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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o, Stranger! «번개 모양»
1차/old 2019. 10. 8. 23:31

  왁자한 교실에서 힘썬은 쭉 뻗은 긴 다리와 부리부리한 인상의 얼굴을 보았다. 힘썬이 눈을 깜빡인 다음 순간, 그 애 역시 힘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서로가 눈이 마주쳤다는 사실을 알았다. 힘썬이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 애는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힘썬은 그 애와 대화하기 위해 특별히 허리를 숙이거나 고개를 젖혀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애는 힘썬과 키가 거의 비슷했다.
  힘썬이 말했다.
  “걷고 싶다.”
  “그래? 그럼 걸어.”
  “너랑 걷고 싶어.”
  힘썬은 그 애의 긴 다리처럼 자신 역시 긴 다리를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싶었지만, 다짜고짜 다리 길이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애가 당혹스러워 할 수도 있음을 알았기에 그냥 이렇게만 덧붙였다.
  “복도를 조금만 걷다오지 않을래?”
  “음.”
  그 애는 잠깐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귀찮은데.”
  힘썬은 그 대답에 주눅 들어야하는 법을 몰랐으므로, 간단하게 생각했다.
  “그래? 그럼 여기서 네 이름에 대해 물어보면 되겠구나.”
  힘썬이 손을 내밀었다.
  “악수하지 않을래? 이때까진 악수를 하지 않고 나를 소개했는데, 이번에는 악수를 하면서 통성명을 해보고 싶어.”
  그 애는 힘썬을 미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순순히 손을 잡아주었다.
  “좋아.”
  “나는 힘썬이야.”
  “너 마법사야?”
  “그럼.”
  “나는 김혜나.”
  “오.”
  힘썬이 기뻐했다.
  “김 씨구나. 김 씨는 내가 한국에 내려와 가장 먼저 알게 된 성이야.”
  혜나는 어딘지 허탈하게 들리는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그렇겠지. 한국에서 제일 흔한 성이니까.”
  두 사람은 손을 몇 번 더 흔들었다. 잠시 후 혜나가 물었다.
  “이거 언제까지 흔들어야 돼?”
  “음, 이제 만족했어. 고마워.”
  힘썬이 정중하게 손을 놓았다. 혜나는 운동복에 손을 찔러 넣었다가 힘썬의 정수리 부근을 쳐다보았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있었지만 힘썬은 그것에 문제를 느끼지 않았다. 침묵이 얼마나 지속되면 문제가 되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힘썬이 말했다.
  “내가 너에게 다가온 건, 우리가 눈이 마주쳐서야. 그러니까 우리는 서로를 막 인식한 거지. 그래서 네 이름이 알고 싶었어. 혜나. 혜-나. 이름이 무척 좋아. 받침이 없잖아. 발음하는 게 좋아.”
  “어차피 성은 김 씨지만 뭐, 고마워.”
  힘썬은 이제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말했다.
  “혜나, 놀랍게도 우리는 키가 거의 똑같은 것 같아.”
  “아.”
  혜나는 감흥 없이 대꾸했다.
  “그런 것 같네. 너 키 몇이냐?”
  “175cm야.”
  “비슷하네. 난 178임.”
  “맙소사, 오 정말 아깝다. 내가 3cm만 더 크게 만들었더라면, 우리 사이에 엄청난 공통점이 생기는 거였을 텐데.”
  혜나는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힘썬의 사고방식이 자신과 다름은 충분히 이해한 것 같았다. 그녀는 대꾸하기 좋은 말을 찾는 것 같았고, 잠시 후 대답했다.
  “안 됐네.”
  힘썬은 혜나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혜나가 아까부터 흘끔거리곤 하던 자신의 번개모양 머리 삔을 보여주고 싶어졌다.
   “혜나, 내 머리 삔 말이야.”
  “어. 귀엽네.”
  이번에 혜나는 갑작스럽게 주제가 바뀌었음에도 조금 반가워하는 것 같았다. 힘썬이 머리 삔이 잘 보이도록 고개를 슬쩍 꺾으며 조잘거렸다.
  “더 잘 볼 수 있도록 떼어내고 싶지만, 아직은 ‘조절’이 쉽지 않아. 그러니까 이렇게만 봐줘. 너는 번개모양을 좋아하니? 인간들은 빛에도 여러 심볼을 만들어서 사용하더구나.”
  “무슨 소린진 잘 모르겠는데, 일단 귀엽긴 해.”
  “네 마음에 들었다는 소리니?”
  혜나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응.”
  힘썬은 혜나에게 무언가 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곧 그 방법을 찾았다. 그녀는 혜나의 책상을 굴러다니던 볼펜 하나를 집어 들었다. 힘썬이 볼펜을 혜나의 미간 사이에 두고 긴장한 표정을 지었다.
  “번개 모양을 줄게. 잘 될 거야.”
  혜나가 그 말의 의미를 되묻기도 전에, 힘썬은 볼펜 끄트머리를 부드럽게 쥐고 ‘그것’을 만들었다. 힘썬은 자신의 손을 타고 흐르는 아주 익숙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고, 동시에 손의 고랑을 타고 흐르는 그 에너지들이 정말이지 낯선 감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힘썬이 손을 떼어냈을 때, 그녀의 마법은 제대로 작동했다. 혜나의 볼펜 끄트머리에 힘썬의 머리 삔과 꼭 똑같은 번개모양이 생겨난 것이다.
  힘썬은 볼펜을 신중하게 돌리며 다각도로 그 번개모양을 점검했다.
  “으음, 잘 된 것 같아. 생각보다 조금 작게 만들어졌지만.”
  혜나는 볼펜을 받았다. 그녀는 볼펜을 들어 믿을 수 없다는 듯 뒤집어보았다.
  “방금 마법쓴 거야?”
  “오, 그럼.”
  힘썬이 뿌듯하게 말했다.
  “오로지 너를 위해서 썼어.”

190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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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haircsis «태양의 광장»
1차/old 2019. 10. 8. 22:52

 신속하게 사람을 넘어뜨리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거다. 두 번째는 막대로 등허리를 세게 후려친다. 이러면 상대가 알아서 고꾸라진다. 세 번째는 정통으로 정수리에 주먹을 내리꽂는 것이다. 적당히 힘만 들어가면 반으로 접힌 상대가 발치에서 뒹구는 꼴을 볼 수도 있다. 
 잼에게 이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은 동쪽항만으로 흘러들어온 패잔병이다. 그 남자는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며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었다. 눈빛이 형형해서 언젠가 말을 타고 칼을 다뤘을 거라는 인상을 주었다. 구걸하지 않을 때는 바닥을 보며 지난 세월을 눈으로 더듬어 나가고 있었다. 잼은 항구의 뒷골목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는 마흔 살이었고 잼은 열 살이었다. 
 “안녕하세요.” 잼이 말했다. 
 “이것 좀 드실래요?” 
 잼은 그의 손위에 고기 한 덩어리를 얹어놓았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조로하고 비굴했으나. 잼은 생각했다.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일 거야.’ 
 “무기를 만져본 손이에요, 그렇죠?” 
 잼은 남자의 더러운 손을 주워들고, 작은 손바닥을 펼쳐서 그의 굳은살을 꼼꼼히 만졌다. 
 “언젠가 당신 짐을 빼앗으려고 덤벼든 사람을 귀신처럼 해치우던 걸 본 적 있어요. 나한테 그걸 알려주면 매일 필요한 걸 하나씩 가지고 올게요.” 
 잼은 남자의 나머지 한손에 창처럼 길쭉한 작대 하나를 얹어주었다. 
 “당신 앞에는 고기 한 덩어리가 있지만 또한 당신은 이걸 선택할 수도 있어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잼을 바라보았고, 잼은 그의 눈동자 너머로 무엇이든 읽기 위해 노력했다. 굶주렸다면 고깃덩어리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용사도 배가 불러야 포효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잼은 남자의 눈에서 어떤 빛, 오로지 비굴하기 위해서만 하늘을 바라보게 된 삶의 지층에 깔려있던 그것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았다. 땅을 보며 굴종하고, 하늘을 보며 영광을 알던 기사의 시절이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잼은 똑똑히 보았다. 늙은 남자의 운명이 전복(顚覆)되는 순간을 열 살의 잼은 똑똑히 보았다. 
 남자가 말했다. 
 “좋다. 내 이름은 이곤이다. 네 이름은 무어냐?” 
 “잼.” 
 남자는 작대를 잡았다. 
 “오늘부터 널 가르쳐주지.” 
 이것이 잼이 스승을 얻게 된 일화이자, 평생을 걸쳐 써먹게 될 세 가지 맨손 격투를 배우게 된 발단이다. 

