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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기재와 성단»
1차/old 2019. 10. 30. 00:58

1.

김기재는 소성단을 운동장에서 처음 보았다.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예비 소집일이 있어 전교생이 각자의 반이 정한 시간대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있었다. 운동장으로 쏟아지는 입학생들 틈에서 키가 큰 성단은 조금 눈에 띄었다. 새파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원래 목도리는, 목도리라는 것은 따뜻하기 위해 두르는 것인데 그렇게 차갑고 진한 색을 목에 두르고 서있다니. 아주 나중에도 그 이미지는 종종 색깔 그대로 남아 기재 속의 소성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건 둘 사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다.

기재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알람으로 맞춘 시간보다 10분을 추월한 셈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감싼 랩이 아직 따끈따끈했다. 기재는 밥그릇 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오늘도 잘 달리기. 문장 끝에 작은 이모티콘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타임 트라이얼이 있었다. 특별히 강조한 적도 없는데 아버지가 기억한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기재는 동생들 밥그릇 앞에 붙여진 포스트잇도 읽었다. 숙제 잘 하고, 성적 떨어졌더라, 너무 늦게 다니지 마라, 어제 안색 안 좋던데 무슨 일 있니? 눈으로 훑던 기재는 그 이상 읽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밥을 조금 남겼다.

버스가 금방 왔다. 가방에서 막 꺼낸 이어폰이 엉키지 않은 채 딸려 나왔다. 에어컨이 잘 나오는 창가 자리가 비어있었다. 음악을 틀자 듣고 싶던 곡이 랜덤 재생되었다. 기재는 조금 졸았다. 눈을 떴을 땐 학교까지 두 정거장이 남아 있었고 버스 안이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가 뒤로 내팽겨 쳐졌다. 기재는 이어폰을 빼냈다. 창밖으로 성단이 지나가고 있었다. 창문을 열까 고민했으나 순식간이었다. 기재는 그대로 카드를 찍고 내렸다. 내린 사람은 기재뿐이었다. 이어폰 줄을 마구잡이로 가방에 쑤셔 넣으며-그럼 엉킬 걸 알면서도-빨리 걸었다. 성단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기재가 내린 건 일찍 학교에 도착할 게 빤하다면 걷고 싶어서였다. 교문 앞까지 기재와 성단은 나란하기엔 조금 어긋난 거리와 틈을 유지하며 걸었다. 교정 담벼락엔 담쟁이 넝쿨이 늘어져 한 계절만큼의 분량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기재는 거기서 불쑥 치고 나왔다. 성단은 별로 놀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아까 봤는데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서.”

기재가 씩 웃자 성단은 또 이러네…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응, 그렇지.”

기재는 딴청을 피웠다. 잠시 정적이 있었다. 잠시 후 기재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벼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없나 봐.”

성단이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 아주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아, 뭐.”

“항상 담 넘을 일이 생기는 건 아닐 테니까요.”

기재가 웃었다.

“그런가.”

“그렇죠.”

낙대부고 담벼락에서는 종종 학생들이 무거운 열매처럼 떨어졌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가거나 수업을 재끼기 위해서다. 소녀들일 때도 있고 소년들일 때도 있었고 혹은 둘 다일 때도 있었다. 그들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피난민들처럼 가방을 집어던진 후 낙하 자세를 잡는다. 엉덩이를 바싹 붙이고 어떻게든 바닥과 가깝게 만든다. 가끔 담벼락 아래로 누군가 지나갈 때도 있다. 그럼 그들은 누군가들을 불러 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저기, 안 밟게 내 가방 좀 치워줘.

“아쉽다. 나 이번에 걔네 또 마주치면 너처럼 깔끔하게 무시할 자신 있었는데.”

“아쉬운 일인가요.”

둘은 중앙현관 앞에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기재가 먼저 일어섰다. 너무 많이 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성단과 나눈 대화는 고작 해야 열 마디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성단과 기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성단과 대화를 이어갈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일 지도 몰랐다. 성단이 일어섰을 때, 기재는 먼저 인사했다.

“안녕, 다음에 또 보자.”

“이따 볼 텐데.”

성단은 덤덤하게 말했다. 기재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건 그렇다.”

둘은 배웅이나 친밀한 인사 같은 것은 하나도 주고받지 않은 채로 중앙계단에서 헤어졌다.

 

2.

초봄에는 어쩌다보니 벌어지는 일들이 많다. 어쩌다보니 짝꿍이고, 어쩌다보니 같은 부고, 어쩌다보니 도서부가 된다. 새 학기를 맞이한 다수들이 매달리는 건 그 ‘어쩌다보니’일 것이다. 우연과 조금의 운으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관계를 어떻게 다듬어 나가냐에 따라 그들은 친구로 남거나 어색한 사이로 남거나 혹은 영영 멀어진다. 김기재에겐 그 ‘어쩌다보니’의 관계가 참 많았다. 아는 선배들, 아는 후배들, 같은 반 여자애들, 학원 같이 다니던 친구들, 초등학교 동창 혹은 전에 만나 뵈었던 선생님. 기재가 복도를 지날 때 한 명쯤은 반드시 그를 불렀다. “김기!” 혹은 “기재야!”였다. 기재는 어디든 불려 다녔고 어디든 서있었다. 세상 인구의 절반 정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여러분 역시 기재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 복도, 운동장, 학교 근처 피씨방, 운동장과 계주 트랙 앞에 김기재는 서있다. 당신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할 지도 모른다. “안녕, 우리 또 보네. 그렇지?” 그럼 웃어주기를.

하지만 성단은 웃어주는 쪽은 아니었다. 초봄이었다. 둘은 어쩌다보니 함께 하교하고 있었다. 아마 육상부에 신입생이 들어오고 있는 첫 모임이 해산된 이후였던 것 같다. 성단이 앞서 걷고 기재는 조금 뒤쳐진 채 따라 걷고 있었다. 대화하거나 웃고 떠들지 않았고 지극히 모르는 사이처럼 보였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도 않았다. 담벼락에서 누군가들이 둘을 불렀을 때, 둘은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담벼락에 매달린 학생들이 가방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 둘! 이것 좀 받아주라! 기재는 그대로 자리에 멈췄다. 성단은 다시 걸어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기재가 성단을 불러 세웠다.

“안 도와줄 거야?”

“굳이 왜요?”

“어…….”

기재는 말문이 막혀서 그저 웃었다.

“쟤네가 도와달라잖아.”

말하고 보니 스스로가 정말 바보 같이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성단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전 갈게요.”

“뭐?”

하늘에서 가방이 떨어졌다. 멍청하게 성단의 뒤통수만 보던 기재가 정통으로 하나를 얻어맞았다.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기재는 손을 거두고 머뭇거리다 성단을 쫓아 뛰었다.

