굳어 있다가, 갑자기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기겁해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그때까지도 힘썬은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닫지 못할 만큼 무지했다. 이제 힘썬은 지구의 대부분의 지성체를 만날 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해야함을 알고 있다.

 심요한을 처음 보았을 때도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힘썬은 궁금하기 짝이 없다는 손길로 요한의 얼굴을 들어 올리고 눈꺼풀을 열어보거나, 고개를 숙여 공기가 드나드는 콧구멍의 모양새를 관찰하고 싶었다. 하지만 최초의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힘썬은 심요한이 눈을 굴리거나, 느리게 호흡하거나, 턱을 괴는 일 따위를 아주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요한이 힘썬 바로 옆에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힘썬은 외교 특별반 첫날의 풍경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교실에는 마법사들이 먼저 도착해 자리에 앉아있었다. 힘썬은 교탁을 중심으로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자리를 골랐다. 누군가 반드시 자신의 옆 자리에 앉게 될 거라 기대했고, 그렇게 되면 누구보다 상냥하게 대해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등교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정확히 817명의 짝꿍을 상상했다. 마침내 인간 학생이 1학년 1반 교실 문을 열고 등장했을 땐 정말이지 깜짝 놀랐다. 다른 마법사들도 힘썬과 비슷한 기분을 느낀 것 같았다. 제각각 창가, 맨 뒷자리, 맨 앞자리, 중간 자리를 차지하며 앉아있던 마법사들이 동시에 열린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인간 학생은 아무도 없는 교실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는 마음에 드는 자리를 발견했는지 2분단으로 이동했다. 마법사들은 인간 학생이 아직 자신들을 볼 수 없는 상황이라는 걸 알면서도 자신의 옆 자리에 앉게 될 지도 모를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교실에 가장 먼저 도착한 친구의 이름은 이동아였다.) 동아는 조용히 자리에 앉아 책가방을 정돈하고는 이어폰을 꼈다. 동아 옆 자리에 앉아있던 마법사가 신기하다는 듯 그의 귀에 걸린 이어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힘썬은 짝꿍을 가지게 된 그 마법사가 부러웠다. 다음에 도착할 친구가 자신의 옆에 앉아주었으면 했다.

 얼마 가지 않아 다시 교실 문이 열렸다. 여학생이었다. 그녀는 교실에 덩그러니 앉은 동아를 한 번 쳐다보고는 별 고민도 없이 맨 뒷자리에 가방을 놓고 앉았다. 힘썬의 분단이었지만 두 자리나 떨어져있었다. 힘썬은 생각했다. ‘내 예상에, 다섯 번째로 도착하는 친구가 내 옆에 앉을 것 같아.’ 하지만 다섯 번째로 도착한 남학생은 벽 쪽에 바짝 자리를 잡고 앉아서는 휴대폰을 만지기 시작했다. ‘일곱 번째.’ 힘썬은 정정했다. ‘일곱 번째 친구가 내 짝꿍이 될 것 같아.’ 그 뒤에도 그런 일들이 반복됐다. 심요한은 훨씬 나중에 등장했고, 그 즈음 힘썬은 예측하기를 관두고 턱은 괸 채 창가를 보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옆 자리에 요한이 털썩 걸터앉았을 때는 머리카락이 쭈뼛 솟아오를 만큼 놀랐다. 책상은 그런 식으로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느닷없이 채워졌다. 힘썬은 바로 그때 심요한이라는 인간을 처음 보았다.

 심요한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변재구로부터 마법사의 존재를 알게 된 이후에도 크게 기뻐하거나 놀라는 눈치는 아니었다. 힘썬은 책상에 엎드려 서약서를 읽는 요한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거절할까?’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의 YES를 바라고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심요한은 아예 앞자리에 앉은 여학생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는데, 마법사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는 눈치가 아니었으므로 힘썬을 다소 초조하게 만들었다. ‘서명해!’ 힘썬은 고개를 들고 심요한의 손아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서명하고 나를 만나!’ 돌이켜봐도 심요한은 싱거울 정도로 손쉽게 서명했다.

 힘썬이 요한 앞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녀는 허리를 펴고 꼿꼿하게 앉아있었고 눈은 기대감으로 반짝반짝했다. 심요한은 아까보다 제법 놀란 표정이었다.

 “안녕?”

 힘썬은 심요한에게 낭랑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나는 힘썬이야.”

 잠시 후 심요한이 입을 쩍 벌렸다.

 “-.”

 ‘대박은 좋은 말이지.’ 힘썬은 흡족했다.