 이곤이 잼을 오래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다. 잼이 격투를 배운 건 고작해야 일 년 남짓이다. 그래도 잼은 계속 “했다.” 
 항구에는 몸집을 믿고 어슬렁거리는 장성들이 많았다. 소위 놈팽이들이 자릿세를 뜯거나 어리숙한 귀족 아이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항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주택가가 나왔고, 거미줄처럼 늘어진 길거리가 도시 구석구석을 관통하며 흘렀다. 그 거미줄마다 시정잡배들이 놈팽이 흉내를 냈다. 키만 컸지 근육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들이 몰려다니며 어린 애들을 겁주고 간식거리를 뜯어가는 것이다. 잼은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발을 걸거나 등허리를 후려쳤다. 주먹이 좀 더 단단해진 후에는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기분이 좋을 때면 으레 그렇게 했다. 기분이 나쁠 땐 잡배들에게 둘러싸인 아이가 훌쩍거려도 행인들을 모으고 종종걸음으로 벗어나곤 했다. 평민이 항상 용사일 수는 없잖아? (그녀가 귀족임을 알게 되는 건 좀 더 이후의 일이다) 
 오셀로를 만났을 때, 잼은 열여섯 살이었고 당나귀를 끌고 길거리를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기분이 좋았다. 오셀로는 열 살이었고 잡배들에게 둘러싸인 채 골목에서 떨고 있었는데, 분명 죽을 맛이었을 거다. 잼은 그 애를 도와주기로 결심하자마자 “과과”의 등에 올라탔다. (과과는 열 살에 잼이 얻은 당나귀다. 이 친구를 얻게 된 경위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그 날, 골목에서 잼이 벌인 싸움은 싱거우리만큼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잼에게 얻어맞은 우두머리 아이가 울기 시작해 나머지 아이들이 부리나케 도망을 쳤기 때문이다. 냅다 달려온 게 무색할 정도였다. 과과를 급하게 멈춰 세우자 발밑으로 흙먼지가 잔뜩 일었다. 
잼이 나귀에서 뛰어내렸을 때, 잼의 크림색 망토는 바람 덕분에 한껏 하늘로,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고, 때마침 햇빛이 직각으로 내리쬐어서 사방이 반짝반짝했다. 오셀로의 얼굴 위로 커다란 망토 그림자가 졌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장면이 느리게 전개되었다. 잼이 그 순간을 느리게 기억하는 것은 오셀로의 눈동자 때문이다. 
 그 애는 홍안이었다. 

 삐뚤빼뚤한 골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과과는 몇 번 더 크게 히힝, 울음을 토했다. 잼은 과과가 오셀로를 깨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흥분한 당나귀를 귀족 출신 꼬맹이와 놔둘 수는 없는 것이다. 
 잼은 슬그머니 과과를 바깥쪽으로 몰면서 딴청을 피웠다. 
 “넌 왜 귀족이면서 호위병 하나 안 달고 다니냐?” 
 “그야, 집에서 몰래 나왔으니까요…….” 
 오셀로가 작게 중얼거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귀족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 
 “바보냐? 돈 많은 빨간 눈깔은 다 카르스텐 가 사람이니까 그렇지.” 
 ‘완전 띨띨한 녀석이네.’ 잼은 생각했다. 
 “아무튼 잘 됐다. 너 돈 넉넉하지? 나 마침 배고픈데 시장에서 과일 좀 사다주라. 과과 녀석도 먹일 거야.” 
 “과과요?” 
 “응, 얘 말이야.” 잼은 바깥쪽으로 걷고 있는 당나귀를 가리켰다. 
 오셀로는 회색 털을 가진 다부진 당나귀를 바라보았다. 
 “얘 이름이 과과예요?” 
 “응, 근데 가까이 다가가지 마. 성질 사나워서 막 물어.” 잼은 괜히 겁을 줬다. 
 “누나도 무나요?” 
 “바보야, 내가 주인인데 날 물겠냐?” 
 잼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진짜 띨띨이.’ 
 “누나는 어쩐지 연극에 나오는 기사님 같네요.” 오셀로가 말했다. 
 “말을 타고 망토를 두른데다가 무척 강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오셀로는 한 발짝 뛰쳐나가 잼을 향해 똑바로 섰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육포랑 과일이랑 드시고 싶은 만큼 사드릴 테니까 오늘 저녁까지 저랑 같이 있어주면 안될까요?” 
 잼은 과과를 멈춰 세우고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고 통통하게 젖살이 올라서 아주 둥글었다. 사랑을 넘치게 받아서 어떻게든 쏟고 싶어 안달이 난 눈처럼 보였다. ‘내가 조금만 더 배를 곯으며 살았어도 저 애를 증오했을 것이다.’ 라고 잼은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 티끌만큼의 차이일 것이다, 라고. 
 잼이 말했다. 
 “얘, 너 내가 한가한 줄 아니?” 
 오셀로가 벌리고 있던 양팔을 내렸다. 그리고 엉거주춤 서서 고개를 기울이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잼의 마음에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은 강하지는 않았음에도 몹시 거슬릴 만큼은 따끔거렸다. 이런 주먹을 뭐라 부르더라? 
 잼은 입을 샐쭉하게 내밀며 슬그머니 덧붙였다. 
 “뭐, 오늘은 한가하니까…….” 
 오셀로가 환하게 웃는 것을 팔짱을 끼고 모른 척했다. 

 이곤은 스무 살적부터 기사로 전장을 누비며 승리를 누렸다. 이베르타가 통일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영지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국에 멸망이 닥쳤을 때, 이곤의 운명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황량한 북쪽 산맥을 떠돌던 그는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혹은 동쪽으로 비틀거리며 걷거나 달렸고, 마침내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 땅에 도달했다. 바다를 얻고 상인이 번성하는 도시였다. 길거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다보면 빵조각을 얻었다. 부유는 부드러운 검이었다. 북쪽산맥은 얼어 죽게는 만들지언정 기사의 이름을 빼앗을 수 없었으나, 도시의 번영은 시간을 들여 이곤의 이름을 탈환하였다. 당장의 배곯음 앞에서 굴종하기 시작한 남자는 거지가 되었다. 검을 내려놓고 찾아온 두 번째 인생이었다. 
 잼은 그에게 세 번째 인생을 주었다. 
 “난 이곤이 나한테 두 번째 인생을 만들어 줬다고 생각해요.” 잼이 남자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들은 골목에서 작대를 창으로 삼아 짧은 창술을 겨루던 참이었다. 잼이 늘 졌고, 마지막에는 씩씩거리며 나뒹굴었는데, 처음으로 잼이 이겨서 둘 다 몹시 기분이 들떠있었다. 
 “두 번째 삶?” 이곤이 되물었다. 
 잼은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채 발을 까딱거렸다. 
 “응, 두 번째 삶. 난 이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내 삶을 어쩌면 좋을지 도무지 감도 못 잡고 있었거든요.” 
 잼은 노래처럼 중얼거렸다. 
 “기사를 발견했으니 기사가 되기로 했죠. 용병으로 뛰게 되면 이곤이 가르쳐준 것들을 더 잘 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열한 살짜리가 무슨 용병이냐, 완전 꼬맹이구만 그래.” 이곤이 낄낄거렸다. 
 잼은 혀를 쭉 내밀었다. 
 “흥, 나이가 차면 당장 용병으로 뛸 거예요. 다음 해에는 말도 얻어낼 작정이라구요?” 
 “그러시던가.” 이곤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잠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쓰느라 너무 지쳤던 것이다. 
 머리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태양 빛이 거리로 쏟아졌다. 바닥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서 꼭 잼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잼은 빛으로 촘촘하게 채워진 바닥의 타일들을 눈으로 쓸어보았다. 그것들은 몹시 아름다워서, 먼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그 때 고깃덩어리 대신 작대를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잼이 이곤에게 말했다. 
 “나는 이곤이 아마 고기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곤은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노을에 감싸인 잼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거의 오렌지색처럼 보였다. 불꽃처럼. 혹은 생명. 어쩌면 그것보다 더 무한하고 넓은 것. 확장되는 에너지. 죽어가는 것들을 일으켜 세우는 의지 같은 것들. 요컨대 굴종 속에 파묻힌 전사의 이름을 불러 세우는 힘. 
 처음 만났던 잼의 눈동자 속에도 어김없이 담겨있던 그것들. 
 이곤은 그 때, 이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영광 없는 삶에 익숙했더라면 저 애를 증오했을 것이다.’ 
 이곤이 말했다. 
 “나는 고깃덩어리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정말?” 잼이 고개를 기울이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작대를 잡았죠?” 
 이곤은 잼의 눈동자를, 타오르는 불꽃을, 보석 같은 힘을,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았다. 
 “명예가 걸렸거든.” 그가 대답했다. 
 “내 자신에 대한 명예 말이야. 네 녀석 말고.”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잼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온 삶에 배반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라는 거야, 알겠냐.” 
 이곤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누가 심장에 주먹을 때리는 것처럼 거슬리고 아프거든.” 
 이곤은 마흔 한 살 겨울에 페스트로 죽었다. 

