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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물결 «황금벌판»
1차/new 2021. 1. 19. 02:12

어느 화창한 9월의 오후, 겐나디는 내가 일하는 공방으로 뛰쳐들어왔다. 나는 키 낮은 책상에 허리를 굽히고 앉아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작년부터 일하기 시작한 조수 갈리나는 재료에 사포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큰 소리에 놀라 동시에 현관을 쳐다보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새의 지저귐, 바람의 결을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사귀 소리가 벌컥 열린 문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 같았다.

겐나니는 늑대에 쫓기다 헛간으로 몸을 던진 새끼 사슴처럼 잔뜩 경직된 허벅지와 번쩍이는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 애는 잠시간 안절부절 못하더니 내가 웅크리고 있는 책상까지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다. 그러더니 나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지금 당장 그래야 한다고 했다.

그 애가 거칠게 나를 끌고 나가는 동안 갈리나는 어쩔 줄 모르고 우리 주변을 서성였다. 나는 겐나디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놔달라고 했지만 겐나디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나를 질질 끌어 당겼다. 정신이 나갔거나 조금의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엉거주춤 끌려 나가면서 갈리나에게 동생네 조수와 점심을 먹고 오겠다고 했다. 비록 내가 이 꼴로 외출하게 되었지만 일만큼은 똑바로 해두라고 했다. 그런 뒤에 눈앞에서 문이 쾅 닫혔고 겐나디는 나를 대로변으로 끌고 나왔다.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내 눈으로 떨어지면서 순간적인 착란 현상이 왔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론가 나를 이끌며 중얼거리던 사투리 섞인 말투를 기억해냈다. 아버지의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서 옷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고 팔뚝은 크게 베여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는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빛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대답하지 않자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버지는 우악스럽게 내 입을 틀어막으면서 입 닥치라고 했다. 아버지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 순간, 우리 앞으로 마차가 쌩 하고 지나갔다. 마부가 겐나디에게 욕지거리를 하자 나도 겐나디도 잠에서 깨어나듯 소스라치게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겐나디는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 애의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허연 손자국을 문지르며 물었다.

무슨 일이니?”

유리 씨가 얼른 데리고 나오래서요.”

내 표정에 겁을 집어먹은 겐다니가 사과했다.

엄청 큰일이래요. 직접 말하겠다고 레스토랑에 있겠대요.”

나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동생네 조수의 분별력 없는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동생 유리가 분명 주의를 주었을 텐데도 괜히 겁을 집어먹은 겐나디 때문에 오후에 예정되었던 모든 일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작업책상에 덩그러니 놓고 온 도면과 끌려나오느라 바닥에 떨어진 연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스무 살도 먹지 않은 겐나디에게 손찌검을 하는 상상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씩 올려치는 상상을 하면서 말했다.

다음번에는 이러지마.”

화를 삭이느라 말하는 속도가 아주 느려졌다.

나는, 나는 이런 식으로 구는 걸 아주 싫어해.”

, 정말 죄송해요.”

겐다니와 헤어진 뒤 나는 공방에서 다섯 골목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갔다. 테라스가 있고 면 요리를 주력으로 하는 가게였다. 아카데미에 다닐 적에도 종종 외출을 하면 이곳에 오곤 했다. 동생 유리는 가격 때문에 매번 펄쩍 뛰었지만 나는 그러한 반응 때문에 더 아무렇지 않게 굴곤 했다. 나는 유리가 포크로 면을 말아 숟가락에 놓고 휘휘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말했다.

사과해.”

누나도 하나 시켜. 내가 사줄게.”

유리는 면을 집어넣고 천천히 씹어서 삼켰다.

끌고 나온 건 미안.”

다음번에 또 이러면 죽는다.”

유리의 입술이 왼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재수 없는 위에나.”