 번갈아가며 자기소개를 할 생각이었으나 심요한이 갑자기 코앞으로 휴대폰을 들이미는 바람에 힘썬의 계획은 무산되었다

 심요한이 대뜸 말했다.

 “, 너 이름이 뭐라고? 방금 그거 다시 해봐, 빨리빨리.”

 힘썬은 당황했는데, 준비한 자기소개의 서두가 지금의 돌발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힘썬이 되물었다.

 “그거가 뭔데?”

 “방금 네가 한 거 있잖아!”

 “, 내 이름은 힘썬이야.”

 “그래, ! 방금 네가 팟-하고 순간 이동한 거 다시 좀 보여줘 봐봐.”

 그런 후 심요한은 힘썬의 대답도 듣지 않고 갑자기 혼잣말을 시작했다.

 

  REC

 요한 : 자자, 안녕하세요! 여러분의 귀염둥이 도리예요! (흔들리는 화면) 제가 지금 상황이 조금 급해서, 우선 영상부터 확인하고 우리 평소처럼 만나보도록 할까요? (카메라가 돌아가자 옆 자리에 앉은 힘썬이 보인다)

 힘썬 : (어리둥절하게 카메라를 보고 있다)

 요한 : (입모양으로) 아 빨리!

 힘썬 : (고개를 기울여 휴대폰에 가려진 요한을 보려고 하자)

 요한 : ~ 우리 마법사 친구, 아까 해봤던 순간이동 깜...! 다시 한 번 해볼까요?

 힘썬 : , 일단- 나는 순간이동을 하지 않고 처음부터 여기 앉아있었어. 그리고 그건 다시 할 수 없어. 난 이미 등장했잖아.

 

 시야를 반쯤 가리고 있던 카메라가 아래로 치워졌다. 심요한은 다시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힘썬은 심요한이 고개를 숙이고 휴대폰을 몇 번 만지더니 영상을 삭제하는 걸 보았다. 그제야 요한이 무언가 기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네 이름은 뭐니?”

 힘썬은 요한의 명찰을 확인했음에도 대답이 듣고 싶어서 그렇게 물었다.

 요한은 휴대폰을 만지면서 건성으로 대답했다.

 “심요한.”

 잠시 후 요한이 고개를 들고 아까보다는 밝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럼 다른 건 할 수 있어? ? ? 마법사라며?”

 “으으음, 아니.”

 힘썬은 덧붙였다.

 “지금은 마법이 필요한 타이밍이 아니니까, 쓰지 않을래.”

 요한이 그 말을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힘썬은 그 뒤에도 몇 번 정도 요한에게 말을 걸었지만 심요한은 길게 대답하지 않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카메라로 자기 자신을 찍으며 멘트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힘썬은 생각했다. ‘말은 나중에 다시 걸어봐야겠다.’

 힘썬이 사인판을 들고 교실 몇 바퀴를 돌고 돌아왔을 때, 요한은 자리에서 완전히 이탈해 사물함 앞에 있었다. 요한은 아까보다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고, 카메라를 향해 발랄한 멘트를 조잘대고 있었다. 힘썬이 요한에게 다가가 물었다.

 “뭘 하고 있니?”

 

  REC

 요한 : (카메라가 돌아가 힘썬을 비춘다) 이야~ 제 짝꿍이네요. 이 친구도 마법사예요. 머리카락 숱이 엄청 많죠? 눈동자도 완전 신기! (렌즈를 힘썬 눈 가까이로 들이댄다)

 힘썬 : (화면을 가득 채운 힘썬의 눈동자) 누구에게 말하는 거니?

 요한 : 구독자분들에게 하는 거지~ 여러분, 이 참에 마법사도 심돌이로 만들기, 도전?

 힘썬 : 구독자들이 여기 있어? (두리번거리면)

 요한 : 마법사라서 유튜브의 개념을 잘 모르는 모양이네요~ 한 번 이 도리가 알려줘 보도록 하겠습니다!

 힘썬 : 도리가 누구야? 혹시 네 또 다른 이름이니? 하지만 심요한 도리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없는 걸!

 요한 : …….

 

 요한은 투덜거리며 촬영을 중단했다.

 “그렇게 질문만 하면 진짜 노잼이거든?”

 힘썬은 요한의 표정이 다시 시큰둥하게 돌아온 것을 보았다카메라를 들었을 때의 요한과 들지 않았을 때의 요한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었다힘썬은 그 차이가 어디서 기인하는지 알고 싶었다둘 다 요한이 가지고 있는 모습이라면어느 쪽이 요한의 평상시 모습인지도 알고 싶었다.

 힘썬이 물었다.

 “노잼이 뭐니?”

 “아 지금 이런 거!”

