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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이상한 사람»
1차/old 2019. 10. 20. 01:26

1.

킹우드에 들어왔을 때, 헬레나는 이제 막 스무 살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너그럽게 마음을 먹자면 여전히 스무 살 초반이었다. 누군가는 헬레나에게 이런 일을 하기엔 어리거나, 아직 다른 기회가 있다고 말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헬레나는 열네 살에 부모를 잃은 후부터는 줄곧 동생을 키우며 거의 홀로 지냈다. 사교성을 기르거나 공감능력을 키울 기회가 거의 없었던 셈이다. 조언을 해줄 어른이나 윗사람 역시 없었다. 헬레나는 오로지 자신의 판단과 결정만으로 조직에 들어가 사람을 죽이고 보수를 받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총 한 자루만을 지급받고 종종 현장에 투입되었다. 조직에서 제대로 된 임무 내용을 알려준 적이 손에 꼽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일은 무지한 상태로 진행되었다. 영문을 알 수 없었지만,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총격으로부터 살아남는 게 헬레나의 주된 임무였다. 대여섯 번 정도 살아 돌아온 후에야 헬레나는 조직이 기대를 걸지 않는 신입마피아들을 종종 현장의 총알받이로 내보내곤 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 뒤로 헬레나는 지급받은 총을 장전하고, 기둥으로 몸을 날리는 대신 총을 쏘며 앞으로 내달리는 사람이 되었다. 매번 운을 시험하고 사람을 죽였다. 경력보다 빠르게 승진할 수 있던 건 그녀가 너무 많은 사람을 죽이거나 처리했기 때문이었다.

서준의 사무실에서 희미하게 담배 냄새가 났던 것을 기억한다. 개인 사무실을 가질 수 있는 위치의 조직원은 대부분 간부들이었기 때문에, 헬레나는 작은 움직임 하나라도 실수하지 않도록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간부를 만나는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서준은 반듯한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있다 말고 헬레나가 들어오자 느긋하게 일어났다. 헬레나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자기소개를 했다. 어디 출신이고, 이름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당신의 무엇을 보좌하게 될 것인지 말이다. 머리카락으로 둘러싸인 시야 안으로 준의 반들반들한 구두가 걸어 들어왔다.

“고개 들어봐, 응?”

유들유들한 말투였다. 헬레나는 못미더운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준의 새까만 눈동자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 안으로 꿈틀거리는 무언가가 보였는데, 그게 광기인지 아니면 조직 일에 오래 몸담은 자들이 가지는 연륜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들어, 좋아.”

서준이 말했다.


2.

헬레나는 그와 일한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그가 총을 쏘는데 일가견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간부라면 당연히 갖추고 있어야 할 덕목이기는 했지만, 특히 서준은 타겟이 보이는 순간 방아쇠를 당기는 말도 안 되게 대담한 방식을 채택해 일을 최단시간 안에 마무리 짓는 실력을 보여주었다. 석양이 지는 하늘 아래서 총을 겨눈 카우보이도 상대의 움직임이 완전히 파악되기 전까지는 방아쇠를 당기지 않는다. 서준은 타겟이 과녁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 기다리는 과정 자체를 생략하고, 상대에게 제대로 움직이거나 머리를 굴릴 시간 자체를 주지 않았다. 헬레나는 주로 그의 뒤에서 보조사격을 하거나 시체를 처리해 유기하는 일을 맡았다. 총을 쏘는 서준의 등을 응시할 때마다 헬레나는 종종 간부를 쏴죽이면 배신자라고 총살을 당할지, 아니면 그 빈자리를 자신이 꿰차게 될 지를 생각했다. 간부가 되면 어떤 해택을 누릴 수 있는지, 개인 사무실을 소유하는 직책까지 도달하게 되면 얼마큼의 돈을 지불받을 수 있는지도. 조직원들은 사람에게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더욱 안전한 장소로 들어올 수 있었다. 헬레나가 알고 있는 승진방식은 누군가를 죽임으로써 쟁취할 수 있는 것이었다. 간부가 이롭다면 간부가 되고 싶었고, 간부가 되기 위해 다른 간부를 죽여야 한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고 싶었다.

서준이 총을 쏠 때마다, 헬레나는 그의 등 뒤에 서있었다.

만약 타협할 수 있는 선이라면 서준을 죽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무시무시한 등을 보면서, 그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는 동시에,

헬레나는 배신하는 생각을 했다.


3.

서준은 시트에 기댄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헬레나.”

헬레나는 두발을 모으고 총을 허벅지에 얹어놓은 채 대답했다.

“네.”

“몇 시지?”

헬레나는 손목을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네 시 이십분입니다.”

“시계 잘 어울려.”

서준이 기분 좋게 고개를 기울이고 턱을 까딱였다.

“못 보던 건데 새로 샀나 봐?”

“제 동생이 생일선물로 사준 겁니다.”

헬레나의 목소리에서 희미하게 기쁨이 묻어났다.

“동생이 몇 살이야?”

“왜요?” 헬레나는 반사적으로 물었다가 대답했다.

“저보다 두 살 어립니다.”

“그럼 딱 담배피울 나이겠네. 헬레나는 담배 피워?”

“피우죠.”

“뭐 피워? 아니, 내가 말이야~ 얼마 전에 재밌는 걸 들었거든?”

