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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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미는 등허리를 꼿꼿하게 펼친 채 앞만 보고 있었다. 창가로부터 오전의 햇살이 끊임없이 쏟아지던 장면이 기억난다. 알렉스는 토미 옆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한 자리에 앉은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알렉스는 옆자리의 토미가 한 번쯤은 자신에게 말을 걸거나 시선을 마주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토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칠판을 응시하며 앉아 있었고, 이따금 시선을 내려 노트 위에 필기를 하는 것으로 그 수업에 완전히 참여하고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거의 도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쫓기듯이 필기하는 토미의 펜과 희미하게 떨리는 손등, 어지럽게 움직이다 갈피를 잡은 듯 칠판을 응시하는 토미의 불안한 시선 따위를 관찰할 수 있었다. 애쓰지 않아도 훤히 보였다. 어쩌면 지각을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토미는 그 날 유일한 지각생이었고, 거의 최초의 지각인 것처럼 보였고-교사가 무슨 일이 있냐는 식으로 오히려 걱정했기 때문이었다-무언가 불만스러워 보였고 동시에 몹시 불편해보였다. 그는 교실에 ‘가장 마지막으로 들어온’사람이었던 알렉스 옆의 빈자리를, 그 교실에 남은 유일한 빈자리를 잠시 응시했다. 그리곤 이내 체념한 것처럼 가방을 풀고 자리로 들어왔다. 알렉스는 토미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는 교내에서 유명했다. 우등생이었고 단 한 번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었다. 같은 수업을 몇 번 들어본 적도 있고 복도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 알렉스가 아는 한 그는 굉장히 조용하고 침착했다. 재미있을 거야. 무엇이 재미있을 것인지도 모르고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등생과 한 자리에 앉았네. 좋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번 보자고. 그러나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토미는 알렉스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곤, 놀라울 정도로 소리 없이 의자를 끌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재빨리 노트를 꺼내 책상에 펼쳐놓고 필기구 세 개-펜, 하이라이트 마크, 화이트-를 나란히 늘어놓았다. 그 모습이 마치 숙련된 목수처럼 보였다. 알렉스가 대놓고 토미의 얼굴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알렉스의 시선을 눈치 채지 못 할 리가 만무했으므로 그것은 무관심하다기보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알렉스를 차단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느껴졌다. 알렉스는 그전까진 한 번도 마음으로 들어온 적이 없던 토미의 이름을 중얼거려보아야 했다. 토미. 토미 화이트헤드. 그 이름은 호기심으로 반들거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입술이 밀려 올라갔다.

“Hey.”

알렉스가 작게 속삭이며 토미의 손가락을 제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렸다. 토미는 돌아보지 않았다. 희미하게 미간에 주름을 잡았을 뿐이었다. 알렉스가 한 번 더 불렀다.

“Hey.”

이번에 토미는 알렉스를 곁눈질했다. 경고의 눈빛처럼 보였다. 알렉스는 그런 반응이 신선했다. 적어도 알렉스의 Hey는 그 이전까진 꽤 괜찮은 신호와 함께 긍정적인 응답을 들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알렉스가 아는 한, 초면에 알렉스에게 반감을 가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호모포비아 집단을 제외하곤. 어쨌든 호모포비아들도 알렉스의 Hey에 무응답으로 대처하지는 않았으므로 토미는 거의 최초라고 할 수 있었다. 링컨 스쿨 1교시에 진행되는 켈리포니아 로컬 역사 수업은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교사의 잡담이 지나쳐 영양가가 거의 없는 수업으로 유명하다. 알렉스가 맹세컨대 이 수업에서 필기할 것이 있다면 미스터 심슨의 사생활에 지극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거나, 혹은 미스터 심슨이 쪽지 시험에 자신의 신혼여행지가 튀니지였는지 바르셀로나였는지를 묻는 보너스 문제를 출제할 정도로 분별력 없는 교사여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토미는 교실에 입성하자마자 멈추지 않고 무엇이든 적고 있었다. 옆에서 끊임없이 신호를 보내는 교내 최고의 미남(자기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어쨌든 사실이다)을 완전히 차단하고 말이다. 사실, 알렉스에게 별다른 목적이 있는 건 아니었다. 플러팅의 의도도 없었다. 그는 그저… 조금 궁금했을 뿐이었다.

그래서 알렉스가 물었다.

“오늘 왜 늦었어?”

이제 미스터 심슨은 캘리포니아의 타호 호수에 대해 설명하다 말고 자신의 보이스카우트 시절 첫 캠핑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토미는 시선을 내리깔고 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정말 이상한 광경이었다. 알렉스가 손을 뻗어 토미의 노트를 건드리려고 하자, 토미가 그의 손을 밀쳐내다 말고 펜을 놓쳤다. 바닥에 떨어진 펜이 데굴데굴 구르다 말고 알렉스의 구두에 맞아 멈추었다. 순산 토미와 알렉스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햇빛 아래서 토미의 눈동자가 청록색으로 반짝였다. 알렉스는 그 속에서 토미의 신경질적인 어떤 말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꺼져.’ 그는 허리를 굽혀 토미의 펜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토미에게 내밀었다.

“미안.”

“괜찮아.”

토미의 목소리는 그 신경질적인 눈동자에 비해 지나치게 단조로운 톤이었다.

“고마워.”

토미는 펜을 받아든 후 시선으로 인사하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 번 다시 알렉스를 돌아보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갈 무렵,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스스로도 모르겠지만, 알렉스는 고의적으로 토미와 슬쩍 팔을 부딪쳤다. 이번에 토미는 뒤척이거나 노려보거나 꼿꼿하게 앉지 않고 알렉스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알렉스는 똑똑히 들었다. ‘Fuck.' 오, 그래. 힘내, 알렉스. 이런 일도 있는 거지.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하곤 깨끗한 자신의 노트를 덮었다. 내가 좀 성가시게 굴긴 했잖아. 그렇지? 종이 치자 토미는 깔끔하게 가방을 챙긴 후 누구보다 빠르게 교실을 나가버렸다. 제시가 다가오다 말고 멈춰 서서 알렉스의 표정을 감정했다. 너 굉장히 얼떨떨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네. 알렉스가 입술을 익살스럽게 삐죽이며 대답했다. 그럴 일이 좀 있었어. 그러고 나서, 제시가 낸시를 데리고 왔고… 정확히 점심시간 종이 칠 무렵 낸시는 알렉스의 스물 몇 번째 애인이 되어 있었다. 

알렉스는 토미를 깔끔하게 잊어버렸다. 

 

잠시 침묵이 있었다. 토미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뭐라고?”

토미는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야?”

“나랑 데이트하자고.”

알렉스가 말했다.

“뭐 어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던가, 아님 영화를 빌려서 집에 가던가, 피자를 먹던가… Whatever.”

“데이트가 뭔지는 나도 알아.”

토미가 냉랭하게 대꾸했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오, 잘 됐네. 그럼 우리…….”

“싫어.”

토미가 딱 잘라 말했다. 알렉스는 놀랍지도 않았는데, 그건 거의 예고된 대답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그는 준비되어 있었으므로 전혀 상처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이 그에게 이상한 전의를 불어넣었다. 알렉스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기울이고 조금 앙탈을 부렸다.

“왜?”

“첫째로, 난 바빠.”

토미는 마치 준비되어 있던 사람처럼 이유를 열거하기 시작했다.

“둘째로, 난 남자랑 데이트 안 해.”

“셋째로, 한다고 해도 너랑은 안 해.”

“넷째로, 난…….”

“워, 알겠어, 토미. 알겠어.”

알렉스가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토미는 알렉스를 쏘아보았는데, 알렉스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으므로 그는 양팔 안에 갇힌 것처럼 보였다. 토미의 체구는 알렉스가 늘 멀리서 마주칠 때마다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작았다. 토미의 어깨는 그의 어깨와 거의 반배의 차이가 있었다. 저보다 몇 살 어리다고 해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알렉스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토미를 내려다보았다. 그게 토미를 못마땅하게 만든 것 같았다. 토미는 신경질적으로 알렉스의 팔을 치워냈다. 진동소리가 들렸다. 토미는 고개를 숙여 제 휴대폰을 확인하곤 다시 홀드를 내렸다.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린 채 한쪽 눈썹을 올렸다. 

“애인이야?”

“아니.”

토미는 마치 종족 번식 외엔 별 다른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신인류를 바라보는 듯한 눈빛으로(정말 그렇게밖엔 그 눈빛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새)아빠야.”

“그럼 넌 지금 솔로라는 거네?”

“그렇다고 너랑 데이트 할 생각은 없어.”

“그걸 노리고 한 말은 아니었는데. 난 윤리적인 입장으로 접근한 거라고.”

알렉스가 항복이라도 한 것처럼 양손을 들어올렸다. 토미는 가방을 고쳐 맸다.

“잘 됐네. 계속 윤리적으로 살도록 노력해 봐. 내 눈엔 전혀 그렇게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지만.”

“오, 너 굉장히 단정적이다.”

“그럼 아니야?”

“아닌데.”

“그럼 가서 린다에게 사과부터 하는 게 어때?”

그 말에 알렉스의 표정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너 호모포비아야?”

“뭐라고?”

이번엔 토미가 경멸스러운 듯 눈을 치켜떴다.

“내가?”

“그래.”

알렉스가 대꾸했다. 

“진지하게 묻는 거야.”

토미는 모욕을 받은 기분이 됐다. 끔찍한 농담을 듣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동시에 그는 알렉스가 몹시 가증스러워졌다. 그러니까 알렉스 그는 성소수자고, 그러므로 자신을 거절하면 상대는 호모포비아가 된다고 생각하는 건가? 기가 찰 노릇이 아닌가! 그는 린다를 임신시켰고 분명 그에 관해 무책임하게 굴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침에, 그 주차장에서, 마치 쇼의 일부처럼 화려하게 뺨을 얻어맞으며 걷어차였다. 린다는 시끄럽고 유난스럽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그런 일’을 당해야 한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토미는 진심으로 린다를 동정했다. 알렉스를 빌어먹을 난봉꾼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는 토미의 상상 속에서 윤리의 테두리 가장 끄트머리에 선 채 저 편할 대로 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토미는 알렉스에 대해 단언할 수 있으며 그에 대한 판단을 유보할 필요가 전혀 없다고 장담했다. 그리고 그에게 그 어떤 윤리적 비난, 혹은 인간적 지성에 대한 비판을 듣는다면, 그건 토미가 제정신이 아니거나 끔찍한 실수를 저질렀을 때뿐일 거라고, 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걸 알렉스의 입에서 들을 이유 같은 건 없다고 완벽하게… 아주 완벽하게 생각했다.

“난 빌어먹을 호모포비아가 아니야.”

토미는 얼굴을 찡그린 채 숨을 몰아쉬려고 애썼다.

“이봐, 알렉스. 내가 너를 거절했다고 호모포비아가 되는 건 아니야. 난 네가 누구랑 자던 전혀 상관없어. 다시 말해서, 난 그냥 너한테 관심이 없는 거야. 신경 끄고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오.”

알렉스는 다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너 그런데도 내가 오스본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해?”

그 때, 다시 진동이 울렸다. 이번엔 끊어지지 않고 연거푸 이어졌다. 토미는 알렉스와 자신의 액정을 번갈아 보다 말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토미는 연거푸 “네, 알아요.” “네, 죄송해요.” “지금 교문 근처요.” “곧 나갈게요.”라고 대답했다. 그는 통화를 종료한 후 완전히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말해서, 네가 오스본에게 사과하던 말던 그것도 내 알 바는 아니지만.”

토미는 짜증스러운 기색이었다.

“나라면 마땅히 그러했을 거야.”

그리고 그는 인사도 없나 나가버렸다. 알렉스는 자리에 못 박힌 듯이 서서, 토미가 빵,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승용차 앞에 멈추어 창문을 내린 남자와 몇 마디 대화를 하고, 뒷좌석에 타려다 멈추어 서서 다시 한 번 남자와 대화하곤…… 다시 앞좌석 문을 여는 것을 지켜보았다. 차는 요란한 라디오 소리를 내며 떠나버렸다. 주차장으로 알렉스의 Boo! 몇 장이 마구 굴러다니고 있었다. 알렉스는 손에 들린 토미의 설문지를 내려다보았다.

 

비고 : 이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는 거야?

 

“글쎄, 토미. 내가 알겠어?”

알렉스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헤이 호, 이번엔 끝까지 가보자고.”

재미있을 거야.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알렉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학교 최고의 우등생에게 차였네, 좋아, 무슨 일이 벌어질지 한 번 보자고. 

그렇게 해서, 토미 화이트헤드는 알렉스 스타일스의 타겟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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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Tom0612

급해서 그런데 종료된 채팅방 상대 어떻게 불러내?

└ 이거 완전 핑프잖아 -HHpl

 └└ 나도 잘 모르는데 -karl9

└└└ 333 핑프는 아닌 듯 -jujujm 

└ 그냥 네 프로필 들어가서 채팅 서버 접속해. 대기실에 채팅 기록 있어. -torry

 └└ 고마워. -tom0612

└ 니 학교킹카 까던 걔 아님? 뭔일인데 -df***

 └└ 그리고 넌 또 아이디 블러처리하네 -hurrion

└└└ 너 내 스토커냐? -df***

 

My Cheating History

HOSTNAME : gib22 

2017.06.24 17:00 

ip 122.101.122.92

! gib22를 호출합니다 !

 

Tommy0612 : 급해서 그런데, 이거 보면 답장 줄 수 있어?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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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은 기묘할 정도로 조용한 금요일이었다. 토미 화이트헤드와 짐 트레버는 침묵 속에서 링컨 스쿨까지 이동했다. 라디오는 15번 도로의 정체 상황을 사무적으로 알리는 중이었고 평소 시끄러운 댄스곡을 선곡하던 DJ는 재즈풍의 클래식팝을 틀어주었다. 짐은 토미에게 사소한 몇 가지를 이야기했다. 아침을 덜 먹던데 입맛이 없니? 어제 하루 종일 노트북만 보고 있던데 너무 오래 그것만 두들기고 있지 마라. 눈이 안 좋아지잖니. 늘 그렇듯 짐의 질문 혹은 염려는 지나치게 의무적인 느낌이 있었고-적어도 토미는 그렇게 생각했다-토미는 대충 ok로 모든 질문에 대답했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둘은 링컨 스쿨의 주차장에 다다르기 전까지 단 한 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토미는 안전벨트를 푼 후 몸을 돌려 뒷좌석에 던져놓은 자신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어제 짐은 느닷없이 뒷좌석 문을 열어젖힌 토미를 향해 다소 머뭇거리는 톤으로 물었다. “오늘은 앞좌석에 타는 게 어떻겠니.” 정말이지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토미는 잠시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은 채로 어색하게 입을 벌렸다. 그는 바로 이전에 학교 최고의 킹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어떤 난봉꾼의 데이트 신청을 거절하고 온 참이었다. 두 번의 거절은 분명 쉬운 일일 것이다.

“어…….”

토미는 머뭇거렸다.

“그래요.”

그래요… 는 무슨! 토미는 속으로 자신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러나 토미의 몸은 이미 앞좌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는 가방을 발아래에 내려놓고 자리에 앉았다. 짐은 헛기침을 하며 라디오 볼륨을 줄였는데, 그건 토미에게 아주 불길한 징조처럼 느껴졌다.

“오늘은 무슨 일 없었니?”

짐이 물었다. 토미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딱히요.”

그러니까 토미 화이트헤드는 방금 전 학교 최고의 킹카라고 자부할 수 있는… 아니, 그만두자. 토미는 더는 생각하기를 관뒀다. 알렉스 스타일스와의 작은 해프닝은 곧 잊혀 질 것이고 마땅히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그는 대체 왜 자신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일까? …Nevermind.

“음, 넌 늘 아무 일이 없었다고 대답하는구나.”

짐이 우물쭈물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이제 차는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차창으로 희미하게 토미의 얼굴이 비쳤고, 그 너머로 링컨 스쿨이 빠르게 멀어지는 중이었다. 토미는 찡그리고 있었다. 짐이 지금 뭘 시도하는 거지?

“그야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요.”

“학교를 다니면서… 오, 그러니까 내 말은.”

짐은 진땀을 뺐다.

“네 일상 이야기가 궁금해서 묻는 거였단다. 어떤 문제가 있냐고 물어보는 것만은 아니었다.”

“오.”

토미는 할 말을 고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정말이지 어색하고 끔찍한 분위기였다. 토미는 자신이 짐의 제안을 거절하고 뒷좌석에 앉아야만 했다고 생각했다. 이제 더는 엠마의 핑계를 댈 수 없었지만, 머리를 굴리면 어떤 핑계든 댈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핑계든. 바보 같은 핑계라도 댔다면 짐은 알겠다고 대답했을 것이고 더는 아무 것도 시도하지 않았을 테였다. 토미의 말이 진실이라서가 아니라, 토미의 말이 거짓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토미 혹은 엠마가 거절하면 그 이상 다가오지 않고 선을 지켰다. 토미는 그의 그런 점이 굉장히 편안하면서도 불편하게 느껴졌다. 짐이 상처받을 때마다 윽박을 지르거나 신경질을 내는 사람이었다면, 토미는 그를 증오하거나 밀어내는데 훨씬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짐은 상처를 받으면 그대로 거기 멈춰서 다가오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건… 그건 마치, 토미 같았다. 그리고 토미가 생각하건대, 침묵하는 자들이야말로 때론 가장 거대한 상처를 품고 있는 것이다. 짐이 불편했다. 짐이 정말 불편했다. 자신이 가장 손쉽게 상처 입힐 수 있는 상대가 생기는 것은 끔찍한 일이었고… 그러니까, 토미는 짐이 정말로 불편했다. 

짐은 가는 내내 토미에게 어색한 대화를 시도하려고 애썼다. 토미는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으로, 울 수도 웃을 수도 없는 표정을 지으며 하나하나에 대답했다. 그는 ok로만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을 물어보았고 오래된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토미는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헛헛하게 웃음을 터뜨리거나 어깨를 으쓱이기만 했는데, 짐은 그것에 용기를 받은 것처럼 자꾸만 대화를 끌어나갔다. 차가 엠마의 학교에 멈추어 섰을 때, 토미는 속으로 거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엠마가 뒷좌석 문을 열다 말고 앞좌석에 앉은 토미를 흘겨보며 시선으로 물었다. ‘너 뭐야?’ 그러거나 말거나 토미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안녕, 엠마. 오늘도 피자 먹고 싶니?”

