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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커플 타투»
1차/old 2019. 10. 20. 00:52

 힘썬은 아라를 통해 강시라는 존재를 알게 되었다. 강시는 중국 귀신인데 굳어진 시체라는 뜻으로, 죽었지만 움직이며 사람을 해치는 요물이다. 하지만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본 강시는 아라의 강시보다 귀엽지 않았기 때문에, 어쩌면 아라가 의도한 강시는 중국의 강시와는 다른 종류일 지도 모른다. 휴식시간이 주어졌을 때 아라에게 그 소리를 했더니 아라가 두 손을 모으고 음산한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지금도?” 하지만 아라는 여전히 귀여웠기 때문에 힘썬은 대답했다. “응, 지금도.”

 깜깜한 교실에 한 시간이 좀 넘게 박혀 있다가 휴식시간을 받고 바깥으로 나오니 눈이 부셨다. 힘썬은 시야에 빛이 익숙해질 때까지 손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를 가리고 있었다. 몇 번 정도 깜빡인 후에야 곁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 있는 아라가 눈에 들어왔다. 아라는 힘썬을 보고는 히죽 웃으며 두 손을 모았다가, 힘썬이 그에 지지 않겠다는 듯 열심히 머리에 박힌 나사를 돌리기 시작하자 웃음이 터져 겁주는 포즈를 그만두었다. “안 무섭다, 큰일이야!” 아라가 즐겁게 말했다. 힘썬은 그것을 농담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근심어린 표정을 지었다. “큰일이야?” 힘썬이 되묻자 아라가 정정했다. “사실 그렇게 큰일은 아니야.” 왜냐하면 지금은 영업시간이 아니니까 누군가를 겁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귀신의 집이 잠시 정리에 들어간 동안, 두 사람은 부스를 돌기로 했다. 힘썬은 머리에 박힌 나사를 뽑아 창가에 기대놓았다. 아라는 햇빛 아래서 반짝이는 거대한 나사를 한 번 쳐다보고는… 운동장에 가보자고 말했다.
 “뭔가 있을 거 같아. 아까부터 사람들이 자꾸 들락거리더라!”
 그래서 두 사람은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힘썬은 아라의 손을 흘끔거리다가 타이밍에 맞춰 쑥 집어넣었다. 아라는 깜짝 놀란 기색 없이 그녀를 한 번 쳐다보고는, 잠깐 생각하다가 손을 잡아주었다. 힘썬의 눈동자 광채가 바쁘게 빙글빙글 돌더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이동했다. 힘썬은 발끝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느끼면서 아라에게 물었다.
 “운동장에 가서 뭘 할 거니?”
 “흠, 재미있어 보이는 걸 하자.”
 아라는 즐겁게 대답했다.
 “둘이 할 수 있는 거라면 더 좋겠지.”
 운동장에는 천막이 구석구석에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파란 지붕이 운동장의 풍경과 어우러져 무척이나 시원해보였다. 운동장 한구석에서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물 로켓이 보였다. 와글거리는 인파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자, 그게 보였다. 힘썬은 발걸음을 멈추고, 앞서 가려는 아라의 손목을 가볍게 붙잡았다. 아라가 습관처럼 들리는 “응?”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힘썬은 천막 아래에 붙은 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어떠니, 아라?”
 아라는 힘썬의 손끝을 읽고는 대답했다.
 “난 좋아.”
 의자에 앉아 팔을 내밀면서, 힘썬은 옆자리에 앉아 똑같이 팔을 내밀고 있는 아라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아라가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힘썬은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웃었고, 그건 좋은 신호가 된 것 같았다. 아라가 마주 웃어주자 꼭 그녀가 고양이처럼 보였다.
 “저기, 뭐로 하실 거예요?”
 두 사람의 손목을 번갈아 두드리던 부스 학생이 물었다.
 힘썬이 고개를 돌리며 습관처럼 입을 벌렸다.
 “오-,”
 학생이 두 사람을 위해 타투 종류를 정리한 표를 내밀었다.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으니 아라가 옆으로 고개를 내미는 게 느껴졌다. 힘썬은 옆으로 조금 비켜나며 아라의 옆모습을 한 번 더 훔쳐보았고, 그 순간 마음을 결정했다.
 힘썬이 손가락으로 고양이 모양을 가리키며 비장하게 말했다.
 “나 이게 좋아.”
 아라는 강아지 모양 타투를 쳐다보다 말고 힘썬의 손가락 쪽으로 시선을 이동했다.
 “고양이?”
 “오, 맞아. 아라 너를 닮은 것 같아.”
 그런 후 힘썬은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강아지도 좋단다.”
 아라는 고양이를 가리켰다.
 “이걸로 해주세요.”
 타투를 받는 동안 힘썬은 아라에게 강아지를 좋아하냐고 물었다. 그러자 아라가 자신이 키우는 강아지 퐁퐁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자신의 배경화면이 퐁퐁이라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아라의 목소리에는 확신으로 가득 찬 긍정적 감정이 느껴졌다. 힘썬은 퐁퐁을 만나보지 않았는데도 벌써 퐁퐁이 좋아졌다.
 “나중에 만나보고 싶어.”
 힘썬이 그렇게 말하자, 아라는 기회가 된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하자고 대답했다.
 두 사람은 똑같은 타투를 달고 천막 아래를 빠져나왔다. 운동장 한가운데서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힘썬은 손바닥으로 차양을 만들어 이마에 대고, 햇빛을 향해 발사되어 날아가는 물로켓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라가 손목을 매만지며 즐거워했다.
 “타투하길 잘한 것 같아.”
 “맞아, 아라 너와 똑같은 타투를 해서 기뻐.”
 힘썬이 차양을 만들던 손바닥을 떼어내고는 아라를 보며 씨익 웃었다. 똑같은 무언가를 몸에 새기는 일이 가지는 특별함에 대한 단어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순간, 어렵지 않게 그 비슷한 단어가 떠올랐다. 힘썬이 말했다.
 “오, 그러고 보니 우리는 방금 ‘커플’ 타투를 하고 나온 거야. 그렇지?”
 그러자 아까 전, 복도를 걷다 말고 느닷없이 썬의 손바닥이 아라의 손을 붙잡았을 때처럼, 아라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흔쾌히, 기꺼이 혹은 그에 합당하게 웃어주면서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맞아, 완전 귀여운 커플타투 했어.”
 그러자 힘썬의 눈동자 광채가 바쁘게 빙글빙글 돌더니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19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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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콥스콧 «체스»
2차/old 2019. 10. 19. 01:14