서준은 갑자기 신이 난 것 같았다.

“담배 운세라는 거지. 어? 피우는 담배마다 하루치 운세가 정해져 있다 이거야. 열여섯 가지인데 난 내 거만 딱 보고 다니지.”

서준은 시트를 두들기며 운세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헬레나는 총을 조립하며 건성으로 그 말을 흘려들었다. 오후 네 시 사십 분까지는 두 사람 모두 광장에 있어야 했다. 다섯 시부터 열릴 자선 행사에서 연설을 맡을 남자를 쏘고 돌아오는 데에는 오 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헬레나는 조립한 총을 다시 허벅지에 얹어놓고 고개를 들었다. 코팅된 차창으로 보이는 도심의 풍경은 얇은 암막커튼을 씌워놓은 것처럼 톤 다운되어 있었다. 광장 서쪽으로 붉은 플랜카드와 깃발이 세워져있는 게 보였다.

‘시위가 있었던가.’

“그래서 오늘은 꼴찌라는 거지.”

서준이 말했다.

“운이 아주 나쁠 수도 있겠다, 이 말이야.”

헬레나는 고개를 돌렸다.

“무엇이요?”

“오늘 내 담배가 운세 꼴찌라니까, 헬레나.”

서준은 제법 진지하게 즐기고 있었다. 헬레나는 심드렁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의 상사는 냉철하고 실력 있으면서도 이따금 알 수 없는 감성으로 분위기를 망쳐놓는 경향이 있었다. 사람이 완벽할 수는 없는 거겠지. 헬레나는 서준의 저질개그 감성에는 면역이 없었기에 꽤 냉정하게 대꾸했다.

“재수 없는 미신 이야기는 그만하고 내리시죠. 이럴 시간 없습니다.”

“너무 좋아, 헬레나!”

받아주지 않았는데도 서준은 즐겁게 박수를 쳤다.

‘가끔은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차문을 닫으며 헬레나는 생각했다.

 

4.

광장 위 사람들이 포식자를 마주친 누떼처럼 혼란하게 도망치고 있다. 누떼와 다른 점은 그들이 방향성 없이 사방팔방으로 흩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구식 자동 권총을 쥐고 서서 자신 앞으로 홍해처럼 갈라지는 인파를 보고 있었다. 그가 총을 한 발 더 발포하자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헬레나가 서준을 불렀지만 그가 제대로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무대 간판이 추락했다. 간판에서 튕겨져 나온 나무 조각이 헬레나의 팔뚝을 맞고 떨어졌다. 헬레나는 총을 장전하며 다시 한 번 서준을 불렀다.

“카포(Capo).”

서준은 한 발을 더 쐈다.

“카포.”

“왜?”

서준은 자리에 멈추어 섰지만 여전히 앞을 보고 있었다. 헬레나는 광장을 구르고 있는 ‘서커필드 자선행사’ 간판을 보며 중얼거렸다.

“시체를 확인하는 게 좋겠어요.”

“뭐라고?”

어렴풋하게 사이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광장에는 이제 남아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광장을 에워싼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면 박살난 무대 앞에 서있는 두 사람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었다. 헬레나는 일이 복잡해지는 걸 원하지 않았다. 시위대와 동선이 겹치지 않았더라면 일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두 사람은 가능하면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제대로 죽었는지 확인하고 당장 떠나야 합니다.”

서준이 고개를 돌려 헬레나를 쳐다봤다.

“당장?”

순간 헬레나는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잡았다. 지금 그를 쏜다면, 그러니까, 죽인다면 말이다… 쓰러진 그를 두고 유유히 광장을 빠져나간다면. 왜일까? 전혀 그럴 순간이 아니었는데도 그를 배신하고 싶어진 것은. 방아쇠를 쥔 손가락이 서늘해졌다.

그때 갑자기 서준이 헬레나의 머리통을 쥐고 땅으로 처박았다. 머리가 땅에 부딪치는 순간 서준의 나머지 한 손이 쑥 들어왔다. 헬레나는 깜짝 놀란 얼굴로 서준을 올려다보았다. 서준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다시 한 번 그 소리가 들렸다. 총알은 두 사람을 아슬아슬 빗겨가 무대 한쪽을 완전히 무너뜨렸다.

“늦은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헬레나?”

서준이 헬레나의 머리통을 감싼 손에 힘을 주었다. 헬레나는 헐떡이며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 손은 여전히 방아쇠에 걸쳐져 있었고, 총은 갑작스럽게 쓰러지는 바람에 왼 다리에 깔려있었다. 헬레나가 총을 쏜 게 아니었다. 다른 누군가 있었다.

헬레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

“아마 디엔이겠죠.”

“시체 확인할 필요 없어. 쟤 죽었어. 가자.”

“잠시 만요.”

헬레나가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서쪽에서 다시 총성이 울렸다. 서준이 그녀를 막고 서서 총이 날아온 방향으로 난사하기 시작했다. 헬레나는 반파된 무대 위로 올라가 시체를 확인했다. 쓰러진 남자는 등을 대고 대자로 늘어져있었다. 가슴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이미 반쯤 응고되어 검붉은 갈색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맞지?”

서준이 총탄을 갈아 끼웠다.

“예, 죽었어요.”

헬레나가 대답했다.

