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신속하게 사람을 넘어뜨리는 방법으로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거다. 두 번째는 막대로 등허리를 세게 후려친다. 이러면 상대가 알아서 고꾸라진다. 세 번째는 정통으로 정수리에 주먹을 내리꽂는 것이다. 적당히 힘만 들어가면 반으로 접힌 상대가 발치에서 뒹구는 꼴을 볼 수도 있다. 
 잼에게 이 기술을 가르쳐준 사람은 동쪽항만으로 흘러들어온 패잔병이다. 그 남자는 길거리에서 동냥을 하며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고 있었다. 눈빛이 형형해서 언젠가 말을 타고 칼을 다뤘을 거라는 인상을 주었다. 구걸하지 않을 때는 바닥을 보며 지난 세월을 눈으로 더듬어 나가고 있었다. 잼은 항구의 뒷골목에서 그를 발견했다. 그는 마흔 살이었고 잼은 열 살이었다. 
 “안녕하세요.” 잼이 말했다. 
 “이것 좀 드실래요?” 
 잼은 그의 손위에 고기 한 덩어리를 얹어놓았다. 
 남자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조로하고 비굴했으나. 잼은 생각했다. ‘대단한 일을 했던 사람일 거야.’ 
 “무기를 만져본 손이에요, 그렇죠?” 
 잼은 남자의 더러운 손을 주워들고, 작은 손바닥을 펼쳐서 그의 굳은살을 꼼꼼히 만졌다. 
 “언젠가 당신 짐을 빼앗으려고 덤벼든 사람을 귀신처럼 해치우던 걸 본 적 있어요. 나한테 그걸 알려주면 매일 필요한 걸 하나씩 가지고 올게요.” 
 잼은 남자의 나머지 한손에 창처럼 길쭉한 작대 하나를 얹어주었다. 
 “당신 앞에는 고기 한 덩어리가 있지만 또한 당신은 이걸 선택할 수도 있어요.” 
 남자는 다시 한 번 잼을 바라보았고, 잼은 그의 눈동자 너머로 무엇이든 읽기 위해 노력했다. 굶주렸다면 고깃덩어리를 선택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수도 있다. 용사도 배가 불러야 포효하는 법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잼은 남자의 눈에서 어떤 빛, 오로지 비굴하기 위해서만 하늘을 바라보게 된 삶의 지층에 깔려있던 그것이 솟구쳐 오르는 것을 보았다. 땅을 보며 굴종하고, 하늘을 보며 영광을 알던 기사의 시절이 불꽃처럼 튀어 오르는 것을 잼은 똑똑히 보았다. 늙은 남자의 운명이 전복(顚覆)되는 순간을 열 살의 잼은 똑똑히 보았다. 
 남자가 말했다. 
 “좋다. 내 이름은 이곤이다. 네 이름은 무어냐?” 
 “잼.” 
 남자는 작대를 잡았다. 
 “오늘부터 널 가르쳐주지.” 
 이것이 잼이 스승을 얻게 된 일화이자, 평생을 걸쳐 써먹게 될 세 가지 맨손 격투를 배우게 된 발단이다. 

 이곤이 잼을 오래 가르쳐 준 것은 아니었다. 잼이 격투를 배운 건 고작해야 일 년 남짓이다. 그래도 잼은 계속 “했다.” 