스콧른 게스트북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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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비에는 어림잡아 서른 명 정도의 아이들이 줄지어 서있었다. 목에는 스타플릿에서 나눠준 명찰을 걸고, 한 손에는 랩 지도를 쥔 채 교사의 지시에 따라 앞을 바라보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눈으로 훑던 스콧은 어깨를 으쓱이며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붉은 생도복 위에 흰 가운을 걸친 스콧은 스타플릿 아카데미의 학생이라기보다 연구자에 가까워보였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니었다.
 “움직이죠. 섹터 B부터 D까지 한 시간 안에 돌아봅시다.”
 “한 시간 안에?”
 조이가 얼굴을 찌푸리자, 스콧은 어깨를 으쓱이며 정정했다.
 “한 시간 반.”
 스타플릿 아카데미가 주최하는 견학 프로그램은 학교가 방학을 앞둔 여름과 가을에 각각 한 번씩 진행되었다. 견학생들에게 랩을 안내하는 것은 생도들의 의무사항이었다. 따로 지원자를 받지는 않았고, 순번제였다. 운이 좋으면 단 한 번도 참여하지 않고 졸업할 수 있었다. 스콧은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해에 결국 일을 받았다. 그는 가운을 걸치고 목에 플라스틱 명찰을 단 후, 조이에게 이렇게 물었다.
 “확성기도 챙겨야 할까?”
 그는 시끄러운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아이들은 스콧이 예상하는 것보다 시끄럽지 않았다. 확성기를 통해 설명하지 않고선 도무지 견딜 수 없는 소란스러움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들은 질서정연했고, 예의도 발랐고, 아무 곳으로나 흩어지지도 않았다. 스콧은 침착하게 B섹터를 돌며 유리창 너머의 생도들이 최첨단 기계를 만지고, 실험을 진행하고, 그 결과를 컴퓨터에 입력하는 모습을 손으로 짚으며 일일이 설명해주었다. 아이들은 유리창에 거의 달라붙다시피 하며 한 마디씩 떠들어댔다.
 “끝내준다.”
 “저게 드릴이라고?”
 “우주선은 어디 있지?”
 이건 예상한 소란스러움이었으므로 스콧은 견딜 수 있었다. 조이가 아이들에게 기계에 대한 보충 설명을 하는 동안, 그는 한쪽으로 물러서서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유리창 너머의 생도 하나가 멈추어 섰다. 스콧이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생도는 이죽이며 그와 아이들 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가 입을 빠끔거렸다. ‘어울리는데, 스콧 선생.’ ‘입 닥치고 꺼지시지!’ 스콧은 가운데 손가락을 들었다.
 생도는 스콧과 몇 번의 수신호를 더 주고받다 말고 스콧의 어깨 너머를 응시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손을 내렸다. 스콧은 얼굴을 찡그리고 고개를 돌려 자신의 뒤를 확인했다. 한 아이가 그를 보고 있었다.
 “뭘 보냐.” 
 스콧은 당황스러움을 숨기기 위해 툴툴거렸다.
 “스물여덟 살쯤 먹었으면 욕 정도는 할 수 있는 거라고. 알겠니, 꼬맹아?” 
 아이는 대답도 없이 고개를 돌렸다.
 B섹터를 지날 무렵 스콧은 뒤를 돌아 아이들의 수를 확인했고, 왜 그렇게 하고 싶었는지는 스스로도 미처 깨닫지 못 했지만, 시선으로 아까 자신을 바라보았던 아이를 찾아냈다. 그 소년은 그 어떤 무리에도 끼지 않은 채 가장 끄트머리에 서서 소극적으로 걷고 있었다. 스콧은 소년에게 위화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제야 소년이 다른 아이들에 비해 5살은 어려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월반인가?’
 스콧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적어도 자신이 기억하는 한 그는 머리가 무성해질 무렵부터 제 또래의 아이들과 어울릴 기회가 없었는데, 전적으로 그가 너무 똑똑했던 탓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아이들이 모두 스콧보다 멍청했던 탓이었다. 그는 또래 아이들과 대화를 통해 기쁨을 느낀 적이 거의 없었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생도들과 거의 사적인 교류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스콧이 아는 한 그들은 여전하게도 스콧보다 멍청했다.
 지적인 기쁨만이 전부였다. 타고나기를 공식과 우주, 첨예한 첨단기술과 물리학적 가설을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삶을 살아가는 동안 스콧은 타인보다 영리한 이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거듭 경험했다. 인간관계란 자발적이고 본능적인 욕망을 억눌러야 진행될 수 있는 하위의 임무에 불과했다. 사람들과 교류하기 위해서는 대부분의 말을 우선 접어둬야했다. 아름다운 공식과 가설을 복잡하게 생각하고, 조롱말곤 달리 떠오르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논문 앞에서 입을 벌리는 타인들을 위하여. 그리하여 스콧의 일방적 희생-적어도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을 통해 진행된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것은 결국 일시적 충족감과 긴 회의뿐이었다. 천재들은 고립을 택하고, 그 고립이 그들에게 썩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보다 나은 선택지는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의 다 자란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무감한 눈으로 랩을 둘러보는 어린 금발 소년의 태도는 스콧에게 어떤 말할 수 없는 미묘한 자국을 남겼다. 그래서 전혀 스콧답지 않게도, 그는 명단을 뒤져 그 아이의 이름을 찾아냈다. ‘파벨 체콥.’ 러시아에서 왔군. 스콧은 다시 명단을 옆구리에 꼈다. 소년은 스콧이 예상하던 것보다 훨씬 어렸다. 체콥은 이곳에 모인 아이들보다 7살은 어렸다.