“죽었지만 타겟이 아닙니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서준은 다시 한 번 총을 쐈다. 멀리서 비명 소리가 들리더니 주차된 차 뒤쪽에서 남자 하나가 쓰러졌다. 서준은 서부의 카우보이마냥 총구에 후, 바람을 불었다.

“내가 오늘은 운세 꼴찌라고 했잖아?”

헬레나는 서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선 차로 돌아가세요.”

“어유, 어쩌게?”

서준은 구식 자동 권총을 헬레나에게 건넸다. 두 사람은 시체가 누워있는 무대에서 내려왔다. 이제 사이렌 소리는 광장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헬레나는 광장 가로수길 옆에 줄줄이 세워진 경찰차를 응시하다 말고 서준을 돌아보았다. 서준은 그녀의 눈에서 꿈틀거리는 무언가를 보았지만 그것이 광기가 아님은 알아보았다. 그는 그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다.

“어쩌겠습니까. 메뉴얼대로 하는 거죠.”

헬레나가 말했다.

헬레나는 양손에 권총을 든 채 가로수길 쪽으로 혼자 걸어갔다. 그리고 경찰이 보이자마자 총을 바닥에 내던지고 두 팔을 들었다. 서준은 주머니에 손을 쑤셔 넣은 채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헬레나는 경찰 앞에 얌전히 두 손을 내밀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경찰이 수갑을 채우는 동안 서준이 긴 다리로 느릿느릿 헬레나에게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그는 여전하게도 반듯한 검은색 정장에 넥타이까지 갖추고 있었다. 헬레나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서준의 반들반들한 구두가 자신의 시야 안으로 완전히 걸어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서준이 말했다.

“고개 좀 들어봐.”

헬레나는 고개를 젖히고 가볍게 발을 들어, 카포를 대신해 체포되는 솔다토들이 비밀엄수를 맹세할 때 취하는 그것을 했다. 그녀의 입술은 서준의 입술 바로 앞 허공에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서준은 웃고 있지 않았다.

“금방 빼줄게.”

서준이 말했다.


5.

헬레나가 출소한 날에는 비가 내렸다. 고작 몇 주일 사이에 쌀쌀해진 날씨 때문에 헬레나는 코트를 입고도 몸을 움츠렸다. 짜증이 난 표정으로 입구까지 걸어 나오는 동안 낙엽이 그녀 머리통을 세 번이나 후려치고 지나갔다. 서준은 우산을 들고 입구 앞에 서있었다. 이를 딱딱 부딪치며 걸어오자 서준이 그녀 머리 위에 우산을 씌웠다. 헬레나는 철문 앞에 주차된 호화로운 흰 리무진을 보았다.

“승진하셨네요.”

헬레나가 말했다.

“덕분에.”

서준은 휘파람을 불면서 헬레나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두 사람은 오래 걷지 않고 차 앞에 도착했다. 서준은 헬레나를 차에 태우고 우산을 접은 뒤 맞은편에 탔다. 리무진 안은 후끈했고 재즈가 재생되고 있었다. 흰 시트 사이에 얼음을 담은 볼을 얹을 수 있는 기둥이 있었다. 볼 안에 와인이 꽂혀있었다. 헬레나가 몸을 녹이는 동안, 서준은 케이크를 꺼냈다.

“이제 헬레나로 활동하기 힘들겠네.”

헬레나는 서준이 건네주는 포크를 받았다.

“코드명을 사용해야겠죠.”

“너 피우는 담배 이름이 뭐라고 했지?”

여전히 그는 그놈의 운세잡지를 애독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헬레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케이크 끄트머리를 포크로 잘랐다.

“시가 썬(SSUN)입니다.”

“시가 썬! 이야, 이거 진짜 귀신같다니까. 이거 봐, 헬레나.”

서준이 잡지를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케이크를 먹으면서 헬레나는 그의 긴 손가락이 가리키는 잡지 상단을 쳐다보았다. 시가 썬(SSUN)에 큼지막한 동그라미와 별표가 쳐져있었다. 운세 1위 담배였다.

“오늘은 좋은 날이잖아, 그렇지?”

“그렇네요.”

헬레나는 유난히 케이크가 맛있다고 생각했다. 서준은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잡지를 집어던지고 시트에 몸을 한껏 기댔다. 그는 헬레나가 케이크를 먹기 위해 다시 손을 뻗는 것을 흡족하게 쳐다보았다.

“내가 생각해봤는데, 코드명으로 딱 좋은 것 같아.”

“뭐가요?”

“썬 말이야, 썬.”

“내일은 그거 꼴찌할 걸요.”

헬레나가 산통을 깼다.

“원래 그런 건 돌아가며 매기는 겁니다, 카포.”

“아니야, 1등할 거야. 다 방법이 있거든.”