나는 내 음식이 나올 때까지 분을 삭이면서 거리를 지나는 수십 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직접적으로 화를 낸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기운이 빠졌다. 유리가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가 슈텐에 올라왔다고 했다. 채무 관련으로 지나 씨를 만나러 온 것 같은데 겸사겸사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긴 만나기 싫어서 잠시 올라가 있을 건데 누나만 여기 내버려두는 것도 못할 짓인 듯해서 언질이나 줄까 하고 부른 거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황금빛 벌판이 떠올랐다. 어릴 적에 헛간으로 올라가 보았던 거대한 황금빛 물결이 눈에 새겨진 듯 서서히 윤곽이 잡히며 떠올랐다. 땀에 젖은 셔츠와 헤진 바지, 새카만 굳은살 같은 건 뒤늦게 조각조각 떠올라 의식적으로 맞추지 않으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이 나이가 다 되도록 나나 유리는 아버지와 거리감이 있었다. 우리가 슈텐에 올라왔을 때가 열여덟, 열여섯 살 때였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줄곧 우리의 어떤 부분을 수치스럽게 했다. 교육을 받고 장인으로 이름을 조금씩 알리기 시작하자 그는 우리의 감추고 싶은 약점처럼 자리 잡았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가 알아차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 그렇구나.”

나는 다리를 쭉 뻗은 채 손바닥으로 의자를 짚고 발바닥을 달랑거리면서 말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이번에 나는 슈텐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일단 일정이 있었다. 최근 나는 거래처에 납품할 상자의 개수를 두 배로 늘렸다. 조수 갈리나의 업무 속도가 늘었기 때문이다. 밤을 새서 한 번에 도면을 그리고, 하루 쉬었다가 또 남은 하루를 몽땅 매진해서 상자를 짜고 맞출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들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갑자기 공방을 비우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가 건방을 떨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걸. 누나는 표정 관리를 못하니까.”

, 그래.”

나는 기름이 적당히 버무려진 기분 좋은 무게의 면을 포크로 들어 올렸다. 테라스 아래로 가게로 뛰어 들어오는 겐나디의 금발 정수리가 보였다. 나는 문득 깨닫고 말했다.

저 애는 아버지를 닮았구나.”

그것이 적잖이 충격이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저 애는 아버지를 닮았네.”

그래, 쟤가 좀 호구 같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지 혼자 살겠다고 배신할 애론 안 보이지.”

그렇게 말하며, 유리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 날 밤, 나는 갈리나가 사포질을 해둔 나무 조각을 손끝으로 몇 번이고 매만지며 앉아있었다. 작년 이맘때에는 우물쭈물 실수를 하던 갈리나가 이제 가시 같은 건 도무지 참아줄 수 없다는 듯 박박 사포질을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갈리나는 원래 내 조수가 아니었다. 네 달 뒤에는 원래 자신을 가르쳐주던 마이스터에게로 떠날 것이다. 나는 임시로 그녀를 맡은 것에 불과했다.

갈리나가 없으면 이 넓은 공방도 사실은 쓸모가 없었다. 자는 곳과 일하는 곳을 분리하는 것만 포기하면 내 아파트로 돌아가서 이 크고 작은 상자들을 수십 개, 수백 개는 만들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수십 개, 수백 개를 팔아서 돈을 벌고 나면. 자유로워지고 나면. 물론 내게는 계획이 있었다. 내 인생은 짜 맞춰진 상저처럼 반듯하고 단정하게 흘러갔다. 오늘 오후처럼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겐나디의 방문 같은 건 더는 내 삶에 찾아와서는 안 됐다. 그런 건 이미 한 번으로 족했다.

엎드린 채 몇 번이고 나무의 매끄러운 표면을 쓸다가 눈을 감았다. 잠결에 누가 벌컥 문 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나는 끙끙거리면서 점차 의식의 아래로 떨어졌다. 묵직한 어둠이 추처럼 내 발 끝에 매달려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잠이 들었는데도 꿈이 시작되지 않는 내 상태에 조금 겁을 먹었다가 불현듯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것은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겐나디의 방문과 비슷했다. 내 의식 속으로 뛰쳐 들어온 겁에 질린 새끼 사슴 같은 걸 다루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 첫 번째 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꿈이 찾아들기 전에 먼저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어둠 속에서 막연히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내 육신과 정신이 먼저 그것에 호응해, 그들의 계획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도록 일찍부터 내 의식을 준비 상태에 두고 있던 것 같기도 했다.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예정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서듯 내 의식을 어둠 속에 준비해두고 꿈이 찾아오기를 기원하고 있던 것 같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 같았다. 나는 내 두 번째 꿈을 기다리며 불 꺼진 의식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이었다.