“정말 안 도와줘도 돼?”

  “굳이…….”

  성단은 얼굴을 미묘하게 찡그렸다.

  “그래야 하나.”

  김기재는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호의를 베풀며 안정을 찾는 타입이 아니었다. 단지 거절했을 때 돌아올 서운함과 불호의 감정이 싫었다. 인간관계란 가늘고 성가시기만 해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금이 가거나 부서질 수 있었다. 기재는 단지 그것을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심적 부채감을 소유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들로부터 내쳐질 상황이 왔을 때 성공적으로 다른 무리에 들어간다면 좋을 테였다. 하지만 기재는 때때로 생각하고 말았다. 아, 삶이라는 건 몹시 지겹고도 피곤해서 안정이나 행복 같은 건 도통 가까이 오기 힘든 걸지도.

  그 날, 성단이 뱉은 ‘굳이’는 별 것이 아니었는데도 기재의 마음속에 자국을 남겼다. 언덕을 내려온 이후에도 기재는 담벼락 쪽으로 자꾸만 뒤를 돌았다. 앙심을 품진 않으려나? 성단은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아무 것도 걱정하거나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기재는 뒤돌아보고 성단은 뒤돌아보지 않아서 자꾸만 거리가 벌어졌다. 버스정류장까지 왔을 무렵 기재는 마침내 뒤돌아보기를 관뒀다.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빨리 걸었다. 성단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더는 틈을 벌리지 않았다.

그 뒤에도 아주 가끔 둘은 같이 하교할 일이 있었다. 담벼락에선 여전히 아이들이 쏟아지거나 가방이 떨어졌다. 기재는 그 후에도 몇 번 담 앞에 멈추거나 머뭇거리곤 했다. 그러나 곧 관두고 성단의 뒤를 쫓았다. 기재가 머뭇거릴 때마다 둘의 틈은 시시때때로 벌어졌으나 언젠가 부터는 유지되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서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3.

타임 트라이얼을 앞두고 다들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보윤이 다가와 기재의 등을 툭 쳤다. 김기, 긴장했냐? 기재는 시선으로 운동장을 훑다 말고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보여? 성단은 스탠드 쪽에 서서 멀거니 트랙을 보고 있었다. 방송이 울리자 아이들이 대열을 이루며 몰려들었다. 기재는 제 건너편에 선 성단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엄보, 넌 노력했는데 잘 안 되는 일엔 어떻게 하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태클 걸지 말고 대답 좀 쥐어짜봐.”

기재가 툭 보윤의 운동화를 가볍게 밟았다. 아, 진짜! 보윤이 펄쩍 뛰며 기재의 다리를 찼다.

“씨바, 몰라.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다르지.”

“그런가.”

“그래, 임마.”

성단은 장거리 선수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보고 있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성단은 대체로 게임 안의 NPC들처럼 움직였다. 정해진 시간과 패턴이 있었고 한정된 범위 안에서 단조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보윤이 기재를 붙잡고 웃었다.

“야, 너 기록 안 나올까 봐 그러는 거지.”

기재는 보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고민하다가 다시 한 번 웃었다.

“글쎄다.”

“뭘 글쎄야, 맞잖아.”

“마음대로 생각하셔.”

“이 새끼 또 이러네. 말을 해야 알지, 답답하게 진짜.”

“그런가.”

교사들이 모여 짧은 연설을 했다. 계주 뛰기 싫다고 대충 달리는 놈, 무리하다가 자빠지는 놈, 각오들 해 아주. 기재는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운동화로 바닥을 긁었다. 아버지의 포스트잇 생각이 났다. 오늘도 잘 달리기. 아버지는 언제나 격려나 칭찬을 했다. 사실 싫은 말을 쓴 적이 없었다. 잔소리나 심술 맞은 말들은 동생들의 것이었다. 기재는 그것을 서운하다고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기재는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모두의 남이었다. 그리고 상냥한 사람은 대체로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한다.

“야, 엄보.”

“왜 또.”

“우리, 육상부지.”

“존나 뜬금없네. 어. 당연하지.”

기재는 고개를 들고 육상부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비슷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기재는 처음부터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소속되어 있음이 명징한 상징들이 도처에 있는 게 좋았다.

“그럼 됐어.”

기재는 웃으며 보윤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잘 달리자.”

그렇게 말하면서 기재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포스트잇을 구겨버렸다.

선수 호명에서 이름이 불렸을 때 기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트랙 앞으로 나왔다. 준비운동을 하면서 스탠드 쪽을 바라보았다. 성단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 시선으로 아이들을 훑고 있었다. 마침내 성단이 기재를 발견했다. 스탠드와 트랙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 기재가 손을 뻗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와 검지를 펼쳤다. 트리거를 당기듯 손가락을 퉁겼다. 

 

4.

그럼 웃어주기를.

 

5.

굳이…….

그래야 하나.

 

6.

타임 트라이얼은 한 가지를 빼곤 전부 엉망이었다. 단거리를 잘 뛰어본 적이 없어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힘주어 뛰고 말았다. 괜히 무리했다. 다리에 힘이 다 풀려 있었다. 아버지의 포스트잇 때문은 아니었는데, 그냥 뛰다보니 진심이 되었던 모양일 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짐을 정리해 돌아가고 있었다. 스탠드에 앉아 있는 건 기재뿐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계단에 앉아 성단이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눈치인 것 같았다. 잃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일전에도 성단은 수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 때도 가방을 뒤지다 말고 앞에 멀뚱히 서있었다. 기재는 그 뒤로 천천히 다가가 아주 가까이서 물어보았다. 뭐 잃어버렸어? 네, 수건 잃어버렸어요. 그러게, 엄청 속상해보이네. 수건 때문은 아니고요. 성단은 뚱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절 칠칠맞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요. 그 때, 기재는 진심으로 웃고 말았다. 소성단, 너 진짜 재밌다. 진짜 재밌는 후배 같아. 성단은 무뚝뚝했다. 참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네요. 기재는 습관처럼 자신을 숨기며 되물었다. 왜 농담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성단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진담이면 무섭네요. 그런 후 성단은 팩 돌아서 가버리고 말았다.

기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성단이 가방을 뒤적이다 말고 지퍼를 닫았다. 그러니까 성단은 잃어버린 게 없는 모양이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스탠드로 그늘이 져서 기재가 서있는 곳은 온통 어둡고 서늘했다. 기재는 성단이 서있는 양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섯 발자국 정도만 걸으면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재는 움직이지 않고 생각했다. 길이 보이지 않아.

“소성단.”