 “스콧 선생님.”
 한 소년이 스콧에게 다가와 알짱거렸다. 스콧은 시선만 움직여 그를 내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지?”
 그가 덧붙였다.
 “난 교사가 아니야.”
 “스콧 선생님은 애인이 있나요?”
 고개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조이의 시선이 느껴졌다.
 스콧은 아이 앞에서 굳이 경멸의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여기 와서 궁금한 건 그것뿐이냐?”
 “어, 저는 그냥. 미남이시길래요.” 
 소년이 어깨를 으쓱이며 ‘아시잖아요?’하고 눈빛을 보냈다.
 스콧은 혀를 찼다.
 “스타플릿에 연애하러 들어오는 얼간이들은 보통 한 학기 만에 낙제하고 떠나기 마련이지. 쥐도 새도 모르게 말이다. 넌 최첨단 연구소를 둘러보고 있는 와중에도 시시껄렁한 게 궁금한 모양이구나.”
 아이들이 일순 조용해졌다. 질문한 소년은 얼굴을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스콧이 만족스럽다는 콧소리를 내자, 허겁지겁 다가온 조이가 그의 발을 힘주어 밟았다. 스콧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하며 물러났다. 조이가 이를 악물고 그를 노려보았다.
 “잘 좀 해. 여기서도 밥맛으로 굴 거야?”
 “엿이나 먹어.” 
 스콧이 으르렁거렸다.
 섹터 C는 조이의 담당이었으므로 스콧은 할 일이 거의 없었다. 아이들은 아까보다 스콧에게 관심을 덜 가졌고, 그를 훔쳐보던 소녀들도 아까의 일로 그에게 시선을 거뒀다. 그러거나 말거나 스콧은 길쭉한 몸으로 위풍당당 걸어 다녔다. 세상에서 제일 재수 없는 남자가 되기로 작정한 것처럼. 섹터 C의 생도들이 이따금 스콧을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섹터 D에는 로비가 있었고, 견학 일정 상 아이들은 그곳에 모여 자유행동을 할 수 있었다. 로비에는 견학생들을 위해 마련된 모의 프로젝트 기계와 가상 우주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섹터를 둘러보며 구경했던 장비의 기초 버전을 직접 시연해볼 수 있는 기회였기에 아이들은 이 스케줄을 가장 고대하고 있던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재빨리 로비 입구에서 학생용 실험 가운을 걸치고, 자신이 연구원이 된 것처럼 뿔뿔이 흩어져 기계를 만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스콧은 자신이 염려한 데시벨만큼 치솟는 소음을 맛보았다. 아이들이 무서운 기세로 떠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스콧은 피곤하다는 얼굴로 벽에 기대어 섰다. 아이들은 필요한 일이 있을 때면 조이를 찾았다. 스콧을 찾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스콧은 길게 하품하곤 시계를 확인했다. 중앙로비에서 출발한지 딱 한 시간째였다. 30분이면 이 짓도 끝날 것이고, 스콧은 개인 연구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곳에서 스콧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니, 누구의 부름도 받지 않는 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가? 그는 혼자서도 모든 것을 잘 할 자신이 있었다. 지루한 눈으로 왁자한 로비를 바라보던 스콧은 화들짝 생각에서 깨어났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와 어떻게든 동떨어지기 위해 벽에 기대어있는 스콧처럼, 혹은 그보다 더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벽에 등을 맞대고 서있는 소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스콧은 파벨 체콥이 혼자 있는 것을 보았다.
 체콥은 심지어 가운을 입지도 않았다. 들어올 때와 똑같은 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다. 무료하고 지루한 눈빛에는 어떤 참담함이 섞여있었는데, 어쩐지 몹시 슬퍼보였다. 스콧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았다. 그는 슬퍼하기보다 분노하는 쪽이었다. 타인의 무지가 주는 외로움에 대하여 화를 내던 나날들. 체콥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년은 아까부터 부러운 눈으로 아이들이 둘러싸고 있는 첨단 기계를 하나하나 응시하고 있었다. 그 수많은 섹터를 거쳐 오는 동안 그렇게나 무감하게 굴었으면서! 연구소 시스템에는 무관심해도 그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끝장나는 장비와 기술력 앞에 마음을 빼앗긴 걸까? 그렇다면 체콥 역시 엔지니어를 지망하고 있는 것일까? 스콧 역시 엔지니어였다. 그는 단언컨대 스타플릿이 배출한 엔지니어 중 가장 전도유망한 인재가 될 것이었다. 스콧은 체콥을 위해 자신이 무언가 해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체콥은 다가오는 그림자의 끄트머리를 보곤 고개를 들었다. 둘은 오래 시선을 마주쳤다. 체콥은 스콧을 올려다보는 내내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어떠한 말이라도 나누고 싶지 않은 사람처럼. 그러나 스콧이 이렇게 입을 열었을 때, 체콥은 마치 그 질문을 듣기 위하여 오늘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양자의 핵을 분리하는 에너지의 생산 원리를 우주선의 엔진에 달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우주선의 98%가 방사능 덩어리가 돼요. 제외된 2%는 4중 격폐처리된 엔진 냉각수의 제어봉 때문이에요.”
 스콧은 체콥의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보았다.