헬레나는 서준이 또 엉뚱한 짓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지만, 구태여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기 때문이다. 감옥으로 들어가면서, 헬레나는 그가 자신을 다시는 찾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카포를 대신해 체포된 솔다토들은 조직에 충성심을 인정받는 것과 별개로 같은 카포 밑에서 동일한 임무를 받고 일할 기회를 제공받지는 못했다. 카포들은 솔다토의 빈자리를 오래 두지 않았다. 서준이 헬레나의 빈자리를 채우고 그녀를 홀랑 잊어버린다고 해도 헬레나는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 일은 흔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여전히 마주보고 앉아있었고, 서준은 이전보다 넓고 편안한 차에 헬레나를 태운 채 변함없이 시시껄렁한 운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케이크는 유독 달콤하고 맛있었다. 어쩌면 몇 주간 단 음식을 한 입도 먹지 못해서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차 안에는 축배도 있었고, 재즈 음악도 멋졌다. 서준이 구독하는 잡지 상단에 변함없이 1위를 차지할 담배가 있다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었다. 그게 자신의 코드명이 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헬레나는 거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쓸모 있는 충고를 받고 있는 셈이었다. 윗사람의 도움을 받는 일은 그녀가 상상한 것보다 멋졌다. 그래서 헬레나는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그의 등을 봐도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헬레나가 중얼거렸다.

“굉장하네요.”

서준이 즐겁게 박수를 쳤고,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턱을 괴면서 헬레나는 생각했다.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헬레나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19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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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갈림길»
1차/old 2019. 10. 20. 01:20

1.

심 남매의 부모는 12번 국도에서 죽었다. 이틀간의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운전대는 어머니가 잡고 있었고, 아버지는 조수석에 타고 있었다. 비탈길을 돌고 있을 때, 북서쪽에서 갑자기 사격이 시작됐다. 전면유리가 박살나며 타이어가 헛돌았다. 운전자가 즉사한 후 차는 가드레일을 뚫고 다섯 바퀴나 굴렀다. 아버지는 차가 폭발하며 최종적으로 사망했다. 무척 비극적이고 진부한 죽음이었다. 영화에는 이런 최후가 쉰 가지도 넘을 것이다.

그때 헬레나는 열네 살이었고, 당시 요한은 아직 초등학교도 졸업하기 전이었다. 갑작스럽게 고아가 된 두 남매를 거둘 아주 먼 친척조차 없었다는 게 느와르 영화 속 비극과 다른 한 가지였다. 헬레나는 자연스럽게 가장이 되었다. 장례식을 마친 뒤 헬레나는 몇 푼 되지 않는 부모의 유산을 꼼꼼히 기록해 현재 거주지의 집세로 나누어보았다. 통조림 값으로도 나누어보았다. 샴푸와 칫솔, 밀가루와 소스로도 나누어보았다. 그런 일들… 살아가는 데에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이 헬레나에게 어떤 감정을 불러일으켰는지는 알 수 없다. 다음 달이 되자 헬레나는 요한을 데리고 학교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슬럼가 아파트로 이동했다. 이사하기 전날 요한이 짐을 싸다 말고 금이 간 액자를 들어올렸다.

“누나, 이거 버려?”

헬레나는 액자 속에서 웃고 있는 네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응, 버려.”

하지만 요한은 액자를 등 뒤로 숨겼다가, 헬레나가 다른 물건을 뒤적이는 사이 박스 한쪽에 도로 꽂아놓았다. 이사를 끝마치고 물건을 정리하던 헬레나가 그것을 발견했다. 액자를 들고 쳐다보자 요한은 딴청을 부렸다. 헬레나는 별다른 말없이 액자를 창가 앞 탁자에 얹어두었다.

두 남매는 거기서 학창시절이 끝날 때까지 살았다.

 

2.

슬럼가에서는 종종 총성이 울려 퍼졌고, 밤이면 모두가 창문 철창을 내렸다. 철창이 없는 집은 커튼을 쳤다. 아침에 요한과 함께 학교로 걷다보면 어두운 골목에 미동도 없이 누워있는 사람의 실루엣이 보일 때도 있었다. 헬레나는 요한이 그런 것을 보지 못하도록 골목 입구를 가리며 걸었고, 요한도 눈치 빠르게 고개를 돌리고는 딴청을 피웠다. 두 사람은 갈림길에서 항상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고 헤어졌다. 왼쪽이 중학교였고, 오른쪽이 고등학교였다. 요한 쪽이 늘 일찍 마쳤다. 학교가 끝나면 요한은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않고 홀로 교문을 나섰다. 갈림길에 다다를 즈음부터는 뛰기 시작해, 쏜살같이 그곳을 지나쳐 골목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아침마다 헬레나가 보여주지 않으려 했던 그것들이 무엇인지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시체는 여전히 거기 방치되어 있을 때도 있었고, 말라붙은 피 웅덩이만 남긴 채 치워져있을 때도 있었다. 아주 가끔 흔적도 없이 사라져있을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땐 요한은 굳이 골목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시 갈림길로 되돌아왔다. 시체가 마피아와 연관되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한은 약속을 지켜 언제나 갈림길로 되돌아왔다. 헬레나는 요한의 손을 잡고 천천히 집으로 걸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출근을 준비해야했기 때문이다. 중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부모의 유산은 바닥을 보였고, 그녀는 야간공장에 취직해 밤새 컨베이어 벨트에서 통조림을 찍어내고 있었다. 요한은 어느 순간부터 학교에 가는 것을 버거워했다. 자신도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집에 혼자 두지 말아달라고 졸랐다. 그때마다 헬레나는 무릎을 접고 앉아 요한의 두 뺨을 감싸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넌 그럴 필요가 없어. 우리는 고작 둘이야. 내가 번 돈으로 충분히 해결할 수 있어.”