성단이 멈추어 섰다.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기재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번엔 기재도 웃지 않았다.

“나 너 우습게 여긴 적 없어.”

성단은 대답했다.

“알아요.”

성단은 말을 아주 멀리 밀쳐놓았다.

“선배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기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소진되었다. 용기 혹은 비겁함 혹은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면 그 무엇으로라도 불릴 수 있는 상반되는 감정들. 기재는 결국 다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힘빠진 웃음이었다.

“그런가.”

“그렇죠.”

“내일 보자.”

“네.”

성단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구름이 지나가고 그림자가 사라졌다. 이제 양지는 어디에나 존재했지만 기재는 그대로 못 박힌 듯 서서 성단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둘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애매모호하거나 가깝지 않았다. 아주 멀었다.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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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원보기 트리오»
1차/old 2019. 10. 30. 00:57

1.

행성 같은 사람을 보았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같은 반이던 W는 어디 서든 아이들을 끌어 모았다. 서있으면 절로 눈길이 갔다. 단지 잘생겨서만은 아니었다, 분명 뭔가 있었다. W에게서 페로몬이 나오는 걸지도 몰랐다.

W와 어울리고 싶어서 다들 정말이지 침을 흘리며 달려들었다. 기재도 그 무리에 껴있었다는 걸 부정하진 않겠다. W의 가장 가까이서 돌 수만 있다면, 가장 크고 가까운 위성이 될 수만 있다면 좋을 텐데. 다들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같은 조가 되어야 하고 방과 후엔 같이 피씨방에 가야만 했다. 기재는 의외로 순순히 W의 가까운 위성이 되었다. W의 짝꿍으로 앉은 한 달 동안 별의별 이야기를 다 나눈 탓이었다. W는 종종 “내 베프야.”하고 기재를 소개했다. 그럴 때면 괜히 우쭐해졌다. 티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지만 가슴이 붕 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겨울방학 때 몇 명의 친구를 더 사귀었다. 옆 동네 사는 옆 초등학교 애들은 기재보다 키가 큰 아이들이 더러 껴있어 보다 어른스러워보였다. 어디서든 중심이던 W는 자신의 무리를 끌고 옆 동네 아이들에게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넸다. 어디 초 다니냐? 아, 옆이네. 너희도 놀 거지? 기재는 W보다 조금 뒤에 서있었다. 무리하지 않아도 옆 동네 무리의 중심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곳에도 행성은 있었다. 기재와 눈이 마주치자 그 애는 씩 웃었다. 잘생긴

그러니까 이것은 엄보윤 너에 대한 이야기다.

 

2.

“아 존나 더워.”

“여름이잖아.”

“누가 모른대?”

“누가 엄씨 아니랄까 봐 엄살 쩐다.”

“김기 시비 거냐.”

보윤이 기재 쪽으로 발길질을 했다. 기재는 능숙하게 엉덩이를 빼며 물러났다. 낄낄거리며 짧게 술래잡기를 했다. 오래된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가드레일을 두고 차 한 대가 느릿느릿 지나갔다. 둘은 금방 지쳤고 뛰기를 그만뒀다. 보윤이 입맛을 다시며 땀을 닦았다.

“아이스크림 먹고 싶다.”

기재가 동의했다.

“나도.”

“진짜 존나 더워 진짜 진짜로.”

“알아.”

“아랫동네는 덜 덥겠지?”

“아마 과학시간에 배우기로 그랬던 것 같다.”

둘은 잠시 대화를 멈췄다. 아랫동네, 하고 떠오른 누군가 때문일 테였다. 버스 한 대가 지나쳐갔을 때 뜨거운 배기가스가 훅 끼쳤다. 보윤이 얼굴을 찡그렸다.

“최원호한텐 연락 없냐?”

“원호? 매일 하지.”

“와, 최원 존나 나빴다. 나한텐 꼴랑 삼일에 한 번 하는데.”

“내가 매일 연락해서 그런 걸 걸.”

그렇게 말하는 기재의 목소리는 아주 미묘하게 풀이 죽어있었다.

“내가 매일 깨톡 안 보내면 걔도 그렇게 자주는 연락 안 할 것 같은데.”

엄보윤과 김기재의 친구 최원호는, 그러니까 W는 작년 겨울 전학을 갔다. 경기도보다 조금 더 아래 있는 동네라고 들었지만 지역명은 언제 들어도 가물가물했다. 거기서도 인기가 많다고 들었다. W의 입으로 들은 것이지만 기재는 그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W에겐 W만의 중력이 있어서 언제든 사람이 이끌려 맴돌게 됐다.

“어제 듣기론 원호 걔 여친도 생겼다더라.”

“와, 빠르다. 하긴 걘 원래부터 조온나 인기가 많았으니까.”

보윤은 알만 하단 듯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허공으로 젖혔다.

“야 이거 어째 원보기 트리오의 위상을 이어가는 건 이제 최원호뿐인 것 같다?”

기재는 보윤의 옆모습을 훑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넌 그래도 계속 고백 받잖아.”

“아니, 뭐, 그거야 내가 좀 잘나서.”

“얼씨구.”

“그러니까 우리 김기도 노력합시다, 응?”

“지랄하지 말고.”

둘은 이제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몇 미터를 앞두고 버스정류장이 보였다. 연습을 마치고 걸을 때만 해도 햇볕은 이렇게까지 뜨겁지 않았다. 좀 멀리까지 걸어보자고 했던 건 분명 생각 없는 짓이었다. 기재는 보윤에게 조금의 미안함을 느꼈지만 보윤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엄보, 우리 남은 거리는 버스 타고 가자.”

“어, 그래.”

“거절하면 죽빵 갈길 생각이었는데 존나 다행이다.”

“막말 쩌네.”

보윤은 시원스럽게 웃다 말고 턱짓으로 정류장을 가리켰다.

“야, 김기.”

“왜.”

“저기까지 시합할래?”

“미친…….”

“하는 거다, 시작!”

보윤은 냅다 뛰기 시작했다. 기재의 몸이 절로 그를 쫓아 움직였다. 육상부에 들어와 가지게 된 버릇이 있다면 추월하는 사람을 따라 몸이 움직인다는 것이었다. 땡볕을 달리는 동안 매미소리가 멀어졌다. 둘은 땀과 고통으로 일그러진 채 으헉 으헉 숨을 몰아쉬었다. 버스정류장 위엔 나무 그늘이 있어 조금 시원했다.

이긴 건 보윤이었다.

‘엄보윤 죽인다.’

땡볕을 걷게 해서 미안했던 마음은 금방 사라졌다. 보윤 역시 미련한 짓을 했으니 쌤쌤인 셈이다. 호흡을 정리하던 기재는 보윤의 뒤통수를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엄보윤 뒤질래?”

