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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물결 «황금벌판»
1차/new 2021. 1. 19. 02:12

어느 화창한 9월의 오후, 겐나디는 내가 일하는 공방으로 뛰쳐들어왔다. 나는 키 낮은 책상에 허리를 굽히고 앉아 도면을 그리고 있었다. 작년부터 일하기 시작한 조수 갈리나는 재료에 사포질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큰 소리에 놀라 동시에 현관을 쳐다보았다. 덜컹거리는 마차, 새의 지저귐, 바람의 결을 따라 흔들리는 나뭇잎사귀 소리가 벌컥 열린 문과 함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가고 만 것 같았다.

겐나니는 늑대에 쫓기다 헛간으로 몸을 던진 새끼 사슴처럼 잔뜩 경직된 허벅지와 번쩍이는 시선을 갖고 있었다. 그 애는 잠시간 안절부절 못하더니 내가 웅크리고 있는 책상까지 두리번거리며 걸어왔다. 그러더니 나가서 점심을 먹자고 했다. 지금 당장 그래야 한다고 했다.

그 애가 거칠게 나를 끌고 나가는 동안 갈리나는 어쩔 줄 모르고 우리 주변을 서성였다. 나는 겐나디에게 단호한 목소리로 놔달라고 했지만 겐나디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나를 질질 끌어 당겼다. 정신이 나갔거나 조금의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나는 엉거주춤 끌려 나가면서 갈리나에게 동생네 조수와 점심을 먹고 오겠다고 했다. 비록 내가 이 꼴로 외출하게 되었지만 일만큼은 똑바로 해두라고 했다. 그런 뒤에 눈앞에서 문이 쾅 닫혔고 겐나디는 나를 대로변으로 끌고 나왔다.

오후의 따가운 햇살이 내 눈으로 떨어지면서 순간적인 착란 현상이 왔다. 나는 아버지가 어디론가 나를 이끌며 중얼거리던 사투리 섞인 말투를 기억해냈다. 아버지의 등은 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서 옷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고 팔뚝은 크게 베여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우리 앞으로는 추수를 기다리는 황금빛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어디를 가냐고 물었다. 아버지가 대답하지 않자 나는 소리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아버지는 우악스럽게 내 입을 틀어막으면서 입 닥치라고 했다. 아버지가 공포에 질린 목소리로 말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우뚝 멈추어 섰다. 그 순간, 우리 앞으로 마차가 쌩 하고 지나갔다. 마부가 겐나디에게 욕지거리를 하자 나도 겐나디도 잠에서 깨어나듯 소스라치게 놀라 주변을 둘러보았다. 겐나디는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 애의 손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나는 의기소침해져서 허연 손자국을 문지르며 물었다.

무슨 일이니?”

유리 씨가 얼른 데리고 나오래서요.”

내 표정에 겁을 집어먹은 겐다니가 사과했다.

엄청 큰일이래요. 직접 말하겠다고 레스토랑에 있겠대요.”

나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동생네 조수의 분별력 없는 행동에 화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동생 유리가 분명 주의를 주었을 텐데도 괜히 겁을 집어먹은 겐나디 때문에 오후에 예정되었던 모든 일을 망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작업책상에 덩그러니 놓고 온 도면과 끌려나오느라 바닥에 떨어진 연필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부글부글 속이 끓었다. 스무 살도 먹지 않은 겐나디에게 손찌검을 하는 상상을 했다. 한 번, 두 번, 세 번씩 올려치는 상상을 하면서 말했다.

다음번에는 이러지마.”

화를 삭이느라 말하는 속도가 아주 느려졌다.

나는, 나는 이런 식으로 구는 걸 아주 싫어해.”

, 정말 죄송해요.”

겐다니와 헤어진 뒤 나는 공방에서 다섯 골목 떨어진 곳에 있는 식당으로 올라갔다. 테라스가 있고 면 요리를 주력으로 하는 가게였다. 아카데미에 다닐 적에도 종종 외출을 하면 이곳에 오곤 했다. 동생 유리는 가격 때문에 매번 펄쩍 뛰었지만 나는 그러한 반응 때문에 더 아무렇지 않게 굴곤 했다. 나는 유리가 포크로 면을 말아 숟가락에 놓고 휘휘 돌리는 것을 지켜보았다.

내가 말했다.

사과해.”

누나도 하나 시켜. 내가 사줄게.”

유리는 면을 집어넣고 천천히 씹어서 삼켰다.

끌고 나온 건 미안.”

다음번에 또 이러면 죽는다.”

유리의 입술이 왼쪽으로 말려 올라갔다.