 오셀로와 시장을 두 바퀴째 돌고 있을 무렵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오셀로는 종종걸음으로 잼을 쫓았고, 잼은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천막을 쑤시고 다녔다. 
 “누나, 벌써 체리만 두 봉지 째에요. …다른 건 안 먹어요?” 
 오셀로가 잼의 체리봉투를 안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쓸데없는 참견이야. 어련히 알아서 다 먹는다구.” 
 잼이 오셀로의 가슴팍에서 체리 하나를 꺼내 물며 구시렁거렸다. 
 “음, 과일만 먹으니 짭짤한 게 당기는데. 육포 먹을까?” 
 “누나는 정말 배가 크시네요…….” 
 오셀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잼은 그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였다. 오셀로가 펄쩍 뛰었다. 
 “아야, 왜 때려요!” 
 “그냥 때려보고 싶었어, 띨띨아.” 
 “너무해요…….” 
 오셀로가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호쾌하게 먹고 마시는 것까지 기사를 닮았다는 뜻이었다구요….” 
 “누가 뭐래?” 
 잼이 콧방귀를 뀌자 오셀로가 바짝 따라붙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것 때문에 때린 거 아니에요?” 
 “아니거든!” 잼은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난 기사가 아니라구.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나는 기사는 못 돼.” 
 “왜요?” 
 “진짜 기사를 알고 있거든. 함부로 흉내 내다간 비웃음 당하고 말 걸.” 
 둘은 대로변에 세워진 천막을 지나 골목마다 세워진 조그만 잡화상 사이를 지났다. 길이 충분히 넓지 않아서 과과가 뒤처지게 되었다. 과과는 걷는 도중 오셀로의 손등에 축축한 주둥이를 가져다 대서 오셀로를 조금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난폭한 당나귀는 소년의 손등을 다정하게 핥아주었고, 이번에는 잼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너 이 자식, 왜 낯선 녀석에게 다정해지는 거야?” 
 잼은 서운함과 괘씸함이 뒤섞인 눈으로 과과를 바라보았다. 
 “완전 배신자야!” 
 “과과도 누나처럼 나를 좋아하나 봐요.” 오셀로가 웃었다. 
 잼은 오셀로의 정수리에 한 번 더 ‘정의의 철퇴’를 한 방 먹여주었다. 오셀로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둥그런 머리통을 감싸고 눈물을 그렁그렁 달며 물러났다.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오셀로가 항의했다. 
 “아파죽어요! 누나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아세요?” 
 “능청을 떨어대니까 얄미워서 한 방 먹인 거지.” 
 “능청이라뇨! 그럼 누나는 절 왜 도와주신 거예요?” 
 “도와주는 데에도 이유가 있냐?” 
 둘은 코너를 돌았고, 아까보다 좁은 길이 펼쳐졌다. 과과를 데리고는 도무지 이동할 수가 없는 골목이었다. 집과 집 사이가 몹시 좁아서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그 사이를 넘어가면 작은 광장이 나왔다. 노을 때문에 타일이 붉은색으로 온통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좁은 틈사이로도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둘은 잠시 멈추어 서서 그 골목 너머에 존재하는 많은 빛들-쏟아지고 부서지고 붉게 타오르는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어.” 
 잼은 불쑥 말해놓고도 누군가를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셀로가 잼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저를 구해주신 거예요?” 
 “기분이 좋았거든.” 잼이 대답했다. 
 “그런데 널 무시하고 지나치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어!” 
 잼은 손을 들어서 가슴언저리를 문질렀다. 
 “마음이 콕콕 찔려서, 엄청 거슬리는 거 있지. 이때까지 잘 살아왔는데, 고작 그 순간을 지나치는 게 내 삶을 배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이런 기분을 뭐라 부르는지 알아?” 
 잼이 중얼거렸다. 
 “난 예전에는 알았던 것 같은데, 다 까먹고 말았어….” 
 하늘이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셀로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오셀로는 벽과 벽의 좁은 어둠 너머로 일렁이는 빛 조각들을,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오셀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건 아마 누나의 긍지 같은 걸까요.” 
 “긍지.” 
 잼이 되뇌었다. 
 “그래, 나는 긍지를 지키면서 살고 있는 거구나.” 
 이번에는 누군가를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잼은 그것이 좋았다. 그리고 조금 슬퍼졌는데,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영영 상실한 기분이 들었다. 타오르다 지는 순간을 보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누나, 다음에도 저 구해주실 거죠?” 
 오셀로가 말했다. 
 “아니면 내가 누나 동생이라고 허풍을 떨어볼까요? 우리 눈동자 색도 비슷하잖아요. 머리도 땋았구….” 
 “야 임마, 너 같은 띨띨이가 내 동생이라고 자처하고 다니면 내 명예는 어떡하란 거야.” 
 잼이 면박을 주긴 했지만 꿀밤을 먹이진 않았다. 
 오셀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긍지랑 명예는 멀리 있지 않다구요.” 
 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후에, 두 소년소녀는 어둠이 고인 틈과 틈 사이로 보이는 태양의 광장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노을 같은 것을 오래 보고 있는 게 아니었는데. 번영과 멸망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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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haircsis «11-13»
1차/old 2019. 10. 8. 19:12

 나는 열한 살쯤 어른이 된 것으로 기억한다. 어느 날 이불을 걷었더니 거시기에 털이 나있었다. 빨랐던 건가? 남들에게 거시기 털이 몇 살쯤 났냐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영영 알 수가 없을 테다.

 그 해 겨울에는 원인 모를 병이 돌아서 거리의 많은 거지들이 죽었는데, 나의 스승 이곤도 거지였다. 그의 시체가 열흘 동안 골목 구석에 누워있었다. 열흘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그를 수레에서 찾았다. 마침 시체를 쌓으러 가는 길인데, 아는 사람이냐고 수레지기가 물어보았다. 나는 그 놈의 다리를 힘껏 걷어 차주었다.

 그의 몸이 기억난다. 고양이처럼 웅크린 채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나는 잘 때 왼쪽으로 웅크리고 자는 버릇이 있는데, 이곤은 자는 게 아니라 죽은 것이다. 그것의 차이는 간단하다. 나의 이마는 잘 때마다 모락모락 열이 피어오르는데, 죽은 이곤의 이마는 딱딱하고 차갑다. 그의 눈을 감겨줄 때, 이마를 만져보았다가 그 온도에 깜짝 놀랐다. 그 전까지 나는 시체를 가까이서 볼 일이 거의 없었다.

 마흔한 살 먹은 장성을 업고 언덕을 오르는 일을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 혼자 걸을 땐 금방인데, 등에 시체를 지고 있으니 세 배는 더 걸렸다. 죽은 스승이 나의 등에서 어린 아이처럼 늘어졌다. 오르막을 오르는 내내 등 뒤에서 질질 발 끌리는 소리를 들었다. 언덕에 도착하고 나서 이곤의 왼발에 신겨져 있던 구두가 사라졌음을 알았지만, 되돌아 갈 힘이 없어 그대로 엎어지고 말았다. 돌아올 때 찾아보았는데, 못 찾았다. 아무래도 누가 가져간 것 같다. 어쨌든 난 그를 바다가 보이는 높은 언덕에 묻었다. 이곤의 영혼은 이베르타 사람이 아니었지만 이베르타에서 죽었으므로, 그가 축복을 받았다면 에온과 같이 있을 것인데, 구두가 한 짝뿐이니 내내 깽깽이 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조금 눈물이 났고, 이곤에게 미안해졌다. 그러니까 나는 열한 살 겨울에 영영 지울 수 없는 마음의 빚이 생기고 만 것이다.

 열두 살에는 항구에서 제일가는 무법자가 되었다. 남자애들이고 여자애들이고 할 것 없이 내 막대기 앞에서 바짝 쫄아 꽁무니를 빼기 바빴다. 스승을 잃었지만 나는 무사하였다. 계속해서 싸우고 지배하고 정복하고 또 자비를 베풀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전사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어쨌거나 나는 인생에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열두 살 가을 무렵에는 말이 필요해서 트리아즈 상단을 습격했다. 거기서 쫓겨나는 대신, 나는 유리아를 만나게 되었다. 유리아는 트리아즈 상단주였고, 재미있는 일을 찾고 있었는데 때마침 내가 나타나 기분이 퍽 유쾌해보였다. 유리아는 말을 거저 주는 대신 몇 가지 조건을 걸었는데, 나는 그것을 내기로 이해하였다. 이겼는지 졌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이겼을 것이다. 유리아는 나에게 말을 고를 기회를 주었고, 나는 당나귀를 골랐다. 나는 나의 당나귀에게 과과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열세 살에 나는, 단단하고 낡은 나무작대와 튼튼하고 어린 당나귀가 있었고, 항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서, 나의 스승이 묻힌 바로 그 장소에서, 종종 엉덩이를 깔고 먼 바다를 보았다.

 나는 바람이 결을 나누는 곳을 보았다.
 나는 배가 떠나고 돌아오는 곳을 보았다.
 나는 이단자들의 무덤을 보았다.

 
 그 무덤은 나의 스승을 묻은 곳처럼 판판하고 반듯하지 않았다. 필시 시체가 너무 많은 탓일 테지. 시체가 많은 구덩이는 아무리 다져도 판판해질 수가 없지. 무엇으로 가득 찼다면 반드시 부풀어 오를 테지. 요컨대 저 바다도 분명 부풀고 있을 것이다. 요컨대 바다는 판판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세상에 끝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갈 수 있을 때까지는 가봐야지. 열세 살의 나는 마침내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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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다감 «30-0.»
1차/old 2019. 10. 8. 19:07

 0.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 7:24)

 

 1.

 월초에 돈이 들어왔다. 여기저기서 들어오긴 했지만, 합치면 총 50만원이다.

 통유리로 된 자동화기기 건물 안은 에어컨 고장으로 찜통이었다. 삼신은 ATM 기기에서 돈을 꺼내 흰 봉투에 넣곤 곧장 체크카드를 잡아 뺐다.

 밖은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매미가 드문드문 울었다. 삼신은 가로수 그림자 안으로 걸었다. 초여름이구나. 방학 전에 목표를 이뤄서 다행이야. 삼신은 자신의 샌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차도 쪽으로 버스 두 대가 빠르게 지나갔다.

 삼신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돈을 벌었다.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운영되는 동네 학원 몇 군데에서 시험지와 영어 독서록을 받아와 채점하는 일이었다. 모의고사 혹은 내신 점수가 수강생 전체의 0.5%에 들면 과목 당 10만원을 주는 인터넷 강의 사이트에서 돈을 벌기도 했다. 공부를 열심히 하면 30만원이고 40만원이고 벌 수 있다는 사실은 삼신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되기 전까지, 삼신은 290만원을 모았고, 고등학교 2학년 첫 고사 기간을 거친 후 340만원을 모았다. 300만원이 모이면 적금을 들어 대학 등록금으로 쓰고자 했는데, 40만원이나 더 번 셈이다.

 ‘부자가 된 기분이야…….’

 삼신은 신호등에 기댄 채 하늘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내가 부자였던 적이 있었나? 하지만 삼신은 좀 전까지 ATM 기기 액정에 찍힌 액수를 보고 오는 길이었고, 날은 무더워지기 시작했으며, 꿈은 아니었다. 갑자기 삼신은 하늘로 붕 떠오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만약 인간에게 날개가 있었다면 분명 그렇게 했을 것이다. 기분이 좋은 탓에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40만원은 금란이 학원 비로 보태 쓰라고 하자.’