“아, 학, 하학, 김기, 표정존, 나 웃겨.”

“그만 쳐웃어. 숨 넘어 가겠다.”

매미소리가 다시 짙어졌다. 기재는 헐떡이며 웃다 말고 고꾸라지는 보윤을 일으켜 세웠다. 보윤의 축축한 손이 기재의 팔꿈치를 잡았다가 주르륵 미끄러졌다. 기재는 보윤에게 손을 뻗었다. 그것을 잡으며 보윤이 비틀비틀 일어났다. 둘은 의자에 앉아 전광판을 바라봤다. 같은 버스를 타야 했다. 갈 곳이 있었다. 

“아주 편지라도 쓰지 그러냐.”

정성에 탄복한다는 듯 보윤이 웃었다. 잠시 후 도착 버스에 둘이 타야 할 버스 넘버가 떴다. 기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래. 맨날 연락하는 사이에 존나 낯간지럽게 편지까지.”

그러니까 둘은 W에게 보낼 과자를 사러가는 길이었다.

 

3.

엄보윤은 W와 아주 빠르게 친해졌다. 그 날, 양 측의 초등학교가 겨울방학을 맞이하던 날 뒤엉켜 놀던 소년들은 아주 많았지만 껌딱지처럼 붙게 된 건 그 둘뿐이었다. 태생적으로 죽이 잘 맞는 관계라는 게 있다면 보윤과 W일 지도 몰랐다. 기재는 그 사이에 얼결에 끼게 됐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건 보윤과 W가 가진 특수성 때문이었다. 둘은 어디서든 정말이지, 인기가 많았고 중심에 있었다. 둘이 없다면 기재가 중심이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둘이 있는 이상 그것은 기재의 특성이 될 수 없었다. 딱히 아쉽지는 않았다. 그렇게 탐나는 것도 아니었다. 욕심도 없었고 무리에 어울려 즐겁다면 그만이었다. 그런 이유로 W와 보윤, 그리고 기재는 아주 빠르게 친해졌다. 동네 탓에 중학교 역시 갈라졌지만 문제없었다. 수업이 일찍 끝난 날엔 W와 함께 보윤의 학교에서 아이들이 쏟아지기를 기다렸다. 반대의 날엔 보윤이 그들의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언젠가부터 양쪽 학교의 아이들은 셋을 묶어서 원호보윤기재, 줄여서 원보기 트리오라고 불렀다. 소규모지만 나름 팬도 있었다. 수학여행 때면 타 학교 학생인데도 이름이 종종 불렸다. 원체 고백을 많이 받던 W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보윤도 비슷한 눈치인 것 같았다. 기재는 중학교에 들어오기 전까진 특별히 진중한 고백을 받아본 적이 몇 번 없었기에 쏟아지는 관심이 얼떨떨했다. W와 보윤 사이에 서있으면 기재 같은 소년도 총애를 받는 모양이었다. 기재는 자신이 명왕성 같았다. 행성으로 불리고 있지만 언제든 밝혀져 위성으로 퇴출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전까진 이 애들과 어울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보윤과 W가 좋았다. 으스대는 마음 같은 게 아니었다. 정말 친구라고 여겨졌던 까닭이었다. 사랑했다. 오래 봐야만 할 것 같았다.

중학교 1학년 중반 무렵 W가 선언했다.

“야, 나 여친 생겼다.”

보윤은 카페테리아에 앉아 무심하게 휴대폰을 누르며 오, 축하한다, 라고 대꾸해주었다. 기재도 별 생각 없이 축하한다고 대답했다. W는 히죽히죽 웃었다.

“사진 볼래? 존나 예뻐.”

“됐어, 금방 바뀔 거잖아.”

“야이씨, 김기재 진짜……. 그건 모르는 일이지 임마.”

W가 기재에게 헤드록을 걸었다. 보윤이 휴대폰에서 시선을 떼어내고 발로 테이블 건너편에 앉은 둘을, 정확히는 W의 다리를 찼다.

“와, 우리 김기한테 왜 그러냐. 최원 존나 애를 갈구네 갈궈.”

“악, 미친아! 엄보윤 씨발 지금 너 내 다리 차고 있거든?”

기재가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보윤과 W는 박장대소하며 테이블에서 뒹굴었다.

“아, 말을 하지.”

“씨바 편을 들어줄 거면 제대로 보고 차야지!”

그런 나날들이었다. W가 연애를 했다고 트리오가 해산되는 일은 없었다. 기재의 말대로 W의 여친은 금방 바뀌었다. 셋은 여전히 패스트푸드점, 카페테리아, 분식집에서 결성해 마구잡이로 떠들어댔다. 주로 새로 사귄 여자친구, 어제 받은 고백이야기 혹은 그제 키베 뜬 온라인 어그로꾼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종종 흐름이 끊어질 때가 있었다. W의 휴대폰이 울리면 기재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찌푸리게 됐다. 여자 친구에게 연락이 오면 W는 대화를 끊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왜?” 그렇게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기재와 보윤은 종종 둘만 남겨졌는데, 가을이 끝날 무렵엔 보윤 역시 여자 친구가 생겨 W와 똑같이 굴었다. “어, 왜?” 그렇게 말한 후 W 혹은 보윤은 기재를 두고 밖으로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다음 날이면 볼 수 있었고 원한다면 당장 밤에 불러낼 수 있었는데도 기재는 그 순간이 서운했다. 그래서 평소 조금 눈여겨보던 여자아이가 고백해왔을 때 거절하지 않고 받아버리고 말았다. 조금의 오기가 있던 셈이었다.

중학교 1학년 말 겨울, 마침내 트리오 중 가장 늦게 김기재가 보고했다.

“야, 나 여자 친구 생겼다.”

