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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젠가는 변덕을 부리고 싶어서 몸을 한껏 웅크리고 하늘에서 떨어진 적이 있다. 유성우가 내리던 날이었다. 힘썬은 구태여 대기권을 뚫고 올라가지는 않았다. 대신 다른 것, 대기권을 뚫고 떨어지는 수많은 돌 알갱이들과 박자를 맞추기로 했다. 원한다면 100km도 넘게 질주할 수 있었지만 힘썬은 속도를 늦췄다. 그리고 불타 사라지고 있는 그들처럼 빛을 뿜으며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평균 50km/s의 속도로 떨어지는 별들-그것은 사실 별들이라 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별로 취급되었다-과 함께 추락하던 순간을… 힘썬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지만, 아주 나중에, 그러니까 그 날에 태어난 누군가와 만나게 된 이후에는 그것을 꽤 낭만적인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

힘썬은 달리는 성우의 등을 보면서 속도를 늦췄다. 눈을 크게 뜨고 있어서 성우의 이마에서 흩어지는 작은 땀방울 하나하나의 광채를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었다. 조금 젖은 뒤통수, 앞서 나가기 위해 좌우로 흔드는 두 팔을 보고 있자면 의도하지 않아도 속도가 절로 느려지고는 했다. 성우는 단숨에 앞서 나갔고, 얼마 가지 않아 결승선에 도달해 발을 멈추었다. 힘썬은 성우보다 다섯 발자국 정도 늦게 도착했다. 성우는 옅은 땀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힘썬을 돌아보았다. 힘썬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성우처럼 땀을 닦아내는 시늉을 했다. 하지만 닦아내야할 만큼의 양이 묻어나오지는 않았다. 다음번에 뛸 때는 보다 인간이 되어야겠다고 힘썬은 생각했다. 성우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숨이 가빠보였다.

“한 판 더해!”

“오, 하지만 네가 이겼는걸.”

힘썬이 기분 좋게 말했다.

“보통 그 대사는 진 쪽이 하는 것 아니니, 성우?”

성우는 흠, 하고 힘썬을 쳐다봤다.

“역시 일부러 져준 느낌이 든단 말이야.”

힘썬은 거짓말을 할 수는 없었지만, 대답하지 않을 자유는 있었으므로 미지근하고 의미심장하게 웃기만 했다. 하지만 대답해야만 한다면 몇 가지 변명을 할 생각이었다. 첫째로 힘썬의 몸은 평범한 인간이 아니고-심지어 제대로 완성되어 있지 않다-둘째로 어느 정도의 속도가 공평한지 몰랐기 때문이다. 달리기 시합을 위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로 신체를 조정하고 맞춰야 하는지 아직 힘썬은 알 수 없었다. 그러니까 성우에게 관용을 베풀기 위해 고의적으로 승부를 조작하고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었다.

성우가 처음 달리기 시합을 신청했을 때, 힘썬은 흔쾌히 대답하면서도 왜 성우가 그런 것을 원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성우는 힘썬에게, “네가 빛의 속도로 달릴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라고 말해주긴 했지만 그것 역시 곰곰이 뜯어보면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자신이 질 것을 상정하고 승부를 신청했다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인간세상에서 승부란 이기기 위한 게임이 아닌가. 성우는 이기지 않아도 상관없는 승부를 힘썬에게 신청해서 과연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첫날 두 사람은 운동장에 나란히 서서 한 트랙을 코스로 잡고 3을 거꾸로 셌다. 그런 후 쏜살같이 튀어나가 두 팔과 다리를 열심히 흔들어대며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힘썬은 지금보다 훨씬 못 달렸다. 성우의 속도를 손쉽게 따라잡을 수 있었지만 그것을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속도를 의도적으로 자꾸만 늦췄고, 그래서 결승선에 도착했을 땐 성우도 자신의 승리가 어느 정도 힘썬의 의도가 들어간 성적임을 눈치 챘다. 성우는 힘썬을 돌아보자마자 “한 판 더!”를 외쳤다. “한 번만 더 달리자구.” 힘썬은 달아오르기 시작한 성우의 두 뺨을 바라보면서 좋다고 대답했다. “좋아, 계속 달리자.” “이번엔 봐주지 말고.” 성우가 힘주어 말했다. “정말이야, 봐주기 없음이야.”