재수 없는 위에나.”

나는 내 음식이 나올 때까지 분을 삭이면서 거리를 지나는 수십 개의 정수리를 내려다보았다. 직접적으로 화를 낸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기운이 빠졌다. 유리가 본론을 꺼냈다. 아버지가 슈텐에 올라왔다고 했다. 채무 관련으로 지나 씨를 만나러 온 것 같은데 겸사겸사 우리를 찾아올지도 모른다고 했다. 자긴 만나기 싫어서 잠시 올라가 있을 건데 누나만 여기 내버려두는 것도 못할 짓인 듯해서 언질이나 줄까 하고 부른 거라고 했다.

나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황금빛 벌판이 떠올랐다. 어릴 적에 헛간으로 올라가 보았던 거대한 황금빛 물결이 눈에 새겨진 듯 서서히 윤곽이 잡히며 떠올랐다. 땀에 젖은 셔츠와 헤진 바지, 새카만 굳은살 같은 건 뒤늦게 조각조각 떠올라 의식적으로 맞추지 않으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이 나이가 다 되도록 나나 유리는 아버지와 거리감이 있었다. 우리가 슈텐에 올라왔을 때가 열여덟, 열여섯 살 때였다. 아버지는 그때부터 줄곧 우리의 어떤 부분을 수치스럽게 했다. 교육을 받고 장인으로 이름을 조금씩 알리기 시작하자 그는 우리의 감추고 싶은 약점처럼 자리 잡았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을 아버지가 알아차리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 그렇구나.”

나는 다리를 쭉 뻗은 채 손바닥으로 의자를 짚고 발바닥을 달랑거리면서 말했다.

알려줘서 고마워.”

이번에 나는 슈텐을 떠날 수가 없었다. 일단 일정이 있었다. 최근 나는 거래처에 납품할 상자의 개수를 두 배로 늘렸다. 조수 갈리나의 업무 속도가 늘었기 때문이다. 밤을 새서 한 번에 도면을 그리고, 하루 쉬었다가 또 남은 하루를 몽땅 매진해서 상자를 짜고 맞출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아버지가 들릴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갑자기 공방을 비우고 싶지는 않았다.

유리가 건방을 떨며 말했다.

후회하게 될 걸. 누나는 표정 관리를 못하니까.”

, 그래.”

나는 기름이 적당히 버무려진 기분 좋은 무게의 면을 포크로 들어 올렸다. 테라스 아래로 가게로 뛰어 들어오는 겐나디의 금발 정수리가 보였다. 나는 문득 깨닫고 말했다.

저 애는 아버지를 닮았구나.”

그것이 적잖이 충격이었기 때문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리를 바라보았다.

저 애는 아버지를 닮았네.”

그래, 쟤가 좀 호구 같지?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지 혼자 살겠다고 배신할 애론 안 보이지.”

그렇게 말하며, 유리는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 날 밤, 나는 갈리나가 사포질을 해둔 나무 조각을 손끝으로 몇 번이고 매만지며 앉아있었다. 작년 이맘때에는 우물쭈물 실수를 하던 갈리나가 이제 가시 같은 건 도무지 참아줄 수 없다는 듯 박박 사포질을 하는 사람이 되어있었다. 갈리나는 원래 내 조수가 아니었다. 네 달 뒤에는 원래 자신을 가르쳐주던 마이스터에게로 떠날 것이다. 나는 임시로 그녀를 맡은 것에 불과했다.

갈리나가 없으면 이 넓은 공방도 사실은 쓸모가 없었다. 자는 곳과 일하는 곳을 분리하는 것만 포기하면 내 아파트로 돌아가서 이 크고 작은 상자들을 수십 개, 수백 개는 만들 수 있었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할까. 수십 개, 수백 개를 팔아서 돈을 벌고 나면. 자유로워지고 나면. 물론 내게는 계획이 있었다. 내 인생은 짜 맞춰진 상저처럼 반듯하고 단정하게 흘러갔다. 오늘 오후처럼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겐나디의 방문 같은 건 더는 내 삶에 찾아와서는 안 됐다. 그런 건 이미 한 번으로 족했다.

엎드린 채 몇 번이고 나무의 매끄러운 표면을 쓸다가 눈을 감았다. 잠결에 누가 벌컥 문 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지만 나는 끙끙거리면서 점차 의식의 아래로 떨어졌다. 묵직한 어둠이 추처럼 내 발 끝에 매달려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잠이 들었는데도 꿈이 시작되지 않는 내 상태에 조금 겁을 먹었다가 불현듯 예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상기했다.