두 친구는 정말 당연한 일을 들었단 듯이 대수롭지 않은 투로 “축하해.”라고 대꾸했다. 그들은 기재가 인기가 있다거나 고백을 받는다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이제 셋은 동시에 연애를 하게 된 셈이다.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어, 왜?”는 계속됐다. 기재의 여자친구는 조용한 모범생이었고 기재와 함께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다. 손바닥이 따뜻하고 조곤조곤 말하며 눈이 예쁘고 총명해서 기재를 종종 붕 뜨게 만들었다. 얼결에 시작한 연애지만 기재는 정말 그 애가 좋아졌고 행복하게 만들고 싶어서 무엇이든 해줬다. 100일엔 엄보윤과 W를 불러다 노래방에 양초를 깔고 발라드를 불러주기도 했다. (다시 생각하자면 정말 오글거리는 짓이다. 그 때 엄보윤이 얼마나 투덜거렸던지.) 그러나 한 가지 일만큼은 해주지 않았다. 기재는 여자 친구가 예고도 없이 전화를 걸었을 때 두 친구와 함께 있다면 연락을 받지 않았다. “어, 왜?”를 위해 시작한 연애였는데 “어, 왜?”는 해보지도 못 한 셈이었다. 이유를 딱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었다. 그냥 싫었다. 둘과 함께 있을 시간이 점점 줄어드는 것 같았고 막연하게 앞으로도 그럴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예상은 맞아떨어져서, W는 겨우 같은 고등학교에 올라오자마자 전학을 가버리고 말았다. 떠날 때 의외로 울음을 터뜨린 건 W와 보윤이었다. W는 울음을 겨우 참았고 보윤은 조금 눈물을 보였다. 기재만이 얼떨떨하게 서있었다. 분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계속 볼 건데. 고깟 거리가 조금 멀어진다고 붕괴되는 거 아닌데. 우리는 트리오니까. 우리는 트리오니까 말이다.

그러나 종국엔 기재 역시 그 때 울어버리고 말 것을 두고두고 후회하게 됐다. 

 

4.

마트는 에이컨이 빵빵했다. 보윤이 환희에 찬 몸짓으로 티셔츠를 마구 잡아 흔들었다. 기재는 카트를 끌고 느릿느릿 보윤 옆에 섰다. 해피해피해피이마트. 노래가 산발적으로 울려 퍼지는 가운데 평일 낮에도 대형 마트는 사람으로 북적였다.

“야, 뭐 살 거냐.”

“몰라, 보고.”

“김기, 돈 많나보다.”

“돈이 많으면 이런 대형할인마트에 오겠냐. 씨바 면세점을 쓸지.”

“개웃기다. 최원호 존나 샤넬, 루이비통 이런 거 두르고 막.”

보윤이 낄낄거렸다. 둘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식료품 코너 쪽으로 이동했다. 에어컨 바람에 보윤의 뒤통수가 자꾸만 오소소 날렸다. 기재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야, 엄보윤.”

“왜?”

보윤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은 마주쳤다가 미끄러졌다. 기재는 고개를 돌리며 씁, 혀를 찼다.

“아니다.”

“싱겁긴.”

둘의 카트는 자꾸만 시식코너 앞에 멈췄다. 군만두와 불고기를 지나 떡갈비, 홍초 주스와 꼬깔콘을 돌고 돌았다. 둘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계속 집어먹었고 세 번째 돌았을 때는 매장 직원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죄송합니다.”

직원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제발을 저린 기재가 먼저 사과한 후 카트를 끌고 도망쳤다. 야, 어디가! 보윤이 쫄래쫄래 따라왔다. 둘은 시식코너로부터 멀어졌다. 과자코너 쪽에 도착했을 때 보윤이 카트에 탔다. 기재는 무거워서 운전하기 어렵다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내리라곤 하지 않았다.

“이제부터 이걸 다 쓸어가는 거야. 네가 안 떨어지게 잘 받아서 넣어.”

기재는 보윤의 품으로 과자봉투를 마구 집어던졌다. 보윤이 받기엔 너무 많은 양이 아주 빠르게 카트 안으로 들어왔다.

“씨바 좀 천천히 조준해!”

“아, 요령이 없어, 요령이!”

둘은 과자봉투를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웃음이 터졌다. 기재가 카트를 끌고 쏜살같이 코너 끝에서 끝으로 달렸다. 보윤은 카트에 다리를 쭉 걸친 채로 손만 뻗어 빼빼로를 쓸어 담았다. 코너 끝에 도착했을 때 보윤은 과자에 가득 파묻혀 있었다. 보윤이 가슴팍에 얹어진 콘칩 봉지를 한쪽으로 치우며 투덜거렸다.

“진짜 최원호는 우리한테 존나 고마워해야해.”

“당연한 거 아니냐. 눈물도 흘려야지.”

“이별의 날 때보다 더 흘리라고 해.”

“야, 당연하지. 그건 운 것도 아니었지. 엄보만큼은 울어야 울었다고 할 수 있는 건데.”

“야이씨,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야 그거. 쪼금 훌쩍거린 거 가지고…….”

보윤은 민망한 듯 입맛을 쩝, 다시다 기재를 올려다보았다.

“넌 진짜 그럴 때 안 울고 대체 언제 울어.”

“나?”

기재는 미묘하게 웃었다.

“몰라, 그냥 울 땐 울어.”

“최원은 너 우는 거 본 적 있다는데 왜 씨바 나한텐 안 보여 주냐. 나도 두고두고 놀릴 자신 있는데. 언제 울어줄 거야.”

“울겠냐?”

기재가 낄낄거리며 손을 뻗었다. 보윤은 단단히 그 손을 붙잡고 위태롭게 내렸다. 보윤의 몸이 카트를 빠져나올 때 과자 몇 봉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둘은 카트를 끌고 계산대까지 걸었다. 잠시 대화가 끊어졌다. 기재는 보윤의 얼굴을 한 번 더 훑다가 그만뒀다. 말은 목구멍에서 막혀 올라오지 않았다. 그 땐 미안해.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보윤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할 지도 모른다. 됐어, 뭘. 그렇게 넘겨버릴 것이다. 하지만 기재는 이따금 보윤이 두려웠다.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명왕성은 소행성 134340가 되어버렸다. 그건 언젠가 기재는 보윤 주변을 맴돌 134340명의 위성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는 예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늘 잘 보이고 싶었고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확실한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가족에게조차 느끼지 못 하는 그것을 주던 원보기 트리오에게 인생의 일부를 걸고 싶었다.

그러나 W는 떠나버리고 말았으며 차차 멀어지고 있었다. 매일 연락을 주고받지만 그뿐이었다. W는 새 여친이 생겼고 육상을 그만뒀다. 그리고 경기도보다 더 아래에 있는 시골 촌 동네에 있었다. 다신 카페테리아에 모이거나 함께 어울릴 수 없었다. 보윤도 언젠가는 그렇게 될까?

계산대 앞에 선 채로 기재는 가정해본다. 엄보윤에게, 그 때 엄보윤에게 가장 먼저 뛰어갔더라면.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가장 먼저 뛰어가서 울어버렸다면. 그럼 좋았을까. W보다 보윤을 더 오래 보게 되었는데, 그러니까 기재는 잘못 선택한 것 아닌가. 그 순간을 나눠야하는 건 엄보윤이어야 했을까.

“야, 엄보윤.”

“또 왜.”

“……쓰읍, 아니다.”

“아, 이 새끼 또 이러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다. 말은 여전히 목구멍에 단단히 박혀 있고 기재는 아무래도 몇 번의 타이밍을 놓친 것 같다.

