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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포커»
2차/old 2019. 10. 24. 19:10

 한동안 개롯의 레스토랑은 군인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 레스토랑은 워킹 역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거리에 위치해있으며, 가게 우측으로는 16번 국도가 저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를 향해 길게 뻗는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도무지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그 이차선 도로가 산등성이 너머의 또 다른 산등성이로, 또 그 너머의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개롯은 도로의 부산스러운 인구 이동을 기대하며 이 가게를 열었는데, 그의 생각과는 달리 개점 당시엔 그닥 수완이 좋지 않았다. 당연하지만 기차 때문이었다. 워킹의 거주민들은 차를 끌고 다니기보다 기차를 자주 이용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 털털거리는 고물 트럭보다 아무렴 철마가 좋다는 것이 주된 의견이었고, 바로 그런 연유로 16번 국도를 이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하기야 정부는 이 국도를 좁아터진 이차선으로 결정했을 때부터 ‘어떤 운명’을 분명하게 예감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진작 워킹에 기차를 배치할 계획을 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개롯의 주장은 후자였다. 그는 국가 토지 개발 사업이 이룩한 전유물의 힘을 빌려볼 요량으로 사업을 벌여놓곤, 바로 그 이유로 폭삭 망하게 생겼던 것이다. 만약 당신이 전쟁 이전에 그곳을 방문했다면, 텅 빈 레스토랑 구석에서 정부를 향한 개롯의 끝없는 투덜거림을 곤욕스럽게 듣고 있어야 했을 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 터진 후 개롯의 기대를 충족시켜준 것은 ‘그 빌어먹을 기차’였다. 열차가 하루가 멀다 하고 수백 명의 군인들을 워킹 역으로 쏟아 붓게 되면서 작은 숙박업소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워킹에 남은 청년들은 역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은 곳에 엉거주춤 자리를 잡은 후, 아침부터 밤까지 유령처럼 곳곳을 쏘다니고 박혀 있었다. 얼마 뒤 개롯의 작은 레스토랑에도 바로 그 유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곧 모든 테이블이 차지되었다. 개롯은 이제 아주 만족스러운 레스토랑의 경영주가 된 것이다.

 3주 정도 그 레스토랑 테이블에 신세를 진 후, 마침내 알렉스 스튜어드와 토미 테일러는 움직이기로 ‘합의’했다. 그것은 충동적인 결심이 아니라 2주 동안의 고민과 신중함, 그리고 망설임으로 점철된 결론에 가까웠다. 그들은 워킹을 떠나 스튜어드 별장으로 가 볼 생각이었고, 그건 전적으로 알렉스의 의견이었다. 놀라운 지점은 이 모험을 시도하기로 마음먹기 전까지 둘 사이에 주고받은 대화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 그건 놀라운 일이기 이전에 드문 일은 아니었다. 개롯의 레스토랑 아침 영업시간에는 침묵을 지킨 채 카드 패를 돌리는 군인들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저녁부터 밤까지는 비교적 시끄러워졌는데, 그건 지당하게도 술 때문이었다.) 토미와 알렉스 역시 카드 게임을 했다. 아주 많이 했고, 술은 마시지 않았다. 이따금 알렉스가 조지게일 상표의 에일을 얻어오긴 했지만 작정하고 그 레스토랑에서 음주를 한 적은 없다. 그들은 아침이면 약속이라도 한 듯 개롯의 테이블로 등장했다가, 저녁이 되면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들의 숙소는 역 근처에 있었는데, 그들이 묵고 있는 여관에는 이미 서넛 쌍이 넘은 군인들이 머물고 있었다. 원래 그렇게 지내다보면 각자의 짝이 생기는 것일까? 불가사의한 일이지만 당시 워킹엔 짝 지어 돌아다니는 군복 입은 청년들이 많았고 토미와 알렉스는 개들 중 한 쌍이었다. 그러나 저녁부터 밤까지 그 많은 짝들이 개롯의 레스토랑에 몰려가 술을 마시고 있을 무렵, 둘은 조용하기 그지없는 여관으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 것이었다. 심지어 둘은 같은 침대를 썼는데-방이 비좁아 침대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토미가 벽 쪽, 알렉스가 바깥쪽에서 잤다. 그래서 그 둘이 잠을 청할 때, 토미는 주로 벽을, 알렉스는 천장을 보고 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보면 알렉스가 토미의 등에 바짝 붙어있거나 토미가 알렉스 쪽으로 돌아누워 있는 상태가 되었다. 한 번은 서로 끌어안은 채 깨어난 적도 있는데, 먼저 일어나는 알렉스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토미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건 어디까지나 특별히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 했기 때문이기도 했고, 설령 알게 된다고 한들 달라질 일도 없었기 때문이다. 워킹 곳곳에 포진한 짝들이 이따금 서로로부터 그들의 욕망을 뒤적인다는 것은 공공연한 이야기였지만, 알렉스와 토미에게 그것은 아주 먼 일이었다. 너무 멀어서 도무지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들 스스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알렉스는 어떻게 하면 같은 남자로부터 성적인 욕망과 충동을 느낄 수 있는지 모르겠다는 쪽이었고, 토미는 만사가 피로해서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이 떠나기로 마음먹은 건 바로 그 문제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어쨌든 워킹 역에 떠도는 소문에는 어느 정도 진위성이 있었던 셈이다.

 스튜어드 별장은 워킹에서 차로 어림잡아 다섯 시간을 달려야하는 곳에 있었다. 철로가 깔려있지 않은 곳이라 기차로는 갈 수가 없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바로 전날까지 둘은 개롯의 레스토랑 구석에 박힌 테이블에 마주 보고 앉은 채 이 문제에 대해 제법 진지한 논의를 주고받았다. 알렉스는 기차로 갈 수 있는 만큼은 갔다가 내려서 도보로 이동하자는 쪽이었고 토미는 결코 차를 이용해야 한다고 못 박았다.

 “어디서 어떻게 차를 장만할 건데. 히치하이킹이라도 할 거야?”

 알렉스가 물었지만 16번 국도엔 히치하이킹을 할 만큼 많은 차가 지나다니지 않았다. 둘 다 그 정도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알렉스는 마저 우스갯소리를 할 수 있었다.

 “차를 훔치지 않는 이상은 우릴 거기까지 태우고 갈 사람을 찾는 것도 드문 일일 걸.”

 “그럼 훔치자.”

 토미가 카드 패를 노려보며 말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어 토미를 바라보았다. 토미는 진지하게 스페이드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투 페어.”

 “진심이야?”

 “내가 이겼어.”

 그런 후, 토미가 알렉스를 마주보았다. 흘끗거리기엔 길고 대화를 의도하기엔 짧은 시선이 교환되었다. 건너편에서 한 군인이 시가를 피우기 시작했다. 알렉스가 먼저 고개를 숙였다. 푸르스름한 연기가 매캐하게 레스토랑을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개롯이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 찌그러진 종이 마구 짤랑거렸다.

 “음, 그럼 누가 훔치지?”

 알렉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토미는 자신의 카드 패를 전부 테이블 위로 던졌다.

 “네가.”

 “정말 웃기는데.”

 알렉스가 말했다. 토미의 남은 패는 전부 쓰레기였다. 알렉스는 엎어진 패 위로 자신의 하트10을 던졌다.

 “풀하우스. 유감스럽지만 이건 내가 이겼어.”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알렉스는 문득 이 모든 일이 시시하고, 시시하기 때문에 평화롭고, 평화롭기 때문에 대단하며, 동시에 끔찍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간밤에 수음을 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테이블을 놓고 포커를 치고 있는 것이다.

 “빌어먹을. 언제까지 카드만 만지고 있을 거야?”

 “알렉스.”

 “난 지겨워. 토미, 알겠어? 모든 일이 지겹다고.”

 그는 거의 노이로제에 걸린 사람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그곳에 토미를 버려둔 채 가게를 박차고 나왔다. 저녁도 아닌데 레스토랑 바깥으로 나와 보긴 처음이었고, 토미를 두고 나온 것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16번 국도의 반대편을 가로지르고 있을 무렵 누군가 따라붙었다. 알렉스는 돌아보지 않고도 그게 토미의 그림자임을 알았다.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른 낮에 숙소로 돌아왔다.

 방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방에서 누군가들이 섹스를 시작했다. 알렉스는 이따금 복도에서 마주치던 옆방의 남자 둘을 떠올렸고 얼굴을 붉혔다. 그는 토미의 눈치를 보았다. 토미는 시트에 누운 채 도무지 참기 힘든 것을 간신히 참아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역겨워.”라고 토미가 중얼거렸는데, 그건 꼭 알렉스를 향한 말처럼 들렸다.

 “뭐라고?”

 알렉스가 되물었다. 토미는 천장을 노려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역겹다고.”

 둘은 숨조차 쉬지 않고 바로 옆방에서 들려오는 난잡한 난교에 귀를 기울였다. 알렉스는 식은땀을 흘렸다. 손이 온통 흥건했다. 발기해서는 아니었다. 그는 조금도 흥분해있지 않았다.

 “토미,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을 거야.”

 알렉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토미는 알렉스를 바라보았는데, 그 눈은 무언가를 힐난하거나 캐묻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 순간, 알렉스는 토미가 알고 있다고 확신했다. 토미는 모두 알고 있다.

 

 

 워킹에 머무른 3주 동안 그들 사이에 별다른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심지어 토미는 워킹을 한 번 떠났다가 일주일 만에 돌아왔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그들은 3주 내내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자고 같은 테이블에서 포커를 친 건 아니라는 것이다.

 알렉스는 토미가 떠난 일주일 동안 작은 일인용 침대에 누워 시체처럼 잠을 잤다. 천장을 보고 두 손을 흉부와 복부 사이에 가지런히 모은 뒤 눈을 감는다. 이따금 숙소 곳곳에서 신음소리가 들리겠지만 모르는 척 한다. 그리고 그것에 성공하면 잠들 수 있다. 꿈조차 없이, 총에 맞은 병사처럼 비척거리는 의식이 무의식의 세계로 엉거주춤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도무지 버틸 수 없는 날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아무 곳이나 쏘다녔다. 개롯의 레스토랑을 발견한 건 바로 그 무렵이었다. 끝없는 16번 국도의 한복판에 지어진 그 건물은 세상에서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보였고, 간판도 아주 낡아서 반은 허물어져 있었다. 그곳이 영업 중이지 않았더라도 알렉스는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게는 열려있었다. 문을 열자 달아놓은 종이 마구 짤랑거렸다. 종은 찌그러져서 다소 혼탁한 소리를 냈다.

 가게는 바깥에서 예상하던 것보다 좀 더 크고, 또 예상한 것만큼만 지저분했다. 테이블은 총 열다섯 개였고 바닥은 탁한 파란색 타일로 덮여 있었다. 입구 쪽은 전부 통유리로 되어 있어서 한산한 16번 국도가 보였고, 그 날은 날씨가 좋아서 햇빛이 잘 들었다. 먼지가 마구 산란하는 가운데 싸구려 레코드판으로 재즈 음악이 흘렀다. 가게 한가운데엔 작은 바가 있었다. 가게의 주인이 바로 그 너머에서 허리를 일으키며 나타났다. 개롯은 알렉스를 건성으로 훑어보았다.

 “군인, 군인, 또 군인이군.”

 그는 툴툴거렸지만 목소리에는 약간의 기쁨이 담겨있었다.

 “아무 곳에나 앉으시오.”

 알렉스는 맥주를 주문했는데 개롯이 술 종류는 저녁부터 밤에만 서비스할 수 있는 것이라고 거절했다. 그래서 알렉스는 가장 싼 커피를 시켰다. 씁쓸하고 찝찔한 맛의 아메리카노였다. 향이 나쁘지는 않았으나 아주 맛있는 것도 아니었다. 가게에는 알렉스 외에 다른 손님이 없었는데, 그 애매모호한 커피를 마시며 알렉스는 ‘과연’이라고 생각했다. 과연. 개롯은 구석에 앉아 혼자 포커를 치고 있었다. 정말 지루한 광경이었다. 알렉스는 커피를 반쯤 남겨놓고 테이블을 옮겼다. 개롯은 그를 끼워주었다.

 알렉스는 포커 초짜였다. 개롯은 서두르지 않았다. 룰을 알려주고 카드 패를 참을성 있게 돌렸다. 알렉스가 룰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 해 자신의 기회를 놓치게 되면 반드시 짚어주었다. 개롯은 게임에 있어선 정직해져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인생 역시 게임과 같지.”

 개롯이 말했다.

 “얻거나 잃어서 승리하거나 패하게 되니까.”

 토미가 워킹으로 돌아오기 전까지 알렉스는 아침마다 그곳에서 개롯과 포커를 쳤다. 배팅을 할 때도 있었고 아무 것도 걸지 않고 칠 때도 있었지만 걸어보았자 펜스 단위였다. 정오가 지나면 손님들이 모이기 시작했으므로 그들의 포커 역시 중단되었다. 개롯의 말대로 이곳을 찾는 대다수는 ‘군인, 군인, 또 군인’이었다. 알렉스는 테이블이 꽉 찰 기미가 보이면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했다. 레스토랑으로 옮겨간 몇 쌍의 군인들이 밤새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잠드는 일은 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알렉스는 그럭저럭 혼자에 적응해나갔다. 그리고 토미가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방세를 함께 지불한 친구가 떠났어요.”

 알렉스는 그것을 말할 때 gone, 이라는 단어를 썼다. 개롯은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장담하건대 그 빌어먹을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갔을 거요.”

 그는 덧붙였다.

 “여기선 흔한 일이지. 저런 거대하고 편리한 운송수단을 가진 고장의 인간들은 도통 박혀 있지 못 하고 아무 곳이나 떠돌아다닌다오. 경적소리는 마음만 먹으면 자신이 언제든 어디든 떠날 수 있다는 환상을 심어주지. 하지만 곧 돌아오게 되어있소.”

 “돌아오게 되어 있다뇨?”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개롯은 패를 뽑으며 대답했다.

 “떠난 사람들은 자신이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게 되어있거든. 아직 잃지도 않았고, 잃을 걱정도 없으니까. 워킹 역으론 끊임없이 사람들이 돌아오지. 자네의 친구 역시 돌아올 테니 두고 보시오. 아마 고향에 있을 여자를 만나러 갔겠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결혼한 걸 테고, 돌아온다면 여자가 이미 결혼해버렸기 때문이겠지.”

 그리고 일주일 만에, 토미는 돌아왔다. 알렉스가 눈을 떴을 때, 토미는 벽 쪽에 붙어 있었다. 알렉스는 생각한 것보다 놀라지 않았는데, 어쩌면 개롯의 ‘돌아올 테니 두고 보라’는 말 때문일 지도 몰랐다. 그는 토미를 흔들어 깨웠다. 토미는 이불 속에 웅크린 채 사납게 얼굴을 찡그렸다.

 “좀 더 재워줘.”

 “언제 왔어?”

 알렉스가 물었다.

 “한밤중에.”

 이불 속으로 얼굴을 집어넣으며 토미가 대답했다.

 그들은 다음 날 개롯의 레스토랑으로 갔다. 개롯은 뒤따라 들어온 토미를 보고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날은 셋이서 포커를 쳤다. 토미는 포커가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개롯의 레스토랑이 오전에도 점점 분주해지기 시작하자 포커는 둘 만의 일이 되었다. 토미와 알렉스는 구석 테이블에 앉아 패를 돌린 후, 스페이드, 하트, 다이아몬드, 킹과 퀸 따위를 보여주며 번갈아 승리하거나 패했다. 토미의 승리가 훨씬 빈번했다. 언젠가부터 알렉스는 패를 받으면 토미의 얼굴부터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가 이길 만 한 패를 쥐었을 때 미묘하게 왼쪽 눈썹을 찡긋거린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알렉스는 이를 이용한 심리전으로 몇 번 이겼고, 자신의 관찰이 유의미하다는 증거를 남겼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변명 삼아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토미에 대한 관심을 이어나갔다. 얼마 뒤 알렉스는 더 많은 것을 관찰해낼 수 있었는데, 이를테면 토미는 언제나 커피를 남겼고, 그의 오른쪽 귓불에는 피어싱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가끔 손님 중 하나가 시가를 뻑뻑거릴 때면 가게가 온통 자욱해졌다. 연기 너머에 앉은 토미의 신중한 얼굴은 때때로 신의 불가해한 예언처럼 보였다. 그 때마다 알렉스는 개롯의 말을 상기해보았다. ‘떠난 사람들은 자신이 두고 온 것들을 떠올리게 되어있거든. 아직 잃지도 않았고, 잃을 걱정도 없으니까.’ 그러다 촘촘한 토미의 눈꺼풀이 위로 치솟을 때면, 알렉스는 숨을 멈추고 자신의 패만 들여다보는 것이었다. 죄를 저지르다 발각된 사람처럼 심장이 뛰곤 했다. 토미가 무엇을 잃지 않기 위하여 돌아온 것인지 해명을 구하고 싶었다. 알렉스는 그 뒤에도 종종 포커에서 졌다.