 힘썬이 그 뜻을 알아듣지 못해 고개를 기울이자, 요한이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찡그리며 정정했다.

 “재미없다는 뜻!”

 그러니까 NO와 재미가 합쳐진 단어로구나. 힘썬은 요한의 말을 통해 정확하게 유추했다.

 힘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어. , 그리고 그 문제는 우리가 직접 대화를 많이 하지 않아서 생긴 일인 것 같아. 나도 지금 그렇게 재미가 있지는 않거든! 내 말은- 심심하다는 뜻이야.”

 힘썬은 요한의 표정에서 순간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이 스치는 것을 목격했지만, 그 감정의 이유를 잘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이 곧 표정을 갈무리했으므로 제대로 물어볼 틈도 없이 어영부영 지나가게 되었다. 요한은 구시렁거리면서 휴대폰을 만지더니 또다시 영상을 삭제했다.

 잠시 후 요한이 한결 밝은 얼굴로 물었다.

 “너 휴대폰 있어?”

 힘썬은 있다고 대답했다.

 요한은 힘썬의 휴대폰으로 유튜브 어플을 연 뒤, 무언가를 검색해 돌려주었다. 힘썬은 액정을 들여다봤다. 그것은 도리티비라는 이름의 유투브 채널이었다.

 “너도 심심하면 심돌이가 되어 봐~ 오케이?”

 요한은 구독하는 방법을 알려주면서 힘썬의 등을 가식적으로 두들겼다.

 “뽜이팅!”

 

 그 날 기숙사로 돌아온 힘썬은 이어폰을 끼고 침대에 앉아서 도리티비 채널에 올라온 모든 영상을 하나하나 시청했다. 영상의 썸네일은 이목을 끌 수 있도록 화려하게 제작되어 있었고 영상 제목도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막상 열어보면 그렇게 정보 값이 풍부한 영상들은 아니었다. 도리티비의 영상 대부분이 누군가를 주제로 삼아 일시적인 호응을 유도하고, 더는 분위기를 끌어갈 수 없을 것 같으면 다른 주제로 넘어가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것은 타인을 대하는 태도라기보다 도구를 사용하는 태도에 가까웠으므로 힘썬은 영상을 보는 내내 생각에 잠겨있었다.

 

 다음 날 힘썬은 학교에서 요한에게 말했다.

 “나 도리티비 전부 봤어!”

 요한은 휴대폰 게임을 하다말고 고개를 들었다.

 “구독했어?”

 “했어.”

 “축하~ 너도 이제 심돌이임.”

 힘썬은 이제 심돌이가 무슨 뜻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되물어 볼 필요가 없었다. 그 외에도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힘썬은 도리티비 속 요한이 보통보다 기분이 (이상할 만큼)좋아 보인다는 것, 모두가 도리를 좋아하고 있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도리티비의 댓글 창에서는 종종 사람들이 싸워댔다. 그런데도 영상은 꾸준히 올라왔다. 별로 쓸모 있는 영상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있잖아, 도리.”

 힘썬은 요한을 도리라고 부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인지 확인하려고 요한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요한은 휴대폰 게임을 하느라 제대로 들은 것 같지 않았다.

 힘썬이 물었다.

 “왜 그런 영상을 만드는 거야?”

 “뭔 소리야~ 내 영상이 노잼이라고 시비 거는 건가요?”

 “, 그렇지 않아. 재미있는 영상도 있었어.”

 “좋아요 꾹 눌렀어?”

 “재미있는 영상에는 눌렀어. 나는 한국 역사랑 위인들 설명해주는 게 재밌더구나.”

 하지만 요한은 그런 영상들을 만들지 않은지 오래 되었다. 이제 요한은 친구 사생활을 떠들거나 한밤중에 라면을 먹는 걸 찍는다(힘썬은 왜 이것을 방송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요한은 힘썬이 재미있다고 고른 영상을 노잼영상이라고 말했다. 그런 걸 만들면 구독자 수가 줄어든다고 했다. 그런 걸 만들면 구독자 수가 줄어든다고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는 유잼 콘텐츠를 위해 매일같이 노력해야 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더니 마법사 세계에서도 돈이 중요하냐고 물었다. 힘썬은 자신의 차원에서는 화폐가 아무 가치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부럽다.”

 요한은 처음으로 썩 가볍지 않은 투로 그렇게 말했다.

 “마법사 애들은 그런 걸 전혀 생각하지 않겠네?”

 그 순간 힘썬은 지금 요한의 말에 긍정한다면 무언가 실수하는 기분이 들 거라 강력히 예감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 역시 없었기에 긍정했다.