 삼신은 어젯밤 금란이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소릴 들었다. “은주야…….” 그 애는 행여나 부모님이 깰까봐 숨을 죽이면서도 끄윽끄윽 울음을 멈추지 못 했다. “내 친구들 중에서 나만 학원을 안 다녀 걔넨 나 없이 단톡도 만들었어. 이런 거 왕따라고 하는 거지?” 금란은 자존심도 세고 욕심도 많고 물욕도 많고 외로움도 많이 탔다. 그 탓에 삼신과 자주 부딪치고 싸웠다. 금란은 삼신을 가장 많이 닮았고, 가장 삼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동생이었다.

 삼신의 눈앞으로 버스 한 대가 쏜살같이 지나갔다.

 ‘우리 집에 좀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모난 성격이 되진 않았을 텐데.’

 사거리는 신호가 길었다.

 많은 걸 포기한 사람은 둘로 나뉜다. 죽거나 죽여 버린다. 그리고 두 선택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떼를 쓰던 금란의 눈은 필사적으로 죽여 버릴 것을 찾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무언가를 죽여야만 할 때가 오면 그 애는 이불로 숨어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이런 거 왕따라고 하는 거지…….” 어젯밤 금란의 울음소리는 꼭 항복 선언처럼 들렸다. 한 달 학원 비는 바이올린의 그것보다 못 해도 10만원은 더 불러야 했고, 목욕탕 단골도 줄어든 마당에 부모님이 그걸 보탤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금란은 떼를 써서 될 일과 그럼에도 되지 않을 일을 정말 잘 구분하는 아이였다 항상 그랬다. 금란은 언젠가의 삼신이 그랬듯이 학원가를 서성이며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봐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가난뱅이라서 정말 싫어.’

 금란은 그 말을 끝으로 울음을 그치고 입을 다물었다. 은주가 금란을 껴안았다. 잠들지 못 한 삼신은 어둠 속에서 둘을 바라보았다. 살면서 결코 잊을 수 없는 장면 중 하나가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 삼신은 금란이 부모님의 마음을 죽이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였음을 알았다. 그리고 앞으로 종종 그렇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부터는 쉬운 일이 될 테니까. 가난은 칼자루 없는 칼이고, 어느 쪽으로 쥐던 결과는 같으니까.

 ‘그 애는 나처럼 살면 안 돼.’

 걘 이렇게 못 살아. 삼신은 바닥을 봤다. 마구 헤진 낡은 가죽 샌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니까 이렇게 살 수 있는 거야. 난 장녀니까.’

 마음을 정했다. 40만원은 부모님께 드리자. 금란의 학원 비로 써달라고 슬쩍 언질을 주면 두 분이 알아서 하실 것이다. 그 돈이면 첫 달은 어떻게든 되겠지.

 삼신은 종종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주머니 안쪽에 구겨 넣은 흰 봉투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340만원 어치의 무게는 실로 그러했다.

 

 2.

 이번 달부터는 하복을 입었다. 교칙이 바뀌고 아이들의 옷차림은 한결 가벼워졌다. 삼신은 거울 앞에 서서 하복 와이셔츠 단추를 잠가봤다. 작년에도 가슴이 좀 꼈는데 올해도 여전했다. 체중은 작년보다 3kg가 늘었고, 삼신은 그 살이 다 팔뚝에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삼신은 얇은 가디건을 걸치고 거울 앞에서 한 바퀴를 빙 돌아봤다. 치마는 좀 더 짧아졌고(키가 컸기 때문이다) 가슴이 좀 커보였고(좋은 일인 진 모르겠다) 머리가 미묘하게 길어졌다(늘 그렇듯이). 그것 외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가디건 덕분에 늘어난 살집도 별로 티가 나지 않는 것 같았다.

 대신 숨쉬기가 답답했다. 삼신은 와이셔츠를 위로 말아 올렸다. 브레지어 끈에 눌린 살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땀으로 습한 가슴 사이가 찝찝했다. 삼신은 부어오른 가슴 안쪽으로 바람이 통할 수 있도록 와이어를 당겼다.

 ‘속옷도 새로 사야겠구나.’

 남은 300만원에서 3만원을 제한다고 당장 큰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적금을 들고 오는 길엔 매장에 들러 새 속옷을 사자. 두 개 정도의 여유분을 사야 빨래할 때 곤란하지 않겠지. 삼신은 속으로 계산해봤다. 10만원만 빼놓을까. 그 정도면 살 수 있으려나. 빈 금액은 다음 달에 더 열심히 벌어서 채워 넣으면 된다. 340만원도 벌었는데 못할 게 뭐가 있으랴.

 삼신은 걷어 올렸던 와이셔츠를 내리고 양말을 바로 신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그리곤 화장대 앞에 앉아 서랍을 열었다. 하얀 봉투, 삼신의 자부심, 그녀의 340만원이 얌전히 누워 있었다. 삼신은 봉투 하나를 더 꺼내 40만원을 나누어 넣었다. 그리곤 300만원 봉투를 서랍 아래쪽에 넣고, 40만원을 서랍 맨 위에 얹어놓았다.

 “누나, 뭐야?”

 동래가 이불 위를 뒹굴다 말고 물었다. 삼신은 건성으로 니네 누나 학원 비.”라고 대답했다. 동래는 이불을 더 뒹굴다 말고 잠이 들었다. 삼신은 그 애의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곤 밖으로 나왔다. 금란이 문 앞에 멀뚱히 서있었다.

 삼신이 팔짱을 꼈다.

 “안 들어가고 뭐 해?”

 “내 학원 비야?”

 금란은 삼신만큼이나 눈치가 빨랐다.

 삼신은 웃지 않으려고 애쓰며 대답했다.

 “.”

 금란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삶을 발견한 눈빛은 아름답구나, 라고 삼신은 속으로 생각했다.

 “큰돈은 아니야.  40만원이거든. 대신 열심히 다녀야 돼. 한 달 다녀보고 결정하는 거야.”

 “.”

 “별로 할 마음이 안 들면 깔끔하게 그만두는 거야.”

 “.”

 “나랑 약속해.”

 금란이 갑자기 와락 삼신을 껴안았다. 삼신은 엉거주춤 손을 들었다.

 “약속할게.”

 삼신은 가슴팍이 조금 축축해지는 걸 느꼈다.

 금란이 말했다.

 “언니 사랑해.”

 삼신은 엉거주춤 들었던 손으로 금란의 등을 감쌌다.

 “나도 알아.”

 문 너머에서 동래가 이불을 발로 차는 소리가 들렸다. 삼신은 금란이 자길 놓아줄 때까지 얌전히 서있었다. 무언가를, 누군가를 죽이지 않아도 괜찮은 선택지를 발견한 품은 억세고 충만했다. 금란은 오래도록 삼신을 놓지 않았다. 40만원이 전혀 아깝지 않은 품이구나, 라고 삼신은 그 애에게 안겨진 채로 오래오래 생각했다.

 

 3.

 그 다음 날, 삼신은 교무실을 나오다 말고 G를 마주쳤다. 삼신은 G를 보지 못 했지만 G는 삼신을 발견했고, 삼신의 포니테일을 아래로 훅 잡아당겼다. 삼신은 너무 놀라서 휘청거리다 말고 주저앉을 뻔했다. G는 삼신의 어깨를 붙잡고 제 쪽으로 돌렸다.

 “!”

 G는 놀란 삼신의 얼굴을 보고 박장대소했다.

 “왜 모르는 척 해! 키 많이 컸네!”

 “!…….”

 삼신은 마땅히 할 말을 찾지 못 하고 G를 바라보았다.

 “유학가신 줄 알았는데.”

 “갔다가 삼 개월 만에 때려 치고 돌아옴.”

 G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찡그렸다.

 “보고 싶었지?”

 삼신은 바닥을 봤다.

 “선배가 절 보고 싶으셨겠죠.”

 G는 이번에도 박장대소했다.

 “, 맞아.”

 그리곤 삼신의 정수리를 마구 헝클었다. 삼신의 앞머리와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 마구잡이로 흐트러졌다. 삼신은 G의 손을 쳐내곤 뒤로 물러났다. G는 여전히 싱글싱글 웃었다.

 “교무실은 왜? 또 사고 쳤어? 우리 신이는 중딩 때랑 달라진 게 없구나.”

 “아니에요.”

 삼신은 변명했다. 변명이 아니었지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모의고사 때문에 그래요.”

 “1등해서?”

 “우리 학년 중엔 제일 잘 봤대요.”

 삼신은 어쩐지 자신이 자랑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꼈고, 자신이 어린 애가 된 것 같다고 느꼈고, 그래서 점점 작아지기 시작했다. G는 만족스러운 눈으로 삼신을 내려다보았다.

 “역시 우리 씬이는 공부의 천재야.”

 예비종이 쳤다. G는 고개를 들고 천장에 매달린 스피커를 바라봤다.

 “난 갈게. 나중에 보자.”

 그림자 속에서 G는 손을 흔들었다.

 삼신은 가만히 서서 G의 뒤통수가 복도 코너를 돌아 사라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이들이 물소 떼처럼 삼신 옆을 우르르 스쳐지나갔다. 삼신은 G가 사라진 복도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키 더 크셨네…….’

 주변은 조용했다. 삼신은 천천히 머리를 풀었다. 어깨를 넘어 가슴께까지 부드럽게 늘어진 머리카락에서 샴푸냄새가 났다. 손가락으로 빗질을 했지만 헝클어진 잔머리를 돌려놓기란 쉽지 않았다. 삼신은 힘주어 빗었다. 그리곤 다시 머리카락을 묶었다. 더 높고 더 빡빡하게. 그러자 피가 도는 기분이었다. 삼신은 손을 벌려 자신을 안아보았다.