 항구에는 몸집을 믿고 어슬렁거리는 장성들이 많았다. 소위 놈팽이들이 자릿세를 뜯거나 어리숙한 귀족 아이들의 주머니를 털었다. 항구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주택가가 나왔고, 거미줄처럼 늘어진 길거리가 도시 구석구석을 관통하며 흘렀다. 그 거미줄마다 시정잡배들이 놈팽이 흉내를 냈다. 키만 컸지 근육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녀석들이 몰려다니며 어린 애들을 겁주고 간식거리를 뜯어가는 것이다. 잼은 그들과 마주칠 때마다 발을 걸거나 등허리를 후려쳤다. 주먹이 좀 더 단단해진 후에는 정수리를 사정없이 내리꽂았다. 기분이 좋을 때면 으레 그렇게 했다. 기분이 나쁠 땐 잡배들에게 둘러싸인 아이가 훌쩍거려도 행인들을 모으고 종종걸음으로 벗어나곤 했다. 평민이 항상 용사일 수는 없잖아? (그녀가 귀족임을 알게 되는 건 좀 더 이후의 일이다) 
 오셀로를 만났을 때, 잼은 열여섯 살이었고 당나귀를 끌고 길거리를 지나고 있었는데 마침 기분이 좋았다. 오셀로는 열 살이었고 잡배들에게 둘러싸인 채 골목에서 떨고 있었는데, 분명 죽을 맛이었을 거다. 잼은 그 애를 도와주기로 결심하자마자 “과과”의 등에 올라탔다. (과과는 열 살에 잼이 얻은 당나귀다. 이 친구를 얻게 된 경위는 나중에 설명하겠다) 
 그 날, 골목에서 잼이 벌인 싸움은 싱거우리만큼 순식간에 끝나버렸다. 잼에게 얻어맞은 우두머리 아이가 울기 시작해 나머지 아이들이 부리나케 도망을 쳤기 때문이다. 냅다 달려온 게 무색할 정도였다. 과과를 급하게 멈춰 세우자 발밑으로 흙먼지가 잔뜩 일었다. 
잼이 나귀에서 뛰어내렸을 때, 잼의 크림색 망토는 바람 덕분에 한껏 하늘로, 하늘로 솟구치고 있었고, 때마침 햇빛이 직각으로 내리쬐어서 사방이 반짝반짝했다. 오셀로의 얼굴 위로 커다란 망토 그림자가 졌다가, 천천히 가라앉는 장면이 느리게 전개되었다. 잼이 그 순간을 느리게 기억하는 것은 오셀로의 눈동자 때문이다. 
 그 애는 홍안이었다. 

 삐뚤빼뚤한 골목을 빠져나오는 동안, 과과는 몇 번 더 크게 히힝, 울음을 토했다. 잼은 과과가 오셀로를 깨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흥분한 당나귀를 귀족 출신 꼬맹이와 놔둘 수는 없는 것이다. 
 잼은 슬그머니 과과를 바깥쪽으로 몰면서 딴청을 피웠다. 
 “넌 왜 귀족이면서 호위병 하나 안 달고 다니냐?” 
 “그야, 집에서 몰래 나왔으니까요…….” 
 오셀로가 작게 중얼거리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귀족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 
 “바보냐? 돈 많은 빨간 눈깔은 다 카르스텐 가 사람이니까 그렇지.” 
 ‘완전 띨띨한 녀석이네.’ 잼은 생각했다. 
 “아무튼 잘 됐다. 너 돈 넉넉하지? 나 마침 배고픈데 시장에서 과일 좀 사다주라. 과과 녀석도 먹일 거야.” 
 “과과요?” 
 “응, 얘 말이야.” 잼은 바깥쪽으로 걷고 있는 당나귀를 가리켰다. 
 오셀로는 회색 털을 가진 다부진 당나귀를 바라보았다. 
 “얘 이름이 과과예요?” 
 “응, 근데 가까이 다가가지 마. 성질 사나워서 막 물어.” 잼은 괜히 겁을 줬다. 
 “누나도 무나요?” 
 “바보야, 내가 주인인데 날 물겠냐?” 
 잼은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진짜 띨띨이.’ 
 “누나는 어쩐지 연극에 나오는 기사님 같네요.” 오셀로가 말했다. 
 “말을 타고 망토를 두른데다가 무척 강해요. 그래서 말인데요.” 
 오셀로는 한 발짝 뛰쳐나가 잼을 향해 똑바로 섰다. 그리고 두 팔을 벌리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육포랑 과일이랑 드시고 싶은 만큼 사드릴 테니까 오늘 저녁까지 저랑 같이 있어주면 안될까요?” 