 그 일은 토미가 돌아온 지 5일이 지난 한밤중에 일어났다. 옆방의 남자들이 그것을 시작한 것이다. 토미는 자고 있었고, 알렉스는 습관처럼 손을 포개어 놓고 천장을 노려보고 있던 중이었다. 벽에서 쿵, 하고 둔탁하게 부딪히는 소리가 나더니 허겁지겁 주고받는 숨소리가 훤히 들렸다. 알렉스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맞잡아 포갠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들은 서로의 이름을 속삭이며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티미, 티미, 나를 봐…….” 알렉스는 눈을 감고 역겨운 것들, 축축한 늪과 부패한 가축의 장기, 피가 섞인 토사물 따위를 떠올리려 애썼다. 그러나 갑자기 그 풍경 위로 자욱한 안개가 덮이더니, 모든 게 온통 흐릿해졌다. 곧이어 그 속에서 유령처럼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알렉스는 그 얼굴이 짓는 신중한 표정, 귓불에 남은 선명한 흉터를 볼 수 있었다. 사실 자욱한 것은 안개가 아니라 담배연기였던 것이다. 풀하우스. 얼굴이 말했다. 알렉스는 눈을 떴다. 토미가 뒤척이며 한숨을 뱉어내고 있었다.

 그들은 건너편에서 계속 섹스하고 있었다. 알렉스는 일어나서 토미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토미는 분명 잠들어 있었는데,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굳이 따지자면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무서울 만큼 공허한 얼굴이었고, 지쳐 있었고, 하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오, 찰스. 제발, 찰스…….” 알렉스는 갑자기 아주 어릴 적의 자신이 떠올랐다. 그는 여덟 살이었고, 별장 건너편의 농장에서 사과 두 개를 훔친 후 달려가는 중이었다. 배가 고파서 그랬던 건 아니었다. 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무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해서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는 처벌받지 못 할 비밀스러운 죄를 소유하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그는 사과를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다 먹어버렸는데, 죄의식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그 후 아주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알렉스는 사과 두 알에 대한 처벌을 받지 않았고 건너편 방에선 두 사내가 동성애를 한다. ‘게임에 있어선 정직해야 한다오.’ 알렉스는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토미의 눈꺼풀 아래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토미는 분명 잠들어 있었다.

 그 뒤로, 알렉스는 시체처럼 잠들 수가 없게 되었다. 눈을 뜨면 그는 토미의 쪽으로 돌아누워 있거나, 혹은 그 등에 바짝 붙어 있었다. 그가 의도하거나 원한 것은 아니었지만 계속 그런 일들이 벌어졌다. 알렉스는 말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토미도 때때로 돌아누웠고 그럼 알렉스는 잠들지 않고 토미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볼 수 있었다. 볼록하고 창백한 이마, 흔들거리면서도 일직선을 유지하며 떨어지는 콧날, 촘촘하고 새까만 속눈썹과 힘주어 다물린 입술, 턱 끝에 붙은 점, 그리고. 그리고……. 그러다 잠들었다.

 포커는 계속되었다. 둘은 말없이 패를 섞고 돌리고 이기거나 패했다. 무언가를 거는 일은 없었다. 토미는 여전히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이따금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했다. 주로 스튜어드 별장에서 여름을 났던 시절에 대해서였다. 깨끗한 개울이 흐르고, 별이 잘 보이며, 다락에는 오리털 이불과 싸구려 잡지 희곡이 굴러다닌다. 그 시절에선 청명하고 아득한 바람 냄새가 났다. 알렉스는 곧 토미에게 그 별장에 대한 모든 것을 늘어놓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보낸 유년시절이야말로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것 중 가장 괜찮은 기억이었기 때문이다. 사과를 훔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토미는 패를 들여다보며 아주 가끔, “그래” 혹은 “멋지네”라고 대답하곤 했다. 스튜어드의 별장은 몇 년 전부터 발길이 끊겨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이야기는 늘 마무리되었다. “언젠가는 그곳으로 가자.” 알렉스는 지켜질 가능성도 없어 보이는 그 말을 공허하게 뱉었다. 그러면 토미는, 또 “그래” 혹은 “글쎄”로 이따금 그에 응답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별장은 너무 멀리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그것은, 너무 멀어서 도무지 일어날 것처럼 보이지도 않고, 그들 스스로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위법행위처럼. 그래, 마치 그것처럼.

 그들이 함께한지 2주쯤 지났을 때, 워킹 역에서 한바탕 소란이 있었다. 교회에서 나온 남자가 팸플릿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나란히 걷는 군인들이 보이면 닥치는 대로 그것을 나누어주었다. 알렉스와 토미도 그것을 받았다. ‘지옥에나 떨어져라!’ 문구를 읽은 알렉스가 고개를 들자, 남자는 보란 듯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는 며칠 만에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듣기로는 누군가 두들겨 팬 후 풀숲에 버렸다고 한다. 죽었다는 말도 떠돌았는데 알렉스는 그가 조용한 얼굴로 교회 정원에 서있는 걸 본 적이 있었다. 

 토미는 팸플릿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그것을 접어 방 한쪽에 치워놓았고, 이따금 실없이 혼잣말을 했다.

 “알렉스, 지옥이 뭘까?”

 “글쎄.”

 알렉스가 대답하면 토미는 또 홀로 어떤 것에 납득한 것처럼 고개를 숙였다.

 “어쨌든, 난 거기 안 가.”

 팸플릿 사건 이후 토미는 그전까지는 한 번도 의식하지 않던 모든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거리를 걷다 나란히 걷는 군인들을 마주쳤을 때 고개를 들어 그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식이었다. 마치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는 어떤 것을 목격한 사람처럼. 그리고 그들이 지나가면, 비로소 나란히 걷고 있는 알렉스를 흘끔 바라본 후, 거리를 벌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들은 여전히 좁아터진 한 침대에서 잠을 잤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포커를 쳤다. 알렉스는 토미가 아무것도 모르는 만큼 자신 역시 아는 게 없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시작했다. 왜냐하면 알렉스는 토미를 도무지 어쩌면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설령 토미를 별장에 데려갈 수 있다한들 그곳에서 대체 뭘 할 수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포커다. 고작 포커를 치기 위하여 깨끗한 개울이 있고 별이 잘 보이고 오리털 이불과 희곡이 있는 별장으로 간다. 그리고 걷는 것이다. 그곳에는 정말 둘뿐이라 쌍을 이루는 군인도 팸플릿도 마주칠 수가 없다. 그럼 토미 테일러는 어떻게 할까? 그럼에도 알렉스를 흘끔, 바라본 후 거리를 벌릴까. 그를 두렵게 할 존재가 그 무엇도 없는 그곳에서도 그는 과연 거리를 벌릴까.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알렉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말 어떻게 해야만 좋은 것인가. 그리고 그곳은 분명 한밤중일 것이다. 죄가 유보되거나 은폐되기에 좋은 시간인 것이다.

 “별장에 갈까.”

 불쑥 말한 것은 토미였다. 알렉스는 패를 돌리다 말고 카드를 전부 엎을 뻔했다.

 “뭐라고?”

 “슬슬 떠나자고.”

 토미는 덤덤하게, 마치 당장이라도 실현될 수 있는 것을 늘어놓는 사람처럼 말했다. 알렉스는 그로부터 어떤 신호나 낌새를 알아차리기 위해 애썼지만, 그 어떤 의도도 욕망도 발각할 수 없었다. 알렉스는 토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 하고 뜸을 들였다.

 토미가 되물었다.

 “싫어?”

 “그럼 넌?”

 알렉스가 대답을 회피했다. 토미는 즉답했다.

 “난 지겨워.”

 그는 씹어뱉었다.

 “여기가 지겨워.”

 그들은 이른 저녁 숙소로 돌아왔다. 토미는 방에 도착하자마자 방 한구석에 박아놓았던 팸플릿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알렉스를 노려보며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h, e, l, l들이 먼지처럼 허공을 날았다. 알렉스는 토미의 분노가 언제로부터 기인한 것인지 따라잡고 싶어 무엇이든 되짚어 보았으나 곧 그만두었다. 어딘가에서 헐떡거림이 새어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미와 알렉스는 동시에 얼어붙었다. 숙소의 어떤 군인 한 쌍이 뒹굴고 있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바로 다음 순간, 토미의 얼굴이 고통스럽게 일그러졌다. 그는 그 자리에 서서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 작게 우는 신음을 냈다. 알렉스는 멍청하게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렸다. 토미는 발기해있었다.

 ‘만약 그렇지 않는다면 알렉스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알렉스는 다리를 벌리고 왼쪽 허벅지에 토미를 앉혔다. 그리고 토미가 그 깊은 분노와 혼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토미는 수음을 받는 내내 결코 알렉스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러나 사정을 할 때는 그의 목에 단단히 손을 감았다. 밀어내거나 거리를 벌리는 일 따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알렉스가 손을 씻고 방으로 돌아왔을 때, 토미는 자리에 없었다. 알렉스는 그를 기다렸지만, 한밤이 지나도록 토미가 돌아오지 않아서 이번에야말로 그가 영영 떠나버린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렉스는 방에서 홀로 수음을 했다. 그리고 잠들었다. 토미는 새벽이 되어서야 슬그머니 돌아왔다. 그는 벽에 바짝 붙어 돌아누웠는데, 알렉스가 일어났을 땐 그를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알렉스는 품에 안긴 토미의 얼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볼록하고 창백한 이마, 흔들거리면서도 일직선을 유지하며 떨어지는 콧날, 촘촘하고 축축한 속눈썹과 힘주어 다물린 입술, 턱 끝에 붙은 점, 그리고. 그리고……. 눈가가 잔뜩 짓물러 있었다. 밤새 울고 왔을 지도 모른다. 울고 왔을 것이다. 그렇다면 토미는 어째서 울었을까? 알렉스는, 언젠가처럼 그 얼굴로부터 신의 불가해한 예언을 보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말았고, 그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예언은 오지 않았다. 똑같았다. 둘은 그 날 개롯의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 포커를 쳤고, 이번에는 3팬스를 걸었다. 알렉스가 이겼다. 그런 후 그들은 별장에 어떻게 하면 도달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을 심심하게 교환했다. 그리고 저녁이 될 무렵 숙소로 돌아왔다. 알렉스는 무엇이든 말해보려고 시도했으나 토미가 너무 일찍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아무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토미는 거의 전투적으로, 증오하다시피 잠에 빠져들었다. 그런 것처럼 보였다. 다음 날에도 그들은 포커를 쳤고, 별장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누었고…… 그 날엔 또다시 수음을 했다. 하지만 일상은 계속되었다. 그런 짓을 세 번 정도 반복한 후에, 토미가 말했다.

 “우리는… 아직은 괜찮아.”

 yet, 을 발음하는 토미의 눈이 절실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알렉스를 바라보며 또박또박 되새겼다.

 “알겠어?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했잖아.”

 물론이다. 그들은 성교하지 않았다.

 ‘넌 정말이지 아무것도 몰라.’

 알렉스는 생각했다.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서 다행이야.’

 하지만 토미는 다 알고 있었다.

 “우리는 문제가 생겼어.”

 토미가 말했다. 알렉스는 대꾸하는 대신 창문을 바라보았다.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고 한낮이었다. 내일이면 떠나야 하는데, 차를 훔치거나 도로에 서서 엄지를 들어 올려야만 하는데, 토미는 무엇을 알고 싶은 거지? 이제 와서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거지? 너는 나로부터 무엇을 얻고 싶어 하는 거지? 알렉스가 침묵하자 토미가 눈을 부릅떴다.

 “우린 하나도 괜찮지 않아.”

 “뭘 말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알렉스가 재빨리 대답했다. 토미는 으르렁거렸다.

 “네가 가게를 박차고 나왔잖아.”

 “그래서?”

 “넌 지금 들리는 소리를 역겹다고 생각하지 않잖아.”

 “왜 그렇게 생각해?”

 “난 잠든 적이 없으니까.”

 토미는 빌어먹을, 이라고 중얼거렸다.

 “너 때문이야. 전부 네가 잘못했어. 나는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는데, 너는 갑자기 내게…….”

 “정말 알고 있었어?”

 알렉스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되물었다.

 “넌 알고 있었는데도 이 지경으로 굴었어?”

 “역겹게 굴지 마, 알렉스.”

 “역겹다고!”

 알렉스가 화를 냈다.

 “그래놓고 넌 내 허벅지 위에서 쌌잖아.”

 “입 닥쳐.”

 토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알렉스는 계속 지껄였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그래놓고 잘도 낮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입을 닦았지. 깨끗한 척 굴지 마, 토미. 너도 알고 있잖아.”

 “지옥에나 떨어져버려.”

 “오, 그럼 내 옆구리엔 너를 껴야겠네.” 

 알렉스가 빈정거렸다.

 “넌 무서워하고 있는 거야.”

 “아니, 난 너한테 화내고 있는 거야.”

 “그래, 무서워서 화가 나는 거야.”

 알렉스가 힐난했다.

 “넌 내가 무서운 거야. 그렇지, 토미? 난 다 알고 있어. 모를 수가 없어. 모를 수가 없다고. 너만 모든 걸 안다고 생각하지 마. 네가 워킹에 돌아온 순간부터 우린 이렇게 될 거였어. 빌어먹을 토미, 넌 돌아와서 이주일 내내 나랑 여기 처박혀 있었잖아. 뭘 기대했어? 뭘 기대한 건데?”

 바로 그 다음 순간, 토미가 알렉스에게 달려들었다. 알렉스는 주먹을 맞고 휘청거리다가 반격했다. 그는 토미를 덮쳤다. 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둘은 침대 위로 쓰러져 뒹굴었다. 토미가 알렉스의 얼굴을 마구 할퀴자, 알렉스는 그를 깔아뭉갠 채로 주먹을 내질렀다. 토미가 미친 듯이 바둥거렸다. 씨큰거리는 소리가 방을 가득 채웠다. 토미는 알렉스의 목을 쥐었다. 알렉스가 컥컥거리며 뒤집혔다. 이제 토미가 알렉스의 위에, 알렉스가 토미의 아래에 있었다. 토미는 그대로 그의 숨통을 조였다.

 “네가 끔찍해.”

 토미의 손이 마구 떨리고 있었다.

 “네가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토미의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손아귀가 느슨해지자 알렉스는 헐떡거리며 토미를 발로 찼다. 토미는 순순히 치워졌다. 알렉스는 거칠게 숨을 고르며 그 위로 올라탔다. 토미는 눈을 깜빡이다 말고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길고 마른 손가락 사이로 작은 울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알렉스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고, 그건 고통에 가까웠다. 그는 토미의 목을 쥐다 말고 그대로 감싼 채 엎어졌다.

 “제기랄.”

 알렉스가 씹어뱉으며 토미의 손목을 쥐었다. 그 아래에는 축축한 얼굴이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그곳에 깊게 입을 맞췄다. 토미가 나지막이 비명 같은 걸 질렀다. 그러나 결코 밀어내지 않았다. 밀어내는 법이 없었다.

 알렉스는 몇 번 더 토미의 축축한 눈 위에 입을 맞췄다. 둘은 다시 한 번 침대 위를 뒹굴었다. 이번에는 몸싸움이 아니었다. 그러나 때때로 몸싸움처럼 보였다. 그들은 축축해져서 비빌 수 있는 곳은 모조리 비비며 파고들었다. 정신없이 서로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끝까지 가는 데는 실패했다. 삽입은 어려운 일이었다. 

 토미는 울었다. 많이 울었다. 알렉스는 방 곳곳에 흩날리던 무수한 h와 e와 l을 떠올렸다. 그는 거기서 l을 빌려왔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열해보았다.

 “잘 들어 봐, 토미.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 같아.”

 알렉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그래서 이걸 이해하거나 혹은 이해하지 않으려고 노력 중이야.”

 토미는 훌쩍거리며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토미는… 마치 신의 불가해한 예언을 보는 것 같은, 그래서 앞으로 어떤 비극이 벌어지고 말 것인지 분명히 알고 있는 사람의 눈 같은 걸 하고 있었다. 토미가 알렉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너 내가 워킹을 떠났던 지난 일주일 동안 누굴 만나고 왔는지 알아?”

 “아니.”

 “나는 고향에 있는 내 애인을 만나고 왔어.”

 토미가 말했다.

 “그리고 난 우리에 대해 기대한 적 없어.”

 끔찍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토미가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벌떡 일어났다. 횡설수설하며 훌쩍였다.

 “여길 나가야겠어. 미쳐버릴 것 같아. 남자랑 남자가 사랑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처럼 보이잖아. 여긴 현실이 아니야. 취해버리면 원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아.”