 스콧은 구석에 처박힌 책상을 앞으로 끌어온 뒤 의자 두 개를 놓았다. 체콥은 의자에 앉았고, 스콧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푸른 눈동자가 스콧을 꿰뚫었다. 소년은 전적으로 스콧에게 관심을 쏟고 있었고 스콧은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심심하니?”
 “잘 모르겠어요.” 
 체콥이 대답했다.
 “하지만 할 일이 생긴다면 잘 할 수 있어요.”
 “그럼 할 일을 만들어주마.”
 스콧이 말했다.
 “난 네가 재밌어 할 만한 걸 알겠거든.” 
 체콥은 그 말을 이해했다. 
 스콧은 자신이 들고 있던 플라스틱판에서 명단을 통째로 떼어낸 후, 그 중 한 장을 뒤집었다. 그리고 가운에서 만년필을 꺼내, 그 여백에 큰 사각형을 그렸다. 스콧은 사각형을 가로로 뻗는 여덟 개의 직선으로 나눈 후, 세로에도 똑같은 작업을 했다.
 “체스판이군요.” 
 체콥이 말했다.
 “둔하지는 않구나. 하지만 이건 네가 아는 그 체스는 아니야”
 스콧이 사각형을 칠하며 대답했다.
 스콧은 그들 사이에 그 체스판을 놓고, 손가락으로 그 중 한 사각형을 짚었다.
 “말은 하나야.” 
 스콧이 설명했다.
 “그리고 매 턴마다 오직 한 칸씩 움직일 수 있는데, 두 칸씩 대각선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문제를 내는 거야. 퀴즈지. 상대가 문제를 내고, 네가 그것을 맞추면, 넌 두 칸씩 전진할 수 있어. 맞추지 못 하면 넌 한 칸씩 움직일 기회조차 잃는 거지.”
 “그럼 서로 도망 다니기만 하잖아요.”
 체콥이 말했다.
 “-그래서.” 
 스콧이 대답했다
 “너는 나를 쫓아야 하는 거지.”
 “스콧은 도망가고요?”
 스콧은 체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스콧이 덧붙였다.
 “애라고 봐주지는 않을 거야.”
 체콥은 눈을 굴리다 말고 어깨를 으쓱였다.
 “할래요.”
 그래서 둘은 더는 체스라고 할 수 없는 그 게임을 시작했다.
 체콥이 먼저 움직였다. 스콧은 그에게 물리학 기초 이론에 대해 물었고, 체콥은 얼굴을 찡그리곤 스콧을 올려다보았다.
 “그 정도는 알아요.”
 “그럼 대답하고 말을 옮기지 그래.”
 그래서 체콥은 그렇게 했다. 말이 두 개뿐이었으므로 두 사람은 굳이 말을 형상화할 필요가 없었다. 그저 자신의 차례가 왔을 때 각자의 말이 어디에 있는지 판 위를 차례로 짚으면 됐다. 그것들이 어디 있는지 잊어버릴 리도 없었다.
 체콥은 말을 옮기며 스콧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밥맛으로 굴어요?”
 스콧은 콧방귀를 뀌었다.
 “밥맛으로 보였냐?”
 “굳이… 밀어낼 필요는 없잖아요?”
 스콧의 차례였다. 체콥은 어니스트 러더퍼드가 내세운 원자 모형에 대해 물었고, 스콧은 어깨를 으쓱이곤 정답을 말했다. 그는 말을 옮기며 체콥의 질문에 돌려 대답했다.
 “그렇다고 밀어내지 않을 필요도 없지.”
 스콧은 도망가는데 성공했다. 이제 체콥의 차례였다. 
 “넌 그럼 밀어내지 않는 모양이구나, 체콥.”
 스콧은 그에게 대각선으로 움직일 것이냐고 물었고, 체콥은 판을 들여다보다가 이번엔 한 칸만 움직이겠다고 대답했다. 체콥은 자신의 말을 한 칸 전진시켰다.
 체콥이 말했다.
 “밀쳐지는 것뿐이에요.”
 스콧은 얼굴을 구겼다.
 “저 애들은 멍청해.”
 “알아요.”
 “사람들에게 상냥할 필요는 없어.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일에 호기심을 가지고 알랑거리지만 정말로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이 오면 침을 뱉으며 떠나지. 너를 이해하지 못 할 사람들이 네게 저지를 수 있는 일은 고작해야 너를 할퀴는 일뿐이야.”
 체콥은 스콧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스콧은 밀치며 살아온 건가요?”
 스콧은 대답 대신 턱을 문질렀다.
 잠시 후 스콧이 말했다.
 “난 대각선으로 도망칠 테니 너는 질문하렴.”
 “왜 파동함수에 모순이 있는지 설명해주세요.”
 스콧은 체콥을 흘끔거린 후 말을 움직이며 대답했다.
 “애초에 그건 아무도 모르는, 정의할 수 없는 무엇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수학적 언어기 때문이다. 양자의 비밀을 전혀 밝혀내지 못 한 그들이 미지를 설명하기 위해 수학을 끌어들였던 거야. 함수라는 게 넣으면 답이 뿅 튀어나오는 마법상자라도 되는 줄 알았던 거지. 그들은 상자를 이루는 질서를 존중하지 않았어. 핵심이 되는 언어가 가장 불확실한 줄도 모르고. 그래서 문제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었지. 파동함수에는 물리적 의미가 없어. 다만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가능성을 내포할 뿐이지. 그건 수학이 아니야. 인문학이지.”
 스콧이 말했다.
 “네 차례다.”
 “저도 움직일래요.”
 체콥은 추격하겠다고 대답했다. 스콧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느 물리학자가 그놈의 인문학으로써 주장한 게 있을 거야, 꼬맹아.”
 “불확정성의 원리.”
 체콥이 스콧이 도망친 방향으로 말을 움직였다.
 스콧이 어깨를 으쓱였다.
 “설명할 수 있니?”
 “그 원리는… 결과적으로 우리가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줬어요.”
 체콥은 스콧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건 양자를 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사실이 아니었나요?”
 “그럼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지?”
 “사람들.”
 그러니까 체콥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미지의 영역에 대한 이야기였다.
 “사람은 양자가 아니야.”
 스콧이 말했다.
 스콧의 차례였다. 스콧은 질문을 받지 않고 한 칸을 움직였다. 다시 체콥의 차례가 되었다. 체콥은 판을 내려다보았다. 체콥의 말은 두 번만 대각선으로 움직이면 스콧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스콧은 도망갈 것이다. 체콥은 스콧이 대답하지 못 할 공식을 고민해보았다. 그러나 공식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스콧의 탈출구가 될 것이다.