“계산이나 하자.”

“편지 안 쓰냐?”

“닥쳐, 좀.”

미안해, 혹은 너희를 정말 사랑해. 때를 놓친 말은 왜 이렇게 무겁거나 너무 가볍게 혹은 너무 동떨어진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기재는 입을 다물고 웃었다. 카트를 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엄보윤을 태우고 자꾸만 나아가고 싶었다.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가능하다면 인생 정중앙까지.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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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집은 기억하는 것보다 작았다. 오는 데만 세 시간이 넘게 걸렸다. 출발할 때만 해도 밤이었는데 도착했을 땐 새벽이었다. 고모부가 트렁크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기재는 조수석에서 내릴 때 일부러 차문을 약하게 닫았다. 아영과 아진은 뒷좌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기재는 마당에서 심어진 나무가 훌쩍 2층 높이까지 자란 것을 올려다보았다.

“나무가 자랐네요.”

“나무?”

고모부는 기재의 시선을 따라 이동한 후에야 어떤 나무를 말하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아, 저거. 기재 네가 마지막으로 여기 왔을 때가 5년 전이던가?”

기재의 입에서 입김이 피어올랐다.

“저 열한 살 때요.”

“그래……. 그 정도면 많이 자랐다고 느낄만하지. 올해 가을엔 열매도 열렸어.”

“기재 형.”

고모부와 기재가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수가 서있었다. 기재는 놀랐다. 처음엔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 했다.

“어… 지수구나.”

“형은 변한 게 없네.”

“너는 많이 변했다.”

기재는 진심으로 대꾸했다. 지수가 호탕하게 웃었다.

“내 키가 좀 크긴 했다.”

지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다가왔다. 기재 앞에 서자 눈높이가 거의 같았다. 기재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운동화를 바라보았다. 굽 차이를 고려하면 지수가 기재보다 더 클 지도 몰랐다.

“형, 들어가자.”

지수는 기재의 손을 아주 자연스럽게 쥐었다 놓았다.

 

주택 안은 변한 게 없었다. 잘 닦인 복도를 따라 방문이 나란히 늘어져 있고 현관 앞엔 꽃이 화분에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고즈넉하고 여유로운 냄새나 신발장에서 풍기는 방향제 냄새도 여전했다. 지수는 기재를 데리고 이층으로 올라갔다. 고모가 벌써 방에 다녀간 모양이었다. 기재가 자게 될 지수의 방엔 지수 몫이라기엔 너무 많은 양의 이불가지가 정돈되어 있었다.

“기재 형, 맘 쓰지 말고 편하게 지내라.”

지수의 목소리에선 사투리 억양이 강하게 묻어났다. 기재는 지수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지수가 무엇이든 물어볼까봐 두려웠다. 한 달 간 김기재와 두 여동생은 지수네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것보다 오래 지낼 수도 있었다. 고모와 고모부가 그 사정을 설명했다면, 지수는 분명 기재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아주 많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수는 무언가를 묻는 대신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형 중간에 깨서 그런데 나 너무 졸려.”

“다시 잘 거야?”

“형은 안 졸려?”

“차에서 조금 잤어.”

“낮까지 자. 어차피 학교도 안 가는데.”

“그럴까.”

“응. 아, 맞다, 형.”

지수는 이불 속에서 얼굴을 내밀고 키득키득 웃었다.

“나 불 좀 꺼줘.”

기재는 불을 끄고 지수 옆에 쌓인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왔다.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새벽녘의 푸른 기운이 어스름하게 창문을 넘고 있었다. 지수는 금방 잠들었지만 기재는 오래도록 잠을 이루지 못 하고 뒤척였다. 서울에 두고 온 것들이 떠올랐다. 집이 그리웠고 어머니가 그리웠다. 지수가 뒤척이며 이불을 발로 뻥 찼다. 기재는 자는 지수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좋은 생각을 하려 애썼다. 그리고 생각했다. 지수마저 없었다면 자신은 정말로 울어버렸을 지도 모른다고.

 

아침에 일어났을 때 지수는 옆에 없었다. 아래층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기름에 튀겨지고 있었다. 기재는 층계를 내려왔다. 아영과 아진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지수는 보이지 않았다.

“오빠 안녕.”

“오빠 좋은 아침.”

“고모, 지수는요?”

“지수?”

고모는 기름이 팔팔 끓는 냄비 안에서 가지튀김 몇 개를 건져내곤 불을 내렸다. 접시에 키친타올을 깔고 튀김을 옮겨 담은 후 식탁 앞으로 밀었다. 기재 앞으로 분주히 상이 차려졌다.

“지수는 벌써 일어나서 밥 먹고 나갔지. 아마 또 동네 쏘다니고 있을 거다.”

기재는 식탁에 앉아 밥과 가지튀김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고모가 맑은 된장국을 퍼서 밥 옆에 차려주었다. 출렁이는 된장국 안으로 기재의 얼굴이 비쳤다. 젓가락을 들 마음이 들지 않았다. 밥을 남겨도 고모는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기재는 가지튀김 두 개를 집어먹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모가 식탁을 치우다 말고 멈춰서 거의 비워지지 않은 기재의 밥그릇을, 그리고 기재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무언가 묻고 싶지만 예의상 물을 수 없는 것들이 있을 때 짓는 어른들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기재는 어물거렸다.

“죄송해요.”

“아니야, 고모는 괜찮아.”

그것은 기재가 원하던 전개였고 예상했던 말이었으나 거북하게 느껴졌다. 기재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거실에서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가엾은 고모를 더 죄송스럽게 만들 수는 없었다.

바깥으로 빠져나온 기재는 방금 먹은 것을 모조리 토해냈다. 벽을 짚고 서서 더 이상 게울 것이 없을 때까지 침과 오물을 뱉었다. 한참 그러고 있으니 절로 기운이 달렸다. 쭈그려 앉은 기재의 뒤로 인기척이 났다. 기재는 고개를 돌렸다. 지수가 서서 기재를 보고 있었다. 철렁했다.

“어…….”

지수는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형.”

지수가 손을 까딱거렸다.

“가자.”

지수의 뒤를 따라 오솔길을 걷는 동안 기재는 생각해보았다. 어디까지 봤을까? 지수는 아무 것도 모르는 건 아니지 않을까? 지수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까. 지수의 등은 아주 넓고 컸다. 운동화로 갈아 신은 지수의 키가 기재를 미묘하게 추월하고 있었다. 다음 해엔 기재보다 훨씬 더 클 지도 몰랐다. 기재는 지수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그 땐 기재가 더 컸다. 지수는 구석에 있었고 말수가 적었고 눈치를 보는 동생이었다. 왁자한 친척 아이들 틈에서 자리를 잡지 못 하고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맴도는 건 기재가 된 것 같았다.