 알렉스가 두 팔을 벌렸지만 이번에 토미는 그를 힘껏 밀어냈다. 그리고 그 몸짓은 분명하게 알렉스의 무언가를 관통했다. 막을 수 없는 구멍이 생겨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를 죽여 버리고 싶다는 충동에 휩싸였다. 지금이라면 정말 그렇게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토미의 얼굴, 그를 밀어낸 자신 스스로에게 충격을 받은 것처럼 깜짝 놀라 굳어 있는 그 표정을 보는 순간, 그 마음이 모조리 무너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재건되었다. 그곳에선 그 어떤 사랑도 불법이 아니었다.

 “토미, 이러지 마.”

 알렉스가 간절하게 말했다.

 “우리는 괜찮을 거야.”

 “제발 떠나자.”

 토미가 애원했다.

 “난 더는 여기 있고 싶지 않아.”

 “우린 차가 없어.”

 “훔치면 돼.”

 토미는 눈가를 닦아내며 중얼거렸다.

 “우린 이미 범법자야.”

 그러니까 토미도 마침내 인정한 셈이었다.

 그들은 숙소 바깥으로 나와 건물 뒤편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오래된 주차장이 있었는데, 둘은 레스토랑과 숙소를 오며가며 종종 그곳을 눈으로 둘러보곤 했다. 그리고 기억하건데 그 주차장 한쪽에는 내내 처박힌 채 아무도 몰 것 같지 않은 낡은 고물 트럭이 한 대 버려져 있었다. 알렉스는 창문을 깬 뒤 문을 열어서 계기판을 확인해보았는데, 놀랍게도 신은 그 트럭에 키와 몇 갤런 정도의 기름을 남겨놓았다. 그리고 알렉스는 포커에는 초짜였지만 운전을 할 줄 알았다. 저녁이 오고 있었다.

 “올라타.”

 알렉스가 말했다.

 “가는 길을 알아?”

 토미가 물었다.

 “아니.”

 알렉스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곳의 도로는 하나뿐이잖아.”

 둘은 트럭에 앉아 숙소의 모든 사람들이 레스토랑으로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노을이 지면서 주차장 팬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까마귀가 그 위에 앉아 몇 번이고 울었다. 그리고… 저녁이 끝났다. 까마귀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알렉스는 시동을 걸었다. 몇 번 실패했지만 마침내 걸렸다. 그는 주의 깊게 핸들을 꺾어서, 찔끔거리며 후진을 두어 번 하고, 입구에서 한 번 긁힌 후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16번국도 입구에 진입했을 때, 도로에 외따로 세워진 개롯의 레스토랑에서는 환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둘은 술과 접시를 주고받는 왁자한 군인들의 무리를 시트 위에서 내려다보았다. 개롯은 바에 있는 것인지 보이질 않았다. 알렉스는 페달을 밟아 그곳을 벗어났다. 레스토랑은 빠르게 멀어졌다.

 트럭은 탈탈거리며 한산한 16번 국도를 마구 달렸다. 깨진 운전석 창문 안으로 바람이 자꾸만 들어왔다. 토미는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댔다.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가운데 산등성이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공기가 점점 더 서늘해지고 있었다. 숲을 지날 무렵, 토미가 물었다.

 “너는 무섭지 않아?”

 “넌?”

 “무섭지 않아.”

 토미가 대답했다. 알렉스는 손을 뻗어 라디오를 틀었는데, 고장이 났는지 작동하질 않았다. 알렉스는 핸들을 쥔 채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이 모든 게 무서워.”

 한밤의 숲은 지독하게 새까맣고 무서웠다. 그리고 정말 추웠다. 바람이 너무 서늘해서 둘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며 이마를 칠 때마다 고통이 느껴졌다. 긴장한 알렉스가 너무 세게 밟고 있었다. 풍경이 뭉개져서 사방이 온통 흐지부지 칠해진 까만 도화지처럼 보였다. 토미는 작게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알렉스가 토미를 흘끔거렸다. 그는 중얼거리는 게 아니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so this is the part where we say goodbye……. (이제 우리가 헤어질 시간이야.)”

 토미의 목소리는 아주 작았지만 알렉스는 요란한 바람소리 속에서도 뚜렷하게 그것을 들을 수 있었다.

 “I promise I'll try to make it stick this time. (이번엔 정말 잘 이겨내 볼게.)”

 “누구 곡이야?”

 “original.”

 토미가 대답했다.

 

 So this is the part where we say goodbye.
 이제 우리 헤어질 시간이야
 I promise I'll try to make it stick this time.
 이번엔 정말 잘 이겨내 볼게
 I always loved breaking up with you cause
 난 늘 너와 헤어지는 걸 좋아 했어
 The more bitter it was the better the making up with you was.
 마음이 아플수록 더 화해하고 싶었지
 And I think we can agree,
 그래, 이제 우리 헤어질 수 있을 것 같아
 On the following things
 왜냐하면


 그것은 토미 자신에 대한 곡이었다.


 I am an asshole,
 난 쓰레기야
 And you're kinda needy.
 넌 그저 사랑을 원했고
 We said it was casual,
 아무 문제없어 보였지
 And you pretended to believe me.
 넌 나를 믿는 척 했어


 16번 국도는 끝이 없었고 숲은 연거푸 이어졌다. 알렉스의 손 떨림이 잦아들었다. 토미의 목소리가 바람소리를 추월했다. 트럭은 아까보다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헤드라이트 하나가 깜빡거리다 나가버렸다. 모든 게 나빠질 지도 몰랐지만 토미의 노래는 듣기 괜찮았다. 객관적으로, 그런 느낌이었다. 토미는 자신이 고향에 두고 온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많은 걸 말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만나고 왔던 애인, 그러니까 토미가 십대 시절 사랑했던 여인에 대해서는 자세히, 꿈속에서도 그린 것처럼 늘어놓았고, 그건 알렉스가 스튜어드 별장의 시절을 늘어놓을 때와 꼭 비슷한 느낌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토미가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절이었던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토미는 그녀를 사랑하는 동시에 증오해왔다고 고백했다. 이어서 토미는 워킹을 떠났던 일주일 동안 고향에 그 모든 것을 두고 왔다고 털어놓았다. 사랑은 늘 증오와 같았어, 라고 그는 중얼거렸다. 죽여 버리고 싶었고 동시에 용서하고 싶었지. 알렉스는 토미의 말이 무엇인지 완벽하게 이해했다.

 “완성된 곡이 아니야.”

 토미는 자신의 노래가 뒤죽박죽하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 뒤의 가사를 쓴다면, 분명 너에 대해 말하게 되겠지…….”

 그 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알렉스를 흥분하게 했다.

 토미는 그 뒤로는 별다른 말없이 미완성의 곡을 완성한 만큼만 불렀다. I only love you when you're leaving… 곡의 말미에서 그는 그렇게 말했다. only. 난 네가 나를 떠날 때만 사랑했어.

 

 둘은 밤의 정점에 샛길로 빠져서 트럭을 세웠다. 눈을 좀 붙일 필요가 있던 것이다. 도로가 너무 깜깜해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풀벌레들이 울었고 먼 곳에서 맹금류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잦아들자 흙냄새가 사방에서 끓어올랐다. 알렉스는 생각했다. 아침이 되면, 낮이 오면, 언덕을 넘어서 산으로, 산을 지나서 별장으로 가자. 그리고 거기서 삽입을 해보자. 거기서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두려워할 만한 게 아무 것도 없다. 세상에는 그런 곳도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잠이 들었다.

 그는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맞은편에는 개롯이, 그의 옆 좌석에는 한 소녀가 앉아 카드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토미가 말한 대로 짙은 갈색 머리카락을 어깨까지 늘어뜨리고 있었고, 토미는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면사포를 쓰고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토미는 그런 이야기는 해주지 않았다.

 “베팅을 해.”

 그녀가 말했다.

 “어… 6펜스?”

 알렉스가 걸었다. 소녀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나는 토미를 걸 거야.”

 “그리고 난 레스토랑을 걸겠소.”

 개롯이 대답했다.

 그들은 포커를 쳤다. 커피가 있었지만 아무도 마시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곳은 개롯의 레스토랑이었는데, 어쩐지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통유리로 희끄무레한 빛이 드문드문 쏟아지고 있었고 머리 위로는 실링팬이 천천히 돌아가는 중이었다. 한 때 토미의 것이었고 동시에 토미를 소유했던 소녀는 결혼식 장갑을 낀 채로 패를 던졌다.

 “트리플.”

 “한 방 먹었군.”

 개롯이 낄낄거렸다.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웃을 때가 아닌데요.”

 “오, 그럼. 웃을 때가 아니지.”

 개롯이 중얼거렸다.

 “난 항상 진지했다오.”

 그들은 계속 쳤고 카드를 뽑았고 패를 돌렸다. 첫 판은 알렉스가 이겼는데, 소녀는 알렉스에게 무릎을 꿇고 토미를 데려가지 말아달라고 애걸복걸했다. 난 모든 걸 잃었고 토미마저 없으면 난 죽어버리고 말 거야. 그러나 어쨌든 아직 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두 번째 판은 개롯이 이겼다.

 “점점 흥미진진해지는군.”

 개롯이 말했다.

 “내가 이기면 더 흥미진진해지는 셈이지.”

 소녀가 대답했다.

 세 번째 판이 시작되기 전에, 알렉스는 잠에서 깨어났다. 토미가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어두컴컴한 트럭에서 토미의 실루엣이 창문의 밤하늘을 등진 채 선명하게 드러났다. 알렉스는 시트에서 반쯤 몸을 일으켰다.

 

 I'm sorry I hurt you,
 너에게 상처 줘서 미안해
 And for pissing you off and,
 널 보내려고 그랬어……

 
 뒤척거리는 소리에 토미가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I'm sorry for not hurting you,
 너에게 조금 더 자주
 A little more often.
 상처주지 않아 미안해…

 

 “토미.”

 알렉스가 손을 뻗었을 때, 토미는 고개를 숙여 뺨을 가져다댔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었고 결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신의 불가해한 예언이 있다면, 이해해야만 하는 순간이 여기 있었다. 알렉스는 이해하고자 했다. 토미가 그렇게 하자고 방금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거기서 했다. 이번엔 성공했고, 그것은 생각만큼 좋지 않았다. 그러나 토미의 두려움은 거기서 다 끝났다. 알렉스는 포커를 떠올렸다. 무엇도 걸지 않았음에도 이기거나 졌던 토미와의 포커를. ‘게임은 인생과 같다오. 얻거나 잃어서 승리하거나 패하게 되니까.’

 ‘하지만 인생은 게임이 아니야.’ 알렉스는 생각했다. 그리고 비로소 자신이 사과 두 알을 훔친 후 어떻게 되었는지가 떠올랐다. 그는 도둑질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 자리에서 사과를 전부 먹어 버렸고, 그 과정은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배가 너무 찼기 때문이었다. 죄의식을 느끼기 위해서는 그 행위에 대한 만족감과 행복이 수반되어야만 했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내가 강탈하였다, 혹은, 영영 소유하고 말았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모든 일이 싱거워지고 말았다. 토미가 아래에서 헐떡거리며 알렉스를 껴안았다. 뜨거운 두 뺨이 알렉스의 서늘한 목덜미에 닿았을 때, 마음속으로 화염이 끓어올랐다. 알렉스는 강렬한 죄의식을 느꼈다. 하지만 괜찮다. 아주 한밤중이므로 그들은 처벌받지 않을 것이다. 알렉스는 멈추지 않을 것이었다.

  ⑴ 알렉스는 토미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 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토미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알렉스는 토미의 어떤 것이 재건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재건에 알렉스가 일조하고 있음을 직감했으나, 그것이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건이 항상 좋은 쪽으로만 이루어지지는 않는 법이다. 토미는 다만 산산이 부서졌다가 ‘무엇으로든’ 되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알렉스는 입을 맞추면서 속으로 물어보았다. 토미, 그곳에도 사랑이 불법이야? 토미가 대답할 수 있을 리는 물론 만무했다.

 둘은 끌어안고 잠들었고, 동이 틀 무렵 16번 국도를 타고 왔던 길을 되돌아 왔다. 그들은 더 이상 스튜어드 별장으로 갈 필요가 없었다. 그건 너무 멀리 있었음에도 간밤에 이미 다녀온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토미는 밤새 바로 그 별장을 재건하고 있던 걸지도 몰랐다. 토미의 마음속으로 깨끗한 개울이 흐르고, 별이 잘 보이며, 오리털 이불과 싸구려 잡지 희곡이 굴러다닌다… 그리고 그는 이제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 토미는 그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절을 갱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기차역에서 헤어졌다. 떠나기 전에 토미가 플랫폼에서 알렉스를 끌어안았다. 알렉스가 속삭였다.

 “우리는 지옥에 갈 거야.”

 “그래, 고물 트럭을 훔쳤으니까.”

 토미가 대답했다.

 “하지만 이제 돌려놨으니 아무 상관없어.”

 기차가 경적을 울렸다. 토미는 천천히 떨어졌는데, 그 과정에 알렉스는 토미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묻혔다’고 생각했다. 그건 토미가 원해서 혹은 알렉스가 원해서 옮겨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달리 그렇게밖엔 설명할 도리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그것은 토미의 일부였다. 그리고 이제 알렉스의 일부가 된 셈이었다. 알렉스는 언젠가 토미가 자신을 멀리 밀쳐냄으로써 관통시킨 구멍이 단단히 틀어 막혔음을 알 수 있었다. 방 곳곳에 흩날리던 무수한 h와 e와 l속에서 다시금 배열된 단어가 떠올랐다. 알렉스는 물러나는 토미를 붙잡아 귓가에 그 문장을 쏟아 넣었다. 흉터가 분명하게 남아있는 토미의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토미는 입을 맞추는 대신 눈을 감았다가 떴다.

 기차가 출발할 때, 알렉스는 머릿속의 테이블로 돌아와 앉았다. 소녀와 개롯은 기다리고 있었다. 여전히 거기서 마지막 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지만 토미는 돌아올 거야.”

 소녀가 심술궂게 웃었다.

 “그리고 넌 이 게임에서 이겨도 나를 고통스럽게 할 수 없어.”

 “이제 아무 상관없어.”

 알렉스가 대답했다.

 “정말 아무 상관없어.”

 기차가 멀어지는 가운데, 알렉스는 그 말을 끝으로 테이블에 패를 던진다. 개롯이 대신 소리쳐준다. 소녀가 퇴장하고, 연기가 깨끗하게 걷힌다. 개롯의 레스토랑은 이제 알렉스의 것이고 통유리로는 맑은 햇살이 쏟아진다. 알렉스는 개롯의 레스토랑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는 토미를 볼 수 있다. 자, 이제 끝났다. 알렉스는 모든 게임에서 승리한 것이다. 

 알렉스는 손을 흔드는 대신 두 손으로 얼굴을 묻는다. 풀하우스, 라고 알렉스는 중얼거린다. 풀하우스. 토미, 그리고 사랑해. 너를 사랑해. 그리고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 ■

 

⑴ 나는 그 방에서 여자의 조바심을, 마치 칼을 들고 달려드는 사람으로부터, 누군가가 자기의 손에서 칼을 빼앗아주지 않으면 상대편을 찌르고 말 듯한 절망을 느끼는 사람으로부터 칼을 빼앗듯이 그 여자의 조바심을 빼앗아주었다. 

 - 김승옥, 무진기행 中

 

토미가 부른 곡은 Asshole (러덜리스 soundtrack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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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스토미 «태고의 밤»
2차/old 2019. 10. 24. 19:10

 인어의 말

 알렉스가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그것은 일자형 수조에 갇혀 있었고 검은 천으로 가려져 있었다. 항구는 인어를 잡아왔다는 소문에 줄줄이 모여든 사람들로 빽빽했다. 알렉스는 인어보다는 사냥꾼이라는 남자가 먼저 보고 싶었다. 그러나 까치발을 들어도 인파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저리 좀 비켜 봐요. 몸을 비집어 넣고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다가 철퍽 엎어졌다. 군집의 행렬은 끝나있었고 고개를 들자 천막을 씌운 거대한 수조가 시선 위로 솟구쳐 있었다. 수조를 지키던 무뚝뚝한 남자가 그를 일으켜 세웠다. 알렉스는 남자의 가슴에 매달린 목걸이를 보았다. 조개처럼 보였으나 좀 더 편평하고 납작했다. 빛이 바랐지만 아름다웠다.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조심하렴.”

 남자가 말했다. 그 순간, 천막 너머의 수조에서 탕탕 두들기는 소리가 났다. 알렉스는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안에서부터 자그맣게 속삭임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수중에 응집되어 기포와 함께 희미해진 발음이었다.  그래도 가까이 서있던 남자와 알렉스에게는 똑똑히 들렸다. 그것은 말하고 있었다.

 ‘죽이고 싶어.’

 ‘죽이고 싶어.’

 ‘나를 풀어준다면.’

 ‘너는 죽이지 않을게.’

 “신경 쓰지 마라.” 