 ‘가디건 입길 잘했다…….’

 수업종이 쳤다.

 

 4.

 삼신이 다니던 중학교엔 전교에서 가장 인기 없는 교사가 있었다. 50대의 미혼인보수적인 남성 교사였다비쩍 말라 송곳 같은 인상이었는데당시엔 학생 인권조례니 뭐니 시끌벅적할 때가 아니라 체벌도 존재했고그는 매로 꼭 효자손을 들고 다녀서애들 사이에선 그 효자손으로 통했다효자 노릇할 자식도 없는데 효자손이 웬 말이냐고하긴그러니까 효자손이라도 들고 다니는 거 아니겠냐고. G는 일이 벌어진 이후에도 오래도록 효자손을 씹고 다녔다.

 어쨌든 효자손이 중학교 2학년 삼신의 반 담임이 됐을 때까지만 해도 삼신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이삼신은 전교에서 제일가는 우등생이었고, 어디서든 예쁨 받았으며, 교사들의 칭찬을 후광처럼 달고 다녔으니까. 요컨대 흠잡을 곳이 없는 학생이었기 때문에 체벌과는 먼 세계에 있었다.

 하지만 이삼신이 간과한 게 있었으니, 세상엔 마음이 너무 기울어져서 더는 한 인간을 제대로 바라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사람도 있다는 것이었다. 중학교 2학년 이야기는 하기도 싫다. 어쨌든 좋은 기억들은 아니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이삼신은 체벌을 겪었다. 그게 다다. 하지만 그게 삼신의 잘못은 아니었다. 반 아이들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걸 잘못됐다고 말하지 못 했다는 점에서, 그 사건은 작은 비극으로 남았다. 이삼신은 금방 그 일을 떨쳐냈지만, 어쨌든 유쾌하지 못 한 일이었단 데에 동의했다.

 “그 사람 별로 좋은 담임은 아니었지.”

 라며 삼신은 후에 유성과 통화하며 깔깔 웃었다.

 “다신 그런 고약한 교사를 만나지 않겠어!”

 유성도 따라 웃었다.

 “그게 마음대로 되냐.”

 “만나면 자퇴해버릴 거야.”

 “, 쎈데.”

 삼신은 이불 위에 엎어진 채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맞아, 방금 말은 너무 세다. 취소, 취소. 중졸은 어디 취직도 힘들겠다.”

 “, 씬이의 가벼운 주둥이가 또 시작 됐나요…….”

 “아아, 유스타 요원, 또 태클 거나요…….”

 이 통화가 아마 중학교 3학년 올라가기 전 겨울방학이었을 것이다. 그 때까진 둘이 주일에 다섯 번 꼴로 통화를 했었다. 가끔 동네 놀이터 그네에 앉아 대화하기도 했다. 아직 삼신이 많이 바빠지기 전이었다. 유성이는 그 때도 여자가 많았다. 여하튼 인기쟁이 소꿉친구였다.

 

 #5.

 점심시간 중학교 교무실. 교사들이 각자의 자리에 착석해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다. 의자에 엉덩이를 걸터앉은 교사와 뒷짐을 지고 얌전히 선 학생이 보인다. 효자손과 삼신이다. 효자손은 다리를 한 쪽 올려 불량한 자세를 취하고, 손에는 가정 실태 조사 프린트(정말 그 따위 이름이었다)가 들려있다. 삼신의 표정은 앵글의 사각지대에 있어 보이지 않는다.

 

 효자손 : (조소가 섞인 목소리로) 이삼신이, 부모 잘못 만났네.

 삼신 : (똑 부러지게) 형편이 어려운 게 저희 부모님 잘못은 아니니까요.

 효자손 : 1학년 때부터 지원 받았어?

 삼신 : .

 효자손 : (조소) 니 부모는 애 학교에서 밥 맥일 돈도 없대냐?

 삼신 : (뒷짐 진 손에 힘을 쥐며) 아뇨. 내실 수는 있지만 제가 받겠다고 했어요. 조건이 맞는다면 받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요.

 효자손 : (혼잣말 하듯) -단한 효녀 나셨어요. 그래, . (삼신을 위 아래로 훑으며) 보탬은 되겠어? 성적 보니 시집은 잘 가겠네.

 

 이삼신,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생각하기 시작한다. 삼신 쪽에서 대답이 없자 정적이 흐른다. 잠시 후, 효자손이 쯧, 혀를 찬다.

 

 효자손 : 대학은 뭐, 여대 갈 거냐?

 삼신 : 아뇨, 서울대 갈 거예요. (고기는 역시 비싸려나, 하고 금액 계산 중이다)

 효자손 : (효자손으로 뒷목을 긁으며) 주제에 꿈도 참…….

 삼신 : (능청스럽게) 역시 하버드가 나을까요? 거기도 전액 장학금 제도 있을 텐데. 영어만 좀 잘했으면 좋았을 걸 아까운 것 같아요.

 효자손 : 그런 건 유학 갔다 올 애들한테나 주어진 선택지야, 임마. (삼신의 가슴을 효자손으로 두 번 찌른다) 급식비도 못 내는 애가 뭔 헛소리야.

 삼신 : (효자손의 효자손을 피해 슬그머니 뒤로 물러나며) 어머, 1등해서 전액 장학금 받으면 그만이죠. 여기서도 1등 해봤는데 다른 곳이라고 갑자기 꼴등하진 않을 거 아녜요? 고등학교 가서도 전 1등 할 건데요! (오늘 저녁은 함박 스테이크를 먹어야지. 유성이도 부를까?) 정 뭐하면 선생님이 응원해주시면 되겠네요! 돈을 보태주시진 않을 거 아녜요? (, 함박 스테이크~)

 

 앵글이 뒤로 빠지며 다시 교무실의 풍경이 잡힌다. 두 책상 건너에서 남학생 한 명이 효자손과 삼신 쪽을 보고 있다. G.

 

 6.

 “재밌는 애네!”

 ……라고 생각했지!”

 G는 학생부실을 한 바퀴 돌며 몸짓을 마구 과장했다.

 우리 씬이 간지 철철! 개멋있었죠~ 아주!”

 아니에요.”

 삼신이 창피하다는 듯 부실 책상에 엎어졌다. G는 삼신 주위를 빙글빙글 돌며 마구 웃었다.

 , 이삼신 존나 귀여워. 귀 빨개진 거 봐.”

 강준아 애 좀 그만 놀려라.”

 뭐 어때요?”

 G는 학생부실에 앉은 모두를 바라보며 깔깔 웃었다.

 내가 구해준 애니까 애착관계를, ? 이제 형성해야지.”

 삼신의 귀 끝이 더욱 빨개졌다.

 

 7.

 G가 양동이 사건으로 유명해진 건 여름 무렵의 일이었다. 교칙 위반도 아닌 치마를 가지고 벌점을 매기기 위해 교정을 달려가던 효자손 머리 위로 물 양동이가 쏟아졌다. 악취가 나는 물이었다. 걸레를 빤 물이라 좀 냄새가 날 거거든요! 누군가 2층 창문에서 박장대소하는 G를 봤다고 진술했다.

 효자손은 노발대발했다. 그리곤 G를 쫓아 교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삼신은 효자손에게 쫓기다 말고 갑자기 자유의 몸이 됐다. 고개를 들어 창문을 바라봤다. G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여름 햇살이 따가웠다.

 네가 그 효자손에게 찍혔다는 여자애지?”

 믿을 수 없게도 G는 이층에서 뛰어내렸다. 삼신은 온몸의 털이 쭈뼛 서는 기분이 무엇인지 그 때 알게 됐다. 정확히 말하자면 G는 이층 창문 근처의 나뭇가지를 타고 중간까지 내려왔다가 뛰어내린 것이다. 다친 곳이 한 군데도 없다는 사실은 G를 더욱 기묘하게 만들었다. 삼신은 그 멜랑꼴리한 기분을, ‘운명인가라고 생각했다. G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자 그 기분은 곧 확신이 됐다.

 , 도망치자! 효자손 새끼 분명 나도 너도 잡으러 올 거야!”

 G는 삼신의 손을 쥐고 마구 달렸다. 삼신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질질 끌려갔다. 달리는 동안, 삼신은 땀이 송글송글 맺힌 G의 얼굴과 등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저렇게 잘생긴 사람도 있구나, 라고 생각했다. 여름 햇살이 마법 같이 느껴졌다.

 

 8.

 내가 구해준 애니까 애착관계를, ? 이제 형성해야지.

 

 9.

 솔직히 삼신은, G가 자길 구해줬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이삼신이 G를 좋아했던 건 순전히 그냥 멋있어서였다.

 잘생기고 키 커서.

 원래 사랑의 순간은 단순하다. 적어도 삼신의 역사에선 그랬다.

 하지만 G는 아직도 자신이 그녀를 구해줬기 때문에 삼신이 자길 좋아한다고 믿는다. 비극인가? 아닐 지도…….

 어쨌든 그 이후로 3년이 흘렀고, 삼신은 더는 G를 신경 쓰지 않는다. 어쩔 수 없다. 사랑은 원래 이동하거나 사라지거나 죽어버리는 것. 이삼신은 죽는 것도 죽이는 것도 익숙했다. 그것은 가난이 가르쳐준 삶의 방식이었다. 아주 유용한…….

 

 10.

 , 내가 뭐라고 하면 겉으론 툴툴거려도 다음 날엔 싹 고쳐서 온다니까! 진짜 귀엽지 않냐.

 근데 왜 나 좋다는 애가 몸매 관리는 못 하지? 그것만 아니면 사귀었을 텐데…….

