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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팅라인 «기재와 성단»
1차/old 2019. 10. 30. 00:58

1.

김기재는 소성단을 운동장에서 처음 보았다. 겨울방학이 끝나갈 무렵의 일이었다. 예비 소집일이 있어 전교생이 각자의 반이 정한 시간대로 모였다가 흩어지고 있었다. 운동장으로 쏟아지는 입학생들 틈에서 키가 큰 성단은 조금 눈에 띄었다. 새파란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원래 목도리는, 목도리라는 것은 따뜻하기 위해 두르는 것인데 그렇게 차갑고 진한 색을 목에 두르고 서있다니. 아주 나중에도 그 이미지는 종종 색깔 그대로 남아 기재 속의 소성단이 되었다. 그러나 그건 둘 사이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 했다.

기재는 평소보다 일찍 눈을 떴다. 알람으로 맞춘 시간보다 10분을 추월한 셈이었다. 아버지는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감싼 랩이 아직 따끈따끈했다. 기재는 밥그릇 앞에 붙은 포스트잇을 떼어냈다. 오늘도 잘 달리기. 문장 끝에 작은 이모티콘도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타임 트라이얼이 있었다. 특별히 강조한 적도 없는데 아버지가 기억한다는 게 조금 놀라웠다. 기재는 동생들 밥그릇 앞에 붙여진 포스트잇도 읽었다. 숙제 잘 하고, 성적 떨어졌더라, 너무 늦게 다니지 마라, 어제 안색 안 좋던데 무슨 일 있니? 눈으로 훑던 기재는 그 이상 읽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밥을 조금 남겼다.

버스가 금방 왔다. 가방에서 막 꺼낸 이어폰이 엉키지 않은 채 딸려 나왔다. 에어컨이 잘 나오는 창가 자리가 비어있었다. 음악을 틀자 듣고 싶던 곡이 랜덤 재생되었다. 기재는 조금 졸았다. 눈을 떴을 땐 학교까지 두 정거장이 남아 있었고 버스 안이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차가 멈추자 몸이 앞으로 당겨졌다가 뒤로 내팽겨 쳐졌다. 기재는 이어폰을 빼냈다. 창밖으로 성단이 지나가고 있었다. 창문을 열까 고민했으나 순식간이었다. 기재는 그대로 카드를 찍고 내렸다. 내린 사람은 기재뿐이었다. 이어폰 줄을 마구잡이로 가방에 쑤셔 넣으며-그럼 엉킬 걸 알면서도-빨리 걸었다. 성단에게 먼저 인사를 하지는 않았다. 기재가 내린 건 일찍 학교에 도착할 게 빤하다면 걷고 싶어서였다. 교문 앞까지 기재와 성단은 나란하기엔 조금 어긋난 거리와 틈을 유지하며 걸었다. 교정 담벼락엔 담쟁이 넝쿨이 늘어져 한 계절만큼의 분량으로 영역을 확장하는 중이었다. 기재는 거기서 불쑥 치고 나왔다. 성단은 별로 놀라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안녕.”

“아, 안녕하세요.”

“아까 봤는데 인사할 타이밍을 놓쳐서.”

기재가 씩 웃자 성단은 또 이러네…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래요.”

“응, 그렇지.”

기재는 딴청을 피웠다. 잠시 정적이 있었다. 잠시 후 기재는 어깨를 으쓱하며 담벼락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없나 봐.”

성단이 그 말을 알아듣기까지 아주 조금의 시간이 걸렸다.

“아, 뭐.”

“항상 담 넘을 일이 생기는 건 아닐 테니까요.”

기재가 웃었다.

“그런가.”

“그렇죠.”

낙대부고 담벼락에서는 종종 학생들이 무거운 열매처럼 떨어졌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에 가거나 수업을 재끼기 위해서다. 소녀들일 때도 있고 소년들일 때도 있었고 혹은 둘 다일 때도 있었다. 그들은 기차에서 뛰어내리는 피난민들처럼 가방을 집어던진 후 낙하 자세를 잡는다. 엉덩이를 바싹 붙이고 어떻게든 바닥과 가깝게 만든다. 가끔 담벼락 아래로 누군가 지나갈 때도 있다. 그럼 그들은 누군가들을 불러 세운다. 그리고 이렇게 외친다. 저기, 안 밟게 내 가방 좀 치워줘.