꿈은 씨앗이 움트는 것처럼 작은 점으로써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아득히 먼 곳에서 시작되었다. 새까만 천에 구멍을 뚫어 태양을 보듯 빛이 놀랄 만한 속도로 쏟아지면서 점차 공간을 팽창시켜 나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풍경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빛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점점 거대해졌다. 물결은 어느덧 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꿈인 줄 알았다. 내 눈앞으로 펼쳐진 무한한 황금의 물결은 아무리 보아도 벌판의 그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키가 다 자란 곡식들은 바람이 불 때면 물결처럼 넘실거리며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파도치듯 무언가를 꾸역꾸역 밀어내면서 자유롭게 내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결이란. 아니, 다 자란 황금의 곡식들은 그런 자유와는 또 다른 성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끝이 정해진 깊이, 힘껏 뛰어들면 사람의 형체도 짐승의 형체도 모조리 삼켜버릴 듯하면서 결국 땅 위에서 숨겨주는 게 고작인 그 한정적인 깊이였다. 물결처럼 다 숨겨주지도 못하고 빨려 들어가지도 못하는 무용한 황금의 물결그것이 물결치며 우짖는 소리들쏴아아하는, 그 흉흉함이란.

나는 갑자기 열여덟 살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내 손을 붙잡고 달리고 있었다. 내 뒤로는 겁에 질린 유리가 헐떡이는 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우리는 벌판을 가로질렀지만 벌판은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멀리 가지 못했다. 우리의 현실은 땅처럼 우리 발밑에 있었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좀 더 촉각적이면서 청각적인 것이었다. 나는 어음과 동전에서 나는 냄새를 혐오했으나 동전이 떵그렁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것은 좋아했고 자라면서 그 둘 다에 점차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멈추어 섰다. 반사적으로 내 손을 매만지면서 정신을 차렸다. 발밑이 축축했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자 차갑고 축축하면서 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금빛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황금의 물결이 내 발을 적시며 아득히 먼 어둠 속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벌판이 아니었구나.’ 나는 생각했다. ‘바닥이 없는 꿈이었구나.’ 그렇다면 이것은 현실과 먼 꿈이다. 나만의 꿈이다.

나는 축축해진 뺨을 문지르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깨어나면 공방을 비우고 갈리나를 맡아줄 새 장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 다음에는 튼튼한 신발과 조금의 돈을 챙기는 것이다. 지나 씨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거래처와 계약을 조율하는 것이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일들은 항상 내 삶을 더 나은 쪽이 아니라 더 불길한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변화가 싫었다. 장인으로 있는 게 즐거운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이 꿈도 그러하기를. 나는 의식이 점차 위로 솟구치는 것을, 내 영혼이 내 어두운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감각이 위로 훅 잡아끌렸다. 나는 점점 내 몸의 형태가 감각으로써 되살아나고 재건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닥으로 늘어진 왼 손, 뺨을 대고 있는 매끄러운 나무의 재질, 벌어진 입술에 고인 미지근한 침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의식이 도착한 곳을 받아들였다. 내 현실을 받아들였다. 꿈에서 깬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실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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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르다르, 들었어? 푸른 매의 히라이드가 아드리나를 좋아한대. 벌써 우리 중 절반은 알고 있을 걸. 사르다르는 잠자코 듣다가 되물었다. 어느 아드리나?

 바람거미의 아드리나. 사르다르의 시큰둥한 반응이 비난처럼 느껴졌던 건지 도도나는 변명처럼 덧붙였다. 놀리려고 꺼낸 말은 아니었어. 그냥, 언젠가 걔네 둘이 결혼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기분이 뭔지 궁금했거든.

 사르다르는 수평선을 응시했다. 뭐, 둘만 좋다면 결혼하는 거지. 그는 바람거미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우리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서 청혼을 하게 되려나.”

 “글쎄, 모르지.”

 사르다르가 꿩을 세며 대답했다.

 “우리 중 하나를 좋아하게 된다니, 상상이 잘 안가.”

 “음, 그것도 모르는 일이지.”

 도도나는 벌렁 모래 위에 드러누웠다.

 “난 누구랑 결혼하게 될까?”

 “오아시스에 물어보는 건?”

 흔한 주술이었다. 태양이 하늘 꼭대기에 정확히 걸렸을 때 나무 아래 흙을 한 줌 집어다 오아시스에 뿌리고, 물이 다시 깨끗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얼굴을 비추면 되는 것이다. 아무도 깨지 않은 낮이어야 한다는 점이 조금 까다로운 조건이기는 했지만, 어떤 아이들은 정말로 성공했다고, 그래서 수면에 비친 다른 누군가의 얼굴을 보았다고 주장했다.