 남자는 냉랭하게 대꾸하며 알렉스를 내려다봤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두렵지 않았다. 그것은 수조에 갇혀있고 알렉스는 그것을 도울 생각이 없었다. 조금도 없었다. 그보다, 저 안에 든 저게 정말 인어일까?

 “정말 죽이려 들면 어쩌죠? 제가 듣기론 인어들은 힘이 무지막지하게 세다고 하던데요.”

 탕. 수조가 덜컹거리면서 좌우로 흔들렸다. 안에서 작게 쇠사슬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남자는 응수하듯 수조를 주먹으로 쿵 내리쳤다.

 “인어의 말은 믿지 마라.”

 남자는 경고하듯 씹어뱉었다.

 “그것들은 전부 거짓말만 한단다.”

 “당신이 저걸 잡아온 사냥꾼인가요?”

 알렉스가 물었다.

 “그래.”

 “기분이 어때요?”

 남자는 대답했다.

 “실망스럽구나.”

 알렉스는 얼굴을 찡그렸다.

 “왜죠?”

 “내가 찾던 게 아니었어.”

 알렉스는 수조를 담은 수레를 끌고 상인의 무리를 따라 천천히 이동하는 남자의 어깨를 오래도록 응시했다. 실망스럽다는 말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그는 바다에서 가장 아름다운 존재를 지상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그것이 그가 찾던 것은 아니었다. 이름답지 않은 인어기 때문일까? 그는 무엇을 찾았던 걸까?

 경매가 시작되자 구경꾼이 몰렸다. 알렉스는 인파를 헤집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대신 수조를 실었던 수레를 밟고 올라가기로 했다. 남자는 여전히 수조 옆에 있었다. 보물을 소개하는 보석상보단 장례식 첫날을 맞이한 상주의 표정을 하고. 경매 주최가 몇 가지를 과장되게 떠든 후 남자를 돌아보자, 그는 수조를 덮은 덮개의 끝과 끝을 쥐곤 한 번에 벗겨냈다. 그 순간 쾅,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조가 크게 흔들렸다. 수조에 반사된 빛 때문에 모두가 움츠렸다. 알렉스는 실낱같은 눈을 뜨고 몸을 곤두세웠다. 그는 그 자리에 서있던 구경꾼 중 가장 처음으로 그것을 보았다.

 그것은 남자였고 지느러미와 양손에 무거운 사슬을 차고 있었다. 어둠속에 잠겨있다 말고 느닷없이 빛에 노출된 사람의 표정 같은 것을 하고, 경멸스럽게 수조 옆을 지키는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물이 찰랑거려서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부드럽게 유영했다. 지상의 성질이라고는 할 수가 없는 속도로 상하좌우, 천천히 퍼졌다가 하나도 뭉쳐지면서. 그리고 그것이 돌아보았다. 시선이 사격되었다. 보이지 않는 화살이 구경꾼들을 제치고 곧장 어딘가로 와박혔다. 그것은, 수레를 밟고 올라간 열여덟 살짜리 소년 알렉스를 철저하게, 가차 없이, 무자비하게 관통했다. 알렉스는 이상한 고통을 느꼈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내려앉은 심장이 막 건져올려진 생선마냥 토막토막 펄떡거렸다. 관념적인 고통이었다. 그것이 알렉스를 보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알렉스로부터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고통은 깔끔하게 뽑혀나가긴 커녕 대신 선명한 상처로 남았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분명한 공격이 있었다. 알렉스는 가슴 언저리를 괜히 더듬거렸다. 그런 주제에 고개를 돌린 그것으로부터 눈을 떼지도 못 했다. 자기도 모르게 죽일 거야, 라고 읊조리게 되었다. 저것은, 저것은, 무엇이든 죽이고 말 거야. 중얼거린 후 그는 생각했다. 저것은, 저것은, 아름다운 촉을 가지고 있으니까.

 알렉스는 그것에게 무가치한 존재거나 혹은 흥미 밖의 존재로 여겨지는 것 같았다. 내리깐 눈동자 위로 허연 물그림자가 져있었다. 알렉스는 바랐다. 가장 높은 고도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던 지상의 존재인 자신을, 저렇게도, 저렇게도 어릴 줄이야… 라고 생각해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고 경매도 금방 끝나고 말았다. 인어는 마을 제일의 부호에게 팔렸다. 누군가 액수를 더 부를 엄두조차 낼 수 없을 만큼 전례 없는 가격이었다. 수도의 부르주아들이 와도 그만큼은 부르지 못 했을 테였다. 그가 마을의 운하사업을 맡은 후 거래처와 결탁해 떼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인어를 사들이고도 휘청거리지 않는다면 정말일 것 같았다. 인어는 그렇게 알렉스에게 화살 하나를 날래게 박아놓고, 책임지지 못 할 상처를 남겨놓고, 부호의 집으로 이송되었다. 멀어지는 수조를 보며 알렉스는 다시 한 번 가슴 언저리를 더듬었다. 그곳엔 그가 박아놓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이상한 촉이 박혀 있었다.

 

 운하사업

 알렉스가 살고 있는 공간은 앞으로 바다를, 뒤로 산맥을 등진 작은 시골 어촌이었다. 그러나 지방자치를 맡던 시장이 임기를 마치고 재산을 정리해 내려온 후 급하게 재개발 되고 있었다. 그가 바로 인어를 사들인 부호였다. 그는 이 마을을 관광지로 유치시키고 싶어 했다. 대중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안다고 유세를 내걸었다. 이 어촌이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슬로건을 사방에 붙여놓았다. 생선 비린내와 작살에 지친 주민들이 손을 벌려 환영했다. 운하사업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는 산맥 어귀에서부터 바다까지 이어지는 인공 수로를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비용은 고사하고 현실적인 문제가 있었는지 계획이 도중에 수정되었다. 그는 운하 사업의 규모를 반으로 줄이고, 대신 최초 계획으로 얻어낸 예산의 4할을 그대로 삼켰다. 그 돈이 없었다면 인어를 살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정말이지 굉장한 액수였다. 그는 운하 사업을 더욱 축소하기 위해 건설을 맡은 거래처와 결탁해 뇌물을 더 끌어들였다. 사업은 더 줄어들었다. 이제 인부들은 운하가 아닌 연못을 만들고 있었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 신전처럼 지어진 부호의 집을 중심으로 층층이 내려다보이는 집 마당마다 거대한 구덩이를 팠다. 부호의 궁전에서 그곳을 내려다보면, 거대하고 둥그런 접시 같은 구덩이가 순차적으로 고도를 낮춰가며 계단처럼 이어졌다. 거기에 물을 채우고 물고기를 기를 거라고 했다. 날씨가 좋은 날에는 수로를 개방해서 부호의 집 수영장에서부터 물을 연못과 연못으로 이어 보낼 계획이었다. 그림만 생각하자면 근사한 사업이 아닐 수 없었다. 어쨌든 그는 그렇게 사업의 맥을 망치지 않고도 돈을 챙겨서, 그 돈으로 인어를 샀다.

 그는 인어를 위해 자신의 수영장을 확장시켜서, 마치 테라스처럼 꾸며놓았다. 그리고 그 위를 단단한 철망으로 씌웠다. 멀리서 보면 그것은 거대한 새장 혹은 흉물스러운 돔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안에는 그 무엇보다 아름다운 바다의 존재가 살고 있었다. 갇혀 있었다.

 알렉스는 자전거를 타고 저녁마다 그 근처를 지나쳤다. 운이 좋으면 내리막을 내려가는 동안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깊고 어두컴컴한 바닷속, 판과 판이 갈라진 지구 깊숙한 곳에서부터 끓어져 올라오는 것만 같은, 누군가의 수렁을 닮은, 고요하고 음울한 목소리였다. 그것은 아름답기보다 끔찍했는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 유독한 목소리가 내리막길을 내달리는 알렉스의 서늘한 가슴으로 끊임없이 스며들고 있었다. 언젠가 한 번 분명히 꿰뚫렸던 가슴 언저리를 휑하니 스치고 있었다. 그것이 멈추지 않고 노래하고 있었다.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인간은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파괴할 수만 있어

 너를 죽일 거야, 라고 언젠가는 그렇게 말했었다.

 

 Tommy

 유난히 춥고 어두컴컴한 날 보름달이 떴다. 차가운 공기는 금속과 날카롭게 벼려진 것들, 섬세하고 유려한 것을 떠올리게 한다. 추운 날엔 유독 달이 하얗고 서늘하게만 보였다. 알렉스는 내리막길을 위해 자전거를 끌고 자꾸만 높은 곳으로 향했다. 운하 사업이 이뤄지고 있는 집 곳곳에 거대한 흙더미가 쌓여 있었다. 밟을 때마다 우드득, 돌이 짓이겨지는 소리가 났다. 알렉스는 부호의 새장 근처에서 비로소 멈추어 섰다. 마을 가장 높은 곳에선 달빛에 부서지는 밤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귀를 기울였지만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파도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올 정도로, 고요했다. 그 때, 날카로운 굉음과 함께 큰 진동이 일었다. 쾅! 알렉스는 소스라치게 놀라 자전거를 내던지고 부호의 새장으로 달음박질했다. 철옹성 같은 철제 돔이 통째로 흔들리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소리가 들렸다. 쾅! 알렉스는 부호의 저택을 빙 둘러싸고 있는 정원목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엎어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쾅! 알렉스는 숨을 고르며 발을 끌고 기다시피 돔 앞으로 기어갔다.

 그곳에는 인어가 있었다.

 바짝 돔 앞에 몸을 붙인 채, 지그재그로 얽힌 철망을 붙잡고 죽일 듯이 알렉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렉스는 그것의 눈을 오래도록 들여다보았다. 노여움과 두려움, 힐난과 그리움이 혼재한 눈동자는 달빛 속에서 녹색도 파란색도 아닌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물을 강하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알렉스의 시선이 비로소 그것의 얼굴 너머, 허리 아래부턴 도무지 인간이라 부를 수 없는 구역으로 이동했다. 지느러미는 은빛이었고 방금 전까지 언덕에서 내려다보던 밤바다 위의 달을 꼭 닮아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시 달빛을 받아 도무지 달, 혹은 빛으로만 표현할 수 없는 세계의 것처럼 반짝일 때, 알렉스의 눈으로 물이 튀겼다.

 “윽, 하지 마.”

 알렉스가 고개를 마구 휘저으며 중얼거렸다. 그것이 자신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지 몰랐으므로 중얼거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곧 행동을 멈추고 알렉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알렉스는 중얼거린 게 아니라 말한 것이 되었다.

 “왜 왔어?”

 인어가 딱딱거렸다. 알렉스는 물기를 닦아내며 돔 앞에 바싹 붙었다.

 “소리가 나서.”

 “날 도와줄 거야?”

 “아니.”

 알렉스가 입술을 찡긋거렸다.

 “그런 짓 했다간 내 목이 날아가. 널 배상할 돈이 없거든. 그리고 설령 시도했어도 힘들었을 거야.”

 “왜?”

 “이거.”

 알렉스가 둥글게 얼기설기 얽힌 돔을 가리켰다.

 “강철이거든. 그냥 강철도 아니고 아주 특수한 강철이라고, 지상에서 단단한 모든 걸 녹여 만든 거라고 네 주인이 그랬어.”

 “난 주인이 없어.”

 “한 달 전에 생겼어.”

 알렉스는 그렇게 말해놓고 괜히 분한 마음이 들었다. 분하다니, 무엇을? 그는 빈털터리 고아였고 신문사의 다락방에서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인어를 가질 수 있는 자본 따위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도 눈앞의 인어를 보면 재물을 마주한 것처럼 탐이 났다. 재물일 수 없었으나 재물로 취급되고 있는 존재를. 가지고 싶었다.

 “인어는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야.”

 “오, 나도 알아.”

 알렉스는 기묘한 허밍 음을 내며 한쪽 눈을 찡그렸다.

 “인간은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인어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알렉스는 흘끔, 그의 눈치를 보며 노래를 중단했다.

 “네가 매일 부르잖아. 아니야?”

 “맞아.”

 “앞부분은 까먹었어, 미안.”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인어가 말했다.

 “그 뒤도 알아?”

 “알아.”

 알렉스는 어설프게 노래를 불렀다.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파괴할 수만 있어……. 인어는 아까보다 누그러진 기색으로 돔에서 천천히 떨어져 수영장 바닥에 얼굴을 뉘였다.

 “너 정말 노래 못 부른다.”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어서 그래.”

 알렉스가 항변했다.

 “그런 걸 가르쳐줄 사람이 없었어.”

 “배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 있어?”

 “조금?”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하지만 배우지 않아도 상관없어.”

 “왜?”

 “그런 일들이 많았으니까.”

 알렉스가 대답했다.

 “그리고 배운다고 해도 잘해내진 못 할 거야.”

 “너 인어한테 노래를 배우면 누구보다 노래를 잘 할 수 있게 된다는 거 알아?”

 인어가 천천히 물에서 반쯤 빠져나왔다. 지느러미를 걸친 채 알렉스 쪽으로 가까이 붙었다. 알렉스는 마른 침을 삼켰다.

 “들어본 적 없는데.”

 “나처럼 부를 수 있어.”

 인어가 속삭였다.

 “약속을 하자. 매일 밤마다 여기로 와줘. 나랑 대화를 하면 노래를 가르쳐줄게.”

 “무슨 대화?”

 “이 마을에 대한 이야기를 해줘.”

 인어는 눈을 깜빡였다. 아주 슬퍼보였다.

 “평생 여기에 있어야만 하는 운명이라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알고 싶어…….”

 “좋아.”

 알렉스는 약속했다.

 “매일 올게.”

 “그래, 너 잊지 마.”

 “알렉스야.”

 알렉스가 인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어는 한참동안 답이 없었다. 파도소리와 함께 희미한 바람소리가 들렸다. 짠 내가 났다. 마침내 인어가 지느러미를 움직이며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수영장에 온몸을 천천히 담그며 중얼거렸다.

 “토미.”

 인어의 눈동자가 형형히 빛났다.

 “내 이름은 토미야.”

 그렇게 알렉스는 인어의 이름을 획득하게 되었다.

 

 Alex

 그는 원래 고아가 아니었다. 모친이 알렉스를 출산하자마자 죽긴 했지만 그에겐 아버지가 있었다. 여덟 살 때까지 알렉스의 꿈은 그의 아버지를 따라 배를 타고 바다를 누비는 것이었다. 고전문학에 줄곧 등장한 거대한 참치를 잡는 꿈을 좋은 꿈이라고 여겼다. 그런 꿈을 꾼 날 아버지에게 달려가면 길몽이라며 동전을 주었다. 알렉스는 꿈을 판값으로 사탕을 사먹거나 과자를 집어먹었다. 그의 아버지는 알렉스가 열 살에 여느 때처럼 배를 타고 나갔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시체조차 건질 수 없었다. 뱃사람에게는 진부한 죽음이었다. 그것을 언제나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굉장히 슬펐다. 알렉스는 한동안 집에 틀어박혀 있다가, 은행원들의 방문에 비로소 문을 열었다. 신탁계좌를 만들 거란다. 그들은 설명했다. 네가 성인이 되면 작은 돈이긴 하지만 네 아버지 재산을 모두 돌려줄 거야. 알렉스는 곧 기운을 차렸다. 그가 집안에 틀어박힌 채 맞서 싸워온 건 아버지의 부고로 인한 슬픔이 아닌 그 부재로 인한 두려움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생활의 유지와 자립에 대한 걱정이 신탁계좌라는 단어 아래에 잘 정돈되었다. 알렉스는 추모를 그만두고 밖으로 나와 어디에나 취직했다. 빵집에도 취직했고 꽃집에도 취직했고 창고에도 취직했고 교회에도 취직했다. 그가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그는 마을의 조그만 신문사에 취직해서 매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신문을 날랐다. 마을 가장 높은 곳-부호의 집에서부터 시작해 차례로 내려가면서 페달을 밟고 신문을 솜씨 좋게 집집마다 던져 넣는 일은 보람도 무엇도 없었지만 알렉스는 그 일을 좋아했다. 부호의 집 앞을 어슬렁거릴 수 있는 적당한 핑계거리가 생긴 까닭이었다. 아침이던 밤이던 간에 신문사 로고가 붙은 자전거 하나만 있으면 그럴싸한 이유를 댈 수 있었다.

 토미와의 첫 대면 이후, 알렉스는 약속대로 매일 돔 앞까지 왔다. 밤마다 걸어서 풀숲을 헤치고 왔다. 토미는 언제나 그 소리에 맞춰 지느러미를 움직여 넓고 깊은 수영장의 끝에서부터 끝으로 쏜살같이 헤엄쳐왔다. 첨벙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알렉스의 가슴이 부풀었다. 신비하고 존귀한 존재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물소리였다. 믿을 수 없는 일이 펼쳐지고 있는 것 같았다. 토미는 알렉스의 혓바닥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눈여겨보면서 발음과 음의 고도를 가르쳤다. 높은 음을 어떻게 뱉고 낮은 음을 어떻게 긁어내야 하는지 알려주었다.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그 뒤는 힘주지 마.”