 “맞아,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실수라고 할 만한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오니, 요한이 칠판 앞에서 휴대폰을 들고 있었다. 힘썬은 요한의 한껏 고양된 목소리와 꾸며낸 말투를 통해 그가 촬영 중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했다. 요한은 힘썬을 보고 카메라를 돌렸다. 힘썬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요한과 자신 사이의 거리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REC

 요한 : 이야~ 저기서도 마법사 친구가 오네요! 이 친구에게도 한 번 물어볼까요?

 힘썬 : (렌즈를 빤히 쳐다보고 있다)

 요한 : 마법사들은 사실 인간처럼 생기지 않았다던데 그게 사실인가요, 우리 힘썬 친구?

 힘썬 : (고민하다가) 맞아.

 요한 : 우와~ 너무너무 놀랍다~ 그럼 본 모습은 어떻게 생겼을까요? 여러분, 궁금하시죠? (목소리 톤을 높이며) ~! (다시 원래 톤으로) 여러분들의 뜨거운 성원에 이 도리, 감동했습니다. , 마법사 친구~ 본 모습 딱 한 번만 특...개 해보도록 할까요?

 

 “사실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 아니지?”

 힘썬이 요한의 카메라를 가리며 물었다. 요한은 몸을 뒤로 빼면서 능청스레 말했다.

 “아니, ~ 겸사겸사 궁금하기도 한 거지.”

 “카메라 끄고 나랑 대화하자, 요한!”

 힘썬이 요한 앞에 가까이 붙었다.

 “너 카메라를 켜놓고는 나랑 제대로 대화하지 않잖니!”

 “아 언제! 내가 너 말을 씹은 것도 아니고!”

 요한이 질겁했지만 힘썬은 요지부동이었다. 제일 가까이 앉아놓고 제일 멀게 느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왜 인간들에게는 아주아주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걸까. 왜 질겁하며 도망치려 하는 걸까. 하지만 물리적인 거리의 문제는 아닐 지도 모른다. 요한은 대뜸 카메라를 들고 가까워지지만 힘썬이 요한 앞에서 도망치지 않았다고 해서 두 사람이 자기소개를 나누거나 제대로 대화하는 일 따위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힘썬이 환산할 수 없는 거리일 지도 모른다.

 “, 나는 내 본 모습 같은 거, 절대 안 보여줄 거야.”

 힘썬이 반짝반짝한 눈으로 요한에게 선언했다.

 “네가 카메라를 끄지 않는 이상은!(이 말은 사실상 마법사를 돈벌이로 여기는 걸 포기하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어림잡을 수조차 없는, 마음대로 좁히거나 벌릴 수 없는 그 거리를 무어라 부르면 좋을까?  
 알아내면 그만이다.

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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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체가 처음으로 몸을 구상하던 순간이 기억난다. 그때 힘썬과 리체는 판판한 지형에서 불과 몇 밀리미터 정도 부유한 채 나란히 떠있었다. 둘의 머리 위로는 마치 은하수처럼 아주 작고 미세한 빛의 알갱이들이 천천히 흘러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살아있지만 마법사들과 달리 지성이 없고 의사소통이 되질 않아 ‘작고 조용한 친구’로 불리는 존재들이었다. 힘썬의 경우에는 그들을 ‘쥼쥼’이라고 불렀다. ‘쥼쥼’은 지구로 따지면 식물에 가까웠다.

  힘썬이 리체를 인간으로 변신시키기 위해 가장 먼저 설명한 것은 인간의 외형이었다. 두 개의 팔과 다리가 있으며 여러 개의 덩어리로 나뉘어 있고 각 기관이 유기적으로 바쁘게 생명활동을 한다. 얼굴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은 개개인을 식별하는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고 총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 눈, 코, 귀에 각각 두 개씩 분배하고 코 아래에 마지막 하나를 분배하는데 신경 써서 크게 만드는 편이 좋다. 그게 입이다.

  리체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는 것 같았다. 신이 나있었지만 학습의 기쁨을 누리고 있지는 않았다. 제대로 설명을 듣고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쨌든 누군가를 가르치는데 필요한 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힘썬은 설명을 계속해나갔다. 인간의 신진대사를 담당하는 장기에 관한 이야기였다. “중요한 기관이야.” 힘썬이 강조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꼭 필요하지 않아. 원하지 않으면 생략하고 몸만 만들어도 좋아.” 실제로 힘썬은 인간으로 변신할 적 많은 기관을 생략해왔다.