헬레나가 졸업반이 되었을 때, 신식기계를 들인 통조림 공장이 야간반의 3분의 1을 해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사직권고를 받은 헬레나는 계속해서 근무하기 위해 오전반으로 스케줄을 옮겼다. 얼마 뒤 학교에 나가지 않은 헬레나는 퇴학당했고, 요한은 그 뒤로 방에서 나오지 않게 되었다.

 

3.

헬레나는 스물두 살에 공장을 나왔다. 바뀐 고용주가 세달 치 임금을 체불해 대다수의 노동자가 파업 상태에 돌입했을 때였다. 그녀는 파업이나 시위의 개념을 몰랐다. 사회적인 활동과 합당히 보장받을 수 있는 시민의 권리에 무지했다. 헬레나는 당장 돈이 필요했고, 고용주가 돈을 내놓지 않겠다면 협박이라도 해야 했다. 그녀가 작은 단도를 쥐고 사장실 문 앞으로 갔을 때, 검은 정장을 갖춰 입은 남자 둘이 문을 박차고 빠져나왔다. 그들이 쥔 권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헬레나는 깜짝 놀랐지만, 두 사람은 그녀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고 코너를 돌아 사라졌다. 헬레나는 열린 문틈으로 비스듬하게 누워있는 남자를 보았다. 사장은 죽어있었다.

얼마 뒤 새로운 사장이 고용되어 밀린 임금이 지급되었고, 공장은 다시 정상가동하기 시작했다. 그 뒤로 통조림 공장은 킹우드에 돈을 상납했고, 다시는 임금을 체불하지 않았다. 그것은 폭력의 결과물이었고, 힘의 증명이었으며, 어둠의 권력이었다. 마피아들은 세력싸움을 벌이다 우연히 근처를 지나던 헬레나의 부모를 죽였지만, 또한 조직 사업을 위해 악덕 고용주를 제거하고 헬레나에게 밀린 임금을 지급하는 존재이기도 했다. 어둠을 증오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이제 헬레나는 어두운 골목 안에 쓰러져있던 시체를 향해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그 뒤 공장을 나온 헬레나는 마약운반책으로 돈을 벌면서 서서히 그 바닥에 익숙해졌다. 늦은 밤마다 집으로 돌아와서 요한의 방문을 두들겼다. 요한은 대부분 문을 열어주지 않았지만 이따금은 고개를 내밀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기도 했다.

“바빴어?”

요한이 물으면, 헬레나는 대답했다.

“응. 너는?”

“바빴어.”

요한 역시 대답했다.

 

4.

헬레나는 조직에 들어가 처음으로 살인을 저질렀다. 시체를 유기하는 적당한 방법을 알지 못했던 헬레나는 언젠가 요한과 함께 지나치던 골목을 떠올리고는 차 트렁크에 그것을 싣고 돌아왔다. 차를 주차하고 아파트로 들어왔을 때, 요한은 웬일로 거실로 나와 창가에 놓인 액자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 간 유리 속에서 헬레나와 요한이 교복차림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학창시절 이후로 함께 웃으며 사진을 찍은 적이 없었다. 불과 어제 바꿔놓은 사진이었기 때문에 액자의 풍경은 헬레나에게도 낯설었다.

“언제 바꿨어?”

요한이 물었다.

“어제.”

“얼마 안 됐네.”

“너 평소에도 내가 없으면 밖으로 나오니?”

요한은 대답하지 않다가 되물었다.

“엄마아빠랑 찍은 사진은 버렸어?”

“그 사진 뒤에 있어. 겹쳐서 넣은 거야.”

“그렇구나….”

요한은 잠깐 생각에 잠긴 눈치였다가 헬레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나 다쳤어?”

“왜?”

“그냥.”

“안 다쳤어.”

“진짜?”

“진짜.”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있었다. 거의 몇 달 만에 해보는 긴 대화였던 것이다. 헬레나는 아파트 불을 켜고 싶었다. 요한이 어떤 표정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쩐지 불을 켜는 순간 요한이 사라져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이 있기에 요한도 그곳에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헬레나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곳에 서 있다가 어색하게 물었다.

“우리… 간만에 근처 레스토랑이라도 갈래? 너 나온 김에.”

“프라이데이스? 멀잖아.”

“누나 직장에서 받은 차 있어.”

헬레나는 입을 삐죽이다 말고 웃었다.

“타고 드라이브도 할 수 있어.”

두 사람은 마감시간이 다가온 레스토랑에서 늦은 저녁을 먹었다. 헬레나가 계산을 하는 동안 요한은 차키를 받아 먼저 주차장 쪽으로 빠져나왔다. 주차된 자리에 서있는 가로등이 지지직 소리를 내며 깜빡이고 있었다. 요한은 조수석 문을 열다 말고 동작을 멈추었다. 트렁크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고 있었다. 천천히 트렁크로 다가가는 동안 그 냄새는 더욱 심해졌다. 헬레나가 아파트에 들어왔을 때 희미하게 달고 있던 냄새였다. 헬레나는 다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요한은 천천히 차키를 넣고 돌렸다. 트렁크가 열리는 순간, 팍 소리와 함께 사방이 캄캄해졌다. 요한은 트렁크를 내려다보며 잠시 어둠속에 서있었다.

헬레나가 계산을 마치고 나왔을 때 요한은 캄캄한 조수석에 앉아있었다.

“가로등이 고장 났네”

차문을 열며 헬레나가 말했지만, 요한은 대답하지 않았다.