 “……불태울 수만 있어.”

 “응, 그렇게.”

 토미는 눈을 깜빡이며 알렉스의 얼굴과 떨리는 입천장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입을 다물고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너 정말 아름답구나.”

 토미는 그것을 역겨운 말처럼 대했다.

 “매일 들어. 별로 좋아하는 말이 아니야.”

 “누구에게?”

 “날 산 남자에게.”

 토미는 수영장 끄트머리에 세워진 작은 의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앉아서 매일 그 소리를 해.”

 “그럼 다른 말을 할게.” 

 알렉스는 고민하다가 진중하게 속삭였다.

 “넌… 달 같아.”

 “어떤 달?”

 “보름 달.” 

 그러자 토미가 처음 만났을 때와 똑같이,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알렉스를 응시했다.

 “너 인어를 알아?”

 “음, 아니.”

 알렉스는 다소 멍청한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으로 대답했다.

 “네가 처음이야.”

 “모든 인어는 보름달을 좋아해.”

 “왜?”

 “인간이 될 수 있거든.” 

 알렉스는 놀랐다.

 “거짓말.”

 “딱 하루야. 딱 그날 밤이야.”

 “그럼…….”

 알렉스는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더듬거렸다.

 “그럼 왜 그 날엔 계속 인어였는데?”

 “여긴 바다가 아니잖아.”

 토미가 대답했다.

 “바다가 아닌 곳에 사는 인어가 어떻게 인어라고 할 수 있어?”

 토미의 눈은 절망과 슬픔으로 가득 차있었다.

 “나는 이제 인간도 인어도 아닌 존재가 된 거야.”

 알렉스는 토미의 고통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면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지만.”

 그는 다소 방어적으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매일 이곳에 올게.”

 “그건 약속한 거잖아.”

 토미의 지느러미가 물속에서 달빛을 받아 느릿하게 반짝였다.

 “내가 노래를 가르쳐줬으니 이제 마저 약속을 지킬 차례야.”

 “엄.”

 알렉스는 뜸을 들였다.

 “네가 어떤 이야기를 좋아할지 모르겠어. 그냥 마을 이야기면 돼?”

 “글쎄.”

 토미는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대꾸했다.

 “네가 알아서 해.”

 “음.”

 알렉스는 이야기를 고민해보았으나 잘 되지는 않았다. 처음에 그는 지리 이야기를 했다. 산을 등지고 바다에 맞서는 작은 고장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으나, 이 고장에서 가장 큰 집의 이야기가 나올 땐 토미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시시한 이야기라며 끝을 흐렸다.

 “음, 물론 너도 잘 알겠지만. 위넌트는 제일 부자고.”

 “왜 그렇게 돈이 많은데?”

 “어… 운하산업 때문에?”

 알렉스는 토미와 마주보던 제 몸을 한쪽으로 비켜 세우고 흉물스럽게 층층이 늘어진 구덩이들을 보여주었다. 구덩이의 나열은 해변의 작은 집 마당에 다다라서야 비로소 끝났다. 밤이라 잘 보일지 의문이었다. 구덩이는 어둠과 비슷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서 밤 속에서 포착하기 쉬운 것이 아니었으니. 그러나 토미는 철창을 붙잡고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수영장 아래로 펼쳐진 그 풍경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를 포착하려 애쓰는 눈동자가 어둠속에서 공간을 꿰뚫었다.

 “사람들은 위넌트가 돈을 꿍쳤다고 하더라.”

 알렉스가 구멍 뚫린 풍경 곳곳을 훑어보며 바람에 눈을 찡그렸다.

 “저걸 하면서 엄청 돈을 벌어서 원래 부호였지만 이제는 엄청난 부호가 되었대.”

 “너희 집은 어딘데?”

 토미가 속삭였다.

 “너희 집 앞에도 저런 게 있어?”

 “음, 아니.”

 알렉스는 솔직히 대답했다.

 “난 이제 집이 없어.”

 “왜?”

 “부모가 없거든. 그리고 아버지가 남긴 돈은 전부 은행 신탁계좌에 있지. 그것도 몇 푼 되는 건 아니지만. 어머니는 날 낳다가 죽었는데, 아버지도 대충 내가… 아마 아홉 살쯤이었을 거야. 아마도. 사실 잘 기억 안 나. 여하튼 배를 타고 생선을 잡는 사람이었는데, 뻔하지만 배를 타다가 죽었어. 누군가 인어가 잡아먹었을 거라고 하더라.”

 알렉스는 마지막 말을 뱉어놓고 후회했다. 그러나 토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것이 알렉스를 두렵게 했다.

 “토미.” 

 “말해.”

 “사람을 먹어본 적 있어?”

 그러자 토미가 매섭게 알렉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속에서 형형하게 빛나는 눈동자가 고요하게 알렉스를 응시했다. 맹수의 그것처럼…… 알렉스는 엉거주춤 자세를 흐트러뜨리며 뒤로 물러났다.

 “미안.”

 “알면 됐어.”

 토미는 다시 물로 되돌아갔다. 지느러미를 박차고 수영장의 끝에서부터 끝까지 빠르게 왕복하고 돌아왔다. 알렉스는 넋이 나간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정말이지 그가 헤엄을 칠 때면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토미의 말이 맞았다. 그는 이곳에서 나가야만 했다. 이런 조그만 곳에 갇혀있으면 안 됐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그가 정말 이곳을 나가게 된다면 알렉스는… 그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남겨지는 걸까? 인어가 없는 이 고장에 그가 남아있을 이유가 대체 뭐가 있을까?

 “알렉스.”

 “응?”

 토미는 물속에서 고개를 들고 천천히 눈을 떴다. 시선은 알렉스를 향해있었지만 눈동자는 텅 비어있었다.

 “나를 꺼내줘.”

 알렉스가 말을 흐렸다.

 “내가 할 수 없는 거 알잖아…….”

 토미는 눈을 감았다.

 “그래, 알아.”

 그는 중얼거렸다.

 “잘 알고 있어.”

 토미는 잠수했고 오랫동안 솟아오르지 않았다. 알렉스는 쭈그려 앉은 채 그를 기다렸다. 그러나 토미는 올라오지 않았다. 기포도 없고 숨이 담긴 물방울도 없었다. 물속에서 호흡할 수 있는 존재는 단순히 머리를 집어넣었을 뿐인데도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 있었다. 한참을 외롭게 기다리던 알렉스는 결국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리막길로 되돌아가기 위해 풀숲으로 들어섰을 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등 뒤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첨벙, 첨벙, 거리면서 수영장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 좁아터진 수조를…… 토미는 평생을 그곳에서 살아야겠지.

 그렇다면 난 토미를 평생 볼 수 있는 걸까.

 해서는 안 될 생각을, 죄를, 저질러버린 것 같은 기분으로, 알렉스는 뒤돌아보지 못 하고 황급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사냥꾼의 노래

 운하산업이 중간으로 접어들었을 무렵, 알렉스는 신문을 던지다 말고 그를 만났다. 수조 앞을 지키던, 토미를 물위로 끌어올린 그 남자, 이 고장의 명성 높은 사냥꾼. 그는 대문 앞에서 굴러다니는 신문을 집어 들곤 자전거 안장에 엉덩이를 걸친 알렉스를 무미건조하게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적잖이 놀랐다. 그의 집은 대부호에게 인어를 팔아넘긴 사람치곤 지나치게 볼품없고 초라했다. 돈을 다 어디다 쓴 건지 알 도리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알렉스가 먼저 인사했다. 남자는 멍하니 바다 쪽을 응시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그는 인사하지 않았다.

 “전부터 생각했는데, 어, 목걸이가 멋지네요.”

 알렉스는 남자의 목에 걸린 그것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느릿하게 결을 더듬거리며 목걸이를 문질렀다.

 “조개인가요?”

 “아니.”

 남자가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개는 아니다.”

 “오.”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알렉스는 잠시 고민했으나 달리 떠오르는 말이 없어 바다를 바라보았다. 잠시 뒤, 알렉스가 다시 말을 꺼냈다.

 “음, 인어를 잡으셨잖아요.”

 “그래.”

 “작살로 잡은 건가요?”

 “아니.”

 “그물로 잡은 건가요?”

 “그것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는 그랬지.”

 “그럼 어떻게 가까이 다가오게 했는데요?”

 남자는 대답했다.

 “노래를 불렀다.”

 “오.”

 예상치 못 한 대답에 알렉스가 우물쭈물했다.

 “그렇군요.”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도 인어를 사냥하러 나가실 건가요?”

 그러자 남자는 굉장히 공허하고 끝없는 눈으로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는 그 눈 너머에 존재하는 어떤 것들, 부서지는 파도와 어두컴컴한 바다, 그 바다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신비로운 생물들의 꿈틀거림을 보았다. 알렉스는 시선을 피했다.

 “아니. 이젠 포기했다.”

 남자가 무겁게 대꾸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인어를 잡는 노래가 무엇인지 가르쳐주마.”

 알렉스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응시했다. 그러나 곧장 대답하지는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남자는 신문을 옆구리에 꼈다.

 “잘 있어라.”

 그런 후 남자는 문을 열고 집안으로 사라졌다. 작게 음을 흥얼거리고 있었다. 쾅, 문이 닫히자 멜로디는 희미해졌다. 알렉스는 하얗게 질린 채로 내리막길을 쏜살같이 내려왔다. 남자의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귓바퀴를 자꾸만 맴돌고 있었다. 알렉스를 겁에 질리게 하고 있었다.

 

 꿈

 내가 살던 곳은 따뜻하고 고요해. 바닷물이 바닷물 속에 고여 있는 거야. 요람처럼.

 잘 상상이 안 돼.

 눈을 감아 봐. 뭐가 보여?

 그냥 깜깜하기만 한데.

 거기가 내가 있던 곳이야.

 어딘데?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왜?

 ‘ .’

 마지막 말은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다.

 

 이야기, 이야기들

 어릴 땐 참치 잡는 꿈을 꿨었어. 아주 큰 참치. 어, 그러니까 지금 내가 너한테 동족상잔을 고백하고 있는 건가? 오, 아니구나. 참치 좋아한다고? 그래… 토미 너도 참치를 먹는 구나. 여하튼 아주 큰 참치였어. 나는 그걸 작살로 잡아서 배에 힘겹게 끌고 와… 집에 도착하는 거야. 아버지가 식탁에 앉아있다 말고 나를 반기지. 그리고 나와 함께 그 무겁고 거대한 참치를 헹가래 하는 거야. 왜 하필 내가 아닌 참치를 헹가래 하는 걸까 고민해본 적도 있어. 하지만 꿈속의 아버지는 나보다는 생선이 좋았던 모양이야. 어쩌면 실제로 그랬는지도 모르지. 생선을 잡으려고 바다에 나갔다가 나를 두고 죽었으니까. 소중한 게 있으면 악착같이 살아 돌아오잖아. 인간은 그렇거든. 소중한 걸 지키기 위해서… 사실, 소중한 걸 뺏길까 봐 그런 걸 거야. 죽으면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잖아. 내가 주인이었는데 내가 사라지니까……. 아버지는 내 주인이었던 셈이지. 그러니까 나도 언젠가는 너처럼 누군가에 의해 가둬지고 키워지고 영영 나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던 거야. 하지만 아버지는 나보다 생선이 더 소중해서 죽고 말았어.

 토미가 물었다. 위넌트도 죽게 될까? 뭐, 그도 인간이니까. 언젠간 죽어. 알렉스가 대답했다.

 내 이야기는 그 뒤론 정말 재미없어. 하루 종일, 거의 평생, 일만 했거든. 돈을 벌지 않으면 사람은 죽고 마니까. 여기서 제일 중요한 건 돈이야. 지금도 난 돈을 벌고 매일 밤 너를 만나러 오는 거야. 너도 알겠지만. 난 신문을 배달해. 신문이 뭐냐면… 어, 다른 사람들이 간밤에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죽었나 모두에게 알려주는 종이야. 생선 값이 오늘은 얼마고, 내일은 얼마가 될 것 같고, 그런 것들도 알려줘. 운하 산업에 대한 이야기도 해. 너 전에 물어봤었지? 이제 구덩이를 다 파서 내일이면 물을 채워 넣는대. 신문에서 그러는데 대충 일주일이면 될 거라고 하더라.

 한 곳에 고인 물은 썩어. 토미가 말했다. 알렉스가 동의했다. 그래, 내 생각에도 그래.

 이번엔 토미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우리에겐 섬이 있어.

 우리?

 그래, 우리.

 네 친구들?

 그래, 많진 않아.

 너 말고 또 다른 인어가 있는 거구나.

 그래. 난 혼자는 아니야.

 외롭지 않겠네.

 그렇지 않아.

 토미가 말했다.

 난 외로워.

 알렉스는 그 말에 외로움을 느꼈다.

 그렇구나.

 그래… 난 섬으로 돌아가고 싶어.

 거기가 어디 있는데?

 설명할 수 없어. 하지만 여기서 아주 멀어.

 거기서 뭘 하는데?

 노래를 부르지. 그리고 보름밤이 되기를 기다려.

 인간이 되려고?

 그래, 두 다리가 생기길 기다려.

 왜?

 새끼를 치려고.

 이번에 알렉스는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어… 그렇구나.

 토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넌 농담과 진담을 구분하지 못 하는 구나.

 거짓말이었어?

 아니.

 토미는 출렁거리며 물장구를 치다가 유유히 되돌아왔다.

 이제 이야기는 그만하자.

 “왜?”

 “노래 가르쳐줄게.”

 인어는 정말 제멋대로구나. 알렉스는 혼란스러운 기분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인간은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계속 불러.”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파괴할 수만 있어.”

 알렉스는 노래를 멈췄다.

 “위넌트가 너를 강간하기도 해?”

 토미는 대답 대신 물속에 얼굴을 반쯤 집어넣은 채 투명하게 알렉스를 올려다보았다. 눈동자에 물기가 어려 있었지만 슬픔에 젖어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토미, 대답해줘.”

 알렉스는 알 수 없는 질투를 느꼈다. 그 질투는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끔찍하고 괴로운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토미.”

 “빨아줘.”

 토미가 물속에서 속삭였다.

 “안 그럼 그가 나를 아프게 해.”

 “위넌트가 너를 불태우기도 해?”

 토미는 대답하지 않고 물속에서 손을 꺼냈다. 그리고 그것을 알렉스의 앞으로 가져다놓았다. 알렉스가 돔에 바짝 붙어 섬세하고 단단해 보이는, 조각상 같은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가락들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잔뜩 부풀어 있었다. 누군가의 손자국의 모양 그대로 손목을 감싸고 있었다.

 “인간들은 뜨겁거든.” 

 토미가 말했다.

 “내겐 불덩이 같아.”

 “나는 너를 만지지 않을게.”

 알렉스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제발 나를 싫어하지 마.”

 “너도 인간이야.”

 토미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리고 넌 날 만지게 될 거야.”

 “왜?”

 “넌 나를 보면 위넌트와 똑같은 눈을 해.”

 “그렇지 않아.”

 알렉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을 거야.”

 “그렇지 못 한 것뿐이지.”

 토미는 천천히 물러났다.

 “하지만 괜찮아… 난 이제 그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잊어버렸어.”

 달빛 속에서 토미의 지느러미가 형형하게 빛났다. 아름답게 부서지고 있었다.

 “알렉스, 넌 인간 중에서도 가여운 편에 속한다고 생각해.”

 토미가 말했다.

 “나는, 너의 가엾음을 인정해…….”

 알렉스는 그 말에 큰 상처를, 동시에 큰 위안을 받았다. 저절로 손이 가슴 언저리를 쓰다듬게 되었다. 언젠가 토미가 분명하게 박아 넣었고, 점유했고, 뽑아냈음에도 분명한 상흔이 남은 영혼의 구멍을.

 토미는 수면 위로 카펫 같은 주름을 잔잔하게 띄우며 천천히 어둠 속으로 멀어졌다.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운하 사업이 마무리에 접어들고 있었다. 인부들은 몇 갤런의 물을 깊고 깊은 구덩이로 쏟아 넣었다. 흉물스러웠던 앞마당마다 아름다운 연못이 생겼다. 꽃처럼 피어나고 있었다. 알렉스는 페달을 밟고 마을 곳곳을 돌아다녔다. 갈매기들이 낮게 날고 있었다. 폭풍우가 올 거야. 편집장은 재난 경보를 실으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오르막길을 오르자, 굉장한 광경이 펼쳐졌다. 알렉스는 자전거에서 내린 후 뜀박질로 더 높게 올라갔다. 부호의 궁전까지, 위넌트의 감옥까지, 가장 높은 곳으로……. 그리고 내려다보았다. 테라스처럼 솟은 인어의 수조 아래로, 계단처럼 층층이 깎아지른 무수한 연못들의 향연을 보았다. 바다를 향해 이어지는 그 둥근 접시들, 한밤의 달을 담을 물웅덩이를 바라보았다……. 그 때,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렸다. 알렉스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것은 토미의 목소리였다.