 잼은 과과를 멈춰 세우고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뺨은 발갛게 물들어 있고 통통하게 젖살이 올라서 아주 둥글었다. 사랑을 넘치게 받아서 어떻게든 쏟고 싶어 안달이 난 눈처럼 보였다. ‘내가 조금만 더 배를 곯으며 살았어도 저 애를 증오했을 것이다.’ 라고 잼은 생각했다. 그것은 분명 티끌만큼의 차이일 것이다, 라고. 
 잼이 말했다. 
 “얘, 너 내가 한가한 줄 아니?” 
 오셀로가 벌리고 있던 양팔을 내렸다. 그리고 엉거주춤 서서 고개를 기울이고 머쓱하게 웃었다. 
 그 모습이 잼의 마음에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은 강하지는 않았음에도 몹시 거슬릴 만큼은 따끔거렸다. 이런 주먹을 뭐라 부르더라? 
 잼은 입을 샐쭉하게 내밀며 슬그머니 덧붙였다. 
 “뭐, 오늘은 한가하니까…….” 
 오셀로가 환하게 웃는 것을 팔짱을 끼고 모른 척했다. 

 이곤은 스무 살적부터 기사로 전장을 누비며 승리를 누렸다. 이베르타가 통일되지만 않았더라면 그는 영지에서 영광을 누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국에 멸망이 닥쳤을 때, 이곤의 운명도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황량한 북쪽 산맥을 떠돌던 그는 추격을 피해 남쪽으로, 혹은 동쪽으로 비틀거리며 걷거나 달렸고, 마침내 겨울에도 얼어 죽지 않는 땅에 도달했다. 바다를 얻고 상인이 번성하는 도시였다. 길거리에 누워서 잠을 청하다보면 빵조각을 얻었다. 부유는 부드러운 검이었다. 북쪽산맥은 얼어 죽게는 만들지언정 기사의 이름을 빼앗을 수 없었으나, 도시의 번영은 시간을 들여 이곤의 이름을 탈환하였다. 당장의 배곯음 앞에서 굴종하기 시작한 남자는 거지가 되었다. 검을 내려놓고 찾아온 두 번째 인생이었다. 
 잼은 그에게 세 번째 인생을 주었다. 
 “난 이곤이 나한테 두 번째 인생을 만들어 줬다고 생각해요.” 잼이 남자를 보며 히죽 웃었다. 
 그들은 골목에서 작대를 창으로 삼아 짧은 창술을 겨루던 참이었다. 잼이 늘 졌고, 마지막에는 씩씩거리며 나뒹굴었는데, 처음으로 잼이 이겨서 둘 다 몹시 기분이 들떠있었다. 
 “두 번째 삶?” 이곤이 되물었다. 
 잼은 눈을 감고 벽에 기댄 채 발을 까딱거렸다. 
 “응, 두 번째 삶. 난 이곤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내 삶을 어쩌면 좋을지 도무지 감도 못 잡고 있었거든요.” 
 잼은 노래처럼 중얼거렸다. 
 “기사를 발견했으니 기사가 되기로 했죠. 용병으로 뛰게 되면 이곤이 가르쳐준 것들을 더 잘 할 수 있게 될 거예요.” 
 “열한 살짜리가 무슨 용병이냐, 완전 꼬맹이구만 그래.” 이곤이 낄낄거렸다. 
 잼은 혀를 쭉 내밀었다. 
 “흥, 나이가 차면 당장 용병으로 뛸 거예요. 다음 해에는 말도 얻어낼 작정이라구요?” 
 “그러시던가.” 이곤이 성의 없이 대답했다. 
 잠시 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몸을 쓰느라 너무 지쳤던 것이다. 
