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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화 «1-4»
1차/old 2019. 10. 30. 01:19

1.

기억하기로 그 날은 수요일이었다. 날씨가 좋았을 것이다. 찬락은 창가자리에서 졸고 있었다. 점심시간엔 아무래도 그 자리가 제일 볕이 잘 드는 것 같았다. 바람이 잘 불고 커튼이 들썩여서 찬락의 몸은 성공적으로 가려져 있었다. 아무도 깨우지 않았던 건 그 탓인지도 모른다. 축구에도 불려가지 않았고 식후땡 모임에도 소환되지 않았다. 완전 혼자였다.

햇빛이 기울어질 무렵에 누군가 공을 던지기 시작했고 소리가 계속됐다. 찬락은 뒤척였다. 들썩이다가 한 번 움찔거렸다. 그러다 깼다. 고개를 돌리니 노란 꽃이 눈에 들어왔다. 창가에 누군가 개나리를 잘라 놓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개나리는 아무데서나 심어도 잘 자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찬락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테니스부가 줄지어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게 체육복을 갖춰 입고 테니스 체를 흔들면서 일렬로 선 무리를 보고 있자니 하품이 나왔다. 키 큰 애, 마른 애, 작고 통통한 애,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애, 체육복이 큰 애…… 눈으로 훑다가 아는 얼굴을 보았다. 같은 반 애였다. 반장? 부반장? 아니다, 서기? 음 그냥 아무것도 아닌 애였을 지도. 어쨌든 예뻤다. 그래서 계속 봤다.

찬락 안의 테니스는 펄쩍 뛰어오른 후 공을 내려치는 작업이다. 그러니까 김찬락은 서브밖에 모르는 애송이였던 셈이다. 여자애는 뛰어 올랐고, 한순간 머물렀고, 내리쳤다. 하지만 찬락이 상상 속에서 기대한 파워의 서브는 아니었다. 공은 벤치를 맞고 부원들의 발치로 굴러왔다. 여자애가 공쪽으로 허리를 굽혔을 때, 찬락은 개나리를 쥐고 들어올렸다. 그리고 타이밍에 맞춰 개나리를 마구 흔들었다. 꽃잎이 우수수 3층 높이에서 추락하고 있었고 그것은 찬락의 상상 속에서 제법 드라마틱하고 멋진 이미지로 치환됐다. 여자애는 반응이 없었다. 조금 보다가 고개를 돌리곤 자리로 돌아갔다. 싱거운 엔딩이었다.

“차였네.”

대수롭지 않은 실패였으므로 찬락 역시 자신의 세계로 돌아갔다. 책상으로 돌아와 엎드렸다. 눈을 감았다. 공이 튀겨 솟구치는 소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손쉽게 잠이 몰려왔다. 개나리가 시들어가고 있었다. 딱 점심시간까지만 살아있었다. 꽃은 자는 동안 죽었다.

 

2.

김찬락의 집은 매 달 집안모임이 있다. 장소로는 주로 레스토랑이나 호텔을 잡았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강제적으로 참석해 집안어른들의 덕담을 듣는다. 이야기는 뻔했다.

“성적 좀 신경 써라.”

“쟤 요즘 공부 안 해.”

“네 사촌 좀 본받아.”

“한심하게 살지 마라.”

그러니까 잘 살기 위해 쌓아야 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세상은 아직 고리타분해서 고학력과 스펙, 영어 점수를 가지고 있으면 무엇이든 되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어르신의 이야기를 종합해보자면 그랬다. 실제로 그렇게 자라온 어른들이 레스토랑과 호텔에 거리낌 없이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카드를 긁고 있으니 그 말은 제법 신빙성이 있었다. 부모들은 말했다. 비싼 곳에서 질 좋은 음식에 돈을 지불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행복이야. 그런 것 같아요. 부드러운 고기를 목구멍으로 넘기는 동안엔 찬락 역시 순순히 납득했다. 자본, 을 발음하는 일은 달콤하고 편안하고 부드럽고 푹신푹신한 느낌을 줬다. 언젠가는 그것을 위해 무언가를 포기하게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찬락은 생각했다. 자유? 오토바이? 무엇이 됐든 지금 당장의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좀 더 놀아도 괜찮았다.

 

3.

64가 등 뒤에 매달려 있다. 김찬락은 오토바이를 몰고 쏜살같이 내달린다. 더 빨리 가야해, 더 빨리, 아니야, 그만해 나 무서워. 뒷자리에 앉힌 64가 중얼거릴 때까지 풍경은 자꾸만 뭉개지고 있었다. 찬락은 오토바이를 멈추고 길가에 세웠다.

“야, 미쳤어! 나 죽는 줄 알았어.”

64는 오토바이에서 내리자마자 찬락의 등을 마구 쳤다. 가까이 다가온 64에게선 향수 냄새가 진하게 났다.

“어디 꺼야?”

찬락이 64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쥐고 인중까지 들어올렸다. 64는 몸을 움츠렸다.

“걍 로드샵에서 샀는데.”

“얼만데?”

“왜, 사주게?”

“미쳤냐, 내가 왜?”

찬락이 낄낄거렸다.

“걍 물어본 거야.”

“난 또 사주려는 줄 알았지.”

64는 입을 삐죽였다.

“너 완전 돈 많아 보여.”

“왜?”

“오토바이 가지고 있잖아.”

“내 거 아니고 빌린 거야.”

“그렇구나.”

“그렇지.”

술기운이 올라오고 있었다. 둘은 오토바이에 오르기 전 소주 한 병을 반씩 나눠 마셨다. 새벽 두 시엔 도로가 비어서 아무렇게나 달려도 괜찮았다. 찬락은 눈을 깜빡였다. 가드레일 너머로 줄지어 선 가로등이 겹쳐졌다가 흐릿해지며 마구 뭉개졌다. 주황빛들은 모든 감각이 마구 뒤섞이고 있다는 경고등처럼 보이기도 했다. 찬락은 향수냄새 속에서 64의 얼굴을 찾아냈다. 찾아내서, 붙잡았다. 끌어당겨서 입을 맞췄다. 64가 웃으며 더듬더듬 찬락의 팔 안쪽을 뒤졌다. 줄기가 똑, 하고 꺾였다. 향수 때문에 베고니아에서 아무 냄새도 맡지 못 했다.

“집까지 데려다 줘.”

“그럼 다시 타.”

둘은 동네를 빙 둘러 아파트 단지 사거리까지 오토바이를 몰았다. 64가 찬락 등을 자꾸 밀었다. 찬락아, 아무도 태우면 안 돼. 왜? 이제부터 여기 내 자리야, 알겠지? 찬락은 대답을 내뱉는 대신 삼켰다. 그게 될까? 얼마 후 64는 57로 바뀌었다. 헤어질 때 64는 베고니아를 도로에 버렸다.

 

4.

최유현은 오른쪽에 앉아 있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유현은 잠깐 표정을 굳히고 있었는데, 곧 이어 반달처럼 눈을 접었다.

“또 같은 반이라니 신기하고 질린다.”

“농담인 거 알지?”

찬락은 최유현의 표정이 상냥함으로 빽빽해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질릴 리가 있냐. 잘생긴 나한테.”

그렇게 대꾸한 후 자리에 앉았다. 교실 앞에는 훈화가 붙어 있었다. 어디가 끝일까, 너희들의 잠재력. 제법 비장한 감탄사였다. 하지만 잠재력에도 끝이 있다면 그것은 잠재력이 아니지 않은가.

“방학엔 뭐했어?”

“나야 뭐 똑같지. 술 까고 학원 재끼고.”

“김찬락 그러다 진짜 훅 간다.”

“야, 설마 죽기야 하겠어.”

둘은 방학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지난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에 대해서다. 꽃이 피지 않는 계절에 찬락은 오토바이를 몰았고 유현은 선행학습을 했다. 그것을 찬락은 능청스럽게, 유현은 사무적으로 늘어놓았다. 매번 똑같았다. 김찬락은 놀고, 최유현은 공부한다. 김찬락은 튀기 위해 노력하고 최유현은 돋보인다. 그러니까, 그런 이야기다.

“너 어제 또 오토바이 탔지?”

“어떻게 알았냐.”

“어제 봤어.”

“하긴 내가 좀 까리하게 동네를 쏘다니긴 했어, 그렇지?”

“착각도 병이래, 찬락아.”

유현은 조금 웃었다. 백만불짜리 미소고 빽빽하게 상냥함으로 무장되어 있다. 누구나 상냥한 것을 좋아한다. 지난 몇 년간 찬락은 제법 가까운 곳에서 남자애들이 종종 최유현에게 고백하거나 치근덕대는 걸 보았다. 한 때는 찬락도 그 무리에 끼어 있었다. 중학교 1학년 때였고 아마 수요일이었고 날씨가 좋았을 즈음의 일이다. 테니스를 치던 최유현은 예뻤다. 정말로, 예뻤다.

“너 앞으로도 계속 공부하는 거냐.”

“응, 그렇겠지…….”

“진짜 내 주변에서 공부 열심히 하는 애 최유현 밖에 없다.”

“나도 내 주변에서 막 나가는 애 너밖에 없어.”

“그래?”

이번엔 찬락이 웃었다.

“그거 존나 까리하네.”

언젠가 찬락은 도로를 달리다 말고 신호 앞에서 유현과 마주친 적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 하고 눈을 둥그렇게 뜬 유현을 보고 뒷자리에 앉은 70이 물었다. 누구야? 찬락은 시동을 걸었다. 부러 크게 오토바이의 배기음 소리를 높이자 김찬락은 도로에서 제일 시끄러운 존재가 됐다. 내 친구야. 찬락은 소리를 질렀다. 야, 쟤 완전 모범생이야. 존나 까리하지? 내 친구다! 그 날은 아주 빠르게 너무 많이 달렸고 집에 돌아와 볼기짝을 얻어맞았다. 네 친구 좀 닮아라! 험상궂게 일그러진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김찬락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유현하고 저는 진짜 완전 종족부터가 다르다니까요. 걘 진짜 모범생의 표본이고요, 저는

그러니까 대충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뒷좌석에 앉힐 여자애는 매번 바뀌었다. 67일 때도 있고 71일 때도 있고 혹은 65거나 64거나 했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릴 때마다 여자애가 허리를 감아주는 게 좋았다. 술을 마시고 된소리 심한 욕을 내뱉으며 폼을 잡으면 베고니아가 피었다. 그런 게 멋있다고 생각하는 여자애들은 그런 것들 앞에서 꽃을 피워줬다. 많은 꽃을 꺾어보고 피워보고 버려보았다. 종종 김찬락의 꽃도 피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꺾거나 피우거나 버리거나 했을 것이며 64가 버린 베고니아는 도로에 짓눌려 시들어 버렸을 것이다. 김찬락은 묻고 싶었다. 왜 하필 베고니아인지. 여자애들 이름은 왜 그렇게 하나같이 비슷한 것처럼 느껴지는지. 사랑은 왜 그딴 줄기식물처럼 탄생하고 죽어버리는지. 최유현은 중학교 1학년 겨울방학 무렵 테니스를 그만뒀다. 그리곤 다시는 서브를 치지 않았다. 부상 때문이라고 하며 유현은 준비된 웃음을 지었다. 비가 오면 아직도 거기가 막 쑤신다니까. 유현의 미소는 각오한 사람의 결과물처럼 보였고 상냥함으로 빽빽해 파고들 기미가 없었다. 찬락은 그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네가 원한다면 언제든 내 뒷자리에 태워줄게.”

최유현은 눈가를 찡그렸다.

“거긴 네 여친들만 태우는 걸로 해.”

하지만 최유현이 정말 김찬락의 뒷자리에 탄다한들 그 애가 68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최유현은 최유현으로 남는다. 비가 올 때마다 쑤신다는 유현의 왼팔로는 찬락의 허리를 단단하게 감을 수 없다. 그러니까 찬락은 유현을 태운다한들 최고 속력으로 세상을 보여줄 수는 없을 것이다. 게다가 찬락은 한 번 차였다. 한 번? 두 번? 셀 수 없다. 꽃은 시들었다. 딱 점심시간까지만 살아있었다. 꽃봉오리들은 자는 동안 죽었다. 베고니아도 아니었다. 아무데서나 잘 자랄 수 있는데도. 아무데서나 잘 자랄 수 있었는데도. 아무데서나 잘 자랄 자신이 있었는데도.