 

 11.

 G와 거의 1년 만에 조우한 다음 날, 삼신의 고등학교 2학년 내신 등수가 나왔다. 1등은 아니었다. 반에서도 1등은 아니었다. 삼신의 반 1등은 전교에서도 1등이었다. 삼신은 반 3등에 전교 6등을 했다.

 전교 1등하고 점수 차이가 얼마나 나지?’

 삼신은 다른 것에 비해 영어와 국어를 못 했다. 나머진 만점인데 영어와 국어는 꼭 하나씩 틀렸다. 특히 국어는 서술형 점수가 나가서 짜증나는 과목이었다. 서술형 점수는 하나에 6점씩이나 했다. 하나가 틀리면 등수가 훅 밀리는 것이다. 이번엔 부분 점수를 받았지만, 어쨌든 이번에도 삼신은 국어에서 4점을 빼앗겼다. 전교 등수엔 분명 타격이 컸을 것이다. 영어도 두 문제나 틀렸다. 자신을 쥐어박고 싶었다.

 등급을 놓치진 않았으니까 1등이 아니어도 상관은 없어…….’

 삼신은 햇살이 내리쬐는 미지근한 나무 책상에 엎어진 채 눈을 감았다.

 하지만 열심히 했으니까 1등이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바람은 불지 않고, 공기는 더워졌다. 괴담엔 발전이 없는데 해마다 여름만 혹독해진다. 바깥은 초여름에서 여름으로, 계절의 정중앙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꼭 낀 브레지어가 답답했다. 삼신은 와이셔츠 속으로 슬그머니 손을 집어넣어 와이어를 당겼다. 숨쉬기가 한결 편해지자 머릿속도 조용해졌다.

 오늘 집에 가서 봉투 챙기고 부모님한테 금란이 학원 비에 대해 말하고 내일은 적금을 들고 꼭 속옷도 사고…….’

 삼신은 엎어진 채로 잠이 들었다. 다음 교시는 어차피 자습이었다.

 

 12.

 꿈을 꿨다. 중학생 교복을 입은 G가 나왔다. 꿈속의 삼신은 중학교 2학년이었다. , 언젠가 이 장면을 본 적이 있는데, 라고 꿈속의 삼신은 생각했다.

 G와 삼신은 스탠드에 앉아 운동장을 보고 있었다. G가 삼신의 어깨에 기댔다. 삼신은 가슴이 떨려서 일부러 운동장의 먼 곳을 바라보았다. 정글짐, 철봉, 고무 타이어……. 바람이 불자 G의 머리카락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멜랑꼴리, 라고 삼신은 생각했다.

 , 넌 효자손이 안 무섭냐?”

 G가 물어서, 삼신은 대답했다.

 전 정의롭지 않은 사람에겐 기죽지 않아요.”

 정의이?”

 G가 웃었다.

 개웃기다. 나 정의 소리 하는 애 존나 도덕책에서만 존재하는 줄 알았어.”

 근데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어울리긴 한다. 넌 존나 정의로운 애처럼 보여. 정의의 사도 이삼신.”

 그래서 그렇게 대드는 거야?”

 G가 여전히 웃고 있었으므로, 삼신의 어깨는 G의 숨소리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삼신은 그 떨림을 가만히 느끼다가 조용히 대꾸했다.

 전 그렇게 안 대들어요. 대들고 싶었다면 한 대 갈겼겠죠.”

 삼신은 얼굴을 찡그렸다.

 대드는 건 선배가 하는 일이고요! 전 그냥 넘기는 것뿐이에요. 좋지 않은 일을 제 안에 들이고 싶진 않으니까.”

 그게 돼?”

 G가 물었다.

 삼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

 바람이 불었다. 좋은 냄새가 났다. 운동장으로 모래가 마구 날리는 게 보였다. 햇빛이 더욱 뜨거워졌다. G가 중얼거렸다.

 넌 망가졌구나…….”

 헛소리하네. 삼신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G가 계속 자기 어깨에 기대 있었으면 한데다가 우수에 찬 눈빛으로 감성에 젖은 G의 얼굴이 더욱 잘생겨 보여 태클은 걸지 않았다.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삼신이 말했다.

 전 정의롭게 살 거예요.”

 계속 대들면서?”

 G가 되물었다. 대드는 게 아니라니까. 삼신은 G가 멋대로 자신의 행동을 폄하하는 게 짜증났지만 잘생겼으니 봐주기로 했다.

 .”

 G가 물끄러미 삼신을 바라보았다.

 “그건 정의로운 게 아니야. 그냥 못마땅한 거지.”

 G의 목소리는 약간 사이비 교주 톤처럼 들렸다.

 누군가 네 안에 미움을 심어둔 거야.”

 한 대 칠까? 삼신은 생각했지만, G의 마지막 말에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G는 삼신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난 네 미움이 마음에 들어.”

 삼신은 가능하면 그 말을 오래 음미하고 싶었다. 네 미움이, 말고, 마음에 들어, 를 말이다. 운동장은 충분히 뜨거웠고 머리도 어떻게 되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G가 삼신의 어깨에서 일어났다. G의 얼굴이 아주 가까이 있었다. 둘은 서로를 바라봤다. , 이거 타이밍인가 라고 삼신은 생각했다. G도 비슷한 생각인 것 같았다. G의 얼굴이 더욱 바싹 다가왔다. 삼신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물러났다. G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삼신은 순간 일시적인 거북함을 느꼈다.

 대놓고 알려줘도 날 제대로 볼 줄 모르는 사람과 키스해도 괜찮을까?’

 삼신은 눈을 감을까 말까 고민했다.

 잘생긴 오빠니까 괜찮지 않을까.’

 귓불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G의 냄새가 아주 가까이서 났다. 기분 좋은 샴푸 향이었다. 삼신은 자신의 거북함에 대들지 않기로 했다. 그리곤 눈을 감았다. 바람이 멈췄고 세상이 조용했다.

 G의 입술은 따뜻하고 침이 좀 있었다. 키스는 아주 빨리 끝났다. 삼신은 입을 벌리지 않았다. 혀를 쓰지 않아서 다행이야. 날아가는 기분은 없었다. 삼신은 손등으로 G의 침이 묻은 입술을 닦아냈다.

 삼신아, 너 키스 처음이지.”

 G가 물어서, 삼신은 입술을 닦으며 끄덕거렸다.

 못 한다.”

 난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야해질 수 있어요.”

 삼신은 결국 짜증냈다.

 하지만 선배는 나랑 다른 세계에 살잖아요.”

 그럼 안 돼?”

 여기로 올 수 있어요?”

 아니, 난 우등생은 무리.”

 그런 소리가 아닌데. 삼신은 생각했고, 실망했고, 다시 기대하기로 했다. 어쨌든 키스는 했으니까.

 역시 선배랑은 안 되겠어요.”

 그렇구나…….”

 G는 조금 서운한 눈치였다.

 그런데 삼신아, 너 땀 냄새 나더라.”

 삼신은 G가 자길 무안 주고 싶어 한다는 걸 눈치 챘지만 그 말은 직격 타처럼 자신의 가슴에 와 박혔다. 가슴에 들이고 싶지 않은 말이었지만 스트라이크 당했다. 하필 첫 키스 이후에 공격이라니, 비겁해. 삼신은 G의 다리를 걷어차곤 일어났다.

 어떻게 키스하자마자 심술을 부릴 수 있어요?”

 삼신은 눈을 흘겼다. G는 제가 실수했음을 알고 미안하단 듯 힘 빠지게 웃다가 시선을 피했다.

 미안.”

 됐어요.”

 그 날 삼신은 방과 후 올리브 영에서 핸드크림과 로션을 샀다. 향수를 사지 못 한 건 비싸서였다. 가난의 향기인가, 라고 삼신은 복숭아 모양 핸드크림 용기를 열며 생각했다.

 그 뒤로 삼신의 몸에선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여름이 가는 동안 G와는 종종 혓바닥 없는 키스를 했고, G는 더는 삼신의 땀 냄새를 가지고 심술을 부리지 못 했으며, 삼신은 G가 언제쯤 제게 고백을 할지, 만약 한다면 받아줘야 할지, 받으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가을이 오기 전에 G가 실수를 저질렀다. 큰 실수였기 때문에 삼신은 이번엔 어쩔 도리가 없이 상처를 받았다. 그 뒤로 둘은 흐지부지해졌고 감정이니 밀고 당기기니 멜랑꼴리는 전부 없던 일이 됐다. 하지만 겉으론 서로 늘 그랬던 것처럼 인사를 하고 농담을 주고받고 복도를 지나칠 때마다 웃어주었다. 둘은 이상한 구석에서 자존심이 강했다.

 그렇지만 삼신 쪽은 두 번 울었다. G는 울었을까? 꿈속의 삼신은 생각했다. 안 울었을 것 같다. 그 사람은 날 좋아하지 않았으니까. 왜냐하면 난 엄청 예쁘지도 않고 또…….

 어디선가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13.

 눈을 뜨니 자습시간이 끝나있었다. 바람이 넘실거리며 삼신의 머리 위로 커튼을 흔들었다. 타종 몇 분 전 교실은 벌써부터 어수선했다. 다들 가방을 챙기거나 부스스 일어나거나 제 옆자리와 떠들고 있었다.

 젠장.’

