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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은 의도적으로 그늘 바깥에 서있었다. 보송보송하고 건조한 햇발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레이첼은 느긋하게 나무 그늘을 요리조리 피하며 운동장 가장자리를 걷고 있었다.

교실을 빠져나온 힘썬은 스탠드 쪽으로 걸어갔다. 운동장 중앙에서는 축구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공을 차거나 패스해 골대에 넣으면 이기는 게임이다. 몸을 사용하기 때문에 스포츠라고 한다. 남자 아이들이 소란스럽게 목청을 높였다.

 “패스! 패스!”

 “패th해!”

 다음 순간, 뻥 소리와 함께 공중으로 공이 날았다. 힘썬은 눈을 크게 떴다. 공이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질 위치에 레이첼이 걷고 있었다. 힘썬은 어렵지 않게 머리통에 직격으로 강타한 공의 위력이 가져올 비극을 떠올렸다. 상상속의 레이첼이 운동장 바닥에 누워 쓰러져 있다. 피가 흐르거나 흐르지 않는다. 어쨌든 레이첼에게 나쁜 일이 닥쳐 모두가 모인다. 힘썬은 레이첼을 지키지 못해 스스로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어쩌면 다시는 지구로 돌아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다음 순간 노란 빛 한줄기가 스탠드로부터 운동장 가장자리를 쏜살같이 가로질렀다. 레이첼이 악 소리와 함께 인공 잔디 위로 엎어져 데굴데굴 굴렀다. 공이 나무를 맞고 튕겨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힘썬은 조금 뒤에 정신을 차렸다. 레이첼이 자신의 큼지막한 몸 아래에 깔려 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멍한 얼굴이었다. 힘썬은 질겁하며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오, 어떡해!!”

레이첼은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었다.

힘썬이 시야를 가렸다. 레이첼의 눈동자가 그녀를 향했다.

“내가, 부딪쳐서, 레이첼 너 괜찮니?!”

“야, 누가 공 좀 주워!”

힘썬이 레이첼을 안절부절 못하며 일으켜 세웠다. 레이첼은 아야야 소리를 내며 일어났다가 다시 한 번 힘썬을 쳐다봤다. 힘썬은 레이첼의 머리카락에 붙은 인공잔디를 보았다.

“야, 김민수 너 공 주워와!”

땀을 뻘뻘 흘리며 남자아이 하나가 두 사람을 스쳐갔다. 레이첼은 잠시 아무 말이 없었다. 힘썬은 레이첼이 무언가 잘못되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손끝이 서늘해지더니 곧 온몸이 허예졌다. 이 일을 어떻게 책임지면 좋지? 그러나 잠시 후, 레이첼의 눈동자에 광채가 돌아왔다. 레이첼은 힘썬의 표정을 보더니 갑자기 입을 벌리고 온몸을 비틀었다. 그러고는 큰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힘썬은 큰 충격을 받았다. 너무나 심각해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레이첼의 머리에 어떤 문제가 발생해버린 게 분명했다!

“오, 레이첼!!”

힘썬이 레이첼의 어깨를 붙잡고 비명에 가까운 소리를 냈다.

“괜찮아, 내가 어떻게든 해줄게!”

레이첼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땅을 치며 낄낄거리다가, 갑자기 진지한 표정으로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 기세에 깜짝 놀란 힘썬이 입을 다물었다. 햇발이 레이첼의 눈동자를 자꾸만 투명하게 만들고 있었다. 레이첼이 말했다.

“썬아, 큰일이야. 나 머릿속에 인공잔디가 들어가 버렸어….”

힘썬은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뭐라고?!”

“아, 느껴져, 지금… 안에서 쑥쑥 자라고 있어. 어, 막 간지러워. 어떡하지?”

“아악!!!”

힘썬은 벌떡 일어나 두 뺨을 붙잡았다.

“오, 어떡해!! 그런 사례는 들어본 적도 없어서 내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물론 난 침착할 테지만-아니야, 침착할 수 없어! 하지만 이 일을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우선 그게 다 자라서 레이첼 너의 뇌의 통제권을 앗아가기 전에 조치를 취해야겠어!”

레이첼은 이제 거의 죽으려고 했다. 너무 웃어대서 기운이 없어보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곧 축 늘어져서 한 손으로 이마를 누르고 호흡을 정돈하기에 이르렀다. 그 모습이 힘썬의 눈에 어떻게 보였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레이첼을 공주님 안기로 들어 올리고 운동장을 뛰기 시작했다. 레이첼이 손을 뻗으며 다리를 퍼덕였다.