“아니.”

엠마는 간밤에 외계인이 토미를 죽이고 그 거죽을 뒤집어쓴 후 완벽히 새로운 토미로 거듭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대답했다.

“난 피자에 미친년이 아니야.”

저녁은 라자냐였다. 짐의 요리 실력은 정말 좋았다. 토미는 이번에 한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차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말 끔찍하리만큼 어색한 공기가 감도는 저녁 식사였다. 제니는 오늘도 늦는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토미와 엠마는 꾸역꾸역… 아니, 중간부터는 정말 맛있어서 진심을 담아 라자냐를 퍼먹었다. 짐의 ‘어색한 시도’는 저녁에도 계속되었다. 라자냐의 맛과는 상관없이, 토미는 분명 오늘 체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식탁 아래로 초조하게 휴대폰을 확인했다. 게시판에는 이미 많은 댓글이 달려 있었고 잠금 화면으로 알림 몇 개가 쌓여 있었다. 토미는 빠르게 눈을 굴려 내용을 훑어보았는데, 그 중 절반 이상이 hurrion과 df***가 키보드 배틀을 벌이는 것이었다. 대체 왜 남의 게시물에서 이러는 건데? 토미는 묵묵히 라자냐를 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짐이 물었다. “더 줄까, 토미?” “아뇨, 됐어요.” 토미는 대답했다. “전 올라갈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는 체하지 않았다. 밤이 될 때까지 토미는 그가 락카 앞에서 모조리 쏟아버린 유인물들을 파일 철에 가지런히 정리하며 수시로 노트북을 들락거렸다. 채팅의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래서 달리 뾰족한 수나 괜찮은 채팅 친구의 조언 없이, 거의 잠들 때까지, 토미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만 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무슨 정신으로 내게 데이트 신청을 한 거지?

“다녀올게요.”

토미가 다소 멍한 정신으로 인사했다. 

“늦지 않고 마중 나가마.”

짐은 아주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 다녀와라, 토미.”

토미는 건성으로 보이는 고갯짓-사실 그는 어쩔 줄 몰라 고개를 까딱일지 말지 고민하다가, 너무 늦어버린 타이밍에 마구 흔들어버린 것이다-으로 답한 후 차문을 닫았다. 짐이 오늘 아침에 침묵을 지켜준 건 굉장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토미는 뒷좌석에 탈 생각으로 가방을 미리부터 던져놓았지만, 결국 또다시 앞좌석에 앉는 끔찍한 실수를 범했기 때문이었다. 금요일은 토미에게 굉장히 피곤한 날이 될 예정이었으므로 아침부터 짐과의 대화로 진땀을 뺐다면 토미는 그 날 점심 알렉스 스타일스의 멱살을 쥐어 잡았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들은 그 날 거의 하루 종일 붙어 있어야 했다. 거의 하루 종일.

자신의 슬픈 운명을 아직 감지하지 못 한 토미 화이트헤드는 잠시 머뭇거리며 주차장을 둘러보았는데, 그곳에는 더는 Boo! 하고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는 무수한 알렉스의 얼굴도 없었고, 요란하게 트럼펫을 울리는 AL's 패거리도 없었고, 설문을 위해 뛰어다니는 제시도 없었다. 그는 아주 만족스럽게 불안한 마음을 놓아주었다. 빵! 뒤에서 클랙슨이 울렸다. 토미는 슬쩍 고개를 돌려 짐을 돌아보다가, 이내 가방을 고쳐 매곤 교문을 통과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토미의 옆자리에 앉아있었다.

‘뭔데?’

토미는 생각했다.

‘이게 대체 뭔데?’

모두의 시선이 토미 화이트헤드에게 집중되고 있었는데, 알렉스는 그 일련의 시선이 결코 기분 나쁘지 않다는 듯 작게 휘파람까지 불어댔다. 말하자면 1교시의 흔하지 않은 풍경이었고 어떤 일이 막 벌어질 징조를 보이고 있었다. 교내의 모든 아이들이 생각하기에 토미 화이트헤드와 알렉스 스타일스의 교집합은 고작 해봐야 같은 영장류라는 정도였고, 굳이 또 하나의 교집합을 찾는다면 생물학적으로 남자라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알렉스 스타일스가 누군가의 옆자리에 자진해서 앉는 것이 결코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그가 앞줄, 그것도 흔히들 모범생 혹은 너드 취급을 받는 인간들을 위해 마련된 좌석처럼 가지런히 비어있는 “지식의 로얄석”에 앉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거기 앉았다. 정확히는, 토미 화이트헤드가 앉은 자리 옆에 가방을 두고 앉았다. 토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알렉스를 올려다보자, 알렉스는 예의 그 매력적인 미소를 만연하게 띄우며 고개를 기울였다.

“오, 안녕, 토미. 간밤에 생각은 좀 해봤어?”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토미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뭘?”

“어제 내가 데이트 신청한 거.”

교실이 소리 없이 술렁거렸고 이제 교실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한 번도 눈길을 준 적이 없던 교탁 앞 로얄 석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아예 책상 아래로 빠르게 텍스트 메시지를 작성하고 있었는데, 토미는 이 일련의 사태가 전혀 반갑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덤덤하게 수습하고자 애썼다.

“음,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네가 어제 거절했잖아.”

“거절하면 보통 그걸로 끝난 거 아니야?”

“좋아, 잘 기억하고 있잖아.”

토미는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져 입을 다물었다. 알렉스는 기분 좋은 듯 자리에 앉아 토미를 바라보았다. 토미는 그 부담스러운 관심에 응하는 대신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교실이 지나칠 정도로 조용했기 때문인데, 그건 전적으로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던 까닭이었고, 토미는 정말로… 자신이 아직 이것을 수습할 기회가 있다면, 너무 늦지 않게 해달라고 신에게 간곡히 빌었다.

“생각 안 해봤어.”

토미는 거짓말을 했다.

“내 대답은 여전히 싫어, 야.”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그럼 나도 뭔가 물어봐야겠는데.”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 여자야?”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토미가 불쾌한 듯 대꾸하자,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럼 여자거나 남자거나 해? 아님… 뭐, 아무것도 아니라거나?”

“아니.”

토미가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아니, 왜 물어보는 건데?”

“그런 애들도 있어서?”

알렉스는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그럼 너 헤테로야?”

토미는 입을 다물고 알렉스를 쏘아보았다. 알렉스는 한쪽 입 꼬리를 올렸다.

“오, 그래. 음. 그럼 너 호모포비아야?”

“아니!”

토미는 이번에 정말 화를 냈다.

“한 번만 더 물어보면 네 멱살을 잡을 거야.”

“이상하네.”

알렉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대체 왜지?”

“알렉스, 네가 웬일로 앞자리에 앉아있구나.”

미스 메리엇이 서류를 내려놓고 교탁 앞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물리학 교사로 레포트를 무지막지하게 내주기로 유명했는데, 거기에 더불어 주일마다 쪽지시험을 봤다. 알렉스는 수요일에 그녀의 수업에서 거의 반타작을 했다.

“오, 쪽지시험에 대한 충격이 컸거든요.”

알렉스가 선량한 웃음을 지어보였으나 돌 심장으로 만들어져 있는 미스 메리엇은 이에 굉장히 냉담했다.

“모두에게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구나. 성적에 향상심을 가지는 건 좋은 일이지만 수업 시간에 요란스럽게 굴거나 졸게 되면 뒤로 내보낼 거다.”

“걱정 마세요.”

알렉스가 쾌활하게 웃으며 토미의 팔을 건드렸다. 토미는 근심어린 표정으로 그를 피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수업 종이 울렸다.

알렉스의 말이 맞았다. 그는 떠들지도 졸지도 않았다. 심지어는 토미를 건드리거나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는 얌전히 거기 앉아서 필기를 하고, 교탁을 보고, 몇 가지 질문에 대답하여 미스 메리엇을 ‘퍽 흡족하게’ 했다. 그들은 그 수업 이후로도 다음다음 교시에 한 번 더 마주쳐야만 했는데, 알렉스는 그 때도 굉장히 자연스럽게 토미의 옆자리를 점유함으로써 모든 소란을 증폭시켰다. 점심시간이 지날 무렵 학교는 이미 새로운 가십거리로 떠들썩했다. 한 번도 그 소란에 오르내린 적이 없고, 그럴 일도 없어보였던 이름 하나가 그 주인공이었다. 토미 화이트헤드. 데이트. 거절. 그리고 다시, 토미 화이트헤드.

대다수의 사람들은 얼굴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잠깐만, 네가 말하는 게 내가 알고 있는 ‘그’ 화이트헤드야? 말했지만, 그리고 토미 본인은 잘 몰랐지만, 혹은 알았다면 조금 우쭐해하면서도 겁을 먹었겠지만, 그는 유명했다. 알렉스 스타일스 만큼 유명할 지도 모른다. 어쨌든 교사들도 학생들도 그가 누군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맹세컨대 그와 알렉스 스타일스 사이엔 조금의 접점도… 무엇 하나… 겹쳐지는 게 없고 또… 같이 무언가를 하는 것도 어색했고…… 그러나 그 토미 화이트헤드가 맞았다. 그가 알렉스 스타일스에게 데이트 신청을 받았고, 거절했고, 알렉스가 다시 달라붙었다. 그러나 플러팅 하거나 삽질을 하는 것은 또 아니고, 그냥 옆에 달라붙어 있었다. 그게 다였다. 정말 이상하고도 흥미로운 일이 아닌가? 

토미는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알렉스가 아침,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순간, 데이트라는 말을 꺼내지 않았더라도 이 학교 곳곳에 자신의 이름이 무수한 학생들 입을 타고 배송될 거란 걸 말하지 않아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 학교의 생태를 잘 알고 있는 건 알렉스 스타일스 같은 난봉꾼들만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리고 맹세컨대 토미는 이제 이걸 수습할 기회는 거의 남지 않았고, 굳이 기회가 남았다고 친다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알렉스를 단호하게 거절하거나 바람을 맞히거나… 여하튼, 다소 매정하고 매몰찬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했다. 둘 사이엔 접점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고, 죽을 때까지 없을 것이란 것을 모두의 앞에서 인식시키는 일. 토미에겐 바로 그런 이벤트가 필요했다. 그렇다고 그런 일 따위를 시도할 생각은 없었다. 알렉스가 못마땅하긴 했지만, 그는 굳이 나서서 남을 헤집거나 상처 입히는 일을 하는 부류가 아니었다. 그렇다, 그게 바로 알렉스 스타일스와 토미 화이트헤드의 차이점이 아니겠는가! 가엾은 린다. 린다 오스본!

알렉스는 도시락을 들고 홀을 가로질러 토미의 옆자리로 왔다. 구석진 곳에 앉아 홀로 매점 샌드위치를 먹고 있던 토미는 그가 다가오는 걸 보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알렉스가 어깨를 붙잡아 토미를 앉혔다.

“아직 샌드위치가 남았잖아, 그렇지?”

알렉스가 윙크를 해서, 토미는 정말로 구토를 할 뻔했다… 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사실 이런 류의 최면은 알렉스가 정말 잘생겼으므로 거의 토미에게 들어먹는 일이 없었다. 윙크를 하던 애교를 부리던 알렉스가 하면 정말 괜찮게 보였다. 다만 토미는 ‘낯부끄럽지 않게 잘도 저런 짓을 하는 구나…’하고 감상에 빠질 뿐이었다.

어쨌든 토미는 다시 자리에 앉아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샌드위치를 들었다. 그러나 식욕이 뚝 떨어져 더는 베어 먹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게다가 그건 굉장히 맛이 없었다. 짐이 싸준 도시락이 있긴 했지만 토미는 그것을 열어보는 대신 매점에서 샌드위치를 사왔다. 그리고 그건 정말 잘못된 선택이었다……. 짐의 도시락을 꺼냈다면 알렉스가 오기 전에 그것을 해결하고 자리를 떴을 수도 있었고, 그럼 알렉스에게 발견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훨씬 맛있는 점심을 했겠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토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알렉스는 자신의 도시락 통을 열었다.

“오, 샌드위치네.”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잠시, 토미는 그걸 좀 의외라고 생각했다. 알렉스는 얼핏 보기에 식당에서 비싼 밥을 사먹거나 외부로 나가 아무 레스토랑에서 무엇이든 주문할 인상으로 보였던 것이다. 도시락은, 그러니까… 좀 가정적이지 않은가. 짐처럼. 알렉스에게 그런 가족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지는 않았다. …Nevermind. 토미는 신경을 껐다.

“Hey, 토미.”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토미이.”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다.

“이유만 알려달라니까.”

“어제 네 가지는 댔던 것 같은데.”

“세 가지야.”

알렉스가 정정해주었다.

“그게 그거지.”

토미가 대꾸했다.

“납득 가능한 이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내가 바쁜 게?”

“오, 아니, 그건 이해가 되긴 해.”

알렉스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확히는 그 뒤의 두 개가. 넌 헤테로도 아닌데 남자랑 데이트도 안 하고…….”

“헤테로가 아니라고 말하지 않았어.”

“그럼 헤테로야?”

토미는 대답 대신 맛없는 매점 샌드위치를 베어 물었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정말 맛이 없었다. 알렉스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어쨌든 말이야. 그리고 설령 해도 나랑은 안 한다며.”

“그래.”

토미는 속이 메스꺼워지는 걸 느꼈다.

“내 말이 그 말이야.”

“그게 바로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야.”

알렉스가 자신의 샌드위치를 한 입 물곤 Hmm, 하고 만족스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그는 싱싱한 양배추를 아삭아삭하게 씹으며 열정적으로 물었다.

“이것 봐.”

“뭘?”

토미는 알렉스 입에 든 양배추를 역겹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조금 낙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거기 말고, 내 전체적인 얼굴을 보라고.”

그래서 토미는 그렇게 했다.

“어때?”

“뭐가?”

“잘생겼잖아.”

토미는 전 인류에게 투자할 수 있는 혐오의 총량을 그 순간 다 소진해버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 진짜 너무하다. 사진으로 찍어놓고 내가 심각해져야만 하는 순간에 꺼내보고 싶어. 이를테면 헌혈할 때.”

알렉스가 투덜거리자 토미가 매정하게 대꾸했다.

“그건 불법이야.”

“장난 아니거든!”

알렉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라면, 그것도 솔로인 상태에서, 내 얼굴로 데이트 하자고 했을 때 이미 뻑갔을 거야.”

“잘 됐네, 너 혼자 데이트 해.”

“그게 데이트야?”

알렉스가 진심으로 물었다.

“너 내 얼굴이 싫어?”

토미는 좀 질렸다는 목소리로 한숨을 쉬었다.

“알렉스… 네가 잘생겼다고 모든 데이트 신청을 거절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지 말아줄래.”

“내가 잘생겼다곤 생각하는구나.”

알렉스는 단순해보일 만큼 행복해졌다.

“그럼 뭐가 문제인데?”

“네가.”

토미는 매점 샌드위치를 포기하고 종이로 뭉쳤다. 거의 절반은 먹었지만, 그 이상 해낼 자신이 없었다.

“난 네가 싫어. 아니, 싫다기보다… 그러니까, 너랑 있는 게 싫어.”

“왜?”

토미는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홀을 가득 채운 학생들을 훑어보았다. 그들 중 대다수는 음식에 집중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몇 명은 분명하게 그들이 앉은 테이블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토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난 조용히 지내고 싶어.”

‘그런 것치곤 존나 유명하던데.’

알렉스는 속으로 생각했지만 구태여 입으로 뱉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넌 클로짓게이구나.”

토미는 곤란하단 표정으로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입술을 물었다.

“입 닥쳐.”

“왜?”

“아니니까.”

“아니야?”

토미는 다시 주변을 훑어보았다.

“아니야.”

토미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Whatever.”

잠시 침묵이 있었다. 홀 안은 온통 식기 부딪히는 소리와 달그닥 거리는 락앤락 통 소리로 시끄러웠다. 아이들이 낄낄거리며 떠드는 가운데 토미는 어색하게 테이블 아래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휴대폰이 울렸다. 토미는 허겁지겁 텍스트를 확인했다.

 

gib22 : 무슨 일인데? :>  12:14

 

“오, 이거 너희 부모님이 싸주신 거야?”

알렉스가 토미의 팔 아래에 놓인 짐의 도시락을 가리켰다. 토미는 홀드를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어, 아마도.”

“대답이 이상한데.”

알렉스가 샌드위치의 마지막 조각을 털어 넣었다.

“그런데 왜 안 먹어?”

“매점 샌드위치가 먹고 싶어서.”

토미가 재빨리 둘러댔다. 알렉스는 의미심장한 눈으로 구석에 박힌 볼품없는 매점 샌드위치와 짐의 도시락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너 입맛이 아주 특이하구나.”

“알 거 없잖아.”

“내가 맞춰볼게. 이거 네 아빠가 만든 거지?”

토미는 말문이 막혔다.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널 데리러 오니까? 원래 그렇잖아. 부지런한 쪽이 이런 일을 해낼 수 있는 거라고.”

알렉스는 마지막 조각을 완전히 삼킨 후 다시 한 번 윙크를 해보였다. 이번에 토미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거나 그 미소에 반항할 힘이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그저 고개를 돌리기만 했다.

“따지자면 아빠지만 별로 아빠인 것도 아니야.”

토미가 말했다.

“오.”

알렉스는 눈치껏 되묻지 않았다. 토미는 처음으로 그것에 조금의 호감을 느꼈다.

“먹을래? 어차피 버릴 거야.”

알렉스는 탐탁지 않은 얼굴로 토미의 도시락을 바라보다가 코를 찡긋거렸다.

“아니, 네가 먹는 게 낫겠는데… 버리지 말고.”

“네 알 바는 아니지.”

토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고, 알렉스는 그의 방어적인 태도에 다소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하게도 그것에 대해 더 캐묻거나 에둘러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거절당한 그 자리에 멈췄고, 입을 열지 않았고, 그리고 그건…… 짐을 생각나게 했다. 토미는 이제 완전히 메스꺼움을 느꼈다. 데이트를 거절했을 때처럼 굴었다면 좀 더 나았을 지도 모른다. 그럼 알렉스에게 샌드위치를 던질 수 있었을 텐데, 그럼 모두가 그것을 지켜보고 자신이 알렉스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려줄 수도… 있었다.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만약 알렉스가 그렇게 했다면, 신이 한 번의 기회를 내려줬던 셈이라고 토미는 분명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은 토미에게 더는 기회를 줄 생각이 없어보였다. 이제 토미는 스스로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만 했다.