 머리 위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태양 빛이 거리로 쏟아졌다. 바닥이 온통 빨갛게 물들어서 꼭 잼의 눈동자처럼 보였다. 잼은 빛으로 촘촘하게 채워진 바닥의 타일들을 눈으로 쓸어보았다. 그것들은 몹시 아름다워서, 먼 미래에 대한 확신을 주었다. 
 “그 때 고깃덩어리 대신 작대를 선택해줘서 고마워요.” 잼이 이곤에게 말했다. 
 “나는 이곤이 아마 고기를 선택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곤은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노을에 감싸인 잼의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불타오르고 있었다. 거의 오렌지색처럼 보였다. 불꽃처럼. 혹은 생명. 어쩌면 그것보다 더 무한하고 넓은 것. 확장되는 에너지. 죽어가는 것들을 일으켜 세우는 의지 같은 것들. 요컨대 굴종 속에 파묻힌 전사의 이름을 불러 세우는 힘. 
 처음 만났던 잼의 눈동자 속에도 어김없이 담겨있던 그것들. 
 이곤은 그 때, 이렇게 생각했었다. ‘내가 조금만 더 영광 없는 삶에 익숙했더라면 저 애를 증오했을 것이다.’ 
 이곤이 말했다. 
 “나는 고깃덩어리를 선택했을 수도 있었어.” 
 “정말?” 잼이 고개를 기울이고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작대를 잡았죠?” 
 이곤은 잼의 눈동자를, 타오르는 불꽃을, 보석 같은 힘을, 영원한 생명을 바라보았다. 
 “명예가 걸렸거든.” 그가 대답했다. 
 “내 자신에 대한 명예 말이야. 네 녀석 말고.”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는데.” 잼이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니까 내가 살아온 삶에 배반하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라는 거야, 알겠냐.” 
 이곤은 자신의 가슴팍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건 누가 심장에 주먹을 때리는 것처럼 거슬리고 아프거든.” 
 이곤은 마흔 한 살 겨울에 페스트로 죽었다. 

 오셀로와 시장을 두 바퀴째 돌고 있을 무렵에는 해가 저물고 있었다. 오셀로는 종종걸음으로 잼을 쫓았고, 잼은 성큼성큼 걸어 다니며 천막을 쑤시고 다녔다. 
 “누나, 벌써 체리만 두 봉지 째에요. …다른 건 안 먹어요?” 
 오셀로가 잼의 체리봉투를 안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쓸데없는 참견이야. 어련히 알아서 다 먹는다구.” 
 잼이 오셀로의 가슴팍에서 체리 하나를 꺼내 물며 구시렁거렸다. 
 “음, 과일만 먹으니 짭짤한 게 당기는데. 육포 먹을까?” 
 “누나는 정말 배가 크시네요…….” 
 오셀로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잼은 그의 정수리에 꿀밤을 먹였다. 오셀로가 펄쩍 뛰었다. 
 “아야, 왜 때려요!” 
 “그냥 때려보고 싶었어, 띨띨아.” 
 “너무해요…….” 
 오셀로가 정수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삐죽 내밀었다. 
 “호쾌하게 먹고 마시는 것까지 기사를 닮았다는 뜻이었다구요….” 
 “누가 뭐래?” 
 잼이 콧방귀를 뀌자 오셀로가 바짝 따라붙으며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것 때문에 때린 거 아니에요?” 
 “아니거든!” 잼은 딴청을 피웠다. 
 “그리고 난 기사가 아니라구.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나는 기사는 못 돼.” 
 “왜요?” 
 “진짜 기사를 알고 있거든. 함부로 흉내 내다간 비웃음 당하고 말 걸.” 
 둘은 대로변에 세워진 천막을 지나 골목마다 세워진 조그만 잡화상 사이를 지났다. 길이 충분히 넓지 않아서 과과가 뒤처지게 되었다. 과과는 걷는 도중 오셀로의 손등에 축축한 주둥이를 가져다 대서 오셀로를 조금 놀라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난폭한 당나귀는 소년의 손등을 다정하게 핥아주었고, 이번에는 잼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너 이 자식, 왜 낯선 녀석에게 다정해지는 거야?” 