 “그렇게까지 궁금하지는 않아.” 도도나는 질색하다가 되물었다. “넌 해본 적 있어?”

 “아니.” 사르다르는 어깨를 으쓱였다. “조건이 까다롭잖아.”

 “그건 그래.” 도도나는 콧잔등을 찡긋거렸다. “우리 중 하나랑 결혼한다면 누가 좋을까?”

 “글쎄….” 사르다르는 꿩을 전부 셌다. “이다이라?”

 도도나가 벌떡 일어났다.

 “뭐?!”

 “예쁘잖아.”

 사르다르는 모래를 털며 일어났다.

 “스물일곱 마리 전부 있으니까 이제 돌아가자.”

 다음 날 사르다르가 일어났더니 마을 아이들 절반이 그가 이다이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실 확인 차 찾아온 몇몇 아이들은 비장한 표정이었다. 사르다르는 부정 대신 어깨를 으쓱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고, 며칠 뒤 이스니야의 모든 아이들-심지어는 일부 어른들까지도 사르다르가 이다이라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루는 한낮에 일어나 노나임을 짜고 있으니, 누워서 잠을 자던 사르다르의 어머니 자드나가 웅얼거리며 물었다.

 “이다를 좋아한다며?”

 “음, 네.”

 사르다르가 입으로 직접 인정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고백했니?”

 “아뇨.”

 “그럼 이미 늦은 것 같구나.”

 자드나가 하품하며 말했다.

 “온 마을 사람들이 알고 있잖니….”

 실을 너무 잡아당기고 있어. 사르다르는 생각했다. 여길 잡아당겨도 다른 실이 딸려올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아니었네. 다 엮여 있는 부분이었구나. 하지만 그는 실을 끊어버리는 대신 손에서 놓아버렸다. 노나임을 망친 사르다르는 자드나를 바라보았다. 그새 잠에 빠져든 자드나는 몸을 뒤척이며 긴 숨을 내쉬고 있었다.

 다음 날 계시처럼 이다이라가 찾아왔다. 물 항아리를 얹은 채였다. 무릎을 조금 굽히고, 한 손으로는 항아리의 손잡이를, 다른 한 손으로 카프탄의 끝자락을 들어 올리더니 중심을 잡으며 천천히 항아리를 내려놓았다. 찰랑이는 물소리가 들렸지만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이다이라는 평소와 다를 것 없이 침착했고, 사르다르는 엉망으로 꼬인 노나임을 떠올렸다.

 “안녕, 이다이라.”

 사르다르가 인사했다.

 “안녕, 사르다르.”

 이다이라는 사르다르를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어서.”

 어쨌든 자드나가 사르다르에게 충고하는 대부분의 일은 들어맞는다. 관계에 관한 문제라면 말할 것도 없다. 사르다르는 돌아서는 이다이라에게 나중에 보자고 대답했다. 이다이라의 옷자락이 모래에 끌려 희미한 흔적을 남기고 있었고, 사르다르는 그것을 쫓는 대신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떠들썩하던 소문은 금방 잠잠해졌다. 아이들은 평상시처럼 맥 빠진 표정으로 “어, 그래. 난 이다이라를 좋아하지.”라고 대답하는 사르다르에게 오히려 질린 표정을 지었다. 누군가를 좋아하다가 그만두는 건 흔하게 벌어지는 일이었으므로 아이들은 이다이라에 대한 사르다르의 기호가 그의 표정처럼 흐지부지 되었다고 결론 내렸다. 이다이라와 나란히 서있기만 해도 엄숙한 얼굴로 사르다르의 표정을 감시하던 마지막 아이까지 뿔뿔이 흩어지자, 사르다르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이다이라에게 말했다. “끝난 모양이야.”

 그 뒤에도 사르다르와 이다이라는 예전과 다를 것 없이 지냈다. 어느 순간에는 이다이라조차 사르다르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 같았다. 구만 구천 걸음의 날에도 다를 바는 없었다. 마주쳤을 때에도 처음 만났을 때처럼, 혹은 거절하고 거절받은 날처럼, 혹은 그 뒤의 나날들처럼 “안녕”하고 서로 인사를 건넸다. 이다이라는 물 항아리 대신 짐을 이고 있었고, 그녀가 걸어온 길에는 옷에 끌린 모래 위에 희미한 흔적이 남아있었다. 두 사람은 보따리 틈에 짐을 끼워놓고 탑을 쌓기 위해 오아시스를 빙 돌았다. 호수를 반 바퀴쯤 돌았을 때 이다이라가 걸음을 멈추었다. “저게 뭐지?”하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더니 경사진 길을 매끄러운 자세로 내려갔다.