“아쉽다. 나 이번에 걔네 또 마주치면 너처럼 깔끔하게 무시할 자신 있었는데.”

“아쉬운 일인가요.”

둘은 중앙현관 앞에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기재가 먼저 일어섰다. 너무 많이 떠들어 버린 것 같았다. 성단과 나눈 대화는 고작 해야 열 마디도 채 되지 않았지만 성단과 기재는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성단과 대화를 이어갈수록 수렁에 빠지는 기분이 드는 건 그 때문일 지도 몰랐다. 성단이 일어섰을 때, 기재는 먼저 인사했다.

“안녕, 다음에 또 보자.”

“이따 볼 텐데.”

성단은 덤덤하게 말했다. 기재가 얼굴을 찡그리며 웃었다.

“그건 그렇다.”

둘은 배웅이나 친밀한 인사 같은 것은 하나도 주고받지 않은 채로 중앙계단에서 헤어졌다.

 

2.

초봄에는 어쩌다보니 벌어지는 일들이 많다. 어쩌다보니 짝꿍이고, 어쩌다보니 같은 부고, 어쩌다보니 도서부가 된다. 새 학기를 맞이한 다수들이 매달리는 건 그 ‘어쩌다보니’일 것이다. 우연과 조금의 운으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관계를 어떻게 다듬어 나가냐에 따라 그들은 친구로 남거나 어색한 사이로 남거나 혹은 영영 멀어진다. 김기재에겐 그 ‘어쩌다보니’의 관계가 참 많았다. 아는 선배들, 아는 후배들, 같은 반 여자애들, 학원 같이 다니던 친구들, 초등학교 동창 혹은 전에 만나 뵈었던 선생님. 기재가 복도를 지날 때 한 명쯤은 반드시 그를 불렀다. “김기!” 혹은 “기재야!”였다. 기재는 어디든 불려 다녔고 어디든 서있었다. 세상 인구의 절반 정도를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어쩌면 여러분 역시 기재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 복도, 운동장, 학교 근처 피씨방, 운동장과 계주 트랙 앞에 김기재는 서있다. 당신과 눈이 마주치면 인사할 지도 모른다. “안녕, 우리 또 보네. 그렇지?” 그럼 웃어주기를.

하지만 성단은 웃어주는 쪽은 아니었다. 초봄이었다. 둘은 어쩌다보니 함께 하교하고 있었다. 아마 육상부에 신입생이 들어오고 있는 첫 모임이 해산된 이후였던 것 같다. 성단이 앞서 걷고 기재는 조금 뒤쳐진 채 따라 걷고 있었다. 대화하거나 웃고 떠들지 않았고 지극히 모르는 사이처럼 보였으나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지도 않았다. 담벼락에서 누군가들이 둘을 불렀을 때, 둘은 동시에 하늘을 바라보았다. 담벼락에 매달린 학생들이 가방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거기 둘! 이것 좀 받아주라! 기재는 그대로 자리에 멈췄다. 성단은 다시 걸어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기재가 성단을 불러 세웠다.

“안 도와줄 거야?”

“굳이 왜요?”

“어…….”

기재는 말문이 막혀서 그저 웃었다.

“쟤네가 도와달라잖아.”

말하고 보니 스스로가 정말 바보 같이 느껴졌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다. 성단은 빨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럼 전 갈게요.”

“뭐?”

하늘에서 가방이 떨어졌다. 멍청하게 성단의 뒤통수만 보던 기재가 정통으로 하나를 얻어맞았다. 악, 소리가 절로 나왔다. 기재는 손을 거두고 머뭇거리다 성단을 쫓아 뛰었다.

“정말 안 도와줘도 돼?”

  “굳이…….”

  성단은 얼굴을 미묘하게 찡그렸다.

  “그래야 하나.”