“김찬락, 일어나. 수업 시작한다.”

“나 잘 거니까 깨우지 마.”

“수업 좀 듣지.”

“시끄러워.”

최유현, 이라고 발음하는 건 자본, 이라고 발음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을 줬다. 편안하고 안락한 세계에 소속된 존재들은 다 그런 느낌을 주는 모양이었다. 언젠가 최유현은 그 세계로 완전하게 떠날 것이고 김찬락은 몇 가지를 포기하게 될 것이다. 이를테면 자유. 이를테면 오토바이. 이를테면 무수한 64들과 71들과…… 그것이 아쉽다면 좋을 텐데. 아쉽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수업종이 친다. 김찬락은 눈을 감는다. 잠에 빠진다. 좀 더 막 살아도 괜찮을 것 같으니 좀 더 이렇게 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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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밤 «허공의 사나이»
1차/old 2019. 10. 30. 01:18

 1.
 최진명이 교사가 된 것은 그녀가 스물아홉이 되던 봄의 일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진명은 선배들이 운운하던 첫 발령지의 불운-“첫 발령지에 좋은 학교에 가는 건 글러먹은 일이다”-에 대해 고려해본 적이 없었다. 당시 진명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좋은 학교는 학생과 교사가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이후 진명은 일산 변두리에 위치한 공장 단지 부근의 남자 고등학교(학교폭력 문제로 빈번이 시끄럽던 학교였다)로 첫 발령을 받게 되는데, 이로써 선배들이 말한 첫 발령지의 불운은 어느 정도 증명이 된 셈이다. 훗날 동료 교사는 그녀의 발령지를 두고 “그곳은 최악의 공간이었다.” 라 말하기도 했다. 당시 임산부였던 진명의 건강을 염려한 남편 이준호 씨는 그녀에게 공기청정기를 선물했는데, 이를 두고 최진명은 ‘정말 바보 같은 짓’이라 생각했다고 한다. 그녀가 걱정한 것은 일산 공단의 탁한 공기가 아니라 음울한 학교의 분위기였다. 발령지에 근무하기 시작한 진명은 일기장에 자주 이런 문장을 썼다. ‘나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몇 달 뒤 최진명은 한 언론 사이트에 인터뷰를 요청했고, 포털 사이트에서 몰매를 맞으며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게 된다. 동료 교사는 교직에 있던 시절 진명이 불안 증세를 자주 보였다고 증언했다.
 남편 이준호는 그녀의 사건이 공론화되기 전까지 그녀가 겪고 있던 성희롱과 성추행에 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진술했지만, 그녀의 일기장이 수면 위로 떠오르자 이내 진술을 번복하고 일부 사태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고 시인했다. 그가 부인한 일기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선배는 나를 방치하고 있다.’ ‘선배가 나를 바닥에 밀치고 고함을 질렀을 때, 나는 이 남자 앞에서 다시는 울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준호 씨는 진명이 교직을 그만 둔 6월 진명으로부터 이혼 통보를 받았다.)
 자세한 내막은 알 수 없으나 진명의 교직 생활이 그녀의 유산에 치명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학교 폭력의 피해자였던 P모군은 진명이 자신을 도우려다 일이 잘못된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 애들은 수업 시간이면 선생님에게 그렇게 하고, 쉬는 시간이면 나한테 그렇게 했어요. 선생님이 하지 말라고만 하니까 애들이 재미있다고 더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다 더러운 말들이죠. 난 주먹으로 두들겨 맞았지만 선생님은 말로 두들겨 맞은 거예요.” 당시 인터넷을 떠돌던 영상 안에서, 진명은 집단 린치를 당하고 있던 P모군에게 달려가다 말고 한 학생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 이후 영상은 끊어졌다가 편집된 장면부터 이어지는데, 그녀가 린치의 주동자 학생으로 추측되는 검은색 파카의 뺨을 강하게 내려치는 장면은 각종 커뮤니티 내에 캡처 화면으로 올라가 다음과 같은 제목이 붙었다. ‘대한민국 학생 인권의 현실.’ 모자이크 처리된 진명의 얼굴은 SNS 내에서 신상 털이로 이어졌으며, 진명은 두 달 동안 총 세 차례 휴대폰을 교체해야만 했다. 그녀는 우울증과 함께 불면증에 시달렸는데, 당시 진명이 쓴 일기장의 내용을 보면 환청에도 시달리고 있었던 듯하다. 다음은 일기의 전문이다. ‘밤마다 내 휴대폰으로 카톡과 문자가 밀려드는 상상을 한다. 나는 그들을 모르지만 그들은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눈치다. 휴대폰을 바꾸었지만, 그런 문자와 카톡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오늘 받은 문자에서 34로 시작하는 번호는 나를 여전히 기억하고 있다고 협박했다. 어떤 문자들은 현실로 튀어나오기도 한다. 몇 주 전에는 웬 어린 학생들이 문을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 웃음을 터뜨렸다. 삼십분 동안 두려움에 떨었다. 선배에게 전화했지만 받지 않았다.’ 학교 측은 진명이 받은 모든 정신적 물리적 피해를 부정했다. “교사 하나의 문제를 들고 저희 측에 뭘 요구하시면 저희도 곤란합니다……(이하 생략) 애들이 가해자라니요. 보복성 린치죠. 학교 폭력 운운하면서 한 아일 과하게 감싸주니까 사태가 커진 겁니다. 듣자하니 가해자 학생들을 대놓고 차별하기도 했다더군요. 수업 시간에 질문해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고.” 학교 측은 실제로 사건이 공론화 되자 가장 먼저 나서 비슷한 진술의 인터뷰를 수차례 한 전적이 있다. 왜곡된 기사가 포털 사이트에 올라가자 누리꾼들은 득달같이 달려들어 그녀를 물어뜯었다. 가해자 학생 측과 학교 측은 사건을 은폐하고자 동영상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카페와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동영상(문제의 2분 21초)캡처본이 떠돌아 다녔고 여론은 분노로 물들었다. 교사로부터 학교 폭력을 경험했다는 피해자 학생들의 회고록이 이어지며 댓글 창은 눈물바다가 되었다. 모 SNS 상에는 해시태그를 이용한 학교 폭력 근절 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들은 하나같이 진명의 행동을 지탄하고 있었다. 몇 달 후 한 케이블이 짧게 교사 최진명과 학교 내에서 벌어졌던 성희롱과 학교 폭력에 대한 진상 규명을 다루었고 두 차례의 정정 기사가 떴지만, 며칠 후 터진 연예인 세금 비리로 인해 큰 조명을 받지 못 했다. 교사 최진명을 죽인 사건은 그렇게 잊혀졌다.
 ‘사람의 존재가 아 걔? 로 압축되는 순간, 누군가는 기꺼이 죽을 결심을 할 수 있다.’ (최진명 일기장 발췌) 그 이후의 그녀의 행적에 대해선 알려진 바가 없다. 남편은 진명이 이혼 이후 자신의 연락을 받아주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카카오톡도 안 받고 번호도 자주 바꿔서 연락할 방도가 없었어요.” 아직 진명에게 미련이 남아 있던 진호는 진명의 지인들에게 그녀의 행방을 추적했다고 하는데, 진명의 마지막 바깥 행적은 산부인과에서 끊겨있었다. 진호는 착잡한 목소리로 고했다. “유산이었어요.” 가을, 임신 4개월 차의 일이었다. 그러나 진명이 교단을 내려온 데에는 좀 더 복합적인 이유가 존재했던 것 같다. 최진명 사건에 대한 정정기사가 뜨던 날, 진명은 해당 기사를 일기장에 스크랩한 후 아래에 이렇게 썼다. ‘짐을 정리하던 날 편형이 나를 찾아와 고백했다. 선생님, 죄송해요. 그 동영상 제가 올렸어요. 그 말을 듣는데 무어라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편형이가 엉엉 울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맞을까 봐 무서워서 시키는 대로 올렸다는 그 아이한테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여기서 편형은 학교 폭력 피해자 P모군이다) 각종 기사와 언론 물타기로 몰매를 맞으면서까지 보호하려 들었던 피해자 학생이 자신의 인생을 완전히 망가뜨린 동영상의 최초유포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진명은 자살을 결심하게 된다. 놀랄 만큼 평화로웠다. -고 진명은 당시 심정을 이렇게 서술했다. ‘약을 사기 위해 총 다섯 군데의 약국을 돌아다녔다. 살고 싶다는 생각은 마지막까지 눈곱만큼도 들지 않았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나를 흘끔거리는 것 같았다. 누군가 돌을 던지면, 맞아서 그대로 죽어버려야지. 그런 생각을 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약국을 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진명은 한 전시회장을 보게 된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활동하는 작은 미술의 집이었다. 진명이 그곳을 방문한 것은 충동적인 행동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진명의 생을 연장시키는 계기가 된다. 진명은 전시회장에 걸린 캔버스에서 붉고 아름다운 행성 하나를 목격한다. 호주머니엔 학창시절부터 진명이 즐겨 들고 다니던 워크맨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는 비틀즈의 Let it be가 녹음된 테이프가 있었다. 아름다운 음악과 아름다운 그림만으로 감화되기에 그녀는 너무 지쳐있었지만 진명은 비틀즈가 부르는 “그냥 내버려 두세요”를 들으며 죽음 대신 삶을 선택하기로 결심한다. 진명은 돌아오는 길에 약을 쓰레기통에 쏟아버리고 거실에 앉아 TV를 틀었다. ‘몇 달 만에 듣는 외부의 소리들을 받아들이느라 나는 뉴스 내내 진땀을 뺐다. 어딘가에는 분명 내 이름이 존재할 것 같았는데, 세상은 내게 관심이 없었다. 정치인 둘이 뇌물을 받아먹었다고 한다. 뉴스를 껐을 때 몸은 땀으로 온통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샤워를 했다.’ 진명은 잠깐의 휴식을 취한 뒤 냉장고에서 차가운 우유를 쉬지 않고 마셨다. 차가운 기운은 진명의 곤두선 기운을 조금 달래주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던 진명은 다시 TV앞으로 돌아와 쉬지 않고 채널을 돌아가며 모든 방송을 시청한다. 멈출 수 없었고 멈춰서도 안 되었다. 진명의 모든 트라우마가 그곳에 있었고 마침내 진명은 다시 그것을 마주했기에 버릴 수 없었다. 진명은 그렇게 며칠 내내 TV앞에 매달려 모든 채널과 방송을 섭렵한다. ‘놀랍게도 세상은 나에게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었다. 살아남으면 잊혀 질 권리를 얻는 것인가를 고민했다. 내가 돌에 맞았다는 것조차 잊은 그들은 저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건배를 하고 세상사를 읊고 웃고 떠들고 사랑하고 증오한다. 정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다.’ 무감한 세상을 목도하며 진명은 억울함을 느꼈지만 동시에 안도했고, 마침내는 인정했다. ‘나는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세상은 어딘가 잘못되었다.’ 진명의 'Let it be'가 이루어진 순간이었다.
 대규모 화성 이주 프로젝트가 시작된 지 3년 쯤 지났을 무렵 혜성같이 등장한 환상 야구는 당시 진명이 죽음과 생의 경계에서 고민을 거듭할 무렵 대한민국을 강타하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다. 스포츠에 완벽한 문외한이었던 진명이 환상 야구를 접한 것은 순전히 이런 까닭에서였다. 전투적으로 TV채널을 시청하던 진명은 모든 뉴스와 스포츠 채널이 하나의 종목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는데, “지금 화성의 전파 상태가 좋지 않아 화면이 종종 끊어지는 점 양해 부탁드립니다.” 라는 하단의 안내 메시지는 진명이 일전에 마주한 붉고 아름다운 행성 그림 하나를 떠올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허공을 향해 달리는 야구선수의 표정이 클로즈업될 때, 진명은 완전히 그 경기에 매료되어 있었다. 나중에 밝혀진 것이지만 그는 환상야구 시즌제 리그에서 명장면으로 손꼽히는 장면 중 하나인 ‘허공의 사나이’를 종종 연출하기로 유명한 환상야구단 프로 선수였고, 이 장면은 진명이 화성 여행을 가기로 결심하는 아주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환상 야구는 분명 보통 야구와는 다르다. 장면 하나하나를 보기에도 이를 그냥 야구라고만 명명하기엔 크나큰 실례다. 사람들은 분명 그래서 환상, 이라는 말을 붙였겠지. 중력과 맞서 날아오르는 청년들이 느릿느릿 던져지는 공을 쫓는다. 그들은 경기장 일부에 도달해선 또다시 뒤바뀐 중력 때문에 쏜살같이 튀어나갈 공의 운명을 알면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허공의 마임을 향해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날린다. 아무도 그들을 우습다고 말하지 않는다. 환상야구란, 단단하고 작은 무언가를 위해 자신을 짓누르는 힘과 끊임없이 싸우는 모든 삶들의 대변이다.’ 경기가 끝나자 진명은 컴퓨터 앞으로 기어가 환상 야구 시즌별 경기 날짜를 확인한 후 여행 일정을 짰다. 화성 급행열차 티켓은 왕복 130만원이었다. 미국 비행기 왕복 표 값이군, 진명은 결제 버튼을 누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2.
 경기도 양평에 위치한 지구 정류장으로 떠나는 날 진명은 전 남편 이준호에게 전화를 건다. 오 개월만의 일이었다. “선배, 나 좀 양평까지 태워주라.” 그는 깜짝 놀라 “어디를 데려다 달라고?” 라고 되물었지만 진명은 두 번 대답하지 않았다. 한겨울을 관통하던 날씨는 산속에 도착했을 때 절정에 치달았다. 벌벌 떨며 발가락을 오므리는 진명의 하이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준호는 “신발 줄까?” 하고 머리를 긁적였다. “담배나 한 갑 주라.” 진명은 대답했다. “네가 담배도 폈니?” “그렇게 되었어.” 진호는 근처 편의점까지 직접 뛰어 담배 한 보루를 사왔지만, 진명은 한 갑만 받아들고 트렁크에서 캐리어를 내렸다. “진명아, 연락해!” 다시 대학 선배로 되돌아 온 준호는 진명의 등 뒤에 대고 그렇게 외쳤다. 진명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탑승 수속을 마치고 있을 무렵 진명은 문득 담배가 피우고 싶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아무 것도 해낼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나는 유산 이후 베란다에서 내내 담배를 피웠다. 그러니 지금 여기서 연기를 마셨다간 빼도 박도 못 하게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내가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진명은 일기에 짧게 기록한 뒤 기둥 근처 의자에 늘어졌고, 핸드백에서 시집을 꺼내들었다. 우울을 달래기 위해 최진명이 삶을 거치는 동안 발굴한 몇 가지 방법이 있다면 하나는 흡연이었고 하나는 시집을 소리 내어 읽는 것이었다. 하지만 주변엔 사람이 너무나도 많았기 때문에 진명은 그냥 마음으로 문장을 새겨 넣기로 결심했다. 그 애는/우리, 라는 말을 저 멀리 밀쳐놓았다/죽지 못해 사는 그 애의 하루하루가/죽음을 능가하고 있었다……. 시는 아름다웠고 삶은 계속되는 중이었다. 히터 바람 때문에 어느 순간부터 진명은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머리 위로 말을 건 누군가가 없었다면 진명은 바닥에 엎어졌을 지도 모르는 노릇이다.
 “그런 시를 놔두고 졸고 계시다니요.”
 졸음에서 벗어난 진명이 고개를 드니 거기엔 한 명의 청년이 있었다. 마스크를 끼고 있었고 눈매는 담백했다. 끼고 있는 안경테는 얇았다. 진명은 벌어진 다리를 오므리곤 옷매무새를 갈무리했고 어색하게 웃었다.
 “……피곤해서요.”
 “이소연 시인 좋죠.”
 청년은 시인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진명은 동의를 표했다.
 “네, 좋죠. 아직 반도 못 읽었지만.”
 “졸고 계셨으니까요.”
 청년의 말에 무안해진 진명이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화성으로 가시나요.”
 “예, 화성 갑니다.”
 진명은 대답하는 청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학생이신가 봐요.”
 “휴학생이에요. 바로 알아보시네요.”
 “그 나이 대는 보통 대학을 다니고 있으니까요.”
 여기까지 말한 진명은, 시선을 내리깔았다가 덧붙였다.
 “사실 교사였거든요.”
 청년은 예리했다.
 “과거형이시네요.”
 “네, 지금은 쉬고 있습니다.”
 “비슷한 처지네요.”
 “네, 비슷한 처지죠.”
 둘은 그 이후에도 시시콜콜한 몇 가지 대화들-시집과 가방에 대한 것-을 주고받았다. 진명은 청년에게 조금의 친밀감을 느꼈고, 청년이 통성명을 제안했을 때 순순히 “최진명 입니다.” 라고 말해주었다.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이제 일어나봐야 해요.”
 아쉬움 없이 진명은 그에게 “열차에서 봬요.” 라 인사했다. 청년 역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는데, 그래서 이 관계는 더욱 깔끔하고 괜찮은 것으로 느껴졌다. 조금 더 시간이 흐른 뒤 둘은 서로의 관계가 이것보다는 좀 더 복잡했음을 알게 되지만 당시 진명은 그 청년의 까만 캔버스 운동화를 보면서도 아무 것도 떠올리지 못 했기 때문에 그를 잡지 않았다. 후에 말하기를, 이 청년이 “배차현”이다.
 화성 행 급행열차가 대기권을 돌파할 때 기차는 아주 심하게 흔들렸다. 진명은 침대 위에 얹어둔 캐리어가 머리 위로 떨어지진 않을까 걱정하느라 아무 것도 하지 못 했다. 열차는 10여분 정도 그렇게 흔들리다가 갑자기 돌변해 완벽하게 평화로워졌다. 궤도를 잡은 열차는 매끄럽게 허공을 유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의 흔들림이 없을 것이란 확신이 서자 진명은 객실 바깥으로 나왔다. 열차 내에는 작은 식당과 편의 시설이 있었다. 커피를 주문한 진명은 창밖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우주를 바라보았다. 아름답고 눈물겨우며 놀랄 만큼 텅 비어있고 동시에 놀랄 만큼 빼곡하게 들어 찬 그 까만 공간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은 진명을 꽤 행복하게 만들었다. ‘이 정도면 괜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지 않아서 지금까지는 다행히도 괜찮았다.’ 진명은 객실에 돌아와 이런 문장을 쓴 뒤, 전 남편에게 받은 담배 한 갑을 들고 흡연실로 향했다. 거기엔 “배차현” 이 있었다.
 “진명 씨, 담배 피우시네요.”
 그렇게 말하며 차현은 우주가 흐르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진명은 연기를 뱉으며 캄캄한 베란다를 떠올렸다.
 “얼마 안 되었어요. 일 년?”
 “초심자시네요.”
 “초심자랄 것까지 있나요.”
 “전 대학 들어가서 폈는데.”
 차현은 씁쓸하게 덧붙였다.
 “이상은 너무 쉽게 무너지네요.”
 진명은 배차현이란 청년이 가진 이상이 무엇일까 고민해보았지만 아무 것도 짐작할 수 없었고 또 시도할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짐작하는 일이 그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녀의 ‘Let it be' 가 알려준 세상사란 아주 단순했다. ‘그냥 내버려 두세요.’ 누군가 집단 린치를 당해도, 누군가 그녀의 엉덩이를 좀 더듬어도, 누군가 그녀를 향해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고 손가락질을 해도 ‘Let it be’ 하다보면 세상은 곧 그녀에게 흥미를 잃었다. 진명은 배차현에게 자신의 ‘Let it be'를 적용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래서 진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원래 이상은 이상으로 남아서 이상인 거고, 그런 거죠.”
 차현은 진명을 보며 담담하고 옅게 웃었고, 대답 대신 담배 연기를 뱉었다. 희미한 시야 속에서 이상하게도 진명은 그 순간 한 학생을 떠올렸는데, 공교롭게도 아주 오래 전의 일이었다. 가물가물했지만 그 애는 아름다운 언어에 감탄하는 재능이 있었다. 그 애가 시를 쓰겠다고 영어 과외를 그만두기 전까지 진명은 주일에 한 번 영시를 소리 내어 읽어주었다. “방금 문장 뭐에요?” 마음에 드는 구절이 있으면 그 애는 꼭 지나치지 않고 진명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이따금 시집을 빌려가기도 했는데, 진명이 마지막으로 읽어주었던 구절은 이것이다. “이 두려움 떠는 침상 위에 / 찬란한 빛이 비치게 하라.” 에밀리 디킨슨의 시였다. 그 애가 그 시집을 빌려간 후 영영 되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진명은 그를 ‘시를 쓰기 위해 홀연히 사라진 이상의 아이’로 종종 회고하곤 했다. 진명이 배차현과 그 애를 연관시킨 건 순전히 그 애가 가진 ‘이상’이 떠올라서였다. 진명은 웃음이 나와 고개를 숙였고 차현은 고개를 기울였다.
 “왜 웃으세요.”
 “그냥…전에 가르치던 제자가 생각이 나서.”
 진명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제자는 그 애 하나뿐이었다. 좋은 기억이었지, 하고 진명은 생각했고, 곧이어 참 좋은 시절이었어, 라고 생각했다. 차현이 “그러고 보니 저도 고1때 영어 과외를 받았었죠.” 라고 하지 않았다면, 그 애는 진명의 오랜 시절 전으로 사라졌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일은 벌어졌고 차현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저 가르치던 쌤이…시를 읽어줬었거든요. 다른 건 몰라도 그래서 시는 되게 기억에 많이 남네요. 시집 빌렸던 거 하나 못 돌려줬었는데 제가 중간에 그만둬서…….” 진중하게 이야기를 듣던 진명의 표정은 시집에 이르러 묘하게 변했다. 진명의 시선이 꼼꼼하게 청년의 얼굴을 더듬기 시작하자 차현은 왜 그러냐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진명은 작게 웃으며 기둥에 기대섰다. “차현 씨.” 라고 진명은 그를 불렀고, 한 번 더 웃었다.
 “에밀리 디킨슨 좋아해요?”
 “아.”
 “맞죠.”
 이 기묘한 7년 만의 재회에 대해, 진명은 이렇게 썼다. ‘에밀리 디킨슨 좋아해요, 라는 말로 이어질 수 있는 인연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찬탄한다. 어쩌면 나는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이 열차에 오른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내가 쫓던 야구공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단언컨대 그 애와 보냈던 짧은 계절은 내 인생 가장 찬란한 순간을 관통하고 있었다.’
 