그러나 토미가 이 주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어떤 시도라도 하려던 참에, 고맙게도, 알렉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뭘 하면 나랑 데이트해줄래?”

토미는 마음속으로 이모지를 생각했다. :> 무슨 일이야? 오, 별 거 아니야, 전에 말한 걔한테서 데이트 신청을 받았어. 와, 뭐라고 대답했어? 거절했는데, 조건을 걸어보기로 했어. 어떤 조건?

‘더러운 놈!’ ‘오, 가엾은 린다 오스본! 임신했대?’ ‘그렇대!’

“네가 린다 오스본에게 사과하면.”

토미가 말했다.

“너랑 데이트할게.”

그 순간, 토미는 방금 전까지 생글거리던 알렉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무거운 침묵이 있었고, 모두의 웃음소리가 멀어졌고, 달그닥거리는 홀의 잡음과 작은 비명소리와 매점 앞에서 웅성거리는 군중의 웅성거림이 천천히 세계 뒤편으로, 아주 천천히 밀려났다. 그들은 잠시 진공상태에 도달했다가, 이내 순식간에 세계 한가운데로 되돌아 왔다.

“…좋아, 토미.”

알렉스 스타일스가 대답했다.

“약속한 거야. 무르는 순간 이 말도 안 되는 조건을 건 너를 박살내버릴 테니까.”

그런 후, 알렉스는 미소를 지었다. 어딘지 일그러진 것 같은 웃음이었고, 토미는 대체 그가 왜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토미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Chatting Dialog

gib22 : 무슨 일인데? :>   12:14

Tommy0612 : 어… 그냥 좀.   17:08

Tommy0612 : 하지만 일단 다 끝났어.   17:08

gib22 : 심각한 일이었어?   17:15

Tommy0612 : 음.   17:18

Tommy0612 : 잘 모르겠는데.   17:18

Tommy0612 : 몇 가지 점을 제외하면 그럭저럭?   17:18

gib22 : 어떤 점?   17:18

Tommy0612 : 학교 최고의 가십꾼들이 한 판을 벌였고, 난 사이에 껴서 구경꾼들의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한데다가, 그 싸움이 끝나자마자 공개적으로 데이트 신청을 받고, 그 뒤에 곧장 전교생이 보는 앞에서 멋지게… 토했다는 점?   17:18

gib22 : oh.   17:20

gib22 : are you okay?   17:20

.

gib22 : are you really okay, Tommy?   17:22

.
.
'no.'
.
.

Tommy0612 : yes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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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0 a.m.

월요일 등교 시간, 알렉스 스타일스가 주차장에서 학교 최고의 퀸카에게 따귀를 얻어맞는다. 주변에는 열댓 명의 구경꾼이 있었다. 토미는 차에서 막 내린 참이었다. 매니큐어를 꼼꼼하게 바른 린다 오스본의 긴 다섯 손가락이 알렉스의 뺨을 강타할 때, 구경꾼들로부터 일제히 감탄이 터져 나왔다. 워! 토미는 얼굴을 찡그렸다. 알렉스가 화를 낼까? 아니, 절대 그렇지 않다! 울음을 터뜨린 건 린다였다. 그녀는 마치 거대한 재앙을 막 목격한 사람처럼, 다소 인위적인 격양으로 가득 찬, 길고 시끄러운 신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불과 십분 전까지 그들을 태우고 왔던 스포츠카의 좌석에 던져진 키를 집어든 후, 보란 듯이 알렉스의 품으로 던졌다.

“더러운 놈!”

“오, 조심해.”

키를 엉거주춤 받아든 알렉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토미가 서있는 쪽으로부터 등을 지고 있어서 토미는 단지 알렉스의 어깨 너머로 시큰거리는 린다의 눈물을 통해 그녀가 얼마나 화가 나있는지 만을 간신히 짐작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일이 심각해지고 있는 것 같은데도 알렉스는 그녀를 달래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알렉스가 말했다.

“볼 일 남았어?”

“있겠어?”

린다는 경멸어린 눈으로 알렉스를 쏘아보며 고개를 저었다. 

“다신 말도 걸지 마.”

“오, 그래.”

“꺼져!”

린다가 요란한 하이힐 소리를 내며 빠르게 자리를 떠났다. 알렉스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거두었다.

“그런 것치곤 본인이 떠나고 있는데 말이지. 잘 가, 오스본! 생각나면 연락하고!”

린다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비실비실한 웃음을 흘리며 중얼거리듯 덧붙였다.

“물론 네 혐오와 분노가 정상적인 범주로 돌아올 수 있다면 말이야.”

구경거리가 사라지자 학생들은 빠르게 흩어졌다. 알렉스는 몸을 돌려 스포츠 차에서 백팩을 꺼내 어깨에 걸친 후, 키를 만지작거리다 공중으로 휙 던져 올렸다. 토미와 시선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알렉스는 시선을 고정시킨 채 키를 솜씨 좋게 낚아챘다. 그가 잘생긴 얼굴로 장난스럽게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Hey, 안녕.”

토미는 뒤를 돌아 아무도 없는 주차장 쪽을 확인했다. 알렉스가 손가락으로 짚었다.

“오, 아니. 너 말이야.”

토미는 고개를 돌려 알렉스를 바라보았다. 알렉스가 손을 흔들었다.

“재밌는 구경거리 잘 봤어?”

토미는 대답 대신 얼굴을 찡그렸다. 그리고 못 볼 걸 봤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물러났다.

“너 코피나.”

알렉스가 몸을 숙이고 황급히 인중을 더듬었다. 검지와 중지에 선명한 피가 묻어나왔다. 그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토미는 교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알렉스는 손등으로 피를 훔치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이내 백팩을 고쳐 매고 차문을 닫았다. 학교 종이 치고 있었다.

 

12:24 a.m.

모두가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학교 최고의 퀸카와 학교 최고의 킹카의 한 달 연애가 막 쫑난 참이었고 불과 한 시간 만에 가십거리는 무서울 만큼 몸집을 불려서 이제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조차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임신시켰대. 정말? 무슨 소리야, 걔 섹스할 땐 무조건 콘돔 쓰거든. 그걸 어떻게 알아, 해봤냐? 오, 넌 그럼 안 해봤어? 으스대긴, 마음만 먹으면 다음 달엔 걔랑 내가 애인 사이가 되어있을 걸? 하긴, 그 알렉스인 걸!

알렉스 스타일스는 이 모든 소란 속에서도 자신의 얼굴근육이 얼마나 유연한지 보여주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보였다. 그는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멋지고 상쾌한 웃음을 지어주었고, 수업에 앉아 열심히 필기했고, 심지어는 몇 가지 질문을 하기 위해 손을 들다가 껌을 씹는 것을 들켜 지적을 받기까지 했다. 퉁퉁 부은 왼쪽 뺨만 제외하면 그는 정말 괜찮아보였다. 오히려 괜찮지 않은 건 린다 쪽인 것 같았다. 그녀는 하루 종일 법석을 떨며 쉬는 시간마다 몰려드는 친구들에게 자신이 처한 끔찍한 상황을 전달하고 싶어 했다. 헛구역질을 하는 시늉을 하거나 각종 손짓을 동원해 이야기를 과장하는 식이었다. 월요일엔 린다 오스본과 강의실에서 적어도 세 번은 마주쳐야 하는 토미 화이트헤드-그는 학기 초 린다와 같은 스쿨 멘토에게 스케줄 조정을 조언 받았다-는 불쾌한 기색을 감춘 채 일련의 사건으로부터 자신을 멀어지게 하려 애썼다. 그가 싫어하는 건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가십이고 나머지 하나는 소란이었다. 요컨대 토미는 남의 이야기에 가능하면 신경을 끌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을 선호하는 개인주의자였고, 그런 이유로 그는 이 사건이 총체적으로 달갑지 않았다. 쉬는 시간마다 요란하게 사람을 끌고 강의실을 옮겨 다닐 린다를 생각하면 벌써부터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이미 알렉스와 교제하던 지난 한 달 동안에도 충분히 시끄러웠던 것이다. 원하지 않았지만, 토미는 그녀와 알렉스가 지난 한 달 간 어디를 다녔고 주로 무엇을 먹었으며 심지어는 주말에 만나 어떤 섹스를 했는지도 알고 있었는데 이는 결코 알고 싶은 정보가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tmi(too much information)의 표본이라고 할까. 그런데, 그렇게 깨를 볶던 그 둘이 왜 깨진 걸까?

그러니까 말이다. 대체 그 둘은 왜 깨지고 만 것일까? 그야말로 우리 모두가 알고 싶어 하는 주제였다. 무엇을 겪던 떠들지 않곤 못 베기는 린다의 말에 따르면, 알렉스는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 했다는 것이다.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걘, 그렇게 나를 속이고, 주말마다 했어! 오, 맙소사. 상상이 가니? 난 수십 번이나 그 병에 노출될 위기에 처해있던 거야. 난 그런… 인생의 위기를 잘 해쳐낸 내가 대견스러워.” 

그럼 대중들의 반응은 어떨까? 

링컨 스쿨의 학생들은 진작부터 알렉스의 지난 사생활에 대해 알고 있었으며, 언젠간 일이 이렇게 될 것이라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다는 투였다. 

A : 왜, 린다는 전학생이잖아. Freshmen때부터 알렉스를 알고 있었으면 진작부터 피해갈 수 있었을 걸. 전교에서 알렉스 소문 모르는 사람이 있어? 린다는… 순수했지. 

B : 아주 순수했지.

A : 솔직히 린다가 지나치게 유난을 떨고 있긴 해.

B : 오, 유난이 아니지. 나라도 내 남자친구가 알렉스 같았으면 큰 상처를 받았을 거야. 

A : 아니, 아니. 아니지, 그게 무슨 상처가 되는데? 알렉스가 바람을 피운 것도 아니고. 그는 잘해줘. 어쨌든 사귈 땐 한 사람에게 올인하잖아

B : 어쨌든 그는 망할 호모라고!

A : 여자랑 자는 게이도 있냐?

B : 알게 뭐야!

A : 어쨌든 린다가 유난스러운 건 맞아. 지금까지 알렉스랑 사귄 여자애들이 다 저렇진 않았어.

B : 하!

A : 남자애들도. 혹은 뭐, 다른 애들도 있을 수 있고.

C : 소문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

A : AIDS랑 게이를 연결하는 사람은 호모포비아지. 멍청이 아니면 그런 말 안 믿어.

B : 난 믿어.

A : 그럼 넌 망할 호모포비아인 거고.

C : 너희들 굉장하네!

A : 칭찬 존나 고맙다.

 

여기서 알렉스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알렉스. 알렉스 스타일스! 그는 걸어 다니는 가십 자판기고 잘 빠진 미남이다. 비율도 좋고 패션센스도 있으며, 제법 점잖고 모두에게 상냥하기까지 하다. 그는 링컨 스쿨의 Freshmen에서 Sophomore로 올라가는 동안 애인을 총 스물다섯 번 갈아치웠고(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그는 몸소 보여주었다)다시 Junior로 진학하는 동안 대충 열 번을 갈아치웠다. (기세가 주춤한 걸 보아하니 요양이라도 하고 싶었던 모양이지?) 그리고 사이언스 위크(링컨 스쿨의 3월 일정엔 2주 간 열리는 큰 과학 행사가 있다)에 당도한 화제의 전학생 린다 오스본을 잡아 한 달을, 무려 한 달을 연애했다. 알렉스의 한 달은 굉장한 기록이다. 그는 평균 일주일 정도면 관계를 정리했으니 말이다. 전부 돈 때문이라는 소문도 있었다. 오스본은 굉장한 부잣집 딸인데다가, 금발이고, 예쁘장한데다가 돈도 잘 썼다. 특히 어떻게 사치를 부려야 할지 굉장히 잘 알고 있는, 자본주의적인 의미에서 굉장히 영리한 아가씨였다. 그녀는 원하는 만큼 알렉스를 시가지 호텔의 파티에 데리고 갔고, 비싼 스포츠카를 몰도록 허락하며, 단둘이 있고 싶을 땐 그녀의 빌라 꼭대기 층에 있는 풀로 불러들였다. 알렉스가 못 사는 편은 아니었다. 사실, 그도 부자일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니까 그런 사치가 알렉스를 감화시킬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려 한 달. 한 달 간 알렉스는 그 짓을 했던 것이다. 사랑이다!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물론, 알렉스는 매 순간 진심을 다한다. 그와 사귀어 본 무수한 애인들은 관계가 끝난 후에도 대체로 알렉스를 미워하기보다 귀여워했다. 혹은 다신 없을 굉장한 애인이었다고 떠들어댔다. 놀랍게도 난봉꾼 알렉스의 평판은 극과 극이었다. 그를 싫어하는 사람은 사력을 다해 그를 증오했다. 그러고 싶어서 안달 난 것처럼 보이는 무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는 사람은 진심으로 알렉스를 사랑했다. 그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팬클럽도 있었다. 어쨌든, 난봉꾼 생활을 청산한 알렉스가 한 달 간 린다 오스본에게 몸과 마음을 매진하는 동안 학교는 새로운 가십거리가 없어 시들한 분위기를 유지하면서도, 다른 한 편으로 그 둘의 연애 생활에 관해 떠들어 대느라 몹시 산만했다. 이번에야말로 알렉스가 제 짝을 만난 게 틀림없다는 여론보다는, 대체 왜 ‘하필’ 린다 오스본이여야 하냐는 투덜거림이 주를 이뤘으니 둘이 산산조각 난 지금, 샴페인을 들 작자들이 이 학교에 차고 넘쳤다는 걸 누구도 부정할 순 없겠지만 말이다.

토미 화이트헤드는 이 모든 것에 관심이 없었다. 솔직히 말해서, 이 모든 소란의 시발점인 알렉스가 학교에서 꺼져주거나 혹은 전학이라도 가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는 장학금을 노리고 있었고, 모범생이었으며, 진정한 인생의 행복은 지금 획득하는 것이 아닌 예정되어 있는 것이고, 그 확신에 필요한 신탁계좌와 아이비리그 졸업장의 티켓이 바로 성적표에 있다고 생각했다. 알렉스가 누구와 붙어먹던 그것은 토미와 아무 상관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었다. 토미는 가능하면 엮이지 않기 위해 줄곧 알렉스를 솜씨 좋게 피해 다녔고(눈에 띄지 않도록 스스로를 숨기는 건 토미의 몇 안 되는 재능이다) 알렉스는 Junior가 되어서도 토미의 존재를 결코 모르고 있었다. 이제 그들은 각자의 세계에 살며 Senior가 될 것이고, 그것이 바로 토미가 바라던 바였다. 그래서 이른 아침 알렉스가 토미에게 인사를 건넸을 때, 그는 속으로 굉장히 놀랐다. 알렉스의 왼뺨은 린다의 손자국으로 인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고, 그의 웃음은 굉장히 우스꽝스러웠다. 토미는 하마터면 그의 인사를 받아주는 인생 최대의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그는 알렉스에게 조금 동정심을 느꼈다. 구경꾼들 중 그 누구도 알렉스를 걱정하거나 챙기지 않았던 것이다. 다툼 이후 곧장 자리를 뜬 린다의 곁으론 서너 명의 사람들이 붙었는데도 말이다. 알렉스는 혼자 남겨져 있었고, 유일하게 그 자리를 뜨지 않은 토미에게 인사를 건넸다. ‘인사’를 건넨 것이다. 맙소사, 왜 하필 자신이란 말인가? 토미는 덕분에 오전 내내 찜찜한 기분으로 굳이 가지지 않아도 될 죄책감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린다 오스본과 알렉스 스타일스에 대한 가십거리-그러니까, 임신과 콘돔, 섹스에 관한 것이었다-를 듣는 순간, 그 얕고 개인적인 동정과 죄책은 사라지고, Tommy's page에 알렉스에 대한 평가가 한 줄이 더 추가됨으로서 그 모든 내부적 갈등은 비로소 종식될 수 있었다. 토미의 페이지, 목차 알렉스 - 난봉꾼, 아웃팅의 천재, 멍청이, 그리고 철부지. 비고 : 주의요망!

 

2:46 p.m. 

[작성자] Tom0612

전에 말했던 걔 말이야, 깨졌대.

학교가 온통 뒤집어져서 시끄러워 죽겠어.

└ 보통 학교가 그렇게까지 남의 연애 사에 신경 쓰냐? -df***

 └└ 어지간히 잘생긴 놈인 모양이지. -hurrion

  └└└ 진심 얼굴 존나 궁금하다. -df***

    └└└└ 근데 넌 왜 아이디 블러처리 하냐? 매너 없게. -hurrion

└ 잘 됐네. 한 번 꼬셔봐. :> -gib22

 └└ 내가 왜? 관심 없다니까. -tom0612

  └└└ :< -gib22

 

경적 소리에 토미가 고개를 들었다. 짐이 차에서 내렸다. 

“토미!”

토미는 휴대폰을 껐다.

“빨리 오셨네요.”

“가는 길에 퍼블릭 마켓에 들릴 생각이다. 네 여동생도 태우고.”

“늦는다고 문자 보낼까요?”

“아니, 먼저 태우고, 장을 보러 갈 거야.”

짐은 토미의 가방을 받아 뒷좌석에 밀어 넣은 후 조수석을 열었다. 토미가 어깨를 으쓱하곤 뒷좌석 문손잡이를 잡았다.

“어… 전 그냥 뒤에 탈게요. 엠마가 조수석을 좋아해요.”

“오, 그래.”

짐은 허둥대지 않고 건조하게 대꾸했다.

“좋을 대로 하렴. 괜찮다.”

짐이 시동을 걸고 라디오 채널을 맞추는 동안, 토미는 고개를 돌려 교문으로 쏟아지는 인파를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천천히 한 명 한 명을 주의 깊게 뜯어보다가, 이내 주차장으로, 아침의 그 소동이 있었던 바로 그 장소로 옮겨졌다. 린다의 파란 스포츠카는 그대로 거기 있었다. 그나저나, 분명 린다의 차였는데 왜 린다는 키를 알렉스에게 집어던진 것일까? 그는 그것을 돌려줬을까?