 이다이라가 발견한 것은 오아시스 가장자리 한 구석의 움푹 파인 발자국이었다. 그 일대에 뿌옇게 흙이 올라와 수면이 자욱했다. 누군가가 삶을 걸고 마음을 빼앗기게 될 얼굴에 대한 질문을 던지다 말고 포기해버린 흔적이었다. 뒤따라 내려온 사르다르는 발자국을 살폈으나 오르막길에서 느닷없이 뚝 끊어져 시선으로는 추적할 수가 없었다. 사르다르는 이다이라에게 주술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봤을까?”

 이다이라는 무릎을 접고 앉아 심각하게 수면을 들여다보았다.

 “음, 흙이 가라앉기 전에 떠났으니까 못 봤을 걸.”

 “우리 소리를 들었나봐.” 이다이라가 진지하게 의견을 내놓았다. “누군가 깨어있으니까 어차피 못 볼 거라고 생각했던 게 아닐까.”

 사르다르는 이다이라의 옆에 서서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흙이 가라앉고 있었다. 수면이 점점 투명해지는 동안 바람이 불었다. 물 위로 부서지는 수십 개의 빛들이 찰랑이며 땅과 부딪쳐 흩어졌다. 이다이라처럼 마음을 편안하고 충만하게 하는 적요한 평화였다. 사르다르는 깨끗한 수면 위로 떠오른 이다이라의 얼굴을 보았다. 이다이라의 보랏빛 눈이 스스로를 바라보다 말고 사르다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순간 움찔거렸다. 이다이라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가자.”

 사르다르는 뽀얗게 먼지가 묻은 이다이라의 카프탄 끝자락을 내려다보면서 대답했다.

 “그래.”

 화들짝 놀라거나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해야하나? 그건 어쩐지 이다이라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다. 모래 위 희미한 한 줄기의 자국처럼 남아서 사르다르를 그 안으로 이끄는 것이 있다. 마음을 어떠한 태도로 다루고 말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라면 이다이라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걸어들어간다면 좋을 것이다. 탑을 쌓고 집으로 돌아가서 노나임을 짜야겠다고 사르다르는 생각했다. 꼬인 실을 풀고 원래 계획했던 문양을 짜 넣는 일이다. 그 문양을 포기하겠다고 생각한 적 없었다. 그는 실을 끊지 않았다.

2020/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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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에 선 뼈 «르샤흐 리퀘스트»
1차/new 2020. 4. 15. 00:58

 사르다르의 가장 오래된 기억은 이렇게 시작한다. 영리하구나. 그런 뒤에는 그의 머리를 차례로 쓰다듬는 손이 있다. 키가 장대만한 어른들의 얼굴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무슨 일로 칭찬을 받고 있었는지도 희미해져, 지금은 단지 그 순간의 의문만이 남아있다. 영리하다니. 무엇에 대한?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페네쿠스의 할라는 아이들을 잘 돌보고, 잿빛 실타래의 라이한은 누구나 만족시킬 맛좋은 요리를 한다. 곧은 물병자리의 타드나는 놀라운 솜씨로 장신구를 엮고, 바람거미의 테르마는 아름다운 바구니를 만들 수 있다. 사르다르가 생각하고 판단하기로 마을에는 영리한 아이들이 많다.

 