 3.
 진명과 차현은 그 뒤에도 종종 객실 복도에서 마주쳤다. 지구에서 화성까진 이주일 반이 걸렸고 정거장은 세 개나 남아 있었다. 차현은 진명이 오래 전 어물어물 헤어진 과외 선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 그녀를 “선생님”이라 불렀지만 진명은 여전히 그를 “차현 씨”라 불렀다. 차현에게 “선생님”으로 불릴 때마다 진명은 묘한 기분에 휩싸였는데, 정작 그녀는 교단 위에서 제대로 “선생님”이라 불린 기억이 거의 없는 까닭이었다. 아무튼 그리하여 진명과 차현은 종종 커피를 마시는 사이가 되었고 7년 만에 재회한 7년 터울의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되었다. 진명과 차현에게는 서로가 가진 선과 거리감이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틈이 둘 사이를 친구로 묶어주는 것 같았다”고 당시 함께 열차에 탑승한 승객 하나는 진술했다. 진명은 그 틈에서 안정감을 느꼈기 때문에 배차현에게 느끼던 개인적인 호감을 묵살해버린다. 이는 진명이 인생에서 택한 최악의 결정이었다고 “최진명 최후에 순간”에 회자된다. 차현은 진명에게 칠 년 전 빌렸던 시집을 돌려주었는데 진명은 받은 이후부터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 시집을 제대로 펼쳐보지 않았다. 하지만 차현이 빌려준 시집과 소설은 빠짐없이 읽었고, 마음에 박히는 문장은 일기장에 필사했다. ‘내가 당신 생각을 할 때, 당신도 나를 생각할까 / 아니겠지 / 아닐 것이다 / 그렇다면 이렇게까지 막막하지는 않을 것이다.’ ‘소설 속 나의 이름은 고작 / '너를 앓으며 사랑했던 소년 1'이었다.’ ‘비겁하게도 나는 사랑에도 행복에도 한 걸음 물러나 비켜서고 싶었다.’ ‘그러나 그 잃어버린 것은 우연처럼 되돌아와 거대한 바다를 뒤엎는 해일처럼 한순간 삶을 송두리 채 뒤흔들어 놓는다.’ 어느 순간부터 진명은 자신이 쓰는 모든 구절과 문장이 사랑과 통증을 수반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그녀는 시인도 소설가도 아니었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녀를 관통하고 무참하게 학살할 문장들은 이 세상에 무수했다. 진명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매일 밤 개인 객실에 길게 누워 진명은 한 글자 한 글자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나쁘지 않았다. 따스했다. 최진명은 그렇게 천천히 자신을 살해해갔다.
 칠천만 킬로미터를 횡단하는 열차 위에서 승객들은 우주를 목도하며 자신들이 아주 작은 존재라는 것을 거듭하여 깨달았다. 진명도 예외는 아니었기에 종종 우주에 대한 생각을 일기장에 썼다. ‘이런 곳에선 Let it be를 외친다한들 모든 사건들이 너무나도 외롭고 사소한 일이 되어버릴 것이다.’ 어리석은 진명은 그 때 자신이 더는 ‘Let it be’를 말해선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 했다. 진명은 차현을 그렇게 내버려두었다. 커피를 마실 때에도, 담배를 피울 때에도, 복도에서 젖은 머리카락으로 마주칠 때에도, 그렇게, 차현은 성실한 청년으로 남았으며 진명은 나태한 독자로 남았다. 진명은 그것에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K-20은 달 정거장 다음으로 존재하는 인공 행성이다. 자동차를 연구하고 제조하는 공장 연구 단지가 존재하고, 행성 전체가 도로로 덮여있다. 상주인구는 없지만 연구소 직원들은 종종 이곳에서 밤을 샜다. 작은 행성이기 때문에 계절은 하나뿐이었고, 도로를 달릴 때마다 기온은 조금씩 변했다. 눈 쌓인 타이가 숲을 달리다 보면 펼쳐지는 오로라가 장관이라 자동차 CF에는 종종 K-20이 등장했다. 진명이 열차에서 내렸을 때 차현은 근처에서 외투를 싸매고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명이 차 키를 대여한 것은 아주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차현 씨, 오로라를 보러 갈래요?” 진명이 물었고, 차현은 “그래요.” 라고 대답했다. 우습게도 그 때 하늘엔 아직 오로라가 없었다. 어쨌든 둘은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고, 오픈카였지만 생각보다 춥진 않아서 진명은 속도를 냈다. 조수석에 기댄 채 차현은 별다른 말없이 하늘 위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타이가 숲에 들어서자 하늘 위로는 커튼처럼 떨어지는 빛 무리가 펼쳐졌다. “와.” 차현이 짧게 탄성을 질렀기 때문에 진명은 속도를 늦췄다. ‘나는 그 애가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목격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선명하고 또렷하게, 그 아이는 아름다움을 아름답다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이 역시도 세계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 아이 역시도 알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시를 쓰겠다고 종종 말하곤 했던 걸까.’ 속도를 늦추던 진명은 아예 도로 가장자리에 차를 대곤 좌석을 눕혀 완전히 몸을 젖혔다. 차현이 진명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곧 다시 오로라를 바라보았다. 어둑어둑한 하늘 위로 드리운 초록색 커튼은 곧 노란색으로 일렁이다가 사라지는 듯 앞으로 나아갔다. 춤을 추는 빛은 신이 나있었다. 꼭 노래 같구나, 라고 진명이 생각하는데, 차현이 불쑥, “저건 어쩌면 하늘의 노래일까요.” 라고 물었다. 진명은 몸을 뒤척이다가 눈을 감았다. “그렇겠지.” 진명은 중얼거렸다. “아마도 그렇겠지.” 둘은 그 뒤 말없이 역으로 되돌아 와 인사를 하고 헤어졌다.
 