 체콥은 질문을 받지 않고 한 칸을 움직였다. 이제 다시 스콧의 차례가 됐다. 체콥이 물었다.
 “도망칠 거죠?”
 “질문하렴.”
 “저 사람.”
 체콥이 시선으로 조이를 가리켰다.
 “나이가 어떻게 돼요?” 
 스콧은 침묵했다. 체콥이 그를 바라보았다. 스콧은 얼굴을 찡그리곤 턱을 문질렀다.
 “서른 둘?”
 “서른이에요.”
 스콧은 말을 움직이지 못 했다. 이제 체콥의 차례였다.
 “전 계속 추격할 거예요, 질문해주세요.” 
 스콧은 로비를 훑어보다 말고 덩치 큰 남자 아이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저 친구 이름이 뭔지 알고 있냐?”
 체콥은 뒤를 돌아 소년의 얼굴을 확인한 뒤, 어깨를 으쓱이곤 대답했다.
 “제임스.”
 스콧은 남은 명단에서 제임스를 찾아냈다. 체콥이 맞았다. 소년의 이름은 제임스였다.
 체콥은 말을 움직여 스콧의 말과 가까워졌다. 이제 다시 스콧의 차례였다. 스콧은 질문을 받는 대신 이번에도 스스로 한 칸을 움직였다. 그는 이제 질문으로부터도 도망치고 있는 셈이었다.
 “질문하세요.”
 체콥이 어깨를 으쓱였다.
 “참고로 전 애들 이름을 다 알고 있어요.”
 “너 완전 밥맛이구나.”
 “스콧보단 아닐 걸요.”
 스콧은 이번에도 양자역학에 대한 질문을 했고, 잠시 고민하긴 했지만 이번에도 체콥은 훌륭히 정답을 맞췄다. 체콥은 놀랄만큼 예상한 것 이상으로 영특했다. 생도들이 절절매는 질문에도 서두르지 않고 간결하고 분명한 답을 내놓았다. 당황하긴커녕 새로운 공을 선물받은 것처럼 점차 빛났다.
 체콥이 스콧의 말을 추격하고 있었다. 이제는 세 칸밖에 남지 않았다. 스콧은 도망칠 수 없었는데, 그의 말이 구석에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판에는 끝이 있고 도망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그리고 속수무책으로 자신을 추격해온 말에게 지켜온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스콧은 더는 대각선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말을 어쩔 수 없이 한 칸 전진시켰다. 그는 이제 완전히 코너에 몰렸다. 다음 차례가 온다고 한들 더는 움직일 곳이 없었다. 체콥이 다음 질문에 대답하지 못한대도 결과는 똑같았다.
 “그래도 제가 움직일 수 있게 마저 질문해주세요.” 
 체콥이 말했다.
 스콧은 어깨를 으쓱이곤 질문했다.
 “내 이름이 뭔지 알고 있니?” 
 체콥이 대답했다.
 “몽고메리 스콧.”
 “요르겐센.”
 스콧이 정정했다.
 “몽고메리 요르겐센 스콧.”
 체콥의 말은 전진하지 못하고 스콧의 말과 마주보며 섰다. 게임이 끝났다. 체콥이 이겼다. 체스는 체콥의 승리로 끝났다.
 스콧은 시계를 확인한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간이 됐구나.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야, 꼬마 엔지니어씨.”
 “엔지니어를 할 생각은 없는데요.”
 “그럼 어디를 지망하지?”
 잠시 고민하던 체콥이 대답했다.
 “조타수요.”
 아이들은 걸었던 순서대로 D섹터에서 C섹터로, C섹터에서 다시 B섹터로 돌아갔다. 그리고 A섹터와 B섹터를 연결하는 중앙로비에 모여 인원수를 체크한 후, 스타플릿이 제공하는 기념품을 한 명씩 받아갔다. 스콧은 기념품을 챙겨 체콥에게 다가갔다. 나머지 아이들은 모두 조이에게 몰려갔으므로, 스콧에게 기념품을 받기 위하여 기다리는 아이는 체콥뿐이었다.
 “체스는 재미있었니?”
 “네.”
 체콥이 기념품인 조립식 우주선 모형을 받으며 대답했다.
 “마치 연애 같던 걸요.”
 스콧이 비웃었다.
 “연애해본 적은 있냐?”
 “도망치고 추격한다는 점에서 연애와 스콧의 게임은 다를 바가 없어요.”
 체콥이 똘똘하게 말하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지 않나요?”
 스콧은 낄낄거렸다.
 “그럴 지도 모르지.”
 체콥은 기념품을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스타플릿의 엔지니어가 되면 무엇을 하고 싶어요?”
 스콧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아름다운 함선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혀서 내가 할 일을 하고 있을 거다.”
 “그럼 저는 그 함선의 브리지에 앉겠어요.”
 “그리 어려운 목표도 아니구나.”
 “하지만 저는 오늘 스콧을 추격하는데 성공하지는 못했는걸요.”
 “시간이 더 있었다면 잡을 수 있었어.” 
 체콥은 진중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연애에도 타이밍이라는 게 있는 법이에요. 놓치면 영영 붙잡을 수 없는 거예요. 코앞에 있어도.”
 “사랑 고백을 듣는 것 같군.”
 스콧은 기발하고 재밌는 농담을 던진 것처럼 낄낄거렸지만, 체콥은 진지한 얼굴로 가방을 메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체콥이 고개를 들었다.
 “작별인사를 하고 싶은데 고개 좀 숙여주세요, 미스터 스콧.”
 그래서 스콧은 그렇게 했다. 그의 뺨에 물기어린 감촉이 조심스럽게 닿았다 떨어졌다.
 체콥이 속삭이며 당부했다.
 “다음에 또 봐요. 저를 잊지 마세요, 미스터 스콧.”
 스콧은 대답 대신 작별했다.
 “잘가렴, 파벨 체콥.”
 “안드로비치.” 
 체콥이 덧붙였다. 스콧이 고개를 끄덕였다.
 “파벨 안드로비치 체콥.”
 그렇게 두 천재는 헤어졌고, 각자의 체스판으로 돌아갔다. 스콧은 그 뒤에 여러 가지 사건을 겪으며 정신이 쏙 빠졌고, 이 어린 천재의 존재를-그의 당부에도 불구하고-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지만, 체콥은 시큰둥한 얼굴로 랩을 돌아다니는 밥맛의 미청년을 잊지 않았고, 그리하여 언젠가 둘은 거대하고 아름다운 함선에서 재회할 운명이었다. 그러니까 체콥은 마침내 스콧을 추격하는데 성공할 운명인 것이다. 이 체스는 전적으로 파벨 안드로비치 체콥의 승리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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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10월 티스토리 스킨
chat 2019. 10. 12. 00:52