“토미, 늦기 전에 출발해야지.”

“아, 네. 죄송해요.”

토미는 뒷좌석에 탔다. 차문을 닫자 짐이 에어컨을 틀어주었다. 습도 높은 찬바람이 차 냄새와 함께 좌석 곳곳으로 불어 닥쳤다. 라디오에선 케이티 페리의 노래가 나오는 중이었다. 학교 주차장을 벗어나다말고 짐이 신음했다.

“맙소사, 저런 스포츠카를 학교에 끌고 오는 놈도 있냐?”

토미는 차창 너머로 스쳐지나가는 린다 오스본의 BMW를 흘겨보았다.

“놈이 아니고 여자애 거예요.”

“뭐라고?”

짐이 라디오 볼륨을 줄였다. 토미는 대꾸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짐은 사거리를 빠져나와 외곽도로를 탔다. 토미와 그의 여동생 엠마의 학교는 차로 삼십 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짐은 그와 엠마를 등교시키고 다시 데리고 오는 것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케이티 페리의 곡은 후렴부로 들어서고 있었다.

 

Lets go all the way tonight

오늘 밤 끝까지 가보는 거야

No regrets, just love

후회 따윈 없어, 그저 사랑뿐이야

We can dance until we die

우린 죽을 때까지 춤출 수 있어

You and I, Well be young forever

너와 나, 우린 영원히 젊을 거야

 

노래로 채우고 있던 어색한 침묵을 깨뜨리고, 짐이 물었다.

“토미, 학교에선 별 일 없었니?”

그 말은 굉장히 의무적이고 사무적으로 느껴져서 오히려 토미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토미는 화면으로 뜬 리플 몇 개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내가 보기엔, 관심 있는 것 같은데. -gib22’

"어, 음. 네. 별 일 없었어요.“

토미는 휴대전화를 껐다. 짐이 대답하지 않아서 토미는 한 번 더 대꾸해야 했다.

“정말로요.”

“그럼 됐다.”

차가 빨간 불에 걸렸다. 그들은 이제 속수무책으로 케이티 페리의 노래를 들어야만 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순간 토미는 짐이 아주 밟아주거나, 혹은 아예 영영 멈추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럴 일은 없었다.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다시 신호가 바뀌었고, 차가 출발했다. 노래는 끝나가고 있었다.

 

미들스쿨로부터 아이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엠마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토미, 옆으로 좀 가.”

토미는 앞좌석을 흘겨보았다. 짐은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엠마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다시 한 번 또박또박 말했다.

“토미, 옆으로 가라니까.”

토미는 엉덩이를 구석으로 옮겼다. 엠마가 어깨까지 오는 단발을 찰랑거리며 앉자 차체가 작게 흔들렸다. 짐이 라디오 볼륨을 낮췄다.

“학교는 잘 다녀왔니, sweetie?”

“오, 그냥 그랬어요. 사실 친구랑 좀 싸웠는데 화해했어요. 괜찮아요.”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게 괜찮은 거야?”

“네가 뭘 안다고?”

“둘 다 그만해라.”

짐이 말꼬리를 잘랐다. 토미가 짐을 바라보았다.

“뭘요? 저흰 싸우지도 않았는데?”

“내 눈엔 그럴 것처럼 보였다.”

“아빠는 너무 걱정이 많아요.”

엠마가 어깨를 으쓱했다. 

“오빠랑 전 늘 이래요.”

짐은 대답하지 않고 시동을 걸었다. 차가 출발했다. 이제 라디오에선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시끄러운 곡이 나올 기미는 없었다. 넓은 도로를 타자 차가 늘어났다. 짐은 교통 방송으로 채널을 돌렸다. 창가에 턱을 괸 채 고개를 돌린 토미와 엠마가 백미러의 양 사이드에 앉아 있었다. 짐이 백미러를 흘끔거리며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집에 가기 전에 퍼블릭 마켓에 들릴 예정이다.”

“오, 잘 됐네요! 전 오늘 피자가 먹고 싶어요.”

토미가 작게 덧붙였다.

“난 피자 싫은데.”

엠마가 토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어차피 넌 제대로 먹지도 않을 거잖아.’

‘먹을 거거든?’ 

‘시끄러워.’

“아빠, 토미도 피자가 좋대요!”

“그럼 그렇게 하자. 토미?”

토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돌렸다.

“…네, 좋아요.”

“와! 피자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토미는 이번에 화면조차 확인하지 않고 전원을 꺼버렸다. 라디오의 교통방송이 끝나가고 있었다. 차는 덜컹거리며 퍼블릭마켓을 향해 달려 나갔다. 

-

'Site'는 미국 서부에 거주하는 게이들을 위한 대형 커뮤니티 사이트다. 데이트, 채팅, 잡담과 원나잇 외 잡다한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창립 초기엔 작은 규모로 소수 인원을 받아 운영되었지만, 디도스 공격과 해킹 시도를 겪은 후 서버를 교체하고 완전 익명제로 바뀌었다. 그 뒤로 알음알음 유입된 인원들로 하여금 차차 몸집을 불려 이제는 이름 그대로 거대한 하나의 사이트(site)가 되었고, 지금은 포털 사이트 못지않은 기능과 인터페이스를 갖추고 있었다. 토미가 Site를 알게 된 건 열네 살 때였다. 그가 그곳에 곧바로 가입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그 사이트의 존재를 알자마자 잊어버렸다. 그가 Site를, 주변엔 암만 뒤져봐도 보이지 않는 존재들이 사실 곳곳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을, 이 거대한 미국 서부, 하다못해 캘리포니아 주에서조차 수천 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토미 역시 결코 오류 혹은 돌연변이가 아님을 증명해줄 수 있는 그 거대한 커뮤니티를 떠올리는 건 좀 더 나중의 일이다.

엠마가 벌컥 문을 열었다.

“토미!!”

“엠마, 제발 내 방에 들어올 땐 노크 좀 해줄래?”

토미가 짜증을 참는 얼굴로 의자를 돌렸다. 엠마는 어깨를 으쓱했다.

“피자 안 먹어?”

“생각 없어. (있겠냐?)”

“아, 그래……?”

시선의 이동을 느낀 토미가 황급히 노트북을 닫았다. 엠마는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누구랑 채팅해?”

“안 해.”

“했잖아! 네가 누구랑 채팅도 해?”

“아니라니까.”

“텍스트로 도배된 창 다 봤거든?”

“메일이야.”

토미는 얼결에 마구 뱉었다.

“학교, 과제야.”

“흐음.”

엠마는 미심쩍다는 표정이었으나 곧 흥미를 잃고 문지방에서 물러났다.

“아무튼 생각 없어도, 나중에 내려와서 먹어. 짐이 슬퍼할 거야.”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긴! 그는 이제 우리 가족이라고! 맙소사, 피자를 직접 만들어줄 줄 누가 알았겠어? 맛없어도 두 조각은 먹을 각오를 했는데, 심지어 맛있어서 네 조각이나 먹었어.”

“알겠으니까 제발 빨리 나가.”

“피자 먹을 거야?”

“나중에.”

토미는 마지못해 덧붙였다.

“아무도 없을 때 내려가서 한 조각만 먹을게.”

“오븐에 넣어놓을게. 식기 전에 먹어.”

“그래… 엠마, 제발 나갈 때 방문 좀 닫아!”

엠마는 뒤돌아보지 않고 층계를 내려갔다.

“엠마!”

fuck. 작게 욕을 중얼거린 토미가 자리에서 일어나 세게 문을 닫았다. 분은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이사를 온지 벌써 일주일이 지났지만 문의 잠금장치는 여전히 고장 난 채로 방치되어 있었다. 새 집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토미는 생각했다. 정원엔 낡은 스프링클러가 있고, 문은 하얗고, 지붕은 붉네. 이보다 더 진부한 집이 있을까? 엠마도 같은 인상을 받은 것 같았다. 차에서 내린 둘은 집을 보며 오두방정을 떠는 엄마를 지나쳐 심드렁하게 문으로 들어섰다. 짐은 엄마의 열렬한 반응에 몹시 신난 기색으로, 토미를 직접 층계에 데리고 가 그의 것이 될 예정인 빈 방을 보여주었다. “집에서 두 번째로 큰 방이란다.” 짐은 무슨 자랑스러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했다. “제니와 거실을 둘러보고 있을 테니, 원하는 만큼 있다가 내려오렴.” 그리고 그는 토미를 빈 방에 버려둔 채 계단을 내려갔다. 아무 것도 없는 방에 홀로 남겨진 토미는 건성으로 공간 전체를 훑어보았다. 가구가 옮겨지지 않은 방은 짐의 말대로 굉장히 크게 느껴졌으나, 동시에 그만큼 텅 빈 까닭에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인상을 주었다. 구석엔 칠이 조금 벗겨진 벽장이 있었고, 창문은 왼쪽으로 크게 나있었다. 햇빛이 스포트라이트처럼 마룻바닥으로 쏟아졌다. 토미는 몇 번 훑지도 않고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 문고리를 잡았다. 덜컥, 하고 허술한 무게감이 잡혔다. 토미는 손을 떼어내고 문고리를 살폈다. 그러나 겉으로 보기에 그것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토미는 다시 한 번 문고리를 잡아보았다. 덜컥. 토미는 허리를 숙이고 얼굴을 찡그린 채, 문고리에 바싹 시야를 붙였다. 그러자 안쪽, 잠금장치의 핀 버튼이 미묘하게 어긋나서 구멍에 아무렇게나 박혀 있는 것이 보였다. 토미는 층계를 내려왔다. “문고리가 고장 났어요. 수리해야 해요.” 짐은 큰일도 아니라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오, 이사하기 전에 내가 사람을 불러 수리해놓으마.” 

그리고 일주일이었다. 일주일. 일주일이면 사람을 부르는 건 고사하고 본인이 문고리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고칠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 짐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빌어먹을 피자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이 여기 있었는데! 사실, 그는 언제나 정말 해야 할 일은 잊어버리는 남자였다. 토미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인상은 대게 그대로 굳어지는 법이다.

자리로 돌아온 토미가 노트북을 펼치자, 스크린이 깜빡이며 마지막 작업 창을 띄워주었다. 채팅은 거기서 멈춰있었다. 개인 채팅 방이었고, gib22가 이모지를 남겨놓았다.

 

gib22 : 그럼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16:43

gib22 : Tommy, 간 거야? :(  16:52

 

토미는 황급히 답장을 입력했다.

 

Tommy0612 : 미안, 일이 있어서.  16:54

Tommy0612 : 나간 거 아니야.  16:54

Tommy0612 : 그리고 난 정말 생각 없어.  16:54

 

잠시 뒤, 답장이 갱신되었다.

 

gib22 : Oh. :(  16:56

gib22 : 가족이 포비아야?  16:56

 

토미는 아니, 와 몰라, 중에서 머뭇거렸다. 그것은 실상 동일한 뜻이었다.

 

Tommy0612 : 몰라.  16:56

Tommy0612 : 하지만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16:56

Tommy0612 : 괜히 떠보려고 물어봤다가 일이 커지면 어떡해?  16:56

Tommy0612 : 그건 싫어.  16:56

gib22 : 동의해.  16:57

Tommy0612 : 쉬운 문제가 아니잖아. 난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불신해.  16:57

gib22 : 네가 말한 그 알렉스처럼?  16:57

Tommy0612 : 그래.  16:58

Tommy0612 : 걔처럼.  16:58

gib22 : 걔가 데이트 신청하면 거절할 거야?  16:58

gib22 : 얼굴은 잘생겼다며?  16:58

Tommy0612 : 장난해?!  16:58

Tommy0612 : 관심 없어!!  16:58

Tommy0612 : 그리고 절대 그럴 일 없어!  16:58

gib22 : 왜?  16:59

Tommy0612 : 걘 내가 누군지도 모르거든.  17:00

 

토미는 잠시 고민하다가 이렇게 덧붙였다.

 

Tommy0612 :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고.  17:00

 

채팅은 거기서 종료되었다.

-

다음주 수요일 아침, 링컨 스쿨의 주차장 앞으로 작은 행렬이 있었다. 짐은 운전대를 잡은 채 얼굴을 찡그렸다. 

“저게 대체 무슨 소동이냐?”

토미는 짐의 자동차 앞으로 지나가는 행렬 속에서 익숙한 몇 명의 얼굴들을 발견하곤 곧 흥미를 잃었다. 그들은 평소 알렉스 스타일스 옆에 삼삼오오 붙어있던 ‘패거리’들이었다.

“어, 상관 쓰지 마세요. 쟤넨 원래 쓸데없는 짓을 잘 하거든요.”

토미는 가방을 챙겨 맨 후 문을 닫았다. 패거리 중 하나가 그를 발견하고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그녀는 어깨를 잡고 구겨진 포스터 한 장을 토미에게 막무가내로 안겨주었다.

“헤이, 헤이. 너도 받아.”

토미는 인상을 찌푸리며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알렉스를 어떻게 생각하세요?

▫존나 좋아!!

▫좋아!

▫그냥 그래

▫조금 싫어

비고 :

 

“워워, 조심해. 넌 지금 알렉스의 얼굴을 구기고 있어.”

그녀는 토미가 붙잡고 있는 포스터 상단을 조심스럽게 펼쳤다. 그곳엔 백만 불짜리 미소를 짓고 있는 알렉스가, 허세가 잔뜩 담긴 각도로 한쪽 눈썹을 찡그린 채 손가락 총알을 날리고 있었다. 

“알렉스의 인스타그램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진으로 고른 거야.”

“아, 그래.”

토미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이게 뭔데?”

“알렉스가 만든 건데, 중요한 설문이야.”

“아, 그래.”

토미는 다시 한 번 심드렁하게 알렉스의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그거 참 중요해 보인다. 이걸로 교내 인기왕이라도 하겠대?”

“글쎄! 그건 굳이 이러지 않아도 모두가 다 아는 사실 아니야? 펜 빌려줄까?”

“어, 아니.”

“그래!”

그녀는 토미의 대답을 깔끔하게 무시한 채 포스터를 줄 때와 똑같이 막무가내로 그에게 펜을 쥐어주었다. 토미는 뚱한 표정으로 설문 항목을 내려다보았다.

 

▫존나 좋아!!

▫좋아!

▫그냥 그래

▫조금 싫어

비고 :

 

“왜… 정말 싫어는 없는 거야?”

“사실, 있었는데 알렉스가 상처 받을까 봐 우리가 뺐어.”

“아, 그래.”

토미는 오래 고민하지 않고 비고를 채워 넣은 후, 다시 볼펜을 돌려주었다. 그녀는 경쾌한 미소로 딸깍딸깍 볼펜을 누르며 주머니에 도로 집어넣었다. 앞서가던 무리들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시, 빨리 와!”

“오, 이런.” 

제시는 호들갑을 떨다가 재빨리 손을 흔들며 앞으로 달려 나갔다.

“안녕, 다음에 봐!”

“잠시만, 이건?”

“아, 포스터는 가지고 있어, 나중에 수거하러 올게! 안녕!”

제시는 경고하듯 토미의 손에 들린 포스터를 손가락으로 짚으며 재차 당부했다.

“버리지 마! 네 얼굴 기억했어!”

그리고 그녀는 떠났다. 알렉스의 패거리와 그의 팬클럽으로 추정되는 무리는 그렇게 시끄러운 트럼펫 소리와 웃음소리를 달고 주차장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토미는 이미 주차장 사방에 굴러다니고 있는 구겨진 알렉스의 얼굴들을 조용히 훑어보다가, 포스터인지 설문지인지 모를 그것을 잘 접어 가방 안에 집어넣었다. 빵, 하고 뒤에서 클락센이 울렸다. 토미는 짐을 돌아보지 않았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지난 일주일 간 루머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선 사람치곤 제법 무탈하게 일상을 영위하고 있었다. 린다의 복수도 없었고, 그녀의 무리들의 보복도 없었고, 알렉스의 무리는 돌아왔으며 수업은 변함없이 진행되었다.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밝고 사람들은 여전히 알렉스를 사랑했다. 문제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린다와 헤어진 것은 유감이었으나 알렉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 사실 하나로 알렉스는 일련의 사건을 반으로 뚝 접어 뒤로 제쳐놓았다. 루머와 가십거리에 휩싸이는 건 이번만이 아니었으며 그는 그런 일들에 아주 익숙해서, 상처를 받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참이었다.

그는 지난 일주일 간 새로운 애인을 찾고 있었다.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연애를 삶의 필수요소처럼 취급했고, 외로움을 상쇄하고 정성을 투자할 특별한 단 한 사람을 가지는 것에 매순간 충실했다. 다행스럽게도 조물주는 알렉스에게 이런 성정을 불어넣으며 그가 비참해지지 않도록 한 가지 은혜를 내려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얼굴이었다. 잘생긴 얼굴. 아주 잘난 얼굴. 알렉스는 자신이 웃어줄 때 대다수의 인간들이 행복하게 미소를 돌려준다는 사실을 좋아했다. 거울을 보는 일이 즐거웠고, 옷을 잘 차려입는 일이 보람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인간을 가질 수 있는 일이 얼마나 굉장한 능력인지 알았고, 그 기적 같은 일이 모두 자신의 얼굴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믿었다. 유치원에서 초등학생, 초등학생에서 중학교, 그리고 다시 사립 링컨 스쿨로 이동하는 동안 알렉스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인간들을 내치지 않고 기껍게 받아들였다. 세상은 그를 향한 사랑으로 넘쳐서 삶은 도무지 쉴 틈이 없었다. 그는 자신을 찾는 모든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고, 원한다면 양 뺨에 입을 맞추거나 하룻밤을 보냈다. 남자, 여자, 혹은 둘 다거나 둘 다가 아니어도 좋았다. 알렉스를 사랑해준다면 그 역시도 충실히 그들에게 매진할 것이었다.