  김기재는 누군가를 도와주거나 호의를 베풀며 안정을 찾는 타입이 아니었다. 단지 거절했을 때 돌아올 서운함과 불호의 감정이 싫었다. 인간관계란 가늘고 성가시기만 해서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금이 가거나 부서질 수 있었다. 기재는 단지 그것을 가능한 한 오래 유지하고 싶었다. 사람들을 도와주고 심적 부채감을 소유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들로부터 내쳐질 상황이 왔을 때 성공적으로 다른 무리에 들어간다면 좋을 테였다. 하지만 기재는 때때로 생각하고 말았다. 아, 삶이라는 건 몹시 지겹고도 피곤해서 안정이나 행복 같은 건 도통 가까이 오기 힘든 걸지도.

  그 날, 성단이 뱉은 ‘굳이’는 별 것이 아니었는데도 기재의 마음속에 자국을 남겼다. 언덕을 내려온 이후에도 기재는 담벼락 쪽으로 자꾸만 뒤를 돌았다. 앙심을 품진 않으려나? 성단은 뒤돌아보는 법이 없었다. 아무 것도 걱정하거나 고려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기재는 뒤돌아보고 성단은 뒤돌아보지 않아서 자꾸만 거리가 벌어졌다. 버스정류장까지 왔을 무렵 기재는 마침내 뒤돌아보기를 관뒀다. 신경 쓰지 않기로 하고 빨리 걸었다. 성단 옆에 나란히 섰다. 그리고 더는 틈을 벌리지 않았다.

그 뒤에도 아주 가끔 둘은 같이 하교할 일이 있었다. 담벼락에선 여전히 아이들이 쏟아지거나 가방이 떨어졌다. 기재는 그 후에도 몇 번 담 앞에 멈추거나 머뭇거리곤 했다. 그러나 곧 관두고 성단의 뒤를 쫓았다. 기재가 머뭇거릴 때마다 둘의 틈은 시시때때로 벌어졌으나 언젠가 부터는 유지되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서 애매모호하기만 했다.

 

3.

타임 트라이얼을 앞두고 다들 분주하게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보윤이 다가와 기재의 등을 툭 쳤다. 김기, 긴장했냐? 기재는 시선으로 운동장을 훑다 말고 실소를 흘렸다. 그렇게 보여? 성단은 스탠드 쪽에 서서 멀거니 트랙을 보고 있었다. 방송이 울리자 아이들이 대열을 이루며 몰려들었다. 기재는 제 건너편에 선 성단의 무표정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엄보, 넌 노력했는데 잘 안 되는 일엔 어떻게 하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태클 걸지 말고 대답 좀 쥐어짜봐.”

기재가 툭 보윤의 운동화를 가볍게 밟았다. 아, 진짜! 보윤이 펄쩍 뛰며 기재의 다리를 찼다.

“씨바, 몰라.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다르지.”

“그런가.”

“그래, 임마.”

성단은 장거리 선수들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보고 있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성단은 대체로 게임 안의 NPC들처럼 움직였다. 정해진 시간과 패턴이 있었고 한정된 범위 안에서 단조롭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보윤이 기재를 붙잡고 웃었다.

“야, 너 기록 안 나올까 봐 그러는 거지.”

기재는 보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떤 표정을 지을지 고민하다가 다시 한 번 웃었다.

“글쎄다.”

“뭘 글쎄야, 맞잖아.”

“마음대로 생각하셔.”

“이 새끼 또 이러네. 말을 해야 알지, 답답하게 진짜.”

“그런가.”

교사들이 모여 짧은 연설을 했다. 계주 뛰기 싫다고 대충 달리는 놈, 무리하다가 자빠지는 놈, 각오들 해 아주. 기재는 묵묵히 들으며 고개를 숙였다. 운동화로 바닥을 긁었다. 아버지의 포스트잇 생각이 났다. 오늘도 잘 달리기. 아버지는 언제나 격려나 칭찬을 했다. 사실 싫은 말을 쓴 적이 없었다. 잔소리나 심술 맞은 말들은 동생들의 것이었다. 기재는 그것을 서운하다고 한 번도 소리 내어 말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래도 되는 걸까? 기재는 아버지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모두의 남이었다. 그리고 상냥한 사람은 대체로 남에게 싫은 소리를 못 한다.

“야, 엄보.”

“왜 또.”

“우리, 육상부지.”