“잠깐, 잠깐만!”

급정거하는 바람에 힘썬 주변으로 먼지가 날렸다. 레이첼은 힘썬의 품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후 머리카락에 붙은 인공잔디를 떼어냈다. 그리고 그것을 마치 과학자가 신소재를 발견한 것처럼 엄지와 검지로 들어올렸다. 힘썬은 걱정스럽게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있었다. 레이첼이 말했다.

“이제 괜찮아, 짠, 봤지? 떼어냈어.”

“머리에 들어갔다며!!”

“아, 사실 거짓말이야.”

“거짓말?!”

힘썬은 그 말을 뒤늦게 이해하곤 갑자기 침착해졌다.

힘썬이 되물었다.

“거짓말이야?”

“응, 거짓말!”

레이첼은 조금 미안한 것처럼 웃었다.

“금방 말하려고 했는데 말이야.”

“다친 곳은 없는 거니?”

힘썬은 여전히 걱정스러워보였다.

“우리는 너무 세게 부딪쳤고 한바탕 뒹굴었잖아!”

“음, 너무 깜짝 놀라서 아픔 같은 건 잊어버린 것 같아. 안심해!”

레이첼은 옷을 털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그보다 왜 갑자기 날아온 거니?”

그래서 힘썬은 드디어 레이첼에게 말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 내내 레이첼을 보고 있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나무그늘을 피해 천천히 걷고 있던 레이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다는 것, 그런데 갑자기 날아온 공에 레이첼이 그만 죽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을 털어놓자 레이첼이 눈을 찡긋거리며 느긋하게 말했다.

“아마 난 피할 수 있었을 거야.”

“나무그늘을 피해서 걷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어.”

힘썬이 진지하게 레이첼의 손을 잡았다.

“그런데 네가 혹시나 다치면 미안해서 물어볼 수가 없잖니!”

“그렇지만 다치지 않았으니 이제 물어볼 수 있겠다.”

레이첼이 즐겁게 말했다.

“내 목숨을 구해줘서 고마워.”

두 사람은 다시 운동장 가장자리를 천천히 돌면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레이첼은 자신이 ‘상상 중’이었다고 말했다. 나무그늘을 아슬아슬 피해서 걷다보면 어떤 놀라운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이를테면 명림 국제고등학교가 지어지기 전 고대 주술사가 걸어놓은 비밀퍼즐의 작동 방법이 바로 나무그늘을 30번 피해 걷기라면? 그렇다면 느닷없이 발아래가 진동하고 땅에 묻혀있던 비밀의 통로가 모습을 드러내지는 않을까? 그것은 단순한 상상의 이야기였고, 힘썬 역시 그 과정을 알고 있었다. 누군가를 걱정하거나 어떤 일을 대비하기 위해 종종 사용하던 방법이기 때문이다. 레이첼을 구하기 위해 몸을 던지기 전에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했었다. 힘썬은 그것을 ‘수많은 가설’이라고 이름 붙였지만, 레이첼은 그 모든 과정을 포괄해 ‘상상’이라고 부르는 듯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너는 나처럼 상상력이 풍부한 애라고 생각해.”

레이첼은 여전히 그늘 바깥으로 아슬아슬 걷고 있었다.

“그걸 걱정하는 데에만 쓰고 있을 뿐이지!”

“오, 하지만 걱정이 멈추지 않는 걸, 레이첼. 나쁜 일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고, 난 우리가 모두 그런 가능성에서 안전하길 바라.”

힘썬은 레이첼의 손목을 잠깐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운동장을 달리는 소년들은 거리낌 없이 부딪치거나 뒹굴면서 공을 차고 있었다. 이곳만 해도 그렇다. 위험은 어디서든 도사리고 있었다. 힘썬 자신조차도 누군가의 위험이다.

“하지만 힘썬, 살아가는 건 언제나 예측할 수 없는 일의 연속이잖아.”

레이첼이 말했다.

“우리들은 모두 그런 일에 익숙해.”

“하지만 그건 너무 슬프지 않니?”

“난 그런 일들을 상상하는 게 즐거운 걸.”

레이첼은 선선한 바람처럼 웃었다.

“나쁜 일만 오는 게 아니잖아. 나는 방금 공을 맞을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너와 멋진 대화를 하며 걷고 있으니까 말이야.”