링컨 스쿨에서부턴 일이 다소 꼬이긴 했다. 유서 깊은 사립학교엔 사회 각 계층의 사람들이 속속들이 모이기 마련이다. 그 말은 즉 이 학교의 전교생이 가지는 종교, 가치관, 신념을 포함한 모든 특성이 켈리포니아주의 조그만 마을이 가지는 동일한 특질과 하나하나 구분되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인간의 것으로 구분된다는 뜻이었다. 알렉스는 난봉꾼이 되어있었고(사실, 그도 부정하지는 않았다. 여러 의미로 그는 난봉꾼이었다) 몇몇은 그들이 증오해 마땅한 존재를 알렉스가, 학교의 아이돌이자 모두의 우상처럼 여겨지는 그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고 입을 맞춘다는 사실에 격분했다. 그들은 알렉스가 죄를 저지르고 있으며, 잘못된 인식을 학교에 퍼뜨릴 위험이 있다고 언성을 높였다. 그러니까 요컨대 그들은 암묵적으로 ‘호모’와 ‘정신병’을 가진 자들과 섹스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알렉스는 그것을 굉장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좋다는데 굳이 밀어낼 필요가 있냐는 거야. 걔네가 누군들 어때? 날 좋아해주는 건 엄청난 일 아니야?”

그것은 진심이었다.

링컨 스쿨에 입학한 후 알렉스는 보란 듯이 애인을 갈아치웠다. 여자일 때도 있었고, 남자일 때도 있었고 혹은 둘 다거나 둘 다 아니기도 했다. 얼굴이 어떻던 인종이 어떻던 출신이 어떻던 상관하지 않았다. 입학한 지 일 년 즈음엔 알렉스를 증오하는 호모포비아들이 생겼고, 그들은 집단을 이루어 알렉스를 비난하거나 대놓고 악질적인 장난을 늘어놓기도 했다. 복도를 지나다 밀가루 계란 폭탄을 맞았을 땐 알렉스도 제법 충격을 받았다. 그러니까 그는 그렇게 완전하고, 옹졸하고, 강건하며 근본도 없는 악의를 처음 맞닥뜨려본 셈이었다. 

“정말 이상해,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긴 하지만 그게 누굴 피해주거나 상처 입히는 일도 아니잖아? 사랑을 하고, 사랑을 받고, 다시 사랑을 주지. 그런데 걔넨 바로 그 이유로 나를 공격했어. 이때까지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당시 알렉스의 대충 서른 몇 번째 애인쯤 되던 제시가 그의 가슴팍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스. 정말 신기하다. 중학교에서 그런 사람들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어?”

알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음, 글쎄. 기억에는 없는데.”

“넌 정말 운이 좋았구나.”

제시는 눈을 감았다.

“난 늘 근처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어.”

“저런 놈들이 그렇게나 많단 말이야?”

“오, 알렉스, 그들은 어디에나 있어. 그래서 넌 정말 신기해. 보통 잘생긴 애들은 멍청하고 많은 걸 신경 쓰지 않거든.”

“나도 걸핏하면 멍청하다거나 깊게 생각하지 않는단 소릴 듣는데 말이야.”

알렉스는 히죽거렸다.

“단순함이 내 매력이라고도 했었는데.”

제시는 알렉스에게 다정하게 입을 맞춰주었다.

“맞아, 넌 멍청하고 단순해. 나는 그런 널 정말 사랑해.”

제시는 정확히 삼일 뒤에 알렉스와 깨졌다. 그러나 나쁜 결말은 아니었고, 그들은 여전히 좋은 친구로 지내고 있다. 위에서 보시다시피.

엄밀히 말하자면 그놈의 ‘포스터’는 바로 제시의 아이디어이기도 했다. 그녀는 알렉스가 진심으로 사랑에 마지않았던 린다 오스본이 호모포비아라는 것에 몹시 유감을 표했다. 그녀는 지난 한 달 간 알렉스가 얼마나 린다에게 정을 쏟았는지, 그리고 얼마나 진심으로 ‘사랑을 찾은 것 같다고’ 떠들어댔는지 지켜본 장본인으로서 알렉스의 상태를 몹시 걱정했다. 비록 알렉스는 깨진 당일 날에도 유쾌하고 쾌청한 웃음으로 학교 복도를 활보하긴 했지만, 그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게다가 린다와 싸운 일요일 날, 그는 전화도 받지 않고 하루 종일 집에 박혀만 있었다! 그래서 그가 정말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책상에 다리를 걸치며 “Hey, 제시."하고 그녀를 불렀을 때, 제시는 정말이지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알렉스의 뺨은 린다에게 얻어맞은 지 불과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온통 엉망진창이었던 것이다.

“알렉스! 네 꼴 좀 봐!”

알렉스는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좀 엉망이긴 하지.”

“알렉스! 너 괜찮니?”

“오, 난 괜찮아. 그냥 새 애인을 구할 생각에 들떠있었어.”

알렉스가 고개를 돌려 익살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이자, 제시는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넌 정말 어이없고 이상해!”

“그게 바로 내 매력이지.”

“음, 린다의 일은 유감이야.”

“괜찮아, 내 잘못이 아닌 건 금방 잊어.”

“새 애인을 어떻게 찾을 건데? 또 고백이라도 받았어?”

“나 좋다고 해서 사귀고 깨진 애들만 꼽아도 벌써 이 학교의 삼분의 일일 걸.”

알렉스는 다소 과장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었다.

“이제 나 좋다는 사람은 모조리 다 사귀어봐서, 새로운 스릴이 필요해. 아, 그렇다고 나한테 관심 없는 애들을 찍어보라는 말은 하지 마. 그건 이미 중학생 때 다 해봤다고!”

“정말 부풀리는 게 심각하구나.”

“어쩔 수 없지, 내 매력이 철철 넘쳐서 미소 한 방이면 모두가 돌아보는데. 한 번 찍으면 일주일도 안 되어서 빵, 하고 넘어온단 말이야.”

알렉스는 빵, 소리를 내며 양팔을 극적으로 들어올렸다. 제시는 몇 번 더 실소를 흘린 후 어설프게 덧붙였다.

“그럼 이번엔 아예 골탕을 먹이는 건 어때?”

“누구에게?”

“글쎄, 뭐. 린다 같은 애들?”

제시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어깨를 으쓱였다.

“널 싫어하는 애들이라던가.”

“싫어하는 애들!”

알렉스는 크게 감명을 받은 얼굴이었다.

“오, 나쁘지 않네. 하긴, 난 만인의 알렉스니까, 그렇지? 그런데 날 싫어하는 애들을 무슨 수로 알아? 아, 물론 내게 밀가루 폭탄을 안겨준 걔넨 잊지 않고 있지만. 그래도 좀 봐주라, 아무리 나라도 걔네한테 작업을 걸 긴 싫단 말이야, 동의하지?”

제시는 알렉스가 평소에 비해 다소 횡설수설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알렉스… 그냥 농담으로 던진 말이야, 너도 알잖아. 진지하게 받지 마. 널 싫어하는 애들한테 그럴 필요 없어.”

“오, 아니야. 좋은 시도 같아.”

알렉스는 책상에서 다리를 내리고 일어났다. 제시는 그가 몹시 의욕적으로 보여서 당황했다.

“그런 멍청이들 말고, 좀 적당히, 그럴 듯한 이유를 붙여서 날 싫어하는 사람이 좋겠어. 밀가루 폭탄을 던진 걔넨 날 싫어하는 이유가 내가 그 ‘알렉스’라서 라고 했잖아. 그런 이유를 어떻게 상쇄시켜? 내가 알렉스인데! 그런 거 말고, 좀 적당히 날 싫어하는 사람이 좋겠어.”

제시는 ‘적당히 싫어한다’의 기준을 이해하지 못 하고 얼굴을 찡그렸다.

“오, 그래. 그런데 그걸 어떻게… 구분할 건데?”

“글쎄! 생각 중인데, 음.”

알렉스는 산발적으로 다리를 구르며 창가를 서성였다. 지나치게 하이텐션이라 오히려 지극히 이상하고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오히려 몹시 불안해보이기도 했다. 제시는 그런 알렉스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알렉스는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팔을 들어 올리고 박수를 쳤다.

“좋아! 아예 설문지를 돌리는 거야.”

“와!”

제시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평소처럼 맞장구쳤다.

“괜찮은 생각이네!”

“그렇지?”

정직해지자면 제시는 그것이 재치 있긴 하나 다소 우스꽝스러운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렉스가 한결 기분이 나아진 표정으로 제시를 돌아보자, 그녀는 그를 위로하기 위해서라면 이 정도 맞장구는 얼마든지 쳐줄 가치가 있다고 판단하게 되었다.

“아예 네 멋진 사진도 붙이지 그래! 내가 네 인스타그램에서 한 장 뽑아줄게. 제일 코멘트를 많이 받은 게 좋겠어, 그렇지?”

“그리고 그 아래에 설문을 달아놓는 거지. 항목은 존나 좋아, 좋아, 그냥 그래, 싫어, 존나 싫어가 좋겠다.”

“최고야!”

그렇게 해서 일주일이 지난 수요일 아침, 링컨스쿨의 주차장 곳곳엔 바로 그 제시의 작품이 굴러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제시는 알렉스의 친구를 자청하고 있는 그의 무리(실상 절반은 알렉스의 인기에 편승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어쨌든 알렉스는 그들 역시 친구라 여겨주었다) 그리고 알렉스의 팬클럽과 함께 사방에 알렉스의 얼굴이 찍힌 그 흑백 포스터를 뿌리고 다녔다. 그녀는 그 날 아침 거의 서른 명에 가까운 사람들에게 강제적으로 포스터를 지참시켜 주었는데, 토미는 그녀가 막무가내로 그것을 안겨준 마지막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 날 점심, 알렉스가 모든 것에 심드렁해진 얼굴로 “이제 됐어.”라고 선언했다.

“뭐가?”

“이제 정말 괜찮아. 내 기분을 위해 내가 만든 억지스러운 쇼를 감내해줘서 고마워!”

“오.”

제시는 아직 남은 포스터를 내려다보았다. 그 속의 알렉스는 상큼한 웃음을 달고 제시를 향해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 사진을 고르는 게 어렵지 않았다. 알렉스의 그 사진은 정말 폭발적인 인기를 끌어서, 한 때 대다수의 여학생들이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있었으니 말이다. 제시는 바로 그 무렵 알렉스와 진하게 연애를 했던 EX였다.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거야?”

“그냥 내 변덕으로 이 이상 네가 고생하는 게 보고 싶지 않아서야.”

알렉스가 솔직하게 고백했다.

“그리고 그걸 어떻게 회수할 건지도 문제잖아? 난 여기 오는 동안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포스터를 수십 개는 본 것 같아. 설마 그걸 일일이 네가 주울 건 아니지, 제시?”

제시는 어깨를 으쓱하곤 두 팔을 벌렸다. 알렉스가 다정하게 그녀를 안아주었다.

“넌 정말 몇 안 되는 최고의 친구야.”

“당연하지.”

제시는 자랑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몇 안 되지는 않아, 알렉스.”

 

점심 이후엔 두 반의 합동 수업이 있었다. 제시는 운동복으로 갈아입은 후 락커가 늘어선 복도를 지나다 말고 누군가에게 붙잡혔다. 제시는 고개를 돌렸으나 얼굴을 보고도 누군지 몰라 어리둥절해했다.

“오, 안녕.”

그녀가 인사하자, 토미가 얼굴을 찡그렸다.

“너 이거 언제 가져갈 거야?”

토미가 내민 것은 아침에 그녀가 막무가내로 배포한 알렉스의 설문지였다. 그제야 제시는 그가 누군지 불현 듯 떠올랐다. 그는 그녀가 주차장에서 만난 마지막 사람이었던 것이다. 

“오, 너구나!”

제시는 활달하게 소식을 전했다.

“그거 버려도 좋아, 혹은 뒤집어서 필기하는데 쓰거나. 우린 그걸 회수하지 않기로 결정했어.”

“뭐?”

토미는 혼란스러운 눈치였다.

“왜?”

“글쎄, 회수하기 어려워서?”

“그럼 애초에 왜 나한테 이걸 준 거야?”

토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종이가 아깝다는 생각해 본 적 없어?”

제시는 조금 언짢아졌다.

“뭐,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

“그럼 이건 어떡해?”

“말했잖아, 버리거나, 음, 뭐, 다른 용도로 좋을 대로 쓰던가. 알아서 해!”

종이 쳤으므로 제시는 서둘러야 했다. 그녀는 인사도 없이-이번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복도를 가로질러 후문으로 사라졌다. 다소 구겨진-알렉스를 어떻게 생각 하세요?를 든 채 복도에 남겨진 토미는 재빨리 달려 나가는 제시의 뒷모습을 찡그린 채 응시하다가, 그녀가 사라졌을 때 비로소 고개를 숙여 제 손에 들린 포스터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네 번 접힌 흔적이 남아있었고, 알렉스의 미소 부분이 일그러져 있었다. 아래엔 공중에서 펜을 사용한다고 제법 비뚜름하게 적은 자신의 글씨가 비고란에 쓰여 있었다. 토미는 미소가 우그러진 탓에 다소 묘하게 우울해 보이는 알렉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락카를 열어 그것을 책 사이에 던져놓았다. 그리고 책을 챙긴 후, 요란스럽게 문을 닫고 자신의 교실로 돌아갔다.

 

합동 수업 크리켓에서 제시가 선두로 2점을 따고, 알렉스는 쪽지시험에서 반타작을 했으며, 토미는 과제 제출로 A를 받았다. 지루한 일상은 다음 날도 문제없이 이어졌다. 이번엔 크리켓에서 알렉스가 선두로 4점을 따고, 토미는 쪽지시험에서 만점을 받았으며, 제시는 과제 제출로 B를 받았다. 하루 간 정신없이 전교를 떠돌던 알렉스의 포스터는 그쯤엔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소비되고 있었다. 메모지, 휴지, 다트과녁과 저주대용, 종이비행기 등등…… 토미가 받은 포스터는 여전히 락카에 얌전히 박혀 있었다. 그는 그것으로 그 무엇도 하지 않을 계획이었고, 분리수거가 있는 금요일에 폐지함에 가져가 버릴 생각이었다. 

어쨌든 토미 화이트헤드의 기분은 영 좋지 않았다. 그는 목요일 내내 학교 곳곳에서 자신이 가장 싫어한다고 자부할 수 있는-물론 거기서 짐을 제외하자면 말이다. 짐은 모든 것의 예외였다-인간의 얼굴을 마주해야만 했다. 알렉스는 화장실 칸막이 안에도 붙어있었고, 세면대, 변기, 심지어는 전봇대와 책상, 복도 기둥 곳곳에도 붙어 있었다. 정원을 걷다 말고 오층에서 쏟아지는 종이비행기들을 맞은 적도 있는데, 카라 안으로 주둥이가 처박힌 종이비행기를 잡아 펼쳤던 토미는 짜증이 솟구쳐 기함할 수밖에 없었다. 알렉스가 너무나 상큼한 웃음으로 토미를 향해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길 가도 알렉스, 저길 가도 알렉스라니. 저번 주엔 린다 오스본이 쉬지 않고 시끄럽게 굴더니, 이번 주엔 알렉스 스타일스가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었다. 화장실 칸막이 알렉스, 세면대 알렉스, 다트 알렉스, 휴지 알렉스, 종이비행기 알렉스, 메모장 알렉스 따위를 지켜보고 있자니 알렉스 노이로제가 걸릴 판이었다. 신경질 난 토미가 책을 챙기기 위해 락카를 열었을 때, 바로 그곳엔 ‘토미 락카의 알렉스’가 

Boo! 

사랑의 총알을 발사하고 있었다. 이제 토미는 정말 아무나 붙잡고 멱살을 흔들고 싶은 심정이었다.

‘짜증나…….’

그는 괜한 분풀이를 하듯 성의 없이 쌓인 책 위로 파일을 던졌다가, 중심을 잃고 쏟아진 책들 때문에 작게 신음을 뱉어냈다. 

“젠장.”

“오, 저런. 도와줄까?”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렸다. 토미는 대답하지 않았는데, 입을 열면 그에게 괜히 신경질을 부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토미는 주섬주섬 바닥을 쓸며 지리책과 문학책을 주워 무릎에 얹어놓았다. 파일철이 벌어져 사방에 레포트가 흩날리고 있었다. 토미가 무어라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질문한 소년은 무릎을 접고 바닥에 떨어진 그 레포트를 주섬주섬 줍기 시작했다. 토미는 그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소년은 대충 종이를 주워 파일철을 되돌려주었다. 

“고마워.”

토미는 고개를 들다 말고 뻣뻣하게 굳었다. 그건 소년도 마찬가지였다. 파일 철에 미쳐 쑤셔 넣지 못 한 종이 몇 개 사이에서 무언가를 발견한 까닭이었다. 그는 토미를 보지도 않고 파일철을 넘긴 뒤, 포스터 한 장을 쑥 빼서 눈으로 훑었다. 토미는 천천히, 최대한 침묵하면서 몸을 일으켰다. 알렉스 스타일스는 설문지를 읽었다. 손도 대지 않은 항목은 깨끗하고, 시선은 곧장 마지막에 붙은 비고란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다소 삐뚤빼뚤하지만 정성스럽게, 내용을 그렇게 쓴 사람치곤 꽤 길게 쓰인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비고 : 이런 쓸데없는 짓은 왜 하는 거야?

 

“버릴 생각이었어.”

토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려 애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알렉스는 여전히 뚫어져라 토미의 설문지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토미는 점점 닥치는 불길한 예감을 지우기 위해 애썼지만, 여전히 설문지에 시선을 박고 있는 알렉스의 입 꼬리가 벌어지자 마침내 모든 기대를 버리기로 작정했다. 알렉스는 고개를 들고 기분 좋게 웃었다.

“오, 안녕.”

알렉스는 덧붙였다.

“토미.”

토미는 알렉스가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다는 것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날 알아?”

“오, 당연히 알지. 토미 화이트헤드잖아. 지난주에 우리 대화도 하지 않았나?”

알렉스는 자신의 뺨을 가리키며 손을 휘저었다.

“주차장에서 말이야.”

“내 이름을 알아?”

“그건 당연하지. 넌 나랑 지난 학기에 거의 다섯 타임 정도 같은 수업을 들었거든? 오, 넌 내 이름 알아? 난…….”

“알렉스 스타일스.”

“아, 역시 난 유명해.”

알렉스는 자화자찬하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 토미는 빳빳하게 굳은 자세 그대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엄, 그래. 우선… 난 가볼게. 짐, 아니 아빠가 날 데리러 오는데, 슬슬 오셨을 거거든.”

“워, 잠깐만, 잠깐만.”

알렉스가 토미의 어깨를 붙잡았다. 토미는 진심으로 소름이 돋았다. 

“왜?”

“너 완전 싫어한다. 내가 너 잡아먹는 것도 아닌데.”