 그는 자신이 영리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르다르는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그는 방의 모서리에 서있었고, 그 때문에 시야가 넓었다. 좌측에는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 마니와 그 옆에서 작고 반질거리는 돌(아까 마니가 빨고 있던 것이다)을 쥐고 흔드는 슈슈카, 모닥불이 놓인 우측에는 갓난아이에게 우유를 먹이는 종려나무의 제드냐와 그녀의 무릎에 매달린 아브틴, 아슬람, 아즈바바가 있다. 각각의 사건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공간적 개념으로 파악되어, 사르다르는 동시에 많은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집안에서 곧바로 르샤흐의 모습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가 시야를 반쯤 가리는 바구니를 끙끙 들어 옮기는 동안, 르샤흐는 그 호리호리하고 큰 키로 누구보다 빠르게 이 간단한 일을 해치우고는 종적을 감추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이런 일은 드물지 않았다. 이전에도 사르다르는 르샤흐와 함께 일을 한 적이 있었다. 웃어른들에게 특히 눈길을 받는 아이였던 그는, 또한 마찬가지의 사정이던 사르다르와 결국 팀으로 묶이게 되었다. 이 시기에 어른들은 두 사람이 얼마큼의 일을 해내는지 한 번 확인해보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 뒤로 두 사람이 묶이는 일은 줄어들었고, 이제는 노인 곁에서 돌아가며 육아를 맡을 때나 순번이 겹쳐 만나는 식이었다. 다른 아이들에게 그러하듯, 사르다르는 르샤흐에게도 특별히 악감정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르샤흐가 남겨놓았던 것─제대로 엮이지 않은 바구니와 곡식을 흘린 항아리, 놓쳐버린 꿩의 발자국과 굳이 가까이 있을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사르다르는 서툰 아이를 보조하는 일에는 불만이 없었으나, 르샤흐가 그런 아이가 아니라는 건 마아가도 아실 일이다.

 

 밖으로 나온 사르다르는 아직 모래가 따뜻한 오아시스 근방에서 르샤흐를 찾아냈다. 그는 종려나무 아래에 등을 보이고 앉아있었다. 그늘이 더는 필요 없는 시간, 그늘이 사라진 장소에서, 르샤흐는 남은 시간을 보내기로 마음먹은 것 같았다. 뒷모습이 뻔뻔할 만큼 느긋했다.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그에게 다가가는 사르다르의 마음도 무척이나 평온했다. 두 사람 간의 거리가 충분히 좁혀지기도 전에 르샤흐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발소리로 사르다르를 알아차린 것이다. 그는 노란 눈을 가늘게 뜨더니, 평소의 얼굴로 돌아가서 “사르다르”하고 불렀다. 사르다르는 르샤흐 앞에 멈추어 섰다. 그를 이런 식으로 내려다보는 건 처음이었다.

 “돌아가자.”

 사르다르가 말했다.

 “응.”

 르샤흐는 대답하더니 벌렁 누웠다.

 사르다르는 그가 말을 듣지 않는 새끼 양처럼 느껴졌다. 무리를 빠져나온 짐승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사르다르는 그들을 안아 올린 뒤 억지로 무리에 데려다놓고는 했다. 하지만 르샤흐를 안아 올리기엔 너무 무겁다. 그렇군, 그는 새끼 양은 아니다.

 사르다르는 르샤흐에게 손을 내밀었다.

 “일하고 싶지 않구나. 하지만 해야만 해.”

 “맞아, 큰일이야.”

 “네 일을 대신 해주지는 않을 거야. 마을의 규칙이 아니야.”

 “속옷은 모두 정리되었고, 당장은 내가 필요하지 않잖아.”

 르샤흐는 이제 눈을 감고 있었다. 사르다르는 화가 난 척을 할지 고민했다. 그럼 르샤흐는 마지못해 일어날 것이다. 모래를 털고 비척거리며 따라나설 것이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바람이 사구를 옮기듯 어느 순간이 오면 그는 또다시 사라질 것이다. 때로 사르다르는 르샤흐가 언젠가 사막을 건너가 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어떤 아이들은 이따금 그와 같이 권태감을 갖고 있었다.

 정신이 다른 곳에 있거나 마음을 묶어두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을 잡아놓는 건 마을에 있지만 마을에 없다고 믿어지는 것들인 듯했다. 큰 단위의 숫자(이스니야에는 큰 계산이 필요치 않았고), 그를 이용한 계산(노인들은 대부분 간단한 셈을 가르쳤다), 별이 사라지고 나타나는 시기(음, 이건 중요하지), 매어놓고 다음 교역을 기다리는 낙타들(하지만 이스니야로 돌아올 짐승들). 더 넓은 세상이라는 지표들(그래, 결국 여기다). 저 멀리 있다고 믿어지는 것들. 사르다르는 그런 아이들을 반드시 찾아내서 결국 데리고 돌아오곤 했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찾을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럴 수도 있다. 얼마나 떠나게 될까? 얼마나 돌아오게 될까? 사르다르는 눈을 감고 누워있는 르샤흐의 얼굴을 거꾸로 내려다보면서 무릎을 굽혔다.