힘썬은 잠시 생각해보다가 고개를 들어 레이첼을 바라봤다. 운동장 중앙에서 또다시 뻥 공을 차는 소리가 들렸지만 이번에 힘썬은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대신 발밑에 있을 지도 모를 비밀의 통로가 떠올랐다. 땅 밑이 진동한다면 그건 상상의 실현이 아니라 지진이 일어난 것일 테였지만, 그때가 된다면 힘썬은 레이첼의 손을 잡아줄 것이다. 안아 올려서 쏜살같이 뛸 자신도 있었다. 힘썬은 더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위험성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레이첼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도.

힘썬이 미소 지었다.

“네 말이 맞아, 레이첼. 지구에 오기까지 나는 무척 많은 걱정을 했지만, 지금은 너와 멋진 대화를 하며 운동장을 걷고 있어.”

두 사람은 운동장을 한 바퀴 더 돌았고, 레이첼은 놀이를 그만두었다. 하지만 그늘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어쨌든 날이 따뜻했으므로 그늘이든 아니든 간에 어느 곳이든 춥거나 외롭지 않았다. 공평하게 모든 곳이 온화했다. 축구를 하던 소년들이 한곳으로 모여들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가고 있었으므로 모든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레이첼이 교정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서 말했다.

“조금만 있으면 너도 나처럼 재미있는 농담을 하게 될 것 같아.”

“오, 사실은 우리가 걷는 동안 한 가지 생각한 게 있어.”

힘썬이 말했다.

“네 말대로 우리 발밑에서 무언가 솟구쳐 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이야. 혹시 알겠니, 레이첼? 정말 우리 밑에 무언가 있었는지도 몰라.”

“아하, 괜찮은 시도였어.”

레이첼이 즐겁게 맞장구쳤지만, 힘썬은 여전히 진지했다.

“정말이야. 터무니없는 너의 상상도 현실이 될지 몰라.”

“흠.”

레이첼은 오래 고민하지 않고 가볍게 대답했다.

“맞아, 그럴 지도.”

“역시 그렇지?”

“그럼.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한 것도 언젠가는 이루어질지 몰라. 너희들을 만났잖아. 내 상상 중 하나는 벌써 여기 있는 걸.”

레이첼은 덧붙였다.

“이건 거짓말이 아니야.”

“오, 알고 있어.”

힘썬이 웃으며 대답했다.

“만약 또 네가 거짓말이라고 했더라면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농담을 알아들었을 거야.”

레이첼과 계단을 오르던 힘썬은 운동장 가장자리에서 반짝 빛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고개를 팩 젖혔다. 눈을 가늘게 뜨자 그것이 무척 잘 보였다. 그것은 나무 그늘과 양지의 경계선에 떨어져 있었다. 힘썬은 계단을 거의 다 오른 레이첼의 뒷모습을 한 번 바라보고는 계단을 내려왔다.

운동장 가장자리에 떨어진 그것은 안경이었다. 힘썬은 허리를 숙여 안경을 주워들었다. 레이첼이 늘 머리 위에 얹고 다니는 큼지막한 알의 안경임을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힘썬은 그것을 한 번 눈가에 가져다댔다가, 그대로 몸을 틀어 계단 쪽을 바라봤다. 레이첼은 이미 교실로 돌아갔는지 보이질 않았다. 힘썬은 기분 좋은 상상을 시도해보려고 했는데, 제대로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레이첼이 말해준 한 가지는 제대로 이해했다.

“예측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이 꼭 나쁜 것도 아니다….”

힘썬은 조용히 중얼거리면서, 어떤 불안을, 자신을 통제하거나 괴롭게 만들었던 한 가지를 깨끗하게 내려놓았다. 그러자 내일 있을 요한과의 촬영이나, 복도를 돌 때 이따금 마주치곤 하는 헤르만의 딱딱한 눈빛이 생각보다 무겁게 취급되지 않아도 괜찮다고, 그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며 걱정을 키우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어떻게든 될 것이라고-레이첼의 손을 잡거나 안아 올리는 것과 비슷한 일들이, 혹은 그것보다 좋은 일, 레이첼과 함께 따뜻한 교정을 걷는 일이 벌어질 수도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다음 번에 만나면 농담을 할 수 있을 것 같아.’

점심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예비종이 울리고 있었다.

힘썬은 안경을 내려놓고 천천히 텅 빈 운동장을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1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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