 4.
 승객들이 화성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열차가 화성의 위성 중 하나인 포보스에 도착했을 무렵이었다. 간이정거장을 지나쳐야만 했지만 다른 위성인 데이모스 정거장을 지나치고 나면 그들은 덜컥 화성에 도착하는 것이었다. 포보스에는 역 근처에 위치한 작은 술집 하나가 있었는데 명물이었다. 화성에 가기 전 으레 들러 블랙 맥주를 마시는 것이 승객들 사이에선 일종의 관계가 되어 있었다. 비즈니스를 이유로, 야구 경기 관람을 이유로, 관광을 이유로, 죽음을 이유로, 생존을 이유로 이 열차에 탑승한 승객들은 저마다 술렁거렸다. 열차 내에선 음주가 금지되어 있었기에 술을 고파한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누군가 “마시자”고 외쳤고, 구호처럼 사람들은 열차에서 뛰어내렸다.
 행성에 내리기 전, 진명은 좌석에 붙은 정거장 안내표를 읽었는데, 거기엔 포보스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최고의 맥주를 만드는 주재료를 생산하는 행성.’ 아래엔 자잘한 설명이 붙어있었는데, 진명은 그것보다도 아래에 붙은 경고 표시에 더 눈이 갔다. ‘절대, 마을로 내려가지 마시오.’ 요약하자면 대규모 화성 이성 프로젝트가 진행될 무렵 불법 이주를 시도하다 내쫓긴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지구에 가던 도중 열차에서 무단이탈해 점거한 행성이 포보스라는 것이었는데, 포보스의 대규모 슬럼가는 치안률이 아주 낮고 사실상 치외법권 지역이기 때문에 승객들이 호기심에 내려갔다가 종종 변을 당한다는 것이었다. 슬럼가는 포보스 행성에서 대규모로 재배되는 작물을 팔아 수입을 유지하고 있지만, 생활이 넉넉지 않은 건 매한가지라 승객들의 소지품 도난을 위해 열차에 무단침입을 시도하는 거주자도 더러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는 것으로 정거장 안내표는 이야기를 끝맺고 있었다. 안내 책자를 다시 의자 사이에 끼워 넣은 진명은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창밖 너머의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은 온통 푸른 어둠이었다. 이 행성의 하늘은 몇 시간이고 늦저녁이었다. 진명은 저만치 떨어진 곳에 빽빽하게 늘어진 판자촌을 보았다. 아주 희미한 불꽃이 일렁이는 슬럼가에는 으스스한 실루엣들이 이따금 스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진명은 객실에 가지런히 정리해둔 차현의 시집들을 떠올렸고, 그들이 이런 책을 가져가진 않겠지만, 만약 가져간다면 몹시 슬픈 일이 될 거라 생각했다. 진명은 포보스를 설명하는 안내 책자를 다시 꺼내들었다. ‘절대, 마을로 내려가지 마시오. 강간, 절도, 도박, 구타, 살해, 실종의 위험이 있음.’ 진명은 두 번째 문장을 아주 오래도록 읽었다. 누워서도 읽었고, 엎드려서도 읽었다. 그리곤 나중에 일기장에 그대로 필사했다. ‘절대, 마을에 내려가지 마시오. 강간, 절도, 도박, 구타, 살해, 실종의 위험이 있음.’
 
 5.
 간이정거장에서 연료를 충전한 열차는 몇 번의 동력 점검을 마친 후 다시 우주를 가르며 출발했다. 포보스에서 잔뜩 취하고 돌아온 승객 하나가 복도에 구토를 했기 때문에 한동안 복도에선 시큼한 냄새가 났다. 로봇 청소기와 공기 청정기는 한동안 진명의 객실 앞을 서성거리며 승객이 뱉어놓은 토사물의 흔적을 치운다고 법석이었다. 진명은 차현을 찾지 않았고 대신 객실에 앉아 차현이 빌려준 시집을 몇 번 더 읽었다. 7년 동안 한 시집을 장기 대출한 전적이 있어서였는지도 몰랐지만, 차현 역시도 꽤 오래도록 진명이 빌려간 시집을 돌려주지 않음에도 먼저 말을 꺼내거나 하진 않았다. 진명은 그것 역시 저와 차현 사이에 존재하는 ‘틈’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이따금 사려 깊지 않은 대담함을 가지길 바란다.’ (진명은 일기장에 이렇게 썼지만, 이 페이지는 후에 진명의 손에 의해 직접 훼손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착실하게 열차는 나아갔고 곧 데이모스에 도착했다. 화성에 도달하기 전 정차하는 마지막 정거장이었다. 안내 책자를 읽지 않아도 진명은 이 위성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데이모스는 이미 학원도시로 유명한 화성의 작은 위성이었고 승객들 중 일부는 학원도시 입학을 목적으로 한 학생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내내 노을이 지고 있어서 ‘영원한 노을’로도 유명한 위성이었다. 진명이 열차에서 내려 모래사장을 밟고 있을 무렵에도 하늘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이 위성의 팔십팔 퍼센트는 물이었고, 나머진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레몬 색 모래사장에선 신 냄새가 났다. 해수욕장 입구 앞에는 뜬금없게도 포장마차가 있었다.
 “처자, 저 물에 뛰어들지 마. 바다에 너무 깊이 들어가지도 말고. 저 안에는 사람 맛을 아는 괴물 물고기들이 살고 있어.”
 어묵 탕을 주문해 홀짝이고 있으니 주인장 되는 아주마니가 입을 열었다. 그녀는 역이 위치한 해수욕장과 거대한 섬-번듯한 빌딩이 세워진 하나의 도시였다-을 연결하며 바다를 가로지르는 대교를 바라보았다. 다리 아래에 아주 거대하고 시커먼 그림자가 조금씩 수면 위로 솟구쳐 올랐다가 다시 가라앉았다. 바람이 불지 않는 이곳은 바다에 파도가 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의 파동이라도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저게 그 물고기들인가요?”
 진명이 묻자, 아주마니는 대답했다.
 “애들이 공부하다 미치면 빌딩에서 뛰어 내려. 저 바다 쪽으로. 처음엔 안 그랬는데, 나중엔 시체 건지기가 그렇게 힘들어지더래. 알고 보니 쟤네들이 다 주워 먹더란 거야. 쟤네가 인간 맛을 알게 된 거지. 살아있는 사람도 꿀떡 삼킬지 누가 알아? 비늘 하나가 성인 남자만 하더만.”
 진명은 데이모스 학원 도시의 실태에 대해 떠들어 대던 뉴스와 언론사들을 기억한다. 교사들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고 오로지 수천 명의 학생들만이 그 높은 최첨단의 빌딩에 살고 있다는 기적 같은 학원 도시의 이야기들. 관리자들은 몇 달에 한 번만 빌딩의 유비쿼터스 시스템을 점검하고 모든 수업은 인터넷 강의로 이루어진다. 빌딩의 방 하나하나가 호텔 스위트룸처럼 넓고 아늑했다. 창밖으론 지지 않는 영원한 노을이 있었고 학원 도시 안에는 모든 생필품이 갖춰져 있었다. 부족해질 일도 없었고 차고 넘치는 일도 없었다. 그런데도 해마다 학생 수십 명이 빌딩에서 몸을 던졌다.
 “왜 그러는 걸까요.”
 진명은 잔잔하고 거대한 바다 한가운데에 우뚝 솟은 학원 도시 섬을 바라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아주머니는 진명의 빈 그릇을 치웠다.
 “눈 뜨자마자 일어나서 밥 먹고 씻고 공부하다가 다시 밥 먹고 자러가는 게 뭐가 즐겁겠나 싶지. 그래도 졸업장 따면 바로 취직이니까 4월에는 사람들이 또 꾸역꾸역 여기로 몰려와. 아줌마, 여기 좋아요? 그렇게 묻는데 대답을 못 해주지.”
 데이모스 학원도시는 3년을 버티면 졸업 시험을 치르고 자격증을 따면 졸업장을 준다. 특수한 기술을 배우기 때문에 데이모스 학원도시 출신들은 전부 K-20의 연구 단지의 연구원이 되거나 화성 지부에 있는 대기업의 스카우트 제의를 받게 된다. 갈수록 어려워지는 취업 시장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는 수많은 청년들이 가방으로 매고 이곳으로 몰려든다. “어쩔 수 없잖아요.” 라는 표정을 짓고. 여기서 몇 명은 죽음을 꿈꾸며 살아남고 또 몇 명은 어느 날 불현 듯 이 노을이 너무도 지겨워져 발코니 창문으로 나가 바다로 몸을 던진다. 살아남은 자들의 성공이 TV에 중계되고 또 중계되기 때문에 데이모스 학원도시 내 학생 자살률은 해마다 증가하지만 아무도 손쓰지 않는다. 이 영원한 노을이 지겹다고 몸을 던지는 학생들의 삶을 이해하는 일은 너무나도 골치 아프기 때문이다. 세상이 그들을 버리기로 결심했을 때 아름다운 노을은 한없이 지겹게만 느껴지는 것인데도.
 세상이 버리기로 결심한 최진명은 노을의 지겨움을 아는 사람. 그녀는 이곳에 적용된 룰을 한 번에 알아본다.
 “그러니까, 이건 분명…… Let it be 같은 것이군요.”
 아주머니는 동의한다.
 “분명 그런 거겠지.”
 열차로 돌아온 진명은 일기장에 이렇게 쓴다. ‘나는 이 바다에 뛰어들 수 없다. 이 바다는 나의 죽음을 위해 마련된 것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그런 느낌이 든다. 물고기들이 나를 삼키지 않아서 나는 다만 시체로서 발견될 것이다.’ 그 날 밤 진명은 꿈을 하나 꾼다. 데이모스 학원도시의 빌딩을 우두커니 바라보는 꿈이었다. 빌딩 창문을 열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동시에 바다로 몸을 던진다. 퐁당퐁당 떨어지는 까만 점들 위로는 영원한 노을이, 아래로는 거대한 그림자가 헤엄치는 바다가 있다. 물고기들은 다만 입을 벌린 채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완벽한 ‘Let it be’ 였다.
 