 알렉스는 허겁지겁 정원을 헤치고 나아갔다가, 이내 천천히 멈추어 섰다. 낯선 자의 목소리가 함께 뒤엉켜 있었던 까닭이었다. 알렉스는 숨을 죽이고 엎드렸다. 천천히 기어 풀을 치워냈다. 돔 근처에 다다르자 목소리들은 뚜렷해졌다.

 “이리 와.”

 알렉스는 토미의 팔을 마치 물건 다루듯 쥐어 올린 위넌트를 보았다. 그는 꼭 거대한 생선을 건져 올리는 것과 같은 폼이었다. 토미는 위넌트에게 쥔 팔목을 잡아 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에서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위넌트가 토미를 물속에서 잡아끌자, 토미의 지느러미가 마구 꿈틀거리며 수면을 사방으로 후려쳤다. 물방울이 강하게 튀겨서 엎드린 알렉스의 뺨에도 몇 방울 튀겼다.

 “이리 오라니까.”

 위넌트가 으르렁거렸다. 토미는 길게 신음소리를 냈다. 그런데도 단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단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증오한거나 죽여버린다거나, 그런 저주의 말도 없었다. 완강히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젓고 있었다. 위넌트는 토미의 얼굴을 붙잡아 제 가랑이 사이로 처박았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토미가 고개를 저었다. 위넌트는 참을성 있게 그를 짓눌렀다. 양손을 촉수처럼 뻗어 토미의 뒷덜미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토미가 흐느끼면서 고개를 박았다. 고통으로 빳빳하게 굳은 지느러미가 한 번 부르르 경련하다 말고 물속에 축 늘어졌다. 토미가 억지로 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으욱… 아헥…… 어흑……. 헐떡이는 소리에 구역질과 질척한 점성이 뒤엉켜 엉망이었다. 알렉스는 입을 틀어막았다. 구토감이 올라와 견딜 수 없었다. 토미는 위넌트의 성기를 빨다 말고 견딜 수 없다는 듯 힘껏 고개를 젖혔다. 그러자 위넌트가 토미의 머리통을 붙잡고 쳐올리기 시작했다. 토미는, 결코 허우적거릴 수 없는 존재였음에도, 분명하게 허우적거렸다. 고통으로 울고 있었다. 잠시 후 위넌트가 사정했다. 그가 놓아주자마자 토미는 튕겨져 나가듯 그로부터 떨어져 나왔다. 토미는 뚝 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벌건 눈과 코로부터 끊임없이 액체가 줄줄 샜다. 위넌트는 바지를 추슬렀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저택 안으로 사라졌다. 알렉스는 헛구역질을 하며 풀숲에 고개를 박았다. 토미가 흐느끼는 소리가 돔 안에서 잔잔히 들려왔다. 알렉스는 젖은 입술로 고개를 들었다. 돔 앞으로 기어나갔다.

 “토미.”

 “어흑…….”

 “토미.”

 토미는 고개를 들고 증오스러운 눈으로 알렉스를 쏘아보았다. 벌건 눈에 주렁주렁 진주가 매달려 있었다. 진주는 알알이 수면으로 쏟아졌다. 반짝반짝하고 은은했다, 끔찍할 만큼… 정액을 닮아 있었다. 토미가 물속으로 허연 침을 뱉었다.

 “왜 왔어?”

 “내가 너를.”

 알렉스가 헐떡거리며 돔의 철창을 세게 쥐었다.

 “내가 너를 구해줄게.”

 알렉스가 마구 약속했다.

 “정말로 너를 이곳에서 구해줄게. 정말 미안해. 정말 미안해, 토미. 정말 미안해, 토미.”

 “어떻게?”

 “잘 모르겠어…….”

 알렉스는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잘 모르겠어, 토미… 그래도 너를 구해줄게. 약속해. 약속해, 토미.”

 토미는 고통스러운 신음소리를 내며 눈을 감았다. 몇 번 자맥질을 하려다 포기했는지 그대로 물 안으로 고꾸라져 가라앉았다. 낮이었으므로 알렉스는 물속에 쓰러져있는 토미를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수조… 바닥은 온통 허옇고 반짝반짝했다. 알렉스는 밤이었으므로 결코 알지 못 했다. 결코 보지도 못 했다. 그곳은 온통 진주투성이였다.

 “인간은 결코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알렉스가 속삭였다.

 “인간은 결코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물속에서 희미한 물방울이 올라왔다. 알렉스는 눈물을 닦아냈다. 토미는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천천히 바닥을 짚고 일어나 천천히 알렉스 쪽으로 헤엄쳐왔다.

 “이제 형편없지는 않구나.”

 토미가 팔을 겹치고 얼굴을 얹었다. 그리고 알렉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진주가 가득 담겨있었다.

 “가져.”

 토미가 말했다.

 “난 필요없어.”

 “나도 필요없어.”

 알렉스는 모욕을 당한 기분을 느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걸 원한 게 아니야.”

 “알아.”

 토미가 속삭였다.

 “그렇지만 위넌트에게 주긴 죽기보다 싫어. 무슨 뜻인지 알지…… 알고 있지, 알렉스.” 

 토미가 애원했다.

 “빨리 받아.”

 알렉스는 딱딱하게 굳은 채 토미의 손에 쌓인 진주알갱이들을 바라보았다.

 “부탁이야?”

 “그래.”

 “너를 꺼내달라는 부탁은 안 해?”

 “말했잖아.”

 토미가 중얼거렸다.

 “이제 그 섬이 어떻게 생겼는지조차 희미하다고.”

 알렉스는 눈가를 힘껏 닦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양손을 모아 토미의 손 아래로 오므렸다.

 “네가 쏟아줘.”

 알렉스가 말했다.

 “난 널 만지지 않을 거야.”

 그래서 토미는 그렇게 했다.

 

 전설

 인어는 힘이 세다
 인어의 눈물은 무엇이든 치유한다
 인어의 눈물은 굳으면 진주가 된다
 인어의 진주는 세상 그 어떤 진주보다 값비싸다
 인어의 진주는 녹이면 강한 독이 된다
 인어의 노래는 누군가를 홀려 죽일 만큼 아름답다
 인어에게 노래를 배우면 인어처럼 노래하게 된다
 인어는 자신이 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인어의 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하거나 평생 저주 받는다
 인어는……,
 인어는…….
 알렉스는 진주의 전설을 안다.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그날 밤, 알렉스가 거대한 유리병을 짊어지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만월이었다. 등 뒤로 새하얗고 서늘한 보름달이 떠있었다. 연못마다 조금씩 나누어 담겨져 있었다. 알렉스는 위넌트의 저택 앞에 자전거를 내팽겨 치고 유리병을 짊어진 채 풀숲을 헤치고 달려 나갔다.

 토미는 알렉스가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오는 것을 보았다. 알렉스의 눈을 보았다. 그는 정말로, 진심으로…….

 “토미.”

 알렉스가 속삭였다.

 “뒤로 물러나.”

 달빛 아래서 유리병에 담긴 액체가 진득하게 출렁거렸다. 그것은 꼭 달빛과 꼭 닮아있었다. 토미의 지느러미를 닮아있었다. 토미가 물었다.

 “그게 뭔데?”

 알렉스가 대답했다.

 “네 독.”

 토미는 알렉스의 손이 형용할 수 없는 모양새로 짓물러있는 것을 보았다.

 “그걸 짊어지고 왔어?”

 “그래. 이제 비켜줘.”

 알렉스가 이를 갈았다.

 “이건 지금 아주 뜨거워.”

 토미가 뒤로 참방거리며 물러나자, 알렉스는 유리병을 열고 바닥을 고쳐 잡았다. 그리곤 망설임 없이 나머지 한손으로 주둥이를 붙잡았다. 독소에 쏘인 것처럼 손가락이 순식간에 부식하기 시작했다. 살타는 냄새가 났다. 토미가 눈을 찡그렸다. 알렉스는 신음하면서 있는 힘껏 진주의 액을 철장 안으로 내던졌다. 돔이 크게 흔들렸다. 길게 늘어진 토미의 지느러미가 불에 데인 것처럼 화들짝 놀라 마구 파닥거렸다. 액이 튀긴 자리가 조금 녹아있었다. 토미는 녹아서 납작해진 제 비늘을 손가락으로 훑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숨을 삼켰다.

 돔의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하얗고 눅진한 액이 달빛에 반짝이며 천천히 돔과 함께 녹아내리고 있었다. 구멍 너머로 하얀 달이 보였다. 토미는 찰랑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알렉스는 헐떡거리며 유리병을 집어던졌다. 손가락 마디마다 희미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피와 살덩이가 엉겨 붙어 온통 엉망이었다.

 “토미, 넌 자유야.”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젠장… 너는 자유라고.”

 돔을 녹이던 진주의 액이 흘러내리다말고 딱딱하게 굳었다. 토미는 알렉스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는 힘껏 손을 펼쳤다.

 “알렉스.”

 “잠시만.”

 알렉스는 헐떡거리며 대답했다.

 “내가… 자전거 뒤에 담요를 실어놨어. 가지고 올게… 그럼 넌 화상을 입을 필요도 없이 바다로… 내가 바다로 데려다줄 수 있을 거야.”

 “알렉스.”

 토미가 조용히 대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 괜찮아. 이리와.”

 알렉스는 천천히 돔 앞에 바싹 붙었다. 토미가 펼친 하얗고 섬세한 손을 내려다보았다. 토미가 알렉스의 손을 시선으로 가리켰다. 알렉스는 머뭇거리며 상처로 엉망진창인 제 손을 엉거주춤 펼쳐 그 앞으로 가져다댔다. 토미는 다정하게 그곳에 뺨을 가져다댔다. 돔의 철장을 사이에 두고 아주 조금의 열기가, 그리고 알렉스에게는 조금의 축축함이 전달되었다.

 “고마워.”

 토미가 속삭였다.

 “소원을 들어줘서 고마워.”

 “별 거 아니야.”

 알렉스가 몹시 지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는 울고 있었다.

 “이제 내 소원을 들어줄래?”

 “뭔데?”

 “이게 마지막이 아니었으면 좋겠어.”

 알렉스는 애원하듯 신음했다.

 “그럴 수 없다는 거 알아. 하지만 너를 가지고 싶어.”

 토미는 희미하게 웃었다. 알렉스는 이번에는 토미의 웃음소리를 들은 것 같다고 느꼈다. 토미는 대답하지 않고 천천히 물러났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뒤로… 뒤로 물러났다. 알렉스가 벌떡 일어났다.

 토미는, 있는 힘껏 지느러미를 박차고 솟구쳐 올랐다. 둥근 포물선을 그리며 녹아내린 돔의 구멍을 지나, 하늘 끝으로 날아올랐다. 달빛 위로 매끄러운 실루엣이 선명하게 반짝였다. 토미는 천천히 공중에 머물러 있다가, 곧 중력의 법칙에 따라 아래로 추락했다. 그 일련의 과정은 아주 천천히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토미가 저택 바로 아래에 펼쳐진 넓은 연못으로, 운하사업으로 지지부진하게 파헤치던 물웅덩이로 떨어지는 것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풍덩… 소리와 함께 거센 파동이 일었다. 잠시 후, 연못 속에서 토미가 다시 솟구쳤다. 그는 다시 하늘 위로 날아올랐다가… 아름다운 호선을 그리며 그 아래의 연못을 향해 떨어졌다. 이제 연못은 토미를 위한 바다의 계단이었다.

 알렉스는 훌쩍임을 멈추고 길가로 달려갔다. 아무렇게나 엎어진 자전거를 타고 페달에 발을 올렸다. 그리고 토미를 따라 아래로, 아래로 쏜살같이 내달렸다. 풍덩… 소리와 함께 토미가 위로 솟구치면, 알렉스가 고개를 젖히고 달빛 속에서 빛나는 그의 눈부신 인어를 바라보았다. 풍덩… 쏴아아……. 풍덩… 쏴아아……. 알렉스의 옆으로 나무와 집이 마구 뭉개졌다. 토미는 규칙적으로, 서두르지 않고 바다를 향해 솟구쳐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토미가 마지막 연못에 다다랐을 때, 알렉스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가속 때문에 쉽사리 밟히지 않아 마구 쇳소리가 났다. 알렉스가 쉰 목소리로 찢어져라 외쳤다.

 “토미!”

 그 순간, 토미가 그 어떤 때보다 높게, 아주 높고 아름답게 솟구쳤다. 그리고 공중에서 한 바퀴를 매끄럽게 돈 채로, 사방에 눈부신 물방울 조각을 뿌리며, 그렇게 멈추어 있다가…… 바다로, 그의 고향으로…… 떨어졌다. 브레이크가 걸렸다. 자전거는 급하게 멈추어 섰다. 알렉스는 자전거를 내팽겨 치고 모래사장으로 뛰쳐나갔다. 파도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돌진했다가 부서졌다. 알렉스는 천천히 걸음을 멈추었다. 무시무시한 두려움이 닥쳤다. 그는 먼 바다로부터 몰려오는 거대한 먹구름의 운집을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달을 가리기 위해 무서운 속도로 밀려오고 있었다. 우르릉, 소리를 내며 울부짖고 있었다. 번개가 번쩍이며 다가오고 있었다. 그 배경을 등진 채, 파도 속에서 누군가 천천히 허리를 펼치고 일어났다. 알렉스는 못 박힌 듯 자리에 서서 달빛 아래 빛나는 그 실루엣을 응시했다. 그것은 두 다리로 단단히 모래를 버티고 선 채, 물을 떨어뜨리며 다가왔다. 보름달이 환하게 작열하고 있었다. 토미는 그렇게 인간이 된 채, 알렉스의 앞으로, 느긋하게, 걸어왔다. 알렉스는 눈을 감았다.

 둘은 전라가 된 채로 모래 위를 뒹굴었다. 시시각각 닥쳐오는 재난과 맞서 싸웠다. 토미는 알렉스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다. 다정하게 비비며 입을 맞췄다. 알렉스는 토미를 허겁지겁 탐하면서 자꾸만 품으로 끌어당겼다. 토미는 놀랄 만큼 차가웠고 무서울 만큼 딱딱했다. 인간이지만 인간이 아니었다. 알렉스가 핥은 자리마다 눅진한 화상자국이 남았다. 아프지 않아? 아파. 토미는 눈을 감았다. 너는 불덩이 같구나. 뜨거운 뱀처럼 나를 파고드는구나. 섬세한 속눈썹마다 촘촘히 물기와 작은 진주알갱이가 박혀 있었다. 알렉스가 울었다. 너를 만져서 미안해. 토미는 아물어가는 알렉스의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괜찮아. 토미의 가슴언저리에 강렬한 화상자국이 남아있었다. 평생 남길 생각으로 너를 각오했어.

 토미는 쾌락에 젖은 울음소리를 냈다. 차갑고 단단한 다리가 알렉스의 허리를 감았다. 번개가 번쩍였다. 알렉스는 절정을 느꼈다. 천둥이 콰르르 무너졌다.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토미가 알렉스에게 짓눌린 채 헐떡였다. 파도가 가까워져서 이제 물은 그들의 다리언저리까지 차있었다. 알렉스가 속삭였다.

 “넌 어디로 가?”

 “내가 태어난 곳.”

 “거기가 어딘데?”

 토미는 알렉스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가까이 끌어 당겼다.

 “눈을 감아 봐. 뭐가 보여?”

 “그냥 깜깜하기만 한데.”

 “거기가 내가 있던 곳이야.”

 알렉스는 데자뷰를 느꼈다.

 “어딘데?”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알렉스는 왜, 라고 묻지 않았다.

 그래서 토미가 말한다.

 “너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파도가 그들을 덮쳤다. 흰 거품이 갈퀴처럼 토미의 다리를 적셨다. 토미는 허벅지를 더듬어 납작하게 녹은, 작은 조각을 알렉스에게 건네주었다. 비가 쏟아져서 사방은 이제 온통 물로 출렁이고 있었다.

 “선물이야.”

 “이게 뭔데?”

 “네가 영원히 상처 낸 내 비늘.”

 알렉스는 뒷말이 듣고 싶지 않아 토미에게 입을 맞췄다. 혀로 토미의 곳곳을 헤집고 자꾸만 습윤하게 만들었다. 토미는 밀치지 않고 무력하게 그 사랑을 받아주었다. 둘은 한 번 더 뒹굴었다. 폭풍우가 아주 가까이 있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었다. 알렉스는 녹초가 될 때까지 토미를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엎어졌다. 토미는 축축한 뺨을 알렉스의 뺨에 마주 대며 속삭였다.

 “안녕, 알렉스.”

 “…토미, 가지마.”

 “보름달이 뜨면 너를 보러 올게.”

 “약속해줘.”