  리체가 돌발 행동을 한 건 그때였다. 단숨에 솟구쳐 오르더니 사방으로 입자를 뿌리며 번쩍번쩍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한동안 리체는 그런 식으로 공중에 매달려 있다 말고 변덕스럽게 ‘쥼쥼’의 군집으로 뛰어들었다. ‘쥼쥼’들은 깜짝 놀란 것처럼 리체의 움직임에 따라 이리저리 몸을 피하며 가루를 뿌려댔다. 힘썬이 쏜살같이 쫓아와 리체의 이름을 불렀지만 리체는 깔깔거리며 ‘쥼쥼’ 사이를 뒹구느라 정신이 없었다. 힘썬은 리체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그 앞에서 변신했다. 두 개의 팔과 다리를 만들고 볼록한 몸의 굴곡과 빛나는 눈동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과 단단한 손톱을 만들자 리체가 깜짝 놀란 것처럼 멈추어 섰다.

  “그게 무엇이냐?”
  리체가 물었다.
  “[  ]. 그건 무슨 형태인가?”
  힘썬은 엄숙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인간 남자’야. 

  힘썬은 리체 앞에서 빠르게 세 번 정도 변신했다. 처음에는 젊은 남자였다가 점점 나이든 모습을 보여주었다. 인간의 수명이 마법사들보다 반절쯤 짧다는 사실을 직접 눈으로 확인시켜 학습시키자, 리체는 힘썬의 변신 과정을 유심히 살피다 말고 크게 한 바퀴를 돌았다. 힘썬은 리체를 이루는 빛의 입자가 주변의 분자를 끌어 모아 하나의 운집을 이루고, 무형에 가까웠던 형태가 덩어리를 갖추는 과정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잠시 후 리체가 몸을 만들었다. 의외로 리체의 몸은 완성도가 있었다. 리체는 힘썬과 똑같은 얼굴의 남성이 되어 마주보았다. 힘썬이 만든 몸의 점 하나까지 똑같이 복사한 육신이었다. 힘썬은 리체가 자신의 설명을 아주 흘려듣지는 않았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리체가 물었다.
  “어떤가?”
  “오, 훌륭히 잘 해낸 것 같아.”
  힘썬은 간단하게 감상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렇게 물어보는 걸 보니 넌 뭔가 잘 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바로 그걸세.”
  리체는 자신의 몸을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전혀 색다른 기분이 들지 않거든.”

  그러니까 리체는 힘썬의 모습을 취하면 무언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힘썬은 가까이 다가가 리체가 만든 몸을 직접 주무르고 만져보았다. 가슴팍에 귀를 바싹 대고 소리를 들어보기도 했다. 힘썬은 곧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아차렸다. 리체가 인간의 내부를 전혀 복사하지 않았던 것이다. 리체가 만든 몸에는 심장이나 핏줄, 신경이나 조직이 전혀 없었다. 리체가 만든 최초의 몸은 인간의 육신이라기보다 단백질로 만든 인형에 가까웠다. 그저 부유하던 평소의 상태에 형태를 부여하는 작업을 했을 뿐이므로 색다른 존재가 되었다고 볼 수 없었다. 힘썬은 리체에게 처음부터 설명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힘썬은 리체에게 생식의 행위와 번식의 과정, 세포의 무한복사와 생성부터 다시 가르쳤다. 이미 한 번 인간의 육신을 만드는데 매료된 리체는 아까보다 훨씬 더 협조적으로 학습에 임했다. 리체는 힘썬으로부터 난생과 태생, 난태생에 대해 배웠고 또 때때로 토론도 했으며 그것에서 답을 찾기 위해 골몰하기도 했다. 마침내 리체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몸을 재생성하기 위해 웅크렸을 때, 힘썬은 이번에는 리체가 성공할 것임을 알았다. 리체는 보기 좋게 해냈다.

  “와!”
  힘썬은 리체의 가슴팍에 귀를 대보고는 기쁜 듯 말했다.
  “모든 게 완벽해, [  ].”
  “[  ]의 도움이 컸다네.”

  리체는 성취의 기쁨에 흥분해서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심장이 요란하게 뛰고 피가 건강하게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리체는 육신이 주는 감각에 도취해 당장에 지구로 내려가 보고 싶어 했지만 발가벗고 있었으므로 힘썬에 의해 제지당했다. 힘썬은 그대로 지구로 내려갔다간 인간들이 질겁할 것이라며 리체를 말렸다.

  “오, 나도 맨 처음에 그런 실수를 했다가, 많은 인간들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단다.”
  힘썬이 말했다.
  “물론 너는 지금 ‘남성’이기 때문에 설령 이 상태로 누군가에게 노출될 지라도 아주 위험하지는 않겠지만, 기억해줘. 네가 ‘여성’으로 있을 때는 많은 게 교묘한 방식으로 달라질 거야.”
  “네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어, [ ].”
  리체가 대답했다.