 6.
 진명이 화성에 도착한 것은 열차에 탑승한지 정확히 이주일 하고도 4일이 지났던 2015년 12월 6일의 무렵이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날씨 때문에 화성은 조금 쌀쌀하기만 할 뿐 겨울의 기미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캐리어를 내린 진명은 차현이 화물칸에서 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지만 인사하지 않았다. “진명 씨는 그 때 아주 갑자기 정신이 바짝 든 사람처럼 보였어요. 인사를 하려고 했는데, 어찌나 빨리 역에서 사라지던지.” 진명의 옆 객실에 탑승하던 승객은 그렇게 증언했다. “아마도 야구 경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시즌 리그의 가장 중요한 경기가 3시간 뒤에 시작이었거든요.” 실제로 진명은 환상 야구의 경기장을 찾았고 미리 끊어둔 티켓을 수령한 뒤 경기장 끝자락에 앉아있었다. 그 날의 경기는 두말할 것도 없이 최고였다고 전해진다. 삼성 ‘매트 비’를 재치고 작은 구단인 ‘솔라’가 역전승을 거뒀는데, ‘솔라’에는 진명이 그토록 보고 또 보았던 ‘허공의 사나이’가 있었다. 그는 경기장 곳곳이 구역마다 다른 중력으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중력이 무겁거나 가벼워지면 다른 선수들은 으레 속도를 줄이거나 늘렸는데, 그는 아무것도 상관없다는 듯이 자꾸만 앞으로 달려 나갔다. 8회 말 무렵, ‘허공의 사나이’가 연출되었다. 힘차게 땅을 박차고 뛰어오른 한 남자는, 그렇게 흙과 먼지를 튀기며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객석이 환호하며 기립했고 경기의 스포트라이트는 그를 향했다. 진명의 좌석은 그의 측면을 향하고 있었다. “지금입니다, 지금, 아, 나오는군요! 여러분, 박수 쳐주세요, 그가 공을 향하여 달립니다. 그렇습니다, 허공입니다. 허공의 사나이입니다!” 온 세상을 뒤집어엎을 듯 쩌렁쩌렁 방송이 울리는 그 때, ‘허공의 사나이’를 보며 앉아있는 서른한 살의 최진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 장면 하나를 위해 칠천만 킬로미터를 날아온 여자는 그 경기를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화성에 도착한 이후로 진명은 일기장을 쓰지 않았기에 우린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진명이 결국 ‘허공의 사나이’를 목격했다는 것이고, 그게 그녀에게 어떤 결심을 안겨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어쨌든 그녀는 거기 있었다는 것이다. 경기가 끝마친 후 진명은 인파를 피해 뒤쪽으로 빠져나왔다. 진명은 곧장 다시 열차를 탈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 일어난다. 진명이 기대하지 않은 일이었기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거기엔 “배차현 씨”가 있었다.
 “아, 선생님.”
 차현이 먼저 인사했기 때문에 진명은 그를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진명은 인사했다.
 “차현 씨, 야구 봤나 봐요.”
 “예, 뭐. 그렇죠.”
 차현은 머쓱하게 웃었다. 진명은 그 얼굴을 보며 갑자기 자신이 배가 고프다는 생각을 했고,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먹어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진명이 차현에게 물었다.
 “같이 밥 먹을래요?”
 차현은 대답했다.
 “지금은 햄버거가 좋네요.”
 둘은 버거킹으로 가서 버거 세트를 하나씩 사먹었다. 진명이 카드를 긁었고, 차현은 조금 미안해했다. 머쉬룸 스테이크 버거는 아주 맛있었다. 진명은 차현이 햄버거를 베어 무는 얼굴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차현이 어색하단 표정으로 입술 주변을 비비자 진명은 시선을 내리깔곤 핸드백을 뒤졌다. 찾을 건 없었지만 그렇게 했다.
 “아니에요. 그냥.”
 차현과 진명은 그 뒤에도 소소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콜라 속에 담긴 얼음이 녹아 부서질 때까지. 시집, 소설과 문장들, 우리가 지나쳐온 행성과 위성에 대해서 그들은 말하고 또 말했다. 패스트푸드점은 냉방이 잘 되었기 때문에 진명은 곧 으슬으슬한 추위를 느꼈고, 하이힐을 신은 발가락을 오므렸다. 차현은 진명을 보곤 물었다.
 “선생님, 옷 빌려드릴까요?”
 진명은 잠깐 굳었다가 이내 대답했다.
 “괜찮아요.”
 차현은 진명에게 몇 가지를 더 이야기했다. 둘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과거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는데 그건 서로에 대한 배려라기 보단 그들 스스로가 꺼내기에 유쾌한 이야기들이 아니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진명은 차현이 자신의 과거를 어떤 식으로든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차현은 최진명 사건으로 세상이 떠들썩할 당시 군대에 있었다.
 “혹시 폭력 교사 관련으로 떠들썩했던 거 기억나나요. 재작년 여름 무렵이었는데.”
 진명은 괜히 그렇게 물었지만, 차현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 모르겠어요. 재작년이면 막 재대했을 때라서.”
 진명은 그 얼굴을 보며 안심했고, 더는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차현은 다른 주제를 좀 더 이야기했다. 도서관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 화성 도서관은 지구와 화성을 통틀어 가장 큰 도서관이래요.”
 절판된 도서와 고대 서적들, 학회 자료를 보관하는 곳이다. 최근엔 시대적 착오에 의해 사라진 도서들을 복원해놓는 시도도 하고 있다. 어쩌면 교과서에 이름만 남은-혹은 이름을 남기지도 못 한 외로운 시인들의 시집이 거기 있을 지도 모른다. 차현은 도서관에 대해 알고 있는 만큼을 이야기했다. 진명은 다 녹은 콜라를 빨대로 천천히 저으며 주의 깊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차현 씨는 거기 가봤나요?”
 진명이 물었을 때 배차현은 으음, 하는 표정으로 옅게 웃었다.
 “선생님, 우린 그 열차에서 내린 지 아직 하루도 안 되었거든요.”
 차현은 야구 경기장 쪽을 바라보며 턱을 괴었다.
 “일정이 된다면 가보겠지만 잘 모르겠어요.”
 바깥은 늦은 저녁이었다. 곳곳 간판에 불이 들어오고 패스트푸드점은 연인들로 북적였다. 응원 복을 입고 앉은 한 무리의 사람들 등판으로 시큼한 땀 냄새가 올라왔다. 진명은 미지근한 콜라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오늘 거기 가봐야겠어요.”
 이것은 충동적인 결심이 아니다. 하지만 차현이,
 “마음에 드는 시집을 발견하신다면 추천해주실래요? 돌아오는 열차에선 제 시집을 돌려주러 와주세요.”
 라고 말했을 때, 진명은 충동적으로 그에게 어떤 시, 이를테면 사랑과 통증을 수반하는 문장들을 죄다 그의 가슴 속으로 끌어오고 싶다는 욕망에 휩싸였다. 일기장에 필사했던 그 모든 문장들처럼 아름답고 잔인한 이 세상 모든 언어를 하나하나 손수 박아 차현을 그 속에 죽이고 싶었다. 천천히 담갔다 꺼내곤 흔들며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배차현 씨, 여기엔 내가 하고픈 말이 단 한 마디도 없어요.” 라고 말하고 싶었다. “배차현 씨, 죽지 마세요, 이제 내가 하고픈 말을 할게요.” 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문장으로 축축하게 젖은 스물네 살 청년의 하얗고 볼록한 이마를 내려다보며, 최진명, 그럼 결심하겠지. 그러니까 최진명은 기어코 이렇게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배차현 씨, 나는 아무래도 당신을 사랑하는 모양이에요.”
 하지만 배차현은 이제 펜을 꺾고 세상으로 걸어 들어가는 문청일 뿐이다. 최진명이 찬탄하던 그 시절의 배차현은 아주 오래 전에 목을 매달고 죽어버렸다. 그가 쓰는 문장은 이제 보고서와 서류 위에 걸맞은 성질을 가지고 빌딩 위를 기어오를 테였다. 기어오르고 기어오르고 기어오르다가, 그 도시의 아이들처럼 바다로 몸을 던져버릴 거니. 서른한 살이 된 최진명은 두렵다. 최후의 배차현이 죽어버릴까 봐. 이 시절도 결국 그 시절이 되어버릴까 봐. ‘Let it be’ 란 그런 식으로 진명을 방치하고 차현의 문장을 토막 내고 재구성했다. 진명은 세상이 가진 ‘Let it be’ 는 비틀즈가 부르는 아름다운 한 곡의 일부처럼 평온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요컨대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배차현 씨, 나는 아무래도 당신을 사랑하는 모양이에요.” 라고 말하면, 영영 배차현을 만날 수 없게 될 거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여자였다.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느끼며 진명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이 벌벌 떨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어떤 말이든 해야만 했다. 그래서 진명은 차현에게 인사했다.
 “돌아오는 열차에서 만나요.”
 차현은 눈을 느리게 감았다 뜨며 그녀를 배웅했다.
 “예, 그 때 봬요.”
 진명은 차현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7.
 도서관에 도착했을 때 시간은 밤 10시였다. 진명은 도서관이 문을 닫진 않을까 걱정했지만 도서관이 문을 닫는 시간은 밤 12시였다. 진명은 800번 대에 가기 위해선 몇 층으로 가야하냐고 물었다. 로봇은 친절하게도 2층이라고 대답해주었다. 진명은 달팽이집처럼 빙글빙글 이어지는 계단을 쉼 없이 올라 아주 넓은 홀에 도착했다. 수많은 서적들 사이사이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진명은 핸드백에서 일기장을 꺼냈지만 아무것도 적지 못했다. 시집을 더듬거리며 자꾸만 안쪽으로 들어갔다. 계속 더듬고 계속 더듬다가 책장이 끝나자 멈추어 섰다. 진명은 그곳에서 아주 낡은 시집 한 권을 발견했다. 시인의 이름을 읽었지만 누군지 알지 못 했다. 나중에 찾기를, 그 이름은 1930년 대 시인하면 떠오르는 시인들 중 하나의, 부인 되는 사람의 것이었다. 시집은 아주 얇았고 잘못 손대면 바스라질 것 같았기 때문에, 진명은 핸드백을 내려놓고 조심스럽게 시집을 펼쳤다. 시집에는 딱 두 편의 시가 쓰여 있었다. 하나는 남편에 관한 시였고 또 하나는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간 그녀의 아이에게 쓴 시였다. 실제로 이 시집은 복원될 당시 특히 두 번째 시의 마지막 구절로 인해 많은 시인들로부터 찬사를 받았는데, 시인은 될 수 없었을지언정 시인을 사랑할 수밖에 없던 진명 역시도 이 마지막 구절에 압사당하고 만다. 그 후 3박 4일 만에 지구로 되돌아오는 화성 급행열차에서, 진명은 일기장에 그 구절을 꼼꼼하게 필사한다. 절박했다. 그 구절은 다음과 같다.
 ‘결국 우리는 알게 되겠지만/해가 지는 동안에도 나는 끊임없이 물을 것이다/너는 나의 딸이었을까 아들이었을까’
 