돌아오는 길에 두 사람은 뚜껑을 열고 드라이브를 했다. 헬레나는 들떠서 자꾸 요한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가 아는 한 요한은 거의 반년 만에 외출하는 것이었다. 저것 좀 봐, 저건 뭐하는 데지? 저긴 왜 저렇게 줄을 많이 섰을까. 와, 간판을 보니 저긴 비싼 술집인가 봐 그치… 요한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린 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바람에 나부끼는 요한의 머리카락이 간판들의 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아까 먹은 거 때문에 체했어?”

헬레나는 콘솔박스에 얹어진 요한의 손등 위에 손을 얹었다.

“왜 그래, 무슨 말이라도 해….”

요한이 손을 뿌리치지도 대답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헬레나는 계속해서 달렸다. 도심은 슬럼가와 달리 밤에도 눈이 부셨다. 빛에 감싸인 채로 헬레나는 어쩐지 눈물이 날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아파트로 돌아오자마자 헬레나는 불을 키려고 했다. 그때 갑자기 요한이 다가와 헬레나를 껴안았다. 헬레나는 두 팔을 들고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숨소리를 내며 서있었다. 요한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누나, 일하지마….”

헬레나는 오래 전 일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요한은 더는 십대가 아니었고, 헬레나는 예나지금이나 일을 그만둘 수 없었다. 어린 동생을 두고 아파트 문을 닫는 기분을 감내하는 일은 사람을 죽이는 일보다 어려웠다. 살아가는 데에는 너무 많은 비용이 필요했다. 고작 둘인데도….

헬레나는 요한을 감싸고 중얼거렸다.

“괜찮아, 나는 상관없어.”

헬레나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면, 두 사람은 이미 폭력의 세계에 익숙했다는 것이다. 아침마다 시체가 뒹구는 골목을 지나 학교로 향했던 건 헬레나뿐만이 아니었다. 헬레나는 요한이 보지 못하게 어둠을 가리고 걸었지만, 요한은 그 어둠을 확인하기 위해 매번 갈림길을 지나쳐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그러나 헬레나는 요한이 어둠에 무지하다고 믿었다. 그것을 만지는 법을 알고 있는 건 본인뿐인 줄 알았다.

다음 날 헬레나가 출근한 뒤, 요한은 머리를 감고 면도를 했다. 새 사람처럼 차려입고 거울 앞에서 오래도록 자신을 들여다보았다. 그런 후 언젠가 걸었던 등굣길을 천천히 걸었다. 캄캄한 골목 한구석에 남자가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었다. 요한은 골목 안으로 걸어 들어가 그 시체를 앉혀놓고 쭈그리고 앉았다. 남자는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 뜬 눈으로 죽어있었다. 탁한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요한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오토바이 한 대가 골목 앞을 지나쳐갔다. 매연이 걷혔을 때 골목에는 시체 한 구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5.

그 뒤로 요한은 꼬박꼬박 면도하고 옷을 갈아입었고, 헬레나는 그것에 기뻐했다. 요한의 외출은 점점 잦아졌고, 헬레나는 갈수록 바빠졌다. 헬레나는 요한이 무엇을 하는지 한 번도 물어보지 못했다. 한 번은 요한이 자신의 방 물건을 전부 상자에 담아 버리려고 내놓았는데, 헬레나가 출근하기 전에 슬쩍 들추어보았더니 스크랩된 신문 다발이었다. ‘총격 사건으로 20대 후반 부부 사망하다’ ‘마피아 간의 세력다툼, 이대로 괜찮은가?’ ‘대낮에 도로 앞에서 총기난사’… 헬레나는 상자를 덮고 잠시 그 앞에 서 있다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차에 올라타며 헬레나는 요한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이어지는 동안 헬레나는 초조하게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들겼다.

-왜?

“내일 뭐하니?”

헬레나는 목소리가 잠겨있다는 것을 깨닫고 헛기침을 했다.

요한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몰라. 나갈 일 있음 나가고 아님 말고.

“그럼 우리 크리스마스 파티할래? 누나가 케이크 사갈게.”

-파티?

“왜, 좋잖아.”

헬레나가 어색하게 애교를 부리다 입을 다물었다. 침묵이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다. 핸들을 두들기는 손가락이 빨라졌다. 잠시 후 요한이 대답했다.

-그러지 뭐.

“누나 7시까지 갈게.”

헬레나가 시동을 걸었다.

“프라이데이스 가서 저녁도 먹을 거니까 멋있게 입고 기다려, 알겠지?”

그 날 저녁 6시 반쯤에 요한은 밖으로 나와서 양치를 하고 머리를 감은 뒤 좋은 옷을 입고 거실에 앉았다. 그런 후 휴대폰을 만지며 때때로 시계를 확인했다. 새로 이사한 아파트는 해가 잘 들어, 노을이 지자 거실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7시가 조금 넘자 거실은 금방 침침해졌다. 요한은 불을 켜지 않고 자리에 앉아있었다. 그는 시계를 확인하고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한참 후에 누군가 받았다.

“어디래요?”

누군가가 대답했고, 요한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그래요, 뭐, 알겠어요.”