 토미는 대답 대신 알렉스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큰 파도가 둘을 덮쳤다. 토미는 물거품처럼 그곳에 휩쓸렸다. 알렉스가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토미는 온데간데없었다.

 “토미!”

 비바람이 우우, 불었다. 하늘엔 더 이상 보름달도, 빛도 없었다.

 “토미!”

 천둥이 쳤다. 알렉스는 흐느끼며 얼굴을 감싸 쥐었다. 그러다 차가운 촉감을 느끼며 손을 떼어냈다. 번개가 번쩍였다. 알렉스는 그것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조개처럼 보였으나 좀 더 편평하고 납작했다. 빛이 바랐지만 아름다웠다. 폭풍우 속에서도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파도의 결과 결 사이로 희미한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인간은 인어를 강간할 수 없어
 인간은 인어를 가질 수도 없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불태울 수만 있어
 인간은 오로지 인어를 파괴할 수만 있어……

 

 알렉스는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그 노랫소리는 언젠가 사냥꾼이 흥얼거렸던 그것과 꼭 닮아있었다. 실망스럽구나, 라고 언젠가 그가 그랬다. 실망스럽구나. 왜요? 내가 찾던 게 아니었어.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

 눈을 감아 봐. 뭐가 보여?
 그냥 깜깜하기만 한데.
 거기가 내가 있던 곳이야.
 어딘데?
 깊고 깊은 바다 속. 난 거기서 헤엄쳐 나왔어.
 너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섹스를 하려고.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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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 «조류»
2차/old 2019. 10. 23. 01:51

 모든 것은 언젠가 되돌아오는 법

 

 1.

 덩케르크 해안에는 조류가 있다. 어느 바다에나 있는 것이므로 명물이라고는 할 수가 없다. 특별할 것 없이, 세상의 바다는 가득 찼다가 가득 빠져나가는 것이다. 마치 철새처럼.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할 ‘그들의 조국’이 있는 건 새도 바다도 사람도 마찬가지다.

 필립이 해변에 도착했을 때, 세상은 간조(干潮)였고 모래사장은 군데군데 움푹 패어있었다. 백사장 너머의 바다는 눈부시게 청명하고 아름다웠다. 줄지어 선 망령 같은 영국군들이 없었다면 덩케르크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관광지로 보였을 것이 분명했다. 등 뒤에서 총성이 마구 울려 퍼졌다. 필립은 허겁지겁 앞으로 달려 나가다 말고 멈추어 섰다. 그는 막 방어선 내부로 들어온 참이었다. 가벼운 이명이 찾아왔다가 맥없이 사라졌다. 심장소리만 남았다.

 그의 부대는 둘로 나뉘어졌다. 다섯 명이 방어선에 남았고, 나머지가 퇴각 명령을 받았다. 후퇴한 빈자리에 영국군들이 엎드려 총탄을 장전했다. 개중 한 명이 영어로 무어라 소리를 쳤지만 필립을 포함한 부대원들은 알아듣지 못 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총격전이 시작되었으므로 모두가 몸을 낮췄다. 영국군들이 손사래를 쳤다. 쌓아올린 포대 사이로 총탄이 박히면서 모래가 조금씩 튀었다. 소음 속에서 out, get, shit 따위가 들렸다. 누군가 어깨를 잡아끌었다. “기예, 뒤로 빠지자. 바다로 가자. 퇴각하라잖아.”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고 해변으로 달렸다. 마을의 끝까지. 그들이 지켜낸 방어선의 가장 안쪽까지. 누군가 쓰러졌지만 알지 못 한다. 허겁지겁 달리다 말고 멈추어 섰을 때, 푸른 수평선이 펼쳐졌다. 남겨진 전우도 달려 나온 전우도 각각 다섯이었는데 필립을 포함한 세 명만이 헐떡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시선을 교환하곤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바닷바람이 불었다.

 그들은 잔교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역시도 영국군이 시간마다 선박을 보낸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이미 해안선에는 몇 척의 함선이 떠있었다. 저 함선에 타면 군인이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는 땅에 무사히 이송된다. 퇴각명령을 받은 것은 프랑스군이나 영국군이나 마찬가지인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남겨지고 그들은 떠난다. 독일 군에는 진격할 수 있는 탱크와 폭격할 수 있는 비행기가 있다. 최전방에서 싸워온 우리는 덩케르크 해안선으로 시시각각 좁혀드는 방어선을 목격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남겨진 사람은 죽는다. 우리는 남겨졌다. 우리는 죽는다. 자명하다. 뒤통수가 서늘했다. 마르첼로가 필립을 잡아끌었다. “우리는 저 배를 타야해.” 테오가 묵묵히 동의하며 뒤를 따랐다.

 그들은 해안선을 가로질러 잔교로 향했다. 걷는 동안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거뭇거뭇한 점들과, 어렴풋이 보이는 영국령과, 희끄무레한 순양함들이 떠있었다. 하지만 새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머리 위로 찢어질 듯 한 굉음과 함께 슈투카 폭격기가 날아갔다.

 잔교 입구는 이미 퇴각한 프랑스군의 군집으로 꽉 차있었다. 마르첼로가 익숙하게 몸싸움을 벌이며 안으로 파고들었다. 덩그러니 남겨진 테오와 필립은 그가 앞으로 치고 나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군집 앞에 선 영국군은 시뻘개진 얼굴로 소리를 치고 있었다. only! 주변이 시끄러워 잘 들리지 않았다. 필립은 얼굴을 찡그린 채 소리에 집중하려고 애썼다. 영국군은 인파에 밀려날 때마다 빈번이 온몸을 던져서, 앞당겨진 군집을 도로 밀어놓았다. 목소리가 갈라지도록 외치고 있었다. 이번엔 또렷하게 들렸다. English Only!

 “그들은 우리를 보내주지 않을 거야.”

 “엿이나 먹으라지.”

 테오는 빈정거리면서도 초조하게 마을과 바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다 뒤지게 생겼다고, 알아? 기예, 이제 우린 다 죽은 목숨이야.”

 “배를 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

 “영국군만 된다잖아, 빌어먹을! 멀쩡한 건 이 잔교뿐이야. 여길 막는다고? 알아서 뒤지라고 등 떠미는 거랑 뭐가 달라?”

 “기다릴 거야?”

 “그럼 기다려야지. 별 다른 도리가 있겠냐? 마을로 돌아갈 순 없잖아. 미친 나치새끼들… 마르첼로 좀 봐. 주먹질이라도 할 기세인데?”

 잔교 위에서 작은 몸싸움이 벌어졌다. 다리 위에 서있던 영국군 두 명이 달려와 주먹질을 하는 마르첼로를 떼어놓고 내동댕이쳤다. 프랑스군들은 쓰러진 마르첼로를 잡아 벽 쪽에 앉혔다. 소란이 진정되자마자 영국군들이 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다리로 돌아갔다. 프랑스군들은 잠시 침묵하다말고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엎치락뒤치락 몸싸움이 재개되었다. 밀려났다가 되돌아오는 프랑스군들은 덩케르크 해안으로 쏟아지는 파도의 그것과 꼭 닮아 있었다. 주저앉은 마르첼로는 인파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대열을 정돈하기 어려워졌음에도 그를 막기 위하여 영국군은 필사적이었다. 소리를 치며 쏟아지는 인파를 막으려 애썼다. 단말마에 가까운 비명을 질렀다. ENGLISH, ONLY!

 “난 갈래.”

 “어딜?”

 “여기 있어봤자 달라지는 건 없어.”

 필립은 잔교를 내려왔다. 백사장을 지날 때, 바다에 줄지어 선 영국군들이 고개를 돌려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죽은 눈들이 필립의 뒤통수로 따라붙었다가 곧 떨어져나갔다. 테오는 따라오지 않았다. 마르첼로와 테오는 부대 안에서도 싸도 도는 사이였으므로 납득할 수 있었다. 필립이 혼자 남겨진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같은 부대원이라도 그와 그들은 동지보단 비즈니스 파트너에 가까웠다. 그의 동지들은 진작 최전방에서 죽었다.

 필립은 마을입구와 가까운 것도, 그렇다고 해안선과 가까운 것도 아닌 곳에 주저앉았다. 탱크의 포탄소리는 더는 들리지 않았다. 이따금 먼 곳에서 총성이 울려 퍼졌다. 바닷바람은 여전히 강했고, 해가 기울어지고 있었다. 바다가 가까워질 때가 다가오는 것이다. 필립은 그곳에 앉은 채 파도가 높아지고, 영국군들이 잔교 위 혹은 해변 가 안쪽으로 후퇴하고, 노을이 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수평선을 따라 떠있던 거뭇거뭇한 점들이 파도와 함께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것은 

 시체, 시체들, 무수한 시체들이었다. 필립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배를 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 바닷가에는 여전히 새가 없었다. 어쩌면 돌아가지 못 하고 전부 죽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그는 마음 한구석에서 끝까지 붙들고 있던 가냘픈 무언가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발치까지 떠내려 온 시체 한 구가 허벅지를 치고 지나갔다. 필립은 고개를 숙였다. 배를 탄다고 살 수 있는 건 아니야.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여기 있는 것보단 살 확률이 높아지겠지.

 English, Only! 마음속으로 한 발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그것은 필립의 영혼에 구멍을 냈다. 시체의 군번줄이 노을빛을 받아 눈앞에서 붉은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Gibson. 그것은 꼭 경고등처럼 보였다.

 

 2.

 그는 어둠 속에서 옷을 갈아입었고, 아침이 되었을 땐 Enligh가 되어 있었다. 이제 배를 탈 확률이 조금 더 높아지게 된 셈이었다. 필립은 자신의 군번줄을 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군복 깊숙한 주머니에 묶은 후 안으로 감추어놓았다. 그리고 원래 자리에 새 군번줄을 달았다. Gibson. 그것이 이제부터 그의 이름이었다.

 깁슨이 깁슨이 되고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깁슨이었던 누군가의 시체 위로 흙을 덮어주는 것이었다. 그것은 증거를 인멸하기 위한 행동만은 아니었고, 약간의 죄책감, 그리고 응당 그래야만 한다는 이상한 의식에 가까웠다. 전쟁은 폭격과 살육의 현장이었고 그는 생사를 넘나들며 최전선까지 밀려나온 생존자였다. 학살은 너무나 당연한 듯 자행되어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래서 그의 정신은 내내 제대로 붙박여있지 못 하고 종종 반쯤 허공을, 무의식의 경계를 부유하곤 했다. 그리고 바로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구체적으로 깁슨이란 존재에게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당시에는 제대로 실감하지 못 했다. 하지만 필립이 깁슨이 된 순간, 그가 디디고 섰던 땅은 그토록 염원하던 평화의 조국이 아닌 죄악의 심판지대가 되어버렸다는 점에서, 방황하던 그의 영혼이 무사히 몸으로 되돌아올 즘엔 필연적으로 그 죄책감과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참 나중의 일이었다. 시체를 파묻으며, 깁슨은 눈물 대신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죄의식의 영역은 오래 전에 두고 온 나머지 너무 희미하게 느껴졌다. 그가 고개 숙이는 법을 모르는 인간이었다면 그의 영혼이 지상에 두고 온 게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 했을 것이다.

 반쯤 파묻은 시체를 두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볼일을 보기 위해 바지를 내리던 어린 영국군을 발견했다. 눈이 마주친 소년은 헐거운 바지를 추슬러 올리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다가와 마주보고 쪼그렸다. 소년은 그가 묻어주다 만 시체의 발 위로 모래 더미를 얹어주기 시작했다. 깁슨은 손을 멈추고 소년을 바라보았다. 영어가 유창했더라면 무엇이든 물어봤을 지도 몰랐다. 소년에게 발견되었으므로 모든 일은 돌이킬 수 없게 된 참이었다. 그러니까 그 순간, 필립(Philippe)이었던 프랑스군은 깁슨(Gibson)이란 영국군으로서 영국군 소년에게 ‘발각되고……’ 만 것이다. 이제 이전의 정체성으로는 설령 원한다고 해도 돌아갈 수가 없었다. 소년이 나타난 순간부터 톱니바퀴는 반대방향으로 맞물리기 시작한 것이다. 부유하던 영혼이 육신을 향해 끌려오고 있었다. 죄악의 지대로, 단죄의 시간으로, 죄책감으로, 손쓸 도리도 없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소년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수통을 원하고 있었다.

 영국군이 전우에게 무언가를 원한다. 깁슨은 제공했을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깁슨도 그렇게 한다.

 그는 수통을 내밀었다.

 소년은 물을 마셨다. 깨끗하고 신선한 물을 뚝뚝 흘려가며 마셨다. 그리고 되돌려 주었다. 그들은 눈을 마주보며 웃지도 않는 낯으로 희미한 미소를 교환했다. 그들은 그 순간 전우가 되었다.

 그 날, 그 순간, 하늘로부터 시시각각 슈투카 폭격기가 가까워지던 전쟁의 한복판에서, 그는 ‘어쩐지 그래야 할 것 같았으므로’ 시체 묻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았고, 소년을 만났고, 잃어선 안 될 이름과 조국을 잃었고, 동시에 잃어선 안 될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지켜내는데 성공한다.

 그는 토미와 함께 찾아온 그것을 양심(Gibson)이라고 불렀다.

 

 3.

 필립은 세 개의 부대에 배치되었다. 첫 번째 부대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그곳엔 필립의 오랜 전우들이 있었고, 전쟁 이전의 시대를 함께 보낸 이들이었다. 당시엔 독일군의 침략 선전이 허황되고 우스운 것으로만 여겨졌다. 그들이 폭격을 맞이했을 때, 대다수는 부대 기지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필립과 불침번을 섰던 두 명의 전우를 제외한 모든 이가 사망했다. 프랑스는 5일 만에 손을 들었고 손쓸 도리 없이 조국 곳곳에서 불기둥이 솟았다. 살아남은 필립과 남은 전우들은 새 부대에 재편성되었다. 마르첼로와 테오를 만난 것은 바로 그 부대에서였다. 나치가 최신형 전차를 끌고 시시각각 언덕을 넘고 있었다. 연합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덩케르크로 밀릴 때까지, 필립은 그들을 제대로 만나본 적이 없었다. 대다수의 부대가 저지대에 전력 배치되어 몰살당하거나, 힘겹게 후퇴했다. 필립이 새롭게 배치된 부대의 사기는 이미 꺾일 대로 꺾여 있었다. 마르첼로와 테오는 그 중에서도 가장 말수가 없고 신경질적인 부류였다. 과거의 부대 이야기는 일절 꺼내지도 않고, 말이 나오면 분노했다. 그들은 오직 그들만이 서로의 안식인 것처럼 굴었고, 저들끼리 과거의 이야기를 하거나 죽어버린 이전의 전우들 이야기를 나눴다. 필립은 그들과 만난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아 최전선에서 고전하다 말고 덩케르크 해안까지 밀려났다. 총격전에서 필립의 전우들이 모두 사망했다. 뒤돌아서 뛰쳐나온 건 필립뿐이었다. 살아남은 것도 필립뿐이었다. 함께 남겨진 건 마르첼로와 테오 뿐이었으나, 그들은 전우라고 하기엔 너무 멀고 남처럼 느껴졌다. 어색하기만 해서 소용이 없었다. 그가 다른 방법을 찾지 않았더라도 언젠간 찢겨나갔을 지도 몰랐다.

 필립이 마지막으로 옮겨간 부대는, 정확하게 몇 사단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자의적으로 옮겼고, 소속도 바뀌었다.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확실하게 자신의 소속을 말할 수 있을 것이었다. English. 그는 이제 깁슨이었다.

