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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탄 아래 «지지의 나무»
1차/new 2021. 1. 19. 02:17

 지지가 그 나무를 키우기 시작한 건 2학년 때다.

 집에서 가지고 온 작은 묘목이었다. 지지의 오빠가 시험 삼아 만들어낸 새 품종이었는데 제대로 자라지 못해서 세 그루 째 말라죽게 되자 이걸 개량할 순 없다고 판단하고 남은 마지막 한 그루였다. 지지는 오빠에게 이 나무를 달라고 했다. 지지의 오빠는 흔쾌히 그 빼빼마른 나무를 건네주었지만, 사과나무라는 건 구색일 뿐 정작 무슨 색깔의 열매가 열릴지는 장담할 수 없다고 했다.

 “괜찮아. 팔 만한 게 열리진 않을지 몰라도 어쨌든 키우면 뿌듯해질 것 같아!”

 과수원 집안의 딸자식으로서 어깨 너머 배워온 여러 가지 지식은 분명 유용하게 쓰였다. 한동안 지지는 이 작다란 나무를 건강하게 만드는 것에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가지를 치고, 비료를 푸고, 영양제를 넣고, 나무의 마력을 관찰하며 기분을 살폈다. 그런가 하면 지지는 의외로(남들이 추측하기로 그녀는 인정 많은 사람이긴 했으니)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간에 이름을 붙이고 분류해 자신의 특별한 무언가로 삼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으므로, 이 나무는 그녀가 자라는 동안에도 그냥 사과나무로만 남았다. 지지는 나무가 갑자기 쓰러져 생을 다한대도 그 죽음에 오래 사로잡혀있지는 않으리라. 추억할 만한 이름을 따로 붙여주진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실제 사정도 그러하여, 학년이 높아질수록 지지는 안뜰에 심어진 그 나무를 종종 잊어버렸고, 아카데미를 떠나있던 지난 2년간은 거의 생각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카데미 기숙사 안뜰에서 애지중지 길러져온 역사를 간직한 이 지지님의 사과나무를 허락도 없이 따먹다니, 이 엄연한 절도행위를 용납할 수는 없는 법! 지지가 데미안의 존재를 확실히 인식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사건 때문이다. 데미안은 정말이지 잊을 만하면 지지의 나무 근처를 얼쩡거리다 귀신같은 솜씨로 사과를 따먹곤 했던 것이다. 이 소소하고도 용납 불가능한 절도 행위가 이어져온지도 벌써 몇 주째였다. 어쩌면 지지가 제대로 알지 못했을 뿐, 사과나무를 향한 데미안의 소소한 절도 행위는 몇 년째 이어져왔던 걸지도 모른다.

 지지는 데미안이 싫지 않았다. 데미안은 말수가 적고 무뚝뚝하지만 다루기 쉬운 구석이 있었고, 거짓말을 하며 뻔뻔하게 굴기보다는 자백해놓고 기분을 살피는 쪽에 가까웠다. 처음 절도행위를 적발 당했을 때, (비록 처음에는) 귀찮다는 표정으로 도망치기는 했지만, 붙잡히고 나자 순순히 그녀의 기분을 살펴준 점도 지지의 기분을 누그러지게 했다. 볼을 쭉 잡아당기자 데미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투덜거렸는데, 지지는 그가 으레 그 뒤에 뱉는 말도 좋아했다.

 “그치만 이 사과가 제일 맛있는 걸. 항상 내가 다니는 길에 그렇게 탐스럽게 열려있는데 안 먹을 수가 없잖아?”

 구체적으로 언제인지 가물가물한 어느 날, 지지는 아카데미 기숙사 안뜰을 빙글빙글 맴돌며, 자신의 나무를 흘끔흘끔 훔쳐본 적이 있었다. 아마도 데미안이 사과 서리를 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지 며칠 지나지 않았던 때일 것이다. 자신의 나무를 올려다보면서 지지는 생각했다. 그렇지, 이 나무는 사과나무였어. 가지 곳곳에는 주황빛이 도는 매끈한 붉은 색의 작은 사과가 열려있었다. 언제 이렇게 열렸던 걸까? 갑작스럽게도 지지는 나무가 낯설었다. 자신이 지키지 못한 세월동안에도 꾸준히 생장해온 나무만의 시간이 더는 지지의 나무가 아닌 낯선 나무로 만들어버린 것만 같았다. 용케도 혼자 잘 자랐구나. 이름이라도 붙여줄 걸 그랬나보다. 하지만 어쨌든 간에 이 나무는 여전히 지지의 나무이긴 한 것이다.

 

 

 “데미안!!”

 자리를 박차고 나온 데미안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지지가 기숙사 안뜰로 걸음을 옮겼다. 지지의 예감대로 데미안은 거기 있었다. 어쩐지 뾰루퉁한 표정으로, 불만스러워 보이지만 결국 지지에게 누그러뜨릴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그 나무 아래에 서있었다. 그의 머리 위로는 아름답고 작고 옹골찬 열매가 가득 핀 나뭇가지가 하늘을 향해 뻗쳐나가며 끝없는 생장의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 지지는 문득 자신이 완전히 자리를 비웠던 지난 2년간에도 데미안이 자신의 나무 아래를 어슬렁거렸을지, 때로는 저 가지를 잡고 올라타 단단한 열매를 따먹었을지, 그렇게 함으로써 나무를 혼자 두지 않았는지 궁금해졌다.

 “미안~ 너무 놀렸나봐! 화났어? ? ?”

 데미안에게 쪼르르 달려간 지지가 아양을 떨며 말했다.

 “화 풀어라~ 그치만 자꾸 허락도 없이 훔쳐 먹는 데미도 나빴는걸!”

 지지가 허공으로 손을 뻗자, 보이지 않는 바람이 날카롭게 움직여 사과 하나를 떨어뜨렸다. 작고 단단한 과일 하나가 데미안의 정수리에 부딪쳐 한 번 더 튀어올랐다가, 그대로 데미안의 손안에 감겨들어갔다.

 “맛있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봐주는 거야! 이번 건 아무 짓도 안 했다구?”

 어쨌든 데미안도 결국 사과 한 알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지지의 나무에서 열리는 건 그에게 있어 맛있는 사과니까. 지지는 데미안의 괘씸한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나무 아래를 계속해서 어슬렁거려준다면 기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소릴 하진 않겠어! 버릇이 들어버리면 어떡해? 게다가 이 나무는 아직까진 지지의 나무이긴 한 것이니 말이다 아직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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