 기분 나쁜 꿈을 꿨다고 생각하며 삼신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비볐다. 이게 다 G를 다시 만나서 그런 것이다. 그 인간, 미국에 있을 것이지 왜 돌아왔대? 삼신은 다리를 쭉 피고 스트레칭을 했다. 이래고등학교에 온 게 G때문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입학을 결정한 이후에도 종종 G 생각을 했었다. 뭘 하고 살까?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G와 중학교 3학년이 된 삼신 사이엔 별다른 대화가 없었다. G는 자신이 삼신에게 실수했음을 알았지만 사과하지 않았고(사과하기에도 좀 뭐한 것이었다) 사실 사과 받아도 별 수 없는 일이긴 했다. 게다가 G는 멀쩡한 가슴에 상처를 냈다기 보단 이미 벌어진 틈에 곡괭이를 쑤셔 넣었다 정도의 일을 해냈으니까 어쨌든 지난 일이다. 삼신은 생각을 접고 자리에서 일어나 필통을 가방에 욱여넣었다. 종이 쳤다.

 내리막길을 내려오는 동안, 삼신은 전화를 했다. 엄마에게 했지만 받지 않아서 두 번째엔 아빠에게 걸었다. 아빠는 평소보다 몇 초는 더 삼신을 기다리게 했다.

 아빠, 통화 가능하세요?”

 , 가능하지. 우리 신이, 무슨 일인데?”

 삼신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개 한 마리가 달려 나와 종아리를 빙글빙글 돌았다. 삼신은 휴대폰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개의 정수리를 쓰다듬어줬다. 눅진한 혀가 마구 손바닥을 핥았다.

 , 별 건 아니구요. 제가 사실 조금씩 돈을 모았거든요 용돈 혼자 벌면서 남은 돈 모은 건데.”

 삼신은 어쩐지 쑥스러워져서 휴대폰을 고쳐 잡았다.

 많은 건 아니에요 이번에 금란이 학원 보내야 할 것 같은데, 그걸로 보태 쓰면 좋겠다 싶어서.”

 …….”

 수화기 너머에서 말이 없었다. 삼신은 아빠가 코를 훌쩍이는 걸 분명히 들었다. 삼신은 이제 정말 쑥스러워졌다.

 저희 화장대 서랍 맨 위에 있는 봉투거든요. 흰 색인데 나중에 퇴근하면 확인해주세요. 금란이도 알아요. 미리 말했어요.”

 삼신은 금란이 저를 껴안고 울었던 걸 떠올렸다. 왜 가족들은 이런 일엔 눈물을 보일까? 삼신은 그런 것들이 오히려 부끄러웠다. 눈물은 자신이 해낸 일들이 굉장하게 느껴지도록 만들었다. 고작 340만원 중에서 40만원인데 말이다. 정말 착한 딸이었다면 300만원도 마저 내놓아야 하는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대학 등록금은 전액 장학금으로 해치워버리는 것이다. 삼신이 300만원을 꺼내놓지 않은 건 그 최상의 시나리오를 해낼 자신이 없어서였을 뿐이다. 능력이 안 될 지도 모르니까. 이번 시험은 삼신의 불안을 더욱 심화시켰다. 밀린 등수는 삼신이 정말 그럴 능력이 안 될 지도 모르겠다, 고 생각하게 만들었다.

 아무튼, 이따 봬요.”

 삼신이 전화를 끊으려 하자, 아빠가 다급하게 잡았다.

 삼신아, 늘 고맙다.”

 아빠의 목소리는 습윤했다.

 사랑한다, 내 딸.”

 , 저도요.”

 삼신은 갑자기 목이 멨다.

 사랑해요.”

 그 말은 족쇄 같았다.

 

 14.

 차유성은 집에 없었다. 차유성 마미는 삼신을 향해 웃었다.

 신이 왔니? 이를 어째, 유성이 잠깐 어디 나갔는데…….”

 삼신은 어깨를 으쓱했다.

 안에서 기다릴게요.”

 금방 올 거야.”

 유성 마미는 삼신에게 유자차를 타줬다. 아줌마도 참. 여름인데 뜨거운 유자차라니 삼신은 김이 피어오르는 머그컵 속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리곤 부엌 냉장고를 열어 얼음 다섯 개를 꺼냈다. 뜨거운 물속에서 침몰하는 얼음을 보고 있자니 타이타닉이 떠올랐다.

 다섯 번째 얼음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 무렵 차유성이 돌아왔다. 유성은 현관에 놓인 삼신의 운동화를 발견했다.

 헤이, ! 운동화 바꿨네?”

 안나가 사줬지롱.”

 삼신은 테이블 아래로 긴 다리를 쭉 뻗으며 히죽 웃었다. 유성은 얼굴을 찡그렸다.

 진짜 걔 너한테 푹 빠졌어.”

 내가 원래 한 매력 하지.”

 삼신이 으스대며 유자차를 홀짝였다. 유성이 씩 웃었다.

 ~ 내가 전수해준 거다.”

 어얼씨구?”

 뭔 일로 왔어.”

 “CD 반납하러.”

 좋았어?”

 끝내줬어…….”

 유자차를 마신 삼신은 유성의 방으로 들어갔다. 유성은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었다. 삼신은 유성의 침대에 엎드려서 가방을 마구 뒤졌다. 그리곤 CD를 건네주었다.

 나는 4번 트렉이 제일 좋아.”

 유성은 노트북을 두들기며 의외라는 듯 대꾸했다.

 , 난 네가 3번 좋아할 줄.”

 그것도 좋았는데 4번이 제일 좋음.”

 파일 줄까?”

 삼신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의 휴대폰을 건넸다. 유성이 노트북을 펴고 앉은 곳까지 조금 모자란 거리였다. 삼신은 낑낑거리며 손을 보다 앞으로 뻗었다. 유성은 일부러 받지 않고 모르는 척 노트북을 두들기고 있었다.

 , 유스타!!”

 삼신이 애타게 불렀다. 유성의 입 꼬리가 슬슬 올라갔다. 삼신이 휴대폰을 집어던졌다. 유성이 재빠르게 받았다. 삼신은 기운이 빠진 듯 침대에 엎어졌다.

 네가 그거 못 받았으면 난 울었을 거야…….”

 , 내가 못 받고 맞으면 울어야지…….”

 유성은 USB를 연결해 삼신의 휴대폰으로 곡을 전송해줬다.

 “4번 트렉만?”

 .”

 삼신은 침대에서 꾸물꾸물 내려와 유성 옆까지 데굴데굴 굴러왔다. 그리곤 잭에서 제 휴대폰을 분리했다. 시험 삼아 노래를 틀자 체리필터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좋아, 완벽해. 앞으로 당분간 이것만 들어야지.”

 넌 대체로 락을 좋아하더라. 시끄러운 거.”

 그럼. 난 락이 좋아. 시끄러운 거.”

 삼신은 휴대폰을 만지며 키득키득 웃었다.

 나 대신 소리 질러 주고 좋잖아.”

 저녁 무렵 삼신은 유성의 집을 나왔다.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에서 유성 대디를 마주쳤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유성 대디가 말했다.

 신이냐! 저녁 먹고 가지 그래. 집사람이 안 붙잡든?”

 괜찮아요!

 삼신이 로비 문을 열며 대답했다.

 오늘은 일찍 집에 가야 해서요.”

 

 15.

 삼신은 도착하자마자 현관까지 달려 나와 저를 껴안는 엄마 때문에 깜짝 놀랐다. 우리 신이, 라는 엄마의 목소리는 잘게 떨리고 있었다. 삼신은 제가 무슨 의대 합격이라도 한 줄 알았다. 아님 하버드나. 둘 다 아니지만.

 신아, 정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엄마는 삼신이 신발을 제대로 벗을 새로 없이 손을 끌었다. 삼신은 휘청거리며 따라 끌려갔다. 손끝부터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기분이 간지러워서 날아갈 지경이었다. 어쩌면 정말 날아갈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부엌 식탁 위엔 삼신의 자부심의 일부, 40만원 봉투가 얌전히 놓여 있었다.

 너희 아빠는 뒷정리하고 온다고 좀 늦을 거야. 먼저 퇴근하려고 하니까 붙잡더니 너랑 통화했다고 말해주더라. 네가 돈을…….”

 삼신의 엄마는 말을 잇지 못 하고 잠깐 머뭇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이었다.

 금란이 학원 비를 모았다고.”

 믿을 수 없다는 듯 엄마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모았다니! 난 상상도 못 했다…….”

 엄마의 호들갑에 세 동생이 쪼르르 달려 나와 문간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삼신은 금은동와 눈이 마주치자 머쓱하게 웃곤 고개를 돌렸다. 엄마는 삼신의 손을 붙잡았다. 아주 따뜻하고 거칠고 많이 고생했고 또……. 엄마는 잡은 손에 힘을 줬다.

 너한텐 큰돈이 아니니? 정말 써도 괜찮겠어?”

 엄마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삼신은 너무 부끄러워서 식탁 바닥을 봤다.

 아니, , 큰돈이긴 한데 또 그렇게 큰돈이 아닌 것도 같고 아이고, 내가 뭐래! 그냥 쓰세요.”

 삼신은 얼굴을 붉히며 횡설수설했다. 엄마는 다시 한 번 감격해서 식탁을 박차고 일어나 삼신을 끌어안았다. 어깨 너머로 금란과 눈이 마주쳤다. 금란은 입을 다물곤 시선을 피했다.

 엄마가 삼신의 정수리에 입을 맞췄다.

 “300만원이면 큰돈이지, 이 가스나야. 기특하기도 하지…….”

 삼신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봤다.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다. 엄마는 이제 삼신을 껴안고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했다.

 삼백이면 은주랑 금란이 둘 다 보낼 수 있겠다.”

 ?”

 삼신은 금란을 바라봤다. 금란은 고개를 돌린 채로 눈을 내리깔았다가, 방안으로 도망쳤다. 날아가던 기분이 갑자기 거대한 우물로 바뀌었다. 삼신은 발밑이 쑥 꺼지는 것을 느꼈다. 어둡고 음습했다. 다리가 덜덜 떨렸다.

 엄마.”