“지수야, 우리 어디 가는 거냐.”

“응? 걍 걷는 기다.”

지수는 능숙하게 오솔길을 누비며 씩 웃었다.

“아침 묵었으니 산책 해야제.”

“어디까지?”

“갈 수 있는 데까지 갔다 돌아오면 되지 뭐.”

“길 잃어버리면 어떡하냐.”

“뭐?”

지수는 아주 우스운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것처럼 박장대소 했다.

“뭔 소리고, 내가 여서 길을 왜 잃는데.”

오솔길은 뒷산으로 이어졌다. 길이 가팔라지고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둘은 이제 겨울산 속에 있었다. 황량하고 앙상한 풍경이 이어졌다. 눈이 오지 않은 산은 어쩐지 무서웠다. 귀신이 나타날 것도 같았다. 지수는 산 동물처럼 잘도 껑충껑충 앞서 나갔다. 중턱까지 올라갔을 때, 둘은 나무 한 그루 앞에 멈춰 섰다. 가지에 반쯤 찢어진 연 하나가 걸려 있었다. 지수는 그 연을 가리키며 다음엔 연 놀이를 하자고 말했다.

“있제, 따분하게 보여도 생각보다 재밌다.”

“롤보다 재밌을까?”

“아, 그건 그렇다.”

겨울바람이 불었다. 둘은 중턱에 서서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몇 몇 집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개 한 마리가 좁은 길을 마구 내달리고 있었다. 기재가 불쑥 말했다.

“롤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것 같아.”

“그제. 맞다.”

지수가 동의했다.

“내가 해본 게임 중에선 제일 재밌더라.”

“롤보다 재미있는 게 나올까?”

“새로운 겜은 계속 나오니까 언젠가 함 나오겠지 뭐.”

“그 땐 우리 집에 또 놀러와.”

거기까지 말하던 기재는 잠시 머뭇거렸다. 집, 이라고 발음하자 입안이 깔깔해지는 것 같았다. 기재의 집은 불에 탔고 지수가 다시 서울에 올라온다고 해도 그 집에서 재워줄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새 집을 빠른 시일 내에 구해오겠다고 약속했다. 더 크고 좋은 집을 찾고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니까 지수가 다시 서울로 올라온다면, 그 땐 새로운 집에서 기재와 게임을 하게 될 것이었다. 하지만 그 집엔 치명적으로 무언가 빠져있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진 기재를 지수가 묵묵히 바라보았다. 눈치를 보고 있는 걸지도 몰랐고 기재가 갑자기 입을 다문 이유를 알고 있어서일지도 몰랐다. 기재는 아무 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서 일부러 먼 곳을 보았다.

“야, 김지수. 먼저 내려갈래?”

지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 천천히 내려온나.”

지수가 내려간 뒤 기재는 바위에 앉아 조금 훌쩍였다. 어린 애처럼 울고 싶지는 않아서 숨을 죽일 생각이었지만 생각한 것보다 울음은 금방 그쳤다. 기재는 천천히 바위에서 일어났다. 지수가 오솔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게 보였다. 반대편에서 누군가 달려왔다. 여자애였다. 지수가 낄낄거리며 팔을 벌렸다. 친구일까? 아니면 애인? 기재는 지수의 품에 찰싹 달라붙은 긴 머리카락의 소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주택으로 돌아왔을 때 기재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현관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신발들이었다. 낯선 신발도 하나 껴있었다. 아까 지수가 껴안아준 여자애의 것일지도 몰랐다. 기재는 층계 쪽을 올려다보았다. 쿵, 하는 소리가 났다. 

층계를 따라 올라가는 동안 소음은 점점 선명해졌다. 기재는 저도 모르게 난간을 붙잡고 멈춰 섰다. 소리는 지수의 방으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수가 누군가를 어르고 달래고 속닥거리고 있었다. 기재는 당혹스러움에 휩싸였다. 무슨 상황인지 깨닫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마치 그래야 했던 것처럼, 기재는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여자가 교성을 질렀다. 둘은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기재는 못 박힌 듯 그 앞에 서서 지수가 욕설을 내뱉는 걸 묵묵히 들었다.

“누나, 아, 존나…….”

지수의 목소리엔 많은 숨이 섞여 있었다. 사투리의 억양도 잘 들리지 않았다. 지수의 목소리인지도 의심스러웠다. 기재가 늘 들어오던 느낌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을 열 수는 없었다. 누가 됐던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머뭇거리던 기재는 복도를 지나 다락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등지고 주르르 미끄러졌다. 옆방은 여전히 쿵쿵거리고 있었다. 기재의 손바닥이 축축했다. 기재는 마른세수를 했다. 뺨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교성에 칭얼거림이 섞이며 상황은 보다 노골적으로 변했다.

“지수야, 그건 아파!”

“아, 쫌만.”

“아, 진짜, 김지수…….”

원하지 않아도 상황이 그려졌다. 기재는 보이지도 않는 방을 훤히 볼 수 있었다. 야한 소설을 읽을 때 느끼던 것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기재는 몸을 웅크린 채 눈을 감았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전 헤어진 여자 친구가 떠올랐다. 그 애도 머리카락이 길었던 게 생각났다. 지수가 안고 있는 누나와 비슷하게 생겼던 것도 같았다. 가까이서 본 적도 없는 주제에 멋대로 그렇게 상상되고 있었다. 이제 기재는 죄악감을 느꼈다. 바지춤이 부풀어 있었다.

기재는 검지를 문 채 수음을 했다. 신음하면서 조금 울었다. 외로웠다. 외로웠는데, 너무 큰 일이 닥쳐버려서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지금 하는 일도 나쁜 일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정말 나쁜 일일 지도 몰랐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수는 방 너머에서 사정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지수야아, 하고 지수의 ‘누나’는 울었다. 기재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헐떡거리며 성기에서 손을 떼어냈다. 손바닥이 축축해져 있었다.

 

그 날 밤에도 지수는 먼저 자리에 누웠다. 이불에 눕다 말고 기재가 머뭇거렸다. 지수는 고개를 돌려 씩 웃었다. 기재의 가슴이 순간 철렁했다.

“형.”

“어, 어?”

“불 좀 꺼줘.”

“아……. 그래.”

기재는 불을 끄고 지수의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지수가 들어가서 데워놓은 이불 속은 따뜻하고 건조했다.

“형 언제 들어왔어?”

“음.”

기재는 지수의 아는 누나가 나간 시간을 대충 떠올리며 둘러댔다.

“너 내려가고 한 시간쯤 뒤에.”