요한은 전화를 끊고 마른세수를 하며 신음소리를 냈다. 그런 후 벌떡 일어나 거실을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주먹을 쥐고 신경질적으로 벽을 걷어찼다. 협탁이 흔들리더니 무언가 떨어져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씩씩거리며 고개를 돌린 요한이 허리를 숙여 그것을 주워들었다.

벌써 오후 8시가 넘어 이제 거실은 완전히 어두워져 있었다. 요한은 깨진 액자를 물끄러미 들여다보며 한참을 서있었다. 교복을 입은 헬레나는 웃고 있었지만, 요한은 이 사진을 찍은 지 일주일 뒤에 헬레나가 퇴학당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다. 헬레나가 우는 걸 요한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슬픔보다 그녀가 가진 어둠을 만지기가 더 쉬웠다. 알아보기도 더 쉬웠다… 요한은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를 중얼거리다 말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후 그는 소파로 되돌아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한참 후에 누군가 전화를 받았을 때, 요한이 말했다.

“저 내일부터 일할게요.”

전화를 끊고 나서 요한은 액자를 쓰레기통에 버렸다.

 

6.

누나, 계속 죽일 거지

 

7.

헬레나가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오후 10시가 한참 넘어있었고 거실은 깜깜했다. 요한 역시 보이지 않았다. 헬레나는 비틀거리며 현관 앞에 기대어 서 있다가 케이크 상자를 신발장에 얹어놓고 팔뚝을 움켜쥐었다. 빠르게 지혈을 하고 붕대를 잘 감아서 더 이상 피가 새어나오지는 않았다. 헬레나가 신발을 구겨 벗으며 요한을 불렀다. 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헬레나는 케이크를 거실 테이블에 얹어놓고는, 불을 켜기 위해 걸어갔다가 다시 되돌아왔다. 옷에 피가 튀어있을 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녀는 케이크를 꺼내 상자에 올려두고는 소파에 앉았다. 요한의 방문이 활짝 열려있었다. 헬레나는 멍하니 그곳을 쳐다보다 말고 초를 뜯어 케이크에 하나씩 꽂았다. 전부 꽂아서 더는 꽂을 게 없어지자, 하나씩 제거한 뒤 처음부터 그것을 반복했다. 요한이 오면 불을 밝히고 캐롤을 부를 생각이었다. 요한이 어디에 갔는지 알 수 없었지만 금방 돌아올 것이다. 갈림길에서 기다리는 건 언제나 요한이었다.

밤 12시가 조금 넘을 무렵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현관문이 열렸을 때 찬바람과 함께 진눈깨비가 들어왔다. 요한은 천천히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섰다. 어깨에 눈이 쌓여 있었다.

헬레나는 소파에 앉아있었다. 케이크는 전부 세팅되어 있었다. 요한이 헬레나 옆에 앉자, 바닥이 꺼지며 무게가 기울었다. 헬레나는 자고 있지 않았지만 그에게 어디를 다녀왔냐고 묻지도 않았다. 요한은 헬레나에게 기대며 속삭였다.

“누나, 많이 기다렸어?”

“아니.”

어둠속에서 헬레나가 되물었다.

“너는?”

“별로.”

한참 침묵이 있었다. 요한이 자세를 뒤척여 헬레나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헬레나는 축축한 눈을 느낄 수 있었다. 

요한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누나, 있잖아… 우리 엄마아빠가 죽었을 때.”

헬레나는 잠깐 텀을 두고 대답했다.

“응.”

“그때 누나는 너무 어렸어.”

요한은 낮은 목소리로 생각에 잠긴 것처럼 중얼거렸다.

“누나는 너무 어렸던 것 같아….”

“너를 보호하지 못할 만큼 어리지는 않았어.”

헬레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그때의 자신을 떠올릴 수 없었다. 너무 까마득했다. 기억 속의 자신은 정말 어리고 작았다… 하지만 요한은 항상 그것보다 더 작았다. 지금의 요한은 헬레나보다 컸지만 대체 언제 그런 일이 벌어진 건지도 알 수 없었다. 헬레나는 천장을 보았다.

“나는 언제나 너를 돌보기 충분했어.”

‘아닐 걸.’

요한은 생각했다.

‘아니야….’

어둠보다 슬픔을 들여다보았어야만 했는데. 그것을 만지는 법을 터득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두 남매는 이제 눈물을 흘리는 일보다 어두컴컴한 거실에 앉아있는 게 더 익숙했다. 그 어둠속에서, 요한은 더 깊은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눈을 감는다. 눈꺼풀 아래 골목에는 여전히 그 남자가 누워있을 것이다. 요한은 그 앞에 서서 묻는다. 누나, 계속 죽일 거지. 시체는 대답하지도 눈물을 흘리지도 않는다. 어둠은 그것을 모른다.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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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어둠에 대한»
1차/old 2019. 10. 20. 00:56