  두 사람은 인간사회의 유행을 알기 위해 우주로 이동한 다음, 지구 위를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인공위성 하나에 내려앉아서 마음에 드는 전파를 골라잡았다. 리체가 일정하고 빠른 리듬에 따라 몸을 흔들며 춤을 추는 멋진 영상을 발견했다. 이상하게도 춤을 추는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클로즈업 되면서 눈동자가 반짝이거나 조명이 번쩍이는 연출이 반복되었다. 힘썬은 그게 ‘한국의 가요’라고 알려주었다. “이건 방금 내가 이 전파들을 뒤져보며 알게 된 사실인데, 이것들을 ‘케이팝’이라고 부르기도 하더구나.” 리체는 케이팝 패션이 무척이나 인상 깊었던 것인지 이런류의 옷을 입어보자고 말했고, 힘썬은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동의했다.

  이번에도 리체는 약간의 실수를 저질렀다. 피부조직을 움직여 색깔을 만든 후 몸 바로 위에 옷을 입은 것처럼 ‘무언가’를 생성하려 했던 것이다. 힘썬은 옷은 살아있는 게 아니므로 세포의 생명활동 방식을 카피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주었지만, 리체는 이런 편이 재미있는 것 같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힘썬은 남성의 나신으로 위성에 앉아 리체가 자신의 육신 위에 흥미롭고도 그로테스크한 시도를 반복하는 것을 얌전히 지켜보면서 때때로 송신되는 전파에 귀를 기울였다. 힘썬의 예상대로 리체가 그 행위에 질리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침내 리체가 도로 나신의 남성으로 돌아가자, 힘썬은 자리에서 일어나 리체에게 시범을 보이겠다고 말했다.

  “내 방식은 네게 너무 지루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힘썬은 전파 하나를 리체에게 보여주면서 두 팔을 벌렸다.
  “그래서 네게 도움이 될 만한 걸 함께 보여줄게.”

  그런 후 힘썬은 곧장 여성의 몸으로 변신했다. 다음 순간 힘썬의 육신이 강하게 빛나더니 몸의 윤곽만 간신히 알아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힘썬은 빙글빙글 돌면서 그대로 다이빙했다. 주변에 생성된 빛 무리가 힘썬을 따라 쏜살같이 떨어졌다. 그녀가 두 팔을 벌리며 빙글빙글 돌자, 빛 무리가 형태를 갖추며 육신에 달라붙었다. 다음 순간 그것들이 유리처럼 깨지며 빛을 하나씩 터뜨렸고 곧 하나의 의복이 되었다. 힘썬은 매혹적으로 돌면서 솟구치다가 화려한 포즈로 인공위성 안테나 위에 착지했다.

  리체는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았다.
  “방금 우리가 본 게 무엇이었지?”
  “주로 어린 인간 아이들이 보는 영상물이야.”
  힘썬이 말했다.
  “인간 어른들이 흔히 마법소녀물이라고 부르던데, 여기서는 인간들도 변신을 해.”

  리체는 마법소녀의 변신 과정을 통해 의복을 ‘생성하고’ ‘입는다’는 개념을 완벽하게 이해한 것 같았다. 거기 더불어 힘썬보다 훨씬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변신하기까지 했다. 힘선은 위성 안테나에 앉아, 리체가 우주쓰레기들 틈을 능숙하게 돌며 자신의 에리어를 형성하고 장미와 반짝이를 흩뿌리며 아름답게 의복을 만들어 입는 것을 즐겁게 지켜보았다. 마침내 리체가 돌아왔을 때, 힘썬은 더는 자신이 리체에게 전달할 사항이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리체의 주변에는 아직도 꽃과 반짝이가 떠다니고 있었다.

  “오, 내일은 네 이름을 짓자.”
  힘썬이 즐겁게 말했다.
  “분명 신나는 일이 될 거야.”
  “그 전에 하고 싶은 게 있다네.”
  리체가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여기에 뭔가를 좀 걸고 싶은데, 인간의 방식이면 좋겠어.”

  힘썬은 리체가 귀걸이를 걸기 위해 귓불을 뚫고 싶어 한다는 것을 이해했다. 좋은 생각이었다. 인간과 비슷한 흐름을 경험하다보면 인간사회에 보다 무사히 적응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리체는 원래부터 예측 불가한 빛이었으므로 지금의 사회에서도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는 편은 아니었고, 힘썬은 그 사실을 기억했기 때문에 그녀를 가르치는데 많은 순간을 인내하고 사랑할 수 있었다. 귀쯤이야 간단히 뚫어줄 수 있었다.