이사 끝!!
이번에 백업 티스토리를 이전하면서 스킨을 바꿨다.
무엇이든 금방 실증을 내는데 이번 스킨은 얼마나 쓸지 모르겠음.
큰틀은 유지하고 세부적인 디자인만 바꾸어서 오래 사용할 예정.
늘 그렇듯 포토샵으로 레이아웃을 짠 뒤 코드 작업은 그대로 커미션 맡겼다.

디자인 가안 (첫화면)

배경은 엔록 글갈피 만들면서 다운받아놓은 프리스톡사진으로 뚝딱 만든 것.
해상도 문제로 인해 전반적으로 폰트 사이즈가 1pt-3pt쯤 커졌음.. (sad)


한동안 상단 메뉴를 사용했었는데 역시 좌측 메뉴가 편함...
우측 메뉴도 디자인해보고 싶은데 다음 스킨에서 도전해볼까.


소스 출처
1. 배경
unsplash(http://unsplash.com)
다운 받아 재배치+배경색 조정+보정

2
. 도트
좌 용왕님 @yongwang_커미션이고 우 파니니님 커미션.
파니니님은 도트가 아니고 찌끄미 커미션이었음... 너무 귀여움.

3. 폰트 / 컬러
구글폰트 (http://fonts.google.com)
본문 제외 모든 곳에 본고딕 CJK KR 사용. 
이것저것 사용해봤는데 역시 본고딕이 제일 깔끔함.