 향이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향은 아까와 달리 대걸레를 뒤집어쓰고 서있었다. 힘썬은 향의 분장이 어떤 괴물이나 유령을 모티브로 한 것일지 고민했지만, 제대로 판단하지 못했다. 어쩌면 아직 인간세계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걸지도 모른다… 세상엔 많은 로어와 괴담이 존재했고, 인간의 두려움에서 기인한 상상력은 무궁무진하다. 힘썬은 더는 향의 분장을 고민하지 않기로 결심하고 그녀에게 다가섰다. 향은 바로 옆에 힘썬이 와있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장난기가 솟았다. 힘썬이 두 손바닥을 펼치고 소리쳤다.
 “워!”
 향이 고개를 팩 쳐들어 힘썬을 쳐다보았다. 전혀 놀라지 않은 표정이었다. 힘썬은 아무렴 좋다고 생각했다.
 향이 힘썬을 확인하곤 배시시 웃었다.
 “썬!”
 “안녕, 향.”
 힘썬은 습관적으로 오, 하고 덧붙일 뻔한 것을 간신히 삼켰다.
 “무언가 고민하고 있는 거니?”
 “아, 맞아.”
 향은 머리 위에 얹어놓은 대걸레를 가리키며 활짝 웃었다.
 “분장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어, 썬!”
 “그건 무슨 괴물이니?”
 썬은 때마침 물어보고 싶던 것을 물어보아 기분이 좋아졌다.
 향은 고개를 요리조리 기울이며 의아해했다.
 “이름 말하는 거야?”
 “맞아, 테마 말이야.”
 “특별히 있지는 않아. 로어와 괴담에 나오는 공포 이미지를 조합해본거야!”
 향은 자랑스레 대걸레 위에 달린 눈을 가리켰다. 힘썬은 그것이 무섭기보다 귀여운 편에 속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두운 교실 한복판에서 마주치면 느낌이 색다를 지도 모르는 일이다.
 힘썬이 말했다.
 “그렇다면 너는 무서움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거지?”
 향은 바로 그거라고 대답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이제 막 오후 1시가 넘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허기진 것처럼 보였다. 맛있는 냄새가 새어나오는 교실이 보이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꼬치며 사탕을 손에 들고 나왔다. 향과 그 혼잡한 복도를 걸으며 두려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괴물과 유령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결국은 어둠에 대한 이야기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어째서 어둠을 두려워하는지에 대해 말하다보니 결국 마법사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썬, 인간들은 스스로 빛나지는 않잖아.”
 향이 또박또박 말했다.
 “그래서 눈앞에 무엇이 있는지 몰라서 그런 걸지도 몰라.”
 “어둠을 이겨내기 위해서 괴담을 만든다는 거지?”
 “맞아.”
 향은 박수를 치며 좋아하다 말고 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앗, 그런데 이상하다. 그렇게 치면 인간들은 두려움을 이겨내려다 더 큰 무서움을 만들어내고 말았네.”
 썬은 손끝으로 입술을 밀며 고민하다가 결론을 내렸다.
 “어둠 때문에 눈앞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벗어나는 게, 그들이 우선적으로 원하는 것이었을 지도 몰라.”
 향이 물었다.
 “설령 그게 괴물이라고 해도?”
 “그래, 설령 그렇다고 해도.”
 썬은 복도 창으로 쏟아지는 빛을 보며 중얼거렸다.
 “중요한 건 인간들은 우리보다 더 어둠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거야.”
 두 사람은 복도를 돌다가 다시 1학년 1반으로 돌아왔다. 교대시간이었다. 입구의 책상은 비어있었지만 교실 문을 두들기자 안에서 마랴가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그러더니 “정산 좀 맡아줄 사람!!”하고 힘차게 소리쳤다. 힘썬은 향을 한 번 쳐다보고는 자신이 하겠다고 대답했다.
 “이제 들어갈 시간이구나, 향.”
 힘썬은 향의 머리카락 위에 얹은 대걸레를 바로잡아주면서 씩 웃었다.
 “빛 속에서 보면 넌 정말 사랑스러운 존재야.”
 “그러면 안 되는데!”
 향이 조급하게 입을 열자, 힘썬이 그녀의 머리카락 끄트머리를 매만지면서 말했다.
 “하지만 어둠속에서는 분명 무서운 존재일 거야.”
 “내가 누군지 모르니까?”
 영리한 향이 확인하듯 질문했다.
 “그래.”
 힘썬이 대답했다.
 “하지만 인간을 어둠속에 혼자 두지는 않으니까, 괴물이나 유령은 인간의 외로움에 한해서는 상냥한 상상일 지도 몰라.”
 “우리가 지금 유령의 집을 하는 것에 죄책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지?”
 향이 배시시 웃었다.
 힘썬이 따라 씩 웃어주었다.
 “응, 내 생각에 확신을 줘서 고마워.”
 교실 문이 닫히고 안에서 커튼을 치는 소리가 들렸다. 힘썬은 책상에 반듯하게 허리를 펴고 앉았다가, 주변을 둘러보고는 슬쩍 턱을 괴어보았다. 나쁘지 않았다. 괜찮았고, 자연스러웠다. 힘썬은 손님 명단을 들추어보며 머릿속으로 돈 계산을 해보았다가, 그 일이 너무 빠르게 끝나는 바람에 금방 지루함을 느꼈다. 그녀는 명단을 내려놓고 복도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인간들은 어둠을 무서워해, 외로움을… 혼자 남는 걸 무서워해. 그렇다면 마법사들이 두려워하는 것은 무엇일까.
 책상 앞으로 손님이 다가왔으므로 힘썬은 생각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어찌되었던 지금은 어둠속의 공포를 보여줘야 할 때였다. 향은 잘 해낼 것이다. 힘썬은 볼펜을 들고 명단을 들추며, 밝은 목소리로 능숙하게 대꾸했다.
 “안녕. 몇 명이니?”

2019/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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