 8.
 돌아오는 내내 진명은 아주 평온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함께 열차에 탑승한 승객 하나는 당시의 진명을 “데이모스의 바다와 같았다”고 표현했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는데, 저로서는 알 방도가 없었죠. 겉보기엔 아주 평화로웠거든요. 그 자주 다니는 청년이랑 똑같은 시간에 앉아서 커피 마시고, 돌아와선 또 객실에서 나오지도 않고. 거대한 물고기가 그 속에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진명은 흘러가는 우주가 있는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밤새도록 소리 내어 천천히 시집을 읽었다. 차현이 빌려준 시집 세 권은 그렇게 진명의 입에서 말이 되고 소리가 되어 느릿느릿 쏟아졌다. 이따금 진명은 발가락을 오므리곤 작게 들썩이며 숨을 내쉬었지만 코끝의 시큰함이 가라앉으면 다시 시를 읽었다. 최진명 인생에서 가장 평화로운 날이 있다면 이때였을 것이다. 진명은 마침내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나는 말하지 않고 죽는 법을 배울 수 없다.’ 포보스에 도착할 무렵이었다. 일기장을 넘기자 거기엔 진명이 지구에서 화성으로 날아가던 이주일 반 동안 필사한 문장들이 있었다. 진명은 그 중에서 그 언젠가 썼던 문장 하나를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절대, 마을에 내려가지 마시오. 강간, 절도, 도박, 구타, 살해, 실종의 위험이 있음.’ 진명은 거기서 ‘실종’을 지워냈다. 그래서 그것은 그녀에게 더는 아무런 위험도 되지 못 했다.
 열차에서 내리기 전에 진명은 캐리어를 꺼냈다. 그리곤 배차현의 객실을 찾아갔다. 차현은 “선생님, 어쩐 일이세요.” 라고 묻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시를 다 읽으셨나요?”
 진명은 그래서 웃었다.
 “네, 돌려주러 왔습니다.”
 진명은 시집 세 개를 차현에게 돌려주며 말했다.
 “차현 씨, 여기 맥주가 유명하대요.”
 차현이 무슨 소리냐는 듯 진명을 바라보았다. 진명은 차창 너머로 펼쳐진 끝없는 늦은 저녁의 하늘을, 그 아래의 판자촌 슬럼가를 응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차현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지만 진명은 웃을 기운이 없어 그냥 고개를 기울였다.
 “우리 같이 맥주 마시지 않을래요.”
 차현이 거절하면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차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까요.”
 그게 불행인지 다행인지 진명은 끝끝내 알지 못 했다.
 
 9.
 둘은 작은 포보스 정거장에 내려 바깥으로 나왔다. 선선한 공기에 바람이 불었다. 차현은 진명이 캐리어를 끌고 나오는 것을 보곤 고개를 갸웃했지만 따로 이유를 묻진 않았다. 진명은 그것이 그가 마지막으로 보여준 둘 사이의 ‘틈’이라고 생각했고, 거기에 여전하게 안온함을 느꼈다.
 바에 들어선 둘은 아무 자리에나 앉아 블랙 맥주를 주문했다. 진명은 카드를 내밀었지만 늙은 노인은 이곳은 카드가 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제가 낼게요.” 라며 차현이 지폐를 내밀었다. 맥주는 그렇게 비싸지도 않았다.
 차현과 진명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맥주를 마셨다. “지구에 가면 뭘 할 거예요?” 차현이 침묵이 이어지던 도중 그런 질문을 던졌는데, 진명은 대답 대신 작게 웃기만 했다. 차현은 진명이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진명은 차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턱을 괴었다.
 “차현 씨, 과거형이네요.”
 “대게 그렇지 않나요.”
 “아니에요.”
 진명은 차현과 눈이 마주쳤지만 이번엔 웃지 않았다.
 “지금이 좋아요.”
 차현은 진명의 시선을 응시하다가 잔을 기울였다.
 “……그렇군요.”
 둘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시 술집에 앉아있었던 승객이 말하기를, 둘은 “너무나도 말을 아끼고 있는” 눈치였다고 한다. 차현은 어땠을지 모르겠지만 진명은 그 때 정말 그러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진명에겐 할 일이 있었고, 그리하여 이 모든 순간이 최후였다. 진명은 차현에게 무얼 해주면 좋을지를 생각했다. 이 스물네 살의 청년에게 무얼 말하면 좋을지를.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고민해도 마땅한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차현은 혼자 맥주 한 병을 비웠고 이내 조금씩 휘청거리고 있었다. 졸음과 취기가 쏟아지는 눈을 깜빡이며 차현이 진명 앞에서 기울어졌다. 진명은 그의 이마가 테이블과 자꾸만 가까워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그가 테이블에 엎드렸을 때, 진명은 차현이 작게 웅얼거리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선생님, 좋은 시는 찾으셨나요.”
 진명은 화성의 패스트푸드 점에서 차현과 했던 약속을 기억해냈다.
 “네.”
 진명은 대답하고 목이 메어 잠깐 숨을 삼키다가 다시 대답했다.
 “……네, 찾았어요.”
 “그렇군요…….”
 차현은 길고 나른한 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다. 진명은 그의 뒤통수를, 언젠가 시인이 되려고 했던 배차현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는데 거기엔, 그러니까 동그란 이상이 있었다. 여전히 모난 곳이 없는 뒤통수였다. 진명은 문득 부르고 싶어져 머뭇거렸고, 결국 조용히 시인의 이름을 불렀다.
 “차현아.”
 사방이 고요해진 것 같았다. 배차현이 대답하지 않았으므로 진명은 다시 한 번 부를 수 있었다.
 “차현아.”
 “…….”
 진명은 코끝이 시큰해지는 걸 느꼈다.
 “딸이었을까 아들이었을까.”
 차현이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기에 진명은 마음 놓고 울음을 억누를 수 있었다. 손을 뻗은 진명은 머뭇거리다가 배차현의 이마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위로 정돈해주었다. 차현이 숨을 내쉬며 몸을 뒤척였다. 얼굴 각도가 달라져서, 진명은 아주 가까이에서 차현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손을 거둔 이후에도 그 얼굴을 아주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가슴은 아프지 않았다.
 진명은 핸드백에서 여행 내내 가지고 있던 시집을 꺼냈다. 차현이 칠 년 전 빌려다 얼마 전 돌려주었던 에밀리 디킨슨의 시집이었다. 진명은 그걸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큰 도서관을 다 뒤져도 당신이 쓴 시가 없어요.”
 진명은 그 시집을 엎드린 차현 쪽으로 밀었다.
 “그래서 내가 찾은 시집은 이게 전부입니다.”
 허공으로 달리는 남자를 생각한다. 그 작은 공 하나를 쫓겠다고 우스꽝스러운 폼으로 공중에서 온몸을 비틀고 손을 뻗는 그 남자. 아무도 그를 비웃지 않는다. 허공의 마임이 격렬해질수록 사람들은 박수갈채를 날린다. 아무도 그가 쫓는 것을 'Let it be'라 부르지 않는다. 북적이는 관람객석에 앉아, 진명은 'Let it be'가 적용되지 않는 세상의 한 장면을 목격한다. 진명은 생각한다. ‘왜 내가 그 작은 공 하나를 쫓는다고 발버둥을 쳤을 때, 사람들은 돌을 던졌나.’ 하지만 진명은 동시에 알고 있다. 세상이 'Let it be' 하지 않을 땐, 삶 역시도 'Let it be' 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우주가 도는 동안 화성으로 기차가 달린다. 아름다운 오로라를 아래에 두고 차를 몰며 타이가 숲을 지나치자. 눈을 감고 거대한 물고기를 떠올리면 빌딩 아래의 배차현이 펜을 꺾고 세상으로 걸어 들어간다. 진명은 교편을 내려놓고 비로소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배차현의 뒤를 따르는 일은 아니다. 진명에겐 따로 가야한다고 결심한 길이 있다. 마지막이다. 진명은 조금 울면서, 천천히 얼굴을 감쌌다.
 “차현 씨, 안녕히 계세요.”
 진명은 중얼거렸다.
 “나는 시를 쓰지 못 합니다. 쓰지 않고 말합니다. 사랑합니다.”
 모든 마음을 내려놓은 후에 진명은 잠든 차현을 거기 내버려 둔 채 캐리어를 끌고 바깥으로 나왔다. 그녀의 마지막 말을 전해준 것은 술집에 앉아 있던 다른 승객이었다. “열차가 출발하기 전엔 차현 씨를 깨워달라고 하더군요. 그는 기차를 놓치면 안 되니까요.” 진명은 비틀거리며 걷다가 문득, 하이힐 굽 하나가 부러진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신발을 벗었다. 술집 아래는 가파른 내리막길이었다. 그 아래는 죄다 슬럼가였다. 한참을 내려가 한참을 걸어야 했지만, 어쨌든 그 아래엔 뭔가 있었고 사람도 살고 있었다. 진명은 희미한 불빛이 일렁거리는 낡은 판자촌을 내려다보며 계속해서 걸었다. 등 뒤로 뿌우, 하고 열차가 경적을 울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진명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바람이 불었다. 정말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다. 열차가 출발을 예고하는 경적을 한 번 더 울리며 요란하게 종을 쳤다. 뿌우우, 하는 소리가 바람과 함께 들이닥쳤다. 진명은 열차에 올라탈 승객들을 상상했고, 얌전하게 개어놓은 자신의 개인 객실의 이부자리를 상상했고, 지구에 도착한 후 얼마나 지나서야 자신의 실종 처리가 이루어질 지를 상상했다. “진명아, 연락해!” 라고 외치던 전 남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진명은 그에게 손을 흔들지 않았다. 다녀온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열차가 출발하는 소리가 들렸기 때문에 진명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바람이 불며 진명의 단발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아.” 하고 진명은 탄식했고 동시에 저 열차를 향해 달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그 모든 충동이 한 사람으로 비롯되었던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제야 진명은 배차현에게 제대로 된 말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지 말 걸.” 이라며 진명은 중얼거렸다. 코끝이 시큰해졌으므로 진명은 조금 더 울었다. 후회가 찾아왔기에 더는 평화로울 수 없는 속이 절절 끓었다. 진명은 달리는 열차를 향해 욕을 하고 화를 내고 발을 구르고 자신을 원망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렸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대신, 진명은 손을 길게 뻗어 흔들어주었다. 그 열차 어딘가에 탄 배차현 씨를 위하여 진명은 손을 흔들었다. “어쩌면, 저것은 하늘의 노래일까요.” 진명은 멍하니 중얼거렸는데, 열차가 완벽히 떠나고 나서야 진명은 그게 그 언젠가 차현이 조수석에서 중얼거렸던 오로라의 시였다는 걸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읊은 아주 아름다운 문장이었다. 
 최진명은 하이힐을 풀숲에 버리곤 맨발로 섰다. 캐리어를 끌고 내리막길을 내려갔다. 비틀거리는 진명의 뒷모습은 이따금 조금 들썩였지만 대체로 평온했다. 진명은 그렇게 자신이 선택한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 속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최진명 최후의 순간”은 그래서, 대체로 평온했다.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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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상 야구를 본 적이 있다. 땅을 한 번 박차고 나갈 때마다 붕 떠오르는 선수들. 등판은 무중력의 공간 속에서 붕 떠오르고, 공은 느릿하게 허공을 가르고 경기장 중앙을 향해 나아가다가 느닷없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튀어나갔다. 서른을 갓 넘겼던 그때, 진명은 코코아를 마시다 말고 천천히 잔을 내려놓는다. 스포츠를 유심히 지켜본 적이 없는 인생에 느닷없이 직구로 날아온 그 장면은, 그러니까 앞으로 조금 더 뒤에 적금을 모조리 깨고 화성행을 결심하게 된 진명이 가장 먼저 화성의 그 어딘가로 떠올렸던 곳이 야구 경기장이게끔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짝, 하고 저녁 어스푸레한 하늘 어딘가에서 빛나는 별이 사실은 행성이고 그 중 하나가 실은 시뻘건 화성이었다는 것만으로도 우주 여행은 가치를 가진다. 우리는 곁에 존재했으나 주목받지 못 했던 것들을 한 번 더 상기시켜줄 때마다 오히려 그 존재들의 생경함을 느끼는 역설을 종종 경험하곤 한다. 진명에게 화성이 그랬다. 티켓 예매는 망설임이 없었다. 컴퓨터 앞에서 자근자근 다리를 떨며 마우스 몇 번 클릭하면 우주로 나갈 수 있다는 것. 그런 멋진 일이 도처에 있다는 생경함. 그리고 그런 와중에도 습관처럼 입가로 올라가던 손톱의 끝. 겨울의 시작.