 “르샤흐. 여긴 재미없어?”

 르샤흐가 눈을 떴고, 사르다르는 흠, 하고 말을 이었다.

 “나도 재미있어서 하는 건 아니야. 해야 해서 하는 것뿐이지.”

 “재미없어?”

 “그래.”

 르샤흐가 몸을 일으켜 앉았다. 모래를 털면서 사르다르에게 물었다.

 “그럼 뭐가 재미있는데?”

 사르다르는 르샤흐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그네이의 불평, 네가 만든 이야기.”

 르샤흐가 사르다르의 손을 잡았다. 사르다르는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시하브의 계산, 주술사 바르바의 별 읽기, 음. 네가 모래에 써놓고 떠난 문제를 고민해보는 것도 재밌어.”

 사르다르는 르샤흐가 손을 붙잡고 일어서는 것을 도왔다.

 “몇 갠 어렵더라. 오아시스 가장자리의 깊이를 계산하는 거 말이야.”

 거기까지 이야기한 사르다르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쓸모없는 걸 만들지?”

 르샤흐가 사르다르를 쳐다봤다.

 모래 위에 남겨진 숫자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는 아이들이 사르다르 말고도 몇몇은 더 있을 것이다. 그걸 풀 수 있는 아이들 역시 드물지만 사르다르 말고도 몇몇은 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을에 필요한 건 아니다. 이건 영리함을 판단하는 일과 연결된다. 사르다르는 어느 순간에는 생각을 멈추고 손을 움직인다.

 그는 자신이 영리한 아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손해 보는 건 싫고 복잡한 일에는 발을 빼고 싶었으니까. 어른들은 경작하고 재배하고 보살피고 만든 것을 나누고 음식이 생기면 어떻게든 이웃집을 돌아다녔지만 사르다르는 가끔 자신만의 것을 갖고 싶었고 애써 찾은 건 혼자 누리고 싶었다. 그 역시도 모래 위에 때로 무용한 걸 쓰곤 했었다. 아주 어릴 때의 일이고, 더는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졌다.

 “재미있는 건 쓸모없는 거야?”

 르샤흐가 악의 없이 되물었다. 사르다르는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음….”

 꽤 오랜 시간을 질질 끌다가 대답했다.

 “고민해본 적 없어. 그건 다음에 대답할게.”

 르샤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이제 가야해.”

 주변이 어두웠고, 바람집으로부터 어렴풋한 불빛이 보였다. 사르다르가 앞장섰고 르샤흐가 털레털레 따라갔다. 보폭을 금방 따라잡혔지만 르샤흐는 늘 그렇듯 서두를 생각이 없어보였다. 두 사람은 지평선을 등지고 나란히 걸었고, 바람집에 도착하자마자 자연스럽게 각자 자리로 돌아갔다. 놓고 떠났던 바구니를 들면서, 사르다르는 르샤흐가 이번에는 얼마큼의 일을 해내고 홀연히 사라질지 궁금했다. 언젠가는 이스니야를 벗어나나. 결국 모래 위에 쓰인 질문들이 아이들을 이끌게 되나. 르샤흐를 이끌어 도르시트로, 혹은 그 너머로 데려다놓을까. 사르다르는 확신하지 않는다. 질문하기보다 규칙과 분위기에 따른 지 오래 되었다. 그것이 유용하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유용하다는 건 대강 비위를 맞추고 얻는 한 번의 이득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이익이 되는 것을 말한다.

 쉽게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것, 굶주리지 않아도 되는 것, 슬프지 않은 것, 마주보며 웃거나 손뼉을 맞출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사르다르만이 아니라 모두의 사항이었다. 이스니야에서 가장 흔하게 나눔 되는 건 즉물적인 게 아니라 추상적인 것이다. 사르다르 역시도 가까운 누군가의 슬픔을 위해 고개를 숙이거나 손등을 매만지는 일에 기꺼웠다. 그런 건 아깝지 않았다. 사르다르는 그것이야말로 유용함이고 영리함이라 믿었다.

 ‘오늘 정말 쓸모없는 소릴 많이 했네.’

 하지만 이번에도 질문은 남았다. 르샤흐가 사르다르의 발밑에 남겨놓았으니 그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무용한가? 그건 좀 더 지켜봐야 한다. 그가 모래 위에 남겨두곤 했던 다른 질문들처럼.

 바구니를 내려놓은 르샤흐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2019/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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