  힘썬은 단지 리체가 신경세포를 너무 많이 만들어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진 상태가 아니기를 바랐다. 귓볼을 뾰족한 무언가로 관통시키는 일은 고통을 수반했기 때문이다.

  힘썬이 대답했다.
  “오, 그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어.”

  하지만 리체라면 고통마저도 즐거움으로 받아들이지 않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썬 역시 아픈 게 아주 싫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니까 그들에게는 고통 같은 것들마저도 때때로는 즐거움이 된다. 영원히 지루할 바에야 차라리 간악하거나 혹독하게 만드는 동물적인 감각에마저 유희를 느끼게 되는 걸지도. 그럼 마법사들은 다 마조히스트일까? 어쩌면 다들 변신마법소녀가 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알 수 없다. 마법사들이라 한들 앞날을 예측하거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는 것이다. 힘썬은 그럼에도 알기 위해 올바른 인간의 형상으로 지구에 내려갈 것이다. 지루함에 대해 알기 위하여.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  ]! 

  리체가 반짝이는 몸으로 그녀를 불렀다. 한 번 더 변신하려는 모양이었다. 힘썬은 생각에서 벗어나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리체의 주변을 감싼 (반짝이와 장미꽃으로 가득한)변신 배리어가 보였다. 아마 저것은 온 우주를 통틀어 가장 빛나는 보라색 블랙홀일 것이다. 리체가 힘썬을 향해 힘껏 손을 뻗었다.

  “함께해주게나! 

  힘썬은 사양하지 않고 낄낄거리며 온몸을 쭉 뻗었다. 그런 후 곧장 빛 무리를 만들며 인공위성 안테나에서 뛰어내렸다. 멋진 다이빙이었다. 두 사람은 그런 식으로 지구를 열 바퀴도 스무 바퀴도 넘게 돌 수 있었다. 변신소녀는 원래 무적이야!

19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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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솟구치는 것»
1차/old 2019. 10. 8. 23:32

  그 세계에는 빛 덩어리들이 지능과 재능을, 개성과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덕과 윤리를 알고 문명과 역사의 기록을 기억하고 있었다. 썬은 높게 날던 빛이고 무척이나 따뜻한 편에 속했지만, 모든 빛들이 항상 치솟거나 번개처럼 번쩍이는 것은 아니었다.

  기억하는 한 염은 게을렀다. 그래서 높게 부유하지 않고 종종 바닥에 가라않고는 했고, 바닥에서 간신히 떠오른 채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것으로 모든 일과를 대신할 때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종종 시야에서 사라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썬은 그를 좁은 지형이나 어둠이 고인 깊은 고랑에서 찾아내고는, 마치 잔소리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온몸을 부풀렸다. 썬은 염을 보살피는 주요한 마법사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조금 움직이는 것도 나쁘지 않아.” 썬은 종종 엄숙하게 선언하듯 염에게 말하곤 했다. “정말이야, 그렇게 바닥에서 간신히 떠오르기만 해서는 솟구치는 법도 잊어버릴지 모른단다.” 염은 그 말에도 태평했지만, 썬은 처음 염이 바닥에만 붙어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가 솟구치는 법을 모르는 빛일 지도 모른다고, 그래서 가르쳐야 할 것이 무척이나 많을 거라고 염려한 적도 있었다. 얼마 있지 않아 썬 역시 염이 그저 게으르고, 어둡고 좁은 곳을 좋아하는 빛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염뿐만의 일은 아니었다. 마법사들 모두가 제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썬은 염과 정반대의 기질을 가진 마법사였고, 유희를 위해 다른 차원을 넘나드는 여타 부지런한 마법사들처럼 부지런했으며, 특히 그중에서도 몹시 아주 무척이나 부지런한 편이었다. 그래서 종종 바깥으로,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수많은 차원을 넘나들며 여러 세계와 행성을 경험하곤 했다. 염이를 자주 보살펴줄 수 없음은 당연했다. 그래도 썬은 탐사를 다녀오기 전에 반드시 자신이 가르치고 보살피고 있는 어린 마법사들을 위해 방문지의 공기를 이루는 입자, 작은 미생물, 암석 따위를 가지고 돌아왔으며, 염은 게으르고 반응이 다소 느릿한 편이기는 했지만 썬이 가지고 오는 것들에만큼은 무척이나 빠른 감정의 변화와 태도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썬은 염이 새로운 세계로부터 오는 물질들에 관심을 가질 때마다 영롱하게 빛나는 것을, 꿈틀거리며 빛의 입자를 마구 뱅글뱅글 돌리는 것을 보았고, 그 애가 관찰하고 사고하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행동이 굼뜨다고 해서 사고의 속도마저 그렇게 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염은 어떤 일이 있어도 솟구치는 법을 잊어버릴 빛이 아니었다. 바로 그 때부터 썬은 염에 대한 걱정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

