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ara

티스토리 뷰

정의의 궤도 «징검다리»
1차/old 2019. 10. 23. 01:05

 

 
 

 아나렉샤는 종종 정원으로 향했다. 격렬한 토론 수업이나 모의 전술 실습이 끝난 뒤 느슨한 정신으로 걷다 보면 익숙한 입구에 도착해있었다. 이런 일들은 점점 잦아졌고 곧 습관이 되었다. ACOTS에는 느세파 가든과 달리 몸을 숨길 만큼 넓은 잎사귀를 가진 식물이나 거대한 나무 같은 건 없었지만, 대신 조용히 흐르는 인공 개울과 양지바른 곳에 놓인 벤치들, 아치형으로 얽혀 자라는 덩굴이 침묵을 보호했다. 적요는 격렬한 감정으로부터 스스로를 억누르거나 통제해야만 하는 아나렉샤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고, 한동안 아나렉샤는 정신을 빼놓으면 정원으로 향하는 이 습관이 어릴 적 버릇으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했다. 침착해지고 싶을 땐 반드시 정원의 그늘진 곳을 찾아가곤 하던 가든 시절의 일들 말이다. 

 정원에서 아나렉샤가 하는 일은 또 있었다. 바로 볕이 잘 드는 물가를 찾아가는 것이다. 콘스탄틴은 매번 시냇가 벤치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고개를 앞으로 숙이고 몸을 기울인 채 눈을 감고 있는 그 애를 항상 깨운 건 아니었다. 고학년이 되자 콘스탄틴도 아나렉샤도 저마다의 사정으로 바빴고, 아나렉샤는 콘스탄틴이 곧잘 공용 휴게실이나 도서관에서 밤을 새곤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괜한 심술을 부리지 않았다. 대신 아나렉샤는 그 곁에 앉아 패드를 만지거나 늘 그렇듯 침묵 속에서 자신을 정돈하는 일을 했다. 어깨에 기댄 콘스탄틴의 무게가 익숙해질 무렵 아나렉샤의 새로운 습관은 일상이 되었다. 

 가끔은 자는 옆모습을 물끄러미 들여다볼 때도 있었다. 아나렉샤는 언제 콘스탄틴이 이렇게 컸을까 했다. 머리카락을 냉큼 자르고 왔을 때는 내심 깜짝 놀랐다. 목덜미를 문지르며 머쓱하게 감상을 묻는 콘스탄틴은 난처한 순간에 뺨을 긁고 시선을 피하는 어린 시절을 훌쩍 건너뛴 것처럼 느껴졌고, 아나렉샤는 그 극적인 변화에 당황해서 퉁명스럽게 그 애를 지나쳐 교실로 도망치고 말았다. 그 순간이 콘스탄틴에게는 제법 섭섭하게 남았던 것인지 그날 정원에서 만났을 때는 어깨에 기대지도 않고 의기소침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아나렉샤는 잘 어울린다는 말을 하기 전에 심호흡을 해야 했다. 얼굴이 조금이라도 빨개진다면 알아챌 테니까. 콘스탄틴만큼은 분명 알아챌 거라는 믿음이 아나렉샤를 조마조마하게 만든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런 뒤에도 바쁜 날들이 이어졌다. 아나렉샤는 곧 콘스탄틴의 단발에 익숙해졌고, 피로가 쌓여 날카로워진 얼굴이라던가, 다크서클이라던가, 마주보기 위해 고개를 들어야 하는 키 차이에도 서서히 적응해나갔다. 너무 오랜 시간 함께 해온 두 사람 사이에 색다른 일이라고는 좀처럼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아나렉샤는 조마조마하던 그 순간을 금방 까맣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리진과 콘스탄틴이 사귄다는 소문을 듣고 순간적으로 철렁 내려앉았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충격과 공포 속에서 경험한 한나와의 첫 키스는 아나렉샤로 하여금 순간의 두근거림을 사랑과 연결 지어서는 안 된다고 강력히 생각하게 만들었고, 반드시 기억되어야만 하거나 기억하고 싶은 순간들은 그런 식으로 소거되었다. 일상이 시냇물처럼 흘러갔다. 돌아오지 않는 한 방향의 물살처럼, 격정적이거나 다만 너무 희미하지만은 않은 형태로 두 사람을 지탱했다.

 그러니까 졸업 무도회 파트너를 청한다면 그 일상이 유지되는 공간이 좋았다. 콘스탄틴이 거절한대도 어쩐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곳, 그 순간을 금방 잊어버릴 자신이 드는 곳, 괴롭거나 슬퍼진다고 해도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가다듬을 힘을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정원뿐이었다. 하지만 덩굴이 자라는 아치를 통과해 시냇가로 향하는 동안 아나렉샤는 아주 오래전, 자신을 기다리던 콘스탄틴을 향해 뛰다 말고 이곳에서 열두 살로 돌아가고 만 순간이 다시는 오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직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치에 앉은 열아홉 살짜리 콘스탄틴은 여전히 아나렉샤를 기다리고 있고, 열아홉 살의 아나렉샤는 사과의 꽃다발 대신 전하고 싶은 간단하고도 진중한 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일상은 흘러가버리는 게 아니라 시간과 함께 쌓여 마땅히 굳어지는 거였다. 막상 콘스탄틴을 마주 보았을 때에 입이 쉽게 떨어지지 않은 게 당연했다. 딴청을 피우자 콘스탄틴이 평소처럼 면박을 주었다. 그건 아나렉샤를 일상의 세계로부터 튕겨져 나오지 않도록 유지시키는 역할을 했다. 정원의 힘이 아닌, 오로지 콘스탄틴이 준 그 힘으로 아나렉샤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말했다.

 “느세파 콘스탄틴, 나랑 같이 무도회 갈래?”

 그런 후 영원할 것 같은 침묵이 이어졌다. 

 어물거리던 콘스탄틴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다 헛기침을 하더니 앞을 보고는 아주 작은 목소리로 아나렉샤가 듣고 싶어 했던 말을 속삭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정수리까지 차올랐던 긴장감이 바닥으로 쏟아지는 게 느껴졌다. 침묵 속에서 어떻게든 난처함을 읽어내고자 애쓰는 불안한 마음을 때려눕히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몸이 기진맥진해 옆으로 천천히 쓰러졌다. 콘스탄틴은 피하지 않고 어깨를 내줬다. 아나렉샤는 그 애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심장소리가 물소리를 가볍게 추월했다. 한밤의 정원이어서 다행이라고 아나렉샤는 생각했다. 이 바보 같은 얼굴을 들키지 않아서 다행이야.

 사실은 알고 있다. 어둠과 침묵을 찾아 그늘로 들어가던 아주 어린 시절의 버릇, 수면 위에서 파편으로 부서지는 빛을 향해 나아가는 ACOTS에서의 나날들. 대조적인 두 습관에는 닮은 바가 없었고 그건 단절된 기억으로 이어지지 않고 남았다. 홀로 있기 위해 정원에 숨던 날들로부터 오래 떨어져 있었다. 이제는 콘스탄틴이 어디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지 손쉽게 찾아내는 시절이 더 가까웠다. 햇빛은 종종 그 애의 밝고 결 좋은 머리카락으로만 흘러내렸다. 그 빛을 보려고 매번 정원으로 걸어들어왔다.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