  버스는 생각보다 한산하고 히터 때문에 텁텁했다. 다만 무한히 옆으로 흘러가는 풍경을 바라보며 진명은 버스 기사에게 충고를 듣는다. 제아무리 늦은 오후라고 해도 붐비는 것은 마찬가지니 자가용을 타고 가는 편이 좋을 것이다. 서울역으로 향하는 버스는 분명 꾸준히 좌석이 차고 있었다. 진명은 기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충고 감사합니다.

  버스 바깥의 공기는 쌀쌀하고 막 얼어붙기 시작하는 겨울의 냄새가 난다. 휴대전화를 든 진명은 굽 낮은 하이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상대방의 목소리가 들릴 때까지 자꾸만 발가락을 움츠렸다, 가 전화가 연결되자마자 펼친다.

 추위로 인해 쪼글쪼글해진 목소리로 진명이 말했다. 

  "선배, 나 좀 양평까지 태워주라."

  막 잠에서 깬 목소리는 그 말에 불평하는 어투로 웅얼거리다가 발신인을 확인한 직후 화들짝 깨 되묻기만 한다. 진명아, 어디를 태워달라고? 진명은 그러나 두 번 말하지 않는다.

  한 번도 우주라는 공간을 구체적으로 상상해본 적 없는 사람들은 화성 이주 프로젝트가 시작된 이후 와글와글 그곳을 넘나들며 과학의 진보를 몸소 체험하고자 안달이 났고, 진명은 이제 그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사실이 조금 우습다며 운전석에 앉은 진명의 대학 선배는 중얼거린다.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주세요. 진명은 턱을 괸 채 그렇게 중얼거릴 뿐이다. 전 남편이라는 이름표를 떼고 나자마자 너무나 당연한 듯이 돌아온 대학 선배의, 촌티나는 음악 선정이 그저 아쉽고 아쉽고 아쉽기만 해서.


  양평에 도착할 즈음에는 가로등이 하얀 색에서 주황 색으로 바뀌었다. 오래된 도로는 늘 오렌지 빛으로 물들어 있고 군데군데 칠 벗겨진 이정표가 보인다. 진명을 태운 자가용은 구불구불한 산길을 넘어 역 앞에 진명을 내려준다. 기지개를 피며 선배는 재차 진명에게 묻는다. 진명아, 어디 간다고? 진명은 물끄러미 불 밝혀진 지구역 간판을 바라보다가 이번에는 대꾸한다.

  "화성."

  선배를 배웅하며 입을 벌리자 입김이 화드득 솟았다. 무서운 일이다, 벌써 겨울이라니. 진명은 멀어지는 자가용을 바라보며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놓고 그런 생각을 한다. 전 남편을 부르는 것은 통상적으로 이상한 일이지만 대학 선배를 부르는 것은 통상적으로 이상한 일이 아니다. 진명은 오늘 그를 대학 선배로만 대했을 뿐이다. 그건 진명을 조금 외롭게 하고, 동시에 조금 홀가분하게 한다. 그리고 이것은 이상한 일이다.

  천천히 역으로 들어서는 자신을 누군가 알아차렸으면 좋겠다고 진명은 생각한다. 누군가가 가장 절실했던 순간 세계의 어떤 눈들이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을 가져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나 과거는 다만 흘러가는 풍경처럼 진명의 곁을 스쳐갈 뿐이며, 무중력 상태로 느릿하게 허공을 기어가던 공도 어느 순간에는 결국 쏜살같이 달리는 법이다. 진명은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서른 살이 되었고, 서른 살을 먹었고, 이제는 서른한 살이 되었으므로. 화성에는 도서관이 많다던데 시집이나 찾아볼까. 생각을 차곡차곡 호주머니 속으로 접어넣으며 진명은 케리어를 끌고 역으로 걸어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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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 «아주 평범한 카운슬러»
1차/old 2019. 10. 30. 01:13

 16년 1월


 “오늘 남편이 집에 일찍 들어와 좋은 와인을 꺼내오더군요. 그리고 내 어깨를 두드렸죠. 꽤 괜찮은 건배사였어요. 그리고 나는 방으로 돌아와 죽기 위한 결심을 굳혔어요. 튼튼한 밧줄을 커튼 봉에 매달고 내 몸을 아무렇게나 걸쳐놓았죠. 몸에 쌓였던 오줌이나 똥이 나올 수도 있다면서요? 생리대를 두 개나 겹쳤어요. 기저귀를 사러갈 시간이 없었거든요. 와인 마신 후에 기저귀를 사러가겠다니, 그건 너무 웃기잖아요. 남편이 보내줄 리도 없었죠. 애를 잃은 이후로 남편은 종종 저를 정신병자 취급했거든요. 수연이의 물건을 끌어안고 우는 걸 이해해주지 않는 남자에게 냉큼 결혼하자고 한 내 자신이 한심해요. 나는 목을 매달기 전 언젠가부터 남편의 정장에서 나던 낯선 향수 냄새를, 아주 오래 생각했어요. 하지만 그런 걸 생각할수록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살고 싶다는 의지로부터 나를 주체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사실이 나를 무섭게 했어요. 그래서 서둘러 의자를 밟았죠. 나는 거기 오 분 정도 매달려있었어요.”

 여인은 거기까지 이야기하곤 잠깐 뜸을 들였다. 마흔 살 중반의 여인은 몸에 딱 달라붙는 회색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화장은 짙었다. 지난여름 피서 여행으로 해외에 다녀왔다는 그녀는 하와이를 회상할 때마다 괜찮은 미소를 지었다. 진심으로 웃을 때면 그랬다. 그녀에게는 열여덟에 접어든 딸이 하나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았어요. 그녀는 그 말을 할 때도 웃고 있었다. 그래서 몰랐던 거예요. 그녀의 딸은 새벽, 홀로 호텔을 빠져나와 하와이의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 그녀가 회상할 때마다 종종 미소 짓곤 하던 에메랄드 빛깔의 고요하고 아름다운 그 바다로.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것 때문에 죽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녀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럼 남편의 외도 때문인가? 내가 묻자 그녀는 나를 완전히 바보 취급하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아뇨, 그럴 리가요.”

 그녀는 그 말을 끝으론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여 예쁘게 칠한 손톱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쑥 내게 들이밀었다. 나는 고개를 빼고 그녀의 손가락을 내려다본다. 길고 가늘게 위태로운 그 손가락, 의 끝에 매달린 손톱을 꼼꼼하고 주의 깊게 살핀다. 섬세한 무늬가 단단하고 긴 손톱을 채우고 있다. 새끼손톱에는 무척 공들인 호피 무늬가 있다. 하지만 그 손가락이 눈에 띈 이유는 호피 무늬 때문이 아니라 길이 때문이었다. 유독 짧은 왼쪽 새끼손톱은 자세히 보니 험하게 깨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나는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뜸을 들였다.

 “내 남편은 나와 결혼한 후 수연이를 낳자마자 외도를 시작했어요. 그이의 사업이 잘 풀릴 시기에 만난 여성은 출장 안마를 주업으로 하고 있었지만 얼굴은 예뻤죠. 그의 휴대폰 메신저 폴더에 저장된 얼굴을 봤어요. 나는 어릴 때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종종 나의 어머니로부터 들어왔지만, 그 여자는 내 얼굴을 형편없게 만들었어요. 그 여자는 젊었거든요. 그건 내가 취할 수 없는 종류의 아름다움이죠.”

 여인이 멋대로 이야기를 시작해버려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고객의 이야기를 막을 권리가 내게는 없다. 나는 그녀의 입을 빤히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조금만 천천히 말해주세요.”

 나는 그녀가 입을 빠르게 움직일 때, 그녀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 한다.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할 때부터 상대방의 입만 바라보았다. 모든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기까지 삼 년이 걸렸다. 이 일을 시작한 지는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고객들은 내가 정신 분열을 앓고 있는 줄은 알아도 귀머거리인줄은 잘 모른다. 사실 전자는 거짓말에 가깝다. 아마도.

 “이 정도 속도면 될까요?”

 그녀가 되물어서 나는 괜찮다는 사인을 보인다. 네, 말하세요. 여인은 페트병 뚜껑을 돌려 물을 두어 번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말이 길어지기 전 그녀는 늘 물을 마신다. 방에 들어온 후 세 시간 내내 저랬다. 나의 고객들은 말이 장황한 사람들이 많다.

 “나는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뜯어보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어요. 질투가 끓어올라서 섹스를 할 때면 남편의 등을 긁었어요. 피가 날 때까지 긁었지만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어느 날 방안에서 남편의 휴대폰을 통해 전송한 그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깨달았죠. 아주 갑작스럽게요. 내가 질투하고 있던 건 남편의 외도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여자가 가진 외모라는 걸요. 하지만 난 그 때 벌써 서른이 넘었어요. 주름살이 매일 아침마다 조금씩 내려와요. 피부가 탄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게 몸으로 느껴져요. 어느 날은 테이블에 무릎을 찧었는데, 멍이 한 달이 넘게 가더군요. 원랜 이주일이면 사라졌는데 대체 내 몸에 무슨 일이 생긴 걸까요. 늙어간다는 건 그런 일이에요, 태훈 씨. 그걸 인정하는 건 좀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허영심이 많은 여인에겐 그래요. 그래서 보톡스를 맞고 안티에이징 광고에 귀를 기울이게 되죠. 하지만 내가 허영심이 많은 줄은 그 때 알았어요.”

 그녀는 내 앞으로 손등을 뒤집어 펼쳐보였다.

 “나는 그 날부터 네일 아트를 해요. 손톱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누그러져요. 남편에 대한 애정에 신경 쓰기보다 내 허영심에 물을 붓고 싶어요. 하지만 늙은 독은 잘 깨져서 물을 부어도 부어도 끝이 없죠. 새어나가는 구멍을 막아주는 두꺼비는 내 인생에 없어요. 그게 있다면 돈, 혹은 남자여야 하는데, 내겐 둘 다 없었거든요. 남편은 외도 사실이 내게 발각될 정도로 허술하고 매너 없는 남자였기 때문이죠. 내 딸 수연이는 지독하게 뚱뚱하고 못생겼습니다. 나를 한군데도 닮지 않았어요. 살을 빼라고 다그쳤지만 매일 밤마다 그 애는 피자를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었어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그런 식이었죠. 학교에서 집단 구타를 당하고 온 날, 치킨을 두 마리나 먹더군요. 뚱뚱해서 괴롭힘을 당하면 이를 악물고 빼야하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어요? 남편이 나를 버린 날부터 나는 내 손톱을 가꾸기 시작했는걸요. 정말이지, 내 딸은 나와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어요. 나는 그 애를 때리지 않았지만, 짐승 취급하듯 했죠. 도축해야만 하는 돼지처럼요. 그게 상처였을까요? 늘 꽥꽥거리며 나와 싸울 만큼 기운 좋고 자존감이 뚜렷한 아이였는데요. 뚱뚱한 건 잘못된 게 아니라고 비명을 질렀지만, 남편에게 버림받은 이후부터 나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 되어있었어요. 나의 딸은 하와이에서 죽었지만, 나 때문은 아닙니다. 시체를 건져 올린 다이버가 나에게 연락을 했죠. 하와이 경찰은 영어로 내게 말했어요. 당연한 말이죠, 하와이 경찰인걸요. 영어를 잘 몰라서 다 알아듣지 못 했어요. 게다가 그 남자는 말을 너무 빨리 했거든요. 하지만 나는 나를 스쳐가는 무수한 단어 중에서 ‘rape'를 똑똑히 알아들었어요. 수연이를 죽인 단어를 나는 똑똑히 알아들었어요.”

 이야기가 다른 쪽으로 새고 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장례식을 하는 동안에도 남편은 종종 밖으로 나가 전화를 받았어요. 그이는 거짓말을 할 때마다 넥타이를 만지죠. 아는 친구의 전화라고 말할 때마다 넥타이를 만지는 그를 보다가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손톱을 칠했죠. 아주 예뻤어요. 색이 잘 나왔죠. 흠집하나 내지 않았어요. 나는 딸을 잃은 이후부터 어떤 것에 짓눌리는 느낌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그러나 반짝이는 열손가락을 보면 그런 기분이 좀 가셨죠. 나는 허영심이 참 많았거든요. 손톱 하나로 슬픔을 이겨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더 사들이겠어요. 매니큐어를 충동적으로 쉰 개 정도 구매해온 나를 남편은 미친 사람 보듯 했지만,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 아니겠어요. 나는 이제 그 남자를 위해 살지 않는 걸요.”