“아, 그래? 오래 있었네. 난 형이 금방 내려올 줄 알았다.”

“겨울 산이 또 있어보니 좋더라.”

“그렇나…….”

지수가 베개 위로 엎어졌다. 얼굴을 마구 부비다 기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며 씩 웃었다. 기재는 지수가 섹스를 한다면 저런 얼굴을 하고 있을지 상상해보았다. 잘 되지 않았다.

“형, 형이 여 오니까 좋다.”

“그래?”

“어.”

지수가 이불 속으로 웅크렸다.

“불 꺼줄 사람이 생겨서.”

“그게 뭐냐.”

기재가 장난스럽게 지수의 다리를 발로 찼다. 지수는 낄낄거렸다. 이불 속은 조금만 뒤척여도 금방 뜨거워졌다. 몇 번 발차기를 주고받다가 똑바로 누웠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천장이 보였다. 지수는 역시 금방 잠이 들었다. 오늘도 잠들 수 없는 건 기재뿐이었다. 지수는 코를 골았다. 그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기재가 천천히 일어났다. 손으로 지수의 얼굴 언저리를 훑었다.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진 것 같았다. 기재가 속삭였다.

“김지수.”

“…….”

“모르는 척 하는 거야, 아님 정말 모르는 거야.”

그러나 세상이 다시 움직였다. 지수의 코골이는 안정적이었고 흐트러지지 않았다. 기재는 맥이 풀렸다. 그러니까 지수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역할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것은 무척이나 안심되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기재를 두렵게 했다. 그러니까 그 누구도 이 겨울에 일어난 재난에 대해 묻지 않는다면, 가족도, 심지어 지수마저 묻지 않는다면, 김기재는 어디 가서 그 이야기를 해야 할까? 하지만 기재가 먼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 해 겨울은 기재에게 아주 길었다. 종종 뒤척이고 잠을 이루지 못 하는 밤이 이어졌다. 우리 엄마가 죽었는데. 혹은 네가 섹스하는 소리를 들었어. 그 무렵 기재의 몸속은 그런 질문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말할 수도 없는 이야기였다.

2017/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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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새학기, 새마음»
1차/old 2019. 10. 30. 00:54

 기재는 스타팅 라인에 섰다. 등판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미적지근했다. 여름이 끝나고 있는 것 같았다. 지겨운 더위가 끝나고 에어컨을 끌 때가 돌아왔다는 것이 믿겨지질 않았다. 어떤 계절들은 가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기재에겐 재작년 겨울과 올해 여름이 그러했다.

 “김기!”

 “왜!”

 겨운이 소리를 높였다.

 “너 멍 때리다간 넘어진다!”

 “정겨운, 걱정도 많아.”

 기재는 자세를 고쳐 잡으며 낄낄 웃었다.

 “야, 이래봬도 이 년째 무사태평한 몸이거든.”

 김기재는 재작년 봄에 육상을 시작했다. 순전히 W의 부추김 탓이었다. 김기, 한 번 달리자. 너 잘 달리잖아, 축구도 잘하고. W의 입 바람은 사실 그렇게까지 애원조는 아니었다. 그렇게 매혹적인 제안이지도 않았다. 기재가 거절했다면 W는 다른 놈을 찾아 떠났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기재는 육상부에 들어가게 됐다. 넌 W가 하는 건 다 오케이해주더라. 나중에 기재와 자주 어울리던 친구 한 명이 심심한 감상을 말해주었다.

 햇발이 강해지고 바람이 조금 불기 시작했다. 겨운은 앞에서 타이머를 쥐고 있었다. 기재, 잘해라! 누군가 외쳤다. 호각이 불렸다.

 기재의 몸은 유연하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바람과 맞서며 다리가 바쁘게 움직였다. 아주 빠르지는 않았다. 달려야 할 거리는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지치면 힘내지 못 한다는 사실을 기재는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언젠가는 W가 물었다. 야,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 하냐. 기재는 그게 아주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넌 달리면서 생각도 하냐?

 하지만 김기재는 오늘 W를 생각하고 있다. 재작년 여름의 일이고 아직 기재의 어머니가 불 때문에 죽기 전의 일이다. 상상 속의 W가 머쓱하게 웃는다. 야, 김기 넌 집중을 존나 잘하나 보다. 난 그런 게 잘 안 되거든. W는 작년 겨울 전학을 갔다. 가기 전에 머쓱하게 기재의 어깨를 툭 쳤다. 잘 지내라. 연락 자주 하고. 기재는 W가 조금 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호각 소리가 들렸다. 기재는 헐떡이며 멈춰 섰다. 정겨운이 스타팅 라인 쪽에서 기재의 지점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기재는 흐르는 땀을 닦았다. 티셔츠를 잡아 마구 흔들었다. 몸 안으로 바람이 들어왔다가 빠져나가게 내버려두었다.

 “김기재 너 제대로 안 뛰지!”

 “왜, 기록 많이 나빠?”

 겨운은 대답 대신 기재의 엉덩이를 찼다. 기재가 악, 하고 장난스럽게 웃었다.

 “웃음이 나오냐!”

 “에이, 친구 때문에 들어온 것치곤 꽤나 근성 있는 놈에게 너무 눈물겨운 취급이다 이거.”

 “하여튼 김기… 콱 관둬버리던가.”

 “안 돼, 나 여기 좋아해.”

 “그럼 잘해 바보야.”

 “알겠어.”

 겨운이 다시 스타팅 라인으로 돌아가는 동안 기재는 고개를 숙여 운동화 끈을 묶는다. 묶으면서 생각한다. 넌 달리면서 무슨 생각 하냐? 기재는 W가 무슨 생각을 하며 뛰었던 걸지 한 번도 물어보지 못 했다. 그 땐 궁금하지 않았기 때문인 지도 모른다. W 때문은 아니었지만 기재는 이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버렸으므로 정말이지 묻고 싶었다. 생각하면서 달린다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나에게 주어진 단 한 가지의 길을 가지고 달리는 동안 그것을 생각하고 만다는 건 정말이지 이상한 일이 아닌지. 네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는지.

 기재는 천천히 라인 앞으로 돌아갔다. 아이들이 트랙 앞에 줄지어 서있었다. 여름이 끝나고 있는 것 같았다. W가 떠나고 어머니는 죽었는데 이 계절이 다시 돌아왔으며 다시 떠나고 있다는 게 믿겨지질 않는다. 어떤 계절들은 가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졌다. 기재에겐 재작년 겨울과 올해 여름이 그러했는데, 이번 가을은 어떠할지 묻는다. 그러니까 김기재, 너는 이제 어떤 생각에 사로잡혀 달리는가.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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