하지만 봐준다던가, 혹은 전력을 다한다던가 하는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힘썬의 몸이 인간에 보다 가까워져야했기에 성우는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 힘썬은 점점 성우가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아슬아슬하게 결승선을 넘었지만, 성우는 여전히 힘썬의 어떤 것들이 궁금한 것처럼 전력으로 달려 나갔다. 몇 주째 같은 트렉을 돌고 또 돈 후에야 힘썬은 어렴풋하게 성우가 사실은 이기거나 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힘썬’이라는 마법사에 대해 알고 싶었기 때문에 매일같이 달리기 시합을 신청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쩌면 성우는 인간을 흉내 내어 페어플레이를 하자는 게 아니라, 마법사인 채로 남아 일시적이지만 동일한 목표를 자신과 함께 달성해주기를 바랐던 걸지도. 그러자 달리기 시합에서 더는 발을 맞추기 위해 애쓰거나 자신의 몸 상태를 조정하기 위해 전전긍긍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힘썬은 달리는 성우에 대해 관찰하기 시작했고, 곧 달리는 인간이란 굉장히 근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로 힘썬은 젖은 등, 흩날리는 땀방울, 달리느라 긴장된 몸의 상태와 빠른 호흡 따위를 사랑하게 되었다. 예전과 달라진 것 없이 성우보다 늦게 결승선에 도착했음에도 과정이 달라져 있었으므로 의미가 있었다.

하루는 운동장을 연속으로 다섯 바퀴째 돌았다. 힘썬조차 기진맥진할 만큼 뛴 후에 두 사람 모두 결승선보다 몇 미터 떨어진 지점에서 벌렁 드러누웠다. 성우는 가슴을 오르락내리락하며 갈라진 숨소리를 냈다. 땀이 쩔쩔 흘러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힘썬은 자신의 두 뺨을 더듬거리며 만져보았다. 무척이나 뜨거웠고, 보통의 인간 같았다. 어쩌면 다음 시합에서는 전력을 다해도 성우에게 질지도 몰라. 그렇다고 해도 성우는 내가 의도적으로 지고 만 거라는 생각을 할까. 성우를 기쁘게 해주려면 정말 빛의 속도로 뛰어야 하는 것일까를 생각하고 있는데, 성우가 헐떡이며 말했다.

“정말로, 아, 진짜 힘들다.”

힘썬도 마찬가지로 헐떡이며 대답했다.

“나도, 힘들어.”

“내가 더, 힘들 걸?”

“아니야, 똑같이, 힘들어.”

힘썬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너랑 달릴수록, 진짜로, 인간의 몸으로 변하고 있거든!”

성우는 잠시 그 자리에 누워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불자 이마 언저리가 무척이나 시원했다. 힘썬은 저절로 눈이 감겼다. 갑자기 끝내주게 좋은 기분이 되어 당장에 잠들고 싶었다. 운동장 트렉 한 가운데서 자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태함을 배워가고 있는 것일까? 그때 갑자기 성우가 말했다.

“이렇게 있으니까 꼭 소년만화의 한 장면 같아.”

힘썬은 소년만화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성우는 고개를 돌려 힘썬을 바라보고는 킬킬거렸다.

“완전 청춘! 같은 느낌의 이야기 말이야.”

“청춘! 같은 느낌은 어떤 느낌이지?”

“으음.”

그러자 성우는 두 손을 몸 위에 얹고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젖혔다. 힘썬은 성우를 따라 하늘을 바라보았다. 날씨가 맑고, 구름이 많아서 바람이 어디로 흐르는지가 잘 보였다. 아주 높은 곳에서부터 구름들이 천천히 좌측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인공잔디에서 희미하게 고무냄새가 올라왔다. 먼 곳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이런 느낌?”

성우는 천천히 눈을 감고 기분 좋게 웅얼거렸다.

“그러니까, 마법사 친구랑 만나서 이런 날씨에 달리기를 하고 말이야. 완전 운명이라니까.”

그건 성우의 말버릇(우리는 운명) 중 하나였다. 힘썬은 운명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면서 성우를 흉내 내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어둠 속에서 바람의 결들을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게 되었다. 이런 게 청춘이거나 운명일까. 마음이 놓이면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지고, 그래서 어디서든 자고 싶어지는 이런 기분이 청춘! 이라는 것일까.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운명이 무엇인지는 조금 알고 있었다. 그건 어떤 극적인 요소가 될 수 있는, 마법 같지만 마법이 전혀 개입되어 있지 않은 순간을 말하는 것이다. 기막힌 우연을 성우는 운명이라고 부르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그것에 대해 힘썬도 어느 정도는 할 말이 있었다. 있지, 라고 힘썬이 말했다.

“지난번에 발표를 할 때, 성우 네가 페르세우스자리 유성우가 쏟아지던 날에 태어났다고 했잖아, 그렇지.”

힘썬은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감은 채 바람을 맞고 있는 성우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내가 그 날 떨어지던 별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기억해냈어. 네가 태어나던 날에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성우 네 이름은 유성우가 되었고 말이야.”

성우가 눈을 뜨고 힘썬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딪쳤다. 성우는 대답하는 대신 입을 조금 벌리고 있었다. 힘썬이 물었다.

“성우, 이것도 운명이니?”

성우의 귀가 분홍빛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힘썬은 생각했다.

음, 이 순간 역시도 청춘! 인가!

(혹은 낭만일 지도.)

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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