그것은 벌컥 문을 열고 들이닥치는 겐나디의 방문과 비슷했다. 내 의식 속으로 뛰쳐 들어온 겁에 질린 새끼 사슴 같은 걸 다루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 첫 번째 꿈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꿈이 찾아들기 전에 먼저 잠들어버리는 바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어둠 속에서 막연히 기다리고 있어야 했다. 돌이켜보면 내 육신과 정신이 먼저 그것에 호응해, 그들의 계획에서 조금도 어긋나지 않도록 일찍부터 내 의식을 준비 상태에 두고 있던 것 같기도 했다.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예정시간보다 일찍 집을 나서듯 내 의식을 어둠 속에 준비해두고 꿈이 찾아오기를 기원하고 있던 것 같았다. 지금이 바로 그런 상황인 것 같았다. 나는 내 두 번째 꿈을 기다리며 불 꺼진 의식의 한가운데에 서있는 것이었다.

꿈은 씨앗이 움트는 것처럼 작은 점으로써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아득히 먼 곳에서 시작되었다. 새까만 천에 구멍을 뚫어 태양을 보듯 빛이 놀랄 만한 속도로 쏟아지면서 점차 공간을 팽창시켜 나갔다. 나는 우두커니 서서 풍경이 완성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빛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들더니 점점 거대해졌다. 물결은 어느덧 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처음에 나는 그것이 아버지에 대한 꿈인 줄 알았다. 내 눈앞으로 펼쳐진 무한한 황금의 물결은 아무리 보아도 벌판의 그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키가 다 자란 곡식들은 바람이 불 때면 물결처럼 넘실거리며 아득한 지평선을 향해 흔들리고 또 흔들렸다. 파도치듯 무언가를 꾸역꾸역 밀어내면서 자유롭게 내달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물결이란. 아니, 다 자란 황금의 곡식들은 그런 자유와는 또 다른 성질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끝이 정해진 깊이, 힘껏 뛰어들면 사람의 형체도 짐승의 형체도 모조리 삼켜버릴 듯하면서 결국 땅 위에서 숨겨주는 게 고작인 그 한정적인 깊이였다. 물결처럼 다 숨겨주지도 못하고 빨려 들어가지도 못하는 무용한 황금의 물결그것이 물결치며 우짖는 소리들쏴아아하는, 그 흉흉함이란.

나는 갑자기 열여덟 살인 것 같았다. 아버지가 내 손을 붙잡고 달리고 있었다. 내 뒤로는 겁에 질린 유리가 헐떡이는 소리가 자꾸만 들려왔다. 우리는 벌판을 가로질렀지만 벌판은 끝없이 이어졌다. 우리는 멀리 가지 못했다. 우리의 현실은 땅처럼 우리 발밑에 있었다. 그것은 현실적이고 좀 더 촉각적이면서 청각적인 것이었다. 나는 어음과 동전에서 나는 냄새를 혐오했으나 동전이 떵그렁 소리를 내며 굴러가는 것은 좋아했고 자라면서 그 둘 다에 점차 익숙해져버리고 말았다.

나는 멈추어 섰다. 반사적으로 내 손을 매만지면서 정신을 차렸다. 발밑이 축축했다. 고개를 숙이고 손을 내밀자 차갑고 축축하면서 바람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금빛의 촉감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황금의 물결이 내 발을 적시며 아득히 먼 어둠 속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벌판이 아니었구나.’ 나는 생각했다. ‘바닥이 없는 꿈이었구나.’ 그렇다면 이것은 현실과 먼 꿈이다. 나만의 꿈이다.

나는 축축해진 뺨을 문지르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깨어나면 공방을 비우고 갈리나를 맡아줄 새 장인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런 다음에는 튼튼한 신발과 조금의 돈을 챙기는 것이다. 지나 씨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거래처와 계약을 조율하는 것이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일들은 항상 내 삶을 더 나은 쪽이 아니라 더 불길한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변화가 싫었다. 장인으로 있는 게 즐거운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돈을 버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다.

이 꿈도 그러하기를. 나는 의식이 점차 위로 솟구치는 것을, 내 영혼이 내 어두운 육신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감각이 위로 훅 잡아끌렸다. 나는 점점 내 몸의 형태가 감각으로써 되살아나고 재건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바닥으로 늘어진 왼 손, 뺨을 대고 있는 매끄러운 나무의 재질, 벌어진 입술에 고인 미지근한 침이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나의 의식이 도착한 곳을 받아들였다. 내 현실을 받아들였다. 꿈에서 깬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실은 아버지를 만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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