“존나 뜬금없네. 어. 당연하지.”

기재는 고개를 들고 육상부의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모두가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비슷한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기재는 처음부터 그런 것들이 마음에 들었다. 소속되어 있음이 명징한 상징들이 도처에 있는 게 좋았다.

“그럼 됐어.”

기재는 웃으며 보윤을 바라보았다.

“오늘도 잘 달리자.”

그렇게 말하면서 기재는 마음속으로 아버지의 포스트잇을 구겨버렸다.

선수 호명에서 이름이 불렸을 때 기재는 자리에서 일어나 트랙 앞으로 나왔다. 준비운동을 하면서 스탠드 쪽을 바라보았다. 성단과 눈이 마주칠 때까지 시선으로 아이들을 훑고 있었다. 마침내 성단이 기재를 발견했다. 스탠드와 트랙 사이의 거리는 아주 멀었다. 기재가 손을 뻗었다. 주먹을 쥐었다가 엄지와 검지를 펼쳤다. 트리거를 당기듯 손가락을 퉁겼다. 

 

4.

그럼 웃어주기를.

 

5.

굳이…….

그래야 하나.

 

6.

타임 트라이얼은 한 가지를 빼곤 전부 엉망이었다. 단거리를 잘 뛰어본 적이 없어서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힘주어 뛰고 말았다. 괜히 무리했다. 다리에 힘이 다 풀려 있었다. 아버지의 포스트잇 때문은 아니었는데, 그냥 뛰다보니 진심이 되었던 모양일 지도 몰랐다. 아이들은 짐을 정리해 돌아가고 있었다. 스탠드에 앉아 있는 건 기재뿐이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계단에 앉아 성단이 가방을 뒤적이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눈치인 것 같았다. 잃어버린 걸지도 몰랐다. 일전에도 성단은 수건을 잃어버린 적이 있었다. 그 때도 가방을 뒤지다 말고 앞에 멀뚱히 서있었다. 기재는 그 뒤로 천천히 다가가 아주 가까이서 물어보았다. 뭐 잃어버렸어? 네, 수건 잃어버렸어요. 그러게, 엄청 속상해보이네. 수건 때문은 아니고요. 성단은 뚱한 표정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절 칠칠맞다고 생각할 것 같아서요. 그 때, 기재는 진심으로 웃고 말았다. 소성단, 너 진짜 재밌다. 진짜 재밌는 후배 같아. 성단은 무뚝뚝했다. 참 재미있는 농담을 하시네요. 기재는 습관처럼 자신을 숨기며 되물었다. 왜 농담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성단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진담이면 무섭네요. 그런 후 성단은 팩 돌아서 가버리고 말았다.

기재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성단이 가방을 뒤적이다 말고 지퍼를 닫았다. 그러니까 성단은 잃어버린 게 없는 모양이었다. 구름이 태양을 가리고 있었다. 스탠드로 그늘이 져서 기재가 서있는 곳은 온통 어둡고 서늘했다. 기재는 성단이 서있는 양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다섯 발자국 정도만 걸으면 그곳으로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기재는 움직이지 않고 생각했다. 길이 보이지 않아.

“소성단.”

성단이 멈추어 섰다.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 기재는 고민하지 않았다. 이번엔 기재도 웃지 않았다.

“나 너 우습게 여긴 적 없어.”

성단은 대답했다.

“알아요.”

성단은 말을 아주 멀리 밀쳐놓았다.

“선배 그럴 사람 아니잖아요.”

기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 소진되었다. 용기 혹은 비겁함 혹은 마음을 졸이게 만든다면 그 무엇으로라도 불릴 수 있는 상반되는 감정들. 기재는 결국 다시 웃어버리고 말았다. 힘빠진 웃음이었다.

“그런가.”

“그렇죠.”

“내일 보자.”

“네.”

성단은 뒤돌아보지 않고 걸어 나갔다. 구름이 지나가고 그림자가 사라졌다. 이제 양지는 어디에나 존재했지만 기재는 그대로 못 박힌 듯 서서 성단의 뒤통수만 바라보았다. 둘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애매모호하거나 가깝지 않았다. 아주 멀었다.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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