알렉스는 어깨를 으쓱하곤 그대로 손목을 둘러 토미를 제 쪽으로 약하게 끌어당겼다. 딱딱하게 굳은 토미가 엉거주춤 딸려왔다. 

“나한테 왜 그래?”

토미가 기겁했다. 알렉스는 눈썹을 찡긋거리며 예의 그 ‘잘생겼다’고 알려진 잔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고개를 기울였다.

“Hey, Tommy.”

토미는 침을 꿀꺽 삼켰다.

알렉스가 말했다.

“너 나랑 데이트 하자.”

 

gib22 : 걔가 데이트 신청하면 거절할 거야?  16:58

Tommy0612 : 절대 그럴 일 없어!  16:58

gib22 : 왜?  16:59

Tommy0612 : 걘 내가 누군지도 모르거든.  17:00

Tommy0612 : 그게 바로 내가 바라던 바고.  17:00

 

“…뭐라고?”

정말이지 토미는 그렇게 되물어볼 수밖엔 없었다. 

그럴 수밖엔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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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It's OK»
2차/old 2019. 10. 24. 19:11

1

조지 밀스는 1922년 도버에서 출생했다. 아마 축복을 받았을 것이다. 잔병치례 없이 열여덟 살을 통과하며 꾸준히 성장했기 때문인데, 축복을 받지 않았다면 운이 좋은 것이겠다. 

도버는 바다를 등지고 팔을 벌리면 바람이 소년의 머리카락을 마구 뒤집는 곳이었다. 작은 항구로 요트들이 끊임없이 돌아오고, 수평선을 따라 흰 새들이 날았다. 파도도 사람도 새들도 떠났다가 되돌아왔으므로 조지는 떠난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소년으로 자랄 수 있었다. 바다는 조지에게 “돌려주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지난 몇 년간은 단 한 번도 그를 배신한 적이 없었다.

그것이 일어났을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 전쟁이 발발했을 때, 조지는 자고 있었다. 아침에 라디오를 듣는데 그 소리가 나왔다. 앵커가 덤덤한 목소리로 말하길, 독일에서 공군들이 공습했다.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 여기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나라의 국민들이 죽어버리고 말았다. 스크럼블 에그를 먹던 조지는 멍청하게 고개를 들고 밀스 부부를 바라보았다. 밀스 부부가 말했다. 조지, 괜찮을 거야. It’s ok는 그때까지 힘이 있었고, 조지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접시에 코를 박았다. It’s ok를 중얼거려보았으나 어딘지 갑갑했다.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 직감이라는 게 있었다. 어떤 거대한 물살. 시대를 따라 흘러가는 무수한 인간들의 세포 하나하나에 내장된 태고적 감각이 조지에게도 있었다. 

그 날은 피터를 만났다. 둘은 약속하고 만난 적이 거의 없었으나, 웬일로 피터가 먼저 전화를 한 것이다. 도버 항구 앞까지 냉큼 달릴 수 있는 좁은 지름길을 숨도 쉬지 않고 달렸다. 피터는 문스톤 호에 앉아있었다. 도슨 일가가 지난여름에 장만한 요트. 날이 흐려서 파도가 통상보다 높았으므로, 배에 앉은 두 소년은 조금씩 엉덩이를 미끄러뜨리며 하늘을 보았다. 잿빛 구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모든 것을 두고 떠날 것처럼 보였다. 자연은 원래부터 인간에게 여러 상징과 징조가 되는 법이다. 피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브라이언 형이. 응. 브라이언 형이 자원했는데. 조지는 피터의 옆모습을 보았다. 바람이 불어서 얼굴을 찡그리게 됐다. 그래서 싸웠어? 아니. 피터는 고개를 숙이고 잠시 마른세수를 했다. 우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착잡해보였다. 그렇지만 돌아올 거니까 괜찮을 거라고 말했어. 네가? 아니, 아버지가. 피터가 고개를 들고 조지를 마주보았다. 바람이 불자 금발이 탁한 하늘 아래에서 마구 나부꼈다. 조지, 나는 슬프거나 화가 나지 않는데. 피터가 중얼거렸다. 그래도 괜찮은 걸까? 소년의 표정은 아직 실감하지 못 하는 먼일을 이야기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오전에 조지가 접시에 코를 박다 말고 지은 표정과 비슷한 성질이 있었다. 전쟁은 가까운 땅에서 벌어졌으나 눈앞에서 벌어진 살육이 없었으므로 먼일처럼 보였다. 어쩌면 먼일처럼 생각하고 싶어서 그런 식으로 말하게 되는 걸지도 몰랐다. 조지는 고개를 돌리고 먼 바다를 보았다. 날씨가 흐려서 프랑스도 보이지 않았는데, 그래서 모든 일들은 더 멀게… 멀게만 느껴졌다. 네 형은 돌아올 거야. 조지가 말했다. 늘 그래왔잖아. 바다가 키운 소년들은 여전히 그 불문율을 희망하고 있었다.

바다가 처음으로 그들을 배신했던 날, 도슨 가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지른 것이다. 피터의 것은 아니었다. 조지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문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도슨 가의 불빛이 깜빡이고 있었다. 위태로워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휘청거리는 불빛이 그곳에 있었다. 피터, 라고 조지가 중얼거렸다. 피터. 그러나 뒷말을 말할 수는 없었다. It’s ok를 말하려는데 혓바닥이 천장에 붙어버린 것 같았다. 말할 수 없다는, 이 이상 그렇게 안심할 수는 없다는, 외면할 수 없다는, 모르는 채로 남아있을 수만은 없다는 감각이 경고등처럼 머릿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전등이, 뇌를 밝히던 전등이 진자처럼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촛불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누군가 바람을 불면 금방이라도 머릿속이 암전될 것처럼 느껴졌다. 덜컥 겁이 났다. 그랬다. 브라이언 도슨이 전사하던 날, 조지는 처음으로 ‘두려움’을, 떠났다 되돌아오지 않는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됐던 것이다. 그 날 피터가 울었는지 조지는 끝끝내 물을 수 없었는데, 그건 조지가 울었기 때문이고, 그러니까… 그런 걸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피터와 다시 만난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형의 장례식이 미뤄질 거야. 시체를 찾았대. 피터는 고개를 숙인 채 조지의 손을 붙잡았다. 그건 흔한 일이 아니래… 보통은 시체를 찾아주지 않는다는데… 가장 먼저 돌격해서 죽어버렸기 때문에… 훈장을 받을 수도 있는 거라고……. 피터의 말은 드문드문 바람에 묻혀서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피터가 고개를 들었는데, 눈이 새빨갰다. 울고 있지는 않았다. 조지는 생각했다. 피터가 화가 나있는 것만 같다. 피터 도슨이 조지 밀스에게 물었다. 조지, 죽음에 영광이라는 게 있을까? 그건 피터 자신에게 묻는 말처럼 들렸다. 조지, 조지 말해줘. 영광스러운 죽음이라는 게 있을까? 조지가 대답했다. 잘 모르겠어. 조지는 자신이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잘 모르겠지만 피터, 화내고 싶다면 화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누구에게? 피터가 마침내 분노했다. 누구에게 분노하란 말이야? 그런 후에 피터는 돌아갔고, 조지는 문스톤호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 오래 그곳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한 후에 한 가지를 깨달았다. 피터가 나에게 화를 냈구나. 그러자 자신이 아주 멍청한 존재만은 아닐 거라고 느끼게 되었다. It’s ok보다 이런 방식이 더 간단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이상하고 또 그럼에도 꼭 필요한 깨달음이었다. 말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때, 그 말들이 힘을 잃을 때,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쳤을 때, 혼자의 힘으로 도무지 해낼 수가 없을 때, 누군가의 분노를… 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맞서야만 할 때. 그 때 조지는 몸을 던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언젠가는 돌아오지 않는 자들이 바다로부터 걸어 나오는 꿈을 꿨다. 헐떡이며 일어났더니 어디선가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조지는 식은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커튼을 열어젖혔다. 바다. 그러자 바다가 보였다. 어두컴컴한 바다 너머에서 끊임없이 번쩍이며 불꽃이 튀어 올랐다. 묵직하게 쿵. 그리고 또 쿵… 이었다. 그것이 축제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조지는 창가에 손바닥을 올리고 헐떡이며 숨을 골랐다. 전쟁이라는 것을 각막에 새기는 일이 얼마나 비현실적이면서도 현실적인지. 눈앞으로 다가온 공포가 어떤 종류인지. 덩케르크로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징발된 청년들이 배를 타고 나가서 돌아오지 못 했다. 이곳은 조지의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도버의 신화는 끝났고 바다는 사람들을 돌려주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바다의 탓일까? 아침마다 라디오를 틀면서 밀스 가족은 접시에 코를 박았다. 그 누구도 말할 수 없는 it’s ok들이 마치 주파수를 잃은 전파처럼 공기를 떠돌았다. 조지 밀스는 음식의 맛을 느낄 수가 없었다. 불안과 두려움은 이미 도버를 잠식하였다. 맞서 싸우고자 하는 의지 밑에는 생존에 대한 본능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깔려있었다. 처칠은 투쟁을 위해 싸우자고 말했으나. 소년은 생각했다. 이미 너무 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많은”의 수식어는 사실 단 한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브라이언. 브라이언 도슨이 죽었어. 옆집에서 살던 나의 이웃이, 친형처럼 따르던 다정한 누군가가 더는 되돌아오지 못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방관의 이유가 발생하는가? 이이상의 죽음을 묵인할 수 있게 되는가? 조지는 포크를 매만지다 말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가슴 깊숙한 곳에서 바글바글 끓는 공포 위로 용기를 짓눌렀다. 할 수 있는 일이 생긴다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이든 하겠다는 생각이. 그럼에도 ‘무엇을 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조지는 동시에 그저 살아가고 싶었다. 일상을 보장받고 싶을 뿐이었다. 

문스톤호가 출항을 알릴 때, 조지는 보았다. 배에 탄 피터가 막 멀어지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넓은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조지는 피터가 입은 스웨터가 브라이언의 것임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수의壽衣였을까? 피터는 죽을 수 있음을 각오하려 하는 것일까? 생각을 정리할 틈도 없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배에 올라탄 조지를 보며 피터가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 했다. 조지, 뭐하는 거야? 도슨씨가 고개를 돌렸다. 거긴 전쟁터야, 조지! 조지는 코를 찡긋거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방해가 되지는 않을게요. 결과적으로 소년은 그 말을 지켰다.

 

구축함을, 구축함을 잊을 수가 없다. 조지는 구축함을 보았다. 함선을 타고 되돌아오는 지친 청년들을 똑똑히 보았다. 문스톤호가 바다로 나간 지 삼십 분이 채 되지 않았을 즈음의 일이었다. 파도를 가르며 거대한 구축함이 도버를 향해 전진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파도는 높았으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갑판에 앉아 조지는 구축함을 올려다보았다. 갑판에 매달린 청년들은 일종의 망령처럼 보였다. 하나같이 때가 낀 가면을 얼굴에 뒤집어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지치고, 죽음에 질렸으며, 늙어있었다. 그랬다, 청년들은 하나같이 늙어있었다. 덩케르크는 사람들로부터 어떤 것들을 앗아갔는데, 그중에 분명 생도 있었으리라. 그들이 돌아오지 못 한다면 그것은 바다의 잘못이 아니었다. 그 앞바다에서 인간들이 벌인 재앙이 인간들을 삼키고 있었다. 거대한 상실과 분노가 그곳을 뒤집어 삼키고 있었다. 인간들을… 돌려주지 않았다. 조지는 바로 그곳으로, 전쟁터로 가고 있었다. 후회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괜히 따라왔다, 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배를 돌릴 수는 없었다. 구축함이 마침내 문스톤호를 완전히 지나쳤을 때, 조지는 어떤 것들을 바로 그곳에서 빼앗겼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구축함에 매달린 망령들이 조지의 안에서 어떤 것들을 잡아채버렸는데, 그 공허함이 가져간 것들 중에는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었다. 좋은 것은 조지의 생. 조지의 일부분. 가지고 있던 믿음. 돌아올 수 있을 거란 도버의 불문율에 대한 마지막 희망이었다. 나쁜 것은 그럼으로써 발생하게 될 조지의 두려움이었다. 요컨대 조지는 죽을 수도 있다는 감각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깨우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것은 나중에 소년의 용기가 되었고, 소년의 마지막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조지는 허탈하지 않을 수 있었다. 

 

3

조지는 결과적으로 분노로 인하여 죽음을 맞이했다. 전쟁이란 원래 불구덩이, 인간의 분노와 어리석음의 응집체, 그 응집체로부터 퍼져 나온 거대한 재앙이다. 조지는 총도 칼도 들지 않았으나 그 분노에 맞서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는데, 우리는 그래서 조지의 죽음을 전사라고 말할 수 있다. 조지의 죽음을 그 누구도 어리석다고 말할 수는 없다. 소년이 스스로 뛰어들었다는 점에서 그걸 멍청하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가 없다.

1940년 5월, 바람이 유난히 불고 파도가 높던 때, 바다 한가운데에서 한 남자를 구조한 조지는 그에게 담요와 홍차를, 그리고 이성을 건넸다. 덩케르크로 되돌아가고 싶지 않았던 남자가 키를 잡고 있던 도슨 씨에게 돌진했을 때, 조지는 손을 뻗었고, 그 일순간 불꽃을 보았다. 남자의 몸으로 타오르는 불꽃. 그것은 원래는 남자의 것이 아니었는데, 덩케르크에서 가지고 온 것이고, 마침내 온전히 그의 것이 된 참이었다. 분노. 조지는 그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았다. 무엇에 분노해야하는 줄도 모르고, 분노하고 있었다. 

 

4

브라이언 형.

나는 형이 죽은 게 슬프고

또 슬프고

또…

 

5

It’ok를 말할 수는 없는 때라는 게 있다. 조지는 그것을 알고 있는 소년이었다. It’s ok보다 더 간단한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고 또 그럼에도 꼭 필요한 깨달음 말이다. 말이 아무짝에 쓸모가 없을 때, 그 말들이 힘을 잃을 때, 어마어마한 재앙이 닥쳤을 때, 혼자의 힘으로 도무지 해낼 수가 없을 때, 누군가의 분노를… 그 주체할 수 없는 감정에 맞서야만 할 때. 바로 그 때. 조지는 몸을 던졌다. 진정하세요! 소년은 그 말을 온몸으로 말했다. 계단을 구르는 동안 머릿속으로 어떤 환각이 떠올랐다. 눈앞이 번쩍 빛나더니 오래 전으로 돌아가는 듯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곳에서 조지는 침대에 앉아있었다. 침대에 앉아 창문에 얼굴을 맞대고 있었다. 누군가 비명을 질렀는데, 여자의 목소리였고, 피터의 집이 거기 있었다. 도슨 가의 거실에 매달린 전등이 좌우로 위태롭게 흔들렸다. 깜빡이면서 꺼졌다가 밝아졌다가 했다. 경고등처럼 보였다. 돌아오지 못 할지도 몰라, 라고 조지가 중얼거렸다. 돌아오지 못 할 거야. 그러자 어디선가 뱃고동 소리가 들려왔다. 조지는 고개를 돌렸고, 거대한 바다를 보았다. 바다를 가르며 돌아오는 함선을. 조지는 어느새 문스톤호 갑판에 앉아있었다. 구축함이 소년에게로 돌진하고 있었다. 조지는 천천히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조지는 순식간에 어른이 되었다. 조지는 늙어버리고 만 것이다. 

조지, 조지. 흐릿한 인영과 함께 정신이 다시 눈앞으로 끌려왔다. 눈을 깜빡이자 붉은 스웨터가 보였다. 조지, 내 말 들려? 조지! 피터는 헐떡이고 있었다. 조지는 피터가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고, 곧 강렬한 통증을, 머리를 짓누르는 끔찍한 고통을 느꼈다. 조지는 피터의 이름을 부르려 했으나 입을 벌리니 나오는 것은 온통 신음뿐이었다. 말을 잃어가고 있구나. 눈앞이 자꾸만 깜빡거렸다. 머릿속으로 촛불 하나가 흔들리고 있었다. 어쩌면 말보다 더 빨리 잃을 게 생길지도 모르겠어… 조지는 눈을 감았다가 떴으나, 빛을 볼 수가 없었다. 빛이 보이지 않았다. 천장과 갑판, 피터의 붉은 스웨터가 보이지 않았다. 조지는 손을 뻗었다. 누군가 그 손을 잡았는데, 조지는 그게 피터임을 알 수 있었다. 피터… 라고 조지가 말했다. 하지만 그 이상 무엇을 말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무슨 말이든 지껄이고 싶어서 무엇이든 말했다. 지금까지 내가 잘한 건 해군단 뿐이었어. 아빠한테 그랬어. 공부는 못 했지만 언젠간 큰일을 해서, 지역신문에 나고 선생님들도 보게 될 거라고. 피터의 호흡이 단정하지 못 했다. 괜찮아지면 올라와. 피터의 말에는 마지막 희망이 내포되어 있었으나. 조지는 동시에 그곳에서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조지는 고개를 저었다. 앞이 안 보여.

 

조지의 마지막 순간에는 하늘 위로 스핏파이어가 떨어지고 있었다. 피터가 갑판 위에서 소리를 치는 걸 들을 수 있었다. 조지는 눈을 감았다 떴다를 반복하며 숨을 뱉었다. 죽음을 각오했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실감하기도 했는데도 소년은 몹시 두려웠다. 두려웠음에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는데, 왜냐하면 옆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소년은 돌아올 수 없음을 알았다. 불문율을 지킬 수 없게 될 것임을 알았다. 그러자 눈물이 나왔고, 그것은 창피하지 않았다. 눈앞으로 촛불이 위태롭게 흔들리다 말고 마지막 빛을 내뿜으며 타올랐다. 그런 후 바람소리와 함께 캄캄한 어둠이 몰려왔다. 조지의 머릿속이 완전히 암전되는 순간이었다. 조지는 천천히 눈을 감으며 손가락을 떨었다. 죽는 것은 무섭구나. 그런데 그 임종의 직전, 무시무시한 뜨거움이 찾아왔다. 조지를 슬프게 만들거나 괴롭게 했던. 두려움을 가르치고 청년들의 생을 앗아갔던. 마침내는 열여덟 살의 조지를 갑판 아래로 밀쳐버린. 그 힘. 그 불꽃. 그 화염.