 잠시 후에, 병원선이 정박했다. 토미는 시체를 묻다 말고 수통을 들고 마셨으며, 목을 축인 후 해안선을 향해 걸어 나갔다. 깁슨은 일어나 그의 뒤를 밟았다. 다시 간조기를 맞은 해변으로 영국군들이 일렬을 유지하며 해변에 서서 구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장관이었다. 동시에 끔찍한 풍경처럼 보였다. 백사장을 모조리 채운 군인들의 투구 때문에 해변은 새까맣게 뒤덮여있었다. 토미는 눈치를 보며 줄에 끼어들었다가, 소속이 아님이 발각되자 빠져나왔다. 계속해서 걸었고, 이따금 뒤를 돌아 깁슨와 눈을 마주쳤다. 따라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내버려두었다. 그들 사이에 희미한 끈이 생긴 것 같았다. 유대감이라 부르기엔 너무 얄팍한 시간으로 붙잡힌, 전쟁이 만든 기묘한 인연처럼 느껴졌다. 토미는 앞서 나가다 말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토미 뿐만이 아니었다. 해변의 모든 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허공을 바라보며 입을 벌렸다. 누군가 총을 장전했다. 창공을 찢으며 폭격기가 등장했다. 슈투카 폭격기들은, 온몸에 폭탄을 두른 괴물들이다. 그들은 비명소리 같은 소음과 함께 등장해 모래사장으로 내리꽂을 것처럼 하강하다가, 몸무게를 줄이고 직각으로 솟구친다. 총을 장전한 병사 하나가 대공사격을 개시했으나 이내 쓰러졌다. 모두가 모래밭이 납작 엎드린 채 때를 기다렸다. 언제 어떻게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바로 근처에 떨어졌음에도 그 무엇도 하지 못 한 채 숨을 죽여야 하는 순간, 인간의 무력함은 가중된다. 깁슨은 숨을 멈추고 차례차례 터지는 폭발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모래가 사방으로 튀었다. 잠시 후, 주변이 조용해졌다. 깁슨은 자리에서 일어나 토미 쪽을 바라보았다. 토미는 죽지 않았다.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마저 걸어나갔다. 계속해서 걷다가 다시 멈추어 섰다. 버려진 들 것 위로 시체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토미는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부상병 하나가 꿈틀거리며 목을 움직였다. 잔교에 정박한 병원선에서 길게 증기가 뿜어져 나왔다. 토미는 뒤를 돌아 깁슨을 바라보았다. 둘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 순간, 그들 사이를 아우르던 투명하고 느슨한 그 줄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유대감! 토미가 코트를 벗는 동안 깁슨은 들 것의 손잡이를 쥐었다. 토미가 가세했다. 그들은 장정을 지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토미가 생존을 위하여 선택한 일은 죄를 저지를 필요가 없었다. 행위의 기저에는 동일한 당위가 있었으나 그것은 분명 누군가의 군번줄을 훔침으로서 영영 시체의 소속을 지워버린 것과는 다른 세계에 있었다. 양심과 함께 찾아온 소년이었기 때문인가? 혹은 양심 그 자체의 상징이 되어버린 것인가? 그렇다면, 토미(Tommy)는 그의 구원인가?

 다리를 건너는 와중에도 몇 번의 공습이 이어졌다. 그들은 인원 수 제한으로 승선거부 당했다. 그들은 포기하지 않고 교각에 매달린 채 다음 기회를 노렸다.

 새하얀 병원선은 집중 포격되었다. 쉰여 명의 부상병들이 물에 수장되었고 깁슨은 교각을 붙들고 토미와 함께 배에서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었다. “제군들, 다른 배를 타게.” 머리 위로 제독이 권고했다. 깁슨은 제대로 알아듣지 못 했지만, another ship이란 단어에서 생존의 냄새를 맡았다. 토미와 그는 짧게 시선을 교환했다. 둘은 교각을 붙잡고 물에 들어갔다가 재빨리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들이 건져 올린 사람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 되었다.

 그들은 교각 사다리를 타고 다른 군인들과 함께 잔교 위로 올라왔다. 모두가 물에 젖어있었으므로 그들은 한 군집처럼 보였다. 꽁무니에 허겁지겁 붙었는데도 누구 하나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들이 이방인임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은, 토미가 건져 올린 토미 또래의 소년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은근슬쩍 부대원들 사이에 낀 그들을 보고도 적개심을 품기는커녕 오히려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고개를 돌린 후 뻔뻔한 표정으로 나아갔다. 토미와 깁슨은 다시 한 번 시선을 교환했다. 모터보트에 탑승했을 때, 소년은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려 그들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산뜻하게 입 꼬리를 올렸다. “Hey, 제법인데.”

 바로 그 순간, 알렉스 역시 그들의 전우가 되었다. 말하자면 한 배를 탄 셈이다. 

 다중적인 의미가 있음을 부정하진 않는다.

 

 4.

 그 날 밤, 깁슨은 갑판 아래로 내려가지 못 하고 난간에 섰다. 그는 조국을 보았다. 멀어져가는 바다 너머의 땅을 똑똑히 두 눈으로 보았다. 그곳은

 불타고 있었고, 

 싸우고 있었고, 

 나날이 잃어가고 있었다.

 이제 독일군의 프랑스 점령은 당연한 일처럼 보였다. 조국이 사라진다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영국군의 이름을 얻은 그가 안식을 취한다면 어디에 묻힐 것인가? 오월인데도 바닷바람은 몹시 찼다. 깁슨은 추위인지 두려움인지 모를 것과 맞서 싸우며 덜덜 떨었다. 바다 곳곳에 보트가 떠있었다. 무수한 영국군들이 올라타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Don't, leave, us! 불기둥은 끊임없이 어두컴컴한 마을 곳곳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누군가 외쳤다.

 어뢰다!

 그것은 상어처럼 물살을 가르며 왔다.

 

 5.

 많은 것을 서술할 수는 없다. 밤바다는 존재만으로도 몹시 공포스러운 장소다. 새까맣고, 끝을 알 수도 없으며, 발 디딜 곳조차 제공해주지 않는다. 상어나 어뢰 같은 것을 상상하면 도무지 맨 정신으로 떠있을 수가 없다. 깁슨은 그곳에서 구출되었다. 영국군들은 그가 구명조끼를 입고 있지 않은 영국군이어서 기꺼이 건져내주었다. 배 끄트머리에 탑승한 채, 그는 물을 떨어뜨리며 침몰하는 함선을 바라보았다. 토미와 알렉스가 배 근처로 헤엄쳐오는 것이 보였다. 함선 뱃전을 삼킨 불길이 천천히, 육중하게,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물보라가 일면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 한 병사들이 수장되었고, 모두가 끔찍할 만큼 숨을 죽였다. 토미가 헐떡이며 뱃전을 잡았다. 깁슨은 바라보았다. 그가 문을 열어 기꺼이 구출한 그의 양심을. 그의 전우를. 알렉스는 그 옆에 꼭 붙어있었다.

 “우릴 버리지 마.” 그의 전우들이 말했다. 그래서 그는 그렇게 했다.

 그는 밧줄을 내려서, 둘이 그것을 꼭 붙잡을 수 있게 도와주었다. 그들은 밤바다를 가르며 죽음의 땅으로 되돌아왔다.

그 다음 날 탈출에 실패한 한 남자가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했다.

 

 6.

 이제 깁슨은 모래톱에 좌초된 선박에 앉아 만조를 기다리던 때를 회상하고 있다.

 지루한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기다리는 것에는 자신이 있었으나 죽음의 공포를 감내하는 일에는 결코 익숙해질 수가 없었다. 그곳에 앉거나 눕거나 웅크리고 있던 모든 소년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들 지치고 피곤한 표정으로 꾸벅꾸벅 졸다 말고 바깥에서 어떤 소리가 들리면 예민하게 경청하며 바싹 곤두섰다. 그럴 수밖에는 없었다. 배는 방어선 바깥에 있었다. 독일군이 모래톱 너머로 득실거렸다.

 몇 시간동안 긴장과 공포에 길들여진 깁슨은, 그 지루하고 지겨운 시간의 틈 속에서, 문득, 아주 느닷없이 궁금해졌다. 마르첼로와 테오는 어디로 간 것일까? 그것은 아주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들의 이름을 떠올린 순간, 그는 깁슨 아닌 필립으로서 존재하게 되고 만 것이다. 그것을 소년들이 알 리는 만무하였으나, 때때로 관념은 예리하고 섬세한 영혼의 감수성에 의하여 포착되는 법이다. 그러니까,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깁슨은 알렉스에게 유감을 표하지는 않는다. 죽음이 앞으로 다가왔을 때, 이따금, 아니 자주, 인간들은 살기 위하여 영혼을 내던진다. 그것은 온전히 가지고 있기엔 너무 무겁기 때문이다. 깁슨의 품에는 두 개의 군번줄이 낙인처럼 매달려 있었으며, 그의 영혼은 이미 한 번 내던져 졌다가 토미에 의해 간신히 붙들려 있었다.

 배 안에서 유일한 프랑스군이 된 깁슨은 이제 토미와 함께 들 것을 지고 뛰던 순간을 회상하고 있었다. 들 것에 버려진 부상병을 이고 잔교 입구를 지날 때, 프랑스군들의 군집과 다시 마주할 일이 있었다. 깁슨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단 한 명도 발견할 수가 없었다. 발견되지도 않았다. 잔교 입구엔 마르첼로도 테오도 없었다. 그가 그랬던 것처럼 다른 방도를 찾아 떠난 것일 지도 모른다. 새들은 어디로 가는 것일까?

 배 안의 소년들은 결코 알지 못 했지만, 만조가 다가올 무렵 창공으로 갈매기 두 마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무거운 공기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날개를 움직이다가, 다시 바람을 타고 위로 솟구쳐 오른 후 해안선 너머로 멀리, 아주 멀리 날아갔다. 그 새들은, 잔병들을 태운 순양함과 병원선을 지나… 국기를 단 채 함선과 반대 방향으로 이동하는 수십 척의 요트들을 거쳐… 용기를 위해 영혼을 걸고 투쟁한 고귀한 두 소년을 태운 단 한 척의 특별한 배(MOONSTONE)를 거슬러…… 도싯의 하얀 절벽 너머로, 누군가의 조국으로, 영국으로… 돌아갔다.

 

 7.

 사랑한다. 인간을 사랑한다. 조국을 사랑하고 자신을 사랑한다. 돌아가기 위하여 최선을 다한 인간들이 있었다. 영혼을 버린 사람도 영혼을 간직하고 죽은 사람도 있었다. 모두가 살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어째서 그런 일들이 벌어져야만 했나.

 새들은 어디로 가야한단 말인가?

 

 8.

 말해, 어서 말해, 아니라고 말해!

 

 9.

 Français… Je suis Français…….

 

 10.

 그는 온전한 영혼을 돌려받았다.

 그리고 전우를 잃었다.

 

 11.

 배가 침몰하기 시작했을 때, 알렉스는 깁슨을 불렀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전혀 닿지 못 하고 수장되었는데, 이는 전적으로 그가 고백함에 따라 전위로 올라온 그의 죄 때문이었다. 그가 버렸다고 시인한 정체성을 돌려받는 순간, 알렉스와 그 사이를 묶던 투명한 끈은 끊어지고 유대는 사라졌으며 부족한 영어로도 소통할 수 있었던 마법 같은 순간들은 삭제되었다. 물을 차고 빠져나오려던 깁슨의 군복 안쪽에서부터 필립(Philippe)의 군번줄이 흘러내렸다. 그것은 부유하다말고 물살에 친친 엉켜 뱃 기둥에 단단히 감겼다. 수면을 갈망하며 뻗었던 손이 저지되었다. 바닷물이 목구멍을 차고 끊임없이 빨려 들어왔다. 필립은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아무 소리도 내지 못 했다. 군번줄은 단단히 그의 몸을 붙잡고 함선과 함께 침몰했다. 부유하던 육신은 영혼을 향해 끌려 내려갔다. 죄악의 지대로, 단죄의 시간으로, 죄책감으로, 손쓸 도리도 없이… 수몰되었다…… 바로 그 순간, 필립의 숨통이 끊어졌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군번줄이 순간 붕 뜨면서 엉겨 붙은 매듭에 헐거운 틈이 생겼다. 필립의 시신은 물살과 함께 아래로 소용돌이치듯 잡아당겨졌다가, 뱃전에 쿵 부딪히며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선박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수면 위로 조금 치솟았다가, 이내 물살에 따라 흔들리며 천천히 운반되었다. 그의 시체는 파도를 타고 무수한 다른 시체들과 함께 덩케르크의 해변으로, 새가 한 마리도 날지 못 했던 그 흰 모래톱 위로, 프랑스의 바다로, 조국으로…… 돌아갔다.

 세상의 파도는 바다가 삼킨 것을 되돌려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12.

 마르첼로와 테오는 해안에서 퇴각하는 영국군 무리 끄트머리에 서서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만조가 가까워지고 있었으므로 모두가 서둘렀다. 요트와 선박을 끌고 온 민간인들이 차례로 영국군을 실어 나르고 있었고, 여유의 자리에 프랑스군들을 태웠다. 조국에 남겠다고 승선을 거부한 일부는 해안의 반대편을 향하여 마르첼로와 테오를 지나쳐 걸어 나갔다. 시체들이 떠내려 오고 있었다.

 “새가 하나도 없군.”

 마르첼로가 하늘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테오도 덩달아 고개를 젖혔다.

 “그러고 보니 정말 한 마리도 없군. 원래 그런가?”

 “모르지.”

 “폭격기가 올 지도 몰라.”

 “배에 탈 수만 있다면 살 수 있어.”

 뻣뻣한 시체 하나가 마르첼로의 허벅지를 둔탁하게 치고 지나갔다. 마르첼로는 고통으로 펄쩍 뛰었다가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테오가 얼굴을 찌푸렸다.

 “마르첼로, 왜 그래?”

 “기예야.”

 마르첼로가 고개를 들어 테오를 바라보았다. 그는 물살에 더는 떠내려가지 않도록 단단히 시체를 붙들고 있었다. 테오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시체의 눈을 마주보았다.

 “…눈을 감겨.”

 그가 속삭였다. 마르첼로는 그렇게 했다.

 “……이 자식, 군번줄이 없어.”

 “달아야 할 자리에 없어?”

 “없어. 이음부가 떨어져 나갔어.”

 테오는 물살에 흔들리는 희끄무레한 실루엣을 발견했다. 그것은 시체의 허리 부근에 친친 감기다 만 모양새로 파도에 흔들리고 있었다. 테오는 몸을 숙여 물속에서 그것을 건져냈다. 햇살에 반짝이며 눈부신 흰 색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Philippe.

 “찾았어.”

 테오가 말했다.

 “입에 넣어줘.”

 마르첼로가 읊조렸다. 그래서 테오는 그렇게 했다.

 그는 눈을 감긴 시체의 입 안으로 그의 이름을 밀어 넣고, 단단히 턱을 다물렸다. 이제 시체의 혓바닥 아래에는 그가 어디에 묻힐 것인지 분명하게 말해줄 소속의 징표가 있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디로 가야만 하는지 우리 모두는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떠내려 보내.”

 마르첼로가 말했다. 그는 우울하지도 그렇다고 건조하지도 않은 목소리로 작게 신음한 후, 앞으로 움직인 대열을 향하여 한 발짝 나아갔다. 테오는 조심스럽게 시체를 다른 시체와 부딪히지 않도록 파도에 띄워 모래톱으로 보냈다. 그들은 필립의 시체가 점점 멀어질 때까지 눈을 떼지 못 하고 바라보았다.

 그렇게 그들은 필립의 전우가 되었다.

 

 13.

 덩케르크 해안의 만조가 모래톱을 무너뜨리며 코앞까지 차올랐다가, 간조기가 다가옴에 따라 뒤로 물러났다. 파도는 후퇴하는 도중에도 곳곳을 헤집었다. 땅에 반쯤 묻혀 있던 소속 없는 시체 한 구가 물살을 타고 바다로 나아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다시 모래톱으로 되돌아왔다. 물거품과 함께 중간이 똑 끊어진 군번줄 하나가 마구 뒹굴고 있었다. 그것은 물결을 타고 천천히 시체 근처로 떠내려 왔다. 마침내 파도가 더는 모래톱에 영역을 끼치지 못 하고 바다로 되돌아 갈 때, 시체에 막혀 돌아가지 못 한 군번줄이 젖은 흙에 남았다. 그것이 반들거렸다. Gibson. 그러니까, 모든 것은 모든 것으로부터 확실하게… 돌려받은 것이다. 조류였다. 누군가는 언젠가 그것을 양심이라고 읽었다.

 간조가 닥치고 덩케르크의 모두는 후퇴하고 있었다. 바로 그 순간, 덩케르크의 해안 위로 하얗고 아름다운 새 한 마리가 창공에 나타났다. 그것은 유유히 날갯짓하며 희고 고운 모래톱과 새파란 물위를 떠돌다가, 마을을 향해 천천히 날아갔다. 그리고 포화를 뚫고, 언덕을 넘어서… 총알과 대공사격을 피해서… 누군가의 평화로운 조국(home)으로, 집(home)으로, 평화의 육신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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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깁슨은 WW2 당시 지리적으로 영국 몸빵을 하느라 개털린 프랑스를 상징하는 인물. 깁슨을 연기한 배우 아나이린의 피셜에 따르면 깁슨의 진명은 필립 위고 기예 (Philippe Hugo Guillet). 내 안의 이미지랑 매칭되는 어감은 아니다. 위고? 기예는 좀 어울린다고 생각함. 작중 이름조차 없던 배역이 작품 바깥에서 유일하게 풀네임을 얻은 이 아이러니라니.

2. 처음 덩케르크를 보았을 땐 알렉스가 죽은 것인줄 알았다. 권선징악 엔딩인줄 알았음. 2차 찍은 후에야 알았다. 죽은 거 깁슨이었음을... 그렇게 어두컴컴한 곳에서 백인 배우들 얼굴 어떻게 구분하는 거냐. 

3. 깁슨의 설정을 마구 날조해가며 썼는데 무슨 생각을 하며 썼는지는 구체적으로 기억이 잘 안 난다. 깁슨한테 뭔가 해주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함. 이름을 돌려주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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