 여인은 그리고 울음을 터뜨렸다.

 “손톱이 부러졌어요.”

 여인은 내게 이해를 구하지 않았다. 다만 슬퍼했을 뿐이다.

 “손톱이 부러졌다니까요.”

 그녀의 새끼손톱을 바라보며, 나는 서랍을 뒤적인다. 안쪽으로 깊게 구르는 유리병을 잡고 다시 탁자 위로 손을 얹어놓았다. 여인은 휴지 곽을 들어 뭉텅이로 휴지를 뽑아냈고, 형광등에 유독 반짝이는 호피 무늬는 그녀의 모든 손톱 중에 단연 으뜸이다.

 “그런데 더는 자라질 않아요. 아무리 기다려도 자라질 않았어요. 뭔가 이상하다 느낀 건 두 달이 지난 후였어요. 병원에 가서, 진단을 받았죠. 아무도 원인을 알지 못 했어요. 큰 대학 병원에 가야 한다고들 해서 휴일에 버스를 탔죠. 삼십 분을 기다려 들어간 곳에 앉은 의사는 내게 희귀한 질병에 대해 말해줬어요.”

 나는 그녀의 입술의 움직임을 주목한다. 내가 귀를 기울이는 방식. 이따금 울면서 입을 가리는 고객들이 있는데, 그녀는 울 때마다 눈가를 훔쳐서 좋았다.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여지를 주는 고객은 좋은 고객이다. 내가 공지한 메시지를 꼼꼼하게 읽어보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나는 고객을 만나기 전 안내 메일을 보낸다. 거기엔 내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설명도 짤막하게 붙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메일을 열어보지 않는다.

 “부인.”

 나는 계속하라는 제스쳐를 취한다. 그녀는 다시 물을 마셨다.

 “세포 분열이 일어나지 않으면 손톱은 자라지 않아요. 죽은 세포를 밀어낼 일이 없기 때문에 거기서 성장이 멈추는 겁니다. 자세한 건 모르겠네요. 틀렸더라도 말하지 마세요. 나는 의사가 아니니까요. 나의 손끝은 성장을 멈췄어요. 희귀병이었죠. 정확히는 내 딸이 죽은 이후부터 조금씩 진행되어 왔다고 하더군요. 의사는 세계에 딱 다섯 명이 앓고 있는 이 희귀한 질병에 대해 내게 말해줬고, 이제 그 질병을 앓는 환자는 여섯이 되었죠. 나의 새끼손톱은 영영 짧은 채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오는 내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어요. 수연이가 내게 벌을 준 걸까요? 하지만 수연이를 죽인 건 내가 아닙니다. 수연이는 강간을 당해 죽었어요. 누가 죽였는지도 알아요.”

 여인은 조금 훌쩍이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화장대 앞으로 돌아왔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더군요. 그 손톱을, 부러진 내 새끼손톱을 말입니다. 내 새끼손톱이요, 어떻게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짧아진 내 손톱이… 너무 흉했어요. 너무… 너무나요.

 그 순간 모든 감정이 밀려오더군요. 남편의 외도가 시작되던 순간을 깨달은 직후 느꼈어야만 했던 감정들이, 수연이가 바다로 홀로 걸어 들어가야만 했던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감정들이, 딸의 장례식에도 내내 휴대폰을 쥐고 있던 그 남자에 대한 감정들이…… 내가 지나친 채 화장대 앞에서 어떻게든 억눌렀던 내 인생이…… 내가… 내가 늙어가고 있었습니다. 나는 늙어가고 있었어요. 너무나도 빠르게 늙어가고 있었어요. 내가 거쳐야만 했지만 필사적으로 무시하고 넘어갔던 모든 감정이 내 주름살로, 내 탄력을 잃은 피부 속으로, 사라지지 않는 멍 자국으로 침투했어요. 삼 분만에 나는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죽이고 있었어요. 나를 물어뜯고 있었어요.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나는 그게 어디로부터 오는 건지도 몰랐어요. 내가 해야 할 일을 필사적으로 생각했고, 그랬더니 수연이가 떠올랐어요. 하와이가… 거기 수연이가……. 내 딸 수연이. 나는 내 딸의 같은 반 남자애를 찾으러 갔습니다. 담임에게 전화를 걸어 연락처를 가져왔죠. 놀이터에 불러내어 칼로 두 번 찔렀습니다. 그 애는 달아나지도 못 했어요. 하지만 죽일 수는 없었죠. 그 애가 피를 철철 흘리며 묻더군요. 아줌마, 왜 그래요? 나한테 왜 그래요? 걔가 그러래요? 걔가 그러래요?

 아줌마라는 소리에 칼을 내던지고 비명을 질렀어요. 내 손톱이 자라지 않는다고 말하자 그 애는 꼭 남편이 나를 바라보듯 하더군요. 내가 수연이를 바라보듯 했던 것도 저런 눈이었을 지도 모르겠어요. 나는 그제야 내가 어디에 분노하고 있는 지를 깨달았습니다. 나는 나에게 화가 나있던 거예요. 아줌마가 된 나에게. 새끼손톱이 자라지 않기 때문에 더는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해야만 하는 나에게. 볼품없는 중년 여성에게.”

 여인은 물을 마시려다, 이내 손을 내린다. 나는 서랍에서 써냈던 약을 책상 위로 올려놓았다. 여인은 잠시 그걸 바라보다가, 이내 부러진 새끼손톱을 만지작거렸다.

 “남편이 집에 들어와 와인을 꺼내는데, 나는 기저귀를 사러나갈 수가 없었어요. 놀이터에 그 남자애를 버려두고 나왔거든요. 경비가 나를 찾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저귀를 사러나갈 수가 없었어요. 내가 그 애를 버려뒀어요. 신고하지도 않았어요. 버려둔다는 건 그런 의미죠. 나는 철저하게 그 애를 버렸어요. 내 딸만큼이나. 그리고 나는 그 애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에요. 아니죠.”

 여인은 입을 다물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이 났다는 걸 깨달았지만 나는 기다렸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약을 보고도 손을 뻗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손짓해야만 했다.

 “당신은 이 약을 줘도 괜찮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네요.”

 “얼마나 기다려야 하나요?”

 “당신이 목을 매달았던 것보다 더 짧게.”

 사실 얼마나 더 걸릴지는 모른다. 독의 치사량은 사람마다 기준이 다르다. 나는 삼 분만에 죽었다는 고객의 소식을 전해들은 적이 있지만, 때때로 항의 메일을 받기도 했다. 오 분이 지나도 나는 건강하기만 해요. 하지만 그런 메일을 보낸 직후의 고객들도 더 이상의 항의 메일은 보내지 않았다. 십 분이 되기 전엔 마룻바닥 위로 쓰러졌으므로.

 나는 자살을 안내하는 카운슬러다. 귀가 먼 이후부터 나는 내가 할 일을 찾아다녔고, 이 일에 정착한 지는 일 년이 다 되어간다. 고객들은 까다롭고 나는 할 말을 듣는다. 나는 죽음을 일종의 권리로 취급한다. 사실 취급하지 않아도 그것은 권리에 가깝다. 우리는 생을 선택하진 못해도 사를 선택할 수는 있다. 나는 그것에 집중했다. 나는 목을 매달거나 강에 투신하는 대신 이 일을 선택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시작했다. 이 도시엔 나와 같은 안정적인 정착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모든 것이 불완전하게 돌아가는 도시엔 죽음조차 불완전하다. 줄을 묶은 커튼 봉이 무너지고, 투신하면 한강 구조 대원이 빠르게 사건을 접수해 자신을 건져내는 곳에서 완벽한 죽음을 맞이하는 일은 몹시 힘든 일이다. 생각보다 자살에 실패하는 사람들은 많다. 나는 그들의 안정적인 정착을 돕는다. 페이가 아무리 세도 그들은 기꺼이 돈을 지불한다. 나의 고객들은 통이 크다. 죽음을 앞둔 사람에겐 물욕이 없고, 그런 점에서 나의 사업은 현명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나는 이것을 불명예스럽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나의 사십 번째 고객이다. 약 네 시간가량 그녀는 내게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해 나를 설득시켰다. 나는 그녀가 장황하게 늘어놓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결국 약을 꺼내주었다. 그녀는 몹시 기뻐하는 기색이다.

 무턱대고 자살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좀 골치 아프다. 충동적이고, 뒤처리가 허술하다. 고객 한 명을 잘못 받았다가 그의 가족들에게 시달림을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메일함을 뒤져본 아들은 내게 소송을 걸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확한 물증은 없고, 그가 먹은 알약은 어디서나 구할 수 있는 감기약과 동일한 성분이다. 나는 빠져나왔지만 그 뒤로는 조금 신중하게 되었다. 사업이 형태를 갖출 때마다 메일 안내문은 조금씩 길어졌지만, 나의 일은 여전히 성황이다. 고객들은 죽어야만 하는 이유를 내게 늘어놓고, 난 그들이 다섯 시간 안에 나를 설득시키지 못 하면 돌려보냈다. 나는 사람을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므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마음에는 허술함이 없어야 한다. 티끌만큼이라도 삶에 대한 희망이 남아있다면 나의 일은 곧 살인이 된다. 그럼 안 된다. 누가 들어도 고개를 끄덕일만한 사연도 되돌려 보낼 이유가 되고, 말도 안 되는 이유에도 알약을 내밀 수 있었다. 순전히 내 주관이지만, 이건 내 사업이니 아무도 뭐라고 할 순 없다. 같은 이야기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설득은 새치 혀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얼굴이 한다. 귀를 듣지 못 하게 된 이후로 나의 의사소통은 다른 방식으로 기민해졌고, 얼굴 근육의 미세한 변화 하나하나에도 나는 날카롭게 반응한다. 거짓을 고하는 고객들을, 삶에 조금의 희망을 건 고객들을, 나는 알 수 있다. 그리고 돌려보낸다. 그들이 다시 돌아오는 경우는 없다. 나는 나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음을 믿는다.

 여인은 알약을 들고, 내게 현금을 내밀며 고맙다는 인사를 한다. 나는 헤드폰을 쓰며, 그녀가 문고리를 돌리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인사한다. 그녀는 웃으며 문을 나선다. 입 모양으로 안녕, 을 중얼거리는 여인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그냥 입모양이다. 멋진 고객이다. 내 안내 메일을 정말로 읽어본 고객들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별로 없다.

 문이 닫히고, 나는 가장 시끄러운 음악을 튼다. 갑갑하게 막힌 귓구멍으로 날카로운 진동이 파고든다. 쿵, 쿵, 쿵, 쿵, 쿵, 쿵 내 심장을 때릴 만큼 매서운 진동이다. 하지만 귓구멍으론 아무 것도 들어오지 않는다. 나는 귀머거리다. 내 귀는 단단하고, 다시는 열리지 않아. 죽음에 정착한 유일한 그곳은 알약이 필요 없었다. 나는 내 스스로를 고객으로 만들지 못 하는 대신 매일 한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한다. 나는 자살을 안내하는 카운슬러다.

 나는 오늘의 고객을 떠올린다.

 “부인.”

 눈을 감으면 그녀의 새끼손톱을 볼 수 있다. 내가 과연 어떤 말을 해야만 했는지 깨닫는 순간이 좋다.

 “아름다워요, 부인.”

 나는 중얼거렸다.

 “정말 아름다웠어요, 부인.”

 슬프지 않지만 슬펐다. 눈물이 나오지 않는다. 그녀의 새끼손톱이 사라지질 않는다. 나는 오래도록 그 손톱을 생각한다. 더는 자라지 않는다는, 영영 부러진 채로 남을 손톱을, 거기에 붙은 아름다움에 대하여, 그 호피 무늬, 그럼에도 그녀가 오늘 삼키게 될 알약 속 성분 하나하나에 존재할 그 새끼손톱을. 그리고,

 그리고 나는 평범한 카운슬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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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럼프 왔을 때 이겨내보려고 혼자 썼던 단편.
맘에 들지는 않지만 몇 안 되는 창작글이라 백업해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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