조지는 분노가 자신의 몸을 덮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의 분노가 아니었다. 시대를 압도할 인간들의 재앙이, 재앙이 그 속에 있었다. 무수한 죽음과 무고한 바다가 그곳에 있었다. 덩케르크와 도버가 그곳에 있었다. 영혼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조지는 오히려 그 분노 속에서 기묘할 정도의 평안을 찾았다. 하얀 빛이 눈앞을 가득 채우며 폭죽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런 소리라니! 조지는 고개를 젖히곤 마지막 숨을 뱉었고… 그 빛 무리 속에서 작게 중얼거렸다.

 

6

브라이언 형.

나는 형이 죽은 게 슬프고

또 슬프고

또…

화가 났어.

 

7

나에게 화를 내도 괜찮아.

 

8

오, 피터, 피터!

 

9

조지 밀스는 1922년 도버에서 출생하여 1940년 바다에서 전사하였다. 소년이 시체가 되었음을 한 병사가 알렸다. 피터는 갑판에서 자신의 전우를 내려다보며 막연함을 느꼈는데,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어떤 두려움에 대한 감정은 아니었다. 덩케르크가 청년들의 생을 탈환하고, 조지가 불꽃에 맞섰을 때, 피터 도슨 역시 어떤 것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것은 도버가 키워온 가치에 관한 것이었다. 조지가 구축함을 마주하며 벗어던진 그것. 그것은 되돌아올 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바다로부터 떠난 사람들이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것. 브라이언 도슨이 피터에게 그것을 남겼으나 피터는 분노함으로써 그를 거부했고, 그것을 조지가 받았으며, 결론적으로 조지는 그 불꽃을 품고 죽었다. 그리고 이번에 피터는 그것을 받게 되었다. 그 날 피터가 울었는지 우리는 끝끝내 물을 수가 없을 것인데, 그건 누군가는 조지를 위해 울었기 때문이고, 그러니까… 그런 걸 말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것이다.

 

10

피터는 조지의 죽음을 아주 오래 기억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도 오래 기억하기 위하여 신문에 소년의 이름을 기고했고,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이었는지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확신하지 못 했다. 도슨씨는 그것에 아무 말도 보태지 않았다. 그래서 피터는 신문을 내려놓고 라디오를 틀었으며, 접시에 시선을 박고 수저를 들었다. 거기엔 맛을 느낄 수 없을 스크럼블 에그와 잼 바른 빵이 놓여있었고, 피터는 어쩐지 자신이 멍청한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아주 오래 전부터 그랬을 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그런 후에 피터는 자신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눈시울이 붉어졌다가 뜨거워졌다가 마침내 무거워졌다. 피터는 천장에 혓바닥을 붙인 채 조지, 하고 웅얼거렸다. 조지, 오, 조지. 

It’s not 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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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어콜린스 «브라이언»
2차/old 2019. 10. 24. 19:11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벌어지던 시대였다. 나는 이제 그 시대의 끝물을 살고 있고, 지금도 종종 내 주변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다는 걸 안다. 그러나 적어도 내 삶 안에서, 기적이나 마법 혹은 재앙은 유통기간이 다 된 깡통과도 같다.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1939년 내가 포르티스에 배치를 받았을 때, 리더는 나를 곧장 바깥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화물용 창고처럼 보이는 대기실(그곳에 비행정들이 있었다)이 있었고, 풀밭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기지가 곳곳에 천막을 쳐놓았고, 몇몇 천막 앞에 간의의자를 두고 앉은 공군들이 보였다. 리더와 나는 줄지어 이어지는 천막들을 지나 거의 마지막쯤에 있는 천막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파리어 대위를 처음 보았다. 파리어 대위는 소파에 앉아서 RAZZLE을 읽고 있었다. “신입이에요?” 파리어 대위가 턱짓으로 나를 가리켰고, 나는 그를 의식해서 빳빳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그래, 콜린스야.” 리더가 말했다. 그는 파리어 대위에게 일어나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파리어 대위는 한동안 거기 앉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하는지 몰라 어깨를 으쓱였다. “반갑습니다.” 그러자 파리어 대위가 RAZZLE을 덮고 일어나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파리어 대위다. 오래 살아라.” 그가 말했다.

 그 때, 나는 파리어 대위가 말한 “오래 살아라”의 의미가 “행운을 빈다”와 비슷한 뜻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문자 그대로 오래 살아남으라는 뜻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교육을 마치고 들어온 상태였고, 포르티스에 배치될 만큼 엘리트였지만, 비행정에 앉아 임무에 투입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 했다. 리더와 대위는 한동안 나를 햇병아리 취급했는데, 돌이켜보면 그다지 틀린 말이 아니었던 셈이다. 나는 들어오자마자 스핏파이어를 몰았다. 리더와 파리어 대위는 그 전까지 허리케인을 몰았고, 내가 들어올 즈음부터 스핏파이어를 몰기 시작했다. 허리케인 전에는 하우커를 몰았다. 나는 세 대의 비행정을 조종할 수 있는 고참들의 날개 사이에서 비행할 수 있음에 자부심을 가졌다.

 나의 첫 번째 출격지는 포크스톤과 몇 십 마일 떨어진 해안으로, 포르티스 외 다른 한 팀(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과 함께 날았다. 나는 고도로 긴장한 상태였기에 리더의 무전을 두 번이나 놓쳤다. 중간 정도 날았을 때, 후발로 날아오던 비행정 한 대가 격추되었다. 파리어 대위가 무전으로 내 이름을 불렀다. 콜린스! 맹세컨대, 파리어 대위가 포르티스 2나 코드명 따위로 나를 불렀다면, 나는 그가 누구를 부르는지 알아듣지 못 했을 것이다. 그러나 파리어 대위는 나를 콜린스라고 불렀고, 그의 목소리는 벼락처럼 내 머릿속에 전짓불을 밝혔다. 나는 정신을 차렸고, 해야 할 일을 알았다. 교육을 받는 동안 지겨울 정도로 외웠던 매뉴얼이 어렵지 않게 떠올랐다. 머리가 깨어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방향을 틀고 구름 속으로 들어갔다. 흩어진 채로 무전을 기다리며, 주의 깊게 창공을 살폈다. 누가 추락했는지 몰랐으나 포르티스 조가 아니었다. 리더의 무전이 들렸기 때문이었다. “적이 근처에 있으니 잘 살피도록 해.” 그러나 그건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실상 도움이 되는 무전은 아니었다. 얼마 뒤 나는 북서쪽으로 날아가는 전투정 한 대를 포착했다. 구름을 빠져나오는 순간 날개가 반짝이는 걸 놓치지 않은 것이다. 나는 몸체의 전대 코드를 확인했고, 리더에게 무전으로 위치를 쳤다. 격추시킨 건 파리어 대위였다. 돌아오자마자 나는 잔디밭에 엎어져 빈속을 게워냈다. 긴장이 풀리자 바짝 쪼그라들었던 위가 요동치고 있었다. 누군가 내 콕핏 근처로 다가왔다. 나는 그의 발치를 볼 수 있었다. 고개를 들자, 파리어 대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마스크를 벗으며 장갑을 낀 다른 한손으로 내 어깨를 두들겼다. “할 만 하지?” 장갑 때문일지도 몰랐지만, 그의 손길은 처음 만났을 때보다 훨씬 부드럽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나는 누가 죽었냐고 물었다. 파리어 대위는 어깨를 으쓱이곤,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신만이 아실 일인데, 추락한 부근이 바다나 독일이 아니니 살았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 둘 다 그것이 일어나기 어려운 기적임을 알고 있었고, 파리어 대위는 내가 아는 바로 무교였다.

 공군으로 있으면서, 나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을 종종 보았다. 특별히 공군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전쟁이 있던 시대였고, 대다수의 일이 많은 이들에게 납득되지 못한 채 비극이 되었다. 징병, 어린아이들의 죽음, 런던 폭격… 지하철에 숨었던 시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비행정에 올라타지 않고, 총을 들지 않아도, 모두가 독일과 어떤 식으로든 맞서 싸우던 시기였다. 우리는 비행정에 탑승했고, 그게 다였다. 더 일찍 죽을 수도 있었지만, 그리고 실제로 그랬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남들보다 더 고생했거나 공을 세웠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RAF의 자부심은 그런 곳에서 발휘되는 것이 아니다.

 본격적인 항공전이 시작되자 파일럿이 부족해진 RAF에도 징발된 청년들이 등장했고, 그중에는 청년이 아닌 자발적 지원자도 더러 있었다. 기수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만큼 짧은 기간을 두고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공군이 되었다. 잦은 출격 명령이 있었고, 조종사들은 아예 대기실로 나와 잔디에 앉아 있곤 했다. 나머지들은 천막 안에서 카드 패를 돌리거나 체스를 뒀다. 대기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도 대체로 거기 있었다. 대기실 내부에는 그 날 임무에 투입될 예정인 항공기와 조종사 명단을 적은 칠판이 걸려 있었고, 모두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콜을 기다렸다. 전화벨이 울리면 바로 뛰쳐나가 캐노피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잔디밭에 엎어진 공군들은 하나같이 메이 웨스트 구명조끼를 정복 위에 걸쳐 입었는데, 입기 까다로워 시간이 꽤 걸렸던 탓이었다. 콜이 울렸을 때부터 우리에겐 꾸물거릴 시간이 별로 없었다.

 정말이지 미치광이 같은 전화벨이었다. 나는 그저 해가 내리쬐는 잔디밭에 앉아 있었는데, 하늘 어딘가 에서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 잔디밭에 내내 앉아 전화벨을 기다렸음에도 종종 믿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지만, 콜을 받으면 일어나 스핏파이어로 달렸다. 필요한 곳까지 재빨리 날아가서 비행정을 격추시키거나, 무사히 살아남았다. 때때로 콜이 시시각각 울릴 때도 있었다. 한 시간 단위, 심지어는 몇 분 단위로 울렸다. 많은 사람들이 비행정으로 달려갔고 돌아오지 못했다. 전화벨이 항상 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 전화인 경우도 더러 있었지만, 벨소리가 똑같았으므로 전화가 울리면 우선 모두 엉거주춤 일어날 태세를 하고 있었다. 하루는 이런 일이 있었다. 콜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울렸다. 우리는 모두 일어나 있었는데, 전화를 받은 머클 중위가 데이빗을 불렀다. 천막 안에서 허겁지겁 데이빗이 뛰쳐나왔다. 그는 전화를 받았고, 고개를 끄덕이며 턱을 초조하게 매만졌다. 이따금 “그래, 나도 알아. 곧 갈게, 지금은 당장 갈 수가 없어.”하고 대답하는 것을 모두가 지켜보았다. 그가 전화를 끊었을 때, 파리어 대위가 물었다. “급한 전화였나?” 데이빗은 아내로부터 장인의 부고소식을 받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잔디밭 중간쯤에 서있던 누군가 달려와, 데이빗에게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그런 미친 일도 있었다. 이 일화는 그만큼 우리가 전화벨 노이로제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어쨌든 데이빗은 돌아갔고, 주먹을 맞은 일에 대해서는 특별히 언급한 게 없는 것으로 안다. 그는 살아남았고, 주먹을 지른 남자는 죽었다. 그것으로 그 이야기는 닫혔고, 더는 이어지지 않았다.

 콜이 너무 자주 울릴 때는, 그냥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시간차를 두고 비행정에 올라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이제 막 배치를 받은 신입들이 인사조차 하지 못 하고 전투정에 올라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 리더들은 천막 혹은 잔디밭에 남은 낯선 새 가방과 보급품을 확인하고, 돌아오지 못 한 비행정의 이름을 리스트에서 찾은 후, 뒤늦게 신입의 이름을 읽었다. 전쟁 초반에, 나는 다른 팀의 리더가 칠판 앞에 우두커니 서있던 것을 기억한다. 그는 허리케인을 몰았다. “오늘 허리케인은 다 돌아오지 않았어요?” 내가 물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돌아오지 못 한 허리케인이 한 대 있어.” 그는 발치에 놓인 보급품을 내려다보곤,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브라이언. 나는 이 놈 얼굴도 확인하지 못했어.” 당시에는 출정하자마자 전사하는 일이 드물지 않았다. 그럼에도 모두가 그것을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건, 그게 너무 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비극은 그렇게 지나칠 만큼 자주 일어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그 시대를 말도 안 되는 시대라고 불렀다. 내가 서두에서 붙여둔 것은 나 혼자만의 작명이 아니었던 셈이다.

 주변의 말을 빌리자면, 나의 포르티스 팀은 오래 버텼다. 오래 살았다는 뜻이다. 우리의 마지막 출정은 다이나모 작전이라고 불렸고, 파리어 대위와 나는 프랑스의 덩케르크까지 날았다. 리더는 프랑스까지 가지 못 했다. 출정 중이었기에 우리는 충분히 슬퍼하지 못 했고, 그저 계속 날았다. 나중에 나는 바다를 보면 종종 그 날 푸른 물결 위로 출렁거리던 리더의 스핏파이어, 파도에 따라 언뜻 드러나는 몸통에 칠해진 익숙한 전대 코드, 햇빛에 반짝이던 날개의 잔해를 떠올리곤 했다. 전쟁은 많은 것을 앗아갔는데, 그 중에서 가장 악독한 착취를 꼽자면 바로 추모의 시간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전우들이 추모할 시간조차 가지지 못 하고 히스테릭과 PTSD, 노이로제와 각종 정신질환 속에서 죽어갔다. 그럼에도 우리가 RAF에 자긍심을 가진 건, 돌이켜보면 그저 국가의 프로파간다와 이데올로기였을 지도 모르겠다고 누군가 말했다. 전쟁은 미친 짓이고, 사람이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 아니며,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말이다. 나는 어떤 말에는 동감을, 어떤 말에는 유감을 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핏파이어를 몰았던 사실에 자긍심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나의 리더를 그리워할 수 있다. 나는 포르티스의 모두를 그리워했고, 특히 그를, 파리어 대위를 아주 오랜 시간 기다렸다. 파리어 대위는 내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것을 알았을지 몰라도, 그게 얼마나 절박했는지는 결코 알지 못 했을 것이다.

 나는 파리어 대위가 바닥을 드러낸 연료통과 함께 덩케르크 해변의 상공을 날아다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나중에 직접 보고를 받았지만, 그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그를 덩케르크에서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문스톤호라고 불리는 작은 요트에 타고 있었고,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연료(아마 당시엔 10갤런도 채 남지 않았을 것이다)로 선회하여 내 눈앞에서 폭격기 한 대와 호위기 한 대를 격추시켰다. 그가 탄 스핏파이어가 그를 다시 영국으로 돌려보내줄 수 없음을 알았다. 울지 않았던 건, 앞에서 말했듯 충분한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문스톤호에는 마흔 명이 넘는 보병들이 타고 있었고, 바다는 온통 기름으로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파도 아래 어딘가에는 U보트가 있었고, 격추된 독일 전투기로부터 불꽃이 피어올랐다. 나는 배를 돌리고 영국으로 돌아갔다. 가는 길에 전투정을 만났지만, 요트를 몰던 두 도슨 가 사람들이 현명하게 대처한 덕분에 아무도 죽지 않았다. 서두에서도 말했지만, 미친 시대였음에도 종종 행운과 기적이 일어나던 때였다. 나는 피터 도슨이라고 하는 소년을 바로 그 요트에서 만났다. 그의 형이 허리케인을 몰았다. 피터는 그의 형이 전쟁 초기에 전사했다고 말했고, 그것을 과거형으로 말했다. 그는 떠나보내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나는 언젠가 허리케인의 리더가 칠판 앞에서 읊던 이름을 떠올렸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배에서 내린 후에도 소집 명령을 받기 전까지 한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도슨 가에 따로 찾아가지는 않았으나, 나는 피터의 친구, 내가 문스톤호에 오르자마자 뱃바닥에서 마주한 소년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피터는 나를 알아보았지만 장례식 내내 말을 걸지 않고 앉아 있었다. 조지 밀스. 단상에 올라간 그 애가 천천히 발음했다. 나의 친구, 나의 용감한 친구, 조지 밀스. 그 애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 애가 단상을 내려왔을 때, 다가가서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나 곧 그 애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그 애의 어깨를 두들겼다. 언젠가 파리어 대위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내가 장갑을 끼고 있다고 상상하면서 피터의 어깨를 토닥이려 애썼다. 그 애가 얼마나 용감했는지 신이 아실 거야. 네 조지는 분명 행복할 거다. 나는 실제로 그렇게 말했고, 나는 크리스천이었으며, 신을 믿었다. 피터는 끝까지 울지 않았지만 나는 그 애가 분명 아무도 없는 곳에서 울었을 것이며, 그렇지 못 했다면 죄책감 때문일 거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창공을 바라보며 파리어 대위를 응원할 때, 우리의 발밑에서 조지 밀스가 죽어가고 있었다. 피터 도슨은 친구의 임종이 진행되던 순간 자신이 어쩌면 그와 아무것도 상관없는 상황 속에서 미소를 짓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이해할 수 있었다. 브라이언의 죽음은 전화 한 통과 전보로 이루어졌으나, 조지 밀스의 죽음은 달랐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에는 육체성이 있었다. 피터는 시체를 눈앞에서 보았고, 심지어 그 시체는 불과 몇 시간 전까지 그의 눈앞에서 입을 달싹이고 있었으며, 그는 시체이기 이전에 피터의 오랜 벗이었다. 나 역시 떠나보낸다는 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당시의 나는 심지어 죽지도 않은 사람을 눈앞에서 떠나보냈던 상태였다.

 공군으로 돌아온 후에도 콜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나는 스핏파이어에 탔다. 파리어 대위를 매순간 기다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나는 생존에 급급했고, 매순간 추격하고 격추했고, 동시에 후퇴하고 선회했다. 전우라고 부를 수 있는 많은 이들이 죽었다. 나와 같은 기수로 불리던 사람은 나를 포함해 둘뿐이었고, 그 역시 종전 직전에 전사하였다. 놀랍게도 나는 살아남았고, 파리어 대위를 기다린 것은 그 뒤의 일이다. 그전까지 내가 기다린 것은 죽음과 생존, 비극과 기적뿐이었다.