본문은 돋움으로 바꿔놨는데... 사용해보고 다시 바꿀수도.
줄간격 말고 문단 사이에도 여백을 주고 싶은데 뭘 해도 안 됨..ㅠㅠ
나중에 해결하기로 함... // → 지인이 도와줬음 해결!!

4. 
포인트 컬러   ■   
#eeeeee 바탕으로 오렌지색이나 로즈골드 조합도 예쁠 것 같음.
나중에 질리면 찔끔찔끔 바꿔봐야겠음.


서브 카테고리 가안


2000년대 초반 유행하던 개인홈 레이아웃을 시도해보고 싶었는데,
전통적인 방식 (novel ■ ■ ■  pic ■ ■ ■  )을 사용하기엔 글 수가 너무 많아서
슬프게도 레이아웃을 짜는 과정에서 자가타협했음... 진짜 슬픔.
전통적인 방식을 가독성 좋게 효율적으로 적용할 방법을 좀 더 고민해보겠음...

글 백업까지 얼마나 걸릴지 모르겠다.
생각 이상으로 쓴 글이 많다. (근데 다 미완임)

대부분
 백업해보려고 노력했는데 또 막상 골라내고 보니까 공개할 수 있는 게 몇 편 없네.
백업을 제때제때 안 했더니 남은 게 생각보다 없다...
백업을 생활화하자. 지금 생각하면 아깝다. 후진 글이어도 백업은 해둘 걸... 
막상 눈으로 내가 얼마나 써왔는지 확인하니 고무되는 것도 있었다.

소커는 홈이 터지면 끝이다보니 로그 백업을 거의 못했다.
2017년 초에 헝거게임 / 배틀로얄 소커도 뛰었던 것 같은데,이건 백업 자체를 안 해서 기억 속에만 남음 ㅋ 
그 커뮤들이 존재하긴 했던 걸까? 사실 소커 너무 달리고 싶어서 꿈에서 달린 거 아님? 
뭐 이런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 모를 의심도 해봄
그 외 동결난 소커.. 백업하지 않았고.. 다정다감도.. 다 날아갔네... 
이건 좀 아깝다. 다정다감 미친년처럼 글쓰면서 달렸는데... 
2차 연성도 장르 옮길 때마다 포타를 터뜨리다보니 거의.. 없었다.
다 백업했다면 지금 백업된 글수x1.8쯤은 여기 있었겠지. 올. 상상만 해도 간지나는데.
결론 : 백업을 생활화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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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청춘! 유성우»
1차/old 2019. 10. 10. 18:20

1.

언젠가는 변덕을 부리고 싶어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유성우가 내리던 날이었다. 힘썬은 구태여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것, 대기권을 뚫고 떨어지는 수많은 돌 알갱이들과 박자를 맞추기로 했다. 원한다면 100km도 넘게 질주할 수 있었지만 힘썬은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불타 사라지고 있는 그들처럼 빛을 뿜으며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평균 50km/s의 속도로 떨어지는 별들-그것은 사실 별들이라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별로 취급되었다-과 함께 추락하던 순간을… 힘썬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그 날에 태어난 누군가와 만나게 된 이후에는 그것을 꽤 낭만적인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힘썬은 달리는 성우의 등을 보면서 속도를 늦췄다. 눈을 크게 뜨고 있어서 성우의 이마에서 흩어지는 작은 땀방울 하나하나의 광채를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었다. 조금 젖은 뒤통수, 앞서 나가기 위해 좌우로 흔드는 두 팔을 보고 있자면 의도하지 않아도 속도가 절로 느려지고는 했다. 성우는 단숨에 앞서 나갔고, 얼마 가지 않아 결승선에 도달해 발을 멈추었다. 힘썬은 성우보다 다섯 발자국 정도 늦게 도착했다. 성우는 옅은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힘썬을 돌아보았다. 힘썬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성우처럼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닦아내야할 만큼의 양이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다음번에 뛸 때는 보다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힘썬은 생각했다. 성우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숨이 가빠보였다.

“한 판 더해!”

“오, 하지만 네가 이겼는걸.”

힘썬이 기분 좋게 말했다.

“보통 그 대사는 진 쪽이 하는 것 아니니, 성우?”

성우는 흠, 하고 힘썬을 쳐다봤다.

“역시 일부러 져준 느낌이 든단 말이야.”

힘썬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대답하지 않을 자유는 있었으므로 미지근하고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대답해야만 한다면 몇 가지 변명을 할 생각이었다. 첫째로 힘썬의 몸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고-심지어 제대로 완성되어 있지 않다-둘째로 어느 정도의 속도가 공평한지 몰랐기 때문이다. 달리기 시합을 위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로 신체를 조정하고 맞춰야 하는지 아직 힘썬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성우에게 관용을 베풀기 위해 고의적으로 승부를 조작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성우가 처음 달리기 시합을 신청했을 때, 힘썬은 흔쾌히 대답하면서도 왜 성우가 그런 것을 원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성우는 힘썬에게, “네가 빛의 속도로 달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그것 역시 곰곰이 뜯어보면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이 질 것을 상정하고 승부를 신청했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인간세상에서 승부란 이기기 위한 게임이 아닌가. 성우는 이기지 않아도 상관없는 승부를 힘썬에게 신청해서 과연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첫날 두 사람은 운동장에 나란히 서서 한 트랙을 코스로 잡고 3을 거꾸로 셌다. 그런 후 쏜살같이 튀어나가 두 팔과 다리를 열심히 흔들어대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힘썬은 지금보다 훨씬 못 달렸다. 성우의 속도를 손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속도를 의도적으로 자꾸만 늦췄고, 그래서 결승선에 도착했을 땐 성우도 자신의 승리가 어느 정도 힘썬의 의도가 들어간 성적임을 눈치 챘다. 성우는 힘썬을 돌아보자마자 “한 판 더!”를 외쳤다. “한 번만 더 달리자구.” 힘썬은 달아오르기 시작한 성우의 두 뺨을 바라보면서 좋다고 대답했다. “좋아, 계속 달리자.” “이번엔 봐주지 말고.” 성우가 힘주어 말했다. “정말이야, 봐주기 없음이야.”