 잼은 서운함과 괘씸함이 뒤섞인 눈으로 과과를 바라보았다. 
 “완전 배신자야!” 
 “과과도 누나처럼 나를 좋아하나 봐요.” 오셀로가 웃었다. 
 잼은 오셀로의 정수리에 한 번 더 ‘정의의 철퇴’를 한 방 먹여주었다. 오셀로는 짧게 비명을 지르며 둥그런 머리통을 감싸고 눈물을 그렁그렁 달며 물러났다.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오셀로가 항의했다. 
 “아파죽어요! 누나 주먹이 얼마나 매운지 아세요?” 
 “능청을 떨어대니까 얄미워서 한 방 먹인 거지.” 
 “능청이라뇨! 그럼 누나는 절 왜 도와주신 거예요?” 
 “도와주는 데에도 이유가 있냐?” 
 둘은 코너를 돌았고, 아까보다 좁은 길이 펼쳐졌다. 과과를 데리고는 도무지 이동할 수가 없는 골목이었다. 집과 집 사이가 몹시 좁아서 어두컴컴했다. 그러나 그 사이를 넘어가면 작은 광장이 나왔다. 노을 때문에 타일이 붉은색으로 온통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좁은 틈사이로도 그것을 볼 수 있었다. 둘은 잠시 멈추어 서서 그 골목 너머에 존재하는 많은 빛들-쏟아지고 부서지고 붉게 타오르는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나는 너를 무시하고 지나칠 수도 있었어.” 
 잼은 불쑥 말해놓고도 누군가를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오셀로가 잼을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왜 저를 구해주신 거예요?” 
 “기분이 좋았거든.” 잼이 대답했다. 
 “그런데 널 무시하고 지나치면 기분이 나빠질 것 같았어!” 
 잼은 손을 들어서 가슴언저리를 문질렀다. 
 “마음이 콕콕 찔려서, 엄청 거슬리는 거 있지. 이때까지 잘 살아왔는데, 고작 그 순간을 지나치는 게 내 삶을 배반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거야. 이런 기분을 뭐라 부르는지 알아?” 
 잼이 중얼거렸다. 
 “난 예전에는 알았던 것 같은데, 다 까먹고 말았어….” 
 하늘이 천천히 기울고 있었다. 둘은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오셀로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오셀로는 벽과 벽의 좁은 어둠 너머로 일렁이는 빛 조각들을, 천천히 사라지고 있는 불꽃을 바라보았다. 
 오셀로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건 아마 누나의 긍지 같은 걸까요.” 
 “긍지.” 
 잼이 되뇌었다. 
 “그래, 나는 긍지를 지키면서 살고 있는 거구나.” 
 이번에는 누군가를 따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잼은 그것이 좋았다. 그리고 조금 슬퍼졌는데,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어떤 것을 얻고, 어떤 것을 영영 상실한 기분이 들었다. 타오르다 지는 순간을 보고 있기 때문일 지도 몰랐다. 
 “누나, 다음에도 저 구해주실 거죠?” 
 오셀로가 말했다. 
 “아니면 내가 누나 동생이라고 허풍을 떨어볼까요? 우리 눈동자 색도 비슷하잖아요. 머리도 땋았구….” 
 “야 임마, 너 같은 띨띨이가 내 동생이라고 자처하고 다니면 내 명예는 어떡하란 거야.” 
 잼이 면박을 주긴 했지만 꿀밤을 먹이진 않았다. 
 오셀로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긍지랑 명예는 멀리 있지 않다구요.” 
 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 후에, 두 소년소녀는 어둠이 고인 틈과 틈 사이로 보이는 태양의 광장이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서있었다. 노을 같은 것을 오래 보고 있는 게 아니었는데. 번영과 멸망 속에서 사라진 사람들을 생각했다.

comments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