 마지막 출격이 있기 전 야간에 비행을 할 일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대위가 되어 있었다. 나는 재편성 되어 새로운 리더와 함께였고, 그는 나의 포르티스 리더의 선임이었다. 그가 왼편에, 내가 오른편에 있었다. 가운데에 랜디 소위가 있었다. 콜린스 대위님. 그가 나를 그렇게 불렀다. 언젠가 내가 그의 자리에 날면서, 무전을 통해 파리어 대위를 그렇게 불렀던 일이 떠올랐다. 대위님. 나는 그의 이름을 잘 부르지 않았다.

 새 리더가 서쪽으로 좀 떨어져서 날고, 나는 랜디 소위와 붙어 이따금 무전으로 상황을 보고했다. 그러다 내가 좀 더 고도를 높이자고 말했고, 랜디가 이유를 물었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요?” 나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달을 보라고, 얼간아. 여기서 적이 나타나는 게 가당키나 한 소리냐.” 랜디와 나는 조금 더 높게 올라갔고, 구름 바로 위에서 달을 보았다. 특출 나게 크지는 않았다. 나는 땅에서 보는 달과 하늘에서 보는 달의 크기 차이가 실상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생각보다 크지 않지?” 내가 랜디 소위에게 말했다. 그건 파리어 대위가 언젠가 내게 했던 말과 똑같았다. 나는 파리어 대위를 흉내 내고 있는 것이었다. 랜디는 한동안 무전하지 않다가, 다시 고도를 낮춰 내려갈 즈음에 이렇게 말했다. “네. 하지만 아름답네요.” 나는 파리어 대위에게 그렇게 대답하지 않았다.

 파리어 대위가 특별히 감상적이거나 섬세한 사람이라고는 볼 수 없었다. 그는 덤덤하고 무감한 편에 속했고, 감정을 어떻게 숨겨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이 주변 사람보다 훨씬 무던한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종종 남이 자신보다 훨씬 풍부한 감성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거나 어림잡았다. 그는 나를 처음 본 이례로 쭉 나를 햇병아리 취급하면서(마침 머리색도 딱이군. 그는 리더와 함께 입을 모아 자주 그렇게 말했다) 내가 예민하고 섬세한 감성의 소유자인 것처럼 취급하곤 했다. 매번 그러던 것은 아니었지만, 장난을 치거나 농담을 할 때면 그가 나를 어떤 인간으로 보고 있는지가 여실히 느껴졌다. 불쾌한 느낌이 아니었지만, 불편하기는 했다. 실제로 나는 제법 뾰족한 감성을 가지고 있었고, 종종 그곳에 무게를 실어 몸을 움직였다. 그래서 파리어 대위가 나를 그런 식으로 취급하는 게 느껴질 때면, 그가 내 사관학교 시절 내가 동기 몇 명을 주먹으로 때려눕혔다는 걸 알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실제로 알고 있었다고, 파리어 대위가 재회 이후 말해주었다. “그러나 너를 취급하는 일과 그 일은 별개였어.” 그가 말했다.

 어쨌든, 그는 나를 달과 보다 가까운 곳으로 데려갔다. 우리의 스핏파이어는 부드럽게 솟아올랐고 놀랄 만큼 구름 위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리더는 우리보다 아래에서, 내가 랜디 소위를 데리고 솟아오를 때 새 리더가 그랬던 것처럼 서쪽으로 비행정을 몰고 있었다. 대기가 차가워서 캐노피에 김이 서리는 게 선명하게 보였다. 파리어 대위가 무전으로 말했다. “봐.” 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위성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밤하늘 속에 둥그렇고 거대한 조명 하나를 띄워놓은 것 같았다. 암청색 창공이 빛 무리에 따라 보라색으로 희미하게 일렁였고, 구름은 천처럼 출렁이며 몇 마일까지 아득하게 이어졌다. “생각보다 크지 않지?” 파리어 대위가 말했다. 나는 어쩐지 목이 메었다. “아뇨.” 나는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대단합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한동안 거기 떠있었다. 뒤늦게 덧붙이지만, 리더의 무전에 어떤 문제가 있었다. 리더가 올라오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는 너무 멀리까지 나가선 안 되는 상황이었기에 후발로 오는 다른 팀과 함께 붙어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그곳엔 온전히 나와 파리어 대위만이 머물러 있었고, 함께 말없이 달 아래를 날았다. 나는 그 순간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한다. 파리어 대위가 무전으로 어떤 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숨소리를 들었다. 나의 첫 키스는 열여덟 살 때다. 동네에서 가장 아름답던 스무 살짜리 여인과 했다. 지나치게 긴장한 나머지 어깨를 딱딱하게 굳히고 있었는데, 그런 내가 우스웠던지 그녀가 숨과 숨의 틈으로 작게 웃었다. 그 소리를 기억한다. 바짝 다가선 사람이 조용하고 은은하게 터뜨리는 숨의 탄성을. 그 때 나는 바로 그 소리를 파리어 대위의 무전으로부터 들었다. 그는 웃고 있었다. 나는 잠깐이지만 그와 키스한 거라고 생각했다. 키스한 것이나 다름없는 어떤 순간이 있었고, 방금 지나갔다. 그리고 달이 아름답다. 그 순간을 잊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면서 비행했다. 그 날은 아무도 죽지 않았고, 비행이 끝났을 때 나는 콕핏 아래에 주저앉았다. 내 어깨를 두들기던 파리어 대위의 손이 기억난다. 그는 장갑을 끼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부드럽고 친밀했으며, 어떤 은밀한 애틋함이 숨겨져 있었다. 달을 다녀온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을 만큼 아주 미약하게, 애정이 뒤척였다.

 랜디는 1943년에 죽었다. 새 리더는 살아남았지만, 1944년 공중에서 추락했다. 나는 여전히 대위였고, 마지막으로 항공전을 치를 때 거의 죽을 뻔했지만, 어쨌든 살아남았다. 거의 죽을 뻔했다는 것은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사실, 나는 한 번 죽었다 돌아온 것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비행사들의 무덤에 다녀왔다. 실제로 그것을 보았다. 이 역시 수사적인 표현이 아니다.

 비행사들의 무덤(혹은 비행정의 무덤이라고도 불렸다)은 RAF들뿐만 아니라 비행정을 모는 모든 파일럿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우리는 신의 존재가 불확실하고 확증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하고 희망하고 저주하고 사랑하곤 한다. 비행사들의 무덤은 바로 그 신처럼, 미신을 넘어선 어떤 강한 희망이자 저주였고, 돌아오지 못 한 비행정을 위한 일종의 괴담이었다. 비행기를 몰던 사람들이 가는 장소. 그곳은 가장 높은 고도에 있으며, 바람이 불지 않고 캐노피가 없어도 얼지 않는다. 하늘에서 전사한 모든 이들이 그곳으로 간다. 타고 있던 비행정이 영혼을 태운 채 위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이는 추락한 위치를 기록했음에도 해당 장소에서 비행정 혹은 시체를 발견할 수 없는 경우가 비일비재하여, 누군가가 붙이기 시작한 가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사라진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빤한 이야기지만, 어쨌든 RAF에서도 유명한 미신이었다. 파리어 대위도 종종 내게 그 이야기를 했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산채로 비행정 무덤에 끌려가는 수가 있어. 그럼 나는, “미신으로 겁을 먹기엔 제가 너무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대위님?”하고 볼멘소리로 대꾸했다. 내가 틀렸다. 나는 겁을 먹었고, 파리어 대위는 그걸 알았다. 그는 덩케르크로 출정하던 그 날에도 콕핏 앞까지 쫓아와 내게 겁을 주고 떠났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하면 놀릴 수 있는지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는 대체로 나에 대해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편에 속했다.

 나의 마지막 항공전은 치열했고, 나는 그것을 정확히 기억할 수가 없다. 눈을 감으면 바람소리와 함께 스핏파이어가 통째로 흔들리며, 마치 기갑부대의 탱크처럼 탈탈거리던 소리가 떠오른다. 장면은 뭉텅이로 잘려있고 단편적인 이미지만이 기억난다. 나는 발포하고 연료 계를 잠갔다가, 다시 열었다. 조명탄 총이 부츠를 자꾸만 쳐서 엄지발가락이 얼얼했던 것, 내 옆으로 폭격기가 날았던 것, 무시무시한 총소리가 났던 것을 기억한다. 우리는 아군이고 적군이고 할 것 없이 공중에서 마구잡이로 뒤섞여 있었고, 뒤집혀진 채 상대가 누구인 줄도 모르고 총격을 가했다. 전대 코드를 확인하기 위하여 몸통을 볼 틈이 없었다. 비행정들은 너무 빠르게, 필사적으로 움직였다. 나는 총알을 다 소진한 후에도 스핏파이어를 험하게 몰았고, 어느 순간부터 졸고 있었다. 믿을 수 없겠지만 그랬다. 늦은 오후였고 나는 삼일 동안 단 한숨도 자지 못 한 상태였다. 녹초가 되어 어느 순간 조종기를 놓았던 기억이 난다. 손이 미끄러지면서 기체에 부딪혔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런데도 스핏파이어가 제대로 중심을 잡으며 어디론가 나아가고 있었다. 잠결에도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졌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어 그대로 기대어 있었다. 잠시 후 중력이 붕 뜨는 것이 느껴졌고, 빠른 속도로 고도가 상승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스핏파이어를 잡아 올리는 것 같았다. 내가 한참 졸았다고 생각한다. 깨어났을 때는 이미 꽤 많은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내가 너무 높은 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고도계를 확인하곤 눈을 깜빡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달과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캐노피는 깨끗했다. 김이 서리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화들짝 잠에서 깨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위는 어두컴컴했고, 달은 아주 거대했다. 암청색의 하늘이 달빛 때문에 온통 보랏빛으로 울렁거렸다. 구름은 단 한 줄기를 제외하면 모두 스핏파이어 아래에 얌전히 깔려 있었다. 잘 경작된 밭처럼, 판판하고 드넓게, 몇 백 에이커, 아니 수백 헥타르에 달하는 구름이 대지처럼 끝없이 펼쳐졌다. 나는 달 위로 흐르는 기묘한 구름 한 줄기를 보았다. 그것은 북쪽으로 나아가고 있었고, 점점이 작고 흰 무언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때로 그것들은 반짝이기도 했다. 그 구름은 여름날의 작은 강줄기처럼 보였고, 혹은 토성의 고리처럼 보였다. 내가 멍하니 입을 벌리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데, 얼마 멀지 않은 곳에서부터 구름 위로 몇 대의 비행정이 솟아올랐다.

 나는 랜디의 스핏파이어를 보았다. 몸통의 전대 코드를 확인한 후, 나는 캐노피 안에 누가 앉아 있는지를 확인했다. 그것은 틀림없는 랜디였다. 나는 랜디 심슨의 매부리코 모양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코 모양 때문에 마스크가 조금 아래로 처지던 것을 기억한다. 랜디는 그곳에, 조금 처진 마스크를 쓰고 스핏파이어에 앉아있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는데, 그는 이미 1943년에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나의 오른편으로 다른 한 대의 스핏파이어가 솟아올랐다. 나는 이번에도 전대 코드를 확인했고, 캐노피 안에 앉아있는 새 리더를 보았다. 나는 내게 일어난 일을 이해했다. 내가 죽었음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앞으로, 색이 바란, 아주 오래된 스핏파이어 한 대가 솟아올랐다. 나는 비행정의 날개로부터 물이 떨어지고 있는 것, 그리고 군데군데에 하얀 거품이 굳어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캐노피 안에 나의 리더가 앉아 있음을 확인하지 않고도 알았다. 코끝으로 열이 몰리는 걸 느낄 수 있었지만 잠자코 앉아 있었다. 나는 마지막 스핏파이어 한 대를 기다린 것이다. 그 때까지도, 나는 파리어 대위가 덩케르크 해변에 불시착하지 않았다면, 그 근방을 날던 독일 전투정에게 격파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스핏파이어는 솟아오르지 않았다. 나를 포함한 비행정 네 대가 그렇게 구름의 평원 위에 떠있었다. 잠시 후, 랜디의 스핏파이어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나는 랜디의 비행정이 달을 향해 자꾸만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랜디는 마침내 구름의 유수에 닿았고, 그 일부가 되었다. 그는 북쪽으로 흘러갔다. 그 다음엔 새 리더의 스핏파이어가, 그리고 마침내 영원한 나의 포르티스 리더의 스핏파이어가 차례로 솟아올랐다. 그들은 직각으로, 마치 누군가 그들을 끌어올리는 것처럼 부유했고, 구름의 한줄기가 되어 랜디를 따라 북쪽으로, 어딘가로 흘러갔다. 나는 달빛에 반사된 스핏파이어들을 볼 수 있었다. 그 구름 한 줄기 속에 얼마나 많은 파일럿들이 앉아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다. 파리어 대위의 목소리가 떠오른 건 그 때였다. 봐, 라고 언젠가 그가 그랬다. 생각보다 크지 않지? 나는 거대한 달 아래에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번에는 목 같은 게 메지 않았다. “아뇨.” 나는 대답했다.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충분히 대단합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모르겠다. 난 죽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연료가 반도 채 남지 않은 스핏파이어를 타고 홀로 바다 근처를 부유하고 있었다. 어떤 정신으로 그걸 몰아 귀환했는지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는다. 어쨌든 난 살아남았고, 파리어 대위 역시 살아있음을 알았다. 그는 구름이 되지 않았고, 독일 어딘가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나는 종전 당시를 자세히 서술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는 기쁘기보다 피로한 상태로 작은 해방감만을 맛보았다. 정복을 벗고 침대에 누웠는데, 한밤중에 무려 다섯 번이나 허겁지겁 깨어났다. 거실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고, 오래도록 거기서 신호음을 들었다.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내 스스로에게 확인시켜 주었으나 몸이 제대로 납득하지 못했다. 한동안 그랬고, 그 후에도 그랬다. 아주 오래도록 나는 전화벨 노이로제와 맞서 싸웠다.

 파리어 대위를 다시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그는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왜소하고 수척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눈에 그를 알아보았다. “파리어.” 내가 말했다. “파리어, 파리어…….” 그는 대답 대신 팔을 벌려 나를 껴안았다. 그는 이전보다 작아진 것 같았는데도 힘은 여전히 장사였다. 내 어깨를 으스러질 정도로 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파서 눈물이 핑 돌 정도였는데, 그가 나를 품에서 놓아줄 즈음 나는 정말 울고 있었다. 그랬다. 나는 비로소 그 때서야 울고 있었다. 전쟁이 끝났고, 아무도 어리둥절하게 죽지 않을 어느 여름, 나는 그의 품에서 아이처럼 흐느꼈다.

 우리는 조지 밀스의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다시 도버를 방문하였다. 내가 조지 밀스의 장례식을 기억하고 있는 건 순전히 문스톤호에서 만난 피터 도슨 때문이었다. 나는 그 배에서 가장 먼저 구출된 사람이었고, 피터가 믿은 어른이었다. 그 때, 그 애가 내게 조지의 상태를 묻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그는 축축하게 젖은 내 정복과 내 얼굴을 번갈아 보면서 눈으로 이렇게 묻고 있었다. 뭔가를 알고 계시다면 무엇이든 말해주세요. 그런데 나는 그 애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모르겠구나.” 그 뒤의 말은 현명하게 뱉었다고 생각한다. “넌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다 했어.” 나는 오래도록 전자의 말 때문에 그 아이에게 부채감이 있었지만, 정작 다시 만났을 때 피터는 후자의 말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애는 그 말이 큰 힘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 때의 친절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콜린스. 제 친구의 장례식에 와주신 것도요.” 피터가 그렇게 말했을 때, 파리어는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의자에 앉아 도버의 LOCAL HERO라고 기려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조지 밀스만의 추모식이 아니었다. 도슨 일가는 가장 앞줄에 앉아 있었고, 조지 밀스의 부모로 보이는 두 사람이 그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이따금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서로의 손을 잡았다. 파리어와 나는 손을 잡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그가 손끝으로 내 손등을 가만히 쓸어보았다. 그 때마다 나는 주변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상기하려 애썼다.

 피터 도슨이 단상 위로 올라왔을 때, 많은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도슨 일가는 이 전쟁으로 가까운 두 사람을 잃었고, 특히 피터는 그랬다. 그는 길지 않은 추모사를 들고 있었다. 서류 한 장 분량도 채 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는 긴장한 얼굴이 아니었지만, 추모사를 읊기 전에 군중을 조용히 훑어보았다. 그러다 어느 한 곳을 응시하면서 잠시 머뭇거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당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마이크를 앞에 두고 추모사를 읽어나갔다.

 내용을 다 기억하지는 못 한다. 추모식 이후에도 오랜 시간, 나는 필사적으로 전쟁을 떨쳐내고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폭력과 불안으로부터 벗어난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싸웠다. 파리어도 파리어 나름대로의 전쟁이 있었다. 우리는 함께 이겨나가려 애썼지만, 어떤 것은 결국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그것을 패배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 파편들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다.

 분명히 기억하는 건 피터 도슨이 조지 밀스를 부를 때, 그가 군중 속 어느 한 곳에 종종 시선이 머물렀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에 떨리는 목소리를 내다가, 마지막에는 놀랄 만큼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나는 나중에 피터 도슨이 바라보던 그 장소에, 언젠가 문스톤호에서 만났던 남자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뱃머리에 쭈그리고 있다가 나중에는 보병들의 구조를 도왔던 바로 그 남자였다. 피터는 또, 조지 밀스 외에 다른 이름을, 이번에는 파리어도 알고 있는 이름을 불렀다. 그 이름이 호명될 때, 우리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브라이언, 그 애는 아름다운 목소리로 줄곧 우리의 어떤 시대에서 그 이름을 불러냈다. 브라이언 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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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레이먼드 카버의 에세이 <내 아버지의 인생>의 마지막 문단을 차용해서 썼음. 내용은 전혀 다르나 장례식장에서 이름을 호명하는 장면, 그리고 마지막 문장은 인용하여 글에 맞게 꾸려 썼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영화 <붉은 돼지>의 세계관도 차용해서 씀. 비행정 무덤 장면에서 얼마나 전율했는지..그러니까 이 글은 내가 쓴 글이지만 온전히 내 글은 아님.

 1-2. <마지막 문장의 원문>
 "레이먼드, 장례식장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목소리로 줄곧 내 유년기에서 그 이름을 불러냈다. 레이먼드.“

2. 덩케르크 오피셜 비하인드에서 피터의 형 이름이 브라이언으로 밝혀졌다. 그것을 기념하여 쓴 글이다.

201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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