하지만 봐준다던가, 혹은 전력을 다한다던가 하는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힘썬의 몸이 인간에 보다 가까워져야했기에 성우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힘썬은 점점 성우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아슬아슬하게 결승선을 넘었지만, 성우는 여전히 힘썬의 어떤 것들이 궁금한 것처럼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몇 주째 같은 트렉을 돌고 또 돈 후에야 힘썬은 어렴풋하게 성우가 사실은 이기거나 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힘썬’이라는 마법사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달리기 시합을 신청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쩌면 성우는 인간을 흉내 내어 페어플레이를 하자는 게 아니라, 마법사인 채로 남아 일시적이지만 동일한 목표를 자신과 함께 달성해주기를 바랐던 걸지도. 그러자 달리기 시합에서 더는 발을 맞추기 위해 애쓰거나 자신의 몸 상태를 조정하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힘썬은 달리는 성우에 대해 관찰하기 시작했고, 곧 달리는 인간이란 굉장히 근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힘썬은 젖은 등, 흩날리는 땀방울, 달리느라 긴장된 몸의 상태와 빠른 호흡 따위를 사랑하게 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 없이 성우보다 늦게 결승선에 도착했음에도 과정이 달라져 있었으므로 의미가 있었다.

하루는 운동장을 연속으로 다섯 바퀴째 돌았다. 힘썬조차 기진맥진할 만큼 뛴 후에 두 사람 모두 결승선보다 몇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벌렁 드러누웠다. 성우는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갈라진 숨소리를 냈다. 땀이 쩔쩔 흘러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힘썬은 자신의 두 뺨을 더듬거리며 만져보았다. 무척이나 뜨거웠고, 보통의 인간 같았다. 어쩌면 다음 시합에서는 전력을 다해도 성우에게 질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도 성우는 내가 의도적으로 지고 만 거라는 생각을 할까. 성우를 기쁘게 해주려면 정말 빛의 속도로 뛰어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고 있는데, 성우가 헐떡이며 말했다.

“정말로, 아, 진짜 힘들다.”

힘썬도 마찬가지로 헐떡이며 대답했다.

“나도, 힘들어.”

“내가 더, 힘들 걸?”

“아니야, 똑같이, 힘들어.”

힘썬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랑 달릴수록, 진짜로, 인간의 몸으로 변하고 있거든!”

성우는 잠시 그 자리에 누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이마 언저리가 무척이나 시원했다. 힘썬은 저절로 눈이 감겼다. 갑자기 끝내주게 좋은 기분이 되어 당장에 잠들고 싶었다. 운동장 트렉 한 가운데서 자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태함을 배워가고 있는 것일까? 그때 갑자기 성우가 말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꼭 소년만화의 한 장면 같아.”

힘썬은 소년만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성우는 고개를 돌려 힘썬을 바라보고는 킬킬거렸다.

“완전 청춘! 같은 느낌의 이야기 말이야.”

“청춘! 같은 느낌은 어떤 느낌이지?”

“으음.”

그러자 성우는 두 손을 몸 위에 얹고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힘썬은 성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맑고, 구름이 많아서 바람이 어디로 흐르는지가 잘 보였다.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구름들이 천천히 좌측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인공잔디에서 희미하게 고무냄새가 올라왔다.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느낌?”

성우는 천천히 눈을 감고 기분 좋게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마법사 친구랑 만나서 이런 날씨에 달리기를 하고 말이야. 완전 운명이라니까.”

그건 성우의 말버릇(우리는 운명) 중 하나였다. 힘썬은 운명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성우를 흉내 내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바람의 결들을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게 청춘이거나 운명일까. 마음이 놓이면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그래서 어디서든 자고 싶어지는 이런 기분이 청춘! 이라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운명이 무엇인지는 조금 알고 있었다. 그건 어떤 극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마법 같지만 마법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기막힌 우연을 성우는 운명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 힘썬도 어느 정도는 할 말이 있었다. 있지, 라고 힘썬이 말했다.

“지난번에 발표를 할 때, 성우 네가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우가 쏟아지던 날에 태어났다고 했잖아, 그렇지.”

힘썬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맞고 있는 성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내가 그 날 떨어지던 별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어. 네가 태어나던 날에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성우 네 이름은 유성우가 되었고 말이야.”

성우가 눈을 뜨고 힘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성우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조금 벌리고 있었다. 힘썬이 물었다.

“성우, 이것도 운명이니?”

성우의 귀가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힘썬은 생각했다.

음, 이 순간 역시도 청춘! 인가!

(혹은 낭만일 지도.)

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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