  하지만 인간의 차원에 내려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어린 마법사들이 분주히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며 새로운 외교의 장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썬은 이번만큼은 염을 그대로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원래부터 썬은 잔소리가 많기는 했어도 일정 이상 개입하지는 않고 선을 지키는 편에 속했지만, 인간사회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두고 어두운 고랑에 박혀있을 염을 생각하자니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어린 마법사들이 1년씩이나 자리를 비우는 상황에서 과연 염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고랑에 틀어박힌 그를 찾아줄 이들이 얼마나 될까? 마법사들은 이타적이고 사려 깊은 존재였으나 그만큼 개성이 뚜렷하고 개개의 존재에 대한 확고한 의식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니 스스로 원해 바닥에 붙어있는 빛에게 있는 힘껏 개입하거나 잔소리를 늘어줄 이들은 아마 썬처럼 부지런하며 유난인 마법사를 제외하면 정말 몇 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썬 외에는 없을 지도 모른다.

  바로 그런 이유로, 썬은 어른 마법사들에게 염을 외교대사로 추천했다. 어차피 어린 마법사들이 많지는 않았으므로 썬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도 염은 반드시 그곳에 내려가야만 했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썬이 행동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녀’가 되기로 결심한 썬이 ‘그’ 혹은 ‘그녀’가 될지도 모를 염을 ‘그’와 ‘그녀’가 존재하는 세계로 끌어당기는 일. 썬은 염의 이름을 추천하고 돌아오는 길에 쪼개진 틈 사이로 몸을 욱여넣고 있는 익숙한 빛을 보았고, 쏜살같이 바닥으로 내리 떨어졌다. 염은 썬을 보자마자 온몸을 움츠리면서 하품하는 소리를 냈다. 그건 썬에 대한 인사였으므로 썬 역시 반갑게 몸을 부풀렸다.

  썬이 말했다.
  “너 이제 지구에 가게 될 거야.”
  염은 잠깐 그게 대체 무슨 말인지 생각하는 눈치였다.
  잠시 후 염이 물었다.
  “왜?”
  “인간들하고 지내게 될 어린 마법사가 필요하거든.”
  “난… 괜찮아.”
  “그렇게 말할 것 같았어.”
  썬은 공중으로 붕 떠오른 다음, 염이 자신을 따라 나올 때까지 빛을 환하게 내뿜었다. 얼마 뒤 썩 탐탁찮은 기색으로 틈 사이에 박혀있던 염이 꾸물꾸물 기어 나왔다.
  “난 정말 괜찮은데….”
  “오, [ ]. 부디 그러지마. 관찰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을 느낄 수 없어.”
  “나는 [ ]이 가지고 오는 미생물로도 충분히 다른 행성을 느끼고 있는 걸.”
  “직접 느끼는 것과는 달라.”
  썬은 상상과 현실에 대한 낙차를 이야기했다. 그러나 때때로 현실이 상상보다 더 높이 부유할 수 있다는 것도. 부유하지 않는 네가 부유하는 법을 잊지 않았음을 보여 달라고 말했다.
  염이 대답했다.
  “으음.”

  그게 대답이었지만 썬은 염이 자신의 말에 대꾸했으므로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임을 알았다. 비척비척거리고, 다소 느리게 움직인다고 한들 염은 호기심과 관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최소한의 욕망이 염에게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염 역시 마법사였으므로 어떤 무료함, 마법사들이 고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지루함과 공허 따위를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염이 이토록 권태로운 것은 그 때문이 아닐까. 썬이 바쁘게 움직이는 것은 가만히 있는 게 괴롭기 때문이지만 염은 그 반대가 아닐까. 결국 우리들은 같은 문제에서 다른 방식으로 해결방안을 찾아나가고 있는 게 아닐까. 썬은 이번에는 염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움직여보기를 바랐다. 자신이 때때로 염을 이해하기 위해 고랑에 누워, 가만히 빛을 죽여 보는 것처럼.

  염이 말했다.
  “응, [ ].”
  염이 다시 한 번 말했다.
  “알겠어…. 어쩔 수 없지.”

  그러자 썬이 빙글빙글 돌더니 염을 끌고 공중으로 솟구쳤다. 아주 오랜만에 소리 내어 웃는 방식이었지만 염은 분명 알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역시 부유하는 법을 잊지 않은 마법사이기 때문이다.

19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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