 삼신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는 춤을 추다 말고 삼신을 놓아주었다. 삼신은 엄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주름살이 보였다. 깊고 음습한 우물이 숨은 그 주름살들 말이다. 그런데 엄마의 눈은 너무나 기쁨으로 충만해서 반짝이고 있었다. 엄마는 울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 신이.”

 엄마가 웃자 주름살 곳곳에 스며든 우물의 물들이 기쁨의 두레박으로 걷어 올려졌다. 환한 빛이 얼굴에 가득했다. 삼신은 말문이 막혔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 턱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하지? 어떻게 말하지?

 삼신은 그냥 떠오르는 이름을 불렀다.

 이금란!”

 이금라안!!”

 이금라아아안!!”

 금란이 방 안쪽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그것은 거의 비명처럼 들렸다. 그 애는 사실 웃는 듯 하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16.

 삼신은 봉투 하나를 더 꺼내 40만원을 나누어 넣었다. 그리곤 300만원 봉투를 서랍 아래쪽에 넣고, 40만원을 서랍 맨 위에 얹어놓았다.

 누나, 뭐야?”

 동래가 이불 위를 뒹굴다 말고 물었다. 삼신은 건성으로 니네 누나 학원 비.”라고 대답했다.

 

 17.

 많은 걸 포기한 사람은 둘로 나뉜다.

 죽거나 죽여 버린다.

 

 18.

 금란이 방에 들어왔을 땐 잠에서 깬 동래가 서랍을 뒤지고 있었다. , 뭐하는 거야. 금란이 동래의 손을 붙잡으며 정색했다. 동래가 손가락으로 뒤집어진 서랍 안쪽을 가리켰다. 금란은 짜증난 표정으로 서랍을 정돈하기 시작했다. 그리곤 가장 밑바닥에서 봉투를 발견했다. 똑같이 희고, 조금 더 두툼한 금란은 화장대에 앉아 봉투를 조금 벌려보았다.

 그곳엔 삼백 만원이 들어있었다.

 

 19.

 우리 집에 좀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그렇게까지 모난 성격이 되진 않았을 텐데.

 

 20.

 이금란!”

 삼신이 자신의 이름을 부를 때, 금란은 귀를 틀어막았다. 이금라안!! 그 소리가 꼭 비명처럼 들렸다. 삼신의 목소리가 필사적으로 죽여 버릴 것을 찾고 있었다.

 금란은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기가 사실 비명을 지르고 있는 줄은 몰랐다.

 

 21.

 둘은 결코 양립할 수 없다.

 

 22.

 난 언니처럼은 못 살아.

 언젠가 금란이 그랬다. 사실 입버릇처럼 말했다.

 언니, 난 절대…….

 

 23.

 바울은 모든 생명을 송두리째 바친 사도이지만 세상을 향해 충동하는 마음을 감당할 수 없는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꾸짖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7:24)고 탄식하였다. 그렇다, 우리는 바울이 어떻게(How to~) 이 문제를 해결하랴?’고 물은 것이 아니라 누가(Who is~) 나를 구원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24.

 언니 사랑해.”

 삼신은 엉거주춤 들었던 손으로 금란의 등을 감쌌다.

 나도 알아.”

 금란은 그 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삼신도 포기했다. 퇴근한 아빠가 거의 울면서 삼신을 껴안자, 삼신은 그 품에 매달려 깔깔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견디지 못 한 금란은 현관을 박차고 뛰쳐나가 저녁 내도록 들어오지 않았다. 삼신은 금란이 이번엔 뭘 죽일까를 생각했다. 아마 자신을 죽이겠지 아빠의 품에서 삼신은 눈을 감았다. 눈시울이 붉어졌지만 울지 않았다. 슬픈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서운한 것도.

 삼신은 그런 감정을 모른다.

 

 25.

 그 날 밤, 삼신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꿈을 꾸었다. 이번엔 G가 나오는 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악몽이었다. 꿈 내용은 이렇다. 사랑할 때마다 찔려 죽는 세상에 버려진 것이다. 삼신의 가슴엔 가시가 아주 많이 박혀 있었다. 그것들이 자신의 가슴에서 솟아오른 게 아니란 사실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남이 박은 것은 스스로 제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삼신은 뛰고 싶었고, 때론 날고 싶었는데, 가난의 가시가 너무 깊어서 뽑을 때마다 가슴이 다 뜯겨져 나갔다. 삼신은 달릴 수 있는 몸을 자꾸만 주저앉히고 가슴을 더듬었다. 그리곤 힘주어 가시를 뽑아냈다. 따뜻한 피가 솟았지만 손은 차가웠다. 가시는 아직도 많았지만 삼신은 멈추지 않았고 포기하지도 않았고 계속 사랑했고 그럼 또 가시가 박히고 또……. 삼신은 자꾸 주저앉다가, 달리고 싶었다거나 날고 싶었다거나 하던 사실을 잊었다. 그럼 삼신은 그런 소망을 바란 적이 없게 되는 것이다.

 완벽한 꿈이었다.

 

 26.

 다음 날, 삼신은 G를 마주쳤다. 하지만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손을 흔들고 인사를 했을 것이다. G는 저를 지나가려는 삼신의 포니테일을 아래로 죽 당겼다. 삼신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 아프구나.”

 G는 삼신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삼신의 앞머리는 땀으로 축축했다.

 보건실 가.”

 G는 삼신을 놀리지 않고 그대로 보내주었다.

짜증이 난 삼신은 대꾸도 없이 복도를 계속 걸었다. 바닥이 흐물거려서 걷기가 좀 힘들었다. 게을러진 모양이지 삼신은 햇살이 너무 따가워 얼굴을 찡그렸다. 교무실을 지날 무렵 담임이 삼신을 붙잡았다. 삼신은 온화한 표정을 짓기 위해 애써서 성공했다.

 , 선생님.”

 담임교사가 물었다.

 이삼신이, 아직도 미스터리 부에 있냐.”

 아무렴요.”

 그렇게 문제 많은 부엔 왜 들어가선…….”

 어머, 말썽쟁이 부라고 하셨지 문제 많은 부라고 안 하셨거든요.”

 삼신은 입을 빼죽이다 그만뒀다. 그럴 기운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1년 전 물어봤을 땐 무슨 말썽이냐고 그렇게 캐물어도 대답도 안 해주시더니. 갑자기 문제 많은 부라고 매도하시면 어떡해요?”

 하이고오.”

 삼신의 담임교사는 2학년 6반의 담임으로, 학생주임이었다. 삼신을 예뻐해 주는 뭐 대충 그런 포지션을 맡고 있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꼭 삼신에게 미리 일러두는 그런 사람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담임 입에서 미스터리 부가 나왔으니 좋은 소식은 아닐 터다. 삼신은 거기까지 생각했다가 가슴이 꽉 막혀 숨을 멈췄다. 담임의 목소리가 왕왕 울렸다.

 니네 부 없어진 댄다.”

 이명이 찾아왔다. 바깥의 매미소리가 갑자기 아주 크게 들렸다. 삼신은 속이 울렁거려서 담임이 뭐라고 덧붙이는지 제대로 듣지 않았다.

 확정은 아닌데 말이 나왔으니 뭐라고 해야 하나, 이걸…….”

 삼신은 가슴을 꽉 눌렀다 뗐다.

 학생부 쪽에서 말이 나왔으니…….”

 삼신은 물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다. 더위가 강렬했다. 삼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몸조리 잘 하고. 낯빛이 안 좋구나.”

 삼신은 교무실 옆 화장실로 들어갔다. 교사 화장실이지만 혼나진 않을 것이다. 혼나게 되면 될 대로 되겠지. 수리 중이라는 팻말이 붙은 가장 끝 칸으로 몸을 욱여넣은 삼신은 손을 더듬어 가슴 안쪽을 닦아냈다. 브레지어 와이어 하나가 바깥으로 튀어나와 살을 마구 찌르고 있었던 것이다. 삼신은 흥건한 손을 펼쳐보았다. 피가 묻어 있었다.

 

 27.

 완벽한 꿈.

 

 28.

 그러니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그러면 누가 나를 구원할 것인가

 

 29.

 삼신은 변기 커버를 내리곤 그대로 그 위에 엎어졌다. 이마가 온통 축축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휴대폰이 화장실 바닥에 떨어져 굴렀다. 삼신은 주워들고 이어폰을 귀에 쑤셔 넣었다. 트렉 4가 흘러나오자 가슴이 조금씩 진정됐다. 환풍기 날이 덜덜거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희미해졌다. 창문으로부터 여름 공기가 키운 바람이 쏟아져 삼신의 앞머리를 쓸어주었다.

 죽도록 모았는데…….’

 삼신은 눈을 감았다.

 어쩔 수 없으니 다시 모을 수밖에…….’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지. 1등도 해야지. 절벽에 내몰렸으니 칼을 빼들어야지. 수세에 내몰렸으니 필사의 힘을 다해야지. 삼신은 등을 더듬어 브레지어 끈을 풀어버렸다. 갑자기 가슴이 너무나 가벼워져서 꼭 증발해버릴 것처럼 느껴졌다.

 속옷은 그럼 언제쯤 사지…….’

 하지만 바람이 기분이 좋아서, 변기 커버가 시원해서, 땀이 말라가는 감각이 온화해서, 삼신은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이어폰으로 체리필터는 자꾸만 소리를 질러줬다. 삼신을 대신한 필사의 힘일 것이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역시 락은 좋구나, 라고 삼신은 생각했다. 눈가가 축축해졌지만 땀은 곧 마를 것이다. 세상이 필사의 힘을 다해 축축해진 삼신을 건져 올리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기분 좋다…….’

 삼신은 작게 웃었다. 시원한 바람이었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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